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40927b 로마서 8장 30절(정도와 본성의 차이)-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시공간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정도(程度, 사물의 성질이나 가치를 양부(良否), 우열 따위에서 본 분량이나 수준)의 차이죠. 인간의 정도의 차이. 정도라 하는 것은 있음+있음+있음, 더하는 거예요.
이 있음하고 인간은 지금 여기다 뭘 추가하느냐 하면 있음 세계 때문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 세계를 위해서는 있음 가지고 빼기를 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시키면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인간이 지성적으로 정복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로렌츠 변환이라니까요.
x,y축이 있어야 될 이 좌표평면에서 이 y축을 뭐로 바꿉니까? 시간좌표로 바꾸는 거예요. 여기서 𝑖,imaginary number라는 게 있는데 𝑖는 이겁니다. 있음의 수직선은 하나밖에 없어요. 원점을 기준으로 우측은 1,2,3,4, 있음, 있음, 있음,… 좌측은 -1,-2,-3,… 이게 인간의 전부에요. 그런데 수직선을 제외한 주변은 없는 세계에요. 없는 세계에다가 빼기를 각도로 바꾸는 거예요. 있는 세계를 동그라미 치고 빼기 방향(시계 반대방향)으로 90도 가고 또 90도 가서 180도 가면 -1이 되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𝑖×𝑖을 하게 되면 뭐가 된다? 보이지 않는 수와 보이지 않는 수를 곱하니까 -1. -1은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는 수를 경유할 때는 보이는 수가 나오는 이런 아이디어를 만든 거예요. 각도 90도를 두 번 꺾으면 -1이 되고 한번 꺾으면 그냥 𝑖가 된다. 𝑖는 뭡니까? 두 번 곱해서(제곱해서) -1이 되는 수가 𝑖에요. imaginary, 없는 수인데 만들어낸 거예요. 없는 수를 만들어낸 거예요.
없는 수를 이렇게 만들어냄으로 말미암아 시간을 공간 속에 집어넣고 공간을 시간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를 만든 거예요.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치 않아요. 뭐가 있냐 하면 광속(c)이 있는데 이 광속은 특징이 뭐냐? 공간으로서 포착이 안 되는 거예요. 어느 공간에서도 30만km/초로 변동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아주 신기한 거예요. 30만km/초. 세상에 모든 게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게 뭐냐? 광속이에요.
그래서 결국 과학이라는 것은 이거에요. ‘광속을 믿냐, 아니면 너의 자율 또는 자유를 믿느냐?’ 이걸 요구하는 거예요. 광속을 믿는 것은 과학이고 인간의 자유를 믿어버리면 이건 자아세계고. 그런데 둘 중에 누가 이겼어요? 과학이 이겼잖아요. 과학이 이겼어요. 인간은 뭐다? 양자역학에서 하나의 전자 흐름이다. 왜냐하면 전자, 광자 이거 과학에 속하거든요. 이 과학이 인간을 이기는 거예요. 인공지능이 누굴 이겨요?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는 거예요. 광속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변한다. 변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에 종속된다.
이 특수상대성 원리에서 나오는 로렌츠 변환. 이렇게 해서 이제부터 Q라는 지점을 표기할 때 S의 거리는 S²=X²-C²T²이라는 거예요(아래 그림 참고). 즉 모든 물체는 시간 요소까지 집어넣어야 제대로 시공간 내에서 자기 좌표를 정확하게 나타낸다는 거예요. 이런 로렌츠 변환(광속의 불변을 설명하기 위한 변환관계) 됐죠.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조사해보니까 이 세상은 공간세계가 아니었어요. 확정된, 변하지 않는 빛에 의해서 모든 것이 조성된, 변하지 않는 빛의 속도에 종속된 세계라는 것이 일식 가운데 빛의 휘어짐을 확인하면서 증명된 거예요. 과학이 진리였던 거예요. 빛의 속도 30만km/초가 진리라는 게 증명된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무슨 세계라 했습니까? 정도에요, 정도. 뭐를 놓쳤습니까? 인간의 정도의 차이만 알았지, 뭘 몰랐어요? 본성의 차이는 몰랐던 겁니다. 인간의 질적 차이를 몰랐던 거예요. 정도라 하는 것은 있음과 있음의 차이, 작다/크다 또는 빠르다/느리다 이거에요. 모두 과학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증명이 됐거든요.
