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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기독교강요를 넘길 때마다

아빠와 함께 2024. 10. 11. 22:55

기독교강요를 넘길 때마다 
이준   2006-11-15 23:29:18, 조회 : 125, 추천 : 8

 

제 서재에는 한 천재 신학자의 저서(기독교강요) 전권이 꽂혀 있습니다.

 

그 책들의 책장을 넘길 때면, 제 눈 앞에는 자신이 탈고한 그 책들의 원고를 다시금 꼼꼼히 살펴보고 음미하는 그의 모습이 선연히 펼쳐지곤 합니다. 그리곤, 그 당시의 최고 권력 앞에 유려하고도 호소력 있는 필체로 헌사를 작성하는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그의 거룩한 열정과 헌신으로 점철된 영혼과 더불어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처럼 순수하고도 찬란하게 드러나는 듯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지식, 구속주 하나님께 대한 지식,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교회에 대한 가르침들...그가 전달코자 한 내용을 문자로 형상화시켜놓으면서 심혈을 기울인 그의 시간으로 그 책장들을 넘길 때마다 제 손끝이 저려옴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그 느낌의 끝자락에는 섬뜩함도 함께 딸려 옵니다. 그 걸작을 집필한 그의 손에는 땀방울만이 아니라 사람의 피도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라!"는 그의 필생의 모토대로 그는 책도 그렇게 썼고, 주변인들 앞에서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했고, 나아가 주변인들도 그렇게 살도록 억압을 가했던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사람의 피가 묻은 칼자루와 거룩한 언어들을 쓴 펜을 번갈아 가며 쥐었던 그의 손...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진부한 서양 격언을 아울러 연상해 보면서, 실로 펜(키보드와 마우스)으로 '십자가의 도'를 공격하고 훼손하고 곡해하는 자들이 일삼는 짓들을 보면서, '만약 이들의 손에 칼자루가 쥐어졌더라면...'이라는 끔찍한 상상을 저도 모르게 '감행해' 보았습니다. 시대가 달라져서 제 상상이 그저 상상일 뿐이라는 점이 한편으론 제 육신의 본능적 공포심을 누그러뜨리긴 합니다만...그럼에도 스스로를 '양무리'라 자처하면서 굴절된 의식에서 비롯된 갖가지 발언들을 먹이덩어리 속을 쑤셔대는 양식장의 장어떼들마냥 거침없이 쏟아내고서 겨울철 차가운 바람 속으로 일방적인 작별을 고하는 뒷모습을 보면서 씁쓸함을 되씹게 합니다.

 

"방종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그 천재적 이상주의자에게 '특별한' - 사람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할 수 있는 - 권한(내지는 권력)이 주어졌을 때 그 권한을 발휘하기에 충분한 자질과 추진 능력도 그는 이미 갖추고 있던 터였습니다.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라!"는 모토는 어느새 시간 속에서 피바람을 타고, 택함 받고 성령 받은 자로서 신을 향한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열정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추한 격동의 소용돌이로 진화(?)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유럽의 아주 작은 도시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작은 도시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탄처럼 그의 천재적 걸작이 남긴 영향력만큼이나 그의 어두운 그림자도 여전히 스스로를 말씀 지킴이라 간주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경종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자기 신학의 명분으로 삼아온 수많은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 추한 역사에 대하여 기꺼이 완곡하게, 또는 정당화하여 표현하려 들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오히려 죄악과 방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일단의 무리들에게 역사하셔서 단죄케 하셨다는 식으로까지 표현할 수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셔야 할 것은 "방종에 대한 안타까움과 호소"는 특정한 자리, 특정한 시간, 특정한 공간, 특정한 권한, 특정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면 언제고 기다렸다는 듯이 호소력을 유발할 수 있는 펜 대신 서슬 시퍼런 칼로써 다가설 수 있음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받았다는 인간 존재들 속에도 여전히 '살인 의지'는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말한 '살인 의지'란 성령의 컨트롤과는 별도로, '자칭' 성도라는 인간 속에 존재하는 전적 타락성을 단편적으로 드러낸 표현입니다(이 시점에서 사용한 '자칭' 성도라는 표현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과거 십자가의 도를 훼방하면서 심지어 '방종을 자아낸다'는 빌미를 내세워 십자가의 도를 감히 영지주의와 연관지으려 했던 어떤 이들의 발언에 대한 기억도 나더라는 언급을 아래 글들 속에서 접해 보았습니다. 무율법주의, 영지주의...어쨌든 그 어떤 딱지인들 못붙이겠습니까마는...이 '자칭' 신자들의 거룩한 열정의 말단에는 사람의 피가 묻은 칼자루가 엄연히 놓여 있다는 점도 아울러 명심들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글에서 칼빈을, 아니 그의 글과 그의 삶의 극명한 대조를 이 글의 중심 소재로 내세웠습니다. 굳이 손무성이든, 여타 그 누구든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는 명제와 관련하여 그들의 진영에 속한 이들 중에 그 천재 신학자 한 사람에 필적하거나 그를 능가하는 이들을 결코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면, 성령 받은 자기 실천력과 성도로서 갖추어야 할 위상을 우선적으로 거론할 것이 아니라, 성령 받아도 여전히 (평소에는 아닌 듯이 보이더라도) 언제고 튀어나오는 각양 방종과 게으름과 죄악들과 더러움 - 쉽게 말해 전적 타락성 - 에도 불구하고 그 택하신 성도를 긍휼히 여기셔서 떠나지 않으시고 머무시는 은혜만을 전부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이자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