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성막(이근호)110221-110225

아빠와 함께 2013. 2. 14. 21:12

성막 110221-11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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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IP:117.♡.132.36) 11-04-04 15:50 
성막 제 1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여러분들이 사역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강의의 수준을 높여서 좀 어렵게 하겠습니다. 강의 중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쉬는 시간에 이야기해 주세요. 제가 받은 주제가 성막의 구조에 관한 겁니다. 성막의 구조를 아는 것은 평신도도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은 사역자입니다.

사역자는 전체 흐름을 알아야 됩니다. 써먹기 위함이 아니라 성경전체에서 성막이 차지하는 그 위치가 뭐냐, 그것을 아셔야 됩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내 말이 현실이 된다.’ 보통 사람들이 이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말이 현실(reality)’ 보통 사람은 이 말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나는 공중을 날고 싶다.’ 현실이 될까요, 안될까요? 답변해 보세요. 될까요, 안될까요? 안되지요. 그런데 선지자, 선지자에 나오는 말이 현실이 될까요, 안될까요?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게 기적이에요. miracle, 기적입니다. 우리 ○목사님의 말은 현실이 아닙니다. 제 말도 현실이 안 됩니다. 통역자의 말도 현실이 안돼요.

여러분의 말도 현실이 안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선지자의 말은 곧 현실이에요. 우리는 그걸 믿습니다. 목숨을 걸고, 목숨 바쳐 믿습니다. 왜 그럴까요? 참 이런 것이 어렵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선지자를 매개로 하여 현실이 됩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이것은 보이는 것’……, 점점 어렵게 들어가는데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가 여기 있습니다. 나의 말은 현실이 아닙니다. 잘 새겨서 들어야 돼요. 내가 보이는 세계에 있습니다. 잘 보세요. 내가 보는 보이는 세계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이는 세계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는 순간부터 이 다툼이 계속 일어나요. 내가 원하는 것, 현실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도 현실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내가 말하기 때문에.


그러나 선지자의 말씀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괴롭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현실을 묵살하시고 선지자를 통해서 전개되는 현실만 나중에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괴롭습니다. ‘주여,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내 뜻만 이루어지면 오케이.’ 믿습니까?


믿기 힘들어요. 나를 부인해야 되니까.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그래프입니다. 신앙세계와 현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래프 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이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에요(신앙세계는 최고점에 있고 우리의 현실은 제로 점에). 내가 아는 이 성경속의 세계가 전부입니다. 자, 10년이 지났어요.


신앙은 이렇게 내려가고 현실은 이렇게 올라갑니다(신앙은 세월에 비례해서 제로점을 찍고 마이너스지점을 향하여 계속 곤두박질치고 현실은 세월에 비례해서 계속 상승한다). 20년 목회 생활, 30년 목회생활, 40년 목회생활 하면 신앙생활은 마이너스로, 마이너스로 내려갑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쓰레기 같던 현실은 점점 더 그 비중이 올라가서 나중에는 이것이 현실처럼 행세합니다.


신앙세계는 마이너스 10, 어두운 세상은 플러스 1000,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모든 것을 내줄 것 같았어요. 10년, 20년, 30년, 40년 목회하다 보면 신앙은 없어지고 현실의 힘만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크게 쓰겠습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 처음 믿을 때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한 40년 지나면 ‘이것은 내 거야. 손대지 마.’


많은 선배들이 그 길로 갔습니다. 성경도 덮어 버리고 교회법만 쥐고 있고, ‘너는 내 사람 아니니까 나가라.’는 투쟁, 권력집착, 성경은 그냥 던져버렸지요. 지금 우리는 이 성경을 다시 펼치려고 합니다. 성경 안에 새로운 하나님의 현실이 들어 있습니다. 동시에 나의 소유는 생각하지 마세요. 이 신앙세계, 처음 사랑을 회복하셔서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갑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져야 돼요.


참 이런 말하기가 힘듭니다. 선배를 본받지 마시고 성경속의 스데반집사를 본받으세요. 큰 교회, 좋은 차타는 것 부러워하지 마시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은 사도바울을 부러워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들여다보면 보여요. 그러나 이 성경을 덮어버리면 권력이 보입니다. 지금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성경속의 선지자의 말이 현실이 된다.’


죄송합니다만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지자의 말이 현실이다. 내 말은 현실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여기 길게 선을 그렸습니다. 이 선에 점을 찍으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성막이 여기 있습니다. 포인트 2입니다. 포인트 1, 유월절 어린양. 포인트 3, 다윗 성전, 혹은 솔로몬 성전. 포인트 4, 에스겔성전. 포인트 5, 요한복음 2장의 예수님성전. 포인트 6, 우리 몸, 고린도전서 3장 16절.


포인트 2의 성막이 무엇이냐, 할 때는 포인트 1에서부터 시작해서 전체를 다 알아야 돼요. 포인트 1에서 2, 2에서 3, 3에서 4, 4에서 5, 5에서 6,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지도자니까. 이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포인트 2에서 5로 점프하면 안 됩니다. 종전까지 알았던 것이 전부 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소위 (제가 들고 있는, 시중에 많이 돌아다니는) 이런 책들입니다. 포인트 2에서 5로 바로 건너뛰었어요. ‘번제는 예수님의 이런 것이고, 언약궤는 이런 것이고……’, 모두 점프합니다. 하나하나 따져야 돼요. P1에서 P5로 점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P2에서 P3로, P3에서 P4로 나가는지 알아야 돼요.


이 어려운 작업을 저와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에스겔 45장 19절입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래층 네 모퉁이와 안뜰 문설주에 바를 것이요.”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피’, 피는 사물이죠. 물컹물컹한 사물입니다. 또 하나는 장소인데 ‘문설주’입니다.


이제부터 정말 어렵습니다. 걱정은 되지만 그냥 밀어붙이겠습니다. 장소는 어떤 영역의 입구를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출입구입니다. 출입구, 문설주라는 장소에 사물인 피가 묻힙니다. 그러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출입구만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고 출입구 안의 모든 영역이 피의 지배를 받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축 늘어진 풍선 주둥이를 훅 불면 새로운 공간이 발생하지요.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다 피의 효력을 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중요할까요, 출입구에 발린 그 피가 중요할까요? ‘피’ 풍선안의 사람이 열심내고 뛰는 것이 중요할까요, 출입구의 그 피가 중요할까요? ‘피’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공간, 없는 영역을 만들었어요. 이것이 사도바울신학에서 가장 어려운 겁니다. 그것을 적겠습니다. ‘예수 안’ 왜 이렇게 어렵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예수 안’이란 1번) 없는 곳입니다. 3번) 있는 곳입니다. 2번) 피 입니다. 나의 피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피 입니다. reality, 그것이 현실입니다.


없는 현실을 주께서는 피를 통해서 만들어 내신 겁니다. 여기서 생겨난 것이 종려나무지요.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보면 천국 가는 사람들이 나무를 하나씩 들고 있어요. 무슨 나무일까요? 종려나무지요.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요한계시록 7:9)


에스겔 40장 26절, 거기에 나무 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지요? 종려나무지요. “또 그리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또 이편, 저편 문벽 위에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제가 지금까지 에스겔 새 성전 이야기, P4를 이야기 안했습니다. 우리의 주제가 P2에서 출발합니다. 여러분들의 요구사항 때문입니다.


사실은 P1에서 출발해야 됩니다. P1, P2, P3, P4, P5, P6, 이렇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책들 때문에, 성막의 구조가 궁금하기 때문에 P2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사역자이기 때문에 P1에서부터 새로 출발해야 돼요. 사역자이기에.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지금까지 했던 중요한 것을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없는 공간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있는 공간 저리가, 있는 공간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은 거부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천국을 이루십니다. 절대로 사람들이 있는 공간, 있는 인간을 거부합니다. 왜냐, 사람들은 말을 하기 때문에, 그 말속에 자기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이 생각하는 현실은 하나님의 그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것뿐입니다.


그것은 선지자의 말을 통해서만 현실이 돼요.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한 그 취지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선지자의 말만이 현실이 된다는 것, 그것을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하지요. 그리고 다툼이 된다는 것, 누구하고 다툼이 될까요? 내가 평소에 꿈꾸던 것 하고 다툼이 되겠지요. 하지만, 아, 이것은 어렵다……, ‘있는데서 있는 것’은 하나님의 솜씨가 아닙니다. 있는데서 있는 것으로 하는 것을 문명이라고 합니다. 혹은 문화라고 합니다. 강을 중심으로 이 세상에 4대문명이 발생하지요. 그것이 하늘나라입니까? 아니지요.


없는데서 생겨나는 겁니다. 그 방법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있는데서 있는 것으로 나온 자식입니다. 이스마엘은 천국에 못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천국에 간 자식이 있었지요. 이름이 누구지요? 이삭이지요. 이삭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없는데서 생겨났지요. 죽은데서 나왔지요. 로마서 4장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요.


따라서 저나 여러분이 믿는 자라면 아브라함과 같은 동질의 믿음이어야 돼요. 쉽게 말해서 ‘없었는데 이것이 왜 생겼지?’ 하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내가 죽어야 되는데 왜 살았지?’ 그것을 믿어야 돼요. 그것도 매일 매일, 그리고 언제나. 세 번째, 있는 공간, 이 땅에 천국이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한 분이 읽어주세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에서 중요한 단어,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을 돈으로 바꿔줍니까, 안 바꿔줍니까? 안 바꿔주지요. 말씀을 상품권으로 바꿔줍니까, 안 바꿔줍니까? 말씀을 금으로 바꿔줍니까, 안 바꿔줍니까? 안 바꿔주지요.


