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나에서 나 빼기

아빠와 함께 2025. 6. 22. 22:40

나에서 나 빼기 

2025년 6월 22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20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에게는 본인이 간택하지 않았던 아내가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내감을 정해서 이삭에게 보내었습니다. 이는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7)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삭의 아내 될 사람도 오빠로부터 다음과 같은 예언을 받게 됩니다. “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 24:60) 이 받은 계시의 공통점은 ‘원수의 성문’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를 정복하는 자가 후대에 나온다는 겁니다.

하나님 원수의 존재는 인간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들이 전부 ‘하나님의 원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기 자신들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과 대척점을 형성하는 안목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오로지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따라서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사람들의 견해는 하나님의 조치와 대립되게 됩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되어야 될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아이를 가질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서 드디어 임신하게 됩니다. 하지만 임신한 배가 안의 내용은 그 부모나 아기가 결정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져 있습니다.

쌍둥이는 어차피 순서 따라 태어나야 하지만 그 순서에 의한 의미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정반대가 됩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겨야 한다는 겁니다. 왜 이런 반전을 하나님께서는 약속 안에 담아두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출생하면서 미리 결정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 난 아이들은 마치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들 같습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0-13)

이 본문에 유념해야 될 것은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라는 구절입니다. 즉 하나님의 안목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출생부터 따지면서 자신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출생과 자기의 죽음으로 자기 삶이 마감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 견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약속이란 ‘죽음에서 도로 받아낸 자’에게나 의미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11:19) 즉 쌍둥이로 태어난 이 두 자녀 관계를 통해서 아버지 이삭에게 집약된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펼쳐진다는 겁니다. 우선 야곱의 경우, 그는 출생 후라도 여전히 자신이 쌍둥이로 태어난 그 시점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출생될 때에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그 의미는 이미 지나간 과거사를 돌리고 서열이 확정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에서 입장에서는 동생 야곱의 계약 조건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자신은 동생으로부터 팥죽을 얻어먹는 이익이 있는 반면 동생 야곱은 엉뚱한 것은 자신에게 찾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창 25:34) 즉 에서 입장에서는 장자권이 바뀔 리가 없다는 겁니다. 먼저 태어난 자만이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에서가 쌍둥이로 태어난 그 시점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다는 점을 반영합니다.

도리아 장자 자리를 탐내는 동생이 한심스럽다고 여길 겁니다. 동생에게 “형 네가 해라”고 넘겨주더라도 자신의 장자 자리는 변함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순진하게도 형이 가진 장자 자리를 자신이 끓인 팥죽으로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형이나 동생이나 자기 자신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 강가에는 밤에서 치열하게 누군가 싸우게 됩니다. 나중에 야곱은 알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야곱이 차곡차곡 성실하게 쌓아온 자기의 모든 가치가 하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현장에서 천사로부터 새로운 목숨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 된 겁니다.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존재의 시작을 말해줍니다. 야곱에게 있어 1-1=0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그냥 1-1=0이었습니다. 에서는 자신 이외에 또 다른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목이 없어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안목이란 약속 전에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이야기의 전개를 볼 수 있습니다. 복과 저주는 같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마치 에덴동산 한복판에 두 개의 나무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미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죽었습니다.

생명나무도 추방되었기에 더는 생명이 없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이미 죽은 세상’에 투입시켰습니다. 이렇게 되면 선악과 나무 안에 생명나무가 자진해서 침투한 바가 되고, 그 가운데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활동할 자격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에서 같은 우리 인간을 야곱으로 바꾸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을 받는다면 에서로부터 출말해야 합니다. 에서의 마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사 47:8) 따라서 에서는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지켜내는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약속을 믿지 않는 자는 사실상 지옥생활을 하는 이유는, 자기의 약점이 남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노력과 자신의 정당함을 자신의 방식으로 증명해야 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야곱에 속한 자들은 단순히 ‘죄 사함받은 나’가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죄사함 작업에 말려들어간 자’가 되는 겁니다.

야곱을 축으로 하여 야곱/에서의 이중성는 출생 이전의 이중성으로 대칭을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의 말씀이 성취가 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예수님은 야곱이 되시고 에서같은 우리는 형제로 삼아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영광으로 인해 복음의 광채가 막히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2강-히브리서 11장 20절(나에서 나빼기)250622-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20절입니다.

히브리서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여기 등장인물이 세 사람이죠. 이삭 나오고, 야곱 나오고, 에서 나옵니다. 특히 이삭 같은 경우 오늘 20절 본문 가지고 다 설명할 것이 아니고 19절과 연관시키면 되겠습니다. 19절에 이삭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이삭은 죽었어야 하는 데 하나님과 아버지 아브라함의 관계성 속에서 도로 살아남은 자가 이삭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했다는 예수님에게 일어나는 그 일이 오늘날 실질적으로 어떻게 우리 현실에 합류되느냐?

