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도축 당하는 인생

아빠와 함께 2025. 12. 21. 19:41

도축 당하는 인생 

2025년 12월 2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3:10-11

13: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13: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이 세상에서 최종적인 의미는 ‘제단 위’ 뿐입니다. 단일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고정적입니다. 제단에서 제사 행위가 활성화되면서 이 세상에 없는 ‘의미 있는 것이 생산’됩니다. 여기에서만 천국에 들어갈 백성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바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입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제단의 활성화를 위하여 제물들이 얹어져야 하는데 이 제물은 율법으로 지정된 제물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을 배제하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즉 인간들은 본인이 ‘죽어 있다’는 의식이 없이 마땅히 살아 있다고 여깁니다. 인간들의 육신은 자기를 계속 ‘살아 있게’ 하기 위해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을 인정해주고 가치를 부여하는 타인을 찾아다닙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타인이란 자신이 화를 내거나 성깔 부려도 그것을 다 곱게 받아주고 위로해 줄 사람을 원하면 항상 자기 편들어주는 사람을 진정한 타인으로 인정합니다. 반면에 진정한 ‘이웃’으로 오신 분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외면받을 분이십니다.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왜 사람들은 진정한 이웃으로 오신 분을 외면할까요? 그것은 인간들 나름대로 독자적인 의미를 추구하고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은 결코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임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알지를 못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누구를 모릅니다.

하지만 성령 받은 성도는 비로소 압니다. 내가 생각한 나와 나의 원형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를 하나님께서는 제단에서 제사의 반복으로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최초의 인물 아벨은 형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이것은 아벨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의 운명과 동일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육체와 피를 분리시킵니다. 이는 곧 인간의 육체 안에서 ‘죽음’을 따로 뽑아내서 육체를 떼 놓는 것입니다. 그동안 죽음이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해 왔음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피, 곧 인간의 목숨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이는 인간들이 이미 뭘 해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27: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도서 9: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인간이 죽고 난 뒤의 시정을 감안할 때, 지금 살아 있다고 우기면서 하는 그 모든 활동도 죽음 후와 마찬가지로 의미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무의미하다고 단정지어진 이 세계에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들을 하겠다고 각가지 계획과 문명과 문화를 일으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가 있는 날 곧, 안식일을 통해서 나머지 날들의 잔여성을 부각하십니다.

즉 1일부터 6일부터 백날 열심히 해봤자, 그들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처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단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제단의 일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나와서 알려진 사항입니다. 율법과 피로서 하나님의 본심을 나타내십니다. “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이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5-8)


제단에 일단 피를 뿌리고 그 다음에 인간들에게 율법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인간에게 율법이란 마치 허공에다 말하는 소리 같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듣고 보아도 그 내용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의미란 오직 제사장이 제단에게 일한 모든 것이 제사장의 양식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통해서만 나타냅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흔드는 요제는 제사장 몫이 되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레 7:30) 높이 처드는 거제는 제물이 된 제사장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말합니다.(레 7:32) 레위 6:26과 7:6에서는 제사장이 제물을 먹습니다. 바로 이런 것은 마치 사극을 찍는 드라마에서 스텝(staff)들과 배우들이 다른 복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물이 진 밖으로 나가서 태워지는 것은 레위 16:27의 말씀입니다. 제물의 피를 다루는데 있소 피를 제사 사면에 뿌리는 것도 있고(레 1:5/3:8) 향단 뿔에 피를 바르는 것도 있습니다. (레 4:7) 피를 쏟는 것도 있습니다. (레 4:25,30) 피를 뺀 제물을 통째로 태우는 것도 있습니다. (레 1:9) 기름만 때로 붙 태우는 제사도 있습니다.(레 3:3-5)

따라서 원인은 한결같습니다. 있은 것을 없게 하시고 없는 것을 다시 있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동안 관계는 다 끊어내시고 그 끊어진 관계를 복음으로 잇게 하십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죽게 하시고 죽은 것을 다시 성령을 통해서 살게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들의 남은 생애는 오로지 무의미만 생산토록 하시는 겁니다.

더는 자기 자신을 지킬 게 없도록, 그리고 더는 분노할 필요가 없도록, 더는 자기 패거리 만들 필요가 없도록 말입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 와서 유일한 의미인 아기 예수와 연결되어 그들의 무의미를 통해 주님만이 유일한 의미로 드러난 것처럼 말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들도 이 세상에서 낯설고 이상한 존재로 취급받을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천국에 적합인 존재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의미 있는 생명인 피에 의해 엮여진 자만이 주님의 거룩만을 드러내는 새로운 제사장 나라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늘 아무 것도 아님을 유지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8강-히브리서 13장 10-11절(도축당하는 인생) 251221-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3장 10-11절입니다.