그런데 그 말씀이 우리를 천국가게 합니다. 믿습니까? 믿음은 말씀에서 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 만드신 새로운 현실 안에 있구나.’ 1번, 3번 말고 2번,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들어가는 출입구에 뭐가 발린다고 했지요? ‘피’ 예수 피가 발리면 이 안에 종려나무 같은 존재, 종려나무 같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의 내부, 우리의 마음이 하얗게 용서받은 사람,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자기 행함일까요, 아니면 피 일까요? 답변해 보세요. 그렇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지금부터 포인트 1에 들어갑니다. 포인트 1은 선(線)만 있습니다. 이 선이 문설주와 문지방입니다. 여러분은 머리가 다 좋으시니까 포인트 1이 뭔지 기억을 하고 계시지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던 첫 번째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때는 선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마주 대했습니다. 선 너머에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선을 넘어서 이쪽으로 들어오면 죽습니다. 선에다 뭘 발랐을까요? 흠 없는 어린양이 피를 발랐지요. 선은 두께가 얇습니다. 이 얇은 두께의 선을 넓히면 이것이 성막이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얇은 선이 범위를 넓히면 영역이 되고 그것이 성막의 시작, 성전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만약 선에 피가 발려 있다고 합시다. 쉽게 말해서 그것을 늘이면 그 피의 효과가 다 퍼질까요, 안 퍼질까요? 다 퍼지겠지요. 접은 부채를 붉은 물감에 푹 담갔습니다. 아주 푹,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그것을 펼쳤습니다.


펼치니 영역이 되고 공간이 됩니다. 그것이 성전입니다. 그것이 성막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몸이에요. 그것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내가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 만든다.’(요2:19) 하는 그 성전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 모든 강의의 결론을 이미 여러분이 쥐고 있습니다. 참 쉽죠? 남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역자니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누구 죄 때문에 흘렸지요? 누구 죄 때문에? 우리 죄 때문이죠. 자, 부채를 펼칩니다. 제가 아까 피가 활짝 펼쳐지면서 영역을 만들어 낸다고 했지요. 동시에 뭐도 같이 펼쳐질까요? 우리의 죄, 그렇다면 성전이나 성소의 모든 기구들은 우리의 죄를 노출시키고 폭로하는 장치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성막과 성전구조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피는 이야기하면서 자기 죄를 모르는 경우가 있어요. 기존에 나와 있는 모든 성막의 구조를 설명하는 책들이 다 그런 책들입니다. 그 죄가 뭘까요? 충격적입니다. 성막을 만드는 그들이 죄인이라는 겁니다. 쇼킹한 겁니다. 시키는 대로 제사 드리는 그들이 죄인이 돼요.


말씀에 순종하면 순종할수록 죄가 더 드러납니다. 쇼킹한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안하면 되겠네요? 이 영역, 1번, 3번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죄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한 장치들이 모든 성막의 장치들입니다. 성경의 구약은 ‘~하라’고 하지요. ‘하게 되면 비로소 네 숨어 있는 죄가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너는 저주 받아도 마땅하다.’ 하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깨닫게 될 겁니다. 바로 제가 하는 이 두 번째, 인간의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상당히 거북스럽습니다. 혹시 교인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교회 안 나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이겁니다. 마트에 가서 ‘이거 얼마입니까?’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는 것, 이것을 원합니다.


이것을 천국이라 합시다. 교인들이 교회 와서 ‘목사님, 이거 얼마면 되겠습니까? 이만큼 드리겠습니다.’ 하고 갖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을 원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한다면 교인들이 말하기를 ‘예수 피를 받아들이면 구원받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말합니다. 오케이!


그들은 돌아갑니다. 그 때 사역자가 묻습니다. ‘당신의 죄가 이러합니다.’ 갖고 가던 것을 그대로 놓고 두 번 다시 안 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자기 현실이 따로 있습니다. 자기의 말에서 나오는 현실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있는데서 있는 것을 만드는 현실’입니다. 그것을 문명이라 했지요. 그것을 문화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달리 이야기하겠습니다. 자기역사입니다. 있는데서 있는 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참된 성도라면 ‘목사님, 내게 없는 것, 내가 죽은 것에도 불구하고 주신 것이 뭡니까?’라고 물어야 되지요. ‘나에게는 집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돈도 있는데 왜 있는 것들로 천국을 얻을 수 없는 겁니까? 나에게는 열심도 있고 충성도 있고 순종할 맘도 있는데 왜 그것을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겁니까?’


‘그것은 당신이 뭘 해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피로, 예수님이 우리를 점령하는 거예요 새로운 영역을 만드는 거예요. ‘전에는 돈 자랑 했는데, 전에는 자동차를 자랑했는데, 이제는 예수 피로 말미암아 나는 살았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왜, 나는 죄인중의 괴수기 때문에.’


심지어 주택이 세 채가 있고 차가 다섯 대가 있고 땅이 십만 평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 피만 있으면 천국에 충분히 들어갑니다. 믿습니까?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님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내가 뽑혀서 들어가기 때문에. 부채를 펼치니까 부채의 그림 안에 내 그림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그림은 예수님의 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나의 피 입니까? 아니지요. 내 정성입니까? 아니지요. 나의 성경공부입니까? 아니지요. 나의 헌금입니까? 아니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다시 하겠습니다. 선(線) 또는 실, 그 실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것을 세로 가로 직조를 했습니다. 이제 그것은 평면이 되었으니 2차원입니다.


그것을 밑으로 수직으로 내립니다. 그러면 격자구조가 되지요. 3차원이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그 예수 안에는 차별이 없지요. 모두 다 예수님의 피의 실로 직조되어 있기에. 이 이야기를 한 뒤에 10분 쉬겠습니다. 격자 구조입니다. 이쪽에 감사가 나옵니다. 이쪽에 찬양이 나옵니다. 이쪽에 전도가 나옵니다. 이쪽 구석에서 예배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따로 따로 시행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관으로, 혹은 실로 다 격자로 짜여 있습니다. 이 안에 뭐가 흐를까요? 피가 흐릅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곧 찬양입니다. 찬양이 곧 예배입니다. 그 안에 뭐가 흐르기에 그러합니까? 예수님의 피가 흐르기에. 헌금도 찬양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로 따로 하려고 하지 마세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닙니다. 출생자체가 죄에서 태어났기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장소가 천국은 아니었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천국 사람 되었습니다.


십분 쉬겠습니다.
 이근호 (IP:117.♡.132.36) 11-04-05 17:49 
성막 제 2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받은 숙제가 성막입니다. 성막은 출애굽기 26장에 성막의 제조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분명히 출애굽기 26장 이전에도 성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P1……, 여기서 P란 point, 어느 지점을 말하는 겁니다. 시간상의 흐름을 표현할 때 점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포인트라 했고 P라고 한 겁니다. 처음에는 선이었습니다. 유월절이죠. 이스라엘은 없는 나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있었습니다. 나라 자체는 없어요. 그것을 히브리민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히브리민족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냥 종족이죠. 그런데 여기에 애굽이 학대를 하게 되면……, 약간 어려운 것인데요, 적겠습니다. ‘히브리민족-나라 없음’ 여기에 ‘애굽 나라가 히브리민족을 없이한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애굽나라가 히브리민족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뜻이 아닐까요?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대 만에 학대를 받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없이’ 하니까 그 없이 하는데서 반드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중간에 유월절 피가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유월절 피가 들어가니까 생겨버린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이스라엘나라가 제사를 드립니다. 피 있는 제사일까요, 없는 제사일까요? 피 있는 제사 맞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습니까? 제사지내는 제사장이 쥐고 있습니다. 옛날에 십일조는 누구한테 바쳤을까요? 제사장들, 레위인들에게 바쳤습니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땅이 없었습니다. 하는 일이 뭘까요? 매일 같이 제사 드리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왜 그렇게 해야 될까요? 이스라엘은 그 흠 없는 피로 인하여 나라가 계속 유지되어야 되는 겁니다. 진도 나가다 보니 여러분이 너무 복잡하게여길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나는 밀어붙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희생을 기념’하지요. 왜 그래야 될까요? 예수님이 죽던 날 밤에 나누었던 떡(살)과 잔(피)을 다시 모일 때마다 기념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감독이 감독할 내용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감독하라는 거예요. 말 재미있지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감독한다면 그 감독하는 사람의 주의사항이 뭘까요? 혹시나 그 교회에서 예수님의 피 공로가 가려질까봐 감시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사라지면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직업이 없는 사역자를 헌금해서 돌보는 이유가 뭡니까? 뭐만 전하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 것을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참 쉽지요? 목회하기 참 쉽지요? 그런데 실은 어려워요. 만약에 교인들이 헌금을 안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은 나의 현실문제지요. 대략난감입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는데, 교회와 이스라엘이 차이가 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연필 안에 뭐가 들어있지요? 심지가 들어 있지요.


까만 심지가 들어 있으면 연필입니다. 한국에 이런 속담이 있어요. ‘앙꼬 없는 찐빵은 찐빵이 아니다.’ 심지가 없는 것은 연필이 아닙니다. 피를 증거 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왜냐, 천국은 돈 바친다고 열리지 않기에. 천국은 오직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천국 문이 열립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어린양의 피로 하얗게 희어진 자가 종려나무를 들고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린양의 피로 희어진 자들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오직 생명의 피를 품고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만이 죄가 없고 그들만이 의인이라고 합니다. 죄 없이 깨끗하게, 흠도 티도 없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이야기 속에서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죄라는 거예요. 이제 P1에서 P2로 나아갑니다. 첫째 시간에 빨리 했기에 아까 한 것을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실 같은 선에 피가 발렸습니다. 이것을 죽 늘입니다. 이것을 늘여도 피가 다 매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부채로 이야기했지요. 보통 부채는 하얗습니다. 색깔이 곱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피는 시커먼 바탕에 피가 묻힙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커먼 죄도 어떻게 하얗게 희어지는가, 그것이 주님의 솜씨입니다. 유월절을 지내온 이스라엘은 자신이 구원받을 만 하다고 착각했습니다. 우리가 승리했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예언했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것 다시 합시다. 우리의 말은 현실이 안 되어도 선지자의 말은 현실이 되지요.