죽었다가 도로 찾은 이삭이 그다음에 한 특별한 행위가 에서와 야곱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2000년 전에 있었던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일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약속’이라는 겁니다.

‘약속’은 한때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약속’만큼은 어느 시대든 관할하고 모든 시대에 그 ‘약속’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약속’은 눈에 보이지 않죠. ‘약속’이라는 것은 이렇게 표현하면 적당합니다, 공중에 선 긋기. 공중에 선을 그으면 뭐가 나타납니까? 아무것도 안 나타나죠.

‘허공에 선을 그으면 거기서 두 개의 영역이 칸막이 쳐져 나타난다.’ 이걸 누가 믿습니까? 공중에 뭐가 있는데요? “거기 산소와 질소가 결합되어 있는 거지, 뭐가 없잖아. 그냥 공기뿐이잖아.” 이렇게 되면 뭐 ‘약속’을 안 믿을 것도 마찬가지지만 ‘약속’이 두 개의 영역으로 갈라졌다는 사실도 받아들일 수가 없죠.

오늘 본문에는 ‘약속’으로 인하여 죽었다가 살아난 그 이삭이 하는 행위가 야곱의 세상과 에서의 세상 둘로 구획 짓는, 영역 짓는 그 일을 약속에 준해 실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오늘 등장하는 세 사람, 이삭, 야곱, 에서, 이 세 사람의 인간 존재의 조합이 그 시대에 ‘약속’을 구성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들의 존재는 어떤 식으로 ‘약속’을 구현하고 구성하고 있습니까? 그냥 돈이나 벌고 밥이나 먹고 살면 그건 공중에 선을 긋는 행위는 아니잖아요. ‘약속’을 업신여기는 태도란 말이죠. 그게 바로 에서의 세계에요.

이삭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다, 그 말도 맞죠. 그런데 이삭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말씀으로만 주어진 게 아니고, 어떤 인물이 ‘약속’으로 자기에게 다가왔어요. 그게 리브가입니다. 리브가라는 그 이삭의 아내는 이삭 본인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아내 간택에 대해서 본인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약속’다운 면모가 있어요.

그런데 이삭에게 다가왔던 그 여인 리브가는 그냥 온 게 아닙니다. 어떤 ‘약속’을 지니고 왔는데 그 약속이 창세기 24장 60절에 나옵니다. 리브가의 오빠가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시집가는 누이동생을 보고 덕담을, “가서 애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라”라고 해야 하는데 이상한 용어를 여기에 그냥 던집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그다음에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네 자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원수가 존재하고 그 원수가 장악하고 있는 그 세계는 누구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러나 네 자식이 그 막강한 하나님의 원수의 권세, 그 성문을 열어서 정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담아둬요. 그 예언을 담은 리브가가 성큼성큼 이삭이라는 존재에 접근해 갑니다.


그런데 이 ‘원수의 성문’이라는 게 리브가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에요. 창세기 22장에 보니까 아버지가 이삭을 잡으려고 했잖아요? 옆에 있던 양을 대신 잡아서 양이 죽고 이삭은 양 덕분에 살아나요. 죽음에서 도로 다시 찾은 자가 이삭인데 그 이삭에게 하나님이 예언하기를 17절에 보면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의 씨 이삭이 그 대적의 문을 연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없는 데서 생겨버린 사람, ‘약속’의 사람, 죽은 데서 살아난 사람, 그 ‘약속’의 사람에게는 특별한 사명 같은 것이 전달 되었고, 그 사명을 이수하게 되어 있고, 성립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 이것은 뭐냐? 그 사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상 볼 때 어떤 관점으로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게도 그 시선을 전달해 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약속’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다초점 안경을 쓰고 있다면 ‘약속’된 성령 받은 자도 똑같은 안경을 쓰고 세상 보는 눈이 열렸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바라보면 뭐가 생기느냐?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이 세상을 완전히 철두철미하게 장악했다는 것이 나타나요.

그런데 하나님의 안경으로 장착된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공부해서 된 것이 아니고 ‘약속’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제공된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안목으로 장착된 사람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한다는 말, 이걸 가지고 복이라고 해요.

숫자만 늘어나는 것이 복이 아니고 그 숫자가 늘어나는 개체의 성질, 질 자체가 하나님의 안목과 일치된 안목을 가지는 특수한 인간들의 출현, 그게 복이에요. 그래서 그 복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파악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안목이 있으니까.

