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고마운 망신

아빠와 함께 2025. 11. 26. 23:17

고마운 망신

2025년 11월 26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20:26-30

20:26 해가 돌아오매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점고하고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매
20:27 이스라엘 자손도 점고함을 입고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저희 앞에 진을 치니 이스라엘은 염소 새끼의 두 적은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20:28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20:29 진이 서로 대한지 칠 일이라 제칠일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을 죽이매
20:30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인간은 나이가 몇이든지 건강 상태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참을 수 없이 격분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개적으로나 내부적인 망신당하는 기분입니다. 비록 갖고 있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가족을 잃는다 할지라도 도저히 내어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자율성입니다. 자유의지입니다. 자존감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형이 유지되는 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천국 백성이란 이 땅에 태어난 인간형을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인간형으로 교체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인이 살아온 환경에 자동적으로 적응되어 그 환경 안에서 자기 만의 자율성을 굳히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하시는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벌어지는 전쟁은 실은 대리전쟁입니다. 하나님과 악령과의 전쟁을 최종 전쟁으로 미리 정해놓으시고 이스라엘 역사 위에 이스라엘과 이방나라과의 전쟁을 일으키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요구해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 사람들은 조용히 평화롭게 살고 싶어합니다. 어지간한 다툼은 인간들 선에서 처리하게 쉽습니다. 왜냐하면 갈등과 불편함은 본인의 차원에서 처리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람의 침공은 북 이스라엘의 태도를 가늠하게 합니다. 강대국 아람 나라가 쳐들어와도 북이스라엘 아합왕은 나라 형편을 고려해서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비록 굴욕적이지만 전쟁보다는 낫다는 계산에서 말입니다. 아람나라가 달라는 것은 다 주겠노라고 아람 나라에 통보합니다. 그런데 아람왕 벤하닷의 의도는 한층 더 치욕을 북이스라엘에게 안겨주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의 자존심과 자율성마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강제로 뺏는 식으로 아합왕의 모든 것을 갖겠다는 겁니다. 참을 수 없었던 아합왕은 아람나라의 제안을 거부했고 이를 빌미로 아람왕은 십 만 대군을 끌고 북이스라엘을 처들어 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의 군대는 소년병을 포함해서 7,232명 정도입니다. 아람왕은 10배나 많은 자국 군병을 전제로 해서 이번 전쟁을 이미 끝난 것으로 자신만만했습니다.

여기에 이름 모를 한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이 선지자는, 이번 전쟁은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람왕이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전쟁이기에 북이스라엘은 그저 상대해주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은 전쟁 패배에서 오는 망신을 두려워했습니다. 상대인 아람왕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므로서 왕으로서 자유 의지성을 지킬 수 있다고 계산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을 고려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신 겁니다. 아람왕이나 북이스라엘 왕이나 모두 자기 중심적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실재에 있어 인간은 그 어떤 승리라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승리로 받아버리면 이는 그 어떤 경우라도 이 세상에서 크게 망신 당하지 않을 자질이 자신이라고 있다고 믿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인간형을 천국에서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인간들은 그동안 실패하지 않고 승리한 것들만 끌어모은 보따리를 끼고 삽니다. 만약이 가출을 한다할지라도 결코 빈몸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친숙한 자기 환경을 따로 챙기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마저 무너져 내린다면 그 망실살에 몸둘 바를 모릅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 주어지는 하나님 뜻에 의하면 도저히 자기가 자기를 살려내는 식의 인간형은 천국에서 거부하는 것이 최종 뜻으로 분명해집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우리 자신이 죽었다’를 받아들이기까지 인간들은 얼마나 허세와 객기에 휘둘리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순전히 그 어떤 경우라도 망신 당하지 않는 인생이 되기를 극구 버티는 식입니다. 실제로 구약 사사기에서 이 경우가 나옵니다. “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그의 무남독녀라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하여금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삿 11:30-35)

입다는 망상가요 환상가입니다. 자신에게 있어 전쟁은 심각하고 진지한 실제라고 하지만 그 사태를 맞이하는 자신에게서 상상이 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해서 환상가와 환상가의 대결이 되게 하십니다. 아람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산의 신이니 평지에서 싸우면 자신이 유리하다고 여기는 것도 환상입니다.

