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효의 위력
2025년 11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51:51-53
51:51 이방인이 여호와의 집 성소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책망을 들으며 수치를 당하여 부끄러움이 우리 얼굴에 덮였느니라
51:5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조각한 신상을 벌할 것이라 상함을 입은 자들이 그 땅에서 신음하리라
51:53 가령 바벨론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하자 멸망시킬 자가 내게서부터 그들에게 임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거룩한 성소가 있는 곳으로 쳐들어가서 함락 시킨 것에 대해서 최종 책임자는 하나님이 아닌가요? 하나님께서는 그 군대가 성소에 들어오는 것을 방치하듯이 하시면서 뒤늦게 성소 침입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바벨론 제국을 처참하게 멸망시키십니다. 왜 애초부터 성소가 침법하지 않도록 방비하시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과 모든 업적들을 무효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인간들은 어떻게든 하나님과 관련지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로 그들 인간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모조리 멸망 당할 대상들로 단정지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성도에 대한 얕잡아 봄과 그 건방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곱게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성소를 최종적으로 불태워버린 바벨론 제국에 대해 혹독한 보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정신 팔린 이스라엘도 또한 하나님의 보복 대상이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든 그 외 모든 민족이든 하나님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이유도 멸망됩니다.
온 천지가 하나님께서 유발시킨 계시 활성화에 출렁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성소를 건드린 자들은 가만두지 않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십니다. 사실 인간들 세계에서는 중심이라는 게 없습니다. 이 ‘중심은 없다’가 유일한 그들의 중심이 됩니다. 사도행전 17:18-20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에피쿠로스 철학 학파와 스토아 학파 철학 학파 사람들을 만나서 논쟁을 벌리게 됩니다. 철학이란 이런 겁니다. 될 수 있는대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종합해서 최종 결론 삼아 이치를 내리는 활동을 뜻합니다. 이 세상은 자신이 세상을 보는 관점만이 아니라 타인들로 나름대로 세상을 보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들의 의견을 다 끌어모아 정리해야 진리를 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마다 각기 살아온 환경이 다릅니다. 직접도 다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의 성격이나 건강 상태마저 다릅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의견을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다 수집하고 모아보는 겁니다. 거기에 그 어느 누구도 부인 못할 정확한 원칙을 만들어보는 겁니다.
이러한 철학자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기분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행복하고 불행해지는 것은 마음 상태, 곧 영혼 상태의 안정성에서 비롯된다는 겁니다. 선과 악을 적절하게 조절하며 살면 여기에서 요령껏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그 평정심이 인간에게 필요한 진리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에게는 그 어떤 중심도 없습니다. 그저 이 사람이 저렇게 하면 그쪽으로 휩싸이는 식으로 요령껏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이 이익을 얻는 식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모든 인간들은 이들 철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벨론의 제국의 특징은 사람들의 타고난 본성이 집중되고 집결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실제로 역사 속에서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중심없는 중심체’가 사람들의 잠재적으로 원하는 바였던 겁니다. 이런 바벨론은 속성은 이사야 14:12-15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바벨론이 새삼스럽게 멸망 당한 것이 아니라 본래 제 자리로 돌아갔다는 봐야 합니다.
과연 우리에게 중심이 있습니다. 바벨론이 멸망당했다는 말은 모든 인간이 바벨론 정신에 속해있고 합류되었다는 점에서 그들도 하나님에게 멸망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에게 있어 ‘모든 인간들의 멸망의 상대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최종 실상은 그 어떤 인간과 상관없이 달성해서 보여진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 인간을 배제하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점이 중심으로 찾아든 자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도입니다. 성도는 비로소 그 안에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중심이 갖추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조건 안에 성도의 모든 인생사는 말끔하게 지워집니다.
