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제 1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여러분들이 사역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강의의 수준을 높여서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강의 중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쉬는 시간에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받은 주제가 성막의 구조에 관한 겁니다. 성막의 구조를 아는 것은 평신도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사역자입니다.
사역자는 전체 흐름을 알아야 됩니다. 써먹기 위함이 아니라 성경전체에서 성막이 차지하는 그 위치가 뭐냐,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내 말이 현실이 된다.’ 보통 사람들이 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말이 현실(reality)’ 보통 사람은 이 말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나는 공중을 날고 싶다.’ 현실이 될까요, 안될까요? 답변해 보세요. 될까요, 안될까요? 안되지요. 그런데 선지자, 선지자에 나오는 말이 현실이 될까요, 안될까요?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게 기적이에요. miracle, 기적입니다. 우리 ○목사님의 말은 현실이 아닙니다. 제 말도 현실이 안 됩니다. 통역자의 말도 현실이 안돼요.
여러분의 말도 현실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선지자의 말은 곧 현실이에요. 우리는 그걸 믿습니다. 목숨을 걸고, 목숨 바쳐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참 이런 것이 어렵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매개로 하여 현실이 됩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이것은 보이는 것’……, 점점 어렵게 들어가는데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가 여기 있습니다. 나의 말은 현실이 아닙니다. 잘 새겨서 들어야 돼요. 내가 보이는 세계에 있습니다. 잘 보세요. 내가 보는 보이는 세계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이는 세계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는 순간부터 이 다툼이 계속 일어나요. 내가 원하는 것, 현실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도 현실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내가 말하기 때문에.
그러나 선지자의 말씀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괴롭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현실을 묵살하시고 선지자를 통해서 전개되는 현실만 나중에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괴롭습니다. ‘주여,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내 뜻만 이루어지면 오케이.’ 믿습니까?
믿기 힘들어요. 나를 부인해야 되니까.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그래프입니다. 신앙세계와 현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래프 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에요(신앙세계는 최고점에 있고 우리의 현실은 제로 점에). 내가 아는 이 성경속의 세계가 전부입니다. 자, 10년이 지났어요.
신앙은 이렇게 내려가고 현실은 이렇게 올라갑니다(신앙은 세월에 비례해서 제로점을 찍고 마이너스지점을 향하여 계속 곤두박질치고 현실은 세월에 비례해서 계속 상승한다). 20년 목회 생활, 30년 목회생활, 40년 목회생활 하면 신앙생활은 마이너스로, 마이너스로 내려갑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쓰레기 같던 현실은 점점 더 그 비중이 올라가서 나중에는 이것이 현실처럼 행세합니다.
신앙세계는 마이너스 10, 어두운 세상은 플러스 1000,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모든 것을 내줄 것 같았어요. 10년, 20년, 30년, 40년 목회하다 보면 신앙은 없어지고 현실의 힘만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크게 쓰겠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 처음 믿을 때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한 40년 지나면 ‘이것은 내 거야. 손대지 마.’
많은 선배들이 그 길로 갔습니다. 성경도 덮어 버리고 교회법만 쥐고 있고, ‘너는 내 사람 아니니까 나가라.’는 투쟁, 권력집착, 성경은 그냥 던져버렸지요. 지금 우리는 이 성경을 다시 펼치려고 합니다. 성경 안에 새로운 하나님의 현실이 들어 있습니다. 동시에 나의 소유는 생각하지 마세요. 이 신앙세계, 처음 사랑을 회복하셔서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갑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져야 돼요.
참 이런 말하기가 힘듭니다. 선배를 본받지 마시고 성경속의 스데반집사를 본받으세요. 큰 교회, 좋은 차타는 것 부러워하지 마시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은 사도바울을 부러워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들여다보면 보여요. 그러나 이 성경을 덮어버리면 권력이 보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성경속의 선지자의 말이 현실이 된다.’
죄송합니다만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지자의 말이 현실이다. 내 말은 현실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여기 길게 선을 그렸습니다. 이 선에 점을 찍으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성막이 여기 있습니다. 포인트 2입니다. 포인트 1, 유월절 어린양. 포인트 3, 다윗 성전, 혹은 솔로몬 성전. 포인트 4, 에스겔성전. 포인트 5, 요한복음 2장의 예수님성전. 포인트 6, 우리 몸, 고린도전서 3장 16절.
포인트 2의 성막이 무엇이냐, 할 때는 포인트 1에서부터 시작해서 전체를 다 알아야 돼요. 포인트 1에서 2, 2에서 3, 3에서 4, 4에서 5, 5에서 6,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지도자니까. 이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포인트 2에서 5로 점프하면 안 됩니다. 종전까지 알았던 것이 전부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소위 (제가 들고 있는, 시중에 많이 돌아다니는) 이런 책들입니다. 포인트 2에서 5로 바로 건너뛰었어요. ‘번제는 예수님의 이런 것이고, 언약궤는 이런 것이고……’, 모두 점프합니다. 하나하나 따져야 돼요. P1에서 P5로 점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P2에서 P3로, P3에서 P4로 나가는지 알아야 돼요.
