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영적 전쟁

아빠와 함께 2024. 11. 6. 19:20

[ 영적 전쟁 ]

 

 

-에베소서 속의 그리스도-

 

 

사랑에 떠밀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할지라도

그곳에서 무엇을 할지 몰라 서성인다 할지라도

다시 어린아이로 발견되게 하옵소서

 

세상에서 내다 버린 거짓들이

자꾸 바닥을 채우는 현실 속에서

 

반주 없이도 부를 수 있는 투명한 노래를 부르고 싶다.

생각이 멈추면 나도 없어지겠지.

그때 주님만이 남을 것이고

해 저문 저녁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가고 싶은 천국

그렇게 보고 싶은 천국

그것은 나의 죄 속에 있었고

 

그 죄와 함께 죽을 때

주님 영광과 함께 나타난다.

 

그대 그리고 우리

이제 주님이 내민 잔을 마셔요.

 

 

 

 

202417일부터 19일까지, 경남 가야산 호텔에서 있었던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강의를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강의 음성을 일일이 글로 옮겨주신 한윤범 목사님과 정대은, 이하림 성도님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자기 몸 생각하지 않고 성의껏 교정해 주신 함숙경 성도님에게도 감사하며, 이미 20권이나 책 도안과 디자인을 맡아주신 최지영 성도님에게는 이번에도 어떤 아이디어로 놀라게 할지 기대해 봅니다.

 

2024년 겨울 이근호

 

 

 

 

1강 침투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계셔서 하시는 모든 일의 진행을 우리가 예측할 수 없지만 미래는 주께 맡기고 지금 말씀 앞에 모였사오니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저희가 깨닫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에베소서를 열면 그 시작부터가 충격적입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했다는 거예요. 에베소서 14절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창세 전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창세 전에는 없던 자들, 곧 창세 후에 세상에 난 우리를 상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정되었음을 통보해 주시고 있는 거예요.

 

바로 이런 통보방식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하는 방식입니다. ‘굳이 알려주셔야 비로소 알게 되는방식, 이런 식의 앎의 방식은 기존의 인간 세상에서의 인간의 앎의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내용도, 앎의 방식도 인간에게는 너무나 생소합니다. 이것은 마치 광야 노정에서 이스라엘이 양식(만나)을 취했던 방식이 자신들이 애굽에서 양식을 취했던 방식과 차이 남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양식(만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공급을 따라 그저 취했어요.


통보라는 생소한 앎의 방식으로 인하여 인간 세상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의견 충돌이 발생합니다. 인간은 쉽게 자기 지식과 자기 뜻을 포기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를 시작하면서 이런 충돌과 마찰을 염두에 두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예정되었다는 통보를 그의 서신 초반에 배치했던 거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의견 충돌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인간에게는 그들 사이에 통용되는 언어라는 것을 매개로 개념이나 사상, 그리고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이 자체적으로 이미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이런 것들은 힘을 갖고 있고, 인간은 이 힘으로 하나님마저도 포섭하려 듭니다. 따라서 인간을 공격하는 하나님의 방식은 창세 전이라고 하는 낯선 언어의 도입이에요. 창세 전에는 인간이 없었어요. 인간이 없으니, 인간의 언어도 없지요. 인간이 언어를 가졌다는 것은 자아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기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무언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제 그 아기의 자아도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머지않아 이 아이는 난 김 먹을래. 김치는 안 먹어라고 말할 것이고 그 아이의 자아는 왕성하게 자기를 표출할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자기 판단의 시작인 거지요.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말은 자아의 분출 수단입니다. ‘를 지킬 요량으로 나오는 것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인간의 말은 시작점은 있는데 끝이 모호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로부터 시작은 됐는데 그 의 종착점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 장담 못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갈 데까지 가보지 뭐.’라는 식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추구하는 학문이란 게 바로 이런 양상입니다. 시작은 있는데 끝은 알 수가 없어요. 인간의 기대가 이런 식이예요. ‘시작점만 제대로 잡고 있으면 적어도 실패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막연한 상상으로 버텨 보는 거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이 모르는 인간의 종착점, 끝점, 혹은 확정된 종말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손에 붙드시고는 그것을 높이 치켜들어 그 확정된 종말에서부터 거꾸로 시작점을 만드셨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하나님 편의 견해입니다. 이러니 이것은 필연적으로 인간 편의 견해와 충돌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처럼 (종말)’시작을 공격하고 그것의 수정을 요구한다면 인간들이 상상하고 미루어 짐작했던 자신들의 미래는 그저 한낱 환상인 것으로 결론지어질 뿐입니다. 불명확한 것은 끝점이 아니라 시작점이었던 겁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뭔가를 쉬지 않고 꾸역꾸역 행합니다. 행하기는 하는데 그 행함의 방향이 제대로 된 방향인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증받지 못한 채 일과를 개시하는 거지요. 그냥 갈 데까지 가보다가 죽게 되면 곱게 죽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 마음대로 곱게입니까? 자신의 종착점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곱게가 다 뭡니까? 인간이 과연 자신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시간이나 때우면서 인생을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끝을 모르니까요. 모르는데 누가 끝에 대해 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그게 무슨 효력이나 있겠습니까? 없어요. 제가 지금 두 문장을 적어볼 테니 이게 무슨 뜻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1. 나는 말한다. 내가 죽을 것이라고. 2. 나는 죽는다. 여기 이 두 문장이 같아요? 아니면 달라요? 달라요. 양쪽에 다 가 나오긴 하지만 1번처럼 내가 죽을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 는 지금 죽어 있습니까? 아니면 살아 있습니까? 살아 있지요. 살아 있는 내가 지금 나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게 돼요.

 

이런 건 반칙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자기의 죽음에 대해 타인에게 언급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에요. 죽음과 비슷하다고 해서 그게 죽음이 아니에요. 이런 말들은 죽고 싶지 않은 본연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연막일 수도 있습니다. 살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 같은 것일 수도 있고요. 수천 명의 타인의 죽음도 나 한 사람의 죽음 경험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죽은 게 아니니까요. 그러기에 아직 살아 있는 내가 나의 죽음에 대해 타인에게 언급하는 것은 가짜가 가짜 죽음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1번 문장과는 달리 2번 문장은 타인을 의식하고 하는 게 아닌 단지 자신의 독백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닌 거지요. 여기에는 나에게는 죽음이 작렬하고 있고 그 죽음이 죽음을 말하는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여지가 있습니다. ‘나는 죽는다라는 말이 내가 곧 죽음일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내가 아는 죽음이 아닌 내가 모르는 그 죽음이 나는 죽는다라고 말하는 나를 함몰해버릴 수 있다는 뜻을 전달합니다. 여기 있는 나는 죽음의 대변자로서 있을 뿐인데 외적으로는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뜻이에요. 이 말을 듣는 타인이 있든 없든 그건 상관없어요. 얼마든지 중얼댈 수 있습니다.


교재 1페이지를 보면, 편의상 뜻과 의미의 차이를 구분해놓았습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의미meaning와 뜻sense은 정반대 것이다. 의미는 큰 영역에 속하며, 우리 경험의 장 전체의 정합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지만, 뜻은 뜻 없음의 바다에서 국소적으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의미는 전체 수준에 속하지만 뜻은 비() 전체이다....]

 

연기력이 좋은 배우는 자기에게 주어진 캐릭터를 잘 소화해냅니다. 그런데 그 배우더러 본인을 연기해보라면 당황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평생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채로 타인의 요구에 자기를 맞추느라 급급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기 죽음조차도 타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죽음이기를 원해요. 그러니 본인을 연기할 수 없는 거지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요. 이런 인간이 이 담긴 말도 하고 글도 씁니다. 그러니 그것은 이 뜻에서 저 뜻으로의 움직임 밖에는 아닌 거예요. 의미는 몰라요. 모르는 채 이런저런 뜻에 대해 말도 하고 글도 쓰는 거지요. ‘타인과 소통되지 않는 말을 해서는 안 돼라는 것에 눌려 마치 자기 사명은 소통되는 말은 하는 것이라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인간의 언어는 불확실성을 몰고 다니고 인간 세상에서 그런 식으로 유포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무엇이 맞고 무엇이 맞지 않는지를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 채로 그럭저럭 인생을 살아갑니다. ‘진리에 대한 결정은 미래로 미루겠다는 거지요. ‘끝에 가봐야 아는 거지’, 혹은 죽음이 뭔지는 죽어봐야 알겠지라는 식으로 말이지요(진리에 대해 모르니 그런 민감한 주제는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이건 속임수인데요 이런 거예요. 서로 잘 알고 친하게 지내는 일곱 사람의 모임이 있어요. 그중 한 사람이 암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암에 걸린 이가 누군지 그게 정말 확실한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일곱이 평소처럼 카페에 모였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요. 어떤 이는 새로 나온 책 이야기, 또 어떤 이는 최근에 본 영화 이야기, 또 누구는 직장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또 누구는 자기 가정사에 대해 말합니다. 정치 이야기도 빠뜨리질 않아요. 그러다가 헤어졌어요. 이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보면 나름의 뜻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이들이 정작 진짜 나누어야 할 이야기, 이라는 주제를 회피하려고 동원된 것들에 불과한 거예요.

 

인간은 참으로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 답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타인에게서 들었던 이런저런 나름의 뜻들을 동원해서 계속 자기를 둘러칩니다. 많이 알기는 아는데 그 여러 지식이 정작 자기를 아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아요. 오히려 나를 힘써 감추기 위한 속임수로 작용할 뿐이에요. 에베소서 1:4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답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대하고는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들은 양 후딱 이 말씀을 자기 두뇌 속으로 집어넣어요. 헛헛한 자기 자신을 달래야 하니까요. 그리고는 그 말씀으로 자기를 커버하지요. 사람들이 붙잡고 있는 그게 바로 이라고 하는 거예요.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동원된 겁니다.

이를테면 이런 거지요. 이 땅에는 각종 재앙이 들끓습니다. 전쟁이 있고 기근과 지진도 처처에서 발생합니다. 얼마 전에도 일본에서 대규모 지진이 있었잖아요. 이 모든 재앙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다고들 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거지요.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더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해요. 그렇다면 그 지진과 하나님의 뜻과의 관련성은?’이라고요.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지진의 의미를 모르는 거예요. ‘의미는 모르겠고 그냥 지진은 무서워라고 하는 태도는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바가 됩니다. 사람들은 늘 이런 식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지요. ‘의미는 모른 채 그냥저냥 시간을 끄는 식으로 일평생을 보내요. 의미는 몰라도 뜻이라도 부여해야 허망한 삶이 달래지니까요. 그래야 오늘을 마감 짓고 또 내일을 또 힘차게 살아낼 수 있잖아요.


, 그런데 문제는 이겁니다. ‘뜻은 뜻이 없는 장소에서 나온다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들로서는 골칫거립니다. 좀 전에 에베소서 1장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이런 식은 성립되질 않아요.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이냐? ‘나는 내가 없는 데서 나왔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없는 데서 나왔기에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거예요.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기에 이 모른다는 사실을 가릴 양으로 하나님을 포섭하기 위한 언어가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자기를 가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통보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개체가 같은 인간의 언어에요. 그러니 이 언어에 대한 해석이, 달리 말하면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인간 입장은 이러합니다. ‘하나님도 필요하고 하나님의 계시도 필요하다에요. 자기로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곧 진리 혹은 인간의 종국에 관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에베소서가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어디 한번 보자, 거기 뭐가 있지?” 봐서 뭐 할 건데요? 자기에게 있는 미해결 된 문제의 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한번 참고해보겠다는 겁니다. 이런 심보에는 노림수가 있어요. 이건 자기를 속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건 해답보다 내가 먼저 있어야 해라는 고집이니까요. 그런데 에베소서는 내가 없던 때에 관해서부터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요.

사실이 이러함에도 인간은 자기가 현재 여기에 있고, 그런 자기의 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냐를 알아보겠다는 겁니다. 이 일을 위해 성경 말씀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는 거지요.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 신이 주셨다고 하는 정보를 취득해보겠다는 심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내부에서 튀어나오는 이런 속임수에 대해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해 버리십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에 대한 규정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존재가 아닌) 자리(위치)로 표현되며 그 자리는 내가 아닌 그분의 활동을 위해 그분의 주변을 맴도는 방식으로 배정된 것이다.’ 이런 관계의 상호작용이 사랑입니다. ‘그대 있음으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대를 위해 나를 위한 내 자리를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거지요. 이것은 내 자아보다 상대의 존재에 우선권을 두는 태도이며 더 나아가서 자기의 안식처는 그분이 계시는 바로 그곳이 되는 거지요. 그러므로 결론은 인간은 자기를 위한 자리를 따로 가져서는 안 된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이 왔을 때의 일이고 그전까지는 그저 충돌과 충돌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목사님,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데요...” 그런데 누가 됐든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다른 사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자아가 생기면 사랑하는 사람도 같이 생기게 돼요. 일차적으로 그 사랑의 대상은 바로 자기입니다. 하지만 는 온전치 못해요. 인간은 자기를 온전히 모릅니다. 이 때문에 자아에 틈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 틈을 메꾸고자 인간은 을 찾아요. 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붙들어 두고 싶은 를 더욱 완벽하게 붙들고 온전하게 사랑하고 싶어서예요. 그래서 나보다 나를 더 많이 알고 심지어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도 알고 있다는 신을 찾는 거예요. 신의 도움이 필요한 거지요. 신을 찾아가는 이 여정에서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게 있어요. 바로 자연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자연을 어떤 식으로 인간의 언어로 담아낼까요?

(그림 1)

 

 

 

위에서 보시다시피 인간이 자연을 담아내는 언어 형식 중 하나가 원소 주기율표입니다. 바깥 부분에 있는 전자의 개수에 따라 전자가 한 개 있으면 일족, 두 개 있으면 이족, 이런 식으로 분류를 해요. 이 분류를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H(수소), He(헬륨), Li(리튬), Be(베릴륨), B(붕소), C(탄소), N(질소), O(산소), F(불소), Ne(네온), Na(나트륨), Mg(마그네슘)...등등, 118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을 인간의 언어 형식으로 담아내겠다는 이 같은 시도는 자연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인간의 삶에 보탬이 되게 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인간이 자연마저도 장악한 진리의 화신(진리체)’으로 자처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어요. 무질서한 자연을 언어라는 형식으로 체계화하여 인간의 진리 됨을 확인하겠다는 겁니다. 자기를 믿고 자기를 사랑하는 그게 바로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진리라는 거지요. 이 작업을 위해 언어가 동원되는 겁니다.

리튬(Li)의 경우를 보게 되면 리튬이 주성분인 암석은 시멘트랑 비슷한 색깔을 띠는데요 마지막 궤도에 전자가 하나밖에 없어서 다른 원소들과 반응을 잘해요. 리튬은 리튬전지로 유명합니다. 주기율표 제일 왼쪽에 있는 원소는 알칼리성 금속이라고 해서 굉장히 반응도 잘되고 가벼운데 그 중 나트륨(Na)의 경우, 물에도 잘 뜨고 칼로 잘라도 쉽게 잘리는 무른 금속이에요. 나트륨은 우리 두뇌 안에 있는 신경 세포의 일부인 축삭돌기에 이온 형태로 있어서 전기현상을 일으킵니다. 마그네슘(Mg)의 경우는 자연의 엽록소에 들어있어서 광합성 활동에 핵심 요소가 됩니다. 칼륨(K)은 인(P), (S)과 더불어 비료의 3대 요소가 되고, 특히 폐 안에 들어가서 폐 기공을 열어줍니다. 칼슘(Ca)의 경우는 뼈의 주요 성분이고요.

이게 인간이 자연을 분류하는 언어인데, 실은 이런 것은 인간이 자기를 선도 악도 아닌 중립(중성)의 위치에 두고자 하는 시도에서 나온 거예요. 신을 찾는 일에서든 자연을 연구하는 일에서든 거기에 동원되는 모든 언어가 인간의 자기 중립화 구축을 위한 시도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교재 1페이지에 보면, “그런데 과연 물리학이 전쟁과 초연하게 자기만의 고유영역을 유지할 수 있을까?”라고 되어있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과연 과학의 영역에서 영적 싸움이란 말이 성립될까요? 인간은 이 질문에 대하여 당연히 ‘No’라고 할 것입니다. 과학은 선에도 악에도 넣을 수 없는 중립지대(중성적 위치)에 있는 것이라고들 생각하니까요.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마가복음 13:24-27입니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과학적인 접근으로 볼 때 이 말씀에 대한 적절한 대처는 뭡니까? 중립화를 획책하는 인간의 언어로 이런 사태의 원인에 대해 과연 규명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없습니다.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를 설명하려면 영적 전쟁이라는 전제가 선행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인간의 죽음에 관한 설명에서도 과학적인 접근으로 대처가 안 돼요. 이건 자신을 선도 악도 아닌 중립의 위치에 세우고자 하는 인간들의 자기 이해를 배제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 안에서나 이해될 문제라는 말이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러니까 메시아와 악마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필요한 언어는 하나님 편에서 준비하셨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 쪽에서 준비하신 그 언어가 우리 쪽으로 밀고 들어온 거예요. 우리 편에서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들은 선과 악의 중간에 있는 자신의 중립적 위치를 고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합니다. “헬륨(He)이든 수소(H), 혹은 칼이든 총이든 뭐가 됐든 좋은 일에 쓰기만 하면 그건 선이고, 악한 일에 쓰면 그건 악한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속내를 생각해 봐야 해요. ‘산화수소라는 용어가 있는데 누군가가 굳이 이 용어를 사용해서 말을 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뭔가 노리는 바가 있어요. 거기에는 자연에 대한 체계 세우기라는 의도가 들어있고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세계관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자기를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가 은연중에 들어있는 거예요. ‘. . . .’, 네 글자잖아요. 그런데 이걸 한 자로 말하면 그냥 이에요. 수소가 산화된 거, HO에요.

 

인간이 과학을 수단으로 삼아 행하는 이런 시도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함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누구도 나를 죄인으로 규정할 수 없게 하겠다는 거지요. 하나님조차도 나를 죄인으로 규정하지 못하시도록 자기 쪽에서 단속하겠다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수학이 악하다고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그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2+3=5’가 그 자체로서 악하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이 점에 대해서는 모든 인간이 합의하고 있어요. 악도 선도 아닌 중립 지역으로 모든 인간이 집결하고 단합합니다. 그것으로써 인간은 자기들이 진리 안에 있다고 자부합니다. ‘예수 안대신 진리 안을 선택하는 거지요. 이에 대해 에베소서의 지적은 이러합니다.너희는 창세 전의 사정에 대해 무지했다. 그것이 바로 죄며 악하다,’

이와 같은 과학을 통한 인간의 악한 시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 방식이 누가복음 16:16에 나옵니다. 이 구절에 어려운 에베소서 전체를 풀어나가는 힌트가 담겨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침입, 침투. 마태복음 11:12도 같은 뜻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천국은 고정되었으니 여기 있다. 믿어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은 기존의 인간의 천국관과 충돌하면서, 천국은 고정된 장소로서가 아닌 충돌의 현장에서 언뜻언뜻 내비쳐지는 나라로 제시됩니다. 각자의 세계관이 찢어지고 무너지고 해체되는 가운데 인간세계 전체가 악하고 음란하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지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16:4).”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요? 인간이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고요? 그런 중립(중성)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모두가 예외 없이 악해요.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만 수시로 뿜어낼 뿐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것은 복음이 이 세상에 침투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침노 당했기에 가능한 현상인 거예요. 중립의 위치에 있는 존재에게는 전쟁이 없겠지요. 전쟁은 선한 쪽과 악한 쪽의 피 터지는 충돌이잖아요. “저는 과학도로서 중립의 위치에 있어요. 그런 제가 어떻게 악한 편이겠습니까?”라는 말이 성립되질 않아요. 인간이 뱀의 후손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무조건 선이고요, 뱀의 후손은 무조건 악입니다. 이건 인간이 있기 전, 창세 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한창 치열한 영적 전쟁터에서 인간이 성도(천국 백성)가 되는 것은 그 전쟁의 결과 때문이지 그가 중립의 위치를 고수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에게 승리한 결과가 그들에게 덮쳐왔을 따름입니다.

주님이 이 땅을 침투하실 때 이 땅에 천국이 침투하고 인간의 천국은 예수님의 천국에 의해 침노를 당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과 율법이 인간의 천국관을 공격했고 지금 신약 시대에는 성도들이 인간의 천국관을 공격하는 일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성도가 어디 있는 거지요? 성도는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나도 성도 될래라고 해서 성도가 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성도는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언어 속에서 수시로 발생해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결국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라!’가 됩니다. 새로운 언어가 창조될 때 그 창조의 공간 안에서 성도가 생겨납니다. 그 새로운 언어를 배태하는 창조의 공간이 바로 예수 안인 거지요. 그래서 성도의 언어는 양편의 의미를 다 품고 있어요. 하나는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의도가 담긴 언어이며 또 하나는 그것을 해체하시는 창세 전의 언어입니다. ‘창세 전이 내포하는 의미와 창세 후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의미의 충돌, 이것이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 싸움입니다.

 

이제 하늘의 별들이 떨어져야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하늘의 별들이 떨어져야 정연해 보이는 자연 질서에 의존해서 자아의 질서를 구성해보려는 인간 쪽의 의미가 떨어져 나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베소서의 용어들, 즉 천국, 영생, 율법, 인간, , 악마, 교회, 예정, , 십자가와 같은 말들은 인간들의 속내를 파헤치는 수단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이 용어들을 어떻게 또 어떤 의도로 사용했으며 하나님은 이 같은 인간의 의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마중 나오시고 어떻게 그런 의도를 박살 내시는지를 살펴봐야 해요.

마가복음 13:24-25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라고 돼 있잖아요. 이건 창세 전에 수립된 계획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바로 단 하루에 행십니다. 인자(人子)가 오심이 단 하루로 성취돼요.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13:32)” 이 말은 인류 역사의 긴긴날들이 단 하루로 응축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말을 달리하면 그 단 하루의 일이 인류 역사 가운데서 길게 확장되고 펼쳐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한 날에 하나님이 준비한 모든 것의 승부를 내버리십니다. 사도행전 1:6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 예수님께 듣고 이해한 것을 나름대로 종합하여 단출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의 회복할 날이 언제입니까?”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바로 제가 오늘 강의한 내용의 집약이기도 합니다. “너는 몰라도 돼”. 너는 그 일에 끼어들 당사자가 아니야.’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서 배제되어 마땅합니다. 이는 예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제가 예정된 자예요?” 여기에 대한 답변도 너무나 간단한 해요. “그 문제는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단 하루를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성령이 나오는 곳으로 말이지요. ‘하루자리로 대체돼요. ‘을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단일 공간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3:1)” 여기 보면 공간과 더불어 시간이 나와요. 시간을 공간 안으로 잡아당겨 버리면 시간이 공간 안으로 쭉 빨려 들어가고 빨려 들어간 그 공간에서 시간이 앞뒤 사방으로 퍼집니다. 모든 것이 한 날, 한 지점으로 모이고 새롭게 생성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 한 날, 혹은 이 한 장소를 예수님의 죽음으로 봅니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창세 전 언어의 논리로 적용해 봅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없는 겁니까?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 죽음을 몰라요. 인간은 죽지만 죽기 때문에 죽음이 자기 일이 아닌 거예요.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사는 동안 인식하는 모든 일의 의미도 모르는 거예요. 이 세상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파생된 의미 외에 달리 아무것도 없어요.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시공간에 저촉받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새로운 시공간이 열리게 되는 거예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벧후 3:8)”고 하시는 말씀의 근거가 되는 것도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는 창세 전 언어가 인간의 역사를 뚫어 버린 거지요. 그렇게 인간의 언어 개념이 창세 전 언어 개념으로 침노(침투) 당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 개념이 창세 전 언어 개념으로 침노 당하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구원받기 위해 제가 뭘 하면 됩니까?”라고 질문하게 돼요.

마귀는 인간세계에 이러한 창세 전 언어의 의미가 뿌려지지 않도록 사력을 다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이 말씀은 영적 전쟁의 내부 사정에 대해 말해줍니다. 인간들은 기껏 마귀의 종이었다는 거예요. 인간은 세상 말로 정신병자예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사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를 아는 현실이 빠져 있는 채로 살아갑니다. 순간순간 환상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자기가 만든 환상을 현실이라고 믿으니 정신병자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 환상의 세계가 인간의 의식 세계입니다. 보편적인 상식도 사회 전반의 여론도 정치도 문학이나 예술도 과학과 철학과 종교도 모두 이 의식 세계의 단편이요 단면들입니다. 인간은 이런 것들을 다룬다고 하지만 정작 그런 작업에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이해는 빠져 있는 거지요. 따라서 그 결핍의 자리를 의식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 개념으로 메우려고 치열한 노력을 해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작용이 생겨납니다. 당구대에 당구공을 밀어 넣는 칸은 9개인데 공이 8개라면 아무리 노력해도 한 칸은 결국 비게 되는 이치와 같아요. 인간이 스스로는 다루지 못하는 인간 본인의 의식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악마입니다. 악마가 악마의 심성으로 인간의 의식을 다루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라도 인간이 창세 전의 의미에 접촉되지 않게 하는 방향으로 악마는 인간을 내부로부터 조종하고 있습니다.

 

충동은,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자리가 이후에 형성된 자아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성질을 일컫는 말입니다. 자아의 이성(理性)과 합리성(合理性)이 내부의 충동만큼은 제대로 통제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충동은 이게 나다라고 우기는 자아에 결핍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니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충동이 우리 자아의 내부에 곱게 조용히 있도록 달래주는 것밖에는 없어요. 의식 차원에서의 인간은 정신병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정신력이 약해지면 자아는 충동에 놀아나게 돼요. ‘내가 왜 이러지? 나는 이런 실수를 잘 안 하는 타입인데라고 당황해해요.

결핍이 있는 자기를 다루는 방안으로써 인간은 고립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형성합니다. 이것은 저의 경험입니다만 저는 어릴 적엔 틈만 나면 두툼한 솜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 아늑한 공간에서 저만의 시간을 즐기곤 했어요. 손가락으로 이불 가운데를 쑥 밀어 올리면 이글루 같은 작은 공간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팔베개를 베고 누워있으면 비록 이불속이라도 하늘의 별자리를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 (), ()’, 이 세 요소를 다 갖출 수가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이런 절대공간이 사정없이 부서지는 순간이 와요. “밥 먹어. 밥 먹으라는 소리 못 들었어?”라면서 집안 어른이 들이닥쳐서는 이불을 사정없이 걷어내는 때가 그때입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즐겼던 나만의 세계는 그렇게 끝나버립니다. 요양병원에 넣어질 때까지 인간은 다 그냥 이런 식으로 사는 거예요. 여러분도 다 유보된 정신병자로 사시는 겁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축 취지가 이랬어요.

 

 

(그림 2) [라캉의 루브르 ] p 81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입니다. 여기 보면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 구멍이 뚫린 방향이 북극성을 향하고 있어요. 영원히 북쪽 하늘에 고정된 그 별자리처럼 파라오()들은 자신들이 죽음 자체를 벗어나 영원히 살기를 원했던 거예요. 이 피라미드가 저의 이불 속 세계와 같은 거예요. 그저 인간의 희망이고 기대고 상상이지요. 인간의 모든 문명이 향하는 궁극적 방향을 피라미드의 건축으로 노골화시킨 겁니다.

 

인간이 자기에 대해 알고자 했을 때 제일 먼저 마주하는 대상이 자연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과학으로 그 자연의 질서를 포착하고 자연을 포획하기 위한 기술력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런 식으로 자연을 상대해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것은 자연에는 주인도 없고 인간의 이런 태도를 꾸짖는 이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하냐 악하냐, 좋으냐 나쁘냐에 대한 판단을 자연을 상대하는 인간 자신이 내릴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이 자연에서 얻는 평안입니다. 자연에는 갑질하는 어른이 없다는 거지요. 자신이 선도 악도 아닌 중립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연이 호응하고 지지해준다고 믿어요. 그런 증거가 자연에 가득하다는 거지요. 인간은 자연이라는 종교의 신봉자들이었던 거예요.

자연이 무슨 죄가 있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나에게 무슨 죄가 있냐?’는 말이에요. 자연을 상대할 때만큼은 마찰이나 충돌이 일어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들은 자연을 최후의 도피처로 여기고 그런 자연에 매력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개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집이 두 채가 있는데 앞집과 뒷집 사이를 무언가가 연결하고 있다면 이 연결체는 매개가 됩니다. 매개로 연결된 이들 두 집을 수직으로 곧게 세운다면 이층 건물이 되고 위층과 아래층은 이 매개로 인하여 연결된 게 됩니다.

