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소한 안목
2025년 12월 7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 6-7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돕는다’혹은 ‘인도한다’는 제안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본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자기 세계를 건설하면서 살아가는 게 본성이 부합됩니다.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지만 그 한계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알아서 선을 그어보겠다는 겁니다.
‘도움 받겠다’는 의미는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런 자세가 견지되기에 제대로 된 도움이나 인도란 성사될 수가 없을 겁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구원작업을 성립시킬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사시키시는 구원은 ‘나 본인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구원’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나타나는 구원입니다.
‘개인적 구원’은 곧 지옥으로 통하는 원리입니다. 직행합니다. 구원을 시도하다가 결국에게 지옥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작업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시는 겁니다. “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회개할 것 없는 99마리의 양’을 버리는 방식으로 구원을 실시하십니다. 양을 버리고 양을 건지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찾아낸 양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나서시는 방식입니다. 이 방법에 대해서 요한복음 4:40-53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분명 여기에서 왕의 신하 생각한 시공간은 주님께서 가지고 오신 시공간과 분명 차이가 납니다. 왕의 신하는 자기 시간 안에서 납득될 수 있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구원이 담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식은 인간들의 예상하는 방법을 피해가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인간은 ‘자기 자유 위주’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자기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와야 ‘나의 구원’에서 벗어나 ‘우리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성도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에서 벗어나 ‘진짜 사실이 뭔가’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빌립보서 2:8-11에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는 협소한 안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죽어서 땅 아래에 가서도’ 주님의 영향권 속에 놓여 있음을 미리 알게 됩니다. 이게 바로 사실인 겁니다. 자신이 믿고 싶지 않더라도 믿어야만 하는 일이 바로 이런 사실입니다. 구약의 말씀은 협소하지 않는 안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2에 보면, “너희는 정다이(친절하게)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들의 출생 자체가 교도소 안입니다.
따라서 악마의 본성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악마는 자립의지로 무장되어 있고 바로 그 정신을 인간에게 주입시켰습니다. 그리고 인간들로 하여금 항상 다음과 같은 최종 항변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은 사랑하지 않으니 우리 같은 인간들 끼리라도 의지하고 의논하고 정붙이고 살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은 사랑 없는 살 수가 없다’에 치명적인 세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협소한 안목을 넘어서 하나는 인간은 없고 죄인 뿐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 이미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걷어찼습니다. 세 번째 인간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필연적으로 당도해야 될 존재입니다.
인간의 자아는 주님의 지적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 십자가 지신 현장에 구원되지도 못할 강도로 같이 있습니다. 그 강도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나를 구원해주면 그때 당신은 인정하겠다”고 말입니다.(눅 23:39) 그러나 ‘나의 사랑’을 요구하게 됩니다. ‘우리 구원’은 성립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에 불과합니다.
진짜 사랑은 구원받은 강도의 고백입니다. “내가 강도짓을 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죽기 위해 태어났음을 주님의 죽음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곧 ‘주님에게 일어난 일’이 곧 나에게도 일어납니다는 겁니다. 이처럼 자신의 소유성이 파괴되고 주님의 소유성을 합류되는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주기도문에서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마 6:9) 따라서 앞으로 성도는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이런 차원에서 협소하지 않는 다음과 같은 안목을 나타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이 땅에서 즐거이 빠져 나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 구원의 특징입니다. 성령이라는 보혜사가 오셔서 주님의 사랑을 입게 하듯이 동일한 사랑을 입게 하는 그 작업에 먼저 사랑받은 자가 동원됩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바로 이런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홀로 있지 않음이 사실 그대로임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5강-히브리서 13장 6-7절(협소한 안목) 251207-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6-7절입니다.
히브리서 13:6-7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여기 보면 ‘주는 나를 돕는 자’라고 되어 있죠. 그리고 ‘인도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혼자 해내지 못하는 일이다. 그게 구원이다.’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에요. 성경은 이미 천국을 알기 때문에, 홀로 자기 노력으로서 천국 왔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받아주지 않습니다. “너 누구와 함께 왔지?”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내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나는 나만을 소중하게 여기고 나에게 중요하면 그게 전부인데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 누가 나를 인도한다? 그것은 벌써 자존심에 스크래치 내는,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환경이죠.
