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중보자

아빠와 함께 2025. 5. 5. 22:38

[25대구강의]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13 - 중보자

25,04,07 강의 : 이근호, 정리 : 구득영

*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은 달라요 !!

오늘은 교재 114페이지부터 하겠는데, 여기 중간에 보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부르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다들 같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를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을 불러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 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 그게 아니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주' 또는 '주님' 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차이를 두는 겁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그냥 계시는 분인데,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이 사는 세계에 오셔서 활동을 하신 분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냥 계시는 분을 인간이 인간들이 부른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쪽에서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따로 이 세상에 파견하셨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 교재 114페이지 중간에 보면, "예를 들면, 모세 언약에서는 십계명과 제사법으로 드러납니다"   모세 언약은 율법인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았던 그 율법,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은 아시는데 인간은 모르는, 모세가 시내산에 가서 받아온 그 무엇이라는 말이죠.

모세 언약은 제사법과 십계명으로 되어있는데, 이런 식으로 나가면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러면 무엇이 어려운고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특정 구조에 임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특정 구조, 그게 뭐냐 하면 십계명과 제사에 의해서 제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단을 만들면, 그 제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죠.

* 토단을 쌓고 불러라 !!

그게 출애굽기 20장 24절에 나와 있는데,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그러니 이게 우리가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그냥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간편한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따로 불러라" 라고 하시면, 우리는 상당히 번거롭지요. 제단을 쌓아야 하고, 그 법에 의해서 다 맞춰야 하고, 그리고 아무런 장소에서 부르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 장소에서나 "내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이 저기에 있으니, 그 이름을 부르자.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해주시겠지" 라는 게 아니고,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는 겁니다.

* 특정 구조 !!

그러니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는데, 그런데 주의 이름을 아무런 곳에서나 부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즉 여호와를 부른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임재한, 주의 이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특정한 구조가 있다는 겁니다. 특정한 구조가 말이죠.

다시 말해서, 특정한 구조, 그 구조에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상당히 일을 복잡하게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나갑니다. 하나님을 위로 부르다가, 이제 그 사람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여기 제사법과 십계명이 있는 제단으로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이해를 하시겠지요? 위로 하나님이 부르면서 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특정의 구조, 또는 제단 장치, 혹은 특정 시스템이라는 것이죠.

* 점점 희석되는 나의 이름 !!

그런데 그렇게 갈 때, 여기서 제일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가고 있는 자기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여기에 있는 제사법이 중요합니까? 과연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벌써 이 제단에 접근할 때부터, 자기의 가치나 의미는 서서히 희석이 되어야 하고, 삭제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러 간다" 라고 하게 되면,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러 제단에 접근한다. 왜냐하면 구원받기 위해서다" 라는 마음으로 여기에 접근할 때, 사람들이 이런 마음이 있어요? 없어요?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것은 누구의 활동입니까? 하나님의 활동이 아니고, 자기 활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따로 보냈다는 말이죠. 그분이 누구라고요? 하나님의 이름인데, 갇히면 주가 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 또는 주의 이름이 활동하시는 분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활동을 '1'로 보고, 하나님의 활동을 '2'로 본다면, '1'이 중요할까요? '2'가 중요할까요? 어느 게 중요할까요? '2'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 활동보다도 주의 활동이 더 중요하다는 것인데, 그러면 자기의 활동은 점점 더 축소되고 잊혀지고 엷어지고, 나중에는 사라져야 한다는 말이죠.

* 가나 혼인잔치 !!

신약성경에서는, '2'번에 의해서 '1'번이 줄어드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면, 이것을 두고 '기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표적' 이라는 것인데. 이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가나 혼인잔치라는 말이죠. 그게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주최측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고 "큰일났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 어떡해 하지?"   지금 마리아는 자기 활동을 하고 있는데, 손님은 계속해서 밀려드는데 포도주가 다 떨어졌다는 말이죠. 그래서 누구한테 부탁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파견하신 '주의 이름' 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유의 활동이 있는데, 즉 '활동2' 라는 말이죠. 그런데 마리아는 지금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활동1' 이라는 것인데, 즉 "이번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다" 라는 것만 생각해서 걱정이 늘어진다는 말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지금 마리아 당신의 활동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무슨 짓을 했다는 겁니까? 예수님에게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말이죠.

(요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쉽게 말해서, 마리아가 '활동1', 즉 자기 활동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강요하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너, 무엇이라도 좀 해라. 가만히 있지 말고 좀 해봐. 이 난처한 지경을 어떻게 해결해 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마리아가 압박을 가하니까, 예수님께서 "뭐라도 좀 도와드릴까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 대목만 딱 보면,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과 관계없이 그냥 잠시 들러봤다가 돌아가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난 혼인 잔치에서 결말을 보면, 예수님이 무엇을 해주시는데, 무엇을 해주십니까? 포도주, 그것도 맛있는 최상급의 포도주를 만들어 내신다는 말이죠. 아니 상관이 없는데, 왜 만들어주시는 겁니까?

