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언약 말고 다른 언약이 있어야 돼요.
인간 자체가, 옛 언약에 육신이 있다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인간의 육신 안에 어떤 시계가 장착되어 있는데 시한폭탄이에요. 째깍째깍째깍…, 시한폭탄과 더불어서 빵 터지면 육신도 죽는 겁니다. 숨 거두는 거예요. 그래서 옛 언약, 법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육신은 일종의 상복을 입고 있는 거예요, 상복을. 인간 육신 자체가 어떤 옷이라면 이건 상복이에요. 죽음, 빵 하고 터져 버리고 해체되는 그 옷을 내 육신이라 여기면서 그걸 입고 다닙니다. 그 옷가지고 보디빌딩하고, 필라테스하고 그러죠, 이거 상복인데. 나중에 허물어지면 우리가 죽는 겁니다
복음이 말하는 현실은 뭡니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저는 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마태복음 17장 5절의 말씀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말할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제가 풀이하면 “네가 너를 규정하지 말라. 네가 너에게 내리는 평가를 다 무시하고 남들이 너에게 내리는 평가를 다 무시해라.” 왜? 너나 남이나 다 옛 언약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그래요. “너의 양심, 네 양심도 듣지 마.” 왜? 여기 오늘 히브리서 9장 9절에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온전케 할 수 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비유’라는 말은, 실체는 아닌데 나타나는 징후, 증상, 현상 이게 비유예요.
옛 언약 안에서는 비유고 그 비유가 연결되어 있는 새언약 안에서는 진짜고, 실재고 그래요.
내 일을 주님이 가져가서 주께서 일을 일으켜 버리면 그 일은 나에게 주님과 서로 대화가 된다는 하나의 비유로서의 우리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성령은 그 출발지가 이미 하나님 우편이 출발지기 때문에 인도함을 받으면 그 도착지점이 결정되어 있는 거예요.
그 도착지점이 결정되어 있는 것을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표현한 거예요. 하늘에 앉히시니. 아무리 둘러봐도 하늘이 아닌데, 지금 교회에 와 있는데 무슨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그 말은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그 내용에 비유로서 우리는 이 옛언약의 세계 안에 놓여 있는 겁니다. 우리의 도착 지점은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스데반집사처럼 우리에게 남들이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과 소통되는 말씀이 서로 나타나고 교환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