그러면 복만 나타나면 되는가? 복이 나타남으로써 하나님의 원수에게 이미 기정사실로 확정된 게 있어요. 이런 하나님의 시선을 받지 못한 사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다. 이건 본인의 의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안목 안에 그렇게 둘로 정해져 있어요.

어제죠. 토요일에 은하수 유치원에서 운동회가 있었어요. 그 은하수 유치원의 졸업반, 어르신이 되어서 우리 손자도 참여한 겁니다. 그런데 학부형들에게 유치원에서 당부하는 조건이 있었어요. 청군은 무조건 검은색 복장, 백군에 속한 아이들 학부형은 무조건 흰색 복장으로 정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관람객으로 참여할 때 검은색은 아니지만 좀 검게 보이는 옷을 입고 갔었어요. 이건 뭡니까? 이건 운명입니다. 내가 나의 대표자가 아니에요. 나의 대표자가 아니고 대표자가 일방적으로 두 편으로 나눴어요. 복 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를 일방적으로 나눠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유니폼을 그 지시대로 맞춰야 해요.

복은 홀로 등장하는 게 아니고 저주와 동시에 등장하고, 저주는 홀로 등장하는 게 아니고 복과 함께 등장한다는 거예요. 비가 오게 되면 지붕의 마루에 의해 빗물이 두 면으로 갈라지잖아요. 지붕의 기울기 때문에 두 홈통으로 갈라진다고요. 하나님의 관점 안에 복과 저주, 저주와 복은 극히 대조적이고 대립적이라는 사실이 그 안목 안에, ‘약속’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 안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니고 있는 여인, 아기를 못 낳는 여인 리브가에게 아기를 낳게 할 때 쌍둥이를 낳게 해요. 이 쌍둥이인 두 형제가 나올 때 그냥 평화롭게, 사이 좋게 나오는 게 아니고 태중에서부터 싸워요. 화합될 수 없는 두 이질적인 성격의 대표자로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 9-13절에 보면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절에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 리브가가 나와요.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은하수 유치원이 정한 대로 난 이미 까만 복장을 하고 가야 돼요. 내가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된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싸움의 경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먼저 태어난 자가 맏이가 되고 나중에 태어난 자가 맏이가 되지 못합니다.

인간 세계에서 아버지의 모든 복은, 상속권은 맏이에게 넘어가요. 쉽게 말해서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은 맏이에게 넘어간다,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5장에서 지금 하나님의 원수가 장악하고 있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시선을 장착하지 못한 일반인들이 쌍둥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전제로 해 계시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해놓고 그다음에 먼저 나온 자가 에서고, 나중에 나온 자가 야곱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먼저 나온 자가 복된 자고 나중에는 그 형님한테 종속되는 차자(次子)가 되어서 모든 복은 맏이한테, 쌍둥이라도 먼저 나온 자가 맏이가 된다, 모든 복은 맏이한테 간다.’라는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장착되지 않은 모든 인간들의 상식적인 안목입니다. 그 안목을 딱 깔아놓고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 곧 종이 된다는 거예요.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바꿔치기 하는 그 사실에 강조점을 두는 겁니다. 이렇게 바꿔치기를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그 종속적인 의미가 나와요. 그게 뭐냐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예요. 그냥 사망에서 사망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개입되게 되면 어떤 전복되는 반전이 일어나는데,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사는 수가 있는 거예요.

‘반대가 된다, 전복된다, 그 결말이 뒤집어진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두 개의 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고 하나는 선악과에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정녕, 반드시, 필히, 예외 없이 모두 다 죽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어떤 반전을 인간이 기대해서는 안 되는 거죠. 그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주께서는 여지없죠. 그냥 죽여 버려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살았다가 죽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그걸로 이야기가 끝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사람의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이야기가 달라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스토리를 쓰지만 하나님의 스토리는 인간의 경험으로서는 지어낼 수 없는 이야기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선악과 먹었으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생명나무가 선악과 속에 개입됨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에서 끊어진 자는 죽는다. 그 죽음 안에 생명나무 끼어든다. 여기서 죽어 마땅한 자에게도 드디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아들을 보낼 때 아들이 짊어지고 온 하나님 ‘약속’의 성취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목을 지닌 자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어차피 쌍둥이 태어나도 맏이 따로 있고 둘째가 따로 있거든요. 왜? 한꺼번에 둘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쌍둥이로 낳게 하고 첫째와 둘째를 차례로 나오게 함으로써 그 아이들은 그다음 세대에 하나님이 활용하시는 ‘약속’으로 보는 거예요.

