자기 함정
2025년 12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2:12-16
52:12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십구년 오월 십일에 바벨론 왕의 어전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52:13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52:14 시위대 장관을 좇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52:15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백성 중 빈한한 자와 성중에 남아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를 사로잡아 옮겨가고
52:16 비천한 국민을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성전이 불탑니다. 성전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온갖 시련 가운데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백성들을 하나로 결집시켜 온 상징적 건물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깨어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진 바가 됩니다. 문제는 이방 적들에 의해서 성전이 불태워지기 이전에 이미 선지자의 예언 속이 필히 불태워져야 함이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성전이 무너졌다’가 아니라 ‘반드시 불태워져야 했다’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있던 성전이 없어진 겁니다. 원래 있지도 않는 성전이 생겨난 것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개입으로 된 일입니다. 다윗은 본인이 먼저 하나님께 성전 지어드리겠다고 나왔습니다.(삼하 7: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다윗의 제안을 수정하십니다. 성전을 짓기는 짓되 다윗이 짓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아들에 의해서 짓도록 허락하십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삼하 7:13) 왜 계약은 다윗과 하시면서 성전 건축은 아들대에 와서 짓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가 부동산이나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아들로서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과 다윗과의 계약에서 하나님께서 열심내시는 성과는 ‘아들’이지 결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닙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다윗의 의도는 이러합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자기가 보기에 거의 완성단계에 왔으니 이것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영원히 굳히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이 최종 하나님 나라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안은 이러합니다. ‘영원한 아이’가 다윗의 왕 자리에 앉을 바로 그 때가 제대로 된 이스라엘 왕국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열심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건물로서의 성전이 사정없이 불태워지는 것은 제대로 된 아들의 등장으로 인한 성전의 시대가 정상적으로 착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다윗 왕 자리’에 않아야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이 점을 위해 처녀 마리아 몸에서 아기가 태어납니다. 이름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과 백성이 함께 있음’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셨다는 말은 인간의 조상 아담은 아기로부터 창조된 자가 아니라 성인 어른으로 출발했음을 염두에 두신 일입니다.
즉 뿌리부터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질적 존재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른인 자가 정신차려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원적으로 차단하시겠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 2:13-16)
안건적으로 생각해 보면,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으면 깔끔하게 그들을 내쫓고 청소한 다음에는 제대로 된 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전답지 못한 요소를 제거했으니 이제는 그 헤롯 성전에서 제사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제대로 성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적절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의 성전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19-22)
즉 46 년 동안 굳건하게 건설 중인 성전 건물을 전면적으로 부정해 버리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정’과 ‘부인’과 ‘멸망’을 구분해야 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도 부인(否認)할 수 없을 뿐더라 자기를 부정(否定)할 근거도 없습니다. 자기를 본인이 경멸할 자격도 없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자신다움을 계속 죽을 때까지 끌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이 세상 모든 것을 규명하고 규정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몫이요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否認)할 수 없어 그 대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들은 쉴새없이 나름 하는 바가 따로 있습니다. 열심내어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은 이사야 9:7에 나오는 하나님 열심의 내용과 다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사람이 하는 일은 충성되어 자기 것을 사수하기 위한 자기만의 성전 건설에 매진합니다.
자기 아지트와 자기 벙커를 위해 평생을 소비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기 함정입니다.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성전이 불타버리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잃었다고 되찾는 식‘입니다. 그리고 ’없는데서 새로 생겨남‘입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은 책망을 받게 됩니다.
“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2-23)
이 대목에서 ‘마귀의 일=사람의 일’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마귀의 시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부인(否認)’이란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이 외피하는 것을 말합니다. ?