 

그런데 매개의 상대 개념에 해당하는 개념이 주체입니다. ‘주체로부터 시작한 의미를 도로 나에게로 귀결시킵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이 이와 같아요. 인간은 자신을 주체로 상정하고는 자기에게서 시작한 의미를 신에 대한 존재 인정을 거쳐서 다시 자기에게로 귀속시킵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내부 순환 회로에요.

창세 전 관점을 결여한 인간이 자기를 매개가 아닌 주체로 상정하기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매개자는 인간들을 죽일 수밖에 없어요. 에베소서 1장에서 제시하는 매개는 예수 안입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그 여정(11:36), 주님은 그 경로를 주님 자신의 활동 궤적으로 세상에 남기셨습니다. 마치 여름철 방역차가 훑고 지나간 자리의 그 연기(흔적)처럼 말입니다. 이 흔적이 실체가 되도록 창세 전에 택한 주의 백성에게 성령의 통보가 가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계획이에요.

 

 

 

 

 

 

2강 통보

우리는 타인의 방에 들어갈 때 문 앞에서 이렇게 묻지요. “들어가도 됩니까?” 답변은 다음 둘 중 하나에요. “들어오세요.”, 혹은 못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못 들어온다입니다. 창세 후에 피조된 처지에 있는 인간이 창세 전의 시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없던 시절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분명히 들어간 사람이 있었지 않습니까? 에녹이라든지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요?

 

 

이 질문은 참으로 의미 있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창세 후의 인간은 창세 전의 상태로 이루어진 천국에는 못 들어간다는 전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답변도 못 들어감이라는 전제를 더욱 확고히 하는 답이어야 합니다. 에베소서에서 제시하는 답이 바로 그거예요. ‘저들은 내가 선택했다입니다. 이 답변을 구체화하면 이래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천국에 저들은 들어오도록 내가 선택했다입니다. 이것을 좀 더 압축하면 하나님이 오직 예수 안에서 선택했다가 됩니다. 구약의 표현으로는 언약 안에서 선택했다가 돼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천국 가게 되었다라고 말할 게 아니란 말이지요. 구약과 신약의 표현 이 둘을 합쳐 봅시다. 먼저 창세기 12:1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다음으로 생각할 구절은 신약 요한복음 8:56-58의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구약의 말씀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신약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다른 요소 하나를 제시합니다. 매개자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연결해보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분은 매개자, 곧 예수님이시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하셨음을 보이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선택되었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선택된 것은 예수 안에서 입니다. 아브라함 선택에서 매개자이신 예수님을 빼봅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선택된 근거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게 아니었어요. ‘예수 안이라는 그 매개를 역사 안에 구성하기 위해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인간을 비교하고 대조시키십니다.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결코 예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 이것은 예수 안에 있지도 않은 처지에서 자기가 자기를 선택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선택권은 오로지 하나님께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선택 권한을 저에게 행사하셔서 저를 선택해 주옵소서라고 요청할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이에요.

 

예수 안이라는 개념 형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일이 선행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면에 내세우시는 매개자를 인간 쪽에서 걷어차 버린 게 되도록 하나님이 일을 진행하신 거지요. 예수님을 저버린 주제에 나를 구원해달라 나를 선택할 달라는 요청이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그러니 인간들은 무슨 수를 써도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천국에 이미 입성한 자들은 예수 안에 있다는 바로 그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지 다른 어떤 이유도 없어요.


선택이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의 선택은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심으로써 우리 쪽의 선택을 거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선택은 주님과 우리의 합작품이 아니란 말이에요. 한쪽이 일방적으로 선택해버리면 다른 편은 좋든 싫든 그 결과에 종속되는 게 선택의 속성입니다. 주고받는 게임이 아닌 거지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시는 그 권한(기능)을 우리 쪽에서 소유하거나 요구하거나 이용할 수 없다는 거예요.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모든 일을 마감하셨기 때문입니다. 액션 영화의 히어로처럼 시한폭탄 앞에서 빨간 선을 끊을 것이냐 파란 선을 끊을 것이냐와 같은 고민 따위는 인간에게 남아 있지 않아요.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선택을 비껴갑니다. 굳이 우리가 선택할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효력도 없는 거니까요. 주님의 지시대로 됩니다. 주님이 아브라함, 이삭, 모세, 엘리야더러 , 지옥 가라고 하시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옮기면 너 지옥 다녀와가 되고 이것을 또 다른 말로 하면 언약이 너를 언약대로 너를 이끌고 인도할 것이다가 됩니다. 성도들 안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내용은 십자가의 저주입니다. 예수님도 저주를 받아 음부까지 다녀오셨잖아요. 그러니 넌 지옥에나 가버려라고 하는 이게 욕이 아닌 거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지시를 내리시든 그 지시가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 그게 말씀이 들어온 증거예요.

주님의 통보 또한 이런 차원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주님의 통보에 대한 적절한 예가 주님께서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거부할 수 없어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는 그 뒤에 자살했잖아요. 예수님은 이 일이 있기 전에 가룟 유다에 관하여 미리 말씀하셨고 당사자인 유다에게 이를 미리 통보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가룟 유다는 그의 출생이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제대로의 저주에 해당하도록 미리 조치 되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와의 관련성을 배제하고는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로 그 역할을 부여받은 거예요. 그가 전형이에요. 그는 저주받은 자의 역할을 감당했고 나머지 열 한 제자는 구원된 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거지요. 요한복음 17:12이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따라서 가룟 유다의 자살은 가룟 유다 본인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었다는 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선택은 충돌 없는 순조로운 진행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구원) 의지와 마찰하고 대결하는 구조를 형성하면서 차라니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는 결과를 수반한다는 겁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조합에는 무슨 말에서든 늘 자기 부정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합시다. 이런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면 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내가 믿지는 않지만 내가 아는 예수님은 믿습니다라고 말이지요. 한편 당신도 예수님을 믿기 바랍니다라고 상대가 말한다면 그에 대해서는 예 고맙습니다.”라고 하면 그뿐이에요.

 

내 말이 타인에게 전달될 때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 조합은 언제나 온전치 못합니다를 자인해야 하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의 판단은 파편화된 언어들로 해체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극단적인 설교자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 사람은 너무나 주님이 두려워서 설교할 때 일체 자기 말을 섞지 않고자 합니다. 그래서 아나운서가 뉴스 원고 읽듯 그저 성경 본문을 읽기만 하고 강단에서 내려옵니다. , 그렇다면 이런 설교의 문제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한번 시범을 보여 보겠습니다. 아무 구절이나 펼쳐볼게요. 다니엘서 5장이 튀어나왔네요. 벨사살 왕에 관한 대목입니다.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고(5:1)” 한 구절로는 설교 시간이 너무 짧겠네요. 그렇다면 몇 구절, 아니 몇 장을 더 읽어야겠지요. 어쨌든 설교 시간은 안배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성경을 여러 장 연속해서 읽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30분은 지나갈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설교입니까? 순수하게 성경만 읽고 강단에서 내려오는 이것이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지 않는 설교인가요? 과연 이 설교자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 생각을 빼는 일에 성공한 겁니까?

 

또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어떤 설교자는 한글 성경이 아닌 헬라어 혹은 히브리어 성경을 들고서 설교 시간 50분을 구문분석parsing에 다 써버립니다. 가정법 과거완료가 어떻고 남성형, 여성형이 어떻고 하면서 말이지요. 이런 식의 설교가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는 바른 설교란 말입니까? 그게 아닌 거지요. 설교는 다른 게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이 말씀에 대해서 지금껏 알았다고 여겼던 이해가 오늘은 이런 식으로 깨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거지요. “저는 저의 순수함, 순결함, 혹은 진리에 입각한 저의 면모를 확인하고 싶어서 또 여러분들에게 이런 걸 보여줄 것을 고대하면서 성경을 대했습니다. 이런 짓거리는 멸망의 자식들이나 하는 짓거리입니다.”

 

설교를 듣는 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예배 시간은 누구에게 한 수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설교자가 어떻게 주님께 깨뜨려 졌는지를 참고하는 시간이에요. 주님의 일의 현장성이 진리로 작용하는 거지요.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설교자에게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은 설교자(우리) 자신이 중보자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복음 전하는 자에게 한 수 배워보겠다는 태도에 대해 바울 역시 이렇게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한 일이 있습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고전 1:13)?”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여기 있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예수님께서 직접 중보자(매개자)로 우리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우리더러 나는 내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아버지께로 간다. 남아 있는 너희는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해라라고 하시는 게 아니라 떠나셨던 주님이 우리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 안에 상주해 버립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주님은 개인이 아니라 우리속에 오신다는 점입니다. 이는 내 안에는 너는 네 것을 사수해라고 하는 악마가 심어놓은 무의식이 탑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이곳을 치고 들어오시는 거지요.

우리의 껍데기는 여전히 달라진 게 없어도 내부는 아버지와 중보자이신 예수님 사이에 창세 전에 연결되었던 그 케이블이 살아 있습니다. 이게 성령의 침투로 인한 거예요. 우리가 천국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우리를 침투해서 영적 전쟁을 벌이게 되면 우리 자신은 패배자로 드러납니다. 주님(천국)께 전적으로 패한 자, 그런 사람이 입으로 내놓는 것이 설교인 거지요. ‘나는 패배자 맞습니다, 나는 죄인이 맞습니다.’라고 성급하게 결론부터 내놓지 마시고 감사함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주님께 패배당한 기쁨, 이게 바로 로부터 자유하게 된 자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곧잘 성급하게 정답을 내놓는 경향이 있는데 이 같은 우리 속 마귀 속임수에 하나님께서는 속아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친절하신 우리 주님은 우리들의 역사’, 곧 우리의 속임수가 공격당하는 일을 겪게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가지로 요령 부리는 자들이며 모사꾼입니다. 이런 자들이 주님께 당당하게 내미는 나의 행함이라는 것, 그게 곧 나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우리 쪽의 선택을 하나님도 인정하셨다고 내놓는 최종적인 거짓 증거물입니다. 진화론을 내세우는 게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인간은 자긍심이 강해요. 그래서 자기 역사의 전시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진열품을 잔뜩 채워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곧장 치워버리면 돼요.

그러니 역사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매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 돼요. 윗동네와 아래 동네가 연결되질 않아요. 쏘아 올린 모든 인간 역사가 하나님께는 인정 못 받더라도 인간으로서 믿을 것은 역사밖에 없기에 인간은 역사 쌓아 올리기에 매진하는 거예요. 과학도 중첩되어있는 인간 역사의 일종입니다. 신학도 권력도 마찬가지예요. 민주주의 정치 제도도 그렇고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인간이 믿을 것은 역사밖에는 없는 거지요. 내 인생, 내 일기장이 다 내 역사잖아요. 교회, 가정, 기업, 국가, 이런 사회의 모든 조직을 붙들면서 인간은 자기 역사를 구축하고 거기서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습니다.

역사라는 정신적 구조물에 뼈대를 세우고 자기 이념을 견고히 하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것이 이에요. 이스라엘은 멸망 이후 여러 나라로 흩어졌는데 주로 애굽으로 많이 이주해 갔어요. 물론 바벨론에도 많이 끌려갔고 바벨론으로 잡혀갔다가 애굽으로 간 사람들도 많았고요. 하여튼 이스라엘 본토는 완전히 궤멸 됐어요. 앗수르의 이주 정책으로 유대땅은 이방인들과 혼혈인들로 넘쳐났습니다. 하나님의 계시(啓示)는 끊어졌고,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의 예전 영광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은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어도 현실은 그 약속과는 점점 더 멀어지는 듯했습니다. 약속 성취의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붙잡은 것이 그들의 혈통이에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과 율법을 결합해서 계시의 연속성을 유지하려 했던 거예요. 말라기 계시 이후의 실정이 비로 이랬어요. 이때가 중간기(中間期)’로 일컬어지는 시대의 시대상입니다. 구약 말라기 이후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계시를 끊으셨는데 인간이 이를 못 견뎌 했어요. 그래서 자기들의 정통성을 자체적으로 구성해 내는 시도를 했던 거지요. 즉 제사장 제도를 취하되 거기에 왕 기능을 접목해서는 아브라함 혈통+율법이라는 완벽해 보이는 체제를 구축했던 겁니다. 시간이 지나도 그들이 이 체제를 꾸준히 잘 견지하고만 있으면 메시아가 오실 때 메시아와 그들이 무사히 접속할 수 있으리라고 모두가 한가지로 그렇게 믿었던 거지요.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흩어진 각처에 회당(시나고그 Synagogue)’을 세우고 거기서 집회로 모이고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이 회당은 흩어진 유다의 남은 자들을 결집하게 했고 이스라엘의 중추적 이념의 생산지 역할을 했습니다. 지구상 그 어디 있든지 회당의 전면은 성전을 향하게 했어요.

그런데 약속(언약)’이 뜻하는 혈통이 DNA(유전자)를 공유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이 마태복음 1장을 보면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열거합니다. 거기에 ○○에게서란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이 어구가 나오는 곳에는 공통으로 외부 혈통의 투입이 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이 감추어 두신 진짜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은 육신 혈통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는 외부 요소의 침투로만 형성된다는 얘기에요. 그래야만 하늘에서 인정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이 된다는 말이며 또 그런 경우라야만 메시아와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육신의 혈통을 치고 들어오는 외부 요소는 놀랍게도 바로 이방인입니다. 이것은 혈통이라는 육의 요소로 역사를 구성해서 그것으로 메시아를 마중해보겠다는 인간의 시도를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우는 정통성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배제하신다는 뜻이에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 바리새인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21:31-32)”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왜 하셨겠습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20:16). 특히 마태복음에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시는데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백부장같은 이방인이 천국을 차지한다는 거예요.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8:11-12)”


이 원칙은 에베소서에서도 한결같이 유지됩니다. 에베소서 2:11-13에 보면,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방인이 어떤 자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자들입니다. ‘약속이 없는 자들이 어떻게 약속 성취에 투입되는 거지요? 이는 혈통의 연속성을 내세워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을 해석하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함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당황해하고 분노할 겁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이 아니란 점 때문에 당연히 지옥 갈 자들로 무시당했던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들에게 허용된 그 천국을 차지한다면 아브라함 혈통이라는 그들의 조건 자체가 오히려 천국 입성에 장애 요소로서 작용하게 된 것이고 이는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들의 혈통이 오히려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불리한 핸디캡을 안겨준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이런 식으로 공격해 왔어요. “개 같은 이방인들이여 너희는 지옥에나 가라!” 이에 대한 이방인들의 반론은 이제 이렇게 되는 거지요. “우리는 이미 지옥을 맛보았다. 그런데 너희 유대인들은 어떠하냐? 지옥은 너희와 상관없다고 생각지 않았는가!” 사실 모든 인간은 지옥을 다녀오고야 구원된다는 조건에서는 같은 입장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지옥 속에서만 구원받음이 성립돼요. 지옥 밖에서는 구원이 없어요. 죄인이어야 의인이 돼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그자는 지옥 가는 자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지옥을 다녀오시고 구원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3:13)”

 

에베소서 2:2에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저주 안에 있다고 단정 짓습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처지에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잘 못 이해하고 잘 못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끄집어내시는 약속에 대한 바른 해석은 무엇입니까? 바로 와 관련된 해석입니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2:13)” 역사를 부여잡는 인간들의 이념과 반대 개념이 예수님의 피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역사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에 필사적이었어요. 자기들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이란 점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그 혈통 유지를 위해서라면 이방 민족에게 나라를 팔아먹어도 상관없다는 식이에요. 아주 막무가내에요.

인간은 창세 후에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을 창세 전 인간이 없던 그 시공간으로 데려가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인간 편에서는 창세 전의 상태에로의 접근 자체가 차단되어 있어요. 인간은 어쨌든 본인이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한다는 바로 그 인식이 문제에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없는(사라지는) 상태를 생각한다는 게 무섭고 두려운 거예요. 나를 빼버리면 내 쪽에서 할 일은 더는 없는 것이 되기에 그렇게 되면 자기는 무능력한 인물로 전락한다고 여깁니다. ‘죽으면 죽었지, 내가 없다는 것은 참을 수가 없어!’라는 어깃장을 부려요. 자신이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합니다.

 

이래서 자살도 하는 거예요. 자기는 자기를 맘대로 해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인간 세상에서 통용되는 모든 말은 장난질 용입니다. 개별적인 어구나 단어의 뜻은 있어도 그것을 총괄하는 의미는 없어요. 그저 자기를 상대로 장난질하면서 자기를 좋게 보이기 위한 말질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창세 전 결정은 약속이라는 말로 제시되는데 이것은 유일한 매개자(중보자)이신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으며 또 이것은 주님의 활동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세례 요한의 대답을 통해서도 이점은 명백합니다.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 대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1:19-21)”

 

세례 요한은 다윗 혈통계열이 아니고 제사장 아론 계열입니다(1:5). 그는 일종의 드론입니다. 인간 세상에 침투된 주님의 침투조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역사를 붙드는 자들이기에 세례 요한의 노선에 대해 따지고 듭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답변은 자기는 아니다로 일관됩니다. ‘나는 무엇무엇이 아니다에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요. 다른 세상 말이었던 거지요. 요한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지으려 할 때 기이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일시적으로 순간 벙어리가 돼버렸어요. 자신의 아이가 인간의 모든 역사와 모든 언어를 부정(不定)하실 분과 연관된 선지자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해당 시대에 개별적으로 활동했지만 세례 요한은 자기를 부정하실 분과 짝을 이루어 한 시대에 활동하도록 배정되었던 거지요.

 

에베소서 2장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성전이 바로 이 노선을 따른 겁니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주의 뜻, 말씀)이 누구(무엇) 상대로 전쟁하신다?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구성돼 있지요? (언어)+혈육(혈통). 이게 인간 역사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역사를 이어가기 위한 힘을 사력을 다해 모으는데 그것은 정치적 에너지를 모으는 것으로 구현돼요. 구약과 신약 사이 중간기의 모든 내용이 바로 이런 정치적 에너지를 모으는 것으로 그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윗 혈통으로 제사장을 세워 한 이념으로 결집하고 외세와 손을 잡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이 역사는 이어지게 한다는 거예요, 그들이 손잡은 외세에 해당하는 이들이 이스라엘 북쪽 세력인 암몬의 셀류쿠스 왕조이고 또 헤즈볼라에요.

끊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역사로 대체시킴으로써 우리 유대교의 정통성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정당하다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그들의 정당성으로 생겨난 계파가 사두개인, 바리새인, 쿰란 공동체(에세네파), 열심당 등입니다. 이 외에도 많지만 이들 네 계파가 대표적이에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 장로회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라고도 불렀어요. 그런데 바로 이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에 대한 사형을 가결했어요. 산헤드린이 예수님의 를 내게 했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인간들이 자기 역사를 신봉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피 흘림도 없어요. 그러하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이 피가 인류의 역사를 고발할 수 있는 겁니다. 작게는 가정사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의 역사까지 말입니다.

인간들의 역사에서는 의미 있는 선택이 나오질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 쪽의 선택으로 하나님 쪽에서 피해를 보는 방식으로만 제대로 된 의미가 나옵니다. 그 방식으로만 창세 전의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선택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하나님이 공격받는 방식으로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1:5)’입니다. 인간들의 안목으로는 탄식할 만한 슬픔인데도 하나님께는 기쁨이 된답니다. “너희들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 내가 말씀을 주었다. 그러니 어떻게 기쁘지 않니?”

 

나의 죽음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고 나의 썩음도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내가 죽는 것과 내가 썩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죽는 것과 내가 썩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다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들추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죽음이 나를 살리는 매개가 아니라는 말은 나의 일평생의 모든 일이 무의미의 연속이었다는 말입니다. 내 죽음, 즉 내 인생의 최종 마감이 의미 없다면 살아 있는 하루하루도 의미 없는 나날이었어요. 하나님의 선택이 이런 것이라면 이 사실에 흔쾌히 동의하는 것이 창세 전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품은 자에요. 내가 뭘 해도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이런 거지요. 딸 아이가 열심히 그림을 그려서는 엄마에게 가져다 보여줘요. “엄마, 나 그림 잘 그렸지?” “그래 잘 그렸어.” 엄마가 건성으로 대답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말하지 말고 자세하게 봐줘그래서 엄마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어떻게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가 그림을 잘 그렸다는 게 내 뜻이야, 알겠니?”

 

이건 그 창세 전의 기쁨이 우리 속에 이미 합류돼 있기에 그래요. 오해하지 마세요. 주님은 자기 피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지 우리의 행함 때문에 기뻐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의 기쁨에 우리의 행함은 방해물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함을 솎아내셔요.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심어놓은 것을 기어이 끄집어내시고는 스스로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이 기쁨과 동반해서 따라오는 게 있어요. 에베소서 1:7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라고 하십니다. 은혜가 따라와요. 주님은 자신의 그 은혜 됨으로 인해 기뻐하십니다. 그분의 피가 지상의 자기 백성에게 쏟아졌다면 창세 전의 주님의 기쁨도 완료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도 바울도 정말 대단합니다. 바울은 인간을 개만큼도 취급하지 않아요. 일체 인간의 견해를 거부해요. 그저 예수님이 하신 일, 곧 예수님의 피 흘리심만 앞세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남은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피 흘리게 만든 그 죄를 육신으로 있는 동안 알아가는 일입니다. 그냥 있어도 터져 나오는 그 죄를 예수님의 죄 사함의 피와 대조하면서 창세 전의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되새기고 그것을 삶에서 드러내면 됩니다. 애쓰지 않아도 돼요. 그저 살던 대로 살면 그게 다 죄에요. 우리 몸이 자동 시스템이라서 숨만 쉬어도 죄를 생산합니다. 그것이 다 주님의 기쁘신 뜻을 위함입니다. 이미 판결은 끝났으니까요.

이것이 창세 전이 품고 있는 내용이라면 우리는 창세 후에 태어난 육신이기에 이 육은 창세 전의 내용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9절에서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했어요. 이 비밀의 특징은 그 내용이 공개되었다는 점입니다. 비밀은 공격용입니다. 침투용인 거예요.

 

비밀이 이미 공개되었기에 비밀을 이해하는 측과 비밀을 모르는 측이 갈라집니다. 그리고 서로 말이 통하질 않아요. 한쪽에서는 창세 전의 이야기가 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창세 후의 이야기만 나옵니다. 인간에게 버림받았기에 흘려진 그 로 인하여 예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 비밀에의 접근이 금지돼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 비밀을 이해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밀 밖의 인간은 어떻게든 자기 행함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리고 그 행함은 결국 그 행위의 당사자 본인에게로 귀속될 뿐입니다. 자기에게서 벗어날 길은 없어요.

 

 

 

3강 유한과 무한

창세 전이라 함은 우리가 생기기 전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간 입장으로 보면 제일 이해 안 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의사(행함)와 상관없이 이미 예정(결정)해 놓으시고는 우리에게는 그저 그 변경 불가한 사항에 대해 통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통보된 내용이 수정이 안 되는 이유는 그 통보가 내가 해야 할 일을 겨냥해서 주어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하실 일을 겨냥한 것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었던 거지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3:20)” 그러니까 하나님이 상대하는 대상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운명이 우선이고 사도 바울의 운명은 예수 안의 사정에 예속되는 것뿐이에요. 에베소서 1:8에서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비밀이십니다.

 

통보한다는 것은 네가 너에 대해서 손댈 일이 남아 있지 않다라는 겁니다. 이는 우리 인간이 없을 때 두 분 하나님 사이에서 결정된 내용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인간은 자기 운명에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있었던 이유는 가룟 유다의 존재가 선택의 일방성을 부각하는 효과를 주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멸망되기로 작정 된 멸망의 자식(17:12)’입니다. 그는 비밀의 가치를 위해 그 비밀에서 차단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발생과 그 위치가 관련되어 있어요. 가룟 유다의 멸망은 인간의 이해 밖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창세 전의 내용을 무한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가룟 유다의 사례는 무한과 대조되는 유한의 한계를 보여주는 데 적절합니다. 모든 유한은 십자가 사건에서 그 이해력이 멈춥니다. 그 한계 너머는 무한의 영역이에요. ‘유한은 다른 말로 하면 피조물입니다. 가룟 유다 속에 마귀가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6:70)”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13:27)”

 

위의 말씀처럼 주님은 유한의 세계가 이미 악마의 손에 넘어갔음을 가룟 유다의 경우를 실례로 삼아 그것이 어떤 식으로 십자가 사건과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피조 세계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압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유한체이며 그 유한체는 무한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타락한 천사의 손에서 농락 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이 가룟 유다의 경우를 통해서 알려지는 거지요. 멸망할 자들에게도 네가 너에 대해서 손댈 일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라는 의미의 통보가 적용되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에 가입되게 되었던 거예요. ‘너는 멸망되기로 작정 되었다를 통보받는 식으로 그의 운명은 전개되고 마감됩니다. 유한은 무한에 의해 통일되게 되어있어요.

 

에베소서 1:10은 이 통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완료(종결)됨을 보여주는 통일체가 필요하겠지요.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미완료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이미 ‘완료’입니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가 주님의 선택의 완료성을 보여주듯 멸망을 보이기 위해 선택된 가룟 유다 또한 주의 선택의 완료성을 보여줍니다. 이들 두 부류가 합해서 이미 통일입니다. 교회는 유한의 모습으로 드러난 무한체에요. 꼭 예수님의 육신 같습니다.

에베소서 1:22에 보면,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충만의 상태는 유한으로서는 달성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유한은 세상에 있는 모든 변화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무한만이 이걸 감당할 수 있고 무한만이 그 안에 계속 무한한 사태들을 끝없이 채울 수 있는 겁니다. 에베소서에서 말씀하는 교회는 인간이 세울 수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충만인데 뭔가 결핍이 보인다면 그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아닌 거지요. 성경 말씀을 동원해서 참 교회 됨을 애써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교회가 가짜라는 표를 낸 겁니다.

 

우리가 수련회로 모이고 있는 이 장소는 불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호텔입니다. 각 호실에는 불교 포교용 책자가 비치되어 있을 거예요. 그런데 불교의 문제점이 뭡니까? 그것은 멸망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 불교는 이 세상이 고통의 바다라는 점은 간파했어요. 그리고 이 고통을 우리 인간이 감당을 못한다는 것도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고통의 출처를 인간의 마음으로 간주하고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마음을 자기가 없애는 식으로 고통의 문제를 다루려 한다는 점입니다.

 

불교의 이런 식의 사고를 보면 악마가 인간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지 그 향방이 보입니다. 불교는 인간에게 사는 법을 모색하도록 유도해요. 이런 불교식 사고와 기독교가 차이점이 있나요? ‘나만 편하고 나만 좋은 데 가면 됐지라는 점에서 한가지로 악마가 유도하는 지점으로 따라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 말은 불교나 기독교가 한결같이 자신의 힘으로 뭔가 변경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창세 전의 사항이 통보되지 않으니 가만히 있질 못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고통으로부터의 해탈되거나 구원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유한이 아무리 자신의 노선 변경과 개선을 추구해봤자 그 제한된 유한의 범주를 벗어나질 못합니다.

 

악마는 인간들로 자기 인생에 대해서 쉬지 않고 수정과 변경을 가하도록 다그칩니다. 사정이 이러니 인간은 자기 내부로부터 공포심과 불안감이 계속 올라와요. 가만있을 위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알고 있고 들은 적이 있는 성경 말씀을 총동원해도 우리 마음속의 빈자리를 충만케 해주지를 못합니다. 유한은 자꾸만 빈 자리를 만들어 냅니다. 무대에서 무용수가 춤을 출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춤 자체가 아니라 무용수의 동작이 흘리는 궤적입니다. 무용수가 만들어 내는 선을 보는 거예요. 잠시 춤 선이 지나가고 난 그 자리는 공백이 됩니다. 무용은 공간의 예술인 것 같지만 실은 시간의 예술이에요. 음악 같아요. 몸짓으로 표현되는 인간 언어의 일부에요.

