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사라의 임신

아빠와 함께 2025. 6. 1. 17:01

사라의 임신

2025년 6월 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1:11-12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1: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믿음’이라는 요소로 인하여만 허상 말고 ‘실상’이 나타난다는 바를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내내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왜 허상만 믿고 사는지가 아울러 드러나야 합니다. 허상 혹은 거짓의 특징은 불가능성이 없고 가능성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의 한도는 ‘주께서 친히 기르시나니’에 대한 조롱과 모독으로 드러납니다.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26,30) ‘친히 기르심’에 대해서 인간은 반발하고 있습니다.

사라의 임신은 완전히 사라의 자궁을 죽었음을 전제로 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불가능성입니다. 이 불가능함으로서 실상의 세계가 허상 안에서 어떤 식으로 등장하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불가능함으로 인해 비로소 인간 세계의 가능함이 얼마나 허상들을 그동안 양산해 내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사실은 인간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미 세상에 ‘다른 믿음’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뱀의 후손’들을 악마가 다루는 가운데 드러난 결과였습니다. 이 세상에 있어 모든 남자와 여자는 다 남자의 후손들입니다.

 

 



따라서 남자 없이 출생한 ‘여자의 후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성립되지 않는 불가능함이 이스라엘 역사의 전 후 계통 안에서 불쑥불쑥 나타났습니다. 모든 남/녀는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마땅합니다.(창 3:19) 하지만 난데없이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 됩니다.(창 3:20)

생명이 도대체 여기서 출몰한다는 겁니까? 모든 임신 가능성이 없는 데서 나오겠지요. 그것이 바로 사라의 임신입니다. 아기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도 못한 상황에서 임신이 된 겁니다. 아브람과 사라가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좋아서도 보다도 더 어처구니가 없는 점에서 믿지 않아서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웃음을 주목하십니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 18:10-15)

이미 인간 세계는 자신의 가능성으로 목적과 기대에 부응하는 식의 신앙체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이 생각한 이 세상이 모두 허구요 거짓이라는 것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오로지 ‘할 수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로 정신무장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도 터무니없었음을 ‘웃음’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이란 ‘나’여기 있고 ‘나 외의 다른 사물들’은 거기에 있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은 것들이 왜 저기에 있나?”라고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해와 달과 별들입니다.

옛날부터 인간들이 신이 그런 것들을 만들었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옳다고 자부했습니다. 문제는 ‘신이 만들었음’을 알고 있는 나에 대해서 실제 이득을 인간들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설명하고 포함시키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2:1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이 여인에게 해와 달과 별이 집결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이 여자는 남자의 노선과 별개의 노선을 형성할 여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는 지점에 ‘여자’를 찾아야 합니다.

사라의 임신이 특이하지만 신약에 나오는 마리아의 임신이 더 최종적입니다. 마리아는 결혼한 적도 없고 남자와 동침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임신이 된 겁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미리아를 자신을 생산하는 인큐베이트로 사용하신 겁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몸에서 태어난 자들을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더 사람 같지도 않는 존재들입니다.

남자의 후손, 곧 뱀의 후손들의 특징은 가짜 지옥과 가짜 천국을 비롯해서 모든 생산된 것들이 다 가짜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약속의 땅을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 사라의 몸에서는 약속된 여자의 후손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이 허상의 세계는 불모의 세계에 마땅히 황폐해져야 될 세계인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두고 ‘없다’고 말합니다. “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즉 모든 인간에게 ‘나’는 없습니다. 사적인 이름인 사래(내 집안의 공주)는 사라(집단 무리에서의 여자 주인)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사래와 사라 사이에 죽음이 끼어있는 것처럼 나와 새로운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십자가 죽음이 끼어 있습니다. 농담거리, 웃음거리에 해당되는 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이 불가능하게도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만들고자 하고 자신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오면 시간은 멈추고 더는 이 세상에서 진리 찾고자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보이는 세계가 나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 절단하고 또 불가능성으로 용접작업을 해서 이어붙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말씀에 응하기 위함’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귀한 자기 백성을 친히 기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만들지 않는 나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9강-히브리서 11장 11-12절(사라의 임신)25060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11-12절입니다.