이 어려운 작업을 저와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에스겔 45장 19절입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래층 네 모퉁이와 안뜰 문설주에 바를 것이요.”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피’, 피는 사물이죠. 물컹물컹한 사물입니다. 또 하나는 장소인데 ‘문설주’입니다.
이제부터 정말 어렵습니다. 걱정은 되지만 그냥 밀어붙이겠습니다. 장소는 어떤 영역의 입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출입구입니다. 출입구, 문설주라는 장소에 사물인 피가 묻힙니다. 그러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출입구만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출입구 안의 모든 영역이 피의 지배를 받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축 늘어진 풍선 주둥이를 훅 불면 새로운 공간이 발생하지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다 피의 효력을 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중요할까요, 출입구에 발린 그 피가 중요할까요? ‘피’ 풍선안의 사람이 열심내고 뛰는 것이 중요할까요, 출입구의 그 피가 중요할까요? ‘피’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공간, 없는 영역을 만들었어요. 이것이 사도바울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겁니다. 그것을 적겠습니다. ‘예수 안’ 왜 이렇게 어렵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예수 안’이란 1번) 없는 곳입니다. 3번) 있는 곳입니다. 2번) 피 입니다. 나의 피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 입니다. reality, 그것이 현실입니다.
없는 현실을 주께서는 피를 통해서 만들어 내신 겁니다. 여기서 생겨난 것이 종려나무지요.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보면 천국 가는 사람들이 나무를 하나씩 들고 있어요. 무슨 나무일까요? 종려나무지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요한계시록 7:9)
에스겔 40장 26절, 거기에 나무 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지요? 종려나무지요. “또 그리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또 이편, 저편 문벽 위에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제가 지금까지 에스겔 새 성전 이야기, P4를 이야기 안했습니다. 우리의 주제가 P2에서 출발합니다. 여러분들의 요구사항 때문입니다.
사실은 P1에서 출발해야 됩니다. P1, P2, P3, P4, P5, P6, 이렇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 때문에, 성막의 구조가 궁금하기 때문에 P2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사역자이기 때문에 P1에서부터 새로 출발해야 돼요. 사역자이기에.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지금까지 했던 중요한 것을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없는 공간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있는 공간 저리가, 있는 공간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은 거부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천국을 이루십니다. 절대로 사람들이 있는 공간, 있는 인간을 거부합니다. 왜냐, 사람들은 말을 하기 때문에, 그 말속에 자기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하는 현실은 ‘하나님의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것뿐입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만 현실이 돼요.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한 그 취지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선지자의 말만이 현실이 된다는 것, 그것을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하지요. 그리고 다툼이 된다는 것, 누구하고 다툼이 될까요? 내가 평소에 꿈꾸던 것 하고 다툼이 되겠지요. 하지만, 아, 이것은 어렵다……, ‘있는데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솜씨가 아닙니다. 있는데서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을 문명이라고 합니다. 혹은 문화라고 합니다. 강을 중심으로 이 세상에 4대문명이 발생하지요. 그것이 하늘나라입니까? 아니지요.
없는데서 생겨나는 겁니다. 그 방법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있는데서 있는 것으로 나온 자식입니다. 이스마엘은 천국에 못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천국에 간 자식이 있었지요. 이름이 누구지요? 이삭이지요. 이삭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없는데서 생겨났지요. 죽은데서 나왔지요. 로마서 4장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요.
따라서 저나 여러분이 믿는 자라면 아브라함과 같은 동질의 믿음이어야 돼요. 쉽게 말해서 ‘없었는데 이것이 왜 생겼지?’ 하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내가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았지?’ 그것을 믿어야 돼요. 그것도 매일 매일, 그리고 언제나. 세 번째, 있는 공간, 이 땅에 천국이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한 분이 읽어주세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에서 중요한 단어,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을 돈으로 바꿔줍니까, 안 바꿔줍니까? 안 바꿔주지요. 말씀을 상품권으로 바꿔줍니까, 안 바꿔줍니까? 말씀을 금으로 바꿔줍니까, 안 바꿔줍니까? 안 바꿔주지요.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를 천국가게 합니다. 믿습니까? 믿음은 말씀에서 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현실 안에 있구나.’ 1번, 3번 말고 2번,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들어가는 출입구에 뭐가 발린다고 했지요? ‘피’ 예수 피가 발리면 이 안에 종려나무 같은 존재, 종려나무 같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의 내부, 우리의 마음이 하얗게 용서받은 사람,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자기 행함일까요, 아니면 피 일까요? 답변해 보세요. 그렇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지금부터 포인트 1에 들어갑니다. 포인트 1은 선(線)만 있습니다. 이 선이 문설주와 문지방입니다. 여러분은 머리가 다 좋으시니까 포인트 1이 뭔지 기억을 하고 계시지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던 첫 번째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때는 선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마주 대했습니다. 선 너머에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선을 넘어서 이쪽으로 들어오면 죽습니다. 선에다 뭘 발랐을까요? 흠 없는 어린양이 피를 발랐지요. 선은 두께가 얇습니다. 이 얇은 두께의 선을 넓히면 이것이 성막이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얇은 선이 범위를 넓히면 영역이 되고 그것이 성막의 시작, 성전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만약 선에 피가 발려 있다고 합시다. 쉽게 말해서 그것을 늘이면 그 피의 효과가 다 퍼질까요, 안 퍼질까요? 다 퍼지겠지요. 접은 부채를 붉은 물감에 푹 담갔습니다. 아주 푹,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그것을 펼쳤습니다.