 

언어를 동원해서 자연의 규칙과 사회의 법을 만들어 내지만 진정 살아 있는 것은 그 규칙과 규칙 사이, 법과 법 사이에 등장하는 새로운 공백뿐입니다. 삶이 지치고 어수선하고 재미없는 것은 이 무한히 등장하는 공백을 인간의 모든 애씀으로 도무지 채울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나 그만할래라고 하는 순간, 인간은 짐승이 돼요. 정신의 제일 밑바닥에 대기해 있던 충동이 그 순간 주도권을 쥐고 나를 장악하는 거지요.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49:12)” 인간은 본시 짐승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괜히 종교로 위장해 봤자 그 위장된 경건의 색채는 세월이 가면 다 바래버리고 짐승다운 본연의 모습만을 충실히 드러낼 뿐입니다. 유다서 말씀입니다.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1:10)”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마태복음 9:12,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환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거지요. 환자 나오라는 겁니다.

이 공백의 증상은 굉장히 심각해요. 이게 아토포스atopos에요. 아토피, 피부가 이상하게 가려운 것 있지요? 아토피란 뜻은 장소가 없다에요. 포괄적으로 가려운 증세만 있어요. 현상입니다. 정신적인 아토피 현상, 그게 정신병입니다. 교회로 나가봤다가 절에 나가고 다시 교회로 나오고, 탈북했다가 다시 월북하고.... 이게 도대체 무슨 짓들인지.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딱 하납니다. 멸망하지 않으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의 비밀을 ‘USB’에 담았어요. 하나님의 USB’가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에는 종말이 미리 들이닥쳤기 때문이에요. 미리 찾아온 종말을 내부에 담고 살았던 유일한 민족인 거지요.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이해하는 태도는 그냥 끝까지 기다려 보는 겁니다. 갈 데까지 가보는 거지요. 불교나 개혁주의 신학도 이와 같아요. 과학자들도 마찬가지고요. 화성 밟고 그다음은 목성, 그다음은 어디? 천왕성, 명왕성. 어디까지? 안드로메다까지. 그런 거죠. 무얼 해보겠다는 건가요? 그냥요. 종말이 있을지 없을지, 끝은 어떻게 될지 그냥 가보자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의 종말은 시간 차원의 것이 아니에요. 즉 시간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움직이고 있는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실체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모든 시간은 이스라엘의 시작하고 이스라엘에서 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대의 자동차가 나란히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차가 나란히 가고 있으니 목적지가 같은가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차들이 어느 시점에서 가는 길이 달라져요.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의 갈라짐 이와 같아요. 이게 종말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세상의 종말을 이스라엘의 탈출을 통해서 세상에 통보한 사건입니다.

창세 전의 내용을 담은 외장하드(USB)’가 이스라엘 속에 들어옴으로써 이스라엘은 세상 그 어떤 민족과도 다르게 움직이는 나라가 된 거예요. 이스라엘이 가는 방향이 여타의 나라들과 완전히 달라요. 유한한 인간들의 안목으로 보면 이스라엘 역시 자기네들과 다를 게 별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무리 봐도 움직여가는 방향이 번영 쪽이 아니라 멸망 쪽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이끄셔요. 율법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만들어요.

 

창세 전의 약속을 담은 외장하드, 그 약속의 비밀이 실체화되어 이스라엘에 나타난 그것을 종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말은 시간의 끝에 오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내부에 담겨서 와요. 이스라엘을 이루는 자들도 인간입니다. 유한한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유한한 인간 속에다 무한을 담는 방식을 사용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인간인데 창세 전의 상황과 연결된 인간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이방 민족은 남았지만, 이 세상에 십자가라는 구멍을 내버렸습니다.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도 망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자들이었어요. 그랬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내신 모세와 아론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뜻까지 거론하면서 말입니다. 출애굽기 5:19-21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러한 의식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줄곧 바닥에 깔려 있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44:17-18)”

 

무한이 유한에 들어왔기에 이스라엘은 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맙니다. 마치 대통밥(대나무의 마디 사이를 잘라내고 그 안에 잡곡을 채워서 쪄낸 밥)’ 같아요. 이스라엘의 신세가 그렇습니다. 멸망을 초래하는 무한이 유한을 채우니 어디 감당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항상 가르치고 배우고 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28:15-19)” 어느 누가 이 말씀 앞에서 버틸 재간이 있겠습니까?

 

세상 자체가 유한이니 유한은 유한만을 자기 안에 골라 담기 마련이에요. 자기를 선하게 보이게 하는 것, 자기를 좋게 보이게 하는 것만 골라서 자기를 채우는 거지요. 이는 타인을 의식해서 그래요. 타인에게 잘 보여야 하니까요. 그런데 이에 정신병의 한 증상입니다. 타인이 내 안의 공백을 찾아내서 내 뒤에서 나를 험담할까 염려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내가 온전하다는 게 무너지잖아요. 그러니 나는 나를 열심히 관리할 수밖에요. 수시로 강박증세를 보이게 되는 거지요.

 

제가 여기 문장 하나를 제시해 보겠습니다. ‘나에게 사과하지 마세요. 내가 먼저 사과해야 하니까요,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상대방이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은 상태라면 나에게는 상대방을 비난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게 됩니다. 타인을 비난함으로써 나는 내 공백의 이유를 타인의 탓으로 돌릴 수 있고 그 결과 나는 막혔던 숨을 쉴 수 있게 돼요. 하루를 버틸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 겁니다. 그런데 상대가 내게 사과를 하네요. 그러면 나는 나를 재조정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됩니다. 기분이 아주 좋지 않은 거예요. ‘네가 뭔데 나를 버티게 하는 나의 정당성을 깨뜨려. 너는 나보다 못나고 나보다 나쁜 놈이기에 내가 숨도 쉬고 살 의욕도 생기는데 내 사정도 모르고 사과해버리면 졸지에 나는 천사 될 기회를 놓친 게 돼. 이게 얼마 만에 찾아온 기회인데 남의 속도 모르고....’


주체가 주체의 자리를 뺏기면 못 견딥니다. 다시 주체의 자리를 탈환해야 돼요(주체탈주체재주체). 인간이 하는 일이 맨날 이래요. 사람이 자기 내부의 무한을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무한을 자기 대결 상대로 인식하고 태세 전환에 돌입합니다. 복음을 전하게 되면 이런 태도를 드러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개척하고, 내 운명도 내가 다루고,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도 내 의지에 달려있다. 그러니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일 그것까지만 하시라.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내 선택과 내 의지에 달렸다는 거지요.

사도행전 17장에는 사도 바울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는 아덴에서 합류하게 될 일행을 기다리다가 아덴 온 성이 잡다한 조각상들(우상)로 가득한 것을 봅니다. 그것들은 아덴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인데 심지어 어떤 조각상의 제단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AN UNKNOWN GOD)’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들의 종교성을 분통이 여긴 바울이 날마다 저자에서 만나는 이들과 이 부분에 대해 쟁론 하다가 아레오바고로 끌려 나오게 되었고 거기서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17:20)’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사도는 담대하게 아덴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대조시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17:22)”라고 운을 떼면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7:24)”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들이 이해하는 신은 모두 한통속으로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 신들은 인간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신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유일하게 정관사를 붙일 수 있는 (the) 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인간의 섬김으로 보충될 필요가 없는 분이며 도리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유한을 위해 무한이 있는 게 아니라 무한을 드러내기 위해 유한이 존재해요. 물고기를 위해 이라는 환경이 필요한 게 아니라 물이 뭔지를 알리기 위해서 물고기가 필요했던 겁니다. 인간을 위해 신이 있는 게 아니라 숨어 계시는 (the)’ 하나님(45:16)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지고 악마도 창조되었으며 종말도 피조 세계 속에 집어 넣어진 겁니다. 하나님은 비밀을 앞장세워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21을 보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형편이 이러니 하나님은 인간에 게 비밀이라는 요소가 빠진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하나님이 언약의 속성상 아들을 죽이는 하나님과 아버지께 저주받아 죽는 하나님으로 두 분이 분리된다는 것을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간은 본성적으로 망하기를 싫어하고 지옥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니 자원해서 저주(지옥)의 길로 들어선 하나님을 어떻게 인간들이 마냥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은 상상도 되질 않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요. 그러나 지옥은 지옥 보낼 자들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도 꼭 필요했어요. 주님은 지옥을 만든 분 정도가 아니라 만드신 지옥을 친히 다녀가신 분입니다. 지옥에도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벧전 3:19).

예수님께서 다녀가신 이 코스가 비밀이 운행하는 노선입니다. 이 노선은 창세 전에 확정되었고 예수님이 친히 밟으신 노선이기에 무한이 유한한 인간 속에 자신을 담을 수 있는 처소가 마련된 거지요. 그게 무한의 능력이며 주님의 충만이에요. 주님의 비밀의 충만, 그 충만의 노선에 합류시키는 것, 그것이 주님의 예정입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예정한 예수 안’, 다른 말로 하면 무한 안에서 그 무한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서 유한인 우리를 그분의 작업에 편입되게 하시는 것, 그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유한) 구원이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들을 구원하는 것이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안에 넣어서 아들로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부모에게 받은 각자의 이름이 있습니다. 개별적인 자기 이름을 가지는 거지요. 자기를 독립적인 개별자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유일한 한 이름, 아담이라는 이름의 변형에 불과해요. 인간은 개별자가 없어요. 한편 개별자로서 독자적인 자기 이름을 가질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 한 분 예수님의 이름 앞에 인간의 모든 독자성은 무릎 꿇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4:12)”

 

여기서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인간은 정신병자라고 했습니다. 환자란 말이지요. 인간이 정신병자가 되는 이유는 어떻게 해도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무한이라는 영역이 내부에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무한이신 분이 세운 계획에 피조 세계는 이미 말려들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예수 안이 구성될 수 있으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하고 또 지옥을 다녀가셔야 합니다.

 

심판은 지옥 상태에 대한 처결을 말하거든요. 주님은 지옥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친히 지옥을 그 몸으로 겪으시고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지옥을 아시는 분이 인간을 지옥 보내는 근거를 제시하시는 것이지요. 당연히 인간은 지옥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지옥을 거부해도 하나님은 지옥 갈 자들은 지옥 가게 하십니다. 어떻게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저주하게 만들어서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여겨서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해요. 그러나 이런 노력은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반드시 그렇게 되게 만드셔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싫어하도록 주님 쪽에서 일을 벌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따라서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사랑했다(요일 4:10)”가 되는 거지요. 천국 갈 자들은 천국 가게 하십니다. 인간의 사랑을 비껴가면서 그 어긋남의 현장에 진짜 사랑이 등장하는 겁니다. 유한은 무한과 맞먹을 수 없습니다. ‘주님도 저를 사랑하셨지만 저도 주님을 많이 사랑했잖아요.’라는 식으로 나올 수 없어요. 내 쪽에서 주님을 사랑한 적도 주님을 믿은 적도 없다는 사실을 견지한 채 성도는 천국에 들어갑니다.

자기가 제일 바닥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취급받아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로 인정하는 한 여자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 여자는 수로보니게 족속이에요.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7:25-28)”

 

개 주제에 무슨 믿음이 있겠으며 믿음이 있다 한들 그게 어디에 소용되겠습니까? 그건 개 믿음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진짜 믿음으로 가치 전환해 버리십니다. 이 여인이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자기 가치를 격상시켜 줄 타인을 골라잡을 형편에 있질 않아요. 이 여인이 이걸 인정했어요. 자기 딸이 귀신 들린 그 일을 통해서 자기가 망했다는 것을 제대로 발견한 겁니다. 그녀는 귀신의 일과 주님의 활동과의 연관성을 인식했던 거예요. 자기 속에는 자신이 감당 못 할 허망함이 있음을 인정했던 겁니다.

 

이 여자는 이방인입니다. 이 여자가 이방인이라고 하는 이 점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11-18에서 교회(성전)를 설명하면서 이방인을 언급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석하면 이스라엘은 망한 자들이고 이방인은 약속이 없는 자들입니다. 둘 다 하나님이 내놓은 자식인 거지요. 그러므로 양측 다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내놓을 수 있는 고백은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것밖에는 없어요. 이런 원리에 의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둘을 하나(통일) 되게 하시고 예수님은 이들의 영원한 머리가 되시는 거지요.

 

인간 세계에서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 통일입니다. 현대사는 인터넷이 움직인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에요. 인터넷은 집단 이성을 형성해요. 쉽게 말하면 여론을 형성하고 움직인다는 말이에요. 정치도 경제도 모두가 이 집단 이성의 흐름에 의해서 요동칩니다. 민주주의는 여론 싸움판이에요. ‘중간기의 역사에서도 정치와 경제 둘 다 가 힘이 쏠리는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밀려다녔어요. 힘이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를 탐지하느라 촉수를 곤두세웠단 말이지요. B.C. 340년부터 기원후 40년에 이르는 이 중간기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가나안의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경제에 관여했습니다. 국가는 경제 정의 혹은 경제 평등의 실현 주체로서 비례 소득세를 도입했는데 이것은 점차 누진 소득세로 전환되었어요. 20세기로 들어오면 통계학으로 관리되는 시대로 전환돼요. 지금은 이 통계마저 여론에 따라 영향을 받아요. 이 여론을 인터넷이 움직인단 말이지요. 인터넷에 의한 개인주의적인 성향은 타인이 자기의 머리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머리인 거지요. 이 때문에 정신병자들이 만연하게 된 거예요.

 

 

 

4강 무죄와 의

오늘날은 셀프 컨트롤(self control)’시대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 시대란 말이지요. 예전에는 자녀들이 부모가 결혼하라고 하면 결혼했어요. 부모님이 결혼해서 나를 놓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세상에 없잖아요. 부모님이 그랬듯이 자식도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일로 받아들여졌어요. 거기에 토를 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던 말이에요. 그런데 현대에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해서 자기 세계관에 따라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흉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걸 장려해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할 테니 주변(부모라도)에서 감 놔라, 대추 놔라하지 말라는 겁니다.

 

국가가 역사를 펼칠 때는 이 동원된다고 했지요? 역사란 +혈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혈통은 존재’, 내가 있음입니다. 그런데 이 존재는 가만있질 않아요. 이게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존재의 중량을 늘여 나가려고 해요. 이 성질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보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8)”

 

주님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무겁게 자기 인생을 끌고 나가는지를 잘 알고 계세요. 자기 존재를 가볍게 만들 재주가 없기에 인간은 가볍게 하기는커녕 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를 더 견고하고 더 무겁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신다는 말이지요. 이런 경향은 인간이 선악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이 무한에 가깝다는 의식의 작용으로 사람들은 어찌하든지 자기의 선함을 입증코자 하고, 이를 위해서는 법을 도입할 필요가 생기는 거지요. 자기를 긍정해주고 자기의 선함을 보증해 줄 법과 규칙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혹시 신이 계신다면 자기의 선한 노력을 인정해주고 자기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해요. 이는 노골적인 존재 집착이에요. 이 시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사적인 역사를 거대한 국가 차원의 역사가 간섭하고 들어옵니다. ‘국가, 난 모르겠고 민주주의, 그것도 난 모르겠고 나는 내 역사만 챙기겠다라면서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국가 없이는 나의 생존도 위협받기 때문이에요. 인천시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18세가 될 때까지 양육비 명목으로 1억을 주겠다고 했대요. 그런데 자기 관리 시대에 이게 현대인들에게 먹혀들어 갈까요? “돈 준다고 사랑하고 돈 준다고 아이 낳겠냐고요?”라는 반발이 나오기 마련이에요.

 

, 이런 제안을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했다고 합시다. 다수의 반발에 대응하여 정부가 다른 대안을 내놓습니다. “, 10억은 어떻습니까? 아이를 낳으면 10억을 드리겠습니다그래도 약간 반발은 있을 수 있어요. “정부는 어떻게 돈 10억으로 사랑과 출산을 강요하려 드는가?” 10억이 적은 돈이 아니잖아요? 격분하는 해보는 거지요. 국가는 이제 금액을 좀 더 올려봅니다. “, 100억 갑니다. 100억 받고 자식 놓으실 분?” 이렇게 되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가 일제히 손을 들 거에요. 손 안 드는 사람이 바보잖아요.

 

세상이 그야말로 평평하게 재편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평평화flatization’에요. 수평적인 것에는 동일성의 함수관계가 적용될 뿐입니다. 그냥 강도(剛度)’의 차이밖에 없어요. 질적인 문제가 아닌 강도의 문제가 그동안 주로 국가 수준에서 제기된 것이었다면 지금은 개인들이 이 강도(剛度) 경쟁에 뛰어들어 발을 맞추고 있어요. ‘평평화에 자진해서 끼어든 거지요. 쉽게 말하면 매끈한 유리판에 부어진 물이 보이는 현상 같은 겁니다. 대칭(대립)이 오래 지속되지 않아요. ‘국가의 잘못으로 내 인생 망쳤다라고 시위하면 국가는 이 긴장 관계가 오래 지속되길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얼른 그 시위자의 손에 보상금을 쥐여줍니다. 돈을 주면 그 대립은 이내 해소돼요.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어도 돈이 투입되면 해결됩니다. 철천지원수도 동지가 되는 형편이에요.

 

생각하는 것이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이에요. 국가 차원의 관리와 사적인 자기 관리, 이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자기 안에 무한의 세계를 따로 소유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외부와 연결점이 있는 무한을 가무한(假無限)’이라고 한다면 자기 내부에서 끝없이 세분되어 나가는 무한은 진무한(眞無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한이 그 내부에 무한을 품고 있는 형국이에요. 우리 인간의 정신 현상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 정신이 내부의 무한으로 치닫기 시작하면 유한인 인간은 유한으로 멈추어 있는 게 아니라 유한체로서 무한체가 되는 거예요.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궁극의 존재가 되는 거지요. 내가 곧 이 되는 겁니다. 결국 내가 지향해 왔던 것은 궁극의 하나였던 거예요. 이게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했던 바로 그 의도입니다. ‘독자적인 신이 되고자 하는 것, 모든 인간이 바로 이런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실정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이 세상에다 그리스도 중심의 통일체를 발생시켰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 세상에는 통일체가 두 개가 되어 버렸어요. 하나는 자아 중심의 통일체,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 중심의 통일체에요. 우리 주님이 무엇을 상대로 영적 싸움을 벌이시는지 이제 감이 오십니까? 우리 인간 자아에요. 우리 자아의 배후에 악마가 있으니까요. 우리가 뱉은 모든 말과 보인 행동은 우리가 악마와 한통속이라는 증거입니다. 내가 곧 신이라는 절대자 됨을 추구하는 성향에서 나오는 거지요. 주님은 우리 자아의 이런 성향을 겨냥해서 말씀을 내십니다.

 

로마서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시고 우리를 다루십니다. 인간만 극단적으로 나가는 게 아니에요. 주님도 극단적이란 말입니다. 우리 주님만큼 극단적인 분이 없어요. 창조하신 모든 것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셔요.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그리고 인간 개개인도 처절하게 진멸해 버리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18:6)”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함에 있어 사람을 상대로 거침이 없어요. 극단적입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봐요. 갈라디아서 1:10에서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사람 안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에요. 사람도 좋고 그리스도도 좋다는 게 없어요. 인간의 내부는 악마의 지령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공격하게 되어있기에 사도 바울에게서 이런 극단적 발언이 주저 없이 쏟아져나오는 겁니다. 성도의 태도도 이래야 해요. 이런 극단성이 우리 자아로 인해 자제될까 더 주의해야 하는 거지요. 좋은 인상을 풍기겠다는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인품 유지한다고 구원받은 표가 아니에요. 심지어 자기 자신을 봐주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8)”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결단코 주님과 합류가 안 된다는 겁니다. 차라리 자아가 없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그 누구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18:3).

 

골로새서 1:16은 사도 바울의 극단적 태도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입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일개 인간입니다. 그런데 모든 피조 세계가 그분에게로 집중된다고 말하는 거예요. 진화론이 됐든 창조과학회의 창조론이 됐든 철학 혹은 신학이 됐든 그 어떤 이론과 학문, 종교 그리고 예술도 이 사실을 증명해 내지 못합니다. 극단 중의 극단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그 하나님은 단순한 창조주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창조주세요. ‘인간에게 버림받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해야 성경적이에요. 창세기 1:1은 신약의 십자가로써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라는 것은 유대교에서도 말하고 심지어 이 세상의 유신론적 철학자도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아는 그들이 구원받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그들은 천국에서 쫓겨나요. 여호와께서 천지를 창조했음을 철석같이 믿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단 말입니다(8:12).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을 유일한 소망으로 여기는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거지요? 추방된 자로 여겨야지요. 우리도 우리 자신을 천국에서 추방해야 해요.

 

옛적부터 사람들은 왜 무한()’에 대해 거부하지 않을까요? 정답은 공동체에서 추방되지 않기 위해서에요. 사람들은 인근에 사는 자들끼리 서로 맞춰가고 서로 닮아가고 차이를 좁혀감으로써 상대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것을 좁은 범위에서 넓은 범위로 적용해 가면서 존재의 안전망을 강화하며 살아왔어요. 이런 존재 방식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존재의 무한함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각자가 자기의 무한함을 추구하다 보니 같은 신을 믿고 있다는 것으로써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게 되고 더 나아가 유대감, 친밀감 혹은 동지 의식을 느끼게 되는 거지요. 공동체에서 자신의 삶이 강화되는 겁니다.

 

결국, 모두가 한 지점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겁니다. 보이는 자신의 유한함무한성으로 대체 하는 것‘, 이 의도를 따라 등장한 최상위 공동체가 국가공동체에요. 국가가 내세우는 공동체 이념으로 한데 무장하고 인간은 한 역사 만들기라는 의미에 헌신하고 봉사하고 희생했던 거지요. 그래야 공동체에서 자기의 존재 명분이 생기는 거니까요. 이것은 또한 본인이 소속한 공동체를 수호하는 이 자기에게 부여한 사명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참 무한인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찾아오시는 걸까요? 모세의 경우가 그 단적인 예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계약서를 쥐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모세 언약입니다. 이건 참 무한이신 하나님과 인간 모세가 서로 합의해서 도장 찍어 성사된 게 아니에요. 하나님 편의 일방적 계약이기에 약속입니다. 인간들의 사사로운 감정이나 변화하는 정서나 능력에 구애됨이 없어요. 이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언약이 주어지면 언약이 주어지기 이전과 같을 수가 없어요. 언약받은 자의 시간이 찢어지고 그의 공간이 찢어집니다. 하나님이 침투하셨다는 증거에요. 홍해 바다는 가운데서 찢어져 이스라엘을 위하여 길을 내어주었습니다(14:2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나가 아모리 사람과 전쟁 할 때,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을 때까지 그리하였어요(10:12-13). 시공간이 찢어지는 일은 이 시공간 안에 진짜 하늘의 무한을 담으시는 하나님의 일의 일련의 절차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찢어진 시공간을 통과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계시는 새로운 시공간의 설계도와 만나게 하십니다. 이 설계도는 바로 성막의 설계도며 성막은 모세 언약의 핵심입니다.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바로 이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지요(27:51). 휘장의 찢어짐은 인자의 날의 성격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자의 날이 기존의 시공간이라는 커튼 뒤에 숨어있다가 그 커튼을 열어젖히고 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그 시공간이라는 커튼 자체를 찢어버리면서 등장합니다.

 

휘장은 땅에서 제작되지만, 설계도는 위에서 왔습니다. 휘장이 있는 성막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내부로 들어왔다는 말은 이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한을 향한 그들의 인간적인 추구와 실질적인 무한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큰지를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막에서는 제사가 반복되어야 했는데 이 제사가 바로 임마누엘곧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는 방법입니다(1:23). 따라서 임마누엘이 유지가 되려면 제사가 반복되어야 했어요. 이것이 모세에게 주어진 계약(언약)의 내용이에요. 이 언약을 인자(人子)’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하셨고 성령님은 주님의 이 성취를 가지고 성도의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성령이 오신 성도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할 자들로 부름을 받은 거예요(2:13). 마음속 깊은 곳까지 하늘의 무한이 담기게 된 겁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0:16-20)”

 

임마누엘의 상황은 인간 편에서 감당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제사를 통해 끊임없이 죄 사함을 받을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죄 사함은 인간의 마음을 찢어발기고 그 안에 들어있는 사이비 무한을 향한 탐욕을 들추어내서 그 가짜 무한을 예수님 자신의 무한으로 대체하는 거예요. ‘제사는 사람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요. 하나님이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그렇게 되게 하셔요. 이런 제사의 원리(절차,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하나님께는 기존의 시공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죄를 짓는 터전이 되는 그 시공간을 이스라엘로 먼저 체험케 하시고는 그 시공간이 더는 하나님의 일에 장애 요소가 될 수 없게 하겠다는 것을 보이십니다. 이 말은 첫 사람 아담이 살았던 에덴동산은 인간의 범죄를 막기에는 부적절한 장소였다는 의미를 내포해요. 따라서 그 시공간은 하나님과 인간 간의 새로운 관계 측면에서도 적절하지 않아요. 에덴동산에서의 인간은 무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새 창조가 이루어진 시공간은 무죄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다른 상태에요. ‘의 상태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주님의 로 인해 새로운 시공간이 요구되었던 거지요.

 

이건 무죄에서 로 전환된 그 환경이 역으로 죄에서 무죄 상태로 되돌려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닌 거예요. ‘에서 무죄가 아니라 죄에서 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무한을 담은 새로운 시공간, 예수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에요. 죄인이 의인 되는 데 있어 반드시 요구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력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시공간(예수 안)이 만들어져야 하고 그 시공간에 의인으로 살아야 할 죄인들이 들어오게 되는 거지요. ‘가 만들어지는 출발점은 놀랍게도 인간들의 였던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부로 들어오신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언약 성취는 이 시공간의 찢어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스라엘로 경험케 하기 위함이었던 거예요. 이러한 모세 언약의 작동원리가 신약에 와서는 어떤 방식으로 추진력을 갖추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안이라는 완성된 시공간의 적용을 통해서입니다. 성도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편입되면서 발생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이러한 과감한 복음에 대한 설명은 듣는 이들로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근거가 되게 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말에 꼬투리를 잡아 그들의 논리로 공격했어요. “그래, 당신이 그 논조라면, 우리가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많이 지어야겠네(3:8)?”라고 말이지요. 이들의 공격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인간은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으로 반박했습니다. 인간이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6:1-2)기 때문이란 거지요. 그럼에도 인간에게서 죄가 생산되는 이유는 죄를 통해 율법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율법의 자체 작용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7:7-8)”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7:13)”

 

하나님의 일에 인간은 무능해요. 죄를 짓는 것조차도 말이지요. 이미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으니까요. 그런데 율법의 작용이 추진력이 되어 죽은 인간에게서 죄를 만들어 내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소급하여 이미 죽은 자로 들추어지는 거지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7:9)”

 

이렇게 율법의 작용으로 생산된 죄는 새로운 시공간인 예수 안을 구성하는 재료로 쓰입니다. ‘예수 안은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성취하신 공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거지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7:24-8:1)”

 

선한 율법의 선한 의도에 의해서 생산된 죄는 선한 용도로 사용됩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선한 제사였음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자기를 아버지께 드린 이 제사의 혜택이 은혜(선물)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율법의 작용 없이 독자적으로 나는 착하고 바르게 살고 싶어. 나는 복음을 믿을 거야라는 것들은 다 죄가 돼요.

 

인간의 행위는 일단 율법의 지적을 받게 되는데 율법은 그 어떤 인간도 저주받음 없이 율법을 통과할 위인은 없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인간이 출생과 더불어 율법 아래에 있다는 말은 곧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이에요. 육신으로 출생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 하고(4:23-25)”

 

이렇게 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에덴동산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출생했기 때문이에요. 반면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특별한 시공간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혜택은 종말과 더불어 주어진 혜택이었어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매일이 종말이었으니까요. 그들의 특별한 시공간은 하루 단위로 끊겼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은 일용할 양식이었어. 하루치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어요.

 

마실 물도 기존의 시공간에서 제공된 게 아니었고요.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17:6)” 모세의 지팡이가 가리키는 반석에서만 물이 나왔어요. 반석을 신약에서는 예수님이라고 밝혀줍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에베소서 1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1:22-23)” ‘무한이 유한 속에 충만히 담긴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의 시도와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미 확정된 사실입니다. 바로 이 완성된 사실을 가지고 말씀은 우리의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몸이 되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살아계신 존재자이심을 증거 하는 도구가 됩니다.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게 되면 인간이 근원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이 작업이고 이 작업은 예수님의 충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충만은 유한한 인간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 곧 창세 전 무한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세상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나온 인간의 범죄 상황에 저촉됨 없이 유한한 인간을 향하여 그 본질을 펼치게 되어있습니다. 이점을 에베소서 1:17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창세 전에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정보, 비밀이 계시의 영을 통해 우리를 창세 전의 안목으로 이끄신다는 말이에요. 에베소서 1:18을 보면,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합니다. 유한한 인간의 무한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탈락이에요. 내 소망, 내 믿음, 그리고 내 사랑은 율법에 의하면 로 판결 났기 때문이에요. 에덴으로 이어지는 유한의 시공간에 갇혀있는 처지에서는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시공간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거지요. 오직 새로운 시공간이 나를 불러 주시는 것, 그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요. ‘부르심의 소망만 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그 일을 시작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는 추후에 그 노선에 합류될 때 알려지는 거에요.