모세는 그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지요. 모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언젠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영원히 사실 것이다. 출애굽기 15장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15장 17절,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기에 “주의 처소 삼으시려고” 처소라는 말이 나오지요.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 이것 사람이 만듭니까? 목사 피로 만드는 거예요? 아니지요. 여러분의 행함으로 만듭니까? 우리가 못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 속에 있어야 됩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이 여러분 속에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기껏 교회 다니기, 교회 봉사하기입니다.


그러나 천국 만들기는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매일 같이 천국 되는 것은 주님이 하는 일에 내가 그 일부로서 가담된 거예요. 흔히 일반 교인들은 자기가 하는 일 따로 있고 교회 가는 일 따로 있습니다. 학생들이 여러 가지 과목 공부하듯이 설거지 따로, 빨래하는 것 따로, 교회 가는 것 따로, 따로따로 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여러 가지 일중의 하나로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은 설거지를 하든, 밥을 짓든, 장사를 하든, 교회를 가든, 나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용서입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예수님의 용서하심에 감사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손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거예요. 그럼에도 그것이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P1에서 P2로 내려가는데……, 제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한국의 가요 중에 ‘산 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산 할아버지가 구름 모자를 썼습니다. 이 산의 이름이 시내 산입니다. 지금 제가 P2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여기에 한 사람만 올라갑니다. 그 분의 이름은 모세입니다.


위에서 다시 내려올 때 무엇을 보았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전서 1장 10절에 그 내막이 나와 있습니다. 쉽게 할 수 있지만 여러분은 사역자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을 읽어보세요.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


모세는 선지자지요. 선지자가 받은 영이 있습니다. 그 영이 무슨 영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그리스도의 영이 무슨 내용이 있을 텐데 그 내용이 뭘까요?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 보니 ‘고난과 영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합쳐보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모세는 선지자입니다. 베드로전서에 의하면 선지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습니다.


제 말이 너무 비약이라고 느껴지십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제 말이 거짓말입니까? 너무 도약했지요. 시대를 초월해서.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엘리야와 모세가 나옵니다. 유명한 변화 산이지요. 그들이 거기서 누구하고 이야기했지요? 예수님하고 했지요. 그게 리얼리티, 실제고 현실입니다.


늘 보이는 현실은 아니지요.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에 사니까. 하지만 성경의 이 현실이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더 현실, 진짜 현실이라고 믿습니다. 본론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모세가 위에서 본 것이 뭘까요?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보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지금까지 여러분이 들은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에요.


‘모세가 산 위에서 성소 짓는 설계도를 보고 왔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성경에서는 그 설계도를 ‘식양’이라고 하는데 모세가 본 그 설계도, 식양대로 성소를 지었다, 그 이야기만 들었지요. 그런데 저는 방금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모세가 십자가와 부활을 봤다고 했지요. 너무 비약한 게 아닐까요? 너무 도약한 것이 아닐까요? 논리적으로.


제가 아까 이야기한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그 말을 여러분이 인정하시지요? 바로 P1, P2, P3, P4를 능가합니다. 여기서 어려운 용어가 나옵니다. ‘묵시’라는 용어입니다. 묵시란 모든 역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높은 산에 꼭대기에 가면 산 뒤편의 민가도 보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시작이고 나중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모세가 그것을 할 재주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것은 알았습니다. ‘바로 내 곁에 있는 예수님이 이 모든 것을 하실 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세의 시내 산에서 나오는 주장이 무엇이냐? ‘여호와가 곧 주님이다.’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가 주님이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가 곧 나사렛 예수라고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자가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는 무지하게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게 다 아는 이야기고 쉬운 이야기인데 ‘왜 목사님은 그것을 어렵다고 이야기했을까?’ 기존에는 하나님이 여기 계시고 거기에 아들이 붙는 식이 되어버렸어요. 추가하는 식이죠. 하나님은 원래 계시고 거기에 우리가 몰랐던 아들을 추가시키면 구색이 맞는다, 조합이 맞는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도요한 같은 경우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나를 모르면 아버지를 모른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 1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에도 나와요. 쉽게 말해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마귀가 조작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와서 소개하는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요한복음의 싸움은 그 싸움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해다오.’라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는 나만 안다.’ 그걸 가지고 ‘나는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다.’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계신데 서로 자기 아버지래요. 어느 쪽이 맞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말했습니다. ‘너희 아비는 악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그 이야기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있고 그 다음에 아들로 구색을 맞추어서 미흡한 것을 채우는 식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관심사는 ‘너희들이 하나님조차도 알지 못한다.’라는 것이었고 그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는 하나님은 아는데 당신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충해 줄 것인가.’만 요구했어요.


자, 그 다툼이 시내산 밑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굉장히 어려워졌지요. 여러분, 기독교가 하나님교입니까? 예수교입니까? 예수교지요. 왜 예수를 강조하지요? 산은 하나인데 여기 진리가 있고 진리는 곧 하나님인데 불교도 이 지점으로 가고 천주교도 가고 기독교도 가고, 그래서 결국 하나에서 모인다는 것이 인간들의 상식입니다.


우리 맘속에 상당히 편하게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림을 이렇게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그림이 악마가 조작한, 악마가 그린 그림이라고 보고, 예수님의 그림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그 뒤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린 이런 상식적인 것을 거부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에게 죽었던 것입니다. P2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시내 산 아래쪽에 누가 남아 있었는가, 아론이 남아 있었습니다. 헤어져 있는 날이 40일,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 갔다.’ 맞지요?


자, 모세는 하나님께로 갔고 그들은 그 하나님 쪽에서 다시 모세가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기다렸겠지요. 가슴에 뭘 품고? 하나님의 뜻을 듬뿍 품고 돌아오기를 기다렸지요. 40일동안 그들은 여호와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백성들로 하여금 항상 여호와를 쳐다보게 만들어야 되겠지요.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여호와축제를 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합니다. 산에 올라가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여호와가 어떤 모습일까요? 제가 여러분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을 집어넣기 전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집어넣은 다음의 하나님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굉장히 궁금하고 굉장히 수상해요. 뭔가 달라져야 되는데, 기존의 하나님이 와르르 무너져야 되는데, 달라지는 것이 한 가지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알기전의 모든 하나님은 우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하나님을 다시 구성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3장 4절을 봅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문제 나갑니다. 로마서 3장 4절에서 ‘사람은……’라고 되어 있는데 그 ‘사람은’ 다음에 괄호를 한다면 거기에 뭘 로 채워야 될까요? ‘사람은 (다 거짓되되)’ 맞지요? 그냥 거짓된 것이 아니고 어떻게 거짓되다? ‘다’라고 되어 있지요. ‘모든 것이’지요. 제 말 맞습니까? 그러면 성전을 만드는 것도 거짓되고, 성막을 만드는 것도 거짓되고, 교회 다니는 것도 거짓되고, 내가 교회다님으로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참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지요.


여러분,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내가 정성으로 기도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지요. 이 먼 곳까지 성경공부 하러 온 그 정성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지요.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모든 것이 거짓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글자로 나와 있지만 이것이 반갑게 느껴집니까?


우리는 우리의 장기와 우리의 잘난 점을 나타내고 싶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현실은 선지자의 말씀에 있지요. 그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모든 것이 뭐가 되어야 됩니까? 뭐가 되어야 되지요? 모든 것이 거짓되어야 되지요. 나의 모든 것이 거짓되다고 발각당하는 그 행복, 그 즐거움, 그것은 모든 것이 말씀대로만 진리라는 것을 아는 그 즐거움, 내 주장이 먹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장이 먹히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즐겁다는 이 가벼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떨어졌어요. 뭘 해도 거짓되기에 거기서 오는 이 즐거움, 전에는 반대로 살았어요. 남한테 잘난 체해야 됩니다. 그게 내 존재의 힘이기에. 그 힘이 우리의 두통과 스트레스를 야기했습니다. 관절통, 류머티스, 위선과 위장으로 일관했어요. 그런데 선지자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인간의 모든 것은 거짓되다, 했습니다. 일부만? 아니요, 전부! 그러면 구원받는 것은 누구 덕분으로? 예수님 피 덕분에! 그게 바로 진짜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고소하리요, 너를 대신해서 내가 죽었는데, 모든 것이 거짓되고 참되신 하나님이 대신해서 죽었은즉 이렇게 주님과 붙어사는데, 그래서 예수님만 자랑하는데, 누가 너희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누가 송사하겠습니까? 마귀입니다.


욥기에 나오지요. 이 말 하기가 무섭습니다. 너무 쇼킹하기에. 제가 너무 잘 압니다. 교회 교인들이 자기 잘난 맛에, 자기 과시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을 너무 잘 압니다. 단점은 가리고 장점은 부풀리고, 너와 나 모두 다 그게 사람이 모인 곳이고 그것이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과연 그 가운데 예수님의 피 앞에서 나의 모든 것이 거짓되다는 것을 아는 사람 누가 있을까요?


오직 묵시의 영,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만으로 자랑하는 사람, 그것을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간음한 여인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간음한 여인보고 한 이야기입니다. 요새 간통하고서는 교회 못나옵니다. 맞지요? 대답이 없으십니다. 이혼하고는 교회 부끄러워서 못나오지요. 나오는 분도 있답니다. 아, 좋아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너무 오버하면 좀 그렇지만.