하나님의 기억에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시 25:7) 이것이 무효의 효과입니다. 조건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성소’가 그 안에 중심으로 박혀있다는 경우를 말합니다.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6-9)
인간이 평생 살면서 본인의 경험상 가다듬은 중심은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평생이 다 헛된 알이기 때문입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 9:9)
이 세상 모든 것이 이 성소에게 나온 복음으로 성도는 생산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늘 말씀만이 활성화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1강-예레미야 51장 51~53절(무효의 위력)251123-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51장 51~53절입니다. 구약성경 1141페이지입니다.
“이방인이 여호와의 집 성소에 들어가므로 우리가 책망을 들으며 수치를 당하여 부끄러움이 우리 얼굴에 덮였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그 조각한 신상을 벌할 것이라 상함을 입은 자들이 그 땅에서 신음하리라, 가령 바벨론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하자 그 성을 높이어 견고히 한다 하자 멸망시킬 자가 내게서부터 그들에게 임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바벨론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하고 그 멸망하게 만든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또 멸망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돌아올 이익은 뭡니까? 이것이 이제 난감한 거예요. 육적인 생각에서 영적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육적인 생각 입장에서는 아무런 소득이나 이익 같은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일하시는데 그 일한 대가로 내게 돌아올 콩고물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좋아할 마음가짐이 평소에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 당하고 그 바벨론을 하나님이 또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이 멸망한 것에 대해서 아쉬워하거나 걱정하는 사람은 없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나라, 민족을 왜 하나님께서 쳐부숩니까?’라는 이스라엘과 우리 자신의 일체감을 갖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멸망한 것을 자기하고 동질화시키지 말고 바벨론을 멸망시키는 것과 우리와 동질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하면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고 그 이스라엘 외에 모든 민족을 만들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또 그 외에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면, 결국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다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멸망 안 당할 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이스라엘과 멸망 당하는 바벨론, 두 민족의 운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호감, 어떤 좋은 생각을 과연 가질 수가 있을까 하는 이게 이제 관건이죠. 하나님 혼자서 이거 치고, 저거 치고, 다 쳤는데, 그렇게 치신 그 일이 우리한테는 좋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이 무덤덤한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육적인 우리의 생각과 영으로 하시는 주님 생각과 접속이 되는가? 접속됩니다. 어떻게 되는가 전도서 9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전도서 9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호감을 갖지 못하고 아무 감각이 없이, ‘그랬었어요?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하나님이 혼자 신나서 하는 일을 어떻게, 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요?’라고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이 헛된 평생을 살아갔다는 것을 지금 잊어버리고 놓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게 하나님의 영적 결과를 덩어리째, 그야말로 폭포수로 얻어맞듯이 시원하게 얻어맞는 그러한 계기가 됩니다. 이건 뭐냐 하면은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살았든 간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무효로 돌리는 무효의 효력이고 효과이기 때문입니다. 이거는 정말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옥경이처럼 살았든지 어떻게 하든지, 그걸 전부 다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멸망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인간들아 애썼냐? 내가 무효 시켜줄게. 무효! 무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해줄게. 세상에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최고의 기쁜 소식이 있잖아요. 요새 부모 섬긴다고 고생이 많죠. 연세 많은 분. 그리고 남편도 돌본다고 힘들지요? 그거 자기 의가 거기에 개입돼 있어요. 자기 의. ‘하나님 잘 보세요. 제가 할 도리 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거 당장 멸망 시켜버려?”
네가 이걸 해서 어떤 거, 뭘 얻고 있는데? 평소에 모든 태도가 ‘이거 하면 나한테 돌아올 이익은 뭡니까?’라는 여기서 우리는 그걸 뚫고 나갈 수가 없어요. 이미 우리는 덮어씌운 게 마귀의 속성으로 덮어씌웠기 때문에, 이게 바벨론이거든요. 바벨론은 뭐냐 하면 높아지기 위해서 환장한 민족이에요. 하늘까지 높아지기 위해서. 오죽했으면 무저갱까지 빠지겠습니까?