 

계시의 영이 오셔야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1:19을 보면,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라고 말씀합니다. , 여기서 제가 한가지 질문해보겠습니다. 구약 창세기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더 셀까요? 아니면 신약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더 셀까요? 물론 정답은 그 능력에서는 차이가 없다에요. 하지만 창조의 능력은 성신의 주도로 나오는 것이고 구원의 능력은 성령의 주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가 성신에게서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1:2)” 그리고 관리도 역시 성신에게 맡겼습니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104:30)”

 

하지만 신약 시대에 이루어진 구원은 그 능력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서 나옵니다. 구약의 창조는 없는 데서 있게 하는 능력이지만 신약의 구원은 기존에 있는 것들을 없게 하고 아들의 죽음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는 능력이에요. 아담의 신부는 아담이 깊이 잠든 때에 아담에게서 취해 내어진 것이지만 예수님의 신부는 예수님의 극심한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 취해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죄로 인한 고통으로 가득 찬 이 세상 환경이 구원의 환경이 되는 거예요. 성도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이 고통을 겪으면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구약 창조 때에 발휘되었던 성신의 능력을 능가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는 거지요.

 

 

 

 

5 강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1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이 대목이 에베소서 2:5-6까지 이어집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즉 우리의 허물이 하늘에 앉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허물을 스스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하늘에 앉혀주시는 게 아닙니다. ‘열심히 하면 주께서 좋은 자리 주시겠지가 아닌 겁니다. 이런 식의 기대는 변경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데서 나와요. 그러나 하늘에 앉혔다라는 말은 미래의 어떤 때에 그렇게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거예요. 이미 끝났다는 말입니다. 확정되었고 완료되었어요.

이런 일은 인간으로서는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세요. 이 일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일의 성취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함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따라서 죄와 허물의 내용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그것을 들추어내는 방식도 인간으로서는 모두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죄와 허물의 내용에 관한 사항을 두고 인간과 하나님이 의견 충돌을 하면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돼요. 즉 인간이 스스로 실토하는 자신의 허물과 죄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들추어내는 죄와 허물의 내용과는 다르다는 거지요. 놀랍게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자랑할 만한 것으로 여겼던 우리의 의로운 행실까지도 하나님의 안목에서는 죄와 허물로 간주 되는 거예요.

 

사실 이런 경쟁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꼭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영적 싸움(경쟁)’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조성하신 환경에 의해서만 우리가 자체적으로 파악하는 죄와 허물은 마귀가 넣어준 이해에서 나온 가짜임이 밝혀지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불리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판단이 되면 어찌하든 자기를 좋게 보이려는 행위를 하려 합니다. 당연히 거기에 선악을 아는 지식이 투입돼요. 이 지식의 작동방식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되고 허물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게게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떨어지는 원인이기도 해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저는 제가 행한 이걸 죄로 규정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주님은 그거 아닌데라고 하십니다. 죄와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사이에 틈이 있어요. 이 틈에 있는 그게 바로 하늘에 앉히시니입니다. 예를 들면 이래요. ‘359분이 되면 저에게 알려주세요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358분에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1분의 간격이 생기죠. 이것은 양쪽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과 인간의 안목도 이래요.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연결될 수 없는 틈으로 인해 끊어져 있습니다.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성경 구절을 대할 때 인간은 나름대로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기대는 미래 어느 시점을 향해있어요. 그때가 이 되면 그 말씀을 대하는 자신을 하늘에 앉혀주실 것이라는 그런 유의 막연한 기대에요. 인간이 생각하는 수준이 딱 이 정도에요. 이런 속내를 보여주는 예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3-24)”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는 간격이 벌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과 인간의 불연속성이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견해 차에서 드러납니다. 주님의 눈물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11:33-35)”

 

인간은 수평적 동질성이라는 환경에서 삽니다. ‘새가 아니기에 날지 못하고 물고기가 아니기에 물에서 살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몸이 터져 죽는다. 그게 인간이다라고 하는 건 인간 세상에서는 보편적인 상식이에요. ‘숨을 쉬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광경을 기이하게 바라봤습니다. 사람의 몸이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세상에 두고 홀로 떠나가신다고 생각하니 서운함도 있었고요. 하지만 두 천사가 이 제자들과는 다른 관점의 말을 던집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1:10-11)”

 

이건 제자들이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그 인식이 달라질 것인지에 대한 힌트에요. 즉 수평적 동질성에 매여 사는 데서 수직적 동일성으로 그들의 인식이 개방되고 확장된다는 겁니다. 제자들의 인식은 달라질 필요가 있었어요. 이것이 예수님의 변화된 몸 안에 있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언약 완성의 효과입니다. ‘한 몸안에 있는 통일성으로 인해 모두가 주님과 동일한 관점을 지니게 되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 성도 안에 새롭게 들어온 이해는 인간이 그동안 자기 노력과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동원했던 모든 수완과 종교적인 기교들이 하나님께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자기를 하늘에 앉히기 위해 시도했던 모든 노력은 다 헛된 것들이었어요. ‘하늘에 앉음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죄와 허물이었던 거예요. 그 죄와 허물에 침투하고 그곳을 돌파해서 하나님께서 기어이 성도를 지금 하늘에 앉아 있게끔 하신 거예요.

 

이 과정에서 이 세상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내부에서 영적 싸움이 일어납니다. 거짓 구원을 추구하는 자들이 쫓겨나는 거예요. 인간이 성경을 통해 얻고자 고군분투했던 모든 노력은 효력 없음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체를 제거하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수직적 동질성 측면에서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간직된 상태기 때문이에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3)”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런 조치는 참으로 효율적 조칩니다.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다른 하나의 실재함을 보이는 거니까요.

 

제거에는 제거당해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 근거는 주님 편에서 마련해 두셨습니다. 마태복음 7:23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불법자이기 때문이에요. 이 불법자들을 예수님이 자신에게서 떨어내신다는 겁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건 예수님의 율법 해석과 부합되지 않는 해석을 내놓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해석 외에 일체 다른 해석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데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이 불법자를 색출하고 예수님 자신에게서 떨어내기 위한 작업이었던 거예요. 인간에게는 율법 해석권이 없었단 말입니다. 이건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에 율법 해석권이 없다면 인류 중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 낼 능력이나 자격은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에게 율법을 주셨기에 율법 해석의 특권도 자기들이 부여받은 줄로 착각했어요. 그래서 부지런히 해석했고 신중히 접근했지요.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이런 기회를 허용하신 것은 율법 해석에 접근하는 그들의 심보를 들춰내기 위함이었어요. 곧 그들의 불법을 들추어내고자 하신 거지요. 그렇다면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성취되는 건가요?

 

이런 문장을 하나를 생각해 봅시다. “방에 들어가도 좋습니까?” “안 돼요!” 즉 접근 불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이런 식이에요. ‘구원받고 싶습니다’ ‘안 돼그러니 그저 통보인 거지요. 주님 홀로 일을 다 이루어 놓으시고 마무리되었다는 증표로서 자기 백성 될 사람에게 통보하시는 거지요. 전자 제품 서비스센터 직원이 대기 중인 고객에게 수리 다 됐습니다라고 통보해 주는 것 같아요. ‘넌 이제 하늘에 앉혔어라는 겁니다.

 

주님의 통보는 끝난 일을 소급 적용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해석권도 없고 해석 능력도 없는 내 편에서의 해석은 무효 처리됐으니 기뻐하라는 겁니다. 이 기쁨이 충만하면 성도이고 자신의 해석이 무시된 것에 분노하면 불신자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은 유효한 거예요. ‘인간이 성경대로 충실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이것이 주님 앞에서 승리에요? 아니면 패배에요?’ 여기에 답을 얻기 위해 교재 3페이지 중간을 한번 보겠습니다.

 

[....전쟁을 통해,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게 하고 자신의 승리자 됨을 확신하게 만드는 억지가 유지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배만이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즉 투쟁의 진리는 오직 패배 속에서만 나온다.

 

이처럼 전쟁터는 적의 파괴가 아니라 서로가 상호 패배자로서 자신들은 파괴될 자임을 확인하는 정화의 환경이기도 하다. 군사적 전시 상황이 아니더라도 상호 패배 경험은 노동 시장에서도 발생한다.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가에 대한 투쟁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실은 목표도 없고 무미건조하기조차 한 대자연의 침묵에 대한 인간의 저항행위이다. 이런 말은 분명 억지다. 하지만 말 없는 자연을 상대로 매일 같이 투쟁하고 피로에 절어 귀가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패배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노동자의 노동은 노동자의 자기 정화행위가 된다. 노동은 외적 대상을 변형시키는 일인 동시에 주체 자신을 규율하는 자기 도야 행위이다...]

 

정리하면 이스라엘의 의의는 전쟁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해야 할 민족이었어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위하여 만들어진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이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해도 그 승리를 결코 자신들의 승리로 여겨서는 아니 되었어요. 승리자 되시는 분은 그들에게 전쟁을 붙이시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그들과 동행하신 하나님이심을 자각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전쟁이 아니고서는 이스라엘이 이런 하나님의 안목을 지닐 수가 없었던 거지요. 합당한 자기 인식을 얻을 수 없어요.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쟁에 휘말린 거예요. 구약 때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에만 적용되었던 그 환경이 오늘날에는 모든 국가, 모든 개인에게로 다 확대 적용되었어요. 이런 확산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 이스라엘의 붕괴(멸망) 사건입니다.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집어삼킴으로써 이스라엘이 지닌 언약 기능도 삼킨 바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온 세상이 언약이 쏟아붓는 저주 효력의 대상자들이 된 거예요. 즉 인류가 다 예수님께 패배한 패배자로 규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자기 눈에는 건전한 노동 행위도 그것은 그 인간을 패배자로 만들 뿐입니다. ‘나는 지금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있고 사회 발전에도 이바지하고 있어. 이 노동 활동은 나의 인격을 도야시키는 과정이기도 해라고 혼잣말해도 그것은 자신이 패배자라는 사실을 애써 감추기 위한 자기 안위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전쟁에 말려들어야 했던 이유는 인간의 패배자 됨을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 때문입니다. 어떤 승리에도 인간의 기여분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란 말이에요. 인간은 애초에 패배자였던 겁니다. 패배자 주제에 제아무리 부지런히 성경을 들여다본들 자신이 애초에 지옥 갈 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양한 인간 활동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그 모든 활동과 수고가 결코 인간을 천국(하늘)에 앉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통보용입니다. 인간의 패배를 통보하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성령께서 통보하시는 이 패배 소식을 도리어 기뻐하고 찬양하는 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기적이에요! 실패하기 위해, 패배하기 위해 인생을 신나게 사는 자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들은 자기를 기꺼이 폐기 처분하기 위하여 살아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땅에 있는 자기는 가짜이며 진정한 존재는 이미 하늘에 올라가 있고 그 하늘에 있는 존재와 자기는 통일(연합)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의 상태요 하늘에 앉힌상태입니다. 머리가 이미 하늘에 있다면 몸도 같이 하늘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위의 경우와는 달리 자기 자신이 전부인 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살리기 위해 결사적으로 성경 해석에 매달립니다. 원어 연구에서부터 시작해서 신학계에서 쏟아져나오는 온갖 신앙 서적들을 마구 찾아보고 탐구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이에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사명 받은 자처럼 자기를 구원시키는 데 헌신합니다.

 

사도행전 5장의 예를 봅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5:1-3)”

 

이 부부는 수중의 있는 돈을 자기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그렇지 않나요? 이들은 그저 보통 사람이에요. 이들과 다른 태도로 사는 그것이 오히려 기이한 일이고 기적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런 이들의 태도를 악마적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을 속이는 일, 곧 성령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죄가 된다는 거지요. 돈이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인생 패배자라는 뜻이에요. 세상에서는 당연한 상식이에요. 사람대우 못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 이치를 염두에 두고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셔요. “너는 자발적으로 패배자의 길로 들어서라. 네 발목을 잡고 네 인생의 방향을 승리 쪽으로 향하도록 다그치는 자가 누구인지 너는 아느냐, 그걸 살펴보았느냐? 너는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읽느냐?”

 

이스라엘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난관에 봉착할 때면 자체적으로 자기들의 죄와 허물을 실토하면서 금식하고 반성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세요. 우리 범죄로 인해 패배했던 우리 역사의 뼈아픈 교훈을 우리가 잠시 잊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가 우리 죄에서 돌이키니 하나님은 우리에게로 돌아오셔서 이번 전쟁에서 우리로 승리하게 해주옵소서라고 말이지요.

 

이런 것이 바로 열왕기 상과 하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들의 행태였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이 그들의 패배를 가속하는 죄와 허물이 되는 것을 그들은 상상도 못 했어요. 모든 승리는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승리로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그 승리의 과정에서 비록 이스라엘이 패배하고 다른 이방 민족의 포로로 잡혀는 일이 있을지라도 결과는 주님의 이름의 승리이며 그것은 언약이 원활하게 작용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주의 이름의 승리를 외치면서 그 승리에 은근히 자기를 편승시키려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대적자의 심보에요. 예수님과 변론하려 들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이랬고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치는 현장에 있었던 청년 사울의 태도 역시 이랬어요.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와 허물을 토설하는 것의 의도는 결국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함이며 그런 반성은 자기 승화 용도였던 거지요. 성경과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존재를 절대화하려는 음흉한 시도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잠시나마 진정 하나님의 승리를 깨닫는 순간은, 적들도 패배자지만 자신들로 패배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였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승리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쳐다보는 게 아니라 자연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대자연은 말이 없어요. 그러니 인간들이 대자연을 대상화시키고 분석에 들어가는 거지요. 마치 유대인들이 율법을 분석 대상으로 생각하여 율법을 탐구한 것처럼 오늘날은 사람들이 자연을 살펴서 자연의 일관된 질서와 원칙을 찾아내려 애씁니다. 이런 것은 인간들이 옛적부터 해온 노동의 일종이에요. 에너지를 투자해서 내가 투자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자연에서 수확하려는 거지요. 그러니 옛날의 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반성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인간들은 본인을 상대로 회개하고 반성합니다. ‘, 이 게으른 자식아, 언제쯤에나 성공 반열에 들 거야? 정신 차려! 이 경쟁 사회에서 낙오되면 안 돼!’라면서요.

 

대자연은 말도 없고 나와 경쟁하려 들지도 않지만 나는 나를 상대로 언제나 말을 건네고 나와 경쟁 합니다. 인간은 로 자기 현실을 만들어 내요. 작게는 내게만 속한 현실을, 그리고 크게는 공동체의 현실을 만들어 내고 역사를 구성해 냅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것을 현실로 여기고 이걸 붙드는 거지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 유대인의 신앙은 유대교로 구체화 됩니다. 유대교는 율법 실행을 위해 많은 세칙을 만들었습니다. 세칙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사랑이 지독하다는 말이에요. 율법을 더 잘 준수해보겠다는 거지요. 즉 유대 공동체 구성원들의 열망과 의지가 세칙으로 반영되는 거지요. 자기 행위에서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을만한 증표들을 챙기면서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18:11-12)”

 

이런 자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십자가에 대해 듣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사실은 기적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2:36-37)”

 

유대인들은 이방 민족의 온갖 학대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릴 만큼 기다렸어요. 옛 선지자들의 충고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다시는 조상들과 같은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자기를 관리하고 또 관리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식 태도에 대해 이런 비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 될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58:4-6)”

 

조상들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자 했던 유대인 후손들의 금식에 대한 접근은 이랬어요. 금식하되 선지자가 지적한 내용을 근거로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자는 거지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당신의 제자들이 제대로 금식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던 거지요(9:14, 11:19). 그런데 이런 철두철미한 자기 관리, 바로 그게 성공을 노렸으나 패배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인간의 모순이에요. 이런 시도는 종말의 세상 풍경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루심으로 인해 망해버린 이스라엘은 차라리 복 받은 민족입니다. 이방 민족의 경우는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시지도 않았어요. ‘내어버린신세였던 거지요. 세상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지내다 지옥에 던져진 후에야 실상을 알고 화들짝 놀라게 되니까요.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찾아가지 않으셨던 걸까요? 로마서 10:18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이는 소식이 들렸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를 자처하는 어떤 인물을 유대인들이 죽여버렸다는 소식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다 전해진 소문이에요. 그런데 이 소식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어요. 이게 인간 내부에 굳건하게 자리 잡은 내 자존심을 계속 건드린단 말이지요. 인간들은 자기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신을 원하지 그걸 짓밟는 신은 원치 않아요. ‘자존감에는 자기 동일성이 내포되어 있어요. ‘동일성은 어제든 오늘이든, 혹은 여기 있든 저기 있든 한결같이 나는 나라는 인식하는 경향이에요. 그런데 이 자기 동일성이 육신의 죽음으로 와해 돼요. ‘죄와 허물로 인한 죽음이라는 것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 앞으로 끌려 나와야 한다는 게 인간 입장으로는 영 불편한 거지요.

 

그리고 인간이 죽는 이유가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기 때문이라니 이건 더 불편해요. 말씀을 계속 보면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2-3)”라고 하십니다. 이 진실을 자존감 있는 인간이 받아들이려 하겠습니까?

 

해변에 나가서 보세요. 큰 파도가 밀려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파도입니다만 세부적으로 보면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세한 물방울들의 집합체에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바꾸지 못할 귀한 이지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진노의 자녀라는 거대한 집단의 한 구성원일 뿐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자기 동일성, 혹은 자존감을 바탕으로 깔고 세상과 나를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동질성에 기반을 두고 세상과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을 수 있었던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8:3)”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신과 동일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죽음과 부활을 거쳐 자기 동질성을 구현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실체와 그 영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형편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따라서 하늘에 앉히시니가 이루어지는 것은 기존 인간의 동질성을 따른 절차가 아니라 도중에 예수님의 동질성이 개입된 결과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그러하기에 진노의 자녀로 구성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과 연동(聯動)되어 일어나는 것들이에요. 그 어느 것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모든 말씀을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다 성취하셨기에 이제 성경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게 된 거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복음을 사적인 자존감이나 이익 획득을 위한 의도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애초에 용납될 수 없어요.

 

성도가 앉힌 하늘의 자리는 성도의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이 하늘의 자리를 예수 안으로 말해도 무방합니다. 하늘에 앉히는 과정에서 나의 동질성은 당연히 탈락입니다. 이 말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이것은 주님만이 참으로 살아계신 분이기에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의 동일성에 연합된 곧 십자가 사건의 연동체의 자격으로 세상에 자기를 드러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의 연동체로서 흘러나오는 성도의 죄와 허물은 어떤 것인가에 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2:8-9)”. 이것은 그동안 인간이 얼마나 자기 행함에 기초한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갔고 말씀을 마중하려 했는지를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행함을 포기하지 못하고 하지도 않으려 듭니다. 그것은 공중 권세를 쥔 악마의 품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랑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자랑하려면 자기를 주목해서 살펴야 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주인이어야 합니다. 인간이 자기 동질성을 고집하는 것은 이런 성향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에요.

 

교재 4페이지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TV 화면에서 TV가 올려져 있는 책상을 볼 수 있는데 이 TV 속에도 다시 TV가 올려져 있는 책상이, 그리고 그 책상 위에 다시 TV이처럼 자아를 계속 확대 재생산 있는 것들이 주변에 가득하다. 이것은 곧 언어()를 구사하는 당사자 자아가 있고, 그 언어 안에 담겨 있는 내용으로서의 자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느 것이 진짜 자아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 모두가 다 자아다....]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말을 건네게 되는데 이는 자기가 없으면 살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말고 다른 이를 위해 살 생각은 전혀 없는 거지요. 따라서 무슨 말을 해도 결국은 자기 자랑으로 귀결돼요. 말로 자기를 지키고 말로써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성향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풍성함을 모독하는 겁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2:7)”

 

예수님의 자비를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우리 자신의 행함을 내놓을 것이냐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진정으로 살아 계신 분이냐 아니면 거기에 나를 끼워 넣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둘 다를 내세울수는 없어요. 우리가 살아 있다면 그것은 유일하게 사시는 분인 예수님의 행함이 우리에게 베푼 자비 때문이며 우리는 그 자비의 선물을 받았다는 조건으로만 살아 있는 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 안에서 나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것은 더는 용납될 수 없어요. 우리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는 주님의 자비에 의해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오직 아들 예수님 뿐이신데 나는 나를 내세우며 하나님의 사랑을 요구했으니 내가 곧 하나님의 일의 훼방자요, 폭행자요, 방해자였습니다’.

 

불교에서는, 주변 모든 사물의 의미는 내가 부여한 것이기에 천하 만상이 다 나의 자아다라는 결론을 도출합니다. ‘강물에 비친 세상 모든 달은 밤하늘에 떠 있는 단 하나의 달을 비춘 것이기에 모두가 다 하나의 달이다.’라는 거지요. 그래서 인간은 부처는 죽여도 자기 자신은 죽이질 못하는 것이에요.

 

교재 5페이지에 보면. [.... 자아와 관련된 모든 인과(因果)성이 멈추는 곳, 그곳이 바로 죽음인데 이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밖에서 죽는 죽음이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과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 하신대(20:17)”....]

 

종교계에서는 특정 진리는 없다는 것이 진리다고 주장합니다. 서로가 불순종의 아들들이며 진노의 세계 속에 있기에 같은 물방울로서 상호 동질성을 느끼는 것이지요. 참으로 당연한 결과입니다. 십자가 밖에서 죽는 죽음으로는 하늘에 앉힐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두 종류의 죽음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이 주어지면서 이스라엘은 율법 없이 죽는 죽음이 아닌 율법으로 말미암는 죽음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자들이 됩니다.

 

레위기 10장의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그 사례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서 분향했다가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에 의해 불사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2장에서는 백성들이 모세가 산에서 더디 내려옴을 참지 못하고 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다가 모세의 명을 받은 레위 자손들의 칼에 의해 3,000명가량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25장에서는 백성들이 모압 족속의 제사를 따라 했다가 24,000이 죽임을 당했고 여호수아 7장에서는 아간이 여리고성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을 사적으로 착복했다가 발각되어 그와 그의 온 집안이 하나님의 명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모두 다 특이한 죽음입니다. 율법이 없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죽음이에요.

 

구약의 사례들은 율법이 성취되기 전, 율법으로 말미암는 죽음의 어떠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에 의해서 율법이 온전한 성취를 이룬 오늘날 신약에서의 죽음의 의미는 멀쩡하게 살아 있어도 정작 죽은 자로 규정 받는 죽음이에요. 에베소서 2:1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할 때, 여기 이 죽음이 바로 신약적 의미의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10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밝히고, 율법이 있는 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3:12).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형편은 결코 바뀌지 않아요. 내 힘으로 이 확정된 현실을 바꾸지 못해요.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50, 60년간 복음 실컷 들어도 밤에 잠자리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이런 거예요. ‘그런데 내가 과연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될까? 확실히 그렇다는 보장은 있나? 만약 하늘에 앉히지 못하고 지옥 불구덩이에 던져진다면 그 오랜 시간 들어온 복음은 다 뭐지?’라는 걱정 말입니다. 이 사람은 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는 거예요. 나의 해석과 주님의 해석 사이의 틈에서 나온 증거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들이미시며 나와 싸우시는 하나님의 전쟁 풍경이 돼요. 이런 고민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어요.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다 내놔봤습니다. 자기 목숨도 내놓을 요량이었어요. 그러나 그런 것으로 하늘에 앉히질 못합니다.

 

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은 인간을 배제하고 진행되는 전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자비로 말미암는 전쟁이에요. 인간의 그 어떤 행함이나 자랑거리도 배제돼요. ‘진정 전쟁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 곧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데(1:51) 이 천사들의 이름이 마하나임이에요. ‘하나님의 군대라는 뜻입니다(32:2).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성령으로 통보받아서 아는 거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없기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너는 죽어라가 아니라 너는 마이너스(-)가 되어라.’에요. 즉 죽는 것보다 더 못한 삶을 살라는 거지요. 이걸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그냥 구차한 정도의 삶이 아닌 거예요.

 

이런 말이 예수님 당시 자기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에게 얼마나 모욕적으로 들렸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참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응수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7)” 죄를 사해준다니 이게 도대체 뭔 소리냐 당신이 누구관대 감히 죄 사함을 언급하느냐는 거지요.

 

그러나 이들이 분노에 차 내뱉은 이 발언은 이제 십자가가 반복적으로 적용되는 이들의 입에서는 전혀 다르게 변환되어 나옵니다. ‘주님, 주님은 누구시관데 저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시는 겁니까!’ 이것은 오로지 주님만을 주목했기에 나오는 반응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7:47-48)”

 

인간의 자기 죄에 대한 인식은 선악 체계가 가동된 결과입니다. 인간은 그 선악 체계에 근거해서 회개할 범주를 자체적으로 결정해요. 회개를 통해 자기가 회복되겠다는 거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에 대해 다른 규정을 제시하세요. 즉 죄는 도저히 회복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죄에 대한 해석 차이예요. ‘의 발생입니다. 이 곧 영적 전쟁인데 이 전쟁에서 주님은 이미 승리하셨어요. 예수님의 동질성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는 이 모든 과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셨고 이로써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미래가 다 예수님이 좌정하신 하늘의 자리로 집결되게 된 거예요.

그러하기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모든 사건은 오직 하나의 사건,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부산물들인 겁니다.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고 십자가 사건과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2024년의 일이든, 2025년이 일이든 모든 것이 다 십자가와 관련되어 일어난 일이며 일어날 일인 거지요. 우리는 자체적인 동질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안(십자가 안)에서 우리 주 예수님의 자기 동질성으로 인해 2024년에 우리가 성도였다면 2025년에도 주님의 성도로 살 수 있습니다. 2024년에도 2025년에도 내가 부정됨을 통해서 십자가와 연결된 채로 사는 거예요.

 

중간기의 이스라엘의 오류는 자기들의 역사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대체하려 한 데 있습니다. 역사는 자기 부정을 낳지 못해요. 오히려 자기 긍정에 힘을 실어줄 뿐이지요. 인간의 역사에 대한 의존, 이것이 이 땅에서 메시아를 추방하는 원동력이었어요. 이로써 인간과 하나님의 전쟁은 게임 끝입니다. 이제 인간들이 주님 앞(하늘)에서 쫓겨날 차례입니다. 역사를 붙들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질문과 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다음에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22:22-26)”

 

바리새인들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과 자신들이 역사적, 혈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메시아가 누구의 자손이냐는 질문을 던지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질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후손으로서 조상이 되느냐는 겁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던 이는 세례 요한이었어요.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1:15)”


세례 요한의 말이 수평적인 시간 선상에서 하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그게 아니에요. 그는 지금 수평적 시간을 초월한 수직적인 관계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27,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출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했어요(1:26). 출생과 상관없이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자기보다 앞선 이유는 그분이 위에 계신 분이기 때문이랍니다. 수평적 시간상에서 시간의 전후와 상관없이 그분의 먼저 계심은 변동이 없다는 거지요.

 

이렇게 보면, 에베소서 2:2-6의 내용은 그들이 놓인 환경을 수평적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수직적으로 볼 것이냐를 놓고 벌리는 한판 전쟁이에요. 골로새서 3:2-3에 보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있는 자들을 죽은 자로 봐야 합니까 아니면 산 자로 봐야 하는 겁니까? 지금 심장이 뛰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생명 있는 자로 보겠다는 것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나는 한결같은 나다라고 우기고 싶은 거지요.

 

하나님의 전쟁은 이러한 인간-실은 배후의 악마를 겨냥해서-을 상대하는 전쟁입니다. 인간의 자기 동질성에 대한 공격이에요. 너는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네게는 그 어떤 것도 자랑거리나 가치 있게 여길 것이 없다는 거지요.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해같이 빛난 모습이 되셨습니다(17:2). 이 모습을 보여주고자 예수님이 대동한 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지상의 인간 생명과 하늘의 생명을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는데 놀랍게 대화 내용은 예수님의 별세에 관한 것이었어요(9:31).