진정한 실재, 즉 환상이 아닌 것은 신약 시대 누가복음 7:37-38에 보면,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상황이 곧 모든 망신으로부터 벗어난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마땅히 받아들이는 인간형입니다. 이는 자신이 자기를 조절하거나 관리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만약에 자신이 신앙인 것들을 챙기면 이는 곧 자율성을 유지하는 보따리를 그대로 갖고 있는 인간형이 됩니다.

진정한 천국 인간형은 자신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완성도를 갖느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어떤 희생을 치뤘느냐를 유일한 보따리라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보따리만 자랑하는 인간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도로 일으키신 영적 전쟁터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8강-열왕기상 20장 26-30절(고마운 망신) 251126-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20장 26-30절입니다.

열왕기상 20:26-30

“해가 돌아오매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점고하고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하매 이스라엘 자손도 점고함을 입고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저희 앞에 진을 치니 이스라엘은 염소새끼의 두 적은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진이 서로 대한지 칠일이라 제 칠일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을 죽이매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이 말씀은 아람 나라하고 북이스라엘이 전쟁하는 대목입니다. 보통 전쟁할 때 ‘결과적으로 아람 나라는 북이스라엘에게 졌다. 반대로 북이스라엘은 아람 나라한테 이겼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떤 전쟁이든 인간이 이기는 전쟁은 성경에 단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승리를 얻을 그러한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민족과 우리 이스라엘이 싸운다’고 그렇게 오해를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대리전쟁입니다. 인간만 있는 것 같지만, 인간을 앞장세운 그 배후에는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악령과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 싸움을 이스라엘의 대리전쟁을 통해서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보면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잠언서 25장 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은 숨어 있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대리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주인이 전쟁을 벌였는데 종이 이겼다? 이것은 말이 안 되지요. 이스라엘 왕은 그냥 종입니다.

종의 승리로 돌아갈 전쟁은 하나님이 일으켜 본 적이 없습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승리로 이어지는 전쟁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 아무리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준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조용히 살고 싶어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아예 전쟁이 안 일어나서 평화롭게 사는 것, 그게 사람들이 내심 원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이스라엘 주인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주인이 하나님이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의 대리전쟁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전쟁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과 그 본질, 본성을 드러내는 활동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스라엘 전쟁을 이렇게 봅니다. ‘주님의 숨쉬기’ 또는 ‘주님의 현재 활동성’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겪어야 될 일은 뭐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새삼스럽게 발견해야 할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건 뭐냐? 현재 기존 인간형은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그러면 어떤 인간형이 되어야 하느냐? ‘어떤 인간형으로 바뀔 때 천국에 넣어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뀌어야 된다’는 것, 현재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으로서는 천국에 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전쟁의 효력으로써 이스라엘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이러한 인간형은 하나님께서 거부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거부하는구나’를 아는 그런 기회, 그런 계기가 돼야 해요. 그래서 물결치듯이 끊임없이 영적 전쟁이 지금도 계속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열왕기상 20장에 나온 전쟁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비는 먼저 어디서 걸었는가? 아람 나라에서 걸었어요. 아람은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시리아 쪽에서, 아람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다. 아람이 먼저 시비를 걸어왔고, 처음에 북이스라엘은 그저 조용한 게 좋기때문에 아람 나라 벤하닷 왕이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두 번째 요구 사항에서는 북이스라엘 아합왕이 성질나서 거부했습니다. 아람 왕의 두 번째 요구 사항을 거부하면서 장로들하고 회의합니다. “이거 어쩌면 좋으냐?”(왕상 20:7)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래서 군사를 모아 보니까 성경에 ‘소년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청년들 232명과 병사는 7천 명(왕상 20:15), 합해서 7,232명인데 적군은 십만 명이니까 이것은 10분의 1도 안 돼요. 이스라엘 군사 하나 잡는데 아람 군대 10명씩 동원해도 남아요.

