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12/17

아빠와 함께 2024. 12. 17. 22:11

 

 

첫 번째, 자연세계 속에서 내가 여기 살아있음을 증명할 길이 없다. 그 증명을 누가 한다고 했어요? 인간이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의 율법은 누구한테 줬습니까? 여러분들이 성경공부 좀 하고 복음 공부 좀 했으면 아시겠지만 율법은 누구한테 줬습니까? 예수님한테 줬지요. 예수님에게 준 거예요.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에게만 준 거예요. 사람 이름에게 안 줬습니다. 사람의 이름은 노아 때 홍수 때 다 죽여버렸어요. 다 죽여버렸다고요. 증명하고자 하는 그 대상 자체가 다 날라가버렸어요. 그때 개입된 것이 뭐냐? 노아언약이라는 겁니다. 언약은 인간세계가 허상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용도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걸 폭로하는 용도로 주어진 겁니다. 노아 홍수에서 노아가 의인이라고 했지요. 자, 노아홍수에서 노아가 의인이다. 그것이 노아를 구원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노아를 구원한 것은 노아가 의인이다가 아닙니다. 방주였어요. 방주였습니다. 의인하고 갖다 붙여도 구원 못 받아요. 하나님은 노아를 죽이고 노아를 살렸습니다. 죽일 때는 노아의 존재를 허상으로 죽이고 살릴 때는 노아언약을 위해서 노아를 살린 거예요. 노아 언약을 위해서. 토대를 새롭게 개입시키는 겁니다.  
성경은 내가 있다로부터 성경을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뭐냐? 있음과 없음의 대비가 아니라 악함이 있고 선함 또는 의로움이 있다는거에요. 의로움이 있는 것을 가지고 실상이라고 하고 악함만 있는 것을 가지고 허상이라고 합니다. 허상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고 악만 딱딱하게 굳어져있다는 것이 허상이에요. 쉽게 말해서 없음보다 더 못한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없애지 않습니다. 부활시키죠. 인간에게 제일 골치 아픈 것, 안 죽는다는 것이죠. 마지막 때 무덤을 열고 악한 자를 부활시켜버려요. 내뺄 수가 없어요. 한번 다루었던 도구는 끝까지 다룹니다. 끝까지 밟아요. 너 인간이냐? 그러면 못 빠져나가요. 한번 인간 되었으면 자살을 100번 해도 없어지지 않아요. 자기 칼로 난도질해도 토막 살인사건 나도 없어지지 않아요. 주께서 다 조립해버립니다. 그러니 뭐 살다가 힘들면 죽으면 그만이지 그러한 부질없는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습니다. 좋든 싫든 연속적이에요. 그 본질이 연속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일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감사한 사람이 있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악이 없는 상태, 선악지식이 없는 상태가 실상이고 선악지식을 가진 상태가 이게 허상 또는 악함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의 본성은 누굴 위하여 살해의지가 있다.   이 살해 의지가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모르는데 주님이 알려줘요. 그게 나라고. 너희들이 죽이고 싶은 그 대상자가 바로 나라고. 어서 죽여라.
타고난 본성이 뭐냐? 주님을 향하여 죽이고자 하는 그 의지, 그 악마의 의지, 이게 인간의 전부입니다. 인간 본 마음의 전부에요. 그것을 누가 확인하느냐? 율법이 확인해주지요. 율법이.
 모든 게 게임이거든요. 게임의 끝은 뭐겠어요? 너 죽고 나 살자 예요.
로마서 8장에서 모든 자연세계는 피조물이 쓰러져요. 왜? 죄가 관영했으니까. 이게 실상이에요. 이 모습이. 그런데 사람들은 몰라요. 모르는데 언약, 말씀이라는 실상이 오면서 폭로당하지요. 아 인간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게 하나님이 원하는 실상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실상이 아니고 나중에 뭉개져야 마땅한 세계라는 사실을 밝혀집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이 점을 잘 이해하셨다면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내가 살아있다 쇠퇴했다는 증거와 인식이 삭제되는 경우는? 이게 문제입니다. 힌트 드립니다. 한글로 한 자에요. 꿈이죠 ‘꿈’. 이게 뭐냐 사도행전 2장에 늙은이들은 꿈을 꾼다는 거예요. 꿈인데 성경에서 신약에서 새 언약 안에서 이 꿈을 무슨 꿈이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랑의 꿈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성령하면 인격체 할 수 있는데 이 앞에 사랑의 영이 붙어버리면 사랑의 영? 뭐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랑의 영.
성도는 주의 말씀대로 살겠다 하지만 불쑥불쑥 내가 예상 못한 다른 일이 발현되는 이유 꿈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다른 일들을 나를 가지고 활용하시고 사용하시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은닉층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사라져요. 내가. 그래서 진정 구원받은 사람은 내 구원을 언급을 안 해요.  꿈의 세계에요. 실제 세계. 그러면 사도행전 2장 17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영이라고 했습니다. 앞에 뭘 붙이라고 했습니까? 사랑의 영을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예언은 뭐냐 하면은 실상이 실상도 아닌걸 허상세계에 실상이 실상답게 나타내는 현상, 그 현상이 뭐냐? 자연세계의 붕괴입니다.  