 

여타 인간의 죽음은 결코 하늘과 세상을 통일하는 특이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 두 선지자가 증언하는 거예요. 오직 예수님의 죽음만이 이 통합을 이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 통합의 중심축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만이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하늘에 있는 모세와 엘리야 역시 생명은 아니에요.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동질성이 뿜어져 나올 결정적인 주님의 행하심,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수님께 요청하는 거지요.

 

죽음(별세)’으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님을 자기 백성에게 내려보내실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2:8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낱말들을 보세요. ‘은혜’, ‘믿음’, ‘구원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나의 동질성에서 나온 겁니까? 아니면 주님의 동일성의 산물입니까? 어디서 나온 거예요. 주님의 동질성에서 나와야 주님이 앉은 하나님 우편 자리에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앉는 겁니다. 내 동질성 포기하고 주님의 동질성에 합류되는 거예요. 나의 겸손이 아니라 주님의 겸손입니다. 모든 게 주의 것이고 주님으로 말미암았어요.

우리의 동질성은 오해에 오해를 낳아요. 말씀에 대한 오해, 하나님에 대한 오해, 나에 대한 오해 같은 것들이 성령님의 활동으로 인해 날마다 내게서 발췌됩니다. 성령께서 이를 계속해서 통보해 주시니 나는 나 자신을 챙기는 데만 급급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드러나요. 이 같은 죄와 허물은 이스라엘의 허물이기도 했고 모든 인류의 허물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다 똑같아요. 하지만 이런 죄와 허물은 그것을 제대로 아시는 분이 그분에게만 있는 진짜 생명을 드러내기 위한 환경으로서 조성된 것들이에요. 주님께서 사단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환경을 조성하시고 이용하셨단 말입니다. 아담의 후손들은 애초에 죄가 왕 노릇하는 환경에서 모두가 한가지로 살아왔고 하나님께 저항하고 하나님을 공격하는 성향으로 길러져 왔던 거지요.

 

따라서 이런 영적 전쟁은 성도에게 꼭 필요한 환경입니다. 자기 동질성에 무게를 두면서 나만큼은 제발 이 전쟁에서 빼주세요. 나만큼은 내가 제대로 산다는 것을 주께서 통보해 주면 좋겠습니다.’라는 식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눈을 열어주기 전에는 성경을 봐도 그저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가 될 뿐입니다. 평소 나는 내 일에 몰두하는 것이 문제 될 게 없다고 여겨요. 그렇게 여기면서 인간은 서서히, 혹은 갑작스럽게 죽는 거예요.

이런 죽음은 하늘에 앉힐 수 없는 죽음입니다. 육신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기에 예수님의 육신으로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된 몸에서 나온 성령님만이 우리로 새로운 육신을 입게 하십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 5:1-3)”

 

 

 

 

 

 

6강 새로운 환경

인간은 쉴 새 없이 자기 정화에 박차를 가합니다. 사람이 고생하면 그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 인간이 기대하는 그 대가란 게 뭘까요? 그것은 인간 내부에 잠복 된 어떤 것이 구체화 된 모습으로 실현되는 현실인 거지요. 내부의 것이 현실에 합류하는 것을 말해요. 에베소서 2:2-3을 보면 인간 내부의 그 어떤 것욕심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자기 내부의 욕심이 실제로 자기 고생의 성과물로 현실에서 주어지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 욕심에는 특정한 방향성이 있어요. 당연히 그것이 바라는 바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고층에 있는 자들의 부류가 사두개인이며 바리새인이고 서기관과 장로들이에요. 예수님이 바리새인에 대해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마태복음 5:20,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천국을 향한 열의와 대면하시고 하신 말씀이지요. 이 열의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천국을 향한 열의를 우리는 문제 삼아야 합니다. 왜냐? 그걸 바라는 우리가 소경이기 때문이에요. 마태복음 15:14에는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사람을 소경 되게 하는 근원적인 요인이 이미 사람 안에 구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전체를 보는 안목이라는 의미에요. 인간에게는 전체를 보는 안목이 빠져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소경이 아니고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인간 말고 예수님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도대체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던 건가요?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이 하는 평범한 일을 하시면 되었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하신 일은 평범하질 않아요. 예수님이 뭐 어쨌게요? 당시 바리새인들의 입장으로 볼 때, 예수님의 말은 너무도 당돌하고 오만했어요.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거예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하면서 자기는 그 아버지의 일을 한다는 거지요. 그러니 그들 눈에 이런 예수님이 얼마나 오만하고 참람한 자로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이런 반응이 인간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끊어진 상태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바리새인(인간) 입장으로는 여기에 대해 할 말이 많아요.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해오고 있다는 그 자부심으로 하나고 살아오고 있었으니까요. 예수님이 바로 이런 점을 아시기에 유대 땅 예루살렘을 예수님의 첫 사역지로 선택하지 않으셨던 겁니다. 오히려 자긍심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는 땅, 이방의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이지요.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4:12-16)”

 

하나님과 관계가 트여 있고 정상적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유대 예루살렘을 뒤로 밀쳐내시고는 유대인들이 외면하고 무시하는 지역서부터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시작하신 것이지요.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 존재를 어둠의 땅과 일체화시키기 위함입니다. 나도 아버지께 가는 길이 이렇게 막혀있다. 그런 내가 아버지께 최종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너희는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3:32-35)”

 

그런데 보통의 인간 같으면 이런 식으로 일하지 않아요. 그건 그 누구도 이 인간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져 있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과 종말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볼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체에 대한 안목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주장을 문제 삼는 지점이 바로 여깁니다.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끊어져 있다는 것을 예수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는 거지요. 그 당시나 오늘날의 사람들이나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잘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비록 좀 부족하고 좀 못났고 어느 정도는 죄인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로 회복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점을 겨냥하세요.

 

, ‘일체 희망 따위는 품지 말라는 겁니다. 심판은 최후에 가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에 의해서 그분의 말씀으로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인간 입장으로는 참으로 기이하고 거북합니다. 그들은 너무도 생소하고 특이한 경우와 마주하고 있는 거예요. 즉 자신의 한평생이 최후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들을 심판하고 있음을 인정하라는 거잖아요. 예수님은 그들의 삶의 행적 하나하나를 문제 삼지 않겠다는 거잖아요. 다만 그들이 생각하는 최후의 심판을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전개하고 계신 분으로 예수님을 인정하느냐의 여부만 문제 삼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심히 난처합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를 평가하고 자기에게 점수를 매겨온 게 따로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본인들의 자기 점검이 예수님 앞에서 다 무효가 되는 게 뻔하잖아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잘 살펴보면 구원(천국)보다 심판이 먼저라는 의미에요. 구원은 생각지도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세례 요한의 외침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3:2/1:15)”

 

이런 식이라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끈질긴 도모를 훼방하는 일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일이에요. 쉽게 말씀드려서 예수님은 이 땅에 심판하러 오신 거였어요. 인간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여겨지는 모든 일이 다 무의미하고 악하다고 정죄하러 오셨단 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일, 곧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이 어떻게 에베소서의 계시를 초래한 걸까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예수님과 인간의 싸움은 환경 싸움으로 판이 정립됩니다. 기존의 인간이 놓여 있는 환경과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께서 초래하신 새로운 환경이 치열한 전쟁상태에 놓이게 되고 그 싸움을 통해 예수님의 심판하시는 일이 현재 진행 상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심판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행한 일에 따른 결과로서 최종적으로 부여되는 처벌이 아닌 게 됐어요. 성령께서 조성하신 새로운 환경에 놓여 있느냐의 여부가 심판의 유일한 근거가 된 거지요. 에베소서는 바로 이 새로운 환경에 대해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4:7-10,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환경을 수평적 시간 선상에서 생각하면 아니 됩니다. 이건 수직적으로 조성된 새로운 환경이에요. ‘올라갔다가 성립되고 또한 내려오셨다가 성립돼요. 이것은 순전히 예수님만이 홀로 성취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래를 다녀가신 그 경로에 의해서 마련된 환경이란 말이에요. 문제는 이런 수직적환경이 어떻게 그 자체로서 심판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로써 하늘과 땅이 막혔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셨습니다. 이 막힌 상태를 예수님 홀로 십자가로 뚫어내심으로써 예수님이 다녀가신 그 경로가 새로운 환경의 골조가 되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다녀가신 이 경로를 이해하는 일의 출발점은 모든 길은 막혔다라는 점을 인정하는 겁니다. 이것을 전제로 할 때만 비로소 예수님의 경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령께서 성도에게 하시는 일도 이 막힘을 철저하게 경험케 하고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 손을 놓게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환경은 막혔다라는 내용을 채우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실제적인 예가 에베소서 2:13-16에 나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여러분이 어느 건물에 들어섰는데 그 안이 온통 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이 막힘을 뚫어내셨다는 사실이 의미가 있으려면 예수님의 피가 있는 그곳에는 그 막힘을 유발한 요인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설명하는 사례로 짝지어진 자들이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입니다. 이 둘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어요. 이방인에게는 언약이 없고 유대인은 언약이 있어요. 그러나 언약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 자체로써 막힘이 해소되는 게 아니에요. 이점은 예수님의 사역과 일관성이 있게 소통됩니다.

 

언약이 있어도 심판받고 언약이 없어도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인간 구출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구출은 언약의 구출인 거예요. 하나님이 부여하신 언약 그 자체를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되는 언약으로 하나님이 성취하실 것이냐에 있어요. 막힌 세상에서 언약만큼은 그 자체적으로 하나님과 소통이 되어야 하니까요.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설명은 이러합니다. 에베소서 2:15입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율법도 언약입니다. 바울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철저하게 차단된 이유를 율법을 들어 설명합니다. 인간의 육신은 율법의 원수 된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율법을 싫어하고 율법을 거부하는 속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인간과 율법, 그 각각이 품은 본질(성향)이 그런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게 하는 거지요.

 

율법의 핵심은 이러합니다. 신명기 6:5에 나오는 말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혹은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리고 예수님 말씀에서도 모든 율법의 핵심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22:35-40)”

 

바로 이와 같은 율법의 핵심이 인간을 원수로 취급해서 심판을 감행합니다. 이것은 원수 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당연한 조치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막힘을 자신의 몸()으로 뚫어내셨어요. 율법에서 명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도 완전하게 성취하신 거예요. 그러니 다른 이의 피는 소용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이 원수 관계를 청산하는 유일한 피가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의 취지를 높이기 위하여 이 피 앞으로 호출당한 이들이 바로 새로운 환경의 수혜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차이가 없어요. 자체적인 능력과 재주로는 이 막힘을 뚫어낼 수 없음을 자백하고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니 이 성전의 그 어느 구석에도 피가 가득하고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와 오고 가는 모든 말의 중심 내용도 바로 이 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가득 차 있는 환경, 이것이 새 환경인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19-22)”

 

여기서 에베소서 4:8을 다시 봅시다. “그가 위에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라고 되어있어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대적인데 승리하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서 포로로 잡은 자들이 있어요. 그 포로 잡힌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원수로 있던 그들의 막힘이 이제는 해소되었다는 증거로서 선물이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그 선물의 내용이 뭡니까? 그것은 자기는 막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재차 확인시켜줄 사건의 발생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선물을 받은 자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 그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선물이 아닌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이 선물이 이와 같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이점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죽기 전까지는 왜 자기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실 수 없었는지가 밝혀져야 합니다. 잠시 에스겔 37:11-13을 보겠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여기서는 막혀있는 현실을 마른 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무덤 속에 갇힌 형국입니다. 율법으로는 인간은 하나님께 원수가 되고, 그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적 조치는 죽음입니다.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 곧 마른 뼈들의 골짜기로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인자)를 불러 그 앞에 세우십니다. 그리고는 그와 말씀하세요. 이는 하나님께서 장차 하실 일에 대해서 알려주시기 위함이에요. 그 자리에는 하나님과 인자로 호칭 되는 에스겔 선지자 외에는 없습니다.

 

대화의 핵심은 이 뼈들이 살겠느냐는 겁니다. 언약 백성의 연속성, 곧 언약의 연속성에 주목시키기 위한 질문이에요. 언약의 연속성은 변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백성은 범죄 해도 언약은 약속대로 성취를 향해 달려 나가야 했기에 대화의 통로는 열려 있었던 거지요.

 

하나님은 왜 이미 죽은 뼈들을 굳이 살리려 하실까요? 그것은 율법이 원수(범죄한 인간)를 발췌해 내고 그 원수를 심판하는 기능을 완수하는 것만으로는 율법의 기능을 온전히 수행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20-21에서 사도는 율법의 또 다른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여기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의 상태는 예수님 안에서 막힘이 해소된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죽으셨기에 그 율법이 성취를 보게 된 이상 하늘과 땅 사이의 막힘은 해소되는 거지요. ‘철저한 막힘만이 철저한 뚫림으로 성립돼요. 따라서 율법에 근거해서 죽은 자만이 뚫림의 사실이 알려집니다.

 

따라서 사로잡힌 자에게만 주어지는 주님의 선물인 거지요. 이렇게 보면 막힘 그 자체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율법을 따라 죽은 자에게만 부활의 능력이 온전하게 발휘되니까요. 이 부활의 능력은 다른 이가 줄 수가 없어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8:11)” 죽으신 분만이 부활의 능력을 주십니다. 따라서 이 신비로움이 유지되려면 성도는 자신이 율법으로 이미 죽은 자임을 자각해야 해요.

 

그런데 그 죽으신 분의 현재 위치가 지상이 아닌 거예요. ‘위에 올라 가실 때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입니까? 시편 68:17-18에 보면,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 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라고 되어있습니다. ‘높은 곳(시내산)’이라는 위치는 율법의 출처가 인간들이 사는 이 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님께서 선물을 인간들로부터 받아내는 것으로 되어있어요. 이는 주님께서 굳이 땅 아랫 곳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4:9)”입니다. 구약 때는 하나님이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과만 함께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해 다른 이방 민족을 상대하시면 되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에게서 배척 받으셨고 이스라엘과 결별하셨습니다. 유대 백성에 의해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게 되시는데 기존의 환경은 인간끼리만의 환경이라서 굳이 음부의 세계까지 밝혀질 필요는 없었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 환경에는 그 배후세력, 곧 마귀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냈습니다. ‘땅 아래’, 곧 음부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을 아우르게 된 거지요. 예수님이 다녀가신 경로가 지상을 사이에 두고 위와 아래두 개 세계의 실존을 밝혀내게 되었다는 말이에요.

 

로마서 10:6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음부를 죽은 자들의 세계로 알려줍니다. 이 죽은 자들의 세계 역시 권세를 지니고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바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

 

음부의 권세, 죽음의 권세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될 때만 그 실정이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게 어두움의 권세입니다. 누가복음 16:23에서는 낙원의 반대편 있는 영역이라는 뜻에서 이를 음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활동 범주가 지상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지상을 사이에 두고 아래쪽과 위쪽 모두를 장악하시겠다는 의도로 움직이셨다는 것을 말해요. 예수님의 활동은 ’, ‘지상’, 그리고 아래로 수직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거주지, 약속의 땅중심의 수평화된 활동 영역을 수직적으로 전환했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 어두움의 권세, 즉 음부의 권세에서 탈출에 성공하셨기에 음부의 세계를 내려다보는 위의 세계에서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심을 나타내 줍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2:27)”

 

이것은 오로지 예수님 혼자만의 업적이에요. 그러니 모든 인간의 육적 활동은 주님이 다녀가신 그 음부의 위세를 당해내지 못했다는 게 폭로된 거지요. 예수님이 선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사로잡힌 자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이 되시는 이유가 밝혀진 겁니다. 이는 예수님이 음부를 다녀가셨다는 바로 그 사실을 예수님이 주시는 그 선물을 통해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능력은 단지 지상에 있는 자들에게만 미치는 효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음부에까지 내려가서 악마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빼내어 오시는 능력이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시작한 곳이 빛의 세계가 아니라 어두움의 세계, 곧 갈릴리였습니다. 이는 소위 빛의 자녀라고 자부하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성격을 지닙니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어두움의 지역이든 빛의 지역이든 어느 곳이 됐든 모두가 다 예수님이 세우신 그 세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막혀있는 거예요. 그러하기에 이제 음부의 세계는 단순히 죽음의 세계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자체를 의미하게 된 거지요. 왜냐하면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바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5:8)”

 

이제 음부란 단순한 죽음의 세계가 아니라 성령이 없는 세계, 성령이 주어지지 않는 세계이며 어두움의 권세에 묶여 있는 세계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그 세계에는 아래도 없고 위도 없는 그저 수평적인 시간(활동)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계에서 이해하는 죽음과 부활은 살다가 죽는 것이 죽음이고 죽어서 어쩌면 가게 되는 곳이 천국이라는 그 정도입니다. 땅에 있는 동안 미리 부활의 영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환경이란 성령 안에서 지어진 성전 그 자체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2)”

 

구약 다윗 시대 때는 찬양대 및 문지기와 같은 성전을 위해 봉사하는 기능들이 있었습니다(대상 25~26). 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기능은 언약궤와 관련된 제사장 기능입니다. 언약궤를 안치하기 위해 성막도 있어야 했고 성전도 있어야 했습니다. 언약궤가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왕상 8:6). 그런데 에베소서에 나오는 성전은 구약의 성전과는 달리 성전이 모퉁이 돌로부터 확장되는 구조입니다. 이 돌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돌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0-22)”

 

모퉁이 돌은 변함이 없고 그 성격이 고정적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118:22-23에서는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게 될 이 돌의 전말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즉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통이 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막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그 확정된 사실을 성전의 고정성으로 굳히기 위해서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벌인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내버린 돌로 모퉁이 돌을 삼은 성전이 있다면 반면에 사람들이 요긴하게 여겨서 취한 돌로 모퉁이 돌 삼은 성전도 있습니다. 성전이 두 종류란 말이에요. 즉 새 환경, 새 성전, 새 이스라엘에는 모두 모든 사람에게서 핍박을 받았다는 요소가 기초석으로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핍박과 버림받았음이 새로운 환경의 핵심 요소란 말이에요. 시편 118 : 24에 보면 더 기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가짜와 진짜가 구별되고 가려지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한 날을 따로 마련해 두셨어요. 그리고 건축자의 버린 돌로 세워진 성전이 완공되는 날에 그 정한 날의 실상이 다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2:22에서는 이 날을 예수님의 부활로 마련된 새 환경으로 소개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이 날이 바로 종말의 날이에요. 대표적인 종말 현상은 부활의 영을 받은 자들의 등장입니다. 이들은 오로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사도행전 2:17-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 종말 현상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확실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에베소서 3:9에 보시면 이런 말씀 나와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려 하심이라.” 교재 6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주님)의 상처가 나보다 먼저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첼시 고양이의 미소는 고양이 자체보다 미소가 먼저 등장했음을 보이기 위해 고양이가 사라져도 오랫동안 현장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예정된 자신의 상처를 구현하기 위해, 곧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세상에 출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존재성은 두 층으로 설명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성과의 차이에요. 인간에게는 아래가 없습니다. 그냥 수평적인 시간 선상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날 뿐입니다. 층이 하나밖에 없어요. 단일 층에서 살다가 단일 층에서 소실되는 거지요. 이 땅은 애초에 인간을 소멸시키는 땅이었던 겁니다. 이점을 예수님이 몸소 증거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과도 다른 점은 그분의 몸에 창세 전의 비밀을 담고 있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까지 비밀의 경륜위와 아래로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율법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과 언약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서 일을 해오셨던 거예요.

 

단일 층으로 지내던 이스라엘에 이중 구조가 찾아와서 역사에 개입해 들어옵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다윗의 등불로 제시됩니다. 다윗 시대를 뒤로 하고 아무리 역사가 앞으로 전진해가더라도 다윗의 등불은 계속 이스라엘과 동행하며 역사의 발목을 붙잡는 거지요.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대하 21:7/왕상 11:36, 15:4/왕하 8:19)”

 

이 원리가 바로 (주님)의 상처가 나보다 먼저 존재한다의 원리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존재가 먼저 있고 그 존재가 있기에 상처도 생기는 법이잖아요. 하지만 이스라엘에 주어진 언약은 이스라엘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창세 전 계획이 먼저 있었고 그 계획의 압력에 의해 이스라엘은 망해가야 했고 우리도 창세 전 계획대로 이 땅에서 망해가야 합니다. 나의 존재가 소실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밭엘 나가봤는데 어떤 쪽의 싹은 파릇파릇한데 어떤 쪽은 말라 죽어가고 있었어요. 왜 그런지 이유를 보니 악의를 품은 이웃이 밭에다 염산을 뿌린 거였어요. 염산 뿌린 밭이 시들시들 죽어가듯 거룩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이용해서 하나님(천국)께 접근하려 들었던 이스라엘은 그렇게 서서히 망해가는 거지요. 망해가면서도 자기 역사의 정통성을 놓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언약으로 계속 들추어내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상처를 우리 일상의 삶에 계속해서 뿌리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대로 되게 하기 위함이에요. 에베소서 3:11에 보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고 되어있지요. ‘예정하신 뜻대로라는 것은 우리 뜻은 늘 빠진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 안에서만 예정되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예수님)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당한 거지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선택 원리가 우리 성도의 삶에 그대로 적용돼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5:21)”

 

십자가가 담고 있는 취지는 예수님의 상처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 의해 선택된 것처럼 예수님의 이 상처로 인하여 우리 성도는 그 상처가 우리 안에서 유효하게 작용한다는 조건과 더불어 예수 안에서 선택된 겁니다. 그래서 선택의 최종 목표는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이라는 새 환경의 조성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수 안 중심이라는 선택 취지를 살리기 위해 주님은 쉴 새 없이 우리의 선택()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7강 사랑을 입은 자


환경교체를 위한 전쟁, 그 전쟁을 에베소서에서는 사랑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보잖아요. 나의 속성 중의 하나로 봐요. 그런데 성경은 인간 자체를 부정하기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사랑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환경에 적합지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를 분석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는 그 행위가 자기를 옹호하는 식의 분석 행위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타인과 관계할 때 내심 종종 이런 식이에요. ‘이런 행동은 제 기분이 상하니 좀 조심하셨으면 합니다라든지 그런 태도라면 제 맘에 들어요. 계속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어요라는 거지요. 추가로 여기서 더 확실하게 지적할 점은 타인의 행동과 태도를 감지하는 내 판단(기분)은 무조건 옳다고 여긴다는 거예요.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나쁜 거지 내가 기분 상해하는 것은 나쁜 짓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뭔가 많이 기괴하지 않나요? 외부 환경이 내 기분에 맞춰주길 기대하는 것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한 태도에요.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분석해 낼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최종적 가치를 부여하고 선택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꺼이 용납합니다. 외부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비밀을 캐내는 일에는 정신없이 달려들어 분석에 들어가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일에는 막무가내로 방어적이에요. 쉽게 말해서 나는 무조건 옳아. 내 기분이 그러니까가 되는 거지요. 이런 인간에 대해 하나님은 우리가 괴물이라는 것을 통보해 주십니다. 편파적으로 자기를 두둔하고 자기를 옳게 여기면서 외부(타인)와 상대하는 것, 그게 바로 괴물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타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본인이 상상으로 만들어 내고 본인이 타인이라고 지칭한 그런 자들만 일시적으로 존재할 뿐이에요.

 

이것은 인간이 자기 분석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해요. 이 세상에 본인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타인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문제 삼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은 자기 안에 자기를 숨기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었어요. 자기를 숨기면서 자기를 절대화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변에 벌어진 그 어떤 상황도 그것은 자기 절대화를 공고히 하는 데 활용되는 수단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첫 사람 아담의 상태로는 결코 돌아가질 못해요.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누구의 말도 듣질 않습니다. ‘자기 놀이에 푹 빠져 있어요. 늘 자기에게서 나간 자의식을 다시 자기에게로 끌어당겨서는 씹고 삼키는 일을 반복해요.

 

의식을 조작하고 자기가 조작한 의식과 놀이하면서 살아가는 게 인간입니다. 이런 사정을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도 잘 아셔요. 따라서 주님은 인간 내면의 그 자의식, 그게 바로 죄인의 모습이라고 들추어낼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기 분석을 새로운 어떤 타인으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 타인은 진정으로 인간()를 지적할 수 있는 타인입니다. 그분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상처받은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우리의 자의식, 나는 무조건 옳아요에 의해 피해당하는 분으로 이 세상을 찾아오신 거지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하나의 개체로 묶어버립니다. 인간을 본래의 자리, 곧 흙의 자리로 돌리시는 거지요. 인간은 모두가 흙이요 죽기로 예정된 자라는 점에서 예외 없어요. 동질성을 띤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인간의 개별성을 하나님이 인정하질 않는 거지요. 인간의 독자적 의식은 범죄 후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무효로 만드시는 거예요.

 

이 일이 완료되면 이제 로마서 8:29이 가동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즉 하나님이 보내신 맏아들에게 종속된 새로운 지위와 위치를 배정해 주시는 거지요. 하늘 아버지로부터 유일한 상속자로 인정받으신 예수님의 형제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더는 자기의식에 매몰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 작업에는 필수적인 후속 절차가 따라옵니다. 그것은 율법에 따라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드는 거예요. 이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례를 단번에 먼저 받으셨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2:11-12)”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물세례와 불세례(심판 세례), 그리고 부활의 성령세례를 한꺼번에 받아요. 이 일은 십자가 사건의 반복성으로 말미암은 거예요.

 

십자가 사건은 ‘31로 인간의 역사 안에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27:38)” 이 세 사람은 누가 봐도 한날한시에 죽었어요. 인간의 진짜 자기 분석은 오로지 주님과 함께 죽는 특수한 죽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이들 셋 중 부활한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어요(고전 15:20). 이로써 인간들이 고통 가운데서 치열하게 살아야 했던 이유가 바로 죽을 자들에게 퍼부어진 저주였음이 밝히 드러난 거예요.

 

인간이 받은 이 저주를 하나님이 직접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인간에게 쏟아진 저주를 자기 몸으로 친히 겪으셨어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한 분석은 예수님이 받으신 그 고난을 통해 제대로 수행되는 거예요. 이처럼 사랑은 인간의 자기 사랑을 문제 삼으면서 그것이 바로 죄와 허물의 실체인 것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주님 편의 일로 수행됩니다. 고발과 폭로의 침투, 이것이 사랑이에요. 이건 기존 인간의 환경과 충돌하는 새로운 환경입니다.


사랑 자체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되어 버리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그건 사랑의 행위가 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거기는 사랑이 나오는 장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을 표현할 때는 사랑하라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는 이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3:17)” 계속해서 3:18-19절에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하는 거예요. 무엇을 알라고요? 사랑을요! ‘새로운 환경에 대해 알아가라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환경 안에서 내 사랑은 지워집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다거나 혹은 미워했다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법은 개별적인 너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절대적 타인과 우리가 원수 관계였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워하게 돼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5:10)”

 

즉 지독한 자기 사랑으로 똘똘 뭉친 우리는 새롭게 들이닥친 환경으로 인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입장으로 통일되는 거지요. 예를 들면 졸업 후 10년 만에 모인 동창회 모임에서 A라는 동창생이 다른 모두의 원수로 지목당해 집중적인 공격을 당한다고 상상해보세요. A를 둘러싼 모두가 일제히 하나 되어 A를 원수 취급하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환경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이런 자였다는 거지요. 따라서 이 환경 속에서는 우리가 우리를 지독히 미워해야 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12:25)”

 

그런데 사랑이라는 새 환경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자책과 정죄는 도 닦는 것에 불과합니다. 소용없어요. 우리로 인해 해를 당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미워해야 해요. 이 일을 위해 성령님은 수시로 우리에게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십니다. 계속해서 십자가를 들이대시는 거지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3:1)”

 

사도는 에베소서 4:15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고 했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라는 겁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4:13)” 중력이 없는 우주선 내부에서 우주인들이 체감하는 것은 무중력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와 그 폭이에요. 무중력의 어떠함을 무중력 속에서 유영하면서 무중력의 극한까지 체감하는 거지요.

이제 저번 시간에 제시했던 문장 하나를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들어가도 좋습니까?” 이에 대해 사랑은 다음과 같은 답을 줍니다. “들어와!” 드디어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는 거예요. ‘사랑 안에 있으니까요. 이 경우가 요한계시록 3:20에서는 이렇게 표현되고 있어요.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그리고 이어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21)”가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서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와 연결돼요.

 

이 구절 외에도 에베소서 5:1을 보면 사랑을 입은 자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랑이 덮쳤다는 거예요. 에베소서 5:2에도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그리고 5:28에도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이 나와요. ‘사랑이란 말씀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우리에게 들이닥친 새로운 사랑이라는 환경 안에서 그 사랑을 즐겁게 만끽하는 겁니다. 우리가 행하는 게 아닌 거예요.

