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의 이질성
2025년 12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2:1-6
52:1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을 치리하니라
52:2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52:3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매
52:4 시드기야 구년 시월 십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을 대하여 진을 치고 사면으로 흉벽을 쌓으매
52:5 성이 시드기야 왕 십일년까지 에워싸였더니
52:6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식물이 진하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한 것은 애굽 나라가 더 안정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애굽 나라를 오랬동안 봐왔고 지난 시기를 같이 하면서 그 어떤 난관에도 애굽나라는 절대로 무너져 내릴 제국이 아님을 친히 경험해 왔습니다. 애굽에 비해서 바벨론 제국은 신참 제국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안정성이 보장될 수 없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시드기야는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으려 합니다. 당장 코 앞의 위협에 직면하여 애굽나라와의 견고한 유대 관계를 깨지 않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이스라엘를 통해서 더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하시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왜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섞일 수 없어야 하는 나라’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왜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는 것은 되고 애굽 나라는 왜 안 되는가입니다. 이스라엘은 시작은 애굽 나라였습니다. 애굽 나라에게 탈출을 한 것이 이스라엘의 시작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종착점은 애굽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관계에서 바벨론은 특이함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이 ‘최후의 제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최후의 제국’이란 이스라엘 빼놓고 모든 민족들이 결국 필히 망해야하는 이유를 유독 바벨론 나라와의 관계에서 정립이 된다는 겁니다. 애굽 나라는 이스라엘을 온전히 접수한 적이 없습니다. 공격 대상도 아닙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온전히 멸망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을 건드렸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드린 것이고, 성전을 건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건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입술이 다치는 것과 입 안의 어금니가 다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금니는 그장 근원적인 자리를 잡고 있는 겁니다. 언약의 겉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언약의 본질을 바벨론 제국이 건드리면서 바벨론은 ‘최후의 제국’ 노선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로서 세상은 끝장보는 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갈 데까지 가 보게 되었습니다. 즉 바벨론을 통해서 도대체 언약 안의 내용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가 벗겨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가룟 유다는 제자로 삼으신 취지와 관련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21:70-71) 신약, 곧 마지막 시점에 와서야 비로소 악마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사건 안에서만 나타납니다. 오늘날 성도가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살고 그 내용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악마의 존재도 아울러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유성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나 타민족이나 모두 같은 인간이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갖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인간적 안목으로서 그 차이점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창 20:16-18)
아브라함의 그 신체적 왜소함에 무한이 덮쳐져 실렸다고 생각해봅시다. 결코 평범하고 싶어도 다시는 평범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자기 자기를 아내를 삼고자 하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 조치당한 아비멜렉 집단은 하나님의 선지자 가정에 관여했다는 죄로 인해 전 집안의 모든 여인들이 태가 닫히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의 중심 인물이 되는 것을 아브라함이 평소에 소망하고 기대했습니까? 원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입니다. 즉 아브라함도 다른 사람과 동질적인 성향으로 살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이질적인 고유성으로 다스리고 이끄십니다.
그 고유적 본질적 현실의 핵심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아브라함의 고유성이 국가 형태로 확장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이방민족과 같이 섞이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차라리 삼킴을 당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고유성이 발산되는 계기로 삼으십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신약 시대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9:1-5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울의 입장에서 나름 열심히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해서 곧 천국 문고리라고 잡을 것같은 위치에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에게는 가룟유다의 요소가 들어온 겁니다. 구원의 원형이시고 모델인 예수님에게는 마귀를 최측근으로 두고서 십자가 사건의 파트너처럼 사용하셨다면 이 원리는 오늘날 성도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꾸만 자신을 구원의 본질 바탕으로 삼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스스로 관리되고 통제가 가능한 요소만 자기 안에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철저히 본인을 무능력으로 지정하시면서 실시됩니다. ‘우리 안에 가룟 유다’이 의미한 단순히 ‘내 마음대로 나를 다루지 못한다’ 정도가 아닙니다.
도리어 매일 같이 ‘주님께서 직접 나를 다루어주셔야 된다’를 정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그것은 성도를 통해서 이미 이 세상은 가룟 유다같이 취급되어 ‘최후의 제국’이 필히 되어야 할 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세상을 떠나서 따로 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는 방식으로 그대로 성도에게 주입시켜서 온전히 이스라엘을 완성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한 시도 우리 안을 살펴서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3강-예레미야 52장 1~6절(내 속의 이질성)251207-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2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1142페이지입니다.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일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인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매, 시드기야 구 년 시월 십 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을 대하여 진을 치고 사면으로 흉벽을 쌓으매, 성이 시드기야왕 십일 년까지 에워싸였더니, 그 사 월 구 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식물이 진하였더라” 아멘.