우리는 모든 일을 내가 마무리해야 어떤 자부심 같은 걸 갖습니다. 예를 들어 “너는 나 아니었으면 구원도 없었어.” 이게 기쁜 소식일까요, 아니면 짜증 나는 소식일까요? “나 아니면 너 구원 없어.” 이 말은 “그러면 도대체 나는 뭐야? 나는 당신에게 뭡니까? 왜 사람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무시해요?” 구원이고 뭐고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지는 거예요. 사람이 기분이 나빠질 때는 자기 가치를 모독할 때 기분이 나빠지는 거예요.
그런데 “나 없이는 너 구원 없어.” 그러면 나는 비자립적인 존재에요. “나한테도 자유가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주님이 돕는 자시니까 주님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유를 준 것은 네가 자유롭지 못함을 알리는 수단으로 준 것이다.” 자유를 줌으로써 그 자유가 결코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게 준 자유는 오히려 내가 어디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도구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 속박되어 있는가? 우리 주님 입장에서 볼 때는요, 인간은 결코 인식할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현재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처벌받고 있습니다. 굉장히 불합리한 거예요. 내가 알 수도 없는 법에 의해서 나는 죄인으로서 규정 받았고, 나는 그 죄에 대해 미처 다 동의할 수 없고 도대체 내 죄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전부 다 처벌이에요. 인생사는 자체가 지금 벌받고 있는중이에요.
그런데 벌받고 있으면서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뭔가 내가 잘못한 게 있어서 인생을 힘들게 사는 것 같으면 내가 용납하겠는데, 지금 죄도 모르고 어디에 저촉됐는지도 모르면서 처벌부터 된통 받고 있으니 ‘아, 인생살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참 불합리하고 허무하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아이들이 공부하면서 느끼는 트라우마가 뭐냐 하면요? 학교 가면 숙제를 준다는 거예요. 또 학교에 가면 시험을 쳐요. 시험치고 숙제 주는 것은 내가 요청하지 않았어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학교에서 시험치고 숙제를 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기분인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학교가 내 시간을 몽땅 가져가는 거예요. 어떤 아주 철없는 애들, 두 살이나 세 살짜리 애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판사님, 우리 엄마 좀 감옥에 넣어주세요.” “왜?” “엄마가 나보고 자꾸 숙제하래요.” 아주 철없는 아이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철은 없지만 아주 솔직한 이야기 아닙니까? ‘나에게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할 자유가 있는데 왜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유가 나를 위해 쓰이지 못하도록 세상이 그렇게 꼬여져 가느냐?’ 그 말이에요. 내 자유 같으면 나 좋으라고 쓰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가 결정하고 선택한 자유가 점점 나를 알 수 없는 쪽으로 몰아간다면 내 기쁨은 도대체 언제 본전을 찾을 수 있지? 언제 얻을 수 있을까?’ 우리가 신약을 보고 있잖아요. 이런 모순점에 대해서 구약 때부터 이미 언급을 해놨어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희년’이라는 것을 준비했거든요.
희년이라는 것은 ‘7 × 7 + 1 = 50’ 50년째가 되면 네가 해방된다는 날이 희년, 기쁜 날, 해방의 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듣는 우리, 곧 자유를 가진 인간의 입장에서 내가 해방해 달라고 요청했습니까? 자유 자체가 해방 아닐까요?
우린 그렇게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거든요. ‘자유가 있다. 난 그 자체로 종속되지 않는다.’ 그렇게 아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해방되는 날을 이렇게 지정해 줬다는 말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네가 갇혀있다는 거예요. ‘너는 해방되지 않으면 영원한 감옥에 갈 거야.’ 이런 뜻이란 말이죠.
‘성경을 봐도 잘 모르겠다’라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성경을 봤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유가, 우리 인생 자체가 지금 감옥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탈출 의지가 없어요.
‘이건 뭔가 문제가 있어, 벗어나야 해.’라는 의식이 없고 ‘남들처럼 살아가면 어느 정도 선방한 인생이다.’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구약 성경에서 희년이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의 잔존 가치를 따지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차를 3천만 원 주고 샀는데 10년을 타고 나면 예상되는 차의 값이 50만 원 정도라고 할 때 그 50만 원이 잔존 가치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땅 위에서 굴립니다. 태어나게 하시고, 살게 하시고…, 그렇게 굴려놓고 그 잔존 가치를 매기시는데 그 잔존 가치가 뭐냐? 죄 찌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레위기 27장 1절에서 8절까지 쭉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찌니 너의 정한 값은 이십세로 육십세까지는 남자이면 성소의 세겔대로 은 오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삼십 세겔로 하며 오세로 이십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이십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십 세겔로 하며 일개월로 오세까지는 남자이면 그 값을 은 오 세겔로 하고 여자이면 그 값을 은 삼 세겔로 하며 육십세 이상은 남자이면 그 값을 십 오 세겔로 하고 여자는 십 세겔로 하라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찌니라.”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레위기에서 희년이라는 것 그리고 여기 성전세도 마찬가지지만 서원한 것에 값을 매길 때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값은 인간은 모르는데 하나님은 아는 죄 찌꺼기의 값이에요. 그 값으로 대체되지 않으면 죄 없는 자가 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관점, 안목이에요.