, 이 사랑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형성된 그 관계가 주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그 결과로서 우리 안으로 들어온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데는 애초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사랑이란 게 전혀 없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에게는 그 어떠한 사랑도 없음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율법 안에다 사랑을 집어넣으신 거예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5)” 즉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받는다는 거지요.

 

사랑은 율법의 성취에서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율법을 하나로 압축에서 사랑 하나만 뽑아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율법은 본래 창세 전에 있었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에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3:8-9)”

 

따라서 율법이 의미하는 이란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형성된 그 새 환경 안에서 살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새 환경 안에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님을 유념해야 합니다. 나는 내 맘대로 산다고 생각해도 그것 또한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그렇게 사는 겁니다. 이 말의 뜻은 내가 한 모든 일이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한 모든 것을 사랑으로 귀결되게 하시는 주님의 권세 안에 내가 놓여 있다라는 뜻이에요. ‘무중력 상태같은 사랑 속에서 우리는 늘 기도하면서 묻게 되지요. “주님, 이것까지도 사랑입니까?” “그것까지도 사랑이다.” “왜요?” “네가 내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또 우리는 묻습니다. “주님, 제가 죽는 것도 사랑입니까? “그것도 사랑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마음껏 죽어!”

그러니까 우리를 죽음으로 위협하고 망하게 하겠다고 위협하던 마귀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는 거예요. 악마는 이 사랑에 대해서마저도 율법을 수단으로 우리를 협박합니다. ‘너 사랑하라는 계명 지켰어? 사랑도 계명인 줄 잘 알지? 그 계명을 못 지키면 넌 지옥 가는 거야라는 식이지요. 악마는 이런 식으로 사랑이 환경이라는 사실을 생각 못 하게 만들어요. 이미 들어와 있음을 인정 못 하게 합니다. 끝까지 나의 운명은 내 결정에 달렸다고 나를 부추기는 거지요. 악마가 인간을 집요하게 협박하는 이유는 악마는 이 사랑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악마는 이미 지옥의 장()에 놓여 있기에 사랑 가운데 있는 성도를 시기하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누가 지옥 가는지를 아는 것은 참 간단해요. 새 환경은 새 환경에 맞는 냄새를 피우게 되어있다는 것이 사도의 설명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오(고후 2:14-16)”

 

사람은 무슨 행위를 하고 나면 반드시 자기가 의식되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의 자기 서술은 나는 밥을 먹었다가 됩니다. 사실은 내가 밥을 먹은 게 아니라 배가 고프다는 그 상태(환경)가 나로 밥을 찾게 만든 건데도 말이지요. 밥 먹는 행위 하나를 놓고도 이런 생각을 해요. 허겁지겁 먹지는 않았는지, 쩝쩝 소리는 내지 않았는지, 밥알을 흘리지는 않았는지를 반추해 보는 거지요. 왜 그럽니까? 내 가치, 내 자존심, 나의 존엄 따위를 생각해서지요. 이게 악마의 표적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주님의 사랑으로 먹었고 주님의 사랑으로 밥알도 흘린 거예요. 그냥 그렇게 말하면 돼요. 이처럼 성도는 모든 행위가 사랑으로 귀결되는 그런 환경에 놓여 있어요.

 

악마는 성도가 사랑 안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상실하고 도로 자기 안으로 돌아오는 순간을 노립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떻고, 복음이 어떻고 해놓고는 얼마 못 가서 내가 복음과 사랑에 대해 제대로 설명했을까를 염려하는 그런 순간이 오기를 지켜보고 있어요. 우리는 컴퓨터에 대해 라고 말하지 않아요. 기계니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여 기계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죽었어요. 그 기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그 사랑의 관계 속에 넣어주시는 거지요. 그러니 성도는 기계인 동시에 아들인 거예요.

 

율법 아래서 종(기계)으로 있던 자가 하나님의 아들(양자)이 되는 겁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4:6-7)”

 

성도가 아들인 이유는 성령을 통해서 아들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1:15)은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라는 환경 조성을 위해 전쟁을 치르신 전사(戰士)이셨습니다. 성도가 바로 예수님의 이 기능을 그대로 인수해요. ‘싸우는 기계로서의 아들인 겁니다. 매일 자신과 싸우면서 주님의 전쟁에 나가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아들이어도 기계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죄의 종으로 있을 때 주인 행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연속성을 주장하지만, 성도 안에는 불연속성이 내재해있어요. 성도에게서 불연속성을 빼내 버리면 지옥 가는 종교인과 다름없어요. 성경을 보면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 나는 죄인 맞아. 내 힘으로는 죄를 없앨 수 없어. 예수님께 내 죄를 고백하고 그분께 죄 사함을 받아야지. 예수님 밖에는 없어라고 하다가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죄 사함을 받은 후의 나의 존재 가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하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신학이 회복신학입니다.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하나님에게도 굴복하기 싫은 겁니다. 차라리 악마의 가르침 대로 나는 나다. 나는 절대자 맞아가 자기 본성에 맞는 거예요. 잠시 주님 앞에 죽은 척했던 겁니다. 그리고 용서받았다고 치고, 새사람 되었다 치고, 본래 노렸던 것, 의미 있는 나를 재구성하는 공작에 나서는 거지요. ‘그래, 이거지. 이거야!’라며 혼자 신나 합니다.

뭐가 날아가 버린 거죠? 불연속성이에요. 겸손한 척했는데, 단절된 척을 했는데, 이게 안 끊어지고 남아서 자아의 영원성을 노린 겁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 힌두교에서부터 불교, 이슬람교, 천주교, 기독교, 세계 각지의 토속 신앙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이와 같은 동일한 논리 구조 위에 세워져 있는 거죠. 여기에다 오늘날의 신생 종교인 자연 과학까지 포함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스님, 그다음은 뭡니까?” “욕심을 버리면 우리는 해탈합니다.” “바로 그거지. 바로 그거야. 그게 내가 원했던 거라고요.” 우여곡절 끝에 악마가 인간에게 했던 말대로, 하나님처럼 되리라에 마침내 도달하게 되었다고 여기는 거지요.

그래서 이 불연속성을 살리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이 불연속성을 지닌 채 하나님의 전쟁에 전사들로 투입된 걸까요? 주님은 인간들의 눈에 보이질 않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됩니다(20:29).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이 치른 전쟁은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자들을 진두지휘한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고 보이는 것은 모세뿐이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믿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어요. 모세나 믿자는 식인 거지요.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자신들에게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으니 그들로서는 밑져야 본전인 거예요. 이건 믿음이 아니라 자포자기에요.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게 믿음이었으니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모세를 의지하고 모세의 명을 따른 것을 자기들의 믿음의 행위로 오해했어요.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도 죽은 후에 그들에게서 비로소 발각된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 한 몸 살릴 궁리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니 당연히 우상을 숭배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이방 민족에게 시달릴 수밖에 없고 당연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멸망의 자리가 비로소 믿음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 상태에서의 이런 고백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 이용하기예요. 자기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느냐에는 무지한 채 오로지 자기의 이 신앙을 후원해 달라는 거지요. 자기 정당성을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독자적인 내 세계를 붙들고 사는 이것을 긍정해 달라는 거예요. 진실로 믿을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내가 전부고 자기 최종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경까지 제자들을 몰고 가시는 주님의 행하심,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이 관계가 사랑의 관계라는 말이지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13:1-2)” 예수님만이 보이지 않는 마귀의 활동과 계획을 보시는 분입니다.

 

이게 영적 싸움이에요. 이제 이 싸움에 주님은 성도를 들이미십니다. 눈에 보이는 같은 인간을 상대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악마와 싸우라는 거지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6:12)”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아말렉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 전쟁에 하나님께서 내세운 것이 지팡이입니다(17:9). 질문을 한번 해볼게요. 이 전투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로서 다음 중 가장 적절한 것은? 1번 지팡이, 2번 모세, 3번 여호수아, 4번 아론과 훌.

 

여기서의 초점은 지팡이에 있습니다. 나머지 선택지에 있는 것들은 지팡이만을 주목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한 보조적 장치들입니다. 하나님이 벌이시는 영적 전쟁이 이런 식이에요. 보이는 인간들은 보조 차원에서만 투입됩니다. 이것은 성도가 늘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이유와 연결돼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인 악마로부터 우리 자신의 의미를 챙기라는 부추김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모세의 혼인 문제에 개입합니다. 모세의 혼인 상대로 이방인 구스 여인은 안된다는 거지요. ,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나 여호와는 너희에게 이방인이 아니냐?’예요. 미리암도 선지자였어요(15:20). 홍해를 건넌 후에는 여인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던 자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미리암은 모세의 누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 집안이라고 해서 특혜는 없어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한 미리암에게 즉각 문둥병이 발했고 미리암은 이스라엘 진에서 쫓겨나 진 밖에서 7일을 격리당했습니다. 사실 이건 모세 집안의 수치가 아니라 이에요. 그들에게 하나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확장된 사건인 거지요.

인간에서 기계가 되었다면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서는 아니 되는 거예요. 성도와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다시 인간 대우받으려고 뒤돌아 가지는 못해요. ‘사랑이 취소되는 경우라면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한번 온 사랑은 취소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두 번 죽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주님의 무기거든요. 보이는 무기에요.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이는 성도를 건드리는 자를 가만두지 않으십니다. 성도에게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5:10)”

이 정도만 해도 사실 에베소서 강의는 끝내도 돼요. 남은 건 응용에 관한 거예요. 응용이라고 하니 성도가 갖추어야 할 실천덕목에 관한 건가?’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도리어 그런 해석이 오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방식으로 성도를 현실, 즉 악마의 소리와 마주하게 하십니다. 이런 거지요. “너 성경 읽었잖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대해 이제는 알았지? 그렇다면 말씀대로 살아야지. 구약 이스라엘을 보고 교훈을 얻어야지. 그들은 실패했어도 신약의 성도는 성령을 받았으니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어. 이게 하나님의 뜻이야. 오케이? 유 노?” 이 말에 넘어간 사람은 성도 근처까지 갔다가 도로 인간으로 돌아간 사람이에요.

 

응용의 진리는 사실은 이런 겁니다. 환경 바꾸기에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게 할 목적으로 주어진 말씀이라는 거지요. 새 환경에서는 내가 뭔가를 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그저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이미 성취된 그 사랑이라는 환경이 각각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를 경험하고 증언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5:22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전에 알던 부부 환경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역시 전에 알던 부모 자식 환경이 아니에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간에 주 안에서의 사랑이라는 환경입니다. 그다음 에베소서 6:5도 마찬가지예요.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단순한 직장 혹은 노동 현장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환경입니다.

 

이 사랑이라는 환경은 악마와의 전투 현장이기도 합니다. 가정도 직장도 악마와 벌이는 전쟁터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다녀가시면서 얼마나 많은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셨는지를 이제는 우리 성도로 몸소 체험케 하십니다. 주님은 이미 성도의 머리이십니다. 주님의 지체는 독자적으로 환경(상황)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환경에 넣어지는 겁니다. 환경을 만날 뿐인 거지요. 바둑에 ()’이라는 게 있습니다. 끝까지 단수에 몰려 잡히게 된 경우나 그 수를 말합니다. 축에 걸렸다 혹은 축으로 몰렸다고 말해요. 성도의 삶의 모든 환경이 악마에 의해 축으로 몰리는 환경이에요. 주님이 조성하신 환경입니다. 내 위치를 내가 임의로 정할 수 없어요.

 

영적 전쟁은 씨름(6:12)입니다. 이 말이 어울리는 장면은 창세기 32장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했지요. 이것을 신약적 관점에서 풀이하면 야곱의 씨름 상대는 자기 안의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돼요. 진짜 나와 싸워서 내가 나로 알고 있는 그것이 악마가 심어준 가짜 나’,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 가짜 나가 진짜 내가 되려면 복을 받아야 해요. 복 받는 과정이 뭐냐? 나를 죽여주시는 겁니다. 죽은 내가 재료가 되어 거기서 생명,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 출연돼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생명)의 얼굴을 볼 그때가 야곱이 죽는 순간이에요(32:31). 이때부터 이스라엘인 야곱은 생명의 담지자(擔持者)’가 돼요. 생명을 담고 있는 생명의 운반체에요. 이처럼 성도는 삶의 현장에서 자신이 망하고 패배하는 순간을 통해 생명에 접촉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야곱과 천사의 씨름에서 야곱이 천사를 이겼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이는 신약의 상황, 곧 인간이 이기고 예수님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 대한 반영이지요. 인간은 기세등등하고 예수님은 인간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맞아 죽은 겁니다. 바로 이 사건이 핵심이 되어 악마와의 영적 씨름에 돌입되어있는 형편이 성도의 삶의 환경입니다.

 

인간에게 패배하신 예수님의 승리가 이것입니다.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19:27-30)”

 

예수님이 다 이루어 취하신 게 뭡니까? 그것은 바로 생명이요 사랑이요 언약의 장()입니다. 예수님의 이 승리로 인하여 인간세계는 철저하게 생명 세계와 차단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따라서 이미 이 생명 세계에 들어온 자들의 운명은 다시는 인간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이 또한 예수님의 승리로 말이암은 겁니다. 이런 게 스카이돔 시스템이에요. 사랑 안, 예수 안, 그리스도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이 전부가 이 돔이에요. 그 안은 다 이루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돔 안에는 하나의 가족만 있어요. 애초에 나를 위한 구원이란 건 이 돔 안에서는 통하질 않아요.

로마서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이 말씀을 개인 구원을 보증해 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돔 안에만 있는 구원의 성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서 8:39도 마찬가지에요.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제 에베소서 4:16을 보겠습니다.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그다음 말씀은 뭐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목적이 나오겠지요?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구체적인 예가 에베소서 4:25-26에 나옵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이런 말씀을 율법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해가 지고 난 뒤에도 마음껏 분을 내어도 좋다고 오해해서도 안 됩니다. 일몰 시각, 그따위를 굳이 체크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사랑은 그 사랑의 환경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차후에 성도에게 주어지는 통보입니다. 성도가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을 사랑과 연결해 주십니다. 성도가 이런 관점으로 살다 보면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세상의 핍박이며 야유입니다. 이런 핍박과 상처가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바로 그 상처에 우리가 합류되었다는 증상입니다. 억울함, 분통함을 통과하여 사랑에 이르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의 경로이며 성도에게만 일어나는 특수한 현상이에요.

 

 

 

 

 

 

 

8강 막

 

생물학에서 어떤 것이 살아있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막()의 존재 여부입니다. 외부와의 경계를 말해요. 막의 생성과 소멸과 같은 자연현상을 인간의 언어로는 제대로 다 표현 못 합니다. 세포가 분열하고 증식되는 과정에서 막이 새롭게 생성될 때 사람들은 굉장히 난처한 게 있어요. 그것은 내가 막을 만든 건지 아니면 막이 나를 새롭게 만든 건지 단정 짓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나의 필요에 의해 막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막의 생성을 위해 막이 나를 함몰시킨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에요.


막은 경계선이거든요. ‘여기까지만 허용됩니다. 넘어오시면 안 돼요를 표시해요. ‘사랑의 막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 막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그 환경 조성을 위해 우리가 사랑의 막을 형성하는 하나의 세포로서 그 막에 합류된 것인지는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확정되어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오직 말씀뿐이에요. 우리는 말씀과 대조될 때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이사야 40:6-8을 보겠습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이 말씀에 을 넣어보면 모든 육체는 막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막의 꽃 같으니, 막은 마르고 막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막이로되 막은 마르고 막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가 됩니다.

분명 좀 전까지 보였는데 돌아서면 없는 것, 짧은 순간 있다 사라져도 꼭 있어야 하는 것, 성도가 바로 이 기능을 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구분 짓는 막이에요. 이 기능을 위해 성도는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호출된 거예요. 세상에 있되 자신의 그 있음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받은 막 같은 자들입니다. 에베소서를 한꺼번에 이해하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막으로 보는 겁니다. 에베소서 5: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이것이 바로 말씀 완성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께 제물과 생축으로 바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 인간 관점에서 염려스러운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다 자기를 몽땅 내어주셔 버리면 예수님이 취할 이익은 어디에 있냐는 겁니다. 우리에게 이런 염려가 있는 것은 인간은 본래 무슨 일을 해도 어떻게든 내가 손해를 덜 보고 조금이라도 내 몫을 더 챙길 궁리를 하는 존재니까요. 이건 인간 사회에서 이미 결론 난 상식 같은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다 내어버리셨다는 거예요. 이 점이 우리에게는 문제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보다 그런 예수님과의 합류가 우리 쪽에서 불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훌륭하신 것은 좋은데 그 훌륭함 때문에 상식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는 예수님과의 접촉점을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거지요.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과 접속되겠다고 우리 목숨을 들고 나가면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경우처럼 그 목숨은 예수님에 의해 거부당합니다. 요한복음 13:37-38을 보세요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래서 우리 쪽에서 접근하는 데 요구되는 경계면이 아닌 거예요. 오히려 그 막과 접촉되려는 순간 그 있던 것도 녹아 사라져 버립니다.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주님과의 접속을 시도하려는 그 심보가 죄와 허물에 해당하기 때문이에요. 사랑은 주님께서 우리를 세심하게 돌보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단호하게 우리를 거절하고 박멸해요. 이게 예수님의 사랑 표현입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의 본성이 십자가 앞에서야 비로소 발각돼요.

 

에베소서 5:3-4에 보면,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되어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은 다 어디에 있던 거지요? ‘우리 안입니다. 우리의 감추어진 속성이었던 거예요. 우리의 육신이 아직도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육신을 주님은 주님 자신의 사랑을 증거하는 용도로 활용하셔요. 성도가 접하게 되는 일상에서 이런 육의 속성은 자극을 받고 그래서 때마다 일마다 그 속성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에베소서 5:22을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되어있죠. 여기서 막의 기능은 아내라는 위치, 남편이라는 그 위치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말씀에 입각한 온전한 아내, 온전한 남편은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겁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성경을 들이밀며 아내 됨, 남편 됨을 채근해봐도 성경대로 살아가는 남편이나 아내는 없어요. 그게 성경의 결론입니다. 아내의 전적인 복종을 받을 자격이 있는 남편도 없을뿐더러 남편이 목숨을 바칠만한 아내도 없어요. 막은 주님의 나타나심과 참된 교회의 등장을 위해 한시적으로 사용되는 소모품으로서 기능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사건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라는 자아가 소유하거나 움켜쥘 수도 없고 우리에게 그럴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에 우리가 나서서 무한을 붙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무한에게만 유한을 유한으로 드러낼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이 있어요. 유한이 같은 유한을 향하여, 또는 유한이 감히 무한에게 말씀을 지키게 해 달라고 요구할 권한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유한인 우리에게 즉 남편과 아내들에게 이 말씀을 명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유한이 자기 한계를 드러내는 바로 그 현장에 무한이 출현하는, 유한과 무한의 그 관계적 속성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관점에서는 분명히 없는 죄를 우리 안에서 찾아내십니다. 죄가 전혀 아닐 것 같은 것도 무한의 입장으로 보면 영락없는 죄에요. 유한의 죄는 무한해요. 주님이 우리에게서 사사건건 죄를 찾아내시는 이유는 사랑을 위해섭니다. 이 사랑은 당연히 유한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인간(유한)은 사라지고 사랑만 남아야 해요. 모세는 지팡이가 아니지요. 하지만 지팡이의 무한성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라는 유한이 꼭 필요합니다. 혼인 관계를 설명하는 사도 바울도 본인은 정작 혼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해요.

 

혼인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통해 가늠됩니다. “장가가도 죄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고전 7:28)” 혼인 자체는 장려할 일도 아니고 죄짓는 것도 아니지만 인간의 유한성에 비추어 볼 때, 혼인이 죄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고전 7:29)”는 말씀도 때가 마지막인데 아내를 통하여 이 땅에서의 삶에 희망을 품어보겠다는 자들은 시대 파악이 제대로 안 됐다는 말이지요. 혼인은 육신에 고난을 안기는 일입니다(고전 7:28). 성도의 마음에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지요.

 

그러니 혼인하려거든 마음고생을 각오해야 해요. 혼인을 생각하면서 육신의 고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는 주님을 섬길 맘이 전혀 없는 불신자라는 말입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마음에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고 사도는 장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밝혀줍니다.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하느니라(고전 7:32-34)”

 

따라서 혼인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어놓습니다.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이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전 7:37-40)” 따라서 애초에 혼인은 자기 육신에서 솟구치는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을 사단의 손에 놀아나지 않게 하려는 조치의 일환이라는 겁니다(고전 7:5). 영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이 육신으로 인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지요.

 

에베소서 5:31에서는 유한으로 무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혼인 관계 안에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음을 눈치채야 한다는 거지요. 혼인은 유한에 속한 관계이지만 실은 그 안에는 무한의 성격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무한에 속한 것, 바로 둘이 한 육체가 된다는 진리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애써도 부부가 한 육체가 될 수 없어요. 부부라 할지라도 육체는 서로 각각 이니까요. 따라서 존재적으로는 별개인 두 육체가 한 몸이 되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사건일 경우에요. 쉽게 말해서 혼인을 신비로 이해하라는 겁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라는 거예요. 유한한 인간이 생각하는 혼인에 관한 모든 것은 뭐가 됐든 그것이 죄로 드러날 그때 두 육체가 한 몸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 거지요.

 

예컨대 혼인에 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은 이런 겁니다. ‘결혼해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싶어. 사랑받는 데서 오는 행복을 얻고 싶어.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자식을 낳아 대를 잇게 해야지. 혼자보다는 둘이 더 경제적으로 이익이 돼. 결혼해야 남들이 나를 정상으로 보잖아. 결혼해서 남편(아내)에게 보살핌을 받고 싶어. 내 편을 만들고 싶어. 아내(남편) 덕 좀 보고 싶어. 결혼은 출세에 보탬이 돼. 내가 못 누린 것을 내 자식은 맘껏 누리게 해줄 거야. 우리 부모처럼 살지 않을 거야. 우리 부모처럼 좋은 엄마 아빠가 돼야지.’ 모조리 다 죄에요.

 

결혼은 그냥 십자가 사건의 연장일 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죽는 환경을 부여받은 거예요. 혼인을 통해 내재해있는 인간의 자기 위주의 죄가 발각당합니다. 죄가 발각당하는 계기가 더 풍성히 제공되었다고 보시면 돼요.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는 말씀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보이는 우리가 교회라는 이름으로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것을 부부관계의 사례로써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자기를 부인(否認)할 때나 나타나는 영적인 사건이에요. 진정한 부부는 이 세상에 없기에 사건으로만 구현되는 겁니다. 말씀은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죄와 용서라는 주님의 활동으로 이 세상에서 실제화돼요.

 

말씀에 합당한 가정이란 부부가 자신들의 더러움이 반복해서 발각당하는 그 과정, 즉 인간에서 기계로 바뀌는 그 경로의 반복 속에서 각자 자신들의 성도 됨을 드러낼 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겁니다. 따라서 사도는 혼인하지 않는 게 최고야라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홀로 사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악마와 혼인하든 예수님과 혼인하든 둘 중의 하나와 혼인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

 

육체와 육체의 만남은 욕심과 욕심의 만남입니다. 둘 다 짐승이지요. 그런데 부부가 둘 다 자신들을 짐승으로 인정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건 성령을 받은 거지요. 이들은 자신들이 짐승임을 고백하기에 바쁩니다. 따라서 라는 존재가 얇은 막으로 사라진다고 해서 그 일을 애석해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혼인에 담긴 신비요 비밀이에요. 성도는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늘 불연속성을 유지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6:1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나옵니다. ‘주 안이 되면 이 공간은 부모와 자식, 그리고 주님이 함께 있는 현장이 형성된 거지요. 주님의 십자가가 서있는 그 현장으로 부모와 자식이 함께 불려 나와 있는 거예요. 율법이 완성된 현장이에요.

 

여기에 신명기 21:18-21을 투입해 봅시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이건 부모에게 명하는 엄중한 율법의 말씀입니다. 자식에게서 율법이 구현되길 원하는가 아니면 자식이 율법으로부터 방치되어 율법 밖에 있길 원하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겁니다. 주 안에서 산다는 것은 자식이 부모의 소유가 아님을 전제합니다. 달리 말하면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 앞에서 부모는 율법이 명하는 부모의 역할을 행하는 것을 말해요. 이때 부모는 십자가 앞에서 자식 문제와 관련된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계기가 됩니다.

 

주님이 그 가정에 없다고 여길 때 부모는 어떤 본성을 드러내겠습니까? 자식 또한 가정을 주님이 없는 공간이라고 여길 때 부모에게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그 공간은 단지 탐욕과 탐욕이 만나는 장일 뿐입니다. 따라서 부모도 자식도 다 돌로 침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돌로 침을 당하지 않는 자가 도리어 저주받은 자입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돌이 없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 밖에 놓여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에요. 저주받지 않은 자가 진정 저주받은 자예요. 율법으로부터의 부르심이 없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끊어진 자이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주님 안에 있는 자녀는 자신이 행하는 것은 모조리 다 돌로 침을 받을 죄라는 점을 인식하는 가운데 부모를 공경하게 됩니다. 그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공경하는 거예요. ‘주님, 부모를 통해서 제발 저를 돌로 쳐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도 주님께 다음과 같이 기도하게 돼요. ‘주님, 저 자식을 통해서 저를 돌로 쳐 주세요. 저는 늘 자식을 노엽게 하는 부모입니다(6:4)’라고 말입니다.

 

에베소서 6:2을 보겠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를 위해 출애굽기 20:12을 봅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되어있어요. ‘약속의 땅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 준수에 대한 보상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들(자녀들)에게 제공된다는 말입니다. ‘주 안의 상태는 약속의 땅에는 이미 들어섰고 보상은 보상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하기에 주 안에 있는 자는 자기를 위한 보상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나를 위함이 포기된 상태가 바로 보상이 완성된 상태인 거지요. 이게 복입니다.

 

구약에서 자식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로부터 전수되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대한 존경을 뜻하고 이는 율법을 앞장세워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의미합니다. 계명으로 형성된 언약의 직선 사다리 꼭대기에는 주님이 계시고 그 제일 아래쪽에는 부모와 자식으로 형성된 가정이 있습니다. 이 가정은 계명의 지속적인 가치를 드러낸다는 조건을 수반하고 생겨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이 가정은 땅에서 잘 될 수밖에 없고, 장수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인간의 수완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어요. 순전히 말씀의 효과에요.

 

이런 복은 가정 구성원들을 위함이 아닌 겁니다. 주님의 완전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에요.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1:14).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 부지를 위하여 혼신을 쏟아붓고 살아가지만, 예수님은 말씀의 완전성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자기 전부를 바쳤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으로 온전히 말씀을 다 이루시고 가기 자신의 약속의 땅을 따로 형성하셨습니다. 그 세계가 아들의 나라(1:13)’예요. 이 보다 잘된 일이 없지요. 바로 이 아들의 나라가 인간 세상에 그것의 징후를 제공합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통해서도 이 아들의 나라는 흔적을 남긴 거지요. 주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장수하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장수가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 말씀에 따른 약속 성취를 보여주는 땅에서의 기간이 바로 약속과 관련된 장수(長壽)’를 의미해요.

 

주 안에서부모 된 자에게 당부하는 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물어봤어요. “뭐 사줄까? ?” 손녀 왈, “할머니, 우리 아파트 사주세요.” 이걸 어째요! 아파트 안 사주면 손녀딸이 노여워할 것 같네요. 그래서 당장 청약저축 통장이라도 만들어야 할까요? ‘아파트라는 매개물이 복음의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자식은 부모로부터의 유산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말씀을 원합니다. 이런 자식에게 부모의 위신을 살리겠다고 재물을 물려주는 그것으로써 신앙의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아파트 대신 복음을 원할 자식이 인간 세상에는 없다는 겁니다. 이건 그냥 주 안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사건이란 말이에요. 주 밖에 있는 이 더러운 세상이 참으로 음란하고 악하다(16:4)는 점을 주 안에 있는 부모와 자식이 증거 해야 한다는 겁니다. 증거 하는 이것이 곧 약속 있는 하나님의 보상이 돼요. 그러니 이게 내 전쟁이 아니라 주님의 전쟁인 겁니다. 주님은 이런 실제 상황에 성도를 마구 던져놓으시고는 십자가 사건의 실재성을 느끼게 하시는 거예요.

