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관련

2012년 봄 특강-언약c

아빠와 함께 2014. 1. 2. 02:57

20120505 특강 - 언약c
(강의:이근호 목사)
음성3

아브람으로 시작했다가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해서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죠. 따라서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미래는 없어요. 하나님이 미래를 알기 때문에 천국 가는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했을 때 여기서 무슨 요소가 가미돼야 된다 했습니다. 이 요소가 아브라함에게는 나올 게 없어요. 하나님께서 집어넣는 요소는 뭐냐 하면, 아브라함을 어떻게 조지느냐가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놔둬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라는 나름대로의 자기 자식을 낳지요. 그것도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잖아요.

하갈이라는 여인 자체도 사실은 아브라함과 관계 맺어서는 안 될 여인이고 엄연히 사라가 있는데. 사라라는 본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임신을 못해요. 하나님께서 임신 못하게 막아놓고 아브라함은 임신 못하는 여성에게 자식은 낳아야 되겠고 그런데 가임여성은 여종 하갈이고 하나님 뜻은 네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다고 하니까 사라 대신 하갈에게서 이스마엘 낳는 이것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하루하루 일기장이에요. 그냥 우리에게 살라는 거예요. 신앙생활하지 말고.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가 관여하면 안 돼요. 내 구원에 내가 관여하면 안 된다고. 내가 내 구원을 손질하면 안 돼요. 어느 정도 신앙이 높을까, 이 정도 하면 구원에 가까웠을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아브라함 같은 발상으로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냥 살면 놀라운 사실은, 이런 아브라함의 성질대로 사는 이것은 주께서는 뻔히 아시면서 아브라함이, “도저히 내가 못했습니다, 나는 내가 한 게 아닙니다.” 하는 거기다가 유발하도록 요소를 집어넣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처럼.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범위를 넓혀가요. 마리아가 임신한 것 자기 할 일 아니죠.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젖먹이고 예수님을 키우고 아침저녁으로 밥 해주는 그것도 뒤돌아보면 내가 한 게 아닌 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안이라는 것은 공간성이 아니고 제가 시간성이라 하는 것은 돌이켜보게 되면 모든 것이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코스대로 주께서 우리한테 그냥 적용시켰을 뿐인 겁니다. 그 사랑과 깊이와 높이를 넓혀가는 겁니다. 우리는 대단한 놀라운 기적적인 것만 골라서 이것은 주님의 특별한 기적이라고 우겼던 그 시절이 점점 더 확산되면서, 지난 주 머리 했는데 세상에 예상보다 잘 나왔을 줄이야.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변변치 않은 것까지도 작은 것 속에서 아름다움이 있다고 모든 범사에 감사하는 걸로 확산되게 하시는 거죠.

그러면 그 확산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될 때 여기에 죽음을 집어넣는데 죽음을 집어넣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이라는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을 그야말로 쟁반에 담아서 제물로 바치듯이 이삭을 잡습니다. 모리아 산에 가서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잡아서 죽음으로 이끌어가죠.

그러면 아브람이 아브라함 될 나온 요소가 죽음인데 이 죽음은 우리의 죽음은 아닙니다. 아브람 죽음은 아닙니다. 죽으려고 신앙생활하지 마세요. 괜히 쓸데없는 짓하고 있는 겁니다. 굶어죽으려고 금식하지 마세요. 금식하시되 밥 먹을 때 감사히 먹으면 그게 바로 금식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피자를 두 판 시키는 거예요. 남보다 더 많은 금식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감사의 기도하면서 오늘밤도 주무시면 철야하는 겁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꿈속에서 주께서 돌봐주시기를 하고 맡겨주시면 그것은 철야 기도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되는 겁니다. 철야 자체 효과는 없겠지만.

고난주간, 3월말 4월초에 하잖아요. 감사함으로 기도하시면 그것이 고난 되고 그렇게 고난 되면 365일 전체가 고난주간 되는 겁니다. 전체가 부활주간이고 고난주간이고. 그런데 그게 어려운 이유가 나중에 감사를 너무 많이 하다보면 감사가 식상화 되고, 형식적으로 될 때 주께서는 밥 먹고 얹히게 하십니다. 내 위장이 내 것이 아니고 얹힐 때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한 번, 두 번 자꾸 버릇이 되면 어느새 나의 소유로 굳어져버리죠. 그때마다 또 예상 못한 사태가 주어지는 것은, 나의 미래가 내 미래가 아니고 주님의 미래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려운 것 해봅시다. 이 죽음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죽음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사용해서 자기 죽음을 거기다 삽입시켜놓고 자기 죽음이 효과의 영향을 받아서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는 거예요. 이것은 아브라함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죽은 아브라함을 살려내는 방식이 언약적인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경험될 수 있습니까? 경험될 수가 없어요. 초경험적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기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고 성령이 주는 경험이에요. 우리가 어떻게 경건한 모습을 띠는가? 그것은 성령과 아무 상관도 없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그런 것은 이미 윤리적인 우리 몸으로도 흉내를 내 온 거예요.