이사야 14장 12절에 보면 나오거든요.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그렇게 잘 나가던 너, 그렇게 잘 나가던 삼성그룹, 현대그룹, LG그룹, SK그룹아, 어떻게 그게 찍혔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라고, 하나의 스타로서, 하나의 별로서 나와 나란히 하겠다고 여겼던 너, 그 높은 곳을 향하여 가는 그의 대표자 격이 누구냐?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을 멸망시킨다. 하지만 사실은요. 바벨론을 멸망시킨 게 아니고 제 자리로 찾아가게 만들죠. 너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 십자가까지 떨어졌잖아요. 하나님이신.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이잖아요. 높은 데 있다고 제일 낮은 곳으로 처박히게 하시는, 그 주님의 작업. 그러면 그렇게 처박히면 또 처박혀 놓고도 ‘그렇게 처박히면 나한테 돌아올 이익은 또 뭡니까?’라고 나오고.
이 본성은 끝까지 이게 강해요.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 인식은, 복음에 대한 믿음은 저주와 심판 속에서만 나옵니다. 저주와 심판 속이 아니면 안 나오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앞장서서 아버지께 저주받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동안 인간에게 막혀 있던 그 영생 소식, 천국 소식, 천국 백성이라는 합격 통보, 그거는 저주와 심판의 자리에서만 그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심판과 저주의 자리에 갈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전도서 9장 9절 다시 보겠습니다. 전도서 9장 9절에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그냥 날이 아니라 아예 헛된 날, 무엇을 해도 헛된 날이에요. 부모를 섬겨도 헛되고 헛된 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그냥, 그냥, 그냥 재미나게 살아. 너는 재미나게 사는 그것이 네가 큰 복 받을 줄 알아라. 더는 생각하지 마라. 그럼 재미나게 사는 방법은 본인이 본인을 헛된 존재로 간주하는 그 순간에만 모든 것이 재미없는 일이 없어요. 다 재미있어요. 다 재미있어요. 주식 꼴아박아도 다 재미있고, 보이스피싱 당해도 재미있고, 사기 당해도 재미있고.
이게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데 우리 인간이 자기가 행한 가운데서 좀 의미 있다고, 가치 있다고, 이거는 뭐 괜찮은 건데 여기에 대한 보상이 있지 않겠느냐, 이런 식으로 은근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기대해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과 바벨론을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다 대패로 밀어버린다고 하죠. 삭발하듯이 쫙 밀어버려요. 쫙 다 밀어버리면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멸망 당할, 하나님께 된통 당할 이유가 나오겠지요. 이제 그 이유를 아는 거예요. 그냥 ‘저주가 마땅합니다. 심판 마땅합니다’라고 이렇게 외운다고 될 게 아니고 제대로 문제를 파악해야 해요. 너와 나는 왜 심판과 저주를 당해야 마땅하냐?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사상과 어떤 사고방식에 물들어서 그동안 인생을 살아왔던가를 제대로 바닥부터 파악해 줘야 합니다.
문제가 뭔지, 문제를 왜 이렇게 우리에게 제시하는지 그걸 아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전도를 해왔는데, 거기서 사도행전 18장 17절에 보면, 누구를 만나느냐 하면은 거기 철학자들을 만나요.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라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여기서 철학가들을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철학이 무엇이냐. 미리 제가 철학이 무엇인지 답변해 드리면, 철학이란 각자 각자가 세상을 보고 나름대로 정리된 세상관의 꽃다발, 그게 철학입니다. 이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몹시 겸손한 사람이라서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여기에 아주 철저합니다. 그러면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면, 내가 모르는 것을 남들이 알고 있어 있을 것이라는 거죠.
그 남들은 기존에 있는 선배들, 같은 동기생들, 같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보는 방식이 아니고 다른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보겠느냐는 그런 것을 다 끌어모은 것이 철학이에요.