있음은 없음의 원칙을 경유해야 있음이 적용되고, 모든 있음의 세계는 변하지 않는 광속에 의해서 전부 다 조종 받는 세계에요. 조종 받는 세계. 그래서 이 정도의 차이에서는 인간은 뭐로 설명되느냐? ‘모든 인간은 광자 덩어리’다. 광속이니까. 이거 말고 다른 절대 진리가 어디 있어요? 인간은 광자 덩어리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걸 보고 뭐라고 하겠어요? 인간들이 광자 덩어리라고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네가 뭘 아느냐고 묻는 게 아니고, 누가 시키더냐?” 누가 시키더냐. 이 질문에 대해서 사람은 답변을 못해요. 아인슈타인의 이런 원칙, 수학, 진리, 측정값, 이 모든 것을 누가 시키더냐 하는 거죠.
그럼 아까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2차원 공간에서 x와 y축이 있고 0(원점)에서 어떤 P(x,y)라는 지점을 나타낼 때는 x²+y²=거리 r²이라 했잖아요. 이걸 사람들이 진리라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원점을 누가 정했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야기를 안 해요. 원점을 누가 정했나. 이 원점을 뭐라 했습니까? 관찰자. 관찰자를 누가 정했느냐 하는 거예요. 본인이 정했죠. 관찰자를 본인이 정한 거예요. 본인이.
그런데 이 관찰자가 양자물리학과 상대성물리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게 c, 빛의 정도로 바뀐 거예요. 인간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이제 완전히 포기를 해야 돼요. 인간의 모든 지성과 이성은 전부 다 포기되어야 돼요. 소용없는 짓이에요.
주님은 ‘누가 시키더냐’ 이렇게 해서 관찰자+배후 존재, 관찰자의 배후 존재를 겨냥해서 주께서는 말씀을 주신 겁니다. 네가 세상을 네 중심으로 보는데, 그렇게 네 중심으로 보라고 누가 시키더냐고 묻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동안은 인간 중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했다면 인간 중심으로 했던 모든 지성과 과학적 노력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빛으로 바뀌었잖아요. 빛의 속도, 빛의 성질로 바뀌었잖아요. 인간은 이 속에 종속되고 날아가 버렸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이 관계를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이게 계약이고 계약은 법이죠, 이 법을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놨지만 보이지 않는 악마가 인간을 이용해서 이 법, 계약을 방해 놓았어요. 악마가 계약을 방해 놓으라고 인간을 사주하러 온 거예요. 이걸 방해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뭐라 했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라. 아버지에 의해서 아들은 부르심을 입은 거죠.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잖아요.
똑같은 관계로 이미 악마와 인간 사이에 악마에 의해서 인간은 부르심을 받은 존재가 된 거예요. 그걸 의도하고, 악마도 마찬가지고 주님도 마찬가지고요. 서로 상생적인 관계들로 그 유사한 관계를 두고 악마가 인간 쪽에 모든 걸 시킨 겁니다.
제가 수요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까? 악마의 입장에서요, 선악과를 따먹는 데에 성공했잖아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었잖아요. 따먹었으니까 이건 누구의 승리입니까? 이미 게임 끝났어요. 하나님에 대한 악마의 승리입니다. 악마의 승리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트라우마로 가져가는 거예요. 자신의 트라우마.
트라우마로 가져갔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누구를 보냈습니까? 파견한 게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기 아들을 파견해서 버림받게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 아버지가 스스로 아버지 쪽에서 받아들일 트라우마를 아버지 쪽에서 생산하는 거예요.
아브라함보고 뭘 바치라 했습니까? 자기 아들을 죽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미워했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라는 거예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을 죽이라는 겁니다. 아들 죽이는 게 사랑이래. 이게 사랑의 극치랍니다. 인간의 존재 중심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곤란한 거예요.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고, 버렸다는 조건 하에 그 아들을 되찾아요. 예수님께서 “이 죽음의 잔을 안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된대요. 세 번이나 해도 안된대요. 죽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아버지가 아들을 다시 살리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안에 이런 트라우마가, 주와 주가 갈라지면서 치료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말라기 보면 “치료하는 광선”(4:2)이라고 되어 있죠. 하나님의 하나님 자기 치료에요.