히브리서 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의 내용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믿음’이 빠져버리면 ‘실상’도 날아가고 없는 거예요. 그냥 ‘바라는 것’만 있는데 ‘인간이 바라는 것이 그 믿음에서 출발하는 바라는 것이냐,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바라는 것이냐?’ 이것을 통해서 ‘믿음이 있어서 바라는 것은 실상이 되지만 믿음이 없이 바라는 것은 허상이 되는’ 거예요. 거짓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것을 주께서 주입시키게 되는데 주입시키는 그 방법이 노아 때는 방주였습니다. 아브라함 때는 장막이었고, 오늘 본문에서 실상과 관련되어 있는, 실상과 연결되는 믿음의 증거들로 사라 몸 자체, 여자의 몸 자체를 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라의 몸에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이것을 실상과 관련해 해석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거짓되고 허상인 세계, 없는 세계를 헤매고 있는 것일뿐더러 본인은 믿는 자만이 모이는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죠. 방주라는 것은 그냥 뚝딱 만들면 되겠지만…,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거죠. 내가 만드는 것은 가능성이지만, 내가 만들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성이에요.

그런데 사라 자신이 늙어서 단산했단 말이죠. 오늘 본문의 믿음은 이미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몸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의 몸은 가능성이 아니고 일체의 불가능성으로 막혀 있죠. 불가능한 이 몸, 곧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그다음에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여기서 임신이 됩니다. 아이가 생겨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지금 허상 속에, 거짓 속에, 허망한 허구 속에 살고 있는 거예요. 실상과 끊어진 상태에 놓여 있다는 거예요. 이미 태가 죽어서 아기를 못 낳는데 임신이 되었다? 임신이 되었다는 말은, 실상의 세계가 이 허구의 세계 속에 드디어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태어난다는 것은 허구 속에서 진실, 진리가 탄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면 진리에 대해서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개입하시면, 주입이 되면 비로소 우리는 진실과 진리와 관련 있는, 접속된 존재가 된다.’라는 그 이야기죠.

그런데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해서 이 땅 위에서 출발 되는 지점이 뭐냐? 물론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데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나가시는,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보이는 것부터 해서 보지 못하는 것들이 실상에 속한다는 말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하죠. 보이는 것이 있어야지 ‘아, 이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어떤 가능성도 실상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다.’가 분명히 정리되겠습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한번 출발해 보자는 거예요. 왜 보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보이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실상에 대해 파악할 수 없다는 자체적 한계를 알기 위해서 보이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기 나무가 보이죠?” “눈앞에 나무가 보입니다.” “저게 실제로 있죠?” “아니요.” 이야기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저기 나무가 있습니다.” “예, 있습니다.” “그게 진짜입니까?” “나무가 진짜 보이니까 진짜 있겠죠?” “아니요. 거짓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보이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는 것을 기껏 애쓰고 탐구하고 노력해 봐야 보이는 것에서 마감이 되어 버려요. 막혀 버린다고요.

해와 달과 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해가 있다. 해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옛날 사람들은 우리 현대인보다 시건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생각이 깊어서 해가 있는 것을 신이 있다는 것으로 봤습니다. 해를 보고 신이 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은 굉장히 겸손한 말이에요.

해가 있으면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했어요. ‘해가 저기 왜 있지? 거기 왜 있어?’ 이것은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이런 식이지요. ‘해가 왜 거기 있을까?’ 현대인들은 거기 신경 안 씁니다. 자기 일이 바쁜데 왜 해까지 걱정해요? 밤에는 달이 떠 있는 거예요. 달이 떠 있다, “달 네가 만들었어?” “아니.” “그러면 당신이 만들었어?” “아니.” “그러면 임금님이 달을 만들었어요?” “아니.” “그러면 우리 중에 아무도 안 만들었네?” “안 만들었지.” “그러면 저 달은 누가 만들어서 저렇게 달아놨을까?”

이걸 옛날 사람들이 생각했던 거예요. 옛날에는 철학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과학적으로도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얼마나 자기 마음을 낮춰요? 옛날 사람들은 벌써 자기 한계를 알잖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나누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신이 하셨다고 그렇게 믿는 게 옛날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오늘날 과학자들은 ‘참 옛날 사람들은 신기해. 신을 왜 믿어? 바보같이 보이지도 않는 신을 왜 믿어?’ 자꾸 그렇게 옛날 사람들을 비아냥대고 비웃었어요. 지금도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즘 사람들은 해가 왜 있는지 압니까? 모르죠. 그들은 몰라도 된다는 거예요.

