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6. 21) 43-2
그림을 봅시다. 이 그림을 볼 때 먼저 동서남북을 봐야 됩니다. 동쪽으로 문이 나 있고 서쪽에는 문이 없어요. 이것은 위에서 본 그림이고, 옆에서 보면 이렇게 생겼습니다. 담 겸용 방입니다. 이 높이가 2.7미터입니다. 상당히 높아요. 그리고 이 위에 1, 2, 3번이 있지요? 이것이 성전입니다. 옆에서 보면 이 성전은 3층 건물입니다. 그리고 한 면은 228미터.
성전은 3층 건물인데 각 층마다 방이 30개 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방이 커집니다. 솔로몬 성전이 이것과 유사한데 이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이제 동쪽 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들어가는데 에스겔에 보면 보통 사람은 못 들어갑니다. 이 문은 장차 오실 분을 위해 남겨두어야 합니다. 누가 오시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오십니다. 왕이 오시는 거예요. 왕이 오셔서 제사장과 결합하면 그것이 성전의 완성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고 제사장이고 성전인데, 자신이 성전을 완성하시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성전을 이루시는 것인데, 성전을 이루시고 죽었습니다. 이 죽음은 구겨지는 것인데,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구겨진 것이 회복됩니다. 그러면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전완성, 거룩이 적용되면서 우리가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한마디 한마디가 빈말이 아닙니다. 구약에 어떤 내용이 있고, 그것이 예수님 십자가와 결합되면서 우리는 구약 완성의 혜택을 입는다는 그 원리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한국교회가 놓치는 것이 뭔가 하면, 구약 사람들이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실패로 끝났다는 점을 고려치 않으니까 과거 사람들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해요.
바리새인 서기관 모두 실패했지요. 이들은 말씀 위주로 산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패했어요. 사두개인도 실패했어요. 이들은 ‘지정된 공간에서 신에게 제사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집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도 실패했어요. 그렇다면 예배당 지어놓고 주춧돌에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다.’라고 새기는데 이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예배당을 지어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주장하려면, 그 교회 목사가 바가지에 물을 떠서 교인들에게 주면 그것이 포도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을 못하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동쪽 문으로 들어오는데, 이 길은 옛날 에덴동산에서 막혔던 길입니다. 율법에 의하면(레위기 17장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등장하는데 피로 등장합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 곧 생명이다. 따라서 지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성전에서는 죽음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죽이는 일입니다.
뜰이 있는데, 그 앞에 사다리처럼 점선으로 되어 있지요. 2페이지에 있습니다. 성전을 출입할 수 있는 문은 남쪽, 동쪽, 북쪽 문을 통과해야 된다. 이 성전은 폐쇄된 곳입니까, 개방된 곳입니까? 문이 있으니까 문은 들어오라고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동쪽 문은 들어오라고 있는 문이 아닙니다.
이 동쪽 문은 들어올 수는 있는데 나갈 수는 없어요. 나갈 때는 남쪽이나 북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일반 제사장들은 동쪽 문으로 들어오지를 못해요. 왕만 들어올 수 있지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옵니다. 2페이지 다시 봅시다. 방이 있는데 6개입니다. 절에 가보면 부처가 있는 대웅전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개의 문을 통과하지요. 통과할 때 좌우에 무섭게 칼을 들고 흉측한 얼굴을 한 조각상들이 있지요.
이처럼 통과하면서 6개의 방이 있는데 방 크기가 가로, 세로, 높이가 다 2.7미터입니다. 이게 문지기 방입니다. 그런데 시편 84:10에 보면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문지기의 역할은 거룩과 비거룩의 경계선에서 출입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 역할은 하늘나라 천사가 하는 일인데 이것을 구원 받은 성도가 합니다. 문지기가 출입만 통제하는 것이 아니고 왕을 보호하고 찬양하고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문지기로부터 모든 것이 오실 메시아를 메시아답게 드러내는 예행연습을 하는 것인데 이것을 건축 구조물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오늘날 우리가 예배당을 짓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오실 메시아를 환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은 아무나 가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과 관련된 업무가 되도록 성령께서 새 성전 설계도에 맞춰서 우리에게 일을 시킵니다. 매일의 모든 일과가 거룩과 비거룩의 경계선에 서있는 우리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위해 그런 역할을 하는 것도 모르고 냄비위에 올라가서 내 이름을 위해 냄비를 두드리니 냄비가 찌그러지지요. 주님은 안중에도 없고 나만 잘되면 된다고 여기니까 성전의 기능들이 나와 무관한 것으로 느껴지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역할을 하도록 하십니다.