사랑 앞에서 내 생각이 가동 중단돼요.   삭제당하고 싶은 나가 되고 싶은 나를 이것을 침몰시키고 이걸 뭉개버리는 겁니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주님의 이름은 차이다' 차이. 이 말은 뭐냐 장벽이다. 장벽 또는 뭐 장벽보다 노골적인 표현은 '방파제'. 파도가 방파제를 치는데 파도가 육지로 넘어오지는 못하죠. 방파제가 워낙 강력해서 예수님의 이름은 방파제입니다. 허상의 인간들이 천국에 오지 못하도록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수 주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장벽인 이유가 '차이'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은 바로 실상과 허상 둘 다를 경험하신 분입니다. 둘 다를 양쪽 세계를 유일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 주의 이름이에요. 오늘 사도행전 2장 21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뭡니까? "구원을 얻으리라" 하죠. 이 주의 이름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뭉개짐을 겪어야 되는 겁니다.
뭐냐하면, 앞에 있는 자연 세계의 뭉개짐과 더불어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하는 이러한 너무나 차이 나는 그 두 개의 차이 나는 양쪽 질을 다 경험한 자만이 바로 그 모든 능력이 예수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차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성도는 뭡니까? 성도도 뭐가 돼요. '차이'다. 양쪽 세계 꿈의 세계와 허상과 실상을 가로막는 차이다. 그리고 성도 존재는 장벽이다. 뭐냐 하면 어중이 떠중이 천국 못 오도록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배치해 놓은 장벽이에요.  "오지마" 장벽이죠.   이렇게 하면 성도 됩니다. 말해 줄 어떤 말도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꿈은 '집단적'이에요.
꿈이 개인적이 아니고 집단적이에요. 집단적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개인의 관여를 최소화 시켰다 이 말이거든요.   공유하는 의미가 주어질 때 이거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계시를 받았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 집단적인 너가 이야기하든 내가 이야기하든 집단적으로 동일한 의미가 나와 산출되는 거 그게 바로 복음이에요 복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다른 말은 '주님이 나를 삭제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삭제하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이거는 구원받은 사람의 공통점이에요.
성경 말씀은 믿고 지키는 용도가 아니에요. 우리가 얼마나 허당인가를 속으로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용도가 바로 성경 말씀이에요. 어느 성경 말씀 하나 우리가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은닉층, 우리가 모르는 숨어있는 성경 말씀에 숨어 있는 것이 얼마나 우리 바깥으로 활성화되는가 그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 목표가 자기를 계속해서 위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걸 또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그 원인은 선악체계입니다.  인간이 추구한 것은 온리원 오직 나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밖에 없다는 것의 최고 라이벌이 누구겠어요. 신이겠지요. 이러한 인간들밖에 없는 대책 주님의 대책은 뭐냐? 아까 제가 룻기를 언급했는데 약간 힌트가 있어요. '희생'입니다. 희생. 희생은 어디서 나오는가? '은닉층'에서 나와요. 왜냐? 껍데기는 전부 다 지 잘났다 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의 바닥에서 은닉층에서 희생이 올라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간에 죄 악마 또는 죄, 여러 가지 악함 죽음 저주가 장벽을 쳤지요. 이스라엘 죄에 의한 장벽 그 위에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오려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쪽에 제시한 제물이 여기서 그냥 오는 게 아니고 희생을 하면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무슨 법이냐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에 피 내는 제사법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인간은 모르는데 하나님 알아요. 너희들의 영역과 공간이 뭐가? 환상적인 요소가 강한 악한 환상적인 요소가 너희를 꼼짝 마라 하고 둘려쳤다는 사실을 인간들만 모르고 있어요. 인간들만, 그런데 누가 그 낌새를 챘느냐? 다윗이 챘어요. 그 낌새를 한번 봐야 되지 않습니까? 다윗의 낌새를. 시편 22편 1절 누가 한번 크게 읽어보세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며 돕지 아니하시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아멘 다윗이 지금 뭐를 느끼고 있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 쪽으로 가는데 장벽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 내가 속해 있는 이 공간이 집단적으로 버려진 공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리고 다윗은 왕이기 때문에 대표자로 지금 기도로 표현하는 거예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이 버렸다는 말이죠. 나를 버린 것이 하나님의 정당한 조치라는 뜻입니다. 나를 돕지 아니하시고.. 돕지 않아야 돼요. 돕지 않아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자신이 하시는 일은 꿈과 환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거고, 거기에 우리는 집단적으로 그 주위에 하는 일에게 새롭게 실행에 옮기는 사람으로 뽑혔을 때에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래 구상했던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진짜 백성은 성령이 올 때 비로소 감을 잡는 거예요 성령이 앞에 뭐가 붙는다 했습니까? 사랑의 의죠   사랑이라는 것은 무슨 용도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삭제시키는 것 그 힘이 사랑의 힘이에요. 나는 존재하지 않아도 그분만 존재하면 그걸로 충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으시고 오히려 선물을 구약 때 완성한 완성 상태를 선물 받을 자격도 안 되는 인간에게 이 상태를 주께서 자기 몫으로 그대로 공유하면서 이제부터는 너와 나와 함께 살자 이게 신약의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 좀 다르죠? 다른 이유는 중간에 누가 끼어들어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끼어들어서 그래요. 예수님이 성과를 내었고 그 성과 낸 것에 예수님이 자신의 것으로만 돌리지 않고 자기 식구들을 패밀리와 공유하겠다고 그렇게 제안을 하셨고 아버지는 그 제안을 수긍하셨고 그 수긍했다는 증거가 뭐냐? 성령을 예수님의 성령을 주심으로써 나의 모든 승리에 같이 기뻐하자고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의 영입니다. 사랑의 영이라 했는데 아직 그 본문은 제가 언급을 안 했죠. 지금 와서 한번 언급을 해 드리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대목인데요.