이게 동양철학에도 나옵니다. 맹자, 공자, 동양철학을 공부해보면 거기에 칠정이라는 게 있어요. 인간의 욕구와 인간의 이와 감정, 이는 이치,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선한데 신이 주신 것이다. 다른 말로 자연이 주신 것이 되죠. 자연이 주신 것을 가만두면 안 되고 교육시켜서 계발하면 계발한 만큼 열매가 맺힌다. 이걸 거울을 먼지가 앉을 때 닦아줄 때마다 우리는 깨끗한 내성의 본모습, 천성이죠. 신이 주신 본성이 거울을 닦을 때마다 발현되기 때문에 수시로 자주 거울을 닦아주면 그게 바로 부처요, 군자라는 거예요. 제 위치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군자. 공자는 중용이라 하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내려온 건데 사람들은 구약을 모르니까 에베소서 5장이나 갈라디아서 5장을 직접 투여하다보니까 “성경에 내가 지킬 수 있는 게 있네. 그러면 복잡하게 성경 볼 필요도 없이 이런 온유함이 있다는 말은 내가 성령 받았다는 말이고, 성령 받았다는 말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말이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오늘밤에 죽어도 천당 간다는 말이구나. 쉽네.” 이렇게 생각해내는 거예요. 그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문 열고 들어올 때는 다 온유해요. 워낙 성품들이 고와서. 새순교회도 그런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교회는 다 온유하고 화평하고. 그런데 우리교회 다니다보면 성질나죠. 자기 본색이 슬슬 나타나죠. 들어올 때는 온유하고 화평하고 다 자비로워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라는 것은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을 때, 정과 욕심은 하나의 덩어리인데 이 덩어리를 성경에서 인간의 몸이라 합니다. 성경에는 나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인간의 몸은 잘 이야기 안 하고 인간을 분해해서 설명하고 있어요. 네 안에 욕심과 탐욕이 있다고 표현하지 너 안에 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을 잘 안 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을 먼저 불러주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괜히 아담 쪽에서 먼저 꿀렸어요. “제가 벗었음으로” “네가 벗은 것은 누가 알려줬느냐? 원래 다 알고 있어?” 알고 있었으니까 부른 것이지 새삼스럽게 숨어서 자꾸 수치를 가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거든요. 이미 익히 알고, cctv 다 찍힌 것 알고 온다니까. 새삼스럽게 자기를 폼내고 정결하게 한다고 정결한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를 육으로 보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변화시키는 그 변화의 하나님의 자기 죽음을 거기다 집어넣고 그 방식을 개인에서 집단으로 확장시키면 그 나라가 이스라엘 된다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을 망하게 함으로서 껍데기가 화르르 무너지면서 속살이 나오는 방식으로 신약의 남은 자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브람을 하나님의 죽음이 개입해서 아브라함 되게 하시고, 아브라함 되게 하신 그것은 집단으로 확장시키면 이스라엘 되고, 그 이스라엘 전체가 집단화되면서 서서히 그 나라가 망하도록 하고, 그 껍데기가 망함으로서 원래 이스라엘 속에 이끌고 왔던 남은 자 진짜 이스라엘을 바깥으로 뽑아내는 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 참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몇 명이죠? 열두 명이죠. 야곱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열두 명이죠. 야곱이 몇 명이죠? 질문 어려운 것 아닌데. 야곱이 한 명이죠. 하나를 열둘로 해놓고 열둘을 하나에 소급하기 위해서 열둘을 자르는 작업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하나로 모으면서 하나에서 전에 있던 열둘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전에 있던 이스라엘 열둘은 그냥 폼 낸 거예요. 이걸 그림자 다른 말로 모형이죠. 구약의 이스라엘 나라는 신약의 모형입니다.

