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자발적 약속 파기

아빠와 함께 2025. 6. 15. 22:29

자발적 약속 파기 

2025년 6월 15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17-19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By faith Abraham, when he was tried, offered up Isaac: and he that had received the promises offered up his only begotten [son],
11: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1: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꼭 남겨 둘만한 것들이 있어서 거기서 비로소 희망이 피어날 겁니다. ‘하늘의 별처럼 네 후손이 많아진다’는 약속이 성립되려면 그 바탕이 되는 최초의 인물을 튼튼하게 보전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최초 거점을 제거하십니다. 없애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안목에서 약속의 바탕은 아예 존재하지 않음이 됩니다. 단순히 없는데서 새로 생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무엇을 키워낼 것인가조차 성립되지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즉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 근거로 해서 후대를 이어나갈 것인가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런 겁니다. 인간들의 궁금증이나 인간들의 모든 기대조차 무산시켜 버립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기대조차 할 자격이 없는 겁니다. 인간은 늘 하나님을 대하면서 바르게 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차마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있어 인간들의 이런 성향이 방해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시험을 받기 이전과 시험 받고 난 뒤의 상황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달라질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그것은 ‘약속’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같은 것인가를 묻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을 갖고 있지 말아야 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약속에 대한 인간들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과 이스마엘 생각의 차이를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시험도 받지 않았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지시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다음과 같이 삽니다.

첫째, 자기를 위해 삽니다.

둘째, 자기 것을 위해 살아갑니다.

셋째, 살기 위해서 삽니다.

넷째, 자기가 자기를 만듭니다.

다섯째, 사나 죽으나 자기를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마엘은 이삭의 곁에서 추방대상입니다. 그 과정은 이러합니다.
먼저 하갈이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를 멸시합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이로 인하여 하갈은 자기에게 대를 이어 아들을 있다는 점을 들어서 공격하니 사라가 하갈을 박해합니다. “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 곁 곧 술 길 샘물 곁에서 그를 만나” (창 16:6- 7)

학대를 이기지 못하고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가출하게 되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집으로 돌아가 여주인의 종으로 살 것을 명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  소소한 가정사로서 두 여인이 헤어져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부름받은 자입니다. 전체 인물들을 저주와 복음으로 나누는 일에 소홀히 해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집으로 도로 돌아가지만 창세기 23:9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집으로부터 강제 퇴출 당하게 됩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창 21:10) 하갈을 결국 분리시키는 이유는 아브라함 언약으로 정립되는 복과 저주가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즉 저주의 특징은 복된 자를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이고, 여기에 대해서 사라는 기어이 종과 그 자식을 추방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10-11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이삭처럼 혈육과 무관하게 태어난 자 외에는 무조건 율법 아래에 속해 저주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이 차이점은 이삭과 아브라함은 ‘희생을 위한 희생’에 가답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상대했지만 이삭을 바치고 난 이유에는 아브라함은 희생물과 상대해야 합니다.

이스마엘은 혈육에 의해 잉태된 자이지만 이삭은 마치 멜기세덱과 같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이것을 갈라디아서 4:27에서는 ‘잉태치 못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잉태치 못한 자는 성령으로 태어난 자, 곧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라는 뜻입니다.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희생물 속의 내용이 되는 겁니댜. 누구를 살리기 위한 희생물이 아니라 이 죄악된 세상에서 유일한 약속이 이미지가 희생물 이미지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대결을 벌리게 되는데 그 싸웠던 상대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곧 해가 뜬다”(창 32:26) 이는 싸움에 있어 천사가 야곱에게 패배했다는 말이 아니라 야곱이 속해 있는 세상과 천사가 속해 있는 세상이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야곱의 속한 세상은 본인들의 노력으로 성과를 내는 세상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하심 말고 다른 것을 묻지 않는 세상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이디오피아 내시는 성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고 있었음을 성령을 통해서 빌립 집사에게 알려줍니다.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사 53:6-7)

이 대목에서 희생자는 아뭇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즉 그 어떤 신적 초월적인 기적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저주에서 복으로 바꾸는 백성의 공장터 역할을 다하십니다. 심지어 “제가 언제 주님을 위하여 먹을 것을 주었습니까?” 할 정도로 말입니다. 바로 이들이 복받은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책임하에 살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1강-히브리서 11장 17-19절(자발적 약속파기)25061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17-19절입니다.