그럼 이걸 하려면 인간의 것은 다 끄집어내야 되죠. 하나님이 만든 계약을 훼방하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건설한 것, 인간의 지성과 모든 지혜의 총합을 다 끄집어내야겠죠. 그걸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다 끄집어내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정도의 차이. 다시 말해서 있음과 있음의 차이를 파악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여기서 단위를 맞춰야 되니까요. 인간의 한계가 정도의 차이 인식이죠. ‘정도의 차이 인식’인 것을 어떻게 뭐로 바꾸느냐? 어떻게 ‘본성적 차이 인식’으로 바꿀 수 있느냐에요. 아까 첫 번째는 뭐라고 했습니까? 정도의 차이 설명했죠. 이제 두 번째는 뭐 설명한다고 했죠, 제가? 본성의 차이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그 문제.
그 문제가 사무엘상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장면이 나와요. 골리앗을 누가 이겨야 됩니까? 하나님이 누구한테 맡긴 업무였어요? 사울에게 맡긴 업무죠. 그런데 사울은 손을 못 대게 되어 있습니다. 왜? 사울은 지금 어디에 빠져 있어요? 모든 것이 정도의 차이라 했죠.
아까 첫째 강의에서 정도의 차이는 무엇의 차이라 했습니까? 힘과 힘의 우열을 논하는 차이죠. 힘. 누가 힘이 세냐? 인간으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기껏 저쪽 힘과 내 힘의 비교. 힘으로 상대 파악하기, 이건 인간들이 알고 있는 거예요. 정도의 차이밖에 몰라요.
그런데 지금 사울과 이스라엘 부대는 골리앗 힘에 맥을 못 추고 있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골리앗 힘을 키웠고 의도적으로 장대한 자를 장군으로 내세웠던 거예요. 하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이 어떻게 돼요?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었어요. 소용없는 헛소리가 된 겁니다.
그런데 이 골리앗 전쟁에서 정도의 차이를 넘어서는, 본성의 차이를 이야기한 자가 있죠. 누굽니까? boy, 소년. 소년 다윗은 사람을 볼 때 정도의 차이를 본 게 아니고 본성의 차이를 본 거예요. 할례가 없잖아, 할례가. 쉽게 말해서 십자가가 빠진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십자가 빠진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그게.
윤석열 생각할 때마다 늘 그런 생각해요. 십자가가 빠졌는데. 십자가 빠진 자리에 윤석열은 뭘 집어넣습니까? 술. 술로 정치가 됩니까? 십자가 빠졌는데요. 자기의 경험, 경험치. 경험에서 끌어 모은 힘. 얻고 저장하고 펼치고. 힘 얻고 저장하고 펼치고, 힘 얻고 저장하고 펼치고. 매일같이 반복하는 그거밖에 모르죠. 본성의 차이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드디어 다윗이 할례 받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의 확정된 계약을 언급했죠. 인간 내부에 힘으로 조성된 자기의 입법기능, 나는 힘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입법, 법을 세우는 이 기능이 다윗에게는 없습니다. 없어요. 전쟁할 때 사울 왕이 뭐 방패 들고 가라, 칼 들고 가라, 갑옷 입어야지 이건 뭡니까? 본인의 입법기능을 말한 거예요. 나는 경험상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옳다,라는 그걸 따라서 소년 다윗에게 입혀봤지만 힘이 없어서 휘청거리다 치워버리죠.
세상이 주는 입법기능을 따르는 것을 정신병자로 보고 연구하는 학문이 정신분석학이에요. 라캉이 말하는. 그것을 어렵게 표현하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상징계(symbolic)를 따른다. 상징계니까 이것이 뭐는 아니다? 실재계(real)는 아니다. 실재계는 모르고, 어릴 때부터 부모가 이야기한 언어 속에 담긴 모델, 허상만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실재하고 끊어져서 상징만 추구하면서 헛된 망상과 허구만 따라가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라는 논리에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라는 거예요.