제가 강의 중에 첫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에 멸망했다는 말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의 모형이라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되겠어요? 당연히 멸망해야 되죠. 언제 멸망하느냐? 매일같이 멸망합니다. 매일같이 교회를 멸망시킵니다. 왜?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서 몸에서 불어난 굳은살을 찌게하고 벗기는 식으로 계속 나갑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이유가, 이스라엘 자체가 이스라엘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셨기 때문에 일단 이스라엘 된 이상은 이스라엘 것이라고 우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때부터 이미 망하기 시작했어요. 조짐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왕을 구함은 하나님의 왕 됨을 싫어서 구하는 것이라고 단언을 해버렸거든요. 그 말에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해준 사람을 우리는 원하고자 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예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대신해서 목사를 세웠을 뿐이지 목사가 하나님이고 목사가 예수란 이유로 목사를 섬기는 게 아니라는 말을 오늘날 교인들은 하죠. 망합니다. 그것은 이미 이스라엘이 그렇게 해왔던 거예요. 지금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소속했던 내 집단을 내 스스로 파괴하기 싫다는 이 말이거든요. 옛날에 한 번 죽으면 됐지 매일같이 죽는다는 싫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나의 이름은 주의 이름으로 했던 것이 얼마 지나가면 나의 이름으로 굳어지고 굳어진 나의 이름은 매일같이 주의 이름의 기능에 의해서 죽어줘야 돼요. 날마다 우리는 죽고 날마다 새로 살아나야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주님에 넘겨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위해서 매일같이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의 기분대로 사는 환경을 통해서 매일같이 죽고 매일같이 사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의 염려는 내일까지 가져가지 마라. 내일의 삶은 주께서 따로 담아서 내일의 아브라함을 준비해주십니다.

본격적으로 어려운 것 하기 전에 쉬운 것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을 바치는 모든 일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왔지요. 이 몸을 압축을 시켜보면 우리의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브라함의 요소가 다 들어오게 돼있어요. 다 들어오면 아브라함 따로 우리 따로가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건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거거든요. 똑같으니까 아무리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아도 자체 내에서 전체를 구원할 수 있는 요소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인간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아브라함의 자손의 이름으로 들어오시게 되면, 들어왔던 아브라함 자손 된 사람들은 들어오신 아브라함 자손의 이름으로 왔던 사람에 의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에 성경 하나도 안 찾아봤지요? 시편 55편 20절 찾아봅시다. 제가 읽을게요.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

시편 28편 5절 누가 읽어보세요.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이것이 하나님 생각이죠.

참 이 말이 이상한 게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면 없어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날마다 너를 파괴했거든 해놓고 아침 되면 또 멀쩡히 있잖아요. 어제 밤에 그 몸이나 아침에 몸이나 똑같다 이 말이죠. 어제 밤에 있었는데 몸이 바뀐 게 아닙니다. 맨 그 몸인데 우리는 우리밖에 생각 안 하니까 기분대로 살기 때문에 날마다 파괴하고 날마다 세웠기 때문에 이 몸이 이렇게 됐다 하니까 우리는 이걸 어떻게 따지느냐 하면, 보통 여러분 몇 시에 주무십니까? 11시에 주무신다 합시다. 10시 59분에 죽고 11시부터는 주님께서 살리시는 겁니까? 어느 날 새벽 2시 반에 자면 2시 29분까지 자기가 알아서 죽고 30분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아니지요.

제가 적극적으로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뭐라고 하던가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언약이 있지요. 예수님의 몸을 언약적으로 아버지가 다루시는 그 언약방법으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다룰 때 예수님께서 날마다 죽이고 날마다 살리실 때 예수님의 몸이 맨날 죽고 살고 이러진 않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몸에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성은 여기 없는 거예요.

