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달고나
2025년 11월 3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1:60-64
51:60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임한 모든 재앙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51:61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이르되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51:62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 거하지 못하게 하고 영영히 황폐케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51:63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 속에 던지며
51:64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가라앉는 세상’의 최종 형태는 바벨론입니다. 모든 인간사는 전부 바벨론으로 집결되고 바벨론으로 마감됩니다. 그리고 그 바벨론은 가라앉고 주저앉게 됩니다. 멸망으로 말입니다. 책의 능력으로 그렇게 만드십니다. 이는 모든 인류는 결국 다 망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 결과라는 겁니다.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단일화된 바벨론이 망하는 이유는 건들지 말아야 할 대상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애굽의 10 재앙은 건들지 말아야 될 히브리인들을 건드린 댓가입니다. 이점은 아브라함의 경우의 연장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뒤집어 씌어놓았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 즉 인간들이 안일하게 그리고 함부로 건드릴 수밖에 없는 만만한 대상 하나를 세상에 심어놓으시고 그 자를 건드리는 자는 저주을 받고 심판을 받는 방식으로 세상을 마감하시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바벨론 통째로 삼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삼키지 못할 것을 건드린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삼킴을 당해버릴 만한 대상을 삼킨 겁니다. 이 극단적인 대비로 세상은 끝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세상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방식은 이미 하나님쪽에서 실시하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스가랴는 천사의 활동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내가 묻되 이것이 무엇이니이까 그가 가로되 나오는 이것이 에바니라 또 가로되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이 에바 가운데에는 한 여인이 앉았느니라 하는 동시에 둥근 납 한 조각이 들리더라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하고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을 에바 아구리 위에 던져 덮더라”(슥 5:5-8)
하나님과 통하는 개인과 하나님과 통하지 않는 인류 전체가 대비가 됩니다. 이 대비로 인하여 “무엇이 보이느냐?”가 성립됩니다. 세상을 보면서 이 세상에 이미 저주가 무거운 납처럼 자리잡고 있음을 보이는 것은 이미 영적인 사람입니다. 무거운 저주로 인하여 이 세상은 무너지게 되어 있고 가라앉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전 인류는 ‘바벨론’의 이름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것도 있을 겁니다. 그래야 극대극으로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극대극의 대비는 출애굽기 19:4에도 나옵니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결코 여러 마리의 독수리가 아닙니다. 단 한 마리의 독수리에 어떻게 많은 백성들을 다 실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공통기반’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택한 백성 외에 모든 자들이 다 공통기반인 것처럼입니다. 이미 이 세상은 예외없이 한 ‘바벨론’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의 자리가 궁금해 꾸역꾸역 올라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올라 선 그 최종 공간은 모두 다 똑같은 생각으로 가치를 추구하는 전쟁터였습니다. 경제적 가치 말입니다. 이 일을 기획한 존재는 짐승이었습니다.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계 13:11-18)
이러한 경제적 생산 조건은 자연환경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스가야 6장에 나오는 천사는 넷인데 이들 천사들은 사각형화된 이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출동해서 안정적인 자연질서에 혼란을 야기합니다. 그것도 씩 말입니다.(계 8:7-12) 이로서 단일 경제단체가 된 이 바벨론은 무너지는 자연과 속에 파묻혀 소멸됩니다.
반면에 떠 오르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의 등장은 그들의 행함에 근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옮길 때는 인간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화된 인간’을 옮깁니다.
일종의 ‘말씀의 달고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체 설탕은 열에 의해서 액체로 녹아들어가면서 소다와 섞여서 전에 알던 자기가 아닙니다. 사랑에 섞여 녹아지면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집니다. 이렇게 되면 신약에 와서 최후의 극대적 대비가 생깁니다. ‘살아 있는 것은 전부다 가짜요 죽은 것만이 실재요 진짜’가 됩니다.
이 극단적 대비는 실제로 갈아앉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향해 떠 오르게 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이처럼 인간은 두 종류가 됩니다. 영적으로 세상을 보는 자와 육적으로 세상을 보는 자로 나뉩니다. 영적으로 세상을 보는 자는 말씀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진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과의 연결을 통해서 그 어떤 외부의 맹렬한 비난에 신경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2강-예레미야 51장 60~64절(사랑의 달고나)251130-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1장 60~64절입니다. 구약성경 1141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임할 모든 재앙 곧 바벨론에 대하여 기록한 이 모든 말씀을 한 책에 기록하고,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이르되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을 읽고,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이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멸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거기 거하지 못하게 하고 영영히 황폐케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라,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아멘.