히브리서 13:10-11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제단’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어떠한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지정해 놓으신 단일성이 있다.’ 오직 하나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인간들의 모든 잡다한 생각은, 다양성을 생각하는 겁니다. 자신의 가치를 다양하게 가져가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매일 같이 선택하고, 또는 자기의 미래를 좋게하기 위해서 골라잡을 다양성을 추구합니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이유는, 자기가 일하고 노동하는 그 가치를 제대로 쳐 줄 사람, 그걸 인정해 줄 사람을 얻기 위한 겁니다.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확장시키고, 또 확정시키는 거지요. 이 세상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려고 그렇게 시도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이미 제단이라는 것, 제단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굳었어요. 그리고 그 제단에는 제물이 된 존재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제단에는 제물이 얹혀있고, 그 제물을 다루는 제사장이 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인간의 원형입니다. 인간의 육체와 피를 따로 구분해서 그 육체는 노동을 하게 된 육체인데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노동의 가치를 얻고자 노력하죠. 자기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매긴 것을 ‘가격’이라고 합니다. 월급 더 많이 주는 데가 어디냐, 내 돈벌이 더 되는 데가 어디냐, 지금보다 내 가치를 더 높인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이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생살이가 그거 말고 뭐 있습니까? 교회 나오고 안 나오고는 다 치우고, 도대체 사람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내 가치를 알아줄 사람 혹시 없어요?’ 그거 찾고 있잖아요. ‘돈으로 가격을 매겨 나에게 가치를 부여할 사람 어디 없습니까?’ 이거 찾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은, 같은 인간입니다, 인간들이에요.

결혼이라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찾고 여자가 남자를 찾는 거라고 알고 있잖아요. 그러나 제대로 보게 되면 사람이 찾는 것은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에요. 사람이 찾는 것은 타인인데 어떤 타인이냐? 내 성질내는 것 다 받아주고,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 그것만 찾아요, 그 타인을.

하나님께서, 인간이 그런 식으로 자기의 가치를 찾고 있다는 걸 뻔히 아셔요. 나의 의미를 내가 구축하기 위해서 만들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인위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인간의 육체와 피를 분리해 냅니다.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노동하고, 노동을 해서 자기 의미를 확정 지으려고 하는데, 그 육체 안에 있는 피, 그 피를 따로 분리해 내게 되면 그 피는 하나님께서 안 받는 피에요. 더러운 피라서 받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주님은 인간을 도축하려고 해요. 고기와 피를 분리하는 거예요.

고기와 피를 분리하는 이 작업을 어느 인간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간을 통해 그걸 해내는데 그 첫 번째 사례가 바로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이 드린 이 제사하고 제사를 드린 당사자인 아벨의 운명과 어떻게 그렇게 닮았는지요.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신 그 제사를 드린 자가 그 제사의 운명과 일치되도록 이끄십니다.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양의 몸체 부분과 기름 부분을 따로 떼어내서 드렸다는 겁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몸체를 받지 않는다는 것, 그 몸체의 원형은 몸체 안에 따로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육체 부분과 육체를 움직이는 원형, 핵심 부분을 따로 분리하는 이 작업이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작업이 맞죠?’ 하면서 제사를 드린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도축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분리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분리하신다는 거예요. 분리를 해보니까 어떻게 되었는가? 그 분리한 제물의 절차대로 아벨은 운명지어졌습니다.

형이, 마귀 들린 형이죠, 악이 덮쳐버린 형이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죽이는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이건 네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이 잘못이야. 하나님이 내 제사를 안 받고 네 제사를 받았기 때문에 내 제사 받지 않은 하나님은 내가 원치 않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 형이 동생 너를 죽인 의도가 그대로 네 제사를 받은 하나님께 반영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서 가인은 동생을 죽였습니다. 죽여놓고 모르는 체했죠.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살릴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벨 자체가 제물이 되어야 되니까요. 제단은 고정되어 있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단은 고정되어 있어요. 제단에 걸치지 않는 제물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고정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의 고정은 자기가 고정이고, 이 고정에서 어떤 다양성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의 의미는, 나의 노동의 가치는, 내 육체로 할 수 있는 노동을 값으로 치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 세상에서는 그것만 생각하지 ‘하나님께서 내 몸을 받을지 안 받을지’에 대해서는 전형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신경을 못 쓰고 있어요. 하나님을 모르니까요. 하나님을 모르는데 천국을 갑니까? 아, 이건 거짓말이에요.

부산의 어느 전문 대학에서 과를 신설했는데 ‘애견 보건과’라는 거였어요. 개를 돌보고 관리하는 그런 과를 만들어서 “우리 전문 대학을 수료하시면 국가 공인 자격증 줍니다.”라고 했는데 나중에 어떤 학생이 진짜 알아봤어요. “저는 전문학교 학생인데요, 이 학교 나오면 국가 공인 자격증 줍니까?” 안 준다는 거예요. 학교가 사기 친 겁니다, 사기를 친 거예요. 애는 공납금 내면서 2년 동안이나 공부했는데 다 허사가 된 거죠.

교회에서 하나님의 천국 자격증을 줍니까? 안 줍니다. 왜냐하면 제단은 고정되어 있고, 그 고정된 제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가치와 의미는 무의미로 바뀌어야 하거든요? 인간은 실컷 교회 와서 노동하고 봉사하고 예배드리고 다 해놓았는데 하늘나라 주님의 뜻은, 네가 뭘 했든 의미 없는 것으로 전환시켜 버립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구원받고자 시도했던 모든 애씀과 노동은 수포로 끝나는 거예요. 전부 헛된 일이에요, 헛된 일! 그 전문 대학만 사기꾼이에요? 교회는 사기꾼 아닙니까? 성당은 사기꾼 아니에요? 제단은 고정되어 있는데 그 제단은 죽어야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죽어야!