계속 구조를 살펴봅시다. 동쪽 문으로 들어가니까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뭡니까? 왜 동쪽 문만 이야기하는가 하면 남쪽, 북쪽은 들러리입니다. 동쪽에 마지막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는 것이 성전의 완성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남쪽, 북쪽은 왕이 오시는 것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들어가면 앞에 계단이 10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 ㅋ 에 또 계단이 나오지요. 성전 가로가 228미터, 세로도 228미터, 동쪽 문으로 계단을 밟고 올라갑니다. 조금 가다가 또 계단이 있어요. 그 계단이 있는 곳을 바깥뜰이라고 하고 그 안쪽은 안뜰이라고 합니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올 때 지대가 높아져요.
바깥뜰에서 올라옵니다. 문지방을 또 통과해요. 그러면 안뜰에 제단이 있어요. 제일 바깥뜰에 벽 겸용 방이 있는데, 방 모퉁이에는 부엌이 있는데 이 부엌은 문지기나 일반인들을 위한 부엌이고, 제사장을 위한 부엌은 따로 있어요. 안뜰 안에 부엌이 있지요. 여기 벽 겸용 방들이 있는데, 총 60개입니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면 제단이 있고, 제단 앞에 보니까 거대한 3층 건물의 성전이 보이는 겁니다. 성전 골격이 소갈비 같아요. 동쪽에 계단이 10개 있고, 올라서면 성소입니다. 성소를 지나 안쪽으로 가면 지성소입니다.
이방인들이 신전(성전)을 지으면 안쪽에 반드시 신상이 있어요. 그리스. 로마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데 거기는 헬레나라는 여신의 신상이 있는데 아주 날씬하고 잘 생긴 여인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 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집약시켜 신의 형상을 만듭니다.
모든 신상은 인간에게서 나왔어요. 왜냐? 신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신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만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신을 신이 아니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너는 인간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다.’라고 하십니다. 생명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떴다 하면 그 바닥은 전부 죽음입니다. 죽음을 확인하는 그것이 곧 생명이 생명답게 활동하는 작용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생명이 레위기에서는 피로 나타납니다. 모든 율법은 어디에서 집약되는가 하면 어린양을 잡는데 집약됩니다. 모든 율법은 제사법으로 모아지고, 제사법은 제물의 죽음에 모아지는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에스겔 신상이 있는 그곳에 새 성전의 신상은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피가 있어요. 천사가 만든 제단에 피가 있어요.
피는 죽음입니다. 피를 그냥 바르면 피가 바짝 마르지요. 피가 안 마르게 하는 방법은 죽음을 사건화 시키고 그걸 반복하게 되면 생생하게 살아 있겠지요. 지금 하늘나라에 어린양의 피가 있고 그 피가 생명의 역할을 하려면 죽음 사건을 매일 되풀이 하면 되겠지요.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는 지성소에 와 있고 우리는 피를 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피로 말미암아 옷이 희어지는 놀라운 효과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지은 더러운 죄가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될 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이 지은 새 성전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첫 번 그림을 보면, 여기 늑골부분에 1층 방이 몇 개 있습니까? 30개의 방이 있고, 뒤쪽에 계단이 있는데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고, 2층에도 30개, 3층에도 30개의 방이 있습니다. 이렇게 방들이 있는데, 이 방들은 제사장들이 숙직하고 교대근무하면서 자고, 제사장의 옷이나 그런 것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됩니다.
자, 이 성전을 이렇게 지었을 때 안 믿는 사람들은 건물을 보면서 ‘저 건물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하겠지요. 여러분들이 시골에 가다가 큰 건물을 보면 궁금하지요? 궁금해서 들어가 보면 작년에 재배한 농작물 등이 보관되어 있어요. 큰 건물은 대부분 창고입니다.
하나님이 지은 집은 무슨 용도로 지었습니까? 방이 많다는 것은 방에 기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고, 그 사람은 제사장이고, 제사장이 하는 일은 제사 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구약 때는 제사장들은 계속 배출되어야 하고, 되풀이해서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하고, 힘드니까 교대 근무해야 하고 그래요.
히브리서에 보면 그런 것들은 이제 무엇으로 인해 끝났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죄를 씻는 제사는 없습니다. 그 말은 죄 씻는 문제에 대해서 예배 참석한다는 그것이 우리 죄를 씻을 수 있는 근거는 없어요. 그것은 옛날 이야기고 지금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죄가 없어야 구원 받는데 우리 육신에서는 매일 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든 말씀으로 죄를 덮었으면 죄 씻는 방법은 끝났어요. 옛날 같으면 양 잡아서 제사장에게 가서 제물 드리고 제사 드리면 되는데, 지금은 그게 없다고 했잖아요. 없으면 죄 씻을 길이 없잖아요? 이게 난감한 문제입니다.