에베소서 6:5에 보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이 세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독자적 가치를 곱게 지키도록 사정 봐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요. 계속해서 나를 건드리고 내 것을 탈취해 갑니다. 이 세상은 타인을 괴롭혀야 내가 사는 구조에요. 나의 존재가 곧 타인에 대한 압력으로 작용해요. 이런 형편에서 이 세상은 종이 됐든 주인이 됐든 각자는 절대적 존재로 살고자 하는 욕구로 무장되어 있어요. 그러니 주 안에서가 빠진 상태로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 위치나 신분이 뭐가 됐든 자기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일에 임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예수님이 천국은 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지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25:14-19)”

 

여기서 예수님이 비유로 든 종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따로 챙길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역할은 주인이 맡긴 것을 이윤을 더하여 주인께 돌려주는 겁니다. 종이 일한 성과를 주인이 가져가는 거지요. 이게 바로 천국, 주 안의 세계의 시스템이에요. 이 땅에서도 이런 천국의 성격이 적용되는 공간이 성도들로 이루어진 직장이에요. 요즘처럼 종이 주인에게 최저시급을 주장한다든지 노동권을 보장해달라든지 하는 것은 주 안의 세계에서는 없는 일이에요. 종이든 주인이든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세상의 직장 현장에서 보여야 할 자들입니다. 타인은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이용할 대상이 아닌 거지요. 안정적인 수입 보장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을 요구하는 데가 아닌 겁니다. 한 직장 안에서 종과 주인은 복음의 완성인 주님의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요.

 

그래서 눈가림만 하는 식으로 일하는 종의 태도는 주님의 종으로서 부적절한 태도입니다. 종에게 공갈하는 주인도 주님의 종으로서 합당치 않아요. 그런 것은 주 밖에 있는 자들이나 하는 짓인 거지요. 그러면 종과 주인은 어떤 식으로 서로를 대해야 하는 겁니까? 고린도전서 7:20-24을 보겠습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주 안에서 사는 자들은 자기 입장을 우선으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종으로 일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요 사람을 부리는 위치에 있게 하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종과 상전은 둘 다 주님에게는 달란트를 부여받은 종이라는 의미에서 이들은 같은 처지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천국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의 처신은 주 밖에 있는 자들의 마음 상태가 어떠함을 드러냅니다. 그는 주인을 속이지 않았어요.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청산하지 않았던 거지요. 그래서 그가 악한 겁니다.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깁니다(25:29-30).

 

주인은 종에게 공갈 놓지 않고 종은 주인을 속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이 성도 관계는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 안에 있는 종과 주인은 이제 더는 자기를 위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체험하도록 강제 조치 된 자들이에요. 내가 나를 위해 이용해도 되는 타인을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실제로 체감하면서 삽니다. 종과 주인, 이들은 서로를 주님이 함께하시는 종, 주님과 더불어 있는 주인으로 대해야 해요. 이것이 바로 사랑의 환경 속에 있는 풍경입니다.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존재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신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이기 위한 한시적인 막()과 같아요. 그래서 성도는 존재가 아니라 사건의 다발인 거예요. 잘나서 사장이고 못나서 노동자가 아니라 각자가 주님을 드러내는 사건 안에서의 부여받은 역할을 하는 거예요. 바둑판 위의 돌과 같아요. ‘주 안이라는 지상의 천국 공간을 드러내기 위해 배정받은 자기 위치를 운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개인 대 개인의 비교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6을 보면,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되어있습니다. 자기 가치를 출발점으로 삼고 세상과 타인을 바라보는 불신자와는 달리 성도는 전체 환경을 드러내기 위해 개별적 위치를 할당받은 자로서 세상을 삽니다. 아내, 남편, 주인, 노동자, 부모, 자식, 그 어떤 역할이라도 그 역할을 통해 불신자들의 세계가 바로 이 세상인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 되지 말라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환경 싸움이에요. 너의 환경과 내가 속한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각자의 역할 수행 속에서 나타낼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것을 위하여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들과 더불어 계신 거지요. 이게 성령 세례입니다(3:27-28). 에베소서 5:8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라고 하세요. 바로 이 실상을 확인시키기 위해 어떤 이는 주인으로, 또 어떤 이들은 종으로 세상을 살게 된 거예요. 회사를 경영하거나 직원으로 취업하거나 각자의 역할을 행하면서 자신이 어두움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하시는 거지요. 자신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그리고 그게 자신이 어둠의 권세 안에 사로잡혀 있는 증거라는 것이 예수님과 더불어 살면서 파악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5:14을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게 아니에요. 천국과 지옥 사이를 가르는 막으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게 하신다는 거예요. 주인과 종, 부부, 부모와 자식, 이 모든 관계에서 예외는 없어요. 모두가 동일한 새 환경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에베소서 5:7을 계속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빛 되시는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라는 겁니다. 나는 나 자체로서 빛이 아닌 거예요. ‘주 안에서 빛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5:14-16의 주님의 산상설교가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완성된 상태를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산상설교에서는 주 안’, 혹은 십자가 안이 제시 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인간을 상대로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착함은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는 나오지 않아요. 예수님의 착함과 예수님의 빛 되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만이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당연히 불신의 세계에서는 이것을 빛으로 간주하지도 않고 착함으로 간주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한다는 것이 전제된 채 세상을 파악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당했던 것과 같은 성격의 핍박과 미움을 당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바로 이 세상 구조 속에 있는 새로운 환경의 성격이에요.

 

에베소서 5:10-12을 보게 되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성도가 사는 이 세상 자체가 주님이 악마로부터 시험받은 공간입니다. 부부관계, 부모 자식 관계, 사용자 노동자 관계, 여타의 이 모든 관계가 시험 거리를 제공해요. 그러니 이 세상은 악마의 열매 외에는 일절 없어요. 주님이 남긴 열매는 전무하다는 말입니다. 모든 게 어두움이 남긴 열매에요. 이런 인식이 성도의 삶의 체험 현장에서 주어집니다.

에베소서 5: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이 대목은 세상에 드러내시는 주님의 활동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책망받는 것은 성도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따로 있어요. 그것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그 어떤 일도 부끄러울 게 없어요. 거기서 주님의 사랑이 나온다면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할 일이라는 거예요. 반면에 그 일이 자기에 대한 집착과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외견상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그건 악마의 일요 어두움의 일입니다. 모든 것이 빛 되신 주님의 행위라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바둑판의 돌과 같이 새로운 환경에서 그것의 위치로만 성도의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결코 내 소유는 허락되지도 않고 용납되지도 않습니다. 내 것이 따로 없다는 이것이 부끄러울 게 전혀 없어요. 이럴 때 성도는 주께 선물을 받은 것이요 주님의 열매인 겁니다.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이 경우를 보여주는 사례가 마가복음 5:22-43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아파서 죽어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당도했을 때는 딸이 이미 죽었어요. ‘죽어가고 있는 것죽었음의 차이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부각하려 하셨습니다. 인간은 죽어가고 있을 때는 살리기 위해 갖은 조치를 다 취해봅니다. 예수님을 급히 모시려는 것도 그런 노력 중 하나에요. 이런 것들이 죽어가고 있는 존재를 살리기 위한 인간 편의 수고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인간(어둠)의 방식과 예수님 자신의 방식에 의도적으로 차이를 벌리십니다. 야이로의 딸이 완전히 죽은 뒤에 그의 집을 방문하려 하신 거지요.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그의 딸이 지금 죽었으니 예수님을 모셔가려는 수고를 그만두라고 합니다. 인간 노력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들의 말을 옮겨 보면 이래요.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5:35)”

 

인간이 인간을 살려보려는 그 어떤 노력도 빛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어두움이에요. 인간은 새로운 환경, 빛 환경의 능력을 몰라요. 따라서 주님은 죽음을 꺼내지 않고서는 그 어떤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의 세계에 속해 있는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방식으로 죽음이 담겨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찾아가서 죽은 자에게 말을 건넵니다. 어둠에 빛이 비취고 빛이 전해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 건네는 이 말씀은 장차 되어질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싣고 전달되는 말씀이에요. 주님이 마련하신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은 죽은 자를 깨우기 전에 죽은 자 주위에서 애곡하던 자들에게 먼저 이 말씀을 하셨어요.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이지요. 이걸 사람들이 비웃었어요.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하실 일을 하십니다. 죽은 소녀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는 살았다는 자들이 알지 못하는 말씀입니다. 산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아요. 이로써 빛의 세계와 어두움의 세계가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그분의 말씀으로 구별되었습니다. 동일한 일이 성도에게 반복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위상이요 성도가 지닌 사건성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말씀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빛과 어두움을 가르는 막, 생명과 죽음을 구분 짓는 막의 역할을 하도록 성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살아서 뭘 할 건가가 아니라 죽은 자가 뭘 할 건가를 말하고 보여주는 역할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에베소서 5:18의 말씀은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내 위주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모든 간섭하심에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5:20-21입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9 강 내부 전쟁


에베소서 6: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전쟁에 관한 기본적인 틀, 곧 전투 대형은 구약 때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그 체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의 진군 대형이 잘 나와 있어요. 마귀를 대적하는 신약의 전쟁도 민수기의 그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게 됩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이 치렀던 하나님의 전쟁이 이스라엘(인간)의 구원을 위한 전쟁이 아니듯 이 원칙은 신약에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구약과의 연결 없이 에베소서 6:10을 대하게 되면 거기서 말씀하시는 영적 전투가 내 구원을 위한 사적인 전투로 오인될 여지가 다분해집니다. 마귀를 이겨야 내가구원받는다는 식이 되는 거지요. 이런 건 애초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을 빙자해서 내 전쟁을 치르면 안 돼요.

 

그럼, 구약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전쟁 할 때의 대형은 어떠했을까요?

 

(그림 3)

 

성경연구 시리즈 p. 174

 

 

민수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지파를 네 진영으로 나누고 각 진영이 동남서북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도록 명하십니다. 사방으로 일종의 막이 형성되는 거지요. 각 진영은 외부의 적과 직접 맞닥뜨립니다. 네 진영은 각각 세 지파로 구성됩니다. 진영마다 진영을 대표하는 지파가 있어요. 동쪽은 유다 지파요 그 곁에 잇사갈, 스블론 지파가 진을 칩니다. 남쪽은 르우벤 지파가 대표 지파이고 그 곁에 시므온, 갓이 진을 칩니다. 서쪽은 에브라임 지파가 대표이고 그 곁에 므낫세, 베냐민이 진을 쳐요. 북쪽은 단 지파가 대표 지파가 되고 그 곁에 아셀과 납달리가 진을 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진영의 가장 외각은 이스라엘 전체 진영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진을 두르고 계십니다. 일종의 탱크 부대 같아요.?

 

멀리 앞쪽으로는 이스라엘의 대형을 마주하고 이방 민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방 민족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민족을 말합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10:25)” 그들에게도 이 있어도 그 신은 그들에게 언약을 부여하고 언약대로 그들을 이끌어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신을 섬긴다는 자들이 신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루는 거지요. 신을 섬기는데 그 안에는 아무 내용이 없어요. 껍데기만 빌려왔기에 속 내용은 인간이 만들어 채웁니다. 인간의 야욕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러니 죄와 허물로 가득 차 있는 인간이나 그들이 섬기는 신이나 전부 다 한통속인 거지요. 이 신이 우상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그 섬김의 내용(언약)을 채웠기에 그 안에는 우상을 배제하는 요소가 필수적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의 생각과 비틀어짐이 생기는 거지요. 이러니 당연히 여호와는 인간에게서 거부당하게 되어있고 하나님은 그걸 아시면서 그 내용을 채우신 거예요. 그래서 흔히 나는 신을 믿어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그냥 이 사람은 교회 다니는 우상숭배자 구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믿습니다가 그들이 외치는 구호라니까요.

이처럼 인간이 선호하는 신이 가짜인 것은 창세기 4장의 아벨의 죽음 사건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을 드린 쪽이 하나님께서 거절당한 제물을 드린 쪽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 살인사건의 내용을 그 요소로 담고 있어요. 곧 참된 신께서 가짜 신에게 살해당하는 방식으로 자기의 참 신 됨을 이 땅에 나타내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을 드린 자가 살해당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제물을 받으신 그 일이 이 땅에서는 억울한 피를 내는 결과를 낳는다는 의미에요. 이에 땅이 하늘을 향해 호소합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

 

아벨의 피에서부터 사가랴가 제단에서 흘린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모든 의로운 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하나로 연결됩니다(23:35).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의 제물을 받으신 하나님을 향하여 가인 편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한 바가 됩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 공격에 대한 온전한 복수를 시행하시는 거지요. 이게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의 성격입니다. 억울한 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거지요.

 

이스라엘 주변에 무수한 이방 민족 포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7:7)” 이스라엘을 지도상에서 보면 그냥 미미한 점에 불과해요. ‘수가 이리 적은데 이겼네? 거참 희한하다가 되는 겁니다.

 

이제 그 을 확대해 보겠습니다. 광야를 행군하는 이스라엘 12지파의 진영이 보입니다. 그리고 전체 진영의 중심부에는 언약궤가 있는데 크기는 가로 112.5cm 세로 67.5cm 높이 67.5cm에요. 이 궤는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지점이고 이 궤를 별다른 한 지파가 호위하고 있습니다. 바로 레위 지파에요. 궤 주위로 또 하나의 막이 형성되어있는 거지요. 레위인들은 특수한 죽음을 말하는 피와 일반인의 피가 어떻게 다른지 그 차이를 드러내는 기능을 담당합니다.

 

레위기 17장을 보면 약속의 땅구역 내에서는 인간이 함부로 피를 흘려서는 아니 됩니다. 또 피를 먹어서도 아니 되고요. 짐승을 잡으려면 진 안에서 잡든 진 밖에서 잡든 먼저 회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예물을 드린 후에야 잡을 수 있습니다. 이는 피에 생명이 있음을 전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지시키기 위해섭니다. ‘피는 곧 생명과 일체(17:14)’라는 거지요. 그러나 생명되는 이 피는 인간이 식용으로 잡는 짐승의 피와는 구별됩니다. 진 안에서든 진 밖에서든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예물을 드려야 짐승을 잡을 수 있다고 하는 의미는 모든 피, 곧 모든 육체의 생명은 언약궤에 발리는 그 희생제물의 피가 지닌 취지(의미)를 공유해야 한다는 조건을 지니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사수해야 하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곧 언약궤에 발리는 흠 없는 제물의 피입니다. 이 피를 내고 이 피를 사수하는 지파가 바로 레위 지파예요. 이 피가 지켜질 때라야 만이 이스라엘에는 생명이 있고 이 피의 구별됨을 지켜내지 못하면 이스라엘에는 생명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민수기 3:10,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제사장 외의 다른 이가 언약궤에 가까이 가면 언약에 발려진 이 피의 특수성, 곧 다름 아닌 유일한 생명이 되는 피의 구별됨을 지키기 위해 이 생명과 차이 나는 외부인의 목숨을 앗아버리겠다는 거지요.

 

민수기 1:51에도 장막을 운반할 때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장막을 세울 때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찌며 이스라엘 자손은 막을 치되 그 군대대로 각각 그 진과 기 곁에 칠 것이나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그러니까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은 이 특수한 죽음()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이 이 피에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결국 언약궤에서 흘러나오는 이 특수한 죽음을 지켜내기 위해 치르는 전쟁인 거였어요. 이걸 지켜내느냐의 여부가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외부와 치르는 전쟁은 결국 이스라엘 내부 전쟁의 여파였던 거예요.

이스라엘도 역사적으로는 다른 민족과 빈번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이 외부 이방 민족과 싸우는 게 아닙니다. 이방 민족은 허수아비요 들러리에 불과해요. 진짜 싸움은 인류를 대표하는 이스라엘과 그 내부의 언약궤에서 나오는 특수한 죽음()을 사수하고자 하는 하나님과의 싸움이었어요. 즉 인간이 이기느냐 하나님이 이기느냐인 거지요. 이 싸움에서 하나님이 이기셔야 생명이 인간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겁니다. 사무엘상 4:11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를 빼앗기는데 그 빼앗긴 언약궤가 오히려 블레셋과의 전쟁을 마무리 짓고 다시 이스라엘 쪽으로 금의환향해요. 여기서도 보다시피 하나님의 전쟁 목표는 하나님의 승리이지 결코 인간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닌 거예요.

 

이스라엘의 진군 대형을 다시 정리하면 12지파로 구성된 진영 중앙에 별다른 한 지파인 레위 지파를 합쳐서 13지파로 편성됩니다. 레위 지파는 언약궤의 특수성을 전담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 특수한 생명을 사수하기 위해 일반인들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진정한 생명은 레위 지파가 지키는 언약궤에서 새롭게 주어집니다. 그 외에는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전쟁은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가르는 싸움이에요. 좀비와 천사의 싸움입니다. 레위 지파가 지키는 그 특별한 영역과의 관계성이 없는 것은 목숨이지 생명은 아닌 거예요.

방금 평면도로 봤지만, 이것을 세워봅시다. 이스라엘 진영 중앙의 언약궤가 위치한 지역을 손으로 쑥 당겨 위로 올려보겠습니다. 그러면 그 평면은 수직이 되겠지요.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진영의 제일 정점에는 언약궤가 있고 여기서 피가 위에서 아래로 흘려내려 오는 형국이 됩니다. 이런 이미지는 현대 경제학에서 차용한 건데요, ‘낙수(落手) 경제론이라 하여 이걸 좀 설명하면 이래요. 국가가 기업의 세금을 감면시킴으로써 기업은 여유자금을 시설 확충에 더 쏟아부을 수 있고 이는 고용증대의 효과를 낳고 노동자는 수입의 증가로 기업이 생산한 제품에 구매력이 향상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면 국가 경제는 내부적으로 자연적인 선순환이 이루어지게 돼요.

중산층이 두꺼워지고 장기적으로는 고정된 구매층이 형성되어 풀렸던 세수(稅收)는 다시 국가로 귀속됩니다. 외국 투자기관에서 국채와 채권을 사들이게 되고 신용도가 높아지면서 환율 차에서 오는 기업의 부담은 줄어요. 외국 투자가 들어오면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기반시설 건설에 국가가 힘을 쏟을 수가 있고 기반시설의 관리와 정비의 주기도 빠르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물류비용이 절감되고 수출 단가를 낮출 수도 있고 가격 면에서 대외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어요.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빈곤층도 줄어들고 이로 인해 치안유지를 위해 소모되는 경비도 감소 됩니다. 이런 게 낙수 경제의 효과에요. 물을 떨어뜨리듯 그렇게 위에서 아래로 흘려보내는 거지요.

, 이걸 그대로 이스라엘 내부에 적용해 봅시다. 피가 위에서 내려오면 사람들은 이 거룩한 피와 자기가 살리고자 하는 목숨과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 과정에서 언약궤에 발린 피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동시에 자기 목숨은 진정한 생명은 아니라는 걸 알게 돼요.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해 출현 되는 새로운 생명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교체되는 효과를 얻게 되는 거지요.

레위 지파의 존재 의미를 민수기 3:12-13을 통해 살펴봅시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국가 성립의 절대적 요건이었던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를 레위 지파가 하는 일을 통해 이스라엘이 존속하는 내내 이어지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유월절 양의 피와 생명이 교체된 이들이 누구냐는 거지요. 교체된 자들만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규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취지를 이스라엘 가운데 드러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으로 하여금 레위인의 수를 헤아리게 하십니다. 민수기 3:39,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을 좆아 레위인을 각 가족대로 계수한즉 일 개월 이상 남자의 수효가 이만 이천명이었더라

 

그런데 민수기 3:43을 보면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이스라엘의 처음 난 남자(장자)의 명수의 총계는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레위인의 일 개월 이상 된 모든 남자의 수와 전체 이스라엘의 1개월 이상 된 장자(firstborn)’의 수를 1:1로 대응시킵니다. 22,200 22,273입니다. 273명이 차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준 삼은 쪽은 레위 쪽입니다. 이는 레위 지파가 대신 하는 자들만 유월절 그날에 부여받은 생명을 가진 자로, 곧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참 이스라엘로 보시겠다는 취지를 살린 거예요. 그럴 때에만 이스라엘에 유월절의 취지가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시겠다는 거지요.


레위를 제외한 열두 지파는 언약궤의 외곽을 지키는 일종의 경비 부대에요. 언약궤는 레위 지파의 남자들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고 있는 교체된 생명이 나오는 곳이에요. 이스라엘의 장자는 언약궤의 아들로서 언약궤가 생산한 참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위 지파가 온전하게 언약궤를 지켜주면 이스라엘의 장자 22,273명은 낙수처럼 위에서 내려오는 생명을 부여받은 자로, 피의 생명으로 출생한 그 시대의 새로운 이스라엘로 하나님께 여김을 받는 거지요. 추가된 273명은 참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보장해 주는 그 증거가 돼요

 

그런데 명수가 일 대 일로 딱 떨어지지 않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73명이라는 차이를 발생시킨 데는 그 취지가 있어요. 이를 위해 민수기 3:46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 삼 인이 더한즉 속하기 위하여 매명에 오 세 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하라즉 이 차이는 레위 지파의 성소에서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었던 겁니다. 성소 활동이 새 생명과 관련되어 있다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여분의 숫자를 발생시킨 거란 말이지요.

 

농협에서 쌀을 수매할 때 등급을 매기기 위해 농협 직원이 쌀가마니를 무작위로 푹 쑤시죠. 그런데 농협 직원에게 쌀 낟알 몇 개가 손해났으니 물어놓으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못해요. 낟알 몇 알이 허비되지 않으면 쌀 등급을 매길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수박도 사기 전에 꼭대기에 삼각형 모양을 내어 쏙 뽑아서 맛보잖아요. 그런데 손님이 구매하면서 아까 그 먹었던 그 삼각형 양만큼은 값에서 빼주세요라고 말하는가요? 안 하지요. 미리 맛보지 않으면 사놓고 후회하잖아요.

위의 두 예가 뭡니까? 샘플(sample)이 필요하단 거잖아요. 샘플은 전체를 대표합니다. 그러니까 샘플로 뽑힌 자들이 성막에서 일한다는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을 대표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치르는 전쟁의 승패는 이스라엘 내부가 이 취지대로 제대로 원활하게 돌아가느냐의 여부입니다. 진 외부에 포진된 이방 민족들은 모두가 다 좀비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이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언약으로 출생하지 않았기에 생명으로 취급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전체가 언약궤 중심으로 결집해 있으니 ‘단일 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에베소서에서 말씀하시는 영적 무기와 관련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4:4-6절을 보면,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요가 연속적으로 이어져요. 에베소서 4:1-3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 되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 되어야 하나님의 무기라는 말입니다. ‘독수리 5형제가 언제 강력한 무기가 되던가요? 5명이 합체할 때지요. 하나가 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크로스!” 하잖아요. 현대인은 자기 관리에 집중합니다. self control이지요. 가족이라도 하나가 아니에요. 가족도 귀찮아요. ‘홀로이기에 말도 행동도 뾰족해요. 늘 날이 서 있고 방어적입니다. 이건 본능이에요. 국가도 싫고 결혼도 싫고 다 싫어요. 그냥 내 편한 대로 살면 그만이고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것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자기 자체를 무기 삼아 세상에 나가 전쟁하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이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었습니다. 개별적인 단일화 시도는 이 통일에 도전하는 셈이 돼요. 따라서 성도는 자기만 챙기는 자기 단일화라는 경향성과 자체적으로 철저하게 내부 전쟁을 겪어야 합니다. 연속으로 치러지는 내부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이 무기에 대해 에베소서 6:13에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표현합니다. 중세 기사 같은 복장이에요. 몸은 개별 몸인데 그 몸에 장착되는 무기는 예수님의 통일에서 말미암은 단일 무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기는 성도가 자기를 지키는데 소용되는 무기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주님의 무기 그 자체를 지키는 무기로 성도의 존재가 쓰임 받는다는 의미에요. 이 일을 위해 성도는 지속적으로 내부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여기에 열거한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마귀의 화전을 소멸하는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6:14-17), 이런 모든 것이 다 위에서 온 것들이고(낙수된 것) 하나에요. 인간세계에서 만든 게 아니에요. 십자가 사건에서 왔습니다. 따라서 내 노력의 결과물이 아닌 거지요. 내가 만들고 성취한 것이 아니기에 나와는 이질적이에요. 이 무기들로 인해 주님과 내가 얼마나 다른지가 발견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철저하게 종속되고 주님께 패배자가 되는 것이 즐거울 때 우리는 주님과의 결합력을 유지하는 영적 무기로 때마다 일마다 발생 되는 거예요.

이 무기들을 장착하고 총사령관인 주님 앞에 집합해 보니 다른 이들도 나와 똑같이 돈키호테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게 발견됩니다. 하나같이 주님께서 은사로 부여하신 같은 무기를 장착하고 있었던 거예요. 학력, 인품, 소득, 성별,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다 같은 것을 입고 같은 것을 쓰고 같은 것을 들고 활동했어요똑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활동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7-28)”

인간은 살아온 환경과 출신 배경이 각자 다릅니다. 하지만 영적 전쟁에 있어서 그런 차이는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한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어린양 되신 한 분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았어요.

오늘날 특히 젊은이들을 보면 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을 선체에 바짝 붙이고 발버둥 치는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의 승객들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을 받게 된다는 것은 바짝 붙어 있으려고 몸부림치던 그 거대한 세상에서 기꺼이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침몰하는 배입니다. 그런 세상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존재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와 후서에서 자기에 대해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1:13을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자기 인생이 엿가락 쪼개지듯 그렇게 절단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로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느닷없이 난입한 천국(성령)에 의해, 십자가 그 언약의 피에 의해 자기 목숨에 연연하던 인생이 두 동강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겁니다.

그는 자기를 핍박자요 폭행자로 묘사하지요? 생각해 보세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깡패 출신입니까? 아니에요. 그런데도 자신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들이닥쳤기에 자기 안에 유발된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이에요. 과거에 그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이단으로 확신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거지요. 자기 나름의 의로운 분노였어요. 자기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으로 확신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고 그들을 핍박하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던 거지요. 그러니 그 어떤 과격한 일이라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단 척결이라는 사명감으로 불탔던 거예요.

그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을 때만났을 때, 자기는 주님께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디모데전서 1:13-14 계속 보겠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했는데 지금은 긍휼을 입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는 거예요.

내부 전쟁을 치열하게 치렀던 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천국 백성이에요. 사도 바울이 자기를 사례로 들어 보여준 거예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감당할 수 없었다는 거지요. 우리도 우리 인생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15-16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만 구원받으면 돼가 아니었던 거예요. 자기가 전한 복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도록 주께서 자기를 사용하셨다는 겁니다. 그를 샘플 되게 하셨다는 거지요. 옷 가게 쇼 윈도의 마네킹처럼 그렇게 사도 바울은 구원 얻는 우리 모두의 본보기로 우리 앞에 제시되었던 거예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서는 더 깊이 나아갑니다. 디모데후서 1:9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그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라고 하지요.

Who hath saved us, and called us with an holy calling, not according to our works, but according to his own purpose and grace, which was given us in Christ Jesus before the world began,

이것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의 강조점과 다소 다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자기가 주님을 핍박했다는 점에 비중을 두었는데 여기서는 그것마저 바울 본인에게서 나온 자기의 행위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 말은 그 핍박은 주님께서 스스로 자기를 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민수기의 전쟁 원리를 사울 안에서 작동되게 하셨다는 말이에요. 주님의 말씀으로 사울의 불연속성을 들춰내시고 그가 겪은 이 내부 전쟁이 이제는 외부로 확장되게 되는 바로 그 전쟁의 비밀이 역사 속에 자리 잡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로써 우리에게는 내 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게 분명해졌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심지어 손가락,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전부 다 주님의 전쟁과 무관한 게 없어요. 아들이 수능을 망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사업이 망하고 병에 걸리고..., 그런데 이게 다 하찮은 일이에요.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모두가 주님의 명예와 관련된 악마와의 전쟁의 징후로써 사용된 것들입니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너의 전쟁에서 너를 끊어내어 나(예수님)의 전쟁에 투입하기 위해서라는 거지요.

<친구>라는 조폭 영화에 유명한 한 장면이 있는데요 화가 난 교사가 학생 볼을 당기면서 이렇게 말해요.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 그때 학생이 담담하게 대답합니다. “우리 아버지 깡팬데요.” 자기는 깡패 새끼라는 말이잖아요. 선생님이 이게 어디 쌤 앞에서 농담해!”라고 하자 반 친구들이 팩트를 말해줍니다. “저그 아버지 깡패 맞는데요. 선생님이걸 성도의 일상에 적용해 보면 이래요. 사람들이 너 뭐야?”라고 시비조로 말하면 ? 이단인데요라고 하면 그만이에요.