히브리서 11: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라고 하셔놓고 지시하기를 ‘그 자손을 죽일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약속의 모태가 주어지면 그다음부터는 죽죽 자손이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이 또 자손을 낳으면 약속이 이 지상에 구체화 되면서 확장되어서 하나님의 약속은 구현된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식이 없는 가운데 이삭을 주시고 이삭을 통해 자손이 번식한다고 하면서, 그 이삭을 절단내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하나님의 ‘자손이 번식한다’라는 그 약속은 나중에 부도가 나죠.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이삭이 살아있어야 많은 자손이 계속 이어질 텐데 초장에 그 약속을 그냥 없애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서도 성사될 수 없죠.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스스로 파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게 하나님과 약속 사이의 믿음 관계에요. 인간들의 약속은 ‘약속대로 실천할 것이다.’ 하면 ‘그렇게 믿습니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약속을 믿는다 할 때 그 약속 가운데 하나님 보시기에 빠져야 할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약속대로 되는 것을 지켜보는 그 시선, 관찰 ‘과연 약속대로 되는구나.’ 이렇게 주시하는 나 자신, 약속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있고 이런 식으로 약속을 확인하고 싶은 그것을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믿음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것에 철퇴를 가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게 바로 약속이에요. “하나님 나라에 가겠습니다.” 하나님 뜻은 “오지 마. 너 못 와. 올 수 없는 곳이야. 네가 올 수 없는 곳이 천국인 것을 믿느냐?”라고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도 가고 싶습니다. 살아서 고생했으니 죽어서는 호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네가 불신자야.” 이것은 고집스럽게 네 방식을 밀어붙이는 거거든요. 이것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고 오기에요. 그 오기의 원인은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쳐다볼 게 아니고 약속을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 쪽에서 그 관계를 서서히 파괴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관심사를 하나님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돌리는 작전을 쓰셨습니다.

하나님께 관심이 있으면 ‘하나님 살아있고 나 살아있고’ 둘 다 살아있는 게 되잖아요? 내가 살아있는 한 그것은 하늘나라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기예요. 거짓말입니다. 어쨌든 간에 나를 없애는 방법을 사용해야 해요, 나를 없애는 방법, 나를 제거하는 방법.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좋아합니다. 하나님, 믿습니다.’라는 그 나를 제거해 줘야 해요.

뭐 도 닦는다고 제거되는 게 아니거든요.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해도 뭐 내가 살아 있으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나 이제 너와 계약 안 한다.” 계약을 철폐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계약 끝났어요. 아브라함하고 계약 안 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계약은 끝났어요. “너 누구세요?” 약속 안 하죠.

계약했던 그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계약했던 아브라함을 어디에 압축을 시키느냐 하면, 이삭에 집어넣어요. 꾹꾹 눌러서 이삭 안에 집어넣어요. 이삭 안에 집어넣으면 아브라함은 생각하기를 ‘나에게 자손 이삭이 있으니까 내가 없어도 이삭이 잘 자라겠지.’라는 생각으로 건너가는 그 다리, 그 다리를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 끊어버립니다.

