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십자가 꽂힌 공간

아빠와 함께 2025. 6. 8. 18:17

십자가 꽂힌 공간 

2025년 6월 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13-16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1: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1: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근원이 다르다는 것은  인생 행로가 이미 되었다는 말입니다. 시작하신 분에 의해서 시작한 분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일반적인 인간들의 인생 행로에 큰 소리치는 것은 자기 생각들입니다. 이것은 시작을 자기로부터 출발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시작해서 얻어진 결과에 대해서 인간들은 철미철미하게 사수하려 합니다.

자신이 건설한 세계에 인간들이 들어앉아서 마치 자폐증 환자같은 증세를 보입니다. “내 것 건드리면 누구든지 죽인다” 이런 기세가 하나님에게까지 자연적으로 파급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하시고 나 것은 건드리지 마세요. 만약에 건드리면 하나님 안 믿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12자식 같은 분들은 모두 불임의 어머니에게 출생한 자들입니다. 곧 ‘불가능한 세계’로부터 시작이 된 자들입니다. 그들의 삶도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이 그저 ‘가능함으로 연속되는 삶’이었습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가능성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가능성 인생 기차에 주님의 불가능함이 침입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대나 목적의식이 결코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가능함의 침투라는 것은 약속의 침투입니다. 미태복음 11:12에 보면,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구성하고 의도하려는 하늘나라가 엉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출생에 문제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잘못되고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생각이 나옵니다. 그 더러움이 바로 “내 것 건드리면 화낸다”입니다. 즉 지금 ‘있는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나갈 내 인생’이다는 겁니다.

없는 데서 있고 죽은 데서 살린다는 말은 출발점을 새로 한다는 말입니다. 기존의 시작점을 일체 부정한다는 말입니다. 안 받아들이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평생 교회 다니다가 죽어서는 천국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이 본인이 시작점이 되어서 선택한 미래입니다. 인간이 선택한 미래는 그저 과거와 같은 노선에서 나온 연장선입니다.

그때가 되면 실망할 게 뻔합니다. 진짜 본향은 불가능함이 가능함에게 찾아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미 죽은 그분이 자신을 찾아주는 일’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일입니다. 나의 시간과 연결되는 노선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개입이요 침투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의 경우, 그들은 충분히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찾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는 성령을 보내셔서 찾아주십니다. 우리 인생에 불가능함의 침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도들은 ‘약속을 받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자기들 시절에는 온전한 약속 성취를 못본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 했습니다. 즉 그 당시나 오늘날 성도는 이 가능성의 세계에서는 사실상 하등의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해야 마땅한 대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하나님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이 불가능한 세계에서는 더 이상 ‘〜하라, 〜하지 말라’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이미 내가 했다, 이미 내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도록 했다’가 됩니다. 이들 신앙의 노선 위에서 산 사람들은 과연 훌륭한 사람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서 모든 가능함을 다 구사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 아내를 타인의 여자로 줘버린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로왕에게 개입하여 무사히 애굽나라를 떠나게 했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 아내 덕에 자신이 살겠다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자기에게 들이닥친 삶의 위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총동원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속적인 개입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리고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징후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다수의 후손들을 하나로 모으는 방식으로 특별한 매장지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3:10에서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 땅에서 막벨라를 돈으로 구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라가 거기에 묻히고 아브라함 자신도 죽어 거기에 묻히고 이삭과 리브가도 거기에 묻힙니다.

창세기 49:30에서는 살아 생전에 야곱 자신도 그 매장지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창 49:30-
31)

이러한 시도로 인해 약속의 땅이란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땅이 됩니다. 요셉도 애굽에서 죽으면서 아예 자신의 해골을 갖고 애굽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게 됩니다.(창 50:25) 이러한 예언은 약속 성취로 신약까지 이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성도는 강도가 됩니다. 강도의 입장에서 십자가를 봐야 합니다. 가능성 속에서 가능성만 주장하면서 자신이 건설하는 자기 인생을 사수하는 바로 그 모습이 예수님을 죽게 된 자아의식입니다. 거지나 부자의 죽음을 통해서 지옥에 간 부자는 그 속에서도 자기 위주의 생각을 멈출 줄을 모릅니다.

많은 수의 성도로 하나로 집결하는 곳에서 성령이 물처럼 쏟아집니다. 에스겔 47장에 예언되어 있는 ‘물이 쏟아지는 성전’은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성취하신다고 했습니다.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4-39)

진짜 하나님 나라는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에게 나의 것이 남아 있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0강-히브리서 11장 11-16절(십자가 꽂힌 공간)250608-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11-16절입니다.