여호수아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나라가 이기고 이방 나라가 집니다. 그때 이스라엘과 동질성을 가지고 있고 소위 우리 성도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신바람이 나요. 왜? 우리 편이니까. 우리 편이 이기니까.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모습, 유다의 마지막 모습, 이 대목을 접하면서, 우리가 신바람이 납니까?
‘잘 망했다. 우상을 섬겼으니까 그렇게 망하는 것이 당연하지’라는 생각이 들까요, 아니면 ‘나도 한 50년, 30년, 예수 믿다가 자칫 이렇게 우상 섬기면 나도 나가리(나가레(流れ),무효)되는 거 아닌가?’ 나도 날아갈 수가 있단 말이죠. 청년 때 열심히 봉사하고, 30~40대 집사하고, 장립 집사로 진급하고, 한 5천만 원 내서 장립 집사에서 승진해서 장로하고, 이렇게 쭉쭉 올라가서, 이제는 손만 대면 천국에 손잡이를 잡을 것 같은데, 마지막에 ‘나가리~’
이거 어디 불안해서 살겠습니까? 신앙생활 제대로 하겠어요? 도대체 어디까지 조심해야 해요? 그 조심한다는 태도가 심리적 불안감을 주잖아요. 아무리 완벽한 신앙을 유지해도 이 불안감은 제거되지 않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하면 구원된다’라는 이러한 것은 결코 성령의 기쁨이 아닙니다. 이건 초조감이죠. 자기의 불안정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때, 그리고 신명기 때, 민수기 때, 모세와 동반해서 승리하고 또 승리하고, 진격하고, 앞으로, 앞으로 진격하면서 계속 발전할 것 같은 그런 모습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인간들을 멱살 쥐고, 착각하게 만들면서 그들을 어디에 집어넣느냐. 주님의 십자가 현장으로 몰고 가서 거기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이래도 네가 나, 하나님을 기뻐할 것인가를 묻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 당했다. 안타깝다’라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주님도 이 땅에서 저주받았습니다. 멸망 당했어요. 따라서 ‘나만은 빼주세요. 나만은 멸망에서, 그리고 저주와 심판에서 저는 예외로 해주세요’라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울산에서 차를 태워주시는 권사님의 고백을 들으면서, 갑자기 20년 전에 우리교회가 생각났어요. 뭐냐 하면, 옆 좌석에 서목사님 앉아 계시고 뒤에는 제가 앉아있고, 앞에서 권사님이 운전을 하는데, 서목사님에게 요청하는 거예요. ‘목사님, 기도 순서에서 빼주세요’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짐작은 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권사님이 참 고마운 것은요, 그냥 빼달라고 하고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빼달라고 하면서 자기의 속마음을 다 털어놔요. 권사님의 이것은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이야기예요. 기도에서 빼달라고 하고, 입을 다물고 ‘내 속은 당신이 알 필요 없어’라는 이게 아니라, 순진해서 그런지, 자기 속을 다 나발을 불어요. 전부 다 공개해요.
빼달라고 하는 이유가, 본인이 이야기해요. 기도 내용이 고갈되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까지 이야기하느냐 하면, 제가 참 감동받았는데요, ‘나는 평소에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운전하시는데, 울산역이 멀어서 30분 정도 운전하셨거든요, 운전하면서 본인 입에서 자진신고가 들어왔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사람을 되게 의식했네요’
권사님의 장점이 바로 그거예요. 항상 끝은 뭐냐. ‘나에게 문제가 많습니다’라는 것을 속에 담아 놓는 게 아니고, 그걸 공개적으로 풀어버린다는 겁니다. 제가 속으로 ‘참 건강하다. 참 참 건강한 분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 기도 내용이 왜 고갈이 되었는지를 친절하게 본인 입으로 설명했어요. 뭐냐 하면은 기도 순서가 되어서, 기도하는데, 거기에 동원되는 어휘, 그 단어들의 개념이 자기가 보기에도 거기서 거기인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 얼마나 식상하겠느냐. 얼마나 식상하겠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20년 전에 우리 교회가 생각났어요. 여자분들의 모든 기도 순서를 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기도 내용이 고갈되어서, 결국 그 권사님의 마지막 고백이 ‘만약에 안 빼주시면 나 교회 안 나옵니다. 교회 부담돼서 못 나오겠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즉각적으로 거기에 대해서 본인이 판정 내립니다.