‘나는 이삭을 믿었다.’라는 것조차도 성립되지 않도록 끊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과 계약했다.” 그 계약 종결시키고, 파기시키고 “나 이제부터는 이삭과 계약한다.” 하고 이삭 계약으로 넘어오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에 관여하는 것을 끊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죽음에 넘기는 방법이에요.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 17절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라고 하는데 ‘시험’이라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시험받은 후의 세계가 시험받기 전에는 예상도, 상상도 못 한 세계라는 것을 시험을 통해서 따로 마련해주는 거예요. 시험받기 전의 상상했던 세계가 시험받은 후에는 전혀 엉뚱한 세계로 전개된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이런 시험에 대해 좋은 예가 창세기 32장에 보면 나옵니다. 창세기 32장에 얍복강에서 야곱이 뒤에서는 형이 추격하고 있고 그래서 야곱은 형을 달래기 위해 일단 뇌물을 주기로 작전을 짰고, 혹시 형이 자객을 보내 자기를 죽일지 몰라 밤새도록 얍복 강변을 지키고 있는데 그때 형의 자객이 오는 게 아니고 뭔가 낯선 사람이 자기를 공격했어요.

공격받고 가만히 있을 야곱이 아니잖아요. 야곱은 어릴 때부터 질 줄을 몰랐어요. 태어나기 전부터 형과 싸웠으니까요. 엄마의 태 안에서부터 싸운 이력이 있기 때문에 싸움에 있어 누구한테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누군지는 명확하지 않은 데 밤중에 야곱을 공격할 때 야곱은 살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웠습니다. 밤새도록 싸워요. 승부가 끝나지 않는 싸움입니다.

이때 창세기 32장 26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이제 곧 해가 뜹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야곱아 네가 지금 생각하고 상상하고 씨름했는데 그게 바로 내가 없는 세계, 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계의 특징을 네가 송두리째 다 보여준 것이다.” ‘이제 밤이 지나고 해가 뜨면 인간들이 잠자고 있을 때 활동하는 천사의 세계로 나는 떠나야만 하’죠.

이 이야기를 할 때 해가 뜬다, 난 더 이상 너와 상대할 수 없다는 말을 딱 들을 때 야곱은 내가 사람하고 상대한 게 아니고 하나님과 상대하고, 그 하나님은 나한테 축복을 주신 하나님인데 나의 적으로 간주해서 죽기 살기로 쓰러뜨리기 위해 애를 썼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뭐냐? 난 이 낮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원수로 행동했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대로 노출된 거예요. “이제 곧 해가 뜨니까 우리 여기서 갈라서자. 넌 네 갈 길 가고 난 내 갈 길 가겠다.”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이 인간을 접촉하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인간을 접촉하는 방법은, 인간이 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우리로 하여금 원래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는 그 일을 주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모든 죄는 ‘나는 살 자격이 있다’라고 여기는 그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살아 있으니까 자꾸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아있으니까 교회 나가고, 살아있으니까 천국 가려고 하는 이 모든 잘못의 원인은 내가 살아있다는 의식 때문에 생긴 겁니다. 아예 죽여 버리면, 아예 나를 없애버리면 천국 갈 생각도 안 할 거고 하나님을 원망할 생각도 안 할 거란 말이죠.

내 인생이 이렇게 고달프고 망가졌다고 하나님께 불평할 생각도 안 할 거란 말이죠. “하나님이 그동안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요?”라고 하나님께 대들지도 않을 거란 말이죠. 이 모든 하나님에 대한 적대적 행위의 기본은 내가 여기 아직 살아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묻질 않아요, ‘과연 내가 살 자격이 있는지?’를. 여태껏 우리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없어요. 하나님 뜻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바르게 살기’에요.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바르게 살기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백 퍼센트 지옥입니다. 손가락 발가락 스무 개 다 장에 찍는다고 해도 이야기할 수 있어요.

‘바르게 살기’ 이것이 자기를 지옥으로 몰아넣습니다. 왜 바르게 살죠? 그 의도가 굉장히 수상해요. 추잡하고 더러워요. 이 세상에 가장 추한 인간이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 추잡한 일, ‘바르게 살기’의 정 반대말이 희생입니다, 희생이에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식을 약속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때문에 죽은 희생물을 약속으로 주시는 거예요. 교회에서 나오는 간증들 들어 보면요. 참 추잡하고 더러운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어요. 평생을 십일조 하고, 주를 위해 헌금 다 갖다 바쳤는데 나중에 돌아오는 것은 연금도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자기가 양육했던 제자들로부터 “목사님, 요새 살기 힘들죠?” 여기저기서 연락이 와서 넉넉하게 연금 이상으로 잘 먹고 잘산다는 간증을 봤어요.