이러한 전력의 차이를 누가 아느냐? 침략한 아람 나라 왕 벤하닷이 그걸 다 알고 있어요. 예를 들어 중국군하고 대만군하고 붙는다. 또는 러시아하고 우크라이나가 붙는다. 이건 뭐 붙으나 마나 게임이 안 된다는 걸 다 알지요, 다 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벤하닷 왕은 느긋한 거예요.

사실은 그 전에 먼저 전쟁의 빌미를 의도적으로 만들었죠. 열왕기상 20장에 그것이 나오는데 시비 거는 그 대목을 상세하게 볼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약간 난해해요. 아람 왕이 사신을 보내서 그 북이스라엘 아합왕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2-3절에 “사자들을 성중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벤하닷은 이르노니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그때 아합왕이 이렇게 동의를 했어요. 4절에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나의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이렇게 동의가 돼버리면 전쟁이 안 일어납니다. “네가 갖고 있는 재산과 처와 네 자녀들과 모든 보물도 다 내 것이다.” “옳소이다, 옳소이다! 다 드리겠나이다.” 이렇게 됐어요. 그랬으면 전쟁이 일어날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이 깔끔한데, 두 번째로 아람 왕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열왕기상 20장 5절에, “사자가 다시 와서 이르기를 벤하닷은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처들과 자녀들을 내게 붙이라 하였거니와.”

이것은 아람 왕의 첫 번째 요구조건이지요. 거기에 대해서 이스라엘 아합왕도 ‘오케이’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열왕기상 20장 6-7절에 보면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저희가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탐하여 무릇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잔해하려고 구하는 줄을 자세히 알라.”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말이 ‘ 아람의 첫 번째 요구에 대해서는 내가 동의했지만 두 번째 요구에 대해서는 내가 동의를 못 하겠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아무리 봐도 첫 번째 요구 내용과 두 번째 내용의 차이가 없어요. “네 모든 건 다 내 거다!” “오케이, 맞습니다.” 두 번째 “네 모든 것 다 내 거다!” “그건 안 됩니다.” 이게 뭐예요?

동일한 요구 조건에 대해서 처음에는 ‘오케이’ 해놓고 두 번째는 왜 ‘안 됩니다, 못 합니다. 그렇다면 거절하겠습니다.’ 여기에 무슨 차이를 두었느냐, 하는 거예요. 아람 왕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요구 조항의 그 리스트, 항목을 보면 동일해요. 똑같은데, 똑같은데… 기껏해야 ‘신복의 집’이 조항에 추가되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요구 조건이 똑같은데 왜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이 그걸 거부했는가? 그것은, 내가 알아서 드리는 것 “형님! 내가 알아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드리는 것과 그쪽에서 쳐들어와서 내 것을 빼앗는 것과의 차이예요. 이것은 뭐냐? ‘처와 자식과 내 모든 것을 빼앗기더라도 나의 자율성, 내 의지, 내 자유 의지, 내 자율성에 의해서 내가 드리겠습니다. 그것만큼은 좀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 이거 건드리면 안 되지요. 형님!’ 이렇게 된 거에요.

나이가 형님인지는 지금 모르겠는데요, 10만 대 7천 명, 이 전쟁은 말이 안 되잖아요. 어마어마한 큰 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딴 것은 되는 데 마지막 남은 내 자존심, 이것 건드리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렇게는 이 거래 못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람 나라가 “쳐들어가자!” 이렇게 된 거예요.