‘부정(否定)’ 아예 자신만만하고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주님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살던 약속의 땅을 텅텅 비워놓게 하십니다. 별 의미없는 자만 남겨서 농사 짓게 합니다. 그리고 이 ‘없음의 땅’을 대신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새로운 공간이 완성되어 성령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그 안에 영원히 살게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완성된 성전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의 아지트가 부질없이 무의미한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4강-예레미야 52장 12~16절(자기 함정)251214-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2장 12~16절입니다. 구약성경 1143페이지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십 구년 오월 십일에 바벨론 왕의 어전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 장관을 좇는 갈대아인의 온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백성 중 빈한한 자와 성중에 남아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를 사로잡아 옮겨가고, 빈천한 국민을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아멘.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버렸다’라는 이것은 ‘성경 자체가 거짓말이다, 구라다, 신화다’라고 할 수 없는 게,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성전이 있어요. 거기서 수백만 사람들이 매년,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구경하고 있고, 특히 서쪽 벽은 ‘통곡의 벽’이라고 해서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거기 통곡의 벽에 쪽지 같은 것을 벽의 틈 사이에 넣고, 여자 구역에는 여자들끼리 한쪽에 있고, 그보다 세 배 많은 남자 구역은 남자들이 빵모자(키파) 비슷한 거 뒤집어쓰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기도하지요.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기도하는 이유는 기도할 내용이 육신의 반동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게 하는 인간의 본능이죠. 천주교 신자들 묵주 딱딱 돌릴 때마다 기도 나오는 것처럼요. 그러한 실제적인 역사적 현상이 있다는 것은, 여기 지금 이스라엘의 성전이 불탔다고 하는 것은, 그냥 역사적 사실이에요.
사실인데,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문제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성전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성전을 다윗이 자기가 설계해서, 자기가 알아서 짓겠다고 하지 않았고, 성전은 다윗에게 허락되지 않았어요. 이게 재미있는 일이 뭐냐 하면, 다윗이 성전 짓겠다 할 때 성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 말고 네 아들을 통해서 성전 짓는 것은 허락했어요.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가 성전이냐, 아들이냐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해요.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했으면 그 언약한 그건, 하나님과 다윗의 개별적인 관계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나는 몰라. 다윗 네가 했기 때문에, 나는 모르고, 나하고 상관없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다윗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성전이라는 건물이 생겨버리면, 이거는 ‘나는 몰라.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가 성립이 안 돼요.
하나님과 다윗의 언약에 의해서 실제로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전을 세우기 위해서 아들 하나 준비했다는 것이 돼요. 그렇다면 성전이 생긴 것은 돈이 있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성전을 세울 만한 아들 자체는 하나님의 관여와 개입이 없이는 아들이 생기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으로 아들이 생겼다는 말은 성전조차도 하나님의 개입으로 생겼다는 이야기예요. 논리가 논리적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와서 성전이 불탔잖아요. 성전이 불타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 장소는 끝났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근데 제가 아까 말씀한 것처럼 성전보다 뭐가 우선되느냐. 다윗의 언약에 성전보다 우선되는 것은 아들입니다. 이 건물이 아니고, 아들이에요. 요한복음 2장에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해서, 46년 동안 헤롯에 의해서 지금도 예루살렘에 잔해가 남아있는 그 헤롯 성전이 지어졌어요.
46년 동안. 그동안에도 다 완성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거기에 와서, 하나님의 집을 완전히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면서 뒤집어 버려요. 그때 사람들,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은 기대하기를, ‘야, 이제는 성전이 깨끗해졌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게 인간 해석의 한계예요. 비둘기 상인을 내쫓고, 장사하는 환전상을 다 내쫓는다고 해서, 성전이 그런 식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걸 제자들도 몰랐고 그 당시에 유대인들도 몰랐어요. 예배당이 더럽다. 우리 집사님이 오셔서, 식사 당번이라 청소하시는데, 그러면 청소 전에는 교회가 아니었는데, 청소 후에는 제대로 된 교회입니까? 아니지요. 북한말로 하면, ‘아니디요~아니디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성전’ 하면 이거는 뭐냐 하면 ‘건물’이라고 해요. 어떤 부동산 건물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의 언약은 건물 부동산으로 성사되는 게 아니고, 특정 인물로 성사가 됩니다. 그 인물에 대해 소개 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다윗과 맺었던 그것을 이루는 것은 아들입니다. 그 아기가 태어나는데, 그 아기 어떤 아기냐. 그 아기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기로 등장합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은 아기가 아니에요. 아담은 창조 자체가 성인입니다. 아기로 출발하지 않았어요. 모든 인간의 아기는 성인 아담이 저지른 그 아담의 숙명, 운명, 팔자, 그걸 그대로 인수해서 죄악된 아기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아기로부터 출발할 때마다, 그것은 성인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그 죄의 결과물을 그대로 인수받기 위해서 오늘도 어린 아기들은 엥~~~하고 울면서 태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로 또 죽게 되고. 따라서 시작부터가 인간에게는 이 시작과 끝을 돌이킬 어떤 기회나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주께서 준비하는 것은 다른 존재인데 그건 한 아기로부터 출발해요.