그러니까 철학은 뭐냐 하면, 어디까지 나가냐 하면, 사람이 사람 만나기까지만 가요. 거기에 물리학자, 생물학자, 인문학 하는 사람, 언어학 하는 사람, 신학 하는 사람, 각자 전문 분야, 농사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농사도 철학가가 있어요.
어부도 철학가가 있고, 목축하는 사람, 여러 가지 건설업에 있는 사람, 모조리 다 자기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적된 자기만의 체험과 같은 거 있잖아요. 그 체험을 어떻게 몽땅 모아서 정리하는 수고를 하는 사람을 철학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 철학가 하면 점(占)치러 많이 가죠. 자기보다 장래에 대해서 잘 대비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 철학가 가운데 사도행전 17장 18절에 두 부류의 철학가가 등장해요. 하나는 에비구레오,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ism)입니다. 또 하나는 스도이, 스도이는 일본말 아니에요, 스토아학파(Stoicism)입니다. 스토아 철학가. 이 부류의 철학가들과 사도 바울이 쟁론했다는, 말을 다투었다고 했어요. 다툴 내용이 뭔가? 도대체 어떤 점에서 다투어야 하는가? 이 철학가의 주장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이 철학가의 주장들은 여기 스토아 철학가와 에피쿠로스 철학가와 둘이 약간은 차이 나지만 합쳐서, 그냥 공통적인 그들의 의견을 제가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신은 있다. 신이 없는 게 아니라 신은 있다. 신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기분이 더 중요하다. 신은 있지만 우리의 기분이, 우리의 기분이 더 중요하다. 우리의 기분을 좋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어떤 균형이냐. 너무 선하지도 말고 너무 악하지도 말고, 선과 악 사이의 균형을 맞추면, 그게 평정심이라고 하는데, 평정심을 갖추면 우리는 그 균형 맞는 기준에 의해서 행복해진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서 우리 성경 좀 아는, 성경을 좀 들은 구석이 있는 사람들 같으면, 일단 당신이 이야기하는 대로라면, 신은 있으나 마나 한 거죠. 아무 의미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편안하고 안정되게 살아가는가 하는 그게 우리의 행복이라는 그런 이야기죠? 그래요. 그런 이야기예요. 그러면 당신이 말했던 모든 물리학, 과학에 의하면 생물이 있고, 생물이고 뭐고 간에 그건 누구를 위해서 있는가? 그건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있다.
문제는 사도 바울쯤 되니까 그들에게 쟁론하면서 그들을 비판할 수 있지만, 일반 그런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기 전에는 에피쿠로스학파가 스토아학파에 그 전체, 지금은 튀르키예죠, 그 전체, 전부 다가 거기에 몰입돼 있었어요. 거기에 다 동의하고 있었던 겁니다.
영국의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에서 뭐를 금지했느냐 하면,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을 금지했어요.
악귀(惡鬼)가, 악마가 왜 노래를 부르냐는 거죠. 사자보이즈(케데헌 보컬)들이 왜 갓(모자)을 쓰고 춤추며 악귀(惡鬼)와 노래 부르느냐. 이거는 하나님의 정신에 어긋난다. 이렇게 하니까 학부모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들고 일어나서, 그 금지를 취소시켰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철학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인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모두 소집한 거예요. 다 소집한 거예요. 그게 바벨론이에요. 바벨론은 소집해서 위로, 저 위로, 그러니까 바벨론 특징이 뭐냐? 저 위에 별을 그냥 보는 게 아닙니다. 저 별의 온화하고 안정된 자리가 내 자리였으면 나는 여한이 없겠다는 그런 포부와 희망을 갖는 겁니다. 그게 바로 UP! UP! 높이 올라가는 거예요. 높이 올라가는 거. ‘Golden’이라는 노래 여러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죠? 한번 들어보세요. 그냥 높이 올라가는 거예요. 이거는 인간들에서 나온 거예요. 너무나 마땅한 겁니다.