이미 과거, 현재, 알파와 오메가가 예수님 몸에 한꺼번에 다 들어 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몸이 예수님 몸에 쓰인다면 우리 몸이 아버지 날 나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지만 주님의 안목으로 바뀐 이상은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이 그대로 주어지게 된다. 우리는 오늘 죽어도 오늘밤에 천국 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천국 가지 직전에 있는 게 아니고 이미 천국 간 몸으로 그냥 주무시면 오늘밤에 주님 품 안에 갈 수가 있는 겁니다. 갔다가 나사로처럼 나흘 만에 되살아날 수도 있는 문제고.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과거, 현재를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다룰 때는 우리 생각하는 과거-현재-미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 몸을 다루던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거예요. 그게 예수 안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아브라함이 이미 죽었지요.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죽었지요. 갑자기 예수님이 등장했습니다. 또 묻습니다. 엘리야가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만약에 죽었다면, 엘리야가 등장해서멱살 쥡니다. “내가 이래도 죽었어?”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이 이야기했지요. 그때 베드로가 느낀 게 뭡니까?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그 좋은 상황을 이미 성령을 통해서 실시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몸의 시간성 때문에 감을 못 잡고 있는 거예요. 만약에 거기서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하면서 엘리야가 “모세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 합니다.” 하고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면 모세가 하는 말이, “눈깔아. 너 나이 몇 살이야?” 모세는 B.C. 1440년, 엘리야는 800년 언저리, 빼면 640년. 이게 말 막 놓을 사이입니까? “너, 경주 이씨 몇 대손이야?” 이렇게 나오면 보통 문제 아니잖아요. 600년 사이 같으면 이순신 장군과 이명박과 말 놓는 사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천국 가면 어떻게 됩니까? 같이 말 놓는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나이 몇 살 먹었어? 육십오 세 됐어? 지하철 공짜로 타? 이 문제는 거기다가 습관화 된 존 듀이에 의하면, 이건 하나의 실용적인 관행적인 습관화, 훈련을 반복하면 습관화됩니다. 우리는 그걸 진리라고 우기거든요. 습관화된 그것으로 진리라고 우기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몸으로 살기 때문에 그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논하고, 성경을 해석하다보니까 그런 오류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야곱이나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요. 여성이란 것도 이 땅에서 여성이지 나중에 천당 가면 여성, 남성도 없어요. 예쁠 때 당기고 찢고 하려면 해야지 그때는 할 것도 없어요. 예수님 같이 하늘나라 영광을 입었는데 성형할 게 없다니까요. 다음번에 가락교회에서 보석이야기할 건데 어떻게 결정체가 인격으로 변하는지 지금 큰 논리적인 방법이 있어요. 보석은 결정체 아닙니까. 보석은 지구 맨틀에서 나오는 결정이거든요. 금속이 어떻게 인격화되느냐? 이것은 성경에서만 이야기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상에서 살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적인 방식의 기적은 생각 안 해주시고 우리가 생각도 못한 기적을 우리에게 주시는 게 뭐냐? 우리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그냥 우리에게 덮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도 우리는 그냥 옆에 있는 열매입니다.

제가 유리공장 기술자가 입에 파이프로 해서 불면 볼록 튀어나오죠. 파이프 이것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예수님이 불면 볼록 튀어나온 성도일 뿐이에요. 여기 볼록 튀어나온 이것이 뒤늦게 똑바로 안 부느냐고 내 구원에 관여하지 말자 이 말이죠. 그냥 돌출된 여드름인데 이게 어떻게 피부조직에다 “주님 똑바로 해. 헌금은 받아놓고 복은 안 주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으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끝은 인간의 죽음입니다. 내 목숨 바쳐서 남을 살리겠다는 이 아이디어, 이것이 마지막 악마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선을 확장시키면 악마가 됩니다. 선하고 선하면 나중에 결국은 악마로 갈 수밖에 없어요.

니체란 사람이 그랬거든요. 니체가 신학자출신이에요. 끝은 뭐였습니까? 신은 죽었다. 더 나가면 신을 내가 죽였다. 신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초인이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자아실현이에요. 신이 따로 없다. 내가 곧 신이다. 신앙생활 오래 한 교인들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말 몇 마디 주고받고 하면 초인들 의외로 굉장히 많습니다. 성화론 주장하는 초인들, 교회에 특히 대표적인 것이 지방교회 같은. 20세기에 태어난 초인이 워치만 니에요. 위트니스 리고. 지방교회 가면 전부다 초인이에요. 여기서 뭘 주장하느냐 하면, 말도 고상하게 의식의 확장.

이걸 모래시계처럼 거꾸로 뒤집어 놔버렸어요. 세리와 창기가 당신보다 천당 가는 거야. 세리와 창기는 주제파악이나 하지 이건 주체파악도 못하고. 우리 속에 있는 선한 것을 계발하면 안 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사람들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이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대우받았습니까? 악마로 대우받았어요. 사도 바울은 그걸 알고 뭐라 했습니까?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자기가 연구해서 된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에 대해서 제가 박수를 보냅니다.