나는 사람을 의식 안 한다고 했는데, 아까 30분 전에 안 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 정도로 사람을 의식했군요’라고 이야기를 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이게 어디서 문제가 되느냐 하면은, 이거는 뭐 권사님은 장점이라고 했으니까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어디서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되느냐 하면은, 왜 예수님께서 구원의 모델로 등장했다고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우리 안에 가롯유다를 심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왜 우리 안에 가롯유다를 심을 생각을 왜 못하고 있느냐는 말이죠. 주님은 자기 제자 안에 가롯유다를 심었는데. 주님은 그 마귀, 사탄을 자기의 구원의 파트너로 삼았거든요. 근데 왜 우리는 마귀하고는 철저히 관계없이, 나만 열심히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결정하는 것처럼, 왜 그렇게 착각을 하시냐는 이 말이죠.
마귀가 도와주지 않는데 무슨 구원이 돼요? 가롯유다가 도와주지 않는데 무슨 구원이 됩니까? 지금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이겁니다. 본문 내용에서 문제를 하나 끄집어냅시다. 여러분, 성경을 보실 때 하나님이 성경에 주신 내용의 취지가 뭐냐 하면은, “너 세상 살아가는데 별문제 없지?”라고 하면, ‘예, 뭐 요새 세상 편안합니다’라는 식으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이 은혜도 안 되고, 뭐 사건이 없으니까, 편안하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문제를 던져줍니다. 어떤 문제냐 하면은, 왜 오늘 본문에서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포로 잡히기를 거부하고 왜 애굽 쪽으로 돌아섰느냐, 애굽을 의지하려고 했느냐는 거예요.
여호야김도 그렇고 이 시드기야가 바벨론 제국에 맞서기 위해서, 그 당시에 남쪽의 강대국인 애굽, 이집트죠, 애굽에 의존해서 바벨론의 침략을 봉쇄, 저지해 보려고 노력했던 거예요. 왜 그렇게 바벨론이 아니고 애굽이냐. 그 당시에는 바벨론은 지금 방금 햇병아리처럼 떠오르는 제국이고, 애굽나라는 유구한 역사로 한결같이 안정성을 담보하고 있는 그러한 강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신참은 와서 막 까불다가 무너질 수도 있지만, 애굽은 지금껏 어떠한 외세 침략에도 무너진 적이 없어요. 이스라엘과 애굽이 함께 그 시대를 가면서, 항상 이스라엘이 애굽을 선망하는 자세로 본 것은, 한결같이 국가의 토대가 단단하고 든든하다는 거예요. 흥망성쇠 같은 이런 분주함이 없어요. 유난 떨지 않아요. 안정권에 있습니다. 지금의 미국처럼.
시드기야가 뭘 몰랐냐 하면, 오늘날 우리도 몰랐던 거지만, 애굽나라가,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빠져나오고 난 뒤에,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노리고, 유다 나라를 노리고 침략을 감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딱 목표가 뭐냐? 마지막 남은 목표가 예루살렘에 성전 파괴에 있어요.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제 시작은 애굽이지만, 종말을 보여주는 제국은 애굽이 아니고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이 최후의 제국입니다. 이 사실을 시드기야가 알지 못했던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지 못했어요. 마지막 제국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이 마지막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바벨론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다시 성전을 세우고 다시 이스라엘을 다시 만드는데, 그 기초가 되는 원리 원칙은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법칙대로 우상을 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그 모든 민족은 완전히 망했다는, 이미 망해버렸다는 그 토대 위에 새로운 이스라엘이 성립되는 원칙이 비로소 거기서 제대로 실시가 되는 토대를 갖고 있습니다.
문장이 길었죠. 길 수밖에 없는데 미안합니다마는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바벨론이 최후의 제국이라 하는 것은, 일단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먹어야 해요. 먹고, 그 먹힌 이스라엘은 먹힘으로써, 너는 한 나라가 한 나라를 먹은 게 아니고, 너는 영원한 언약을 삼키려고 했던 너의 본연의 그 악마적인 정체가 이제는 더 이상 숨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바벨론 제국, 네가 보여줘야 해.