마리아에게 삐쳐 가지고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하시다가, 그런데 왜 도와줍니까? 주님은 '활동1'을 무엇으로 바꾸었습니까? 예수님의 활동, 그게 '활동2' 라는 것인데, 즉 예수님이 자신의 활동으로 바꾸는 현장으로 여겼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하인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하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연회장에다가 갖다 주라고, 그렇게 지시를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가져다 주니까 어떻게 됩니까? 분명히 담을 때는 물이었는데, 그런데 도착한 것을 마셔보니까 물이 아닌 포도주라는 말이죠.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기적' 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성경은 '표적'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 기적과 표적 !!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기적은 자기 활동에 아쉽고 미비한 점, 자기가 속이 상해서 어떻게 맞아 채워야 되는데, 그렇게 채워지지 않은 것이 채워질 때, 그것을 기적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반면에 표적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원하는 기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과 자기는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결과를 보니 상관이 있다는 말이죠.

일단 주님은 우리와 상관이 없는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서 아들로서 자기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겁니다. 사람들의 애로사항이나 요청을 상담해주고 들어주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예수님의 일은 이것인데, 예수님의 일은  자기를 드러내시는 것,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주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시작이고, 이것이 중간이고, 이것이 끝이라는 말이죠. 자기를 드러내신다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결과적으로 마리아가 포도주를 얻었잖아" 라고 나오시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것을 제안했던 마리아를 통해서 기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표적이 나타났다는 말이죠.

그 표적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애당초 달랐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사용했구나"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것이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인데, 즉 하나님의 일을 시킨 주의 일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사도행전 2장 21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라는 것이, 여기서 정리정돈이 된다는 겁니다.

(행 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저를 사용하여주옵소서" 라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를 사용해서 누구만 나타난다는 겁니까? 자기 구원이 아니고, 자기 잘남이 아니고, 예수님의 하시는 일만 나타나는, 그런 수단, 그런 도구, 또는 증인으로 쓰여지게 해달라고 하는 것, 이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죠.

처음 주님에게 올 때는 자기의 아쉬운 것을 하소연하기 위해서, 즉 "전능하시고 대단하신 분이시여, 나의 조그만 인생의 괴로움을 들어주소서" 라고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 한 대목을 다시 한번 해볼게요.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단에 접근한다. 왜?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활동1' 인데, 즉 자기 일이라는 말이죠.

교회라는 것은 장사를 하려는 것인데, 이만희의 신천지도 이런 경우라는 겁니다. 즉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은 천국에 갑니다" 라는 이야기인데, 그러니까 여전히 '활동1'이 죽지를 않았는데, 전혀 희석이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 왜 제단에서 이름을 불러야 하는가?

여기까지는 쉬운 것이고, 이제 어려운 것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모세 언약인 제사법과 십계명으로, 즉 "제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것인데, 이제 그것을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적이든 표적이든 간에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면 되는데, 그런데 왜 굳이 제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느냐는 말이죠. 제단을 일단 제가 그려보겠습니다. 이렇게 돌이 있고, 이게 제단이라는 겁니다.

* 제단의 하늘의 아이디어 !!

그러면 이 제단에는 어떤 장치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밑에서 불을 피우고, 그리고 위에서 양이나 소를 홀라당 태우는 구조라는 말이죠. 그러면 이 구조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모세의 율법에서 왔는데, 즉 하늘에서 왔다는 겁니다. 땅에서 온 것이 아니고,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하늘에서 온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하늘에서 왔는데, 그러면 여기에 누가 계시는고 하니, 주의 이름이 여기에 계신다 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연결시켜 보면, 주의 이름은 어디에 계시는고 하니, 땅에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율법을 통해서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해서, 주의 이름이 하나님의 율법과 만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이 우리 인간의 아쉬움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을 차질 없이 시행하는 것이 곧 주의 이름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면, 요한복음 6장 39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그래서 주님이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다는 말이죠. 우리 인간은 모르니까 빠져야 되는데, 아버지와 아들만 내밀하게 아는 일, 그것을 예수님께서 이 인간 세계에서 드러내심으로써,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 내 뜻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표현되고 나타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꾸 아버지를 찾지 말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고 내가 행하는 것이 아버지에 행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세 글자로 하면, 바로 '중보자' 라는 말이죠.

* 중보자 !!

여러분이 마음이 심란하고 이렇게 인생이 힘들 때 무엇을 찾으면 되느냐 하면, 이 중보자 중심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중보자를 찾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중보자를 찾지 않으면 항상 누구를 찾느냐 하면, '나'를 찾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나'를 찾든지 '중보자'를 찾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시라는 말이죠.

이 중보자는 우리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데, 그냥 아버지의 뜻만 나타내는 것이 중보자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분이 바로 중보자인데, 하늘에서 오신 그 중보자 중심으로 진리가 펼쳐지는 내용이 바로 이 성경말씀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성경은 누구에 대해 증거한다고 합니까?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은 자, 즉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봐도 성경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보면 볼수록 다 엉터리로 여겨진다는 말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자기의 소원 성취나 자기의 아쉬운 것을 해결하려고 성경을 보는 사람은 무엇이 빠졌습니까? 중보자가 빠지고 없는데, 그렇게 중보자가 빠진 상태에서 기적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적을 주옵소서, 기적을 주옵소서" 라고 말이죠.

* 여러분, 말씀 공부를 하면서 기도하세요 !!