구원받고자 하는 노력 그것도 무의미한 거예요. 죽어야 들어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제단은 인간의 원형만 받거든요. 인간은 그 원형을 몰라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사람이 영이 되는데 성령 받은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의 특징이 뭐냐? 내가 평소에 생각한 나와 나의 원형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요. 내가 생각한 나와 진짜 나의 모습이 같지 않다는 것, 이 낌새를 알게 된 자가 성도입니다, 이게 성도에요. CF 있지요. “아, 이거 공기가 다르네.” 이런 식으로요. “분위기가 영 다르네.”

인간은 내가 나를 독촉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육체로 뭘 해보겠다는 그것이 무가치하다고 칼로 잘라낼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걸 잘라낼 수가 없어요. 도축 장소는 제단입니다. 성막, 또는 성전, 제단이 있는 곳이 도축 장소입니다. 그 도축 장소에서 인간을 대신해 양을 도축 함으로써 양이라는 제물의 운명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의 운명과 일치시키는 작업을 주께서 하십니다.

인간은 그 도축장에 들어가서 잘려야 됩니다. 그래서 제물이 잘리는 거예요.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라고 하는데 여기서 ‘더 나은 제사’가 어떤 제사냐? 하나님이 받은 더 나은 제사가 뭐냐?

“그 예물에 대해서 증거하심이라.” ‘도축’이라고 제가 표현했습니다만, 형 가인이 드린 제물에는 분리됨이 없어요. 그런데 아벨은 육체와 기름 부위를 분리시킨 겁니다. 분리될 때 그 기름이 원형에 속하는데 히브리서 1장에 9절에 보면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해서 ‘인간이로되 다른 인간과 차이 남을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것’이 기름 부음이에요.

성도에 대해 성령을 가지고 기름 부었다고 하지요. 요한1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네가 너를 보고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남도 너를 가르칠 필요 없듯이 너도 너 자신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넌 성령을 받아서 내 원형이 어떤 원형인가를 파악했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나한테 손댈 게 없’는 거예요.

그냥 말씀으로 분해되면 그만인 거예요. 왜? 의미가 있으면 아깝겠는데 애초부터 의미가 없는데, 의미가 없는 인생이 이렇게 저렇게 어떻게 살더라도 그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는 사람의 특징은, 자기방어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의미가 있어야 방어할 게 있고, 가치가 있어야 방어를 하죠.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데 무슨 자기방어를 합니까?

주님께서 이 작업을 할 때 율법을 가지고 작업을 하거든요. 그 예가 누가복음 10장에 나옵니다. 어떤 율법사가 주님 앞에 나와 율법을 잘 지켜보겠다고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뜻은 하나님을 목숨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는데 그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해요.

주님께서 답변할 때 그 이웃은, 내가 원하는 타인, 남이죠, 남, ‘내가 원하는 타인 됨에 실패할 때 그때 등장한 것이 이웃’이에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원하는 타인은 무조건 내 편 되어주고 내가 성질날 때 내 이야기 다 들어주는 쪽입니다. 거기에는 남자 여자 구분도 없어요, 그런 것은 상관도 없고 진짜 내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사람은, 내가 울고 싶을 때 위로해 주고 내가 기뻐할 때 웃어주는 그런 타인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한 이웃은 바로 그런 타인을 원하는 내가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하는 그 너머에 그 이웃이 있어요.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이웃이에요. 강도 만나서 얻어터져 버린 이웃, 그거 짐 되는데 누가 맡겠어요?

내게 필요해서, 내가 원해서, 내가 나를 방어하고 나의 가치와 의미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타인만 원하면서 “하나님이여, 내가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 그 율법은 진짜 율법에 의해서 전부 거짓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은 이 땅에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이웃으로 오신 거예요. 이사야 53장 1-3절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은, 인간은 자기의 가치가 있는 한 그 율법의 완성도에 접근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거부당합니다. 왜? 인간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처음부터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서 인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두 군데를 찾아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언서 27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죽고 난 뒤에 가는 세계의 특징이 뭐냐?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는 세계의 특징은 뭐냐? 계속해서 목이 마르고 욕망이 만족 되지 않는 것, 두 자로 그것이 지옥이라는 거예요. ‘뭐 좀 견디지. 뜨거워도 참을 만하지.’ 이게 안 되는 거예요.

현재 인간의 욕망 자체는, 하나님께서 지옥을 맛보라고 욕망을 집어넣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더 가지고, 아무리 원하는 것을 해도 목마름은 계속 지칠 줄을 몰라요. 목마름은 계속 더 내놓으라고 달려들 때 정말 산다는 것이 지옥 같다는 것을 전도서의 솔로몬도 이미 알고 있어요. ‘사는 것이 지옥이었구나.’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인데 문제는 죽어서도 지옥이라는 게 그게 더 큰 문제잖아요.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말처럼 그냥 눈만 딱 감으면 된다고요? 눈 감는다고 될 것 같으면 반창고 붙이겠습니다. 눈 감아도 내 속에 있는 욕망은 눈이 감기지 않는데 어떡합니까, 내 욕심은요?

사람이 몸 아프고 신세 망치면 마음이 낮아진다고요? 사기당하고 몸이 아프고 돈 다 날아가도 욕망은 아직도 펄쩍펄쩍, 활어인데요, 활어! 회로 떠먹는 그 활어가 펄펄 미꾸라지같이 뛰고 있는데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다 동원해도 나의 의미는 내 안에서 제거되지 않습니다.