죄는 계속 생산되고 내 쪽에서 죄를 씻을 길은 없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성전에서 장차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물이 나옵니다. 녹조현상이 일어났을 때 댐에서 물을 보내면 녹조현상이 씻겨 내려가듯이 성전에서 물이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주변 지역에 물고기도 살고 농작물도 풍성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성전 3층 건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밑 동네에 산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성전이 완성되고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7장에서는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이 성령은 나오다 안 나오고, 또 나오다가 그치고 그런 것입니까? 에스겔에 의하면 이 성전 물은 계속 흘러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성전 밑에 사는 주민은 졸지에 홍수를 맞게 되어 있어요. 물을 뒤집어 씌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전 밑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누구의 공로입니까? 자신이 땀 흘려 열심히 농사지은 공로입니까? 아니죠. 성전을 완공시킨 분의 공로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결국 모형인데요, 이 그림을 하나로 집약시킨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일대기 속에 전부 녹아져 있다고 보면 됩니다. 녹아져 있고, 그것이 예수님이 성전 되고, 성령에 의해 그것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주면 이제 내가 어떻게 살까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았다는 모습을 주님은 어떤 식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내가 담당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로 남겠지요.
로토복권 당첨자 추천할 때 번호가 기록된 공이 나오잖아요. 그렇다면 사람이 똑같을 필요가 없어요. 그 구멍으로 나온 공이라면 7번이면 7번 답게 살면 되고, 33번이면 33번 답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너는 좋겠다. 나보다 더 높은 숫자네.” 이런 필요 없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역할을 하게 되면 그것이 전부 한 성령에서 나온 동일한 한 분의 작용입니다.
눈이 발에게 쓸데없다고 하면 안 되지요. 또 발이 눈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각자 받은 은사대로 움직이면 그 전체가 하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전부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을 마셔서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메시아를 만났다.”면서 물동이를 버리고 달려갔을 때 그 여인이 해야 될 일은 목사가 되고 당회장이 되기 위해서 신학교를 가야 합니까? 성경에 나온 그의 역할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면서 그 무대에서 사라져 버려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진행될 때는 화려한 조명이 비취고 무대 위의 배우들 몸짓에 관객들이 웃고 울고 했는데 끝나니까 아무도 없고 정막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고 난 후의 모습입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뭔가를 열심히 했는데 죽고 난 후에는 정적만 남고, 다른 사람이 그 무대에서 뛰고 놀지요. 물동이 버린 여인은 그것으로 끝났어요. 소경은 눈을 뜨게 되고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 사람이 부자 되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부자 되세요!” 이런 소리 안 나옵니다.
성전 중심으로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을 하다가 죽으면 아들이 대를 이어서 순번제로 제사장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어떤 제사장이 순번제로 역할을 하던 최종적으로는 지성소에 피는 남습니다.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어떤 일을 하던지 결국 피만 남습니다.
그렇다면 에스겔 40장에서 천사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척량하는 장대를 가졌다는 것은 집 구조, 즉 크기를 척량하는 것인데 신약 성경에서 이 전체가 인격화 되면 예수님의 키가 얼마인지 이런 것을 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그 기능은 이미 정확하게 주님께서 치수대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도 마찬가지로 이미 예정된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대구에서 목회하다 그만두고, 또 대전에서 사업하다가 실패하고, 강원도에서 어부생활 하다가 그것도 접고. 이런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자기가 선택하고 안간힘을 쓰고 산 것으로 보지만 그 사람이 만약 성도라면 자신이 다양하게 일했다고 생각지 않고 그냥 주님이 맡기신 일을 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 맡겨진 일이 뭔가 하면, ‘네가 어떤 사업을 하든지 상관없이 결국은 예수님 피와 관련된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님 보시기에 다 같은 일이었고, 그 모든 일이 규격에 맞는 것이기에 피와 연결이 가능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제가 어렵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에스겔에 기록된 공간의 치수(크기), 수학적인 양이 신약에서는 인격으로 바뀝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면 치수가 인간성입니까? 아니잖아요. 공간의 크기가 인격으로 넘어오는 논리적 구조가 풀려야 하는데 이게 어렵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에스겔 40장의 주석을 보면 이런 식으로 해석해 놓았어요. “5척, 한 장대, 방이 3개” 등등의 표현을 사람들은 숫자로 이해하고, ‘성전에 들어갈 사람의 수는 정해졌다.’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이게 맞습니까? 틀린 것 같지요? 왜냐하면 치수, 양이 숫자가 되면 동일한 양적 개념이 되지요. 헤아릴 수 있는 개념이 된다고요.