만약에 어떤 교회에서 "여러분, 자꾸 기적을 달라 하지 말고, 말씀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해야 됩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말을 한번 살펴보세요. 참 재미있는데, 자꾸 무엇을 달라 하지 말고 말씀을 공부하고, 그리고 기도응답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활동1'과 똑같다는 말이죠. 자기 활동인데, 즉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거기다가 무엇을 추가합니까? 말씀 공부를 더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성경을 공부를 하게 되면, 그러면 자기 뜻이 삭제가 될까요? 그대로 유지가 될까요? 당연히 유지가 되는데, 그러니 성경을 공부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야망과 욕심만 남게 된다는 겁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바뀌어져야 하는데, 무엇이 바뀌어져야 하겠습니까? 자기의 뜻, 즉 '활동1'은 애당초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소원을 들어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이 기도를 하시든 살림살이를 하시든 무엇을 하시든, 그 현장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이 활동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제가 질문을 또 하겠습니다. 자기가 성경을 보니까 성경에 대한 구절이나 지식이 추가가 되는데, 그렇게 지식이 추가되면 주의 일이 되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 지식의 추가됨이 없이도 주께서 일하시는 겁니까? 어떻습니까?

자기가 성경 구절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심지어 성경을 다 외운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서 주의 일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의 일은 누가 하시느냐 하면, 주님이 하시는 것이 주의 일이라는 말이죠.

자꾸만 이런 질문을 하다가 보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생기는데, "나하고 주님하고 진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금 나는 주님과 상관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구나" 라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을 많이 봤으니까 성경대로 이루어질지어다, 이루어질지어다" 라고, 백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그 요청하는 자기 자신이 삭제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자기 부인이 안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 상관이 없는데, 상관이 있는 것으로 !!

이제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렇게 상관이 없다는 것을 주님이 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상관이 없는 사람을 상관이 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작업을 예수님이 해주십니다. 마치 철없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하셨듯이 말이죠.

아니 예수님이 무슨 포도주 대리점을 합니까? 그것을 왜 예수한테 조달해달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그 집 결혼식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그런데 그런 상관이 없는 것을 상관이 있게 바꾸어 주신다는 겁니다.

* 애굽에 살던 어느 히브리인 가족 이야기 !!

그것이 바로 '표적' 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쉬운 말로 그냥 기적이라고 하고, 이제부터 여러분이 잘 아는 이야기를 제가 해보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집에 있는데, 그 집에 히브리인 5명이 살고 있다는 말이죠. 아들 둘, 딸 하나, 아빠와 엄마, 그렇게 5명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인 가족은 어디에 살고 있는고 하니까, 애굽에서 살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5명의 가족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기적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당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일반시민으로 자유를 누리면서 산 것이 아니고, 노예로 살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1) 노동시간을 줄여달라. 2) 임금을 올려달라. 3) 제발 건드리지 마라" 라는 것을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바로가 너무 심하게 히브리인들을 대놓고 핍박을 했다는 말이죠. 노예가 무엇입니까? 일하는데 품삯을 거의 주지 않는 것이 노예라는 겁니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만 준다는 것이죠.

그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응답을 했습니까? 심지어 그들이 아들을 낳으면, 애굽경찰이 와서는 어떻게 나옵니까? 아들을 낳았다고 해서 죽이고 했다는 겁니다.

* 오잉, 문설주에 피를 발라요?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이 히브리인들이 원하는 아이디어 가운데서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면 우리는 이 애굽에서 자유를 얻을 수가 있다" 라고 여긴 사람이 있었을까요? 그러한 아이디어를 누가 끄집어냈습니까?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히브리인들 가운데 있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 성경을 보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보고 기도하면 은혜를 받고 일이 잘 풀리고, 또한 죽으면 구원을 받고 살았을 때는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그런 것을 우리 인간 쪽에서 끄집어낼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교재 147페이지에 나와있는데, "다음 중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는 방법은? 1) 돌 2) 망치 3) 원자폭탄 4) 물 5) 불 6) 십자가의 피" 라고 한다면, 이 중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의 피라는 말이죠.

여기서 돌에 맞아서 죽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스데반 집사님인데,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이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지금 천국에 살아 계신다는 말이죠. 망치의 경우에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톱으로 나오는데, 이사야의 경우에는 톱으로 몸이 절단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도 살아있다는 말이죠.

원자폭탄은 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어서 지옥불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자아가 말이죠. 물의 경우에는,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그러면 그들은 어디에 갔습니까? 지옥에 갔다는 겁니다.

* 십자가의 피 !!

그런데 사도바울이 제시한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십자가의 피' 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십자가 피에 자아가 죽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겁니다. 즉 새로운 자아가 된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이 제시한 것은 십자가 피였는데, 따라서 이것은 무엇이 해당이 되느냐하면, 이것이 기적이고 표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 피는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십자가의 피로 죽임으로서 예수님이 예수님다움을 나타내는 하나의 매개이고 수단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누가 이야기했다는 겁니까? 그게 사도바울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할지, 그것을 자꾸만 추상적으로 여기지 말고, 구원받은 사도바울이 과연 무슨 이야기를 편지에 담아놓았는지, 그것을 보시면 된다는 말이죠.

히브리인 가족에게서는 아무리 끄집어내도, 유월절 양의 피가 우리를 애굽에서 해방시킨다는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월절 언약은 누구의 생각이고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이 땅에서 활동하는 여호와 이름의 아이디어고 활동이란 말이죠. 그래서 출애굽기 12장 13절에 보면,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표적' 이라는 말이죠.