자기한테 쓸모 있는 것만 진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실용주의’라고 하는데요.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실용주의입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따지지 말자. 나에게 필요한 것만 진리다.’ 이 말은, 내가 진리란 말이에요. ‘내가 여기 살아있는 게 진리니까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소리는 앞으로 일체 하지 마라.’라는 거예요. 내가 진리기 때문에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만들고 싶어 해요. 그 생각뿐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 이렇다고 자꾸 표현하는 데 신경을 써요. 관심이 거기 가 있습니다. 달에 관심 없어요, 별에 관심 없고. 그런 건 과학으로 설명이 된다는 거죠.

단지 과학으로 설명을 했지요. 우리 인간에게 도움되라고 설명을 했지 ‘달이 왜 거기에 있는가? 우리한테 쓸모 있으니까 달 하나 만들자.’ 이런 인간은 없고요, ‘해가 필요하니까 저기다가 해를 하나 만들어 두지.’ 이런 이야기는 인간 머릿속에서 나온 적이 없어요. 지금껏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진리에요? 뭘 안다는 겁니까? 지금 와서 과학자들은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우주는 인간이 필요해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해요. 말도 안 되는 종교적 발언을 해요. 그걸 ‘인류학적 원리’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 우주가 있는 이유는 인간이 ‘저기 우주가 있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우주가 이만큼 진화된 거라고 이야기해요. 지금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 속에 제일 신기한 것 신비로운 것이 뭐냐? 내가 여기 있는데 해는 왜 거기 있고 달은 왜 거기 있느냐는 거예요. 나만 있으면 되는데 왜 네가 거기 있느냐는 겁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문제가 끝납니까?

그다음 나오는 문제는 뻔하죠. ‘신이 달을 만들고 우리한테 요구한 게 뭐냐?’ 지금 이 문제가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신이 해를 만들고, 달을 만들고, 별을 만들면서 인간에게 요구한 게 있다는 거예요. 요구한 게 뭐냐? 몰라요. 요구한 게 뭔지 모르니까 신에게 빌고 ‘신에게 빌면 나에게 행운이 올 거야. 신의 존재를 인정해 줬으니까 그만한 보상이 있을 거야.’라고 하면서 옛날부터 신을 섬기기 시작한 거예요. 이건 실상이 아닙니다. 허무한 거고 허상이에요.

그러면 실상을 말할 때가 됐죠? 해는 왜 있고 달은 왜 있는가? 요한계시록 12장 1절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해를 입은’ 해를 덮어쓴 여자가 있는데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해와 달과 별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자를 꾸미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여자? 미스코리아? 어느 배우? 송혜교? 어느 여자가 해와 달과 별과 함께 있어요?

이 땅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남자나 여자는 모두 남자의 후손이에요. 남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에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여자는 없습니다. 그냥 남자의 후손이죠. 남자의 생산물입니다. 족보가 남자 족보에 다 올라가요. 남자가 확장하는데 남자의 일부가 여자, 남자, 아들, 딸로 구분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해와 달과 별을 뒤집어쓴 여자는 없고, 해와 달과 별을 뒤집어쓴 그 여자를 찾아야 해요. 이 세상 모든 여자는 남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구약은 하나님의 이름, 신약에서는 예수님이죠, 그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이 출몰되기 시작했어요. 툭툭 출몰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의 후손에 속하지 않는, 여자의 후손에 해당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게 창세기 4장에 믿음으로 나온 노선의 아벨이에요. 남자로 태어난 아벨은 죽고, 남자와 여자 없이 새롭게 태어난 아벨이 등장하는 겁니다. 아벨의 후손이라는 새로운 노선이 하나 만들어져요.

그렇게 만들어지게 되면 그냥 ‘만들어졌다’가 아니라, 저쪽에 인간의 육으로는 나올 수 없는 또는 인간의 육이 죽게 만들어서 새롭게 생성된, 새로 삐져나온 노선은 기존 남자에 속한 세계가 뱀의 후손에 속했다는 것을 들춰내요. 뱀의 후손이 없으면 여자의 후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실상, 믿음의 실상이 등장하게 되면 ‘뱀의 후손이냐, 아니면 여자의 후손이냐?’ 두 개의 노선만 달랑 남아요. 수요일 설교의 제목처럼 다양성에서 두 노선으로 정리 정돈이 된다고요, 모아진다고요. 뱀의 후손은 남자의 후손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냥 남자 족보로 올라가요.