그것이 너의 기능이야. 그게 바벨론 너의 기능이야. 제가 아까 가롯유다 이야기를 하게 된 게, 바로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 십자가 사건의 최측근이었어요. 열두제자 중에 어떤 점에서는 가장 예수님의 십자가에 영향력을 끼친 제자가 가롯유다였습니다. 사탄이 예수님 가장 옆에 있다고 이렇게 보면 돼요. 실제로 열두제자 가운데 임원진이기도 하고요. 회계 담당했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할 테니까, 여러분은 속으로 한번 답변해 보세요. [내가 세상을 떠나는 겁니까? 세상에 나를 떠나는 겁니까?] 이 질문이 우리에게 중요해야 할 것은, 항상 우리는 내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내가 망하느냐, 내가 잘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어떻게 보이느냐가 결정되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에게서 세상을 떼어내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나를 떼어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심지를, 이스라엘이라는 심지를 꼽아놔서, 이 세상은 이스라엘에서 탈탈 털어서 떨어져 나와야, 분리되어서, 이스라엘에게 있는 그 특수성, 또는 어렵게 말해서 그 고유성, 절대로 다른 민족과 섞여서는 안 되는 그 고유한 고유성이, 멸망을 통해서 최후의 제국이 망함으로써 비로소 오롯이 그 점이 드러나게 돼 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작업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나와라! 이 최후의 원수야 나와! 나와! 숨지 말고 나와!” 그게 바로 가롯유다를 대변하는 사탄의 등장입니다. 여기서 제가 잠시 어려운 이야기를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은 좀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방금 이스라엘의 고유성이라고 했는데, 다시 말씀드리면 이 고유성은 이스라엘 빼놓고 다른 민족의 고유성과는 절대로 섞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은 뭐냐.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고유함이 삽입되어서, 내 쪽에서 저 사람과 아무리 잘 사귀고, 좋은 관계 맺고, 정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백날 해도,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그런 이질성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돋보이게 하는 거예요. 우리 인간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과 같이 사귀고 싶은데, 우리 속에 있는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그 사람과 내 사이를 강제로 떼어놓게 하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일본의 어느 학자가, 그 이야기를 오늘 아침에 이야기했는데, 제가 가끔 이렇게 잠자리에 누우면 자꾸 무슨 생각이 지워지지 않느냐 하면,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을쯤의 생물 시간이 잊히지 않아요. 너무 또렷해요. 생물 시간에, 오후 2시쯤 됐는데, 햇빛이 완전히 교실을 장악했어요. 교실이 햇살로 가득 찼었는데 생물 시간입니다. 그때 제가 무슨 생각 했는지 너무 또렷하게 생각나는데, 그때 나는 고2로 돌아가요. 담쟁이가 있는 옛날 교실이에요.
고등학교 2학년으로 돌아가서,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가는 지금도 그 꿈이 계속 똑같이 반복되니까 잊어버릴 수가 없는데, 꿈이라고도 할 수 있고 회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는 고2 때 무슨 생각을 했는가? 그거는 공부 잘하고 싶었어요. 공부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똑같이 노력했는데 걔는 점수가 잘 나오고, 난 노력해도 점수가 안 나와요.
노력 안 했는데 점수가 잘 나오는 친구가 너무 부러운 거예요. 그러면 왜 공부를 잘하려고 했는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공부를 잘할 때, 그때 그 사고방식에서는 남한테 인정받아요. 남한테 인정받고 칭찬받고.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 살맛을, 보람을 느끼는 것이 뭐냐? 남한테 인정받는 겁니다. 목적이 딱 그거 하나입니다. 그걸 위해서 또 매진하고. 생물뿐만 아니고, 지금은 생물 시간만 기억되지만, 다른 것도 많이 노력하는 거예요.
인정받자. 남한테 인정받으면 그것이 나는 나한테 기쁨이 된다. 딱 그거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날 때, 바로 이게 뭐냐 하면 철저한 나의 고유성이에요. 나의 고유성. 그러니까 이건 너의 고유성은 내가 이렇게 생각한 것처럼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근데 그건 몇 주 전에, 우리교회 김 권사님하고 김연선 집사님하고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어떤 이질성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이질성이 있느냐 하면은, 전에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안 했었으면 한 번 더 하고 싶어요. 권사님이 파김치를 담아서 김연선 집사님에게 줬어요. 주니까, 그 집사님 입에서 무심코 하는 말이, ‘이 원수를 어떻게 갚지?’라고 했어요. 바로 그게 이질성이에요. 보통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가 이게 정답인데, ‘이 원수를 어떻게 갚지?’ 이게 담긴 뜻이 뭐냐 하면은 이걸 갚아야 하는데 못 갚는 내가 나한테 원수라는 이 말이에요.