전도서 9장 10절에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죽음의 세계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다. 그냥 없다는 말로 가득 차 있어요.

네가 할 일이 없다. 네가 할 일이 없다는 말은, 마지막에 죽으면 네가 원형이 되는 데 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계획도 목적도 할 일도 없다는 말은, 백날 계획 세우고 목적 세우고 비전 세워봐도 그건 의미 없다는 거예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곧 천국 자격증을 줄 수 없는 세상에 우리가 태어난 거예요.

자격증이 없고, 의미가 없으니까 천국에 못 갑니다. 못가니까 인간들끼리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어떤 의미를 작위적으로,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뭐로? 육체로. 주님께서는 그 육체를 잘라내는 거예요. 도축해서 잘라내는 겁니다. 어떻게 잘라내는가? 피와 육체를 분리해 냅니다.

피를 육체 밖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피를 육체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말은, 이것은 죽습니다. 피를 끄집어낸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 네 살아있는 육체의 진짜 원형인데 그 죽음을 끄집어내어서 그동안 육체는 죽음에 놀아나는 대로 죽기 위해서 그냥 열심히 애쓰고 노력했고, 돈 벌고 공부했고 사업 벌이고 그랬다는 거예요. 죽음이 대가리인데, 이게 원형인데요! 실컷 90까지 살았는데 죽어요.

그러면 이런 인간이 죽음을, 무의미를 어떻게 의미로 바꿉니까? 바꿀 수가 없어요. 바꿀 수가 없다고요!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바꾸느냐? 지정된 장소에서 바꿔요. 다른 장소는 안 되고요, 그 지정된 장소가 제단입니다. 아벨은 하나의 인격이니까 제단일 수가 없어요.

제단은 따로 율법으로 만들어져야 됩니다. 출애굽기 24장 5절에서 8절 보면 모세가 죽었다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요. 여기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는 어떤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압축시키면, 즉 참기름 짜면 기름이 나오잖아요. 주의 이 참기름을 알려드릴까요?

참기름이 뭐냐 하면, ‘있는 것을 없게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살아있는 것을 죽여버리고 죽어 있는 것을 다시 살게 만들고, 살아있을 때의 모든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끊어진 관계를 복음 집어넣어서 다시 잇게 하고’ 그게 바로 참기름입니다.

주께서 사건과 사건이라는 참깨를 짜는데 그 원리가 뭐냐? 있는 것을 없게 만들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거예요. 살아있는 것을 죽게 만들고, 죽은 것을 살게 만드는 이것의 반복입니다. 이것의 반복을 제단에서 실시하는 겁니다. 그 실시하는 전체 시스템, 작동 원리를 출애굽기 24장 5-8절에서 모세가 막 산에서 내려와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제단을 세우자.” 제단을 세우고 거기에 화목제를 드리면서 모세가 제물의 뭘 뽑아내느냐? 주께서 율법으로 지정한 그 제물의 육체 부분과 피 부분을 따로 분리해 냅니다. 분리해 내는 그걸 가지고 ‘거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씀의 기능은 우리의 육체를 쪼개는 거예요. 분리니까요.

쪼개서 피를 양푼에 따로 담았지요. 그다음에 제단에 제물이 있지 않습니까? 피의 반은 제단에다 뿌리는 거예요. 그다음에 백성들에게 피를 뿌리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먼저 율법을 뿌립니다. “자, 율법 간다, 율법!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간다!” 이렇게 율법을 쫙 뿌립니다.

그러면 양푼에 있는 피의 반은 딱 빼돌려서 준비하고 있고, 먼저 율법을 딱 던져버려요. 십계명과 여러 율법을 딱 던져버리면 먼저 백성들에게 소리로서 율법이 주어졌잖아요. 모세가 율법을 낭독하는 원칙은 이렇습니다. 진짜 오늘 설교 들으시면서 이건 꼭 기억하셔야 해요.

모든 예수님의 설교, 사도바울의 설교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설교와 강의는 허공에 내뱉는 소리예요. 그냥 허공에 뿌려지는 소리입니다. 어디에다가요? 그냥 허공에요. 이건 뭐냐? 인간은 다른 건 다 알아듣는데 하나님의 말씀만 이상하게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어요. 말씀을 못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성령 받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요. 태어날 때부터 성령 받은 사람은 예수님뿐이에요. 성령으로 예고해서 태어난 세례 요한 같은 사람도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성령으로 알아들은 사람은 없어요. 세례 요한 아버지도 못 알아들었어요. 픽픽 웃기나 했고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고요, 삼손의 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삼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피와 육신이 구별되어서 ‘더러운 피가 너의 원형이고 그 육체는 껍데기가 분명하다’라는 것을 분명히 보이는 작업이 하나님의 율법 작업이에요. 이 율법을 외친다는 말은 “다들 의미 있어? 사는 게 나름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그러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율법 한번 던져봐?”

던져보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봐! 나는 허공에 한 거야.” 허공에다가, 무의미에다가 율법을 던져놓고 거기에 뭘 하는가? ‘피’라는 페인트를 던져버려요. 율법 위에 피가 오는 거예요, 율법 위에 피가 오는 겁니다. 율법 위에 피가 오는 이 작업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정기적으로 계속해서 반복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안식일에 제사하는 겁니다.