그런데 문제는 여자를 찾을 수가 없어요. ‘여자의 후손’에서 그 여자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 없이 태어나는 거예요. 남자에서 태어난 것은 남자의 족보에 속하고, 남자 없이 태어나는 것은 여자에 속합니다.

그게 창세기 3장에 보면 나와요. 남자는 흙이 되었는데 여자는 그 이름이 생명이에요. 생명의 노선에서 여자가 새롭게 등장한다는 거예요. 하와라는 이름이 생명이라는 말이에요. 그 생명 노선에 등장하는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데 가인은 그냥 동생을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게 아니에요.

가인에게 덮어 씌워진 게 있어요. 악이 덮어씌워져 있으니까 그걸 다스리라고 했는데, 그걸 다스리지 못해서 동생을 죽인 거예요. 가인의 노선은 하나님과 끊어진 노선이에요. 창세기 4장에서 하나님이 제사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그 노선이 끊어진 쪽이 하나님과 그 노선이 연결된 자를 살해하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죽은 아벨의 노선을 셋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시작하는 겁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복잡한 이유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 모든 세계가 믿음이 없는 세계에요. 믿음이 없는 세계니까 실상은 모르는 상태에서 가상과 거짓 속에 살아가는 거예요. 가상과 거짓 속에서 사는데 실상으로 나오는 방법은 오늘 본문 사라에 의하면 임신하지 못하는 데서 새로운 아기가 탄생해야 한다는 이야기에요.

노아가 방주를 만들 듯이 하는데 이제 방주 만드는 시기는 지나갔고, 이제는 사람 속에서 새로운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아닌 곳에서 새로운 나를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 노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다시 요한계시록 12장 1장에서 ‘해가 왜 거기 있고 달이 거기 있고 별이 거기 있느냐?’ 왜 있는지를 모르겠다. 허상에 속한 우리가 보기엔 이유가 없죠. 이유도 모르고 그냥 신을 섬기듯이 섬겼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해와 달과 별이 거기 있다고 하지 않고 ‘함께 있다.’가 성립되는 새로운 인물을 여자라는 이름으로 등장시키는 거예요.

그 여자를 대신하는 아들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여자의 유일한 후손인 아들 된 예수님이에요. 남자예요. 기존 악마의, 뱀의 노선에 속한 남자와 이 남자는 다르죠. 말이 안 통하죠. 다릅니다. 결과 문제에요. ‘사라’라는 인간은 없어요. ‘사래’가 있었어요. 기존의 뱀에 후손에 속한 사래를 없애버리지요.

여기서 ‘없애버린다’라는 것은 그 이름을 제거하는 거죠. 그 이름을 제거하고 ‘사래’가 낳은 아들로 인해 그 ‘사래’가 ‘사라’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동시에 아버지는 ‘아브람’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건 없어져요.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는 없어지고 ‘아브라함’으로 새로운 인물이 여기서 등장합니다.

이름을 없앤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기존의 것을 없앤다, ‘없다’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기존의 것에 대해서 없는 조건을 새롭게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로 인하여 발생시킨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것을 없앨 때 그냥 없애면 안 되죠. 없앨 때 어떻게 없애는가?

기존의 세계가 발각당하는 상태에서 ‘내가 없어질 만하네.’라고 인식되는 상태에서 없어져야 해요. 그게 뭐냐? “하나님 농담하십니까?”라고 아브람도, 사래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창세기 17장 15-17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여기 웃는다는 말이 나와요. 웃었다. 18장 12-15절에 보면, 이번엔 사라가 웃어요.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지금 이야기의 초점이요, 늙어빠진 여자가 아기를 낳는다는 거기에 있어야 할 이야기의 초점이 “너 웃었지?” “안 웃었습니다.” “웃었잖아!” 지금 웃는 이야기에 꽂혀 있어요. 참 천사가 할 일도 없이 사라를 붙들고 시비를 거는데 웃었는지 안 웃었는지가 그게 그렇게 대수입니까? 그게 그렇게 큰 문제예요?

지금 아직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름이 왜 바뀌어야 하는지를, 내가 과연 죽은 존재인지 산 존재인지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농담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농담으로! 계시를 줬으면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끝까지 아브라함과 사라는 “제 몸이 늙었는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라고 계시가 오니까 비로소 자기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나는 따로 내가 믿는 게 있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따로 내가 믿는 게 있는데 내가 믿는 것에 비해 지금 당신이 지금 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나보고 믿으라고 하니까 내가 웃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여기서 우리는 대체 교회 다닌다는 것을, 예수 믿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통일교요, 통일교에서 합동결혼식을 합니다. 그들의 교리가 이거에요. 이 세상이 평화롭게 되려면 전 세계 90개국의 몸들이 서로 섞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교리에요. 그래야 평화가 온다는 거예요.