내가 죄인 되었다는 말은 내 스스로 내장된 힘으로써 나를 의인 되게 할 수 없는데서 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없어지는 거예요. 더 이상 나한테 관여하지 않아도 되고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의 열매, 예수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전에 김재성 집사님과 처음에 만날 때 가창의 미술관에 갔어요. 야외에 조각품을 전시해놨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누가 손댄 거예요. 그냥 쇠가 아니라 쇠를 구부려놓고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놨던 말이에요. 누가 그렇게 했어요? 분명히 그렇게 하신 분이 있을 것 아닙니까? 조각품이 지가 스스로 해서 판토마임한 게 아니란 말이죠.

그처럼 우리 하나하나가 어떤 특정 사람을 신앙의 모델로 삼을 필요가 없어요. 죄인 중에 괴수라 하니까 “나는 부족합니다.” 하면서 가슴을 치면서 이런 짓도 하지 마세요. 그것도 뭐 본 게 있어서 본 게 문제라. [사랑의 원자탄] 괜히 봐서 모방한다니까요.

남이 준 어떤 멋진 것, 신앙적인 것들, 그것보다 백배나 열배나 본인만 알고 있는 하루 일과 속에 포함돼있습니다. 그걸 남한테 떠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본인만 간직하세요. 우리교회 교인들은 너무나 간직해. 전부다 간직하고 있어요. 이슬람 여인들처럼 눈만 내놓고 다 가렸어. 본인만 알고 있는 거예요. 본인만 개인적으로 주님과 소곤소곤 하는 게 있다고요. 그걸 만약에 떠버리게 되면 각색해서 해요. 시시한 것, 뺄 건 빼고 드라마 만들어서 하기 때문에 간증이란 그만큼 위험한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죽음이란 인간이 근접할 수 없어요.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렸더니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잖아요. 여기 어떤 집이 있습니다. 하나님 여기 있습니다. 아직 이스라엘 아닙니다. 이스라엘 재료가 될 히브리인들이죠. 애굽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오늘 한 말씀을 응용해서 만들어봅시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을 상대하지 않고 자기 아들 예수님을 상대하죠. 예수님을 상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붙임으로 말미암아 이 이름은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 되는 거예요. 그때는 인간의 죄 짓는 것이 다 들통 나기 전이기 때문에 그냥 이름으로만 작용하게 됩니다.

이름으로 작용하면서 이스라엘에 남긴 것은 뭐냐 하면, 이름이 어떤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저주와 심판이 여기에 동원돼야 돼요. 그러면 죽음의 사자가 동원돼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구비해야 되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작업에 자기는 손쓸 수 없고 죽음의 사자와 어린양이 맞짱 뜨는, 종로바닥을 누가 접수할 것이냐를 놓고 김또깡과 하야시가 붙는 그것을 목격할 뿐이란 말이죠. 이 죽음은 사정없이 꼭 두건 쓴 일본 사무라이 같아. 날카로운 칼 쥐고 모든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다 죽여요. 큰 아들 골라서 다 죽이는 거예요.

천사가 하늘에서 올 때는 조건이 있어요. 큰 아들만 죽여라. 낮에 가지 말고 밤에 가거라. 다 죽이는데 어린양의 피 발렸거든 그냥 넘어가라. 이 작업을 어느 소설가가 지어내겠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로 수용하게 되는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말도 안 되는 신화적이고 동화적인 이야기를. 차라리 우리에게 교회 충성하라, 전도하라 이 말귀는 알아먹어요. 왜? 교인이 30명인데 31명 숫자 불었으니까 전도, 이것은 우리가 말귀 알아듣는 것은 우리의 습관이거든요. 인간들끼리 살아왔던 환경이고 조직이거든. 그것 말고 주께서 하는 일은 그걸 피해버려요.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방식으로 와서 도저히 우리 몸으로서는 못 믿게 만드는 환경들을 계속 쥐요.

예수 피를 못 믿었는데 믿었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지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 못 믿을 것도 마치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처럼 내 안에 습관으로 남아요. 그러면 또 사태가 터지면 “못 믿을 걸 믿었지. 내가 믿을만해서 믿는 게 아니구나.” 또다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십자가마을에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썼지요. 보신 분들도 있을 거예요. 결혼이란 그 이상한 짓을 왜 해야 되느냐?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엄마, 아빠도 있지만 자기 위주입니다. 아무리 엄마, 아빠라도 젖 안 주면 울어요. 태어날 때부터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르는 것이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둘이 결혼을 했단 말이죠. 얼마나 서로 본성을 속이는 짓이에요. 본인만 위해서 살려고 하면서 결혼했다는 이유로 마치 상대를 호도시키잖아요. 상대를 속이는 속임수를 힘들게 하고 있잖아요. “여보, 맛있는 굴비 사왔어.” “너 혼자 좋아하는 거잖아.” “아니야. 당신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너 좋아서 사왔으면서 나 좋다고 하는 거야. 똑바로 해.” 이러면서 우리는 매일 싸우며 산다고요.