율법에 의하면 천지를 7일 만에 창조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아요. 왜? 율법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에게는 무의미한 거예요. 아무 의미 없어요. 자연은 무의미하지 않아요. 자연은 의미 있는데, 자연은 의미를 아는데 그 자연을 해석하는 인간은, 자기는 무의미 하면서도 거기에 억지로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이 수학 방정식이고 그게 과학이에요.

허무한 인생을 의미 있게 한번 살아보겠다고 계속해서 뭔가 만들어내고 발명하고, 그리고 바벨탑 쌓듯이 사는 것처럼 살아보려고…, 물론 가짜죠, 사는 것처럼 살아보려고 의미를 흉내 내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는 그 작업에 대해서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한 지시가 주어지게 됩니다.

7일마다 안식일에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모든 인간의 활동 시간을 7로 나누기를 해요. 7로 나누기를 하면, 여기서 나머지가 나오는데 6, 5, 4, 3, 2, 1, 이게 남습니다. 0은 없습니다. 1, 2, 3, 4, 5, 6, 7, 마지막 7일째 안식일 지키는 것은 이런 겁니다.

‘우리는 7이라는 거룩의 자투리입니다. 거룩을 거룩되게 보여주기 위한, 거룩이라는 유일한 의미, 고정적 의미, 단일적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우리는 6, 5, 4, 3, 2, 1이라는 그 잔여, 잔존, 찌꺼기, 잔해, 무의미한 삶입니다.’ 이걸 안식일의 반복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안식일을 지켰다는 말은, 7이라는 칼날 가지고 우리를 쪼개면 우리는 기껏해야 5, 4, 2, 6, 1, 2,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건 인간뿐만이 아니고 자연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그 예가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동방 박사가 별 따라서 오죠? 동방 박사가 별을 따라옵니다. 여기 별이라는 것은요, 자연물에 해당돼요. 창조에 해당되는 겁니다. 별은 몇 일째에? 4일째에 만든거예요. 그래서 7이 아니고 4에 해당되는 게 하늘의 별이에요.

4에 해당하는 별은 그 자체적으로는 무의미해요. 그러나 별이 움직일 때, 예를 들면 별똥별인데 별똥별은 내려오면서 타는 거잖아요. 동방 박사가 별을 따라갔다는 것은, 별의 운명이나 동방 박사의 운명이나 전부다 잔여, 잔해에 해당되는 거예요.

거룩에 의해서 토막 난 그 잔해, 7이 아니고 6이나 5나 4에 해당되는 그 잔해, ‘과연 나는 무의미한 잔해입니다.’하는 것은, 동방 박사가 아기 예수를 만날 때 비로소 자기가 무의미하다는 그것을 파악하는 거예요. 자기에게 있는 가장 귀한 것들, 유황과 몰약과 황금을 아기 예수한테 바치잖아요.

별이 아기 예수를 향하여 집중적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별의 존재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될 때 비로소 그 무의미가 의미로 드러나는 거예요. 동방 박사도 그와 마찬가지고요. 아기 예수를 만났을 때 비로소 내가 예수님 앞에서 무의미가 된 것을 감사하면서 그다음부터는 스스로를 지킬 이유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고정된 단일성, 그리스도의 제단이라는 그 하나밖에 없는, 주께서 인정한 유일한 의미의 제단, 그 의미의 제단 하나를 위해서 나머지는 다 마땅히 무의미해져야죠, 마땅히! 내가 거기서 단독으로 나는 고정이다, 동질이다, 단일성이다, 이렇게 까불면 모든 의미가 자기로 종결된단 말이죠. 자기를 지키려고 평생 살잖아요. 자기의 가치나, 의미나 이런 것 지키려고요. 그것 때문에 화나고 분노하고요, 가인처럼.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그 잔여물이 폼을 낸다든지, 자기 패거리를 만든다든지, 그래서 자기들끼리 노는 이런 것은 주님 보시기에 성립이 안 돼요. 그저 살아간다는 것은 타들어 가는 별똥별에 해당된다는 말이죠. 거룩의 칼날, 7이라는 칼날로 자르는 것, 그게 요한계시록 13장 18절에 나옵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여기서 짐승에 대해서 ‘사람의 수니 666’을 이해하려면 사람 자리에 뭘 집어넣느냐? ‘무의미’를 집어넣으면 돼요. ‘사람의 수니 무의미이니라.’ 무의미의 수는 뭐냐? 666이다. 아무리 해도 7이 될 수 없고, 더 나아가서 7이 7되기 위해서 인간을 육의 세계의 잔여물로, 거룩으로 쪼갠 찌꺼기의 존재로서 주께서 보시는 거예요.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여기서 동방 박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동방 박사가 하나님과 거룩과 연계된 그 자기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발견한 그 기쁨,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킬 건덕지가 없고 남아있지 않다는 그 자유함, 그 기쁨이 될 때 주께서 동방 박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나님의 7과 연결된, 단독적이고 단일적이고 고정적이고 확정된 그 아기 예수의 제단성과 관련된 것을 주께서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장 12절에 보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그것은 13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그러니까 성도도 마찬가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동방 박사도 마찬가지인데요, 동방박사가 “난 예수님 경배했으니까 내 할 일 다 했다.” 이러면 또 자기 의미가 생기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또 위기를 줘요. 어떤 위기?