그러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가 뭐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는 태어나서부터 협소한 안목으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협소한 안목이라는 말은 뭐냐? 율법이 이 세상을 뒤덮고 있다는 그 덮개 의식이 없는 게 협소한 안목이에요. ‘뭐가 내 머리 위를 율법으로 억누르고 있다.’ 그런 관점으로, 하나님 관점으로 봐야 협소한 관점이 아닌데 ‘내 인생은 내가 기쁨으로 행복을 위해 내가 사는데 이게 뭐가 잘못됐느냐?’ 이게 협소한 관점이에요. 편협한 관점이라고요.
이사야 40장 2절에 보면 의미심장한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 같은 것은 제가 권장하고 싶어요. 액자로 만들어서 집에 걸면 좋은 구절이에요. 2절에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복역의 때가 끝났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전부 뭘 주느냐? 두부 있잖아요, 두부를 다 먹이는 거예요. 생이 끝났을 때 장례식 끝나고 보람 상조에 끌려가서 관 치울 때 두부를 다 주는 거예요. 다시는 이 세상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라고, 다시는 이 감옥소에 오지 말라고.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거예요. 이게 협소한 관점이 아니에요. 이게 주님의 관점이에요. 율법적 관점에서 보는 거예요.
교도소 이감해서 미국 교도소에 가도, 이태리 교도소에 가도, 영국 교도소에 가도, 일본 교도소에 가도 맨 교도소에요 거기는! 수감 장소만 바뀔 뿐이지 호주에 가도 교도소에요. 복역 중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인도자’라는 말, ‘돕는 자’라는 말은 뭐냐?
본인 구원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고 성경에 무슨 구원이 있느냐? 성경에는 ‘우리’ 구원밖에 없어요. 개인 구원은 없어요. ‘우리’ 구원밖에 없습니다. ‘우리’ 구원이 되려면 개인이, 솔로죠, 개인의 자유가 결국 죄 찌꺼기를 남기고, 그 죄 찌꺼기를 잔존 가치로 여기고 그것에 대해서 값을 치르지 않으면 구원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를 못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예요, 우리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요. 개인은 협소한 관점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릴 때 같이 지내던 어떤 친척이 있었는데 그 친척을 우연히 50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친척이 날 보고 하는 말이 “너 어릴 때 김밥을 굉장히 좋아했지? 50년 만에 만났으니 내가 오늘 김밥 거하게 한 번 차려줄게.” 이게 얼마나 협소한 관점입니까? 김밥은 이미 다 먹어봤어요. 그것은 어릴 때, 김밥을 제대로 못 먹던 시절의 관점이잖아요.
그런데 그 친척 어른은 아직도 어릴 때의 협소한 관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쟤가 김밥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먹여 줘야지.’ 지금 김밥 먹을 군번입니까? 김밥도 물론 감사하지요. 지금 예를 드는 겁니다. 더 비싼 것도 있잖아요. 한 줄에 3,000원짜리로 때울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처럼 하나님께서 인도한다는 것은, 협소한 우리의 관점에서 탈출하는 거예요. 벗어나는 겁니다. 이게 혼자서는 안 돼요. 왜 혼자서는 안 되는가? 인간이 혼자 살면 자연스럽게 자기가 파괴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방어하려고 해요. 혼자 살면 명랑하지도 않으면서 명랑한 척을 하는데, 명랑한 체하는 것은 노골적인 슬픔보다 더 서글픈 비극입니다.
그런데 같이 살면서 싸우다 보면 자기가 파괴돼요. “나는 뭐야? 내가 너한테 뭔데?” 사람이 자기 위주로 하나, 하나로 각자 살면 독소를 품은 암 조직체가 돼요, 돌출된 암 조직체. 인간이 ‘돕는 자도 필요 없어. 인도자도 필요 없어. 나는 내 인생 내 자유로 살 거야.’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결국 자기의 원판을 드러내게 됩니다.