내가 얻은 입법기능이라든지 내가 법 제정하는 것도 이미 기존에 나와 있는 기성품들이에요. 기존 세계가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거예요. 그대로 따라하는 것. 그러니까 남이 정신병자면 나도 같이 정신병자 되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까 봤죠? 베드로가 사단을 이야기하고 성령을 이야기한 게 아나니아와 삽비라로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되든 안 되든 그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이좋게 하루에 다 죽었잖아요. 다 죽었는데요. 왜 죽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일단 정신병자로 간주하고 그다음부터는 정신병자가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치료방법인 거예요. 정신병자를 정상적으로 만드는 건 없고, ‘아, 이래서 정신병자구나.’ 그걸 치료로 보는 거예요. 참 재밌죠? 왜냐하면 인간치고 정상인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상징은 새로운 상징으로 치환되니까. 대체가 된다는 거죠.
‘너는 그동안 교사하면서 무슨 낙이 있었노?’ 하고 음메 기죽어,하고 있었는데 미국 간다. 어? 그게 대체가 되죠. 와! 야, 교사라도 성공한 교사구나. 비록 일주일이지만. 자기 돈 안내고 가는 게 어디에요? 아, 부러워라. everybody 정신병자에요, 전부 다. 전부 다 미국이라는 헛된 허구적 상징에 매료되는 거예요. 상징에.
사무엘상 18장 29절 한번 봅시다. 이제부터 단위를 맞추는 거예요. 길이하고 시간하고 안 맞는 걸 인간은 맞췄잖아요. 이제 하나님도 정도를 아는 인간을 본성을 아는 인간으로 맞추는 거예요. 맞추는 방법이 사무엘상 18장 29절에 나옵니다.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more and more)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고 되어 있어요.
그다음에 19장 9-10절, 아 어려운 대목 나옵니다.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자, 여기서 단어 하나 뺍니다. ‘악신’이란 단어를 빼자. ‘악신’이란 단어를 빼고 이 대목을 우리 인간적으로 설명해봅시다. 그러면 “다윗이 나쁜 짓도 안하고 훌륭한 일했는데 당신은 왜 창으로 죽이려 합니까?” 했을 때, 그들은 뭐라고 답변합니까? 정도의 차이로 답변하겠죠.
“내가 미친 모양입니다. 내가 정신 좀 나간 모양입니다. 내가 이상하게 다윗을 보니까 더욱 더 미운 감정이 오는데 이건 다 내 잘못이에요. 내가 잘못해서 그렇습니다. 앞으로 내가 주의해서 다윗을 더욱 더 사랑하고 훌륭하다 칭찬하는 것이 어른다운 태도죠.”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겸손의 차이, 도덕의 차이, 착함의 차이, 인간성의 차이로 보죠. 인간성이라는 정도의 차이. 왜냐하면 겸손도 힘이니까. 낮추는 것도 힘이니까.
그러나 성경대로 하면 뭡니까, 이것은? 사울에게 어떠한 잘못도 없어요. 지금 성경이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뭘 해도 상관없다. 왜? 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이러면 안 되고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그게 아니고, 너는 뭐라도 해. 왜? 뭘 해도 의미 없기 때문에! 전도, 선교, 헌금 뭐라도 해. 물론 그런 건 안하겠지만. 배후에 본성적으로 악마가 너를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면 끝이에요.
악신을 이야기했잖아요. 이래서는 모자라요. 19장 19-24절, 좀 긴데 제가 빨리 읽어보겠습니다. “혹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지금까지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그들이 선지자 무리의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의 사자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사울이 다윗 잡으라고 보낸 그 부하들에게 갑자기 뭐가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했죠.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그들이 다윗을 잡았습니까, 아니면 실성했습니까? 어떻게 됐어요? 완전히 실성했죠. 실성한 거 뒤에 나와요.
그래서 “혹이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른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야, 이 인간들이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군기가 없어. 여기 군기 센 애들 보내! 두 번 다시 그런 실수 안하도록 군기 센 애들 보냈는데 그들도 또 예언하는 거예요. 지금 본인의 역할이 뭡니까? 다윗을 잡는 거잖아요. 정도의 차이, 자기보다 약한 다윗을 힘 센 사울이 정도의 차이에 입각해서 체포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부하들 때문에 유야무야 된 거예요. 예언하기 바빠요.