■네번째.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고난입니다.  방파제가 뭐를 낳습니까? 고난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하나님은 악마라 했지요 그렇게 이야기해서 주님이 얻은 게 뭡니까? 죽음이죠.  똑같은 길을 성도가 가야 돼요.
그래서 골로새서 1장 24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어디에 채운다? "내 육체에 채운다" 그리스도에 했던 아버지가 예수님께 줬던 그 기능의 연속성을 위해서 아직도 내 육체는 지금 안 죽고 살아있다는 겁니다. 뭘 위해서? 방파제. 방파제가 내용이 뭔데요? 오직 사로잡은 자만 구원하는 거예요. 사로잡고, 사로잡은 자만 주님의 영생의 은혜를 사로잡은 자만 구원해요. 어디서 사로잡았습니까? 마귀에 있던 자를 주님께 일방적으로 끄집어내시고 그에게 예수님의 모든 사랑을 담아버리면 그 사람은 이제 남은 고난의 길을 가야 될 하나님의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다시피 모든 사도들은 어떤 길을 갔습니까? 고난 길로 갔지요 나쁜 짓 했어요? 그래서 고난 받았어요? 아니죠. 그들이 고난 받는 이유가 뭡니까? 오직 복음을 위하여. 그 복음의 내용이 뭔데요. 복음의 내용이 뭡니까?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된다는 것. 주의 이름이 뭔데요?
주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그 일로 통해서만 비로소 내가 허상이고 실상은 내한테 찾아온 사랑의 성령이 유일한 실상이라는 것. 이것 때문에 스데반 집사 돌에 맞았고 나머지 사도는 모가지 다 날라갔거든요. 목 베였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는 전승에 보면 목 베였어요. 그러면 끝으로 만약 여러분들이 복음 때문에 목 베이는 일이 벌어진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처하면 됩니까? 어떤 태도를 가지면 돼요? 왜 이제 왔어요? 나 그동안 여기서 제대하고 있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는 나의 고난은 끝나고 이제는 쉼만 남아 있군요. 요쪽 부분 쳐주세요. 요게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예수님이 보였잖아요. 허상이 삭제되니까 실상이 뚜렷하게 등장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말씀의 세계지, 마귀가 만들어준 보암직도 먹음직도 하는 그 세계는 다 허구고 허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실상을 가렸습니다. 마귀에 빠져서 세상 것으로 성공해서 보란 듯이 잘났다 자랑질을 하려고 살다 보니 말씀의 실상을 놓쳤습니다. 정말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허구적 존재인지를 날마다 십자가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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