따라서 그다음 야곱과 에서가 조합이 되어서, 따로 놀면 안 됩니다, 같이 연결되어서 ‘약속’을 구현한다면 그 ‘약속’ 자체를 알기 위해서는 이들의 삶은 다시 어디로 가야 되느냐? 쌍둥이 되기 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쌍둥이 되기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쌍둥이 되기 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면 뭐가 있죠? “야곱도 없고 에서도 없는데 뭐가 있어?” 이렇게 이야기 할 거예요. 로마서 9장에서는 ‘아직 야곱도 태어나지 않고 에서도 태어나지 않은 그 전에 이미 야곱과 에서에 대한 약속이 있었다’라는 거예요.

사람의 안목은 태어난 시점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태어나기 전에는 본인이 없어요.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것과 자신의 운명은 상관없다고 여기거든요? 그러나 하나님의 스토리는 뭐냐? 네가 태어나기 전에 뭐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겁니다. 말씀이라는 거예요,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은 네가 태어나서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이, 어떻게 행하는 가와 관계없이, 영향받지 않고 ‘약속’이 ‘약속’대로 그냥 실현, 완성해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결과물로 이 세상이 딱 두 종류의 인간으로 분류된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안목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갑자기 어떤 마음이 드느냐? ‘나 야곱 할래. 나는 에서 안 할래.’ 에서는 뭐 어떻게 살든 간에 하나님께 저주받기로, 미움받기로 작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후딱 들 거예요.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질 자격이 이미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을 어떻게 하는가? 성경을 보면서 이것을 자기 일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나라는 당사자를 하나님께서는 ‘약속’으로 제거해 버려요. 지워버립니다. ‘누구 마음대로 야곱이고 누구 마음대로 에서야?’ 네 마음대로 관여할 소관이 못 된다는 거예요.

그걸 지워버리지 않으면 살아있는 내가 하나님의 성경이라는 ‘약속’을 이용할 수가 있어요. 아까 기도하신 분도 그걸 약간 언급해서 굉장히 기뻤는데, 현재 내가 살아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를 좋은 쪽으로, 괜찮은 쪽으로 내 선택으로 내 이성적 결정으로 잘 되게 하려는 의도가 내 안에 들어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바로 에서의 마음이에요. 이게 이삭의 마음이고, 놀라운 사실은 그게 야곱의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구성되는 네 명인 이삭, 야곱, 에서, 또 한 명 리브가 그 네 명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붙들린 바 되었지만 그 의식 속에 하나님의 약속은 안중에도 없었어요.

그 누구도 약속에 들어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아무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사적인 이익만 챙기지 하나님의 약속에 진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음을 그들의 인생을 통해 증명해 냅니다. 이것은 뭘 뜻하느냐?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자기가 태어난 그 시점으로 가서 그 시점에서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에까지 넘겨볼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이 인간에게는 아예 없다는 거예요. 인간의 한계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죠. 니고데모가 예수님과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툭 던집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다.”(요 3:3) 이렇게 하니까 니고데모가 역시 사적인 개인적인 운명이 염려가 된 나머지 그것을 자기 일로 확 받아서 “내가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늙은 어미의 몸에서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요 3:4) 이렇게 저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하면서 “여러분 가운데서는 누구도 하나님의 ‘약속’을 알 재주와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하면 여러분 중에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채서 죽고 난 뒤에 천국 갈 수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순간적으로 툭 튀어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에서와 야곱을 다루십니다. 이 ‘다룬다’는 말을 이해해야 해요. ‘다룬다’는 말은 피동적이고 수동적이에요. ‘다룬다’는 말은 내가 나한테 손대지 못하도록 손을 떼주시고 주께서 직접 다루시는데 다루는 그 방식이 ‘야곱적’으로 다루시고 반대로 ‘에서적’으로 다루시는 이 두 종류 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분류 가운데서요.

뭐 이삭이 있지 않느냐? 이삭은 애 낳고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애한테 이전 됐다니까요? 이삭은 ‘약속’에서 빠졌어요. 에서와 야곱을 통해서 이삭은, 에서 같은 이삭이나 야곱 같은 이삭이 되든지 말든지는 자기 아들들인 쌍둥이에게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후차적으로 그 운명이 연관되어 있어요. 이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요.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이삭 같은 운명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차후적으로 아는 것처럼 이삭도 마찬가지예요. 자기 자식에 대해 본인이 손을 떼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삭은 맏이를 좋아했어요. 사냥한 날고기가 맛있거든요. 성격상 맏이는 상당히 외성적이고 활동적인 반면에 야곱은 집 안에 처박혀 있는 조용한 사람이었던 거예요. 에서는 남성적이고 야곱은 좀 여성적인 면이 있는데 얍삽한 면이 있어요.