인간의 원판은, 인간의 옛사람은 혼자 살아야 하니까 뭐든지 끌어모아서 소유해요. 내 것을 만든다고요. 이 모습은, 마귀가 하나님께 독립한 그 정신 상태가 그대로 작동하는 겁니다. 물론 혼자 사는 사람이 교회 나올 수 있지만 결국 어디로 빠지느냐 하면요, 자기 자신이 파괴되는 것에 저항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성경 말씀을 보다가 나중에 점점 복음이 깊이 들어가게 되면 이렇게 외칩니다. “나 예수 없는 지옥이 더 좋아.”
그리고 말씀 들으면 어떤 구토 증세를 느껴요. 주님 앞에 선다? 하나님 앞에 선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게 습관이 되면 하나님 앞에 서는 게 질식되는 거예요. 도대체 견디지를 못해요. 다시 나 홀로 있고 싶어요. 자꾸 나 홀로. 인도자도 귀찮고, 구원자도 귀찮고 그냥 내 곁엔 내가 있고 싶어요.
기성세대들이 ‘요새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한다’고 하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고 또 흥미를 느끼지 않는 이유는, 결혼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그래요.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내가 파괴되는 거예요. 그런데 결혼을 뭐로 보느냐 하면, 날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를 기쁘게 하지 않을 거면 아주 쿠~울하게 가라는 거예요.
나를 그냥 짓밟고 가
괜찮아 돌아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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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b-ye
bye ye ye ye ye ye
bye ye ye ye ye ye (b-ye)
bye ye ye ye ye ye
bye ye ye ye ye
(Good Goodbye, 화사, 2025)
‘언제나 내 곁에 내가 있고 싶다’는 거예요. 그냥 ‘굿바이’ 아니고 ‘굿, 굿바이!’ 난 그 ‘굿, 굿바이’ 그 노래를 잘 못하겠어요. ‘화사’가 부르는 그 ‘굿, 굿바이’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세상이 나를 빤히 내려다봐도
내 편이 돼 줄 사람 하나 없어도
Don't worry it's okay
난 내 곁에 있을게
‘이 세상에 내 편 들어줄 사람은 하나 없어도 나는 내 곁에 있다’는 거예요. 이런 주제로 1975년에 상을 받은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너무 공감해서 상을 받은 그 책의 이름이 『자기 앞의 생』(Émile Ajar, 1914-1980)이라는 책이에요.
거기 아랍 소년이 나오는데 이름이 ‘모모’입니다. 그 모모가 평생을 창녀로 살았던 뚱뚱한 로자 아줌마와 같이 사는데 남들은 욕해요. 남들이 욕해도 둘 사이는 죽고 못 삽니다. 아버지가 버린 아랍 소년, 그리고 그 아랍 소년을 자기 아들처럼 여기는 로자와 함께 6층 아파트에 삽니다.
로자의 몸무게가 95킬로 나가는데 얼마나 힘들겠어요. 그 늙은 아줌마를 부축하며 도와주는 모모, 그 모모가 심지어 개까지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사는 게 어려우니까 자기 개를 팔아요. 옛날 프랑스에서 500불이면 큰돈이잖아요. 그런데 개 값으로 받은 그 500달러를 하수구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내가 개 팔아먹는 인간이 되기 싫다.’
그 책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 있어요.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김만준이라는 사람이 부른 노래 가사에도 나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신에 대해서 인간이 마지막 할 수 있는 항변이 뭐냐?
“신이시여, 사람은 사랑 없이는 못 살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나를 사랑 안 해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당신이 사랑을 해주지 않으니 같은 인간끼리 서로를 의지하고 사슴처럼 기대고 살 수밖에 없고, 믿을 것은 사람의 정 밖에 없으니 그거 빼놓고는 차라리 지옥 가는 게 낫습니다. 사랑 없이 나는 못 살겠습니다.” 그 이야기해서 그 작가가 프랑스에서 큰 상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모, 김만준, 1978)
그런데 ‘사람이 사랑 없이는 못 산다.’ 여기서 모모는 세 가지를 틀렸습니다.
첫째, 사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 자체가 없어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협소한 관점이에요. 하나님 관점에서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사랑 없이는 못 산다’라고 되어 있는데 요한 1서 4장 19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즉 인간이 요청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사랑 없이는 못 산다’라고 하는 자체가 인간이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인데, 인간이 살려고 하는 그 자체도 죄가 된다는 것을 인간이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흔히 언급하는 그 대목 중에 하나가 십자가 사건 때 두 강도 이야기에요. 구원받은 강도만 주님과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할 강도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 달리게 한 그 취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구원받은 강도가 어떤 고백을 했는지’만 살펴서 ‘나도 그런 고백 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구원받지 않은 강도가 뭐라고 예수님에게 이야기했는지’ 그걸 거쳐 오세요. 그냥 구원받은 쪽으로 오지 말고, 구원받지 않은 강도가 십자가 바라보면서 주님한테 한 그 이야기를 밟아 오시라고요. 그걸 밟아 와야 구원을 알아요.