방이 몇 개? 30개. 이건 가능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셀 것 같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을 못 알아 봤겠어요? 예수님이 옷을 입을 때 보통 사람들처럼 입지 말고 에스겔에 나온 성전 설계도대로 디자인을 해서 옷을 입으면 바리새인들이 보고 “어, 메시야다!” 이렇게 알아 볼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에스겔 40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성전은 3층인데 각 층에 방이 30개인 것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들의 인식에 동조해서 긍정해 주시면 서로 소통이 되겠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성전을 헐라.”고 했어요. 그런데 주님이 헐라고 하신 헤롯 성전은 에스겔의 설계도를 따라 지은 성전입니다.
그것을 헐면 그곳이 진짜 성전이라고 믿고 그곳에서 기도했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다 무용지물이 되지요. “너희들이 에스겔 40장 해석 잘 못했다.” 그런 뜻이 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까? 성전을 구체적으로 그림으로 보여주니까 그 모양과 크기대로 만들면 된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거주지와 같이 성전을 이해했기에 솔로몬 성전이 불탄 것처럼 이런 성전을 부서져야 합니다. 그런 개념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이것은 인격 개념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에 양과 수가 인격으로 전환될 수는 없습니다.
인격은 죽어야 됩니다. 내가 죽고 내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고 예수님의 것으로 다시 살기 때문에 기존의 치수 개념과 연결시켜 억지를 부리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이 30개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제사장들이 활동을 많이 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들이 활동을 많이 하면 더욱 제사가 활성화되고, 성전의 활동도 왕성해 지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많은 수가 있다고 해서 제사가 잘 된다는 그 아이디어가 곧 우리가 여전히 우리 인격을 고수하고 있는, 죄 된 인격의 미련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과도 관계해 볼까 하는 그런 심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30개의 방을 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몸입니다. 한 몸이 죽어도 30개의 방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것 다 헐어버리세요. 사흘 만에 이 구조 그대로 다 만들어 냅니다. 방 30개. 그러면 방 30개 만들어 내면, 예수님은 머리고 30개의 지체가 있다. 그러면 30개의 방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구원 받은 셈이지요.
이 세상에 있는 사람 중 30개의 방에 들어가려고 하면 경쟁률이 얼마나 됩니까? 문지기의 방이 6개인데, 그러면 한 사람이 방 하나씩 차지하면 어떻게 됩니까? 문지기를 제사장이 돌아가면서 하지만, 이것도 경쟁률이 굉장히 셉니다.
그러니까 이 해석을 숫자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문지기의 기능, 제사장의 기능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어떤 직업을 어느 장소에서 감당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기능을 이 성전에 입각해서 시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제사장 기능인지 어떻게 압니까? 이 세상의 모든 기능은 마지막에 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뭐라고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고 했어요.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에스겔 40장은 제외한 이야기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에스겔의 성전 척량대로 다 이루어진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왜 못 알아보았는가? 주님이 죽음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못 알아 봐요.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죽음 속으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하면, 죽음 속에 있어요. 죽음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따라갈 수 없어요. 물론 죽음 속에 있어도 따라간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이들은 불속에 들어갔어요. 죽음 속에 들어가 보니 그 속에 누가 계셨어요? 예수님이 계셨지요.
죽음 속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그냥 죽으면 안 되고 모든 말씀을 다 성취했던 그 죽음에 합류될 때만 예수님이 함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장소를 어디로 봅니까? 십자가로 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 나는 드디어 에스겔 40, 41, 42장 속에 들어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 내가 제사장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안에서 사시면 이미 에스겔 40, 41장을 완성하신 그분의 취지가 내 몸을 통해서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면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해도 피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구약 때 이야기입니다. 내가 제사장으로 제사를 잘 드렸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프다. 그래서 근심이 생기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면 이 모습을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 옳은 것입니까? 옳지 않지요. 그렇다면 그 제사장은 제사장 역할을 정년까지 하고 은퇴해서 죽어야 됩니다.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게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사장들은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데, 제사 드리는 그 인간이 죽더란 말이지요. 죽는 이유가 뭔가? 죄 때문에 죽는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제사장들이 제사 지낼 때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속죄제부터 드리고 그 후에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이 자체가 하나님의 제사법의 완성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왜냐? 제사장이 메시야가 아니니까.