21절, “세 번째 다시 사자들을 보내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그다음 22절,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그가 예언을 하는데 24절, 예언을 하는데 옷은 왜 벗습니까?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낮과 밤으로)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이런 소문이 났다 이 말이죠.
자, 정도의 차이에서 다윗을 잡는다는 것, 확정된 계약을 믿는 이미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을 잡으려고 할 때는 영역 경계선상 다윗이 어느 공간, 어느 영토에 있는가를 하나님이 사울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네가 전에 다윗한테 창을 던진 것은 네가 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누가 시킨 거예요. 누가 시켰어요? 악신이 사울을 시켜서 사울이 다윗보고 창을 던진 겁니다.
그러면 사울이 악신에 안 들렸으면 어떻습니까? 악신에 안 들릴 땐 그냥 미워하는 정도죠. 죽이려고 드는 게 아니죠. 그럼 다윗 안에 누가 들어있죠? 예수 그리스도 들어있죠. 그럼 사울 안에 누가 들어있죠? 다윗 안에 여자의 후손, 사울 안에는 뱀의 후손. 결국 이 세상은 확정된 계약에 대한 도전입니다. 방해에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악마는 하나님께 승리했기 때문에.
생각해보세요. 아버지가 자식에게, “얘야, 이 물 내 물이니까 먹지마라.” 했을 때 자식이 부모를 이기는 방법은 뭡니까? 아버지 막 때리는 거예요, 뭐에요? 이 물만 마시면 돼요. ‘난 아버지의 영토, 공간 안에서 벗어나 있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해서 선악과 따먹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따먹었잖아요.
본인은 모르죠. 이게 악마에 속한, 악마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상하게 예수님이 싫어. 예수님의 말씀이 싫어. 하나님이 미워. 이상해.’ 이건 본인이 설명이 안돼요. 그냥 미워요.
어김없이 오는 시간이 드디어 닥쳤습니다. 우선 노래부터 먼저 듣고 하겠습니다. 반주부터 거창하죠?
<나 행한 것으로> 찬송가 203장
1. 나 행한 것으로 구원을 못 얻고
이 육신 힘껏 애써도 죄 씻지 못하네
나 혼자 힘으로 내 주를 못 뵙고
나 탄식하여 울어도 내 짐을 못 벗네
2. 주 예수 공로만 내 짐을 벗기며
주 예수 흘린 피로써 나 평화 얻겠네
여기까지. 1절과 2절 중간까지 봤는데요. ‘나 행한 것으로 구원을 못 얻고 이 육신 힘껏 애써도 죄 씻지 못하네’ 오케이. 인정합니다. ‘나 혼자 힘으로 내 주를 못 뵙고’ 인정합니다. ‘나 탄식하여 울어도 내 짐을 못 벗네’ 인정해요. ‘주 예수 공로만 내 짐을 벗기며 주 예수 흘린 피로써 나 평화 얻겠네’ 여기서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예수님이 피 흘렸는데 왜 우리가 평화를 얻죠? 이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은 거 인정해요. 오케이. 이순신 장군 죽은 거 인정합니다. 인정하는데 이순신 장군 죽었다고 우리가 평화를 얻습니까? 내 마음이 편해져요? 아니죠. 이순신 장군 지가 뭔데 내 마음이 행복한 게 왜 있어요? 고맙죠. 고마운 거하고 행복은 달라요. 이순신 장군은 타인이잖아요. 나가 아니잖아요. 타인이 한 건 고맙죠.
예수님이 피 흘려준 건 좋은데 왜 내가 평화를 얻느냐는 말이에요. 그래도 내 평화가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래요, 그럼? 예수님 피 흘려도 내 평화 없으면 어떻게 할래요? 이 찬송가의 문제가 이거에요. 계속 더 들어볼까요? 중간에서 이게 막히게 되어 있어요.