누가복음 23장 39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우리를 구원하면 그때 내가 당신 믿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특징이 뭐냐?
신의 사랑마저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 부합하도록 신이시여, 나를 사랑해 달라’는 거예요. 그 강도는 지금 구원이 거래인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지 못한 강도에요.
잘 납득이 안되십니까? 납득이 잘 안되신다면 누가복음 15장 3-6절은 더욱더 납득이 안 될 거예요.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99마리는 들러리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데 양을 버리고, 양을 찾는 방식을 사용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99마리의 양을 버리는 방식으로 한 마리 양을 찾는 거예요. 하나님의 관심은 잃어버린 적이 있는 양, 거기에 꽂혀 있습니다. 잃어버린 적이 있는 양.
잃어버린 양의 특징은요, 뭐가 없느냐? 돕는 자도 없고, 그리고 인도자도 없어요. 그런데 그 잃어버린 양에게는 인도자나 돕는 자를 찾아가는 방법도 없어요. 몰라요. 그냥 멍하니 있어요. 구원이라는 것이 이처럼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 구원하는 것이 왜 어렵냐 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솔로에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라는 개념이 없어요. 솔로, 절대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채로 태어났기 때문에 구원이 됐든 하나님이 됐든 천국이 있든 전부 다 자기 위주입니다. 이 병을 고칠 수가 없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엔 그게 지금 복역 중인 거거든요. 교도소에 갇혀있는 거예요. 율법의 저주 안에 갇혀있는 모양새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찾아가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려면 주님께서 어지간히도 고생을 많이 해야 합니다.
태어나면서 자기밖에 모르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그 믿음 소망 사랑, 그 모든 것은 자기에게로 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전도하면 상대방이 다 듣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하나님 불러줘. 하나님 보여줘. 그러면 내가 믿겠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누가복음 24장에서 하나님이 오셨잖아요. 구원받지 못한 강도 옆에 하나님 오셨잖아요. 강도가 보기에 그 오신 예수님은 전~혀 구원자답지 못해요. 하나님답지 못해요. 세상에 저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용납 못 해요. 이해해 주거나 받아줄 사람 없습니다. 왜? 지금 자기 처지가 몰락하고 있는 처지기 때문에요.
그래서 조건이 뭐냐 하면 “당신이 내 처지에서 나를 구원해 준다면 그제야 나는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나서는 거예요. 그래서 땡! 탈락이라고요.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어요. 그런데 잃어버린 양들 다시 말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양인데 주께서 찾아와서 건져준 사람 같으면 ‘내가 뭘 믿고 싶은지’에서 떠나요.
거기서 떠나서 ‘무엇이 사실인가?’를 봅니다. 벌써 안목이 협소한 안목이 아니죠? 전체 안목이 한꺼번에 확 다가오죠? 빌립보서 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까 교독문 할 때 잠시 나왔는데요, 2장 8-9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다음 10절을 보세요.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여기 보면 ‘땅 아래 있는 자들’ 인간은 죽어도 주님 품 안에서 빼도 박도 못한다는 거예요. 죽어도, 그래서 땅 아래 묻혀도 결국 주의 이름에 무릎을 꿇을 때가 온다는 거예요.
이것은 사실의 문제에요. 이것은 살아있으면서 뭘 믿고 뭘 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전체 다 에요, 전체, 다! 내가 태어나서 이 땅에 살다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전체를 한꺼번에 다 알아버리면, 다 봐버리면 어느 경우라도 주님의 통치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뭐가 되느냐? 나에게서 떠나는 게 돼요. 나에게서 떠나는 거예요.
아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 그런데 그 질문이 사실은 전도하는 그 사람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서 한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부터가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에요.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자요, 우리의 인도자라면….”
여기서 ‘인도자’라는 것은 하나님이 붙여준 인도자를 말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인도하는 방식이에요, “하나님이 인도자라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제 앞에 소환시킬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질문을 짧게 하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어떻게 제 앞에 등장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 그것을 남들한테 듣지 마시고 우리가 평소에 수시로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해댔습니까?
