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점멸등
2025년 12월 1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8-9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13: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동일하심은 인간의 동일하심과 다릅니다. 인간들은 최종 자기만을 위해 사는 동일함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죄의 위세가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난 겁니다. 인간이 바르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결과물에 대한 집착이 대단합니다. 헤어나올 기색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서 태어나고 자기 안에서 죽습니다. 사나 죽으나 자기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이것을 종교로 덮고자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건전해보이는 식생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대체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다른 교훈’은 무엇일까요?
다른 교훈이란 ‘신의 존재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을 정립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다 내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계시다‘는 의식입니다. 이는 신의 존재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가 있기에 자신의 몸과 자신의 마음은 절대적인 전능자로부터 주어졌음을 전제로 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압니다.(롬 1:21) 문제는 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근원적으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따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을 받은 분을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인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즉 그 어느 인간이라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오로지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0-11)
그래서 하나님 일의 일관성도 동일성도 오로지 예수님만이 보여주시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사건과 사건으로 덮혀져 있습니다. 그 모든 사건들은 다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 성취와 연계되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동시에 구원될 자격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알고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될 자는 오로지 인간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서 찾아가심으로만 성립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7-40)
이 두 가지점, ㉮모든 것은 십자가 사건 중심과 ㉯구원될 자는 찾아가심으로만 성립한다는 사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이제 남은 것은 인간의 모든 존재를 사건으로 전환시키는 일입니다.
끝까지 사건됨을 거부하고 자기 존재를 붙들고 있는 대표자가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사단’입니다.(요 6:70) 사단의 복제물인 인간들이 이 사단의 정신으로 품고 태어났기에 평생을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끝까지 안고 갈거야” 혹은 “나 외의 존재의 손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내 손으로 내 인생을 끝낼거야” 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늘 사단의 다음과 같은 음성을 내부로부터 듣게 됩니다. “에게, 이게 뭐냐? 왜 내 인생이 이것 밖에 안 돼? 나의 절제와 나의 집중력과 내가 나에게 바친 혼신의 노력의 집대성은 나의 의는 어떻게 되는거야?”라고 말입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보편성은 사단의 뜻과 관련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 인물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욥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 내의 유일한 상대자인 사단과의 대화의 결과가 인간 세계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를 보인 인물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욥은 자신의 출생을 원망했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괜히 태어났다는 식으로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욥 3:11/6:4/7:16) 하지만 하나님은 그 원망한 욥을 그 시대의 메시야로 만들어주므로서 악마가 끝까지 욥을 자기 손아귀에 놓이지 않고 거기서 빼내어주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욥 42:8)
오늘날 성도도 욥처럼 일방적으로 사건으로 찾아와 이 존재의 세계에서 빼내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완충 공간을 두십니다. 즉 그동안 세상에 보고 왔던 그 안목 자체에 변화를 주시는 겁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막 8:22-25)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 같은 사물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 있음의 세계로 옮겨 놓으려면 거기에 합당한 새로운 안목으로 장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안목이 바로 데살로니가 5:10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인간의 몸은 늙어도 자아는 한결같이 늙지 않습니다. 악마 성격의 동질성이며 여기서 인간들은 십자가 사건 중심의 동질성을 외면서 자기 위주의 동질성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자기 백성 안에 집어넣으셔서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건과 사건의 연결성으로 성립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는 더는 존재가 아니라 육과 영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깜박이는 완충 공간으로 지나가면서 천국에 가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친히 통과하신 이 세상을 이제 주님과 더불어 이곳을 통과하면서 주님의 잔과 세례를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7강-히브리서 13장 8-9절(복음의 점멸등) 251214-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8-9절입니다.
히브리서 13:8-9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Do not be misled by varied and strange teachings; for it is good for the heart to be strengthened by grace, not by foods, through which those who were so occupied were not benefited.(NASB)
Do not be carried away by all kinds of strange teachings. It is good for our hearts to be strengthened by grace, not by eating ceremonial foods, which is of no benefit to those who do so.(NIV)
음식에 관한 여러 가지 이상한 교훈에 속지 마십시오. 음식에 관한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은총으로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음식에 관한 규정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이득을 본 일은 없습니다.(공동번역)
예수 그리스도의 한결같은, 일관된, 이미 확정이 된 주님의 원칙과는 다른 원칙을 내세우는 것이 여기서는 ‘다른 교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훈 중에서 하나의 특징을 소개하는데 ‘아름다운 식물’ 곧 자기가 자기관리 하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내용과 충돌된다는 거예요. 내 쪽에서 행한 것은 하나님의 일관성에서 나오는 은혜와 같지 않다는 겁니다. 그 성격이 다르다는 거지요.