형 에서는 피부가 안 좋아서 색이 벌개요. 그래서 이름이 에서, 붉다는 뜻이에요. 야곱은 음흉해서 사기꾼 기질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어쨌든 간에 이름들은 하나님의 ‘약속’ 이후의 그 이름과는 상관없이 너무나 육적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야곱’에서 ‘야곱’을 빼 버려요. ‘에서’에서 ‘에서’를 빼버립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야곱을 축으로 해서 야곱 이후에 나타나는 야곱과 에서라는 그 대칭성과, 그리고 야곱 이전에 선악과와 생명나무라는 대칭성을 준비해 놓고 그 양 대칭성을 서로 대비하게 하셨습니다.

생명나무는 복이고 선악과는 저주죠. 야곱이 출생하고 난 뒤에는 야곱은 복이죠, 에서는 저주입니다. 복과 저주죠. 야곱이 인간으로 출생하고 난 뒤에 그 복과 저주의 대칭성은 원래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대칭성 그 자체였다는 거예요.

바탕의 그 이중성이 확장된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이중성이에요. 인간의 세계는 그 구조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 이중성을 밝히는 방법은 ‘야곱’으로 하여금 ‘야곱’을 빼는 겁니다. ‘야곱’에서 ‘야곱’을 빼면 이건 야곱의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야곱’에서 ‘야곱’을 빼면 야곱은 제로(0)가 될까요? 사람이 있는데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없죠? 제로(0)가 되는 겁니다. 에서가 죽으면 에서의 자리는 진흙이 되고 제로(0)가 돼요. 영(0)이 돼요. 그런데 ‘야곱’에서 ‘야곱’을 빼버리니까 거기서 ‘이스라엘’이 등장했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해가 뜰 때에 야곱에게 축복한 하나님 쪽은 없어졌지만 남아 있는 흔적으로 야곱이 절뚝절뚝 절죠.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내 목숨이 날아갔다는 거예요. 야곱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서 안 받아줬다는 것을 지난밤에 알게 됐다는 겁니다.

야곱은 악착같이 자기가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그만한 가치가 내 안에 남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살면 그 윤리와 도덕이 나로 하여금 더 가치 있는 인간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야곱이 바르게살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 죽기를 바랐던 거예요.

그런데 그냥 죽어버리면 에서가 되거든요. 죽기 전에 바꿔치기 한 상태에서 야곱이 죽기를 바란 겁니다. 야곱이 살아있을 때 야곱이 아닌 다른 존재로 바꿔치기 하는 것, 이름이 바꿔치기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죽었던, 그래서 죽음에서 도로 살아남에 대한 그 과정이 그다음의 연차 연차에 주어지는 모든 시대의 ‘약속’의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본질이 앙꼬처럼 들어가 있어야 해요. 죽은 데서 살아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천국 갈 수 없는 겁니다.

6.25 전쟁 때 1950년도 12월에 흥남 부두에서 60명이 정원인 화물선에 1만 4천 명을 태우고 철수 작전이 벌어졌습니다. 그 배는 60명이 정원이고 전차라든지 병기를 싣는 화물선인데 그때 화물선 ‘빅토리아’의 선장한테 통역사가 간곡하게 이야기해서 사람들을 싣고 12월 22일에 출발해서 3일 동안 항해해서 크리스마스 날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했을 때 거제도의 주민들이 쫓아 나와서 그 사람들을 국민학교나 각각의 가정들에 모시고 밥을 주면서 1만 4천 명을 먹여 살렸어요. 빅토리아호가 흥남에서 거제로 내려오는 동안 아이가 5명이 태어났는데 뱃사람들이 이름을 지었어요. 김치 1, 김치 2, 김치 3, 김치 4, 김치 5, 이름을 지었습니다. 새 이름을 준 거죠. 그 김치 5가 이경필 씨인데 거제도에서 지금 수의사로 가축병원을 하고 있어요.

자,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뭐냐? 죽음에서 도로 얻어냈다는 거예요. 죽음에서 도로 얻어냈는데 얻어낼 때 뭔가 하나님의 ‘약속’,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명확한 철칙, ‘너는 살지 못해. 생명나무는 끝났어. 넌 영원히 지옥 가야 돼.’라는 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이것은 제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할 수 없어요.

흥남 부두나 6.25 전쟁의 그런 죽음이 아닙니다. 완전히 근원적인 죽음, 이 근원적인 죽음을 통과하지 않으면 근원적인 생명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려면 살아 있을 때 그냥 자살해서 죽는 것 말고요, 근원적인 죽음이 있어야 해요, 근원적인 죽음이.

이 근원적인 죽음을 하나님의 계시, ‘약속’이 이걸 자기 백성에게 실시 합니다. 실시하는 방법은 이거에요. 운동 에너지에서 위치에너지를 빼는 거예요. 물리학에서 ‘라그랑주 함수’라고 하는데요. 운동 에너지에서 위치에너지를 뺀다는 것은 바로 내 위치라는 게,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운동이 내가 알고 있는 나와 결부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꼭 필요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에서입니다.