그 아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바탕 자체가 아담이 아닌 바탕에서 출발했던 걸 알리기 위해서, 인간의 육체로 태어나지 않는 아이, 처녀가 잉태하여 낳는 아이, 처녀가 잉태했는데 잉태의 주체는 인간인 처녀가 아니라 성령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 아이, 그 아기가 뭐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임마누엘로 등장하는 이것이 다윗 언약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몸의 교체예요. 인간 몸이 교체될 때, 기존의 인간은 그냥 죽고, 그 죽은 가운데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은 계속해서 새로운 아기 예수를 위한 일종의 자궁 노릇하기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성도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특이한 죽음이 살아 있죠.
십자가에 주님의 죽으심이 살아 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에서, 없는 데서 새로운 우리의 자아와 천국의 몸이 생겨납니다. 더 이상 흙에 속한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광에 속한 몸이 성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만들어져요.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닙니다.(롬8:9) 요한일서 5장 12절에 “누구든지 아들이 없으면 영생이 없느니라” 이번에 서울 강의에서 그 이야기했어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서울 강에서 그 이야기하면서, 요한일서를 적었던 사도 요한은 사람 됨됨이가 참 잔인하다는, 냉혹하다는, 그런 투로 이야기했어요. 참 유도리(융통성)가 없다 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가에 대해서 일체 거기에 답변을 주지 않아요.
답변을 주지 않는 것은 ‘인간아, 너는 문제를 만들어 낼 자격조차 안 된다’라는 거예요. 문제도 주님이 출제하고, 답도 출제하신 분이 답을 하지, 네가 거기에 끼어들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끝이 뭐냐 하면은 “영생이 없다”예요. 앞에 괄호( )를 치면, 괄호 해놓고 뒤에는 “영생이 없다”입니다. [( )이 없으면, 영생이 없다]
괄호 안에 뭐가 들어갈까요? 수능 만점자 5명 다 부르세요. 그리고 괄호 다음에 “영생은 없다”라고 했는데 그 괄호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고 수능 만점자 5명 불러놓고 한 번 걔들이 만점 맞는지 아닌지 궁금해요. 정답은 이렇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영생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아들이 없으면 영생이 없다는 이 말이죠. 아들이 없으면.
내가 나 된다고 해서 영생이 생기는 게 아니란 말이죠. 아들이 들어와야 해요. 아들이, 성전이 들어와야 해요. 하나님의 다윗 계약의 완성자가 들어와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들어오느냐. 우리 안에 없는데, 성령께서, 성령이 아들의 영이니까, 성령께서 들어오게, 우리 안이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는 성전이 개시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불탔다고 했는데, 오늘 불탔습니다. 불탔다는 것은 불탄 시점이 있겠죠. 사건. 그다음에 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나머지 사람들은 그 땅,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다고 했어요. 쫓겨났고, 공간적으로 그 땅에 살 수 없습니다. 공간적으로 살 수 없으면, 그 땅은 다른 사람들 또는 남아있는 비천한 유대인, 남은 유대인들이 살더라도, 그 땅은 어떤 땅이 되느냐 하면, 사람이 살지 않는, 없는 땅이 돼버려요.
있는 땅, 사람이 있는 땅, 사람이 산다는 의미가 있는 땅에서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이거는 의미가 없는 땅이 돼요. 교회 옆에 건물이 하나 있죠. 카페베네 건물. 이거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또 이렇게 말한다고 할까 싶은데, 이게 경매에 나와서 유찰됐어요. 경매에 나와서 지금 몇 차례 유찰됐어요. 교회 옆에 건물. 건물은 있는데 여기에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없다고요. 건물이 있더라도 아무도 없으니까, 그건 없는 건물과 마찬가지예요. 누가 들어와야 살아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없는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서 있는 사람을 치워버려요. 왜? 인간이 자꾸 약속을 오해하기 때문에 있는 인간도 치워버리고, 성전이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의미를 둬요. 인간은 성전이 있어야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거기에 집합적인 결집력이 생기니까, 성전을 없애버립니다.