펼치니 영역이 되고 공간이 됩니다. 그것이 성전입니다. 그것이 성막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몸이에요. 그것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내가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 만든다.’(요2:19) 하는 그 성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모든 강의의 결론을 이미 여러분이 쥐고 있습니다. 참 쉽죠? 남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역자니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누구 죄 때문에 흘렸지요? 누구 죄 때문에? 우리 죄 때문이죠. 자, 부채를 펼칩니다. 제가 아까 피가 활짝 펼쳐지면서 영역을 만들어 낸다고 했지요. 동시에 뭐도 같이 펼쳐질까요? 우리의 죄, 그렇다면 성전이나 성소의 모든 기구들은 우리의 죄를 노출시키고 폭로하는 장치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성막과 성전구조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피는 이야기하면서 자기 죄를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기존에 나와 있는 모든 성막의 구조를 설명하는 책들이 다 그런 책들입니다. 그 죄가 뭘까요? 충격적입니다. 성막을 만드는 그들이 죄인이라는 겁니다. 쇼킹한 겁니다. 시키는 대로 제사 드리는 그들이 죄인이 돼요.
말씀에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죄가 더 드러납니다. 쇼킹한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안하면 되겠네요? 이 영역, 1번, 3번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장치들이 모든 성막의 장치들입니다. 성경의 구약은 ‘~하라’고 하지요. ‘하게 되면 비로소 네 숨어 있는 죄가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너는 저주 받아도 마땅하다.’ 하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깨닫게 될 겁니다. 바로 제가 하는 이 두 번째,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상당히 거북스럽습니다. 혹시 교인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교회 안 나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이겁니다. 마트에 가서 ‘이거 얼마입니까?’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는 것, 이것을 원합니다.
이것을 천국이라 합시다. 교인들이 교회 와서 ‘목사님, 이거 얼마면 되겠습니까? 이만큼 드리겠습니다.’ 하고 갖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을 원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한다면 교인들이 말하기를 ‘예수 피를 받아들이면 구원받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말합니다. 오케이!
그들은 돌아갑니다. 그 때 사역자가 묻습니다. ‘당신의 죄가 이러합니다.’ 갖고 가던 것을 그대로 놓고 두 번 다시 안 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자기 현실이 따로 있습니다. 자기의 말에서 나오는 현실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있는데서 있는 것을 만드는 현실’입니다. 그것을 문명이라 했지요. 그것을 문화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자기역사입니다. 있는데서 있는 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참된 성도라면 ‘목사님, 내게 없는 것, 내가 죽은 것에도 불구하고 주신 것이 뭡니까?’라고 물어야 되지요. ‘나에게는 집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돈도 있는데 왜 있는 것들로 천국을 얻을 수 없는 겁니까? 나에게는 열심도 있고 충성도 있고 순종할 맘도 있는데 왜 그것을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겁니까?’
‘그것은 당신이 뭘 해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이 우리를 점령하는 거예요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거예요. ‘전에는 돈 자랑 했는데, 전에는 자동차를 자랑했는데, 이제는 예수 피로 말미암아 나는 살았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왜, 나는 죄인중의 괴수기 때문에.’
심지어 주택이 세 채가 있고 차가 다섯 대가 있고 땅이 십만 평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 피만 있으면 천국에 충분히 들어갑니다. 믿습니까?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님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내가 뽑혀서 들어가기 때문에. 부채를 펼치니까 부채의 그림 안에 내 그림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그림은 예수님의 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피 입니까? 아니지요. 내 정성입니까? 아니지요. 나의 성경공부입니까? 아니지요. 나의 헌금입니까? 아니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다시 하겠습니다. 선(線) 또는 실, 그 실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것을 세로 가로 직조를 했습니다. 이제 그것은 평면이 되었으니 2차원입니다.
그것을 밑으로 수직으로 내립니다. 그러면 격자구조가 되지요. 3차원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그 예수 안에는 차별이 없지요. 모두 다 예수님의 피의 실로 직조되어 있기에. 이 이야기를 한 뒤에 10분 쉬겠습니다. 격자 구조입니다. 이쪽에 감사가 나옵니다. 이쪽에 찬양이 나옵니다. 이쪽에 전도가 나옵니다. 이쪽 구석에서 예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따로 따로 시행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관으로, 혹은 실로 다 격자로 짜여 있습니다. 이 안에 뭐가 흐를까요? 피가 흐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곧 찬양입니다. 찬양이 곧 예배입니다. 그 안에 뭐가 흐르기에 그러합니까? 예수님의 피가 흐르기에. 헌금도 찬양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로 따로 하려고 하지 마세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 출생자체가 죄에서 태어났기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장소가 천국은 아니었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천국 사람 되었습니다.
십분 쉬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