히브리서 11:11-16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기 사라 자신이 잉태할 수 없는 가운데서 생산해서 비로소, 그냥 후손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후손이 생긴 겁니다. 약속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거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약속에게 계속해서 약속을 주는데 그 당사자들이 이 땅에 살 동안은 그 약속이 이뤄지지 않아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라는 표현이 바로 그 뜻입니다. 살아생전에 온전한 약속의 상황을 다 받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멀리서 그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살아갔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

약속이 없는 사람, 약속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성실하고 충실하게 사는 데 몰두하고 매진하는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이 보기에 이렇게 본향 찾는 사람들을 볼 때 상당히 부끄러운 존재, 쓸모없는 존재, 이 세상이 번영하는데 보탬이 안 되는 존재, 그걸 뭐 세자로 줄이면 찌질이, 그냥 찌질이들이에요.

상당히 부끄러운 대상이 되는데 그게 왜냐하면 그들과 이 세상 쳐다보는 사람들하고는 대화가 안 돼요. 대화가 안 되니까 기피 대상이 되겠죠. 대화가 안 되는 게 당연한데요, 왜 그런가? 태어날 수 없는 자궁에서 태어났거든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그렇고, 그다음에 이삭의 부인도 불임 여성이고,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 결과인 요셉도 마찬가지고, 요셉 이후에 나온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이미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유월절이라는 것을 겪음으로써 애굽 나라에서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다 죽어야 합니다. 다 죽어야 해요. 그런데 그들의 장자는 멀쩡하게 살아났고, 그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약속의 땅으로 향했잖아요. 좀 특이하죠.

내가 노력해서 살았다고 한다면 자부심을 갖겠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왜 아직 살아 있지?’라는 느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은 받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죠.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부끄러워 아니했다는 것은 ‘네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안 부끄럽지? 남들한테는 사람 취급 못 받는 거야.’라는 뜻이에요. 이게 히브리서 2장 11절에도 나와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하나님 쪽에서 성도 볼 때 부끄럽지 않다는 뜻이죠. 왜냐하면 동질이기 때문에, 근원이 한 곳이기 때문에, 똑같은 곳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나타났을 때 없는 데서 태어났잖아요? 그리고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다시 제자들에게 올 때 죽은 데서 살아나서 오죠.

이게 일반 사람들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안 되죠. 누가복음 1장에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세례 요한의 잉태에 대해서 천사에게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때 “이 늙은 것이 무슨 애를 낳겠습니까?” 이 소리 했다고 사가랴가 갑자기 벙어리가 됐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너 말하지 마.” 왜냐하면 ‘네가 받은 계시 예언은 이 세상에서 볼 때 불가능한 세계’에요. 불가능한 세계에 대해서 가능한 세상에 속한 이 사가랴가 불가능에 속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불가능 세계에 집어넣고 벙어리가 되게 한 거예요. “이제부터는 내가 한 말만 이야기해. 쓸데없이 옛날 가능성 속에서 했던 이야기들 하지 마. 스톱!”

그래서 세례 요한 이름을 지을 때까지 아무 소리도 못 했어요. 주위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도 아무런 말을 못 한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죽은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자손들의 특이 사항, 그것을 본질로 지니고 계속 생산되는 이 사람 속에서 바라보는 고향, 그것은 기존 종교에서 말하는, 일반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은 아닙니다.

들어갈 사람 자체가 달라요. 이미 불가능한 세계 속에 진입된 그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지 교회 나와서 ‘죽어서 좋은 데 가고 싶습니다.’ 이런 것은 천국 못 갑니다. 갈 수가 없죠. 지옥 가죠.

차이점이 뭐냐? 차이점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지만 세상 보기에는 퇴출당하고 불가능한 세계에 입국하게 된 사람, 거기에 들어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살면서도 이미 불가능한 세계에 들어와야 한다는 그 말인데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 어떻게 판정될 수 있느냐?