바벨론이 가라앉는다는 이야기인데, 이 바벨론이라는 국가의 존재에 대해서 성경은 끝까지 끌고 갑니다. 한때의 바벨론, 이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을 바벨론의 계기를 통해서 멸망이 이를 때, 전 세계는 바벨론의 이름으로, 그리고 자격으로 멸망시키겠다는 겁니다. 바벨론의 이름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취지는 이 바벨론이 하나님 언약의 나라, 하나님이 택한 민족 이스라엘을 접수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민족을 세상이 접수하고, 자기가 이스라엘을 삼켰다고 되어 있는데, 삼켰다는 그런 경우를 허락하면서 삼킴 받은 자가 도리어 삼킨 자를 영원히 멸망으로 보낼 근거로 안에서 작용하도록 하셨습니다. 잘못 건드린 거예요. 마치 애굽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을 잘못 건드린 거예요. “나를 건드리면 저주를 받고, 나를 축복하면 복을 받는다”라는 이 원칙은 일관되게 지금도 유효합니다. 한결같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살해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세상에게 죽임을 당한, 그래서 사라진 그 예수를 믿는 자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이 원칙, 이 법칙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일관되게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이 바벨론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생각을 좀 해봐야 해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테이블을 생각해 봅시다. 사각 테이블에 탁자보를 펴면, 테이블이 사각형이니까, 막대기도 사각이고, 탁자의 막대기마다 천이 아래로 흘러내릴 거예요. 천이 흘러내리면, 흘러내린 천으로 개미 하나가 올라간다고 합시다. 개미가 늘어진 탁자보를 따라서 탁자의 평평한 위쪽 도착 지점까지 올라가는데, 뭔가 달콤한 것이 있는지 계속 올라가겠지요.
올라가게 되면 나타난 것은 평평한 사각형의 평지가 나타날 것입니다. 개미 올라가는 것은 중력을 거슬러야 할 힘든 고난의 길이겠지요. 중력은 아래로 잡아당기는데 중력을 이겨내고 위에 올라가니까요. 그 위에 올라가면 나타난 그 평평한 평지, 그걸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바벨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간이 출세하고 성공해서 그 성공의 끝은 어디냐, 성공의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 것들, 그런 것의 모든 도착의 최종 지점은 평평한 바벨론이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8장 15절에,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라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심판의 장소로써 미리 예언하신 곳입니다. 이 점을 위해서 제가 스가랴야 5장과 6장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스가랴 5장과 6장에서 스가랴에게 천사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슥5:2)라는 이건 정말 성도로서 하나님께 받았던, 하나님께 받을 만한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아담에게는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는데, 몰라서 물으시는 게 아니에요. 네가 지금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있다는 거죠. “어디에 있느냐? 어떤 상태에 있느냐?”라고 묻죠. “Where are you?” 너 어디 있어? 그다음에 이거는 뭐냐 하면은 스가랴에서는 “너는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스가랴한테 이야기합니다. ‘예, 천사가 보입니다’ “천사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참 이런 대화가요, 우리가 세상에 나오면 대화라는 게, 육(肉)과 육(肉)의 대화밖에 없어요. 육과 육의 대화밖에 없는데 성경에서 나오는 대화는 영(靈)과 영(靈)의 대화입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요, 이미 이 세상, 육의 세계는 집단적으로 단체적으로 운명이 확정되었어요. 이제 끝났습니다. 그게 뭐 새삼스러울 것이 없어요. 멸망이에요.
멸망을 오늘 예레미야 51장에 64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라앉는다” 아까 보셨죠? 가라앉는 데, 가라앉지 않을까 싶어서 뭐까지 동원하느냐 하면, 돌에 매어서 가라앉혀요. 바벨론을 어디에 가라앉히느냐 하면, 유브라데 강가에서 바벨론의 예언이 들어 있는 책을 가라앉힘으로써, 이 예언대로 바벨론은 이 세상에 유브라데 강에 처박힌다, 가라앉는다는 이 말입니다.
오늘 제목은 가라앉는 것과 떠오르는 거예요. 가라앉는 것이 이렇게 확정돼 있으면 반대로 모든 인간은 바벨론에 속해요. 어느 인간도, 아무리 몸부림쳐도 바벨론에서 못 벗어납니다. 모든 민족은 하나의 힘에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바벨론 사람이고, 사는 양식도 방식도 모든 것이 바벨론화 되었습니다.