서로의 민족을 서로 인질로 잡으면 안 싸운다는 그 말이거든요. 문선명이 그걸 주장했어요. 결혼할 때도 교주가 랜덤으로 찍어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야 한다는 거예요. 이거 참 편하죠. 교주가 준 피를 먹은 자들끼리는 교주가 찍어준 자와 결혼해야 한다. 처음에는 찍어준 사람으로 했는데 요새는 개방이 되어서 거부권을 3번 허락해요.

한 번 선보고 이건 너무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고, 두 번째 보고 거절하고, 세 번 보고도 거절하면 “안 되겠다. 내가 일방적으로 찍어준 대로 무조건 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요새 세 번 보고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취업 이력서도 백 통 넣어도 될까, 말까 하는데 그 중요한 결혼 문제에 대해서 200번 이상 선보게 해야지 세 번만 봐요?

그래서 그들은 공개적으로 합동결혼식을 하는 거예요. 이게 가시적이에요. 보이는 거예요. 인간은 보이는 것에 대해서 자기의 실질적인 시력이 있으면 그걸 믿어요. 나한테 신이 있다, 뭐가 있다는 것을 보이는 형식으로 나에게 제공하라는 거예요. 그게 천주교에요.

“이 살과 이 떡을 먹으면 예수님의 살과 떡을 먹는 겁니다.” 이게 천주교잖아요. 신부들 복장 보세요. 애들 훈장 놀이하는 거랑 똑같아요. 북한 장군들 보세요. 훈장이 무거워서 옷이 축 처졌어요. 전부다 가시적입니다. 가시적인 어떤 결과를 얻고 있어요.

그 가시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 종교마다 뭘 하느냐? “시켜만 주이소.” 다시 말해서 ‘어떤 가능성 있는 일만 시키면 그 가능성을 실제로 해냄으로써 불가능한 영적인 능력을 얻겠습니다.’ 이게 바로 종교잖아요. 그게 흑마술이에요. 흑마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부적을 만들어서 신비로운 영적 기운을 빼내어서 두 가지의 운, 건강 운과 재물 운을 얻고자 하는 게 흑마술이에요.

그 흑마술과 종교가 차이점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시킨 대로 믿을 테니까 나에게 건강 운과 재물 운을 허락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들고 싶은데 재료, 소스가 별로 없다는 거예요. 나는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그게 실제적인 이익이니까요.

‘사래’는 그 이름의 뜻이 ‘어여쁜 나의 공주여’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그 공주가 아기를 못 낳아요. 야곱의 두 아내 라헬과 레아도 불임 여성이에요.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불임 여성입니다. 이삭 부인도 불임 여성이고, 아브람 부인도 불임 여성이고, 야곱 부인들도 둘 다 아기를 못 낳는 불임여성이에요.

그런데 라헬과 레아가 남편 되는 야곱에게 찾아와 따집니다. “아이 좀 낳아줘.” 하니까 야곱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 성태치 못 하게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낳느냐?”(창 30:2) 야곱은 하나님을 개입시킵니다. “하나님이 아이를 못 낳게 하는데 내가 무슨 재주로 낳을 수가 있느냐.”

지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그 실상 세계가 믿음으로 왔을 때 그 믿음의 구체화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만들어 나가는 가능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여기서 우리는 사라와 마리아의 차이점을 봐야 합니다.

사라는 가능 세계에서 불가능 세계를 맛봤습니다. 이게 사라에요. 그런데 마리아는 아예 없어요. 왜? 결혼을 안 했으니까 아예 없어요. 그래서 없는데 생겨났습니다. 사라는, 인간이 탈이 났다는 것, 아까 웃었다고 했죠, 인간은 하나님이 주든 안 주든 관계없이 자기 나름대로 소박하게 믿음의 세계를 갖추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끌어모아서 자기 세계를 구성하면 잘은 못 살아도 그럭저럭 세상 살 수 있다. 인간의 희망은 어디에 있느냐? 내 가능성에, 희망에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그렇게 탈이 난 거예요. 그런데 어쩌다 임신이 된 거죠. 그런데 마리아는 아예 자식을 낳으면 안 돼요.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자식을 낳아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예상은 해 보지만 마리아는 예상 자체가 절단돼서 없어요, 예상 자체가!

