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순

사울 때의 생각

아빠와 함께 2025. 6. 15. 22:31

사울 때의 생각 250615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은 사울이라는 사람, 사울이 바울로 바뀌게 된 그 경위에 대해서 성경에 나와 있는 그 취지에 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상당히 한 곳에만 꽂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가 없다.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살고 그리고 따라서 우리 피조물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했던 사람입니다. 굉장히 믿음이 좋고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그런 성향도 있어요.

그냥 최고의 믿음은 어디냐? 무엇이 가장 좋은? 거기서 쉬지 않고 애를 쓰는데 그냥 그가 그렇게 믿음이 있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하나님의 누를 끼치고 하나님의 욕 보이는 그런 자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나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 몸 하나 순교하겠다는 자세로서 극렬하게 싸웠던 사람입니다. 믿음의 싸움을 한 사람이죠.

그래서 이게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거예요. 따라서 그 성경에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굳이 체포해서 죽이기로 했어요. 그냥 체포만 한 게 아니고 옥에 가두기까지만 한 게 아니고 실제로 죽였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나옵니다. 왜 꼭 죽여서까지 하나님께 이렇게 그런 것을 해야 되는가?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누가 된다고 생각했는가? 그 점에 대해서 갈라디아서나 에베소서에서 내가 옛날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존재가 있어야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선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피조물은 주저없이 헌신해야 된다는 그 생각이 나를 이렇게 예수님을 핍박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도 바울과 예수님의 관계가 어떤 관계라 하는 것은 감이 오지요.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였고 예수님이 보기에 사도 바울은 어떤 존재인가?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요. “사도 바울아. 니가 참 애쓴다. 참 애썼다. 근데 니가 애쓰면 애쓸수록 니가 가시에다가 니 맨살을 비비는 거하고 똑같은 짓이다. 왜 그 쓸데없는 짓을 쓸데없는 짓으로 니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느냐?”라는 그런 책망으로서 대화가 텄어요. 사도 바울하고 예수님의 첫 대화가 그겁니다. “니 참 고생이 많다. 그런데 쓸데없는 짓 하고 있다. 니만 힘들어.”라고 한 그 이야기.

그때 사도 바울은 “아. 내 쪽이 잘못되었구나. 내가 고쳐야 되겠네.”라는 생각을 한 게 아니고 죽었던 분이 나한테 찾아왔다는 그 점, 그 점에 대해서 바울은 사울은 달라졌습니다. 없어야 되는 분인데 분명히 계시다는 걸 아는 순간 그동안 뭐가 부각됐느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내가 있는 게 아니고 그 중간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빼먹고 그다음에 자기를 생각한 게 그게 잘못이었던 거예요. 어쨌든 간에 사도, 사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고 내 있으니까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딱 그거 하나만 딱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제 여기에 사도행전 9장 이야기입니다. 이 그림에 보면 사울이 햇빛을 강한 햇빛을 받고 나귀에서 떨어져 엎어져 가지고 햇빛에 눈이 갔어요. 근데 이 뒤에 나온 사람들 있죠? 같은 일행들 일행들입니다. 일행들인데 일행들이 무슨 소리가 안 난 게 아니고 소리가 나기는 했는데 천둥소리 우레 소리 그 소리만 들렸지 자기한테는 구체적으로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대화가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에 사울은 예수님과 아까 이야기한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고 주고받고 주고받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말은 예수님이 사울에 대해서 이미 익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스데반 죽이는 데 있어서 사울이 가담했다는 사실도 알고 책임자로 있었다는 것도 다 알아요. 다 알고 거기에 대해서 일체 주님은 그 사람 사울이 어떤 짓을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어떻게 죽였느냐에 대해서 일체 묻지를 않았어요.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나타났어요. 다만. 다만 등장하고 나타났어요. 나타나고 난 뒤에 이제 눈이 갔죠. 눈이 가고 나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 집에 갔는데 아나니아 사람 이전에 미리 또 하나님께서 또 다 조치를 해가지고 천사를 보내 가지고 “나중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곧 있으면 올 건데 그 사람은 사흘 동안 밥도 못 먹고 지금 정신없어 있다. 일단 밥은 먹여주고 그다음에 안수를 해줘라.” 이렇게 밑에 천사가 와서 연락을 받고 사월이 이제 눈 감고 왔을 때 아나니아가 “다 지시받았습니다. 준비돼 있습니다.” 하고 안수했더니만 눈에서 무엇이 벗겨졌냐면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다는 거예요.