은혜를 모르니까, 주님의 일관성을 모르니까 다른 교훈에 끌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이 세상 속을 지금 우리 성도들이 맞이하고 또 통과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다른 교훈이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관성, 주님의 일관성에 비해서 본인 자기만의 일관성을 고집하는 것, 관철하는 것, 이게 바로 다른 교훈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다른 교훈이냐, 진짜 교훈이냐?’를 알려면 오늘 말씀대로 8절부터 봐야 하죠.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라는 그 근거,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알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가, 특히 신약 성경 전체의 무엇에 관심을 둬야 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관심을 둬야 하는 거예요.
로마서 1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평소에 인간들은 교회를 다니나 안 다니나, 종교를 가지나 안 가지나 상관없이 하나님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일관성, 하나님의 동일성, 하나님이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전제로 해서 자기자신의 몸가짐이나 마음가짐을 정립하려고 그렇게 살아왔던 겁니다.
하나님은 일관되다, 하나님은 동일하시다. 이것은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들이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일관된 마음을 가져와서 “우리도 일관되게 살면 되잖아.”라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교훈에 해당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중간에 뭘 뺐어요. 뭔가 빠진 게 있어요. ‘하나님 존재하시고 나 여기 존재한다, 나 여기 있다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느냐? 그걸로 모든 종교를 대체하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개입됨으로써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른 교훈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이 본문에서 함축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성경 전체가 이걸 함축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 게 뭐가 나쁘냐?” 여기에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빼느냐?” 이렇게 반박이 가능한 겁니다. 하나님 잘 믿는 사람들, 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그대로 ‘마음가짐을 차분하게 하고 양심대로 바르게 살려고, 윤리·도덕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 이게 뭐가 나쁘냐?’ 하는 식으로 사람들은 자체적인 점검을 수시로 하고 있어요. 자기 감찰이죠.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늘 감찰하는 거예요. ‘네가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아. 똑바로 해!’라고 본인이 본인에게 늘 평점을 내리고, 채점하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라는 분이 진짜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이렇게 합니다.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왜? 하나님은 내 아버지거든. 내 아버지인데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도 아니면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게 잘못이다. 진짜 아버지를 아는 것은 나뿐이기 때문에 너희가 진짜 하나님을 알고 싶으면 날 믿어라. 나 있는 곳에 아버지도 계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10-11).
내가 하는 일을 믿어야 그때 아버지를 믿는다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출발점이 예수님과 맞닥뜨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중심주의’에서 뭘 로 바뀌는가 하면, ‘예수 중심주의’로 바뀌는 거예요. 예수 중심주의로 바뀐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 중심’으로 세상을 다시 보는 안목을 갖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사도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하면서 그들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지를 꿰뚫어 보며 이야기했어요. “너희들의 모든 시인과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신의 소생이라고 이야기했다. 너희의 출발점은 그것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다. 이게 잘못됐어? 맞는 말이잖아.’ 이것부터 너희는 출발했다.”
그런데 사도행전 14장 15절에 보면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너희들은 헛살았다. 헛되다.’ 헛살았다고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상당히 힘든 인생을 살 수밖에 없죠. 모든 사람이 맞다고 하는 그것을 사도 바울은 뒤엎습니다. “모든 인간은 틀렸다.” 이것은 뭐 사람들을 끌어모으겠다는 건지 아니면 사람을 쫓아내겠다는 건지, 인간의 의식에서는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예요.
다 아는 이야기에 내용만 하나 더 추가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목회 성공하는 거 아니겠어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왜 다 아는 이야기, 그 바탕 자체가,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굳이 윽박질러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여기서 사도 바울이나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일관성, 하나님의 한결같음, 하나님의 동일성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일성을 넣습니다. 예수님의 동일성은 존재가 아니고 똑같은 일, 동일한 사건을 이 땅에서 벌여 왔다는 것, 벌여 왔는데 너희는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예수님 중심으로 볼 줄 모르고 하나님 중심으로 봤기 때문에 얼추 본인들은 자신 있게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제가 미리 오늘 본문을 한번 정리를 해봤어요. 딱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이 아니고 전체 모든 성경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일은 주님께서 홀로 일으키신 결과입니다. 첫 번째, 모든 일은 주님께서 홀로 일으킨 결과물이다. 이게 신약에 와서 밝혀지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잡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일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일으킨 일이다.’ 이게 구약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이나 구약이나 이건 없어요.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셨다.’ 그건 없어요. 이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예요. 인간들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고요, 악마가 인간을 앞장세워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라고 부추겼던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이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집어넣은 양심이라는 것, 하나님이 빛이라는 것을 가지고 차분하게 양심대로 살면 우리는 천국 간다, 좋은 세상 간다.’ 이게 배후에서 악마가 작동하는 모든 인간의 일관됨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은 이래요. “너희들만 나를 아는데 너희들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겠다. 따라서 모든 세상일은 언약이 언약대로 되기 위해서 벌어져야 할 일들의 집합체가 이 세상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이방 민족에겐 생뚱맞는 이야기가 됩니다. 일단 이방인들은 언약을 몰라요. 이방인들은 양심은 알아요. 양심은 알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바르게 사는 것이 유리하다는 그것은 아는데 언약을 몰라요.