모세 밑에 아론이 있습니다. 아론이 만들어낸 여호와가 어떤 모습일까요? 글자를 크게 쓰겠습니다. ‘우상’입니다. 우상을 누가 만들었어요? 여호와 믿는 사람이 만든 거예요. 이것도 쇼킹한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우상은 부처를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조상숭배를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자기가 평소에 상상한 하나님을 부풀리면 그것이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 앞에 딱 붙는 말이 있어요. ‘자기를 위하여.’ 이것은 십계명에도 들어 있습니다.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시내산 위의 하나님께서 쌍안경을 들고 지금 산 밑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다 보고 알고 계셨습니다. 그 내용이 십계명 안에 담겨 있어요. 놀랍죠? 그래서 십계명의 제 2계명을 보면 ‘자기를 위해서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이것이 지금 아론이 하는 짓을 다 보고 있기에 나온 겁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누구를 사랑합니까? 너? 아니요, 나!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스럽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내가 더 사랑스러울까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대답하기 주저스럽지요. 예수님 말씀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말이 나옵니다. ‘너 자신마저 미워하라.’는 거예요. 왜 너 자신을 미워하라고 했습니까? 이 복잡한 문제의 해답을 드리겠습니다. 간단합니다. 내 것 속에 하나님이 계시게 하지 말고 하나님일의 일부가 내가 되면 돼요. 이제 이 복잡한 문제의 해답이 풀렸지요. 생각하면 굉장히 쉽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어렵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 것을 따로 고수하고 하나님의 좋은 것을 나에게 가져오는 거예요.


이러니 힘든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통째로 접시에 담읍시다. 그것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면 돼요. 참 쉽지요? 그런데 머리에 뭘 발라야 되겠습니까? 주의 피. 왜 주의 피를 발라야 되지요? 그냥 드리면 하늘나라에서 안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받습니까? 베드로가 주께 목숨 바친다고 할 때 주께서 받아들였습니까, 거부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거부했지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피 바르고 데려가지요. 바로 그겁니다. 이제 내막이 풀렸습니까? 아까 제가 어려운 질문 할 때 난감했지요. 신앙생활 어떻게 할지 난감했지요. 그냥 그대로 사세요. 항상 주의 피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분 쉬겠습니다.
 이근호 (IP:117.♡.132.36) 11-04-07 11:28 
성막 제 3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제가 지금 서너 번 계속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되풀이하겠습니다. 피가 있다는 것은 그 맞은편에 죽음의 사자, 심판의 사자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겁니다. 애굽의 장자들은 다 죽었지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의 맏아들은 안 죽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안 죽었다는 거예요. 의미가 뭡니까? 죽어 마땅한데 안 죽었다는 거지요.

죽어도 되는데 안 죽었다 그 말이잖아요.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들이 살았지요? 피 때문에 살았지요. 그렇다면 그 피를 알고 난 뒤에 항상 갖고 있는 생각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데 피 때문에 살았다.’ 그 말이겠지요. 이제 알아야 될 것은 뭐가 남아 있겠습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가, 그 내용이겠지요.

논리가 그렇게 전개되는 겁니다. 피라는 것을 빼버리면 그 때부터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게 돼요. 교회 오고 나서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더 이상 바람도 안 피우고 교회 오고 나서 나는 이렇게 새사람 되었다, 그런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거기에 피가 들어가 버리면 곧 심판 주 앞에서 살지요. 바로 코앞에 심판주가 버티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주가 나를 심판할 때 무엇의 있음, 없음의 여부로 보겠습니까? 피가 있는지 없는지 보겠지요? 그 피를 가지고 약속의 피라고 합니다. 제가 강의 시작하고 처음으로 나온 이야기입니다. ‘약속’입니다. P1에서 P2로 내려가면서 하나님만이 아는 그 약속이 어떻게 확대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누구를 가지고 그것을 보여줄까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착해서 입니까, 아니면 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착해서가 아니라 악하기 때문에 그들을 충분하게 사용할 가치가 있는 겁니다. 방금 제 이야기는 신명기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한 것은 그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다.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고 교만한 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 요새말로 천국이죠,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죄가 많지만 혹시 나중에 천국에 가시거든, ‘혹시’입니다, 저는 다 가기를 원합니다만, 혹시 천국에 가시거든 면류관조차 예수님에게 반납하시고 ‘내가 여기 온 것은 예수님의 은혜덕분입니다.’라고 이야기하세요. 그동안 교회 봉사한 것 많이 있지요. 그것은 주께서 그렇게 일을 시킨 겁니다.


그 일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와서 일을 하면서 비로소 아는 죄, 일을 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알게 된 죄, 그 일을 안했으면 몰랐을 뻔 했던 죄, 그 죄마저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해 준 겁니다. 산자와 죽은 자마저 심판하시는 그 심판 주 앞에서 오직 하나님의약속의 피가 있는 자만 가려내고 있습니다.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장차 할 영원한 심판을 앞당긴다는 의미에서 ‘선취(先取)’, 미리 취한다고 합니다. 모세가 예수님의 부활과 고난을 미리 봤지요?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장차 생명나무와 행위 책으로 말미암아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질 그 심판의 광경을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내는 거예요. 장차 오는 심판을 우리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너희들은 행함을 자랑하지만 나는 예수의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도다.’ 고린도전서 1장 끝부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운데 학벌 좋은 사람도 없고 문벌 좋은 사람도 없고 부자도 없지만 우리는 각자 예수만 자랑하기로 모인 곳이 교회’라는 겁니다. 그 구절 기억나시지요? P1에서 P2로 넘어가면서 참 신과 우상이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상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이방민족들이 섬기는 신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제 1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이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신은 이방민족이고 우리 이스라엘은 여호와만 섬긴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알고 있지요?


그런데 서서히 이스라엘 내부에서 우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피어납니다. 마치 교회 안에서 기도라는 형식으로 원망하듯이, 교회 사역자들이라 여러분은 다 아시잖아요. 어떤 사람은 성경 들고 교회 오면서 흑흑, 울면서 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기쁘게 오는 이도 있지요.


울면서 오는 사람은 따지러 오는 겁니다. 내 인생 내놓으라는 거예요. 원상복구 해놓으라는 거예요. 하나님 믿고 손해 봤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일 따로 있고 하나님 일 따로 있는 거예요. 반면에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이 바쁜 와중에 오게 한 것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오는 거예요.


과연 어느 것이 우상이 아닐까요? 단지 부처만이 우상이 아니라 교회 다니는 바로 내가 여전히 우상을 품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지요. 그 말은 다른 말이 아니고 ‘그렇게 고민하는 너도 예수님 자기의 것’이라는 겁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집안 살림걱정 하겠습니까?


강아지가 혼자 가계부 쓰고 있습니까? 주는 대로 먹지요. 그래서 ‘오뉴월에 개 팔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집안에 난리가 나도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이 이사 가면 따라가면 되니까. 그걸 성경에서 동행이라 합니다. 지금 웃지 않는 것을 보니 심각한 모양입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우상이 만들어지니 그 때부터 이웃나라 우상과 친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우상이 만들어질 수 있는 우상의 요소를 성막 안에 만들어 놓았어요. 이제 P2(성막)를 본격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막의 중심에 보면 법궤가 있습니다. 영어로 box, 상자입니다. 상자는 뭘 담아야 되겠지요.


그 안에 뭐가 담겨 있을까요? 우상 적인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깨진 돌판. 이 돌 판을 누가 깼을까요? 모세가 깬 것이 아닙니다. 원인제공을 누가 했을까?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 상상한 여호와 때문에 깨어졌던 겁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을 돌 판으로 만들었을까요? 언제든지 깨질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인간의 죄로 쉽게 깨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태권도 5단입니까? 예수님의 보디가드가 천 명입니까? 예수님의 몸은 강철입니까? 한국에 ‘로봇 태권 V’라는 것이 있어요. 혹은 ‘독수리 5형제’, 예수님의 몸은 연약했어요. 뺨을 때려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떠밀면 쉽게 넘어져서 죽을 몸이에요. 인간의 어떤 잘못된 생각이 있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의 몸에 흔적으로 남는 겁니다.


그런 몸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죄로 쉽게 부스러지는 형태로 주어진 거예요. 두 번째 들어 있는 것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싹이 납니까? 지팡이는 싹이 나야 정상입니까, 안 나야 정상입니까? 안 나야 정상이죠. 그런데 싹이 났으니 이것은 자랑거리예요, 아니면 뭔가 잘못된 거예요? 잘못된 거지요.


사람의 눈이 뒤쪽에 달려 있으면 편할 것도 같지만 이것은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그것을 도깨비(귀신)이라 합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그만큼 고라 자손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대적했다는 겁니다. 세 번째 들어 있는 것은 만나가 들어 있는 항아리죠. 이 세 가지가 이스라엘백성들 안에 들어 있는 다른 하나님 때문에 발생된 반항심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그런데 아버지하고 동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제대로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몰랐습니다. 티격태격하면서 다투지요. 원망했습니다. 모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본인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다르다는 거예요. 이야기를 쉽게 하겠습니다. 교회 처음 나오는 사람이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교회 나오고 난 뒤부터 가정이 잘 풀리지 않았어요.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원망하면서 기도합니다. 왜 하나님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릅니까, 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지도자로서 어떻게 조언해주십니까? 흔히 하는 조언들은 이런 거예요. 참으세요, 어려울 때 피할 창문을 열어주십니다,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 냅니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요, 그 말이 맞습니까?


제가 분석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겠다고 교회 왔습니다. 우리 첫 번째 강의할 때 했습니다. 나의 기도하는 그것이 나의 현실이 되고자 한 겁니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이런 것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교회 나와서 세상 것을 비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도자입니다.


상담하기를, ‘조금만 참으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주십니다.’라고 이야기한 셈이 되어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당신은 세상 것을 원하십니까? 조금만 참으시면 세상 것을 주께서 주십니다.’라는 말을 한 셈이 되어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당신의 성질 자체를 바꿔야지요.’


그때는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고생했는지를 이야기해 줘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기까지 낮아졌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낮추시면 십자가를 알게 될 것이고, 마음을 낮춘다고 단지 그것으로 십자가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내가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시는 것도 감사해야 할 텐데, 주시는 것도 은혜인데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아버렸어요. 예수님 붙들고 동업하자는 식이 되어버렸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을 앞장세워서 남에게 자기를 과시하려 했다는 말이지요. ‘나를 봐라. 잘났잖아.’ 사실은 그런 사람이 교회에 참 많이 들어옵니다.