사라 입장에서는 ‘말씀이 개입되면 너도 구원받을 수 있다.’가 되지만, 마리아에게는 아예 ‘너’라는 게 없어요. 나도 없고 너도 없어요. 그것은 왜 그런가? 해와 달과 별은 유일한 있음의 인간,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오므라들고 함께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인간들은 “해가 있다. 달이 저기 있다. 별이 저기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도 없어요.

암세포가 에너지를 많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활동성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이 암세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이것을 암세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폐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것을 받아들일 인간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있음을 선점하고 그 나머지를 없애버립니다. 죽이는 거죠. 이렇게 해서 실상과 허상의 세계 가운데 무엇이 놓여 있는가? 죽음이 놓여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나와 나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 새로운 나와 옛날 나 사이에는 뭐가 있느냐? 죽음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죽음이 놓여 있기 때문에 ‘못 한다’가 아니라 예상도 안 하고 있었어요. 아무런 예상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목적? 목표? 기대? 다 무의미합니다.

특히 죽은 자들이 제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내가 없는 이상 천국과 지옥도 우리들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없습니다. 인간이 생각한 천국 지옥도 없어요. 왜냐하면 달이 있는데 거기 있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달과 별이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상 우리가 생각한, 우리 아이디어로 끄집어낸 천국과 지옥도 없어요.

그러면 지옥은 어딨느냐? 예수 천국이 등장할 때 비로소 지옥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 말을 할 때 비로소 지옥이 나타나는 겁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지옥이라는 건 지옥도 아니에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 그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보여줬어요. 농담으로, 웃음거리로 봤어요.

이게 구약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게 되면 웃음 자체가 싹 가시죠. 생각지도 못한 것이 출몰했으니까요. 구약에서는 사라가 이삭을 임신했잖아요? 그런데 신약은 마리아가 기준이 되어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임신 못 하면 천국 못 갑니다. 제2 제3의 마리아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는 걸로 여겨서 천국에 보내요.

그걸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거예요.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할 때 예상을 못 했잖아요? 성령이 임할 때의 특징이 뭐냐? 예상도 못 한 거예요. 처음에는 이런 예상을 했겠죠. 인간은 구약부터 신약으로 오기 때문에, 구약의 여러 가지 증거를 거쳐 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날 도와줌으로 이것은 기적이다 … 말기 암에서 이렇게 낫는 것은 하나님이 날 도우심이다.’ 이런 온갖 이야기를 다 할 거예요.

그러나 그건 허상입니다. 실상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에서 마감이 되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재료를 긁어모았던 그러한 결론이 뭐냐? ‘이렇게 하면 구원받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천국 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나는 여기 있고 거기 성경이 거기 있네? 나무가 거기 있네? 해가 거기 있네? 달이 거기 있네? 왜 있을까? 아,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잘 섬기라고 해와 달과 별이 있고, 이제는 성경이 있구나. 그러면 살아있는 내가 성경을 보면 되겠네.’라고 성경 보며 내린 모든 결론은 다 헛빵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그 짓 했어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습니다. 그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고자 한 수 배우려고 예수님께 왔을 때 그가 아무리 탐구하고 연구해도 자기가 예상하지 못한, 기대하지 못한 내용을 주님께서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제가 십계명 어릴 때부터 지켰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지켰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한 방을 때리십니다. “네 가진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예수님은,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바로 소유의 있음, 그 소유가 있다는 것으로부터 발생된다는 것을 알아요. 소유가 있다는 것에서부터 ‘나’가 발생됩니다. 내 것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나’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여러분들이 아마 수백 번 들었고, 수십 번 보았던 말씀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여기서 우리가 어느 단어에 초점을 맞춰야 하느냐 하면, ‘없다’라는 거예요. ‘없다’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예수님 보기에 “달이 있네, 별이 있네”하는 것처럼 “저기 인간이 있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관점을 바꿔야 해요. 내 관점이 아니고 예수님 관점으로 바꿔야 해요. 왜? 유일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니까, 나머지는 뱀의 후손들이에요.