(출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 12: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피를 보고 넘어가는 것인데, 그런데 피는 어디서 제공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인데, 즉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만 가능하다는 말이죠. 인간의 피는 안 된다는 것이죠.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전도를 하다가 자빠져서 무릎이 깨져서 피가 나더라도, 그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라는 말이죠. 그래서 제단에서 제물을 잡을 때, 피를 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의 언약과 모세의 세상을 압축시켜서 짜면, 거기서 흠 없는 제물의 피가 나온다는 말이죠.

그게 그 제물과 누구의 만남인고 하니, 하나님 이름의 만남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분이 하실 일이, 그게 사도바울에 의하면 "유월절의 양이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모든 표적을 행했다" 라는 겁니다.

조금 전에 돌, 망치, 원자폭탄, 물, 불이라고 했는데, 그때 질문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신다고 했는데, 그게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말이죠. 인간은 살려고 교회에 나오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간을 죽이는 것인데, 그리고 그게 예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 정녕 죽으리라 !!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꾸만 인간을 죽이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창세기 2장 17절에 의하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으로, 여기에는 타협이 일체 없다는 겁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새벽기도회에 나온 사람들을 보고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들은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주의 뜻을 내려주옵소서"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주의 뜻을 내려주셨다는 것이죠. "내가 너를 죽일 거야" 라고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것 말고요, 내 소원을 들어줘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지 몰라도, 자꾸만 자기 쪽에서 주의 뜻을 고르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제가 아까 신앙생활 태도를 이야기하려면 누구를 보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을 보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의 삶은 "현재 나는 죽어 있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다" 라는 겁니다. 즉 "성령을 받은 자는, 나와 같은 이런 삶이 될 것이다" 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다는 것이죠.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따라서 사도바울의 그 덩치는 몽땅 다 무엇이 되느냐 하면, 주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죽으니까 말이죠. 이것은 "내가 늙어서 죽는다" 라는 말이 아니고, 매일같이 자기가 반복해서 죽으니까, 그것이 곧 주의 뜻이라는 겁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왜냐하면 자기가 죽어야 '활동2'가 되는데, 자기가 죽지 않으면 그게 활동원인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죽지 않으면 '활동2'가 되고, 그렇게 '활동2'가 되면 그런 자기를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또 다시 여러분이 다 아시는 이야기를 하겠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애굽에 나와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인도자로 세워서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실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디로 인도했는고 하니, 홍해를 인도했다는 겁니다.

여기서 일대 진퇴양란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여러분은 벽 속에 갇혀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교회를 보면, 여기에 합판으로 막아놓았다는 말이죠. 이것을 떼보면 시멘트와 석회 부분이 이만큼 틈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위에도 마찬가지인데, 지붕과 천장 사이에 틈이 있다는 말이죠.

* 홍해, 그리고 틈 !!

홍해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면, 그게 '틈' 이라는 겁니다. 틈, 즉 오도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렇게 오도가도 못하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았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주님은 사도바울의 활동을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진퇴양란의 지경으로 넣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곤경에 빠지게 되는데, 그러면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기대가 됩니까? 안 됩니까?

그야말로 진퇴양란이니까, 목적과 기대가 압살되었다는 것인데, 그 장소가 뭐냐 하면, 그게 '틈' 이라는 겁니다. 자기의 목적과 기대가 압살되어서 완전히 납작하게 되는 공간, 그것이 바로 '틈' 이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자기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 히브리어들을 홍해 앞에 딱 세워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뒤에서 애굽 군사가 따라왔다는 말이죠. 애굽 군대가 좀 멀찍이 사흘 뒤에 당도한다고 하면, 그러면 덜 초조할 텐데, 지금 홍해를 앞두고 건너가지 못하고 가지고 주춤하고 있는데, 벌써 애굽 군사는 마차를 타고 와서 당도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그들 사이에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있는데, 애굽 군대가 그것 때문에 지금 그들에게 접근을 못하고 있다는 말이죠. 일종의 신호 대기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히브리인들은 앞에 지금 홍해가 가로놓여 있다는 겁니다.

* 홍해를 건널 수는 없어 !!

그 나왔던 숫자가 남자만 60만명인데, 그 60만명을 모아놓고 민주주의 방식으로 회의를 한다고 하면, 그래서 "지금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저 애굽 군대를 피해서 홍해를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라고 했을 때, 한 사람이라도 손을 들 수 있을까요? 없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은 자기를 스스로 구출할 길은 없다고 했는데, 즉 정답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홍해를 또 확장을 하신다는 말이죠. 홍해를 건너고 난 뒤에 확장을 하는데, 그러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광야가 된다는 겁니다.

여기 사도바울을 치우고 이스라엘을 집어넣으면, 그러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자기가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말이죠. 제대로 옴팍 걸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광야를 신약성경에 보면 뭐라고 하면, '세상'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이 세상을 압축해서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고 시험을 받으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받았던 그 광야에다가 40일 금식기도를 더하면. 그 공간이 무슨 공간입니까?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이고 미국이고 이스라엘이고,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지구상의 모든 나라는 이 늪에 빠졌다는 것인데, 그 틈에 빠져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빠져나올 해답은 없다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것이죠.

* 언약과 함께 !!