세상에 남에게 뒤처진 것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으로 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동안 교회 오기 전까지는 몰랐던 우상을 바른 지도자를 만남으로 비로소 내가 우상숭배자임을 알게 된 거예요.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인줄 알았어요. 십자가의 낮아지심을 빼버린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 따르라는 말을 빼버린 거예요.


분명히 설교시간에 여러분이 이야기를 해 줬어요. 그런데 세상 것을 원하는 사람은 그런 것을 다 빼고 듣습니다. 그렇지요? 안 그런가요? 그것은 여러분이 설교하면서 교인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는 안 듣고 있다가 ‘바치면 복 받습니다.’ 할 때는 눈이 번쩍 뜨이는 거지요.


장로님 기도할 때 다 자다가 축도할 때 잠 다 깨지요. 복 받아 가려고.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쌍안경으로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상자 안에 원망이 들어 있습니다. 이 상자가 바로 모든 것이 거짓된 나, 참 쉽지요? 성막 안에, 그 중앙에 내가 들어 있는 거예요. 무엇의 이름으로? 죄인의 자격으로.


죄인역할 함으로써 예수님의 피가 영광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지요. ‘여기 죄인 할 사람!’ 하고 찾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손들고 ‘죄인 여기 있습니다.’ 나서시면 주께서 피를 발라서 ‘이런 강도 같은 인간도 천국 간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먼저 간다.’고 이야기 합니다. 바로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은 거예요. 참 쉽지요?


현실적으로 참 어렵지요. 성막 구조를 장치로 그리지 않고 사람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우선 틀을 마련하세요. 단위는 성경에 있는 대로 큐빗(cubit)을 쓰는데 약자로 C를 쓰겠습니다. 성막의 긴 변(남북)이 100C, 짧은 변(동서)이 50C, 동쪽을 터서 그 간격이 20C, 이 앞에 흙을 약간 돋우고 여기에 고기 굽는 장치를 합니다. 이것을 번제 단이라 합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다시피 여기에 사람이 하나 있다고 했지요. 우상숭배자이지요. 사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람이 다 우상숭배자예요. 그것은 생명나무를 못 봐서 그래요. 우리가 왜 생명나무를 못 봤을까요? 처음부터 못 보도록 천사가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 속담에 ‘서울 안 가본 사람이 가본 사람 이긴다.’ 하는 말이 있어요.


바리새인이 하나님을 압니까?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을 압니까?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아는 체 하지요. 그러면 하늘에서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 앞에서 누가 누구를 가르칩니까? 하늘나라 안 가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앞에 두고 천국에 대해 서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이걸 두고 ‘참 터무니없다.’는 뜻으로 ‘가관(可觀)’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하늘나라 알아요? 우리는 태어나서 여기 살다가 그냥 여기서 끝이에요. 산에 올라가봐야 한 2 천 미터 올라가면 내려와야 돼요. 우리는 변화 산에도 못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우상숭배에요. 여호와, 예수, 삼위일체, 언약, 십자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나 자신이 바뀌지 않는 한 전부 다 우상 되는 겁니다.


뭐에서 뭐로 바뀌어야 되지요? 여기 십자가 피가 온 머리부터 온 몸이 적신다고 해 봅시다. 그 때부터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나는 안다.’고 주장하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건짐 받았다.’라고 이야기하겠지요. 그 때부터 그 사람은 뭐만 자랑합니까? ‘예수님 때문에 나 같은 무지한 인간도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지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보내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 모세도 있고 예레미야도 있고 이사야도 있지만 그 분들이 와서 우리 죄를 해결하지는 못해요. 부처도 있고 공자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부활한 적이 없습니다. 실제로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어요.


제가 목회를 30년 이상 했는데 집에서 가만 생각해 봤어요. ‘내가 이야기한 것이 과연 사실일까? 혹시 내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성경을 꿰뚫는다고 했는데 과연 제대로 꿰뚫었는가?’ 다른 것은 다 부인할 수 있어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삼일 만에 살려서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그 복음은 거짓일수가 없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는 말씀이 있어요. 왜 사도바울은 자기의 잘남을 자랑하지 않았을까요? 자기는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베드로는 자랑하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돼요? 어느 선교사, 어느 성직자,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오직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믿어야 돼요. ‘죽었다가 살아난 자를 믿는 자는 그의 영이 들어오게 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로마서 8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세상적인 복을 가지고 복을 받았니, 안 받았니 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나같이 하면 부자 됩니다, 하는 이야기를 해요. 돈 많은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진짜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그 내막을 아는 거예요. 그것을 두 자로 비밀이라고 합니다. 앞에 붙는 말이 있어요. ‘창세전부터 비밀’ 에베소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밀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이 십자가비밀을 알게 되고 구원의 능력은 샘솟듯이 십자가에서 지금도 나온다는 거예요. 마치 사마리아여인이 먹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나오듯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성령이 있는 사람은, 비록 돈이 없더라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기쁨이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제 말이 아니고 주의 말씀입니다. 그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이 우상숭배의 위에 뚜껑이 있습니다. 이 뚜껑의 이름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제가 아까 이 동쪽으로 문이 나 있고 그 앞에 있는 번제 단 이야기를 했지요. 그리고 갑자기 제가 사람을 하나 그렸잖아요. 이 사람을 우상숭배자라고 했지요.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깨진 돌판, 만나 항아리, 이것이 다 누구 짓입니까?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었지요. 제 말이 맞지요? 착한 사람이 그 짓 했습니까? 바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잘못된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짓거리 때문에 생긴 일들이지요. 그런데 이 상자의 뚜껑을 가지고 속죄소라고 합니다. 속죄소라는 것은 죄를 용서해주는 장소, 다른 말로는 ‘시은 좌(施恩座)’라고 하는데 은혜가 공짜로 내려앉는 자리, 그러면 은혜라는 것은 어디에 안착하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지요. 은혜가 팔랑팔랑 날아와서 여러분 속에 앉는다면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아, 죄가 무지 많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와, 시커먼 죄.’ 나는 그걸 감추고 있었지만 주께서는 쌍안경으로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동원시켰다는데 의미가 있어요. 이 세상에 많은 죄인이 있지만 은혜는 다 임하는 것이 아니고 나풀나풀 나비가 꽃을 찾아가듯이 술래잡기 하듯이 ‘잡았다!’ 하면 그 사람에게 구원이 임하는 겁니다. 제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데 은혜가 나비처럼 날아와서 임하게 되면 ‘제가 우상 숭배자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나는 하나의 장치가 되는 겁니다. 무슨 장치가 될까요? 성막안의 장치가 됩니다. 지금까지 나와 있는 모든 해석은 성막을 예수님으로 해석했지요. 예수님으로 해석하면 안 되고 예수님의 기능(일)으로 해석해야 됩니다. 그 차이가 뭘까요? 그 예수님의 기능에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겁니다. 무슨 자격으로 구원받았을까요? 은혜가 필요한 죄인의 입장에서 역할을 맡은 겁니다.


혹시 이 근처에 영화 촬영소가 있습니까? 거기에서 일하는 분들이 있어요. 원래 친구인데 둘 다 엑스트라로 들어가게 되면 한쪽은 적군의 군사가 되고 다른 한쪽은 아군의 군사가 됩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영화촬영소입니다. 모세가 누구 영을 받았지요? 예수의 영을 받았지요. 성막 전체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했지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을 아까 읽었잖아요. 선지자에게 장차오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보여줬지요. 성막은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의 기능이에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장래에 하실 일,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감히 우리가 부름 받고 그 당시 사람들인 이스라엘이 부름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성막은 곧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축소되면 성막 되는 거예요. 그 장막 앞에 문이 있는데 이 문이 2.25미터인데 이것이 5C(cubit), 이 성막 안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이 높이가 10C, 성소의 가로 세로가 각각 20C, 10C, 지성소의 가로 세로가 각각 10C, 10C ……, 이렇게 설명하고 있으니까 제가 꼭 만드는 것 같은 느낌인데 하여튼 같이 만들어봅시다.


만드는데 누가 누굴 만드느냐, 우리가 우리의 진실한 모습을 만드는 거예요. 만약에 그림에 여러분 자신을 그려보세요. 아주 예쁘게 그릴 거예요. 남자는 미남으로 여자는 숙녀로. 그런데 예수님의 그 기능과 만나게 되면 남자나 여자나 다 죄인으로 그림을 그려야 돼요. 그 그림과 건축이 성막이 된 겁니다. 참 쉽죠.


제가 여러분의 인상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성막이라면 예수님과 관련지었지요. 저는 지금 우리의 감추어진 죄와 성막을 연관시키려고 합니다. 성막은 깨어집니다. 곧 누가 깨지는 거예요? 성막 지은 우리가 깨지는 거예요. P3가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 깨지고 불타버립니다.


누가 깨지고 누가 불타는 겁니까? 이스라엘 멸망입니다. 곧 우리의 멸망이지요. 이제 성막의 존재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 안의 숨겨진 우리 죄를 다 담아서 심판의 라이터 불로 불 질러 버립니다. 이 말씀에서 불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점심 먹고 하겠습니다.
 이근호 (IP:117.♡.132.36) 11-04-07 11:28 
성막 제 4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만들라.’ 성막을 만들라고 했지요. 만들라고 했으니까 여기에 ‘있음’이 되는 겁니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만들라’를 믿겠습니까? 만들어진 이스라엘을 믿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만들라, 한 이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고 만들어진 이 ‘있음’을 보게 되면 여기에는 말씀 + 인간의 행함, 이렇게 말씀에 인간의 행함이 포함되겠지요.

사람이라면 둘 중에 어느 것이 당기고 좋아지겠습니까? 1번일까요, 2번일까요? 2번, 그렇지요.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교회에서 ‘피아노 위에 놓을 꽃이 필요합니다. 꽃 장식 하실 분?’라고 목사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꽃을 피아노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꽃을 얹어놓으세요, 라는 말에 더 관심이 있는 반면에 막상 꽃을 해 놓은 그분은 목사 말보다도 자기의 행위가 포함되어 있는 그 꽃에 마음이 더 당기기 마련이지요.