그래서 ‘아, 저게 추잡하고 더러운 짓이구나. 드디어 자기 본색을 드러냈구나.’ 하나님, 주님, 백날 입에 발린 소리 해봤자 진짜 노리고 노리는 것은 ‘하나님, 저 다치면 안 돼요. 하나님 저 죽이시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 가리면서 죽이세요. 저 얼마나 충성했는지 주께서 아시죠? 저 불신자나 지옥 보내세요.’ 이런 거.

주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그런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깔끔합니다. 깔끔한 게 뭐냐? ‘지저분하게 죽기’에요. 인간에게는 바르게 산다는 게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바르게살기’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바르게 죽는 거요? 바르게 죽는 것도 성립이 안 돼요. 더럽게 살다가 그냥 죽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맺는 관계는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만나는 게 아니에요. “저리 가!” 밀어내 버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 다른 말로 하면 희생물을 통해서만 만납니다. 그 희생물은 하나님의 직접 작품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그 희생물을 주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희생물이 되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렇게 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고상한 하나님이라는 그 하나님 이미지와 완전히 단절을 시켜버려요. 이삭이라는 사람이 희생되는데 그 소년이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이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이삭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난 자식이지 아브라함의 혈육으로 태어난 자식이 이삭이 아닙니다. 관계없는 자식을 하나님이 주시고 그 관계없는 인간이 아브라함에게 있어 희생물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고 후손을 주겠다고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뱉은 자기 말에 대해서 그 자손이 어떤 모습으로 계속 실물을 보여주는지를 하나님이 직접 희생물이 되시면서 보여주시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죠? 하나는 이삭이고 하나는 이스마엘입니다. 이 이스마엘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보면 이삭이 어떤 존재인지가 자동적으로 드러날 거예요. 이스마엘은 첫 번째, 자기를 위해 살았습니다. 두 번째, 자기 것을 위해 살았습니다. 세 번째, 살기 위해 살았습니다. 네 번째, 자기가 자기를 만들었습니다. 다섯 번째, 사나 죽으나 자기 겁니다. 빨리 지나가서 다 못 외우죠? 다시 하겠습니다.

이스마엘은 자기를 위해 살았습니다. 두 번째, 자기 것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자기 노동의 대가, 이런 거죠. 세 번째, 살기 위해 살았습니다. 네 번째,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다섯 번째, 결론적으로 사나 죽으나 살아도 나를 위해서 죽어도 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게 이스마엘입니다. 혈육에게서 난 자식이에요.

그러니 인간 중에 어느 인간도 이스마엘의 프레임, 이스마엘 테두리에서 벗어날 자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왜 의도적으로 이스마엘을 이삭 있기 전에 의도적으로 낳게 했습니까? 인간이라는 프레임을 이스마엘을 통해 백 퍼센트 완벽하게 다 보여준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에게 어떻게 했느냐? 창세기 21장 10절에 보면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라고 했어요. 내어쫓으라. 아, 정말! 그런데 처음부터 이삭을 낳았다고 해서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창세기 16장에 보면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했다고 정실부인 사라를 우습게 여기면서 정실부인 노릇처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라가 도저히 참지 못해서 어떻게 했는가? 아이를 잉태한 그 하갈을 추방했죠. 추방했는데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창세기 16장 9절에서 하갈이 집을 나가니까 살 곳이 있어야죠. 하갈이 살 데도 없이 당장 힘드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주인에게 복종하라고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러고 난 뒤에 다시 쫓아내는데 그 복종하라는 말을 통해…, 이런 게 어려운데요. 하나님께 복과 저주 양쪽의 권한을 받은 자가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을 통해 복이 전달되고 저주가 전달됩니다. 그런데 잉태했다고 해서 첩 주제에 정실인 진짜 아내 구박했다는 이유로 쫓아내 버리면 이것은 그냥 하나의 가정사가 되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이 가정사로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일단은 하갈로 하여금 여주인 사라에게 복종하게 하고, 그다음에 복과 저주가 어디서 분리되고, 어떻게 분리되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저주라고 하는 것은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복이 출현하지 않으면 저주도 출현하지 않아요.