그런데 사도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서 빠져나왔는데, 빠져나오지 못해야 하는데 빠져나왔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언약과 함께 빠져나왔다는 것이죠. 언약과 함께 말이죠. 그러면 그 언약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인간입니까? 주의 이름입니까? 주의 이름이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빠져나왔다는 말이죠. 그것을 '주 안' 이라고 하는데, 혹은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님 안, 또는 새 언약 안, 이것이 다 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사도바울의 서신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보니,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따집니까? 그것이 아니면 전체를 하나의 구조화를 시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전체를 하나의 구조화를 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홍해를 앞에 두고, 그 어떤 사람의 아이디어로도 이 홍해를 건너갈 수는 없다는 말이죠.

그리고 모세는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물론 모세도 몰랐다는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어떻게 조치를 좀 취해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고 "네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그 바다에 대라. 그러면 바다가 쫙 갈라질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제가 어릴 때 대구에 있는 서문시장 근처에서 살았는데, 아주 신나게 쫙 갈라지는 것을 자주 보았다는 겁니다. 그 당시에 우리 할아버지가 염색공장을 하셨는데, 염색을 한 천에다가 칼을 조금이라도 대기만 하면, 그냥 시원하게 쫙 갈라져 버린다는 말이죠.

* 모세와 그를 따르는 지팡이 !!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갈라진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손을 댔느냐는 점이라는 겁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와 더불어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데, 즉 지팡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사물체로서, 모세 옆에 붙어있다는 겁니다.

(출 4:1)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출 4: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이 진퇴난관은 하나님이 무엇이 해줘서 구원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는데 필요해서 홍해가 갈라졌다는 말이죠. 히브리인들이 착해서 구원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너와 함께 있기 때문에, 너의 일을 한다" 라는 게 아니고, 그런 의미가 아니고, 그렇게 우리 인간의 일이 아니고, 주님 자신의 일을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갈라지게 하셨다는 말이죠.

*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그 다음부터는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인데,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아니 물이 있었는데 써서 먹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반석을 깨시는데, 여기서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겠습니다.

(고전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여기에 반석은 곧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스도인데, 그러면 그 그리스도가 깨졌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그러면서 비로소 없던 길이 나온다는 겁니다. 성전에서 말이죠.

* 잠시 복습을 !!

여러분이 오늘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 복습을 해보겠습니다. 처음에 '활동1'이 아닌 '활동2', 즉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겁니다. 제단 위에서 하나님 이름이 만난다는 것인데, 거기에 하나님 이름이 계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제단, 즉 이 땅에 내려온 하나님 이름이 다시 아버지께로 귀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제단을 향해서 내려오셨던 분이, 이제 제단이 완성되면 그 제단으로부터 탈출해야지 아버지에게로 가신다는 겁니다. 바로 그 제단이 확장된 것, 또는 세밀화된 것이 뭐냐 하면, 그게 성막이고, 그리고 성막이 확장된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성전이라는 말이죠.

성전에 지성소가 있는데,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무엇이 있죠? 커튼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휘장' 이라고 하는데, 그 휘장을 찢으면 무엇이 나온다는 겁니까? 하늘로 가는 길이 나온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일어난 현상이 있는데, 첫 번째로 휘장이 찢어졌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는 해가 빛을 잃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좀 있다가 설명하겠는데, 매우 어렵다는 말이죠.

그리고 세 번째는, 그때에 무덤에 있던 뼈들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난 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에 출몰했다는 말이죠. 아니 무슨 좀비도 아니고, 무슨 이런 일이 있느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살아나서 현관비번이 바뀐 것도 모르고 번호를 눌린다고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누구십니까? 좀비십니까? 이것은 기적이 아니고, 그야말로 놀라서 자빠질 엽기적인 일이라는 말이죠.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마 27: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마 27: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눅 23:44)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눅 23: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 우리는 갇혀있다 !!

"목사님, 이 전체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그것을 '갇혀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모르면, 교회에 나와서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갇혀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꼼짝 말라는 것이죠.

신약으로 표현을 하면, 마귀의 세계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값없이 팔렸으니 값없이 네가 구원을 받은 것이라"' 라고 해서, 마귀가 그냥 대놓고 아담을 꼬드겨 가지고 자기 품속에 집어넣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값없이 그들을 풀어주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풀어주고 난 뒤에 "네가 구원을 받았으니까 헌금해라" 라고 했습니까? 그렇지 않은데, 그냥 값없이 나왔다는 말이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자체의 과정이 갇혔다는 것인데, 즉 "팔렸다, 풀렸다" 라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갇혀있는 상태라는 말이죠. 그러면 두 번째로 우리는 어디에 갇혀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연성인데, 즉 "자연 속에 갇혀있다" 라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화가가 풍경화를 그릴 때, 그 풍경화라는 게 대상이 무엇입니까? 자연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화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자기의 예술혼을 거기에 담아서 자기 나름대로의 인상을 그 화폭에 담는다는 겁니다. 그게 화가라는 말이죠.

특히 빈세트 반고흐의 경우에는, '해바라기(1888)', '별이 빛나는 밤에(The starry night, 1889)' 라는 작품이 유명한데 말이죠. 별밤은 팝송으로도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해바라기는 물감을 덕지덕지 갖다 붙이듯이 했다는 말이죠.