애들이 장난치다가 피아노위에 있는 꽃병을 떨어뜨렸다. 다른 사람 같으면 목사님께서 또 누군가에게 꽃 가져다 놓으라고 하면 되지, 라고 믿는데 막상 그 꽃을 처음에 장식한 집사님의 마음은 찢어지겠지요. 다른 사람은 애들 노는데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이해하는 반면에 꽃을 장식한 그 집사님은 화가 나는 겁니다.

‘누구야? 내가 장식한 이 꽃을 어느 집 애가 망쳤어?’ 그걸 보고 목사님이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저 집사님은 내가 한 말보다 자기가 장식한 꽃에 대해서 더 신경을 쓴다.’고 안타까워하겠지요. 이런 일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점을 성막과 관련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막이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있습니까? 둘 중에 어느 겁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중요합니까? 성막이 있는 것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중요하지요. 그러면 성막 없어져도 괜찮지요. 사람들이 성막이 없을 때는 하나님 믿다가 성막이 생기면 성막 자체에 마음을 두느냐하면 성막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이는 것을 우리가 소망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요.


‘우리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롬 8:24,25)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교회라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교회가 없어져도 주님 계시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충분하겠지요. 단 어떤 사람이 충분한가, 그 교회에 헌금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은 괜찮겠지요. 그 교회 봉사한 적이 없는 사람은 손 털면서 괜찮겠지요.


그러나 30년 동안 헌금한 사람, 30년 동안 성가대 한 사람, 30년 동안 교회 건물 손수 지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뭘 어쨌다고? 한 땀 한 땀 자기의 정성과 기도와 노고가 그 교회에 다 묻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성막이 어느새 권력체가 되는 겁니다. 소유용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만들라고 해놓고는 친히 그 성막을 없애버립니다. 이제 우리는 성막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P2입니다. 성막에서 뭘 찾아야 되느냐, 왜 성막은 없어져야 되는가를 찾으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아셨던 성막은 ‘왜 성막이 있어야 되느냐.’라는 쪽에서 공부를 하셨어요. 이제 우리는 성막이 없어져도 상관없다는, 바로 그것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성막에 대해서 만들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해도 상관없이 구원이 되는 그것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성막이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되지 성막 만드는 노력으로 왜 구원되지 않는가를 우리가 알려고 합니다. 이제 더 나아가서 교회 있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나를 구원한다는 이유를 이제부터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반 교인들은 교회 없어져도 괜찮습니다. 저 같이 목사 된 사람들은 교회에서 생계비가 나옵니다. 가족이 있어요. 이걸 붙들고 있어야 밥 먹고 살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의 입에서 ‘교회 없어도 예수의 피만 있으면 충분히 천국 갑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경우뿐입니다.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걸 믿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어요. 아내한테 미안하지요.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연장해 봅시다. 성막의 바깥 전체 가로가 100C, 세로가 50C, 문은 20C, 울타리의 높이는 5C, 이 울타리 안에 성막이 있는데 이 높이는 10C, 이것이 둘로 쪼개져 있어요. 성소가 지성소보다 두 배 더 넓습니다.


성소의 가로가 20C, 지성소의 세로가 10C, 합이 30C, 여기에 입구가 있습니다. 입구는 9C, 여러분이 만들 수 있겠지요? 지성소 안에 박스가 있고 그 박스는 위 뚜껑과 아래 상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뚜껑을 속죄소라고 이야기 했지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수직으로 천이 있습니다. 지성소 안에도 천이 있습니다.


제일 바깥에서 동쪽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면 흙이 약간 돋아져 있는데 거기에 번제 단이 있습니다. 더 가면 손 씻는 곳이 나옵니다. 물두멍입니다. 여기에 부삽이 있고 갈고리가 있습니다. 대야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불을 담는 단지가 있어요. 이것은 제물을 불에 태워서 제거하는 겁니다.


제가 손에 매직펜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뭐만 뽑아내면 갖다 버려야 되지요? 잉크 다 소모되면 갖다 버립니다. 여기서는 피를 뽑아내는 겁니다. 이 천막을 걷으시고 이 피를 가지고 들어가세요. 먼저 나오는 방이 성소인데 이 옆에 향을 피우는 향단이 있습니다. 냄새가 온 천지에 퍼지겠지요. 여기에 상이 한 개 있습니다.


또 등대가 있습니다. 한 줄기가 있고 거기서 양 쪽으로 여섯 개의 가지가 나온 일곱 등대가 있습니다. 이 상에는 떡이 열두 개가 놓여 있습니다. 이 피가 향기로 변합니다. 만약 여기서 나온 이 피가 아니고 다른 피나 혹은 다른 제단의 불을 피운다든지 하면 이것은 향기가 아니고 진노의 불이 됩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이 전체가 뭐냐, 불바다입니다. 레위기 10장에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는 불을 가져왔다가 그 자체가 불바다가 되었어요. 그 두 사람이 죽었겠어요, 안 죽었겠어요? 적어도 제사장인데? 제사장이 높습니까? 하나님이 높습니까? 문제는 여기 어디에도 하나님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제가 네 번째 강의를 하는데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번제 단에 하나님이 보입니까? 이 물두멍에 하나님이 보입니까? 분향 단에 하나님이 보입니까? 이 언약궤에 하나님이 보입니까? 결국 어디에도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하나님은 어디에도 안 보이는데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할 때는 눈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해야 살아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디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두 사람은 불바다 되어서 죽었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보통 문제 아니지요. 큰 문제에요. 이 제단을 누가 만들었지요? 사람들의 노동력이 들어가서 만들었지요.


그러니까 이런 번제 단이 있다면 이걸 만든 사람은 있지요. 그런데 이것을 만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안 보이지요. 안보이면 없는 겁니까? 지금 교회 사역자인 여러분 보고 다른 사람이 비웃습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교회 나갈게,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여러분의 착한 행실? 경건함? 교회에서는 경건하지요. 집의 안방에 혼자 있을 때 뭐가 경건합니까? 기도할 때는 고상한 생각을 하지요. 꿈속에 뭐가 나타나지요? 해괴망측하지요.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정도지요. 다른 사람은 안보이기에 못 믿겠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왜 믿으셨어요? 뭘 보고 믿어요? 안 보이는데?


안 믿는 사람들도 다 똑똑한 사람들이에요. 도마보고 따져보고 믿겠다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도 따져보고 믿기로 했습니다. 여러분, 뭘 따졌습니까? 그래서 30년 다니고 40년 목회해도 나중에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 난감한 질문에 제가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하면, ‘보고야 믿겠습니다.’라는 죄를 들추어냅니다. 일반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믿는 이유가 ‘목사님은 주의 사자고 목사님은 하늘과 땅의 중간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사랑받으면 곧 하나님에게 사랑받은 것으로 스스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화를 내면서 ‘청소를 왜 이렇게 했어.’라고 나무랐습니다. 삐졌습니다. 교회 안 나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삐질 때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 우리는 버티고 있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삐진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비로소 나의 본색을 들추어내는 말씀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면 다닐수록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나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작업이에요.


은근히 교회 다니면서 인정받기를 원했고, 은근히 교회 하면서 남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했고, 은근히 교회 하면서 그걸로 자기의 생계를 보장받기를 원했고, 그것이 돈이 되기에 나는 이 교회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그걸로 하나님 사랑한다고 위선한 거지요. 어느 날 성령이 와서 십자가만 크게 보일 때 내가 흘려야 될 피를 예수님이 대신 흘릴 때 ‘주여, 날 때부터 저는 이미 죄인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해요.


그때부터는 지금까지 산 것이 내가 노력해서 산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로 산 것을 알지요.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말씀입니다. 무수한 시련과 실패를 여러분은 교회 밖으로 나가지 마시고 교회 안에서 겪으셔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생기고 아무리 모함하는 일이 있더라도 교회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떠나면 나보고 죄인이라고 지적할 사람이 없어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걸 가지고 교만이라고 하지요. 방금 무서운 이야기 했습니다. 이 성소에서 양이 들어갑니다. 여기서 잉크만 빠지고 나머지는 버린다고 했지요. 피만 생산되어서 여기를 향기롭게 합니다. 여기서 나답과 아비후가 불바다 되었다 했지요.


정면으로 심판 주와 만나는 장소입니다. 문제는 심판하는 그분이, 불바다 만드는 그 분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민수기 15, 16, 17장에서 고라자손이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00왜 고라 자손이 모세에게 대들었을까요? 하나님은 안보이고 모세는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네가 뭐가 잘났어? 네가 뭔데 너 혼자 다해?’ 그 때 땅이 갈라졌습니다. 거기서 불이 임했습니다. 불바다 되어서 고라자손이 타 죽었지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심판을 느끼고 있는데 모세를 바라보는 고라자손에게는 모세만 보이고 뒤에 있는 모세가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성이 안보였던 겁니다.


그래서 그 선, 선을 넘은 겁니다. 모세는 피의 의미를 아는데 고라자손은 인간 대 인간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하고 있습니다. 공부할 때 진도만 많이 나간다고 좋은 것은 아니겠지요. 아까 한 것 다시 하겠습니다. 유월절은 하나의 선이지요. 히브리인들은 심판 주를 마주서고 있습니다. 애굽인들은 어떻습니까?


뭐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린양의 피를 믿지 않으면 심판받는다.’는 말 자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황급히 양을 잡아서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왜 히브리인들은 피를 바를 줄 알고 왜 애굽인들은 그것을 바를 줄 몰랐을까요? 여러분, 성경 보면서 그것이 궁금하지 않던가요? 그냥 모르는 것은 넘어가기로 했습니까?