복과 저주는 같이 출현돼야 하는 겁니다. 복이 등장했다는 말은 복과 함께 기거할 수 없는 것은 모조리 저주가 돼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복과 저주가 후에 하나의 가정사를 통해 어떻게 구체화 되는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복과 저주가 분리되면서 그다음에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이 뭐냐? 이스마엘이 왜 저주받는지가 본격적으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나와요. 신약에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1-22절에 보면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왜 율법이 동원되어야 하느냐? 이스마엘, 육에 속한 자들의 특징이 있는데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등장하면서 졸지에 사람들은 ‘내가 이삭과 차이점이 뭐냐? 이삭과 내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이삭과 내가 어떤 점에서 구별이 되는가?’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으로 줌으로써 이삭을 표준화해요. 이삭을 스탠다드로 해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이삭 말고 모든 자들은 율법 아래 속했는데 율법 아래 속했다는 그 자체가 바로 저주 아래 속한 거예요. 율법대로 바르게 살면 복 받는 게 아니에요. 율법 아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그것은 저주 아래 있는 거고 저주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이야기를 아주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사람으로 태어났어요? 그러면 저주 아래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저주 아래 있는 거예요. “아버지 누구십니까?” “내 아버지는 아무개입니다.” 그러면 저주 아래 있겠네요. 저주받은 자가 저주받은 자를 자식으로 낳는 거예요.

그러면 복 받은 자는? 아버지 없이 태어난 자가 복을 받죠. 아버지 없는 자만 복을 받아요. 아버지 있는 자는 모조리 다 저주받아요. 이게 말씀이고 이게 성경이고 이게 진리에요. 뭐 교회 몇 년 다니고…, 그런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에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주받은 내 신세를 복의 신세로 바꿀 수 있느냐?’ 바꾸는 방법은 내가 나로부터 제거되어야죠. 제거되는 그 방법은 하나님이 희생한 것에 같이 합류하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은 둘 다 어디에 말려들었느냐 하면, ‘희생을 위한 희생’에 말려들었습니다.

제가 ‘희생을 위한 희생’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브라함은 이삭 때문에 구원받았고, 이삭은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받았다’라는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누가 구원받는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구원받는 존재가 또 생겨버려요.

구원받는 존재가 또 생겨버리면 그다음부터는 이스마엘과 똑같은 코스를 밟게 돼요. ‘나는 나를 위해 살았다. 나는 나의 것, 내가 구원받은 그 구원을 위해 나는 살았다.’ 그 똑같은 코스, 구원받기 위해 살았다는 그 똑같은 코스에 들어서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습니다. 나를 완전히 절단내서 나라는 자리가 희생의 자리로 대체되어야 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래서 3장 21-22절에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죄 밖으로 벗어나서 율법대로 산 사람이 없고, 바르게 살 사람도 없다는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바르게 산다는 것은 바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교묘하게 감추는 하나의 지저분한 짓이 되는 거예요. 죄 밖에 나올 게 없으면서 “예수 믿고 성령으로 바르게 살았습니다.” 우기는 사람들 전부 다 추잡하고 더러운 인간들이에요.

그러면 ‘추잡하고 더러운 인간인 내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잘 못 됐어요. 그 질문은 우리가 할 질문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제공하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 뭘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는 성립되는데 “주님이 나에게 뭘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아요.