그 당시까지 성전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 중심으로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하나로 결집하고 있었습니다. 나라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하나의 중심점이 있어야 해요. 하나의 중심점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북한이 어떤 나라냐 하면 아침에 음악이 나와요. 아침마다 모든 가정에 라디오 비슷한 게 있어서, 옛날 60년대, 우리나라 촌에, 스피커 같은 거 있었잖아요.
하여튼 그런 게 각 집에 달려 있어서, 거기서 음악 소리가 나오면 그 음악 소리가 기상나팔 소리가 되어서, 모든 주민은 일어나서 옷을 차려입고, 김일성, 김정일하고 또 김정은 사진 앞에 나란히 서서 절을 해야 해요. 김일성 죽었습니다. 김정일 죽었죠? 죽어도 소용없어요. 사진들에 절을 해야 하고, 절을 하고 나서 거기서 음악과 함께 나오는 그 훈시로 아침에 큐티 하듯이 교육을 받고,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겁니다.
국가 종교죠. 그리고 수시로 점검을 와서,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에 먼지가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확인해서, 먼지 묻었으면 이거는 사상 교육에 들어가고 처벌받습니다. 종교입니다. 북한은 뭐 개코도 있어야죠. 없잖아요. 없는데, 없다는 것을 감추는 방법은 정신적으로 위대한 지도자, 태양이신 지도자, 마음으로 이렇게 어렵지만, 이 고난의 행군을 이겨낸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이라고 스스로 자기한테 위로할 수 있도록 그걸 누가 하느냐? 종교가 그렇게 도와야 해요.
그걸 그대로 본뜬 종교가 통일교입니다. 통일교. 여기서 여러분, 제가 통일교라고 하는 것은, 이 종교적인 원칙이 통일교에서 멈출 기색이 안 보이죠? 이게 어디까지 가겠어요? 천주교, 모든 기독교, 저쪽 서남아시아의 이슬람교. 인간은 정신적으로 종교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에요.
이건 망했던 유대교도 마찬가지예요. 종교 없이는 못 살아요. 종교는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는 것을, 북한은 보이는 것으로 전환시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기독교 교회가 예배당을 뭐라 합니까? 성전이라고 이야기하죠. 성전. 예배당 가면 약간 부동산 느낌도 있지만, 성전 같으면 거룩한 재단 느낌 들잖아요. 그걸 누가 원하느냐? 목사가 원하냐? 아니에요. 교인들이 원해요. 고객들이 원합니다. 목사는 그걸 맞춰주면 되죠. 그러면 그 예배당은 목사가 돈 냈어요? 아닙니다. 누가 내느냐? 고객들이 자기가 주식 사서, 자기가 지분 낸 거예요.
인간은 내가 바친 돈을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바친 돈이 영원한 나의 아지트예요. 인간은 스스로 한 평생 하는 모든 일이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일을 해요. 자기의 벙커를 만들었어요. 하나님은 간단합니다. 그 벙커를 불사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 자기 벙커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맨날 낚시하러 돌아다녀요. 낚시가 자기 벙커죠.
하여간 내 인생이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어떤 터전을, 자기만의 즐겁고 행복한 자기만을 위한 성전을 모든 인간은 따로 갖습니다. 따로 가져요. 그게 아파트일 수도 있고, 자기 인생일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이게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그들이 그렇게 신주 모시듯 모시던 그 약속의 땅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이 땅은 우리 인간이 주신 땅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라고 준 땅이라는 그 땅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배신을 때려 버리죠.
이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 주는 반전입니다. “나를 믿나?” ‘믿습니다’ “나가! 나가! 네가 나를 배신 안 해? 내가 너희들을 배신할게!” 인간을 배신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인간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하나님을 붙드니까, 하나님 쪽에서 훑어내야죠. “잃어버리고 다시 와! 잃어버리고 다시 와! 그럴 때 네가 고마움이 생길 거야”
그게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이에요. 지난 목요일에 광명역에서 기차 타고 밤중에 동대구로 오는데 11호 차였어요. 앞에 탔는데, 오송역에서 어떤 청년이 내렸어요. 내리는데 그 내리는 청년 바로 옆에 있던 또 다른 청년이 후딱 가서 내리는 청년 어깨를 두드리면서, ‘여기 휴대폰 잃어버렸네요’라고 하니까 그 잃어버린 청년은 지금 내리기 바빠서, 앉았다가 일어나다 보면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빠지잖아요.