소용없어요. 다 쓰잘데기 없는 거예요.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쓸모없으면 쓸모없는 거예요. 예수님 관점과 만나면 없는 거예요. 그냥 없어요. 사라 보고 “네 자궁은 쓸모가 있나?” “없습니다.” 그거예요. 쓸모가 없어요. “자식 낳을 자신 있어?” “이 나이에 무슨 자식입니까? 지금 농담하십니까? 자꾸 웃음이 납니다.” “내 말이 우습지. 그지?” “예, 우습습니다.” “됐어. 그러면 됐어. 내 말이 우스우면 이제부터 네 속에 네 관점 말고, 허상의 관점 말고 실상의 관점을 네 속에 주입할 거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가 네 속에서 하나의 방주처럼 나올 거야.”

그게 나오는 거예요. ‘이 인간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가 네 안에서 자라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나니까, 그게 나 예수님이니까.’ 사라의 특징은 주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사라의 그 몸을 하나의 인큐베이터로 사용했다는 점이 중요해요. 하나의 기계에요.

사라의 몸, 사라의 자궁은 쓸모없어요. 아무 쓸데 없습니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해요. 비 (非)생산적입니다. 불모적이에요. 흔히들 광야 이야기를 하잖아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돌아다녔습니다. 15일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동안 돌아다니게 했습니다. 아, 여러분이 상상해 보세요. 15일 만에 갈 거리를 40년 동안 돌아다녔다.

뺑뺑이를 돌린 거지요. 막혀 있다는 겁니다. 어디에? 보이는 세계에. 아브라함 자손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못 간 것은, 그들이 광야로 나오면서 보이는 세계가 그들에게 전부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의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믿으려고 할 때 그 믿음은 좌절되는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일은 딴 게 아니에요. 우리의 가능성을, 거기서 나오는 우리의 모든 소유성을 좌절시키는 거예요. 그게 주의 일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광야 전체를 지근지근 밟게 했다.’ 밟았습니다.

그렇게 밟아버리면 이것은 뭐냐? 아브라함 자손이 다녀간 길은 뭐가 되느냐? 불모의 대지, 황무지, 황폐함, 공허함이 되어버려요. 허상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밟기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의 가정 단위로 광야를 밟았어요. 아브라함이 밟고 갔어요. 아브라함이 광야를 밟으면서 머물 곳이 없다는 것, 우리는 그냥 머물고 떠나고, 머물고 떠나고…, 그래서 우리가 갈 바는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람의 몸은 임신하고 있습니다, 임신 되고 있어요.

타이밍이 맞잖아요, 타이밍이. 죽은 아내 몸에서는 새 아이가 잉태되어 있고, 그들이 사는 공간은 머물 곳이 없음을 증명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고요. 사래의 몸은 임신하지 못하는 황폐한, 새로운 아기를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는 몸을 가지고 새로운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안에서 자라난다면…, 오늘 본문에는 ‘약속’으로 되어 있어요.

그 ‘약속’이 자라난다면 그 몸으로 돌아다닌 그 광야, 나중에 약속의 땅으로 되어 있는 그 가나안 땅을 돌아다닌다는 말은 그 약속의 땅이 황무한 땅이라는 것은, 실상을 모르는, 믿음이 없는 인간들 세계에서는 기껏 그게 한계라는 거예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일관된, 한 번도 주께서 변동한 적이 없는 주의 뜻이 나옵니다. 26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않고, …않고, 너희 천부께서는 기르시나니. 해가 왜 있느냐? 달이 왜 있느냐? 나무가 왜 거기 있느냐? 그리고 참새가 왜 거기 있느냐?

이번에는 들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30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들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있습니다. 왜 있습니까? 왜 있습니까! ‘친히 기르시나니’를 드러내기 위해서 있습니다. 누가요? ‘이 땅에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하면 안 되고요, 바로 이 땅에서 오셔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분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늘날 죄인을 성도라는 이름으로 친히 기르십니다.

왜냐하면 그 죄인 안에 예수님 본인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 본인이 들어 있어요. 어찌 귀하지 않습니까? “내 안에 누가 있다.” 여러분, 이 말을 세상의 누구에게 이야기해 보세요. 그걸 누가 알아듣습니까? “해가 내 몸밖에 있었지? 이제는 그 해와 달과 별이 내 몸 안에 있다.” 이걸 누가 믿습니까?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거예요.