왜? 모세를 모르니까요. 모세 율법을 모르니까 언약을 몰라요. 인간이 하나님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를 몰라요. 바르게 살면 만날 수 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 민족적이에요. 이스라엘적이 아니에요. 두 번째가, ‘구원은 아무도 받을 수 없다.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어서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서 건져낸다.’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 이름으로, 주의 이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이름 중심으로, 언약 중심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는,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이미 모든 인간은 구원될 수 있는 역량이나 가치가 전혀 없다. 따라서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서 건질 자만 그냥 데려가는 식이다. 이 두 가지가 오늘 나타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방금 이야기 한 두 번째 이야기를 요한복음 6장 37~39절 이렇게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다. 구원에 실패가 없다는 거예요. ‘아, 내가 죄지으면 구원에 실패할 거야.’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내가 죄지었다고 구원이 안 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은 죄짓는다는 게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죄짓는 게 없어요. 인간이 죄짓는다는 것은 아직도 선악 체계, 윤리와 도덕 체계 때문에, ‘죄짓는 경우가 있고, 죄짓지 않는 경우가 있다’라고 본인이 그렇게 채점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인간은 죄지을 수가 없어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죄 밖에는 나올 게 없기 때문에. 주제넘게 착하지 마세요. 착함에 오버하지 마세요. 인간은 착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착한 적이 없기 때문에, 착한 적이 없다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면 더 이상 악마의 협박 공갈에 넘어갈 필요가 없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계획을 수립한 분에 대해서 그걸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아들인 예수님 본인인데 난 그 실천에서 실패할 수가 없다, 성공한다’고 하는 거예요.
38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 아버지 뜻’을 행한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아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게 아니고 나만 아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뜻에 대해서 너희는 모르고 예수님 나만 안다는 거예요.
나만 아는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왔는데 그 뜻은 뭐냐?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1999)에 보면 스미스라는 악당이 등장해요. 이게 기계에요. 컴퓨터의 정보인데 이게 현실화가 되면 스미스가 돼요. 영화 본 사람은 알겠지요. 검은 선글라스 쓰고, 싸움도 잘하고요, 신사복 빼입고 다니는데 정식 명칭이 에이전트 스미스죠. 그 영화에 보면 스미스가 인간을 괴롭히게 되어 있어요.
그 영화에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교훈이 뭐냐? 인간을 괴롭히는 이게 악마라는 거예요. 그 영화는 잘못됐습니다. 악마는 인간을 괴롭히는 게 아니에요. 주님을 괴롭혀요. 인간은 거기서 빠집니다. 악마는 인간과 한패에요. 인간을 괴롭힐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격려하죠. 인간을 격려하는 것, 이게 다른 교훈이에요. 다른 교훈은 인간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 인간 세계에서 말고 성경에서입니다, 인간 세계 말고 성경에서 진짜 악마의 정체를 드러내는 데 동원되는 자가 등장하는데 그게 욥기에 나오는 욥입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과 악마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그 계약이, 약속이 지상의 인간에게 도달될 때 인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반영해 주는 책이 욥기에요.
욥에게 일어난 일은 욥에게서 원인을 찾지 마세요. 나쁜 짓을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고, 욥과 무관한, 욥이 배제된 상태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의 결과로써 일어난 일이 욥기의 이야기입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욥기 3장 1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괜히 태어났어요. 욥이 말합니다. “괜히 태어났어!”
이걸 제가 실감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마취를 했는데 환자의 의식이 약간 남아있는 상태에서 의사가 들어와 수술 부위를 결정합니다. 환자가 누워있으면서 의사가 하는 말을 약간 알아들어요. 의사가 “다리를 다 잘라야 하지 않을까? 다리를 다 자르면 좋겠는데 그냥 정강이 밑으로 자르지?”