많이 했거든요. 그걸 차마 남한테 말은 못 하죠. ‘아직도 하나님 안 믿는구만.’ 하고 비아냥 댈까봐 말은 안 하지만 ‘하나님이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어떻게 내가 확인할 수 있습니까? 확인만 된다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놓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확인이 안 되니까 긴가민가하고,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가 불안하니까 내 정서도 같이 불안해지고, 내 믿음도 같이 흔들리고, 내 인생 전체가 불안정해서 견딜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어서 나타나 주소서.’
그 질문에 대한 답변 들어갑니다. 요한복음 4장 49-54절까지 보면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협소한 관점을 갖고 있던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와서 안수하든지 해서 병을 낫게 하신다면, 우리 집에 오셔서 주의 손을 얹어 병을 낫게 한 그 시점에, 그 시간에 내 아이는 낫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왕의 신하가 이미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 자기를 캡슐처럼 둘둘 감아서 “주님이여, 주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내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납득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라고 요청을 했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그 요청을 거부합니다.
“그냥 가, 그냥 가! 그냥 가라고!” 그래서 진짜 그냥 갔는데 그 신하의 아들 병이 나았어요. 나았을 때 그 아비가 말하기를, 자신 기존의 시공간을 벗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때, 내가 확인을 하지 않았어도 이미 내 아들의 병이 나았다.’
그렇다면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 주님을 보여주세요.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하는 게 뭐가 문제냐? 나라는 이 존재가 주님이 하시는 모든 우주의 일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내 협소한 관점이 주의 은혜와 사랑을 가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관건이 뭐냐? 어떻게 나의 구원은 소멸되고 우리의 구원으로 전환되는가? 지금 그 이야기거든요. ‘나’의 구원은 없습니다. ‘우리’ 구원이에요. 그런데 그 ‘우리’ 구원을 지금 누가 막아요? 태어날 때부터 나밖에 모르는 나 위주, 나밖에 모르는 내 생각이 지금 방해가 되잖아요.
‘나’라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주께서 찾아오실 때 어떻게 찾아오느냐 하면 “아이고, 잃어버린 양이 여기 있었네.” 잃어버린 양의 관점으로 찾아오는 거예요.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나 어떤 인간도 죽을 때까지 ‘나’를 안고 갑니다. 심지어 치매 걸려도 그 나를 안고 가요.
그래서 나는 나에게 잃어버린 게 아닌데, 주님 보시기에는 잃어버린 게 돼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주님 사랑이란, 애초에 주님 건데 이걸 내 거라고 우길 때 주님입장에서는 주님의 자기 것 찾으러 오는 거예요. “내 거 여기 있네? 잃어버린 사랑이 여기 있네!” 이렇게 찾는 겁니다.
관점이, 구원이라는 관점이 이토록 달라요. 우리는 ‘내 인생은 때려 죽어도 내 겁니다.’라는 게 우리의 고집입니다. 주님은 “내 생명 여기 있네!” 찾으러 오니까 “어? 내 인생 내 건데?” 이렇게 앙탈을 부리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이게 어디서 앙탈을 부려? 안 놔?” 그리고 우리를 때려주겠죠. 그 때려주는 그걸 가지고 ‘돕는 자’라고 하는 거예요.
설명보다도 예수님께서 실제 하신 일을 보게 되면 훨씬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실 거예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제자들과 잠시 헤어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끝났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서 고기 잡으러 간 그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와요. 세 번째 찾아옵니다. 찾아오면서 뭐라고 하냐면 14절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시간과 공간 의식은 뭐냐? 이미 죽은 자는 자기가 관여할 필요 없고, 자기는 산 자 쪽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 입장, 주님의 시공간에서는 주님이 살아있는 그 부활의 세계에 잃어버린 자기의 제자들을 강제로 데려와야 해요.
데려오기 위해서 세 번째 찾아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나와요. 여기 ‘사랑’이 나옵니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럴 때 베드로가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주님이 아시잖아요. 주님이 십자가 지실 때 제가 도망쳤던 걸 주님이 뻔히 아시고, 주님을 배신하는 것 주님께서 벌써 다 아시고 계시잖아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어떤 여력도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 꿰뚫어 보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뭐냐? “이제부터 내가 주님 사랑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함으로써 구원한다는 것, 그걸 제가 고백합니다.”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주께서 “그게 양이야, 그게 양이라고!” 그래서 “이제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의 일을 누가 방해합니까? 우리 인간이 방해하는 거예요, 주의 일을! 그래 놓고 우리는 ‘우리’ 구원이라는 개념이 없고 ‘나’만 구원받고 천당 가면 된다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인데 그 ‘우리’가 성립이 안 돼요. ‘나’의 아버지가 돼버려요, 나의 아버지가.