처음에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대해서 시큰둥했다는 겁니다. "이게 뭐야?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야지, 이게 뭐야? 이것이 뭐가 아름다워?" 라고 나왔다는 말이죠. 그러자 반고흐는 "너는 눈에 보이는 대로 자연을 보지만, 나는 내 마음을 경유해서 자연을 다시 본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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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과 특징
인상주의는 빛이 발산하는 일조량, 날씨, 시간, 관찰자 등 변수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순간 빛을 그리려는 미술 사조입니다. 대표적 인상주의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그의 초기 그림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는데, 이전의 신, 귀족, 낭만에서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주제로 어두운 색채와 내면 심리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후 고흐 그림은 밤, 하늘, 별을 주제로 파랑과 노랑, 빨강 색상을 사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죽은 후에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표작입니다. 배경은 밤이지만 소용돌이치는 별과 밝은 노란색 달이 역동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인상주의 그림은 대상을 눈에 보이는 현상 그대로의 형태를 그리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의 세계를 순간의 인상으로 표현합니다. (예즌니 마음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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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이 보는 자연과 예수님이 보는 자연은 엄연히 다르다는 말이죠. 율법을 타고 내려오신 예수님은, 인간 세계의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죄와 악마의 세력에 완전히 잡혀있다는 말이죠. 즉 "갇혀있다, 팔려버렸다, 노예다" 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죄의 종' 라고 한다는 겁니다.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렇게 노예가 되어있는 상태인데, 특히 죄의 노예가 되어있으니까, 우리 인간들은 사는 게 빡빡하고 힘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탈출을 해야만 하는데, 그 탈출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 인간은 성경공부를 해서 탈출하려고 하고, 혹은 기도를 해서 탈출하려고 한다고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탈출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게 '활동2'가 아니고 '활동1'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 '활동1'을 가지고, 빨리 이 힘든 세상에서 벗어나서 천국에 가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라는 겁니다.

불교의 이론을 여러분도 아시죠? 생로병사, 즉 이 땅에서 병들고 죽고 하는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서 어디에 간다는 겁니까? 극락에 간다는 말이죠. 그것이 불교라는 겁니다. 그러면 불교 신자나 기독교 신자나 세상을 보는 인식에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이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교회하고 주님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편하게 살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데, 그러니 그런 것은 굳이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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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 소원이 무엇입니까?
* B : 예, 행복하고 싶어요.
* A : 왜 그런 생각을 하는데요?
* B : 그냥요.
* A : 당신은 갇혀있어요.
* B : 나는 갇혀있지 않아요. 그런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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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은 등산을 하면서 '야호' 라고 외치면 된다는 겁니다. 어디에 갇혀있다는 느낌은 언제 듭니까? 인식 자체가 하나님이 보는 세상과, 이 땅에 태어난 우리 인간이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죠.

* 죄의 개념이 달라요 !!

죄를 지어서 죄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고, 만약에 죄를 지어서 죄에 갇혀있으면, 착한 일을 하면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산다고 해서, 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 '죄' 라는 개념은, 이게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죄의 개념과 다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 개념은 죄 안에서 형성된 죄 개념이라는 말이죠. "나는 이게 나쁘다" 라고 하면, 그렇게 나쁘다고 하는 게 죄라는 겁니다. "이게 잘못되었어" 라고 하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죄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밥을 먹는다" 라고 하면, 밥을 먹는다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나는 숨을 쉰다" 라고 하면, 숨을 쉬는 것이 죄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는 살아있다" 라고 하면, 그 살아있다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 존재함과 건방짐 !!

그래서 "나는 여기에 존재한다" 라고 하면, 어제 낮 설교 시간에 그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존재합니까? 이 '존재한다' 라는 것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건방짐, 즉 교만이 나온다는 말이죠. "나는 살아있어" 라고 하는데, 그 존재함에 때문에 이런 건방짐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자체가 전부 다 죄라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은 "이것은 죄다" 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죄를 모른다는 말이죠. 선악 구조가 그것인데, 즉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기 때문에, 내가 악을 멀리하고 선을 가까이 하게 되면,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사람이 될 수 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따먹지 말아야 될 과일인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나온 현상으로, 그것이 그만 고질병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죄인이면서도 죄인이 아닌 척을 하는 고질병, 그게 바로 정신병이라는 겁니다. 이 정신병에 빠진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여러분에게는 과연 이 갇혀있는 것에서 탈출할 수 있는 어떤 아이디어라도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면, 밤 12시라도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연락을 해주시기 바랍니다(ㅋㅋ).

제가 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나타나는 현상 중에서 2번을 나중에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그 2번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자연에 갇혀있다고 했는데, 그게 죄에 갇혀있다는 겁니다. 자연에 갇혀있는 것이 곧 죄에 갇혀있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해가 빛을 잃었다는 말이죠.

* 자연도 십자가로 재편성 !!

그러면 여기서 사도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외친 것이 뭐냐 하면, 자연마저도 십자가에 의해서 재편성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해는 해고 달은 달인데, 아침이면 해가 뜨고 밤이면 달이 뜬다는 말이죠. 이것은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고 완벽한 진리처럼 여겨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와르르 전부 다 무너져야 하는데, 왜냐하면 연극이 끝나면 무엇도 철거합니까? 세트도 철거한다는 말이죠. 이 자연 세계는 주님이 주님이 되기 위해서 있었던 임시적 세트라는 겁니다. 즉 연극 무대였다는 것이죠.