수술하는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의식이 약간 남아있는 환자가 침대에 누워서 듣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기 몸인 줄 알았는데 자기 몸의 다리를 다 자를 거냐, 정강이 밑으로 자를 거냐에 대해서 자기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습니다. 욥이 이걸 알았어요.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인생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했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습니다”라고 욥이 3장 1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탄과 하나님과의 내기에 연계된 자의 아주 대표적 사례로서 욥이 이 세상에 등장하는 거예요. 욥기 6장 4절에 보면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지금 욥은 사탄은 모르고요, 하나님만 열심히 그동안 충실하게 믿어왔기 때문에 지금 자기에게 육체의 아픔이 있으니까 이것을 두고 ‘하나님의 독이 내 살갗에 도달했다’고 이렇게 자기 형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욥기 7장 16절에 보면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욥기에서 아주 도발적이고요, 반전의 반전이라고 할까요? 그 내용이 나옵니다. 사탄은 인간에 대해 아주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 손아귀에 있기 때문에 자기 손아귀를 벗어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께 “욥을 치면 욥은 하나님을 원망할 겁니다.” “원망할지 안 할지 한 번 내기 해보자” 해서 내기가 되었어요. 결과적으로 욥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누가 이겼느냐? 사탄이 하나님을 이긴 거예요. 사탄이 하나님을 이겼는데 사탄이 몰랐던 게 있어요. 원망한 욥을 하나님이 그 시대의 메시아로, 구원자로 만들어버렸어요. 이건 반전입니다.
인간의 선악 구조에서는 ‘나쁜 짓을 하면 천국에 못 간다’라는 것이 인간 세계의 상식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하나님께서 점찍어서 너를 네 친구들의 죄를 사하는 메시아의 기능을 맡겨서 구원해 버릴 때, 쫓아오던 악마가 “너는 못 벗어나. 벗어날 수 없어. 끝까지 나와 함께 가는 거야.” 했던 그 욥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귀의 소굴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게 오늘날 성도의 새로운 본질, 새로운 자아입니다. 성도의 새로운 모습이에요. 이건 반전이에요. 성도 본인이 생각했던 구원마저 뚫어버려요. 본인이 미리 짐작하고 예상했던 구원 방식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 벽마저 뚫려버려요. “넌 네가 구원될 줄 몰랐지? 네가 개발하고 성경을 통해 짐작했던 모든 구원 방식은 이미 사탄에 의해 벽이 되어 막혀 있다는 걸 미처 몰랐지. 그 벽을 네가 배제된 상태에서 내가 뚫어서 너로 하여금 내 백성 만들었다.”
어떻습니까? 인간이 상상했던 그 어떤 상상도 능가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아이고, 고맙습니다.”하고 집에 돌아갈 게 아니고, 도대체 ‘왜 이런 반전이 일어났고 우리가 예상했던 구원 방식마저도 왜 이게 마귀의 방식이며, 그 마귀 방식 안에 갇혀 있게 하는 게 아니라 그것마저 뚫는 능력이 내가 짐작한 내 쪽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제공되는 경로 그 절차가 무엇인지?’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살아있는 내가 보면 성경과는 다 반대가 됩니다. 그러나 죽어있는 내가 보면 모든 성경이 죽은 나와 합치가 되게 되어있어요. 우리는 아직까지 여전히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이상 우리는 쉬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혹시 내게 도움 될까, 유리할까를 계속해서 탐구합니다.
그 탐구하는 것을 주님은 역으로 어떻게 거부하고 다른 노선으로 우리를 데려가는가? 그 방식이 궁금해요? 중간에 완충 공간을 마련했어요. 그러니까 육의 인간이 영의 인간으로 통과하면서 중간에 하나 거치는 공간을 마련하는 겁니다. 주께서 그걸 마련해주셨거든요.
우리가 비행기 타면 갑자기 압력의 변화가 생길 때 귀가 먹먹하잖아요. 조금 있으면 적응이 되죠.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인간이 상상도 못 한 아버지의 세계, 언약 완성의 세계에서 오셔서 우리에게 말씀을 줘요. 우리의 위치는 육인데, 육이라는 것은 악마에게 포로 잡힌 상태, 그게 육입니다. 악마에게 포로 잡힌 상태가 육이에요.
콜롬비아에 마약 갱단이 있는데 갱단의 하수인으로 청소년들이 많이 가요. 심부름만 해 주면 돈 준다고 해서 철딱서니 없는 16살 애가 콜롬비아 마약 갱단에 들어갔어요. 걔가 복면을 쓰고 KBS 특파원과 이야기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을 16명 죽였습니다.”
아무리 철없는 애지만 겨우 16세인데 16명을 죽였대요. 그게 나쁜 짓인지를 본인 상식으로는 알죠. 사람 죽이는 게 나쁜 짓이라는 건 누구나 알아요. 알면서도 16명 죽이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그들을 죽여야 내가 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기 때문에.
인간은 나이 들어 늙잖아요. 인간은 늙어도요, 자아는 안 늙어요. 똑같아요. 유치원 애나 90 넘은 노인이나 자아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눔을 실천하자’라는 구호로 인사하는 그 유치원 애나, 나중에 90 먹은 요양병원의 치매 걸린 노인이나 그 자아는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어요. 똑같아요. 꼭 매트릭스의 스미스 같아요. 그 나쁜 역할의 스미스는 얼굴들이 다 똑같아요. 복제물이에요.