성경을 보게 되면 “하라” 하는 것이 나오고 “하지 말라”는 게 나옵니다. 불가능한 세계에 이미 들어와 버리면, 약속 속에 들어와 버리면 “하라.” 가 아니라 “이미 다 이루었다.”가 돼요. “이미 했다.”가 돼요. “이미 ‘하지 말라.’를 하지 않도록 내가 조치 다 해 놨다.” 그 말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도 바울 되기 전에 가능성의 세계에 있었잖아요. ‘율법을 지키면 하늘나라 갈 수 있다’라는 가능 세계에 살았던 그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불가능한 부활의 세계를 맛보고 난 뒤에 이런 고백을 해요. ‘전에는 율법으로 내가 갈수록 선해지는 줄 알았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율법을 보고 갈수록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는 것,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죄가 나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그 계열, 그 노선에 우리가 이미 들어간 사람인 것이 어떤 식으로 성립이 됩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죽은 분이 찾아오면 돼요. 이미 이 땅에 죽었다가 떠난 분이 도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가능성 세계 속에 있으면서 불가능한 세계 “다 이루었다. 너 걱정하지 마.”의 세계에 이미 들어간 사람입니다.

예배 전에 어떤 집사님이 저한테 물어요. “목사님, 우리 교회 떠나고…” 이 말은 ‘복음 떠나고’ 그런 뜻이에요. “복음 떠나고 목사님한테 전화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1초 만에 없다고 했습니다. 없어요. 왜 없느냐? 가능성의 세계는 가능성만 자꾸 발휘하는 억지를 부리는데 구원받으려면 이미 죽으신 분이 찾아와야 해요.

이런 소리 하니까 그게 납득이 되겠어요? “죽으신 분이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를 60년 70년 다녀도 지옥 갑니다.”라는 말은 불가능의 세계에 속하거든요. 그걸 제가 내뱉어야 해요. 전화 안 하는 정도는 신사죠. 만약에 그런 소리 하는 제가 옆에 있는데 그 사람에게 주님의 영이 안 찾아왔다면 바로 짓밟아 버릴 거예요. 막 쥐어뜯었을 거예요.

좀 알아듣는 이야기 하면 안 됩니까, 알아듣는 이야기를! 성령이 와야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시고 좀 알아듣는 이야기, ‘성경은 이런 내용이 있으니까 믿으시면 구원받는다, 십자가 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겠느냐? 안 돼요. 그런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요.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이유는 그 동안 내가 알던 나는 잘 못 됐기 때문이에요. 내가 알던 나.

왜 주님께서 죽은 사라의 몸에서…, 이미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는데, 자기 아내의 자궁은 죽어 버렸는데 왜 굳이 거기서 새로운 아이를 낳아야 해요? 하나님의 이 취지를 여러분 이해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있잖아요. 알아듣는 이야기 해서 그 사람들 건지면 되잖아요.

왜 일부러 아브라함을 찾아옵니까? 아브라함 본인도 못 알아들어요. 그래서 웃었잖아요. ‘농담하십니까?’ 만약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여러분도 혹 저를 짓밟을 수도 있을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으면요, 구원 못 받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그랬기 때문에요. “내가 예수를 잘 안 믿는 것 같아요. 왔다 갔다 해요.” 아니요. 그렇게 하시면 안 되고요, 충분히 배신해야 해요. 충분히, 넉넉하게 배신해야 해요. 그래서 자기 자신이 ‘예수 믿는다는 것이 나로서는 성공 확률이 제로구나.’ 하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이걸!

왜 내가 예수를 안 믿느냐?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왜? 난 나의 성실함을 믿거든요. 나의 성실함으로 이뤄놓은, 내가 건설한 나의 세계가 있잖아요. 인간은 출생 때부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어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 천국을 만들겠다’라고 그래서 ‘천국이 만들어졌다’라고, 이 세계가 천국이라고 우겼습니다.

자기 세계기 때문에 출발을 자기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의 성실함과 건실함과 조심함과 주의 깊게 살아가는 것, 하나하나 실수 없이 살아가는 것, ‘망치면 안 돼. 자칫하면 망쳐지는 거야. 망하면 그 감당 나는 못 해. 안 망하도록 사전 조치를 해야 해.’ 이렇게 충실하게 쌓고 신앙생활 해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할 때 그 시작을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근원 자체가 주님과의 동질성이 끊어졌고, 자기 동질성만 꾸준히 계속 더 공고히 하는 거예요. 하루하루 삶이 ‘내 것은 안 망하도록 지켜야 해.’ 이것만 단단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건설한 세계가 한계에 도달했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성내죠. 한계에 도달하면 성을 내요. 성이 왜 나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제가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자신의 일이나 착실히 하세요. 내 일에 좀 개입하지 말고, 참견하지 말고요. 왜 내 세계를 파괴하려 듭니까? 나 성이 납니다, 정말. 자칫하면 내가 하나님 안 믿는 수가 있어요! 하나님, 주의하세요. 내가 몇 번 주의 주는데 내 세계 건들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왜 하나님은 내 말을 안 들어요?’