‘다 빼앗기는 마당에 자존심?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데?’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를 전쟁하게 하는 이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그 인간형은 어디에서 어디로 바뀌어야 하느냐를 알려주는 겁니다.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 의지, 이것만큼은 천하에 누가 와도, 뭐 하나님이라도 이것만큼 내가 간직한 채 천국에 들어가겠습니다.’라는 그런 인간형은 천국에서 안 봤습니다. 안 받아요. 지금 아람 나라가 두 번째 조건으로 건 것이 뭐냐? 수탈하겠다, 빼앗겠다는 겁니다. ‘네가 나한테 순순히 내놓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강제 조치를 하겠다. 강제로 빼앗는 식으로 너희 모든 것을 가져가겠다.’ 여기에 대해서 아람 왕은 거부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동영상을 봤습니다. 나이 한 3살쯤 된 외국 아이의 엄마가 그 애 동영상을 찍었어요. 3살쯤으로 보이는 그 애가 주섬주섬 자기의 장난감, 갖고 놀던 것들, 외출복, 잠자리에 필요한 것들, 인형이랄지…, 3살쯤 먹은 애가요, 그런 것들 다 챙겨서 갑자기 문을 열고 나가요. 엄마가 “너 어디 가는데?” “나 지금 가출할 거예요. 바이!”

아주 쿨~해요. 신나게 “엄마, 안녕!”하고 밖으로 나가서 한 10m 정도 갔어요. 거기서 제가 주목한 것은 가출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걔가 빈 몸으로 안 나가고 뭔가 갖고 나간다는 거예요. 갖고 나간 그게 뭐냐? 지금까지 3년 동안 살면서 친숙했던 자기만의 공간성이에요. 공간의 안정성, 그게 자기의 자존감이죠.

자기가 내 거라고 여겼던 것, 자기를 둘러싼 그 환경을 더불어서 갖고 가는 거예요. 장난감하고, 잘 때 침대 머리맡에 있던 인형부터 해서 외출복까지, 아마 가방 안에 잠옷도 넣었을 거예요. 자발성이에요. 자유 의지입니다. 세 살짜리 그 애가 자유롭게 가는 걸 돌려세우는 엄마의 비책이 있었습니다. “아이스크림이 있는데 이거 누가 먹지?” 이러니까 애가 그 소리 듣고 난 뒤에 2초도 안 걸려서 도로 집으로 들어와서 문 탁 닫았어요. 이제는 가출 안 한다는 뜻이죠. “엄마,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때문에 돌아왔어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기의 자율성과 자기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기만의 보따리가 있어요. 자기만의 보따리를 남이, 나보다 더 강한 자가 왔을 때 그냥 내어줄 수는 있어요. 내가 내 의사에 의해서, 내 자율,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서 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줘버리면 ‘내가 너한테 줬잖아’라는 그 자유 의지는 그대로 남아요. 자존감은 그대로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아람 왕이 뭐라고 하느냐? “강제로 수탈하겠다.” 오늘 본문대로 빼앗겠다고 하게 되면 그것은 못 참죠.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내 자존감을 건드렸으니 나는 못 참겠다.’하는 그 인간형은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받아주지 않아요. 그 인간형의 교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거예요.

쉽게 말해서 북이스라엘 아합왕은 지금 전쟁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가 망신살이 뻗쳤다, 망신당하고 있다는 거예요. 트럼프 대통령이 각국의 지도자를 불러놓고 생방송으로 기자회견 합니다. “당신 나라에 관세 100% 때립니다!” 하니까 상대국이 “관세 좀 낮춰주시면 6천억 불 투자하겠습니다.”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강제로 투자를 강요당하는 방식이지만 속에서는 뭐냐? ‘우리가 알아서 투자하겠습니다, 하는 형식을 갖춰줄 때 우리도 그 제안을 들을 만하다.’라는 그 말입니다. 그게 바로 인간들이에요. 인간들은 모든 걸 참을 수 있지만 공개적으로 개망신 당하는 건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인간들이에요.