바벨론화 되는 그 모습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그렇게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근데 요한계시록 18장을 하기 전에 13장 13~17절에 보면 거기에서 영적으로 이 세상을 이렇게 해석했어요. 13장 13~17절이 약간 깁니다만, 제가 축약해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짐승이 나타나고 그 짐승이 큰 이적을 행합니다. 또 짐승과 더불어서 새끼 양, 짐승과 한 단짝이 되는 선지자가 또 등장합니다.
용처럼 짐승은 이제 용과 짐승이 전부 다 한 패죠. 용처럼 말하고, 새끼 양이라 하는 것은 세상 죄를 지는 어린 양을 흉내 내는 거죠. 기적을 행하는데, 그 기적을 하니까 사람들이 혹하잖아요. 혹하니까 기적 쪽으로 사람들의 힘이 몰리죠.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웅의 등장이죠. 영웅의 출몰을 고대하고 실제로 영웅이 출몰합니다. 그 짐승에게, 그 영웅에게 절하고 우상화합니다.
근데 그 영웅이 뭘 하느냐 하면, 16절부터 보면,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 하게 하니” 여기에 매매(賣買)를 못 하게 한다는데, 왜 그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는 자는 매매를 못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8장에 11~14절에 나옵니다.
거기에서 모든 이익과 가치 창출은 상인들이 다루는데,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 器皿 )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12절) 값나가는 것들의 교환 안에서 비로소 사람들이 고대하는, 짐승들이 인간을 유혹할 수 있는 값진 가치, 값있는 것들이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게 바로 테이블 위에서 이루어진, 최종 평평한 테이블 위에서 벌어지는 장터입니다. 장터인데, 우리가 해답을 먼저 알기 위해서, 스가랴 5장과 6장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천사가 보입니다. “그 천사가 뭐를 하고 있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천사가 이 사각형 세상에다가 무거운 납을 집어넣어요. 그 둥근 납을 곡물을 되는 됫박 있잖아요.
됫박을 에바라고 하는데, 에바 안에 그 무거운 납이 들어갑니다. 그 납이 들어가서 무거우니까, 그 됫박은 스스로 그 무거운 짐을 감당 못 하고 내려앉기 시작한 거예요. 그 천사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스가랴야, 무엇이 보이느냐?” 우리말로 하면 ‘세상이 보입니다’ “세상 안에 뭐가 있는데?” ‘무거운 납이 들어갑니다’ “납이 뭐냐?” ‘저주입니다’
이게 영적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에요. 영적으로 ‘저주가 보입니다’ “세상은 어떻게 되느냐?” ‘지금 세상은 가라앉고 있습니다. 근데 안 가라앉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뭐를 물어요. 6장에 보면, “뭐가 보이냐?” ‘네 명의 천사가 보입니다’ “천사가 뭐 하느냐?” ‘천사가 내 모퉁이를 진격해서 이 세상을 파괴합니다’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1절) 무겁죠. 저주의 산이죠.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세째 병거는 백마들이, 네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2~3절) 이거 지금 마장동 경마 놀이 하는 거 아니죠? 경마 대회 아닙니다. 네 마리의 말이, 네 마리니까 사각형으로 구성된 이 세상을 사각형 그 모서리까지 빈틈없이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서 이들의 하는 역할이 뭐냐 여기는 안 나와요. 안 나오는데, 홍마, 흑마, 백마, 어룽지고 건장한 말이 안 나오는데, 이게 어디 나오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8장에 보면 나옵니다. 8장에 나오는데, 옛날 그 바로 왕의 애굽나라를 10가지 재앙으로 때린 것처럼, 요한계시록 8장에 보게 되면 인간의 모든 경제적인 활동의 생산 기지가 되는 이 판 자체를, 이 세상 전체를 이제 공격합니다.
이건 뭐 요즘 군사적 용어로 표현하면 벙커 버스터(Bunker buster)죠. 지하 벙커까지 박살 내는 GBU 폭탄(초대형 정밀 유도 폭탄 시리즈)이 나왔어요. 지하까지 알아서 내려가서, 알아서 지하에서 스스로 터짐으로써, 지하에 있는 모든 생산량은 다 터지는 거예요. 이란의 핵시설부터 해서, 후티 반군에 있는 무기고, 가자지역에 있는 땅굴들까지.
만약에 한국이나 미국이 북한을 친다면, 북한에 구석구석 파놓은 수천 킬로가 넘는 지하 격납고, 지하 무기 창고. 북한은 지상보다 지하가 더 넓을걸요. 지하에 있는 그거 다 부술 겁니다. 안 얻어맞으려고 지하에다가 다 숨기거든요. 그게 스스로 자기가 이만큼 이 세상 자체가 저주스럽다는 것에 대한 폭로입니다. 거기에 천사가 와서 폭탄을 터트려요. 폭탄을 터뜨리는데, 어떻게 터뜨리느냐 하면은 3분의 1씩 터뜨린다는 겁니다.