이런 태도를 두고 중국 사자성어에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반하장의 뜻은 ‘도둑이 매를 든다’라는 뜻이에요. 같잖지도 않죠. 같잖지도 않아요. 그게 인간입니다. 그게 여러분, 아브라함이고 그게 이삭이고 그게 야곱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의, 찌질하고 또 찌질한 그들의 하나님 됨을 부끄러워 아니했다.’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세계 건설에 쉬는 법이 없어요. 달라지지 않아요. 그런데 오늘 본향에 가는 이 사람들은 바로 천국 갈 사람들이에요. 이게 신기하죠.

인간은 자기가 건설한 세계밖에 몰라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천국을 가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여기에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일으키신 겁니까? 무슨 일을 일으키신 거예요? 제가 그동안 설교할 때 고함을 늘 질러서 목이 아픈 게 아닌가 싶어 지금 실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조용조용 설교할 것인데 혹 잠이 오시면 잘 주무세요.

본향에 간다는 약속은 있지만 그들이 약속은 받질 못했어요. 찌질이기 때문에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약속은 받지 못하고 그냥 그걸 바라보면서 기대하면서 동질적인 관계가 이어지며 갔는데 그들이 갔던 그 길에서 과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잘못이 없는가?

성경에서는 놀랍게도 아브라함이 잘못한 것, 이삭이 잘못한 것, 야곱이 잘못한 것, 진짜 부끄러울 정도의 거짓말, 맨날 거짓말, 신뢰감이 팍 사라지게 만드는 거짓말을 남발했어요. 그리고 남자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줏대 없는 짓을 했어요.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자기 몸 하나 살리겠다고 권세자에게 팔아넘겼습니다. 그런 남자하고 꼭 살아야 합니까? 물론 다른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가뭄이 들게 해서 오갈 데 없는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갔잖아요. 애굽의 바로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탐내서 동침을 시도했습니다. 그때 바로 왕 혼났죠. 그 밤에 혼났습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하나님이 혼을 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가능성의 세계에요. 아브라함이 통박을 굴려서 이 가뭄에서는 살 수 없으니까 아내와 함께 살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마침 행운이 찾아왔어요. ‘바로 왕이 내 아내를 탐내니까 아내를 내어주고 여생은 그 권세자 밑에서 낙을 누리겠다.’ 이것은 인간의 머리에서,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에요.

불가능한 세계는요, 가능성 세계에서는 그쪽으로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요. 저쪽에서 개입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이라는 것은 침략당하는 것이다. 침략당하는 자가 빼앗기는 방식으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내가 건설한 나의 가능성 세계에서 난데없이 도둑같이 주님이, 죽은 분이 찾아와서 나를 납치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입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왜? 우리의 더러운 인간성은 내가 건설한 내 세계를 위해 하나님이라도 욕할 인간들이에요. “나 힘들게 하면 가만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협박과 공갈을 일삼는 자가 우리에요.

그런 인간인 우리를 납치해서 “쪼다 같은 너, 인간 같지도 않은 찌질이 같은 너. 하지만 내가 너의 형제, 너의 구주라는 것, 이 구세주인 내가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없다.”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서 13장에서 이게 사랑의 선물이에요.

이게 말이 됩니까? 안 찾아오면? 그때 애굽에 갔을 때 밤중에 하나님이 바로 왕에게 안 찾아왔으면? 아브라함은 여전히 가능성 세계에 있었을 거예요. 그다음 날 바로 왕이 아브라함 불러서 “당신 분명히 이야기해라. 저 여자가 당신 누이동생이야, 아니면 당신이 저 여자 남편이야?” “제가 남편입니다.” “당신 거짓말 때문에 당한 거 생각하면…”

바로 왕이 화가 많이 났죠. “여봐라. 많은 재산을 붙여서 이 가족을 다시 쫓아 보내라!” 그렇게 쫓아 보냈어요. 그러니까 가뭄 당한 곳에서 애굽으로 갔다가 갑부가 되어 자기 조카까지 다 데리고 약속의 땅에 왔잖아요.