지금부터 저를 따라서 잠시 에서가 한번 되어봅시다. 에서는 이겁니다. 나 말고 다른 나는 내게 없다는 거예요. 이게 에서에요. ‘지금 있는 나 말고 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에서와 야곱의 차이는, 아무리 이미 맏이와 둘째가 규정이 되어도 아직도 쌍둥이라는 사실을 있지 않고 있는 게 야곱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미 맏이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쌍둥이 의식이 없어요. ‘내가 왜 둘이 되어야 해? 나는 하나야. 처음부터 하나였고 지금도 하나고 앞으로도 하나일 거야.’ 하나의 자아상, 이게 에서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내가 모르는 짝, 나와 바꿔치기 되어야 할 짝이 나 말고 따로 있다는 걸 몰라요.

그런데 야곱은 나에서부터 나로의 이전이 있어 줘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약속’이에요. 나로부터 나의 이전. 마리아의 아들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로의 이전. 그거 없으면 예수님도 구원 받지 못하죠. 에서 입장에서 교회 나온다고 칩시다. 에서 입장에서 교회 나온다면 왜 나오냐?

내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말씀 듣고, 믿고, 신앙생활 하는 그 전체가 지금 하나밖에 없는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나오는 거예요. 이거 저주받는 길입니다. 이거 지옥 가는 길이에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의 가치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야곱은 본인이 하는 모든 가치가 사람과 사람하고 만날 때, 삼촌하고 만날 때, 그리고 아내와 만날 때, 형과 만날 때, 모든 사람과 만날 때 ‘너는 너고 나는 나고, 나는 너에게 지지 않는다.’라는 생각이었거든요?

그 안 진다는 생각으로, 밤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까지 그런 자세로서 마주해서 자기가, 내가 중요하니까 나를 잃으면 모든 걸 잃기 때문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한계를 다 동원해서 결사적으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씨름했고 싸웠단 말이죠.

그런데 야곱은 바로 내 패, 내가 할 수 있는 힘, 나의 에너지, 그 위치에너지를 다 쏟아냈을 때 비로소 나는 전혀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이건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는 원칙에 준해서 안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이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야곱은 구원받은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에서라면 나중에 이렇게 마지막 남은 변명을 하나님의 심판 때 할 겁니다. 이렇게 변명할 거예요.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산 게 뭐가 나쁩니까? 내가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게 과연 나빠요?”

이것은 영화 <헤어질 결심>에 나온 대사지만, “사랑하는 내가 그렇게 나빠요?” 하는 것처럼 “내가 열심히 사는 것이 이게 나쁩니까? 내가 자식 키우고 밥 먹고 살려고 열심히 애썼는데 이것도 그렇게 질책당할 나쁜 일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묻죠. “누구 살리려고 했지?” “나요, 나!” “저주받을 사람 또 등장했네. 그게 네 안목이야. 하나님의 안목이 아니야. 넌 네 위주로, 너 사는 것 위주로 할 때 창세기 2장의 선악과 따먹는 날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개무시하고 있다.” 개무시한 거죠.

그래서 주님이 없는 사람, 주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왜 지옥이냐 하면 자기가 존재해야 할 이유와 그 정당성과 자기의 모든 것을 본인이 다 커버해야 한다는 짐을 스스로 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본인이 충당해야 해요, 본인이!

맨날 ‘뭐가 나쁜데? 뭐가 나쁜데?’에요.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 한 게 뭐가 나쁜데요? 기도한 게 뭐가 나쁜데? 헌금한 게 뭐가 나쁜데? 전도한 게 뭐가 나쁜데?’ 맨날 뒤에 붙는 게 “뭐가 나쁜데?” 에요.

여러분이 아까 예배 초반에 교독문을 보셨죠? 오늘 교독문 25번이었습니다. 교독문 25번을 보게 되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또 그 위에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우리 죄가 가는데 그 죄를 따라가면서 갚지 않는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죄사함, 너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고…, 잘 들으세요. 주님은 우리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고요, 주님의 죄사함을 위해서 우리를 편입시킨 겁니다. ‘죄사함 받아서 신난다’가 아니라 ‘죄사함 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구나, 하는 그것을 알아서 신난다.’ 그 말이에요.

같은 뜻 같은데 이상하게 그 뉘앙스가 다르지요. 주님이 주인공 되어야 하는데 갑자기 죄사함받은 내가 주인공 되어버렸어요. 교회 와서 죄사함 받겠다?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그것이 바로 지옥 가는 사람이지요. 누가 종이고 누가 주인이에요? 주님께서는 이삭, 리브가, 야곱, 그리고 에서, 써먹고는 다 폐기 처분해 버리고, 그들이 출생하기 이전에 약속된 상태를 출생하고 난 뒤에 그들을 통해서 표현했다는 그 말이죠.