눈에서 비늘이 벗겨졌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그동안 내가 알던 것이 벗겨진 걸 말합니다. 내가 알던 것.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인간은 자기 몸이 전부가 아니고 이 몸에 마귀의 생각이 꺼풀로 덮여 있었던 거예요. 인간의 육을 덮고 있는 마귀의 생각은 주님이 성령이 찾아오지 않으면 이게 벗겨지지 않아요. 얼굴 팩도 아니고 잡아당겨 이런 게 아니고 인간 속에 있는 눈에 보이는 이 안목 은 주님이 잡아당기지 않으면 벗겨지지 않습니다. 딱 이걸 비늘이 떨어지면서 비로소 내 관점에서 보던 세상에서 예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고 하나님 다시 보고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죠.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이 이 그림 보면 좀 헤 하고 기분이 좋지요? 눈도 떴겠다. 기운도 차렸겠다. 세상도 달리 보였겠다. 이제는 그야말로 사도 바울이 내가 죽었다가 나는 기왕 죽었고 내 죽었다가 내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산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게 되었죠. 알게 되었으니깐 뭐 왜 웃느냐? 자유니까요. 뭐로부터 자유? 내가 이래 해야 되고 난 이렇게 살아야 되고 이렇게 반듯이 해야 되고 자기로부터의 관계가 청산, 떨어져 나갔으니까 주님이 나하고 관계했던 나가 떨어지고 그 관계에 주님이 관여했으니까 자유입니다. 주님이 자유한 것처럼 이제는 성령 안에서 사도바울도 자유지요.

자유가 돼 가지고 그다음부터 한 게 뭐냐 하면은 자기가 겪었던 그 일이 허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 소스 재료가 된다는 생각해가지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내가 이랬던 사람입니다 하고 자기 과거 이야기부터 해서 주님 만난 이야기부터 해가지고 주저없이 거침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하면서 “내가 왕년에 한 율법 했고 한 착함 했고 한 의로움 했고,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나처럼 의로운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주께서 나를 그런 죄인을 주께서 다 용서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주의 증인 되게 하셨다. 이 이야기. 이제부터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죽었다가 살아 계십니다.”라는 그걸 이제 증거하기 시작했죠.

증거하고 나니까 이제 누가 고민이 될 적으로 돌아섰느냐 하면은 그 당시에 사도 바울에게 기대와 믿음을 가졌던 바리새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나쁜 소문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율법을 없애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우리가 처형한 예수님을 추종 세력이다. 새로운 교파 생겼다. 새로운 이단 하나 만들었다. 그러한 비난과 오해를 이제 듣기 시작한 거예요. 그럴 때마다 사도 바울은 이게 바로 주님이 나처럼 겪었던 그 고난을 주님도 이 땅에서 겪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굉장히 감사하면서 그리고 교인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겪는 아픔과 그 서러움을 여러분들도 같이 견디게 되면 겪게 되면 여러분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령 안에 성전입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이 사도 바울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되긴 어떻게 되겠어요? 죽었지. 죽었어요. 죽는 장면 같은 것은 중요하지도 않아요. 사도 바울이 무슨 복음을 전했느냐, 복음의 내용이 뭐냐가 중요하지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죽느냐 그거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어서 사도행전 마지막에는 그 이야기는 없습니다. 성령님이 중요하지 사도 바울이 성령보다 덜 중요하거든요. 누구든지 성령이 임하면 사도 바울처럼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살아계셔서 하신 일, 주님이 고생했던 그 일을 반복해서 일어나는 그것을 차라리 이제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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