그래서 21세기에 현대법에 의하면, 결혼이란 돈의 관계로 정리된 겁니다. 돈 때문에 살지 다른 것 때문에 살지 않는다 해서 서양에서는 이혼문제에 제일 중요한 것은 재산을 어떻게 분할하는 그 문제지 어떻게 사는지 그것은 친구처럼 살면 돼요. 문제는 돈이에요. 얼마나 현대법이 솔직합니까? 이혼할 때 헤어질 때 돌아서면 될 건데 문제는 돈 때문에 재판하고 한다 말이죠. 그러니 결혼하는 것이 상대를 어떻게 내 사람으로 만드느냐 그 작업을 노리다 보니까 오년 지나고, 십년 지나고. 지금 그것 하려고 하니까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못하고.

그러니 결혼도 그런데 하물며 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려면 사랑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한다고 먼저 말하지 않고 인간이 예상 못한 이런저런 법칙이 있잖아요. 죽음의 사자라 인간에게 물어보지 않고 사무라이처럼 와서 큰 딸은 살리고, 둘째 딸 살리고, 둘째 아들도 살리고, 큰 아들만 조지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아이디어에서 나오는 이것인데 우리는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린양 그것도 흠 없는 어린양이 와서 대신 커버해서 세례요한은 그걸 알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 할 때 이것은 우리가 나 위주로 살아가는 그런 세상과는 전혀 딴 판이에요. 그 딴 판이 믿어진다는 그것을 기적이라 한다 말이죠. 그 딴 판에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을 집어넣어야겠어요, 말아야겠어요? 집어넣지 말아야지요. 내가 이렇게 잘하면 복 주고, 내가 익히 아는 것은 거기다 집어넣지 마세요. 주께서 자기 숙제하는데 그냥 숙제하도록 놔두세요.

교회라 하는 것은 세워질 때 피로 세워집니다. 피로 세워지는 걸 그림으로 그리면 핏방울로 이렇게 세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피로 생각하지 않고 자꾸 예수 믿는 벽돌 생각하다보니까 내가 없으면 교회가 안 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모퉁이의 머릿돌은 예수님이고 그 위에 내가 세워진다. 내가 아니고 피로 세운 게 교회입니다. 피 안에 내가 들어있어요. 피 안에 내가 있기 때문에 피를 피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내가 생각했던 나는 날마다 피에 의해서 부정당해야 된다. “그 생각 틀렸거든. 그 생각들은 현실이 아니거든.” 이런 날마다 지적받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교회됨을 위해서 그런 작용이 필히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교재 3페이지 봅시다. 세상 사람들 생각하는 걸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요. 나는 몸이 있다. 몸은 신체다. 신체는 물질이다. 물질은 영양분과 탄수화물, 지방질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나는 살 수 있다.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 내가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시장 가서 양식을 사와야 된다. 시장에서 필요한 것은 돈이다. 내가 어디 가서 돈을 벌어서 나한테 필요한 양식을 사서 한다. 당신 돈 벌고, 나도 돈 벌어서 돈으로 애를 키우자.

이게 흔히 말하는 가정이고, 사람들은 이걸 산다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성경에 의하면 생명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살아있는 모양새지 생명은 아닙니다. 우리는 산다가 길게 늘어지면 그게 영생인 줄 알고 있어요. 선악과 따먹은 채로 백날 늘어져봐야 그것은 생명이 아니니라.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이야기하신 겁니다. 네가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따먹으면 죽은 채로 계속 가는 것이지 그것은 생명이 아닌 거예요. 따라서 산다를 생명으로 바꾸려면 생명만 빼놓고 나머지는 산다가 죽음이 될 수 있도록 생명께서 우리에게 힌트를 줘요.