그렇게 왔을 때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어요. 이번에는 블레셋 땅에 있는 족장 아비멜렉이 또 자기 아내를 탐냈는데 이번에도 또…, 떠돌이니까요. 나그네니까, 자기 거처가 없으니까 텃세하는 사람에게 잡히면 다 뺏기는 거예요. 살아남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찌질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찌질이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 아내를 두고 내 누이동생이라고 한 이것이 아브라함뿐만이 아니고 이삭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리고 야곱의 딸 디나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요셉도 마찬가지고요. 유다도 마찬가지고요. 사람은 안 바뀝니다. 내 세계가 전부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되기 위해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느냐? 그들의 찌질함을 끝까지 다 파헤치고 노출시켜서 “참 네가 봐도 넌 인간도 아니지? 부끄럽지, 그지? 하지만 나는 너의 하나님 됨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

너는 가능성의 세계에서 못 빠져나오죠. 그걸 자폐증 환자라고 해요. 현대인들이 자폐증 환자예요. 자기가 건설한 세계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교회 다녀도 그것은 뭐 장난치는 거죠. 취미 생활이지 그게 무슨 교회를 다니는 거겠어요?

여기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죽은 태에서 나온 자식,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에서 태어난 그들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끊어진 상태고, 그런데 그렇게 끊게 하신 분의 근원에서는 끊어지지 않는 그런 자들의 자국으로 남겨진 세계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약속의 땅이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님, 인간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답변은 간단해요. “No!” 인간은 미래를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택해 봐야 ‘과거-현재’라는 선로(線路), 그 기차의 철길과 동일한 철길이기 때문에 똑같아요. 미래쯤 되어 봐야 또 실망해요.

내가 아는 과거의 연장선이 내 미래기 때문에 그 미래는 소용없는 미래요, 과거입니다. 얼마전에 제가 설교 시간에 했잖아요. 우리는 과거를 살날이 남아 있다고요. 미래라는 것은 새로움이 침투되는 것이 미래에요. 그렇게 되려면 그 선로가 끊어져야 해요. 끊어지게 만들어요. 주께서 끊기 위해 불임 여성과 혼인하게 한 겁니다. 하나님 약속의 백성들은요. 예수님도 남편 없는 데서 태어났고요. 선로(線路)가 끊어져야 해요.

선로(線路)가 끊어지게 되면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모든 게 죄였다.’ 죄는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죄에요. 죄가 할 수 있는 것은 늘 초조하고 불안해서 행여 누가 내 것을 건드릴까 싶어서 자폐증 환자로 살아가는 것이 그게 죄의 발현이에요. 죄가 표현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혹시나 내 새 차 누가 건드리고 지나가면 안 된다고요.

그것 옛것입니다. 새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한 곳으로 몰아넣습니다. 집어넣었어요. 한곳으로 몰아넣은 그곳이 뭐냐? 막벨라 굴이에요. 막벨라 굴에서 약속의 땅이 마련된 겁니다. 막벨라 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는데 죽는 장소가 일반 묘지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친히 마련해주신 집안 묘지, 선영이라 하지요, 가족 묘지인 그 굴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집착하게 됩니다.

이것은 중요하기 때문에 성경을 한 번 찾아봐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3장 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헷 족속과 계약을 하는데요,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했고 그다음에 사라가 죽어요. 17-19절에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성문에 들어온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 막벨라 굴이 어떤 곳이냐? 내가 이 땅에 태어날 때 바로 ‘없는 자가 태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난 것과 관련되어 있는 기념할 만한 인물들이 한곳에 모이는 무덤’ 가족 묘지에요. 두 자로 하면 ‘성도’ 불가능함이 침투해서, 내 것밖에 모르는 이 가능성 속에 불가능성이 침투해서 그 결과로서 죽어지는 자의 죽음의 매장지.

살다살다 늙어 죽는 가능성 세계에서 죽은 묘지가 아니고 특이성, 불가능함의 작용으로 선로(線路)가 옛날 가능성 세계에서 불가능성으로 이동된 자에게 터지는 사태와 사건이 계속 이끌고 이끌어서 기어이 이 땅 위에서 사라지게 하는 최후의 매장지가 막벨라 굴이에요.

그 막벨라 굴에 사라도 죽고 아브라함도 죽고 나중에 같이 거기에 묻힙니다. 창세기 25장 10절에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창세기 35장 29절에 이삭이 거기 죽어 묻히게 됩니다. “이삭이 나이 많고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창세기 49장 30-31절에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하고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죽고 나면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고 자기 아들 요셉에게 부탁하는 대목이에요.