모든 인간은 악마 심성의 가현체로서 똑같아요. 형태는 다른데 자아는 똑같아요. 그 콜롬비아 애가 극악무도하잖아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도 악하죠. 하지만 악의 진짜 모습은 주님께서 자기 곁에 뒀습니다. 누구냐? 가룟 유다예요. 진짜 최후의 악은 가룟 유다입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귀의 종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걔는 마귀야.”라고 인간 중에서 가장 악마와 접근된 존재인 가룟 유다를 일부러 주님께서는 자기 제자로 심어 넣었어요.
악마의 인간을 통한 본모습, 본심을 가룟 유다가 대신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나는 당신 손에 죽기 싫어. 내 인생은 내가 끝낼 거야.” 달리 이야기하면 “내 인생은 내가 끝까지 안고 가.” 남이 나를 죽이고, 남이 나를 살리는 것은 내 본래의 원심적인 마음이 용납하지 않아요. 이게 악마의 진면목입니다. 진짜 모습이에요.
이쯤 되면 여러분들이 알아야 돼요.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되 십자가 사건은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 이제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음식물을 조정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이게 천주교잖아요. 이게 바로 천주교입니다.
천주교는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집단이에요. 가장 악마다워요. 가장 악마답습니다. 요새는 천주교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워요. 기독교도 똑같아요. 뭐냐? 종교로 구원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종교는 이미 악마가 접수하고 점령했기 때문에 더 이상 종교엔 구원이 없습니다.
최고의 악마가 가룟 유다라면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 책임지겠다.’ 이게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 자아 속에 심겨있기 때문에 자아는 유치원부터 90 되어 죽을 때까지 변화가 없어요. 악마가 변합니까? 우리는 악마의 복제물이에요. 스미스 같아요. 똑같은 본질의 얼굴들이고 똑같은 본질의 다양성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의 방법은 이거에요.
■내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잖아요? 그 양쪽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나의 존재를 주께서 말씀으로 토막 내 버리면 ■나는 뭐가 되느냐? 사건이 되는 겁니다. 연속적인 사건, 사건, 사건, 사건…, 따닥따닥 끊어진 사건이죠.
□지금 가룟 유다의 문제는 뭐냐? 자기가 끝까지 존재를 붙들고 있어서 존재가 사건화되지를 못했어요. 그게 가룟 유다의 문제입니다.
가룟 유다 말고 예를 들면 다른 제자들, 사도 바울을 포함한 다른 제자들은 뭐냐? 제자들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내가 말씀을 지켜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이 덮쳐 버려서 말씀의 우발성을 보여주는 그러한 인생을 나타내는 자들이 사도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하나님의 언약이, 복음이, 십자가 사건이 덮쳐 버리면 십자가 사건은, 이건 사건이거든요, 사건이기 때문에 존재의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늘 상 사건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 제가 두 가지 전제를 이렇게 했거든요. 모든 사건은 주님이 일으킨다고 했잖아요. 모든 사건은 주님이 일으킨다. 그걸 여러분들이 잘못 받아들이면 이렇게 돼요. ‘모든 있는 존재는 다 하나님 때문에 있는 존재다.’ 이렇게 이해를 하셨다면 수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일어난 현실은 사건화되어서 일어나는 거예요. 소유 대상이 아니란 말이죠.
아까 기도 내용 중에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내용을 기도에 넣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여기 ‘경고하심을 받았다’고 하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게 믿음이에요. 나를 기쁘게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세상에 주신 것은 사건이었습니다. 무슨 사건? 홍수 사건. 무슨 사건? 에녹 사건. 그 뒤에 무슨 사건?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는 사건. 사건, 사건, 사건…, 매일 같이 일어나는 사건, 그 사건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그 사건이 경고용으로 주신 사건인 것을 내 마음에 담아버리면 사건이 인격화된 그 실체가 신앙인이 되는 거예요. 신앙인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경고, 경고가 들어있어요. 삐! 삐! 삐! 경고음 있죠?
경고음이 되려면…, 좀 어려워서 제가 뜸을 들이고 있습니다. 경고음이 되려면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상황이 엎치락뒤치락할 때만 경고음이 발생됩니다. 애들 놀이터에 시소 있잖아요? 시소가 영어에서 나온 거예요. ‘see’에서 ‘saw’, 보인다, 봤다, 보인다, 봤다, 이렇게 시소를 타면 상대방이 ‘있네?’ 또 ‘없네?’ ‘있네?’ ‘없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정답은 뭐냐? 본인이 여기 ‘있다’ 또 ‘없다’의 그 본인은 볼 줄 모르고 상대방을 보면서 ‘있네?’ ‘어, 없어졌네?’를 보고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내 중심이니까, 내가 있다가 없어지고, 또 있다가 없어진다는 걸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내 중심이기 때문에 어제의 내가 있으니까 오늘 내가 있다고 하지만, 이러면 사건화 되지가 않아요.