교재의 결론 부분을 봅시다. [...성령이 오셨다. 십자가를 반복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그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순간임을 알려주신다.] 누가요? 예수님이시지요. [새삼 추가시킬 신비는 없다. 그저 고귀한 거짓말만 제시하신다. ‘출현 된 어리석음에 우리 정신이 부딪쳐 깨어지기를 요구하신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낳는 것이다.] 어디다가요? 바로 죄인 된 우리 안에요. 우리 안에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낙수 현상을 일으키는 거예요.

언약궤의 피가 현재 우리가 보존코자 하는 목숨과 차이를 내면서 우리 목숨을 유월절 어린 양의 생명으로 교체시키는 그 전쟁에 우리를 초대하신 겁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가 정들었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우리에게 목표를 갖게 했던 이 좀비의 세계와 이미 결별한 상태에 놓인 거예요. 이 사실을 놓고서 우리는 지금도 마귀와 내부 전쟁 및 외부를 상대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더러 언약궤 밖에서 기다려라. 내가 다 이루었다. 내가 약속한 성령을 보내주겠다 성령을 통해서 위에서 성령을 흘려보내 줄게라고 하셨기에 우리에게 장착된 무기는 오로지 한 분 주님에게서 나온 단일 무기입니다. 이 싸움을 위하여 언약궤에 발린 피로써 우리가 예정된 대로 새롭게 태어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세상과는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어요가 되는 거지요. ‘그대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날의 진실인가요?’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세상에서 잊혀진 계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장착시킨 무기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우리는 불신자와 다를 게 없어요. 불신자도 죽어서 좋은 데 가길 원하잖아요. 끝까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자기만을 위해 사는 존재와 우리가 다를 게 없는 게 돼요. 그러니 세상 사는 일에 구애되지 마시길 바래요. 침몰하는 세상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뛰놀면서 사세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우리가 쓴 투구는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 죄인으로 태어나 이단으로 살며 침몰해가는 세상의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고있어요. 예수님이 떠난 세상에서 우리도 나그네로 살다 갈 겁니다. 우리도 이미 예수님 신세에요. 이것이 바로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예정된 성도의 운명입니다. 이미 예수 안에 들어와 있기에 위와 아래, 양쪽 세계를 다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그저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전까지는 나의 전쟁밖에 없었고 남한테 안 지는 것이 사는 이유였습니다. 이제는 질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세상이 침몰하는 것도 주님의 안목으로 발견하게 되었사오니 이것이 창세 전에 이미 주 안에서 계획된 주의 일이지, 어느 하나 나의 일이 아님을 도리어 홀가분하게 감사할 수 있는 저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4년 겨울 수련회 교재 Ⅰ

 

[ 영적 싸움 ]

 

-에베소서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전쟁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 전쟁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순수 중립적인 개념으로 나열된 물리학 속의 단어를 살펴본다.

 

공의 움직임은 공을 구성하는 물체의 움직임으로 일어나고, 별의 궤도는 별을 구성하는 물체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며 사람의 감정은 사람의 뇌를 구성하는 물체의 움직임으로 일어나는 등 모든 현상을 물체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물체의 운동은 물리의 출발점이 되는 개념이다. 역학의 목적은 물체의 운동론을 완벽하게 기술하는 것이다.

 

질점(質點)이란, 질량은 있지만 크기를 무시한 물체, 즉 질량을 가지는 점 입자를 말한다. 질점을 가지고 운동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아야 운동에 대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물체의 위치를 시간의 함수로 구할 수 있으면 된다. 함수는 어떤 변수가 정해졌을 때, 그에 따라 다른 변수가 결정되는 관계성을 말한다. 물체가 언제(시간), 어디(위치)에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는 말이다.

 

변위는 위치 변화량을 의미하며 물리 세계에서 단위 시간(1초가 일반적)이 어느 정도 이동하는지를 수치화한 값이다. 물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예측하고자 할 때, 지금 속도가 어떻게 빨라지고 있는지(가속)를 파악하면 된다.

 

그런데 과연 물리학이 전쟁과 초연하게 자기만의 고유영역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의미meaning 와 뜻sene은 정반대 것이다. 의미는 큰 영역에 속하며, 우리 경험의 장 전체의 정합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지만, 뜻은 ’뜻 없음‘의 바다에서 국소적으로, 우발적으로 일어난다. 의미는 전체 수준에 속하지만 뜻은 비(非) 전체이다.

 

궁극적인 의미는 종교에 의해 보장된다. 예를 들면 살인, 기근, 각종 재앙 등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혼란도 신의 관점에서 보면 보다 지고한 의미를 지닌다.

 

뜻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은유의 마술이 폭발해 나오듯 그렇게 홀연히 등장하는 어떤 것이다. 즉 언어적 논리는 비-논리적인 무의식적 결정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다. 인간의 이성은 우발적인 사건과 늘 일치되지 못하고 빗나간다.

 

의미는 해석의 소임이며, 뜻의 총체성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의미는 전반적이며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나타나는 세부 사항을 아우르는 지평이다.

 

뜻은 뜻-없음의 장에서 일어나는 국소적 발생이다. 의미는 외부로부터 비(非)-의미에 의해 위협받는다. 뜻은 뜻-없음에 내재하는, 터무니없는 우발적 또는 행운의 산물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지니지만 뜻은 만들어진다. 의미는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기표의 뜻 없으므로 환원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궁극적인 공포는 순진한 가면이 그대로 벗겨질 때가 아니라 오히려 숭고한 텍스트가 잘못 해석될 때 일어난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자신에 대해 오류 된 뜻으로 이해한다.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부지불식중에 우리는 자신의 본질과 싸우게 된다. 교전 중인 모든 입장, 모든 편들기는 필연적 환상(일단 적이 제거되면 나의 존재가 완전한 실현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2. 나를 향한 전쟁

 

진정한 적은 맞서 싸우고 있는 상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한성이다. 전쟁이 흥미를 끄는 것은 투쟁 자체가 아니라 관여된 입장들을 통해서 ‘진리’가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교전 당사자들의 ‘상호 파괴’를 통해서 드러난다. 전쟁의 진정한 정신적 의미는 명예, 승리, 방어 등이 아니라 절대적 부정성(죽음)이 절대적 주인이라는 점이다.

 

조직화 된, 유한한 삶의 거짓 안정성은 죽음을 일상에서 배제하기로 합의를 본 상태에서 전쟁을 벌인다. 즉 죽음을 배제하고 산 사람끼리 구성할 수 있는 ‘진리’를 규명하겠다는 시도가 전쟁이다. 이긴 자의 것이 진리의 구현체로 상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보편적인 원리는 자신과 무관한 투쟁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투쟁은 매번 보편성 자체의 운명을 위한 투쟁이다. 유지적 삶에서 특수한 순간들은 상호 간의 투쟁 속에 있으며 이 투쟁을 통해 보편성은 자신을 재생산한다.

 

이 세상 속에서 침착하게 ‘우리가 유한한 존재, 허무한 존재’라고 선언하기란 얼마나 쉬운지!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서 생판 처음 보는 적군 병사가 괴물처럼 들어와서 허락도 없이 가족을 건드릴 때, 그것을 예상했던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전쟁을 통해,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게 하고 자신의 승리자 됨을 확신하게 만드는 억지가 유지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방해하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패배만이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즉 투쟁의 진리는 오직 패배 속에서만 나온다.

 

이처럼 전쟁터는 적의 파괴가 아니라 서로가 상호 패배자로서 자신들은 파괴될 자임을 확인하는 정화의 환경이기도 하다. 군사적 전시 상황이 아니더라도 상호 패배 경험은 노동 시장에서도 발생한다.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가에 대한 투쟁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실은 목표도 없고 무미건조하기조차 한 대자연의 침묵에 대한 인간의 저항행위이다. 이런 말은 분명 억지다. 하지만 말 없는 자연을 상대로 매일 같이 투쟁하고 피로에 절어 귀가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패배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노동자의 노동은 노동자의 자기 정화행위가 된다. 노동은 외적 대상을 변형시키는 일인 동시에 주체 자신을 규율하는 자기 도야 행위이다.

 

노동은 나의 창조성의 직접적 표현이기는커녕 내가 인위적인 규율에 복종하도록, 나의 가장 내밀한 직접적 성향들을 포기하고 내가 자연으로부터 소외당했음을 인정하게 한다.

 

3. 자아의 내부

 

보다 낮은 차원의 기층을 무시하고 더욱 높은 수준의 과정들을 어떻게 하면 자연발생적으로 지각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동시에 나를 행위자로 바라본다.

 

높은 파도가 해변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을 수면을 가로질러 오는 실체적 존재로 지각한다. 하지만 이 파도는 아무런 실체적 동일성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의 원자들은 내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행되는 일은 물과 분자들 사이의 무한히 복잡한 상호작용이 대양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같은 파도의 효과를 낳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신적 삶의 자연발생적인 ‘사유의 동역학’의 효과이다.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의 무한한 복잡성을 피하려고 우리는 보다 높은 수준의 존재자들을 구성한 다음 그들을 ‘행위자’로 지각하는 것이다.

 

‘나’도 이와 같다. 누군가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유발하는 뇌와 근육 사이의 무한히 복잡한 상호작용을 다 분석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문제의 행위를 일으킨 힘을 가진 ‘어떤 것’을 상정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것을 ‘나’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고도의 압축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상실된다. 잔을 입에 대고 물을 마실 때 “내가 왜 잔을 들었지?”라는 질문에 대한 진정한 대답은 ‘갈증’이다. 여기에는 손 근육에 신호를 보내는 뉴런(신경세포) 차원의 복합체가 포함될 것이다. 이 수준에서는 ‘의도’ 같은 것은 없으며 그저 극히 복잡하지만, 단순한 자연적 인과(因果)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사물들을 단순화하기 위해서 나는 ‘의도’를 원인으로 상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물을 마시기 위해 잔을 들었어”라고 말이다.

 

모든 현실의 무한히 복잡한 네트워크가 정말로 외부에 존재하며 그것이 궁극적인 진정한 현실이며 단지 우리의 유한한 정신은 접근할 수 없다고 하는 전제는 과연 옳을까? 모든 구분이 무한대로 계속되고 그 와중에 어떤 것들은 현실적으로 흐릿해지고 무시된다면 결국 궁극적 현실이란 ‘공백의 바다’가 된다.

 

‘자아’를 다수의 물질적 사례들을 동원할 수 있고, 그사이를 흘러 다니는 보다 높은 수준의 패턴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자아를 ‘큰 통속의 뇌’로 보는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큰 통에 뇌만 덜렁 있더라도 뇌는 자신을 하나의 전체 육신일 것이라고 느끼는 것).

 

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는 ‘패턴들’은 나의 뇌뿐만 아니라 나의 다른 신체 부위, 그리고 내 몸 외부에 존재하는 사회적 제도들, 그리고 동식물뿐만 아니라 하늘의 별, 구름, 바람, 각종 자연의 소리, 이 모든 것들과의 상호작용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내가 나의 주변 사람들과 사물들과의 상호작용 과정과 방식이 나의 자아를 구성해 낸다.

 

나의 자아를 형성시키는 복잡한 사회적 네트워크(환경)가 내게서 자아를 박탈하기까지 한다. 우리 인간이 이 대자연이 만드는 ‘보편적 기계’의 일종이라면 우리 자아는 결국 이 보편성의 한계 그 자체이다.

 

예를 들면, TV 화면에서 TV가 올려져 있는 책상을 볼 수 있는데 이 TV 속에도 다시 TV가 올려져 있는 책상이, 그리고 그 책상 위에 다시 TV가 … 이처럼 자아를 계속 확대 재생산하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이것은 언어(말)를 구사하는 당사자 자아가 있고, 그 언어 안에 담겨 있는 내용으로서의 자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느 것이 진짜 자아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 모두가 다 자아다.

 

이처럼 신경 중심주의자들은 ‘나’를 뇌와 동일시 하는 견해와 그것을 반박하는 견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그 어떤 뉴런적 차원의 견해도 ‘나’를 설명하는 데 그리 적합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 그들은 ‘자아’의 존재를 다시 붙든다. 나를 지상의 작은 신으로 여긴다. ‘나’라는 신(神)은 대체 누구 혹은 무엇인가?

 

뇌과학이란 결국 인간들은 실제로는 단지 뉴런적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것과 그리고 현상적 자기 경험의 표면 아래에서 우리 인간은 아는 게 전혀 없는 ‘바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조차도 받아들여야 할 형편에 있다.

 

그래서 광활한 우주로 의식의 범주를 넓혀서 이 두려움이 주는 중압감을 한없이 넓은 공간과 기나긴 시간으로 분산시켜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밑’, 또는 ‘뒤’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 의식을 전적으로 물리적 현상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즉 자기의식의 현상적 수준을 괄호 안에 넣고 자신을 ‘현실’에 제한시키는 순간, 의식조차 너무 희미하게 되어 붙잡을 수 없게 된다. 마치 무지개와 일치하는 현실 속의 어떤 신비로운 X를 적시하기 위해 무지개를 좀 더 가까이 살펴보려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의식은 가상의 출현을 분간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도록 만든다. 무엇이 우리를 왜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 내게 하고 그것을 상상하게 하는가?

 

이러니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아무리 제거하고 제거해도 남겨진 ‘그 무엇’과 끊임없이 내면적으로 싸우게 된다. 자꾸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의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 곧 ‘죽음’이다. 그 죽음의 공간이 바로 ‘나(자아)’다. 즉 ‘나는 살아있는 죽음’인 것이다.

 

4. 자아의 죽음과 구원

 

자아와 관련된 모든 인과(因果)성이 멈추는 곳, 그곳이 바로 죽음인데 이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 밖에서 죽는 죽음을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과 영광에 참여할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 하신대(요 20:17)”

 

아버지의 영광을 보지 못하도록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으로 인간의 눈을 막으셨다. 예수님은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차단하기 위해 덮였던 수건 기능의 결정체이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3-15)”

 

구원이란 예수님의 특별한 죽음이 방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귀환이나 재림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성령)’의 방문이다. 이로써 자아를 구원코자 하는 인간의 의지와 이 결사적 투쟁의 후원자인 ‘구원 신화’는 성령님의 방문으로 인해 자동으로 거짓된 것임이 드러난다. ‘자아 보편성’의 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먼저 일어난 ‘자아와 자아의 투쟁’을 성도 될 자들에게도 발생 되게 하시는데 그것은 ‘예수 밖의 기존 자아’와 ‘예수 안의 새로운 자아’ 사이에 전쟁을 벌이게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고후 13:5-6)

 

5. 예정

 

예정설은 우리의 운명이 영겁부터 신성한 정신 속에 존재해 온 꾸준한 텍스트(성경)에 봉인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운명이 예정된 텍스트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영원한 과거에 속하며, 이 과거 자체는 우리 행위로 소급해서 다시 쓰일 수 있다. 예정설에서 운명은 그러한 과정에 선행하는 ‘결정’으로 실체화되며, 따라서 개인이 떠안은 행위의 짐은 수행적으로 운명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선재하는 운명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시킨다(추정한다). 그리하여 우연의 필연성으로의 변증법적 전도가 모호해져 버린다. 즉 우연적인 과정의 결과가 필연성의 가상을 띠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물들은 소급하여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의 특이성은 인간들이 예상하는 예정론을 비틀어버리는 ‘사건’이란 점이다. 그렇게 해서 성도의 운명뿐만 아니라 성도의 자아성까지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십자가를 알기 이전에는 우리는 그저 죄를 짓는 숙명에 놓여 있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죗값을 치르셨다는 정도로만 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과거 죄를 없애준다는 것은 정확히 그의 희생이 우리의 잠재적 과거를 바꾸고 우리를 해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나의 상처가 나보다 먼저 존재했다. 나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태어났다’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첼시 고양이의 미소는 고양이 자체보다 미소가 먼저 등장했음을 보이기 위해 고양이가 사라져도 오랫동안 현장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예정된 자신의 상처를 구현하기 위해, 곧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세상에 출생하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의 예정된 운명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의 부단한 활동을 몰고 가는 것이 바로 이 불확실성이다. 따라서 자아 해부는 필수다. 해부의 진리는 어떻게 ‘자아’가 있지도 않은 ‘나’와 교체되느냐에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본래의 역사성과 유기적 진화를 구분해야 한다. 유기적 진화의 경우 보편적 원리는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자신을 분화시킨다. 그 자체로서 그것은 투쟁하는 개인들의 분주한 활동, 생명의 순환인 생성과 쇠퇴의 무한한 과정을 통일시키는 차분한, 기저에 깔린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토대로 남아 있다.

 

그와 반대로 모든 본래적인 의미의 역사성은 자아의 보편성 속에서 자아가 거부하는 투쟁을 말한다. 기존 자아에 근거한 지혜는 늘 보수적이다. ‘생명의 순환’이라는 고대의 주제, 즉 생성과 쇠퇴라는 주제는 실은 우리 인간들은 근원적으로 폐쇄되어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 어리석게도 인간들은 ‘폐쇄’를 지키려는 것이다. 모든 갈등과 전쟁이 그친 그 화해의 순간도 여전히 이 폐쇄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음이 재표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출발선에서 한 발짝도 이동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긴 것 같지만 손바닥 한 뼘으로 압축된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 39:5)”

 

행위의 결과로 최종 국면에 이르렀다고 할 때 이는 스스로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했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폐쇄성의 완벽을 사람들은 도리어 자신의 이상(理想)으로 여긴다.

 

Ⅱ 본론

 

(줄거리)

 

사도는 예수님이 주시는 복을 구약의 복과 대비하여 신령한 복으로 소개한다(1:3). 따라서 에베소서를 대하는 자들은 이 신령한 복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이 구약에서 이야기한 복과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말이다.

 

우선 그 복은 하늘에 속했다고 되어있다.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창세기 3:22의 ‘생명나무’를 연상시킬 만하다. 그런데 그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에게만 부여된다. 그럴만한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도 분명하다. 왜 모든 자의 것이 될 수 없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오직 선택한 자여야만 한다는 언약에 규제받기 때문이다(1:5).

 

그러면 왜 예수 안에서의 선택이냐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만이 선택의 유일한 근거가 되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이 무조건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풍성한 은혜이다(1:7).

 

예수님이 성취하신 그 신령한 복, 즉 죄 용서의 복은 모든 구약의 복이 지향한 복, 바로 그 자체이다(1:7).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모두가 예수 안에서 뭉쳐지고 통합되었으니 상속자인 우리는 그저 그분의 영광을 찬미할 따름이다(1:12, 14,3,6). 모든 만물, 즉 죽은 자나 산 자나 온 우주와 하늘의 존재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몰려드는 그 위엄과 능력에 대해 이제 성도는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하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1:17-22).

 

교회는 그분의 활동과 사역의 중심지라는 의미에서 주님의 몸이다(1:23). 그분의 사역이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가? 우선 교회로부터 시작된다. 교회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로서만 구성된다(2:1).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예수 안에서’라는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이기도 하고 그래야만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본질을 확산시키는 몸의 구실을 톡톡히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2:7).

 

여기서 ‘예수 안’이란 말은 예수님에게 발생한 은혜의 사건 전부를 의미한다. 함께 살아나고(2:5) 함께 하늘에 앉히는(2:6)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란 감정 차원에서 처리 될 것이 아니다. ‘역사’라는 모습으로 등장했으나 땅에 속하지 않는 사건을 말한다.

 

그 사건이 이제는 교회 안에서 교회의 모습으로 지속된다. 교회란 은혜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그 은혜의 능력으로 언약밖에 있던 자들까지 하나님의 동일한 식구가 되는 기적이 주어진다(2:11-22).

 

이것은 율법에 따른 기준이 철폐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새로운 기준으로 작동하여 새 사람됨의 자격이 부여된 결과이다(2:15).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거주하실 곳도 이곳이 된다(2:22). 성령은 이 처소를 이루는 일을 하신다.

 

사도의 이러한 성전 개념은 에스겔서에 제시된 성신의 역할이 성전 재건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다윗 언약의 완성이 역사 안에서 실현되었음을 나타낸다(에스겔 37:25-28/48:35)

 

이 성전이 되어 가는 구체적인 모습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 드러난다. 즉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자에게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 일에 관여된 자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3:6-8).

 

사도는 자신이 환난 받고 고난받는 것에 주목하는 데서 주의를 돌리고 성도들이 부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의 풍성함을 더욱 알게 되기를 원한다(3:14-19).

 

바로 그 사랑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이다(4:2). 교회란 우리가 모두 하나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 목적이 이해될 수 있다.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다. 교회가 이미 세상에 대해 승리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은사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있다.

 

은사는 이미 승리한 자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4:8-11). 이미 주어진 구원의 능력이 제공되었기에 지체들은 주님의 그 승리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몸으로 자랄 수 있다. 그러니 성도는 썩어져 가는 옛 구습을 버리고 구별된 자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4:22-23).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행하는 삶이다(4:32-5:2). 사랑은 우선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버릴 것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희롱, 방탕과 음행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행해야 할 것은 범사에 감사하고 찬양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가정생활에 있어서 아내는 남편을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대해야 하고 남편도 이와 마찬가지다. 부모도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며 종과 주인 사이에도 이와 같다.

 

이 모든 것에서의 구별됨이 ‘거룩’이다. ‘비-거룩’‘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인데, 우리는 이들과 대항 되기 위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갑옷을 착용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으로 인해 정신을 차리고 다른 성도들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6:18).

 

 

Ⅲ 결론

 

실패를 수단으로 하여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의 얼굴은 폭행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다. 인간의 접근은 실패다. 인간이 예상하거나 성취할 수 없는 세계가 천국이기에 인간들은 다른 세계를 꿈꾸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야기된 천국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사람들의 고집도 여전하다. 자신을 버리지도 못하고 버리는 방법도 모른다. 어디에다 버릴지도 모른다. 자유스럽기에 그 자유를 버릴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낭패다.

 

“이것이 저의 형편이라면 하나님이여 저에게 저주를 내리소서”라고 기도하지 못해서 더욱더 절망적이다. 금지되지 않는 욕망이라서 하나님으로부터 금지당하기에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성령이 오셨다. 십자가를 반복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을 그때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순간이었음 알려주신다. 새삼 추가시킬 신비는 없다. 그저 ‘고귀한 거짓말’만 제시하실 뿐이다. ‘출현된 어리석음’에 우리 정신이 부딪쳐 깨어지기를 요구하신다. 십자가가 십자가를 낳겠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속아 넘어갈 때만이 저항이 없는 관계에 놓인 것이다. 이때가 나에게서 나를 빼는 순간이다. 그 결과 더는 십자가를 믿는 나는 사라지고 그저 ‘십자가가 된 자’만 그 자리에 생겨난다.

 

 

 

 

2024년 겨울 수련회 교재 (2)

 

 

므나헴(B.C 752-742)

디글랏빌레셀 3세(B.C 746-727)

아하스(B.C 735-720)

베가(B.C 736-732)

호세아(B.C 732-722)

살만에셀 5세(B.C 727-722)

사르곤 2세(B.C 722-705)

산헤립(B.C 704-681)

에셀핫돈(B.C 681-669)

아슈르바니팔(B.C 668-627)

나보폴라실(B.C 625-605)

므낫세(B.C 687-642)

느고(B.C 610-595)

요시아(B.C 640-609)

여호아하스(B.C 609)

여호야김(엘리야김)(B.C 609-598)

예레미야(B.C 627-580)

느부갓네살(B.C 605-562)

다니엘과 세 친구:1차 바벨론 포로

여호야긴(B.C 598-597):2차 바벨론 포로. 에스겔(593-570)도 함께 함

시드기야(B.C 597-586)

벨사살(B.C 556-539)

 

고레스(B.C 559-530)

세스바살

스룹바벨

(남자 여자와 아이들: 47,0742 레위인: 74 레위인 성가대원: 128 짐꾼:110 성무를 돌보는 사람: 392 그 외 이스라엘 정통성이 없는 사람: 662 )

여호수아

캄비세스 2세(B.C 530-522)

다리오(B.C 522-486)

학개(B.C 520)

스가랴(5B.C 20)

닷드네(페르시아 총독)

에스라+5000명 (1차 귀환자: 42,360+종 7,337=49,697/ 2차 귀환자: 남자 1,500+레위인 38+조력자 220=1758)

아하수에로(B.C 486-465)

아닥사스다(B.C 465-425)

느헤미야(성벽재건: 52일)

바슬람+미드르닷+디브엘

산발랏+도비야+게셈

 

 

중간기

 

비어 있는 계시를 정치적 힘의 균형으로 채운다. 이것이 인간 역사의 내부다.

 

알렉산더(B.C 336-323)

다리오 3세(B.C 335-331)

야두스(예루살렘의 제사장)

안드로마코스(알렉산드가 세운 사마리아 총독)

메논(알렉산드가 세운 유다총독)

하시딤(경건한 자)

프톨레마이오스(B.C323-285)

셀류쿠스(B.C 312-280)

안티고노스+데메트리오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70인경)

셀류쿠스 3세(B.C 225-223)

안티오코스 3세(B.C 223-187)

셀류쿠스 4세(B.C 187-175)

안티오코스 4세(B.C 175-164)

프톨레마이오스 6세(B.C 180-145)

 

오니아스 3세(안티오코스 시대의 예루살렘 대제사장)

야손(오니아스 3세 뒤를 이은 대제사장)

메넬라우스(야손 뒤를 이은 대제사장)

가이우스 포필리우수 라이나스(로마쪽 대사)

아폴로니우스 장군(예루살렘을 점령한 군인:야손 처단)

엘르아살의 죽음(서기관. 돼지고기 못먹겠다고 버티다가 안티오코스 4세에게 죽음을 당함)

맛디디아스(B.C 167-166: 마을 원로 제사장)+아들들

유다 마카비(망치: B.C 166-160 맛디디아스이 셋째 아들)

리시아스 장군(안티오코스 4세 휘하의 진압군)

필립: 리스아스의 장군 정치적 라이벌

데메트리우스 1세(B.C 162-150)-안티오코스 5세와 리시우스와 메넬라우스도 처형합니다.

알카무스(데메트리우스 1세 시대의 대제사장)

니가노르 장군(사리아에서 온 응원부대)

바키데스 장군(니가노르 후임 장군)

요한, 시몬, 요나단(B.C 160-142) 마카비 부대의 유다 후임. 152년에 예루살렘 점령

알렉산더 발라스(데메트리우스 1세의 정적)

데메트리우스 2세와 트리폰 장군도 상호 정적

프톨레마이오스 6세

안티오코스 6세(B.C 142)

시몬(1B.C 42-134): 마카비 군대의 다음 장군

요한 힐카누스(세째 아들)(B.C 134-104)

안티오코스 7세

프라이테스(파르티아 왕)

바리새파/사두개파

힐카누스 아내

아리스토불루스 1세(B.C 104-103)

살로메 알렉산드라(아리스토불루스 1세의 부인)

알렉산더 얀네우스(B.C 103-76)

클레오파트라 3세(알렉산더 얀네우스를 지원한 이집트 여왕)

게루시아(장로회 공회. 로마시대에 산헤드린이 됨)

아레타스 3세(아바테아의 왕. 힐카누스 2세와 합세하겨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잠시 실각시킴)

힐카누스 2세(67)의 알렉스 산드라가 죽자 대제사장을 맡음

아리스토불루스2세(B.C 67-63) 왕위와 대제사장직 겸직

 

폼페이우스(B.C 65)

스카우루스 장군 (B.C 65 폼페이우스 휘하의 로마 장군)

안티파터(B.C 63-43. 폼페이우스를 등에 엎은 실제적인 유다땅 정복자. 이두매인)

파사엘(B.C 47. 예루살렘 총독)

헤롯(B.C 37-4. 갈릴리 총독)

안티고누스(B.C 40-37 아리스토불루스의 2세의 아들. 대제사장)

옥타비우스(B.C 30 안토니우스를 이김)

 

미리암네 1세(B.C 37 헤롯의 부인)

미리암네 2세(B.C 24 헤롯의 세 번째 부인. 빌립을 낳았다)

말다스(헤롯의 네 번째 부인. 아켈라오-마 2:22. AD 18년에 죽다.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매 본분왕- 와 안티파스- 행 14:3를 낳았다. 갈릴리 본분왕 AD 39에 죽다)

헤롯 아그립바 1세(행 12:23. AD 44년에 사망)

헤롯 아그립바 2세(행 26:1. AD 100년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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