주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는 이유는 이미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물을 필요조차 없는 거예요. “곱게 지옥이나 가라.” 곱게 지옥이나 가면 되지 뭘 바르게 한다느니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하겠는데 그런 가능성이 없어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그 대목이 나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요. 제정신 같으면 이 말씀 듣고요, “아 그렇구나.” 대번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목자께서 마지막에 양과 염소를 심판하고 그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여기에 복이 나와요. 복이 나온다고요.

저주받은 우리에게 복이 주어지는 데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25:34)라고 하시면서 35-37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하고 도리어 반문하고 있어요.

“제가 뭘 한 기억이 없는데요? 주님은 왜 이러십니까? 제가 주님한테 뭘 한 기억이 없어요.” 이게 정답입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믿음의 세계라는 것은, 해가 떠 있는 이 세상엔 믿음이라는 게 없어요, 없다고요. 믿음의 세계는 어디 있느냐? 이 해 뜬 속에 하나님께서 참여할 때 희생물로 참여했고, 그 희생물 안에서만 믿음이 있어요. 왜? 그 희생물이 약속이기 때문에요.

약속이 있고 약속에서만 믿음이 나와요. 인간에게는 믿음이 안 나온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자식에게서도 믿음이 안 나옵니다. 오직 율법 따라 살아가는 저주만 옴팍 뒤집어쓸 뿐이에요. 잉태된 자에게는 믿음이 없어요.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은 전부다 천국에서 제공되는 겁니다. 다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주님의 인공지능이에요. 내가 만드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친히 만들어낸 인공지능이라니까요. 안에 있는 정보 전부다 주께서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어떤 미국 드라마에 이런 게 있어요. 자기 형이 억울하게 누명 쓰고 교도소에 가서 한 달 내에 사형당하게 되어 있었어요. 그때 똑똑한 동생이 형을 구하겠다고 은행 강도로 위장해서 일부러 체포를 당합니다. 그런데 그 교도소에서 형을 탈출시키는데 어떻게 하느냐? 자기 몸에 문신을 새겼어요. 제목이 <프리즌 브레이크>(Prison Break, 2005)라는 드라마에요.

그 몸에 새긴 문신 하나하나가 교도소의 설계 도면입니다. 전부 다 자기 몸에 새겨놓은 거예요. 자기가 움직이는 설계 도면입니다. 자기 몸 하나 희생해서 형을 건지는 거예요. 희생물 안에는, 희생물 되시는 그 예수님은 아버지의 창세 전의 모든 계획이, 설교 도면이 예수님 몸에 다 들어있어요. 다 들어있어서 그 도면대로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거기서 건져내는 것은 백 퍼센트 주님의 고유 권한이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은 백 프로 복입니다. 저주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가 날 잉태한 게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아버지가 여러분을 잉태한 게 아니고 잉태치 못한 자로 규정해서 잉태한 분의 모든 창세 전 계획이 잉태치 못한 자의 인생에다가 압축해서 쑤셔 넣는데 그 첫 번째 사례가 이삭이란 말이죠. 첫 사례가 이삭입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 다시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에 오늘 본문에 이삭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도로 받은 것이다.

이 점은 같은 히브리서 7장 3절에서 멜기세덱을 표현할 때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아들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는 그 믿음을 가진 거예요.

아브라함은 자기의 몸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자기 몸을 어떤 공장? 어떤 시스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를 생산하는 공장 터로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진 겁니다. 장소 제공이지요, 장소 제공.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이젠 어디로 적용되느냐 하면, 이삭과 아브라함의 계약이 아니고 이삭 계약으로 넘어와요.

이삭 계약으로 넘어오게 되면 아브라함 때는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라고 되어 있는데 창세기 22장 17에 보면 이삭한테는 뒤에 더 뭐가 붙어요. 하늘의 별도 나오지만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나옵니다.

‘바닷가의 모래같이’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 하나님의 약속의 자손들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을 수급하는 공급책? 인력 공급책들입니다. 새벽에 인력시장에 나가 있으면 건설 현장에서 “오늘 미장이 다섯 명!” “예! 됩니다.” 그 공급책. “혹시 도구 필요합니까?” “도구는 필요 없습니다. 믿음만 갖고 오세요.” 믿음만 갖고 오라는 거예요.