(2절 중간부터) ‘주 예수 사랑이 내 근심 쫓으며’. 스톱. 주 예수 사랑이 내 근심을 쫓았다 하는데, 근심 없습니까? 근심 없어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사랑 좋죠. 사랑은 좋은데… 주께서 사랑한다. 오케이.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할 수 있는데 고맙다고 해서 모든 근심이 다 날아갑니까? 지금 걱정돼 죽겠어요. 미국 가서 뭐 어떻게 해야 될지. 근심이 없어지던가요?
인간은 알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아는 것으로 살고 싶은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피를 흘리든 주님이 사랑으로 오든 나는 내가 아는 것으로 내가 살고 싶은 거예요. 남을 살리는 게 아니고, 남은 난 모르겠고, 나는 무조건 내가 살고 싶고 내가 아는 것으로 살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너냐? 나의 죽음이냐?” 이걸 묻는 겁니다. 어느 쪽에 생명이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나의 평화, 나의 행복, 주께 고마움, 다 어디에 속합니까? 이게 내게 속하잖아요. 아, 끈질겨요. 이게 종교에요. 종교. 아무리 예수님 사랑하고 예수님 믿습니다, 해도 나는 나를 포기하고 나를 없앨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나에게 내가 전부라니까요. 내가 나한테 전부에요.
그전에는 예수를 몰랐고 나만 알았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왔잖아요. 이게 뭡니까? 본성의 차이에요, 정도의 차이에요? 전에는 나만 알았는데 여기에 추가해서 예수님이 왔잖아요. 이게 뭐냐? 이게 플러스 아닙니까. 아까 수학에서 플러스거든요. 더하기, 더하기, 더하기, 계속 아는 걸 더하는 거예요. 아는 걸 더하는 게 나를 든든하게 만들면 든든한 만큼 그때 비로소 나는 약간의 안심을 얻겠다는 방식으로 인간의 존재는 그렇게 유지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요구하는 게 뭐냐? 나의 죽음도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계약으로 모든 입법이 확정됐다는 겁니다. 확정된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자살하고 이러지 말고 뭐든지 하란 말이에요, 네가. 뭐든지 하라. 네가 잘하는 거 있잖아. 자율. 뭐든지 해. 그런데 그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거예요. 앞으로도 의미 없는 것을 하라 이 말이죠. 그러나 뭘 해도 이게 의미 없다.
이 말을 제가 같은 뜻인데 다른 단어로 바꾸겠습니다. ‘주님의 활동으로 내가 뭘 하든지 아무것도 안한 게 된다.’ 이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뭐냐? 평화! 평화입니다. 아무것도 안한 게 돼요.
지금 봐야 될 본문이 몇 개 남았어요. 사무엘상 19장 다시 봅시다. 24절,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되어있죠. 이게 뭐 사울 본인에게 무슨 의미 있습니까? ‘나 벗었다~’ 이게 의미 있어요? 의미 없죠.
지금 주님께서 사울에게 요구하는 건 그거에요. 네가 죽자고 다윗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는데 그 의미는 네 속에 있는 악마가 너한테 심어준 것이지, 악마가 너한테 시킨 게 없다고 쳤을 때 단독적으로 보면 네가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있든지 옷을 입든지 간에 그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는 선지자인데 선지자 특징은 자체적으로 아무 의미 없음을 받아들이는 자가 선지자에요. 아무 의미 없음을. 내가 뭘 해도. 이건 뭐냐? 내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뭐든지.
짜장면 시켜먹든 미국을 가든 러시아를 가든 뭘 해도. 가든 안 가든, 갈라 했는데 또 교육청에서 돈 떨어졌다 해가지고 못 가게 되든, 뭘 해도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 의미를 주는 순간 뭐가 되어 버립니까? 방해자, 하나님의 계약 완성에 대한 방해자가 되는 거예요.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와, 진짜 중요한 것 남아 있습니다. 열왕기상 13장 9절을 볼 텐데, 13장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이름을 밝히지 않는 선지자가 있어요. 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지는 13장 제일 끝에 나옵니다. 미리 말씀 드리면, 선지자가 선지자 하는 게 아무 의미 없어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 이름 자체를 밝힐 가치도 없어요. 이름 더하기, 더하기가 아니고 이름을 빼는 거예요. 그 존재를 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존재 빼고 거기다가 이미 확실하게 완성된 계약을 집어 넣어버리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온 거예요. 우리 이름을 빼고.