사건화되지 않으면 존재를 토막 내는 주님의 언약 사건이 삽입되어 있지 않은 바가 돼요. 이것은 다른 교훈입니다. 내가 존재로 있으려면 어제 있는 존재를 오늘 천국 보내기 위해서 내 쪽에서 어떤 좋은 음식을 가려서 먹는다든지, 곧 ‘어제 있던 존재가 오늘의 존재가 되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일을 행해서 내일 천국 가기 위해 나에게 어떤 작업을 걸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이건 하나님 중심주의에요. 종교 중심주의에요.
종교 중심주의는 모든 의미가 나에게 소환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 가는 게 아닙니다. 역시 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나 좋으라고! 토막 나지 않은 덩어리라는 나, 나 좋으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가룟 유다에 숨겨진 악마의 본심이에요.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책임져야 돼. 하나님 섬겨야지! 말씀 지켜야지! 바르게 살아야지! 너 바르게 안 살면 너만 손해야.’
지금 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꿔 준다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바꿔주는 게 아니고 우리의 본래 모습을 들춰내 줘요. 아담에 속했다고. 처음 존재, 아담의 존재가 사건화되어서 언약에 의해서 계속 내려와서 “너라는 건 없어. 너는 아담의 분신이고 아담의 복제물이야. 너는 아담에게 주신 저주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쯤에서 한 문장으로 정리해 봅시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욕은 내가 다 얻어먹었으니까 마지막 멸망과 저주, 심판은 내게 속했다”라는 거예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에서 뱀의 후손은 예수님만 노려요. 인간은 안 노려요. 예수님만 공격한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악마만 공격하면 돼요. 악마로부터 욕을 얻어먹었으니까 욕을 얻어먹은 당사자가 심판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예요. 그리고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이미 십자가 사건으로 다 이루었습니다. 십자가는 존재가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에요. 주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사건화시키는 일을 하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동일하고 한결같아요.
우리는 우리 존재의 한결같음을 고집하지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사건을 일관되게 하는 거예요, 사건을! 그리고 욕 얻어먹은 자만이 욕한 모든 세상을 저주하고 심판하는 데 최종 자격자고, 이미 그걸 실시했다는 것을 같이 거든 분이 계십니다. 거기에 동조하고 거든 분이 계신 데, 같이 거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니고요,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 보면 바로 성령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얻어먹으면 네가 복수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복수 해 줄게.’ ‘복수해 줄게’도 아니고 이미 복수는 끝났어요. 십자가 사건이 유일한 기준입니다.
존재가 기준이 아니고, “네가 내 존재를 건드려?” 이게 아니고, “네가 십자가 사건을 무효화시켜? 그걸 모독해? 그게 쓸데없다는 그 말이야? 그런 뜻이야?” 십자가 사건 때문에 우리가 매일 같이 반복해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그렇게 만들어요.
말씀이 우위고 우리는 거기서 서브(sub)에요. 보조라니까요, 말씀의 보조. 말씀을 지켜서 지킨 자가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말씀이 사건화된 그 사건에서 우리가 사건의 증인으로서 거기에 동원된 거예요.
욥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돈 벌고 살기 바쁜데 언제 욥기 봤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시간에 욥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욥이 친구들 본때 보이려고 고난받았습니까? 그런 건 없어요.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나봇이 아합 왕 믿음 없다고 본때를 보이겠다고 일부러 땅 안 팔고, 그런 것은 없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았을 뿐인데 문제는 사건이 온 거예요, 사건이! 그 사건을 위해서 한쪽은 가해자가 필요했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가해자는 아합왕이 되었고, 피해자는 나봇이라는 그 포도원 지기가 된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도가 꼭 이런 상황 속에 지금 놓여 있는 거예요. 욥도 마찬가지고요. 욥이 얼마나 하나님께 원망하고 대듭니까? “왜 저를 괜히 태어나게 했습니까? 차라리 죽이소서”(욥 3:11). 그런 이야기예요. 그 이야기는 뭐냐? 여전히 존재죠. 존재인데 주님께서 폭풍 가운데 이야기하면서 “네게 누락된 게 있다. 네가 너에 대해서, 또 세상에 대해서 안다고 하지만 내가 질문할 테니까 답변해 봐라” 해서 질문하니까 답변을 하나도 못 해요.
“그거 봐. 누락 됐잖아. 전체를 모르면서 나 의롭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집이 있어? 네가 전체를 모르면서 무조건, 무조건 나는 의롭고 착하다? 이런 건 억지지!” 이것은 어거지죠. 그건 말도 안 되는 어거지에요.