야곱의 라헬은 베들레헴에서 죽었어요. 예수님의 출생지에서 죽었어요. 창세기 50장 12-13절에 보면 야곱이 죽고 난 뒤에 막벨라 굴에 장사했거든요.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그다음에 창세기 마지막에 보면 요셉이 야곱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애굽에 도착합니다. 지금 그 이야기, 내가 죽거든 막벨라 굴에 묻어 달라는 이야기를 야곱이 요셉한테 하는 장소가 약속의 땅이 아니고 애굽이에요. 요셉이 총무 대신이잖아요. ‘나중에 요셉 자신이 죽고 난 뒤에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이곳에 있지 않고 반드시 애굽에서 나가게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막벨라 굴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가야죠. 애굽 남의 땅에 살지 말고. 애굽 땅에는 막벨라 굴이 없어요. 애굽땅에는 막벨라 굴이 없다고요. 그냥 사람들의 가능성의 세계에요. 자기 것 가기가 건설한 세계, 건드리면 성내고 화내면서 ‘죽여 버릴까?’ 하는 그 동네에요. 그리고 그런 자폐증 인간들이 모여 사는 게 애굽이에요.

그런데 요셉은 소원하기를 나 죽거들랑 임시적으로는 애굽에 묻어야 하지만 내 해골을 들고…, ‘참 독하다, 독해.’ 약속의 땅에 가서 묻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25절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뭘 하라는 게 아니고 ‘그렇게 올라가게 되어 있다.’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그냥 있는 땅이 아니고 뭔가 하나님이 침투한, 찾아온 자를 한곳에 모아서 그들 다수를 예수님과 하나의 일체성 동질성으로 구성해서 그들을 살리고자 하는 땅, 더 중요한 것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살게 만드는 하나님의 불가능함이 작동하고 작용하는 그 땅이 약속의 땅인 거예요.

제가 이 이야기 하면 여러분들이 이제 궁금해질 거예요. “목사님, 오늘날 약속의 땅은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그런 질문이 나와야죠. 오늘날 약속의 땅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다 이뤘어요. 그러면 십자가 사건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뭐로 변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내가 거주하는 공간에 십자가가 있다는 말에 대해서 우리는 ‘아, 나 있고 주님이 십자가 달렸구나.’ 이게 아니에요. 제 불만 중 하나가 교인들 집에, 주로 천주교 가정에 그런 게 많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림이라든지, 태피스트리라고 하죠, 그런 것들이 있는데, 십자가는 우리 교회에도 있어요. 돌아보세요. 저 뒤에도 십자가가 있잖아요.

십자가 있는 공간이 되려면 여러분은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 앞에서 강도가 돼야 해요. 이 강도, 저 강도, 김 강도. 안 잡히고 까불이처럼 그냥 돌아다니는 강도가 아니라 이미 체포당한 강도, 피해자가 막 울고불고 난리치는 걸 보고 있는 강도, 미안해서 할 말을 잃어버린 강도, 십자가에 주님 달렸다고만 외치지 말고, 내가 강도라는 그런 그림 “내가 바로 강도입니다.” 내 자화상은 뭐? 강도. 여러분, 강도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렇게 고정화 된 거예요. 막벨라 굴에 집합해야 될 인물의 고정화, 그 앞에서 우리는 강도로, ‘나는 강도’로 고정화가 되는 겁니다. 강도가 강도짓하지 뭐 다른 걸 하겠어요? 이걸 가지고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는 어렵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는 그 말, 여기 ‘회전하는 그림자’가 무슨 뜻이냐, 우리는 맨날 변덕쟁이에요. 기분 나빴다가 또 좋다고 까불다가, 이게 뭐냐? 십자가가 훅 빠져버렸거든요. 십자가가 꽂혀 있지 않거나, 십자가가 꽂혀 있더라도 십자가 쪽으로 모가지가 안 돌아가는 경우에요.

십자가 보면 강도, 십자가 잊어버리면 ‘건드리기만 해 봐.’ 이거, 이게 바로 회전하는 거예요. 제 방의 의자가 그래요. 옆으로 돌아서면 성경책 있고, 앞을 보면 컴퓨터 있어요. 그 의자가 맨날 회전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 오면 십자가 소리 듣고, 심지어 요즘 기도하는 분이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질적으로 많이 성장했구나.’