이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완전히 농심라면이죠. ‘아우 먼저, 형님 먼저’라는 이게 무한이라 끝이 없어요. 지금 그게 주님께서 다른 민족과 다른 특이한 고유성인데, 이 고유성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왜소한 사람이에요. 왜소한 사람인데 무한(無限)을 뒤집어썼어요. 여러분이 그 아브라함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성경에 나온 예를 들어볼 테니까,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 20장 17~18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지금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라고 이래 돼 있어요. 여러분 아브라함처럼 살래요, 안 그러면 그냥 직장 생활하면서 돈 벌고 그냥 살래요?
어느 쪽입니까? 아브라함도 자기가 이런 존재가 되는 걸 원치 않았어요. 너무 이질적이에요. 자기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리려고 하다가, 하나님에게 걸려서, 그 집안 전체가 단체로 벌을 받고 모든 여자의 태가 임신이 안 되는 그런 벌을 받을 때, 이게 아브라함이 ‘아이고, 고소하다. 잘 됐다’라고 이걸 아브라함 본인이 원했던 겁니까?
아브라함은 이질성이 싫어요. 나는 그들과 같은 동질성,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특이하게 사는 것이 안 좋아요. 자기 취향에 안 맞아요. 하나님께서 무한을 아브라함에게 짊어지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묻는 이유가, 하나의 예를 더 들어서 설명하면서 말씀드리겠다.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하나님 율법대로 살고 그래서 나중에 천국 간다고 그렇게 기분이 업되어서 살아가는 거, 그거 인간은 할 수 있잖아요.
왜? 사람에게 인정받는 정도를 넘어서서 이제 하나님께 인정받아서, ‘야, 너 생물 참 잘하네. 생물 점수가 좋아. 네가 신앙생활 점수가 좋아’라는 이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서 사도 바울은 뭔가 무한이 다가왔어요. 인간이 가능하지 않은 불가능한 힘, 부활의 능력이,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와서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덮치니까, 덮치면서 주께서 하는 말이,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이 핍박하느냐는 말씀에 대해서 ‘잘못되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스럽습니다’라는 그 이야기, 그 답변을 유도하는 게 아니에요. ‘이게 웬 이질성이냐, 이게 웬 은혜냐, 이게 웬 선물이냐, 이게 웬 충격이냐, 왜 하나님은 나를 남처럼 다루지 않고 왜 특별하게 다루어 주시는가?’라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고유성입니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이미 어떤 세상을 멸망할 기준을 바로 성도에게 직접, 가롯유다의 요소로써 집어넣어 버리는 거예요.
“네가 가롯유다와 한 패였어. 하지만 네 안에 가롯유다 집어넣고 너를 내가 찾아와서,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나는 너를 이스라엘로 백성으로 삼을 거야. 이거는 네가 가타부타 저항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야”
그러면 바벨론은요? 바벨론 끝났어. 최후의 제국이니까. 다시는 다른 나라, 든든한 나라 의지하고, 미국 의지하고, 어떤 강대국 의지하고, 중국 의지하고 하지 마. 이제는 최후의 제국은 네 안에 있어. 영적인 네 안에 최후의 제국이 있다는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알려줬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는 거예요.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일본에 어떤 해양학자가 이런 단어를 썼어요. ‘지금 일본의 바다는 말라가고 있습니다’ 이 문장이 너무 멋있어요. [지금 일본의 바다는 말라가고 있습니다] 말라가고 있다는 거예요. 딱 들으니까 이게 말이 안 돼요. 왜? 바다는 마르지 않습니다. 근데 바다 보고 말라간다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이냐 하면, 히로시마현에 있는 굴 양식이 올해, 90%가 폐사했다는 거예요.
폐사한 이유가 5월, 6월, 그리고 7월에 일본에 비가 안 와서, 내륙에 있는 플랑크톤이 바다로 쏟아져서 바다가 굴을 양식할 만한 풍성한 양식, 굴 양식을 위한 재료가 있어야 하는데, 먹고 살 수 있는 그러한 양식이 풍부해야 하는데, 플랑크톤으로 인해 그것이 말랐다는 말을 그 해양학자는 바다가 말랐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누구 입장이냐. 바로 개인인 인간의 입장이 그래요. 자연도 인간의 입장을 그렇게 보거든요. 주님의 입장에서 봅시다. 이 세상은 이미 끝났습니다. 끝났고요, 나요? 나 끝났고, 여러 분도 끝났습니다. 근데 이 끝났다는 것이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구원하는 것을 이미 완료했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식으로 진행됨을 우리가 기쁨과 고마움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어쭙잖게 내가 내 구원을 챙기지 않도록 주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