있는 내가 없어지고 없어진 나를 주님의 7에 의해 다시 있게 하는 주님의 작업입니다. ‘난 5와 6으로서 무의미한데 7 되시는 아기 예수에 의해서 없어진 나를 다시 있게 하고 죽었던 나를 살리는’ 이 동방 박사에게 일어났던 이 작업을 후대에는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똑같이 적용시킨다는 말입니다.

그 모델로서 동방 박사가 등장한 거예요. 별도 피조물이고 동방 박사도 피조물 아닙니까? 그 피조물이 아기 예수에게 와서 같이 만나게 된 거죠. 아기 예수 중심으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제단 중심으로 세상 모든 것이 똑같은 원리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있는 것을 없게 하고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살아있는 것을 죽게 하고 죽은 것을 살리는 것. 뭐로 하느냐? 말씀으로, 말씀으로 도축하는 거예요. 그 작업은 어디서 하는가? 바로 제단에 있는 성막에서 또는 성전에서 제사 형식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레위기에 여러 가지가 있는데 레위기에서 핵심 부분만 제가 말씀드릴게요. 핵심 부분은 뭐냐? 속죄제 같은 경우는 제사장이 그 제물을 먹지 못해요. 오늘 본문에 나와요. 성막을 섬기는 자는 제사장이죠, 그 제사장도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다.

그러면 그 육체는 어디로 가느냐? 바깥에 나가서 태워야 돼요. 바깥에서 태우는 거예요. 이게 분리 작업이에요. 하나님이 지정한 의미와 그 외의 모든 무의미를, 의미와 무의미를 거룩한 율법이 제단에서 자른단 말이죠. 율법이 개입해서 잘라버리면 어떤 것이 의미가 없고 어떤 것만 의미가 있느냐?

달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의미 없는 것을 동원해서 의미 있는 것을 어떻게 돋보이게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나님의 율법이 하는 거예요. 거기서 제사장의 역할은 뭐냐?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제사장은 특별한 복장을 하고서 제사합니다. 여러분들이 사극 드라마나 사극 영화의 촬영 현장을 보신 분은 알 겁니다. 문경에도 영화 세트장이 있잖아요. 최수종 배우가 왕으로 나오는 그 드라마 촬영 때 보면, 스태프들의 복장은 다 현대인의 복장이에요.

다들 춥다고 파카 입고, 감독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연기자들의 복장은 다 조선시대 복장이에요.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연출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제사장들은 어떤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물이 죽어야 될 그때 그 시대의 상황에 걸맞은 새로운, 곧 하나님께서 없는 데서 만들어내고 죽은 데서 살리는 새로운 인간은 어떤 인간이어야 한다는 뜻으로서의 제사장 복장입니다.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짜장면, 짬뽕, 탕수육이 아니에요. 뭐냐? 제단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받으신 그 제물을 제사장이 먹게 돼 있습니다. 다만 대속죄일 제사의 제물은 빼놓고요. 그냥 속죄 제사의 제물은 먹을 수 있어요.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제물은 레위기 6장 25-6절과 레위기 7장 6절에도 나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제사장은 그것을 다 단 위에 불살라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니라 이는 속건제요.” 여기 보면 속건 제물도 제사장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 제사장이 조선시대 사극을 찍습니다. 그 연출은 주님이, 거룩한 분이 하기 때문에 숫자로는 ‘7’이 해요. 그 7이 의미 없는 5나 4나 2에 해당하는, 6에 해당하는 제사장 보고 연기를 하게 합니다. “큐!” 사인이 들어가면 제사장은 제단 앞에서 제물을 흔들어요. 이렇게 앞뒤 좌우로 흔든다고요. 그렇게 흔드는 대목이 있어요. 요제(搖祭, Wave Offering)라 합니다.

레위기 7장 30-31절입니다. “여호와의 화제는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찌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그 기름은 단 위에 불사를 것이며 가슴은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돌릴 것이며.”

그것은 뭐냐? ‘이 제물은 내 것이다.’ 해서 제사장 소유가 돼요. 제사장 몫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레위기 7장 32절은 뭐냐? 주님이 또 “큐!” 들어가면 이제는 흔드는 거 말고 그냥 높이 쳐들어요. 거제(擧祭)라고 해서 제물을 높이 쳐듭니다. 이것은, ‘주님 것이지 내 게 아닙니다.’ 하는 소유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제사장의 복장은 어디서 나온 복장인가? 그 복장은 짐승의 탈을 쓴 거죠. 짐승의 탈을 썼다는 것이 짐승의 육체를 썼다는 말이 아니고, 짐승에서 나온 피를 몸에다 발랐으니까요. 아벨의 제사 제물의 운명이나 아벨 본인의 운명이 합치되듯이 제물에 일어났던 절차와 과정,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것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그렇게 제사장에게 작동하고 있는 거예요.

또 주님의 “큐!” 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제사장 보고 또 시켜요. “제물의 그 피를 어떻게 처리해야지!” 그래서 제물의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는 것이 있고, 바르는 것이 있고, 쏟는 것이 있어요. 이것도 장면마다 다 달라요.