그러면 주님의 약속 가운데 뭐가 들어 있는가? 리브가, 이삭, 야곱, 에서 이 모든 네 가지를 주님이 다 품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품고 있으면서 네 가지의 모든 것을…, 사실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네 가지 모든 것을 약속에 따라서 색깔별로 나타내신 겁니다.

이 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공중에 선 긋듯이, 아무것도 없는 데서 결정된 약속이 인간이 출현하고 난 뒤에 그대로 그들에게 할당이 되는 겁니다. 할당이 되면 우리는 어떤 입장에 있는가? ‘이삭 아니고 야곱처럼 된다면 우리는 구원받겠다’라는 그 자체가 에서적 생각입니다.

특히 에서 입장을 따라가려면, 에서의 마음을 우리가 알려면 충분히 에서 입장이 되어야 하거든요. 창세기 25장 29-34절까지 약간 길지만 제가 후딱 읽어드리겠습니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우리가 에서 입장이 되어보세요. 지금 배가 고픈데 자기가 좋아하는 팥죽 냄새가 진동했다는 말이지요. 사냥에서 돌아와서 지금 막 배가 고픈 참인데. 그럴 때 동생이 얼토당토않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제안을 합니다. 이것은 거래조건에 맞지도 않는다는 말이지요.

‘네가 뭔가를 주면 나도 무엇인가를 주겠다.’라는 것 “내가 이것을 줄 텐데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라는 이것이 거래조건이잖아요.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거래조건을 제시한 거예요. “형! 팥죽 줄까?” “응, 도! 너는 뭘 원하는데?” “형의 장자권을 원한다.”

그 소리 듣고 에서가 얼마나 한심스럽게 여겼겠습니까? ‘이게 아무리 철이 없어도 이렇게도 없나?’ 장자는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결정 났어요. 먼저 태어난 것을 어쩌라고요? 이미 먼저 태어났는데! 이미 먼저 태어났는데 나중에 팥죽 한 그릇 얻어먹는다고, 시장통에서 파는 칼국수 한 그릇 먹는다고 해서, 돼지국밥 한 그릇 얻어먹는다고 해서 그게 바뀝니까?

말이 안 되지요. 이걸 연극으로 만들어 본다 합시다. 형이 바깥에서 돌아와서 ‘아, 과일이 먹고 싶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수박 조각을 동생이 쥐고 있다는 말이지요. 형이 “야! 그 수박 나 주면 안 돼?” “이 수박 줄 테니 이제부터 형이 동생하고 내가 형 될게.” ‘그래? 네 마음대로 하세요. 빨리 수박이나 내놔.’

여러분, 이게 거래조건이 된다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관점, 예수의 관점이 없는 때는 이 복음이 전부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예수님이 승천을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교회 50년 다니고 성경을 백 독해도 중요한 것은 내 이익이 중요하고 내가 우선이에요.

하나님이 없지만 만약 있다고 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 그것이 나에게 가치로 쌓이고 쌓여서 저축이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우선이니까요. 그 점은 야곱도 만만치 않아요. 둘 다 마찬가지라니까요.

그래서 교회 나올 때 여러분이 특별히 에서의 관점으로 교회 나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가 나에게 무슨 이익이냐?’ 에서입니다. ‘이것 믿었으니 천국 가겠지.’ 에서입니다. 교회 백날 다녀도 내가 주님한테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을 못 하는 한 그것은 에서입니다.

평소에 내가 쌓아놓은 착함과 윤리와 도덕의 가치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는 지옥 갈 자료들을 긁어모은 거예요. 교회 60년 다닌 것이 나로 하여금 점점 지옥 가는 사람으로 만들어 낸 그런 소스들, 자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결국 야곱도 해결책이 없고, 에서는 물론 해결책 없고요. 이삭도 해결책 없습니다. 당연히 없어야지요. 약속이 주인인데 인간이 자기 운명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이삭은 약속을 알았다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이삭이 하나님께 속았어요. 이삭은 자기 아내에게 속았고요, 자기 아들한테 속았고요, 하나님께 속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속음을 당하지 않고서는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한테 우리는 철저하게…, 곧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 낸 하나님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아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속여줄 때나 가능한 일이에요. 진짜 하나님이 나를 속여줄 때나.