그런데 문만 열고 나가면 모가지가 돌아가잖아요. 십자가는 없고 ‘건드리기만 해봐라.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참는 거지 앞으로는 내가 안 참을 거야.’ 성을 내지요. 고린도전서 13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4-7절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을 한번 바꿔보겠어요. “사랑은 투기할 게 남아 있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할 게 남아 있지 아니하며, 사랑은 교만할 게 없으며, 무례할 게 남아 있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할 게 전혀 남아 있지 아니하며, 사랑은 성낼 것이 없으며, 악한 것도 남아 있지 아니하고, 불의함도 남아 있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이니 다수(多數)’지요. 그리고 아까 말한 동질, 야고보서에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라는 그것이 동일성 아닙니까. 성도는 이미 확정된 ‘다 이루었다’의 그 동일성, “하라…하지 말라”가 “이미 내가 했어…내가 안 하게 했어.”의 십자가가 여러분과 함께 이미 꽂혀 있어요. ‘꽂혀 있는 것 봤습니까?’라고 할 수 있는데 모가지가 돌아가는 그것이 문제지 어쨌든 꽂혀 있거든요.

지옥은 어떤가? 성경이 얼마나 친절하고 고마운지요. 지옥에 간 사람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래서 지옥 간 사람의 이야기를 안 들었으면 진짜 엉뚱한 곳을 천국으로 오해할 뻔했어요. 성경에는 지옥에 간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녹취했는지 성경에 이렇게 소개를 해 놓았어요. 지옥 갔는데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갔거든요. 24절에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한껏 존경심을 나타내요.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여기 ‘혀’ 앞에 뭐가 붙어 있느냐 하면 ‘나’예요. ‘나’ 그 ‘나’가 안 죽었어요. ‘나’가 살아 있는 곳이 뭐냐? 그게 지옥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나’가 살아있잖아요. 지옥이지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자가 이야기하는데 또 ‘나’가 나와요. 26절에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말은 ‘다 끝난 이야기를 왜 하느냐? 다 끝났어.’ 그래서 나사로는 지옥 가려고 해도 못가요. 그리고 지옥에서 천국으로도 못 갑니다. 왜냐하면 서로 말이 안 통하는 불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단절이 있었잖아요, 단절. 어떤 인간도 불가능성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가능함의 능력으로 침투해서 납치를 해가니까 가능성 속에 살다가 불가능성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래서 맨 날 주님 앞에 책망받고 지적받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자기 가능성으로 다 해놓고 나중에 지적받아요. “이런 찌질이를 내가 구원한다.” 이런 식으로요.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가 뭐라고 하느냐? “그러면 됐습니다. 저는 이제 버린 몸입니다.” 28절에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이것은 또 누구 이야기에요? 또 자기 집안 식구 이야기에요. 집안 챙기는 거예요. 아, 참 심하다 심히 정말! 오늘 본문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숱한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뭐냐? 내가 살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을 감사했어요.

이 땅에서 살 수 없는 세계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을 그들은 주님의 불가능한 개입으로 늘 감사했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계속 할 수 없는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찾아와 주는 것이 있으니 그게 결과적으로 감격스러운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는 천국에, 낙원에 가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는 그 이야기가 로마서 14장 17절에는 이렇게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 완성된 것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자 천국이 뭐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 안’입니다. ‘성령 안’에서. 이제 남은 것은 이거예요. 약속을 받지 못한 구약의 선배 신앙인들은 막벨라 굴에 들어갔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살았는데’, 또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죽어서 그 묘지가 있는데’ 그런 뜻이에요.

제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그 근처에 묘지가 많았어요. 이슬람 사람들의 묘지도 있었지만 유대인들 묘지가 많았어요. 부활 때에 살아난다고. 왜냐하면 그 땅은 보통 땅이 아니고 터가 좋은 땅,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땅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막벨라 굴에 해당하는 그것이 십자가거든요.

십자가에 해당이 된다면 십자가에 모였던 그들, 십자가에 집합한 그들이 어떻게 사느냐, 죽은 자들이 어떻게 주님처럼 같이 살 수 있느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생수의 근원이 나온다는 에스겔 47장의 그 예언을 두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에서 “물이 나올 수 있는 성전의 영을 내가 너희에게 줄게.”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7:38-39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에스겔 47장에 성전이 있는데 성전에서 물이 나오거든요. 생수가 나와요. 그러니 아무리 다수(多數)라도 성도라면 같은 한 곳으로 집합하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2장 10절의 에덴동산이 그래요.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여기서 강이 네 개라는 것은 숫자로 1, 2, 3, 4 많잖아요. 많더라도 그 근원은 오직 한 곳에서 나오는 거예요.