그런데 인생이라는 그 자체가 꼬여도 보통 꼬이는 게 아닙니다. 2016년도에 미국에서 희한한 발명품이 하나 나왔는데요, 주세로(Juicero)라는 회사에서 만든 ‘주세로’라는 이 발명품은 1, 400억을 투자해서 개발한 발명품입니다. ‘고기만 먹으면 온갖 질병이 다 생기니까 야채를 먹고 건강합시다.’ 그런 취지로 채식주의 운동을 하는 그 사람이 1, 400억을 투자해서 기계를 만든 겁니다.
채소를 먹으라고 권장해도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 이유가, 다들 너무 번잡스럽게 여기니까 ‘나만 건강하면 되겠어? 다른 사람도 건강해야지.’ 해서 ‘옳지 기계를 만들자.’ 그렇게 된 겁니다. 기계를 어떻게 사용하도록 만들었는가?
펄프화 된 과일과 야채가 혼합되어 있는 프레스용 생산 팩을 따로 만들었어요. 그걸 프레스에 물려서 4톤 압력으로 짜내는 방식입니다. 그런 기계를 만드는데 우주 항공 등급의 알루미늄과 그리고 온갖 첨단 기술을 장착했습니다. 그리고 위생이나 안전상의 이유로 회사 전용 팩 말고 다른 팩을 사용할 수 없게끔 팩에다 QR 코드를 부착시켰습니다. 그 기계를 출시했을 때 한 대 가격이 약 70만 원쯤 됩니다. 주세로라는 그 주스 프레스를 사용하면 매일 같이 신선한 야채즙이 컵에 담겨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유튜버가 이게 아무래도 말이 안 된다 싶어서 그 팩을 사서 손으로 짜봤어요. 짜보니까 1분 30초 만에 컵에 담겼습니다. 1분 30초면 될 것을 기계에 물려서 짠다고 2분 동안 모터 돌아가는 소리 들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손으로 짜면 시간도 30초나 절약이 돼요. “이게 사기다”라고 하니까 “그것은 손의 악력이 센 사람이 했을 것이다.” 한 거예요.
그래서 그 유튜브가 어린애가 짜는 것, 또 노인이 짜는 것을 보여줘서 그 회사가 창업 만 16개월 만에 망했어요. 여러분, 구원받는 거요? 피로 구원받아요. 희한한 첨단 기술이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피 값으로 구원받아요. 여러분,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 피 값으로 구원받는 데 성경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뭘 하라는 명령들,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그러한 잔소리 같은 많은 성경 구절이 나오잖아요.
그게 뭐냐? 피로 구원받는 이유가,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그 타고난 죄에서 벗어날 위인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인간의 죄 중에 뭐가 죄냐? 법을 지키려고 하는 게 죄예요, 법을 지키는 게.
카프카(Franz Kafka, 1983-1924)라는 소설가의 『만리장성의 축조 때』라는 책에 보게 되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중국의 황제가 칙령을 칙사한테 넘겨서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그 현장 인부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그 장면을 묘사한 거예요.
「…칙사는 곧 길을 떠났다. 그는 여전히 궁전의 가장 안쪽 방들만을 통과할 뿐이며 결코 그 끝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가 성공한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서 스스로 싸워야 된다. 그런데 계단 궁전을 지나면 두 번째 외곽 궁전, 또다시 계단과 궁전, 또다시 궁전…, 이렇게 수천 년 지나도 궁전의 밖에 못 넘어간다. 따라서 왕의 칙령은 만리장성 현장에 있는 인부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이런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내용이냐? 성경 말씀을 바리새인처럼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여기에 우주 항공 첨단 기술 같은 온갖 윤리도덕적 테크닉들을 다 동원시키고,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양심까지 다동원시키고, 어떤 걸 집어넣어도 예수님의 피, 그 피로 구원받는 걸 대신할 수 없다는 그 말입니다.
교회라는 걸 동원하고, 종교라는 걸 동원하고, 신학을 동원해도! 왜냐?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 잘 알아요. 주님은 인간을 알거든요. “예수여, 나를 구원해 주면 내가 당신 믿어줄게.” 이런 인간은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는가? 옆에 있는 강도로 한번 가보세요. 옆에 있는 강도는 뭐였습니까?