피를 뿌리는 것은 레위기 1장 5절, 레위기 3장 8절, 14장 5-7절입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제사장은 또 명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대로 취하여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산 새는 들에 놓을찌며.”

피를 바르는 것은 번제, 속죄제, 화목제가 있는데 레위기 4장 7절, 레위기 4장 25절과 30절입니다.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제사장은 그 속죄 희생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단 밑에 쏟고.”

제물의 피를 바르고, 또는 쏟는 것, 또는 제단의 뿔에다 바르는 겁니다. 그다음에 어떤 제물은 피고 뭐고 간에 다 태워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레위기 1장 9절입니다.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또 어떤 것은 내장 기름과 콩팥 기름을 분리해서 따로 태우는 것이 있습니다. 레위기 3장 3-5절입니다.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찌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 윗 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화목제나 속죄제에서 기름 부위는 따로 분리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왜, 왜 제사장이 이런 걸 합니까? 이것은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말씀에 입각해서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온 백성이 다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제사장 나라로 고정되는 겁니다. 온 백성이 다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그 제사장의 원형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고, 대제사장이신 그 예수님께 있었던 일을 그대로 자기 백성에게 이루어지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설교한 것을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과연 천국에 적합한 존재일까요? 인간은 천국에 적합한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어디에 적합한가? 인간은 지옥에 적합한 존재였습니다. 이걸 아는 자가 없어요. 왜? 자기한테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자기가 가치 있다고 했기 때문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가지고 제단을 활성화시킵니다. 제단을 활성화시키면 구약에서 누가 활성화되느냐? 대제사장의 의미와 가치가 활성화돼요. “네가 아무리 농사짓고 아무리 노력해도 이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 없으면 너는 저주받아.” 이것을 가르쳐 왔던 것이 바로 구약의 율법이었어요.

“너희는 제사장한테 잘해줘라.” 백날 이야기했지만 구약 성경을 통해서 알다시피 사람들은 제사장을 무시했습니다. 나중에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갑자기 제사장과 아무 상관이 없어졌어요. ‘너는 네 직업이나 제대로 해. 나는 내 직업에 충실할 테니.’ 갑자기 제사장이 그만 직업화되고 말았어요. 사적으로, 고정화되어서 각자가 따로따로 놀아요.

말씀이 와서, 거룩이 와서 우리를 쪼가리 내고 분해해야 될 텐데 말씀이 와도 분해되지도 않고, 쪼가리 나지도 않고 ‘그냥 너 해라’ 하는 식이에요. 제사장들이 백날 해봐야 허공에 외치는 소리예요. 요한복음 5장 3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잖아요. 그 대제사장이 오셔서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천천히 해야 돼요.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예수 믿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에 대한 정확한 규정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예수 믿는 사람은 없어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되는데 믿는 자가 없어요, 믿는 자가!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믿는 자가 없어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주의 모든 말씀은, 어떤 인간도 못 믿을 만한 말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은 뭔 뜻이냐? ‘우리 육체는 쪼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왜?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게 아니고 ‘내가 성령을 너에게 보내리니’ 해서 성령께서는, 주께서 다 이루신 그 말씀을 우리 안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일은 예수님이 홀로 확정했고, 다 이루었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 일을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사람이 좀 달라요. 안 믿는 사람하고 성령 받은 사람이 달라요. 완전히 다릅니다. 성령 사람의 관심은 뭐냐? 모든 관계에 대해서 복음과 말씀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말씀을 받았으니까,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받았으니까 그 말씀을 가지고 자기와 자기의 관계, 가족들의 관계, 남과의 관계를 맺고 다가서게 돼 있습니다.

“여보, 오늘 반찬 뭐꼬?” “반찬은 나중 문제고, 당신 다 이뤘어? 다 이룬 거야?” “뭐? 무슨 말이야? 나는 못 알아듣겠다!” ‘아, 못 알아듣는구나. 조금 더 기다리지, 뭐.’ 이런 식으로요. ‘다 이루었다’라는 것, 홀로 대제사장 역할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 들어와 버리면 그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자는 일생에 하는 모든 일이 무슨 일만 하느냐?

성도가 이제 앞으로 해야 될 일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또 물을 수도 있고요, 물어도 좋아요. “목사님, 우리가 성령 받고 어떻게 살면 됩니까?” 이 질문에 답변을 해드리겠어요.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이제는 계속해서 살아 있을 때까지 무의미만 생산하세요, 무의미만! 아무 의미 없는 일만 계속하세요.

밥 짓고, 빨래하고, 자식 키우고, 돈 벌고, 건강을 위해서 열심히 뛰고, 수영 배우고, 병원에 휠체어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 손자도 키우고…, 이 모든 무의미만 생산 하세요. 그게 다 무의미해요. 그게 무의미라서 안 하다 하지 말고, 반대로 무의미만 하라고요. 의미는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이니까. 아무 의미 없는 것도 못 합니까, 정말? 참 쉽죠 잉! 의미 없어요, 의미 없어요! 의미 없기 때문에 화낼 일도 없고, 나를 방어하거나 나를 사수할 일도 없어요. 뭐 사수할 게 있어야 사수하지요.

1976년도에 나오는 가스펠 송이 있습니다. 제 나름대로 가스펠 송이라고 하는 건데요. 그 가스펠 송의 가사가 꼭 소설 같아요.