“그래? 어떻게 해서 저 뜨거운 해와 달이 네 몸 안에 있는데? 한 번 설명해 봐, 설명해 보라고!” 해와 달이 내 안에 있다는 그 말은, ‘이렇게 해서 해와 달이 내 안에 있다’라는 것으로 설명하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다 거짓이고 헛거야. 왜? 예수님을 죽여서 보냈으니까. 예수님을 떠나보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그걸 강조하는 거예요.

뜨거운 해하고 같이 살아서 뭐 할 건데요? 예수님이 내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아닌 내가, 거기서 다른 ‘나’가 나오는 거예요. 해와 달, 별이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보면 빛이라고 되어 있어요. 빛이 먼저 있고 해와 달과 별이 있잖아요. 그러면 나와 다른 ‘나’는 뭐냐?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뭐.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괜찮은 내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거지요. 해와 달은 하늘에 가면 빛이 되는 것처럼. 지상에 있을 때는 해와 달, 이런 식의 발광체로 있지만 천국에 가면 빛 자체가 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 22:5).

어린양의 빛 그 자체로 조명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거예요. 그러면 로마서 8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겠어요? 이 땅에는 없어요. 내 안에도 없어요. 없는데 없는 것을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로마서 8장 19-20절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장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것들로 집결해서 뭔가 건강, 재물 운운하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한테 유익도 없는데 교회 왜 다닙니까? 둘 중 하나에요. 그래도 무슨 이익인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다니는 사람, 통일 교인이지요. 신천지도 그렇고요.

‘시켜만 주이소!’ 맨날 시켜만 주이소. ‘하라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 전도하라면 전도하고, 헌금하라면 헌금하고 다 하겠습니다. 그냥 저 천당이나 보내주세요.’ 흑마술하는 사람이지요. 반면에 난데없이 사라가 되고 말았어요. 난데없이 마리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 속에, 이 가능함속에 불가능성이 자꾸 나와요.

나오는데 어떻게 나오는가?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가 한통속으로 ‘참,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흥!’ 하듯이. 그걸 가지고 ‘흥, 칫, 뽕!’이라고 합니다. 그 대목이 또 나와요.

마태복음 27장 40절에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42절에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지금 당신이 그 십자가에서 내려온다면 당신이 믿지 말래도 믿어줄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믿어줄게’가 믿어준다는 말이 아니고 “당신이 지금 자기도 구원 못 하면서 남을 구원한다는 게 흥! 칫! 뽕! 웃기지도 마라. 농담도 정도껏 해야지.” 교회 60년 다닌 우리 마음속에 이게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나를 참하게 만들어서 천당 보내려고 교회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을 일거에 다 더러운 것으로, 지저분한 것으로 여길 정도로 ‘내가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거절당하는 일들만 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여러분이 여태껏 해 보셨습니까?

진짜 성도는 뭐냐? 주께서, 성령께서 인간의 가능성을, 그 철판을 잘라내요. 인간의 마음은 철판이거든요. 이것을 강제로 잘라냅니다. 십자가 피로 가능성이 있다는 그것을 다 잘라내서 조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불가능성으로 집어넣어서 용접을 해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여기서 불꽃이 막 튀지요. 불꽃이 막 튄다고요. 불가능성의 불꽃이 막 튀어나오면 성도에요. 사랑을 만나면 시간이 멈춘다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은, 우리가 더이상 이 세상에서 이동할 필요 없이 확정된 공간 안에 이미 쑥 들어갔다는 겁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시공간이 우리 시공간이 된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로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세상은 내 밖에서 죽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불가능한 공간의 성령이 임하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안에서 천국이 자라나고 있어요. 불가능성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완전하다는 뜻이에요? 그렇지 않고 주께서는 이걸 이루기 위해서 맨날 우리 육신이 갖고 있던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그것을 잘라내요.

가능성을 막아버리고 그래서 기대와 목표가 좌절되면서 그걸 십자가 사랑으로 이어버리면 비로소 그 사랑 가운데서 주님의 생산성, 주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생산되는데 그 생산의 인큐베이터 역할, 생산의 공장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끝으로 여러분 삶 가운데서 말도 안 되는 용서하시는 사랑이 계속 나오기를 바랍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도 없이 나오는 그 사랑과 죄사함이 계속 용접 불꽃 튀듯이 계속 나와서 주님이 우리 안에 함께 있음을 이 땅 나그네 인생 살아가면서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거짓된 세상 속에서 같이 거짓된 것만 공부하고, 거짓된 인간과 대화하면서 그게 진리인 양, 전부인 양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짓인 것을 알게 한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인 것을 이제는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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