그 열 번째 재앙이 이전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아홉 개의 재앙이 먼저 있었습니다.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번째 재앙이 애굽인들 사는 동네와 히브리인들의 동네를 차별해서 떨어졌습니다. 애굽인이나 히브리인이나 둘 다 인간의 시력을 갖고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해석하는 마음은 있었어요.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모세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모세가 시키는 대로 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랐습니다. 지금은 모세대신 누가 와 계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죽고 사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17장 30절, 31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영어로 now, 31절에 “정하신 사람” 이 ‘정하신 사람’이 저입니까? 여러분입니까? 누굽니까? 계속해서 31절에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여기서 ‘저’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북경대학교 수석 졸업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상해 제일의 부자라도 구원 못 받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죽었다가 부활한 그것만이 마지막에 구원이냐 심판이냐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변화 산에서 구름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기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히브리인들이 모세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모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도 않았고 문지방에 피를 바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 주와 마주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모세가 그렇게 외친 것은 그날 밤에 심판의 사자와 맞닿아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언약의 피 밖에 없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바꾸어서 말하면 ‘피가 있으면 어떤 죄도 용서 되느니라.’ 하나님은 죄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피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보시는 겁니다. 이미 이 성막에서 피를 생산했습니다. 향단에도 피를 바르는데 그 피가 없는 향단은 불바다 되는 것을 봤습니다.


피는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뭐가 남았습니까? 죄만 있으면 되겠지요. 죄를 만드는 방법은 뭘까요?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이 가입됨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죄 되게 함이라.’(롬 5:20) 여러분, 제 말은 ‘즐겁게 죄 지읍시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기분 좋게 죄를 압시다.’라고 하는 겁니다. 더욱 넘치도록, 매일 매일, 죄 아닌 것이 없음을 즐거워합시다.


한국에서 이런 이야기 하면 듣는 사람 중에 이해하는 사람 별로 없었어요. 우리가 갖고 있는 죄를 즐거워하자고 했는데 그들은 그 말을 다른 뜻으로 오해해서 ‘즐겁게 죄를 짓자.’고 했습니다. 마음 놓고 죄지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주께서 작용하시는 것을, 주께서 간섭하시는 것을 즐거워하자는 겁니다.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죄를 낱낱이 드러내는 작용을 하는 그 보이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뭐 앞에 데려가기 위함입니까? 바로 피 앞에 데려가기 위해서. 이피는 이미 우리 죄를 용서하기로 창세전부터 작정된 겁니다. 죄도 짓기 전에 먼저 죄용서부터 만들어졌어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우리에게 이미 예수님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행위를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모독하지 맙시다. 즐겁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입시다. 제가 눈물이 다 날려고 하네요. 왜 제가 자꾸 눈물이 나려 하냐면 이것 때문에 많은 설움과 오해를 받았어요. ‘이 근호 목사는 일부러 죄를 유발한다. 교인들에게 죄를 짓도록 독촉한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의 뜻은 마음을 낮추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남들처럼 가지지 못했다고 하나님께 원망하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범사에 기뻐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살전 5:16-18) 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누가복음 15장 이야기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올까 말까, 올까 말까, 주저하고 있을 때도 아버지는 이미 모든 용서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막상 아버지께로 돌아와 보니까 내가 회개하는 그것보다도 아버지 사랑이 더 넓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탕자가 ‘나는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다.’고 자랑하고 싶겠지만 자기의 결정보다 더 앞서서 이미 용서하기로 되어 있는 아버지의 사랑 앞에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구원받고 보니까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서 태어나서 몇 십 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언제 여러분이 창세 전 이야기를 아셨습니까? 태어나서 교육받으면서 아는 그것이 전부인데, 내가 아는 것이 그것밖에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날 용서할까, 용서 안 해줄까.’ 맨 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 피 흘리는 것을 보니까 이미 창세전에 구원의 자리에 우리 이름이 있었던 것을……,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는 결국 말려든 거예요. 야곱은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결정한 그 결정에 우리는 놀아난 겁니다. 좋은 의미에서.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예수님을 사적으로 관계했습니다.


‘예수님 이것 드리면 기뻐하겠습니까? 이것 안 드리면 삐지시겠습니까?’라고 사적으로 흥정을 했어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팔짱 끼시고 싱긋 웃으시면서 ‘네가 창세전을 알아?’ 이미 사랑하기로 만들어진 인간이 너무나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성경속의 세계에 들어가야 되는데 주변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어요.


‘너 그렇게 하면 벌 받는다, 저주받는다.’ 이런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구원받고 보니까 이 모든 것이 다 작정된 시나리오대로 그대로 가는 것을, 우리가 그것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고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롬 8:26)는 거예요. 그런데 기도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를 성령께서 대신 기도해 주셔서, 우리 입을 막아버리고 성령께서 대신 말하셔서 필히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일에 성공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남은 일은 평생 철없는 행동, 자기 밖에 모르는 철없는 행동, 교회 와서 피아노 위에 있는 꽃꽂이 때문에 싸우는 그 철없는 행동, 목사님에게 청소 못한다는 소리 듣고 삐져서 한 달 동안 교회 안 나오는 철없는 행동, 교회 헌금 제대로 못해서 우리 애 성적이 내려갔다고 생각하는 철없는 사고방식, 예배시간에 늦어서 아내가 아프다고 착각하는 철없는 행동, 평생 겪어야 됩니다.


왜냐, 우리 몸이 옛사람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싶어도 내 몸이 아프면 찡그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 이웃은 오해합니다. ‘소위 사역자라는 사람이 교인들 앞에서 왜 얼굴을 찡그리느냐.’ 사실은 이빨이 아픈데……, 삐져서 또 교회 안 나옵니다. 이런 난감함을 한국에서 ‘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여기(성막)에서 뭐가 생산된다 했습니까? 피가 생산되면 속죄 소에 그 피가 묻힙니다. 중간에 피가 생산되어서 최종목적지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이런 장치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장치만 만들었습니까? 아니요. 율법을 주셨습니다. 왜 율법을 주셨지요?


죄를 모조리 긁어모아야 되거든요. 여기에 죄인이 필요하니까 죄를 전부 다 들추어내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죄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있습니까? 십계명에서 제 열 번째 계명을 봅시다.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탐 내지 말라.’ 탐내는 경우는 어떤 때입니까? 새롭게 차이나는 경우를 보면 탐내게 되어 있어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난 뒤에 머리모양이 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미용실에서 더 예쁘게 된 머리를 보면 어떻게 됩니까? 탐이 나는 거예요. ‘걸려들었다~! 걸려들었다~!’ 드디어 탐심이 나옵니다. 딱 걸려든 거예요. 이 몸이 있으니까. 평생 동안 우리는 탐낼 수밖에 없는 몸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몸을 주셔서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신 것을 감사하기 바랍니다. 뭐가 있기 때문에? 피가 있기 때문에. 십분 쉽시다.
 이근호 (IP:211.♡.15.16) 11-04-09 06:05 
성막 제 5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십계명의 제 2계명이지요. 맞지요? 십계명의 제 2계명에서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왜 성막은 만듭니까? 모순되지 않습니까? 만들지 말라면서요. 그런데 성막을 만들지 말라고 하는 것은 신명기 4장 2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시는 불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또 4장 16절에서 18절에 보면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 형상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불 가운데서 나타나지요. 이 불이 어디서 꺼지지 않고 매일 지피느냐, 바로 제단불이지요. 이스라엘 중앙에 이 성막이 있습니다. 동서남북, 성막을 둘러싸고 열두지파가 진을 치고 있는데 특징이 있어요. 모든 천막들의 입구가 다 성막을 향하여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만 뜨면 뭐가 보이느냐, 성막에서 불이 올라오지요. 이 사람들이 십일조를 레위 인들에게 줘요. 레위 인들은 제사장들에게 줍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은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판 놓고 계산해 가면서 십일조를 거두십니까? 하나님이 돈을 어떻게 받아요?


제사장들이 이해하는 ‘십일조를 하나님이 받음’이라는 것은 제사기능의 연속성, 중지되지 않는 제사입니다.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제사장이기에 십일조를 받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십일조를 안낸다고 해 봅시다.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땅이 있는데 거기서 농사를 짓고 추수를 했습니다.


생산물 100을 얻었습니다. 모세 법에 의하면 그 중에서 십분의 일을 레위 인에게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100전체가 내가 수고하고 땀 흘려서 얻은 겁니다. 십일조 내기가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1퍼센트를 냈다고 칩시다. 이것을 제사장 입장에서는 어떻게 이해하느냐, 땅에서 얻은 생산물이 우리가 드린 제사덕분에 얻은 것이냐, 아니면 네 쪽에서 땀을 흘려서 일한 덕분이냐의 싸움입니다.


십일조를 안내는 사람은 ‘제사는 있으나 마나하고 내 힘만 있으면 100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런데 제사장 입장에서는 제사장이 제사를 원활하게 드리지 아니하면 아무리 밭을 갈아도 생산물이 나올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자, 무엇의 차이일까요? 불 가운데서 나타나시는 하나님 내가 노력한 만큼 복 준다는 하나님과의 싸움이에요.


상당히 어렵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을 보세요. 자기가 얻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되겠습니까? 기대하는 내가 나쁘지요. 그냥 푼돈 주듯이 교회 헌금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는 나의 일의 일부가 되지 십자가가 나를 죽이고 살리는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화가 나는 목사 입장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당신은 구약을 모르느냐? 내가 교회에서 기도해주지 않으면 당신은 월급 못 받는다. 목사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기도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말이지요). 내가 당신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당신은 아무리 사업을 잘해도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례를 알고 있는 이웃 교회 목사를 부르지요.


그래서 헌신 예배라는 이름으로 협박 아닌 협박 공갈을 하게 됩니다. 그 소리를 듣고 교인들은 더러워서 돈을 냅니다. 더러워서 줘 버립니다. 찝찝해서 헌금합니다. 과연 목사의 대처가 옳은 겁니까? 옳지 않지요. 옳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 바꿔야 할까요?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구약에서는 그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강의 시간이 길어지니 어려운 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용서를 구하면서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5분만 어려운 이야기를 할 테니 5분만 참아보세요. 약속의 땅에는 누가 동행합니다. 누가 동행하느냐,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과 동행하는가, 제단의 불과 함께 동행 합니다.