빠진 줄도 모르고 내리려고 했다고요. 찾아주는 그 장면을 내가 보니까, 그 청년이 얼마나 고마워하는지요. 제가 입장바꿔서 생각해 봐도 안 고맙겠습니까? 휴대폰이 돈이 몇만 원도 아니고 몇십만 원이잖아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왜 우리는 그런 고마움이 없냐는 말이죠. 그거는 우리가 아지트가 있고, 벙커가 있고, 자꾸 단도리 잘해서 안 잃어버리려고 하니까, 고마움도 같이 날아가 버리고 사라져 버린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챙긴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거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챙길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질질 흘리고 다녀야 해요. 날마다 질질 흘리고, 찾아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 찾아줘요. 잃어버릴 때, 내 거라고 잃어버리지만, 찾아줄 때는 주님의 것으로 찾아주시는 거예요. 그 틈에서 너는 갖고 있으나 갖고 있지 않으나,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는 것을 거기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거예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는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부인을 하라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마태복음 16장 24절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어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런데 자기를 부인할 때, 이 부인의 양쪽 옆에 두 가지의 잘못된 개념이 같이 따라올 수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자기 부인, 그다음에 자기 부정, 또 하나는 자기 불멸. 이 세 가지가 차이가 나요. 일단 잘못된 거, 자기 불멸. 자기 불멸이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자기 몸은 주께서 알아서 만들어 놨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불멸할 수 없어요. 자살하고 하면 안 돼요. 우리는 존재해야 해요. 왜? 우리 몸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불멸은 자기 부인이 아니고 탈락입니다.
그다음에 이제 혼동한 게, 자기 부정. 자기 부정은요, 이거는 거짓말이에요. 내가 여기 엄연히 있는데, 나는 없다고 단호하게 우기는 이거는 거짓말이에요. 그러면 있는 정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 부인. 자기 부인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면서도 내 육적인 욕심 때문에 자꾸 이렇게 회피하고, 외면하는 게 바로 자기 부인이에요.
주께서는 진리를 부인하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라 했는데, 우리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진리를, 주님이 하신 일을, 십자가에 다 이루심을 자꾸 이렇게 회피하고 부인해요. 그 점을 마태복음에서 그 대목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뭐라고 돼 있냐 하면 이렇게 돼 있어요.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맞죠? 너는 주님을 자꾸 외면하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일을 뭐와 연관시키느냐 하면은, 마귀의 일이 마귀의 일로 끝이 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일로 지금 퍼져 있다는 거예요. 사람의 일이 곧 마귀의 일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일은 뭐냐? 사람의 일과 정반대되는 일에 대해서 “베드로야 네가 그것을 회피하지 말라. 네가 예수님의 일을 회피하는 이유는 너 자신을 회피 안 하고 싶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
아침에 눈만 뜨면 밤에 잘 때까지 오로지 자기 보존하는 그것만 생각한다. 자기 벙커 만들기, 자기 아지트 만들기, 나는 어디까지 끌어모았느냐는 그 생각, 그것을 주께서 자기 부인하라고 하신 겁니다. 그럼, 이것은 어떻게 성립됩니까? 성립되는 방법은 간단해요. 뭐냐 하면 우리가 나에게서 잃어버린 휴대폰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잃어버린 자인데, 너한테는 잃어버린 자인데, 주님이 필요해서 기꺼이 오늘도 너를 살게 하고, 오늘도 이 땅에서 너의 진짜 모습, 엉터리 같은 진짜 모습,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지독한 이기주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그게 주의 일에, 십자가에 쓸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쓸모없는 게 아니고 쓸모 있기 때문에, 어설프고, 자기밖에 모르고, 조금만 뭐라 하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내 인생이 왜 이리 꼬이냐고 하고, 그럴 때 그게 바로 성경에서 잃어버린 양의 진짜 모습인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때, 결국 감사로 우리에게 이어집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성전으로 딱 점 찍어 놓았는데, 우리가 한심스럽고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말씀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고 자기의 찬란한 역사, 자기의 잘남, 자랑거리, 거기에 흠집 날까 싶어서 애쓰고 있는 저희들의 모습, 다시 한번 말씀 앞에 들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