그 인간형, 인간의 본색을 주께서 들춰내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전쟁은요, 인간 대 인간의 전쟁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대리전쟁이라고요. 신약 시대에 보면 그 대리전쟁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 대목이 나오는데 이 대목 볼 때마다 신기하고 놀라워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보통 신자다, 또는 성도다 할 때는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 자가 신자라고 돼 있어요. “저는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날 믿어?” “믿습니다.” “그러면 이리 와!” “예!” 골로새서 3장 3절을 딱 보여주는 거예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감춰져 있다는 것을 믿느냐?”라고 물을 때 방금 믿는다고 했으니까 “그것도 믿습니다!”

“그러면 ‘너희’에 해당되는 말도 네가 수긍하냐?”
“믿습니다.”
“그러면 네가 죽었다는 것을 네가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그래야 신자거든요.

“그러면 네 자존심, 자율성, 자유 의지 그것도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사건을 일으켜서 네가 이 땅에서 그런 개망신을 당해도 좋아?”

죽은 자에게는 그런 자율성조차 없으니까요. 우리가 일관되게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래도 좋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죠. 누가복음 7장 37-38절에 보면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님에게 비공개적인 자리가 아니라 다들 보고 있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여자가 이런 행동을 했어요. 그러니까 39절에서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이 놀리는 겁니다. “예수 당신은 뭐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천한 여자의 대접을 이렇게 아무 감정 없이 받으면 안 되죠. 저 여자는 나쁜 짓을 많이 한 더러운 여자고, 예수님은 소문에 의하면 깨끗한 분으로 아는데 어떻게 깨끗한 분이 저 죄 많은 더러운 여자를 다 상대해 주십니까, 질 떨어지게!”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지만 지금 그 죄 많은 여인이 하는 행위가 꼴사납다, 이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인은 그 공개적인 망신을 넘어서 버렸어요. 왜? 예수님이 설명해 줘요. ‘이 여인은 지금 남들이 나에게 어떻게 망신을 주는지는 아무 관심이 없고,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지금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있다’라는 거예요.

이 인간형이 천국 가는 인간형입니다. 우리도 성경 보면서 그렇게 하고 싶죠? 그러나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영적 전쟁을 일으켜요. 사건을 일으킨다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용하게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과연 천국 갈 만 한 인간형이냐, 아니냐를 들춰내는 그런 사태를 계속해서 일으켜요. 망신을 주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요.

실제로 사사기 11장에 보면, ‘입다’라는 사람이 멋지게 이겨서 백성들에게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인정받으려고 전쟁에 나섰는데 아주 개망신을 당했어요. 뭐라고 큰소리를 쳤느냐 하면 “이번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신다면 내가 내 집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마중 나오는 그 짐승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겠습니다”(삿 11:31)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제일 먼저 닭이나 소 돼지가 나온 게 아니고 처녀, 결혼해서 안정적인 인생을 꾸리기도 전인데 자기 처녀 딸이, 그것도 아들이 있는 게 아니고 무남독녀 딸이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달려올 때 딸은 아무것도 모르죠. 딸은 모르는데 아버지는 기겁하는 거예요.

‘뭔가 잘못됐다!’ 일이 잘못된 게 아니고 잘 된 거예요.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입다 본인이 천국 갈 만 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때 처음 알았던 거예요. 난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딸이 마중 나올 때 처음 알았어요. ‘아, 나는 내 자존심과 자기의, 내 잘남에 환장하면서 지금껏 살아왔구나.’

입다가 원래 좀 노는 깡패 출신이거든요. 깡패 출신이라서 그야말로 허세와 객기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인간인데 그 객기 허세가 딸이 마중 나오는 순간 다 깨진 거예요. 아주 큰 망신을 당한 거예요. 큰소리는 쳐놨지요. 딸은 제일 처음 마중 나왔지요. 다들 지켜보는 사람은 있지요. “전에 내가 한 말 무효! 무효!” 이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쟁, 하나님의 개입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취소할게요.” 이런 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딸을 잡아야죠. 처녀 딸을 잡아야 돼요. 입다가 딸보고 “네가 좀 죽어줘야 한다. 고민이다”라고 하니까 딸이 “아버지, 고민하지 마세요. 전쟁에서 승리할 때 아버지의 심적인 변화까지 고려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의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전혀 다른 인간으로 바뀐다면 나 하나 희생물이 되겠습니다. 그 대신 처녀로 죽는 것은 좀 억울하니 좀 울고 내가 제물로 바쳐지겠습니다”(삿 11:37).