그렇게 자연 자체가 죄가 되어버리면, 우리 인간이 그 자연을 어떻게 이깁니까? 해를 어떻게 이기고 달을 어떻게 이기냐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도저히 여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세 번째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무덤 속에 들어가서 뼈만 남았는데, 그러니 의식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뼈가 되었는데,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에 나타났다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당신은 지금 무덤에 있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돌아다닙니까?"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이게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라고 하지 싶다는 겁니다. 정말로 그게 십자가의 효과라는 말이죠.

물론 자기가 나중에 들어서 아는 것이지만, 그렇게 자기가 언제 깨어났다고 하는 것,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타이밍에 맞춰서 나타났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돌아다니는 사람도 나이가 들면 또 죽는다는 것이죠. 그게 마르다 오빠인 나사로인데, 살아났다가 또 다시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났다"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주님 자신, 즉 주의 이름이 벌이시는 표적을 통해서, 주님이 주님이 되도록 드러내기 위해서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이 살아났다는 말이죠.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는 겁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무덤에 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무덤 속으로 가기 때문에, 십자가의 능력, 즉 십자가의 효과로 좀 죽으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살려줄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면 이야기가 굉장히 간단해졌는데, 즉 "자꾸 죽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벌벌 떨지 말고 죽어라. 내가 살려줄게. 십자가만 믿어" 라는,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너의 행함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인데, 그게 로마서의 내용이라는 말이죠.

* 헛웃음이 나는 이 세상 !!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할 것이 하나 남아있는데, 남자들은 군에 갔다와야 하는데, 그런데 이 군대생활이 우습다는 겁니다. 헛웃음이 날 정도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군에 20살에 딱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 고참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고참들의 복장과 태도를 보게 되면, 그야말로 시건방지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짬밥을 좀 먹었다는 것인데, 여기서 짬밥이라는 것은, 군에서 밥을 하는 양이 엄청나기 때문에, 밥을 할 때 쌀을 쪄서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찐밥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죠.

어느 고참이 신참 앞에서 정자세로 있습니까? 그런 고참은 없는데, 짝 다리를 하고는, 복장도 군복이 아니고 군복 안에 방한복 비슷한 것을 입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깔깔이라고 합니까? 그리고 지시도 손가락도 아닌 발가락으로 내린다는 말이죠.

그런 것을 신병이 보면, 그 여유로움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제가 말씀드려는 것은, 그렇게 고참이 되면 인생이 끝이냐는 겁니다. 고참이 되면 인생을 다 살았느냐는 것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요즘 '보물섬' 이라는 TV드라마가 인기가 있는데, 그 드라마를 보면 골프장을 구입하겠다고 하는 건설회사가, 이것은 다른 드라마인가요? 아무튼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그때 구입하려는 쪽은 아주 깐깐하게 나서고, 팔려고 하는 주인공은 아주 겸손하다는 겁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 "역시 재벌은 최고구나. 돈 많은 사람이 최고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죠. 약속 장소를 잡았으면, 그 약속 장소에 나와야만 하는데, 그런데 정작 자기는 골프를 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라운드를 다 끝내야 합니다" 라고 말할 때 그 도도함, 그러면 그게 인생의 끝입니까?

* 짝 다리와 깔깔이가 인생의 목표인가?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데, 그게 인생의 목표의 전부냐는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한다는 겁니다. 특히 남자들은 말이죠. 그러한 허풍과 허세, 그게 그렇게 부러우냐는 말이죠. 지금 우리의 인생은, 아무리 고참이든 신참이든 간에 갇혀있는 꼴이라는 겁니다.

짝 다리를 하고 깔깔이를 입고 돌아다닌다고 해서 인간승리가 아닌데, 좋은 점이 있다고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도대체 인생의 목적을 어디다가 두고 있느냐는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 성경에 나와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요한복음 4장 30절부터 38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 4: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 4: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 4: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 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 예수님의 양식 !!

여기에 보면 3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그대로라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이 궁금한데, 과연 그 일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라고 하시는데, 즉 '추수' 라는 말이죠.

추수가 무엇입니까? 알곡과 가라지를 따로 분류시키는 작업, 그것이 곧 추수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32절에서 '양식' 이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양식이 있었는데, 추수한 것이 곧 주님의 양식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36절이 제일 중요한데, 예수님께서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시는데, 여기에 '즐거움'이 나온다는 말이죠.

여러분, 도대체 무엇이 즐겁습니까? 고참이 되어야 즐겁습니까? 여러분은 일상생활에서 어떤 즐거움이 있습니까? '활동1' 인가요? 아니면 '활동2'에서 오는 즐거움인가요? 예수님은 그게 영생의 열매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 열매 안에 무엇이 소복하게 들어있을까요? 이미 영생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 영생이 소복한 열매 !!

지금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일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데, 그러면 영생이 아주 통실통실하게 열매가 제대로 맺힌다는 말이죠.

그렇게 열매가 맺히면, 이제는 뿌리는 자, 그분이 주님인데, 그렇게 영생을 뿌리는 자와, 그 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거두는 자가 필요하다는 말이죠. 바로 그 거두는 자가 누구냐 하면, 그들이 열두 제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성도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 37절에 보면, "그런즉 한 사람은 심고" 라고 되어있는데,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라고 하시는데, 즉 한 명이 다 심었고, 그 거두는 것은 여러 명이 동원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을 거둔다는 겁니까? 영생이 알차게 들어 있는 영생의 열매, 그것을 거둔다는 겁니다. 이것을 합치면, "주님이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거두는 자의 모집에 나서는데, 그 거두는 자가 일단 영생 덩어리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을까?