시작도 예수님이고 끝도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아버지께로서 와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그 단일선로, 단일철로를 받치는 침목(枕木) 역할 하는 것이 각 시대의 성도의 삶입니다. 침목, 또 침목, 또 침목…, 오늘날 2025년도의 침목. 모든 각 시대의 성도는 그 불가능성이 나의 그 모든 세계를 파괴하고 밟고 지나가는 침목 역할을 하지요.

김소월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러니까 ‘나를 위에서부터 지근지근 밟아주소서. 내 인생을 아주 작살내고 가소서. 불가능함만 할 수 있는 주님이여, 나는 못합니다. 나는 신앙생활 같은 것은 아예 못합니다.’

나는 신앙생활 못해요. 나는 내 것만 악을 쓰고 지키는데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못 해요. 그런데 ‘이런 나를 그냥 방치하지 마시고 나를 십자가로 모가지를 돌려서 다시 한번 내가 천하의 도둑놈이고 강도고 천하의 죄수로 알게 해 주옵소서, 주여!’

여러분, 이러한 고백이 감격과 의와 화평과 희락 없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흉내는 낼 수 있어요. 그저 주님한테 잘해보려고, 잘해보려고…. 배신 없는 사랑은요, 지독한 집착이에요. “주님이여, 내 인생 책임져 주소서. 나는 주님 믿는 것을 나의 미래로 선택했습니다.” “선택하지 마! 나는 네 선택에 끼어들 마음이 없다. 내가 찾아와야지. 네가 교회 50년, 60년 다닌다고 해서 구원이 되냐? 그것은 네 애씀과 노력이 파괴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잖아. 너의 잘남이!”

이런 이야기 하면 여러분이 슬슬 걱정되겠지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어요. ‘이런 이야기를 해서 교인 몇 명이나 남아 있겠습니까?’ 아니 지금 남아 있는 것도 이상해요, 지금 남아 있는 그것도. 성령이, 죽은 분이 찾아와야 한다는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그게?

‘내가 알아서 주님 찾아가면 되지.’ 안 돼요. 그것은 안 받아줘요. 주님이 찾아오는 거예요. 주님의 영이. “나 너 때문에 죽었다!”하고 찾아오는 거예요. 뭐 밤에 오든 낮에 오든 그것은 모르겠고요. 찾아오게 되면 주께서 철저하게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그 감격이 생겨요. ‘아. 지질이 못난 나를 철저하게 쓰시고 있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 장례식에서 설교를 들어 보면요, 그것 때문에 슬퍼요. 죽은 사람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고, 설교를 들어 보면 슬퍼요. 그 가능성의 세계, “살다가 늙어 죽으면 주께서 우리를 죽은 데서 부활시켜 줍니다.” 이런 가능성이 계속 하나의 노선으로 이어지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나한테는 지옥도 아깝다.’ 이러한 자기 자신을 아는 계기가 없는데 그게 무슨 천국을 가겠어요? 그런 사람을 위해서 이 제하가 작곡한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말아요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히 외로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설교 시간에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 가사가 나오거든 집에 가셔서 한번 들어 보세요. 숙제입니다. 그냥 가사만 들어서는 감이 안 와요. 조영남이 불렀어요. 조영남이 자기 죽으면 이 노래 불러달라고 아주 광고하고 다닙니다. “인생 뭐 있어? 살다가 그만 죽는 거지. 죽으면 모르겠고 사는 동안 성실하고 열심히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지 뭐 다른 수가 있어? 그게 진리야.”

십자가 없이, 그리고 십자가에서 모가지가 돌아가면 하루 24시간 들을 수밖에 없는 그 이야기, 중국에서 날아오는 황사처럼…. 여러분, 지금 얼굴색 안 좋아요. 황사바람 하도 맞아가지고요. 그런 가능성의 이야기만 계속 듣고 또 듣고 있을 때 성령께서 모가지를 십자가쪽으로 확 돌려서 “야 이 창기야, 세리야, 강도야! 좋아, 안 좋아?” “좋아요!” “으이그, 이 찌질이! 세상은 너희를 부끄러워해도 나는 너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하나님이 되기로 나는 너희를 충분히 사용하고 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불가능한 나라에서 날아온 선물로서의 믿음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뭐 하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맨날 자기의 가치나 자랑하고, 남에게 게임에 안 지려고 하고, 밑지지 않으려고 하고, 남에게 업신여김받지 않기 위해서 버티고 또 버티는, 그래서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인생. 하지만 그런 우리의 모습이 십자가 앞에서 이미 그 팔자가 영생의 팔자인 것을 이미 알려주시고 사용하신 그 결과물인 것을 저희들 나그네 인생을 살면서 마음껏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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