3분의 1.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은 것이 세 종류인 것처럼, 세 종류로 그 두께에 덮혀있으니까, 하나씩 때려서 추려내는 거예요. 경제를 치니까 정신세계도 같이(돈이 없는데 무슨 정신 세계입니까?), 정신세계도 같이 종교, 정신 취미, 음악, 예술, 돈이 없는데 무슨 음악 예술이에요? 다 날아가죠.
그거 날아가면 뭐냐? 권력도 날아가죠. 모든 권력은 경제에 속해있으니까. 짐승은 매매를 못 하게 하는 것으로 권세를 압도하고 그 권세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나(짐승)한테 절하지 않고 고개 숙이지 않으면 경제 활동 자체를 못 하게 만드는 식으로 이 짐승은 세상을 그런 체계와 구조를 갖추었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하나의 단일화된 바벨론으로서, 운명은 끝났어요.
그러면 떠오르는 사람은요? 떠오르는 사람은 집단적이 아니에요. 성령은 개별적으로 찾아갑니다. 성령은 개별적으로 찾아가기 때문에, 남들이 날 맹비난해도 그거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주님하고 영적으로, “뭐가 보이느냐?, 너 어디에 있느냐?, 너 지금 어떤 상태냐?”라고 말씀을 통해서 주님하고 대화하면 되는 겁니다. 전혀 어렵지 않아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주님이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을 막 순간적으로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아주 인상 깊은 노래 가사가 또 하나 있어요. 노래 가사 들으면 여러분이 무슨 말인지 알 거예요. 이겁니다. 구분을 해요. ‘안 오는 것인지, 못 오는 것인지’ 진성(가수)이 부른 노래 ‘안동역에서’ 이야기예요.
분명히 안동역에서 눈 올 때 만나자고 했는데, 눈이 무릎까지 차였어요. 근데 시간이 됐는데 안동역으로 약속한 사람이 안 나왔어요. 그 가사에 보면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그게 헷갈리는 거예요. 정답은 못 오는 겁니다. 어제 새벽에 운동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급행 1번이 오는데, 급행 1번이 방금 떠났어요. 방금 떠났는데,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막 손 흔들고 태워달라고 했는데, 운전사가 안 태워줬어요.
제가 분명히 단언하기는요, 보고도 안 태워준 게 아니고 못 본 거예요. 안 본 거예요. 주께서 성령을 안 보냈다는 말은 안 태워주는 거예요. 급행 1번을. 천국 가는 버스는 태워 달라고 한다고 태워주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속성은 바벨론이기 때문에. 바벨론이에요. 이거는 그 무거운 납 같은 저주를 당해서 망해야 하지 그 특정 인간을 거기에다가, 그 천국 가는 버스에 태워줄 의무가 주님한테는 없습니다.
주님한테는 없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왜 천국 가는 급행 1번을 태워서, “아이고, 그래 너를 기다렸어”라고 하는 식으로 덜렁 태워서 천국에 보내주는가. 그 사람을 태우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성경에 깊이는 그 사람을 건지지 않고 말씀을 건지는 거예요. 만약에 말씀이 싫다? 말씀이 없는데, 말씀을 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말씀이 없다? 그러면 그거는 건질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 거예요.
말씀에 관심이 없는데 건져준다? 그거 건져서 뭐 할 건데요? 건져서 축구 중계방송이나 볼 겁니까? 천국 가서 야구 볼 거예요? 여러분 달고나 알죠? 이 달고나가 굉장히 맛있어요. 스트레스받을 때는 달고나만한 게 없어요. 최고인데, 그 달고나를 보게 되면 설탕에 열을 가하면 설탕이 녹아요. 제가 그걸 보면서 느낀 것은 뭐냐 하면, 사랑은 소유용이 아니고 소유하려는 나를 사랑에 녹여버려요.
사랑에 열이 있어요. 구원받고자 하는 나를 녹여서 설탕물이 되도록 해줘요. 고체 설탕이 아니고 액체 설탕이 되게 만들어요. 그래서 내 것이라는 게 따로 챙길 어떤 여지도 하나님의 사랑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오면, 우리는 말씀 안에 녹아서, 우리는 말씀의 달고나가 된 채로 우리를 건져요.