그러니까 도리어 이 복음이라는 것이 굉장히 생소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이제 제가 복음 설명할게요. 복음은 딴 게 아니고 자기 손을 손가락을 가지고 자기의 중심을 한번 찾아보세요. 자기 중심이 어디 있는지. 보통 사람은 손가락을 가지고 심장 쪽을 중심이라고 이렇게 가리키죠.
그러나 인간 일상의 생활은 중심이 없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이 중심이 없어요. 그때그때 기분 따라, 좌로 붙거나 우로 붙거나, 난리도 아니죠. 인간은 중심 자체가 없어요. 늘상 흔들리는 갈대처럼 환경 따라서 흔들리기 때문에, 그 환경 속에서 흔들리는 갈대를 어떻게 뚫고 나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 말합니다.
“헛된 인간들아, 그냥 아무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살아.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 일체 모든 것을 내가 삭제해 줄게. 리셋(Reset) 시켜줄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바꿀 게” 이게 바로 멸망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고마움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어?” ‘저 이런이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기억나지 않는데” 주님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세요.
주님이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세요. 주님께서. 그러면 조건이 뭡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한 조건이 뭡니까? 네 안에 네가 모르는 내 중심을 네 안에 심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건 딱 하나예요. 우리한테 심지(心―), 막대기가 있는 거예요. 그 심지가 성소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이야기예요. 성소에 들어와서 호작질한 바벨론을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데 성소에서 호작질한 바벨론을 가만두지 않다면, 이스라엘은 성소를 호작질 안 했습니까? 거기다가 우상 안 섬겼어요?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분명해졌어요. 내가 심어놓은 성소 중심을 어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조건하에 너의 모든 죄는 성소에 나온 죄사함으로 없애주겠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것이 시편 79편 1절에서 6절에 쭉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라고 쭉 이야기가 나오면서, 시편 79편 9절에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나오거든요. 진작에 이런 이야기 해야지요. ‘주님이여, 저의 이익을 위해서 주께서 찾아오고’라는 그런 거 말고,
주님이 접수해 주시고, 접수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 주 우리 안에는 주의 이름 중심으로 매사가 우리 인생 안에 돌아가게 하옵소서. 작동되게 하옵소서. 이것을 이게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말씀이 활성화되지 아니하면 죽은 목숨이다. 한 문장으로 하면, 내 안에 말씀이 활성화되지 않으면 그 인간은 죽은 목숨이에요.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영적 세계의 체화(體化)감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다. 영적 세계의 체화(體化)감. 이거는 내가 안 했는데, 주께서 나에게 중심으로 찾아오셔서 성경의 말씀에 나오는 영적인 그 사실을 우리 안에서 체화, 느끼는 감각, 이게 우리의 자존심을 이겨요.
주의 말씀이 주어지는 그 감각이 없으면 우리는 죽은 사람이죠.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셔서 다 없애준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나의 주님의 기간이 됩니다.
주께서 활동하시는 기간이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무심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급한 사건이 일어나니까, ‘119가 몇 번이야?’ (전화번호가 뭐야?) 그거 의미 있는 거예요.
119가 몇 번이냐? 이 말은 119 숫자가 이미 소방수라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고 만 거예요. ‘119’ 이게 고유명사가 되다 보니까 119라는 숫자는 생각 안 하고 이게 소방관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소방관이 있는데, 빨리 소방관 불러야 해. 그러니까 소방관이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 ‘소방관은 몇 번이지?’라는 이 말을 ‘119가 몇 번이지?’라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이게 체화감, 우리 말씀의 체화감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세상에 이 모든 전부가 하나님의 계시로 출렁이고 있어요. 출렁이는데, 그 계시 중앙에 보면 육이면서, 육과 영의 경계선을 함께 갖고 있는 성도를 미끼로 삼아, 성도로 그것을 자기의 빌미로 삼아서 주께서는 자기의 이미 구원해 준 성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성소 중심으로 세상의 계시는 출렁이고 있습니다.