이 사건은 황무지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에 비가 내리듯이 욥한테 은혜의 비가 내린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욥에게 고난이라는 축복의 비를 내리니까 비로소 욥은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게 되는 은혜를 받은 거예요. ‘아하, 내가 살아온 것이 아니고 나를 살게 하시는 사건이 장차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돼 있다’는 거예요.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죽었다’(롬 5:12). 그래서 이제는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부활함으로써 그 부활의 능력, 은혜가 주어지면 살 사람만 산다’(롬 5:15). 이것과 연계돼 있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건으로 이해해야 돼요. 복음은 소유용이 아닙니다. 사건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 사건에 우리가 널뛰기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이걸 널뛰기라 하지 않고 ‘깜빡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점멸하는 것, 늘 육과 영은 대비되는 가운데서 중간 공간을 통과하죠. 중간 공간을 통과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천국이라는 게 너무나 예상 밖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 그냥 적응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육에서 중간 과정 거치고 영의 나라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 중간 과정에 대해서 성경에서 유일하게 소개돼 있는 대목이 바로 마가복음 8장 18~25절까지입니다. 길지요. 그래서 18~24절까지는 간단하게 설명하고 24~25절까지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가복음 8장 18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라고 되어 있고요, 17절도 봅시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어떤 인간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걸 전제로 합시다. 그래서 오병이어, 그 떡에 대해서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어요.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 먹일 때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먹고 배불렀는데도 깨닫지를 못해요.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22~25절까지 나옵니다.
22절에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옵니다. 평소 같으면 주께서 소경에 안수하시고 “어때?” “눈 떴습니다.” “그래! 이제 눈 떴구나. 집에 가거라.”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느냐? 중간 과정이 없어요. 그런데 마가복음 8장 22~25절까지의 내용을 보게 되면 주께서 안수를 두 번 해요. 안수를 두 번 함으로써 첫 번째 안수와 두 번째 안수 사이에 완충 공간을 통과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캠핑하러 갈 때 준비할 게 여러 가지 있지 않습니까? 코펠이나 텐트는 기본이고, 심지어 판초 우비, 아이스박스, 머리에 쓰는 랜턴, 배터리 등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준비하는 걸 가만히 보면요, 다 어디서 갖고 가느냐? 기존에 자기가 집구석에서 하던 살림살이를 그쪽으로 간편하게 옮긴 것밖에 안 돼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 집에 있다가 캠핑을 가도 이것은 제대로 된 완충 공간이 아니에요. 이것은 뭐예요? 살던 그대로 그냥 살림살이 간추려서 야외에 가서 잠시 사는 거잖아요.
그러나 천국 가는 것은 캠핑장에 가는 그런 식이 아니에요. 인간 쪽에서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살아야 하잖아요. 뭘 준비하느냐 하는 거예요. 뭘 준비하느냐? 궁금하십니까? 제가 지금 두 번째 이야기하는데 지금 표정 보니까 궁금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천국 가기 위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 17, 18절이에요. 5.16, 5.17, 5.18, 전 이런 식으로 외웁니다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면 내 쪽에서 뭘 한단 말인가? 아니에요. 내 쪽에서 뭘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이것은 결과고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0절이 핵심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마중 나오시는 거예요. 마중 나오는 거, 마중 나오는 겁니다. 주께서 마중 나오는 거예요. 이 세상이라는 완충 공간을 통과하는데 그 마중 나오신 분이 어떤 분이냐 하면,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겪었던 분이 마중 나와요. 예수님이 마중 나와요,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 마중 나오는데 마가복음 10장 3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많이 들었던 이야기죠. 그런데 그다음 말을 여러분이 잘 기억 못할 수가 있어요.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나의 잔을 마셔야 해. 그리고 내가 받은 세례를 너희도 같이 받아야 해.’ 이게 바로 완충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말씀 사건이에요. 잔을 마신다? 쓴잔이겠죠. 뭔가 짐작 가죠. 그런데 ‘주께서 받은 세례를 같이 받는다.’ 이건 뭡니까?
주께서 받은 세례 받지 아니하고, 주께서 받으신 잔을 받지 아니하면 완충 공간을 통과하지 못한 걸로 쳐서 그 사람은 천국에 이르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교회를 다니시든지 할 수가 있는데요, 어떤 교회를 다닐 때 그 교회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마태복음 7장 22~23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라는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언급하는 교회가 있던가요?
있던가요? 막 열심 낸다고 난리도 아니잖아요. 열심을 내니 뭐 합니까? 주께서 “너 누구고? 나는 너 모른다.” “제가 금식했고요, 많은 돈을 헌금했고, 전도도 했습니다!” “내 기억에 없네. 너 누구지?” 주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중간의 완충 공간을 통과 안 해서 그래요.