그런데 생명에서 보는 죽음이란 우리가 꽥하고 죽는 죽음이 아닙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죽음이란 이름 사는 거예요. 김 죽음, 이 죽음, 최 죽음, 손 죽음, 죽음으로 살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생명이 임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죽음이라는 걸 아는 겁니다. 나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 됨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산다가 형성되는 여기에다가, 4페이지 로마서 1장 2~4절에 보면, 복음이 무엇이냐 나오죠.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복음입니까, 복음 아닙니까? 아니죠. 조물주 그분이 복음입니까? 아니죠. 복음은 어떤 기능이 일어나야 돼요. 내 안에 복음이 있다는 말은 복음의 기능이 나를 하나의 장소로, 공장현장으로 생각해서 복음적인 기능이 내 안에 계속해서 되풀이 될 때 그게 복음이 다루는 사람이죠.

그러면 복음이 뭔지 알아야 되죠. 복음은 뭡니까?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거죠. 그러니까 말씀이 내 안에 있어서 내 안을 말씀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몸이란 환경만 제공했을 뿐이고 내 안에는 약속이 있는 거예요. 약속은 아들인데 예수님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 믿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란 거기에 집약이 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행하신 것, 예수님께서 오신 것 모든 게 복음인데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 안에서 습관화된, 예수님 빼놓고는 다른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됩니다. 부처나 공자나 소크라테스, 위대한 사람들 이런 것은 예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돼요. 이순신 장군, 강감찬, 을지문덕, 세종대왕 이런 것은 인간도 아니에요. 그것은 주님 보시기에는 죄인이죠. 그것이 일어나야 돼요. 그렇게 일어난 것을 하나둘 따지도 보면 결국은 내 자체가 복음 앞에서 고만고만한 환경 속에 일부로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것이 복음이라 하는데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계시니까 뭐는 빠져야 돼요? 내가 평소에 찬양했던 이웃들, 위인들 다 빠져야 돼요. 복음이 아니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인 예수님만 집중했으니까 이게 복음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내가 전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는 여파, 파장이 나에게 임했다는 거예요. 임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했다는 말이거든요. 뭘 했느냐?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떻게 일을 했느냐? 왜 했느냐? 어디서, 언제는 필요 없어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뭘 했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으로 왔거든요. 그리고 여기에 성결의 영, 거룩한 영으로 여기서 투입되었습니다. 혈통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성결의 영으로 이것이 들어가서 복음으로 만들어져서 그 복음의 여파가, 그 냄새가, 향기가 여기까지 여파 되어서 우리는 주님과 관계에 놓여있다. 이게 복음이에요.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빠져야 돼요. 하나님을 믿던 안 믿던 예수님 앞에서는 다 가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란 없어야 돼요. 오직 약속으로 된 것, 나타나는 사실만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보겠습니다. 첫 번째, 다윗의 자손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참 이것도 어려운 말인데요. 다윗을 다윗 되게 하신 생활환경, 생활공간입니다. 다윗은 어떤 자리가 있는데 다윗의 자리는 다윗 본인이 생각한 자리가 아니고 장차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분이 먼저 다윗에게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겁니다.

여기 나 혼자 요에 앉아 있다가 누가 오니까 “여기 앉으세요.” 하고 자기가 앉아있는 요를 길게 늘여줄 때 다윗에 자리를 주는 거예요. 너는 이제는 다윗의 자손을 보일 수밖에 없는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손에 영향을 준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 이후잖아요. 예수님 자리에 오늘날 우리가 있다면 우리의 자리는 다윗에게 다윗 되게 했던 그 영향력이 우리한테 그대로 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을 미리 다루었던 주님께서 지금은 우리를 이렇게 다루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다윗은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왜?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그래서 다윗은 그 당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이 다윗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다윗언약이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뜻이 아니고, 나를 나 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해요. 같은 말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이냐? 출발점이 나에게 나와 버리면 그것은 다윗이 자기 자리를 만들어서 하나님 자리에 가려는 식인데 그게 아니고 다윗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이 다윗으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다윗은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하심을 그냥 받은 거예요. 그것이 성사될 수 있는 자리가 다윗 밑바닥에 깔린 거예요. 그게 오늘날 우리 되면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이, 사실은 행했지요. 지 기분대로 살았지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죽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뭘 해도 그냥 아무것도 안 한 게 돼요. 국회의원 나와서 떨어져도 지 기분대로 사는 거니까 일체 묻지도 않고 무조건 안 한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도 아무것도 안 한 것이고, 헌금해도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한 걸로 받아줄 때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왜? 그럴 때 값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늘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까지 온 것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우리들만의 약속이에요. 어렵지 않아요. 우리 오늘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차타고 멀미나서 스티커 있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한 거예요. 나한테 올라오는 것이 뭐냐? 항상 값없이 용서받은 것만 올라오는 거예요.