내가 강도질해서 지금 죽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죽어서 태어났다는 거예요. 죽음 자체로, 죽음을 팩으로 삼아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이제야, 강도질하다 잡혀서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내 피는 소용없어요. 내 피는 소용없고 저 주님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을 수가 있습니다. 이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걸 돕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뭘 하셨는가? 그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주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일단 인간은 교도소에서 출생하게 만듭니다. ‘복역의 때’니까요. 교도소에서 출생하게 되면 그 교도소에 누가 있느냐? 교도소에 감독관들이 있어요. 간수들이 있죠. 그 간수들이 천사들이에요. 또 여기에 또 변호사가 있어요.
그게 요한복음 16장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2-14절에 보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십자가 지기 전에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성령이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그 이야기가 뭐냐? 요한복음 16장 7-8절에 나옵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곧 ‘보혜사가 오게 되면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교도소 내에 천사까지 보내주시고, 거기다 친절하게 성령께서 또 오시고. 그러면 교도소장은 누구냐? 교도소장은 심판주가 되시죠. 교도소장은 우리 주님이 교도소장이에요.
이러한 장치는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내가 갇혀 있다는 것, 이 세상 자체에 갇혀 있다’는 의식을 이 천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갇혀있으면 그 갇혀있는 것에 대해서, 곧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지적한다는 말은 ‘너 계속 이 동네에 살면 안 돼!’라는 뜻이거든요.
아까 집사님 기도한 내용 그대로예요. 이 땅은 뭐냐?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에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1:1)이라 했거든요. 보이는 것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히 11:3)고 했어요.
그런데 감옥이 너무 넓다 보니까…, 이 감옥이 넓거든요. 사람들은 감옥에서도 그냥 안 지내요. 내년 2006년 6월에 무슨 일이 있냐면요, 월드컵 경기가 있습니다. 감옥은 감옥인데 손흥민이가 기다려져요. 월드컵 구경해야 하고요, 또 여러분 나름대로 곗돈 타는 날도 있을 거고요, 아직 시집 안 간 딸 시집도 가야 되고요. 아들도 지금 장가 안 갔잖아요. 아들 장가도 가야 되지, 그러면 아파트도 하나 사야지요.
지금 교도소라는 의식이 없고, 여기서 복역의 때를 보내고 있다는 의식이 없고요, 그냥 눌러앉을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행복하게. 그런데 거기서 오는 기쁨, 그 기쁨은 성경에서 말하는 기쁨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데 그렇게 지적한다는 것은 뭐다?
네가 잃어버려졌다는 사실, 그렇게 잃어졌는데 ‘잃어버렸다’라고 하시는 분이 그냥 찾아와서 자신의 피로 모든 것을, 그 잔존 가치를 피로써 해결했잖아요. 그 값, 하나님이 인정하는 값은 피밖에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값은 피밖에 없어요.
그러면 네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기쁨은 뭐냐? 협소한 안목에서 가지는 기쁨 말고, 율법을 뚫고 나간, 율법을 뚫고 그 위에 있는 사랑,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한 그 사랑’을 알고 기뻐해야 하겠죠.
그래서 빌립보서 4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성도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11-12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 비결이 뭐냐?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빠져나갈 수가 있느니라. ‘할 수 있다’는 말은 ‘빠져나가는 데 아무 지장 없다.’ 피의 능력으로 ‘나’가 제거되어야 ‘우리’가 나오거든요. 내가 제거 안 되면 나만 남아요. 주께서, 성령께서 “때찌!” 해서…, ‘때찌’ 정도 같으면 괜찮은데 좀 심해요.
“때찌!” 해서 ‘너는 너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과 우리로 같이 살자. 그것 때문에 너에게 이런 고되고 힘든 인생을 살게 했다. 너는 네가 파괴 못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네 죄 사함을 통해서 너 파괴될 거야. 허세, 행복한 척하는 거 파괴될 거야.’ 그러나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라는 거예요.
끝으로 로마서 8장 읽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우리’가 어떻게 기쁨이 되는지 나옵니다. 로마서 8장 15-18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여기 ‘우리’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여기 ‘우리’에 예수님 포함됩니다. 맡아들이니까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이 세상의)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천국의)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으로 우리의 내부가 이 말씀으로 교체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들어갈 자리에 나의 고집과 허세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잘 모르고 있는 입장에서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말씀으로 지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지적을 통해서 복역의 때가 이미 끝났다는 것, 이제는 빠져나갈 일만 남았다는 그 기쁨이 높은 안목에서, 전체 안목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그 자체를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