이런 겁니다. 사람이 교회 올 때 죄를 지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용서해 주셨으니까 죄지어놓고 벌 안 받는 걸 가지고 좋아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뭐냐? 어떤 사건을 통해서 ‘대신 희생하신 분이 따로 있다’라는 것, ‘나 벌 안 받는다. 이제는 죄 용서받았으니 벌 안 받는다.’ 이걸 좋아하지 말고, 희생하신 분이 따로 계심을 찾아가는 것이 이게 바로 보따리에요, 우리 보따리.

아까 말한 그 세 살짜리 가출 아이는 그런 점에서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자기 친근한 것들로 보따리 싸서 가출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지고 이 땅에서 보따리 싸고 나가야죠. 그래야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감춰졌지요.’

골로새서 3장 4절에서 주께서 준비하신 게 있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주께서는 다 준비한 게 있어요. 다 생각이 있고 마련해 둔 게 있다고요. 예수님의 영광처럼 영광중에 우리에게 나타나게 해주실 겁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뭐냐? 네가 죽었다는 그 사실, 이미 죽었으니까 어떤 망신살이라든지 그런 것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죠. 두려워할 필요가 없죠.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불신의 시대에서 예수님 믿는 것도 일종의 망신 아닙니까?

망신당하는 빌미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위에서 이 불신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뭐냐? “너의 자율성을 발휘해. 왜 너를 믿지 않고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예수라는 분에게 네 인생을 맡겨? 너도 이성이 있고, 지성이 있고, 자율성이 있고, 자유 의지가 있으니까 네 인생 네가 알아서 관리하면 되잖아. 그런데 왜 이미 돌아가셔서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그 예수라는 분에게 네 인생을 몽땅 다 맡기냐?” 그 말이죠.

여러분, 이 정도까지 주위에서 비난받고 망신당하면요, 훌륭한 신자입니다. 정말 훌륭한 신자예요. 왜 그게 훌륭한 신자고 드문 신자냐? 예수 믿는 게 아니고 믿는 척을 하고 있으니까 예수 믿는 게 액세서리처럼 되어 버렸어요.

망신도 안 당하고, 교양 있다는 소리는 듣고 싶고, 내 지성은 지성대로 빛이 나고, 혹시 지켜볼지 모르는 예수님 앞에 믿음 있다는 소리도 덩달아 같이 듣고 싶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요령 부리게 되면 주께서는 가만두지 않고 전쟁을 일으켜요. 주께서 전쟁을 일으킨다고요.

이스라엘 전쟁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 사무엘상 17장 47절에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마주하면서 했던 그 발언을 오늘날 2025년 현대에 그대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런 말을 했어요.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이 발언을 지금의 과학 시대, 우리나라에서 또 우주선을 쏴 올린다고 하는 기계의 정밀성과 합리성이 충만한 이 시대에 “전쟁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 인간이 개발한 무기, 한국의 방산기업체가 만든 그 K-방산의 무기에 있지 아니하다.”라는 말을 공개 석상에서 만약에 한다면, 그것도 국방부 장관이 한다면 어떤 비난을 받게 되겠습니까? 장관 사퇴해야겠죠.

그래서 우리는 말조심하는 거예요. 행여나 비지성적인 발언, 아무리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도요. 기도하면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을 섞어 버릴 때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렇게 되어 버리면 듣는 원장 화 안 나겠습니까?

“앞으로 기도 그렇게 하면 안 되고요, 우리 사업 잘되고…,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그런 도발적인 발언을 왜 합니까?” 그걸 여러분들이 계산해서 ‘이 말을 지금 할까, 말까?’ 이렇게 되어 버리면 좀 곤란해요.