그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나님은 나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에요. 하나님은 나하고 상대하지 않는다. 왜? 왜 나하고 상대하지 않느냐? 하나님은 잉태치 못한 자와 상대하기 때문에. 뭔가 부모로부터, 혈육으로부터 끊어진 자로서 나를 다루기 때문에 그런 자로 상대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력시장에 별로 일도 할 줄 모르는데 오늘도 일당이나 챙길까 싶어 오게 되면 “아저씨는 미장이 일한 지 몇 년 되었어요?” “10년!” 다른 사람은 “5년!” 어떤 사람은 “8년!” “거기 아저씨는요?” “사실은 미장이 할 줄 모르고요. 그냥 뒤처리나 해 주면서 하루 시급이라도 받으려고요.” “나가!” 쫓아내지요.

그 쫒아내는 기준이 뭐냐? 바로 희생물입니다, 희생. 사도행전에 에티오피아 내시가 나와요. 빌립 집사와 만나게 되는데요. 우리가 이제 다 알았기 때문에, 빌립 집사가 하는 역할은? ‘인력 조달’, 공급책입니다. 공급책인데 빌립 집사의 특징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는 거예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활동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노동하는 이 낮의 세계에 밤에 나타나는 그분의 세계, 곧 하늘나라의 세계가 이 땅에서 활동하는데 그 공통점은 뭐냐? 희생물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예요. 제가 사도행전 8장을 볼 때 옛날부터 생각했던 것이 그거예요. 주의 사자가 갑자기 빌립을 인사이동 시켜서 엉뚱한 공간인 사막에 집어넣었다는 그 말이지요.

사도행전 8장 29절에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성령에 의해서 빌립이 나아갔는데 그때 에티오피아 내시가 마차에서 읽던 성경 구절이 나와 있어요. 사도행전 8장 32-33절입니다.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라는 이 대목을 읽고 있었던 거예요.

그 대목이 이사야 53장 6-8절 말씀이에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해요. 이렇게 두꺼운 구약성경 가운데서…, 얼마나 두껍습니까? 하필이면 이사야 53장 6-8절의 그 대목에 왜 꽂혀 있느냐 그 말이지요. 빌립 집사도 그리고 에티오피아 내시도 성령께서 딱 지적하는 그 구절이 도대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 구절이냐 하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희생물입니다. 희생물인데 그 희생물 안에는 일체 하나님다움이 하나도 없어요. 마치 뭐와 같은가? “저가 사지(죽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대단함, 하나님의 초능력 이런 것이 일체 없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당하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소리 하지 않아요. 잠잠하게 끌려갑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땅에서 빼앗기는 거예요. 이 대목과 오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이삭의 대목을 비교해 보세요. 이삭이 아버지에게 끌려갈 때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라고 솔직하게 묻지요. 제물은 어디 있느냐고.

“제사를 드리러 가면서, 번제를 드리러 가면서 왜 제물을 안 가져가십니까?” 아직도 이삭은 인간적 수준, 그런 차원에서 지금 아버지의 일을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지금 하나님 차원의 일을 한다고 느끼는데 어린 이삭은 아직도 하나님 차원을 생각 못 하고 ‘이 번제하는 일을 아버지와 내가 해치우자’ 하는 생각 ‘그냥 해치워버리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시했으니 순종해서 해치우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 하나님의 지시를 인간 쪽에서 해치워버리면 나는 어떻게 제거됩니까? 하나님의 지시대로 해버리면 내가 제거되는 방법이 없잖아요. 기도하래서 기도해, 헌금하래서 헌금해, 예배하래서 예배 참석해, 전도하래서 전도해, 찬양하라면 찬양하고, 성경 공부하라 하면 성경 공부 참석해, ‘하지 뭐. 하면 되잖아.’