결코 내 중심은 아니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헛된 존재지만, 헛된 존재라는 고백 자체가 주께서 일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걸 누가 방해하느냐? 나 헛되지 않아. 나 잘 나가야 해.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뭡니까? 맨날 이런 생각을 하면, 주께서 “너 또 한 번 나한테 멸망 당해 볼래? 이스라엘 멸망 당했듯이 나한테 한번 당해봐”라고 하면서 이제 인생이 서서히,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끝으로, 요한복음 6장에 나온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는데, 예수님 따라다닐 때, 그들은 자기중심을 노출했어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드디어 나의 중심으로 예수님을 모시려고, 임금 삼으려고 따라다녔던 거예요. 어제 우리 외손자가, 우리 딸하고 사위하고 다 같이 있는데, 자기가 체험 학습 가서 귤을 따왔는데, 그것도 제일 작은 귤을 따 왔어요.
그래서 이제 그걸 먹으려고 하니까, 이건 자기 거라고 먹지 말라고 다 말렸어요. 그걸 얻어먹어야 하니까, 이제 손자를 달래는데, 우리 생각에 귤을 하나씩 나눠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손자가 귤 하나를, 그것도 제일 작은 귤을 까서 그걸 쪼개요. 쪼개서 그 쪼가리 귤 있잖아요. 그걸 그것도 둘이 아니고 한 개씩, 내 입에 할아버지 입에, 할머니 입에, 그리고 누나 입에, 아빠 엄마한테 줘요.
느낀 점은 내 기분은 전혀 배부르지 않았어요. 나한테 이익이 없었어요. 더 배고픔만 가증시켰습니다. 그 순간 알아야 해요. 그저 뭘 주든지, 한쪽만 주더라도, 아무것도 아닌 헛된 날을 보내는 아무것도 아닌 나, 이것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 뒤에는 그 귤을 잊었습니다. 잊고 보니까 귤 2개가 와 있대요. 아주 감사가 배가했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어떤 배부름도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배부름은 그걸로 통해서 있을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엉뚱한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면서도 세상의 중심이어야 되는 이 말도 안 되는 고집, 이제는 이것을 낮추어서 모든 것을 무효화 하시는 그 복된 복음이 중심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케데헌이 부른 노래, ‘Golden’ 가사 일부
I was a ghost, I was alone
(유령 같았던 나, 혼자서)
hah 어두워진, hah, 앞길속에 (Ah)
Given the throne, I didn't know how to believe
(왕좌에 앉아도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어)
I was the queen that I'm meant to be
(난 여왕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걸)
I lived two lives, tried to play both sides
(주어진 두 개의 삶, 양쪽에 충실하려 했지만)
But I couldn't find my own place
(하지만 내 자리를 찾을 순 없었어)
Called a problem child cause I got too wild
(문제아라 그랬지, 거친 성격 탓에)
But now that's how I'm getting paid
(하지만 그게 날 이곳까지 이끌었어)
끝없이 on stage, I'm done hidin'
(끝없이 무대로, 더는 숨지 않아)
now I'm shinin' like I'm born to be
(찬란히 빛나는 나, 이게 내 모습이야)
We dreamin' hard, we came so far
(간절한 우리의 꿈, 먼 길을 왔어)
now I believe, it's our moment
(이제 난 믿어, 지금이 바로 우리의 순간이야)
You know together we're glowing
(우린 함께여서 더욱 빛나)
Gonna be, gonna be golden
(반드시, 반드시 빛나게 될 거야)
Oh, up, up, up with our voices
(목소리를 더 높게 올려)
no fears, no lies
(두려움도 거짓도 없어)
That's who we're born to be
(그게 바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야)
Waited so long to break these walls down
(이 벽을 허물기 위해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어)
To wake up and feel like me
(깨어나 진짜 나로 느끼기까지)
Put these patterns all in the past now
(반복된 굴레들은 과거로 보내고)
And finally live like the girl they all see
(사람들이 믿었던 나처럼, 진짜 나답게 살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