출애굽기 19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러 번 제가 이 대목을 보면서도, 아직도 신기하고 놀랍기만 한데요, 이렇게 돼 있어요.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여기에 독수리 날개가 나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분명히 걸어서 왔는데, 독수리는 어디 한 마리도 못 봤는데, 성경은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너희가 걸어서 광야에서 나오고, 홍해에서 걸어서 나왔다고 너희들은 생각하지? 나는 그렇게 보지 않고 독수리의 날개로 했다. 그럼, 독수리의 날개가 성립되려면, 날개 양쪽에 그 50만, 60만, 70만 되는 그 모든 사람을 독수리 날개 죽지에 다 실어야 해요. 그게 뭐냐? 공통 기반이라는 거예요. 공통 기반. 공통 기반은 서로 다름이 하나의 단일체로 간주해서, 동일 존재로 만들어 내는 작업장이 공통 기반이에요.
뭐가 공통 기반이냐. 너도 녹았고 나도 녹았다는 거예요. 뭐에 녹는데? 주님의 사랑에 너도 녹았고 나도 녹았다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에. 따라서 주님은 뭘 건지느냐? 주님의 사랑만 건진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냐? 골로새서 1장 13절에 나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흑암의 권세는 단일체죠. 어느 누구도 흑암의 권세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흑암의 권세 전체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그냥 나라가 아니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어요. 사랑의 나라로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마지막으로 제가 말씀드릴 것은, 우리가 흑암의 권세에 빠지고 싶어서 빠졌습니까? 제가 대전강의<복음이냐 교회냐(5강) 행8:18(기능으로서 교회)20251124>에서 언급했는데, “우리가 추락했습니까? 끌려갔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보통 타락하면 자기가 알아서 떨어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알아서 떨어진 게 아니고 누가 잡아당겨서, 먼저 지옥 갈 존재가 우리를 잡아당겨서, 우리는 추락 안 할 수가 없어서 추락하는 거예요. 우리는 세상을 좋아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고, 세상 좋아할 것 외에, 우리는 태어나면서 다른 기회나 다른 선택지가 없어요. 그냥 세상이 좋아지게 돼 있도록 그런 식으로 훈련받았고 양육 받았어요. 마귀한테.
우리의 이거는 속일 수 없는 본능이에요. 세상을 좋아한다는 말은 마귀가 노린 게 있어요. 절대로 말씀 쪽으로 가지 말라는 거예요. 말씀은 듣지 말라는 겁니다. 네 본성과 어긋나기 때문에 듣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독수리 날개가 무슨 대책이 되겠느냐. 이 대책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이끌어가면서 이방 민족과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된다는 것을 초창기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홍해 건너가는 데서 대비를 시켜줬어요.
대비시켰는데, 역사가 시작되면서 그 대비와 경계, 그 극단적인 대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똑같아요. 똑같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수리의 날개라는, 땅 위로 나는 것과 땅에서 걷는 것과의 차별성이 없어져 버렸어요. 없어졌어요. 독수리 날개라는 것은 하늘을 휙~휙 위로 떠서 하나님의 백성 되었잖아요. 그것과 우리가 평생을 이 땅에서 열심히 하는 것과 이게 다른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렇게 결정 내려요. <성령을 통해서 살아 있는 것은 거짓이고 죽어 있는 것은 진짜다> 극단적인 대비를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서, 그 극단적인 대비를 십자가로 기준을 해서, ‘내가 살아있는 것은 십자가 안에, 그리스도 안에 죽어 있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는 것이지, 세상에서 말하는 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다. 나는 이미 독수리 날개 위에 있다’
“너희는 땅에서는 죽었고, 하늘에서는 살았다”(골3:1~3) 이게 얼마나 극단적인 대비이고 대조입니까. 이것이 드디어 끝으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나옵니다. 4장 16~17절에 보면, 또 이게 성경에만 나오는 낯설고 기이하기 짝이 없는데,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끌려 올라가요. 끌려 올라간다고요. 저쪽은 가라앉고, 바벨론 저쪽은 가라앉고, 이쪽은 끌려 올라가서, 나중에 요한계시록 21장에 하나님의 신부로 단장한, 새 예루살렘 신부로서 등장합니다. 하나는 밀어내고, 한쪽은 끌려서 강제 조치로 천국 가고, 천국의 백성 되고.
이게 주님의 사랑에 녹아, 사랑의 달고나, 오늘 제목을 사랑의 달고나로 해야겠어요. 사랑의 달고나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녹아져야 하는데, 이 자아가 주님의 피와 섞여서 나라고 따로 챙길 수가 없어야 하는데, 이미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이 하나 됨에서 오는 기쁨과 희열과 감격과 감사, 죄인 됨을 통해서, 피의 공로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