이것이 어린양만 드러내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로써 죽을 내가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단체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나중에 어떻게 변한다 했습니까? 그래서 생긴 단체기 때문에 이 단체를 내가 내 소유로 삼겠다고 할 때 그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은 이거에요. 이 작용이 이스라엘의 되풀이입니다. “복음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는 귀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내가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 교회에서 망해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될 건데 우리 교회를 교회 되게 하신 예수를 믿다보니까 예수님은 나중에 뒷전이고 내가 포함돼있는 가정과 교회를 위하여 우리는 기도하고 철야하고 그것을 위해서 봉사하고 충성하는 거예요.

그러면 가정이란 뭐냐? 남편이 생각하는 가정이 따로 있고, 아내가 생각하는 가정 따로 있는데 어쨌든 간에 서로 가정을 생각하기 때문에 헤어지지 않고 서로 오해와 오해 속에서 가정은 잘 꾸려가고 있는 겁니다. 절대로 인생 안 같아요. 다 꿍꿍이가 달라요. 다른데 서로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가정 되고 말거란 고집 때문에 계속 둘 다 버티고 있는 겁니다. 감사한 줄 아시기 바랍니다.

모든 게 그래요. 우리는 모든 일이 이스라엘이에요.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매일같이 발산합니다. 항상 뭐든지 내 것으로 되돌려놓는 그 작업이 우리 몸이 갖고 있는 본성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다윗의 혈통으로 가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다윗의 이런 혈통 속에서 다윗 되게 하는 것은 우리 솜씨가 아니고 다윗의 자손의 솜씨로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소경이 기도할 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대목 보고 제가 은혜를 받은 것이, “주님이여 저 근호입니다, 근호. 몰라요? 경주 이씨 산수공파.” 사실은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이 아무개, 김 아무개 하잖아요. 그런데 그 소경은 자기의 고유명사를, 자기 이름을 대지 않았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에서 볼 때 소경인 것이 마땅하다고 주님의 관점에서 주님이 보는 다윗의 자리에서 다시 자기를 바라보니까 나는 뭐냐? 긍휼을 입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자기 자리를 유지한 거예요. “나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돼.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서 불쌍히 여겨주는 게 아니고 주님 보시기에 불쌍히 여김 받을 사람이라면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거예요.  

우리는 그 식대로 주기도문을 외우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항상 추임새를 붙여야 돼요. 얼쑤하고 음성을 집어넣지 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늘 뜻이 이룬 것처럼 불쌍히 여기소서. 항상 우리는 소경처럼. 왜냐하면 주님께서 보지 못하는 걸 보게 하고, 듣지 못하는 걸 듣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그러니까 소경과 절뚝발이, 귀머거리 누굽니까? 주님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는 소경이고, 절뚝발이고 이미 죽은 자에요. 우리는 주님의 관점을 모르기 때문에,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나는 너보다 나아. 나는 너보다 돈 많이 벌어. 나는 목사야. 자꾸 이렇게 우깁니다. 다시 주님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소경이고 절뚝발이인 거예요. 그걸 주께서는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주님의 관점에서 복음에서 불쌍히 여기소서. 그것이 바로 시공간을 떠난 예수 안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진짜 끝으로 한 마디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 안이 뭐냐? 예수 안은 예수님의 시간만 고집하고 그 안에서 우리 시간 현재, 미래는 날마다 책망 받는 그 관계가 예수 안입니다. 우리는 과거 잘난 것, 미래, 현재 이렇게 가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니는 손바닥 오므리면 여기 무슨 과거가 있고 현재, 미래가 없는 것 같이 되는데 우리는 안개인데 잠시 피어났다가 주먹을 쥐면 한 주먹밖에 안 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자리는 복음의 자리입니다. 내가 만든 자리가 아니고 내가 움켜쥔 복음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움켜쥔 복음의 자리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의 버릇이었고, 관행이었고, 우리의 반복된 학습의 효과였습니다. 주께서 다 무시해주시고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결국 우리는 주님의 죽음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피 흘림으로 인하여 주님의 계획이 주님에 의해서만 성사되었다는 것을 관여할 수 없는 계획이 우리에게 덮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