그 다음 38절에 보면, 이 말씀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노력하지 않은 것을 거두러 보냈다고 하시는데, 로마서 4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일을 했다고 여기는 자의 경우에는, 삭을 은혜로, 혹은 선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렇다면 여기서 무슨 작업이 동원이 될까요? "내가 무엇을 해서 얻겠다" 라는 자기 활동, 즉 '활동1',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될까요?" 라고 하는, 이런 것들은 주님이 찾아오심으로 제거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 너는 꺼져라 !!

이런 것이 제거가 되지 않는다면 그만 자기가 만든 기적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그렇게 자기가 만든 기적이 되어버리면, 모든 교회 출석과 활동이 자기가 자기를 드러내는, 즉 자기 잘남과 자기 우수성과 자기 괜찮음을 드러내는 증거들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부인이 되지 않으면, 교회에 꽃꽂이를 하든 피아노 반주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그것은 주님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고,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성경과는 정면으로 배치가 되는데, 성경말씀은 오직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 소속, 신분부여, 사명의 흘러나옴 !!

그래서 제가 이것을 정리해서 한번 적어봤는데, 주의 일이라는 것은, 첫 번째가 '소속'이고, 두 번째가 '신분의 부여'이고, 그리고 세 번째가 '사명의 흘러나옴' 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즉 "소속, 신분부여, 사명의 흘러나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갇혀있는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서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그 사람의 소속은 땅의 소속이 아니고, 주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시민권이 하늘의 소속이 된다는 말이죠. 마치 예루살렘에 돌아다니는 좀비와도 같은데,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소속은 이미 죽었고, 그래서 소속이 바뀌면서, 주께서 새로운 신분을 부여해주신다는 말이죠. 즉 주민등록증이 새로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런 신분의 부여는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기도하다가 빨리 늙어죽으면 되겠네" 라고 나오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신 일을 계속 반복해서, 주님이 다녀간 이 세상, 이 갇힌 세상에 그 사람을 파견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무엇이 흘러나옵니까? 사명이 흘러나온다는 말이죠. 즉 노력하지 않은 일, 즉 열매의 영생을 거두는 일에 그들을 주께서 친히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 갇힌 세상,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아직도 여러분의 궁금증은 다 풀리지 않았지 싶은데, 뭔가 껄끄럽고 너무 추상적으로 들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실제적으로 일상생활과 교회생활에서, 이 소속과 신분부여와 사명의 흘러나옴, 이것이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그것을 말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분 변화가 일상생활과 교회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고 하니, 이 세상, 즉 자연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전히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자연세계, 그 복사판이 광야인데, 즉 갇힌 세계라는 겁니다. 그 앞에는 홍해도 가로놓여 있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인데, 틈, 즉 탈출구는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렇게 막혀 있는데,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야채 소시지를 먹어보셨습니까? 분명 소시지인데, 야채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군데군데에 야채가 박혀있다는 말이죠. 쿠키에 건포도가 박힌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 야채 소시지 !!

이것이 1,500년도의 세상이라면, 1,950년도 마찬가지고, 올해 2,025년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하나님께서 거두는 자를 이렇게 성령을 통해서 박아 놓았다는 말이죠. 그렇게 박아 놓으면, 일상생활과 교회생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분리 현상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이 분리현상을 사도바울은 '고난'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믿음부터 이제 고난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고난이 말이죠. 왜냐하면 주님이 오실 때, 이 세상과 분리가 되기 때문인데, 즉 분리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의도적으로 분리하려고 하지는 마시고,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죠. "나는 신자다. 나는 너하고 다르다" 라고, 절대로 그런 짓거리는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오히려 그들과 하나가 되려고 애를 써야한다는 말이죠.

고린도전서 7장에 이런 말씀이 있는데, 즉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억지로 헤어지려고 하지는 말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헤어져놓고는, "봐라,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 라고,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고전 7:10) 혼인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고전 7:11) (만일 갈릴지라도 그냥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 같이 살게 되면 !!

그냥 같이 살게 되면,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자기가 전에는 일반인들과 똑같았는데, 그런데 하늘에서 말씀이 침투해서, 이 내용은 울산강의에서 한 것인데 말이죠.

삼겹살보다도 더 두꺼운 자기 마음속까지, 악마의 모든 방해와 공작을 다 뚫고,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가는 길이 틀렸다는 것이, 그게 자기 마음 속에 도달이 된다는 겁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적, 그것을 자기가 복음을 모를 때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와 똑같은 현상이, 자기 옆에 살고 있는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에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겁니다. 자기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을 통해서 말이죠.

* 무시로 !!

그래서 사도바울은 시도 때도 없이 때를 얻든지 말든지 복음을 전해라고 했는데, 이것은 상대방을 꼬드기라는 소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소원도, 우리의 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죠.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말인데, 그런데 자기가 십자가 복음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낌새를 알아챈 것처럼, 비록 자기의 어눌한 말이지만, 혹시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거의 없는데, 혹시나 말이죠.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게 우리의 사명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주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활동인 것을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 때마다 딴 생각일랑 하지 말고, 오직 중보자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5,04,10 오전 11시에 마침.

오늘도 짝 다리 인생,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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