그건 자기가 자기 관리하는 것이고 실제로 성령께서 “네가 말한 것이 아니고 네 속에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다”(마 10:20) 해서 계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위적이 아니라 불쑥 튀어나오는 경우가 생겨요. 왜냐하면 기도는 누구 들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주님만 들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이 탁 나올 때 그것이 바로 죄 많은 여인이 고백했던 것과 동일한 환경을 주께서 친히 조성한 겁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역사거든요, 이스라엘 역사잖아요. 물론 하나님은 숨어 계시지만 이스라엘 역사는 나타난 겁니다. 나타나는 식으로 전쟁하는 데 전쟁하면서 이러한 수모를 하나님이 만든 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지금 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전쟁의 추이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 아합왕이 이스라엘 장로들 모아서 회의한다고 무슨 해결책이 나옵니까? 안 나와요. 자기 자율성과 자기 의지, 자존감을 스스로 빼낼 수 있는 재주는 어떤 인간에게도 없습니다, 없는 거예요. 이걸 그냥 절망적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절망적으로만 보시면 자기 활동만 활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우리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의 활동이 있어요. 제3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게 열왕기상 20장 13절에 나옵니다.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나아가서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말씀이 나옵니다.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아합왕이 초대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아람 왕이 초대한 것도 아닙니다. 지금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 둘이 싸웁니다. 대표격으로. 그런데 여기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제3의 인물이 불현듯 등장해요.

그냥 등장한 게 아니고 말씀을 가지고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이름도 없어요. 그냥 제3의 인물인 한 선지자가 등장해서 “이번 전쟁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드신 전쟁이니까 아합왕은 여기서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신경 쓸 게 없대요.

이 말은 뭐냐? “당신의 자율성, 체면, ‘망신당하기 싫어. 나도 체면이 있지’ 이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전쟁에 절대로 섞이면 안 됩니다.” 왜 그런가? ‘나는 이 전쟁의 주역이 아니냐? 왜 섞이면 안 되는가?’ 그것은 당신이 환상이기 때문이에요.

인간들의 전쟁은 환상과 환상끼리의 전쟁이에요. 실재가 아니에요. 좀 어렵죠? 어려운데 쉽게 가도록 하겠습니다. 환상이란 뭐냐? 자연환경을 내가 속한 인간 환경과 일치하려고 억지를 부릴 때 인간은 상상하게 되고 환상을 억지로 만들어내요.

예를 들겠습니다. 지난 11월 14일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어떤 중국집이 영업을 쉬는 날인데 어떤 사람이 짬뽕 배달 주문 전화를 했어요. 영업을 안 하는 날이니까 당연히 그날은 돈도 안 들어갔고 짬뽕도 올 수가 없죠. 문을 닫았으니까요.

그런데 주문한 그 사람이 다음 날 자기를 무시했다면서 칼 들고 중국집에 가서 죽이려고 문을 두드렸어요. 그걸 듣고 경찰에 신고했는데 그다음 날 그 사람이, 약속을 잘 지켜요, 진짜 죽이려고 칼 들고 중국집에 찾아온 거예요. 미리 신고했기 때문에 경찰이 체포했어요.

지난 10월 26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어떤 식당이 있는데요. 그 식당에서 홍보용으로 긁는 복권을 나눠줬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권을 못 받았다고 칼 들고 가서 그 식당을 하는 60대 부부를 찔러서 부인은 죽고 남편은 중태에 빠졌어요. 왜 복권을 주지 못했는가? “로또 추첨 다음 날인 일요일에는 복권을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날 무시하냐, 하는 그 자율성, 자존심, 체면을 챙기는 사람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실재로 보이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본인 생각이에요. 여러 가지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본인 생각만 하니까 혼자 자기 환상에 빠지는 겁니다. 환상과 실재를 나눠서 이야기했던 어떤 사람이 있어요.