속여준다는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어요. 중국집에 데려가서 “너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주께서 우리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것처럼 묻습니다. 우리가 “짜장면요!” 하니까 주님께서 주방을 향하여 “여기 짬뽕 두 개!” 이렇게 시키면서 “아, 짜장면 시켰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존재 자체를 개무시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안목이에요. 이삭은 맏이 에서를 좋아합니다. 야곱은 엄마나 좋아하지 이삭은 별로 안 좋아했어요. 그러니 이 네 명의 식구가 백날 모여봤자 창세기에 나왔던 약속이 있잖아요,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창 24:60) 그리고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7), 이러한 내용과 전혀 지금 상관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 선교사가 어떤 양반집에 가서 선교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구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양반집 부인이 “선교사님! 그것 믿습니다.” 해놓고 그다음 날 그 부인이 하는 일은 이불 홑청 가는 일이에요. 주님의 승천과 이불 홑청 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없지요. 그런데 만약 그 양반 부인이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그냥 듣지 않고 성령에 의해서, 공중에 선 긋듯이 아무것도 없는데 활동하는 성령을 받아서 그 구획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그쪽에 속했다면 그 양반 부인은 그날도 이불 홑청을 갈면서 ‘아이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내가 선교사님에게 복음을 듣기 전까지는 이것 해서 양반 집 부인으로서 가치 있고 의미도 있고, 나의 포지션, 양반집 부인으로서의 위치에너지에 충실한, 그래서 남 보기에 내 할 일 다 했다고 자랑질을 할 수 있는 장점들로 가득 찼는데 복음 듣고 난 뒤에는 똑같은 이불 홑청’이에요.

여느 때와 똑같이 이불 홑청 갈면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다미 방망이로 삼베를 치면서 ‘이게 다 무슨 소용…’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별로 웃지도 않으시네요. 바꿔치기, 이것은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로 하여금 이불 홑청을 다듬게 한 거예요. 죽은 자로 하여금 자식을 키우게 했고, 죽은 자로 하여금 교회 나오게 했고, 죽은 자로 하여금 예배 드리게 하고 말씀을 보게 한 거예요.

왜? 주님 하시는 일은 ‘빼기’니까. 빼는 거예요. ‘나’에서 ‘나’를 빼는 거예요. 에서는 자기 하나밖에 없어요. 빼니까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야곱에서 야곱을 빼니까 야곱에 가려졌던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주님이 계신 겁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이름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서.

에서의 평생의 모든 관심사는 자신의 영광이었습니다. 그게 놀랍게도 요한복음 12장 43절에 나옵니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런데 방금 읽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다’라는 이 대목은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7장 8절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이게 에서 아닙니까.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맞잖아요. 과학적으로 맞잖아요. 철학적으로 맞는 이야기에요. 학교에서 배운대로 하면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습니다.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심리학, 삐아제(Jean Piaget, 1896-1980)의 심리학은 이거예요. “여러분 외에는 다른 이가 없습니다.” 불교의 철학이 이거 아닙니까? 천주교의 철학이 이거예요. “당신은 소중합니다.” 뭘 빼요? 빼면 안 되지요. 나밖에 없으니까. 단벌인데, 옷이 한 벌밖에 없는데 이걸 빼면 안 되지요.

그러나 복음은 달리 이야기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의 복음의 광채를 ‘지금의 너 말고 따로 너, 죽고 난 뒤에 마련한 구원받은 너, 야곱 같은 너, 복 받고 사랑받은 너는 따로 있다’라는 이것을 누가 가리는가?

에서같은 덩치인 내가 가리고 있으니 주님의 성령께서는 나를 개무시하는 작업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살게 하시는 거예요. “네가 열심히 바르게 살았어?” “예!” “하니 뭐하나?” 하니 뭐합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끝으로 히브리서 2장 11절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야곱과 에서는 다 주님께 속합니다. 그러면 야곱은 누구냐? 야곱은 예수님이지요. 에서는 누구냐? 에서같은 우리, 에서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을 알고 야곱으로 변했고 이스라엘로 변한 우리지요.

그러면 그 둘은 뭐냐? 쌍둥이죠. 쌍둥이는 뭐냐? 형제지요.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는 그 양자가 되는 겁니다. 대칭성이에요. 이동성, 대칭성. 야곱을 축으로 해서 천국 가고 지옥 가는 사람인 야곱과 에서로 나눴다면, 그 이전에 우리가 출현하기 전의 ‘약속’ 안에서 선악과 따먹고 지옥 가야 마땅한 우리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을 형제로 삼아서 천국 백성 만들었다는 이야기, 이게 약속의 이야기, 이게 바로 복음의 이야기, 하나님이 쓰신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속지 않으려고 하기에 결국 우리 자신이 가짜인 것을 그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죽으시고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의 안목이 쳐들어왔을 때 우리가 그동안 헛짓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이고 행복이고 그게 생명이고 구원인 것을 이제는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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