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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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2025. 2. 3. 18:28

 “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 그 차이예요. “저 십자가가 나를 구원할 것이다.” 그거 아니거든요? 그게 십자가 취지가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오게 되면 교체가 일어나요.

‘왜 나 아니고 주님이냐? 왜 한 몸을 따로 준비했느냐?’가 이제 드러나는 거예요. 주께서 한 몸 준비했다는 말은, 이 한 몸 되시는 그분의 피(낫)에 네 피가(지문이) 묻어있다는 것, 그게 묻어 있어줘야 ‘내가 하는 모든 짓거리가 하나님을 죽게 했다.’라는 것과 결부되면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우리가 수모당해야 마땅함을 아는 그러한 기쁨이 바로 주께서 성령으로 주신 선물이에요. 우리의 필연, 우리가 생각했던 그 필연이 전부다 하나님께서 정말 인간을 쓰레기 취급할 만한 사고방식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가 망하는 게 싫어서 평생 나 지키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내가 모든 것을 조사해 보면, 전부다 원인-결과, 원인-결과, 원인-결과…, 이것밖에 없잖아요. 우연은 없지 않습니까? 전부다 원인 결과에요.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안 따져도 너라는 존재 자체가 처음부터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원인-결과 따지지 마. 너는 죽게 되어 있다.”라는 겁니다. 지금 기준을 바꾸는데 천국 가는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되시는 분이 죄 있는 육신을 입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아들 되시는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그 자리, 그 자리가 유일한 구원의 자리에요. 쉽게 말해서 죽어야 마땅함을 아는 자리가 유일한 구원의 자리에요. 예수님이 아는 원인-결과는 자기가 죽는 결과를 낳을 때 거기에 연결, 연결, 연결된 그 원인들이에요. 물 위를 걷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고 그 모든 일, 그 모든 일이 어디로 모아지느냐 하면, 십자가 죽는 일까지 연결, 연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이게 주님에게 필연적인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요? 그 필연을 이해합니까? 자기 몸뚱이 지키는 거 외에는 없잖아요. 어차피 인간은 망하게 되어 있고 저주받게 되어 있는데 이걸 강하게 부정하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인간에 대한 모욕감이 들어있는데 그걸 전혀 발견하지를 못하고 ‘주께서 지켜주실 거야. 주님을 사랑하니까 구원할 거야. 믿을 거야. 천국 보내줄 거야.’ 무슨 필연적 논리를 행사합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한다, 이거 필연이잖아요. 우연 아니에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이 절망할 때까지.

본인이, 내가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 때까지. 인간은 하나님 믿는 자신을 믿지만 하나님을 믿은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 믿는 내가 하나님 기준을 방해하기 때문에요.

 

이렇게 정리합시다. “하나님 저를 어떻게 천국 보냅니까?” “제비뽑기했다? 우연이 너를 찾아간 거야. 너의 필연을 모독하면서.” 아예 판을 뒤집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 존재의 판을 뒤집어 버렸어요. 내가 이렇게 애써서 살아왔다는 그 판을 두고 “그때 그 일도 우연이었고, 그때 그 일도 우연이었고, 그때 그 일도 우연이었다. 나라의 금융 정책으로 인하여 내 주식이 날아가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아내가 ‘이혼하자. 당신이 내 돈 날렸으니까. 내 필연적이고 합리적 조치에 의하면 당신하고 더 살면 내가 빌어먹겠다. 이 필연적 조치에 의해서 우리가 여기서 헤어지는 게 내 장래에 이익되겠다.’라는 말을 한 것도 주님의 말씀이었다, 주님의 말씀.”

그래서 그 비행사 면직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나서 빌어먹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여러분 믿겠습니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하나에요. “제발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니 좀 소모해라. 소모 좀 해라.” 소모하란 그 말이죠. 왜? 천국보다 좋은 게 없고 지옥보다 무서운 게 없는 거예요.

이것을 우리는 0.1초도 생각 안 하고 매일 같이 그냥 넘어갑니다. 천국보다 좋은 게 없고 지옥보다 무서운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옥의 무서움을 뭐로 덮느냐 하면, 남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그 외로움으로 덮어버려요. 내가 외로울 때의 무서움으로 덮어버려요. 나의 쓸쓸함으로 덮어버립니다. 남한테 인정받지 못하고, 나 하나 굶어 죽는다는 내 죽음의 무서움이 지옥의 무서움을 덮고 있어요, 방해하고 있어요,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죽으라고 하는데 우리는 살려고 합니다.

 

모든 것이 공포가 주는 그 억압, 압박, 그걸 감당 못할 때 주님은 졸이기에 나섭니다. “어이! 제단에 소제, 번제 준비했어?” 예수님 집어넣고 구원 받을 자를 함께 집어넣어서 “예수님만 남고 나머지는 다 졸여버려!” 나 잘났다, 나 훌륭하다, 내가 알아서 이렇게 훌륭했다, 이것. ‘내가 이렇게 마귀에게 벌벌 떨었다. 나는 망할까 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거 다 졸여버려라!” 그렇게 졸이는 그 기간이 우리 숨 끊어질 때까지입니다.

그걸 소모한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우연과 우연의 연속으로, 매일같이 우연적으로 소모당하고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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