1980년도에 개그맨 전유성이 결혼식을 했어요. 개그맨이니까 청첩장도 아주 개그스럽게 돌렸어요. “안 바쁘시면 저의 결혼식에 많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뭐가 웃기냐하면 “저도 안 바쁘면 참석할게요.” 우스개 소리죠. 그런데 전유성 그 사람은 뭘 생각했느냐? 내가 결혼한다는 것이 환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결혼한다는 것, 분명 자기가 결혼하는 것은 맞죠.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게 내 경우잖아요. 나의 일에 주목하고 다른 일에는 주목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단지 내 결혼식이고, 내 가치고, 내가 살아가는 의미고, 여기에 집중해버리면 남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고려하지 않고 그냥 내 것만 밀어붙이면 된다는 이게 바로 인간들의 망상이잖아요.

주님은 전체를 보는데 우리는 내 계획만 고집한다고요. 그러니까 그 뜻, 자연 현상, 자연을 움직이는 주님의 뜻과 맞지 않단 말이죠. 이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20장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첫 번째 전쟁에서 10만 대 7,232명 해서 누가 졌는가? 아람 나라의 10만의 적들이 졌어요.

그런데 다시 한번 정비를 해서 이렇게 합니다. 22절에,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가로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의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돌아오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라고 했어요.

실재는 뭐냐? 환상과 환상의 싸움이니까 둘 다 인간은 환상이에요. 실재는 누구냐? 하나님만 실재예요. 하나님께서 환상들이 어떤 계획을 갖고, 자기 자존심 위주로 어떻게 자기 생각만 하면서, 어떤 계획을 한다는 것을 실재되시는 주님은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열왕기상 20장 23절에 “아람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찌라.” 이런 계획을 침략군 아람 나라가 했던 거예요.

이것은 뭐냐? 자연 현상, 내가 보는 자연 현상에 대한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는 거, 그거 환상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도 소집되어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그들 앞에 진영을 치니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떼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왕상 20:27).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때 동원된 아람 나라 군사 12만 7천 명이 왔어요. 12만 7천 명이 왔는데 그들은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그래서 우리는 평지에서 싸우면 이긴다.”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이걸 누가 아느냐? 28절에 보면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도대체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서 정보를 캐내는지, 도청 장치를 했는지 다 알아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것은 전쟁을 통해서 내가 바로 환상에 속하며, 내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 골로새서 3장 3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죽어 있는 것’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죽은 우리를 살려내는 그 인간형만이 천국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런 ‘전쟁 사건’을 일으켰다 이 말이죠.

전쟁에서 아람 군대 10만 명이 죽었고 그 나머지가 도망을 쳤거든요. ‘아벡’이라는 아람의 나라 수도로 도망을 쳤는데 2만 7천 명이 도망쳤습니다. 그래 놓고 “아이고, 이제는 안심이다. 아이고 식겁했다. 우리 2만 7천이라도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하고 성에 들어갔는데 그 성에 지진이라도 일어났는지 갑자기 남은 2만 7천 명 몽땅 자기들 거하던 성에 의해서, 자기들이 거하던 그 보따리, 생존의 보따리, 삶의 보따리, 그 환상을 유지했던 그 공간이 무너져서 다 죽었습니다(왕상 20:30).

이 전쟁, 이게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실제적인 사건, 소소한 사건이 일어나지만 소소한 사건 어느 하나하나가, 아까 골로새서 3장 3절과 4절, ‘너희는 이미 죽었고, 활동성, 숨 쉬는 것은, 내가 숨 쉰다’라는 것, 하나님이 우리를 가지고 숨 쉬어서 하나님의 보따리, 다시 말해서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희생되었다’라는 그 사실을, 이제는 유일하게 우리가 자랑스럽게 간직해야 할, 어디 가도 쥐어야 할 나의 보따리인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쟁이 우연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사태가, 환상적인 우리를 통해서 실재 되시는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의 희생에 있음을, 곧 십자가의 희생이 영생의 근거가 됨을, 매일 같이 주시는 그 은혜를 저희들이 잊지 않고 꼬박꼬박 감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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