어쨌든 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이… 나중에 요시야라고 해서 이스라엘 왕 중에 대개혁해서 마지막에 신앙적으로 부흥을 일으킨 왕이 요시야입니다. 요시야 이후 유다 나라가 망하는데, 13장 2절,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예언을 했는데 실제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할 때에 여로보암이 화나가지고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 하더라” 했잖아요. 잡으라 했는데 팔이 왜? 팔을 좀 주물러야 돼요. 팔이 아파. 팔을 도로 접질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태도를 바꿔서 ‘살려주세요’ 했고, 다시 기도해서 살려줬어요.
그러니까 왕이 보통 사람 아닌 줄 알고 7절에 대접하려고 하죠.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에 가서 몸을 쉬라 내가 네게 예물을 주리라”) 그런데 8절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했어요.
그런데 이게 재밌는 게 9절에 보면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했어요. 이게 왜 희한하냐 하면, 주님의 지시, 하나님의 지시를 전달받을 때는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주님의 지시가 주어지고 선지자가 지시에 대해서 지시가 이루어진 상황, 환경 속에서 선지자는 반드시 실패를 해야 돼요.
■“주의해. 그러면 안돼. 그러면 너는 안돼.” ‘안돼’ 할 때 우리는 보통 어떻게 됩니까? 정신 차려서 우리는 안하려고 하잖아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시나 율법이나 계명은 반드시 계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 계명을 받은 자가 위반자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다이렉트로 연결돼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직접 연결되면서 중간에 인간은 위반자로 위반하고 빠지는 겁니다. 빼야 돼요.
물도 마시고 떡도 먹고 가라는 말을 주님이 먼저 선지자한테 했는데, 그 말을 누가 합니까? 여로보암 왕이 하는 거예요. 여로보암 왕이. 선지자 입장에서는 미리 예상도 못했죠. 그러니까 선지자가 하나님 말씀에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했다 하면서 10절에,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10절까지 보면 이 선지자는 제대로 말씀을 지킨 거예요, 안 지킨 거예요? 지켰죠. 그러면 선지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선지자가 아닌 거예요. 이 선지자는 자기 자신이 말씀 지킨 나와 말씀 안 지킨 나 사이에서 본성의 차이를 모르고 정도의 차이만 알고 있는 겁니다.
이렇습니다. 말씀은 위반을 통해서 내어놓아야 됩니다. 그래야 이게 말씀이에요. 말씀이 왔잖아요. 위반하는 나를 통해서 내 입으로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 잡다한 말씀들을 끌어 모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수요일 말씀처럼. 잡다한 죄인들이 모아져야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거예요.
내(예수님)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지시가 먼저 있고, 지시가 먼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키려고 했지만 위반자로 드러나요. 지시를 지키려고 한 건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모른 상태에서 그러는 거예요. 반드시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모든 말씀은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뭐든지 해도 괜찮아요. 왜? 어차피 못 지킬 거니까. 어차피 못 지킬 거니까요. 뭐 장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선지자가 가는데 여기에 한 늙은 선지자가 등장해요. 늙었다는 말은 뭡니까? 아까 첫째 강의에 의하면 인간은 뭐로 산다? 인간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경험으로 산다. 체험, 경험한 게 기억이 되니까요. 경험 많은 선지자가 이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듣고 와서 아들한테 가서 “야, 빨리 그 사람 쫓아가라.” 쫓아가서 만났어요.
만나서 하나님의 사람이 하는 말이 17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라” 했어요. 하나님께서 진짜 선지자,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 만나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 만나지 말라. 사람 만나지 않는 조건 하에 너는 내 사람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사람 만나지 말라’하는 말은 어떻게 해야 돼요? 지켜야 돼요, 위반되어야 돼요? 위반해야 돼요. 왜? 상황을 그렇게 하나님께서 몰아넣었으니까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8절, 야, 18절 이거 정말 감동적이에요. 어디가 감동적이냐 하면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가 제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이거!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뭐함이라? “속임이라” 아니, 속인다고 속느냐? 예.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속인다고 속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아는 사람은 본성의 차이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속임수에요. 인간은 속임수 외에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인이 본인을 속였고 또 속이기를 기다리고 있고 속이면 기다렸다는 듯이 드디어 속임을 당하고. 이게 인간입니다.