다 했습니다. 그다음에 나중에 나오는 말이 뭡니까? ‘아, 철야 한다고 애먹었네.’ 결국은 이스마엘하고 똑같아요. 내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밖에는 안 돼요. 순종입니까, 그게? 그게 종교 행사지 순종입니까? ‘이런 순종을 했으니 하나님께서 좋은 보상을 주시겠지.’ 이게 뭐예요? 그게 우상숭배지 뭡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한테 요구하는 것은, 어쨌든저쨌든 이스마엘과는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마엘과의 그 차이점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삭 희생물 앞에서는요 농담이나 특히 우는 것, 이런 것은 용납이 안 돼요.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나고 난 뒤에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얼마나 울었는지 대성통곡을 했어요. 그렇게 울어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삭을 바치는 그 현장에서 농담이 나올까요? 웃음이 나올까요? 특별히 울음이 나올까요, 울음이. 울음, 웃음, 통곡 이런 것이 나올까요? 나올 수가 없어요. 너무나 진지하고, 너무나 심각하고, 너무나 엄중한 현장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배제한 자리기 때문에. 나를 아예 빼놓는 자리거든요. 나를 빼내 버린 자리라고요.

아브라함 아버지가 아들 이삭을 바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에 의해서 처단받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녀를, 하나님의 주신 하나님 자기 것을 하나님이 처단하는 자리에요. “아버지 너는 빠져. 빠지라고.” 자식을 데리고 모리아 산까지 가는 거기까지만이에요. “거기까지만 하고 여기서부터 너는 빠져.”

이스마엘 인생의 특징은 죽죽 늘어진다는 거예요. 여름 장마철처럼 죽죽 늘어져요. 그런데 이삭의 특징은 짧은 한순간, 하나님과 접촉되는 짧은 한순간, 그 짧은 한순간이 이삭에게는 시작이고 끝이고 그리고 시작과 끝의 그 중간을 아예 이삭이 가는 과정의 자갈밭으로 깔아놔요. 끝, 끝, 끝, 끝…, 매 순간 끝으로 깔아놓으면 그 끝 지점에서 이삭 같은 인간들이 거기서 계속 생산되는 거예요.

그게 야곱이고, 그게 요셉이고, 그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출현이에요, 생산이고, 등장입니다. 매 순간이. 매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주십니다. “손 떼라!” 그거예요. “네 손 떼라. 웃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이것은 하나님이 손대는 진지함이다. 너는 나의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겁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 상관없는 인간이에요. 관계없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내가 아무 상관도 없는 인생을 살아가시면 복 받은 이삭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인생에 여러분이 관여하지 마세요.

관여하지 말라고 관여하지 않는 것 아니잖아요. 무슨 대안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 대안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반드시 여러분, 이스마엘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자기 것을 위해서 살고, 살기 위해서 살고, 내 인생은 내가 만들고, 반드시 출발점을 저주로부터 들어가야 해요, 저주로부터.

매표소에서 돈 주고 티켓 끊잖아요. 이스마엘을 돈으로 넣게 되면 저쪽에서 이삭이 티켓으로 끊어져 나와요. 그게 신기해요. 그런데 매표소 중간에 주님의 죽으신 그 희생제물 속으로 우리를 이스마엘로 집어넣는 거예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으니까 이스마엘을 집어넣고 이것이 이삭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진지해야 합니다.

‘이게 내가 내 것이 아니구나.’ 끝으로 시편 23편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제, 이제 비로소 내가 나와 관계없는 존재라는 사실, 기쁨과 감사로 이제 말씀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게 내 몸이 아니니까 주의 말씀대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주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희생하신 자기희생의 영향력으로 자기 이름,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이끌어가는, 천국으로 질질 끌려가는 그런 형체, 그 형체가 저와 여러분에게 실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남한테 ‘나 이런 인간이요’ 자랑질한다고 저주받을 짓만 골라서 한 저희들. 돌아서서는 하나님께 이런저런 원망을 하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들. 주여,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손 떼도 괜찮다는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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