자기는 맞다고 하지만 늙어 죽고, 병들어 죽는 것을 보니까 결국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 말씀을 이루었다 여기면서 그냥 제사를 드린 거예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했지요. 그런데 제가 짧은 순간(약 2초)에 돈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내 인격이 의인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제사장은 뭔가? 제사를 지내면서, 속죄제를 드리면서 장차 오실 메시야의 피가 아니면 나도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그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맡은 일을 하면서, 또는 백수로 살면서 예수님 피가 아니면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왕 같은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는 겁니다.
에스겔에서 치밀하게 치수를 제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신 것이기에 인간들에 의해 변동될 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치수를 제는 것은, 이것은 영원한 성전인데 그것은 동쪽에서 다윗 언약에 준해서 왕이 오십니다. 이름은 다윗인데 내막은 여호와. 여호와께서 다윗 왕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로마서 1장 3절에서는 이것을 ‘다윗의 혈통으로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다.’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할 때, 에스겔 40, 41, 42장에서 왕이 동쪽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을 그대로 로마서에 집어넣었어요. 그러면 정말 예수님 하시는 일이 무턱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내가 집에서 가정 제단 쌓는 것이 아무 소용없지요? 집에서 제사 지내는 것도 의미 없지요? 왜냐? 두 번 다시 내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도에 내가 참여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어떤 일에 참여해도 그것이 내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를 내세요. 꾹 참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와 연관 짓지 아니하면 그 자체가 영광이 안 되고, 십자가와 연관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 그것이 주님 십자가 피를 위한 일이라면 그게 영광이 돼요.
그러면 무조건 십자가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남에게 사기치고, 괴롭히고 해도 주님께 영광됩니까? 그것은 스스로 십자가를 위한 것이라고 거짓말 한 것입니다.
새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지요? 여기 아직 예수님이 등장 안했지요? 새 성전 설계도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신다는 이야기지 동시에 왕이 오지는 않잖아요. 왕은 언제 오십니까? 에스겔 예언이 있는 지 500년 후에 예수님 오셨어요. 그러면 이 성전 장치는 결국 예수님이 합류해서 이룰 일이지요.
성전에서 양이나 소의 피를 바를 때 그것이 예수님 피는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이지만 예수님 피가 양이나 소의 피는 아니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숨어 있는 거지요. 우리가 성전을 봤잖아요. 우리는 여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언약에서부터 들어가니까.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주님, 이것은 피와 관련되어 있기에 죄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 영광을 위해 한 것이기에 죄가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해도 진짜 완성의 피는 우리의 일에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뭔가 일이 꼬이고 뜻대로 안 되잖아요. 마치 제사장이 실컷 제사를 드리고 집에 왔는데 아이가 아프다든지 할 때, 자연적으로 불평이 나오지요. 분명히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했는데 가정의 우환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제사장들이 제사 지내면서 심지어 자기 죄를 위해 속죄제까지 드리면서 한 행위의 완성은 드리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속죄제 드리니까 속제가 완성됩니다.’ 이럴 수는 없단 말이지요. 내가 지금 신약시대에 교사를 하면서 주의 일을 하지만 이것이 완성은 아니에요. 피는 숨어 있습니다. 어떻게? 나의 모든 행위가 주께만 범죄한 것으로 부각시키면서 그 순간 피가 등장하면서 ‘아, 나는 구원 받았잖아. 새삼스럽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내가 주의 복음을 위해 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귀여워해 주시겠지요?” 이런 생각을 왜 했느냔 말이지요.
‘주님의 피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주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자기의식을 떨어버릴 수가 없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육신에 있는 이상은 육적 풍성함과 섞여서 나올 수밖에 없어요. 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피를 소유해서 구원 받은 것처럼 여길 때 그것이 죄로 드러나게 하시는 그 지평선 너머에 주께서 십자가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냥 쓴 웃음만 짓지요. “안개 같은 인간이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었지? 이미 구원 받았잖아.” 구원 받았으면 범사에 감사하면 될 텐데 “주여, 이것이 주의 일입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까?” 이런 것은 왜 따집니까? 따졌다고 후회하며 돌아서는 순간 또 따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늘 따지는 것이 육신의 모습이고, 그것 때문에 주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 이러한 새언약적인 차원이 성전의 완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을 보니까 참 좋은 세상인데 늘 불만에 가득한 내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솟아난 것입니까?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릴 피를 생각하면서 이미 성전 안에, 그리스도 몸 안에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7. 25. 09:01 녹취 마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