결정적인 게 아직 남아있어요. 이것가지고 놀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다시피 물 실컷 마시고 밥 먹고 해서 갔다 이 말이죠. 22절 보세요. 하나하나가 지금 어려워요. 22절, 이름 없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던진 벌이 뭐냐 하면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열조의 묘실, 선지자 계열의 그 특수한 공동묘지에 너는 못 묻힌다 이 말했거든요.
그리고 선지자가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후에 가니까 거기에 lion, 갑자기 짐승이 나타나서, 거기에 숲이 많은 모양이라, 짐승이 나타나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바 되니” 사자가 보통 고기가 탐나서 죽였으면 시체를 뜯어 먹어야 되는데 뜯어먹지 않고 그냥 그 시체 곁에 서 있어요.
버린바 된 시체를 누가 거두느냐 하면 29절에,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떠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했어요. 그리고 나서 자기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31절,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한 거예요.
자, 이 말은 뭐냐? 늙은 선지자의 희망은 뭡니까? 말씀이 임한 자의 죽음 앞에 자기가 붙어 있을 때, 나는 진짜로 말씀이 임한 자를 내가 인정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을 죽도록 누가 유도했죠? 본인이 유도했죠. 그럼 여기서 정도의 차이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나는 죄인 맞습니다’로 본성의 차이, 본질의 차이로 이 늙은 선지자가 여기에 들어온 거예요. 정도의 차이에서 본질의 차이로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선지자, 여로보암에게 찾아온 이 하나님의 선지자는 누구를 구원함이었습니까? 여로보암을 구원함이에요, 아니면 선지자 같지도 않은, 속임수만 쓰는 늙은 선지자를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진짜 선지자 죽어서 그 죽음으로 인하여 늙어 죽은 자가 구원받는 거예요.
구원이 뭐에요? 정도의 차이에서 말씀에 입각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 나는 그동안 누구의 사주를 받았다? 죄의 사주를 받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럴 때 왜 예수님이 죽어야 되고 예수님이 왜 자꾸 우리보고 너는 내 죽음에 합류하라고 했는지 비로소 그 내막을 아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나 스스로 잘나고 멋있어 보이게 하고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냈던 입법기능을 뭐로 바꾼 거예요? 이미 계약 완성,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로 바꿔치기한 겁니다. 교체되는 그러한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왜 구원받지 못하는가? 바로 이러한 정도의 차이와 본성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 여로보암 왕은 33절에 보세요.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되어 있죠.
도대체 뭐가 악한 거예요? 자꾸 성경에 구약에 악하다 하는데 도대체 뭘 두고 악하다 하느냐? 계약을 방해하면 악해요. 그 계약이 뭔데?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정치적으로 그럴 수도 있거든요, 정치적으로.
현재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남북으로 휴전선해서 갈라졌잖아요. 사람들이 자꾸 성전이 그리워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니까 나라 꼴이 안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강제로 김정은이 남한 드라마 보면 죽여버린다 하는 이유가 그거죠.
저쪽을 끊고 그 남쪽에 제일 가까운 성읍이 벧엘이에요. 단과 벧엘 두 개에다가 유사 성전을 만든 겁니다.(왕상 12:29) 그리고 제사장들이 남쪽에 있고 북쪽에 별로 없으니까 아무나 제사장을 자원하면 월급 줘서 제사장 시키는 거예요. 그게 악한 거예요. 하나님의 확정된 계약을 방해하는 게 악한 겁니다. 정도의 차이만 알았고 내 본성은 몰랐던 것, 이게 악한 거죠.
자, p.99 중간에 읽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이 한평생 촌에서 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그다음에 뭡니까? [하등 죽일 이유는 없다.] 주님께서 권력이 집중된 그들에 의해서 죽은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힘과 힘이 모인 세상, 그것이 자기 뜻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님이 다 이룬 것을 시기 나서 대드는 또 하나의 승리를 노리는 악마의 짓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아서 뭐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본성과 관련된 십자가와 관련된 일인 것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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