【어두운 밤 사막의 고속도로, 내 머리를 스치는 시원한 바람, 콜리타스의 은은한 향이 공기 중으로 퍼져가고 있었지. 저 멀리 앞 희미한 불빛, 머리는 무거워지고, 시야는 흐려졌지. ​늦은 밤 쉴 곳을 찾아야 했어. ​문가에 그녀가 서 있었지. 들리는 종소리, ​난 혼자 이렇게 생각했어. ‘이건 아마 천국 아니면 지옥일 거야’ ​그리고 그녀는 촛불을 켜 내게 길을 비춰주었어. ​복도 쪽에서 목소리들이 새어 나왔어.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것 같아. ​캘리포니아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말 사랑스러운 곳이예요. ​

캘리포니아 호텔에는 방이 많아요. ​연중 언제라도 방이 있어요. ​그녀는 매우 사치스러워. 그녀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다녔어. 그녀는 친구라고 부르는 잘생긴 남자 친구들이 많이 있었어. 그들이 어떻게 정원에서 춤을 추었는지, 달콤한 여름은 젖었지. 어떤 사람은 기억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잊기 위해 춤을 추었어. 그래서 난 지배인을 불러서 말했어. “내 와인을 좀 가져다 주시오.” 그가 말하길 “우리는 1969년 이래로 그런 술은 팔지 않습니다.” 그 목소리들은 저 멀리서 날 부르는 것 같아. 한밤중에 깨어나기도 하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 캘리포니아 호텔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멋진 곳이에요. 사람들은 캘리포니아 호텔에서 인생을 즐기고 있어요.

놀랍지 않나요! 핑곗거리 대고 놀러 오세요. 천장에 펼쳐진 거울, 얼음이 얹혀진 핑크색 샴페인, 그녀는 이렇게 말했어. “이곳에서 우린 모두 우리가 만들어낸 도구의 노예가 되어 버리죠” 그리고 주 응접실에서, 사람들은 만찬을 위해 모이고, 강철같은 나이프로 음식을 찌르지. 그러나 그들은 짐승을 죽이지는 못하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입구를 향해 뛰었던 거야. 난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길을 찾아야 했지. “진정하세요”라고 야간 경비원이 말했어. “우린 손님을 받기만 할 수 있어요. 당신은 언제든지 방을 나갈 수는 있지만 떠날 수는 없을 거예요(You can check out any time you like. But you can never leave).”】

자칫하면 내가 지옥이나 가는 게 아닌가, 하면서 들어간 그 호텔에 방들이 많다는 것은 다양성이죠. 선택의 여지가 많다는 겁니다. 벤츠 같은 멋진 차든, 사람이든 욕망대로 골라잡아 파티를 즐기는 선택의 다양성. 내가 찾는 1963년산 술보다 더해서 늘 새로운 욕망 거리를 주는 곳, 장식도 그렇게 멋지고 화려하고요.

그런데 여기에 의미심장한 가사가 나오지요. ‘욕망의 장치, 그 device에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다. 아무리 찔러대도 짐승을 죽일 수가 없구나.’ 깜짝 놀라서 ‘이게 바로 지옥이구나’ 하고 문을 향해 막 달릴 때 종업원이 하는 말이 있어요. “릴렉스! 진정하세요. 우리는 여기에 보낸 사람만 받기로 돼 있고 체크아웃도 할 수는 있겠지만 떠날 수는 없어요. 이미 이 호텔에 들어온 이상 떠날 수는 없답니다.”

그 호텔 이름이 뭐냐? <호텔 캘리포니아>입니다. ‘이글스’가 불렀던 ‘호텔 캘리포니아’, 세상에, 가사 내용이 완전히 가스펠 송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지옥이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장치, 인간이 만든 것에 스스로 매료되고 함몰되어서 그게 다인 줄 알고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놀라운 것은, 마귀로 고정이죠, 한 번 들어온 사람은 체크아웃해도 빠져나갈 출구는 없다는 겁니다.

노래는 그걸로 끝나요. 기타 깨나 치는 사람들이 그 곡으로 그저 기타만 쳐대요. 실상 그 가사는 이런 내용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고정돼 있다는 거예요. 제단이 고정돼 있으니까, 주님의 천국 가는 제단이 고정돼 있고 제사장이 고정돼 있으면 동반해서 이 세상도 악마로, 지옥으로 고정돼 있다는 겁니다.

그 지옥에서 인간은 태어났습니다. 이제 빠져나갈 길은 없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영의 사람이 되면 비로소 이 사실이, 우리가 무의미로 시작한다는 이 사실이 이제는 감사와 기쁨으로 되어서 남은 생애는 의미 없는 것만 아주 즐겁게 만끽하면서 기쁘게, 의미 없이 편하게, 자유롭게 여러분들이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밖에 없는 제단, 거기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유일한 제물 되신 주님, 주께서 인정하는 유일한 대제사장 예수님, 도대체 더 이상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일방적으로 다 이루셔서 자기 백성이라고, 예수님이 자기 영으로 찾아오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어떤 것도 나의 의미와 나의 가치로 돌리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조의 중심  (1) 2026.01.04
영문 밖  (0) 2025.12.29
복음의 점멸등  (0) 2025.12.15
협소한 안목  (0) 2025.12.07
피값  (0) 2025.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