완충 공간은 뭐냐?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막 8:22-25).
주께서 소경에게 안수를 해줬는데 안수를 받고 보니까 사람이 아니었어요. 뭐냐? 그냥 나무였습니다. 나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나무. 모든 인간 존재는 그냥 나무 같은 존재예요. 그 안목을 경유하고 난 뒤에 다시 안수해 주니까 사람으로 보였다 그 말이지요.
‘아, 사람은 개코도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를 포함해서, 본인을 포함해서 사람은 그냥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놀아나는 하나의 비품일 뿐이에요. 비품, 하나님의 물품에 지나지 않아요.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는 것. “다리를 다 자를까, 아니면 정강이 밑을 자를까?” 어디를 잘라도 우리는 관여할 수 없는 존재, 이게 사람입니다. 이게 본래 인간이에요.
인간은 한결같아요. 인간의 자아는 “다음에 잘할게!” 인간은 다음이 없습니다. 유치원부터 90까지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몸은 늙었지만 자아는 늙지를 않아요. 희한해요 하여튼, 이게 마귀 자아이기 때문에. 마귀 자아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세례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저기 있는 십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 십자가, 내 안에 들어온 십자가’예요. 내 안에 들어온 십자가. 저기 바깥에 있어서 내 믿음의 대상이 되는 십자가가 아니라, 내 안에 실제로 활동성을 보여주는 십자가. 매일 같이, 매일 같이 이미 다 이루어짐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해 주시는 거예요.
뭐를 증가하지요? 아까 본 데살로니가전서 5.16, 5.17, 5.18 다시 볼까요? 쉽게 말하면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 이제 설교 마지막 대목이니까 큰 거 하나 말씀드려야죠. 악마가 여러분 속에,
여러분 마음에 이렇게 이야기하면 악마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어렵지 않아요. 딱 6자입니다.
“애걔?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악마가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가 이거예요. “애걔? 이게 뭐야?” 다시 말해서 ‘내 인생 이게 뭐야, 내가 가진 게 이게 뭐야, 내 수입이 이게 뭐야, 내 몸이 왜 이게 뭐야?’ 감기까지 걸려서 ‘뭐야, 내 몸이?’ 항상 악마는 범사에 감사하는 걸 제일 싫어해요.
‘이게 뭐야? 내 마음에 안 들어! 차라리 날 죽여버리시지, 욥처럼! 열심히 했는데, 나의 절제력, 나의 집중력, 평생토록 내가 수고한 것, 그런데 그 대가가 애걔…’, ‘애걔’ 이게 들어가야 돼요. ‘애걔? 이게, 이게 뭐야? 아, 정말 실망스럽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주님이 주셨잖아요.’ 하는 고마움, 이거 우리가 유지할 수 없습니다. 유지할 수 없는데 우리가 등대지기 같아요. 우리의 육은 “애걔? 이게 뭐야?” 우리가 마귀의 복제물이니까 ‘이게 뭐야?’ 하다가 그다음에 뭡니까?
등대는 ‘깜빡깜빡’ 하니까 “비로소 내 진짜 찐 모습을 발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 내가 존재가 아니고 이미 다 이루어진 하나님의 동일성, 하나님의 일관성, ‘내 백성은 내가 잃어버리지 않는다, 는 그 일관성에 포함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감사, 그리고 3분 뒤에 ‘이게 뭐야?’ 다시 3분 후에 ‘감사합니다!’
이거 뭐 깜빡이도 아니고, 시소도 아니고, 늘 깜빡, 깜빡, 깜빡…, 감사할 때 ‘나’와의 작별이거든요. “어이! 이거(빨강 구두) 갖고 가야지!” 휙 던지고 그냥 가버리죠. “야이야이야이야! 굿, 굿바이~!” 기쁘죠.
교회는 캠핑장이에요. 자기와 자기가 작별한 자의 모임인데 ‘내가 당신한테 진짜 친절했는데 나한테 돌아온 건 뭐냐? 이게 뭐야?’ 맨날 회까닥하는 이 모습, 이게 뭐냐? 완충 공간,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런 시련과 시험을 다 통과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완성했음’, ‘죄 사했다’라는 것, 죄 사함을 끝냈다는 것, 주께서는 매일의 사건을 통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드러나도록 현장성을 주고서, 그 현장성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걸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이 주께서 홀로 하신 일인 것을 모르고 우리가 내 착함으로 거기에 끼어들려고 시건방지게 설쳤습니다. 마귀는 웃고 있고, 마귀는 우리의 그런 모습에 통쾌해하고 있는 것을 이제는 우리가 깨닫게 해 주시고, 주께서 기뻐하는 것, 주의 깜빡이의 경고하심이 우리 안에서까지 깜빡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