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무죄한 자란 어떤 자를 말하는가? 그것은 장차 올 인자를 내다보면서 지금 고난 속에 뛰어들어 거기가 주님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자
성도란 이런 초과적 지혜로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주님 안에 사는 자
초과된 지혜
2025년 1월 8일 본문 말씀: 열왕기상 4:29-34
(4:29)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4:30)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4:31)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For he was wiser than all men, than Ethan the Ezrahite, Heman, Calcol and Darda, the sons of Mahol; and his fame was [known] in all the surrounding nations.
(4:32)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다섯이며
(4:33)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4:34)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지식이 있는 반면에 사람의 머리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지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지식말고 다른 지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혜를 제공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은 오로지 인간들만의 지혜로서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고 끄집어내어 그것으로 같은 인간들 끼리 열심히 살아가면 그만이다고 말합니다. 굳이 하나님의 지혜를 필요치 않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란 인간이 필요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만물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필요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들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받은 지혜와 총명은 솔로몬이나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자신이 인간에게 주신 그 지혜를 자신에게만 적용하기 위해서 오시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이런 ‘인간의 지식을 초과하는 지혜’의 사례는 모세 때에도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35:30-33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케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가지 공교한 일을 하게 하셨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소를 만드는 설계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겁니다. 그 설계 도면대로 제작되어야 성소를 위하여 합당한 지혜는 브사헬과 오홀리압에게 특별히 임했습니다. 바로 이런 재주와 지혜가 인간의 지식을 능가하는 겁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이런 지혜와 총명을 특정 자를 지목해서 제공한 겁니다.
처음 인간은 아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아담이 사용하는 언어와 아담이 지닌 개념이 제대로 최종적으로 합치될 때 뽑아져 나오는 바가 ‘이름’입니다.
아담이 지닌 지혜가 아담이 지은 이름들로 의하여 다채롭게 펼쳐지는 겁니다. 이 정도에 머문다면, “인간도 지혜가 대단하다”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이라는 이름 자체는 아담이 스스로 지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왜 이 세상에 나타난 겁니까?
그것은 ‘이름값’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름’이란 언어와 개념의 최종적인 합치에서 생겨나는 겁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하나님의 개념에 합치될 때, 아담이라는 이름은 그 완성을 봅니다. 바로 그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그렇다면 그 마지막 이름에 해당되시는 분이 오실 때까지 구약에 등장하는 지혜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는 지혜입니다. 최종 지헤와 중간의 지혜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중간, 곧 구약의 지혜는 특정 인간이 지혜를 소지하는 겁니다. 반면에 신약의 지혜는 지혜를 본인이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 안에 삽니다.
그 지혜 안에서 성도는 지혜의 최종성을 주저하지 않고 원없이 만끽하게 됩니다. 그 방법이 바로 자신을 ‘죽음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즉 자신을 미련함의 극치로 여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갖는 겁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6-29)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솔로몬의 지혜를 높이기 위해 ‘에단’과 ‘헤만’의 지혜와 비교합니다. 이 ‘에단과 헤만’이라는 사람은 다윗 시대의 다윗으로 인해 고위직으로 특채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의 지혜와 총명은 다윗언약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꾸미는데 있어 기여할 수 있다고 여겨 뽑힌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필요한 작사가요 작곡가입니다.
시편 88편은 헤만의 작품이요 시편 89편은 에단의 작품입니다. 다윗의 통치 취지에 부합되었기에 시편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제일 많은 작품이 들어간 사람은 다윗왕입니다. 따라서 다윗과 헤만과 에단, 그리고 솔로몬 모두가 동일한 취지의 찬양을 작곡/작사한 사람들인데 성경은 이들에게 인간의 지식을 초과하는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선 다윗부터 보면, 시편 39:5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헤만의 작품인 시편 88:4에서는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단의 작품인 시편 89:47-48에서는, “나의 때가 얼마나 단촉한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그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작품인 시편 127:2에서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 노고를 넘어서는 세계를 말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있어 이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기를 설명해 보라면 이렇게 하게 됩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성도란 이런 초과적 지혜로서 유일하게 살아계신 주님 안에 사는 자를 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을 날마다 부수고 넘어서는 지혜로서 주님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