진짜 어려운 이야기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사건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를 되풀이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의 초점은 ‘내가 이렇게 내 힘으로 얻은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일조 드려도 벌 받게 되어 있어요. 십의 2조를 드려도 벌 받게 되어 있어요.


그 제물에 뭐가 들어 있느냐, 내 노동이 들어 있어요.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벨의 제사의 초점은 억울한 사람이 피를 흘렸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을 위한 생산물이지 밥 먹고 살기 위한 생산물이 아닙니다. 이제 쉬운 이야기 하겠습니다. 약속의 땅의 모든 생산물은 내가 일했음, 그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안보이지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물로 그런 것들이 생산되는 겁니다.


그래서 특별한 날이 있어요. 그게 안식일입니다. 안식일 날 뭐가 중지되지요? 인간의 노동이 중지됩니다. 노동이 중지되어도 양식은 주어집니까, 안 주어집니까? 누가 일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일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주께서 일하게 하셨다는 말입니까? 어떤 분이 심야에 개인택시 운전을 합니다.


그분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자기 노동으로 운전하는 겁니까, 주께서 주신 힘으로 하는 겁니까? 그분은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운전하고 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합니다. 신약시대에 그 사람의 수입을 십분의 일이 아니라 전부를 바쳐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자기가 한 푼도 쓰지 않고 몽땅 다 바쳐도 주의 것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겠습니다. 교회 한 푼도 안내고 자기가 다 써도 주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헌금을 하는 사람은 즐거이 자진해서 예수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십 원이든 이십 원이든 다 하나님 것입니다. 그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겁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만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린도후서 8:1-5)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7-8)


구약에서는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십 분의 구를 도로 받는 입장이지요. 무슨 말이냐, 10퍼센트를 내는 것이 아니고 고맙게도 90퍼센트를 제공받아서 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 덕분으로 산다는 고백이 십일조에요. 십일조는 드리는 것이 아니고 십 분의 구를 받는 것이 십일조에요. 이 이야기가 히브리서 7장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에 의하면 ‘교회는 헌금을 드려도 받는 것은 하늘의 생명이니라.’ 땅의 것을 줘서, 그것도 손 때 묻은 헌금을 드려서 깨끗한 하늘의 영생을 받으니 이런 수지맞는 장사가 또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헌금하는 마음입니다. 개인택시를 잘하나 못하나 다 하나님의 영생이고, 잘하나 못하나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 간다는 그 마음, 기쁜 마음으로 운전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불의 형상이 이 지상에서 나타내는 것은 피를 나타나지요. 불의 형상, 피, 이렇게 나오려면 중간에 뭐가 개입되어야 되겠지요? 흠 없는 제물, 그래서 그 약속의 땅 중앙에 흠 없는 제물을 아침과 저녁마다 드리는 것을 ‘상번제(常燔祭)’라 합니다. 우리의 노동은 택시 운전이고 하나님의 노동은 자기의 흠 없는 양을 매일같이 죽이는 거예요.


아침에 한 마리, 저녁에 한 마리, 그럼 밤에는 어떻게 할까요? 창세기 1장에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그것을 하루라고 했지요. 밤에는 그냥 주무세요. 푹 주무세요. 뭘 사라지게 하면서? 오늘 있었던 염려는 밤과 함께 사라집니다. 예수님 말씀에 ‘오늘 염려는 오늘 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줄여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에 우리 교회에서 주기도문 설교를 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설명했습니다. ‘여러분이 은행에 있는 잔고를 주께서 다 빼앗아가는 것이 일용할 양식의 응답이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분의 자금이 있으면 절대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몽땅 다 빼앗겼을 때에 그 때 그 순간 ‘주여, 하루치만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집이 열채가 있고 은행잔고가 1000만 위엔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루치 주신 것에 대해서 만족하면 돼요.


만약에 내일치의 양식에 눈독을 들인다면 누가복음 12장이 동원됩니다. 거기에 보면 ‘이 어리석은 자여 저 창고의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너희는 네 몸이나 평생 먹고 살면 된다고 여기는데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그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우리는 10년 치를 예상하지만, 그래서 보험 들고 펀드 들지만 하나님은 말씀대로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제가 어렵다는 것은 불의 형상과 흠 없는 제물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여기에 임재하십니다. 성경 한 구절을 봅시다. 출애굽기 20장 23절, 24절입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여기 보면 23절에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이 24절을 모른다고 생각해 봅시다. 모른다고 생각하면 뭐든지 안 만들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고 했으니 안 만들면 되잖아요. 그런데 24절에 뭘 또 만들라고 하지요? 이유가 뭡니까? 만들지 말라고 했다가 또 만들라고 했다가 왜 그래요?


24절에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는 그 만드는 것은 만드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장치가 되는 겁니다. 너무 어려운 대목이라서 말하기가 주저스럽네요. 어려운 대목입니다. 지금 어려운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무엇인가, 또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 차이가 뭔가, 하는 겁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요. 출애굽기 15장에서 홍해 갈라졌을 때 하나님의 이름이 승리합니까, 하나님이 승리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일이 차이가 나요. 정말 어려워요. 제가 정말 어렵다는 말은 쉬운 해답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지요. 1번이 정답인지 2번이 정답인지 여러분이 알아 맞춰보세요.


1번,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2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몇 번입니까? 주의 이름이지요. 그 주가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거예요. 불교신자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사용할 때는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언약을 품고 실천에 옮기는 분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과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달리 나타났습니다. 모세한테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알려줬어요. 그 이름이 뭐 게요? 그 이름이 놀랍게도 ‘기능’입니다. 보통 우리가 다는 명찰의 이름과 달라요. 제가 여기서 설명을 약간 하겠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두 개 있지요. 하나는 야곱이고 하나는 이스라엘이지요. 아브라함도 이름이 두 가지가 있지요. 아브람이 있고 아브라함이 있지요.


사라도 이름이 두 개 있지요. 사래 있고 사라 있지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거기에 뭔가 개입되었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능이 개입되니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달라지는 겁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니까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름이 개입할 때는 우리의 맹세가 아니고 우리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거기 들어갑니다.


야곱일 때는 야곱 자기 성질대로 살았어요. 그런데 주의 이름이 들어올 때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와 버리면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제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것은 야곱 본인의 책임이 아니에요. 누가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맹세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이스라엘 되기 싫어도 강제로 돼야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나는 너와 함께 있었느니라.’를 그런 식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겁니다.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지만 자기 약속을 가지고 자기 백성과 동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은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을 영적인 이스라엘로 바꾸는 일을 합니다. 영적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본인의 소원이 아니에요. 누구의 소원입니까? 찾아오신 하나님의 소원이지요. 오늘날 성도가 이름이 바뀝니다. 각자 이름들을 갖고 계시지요. 예수 믿게 되면 예수 이름으로 됩니다. 우리의 신분에 주님의 이름이 새겨져요.


그러면 이름만 가지면 다입니까? 그때부터 우리가 실천에 옮깁니까? 아닙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의 자기 숙제지요. 방금 이야기한 이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유명한 스포츠 선수 이름을 알아보겠습니다. 누굽니까?


야오밍, 제가 야오밍이라고 합시다. 저는 야오밍이고 통역하시는 분 이름은 ○○○입니다. 나는 하나님 이름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근히 창세전부터 갖고 있는 계획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에요. 그 내용은 뭐냐, ○선생님이 위대한 농구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이제부터 야오밍이다, 바꿨습니다.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헐~! 무슨 말인지?’ 그런데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분이 따라다니면서 농구를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야오밍(하나님의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농구를 무지 잘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묻습니다. ‘어찌 그리 농구를 잘하십니까?’ 그럴 때 ○선생님은 뭐라고 답하겠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만 증거 한 겁니다. 하나님은 너무 무섭기 때문에 사람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인간을 추방시켜서 생명나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가지고 자기 택한 백성을 찾아와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어떻게 바뀌게 할까요?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로 매일같이 태어나게 합니다. 여기에 누가 개입하느냐,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하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개입하십니다. ‘먼저 된 자는 나중 되게 하고 나중 된 자는 먼저 되게 하’는 작업을 하지요. 그래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데리고 어긋맞게 안수를 하지요.


자리를 바꾸어서 축복해도 무방한데 자기를 바꾸지 않고 일부러 어긋맞게 하는 것은, 바르게 하는 것이 야곱 식이었다면 ‘낮은 자가 큰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방식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하늘에서 그냥 건져 올리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져서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스타 되어서 인기 얻고 부자 되는 것, 그것을 하기 위해서 예수가 오신 것이 아니에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잖아요. 이제 사도들이 원치 않는 길을 가신 것을 아시겠지요? 그것도 강제로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갔어요.


이렇게 이쪽으로 가고 싶은데 띠 띠고 강제로 저쪽으로 갔어요. 베드로를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항상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길로 가게 해놓고 그 길로 못 가게 합니다. 길이 이렇게 있습니다. 여기에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로 갈라집니다.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어느 길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넓은 길입니까, 좁은 길입니까? 우리는 이 좁은 길에 생명이 있다는 걸 알지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은 멸망의 길이고 낭떠러지고 여기에 폭포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지요. 그걸 알면서도 우리 몸은 어느 쪽을 원합니까?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편한 길을 원합니다. 설교하면 5천명이 회개하고 한 달 수입은 수 천만 원 되고 복음대로 하면 존경받고, 아 숨길 수 없는 이 몸의 성질……, 고마운 점은 주께서 그것을 다 아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실 때 그게 영생의 길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고 새로 산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그런데 그 날마다 죽는다는 그 시간이 짧아요. 우리교인들은 2초 내지 3초입니다. 여러분은 몇 분입니까? 돌아서면 넓은 길, 돌아서면 넓은 길, 주께서 그걸 다 아십니다. 이미 그걸 다 아시고 구원하신 거예요. 해답을 손에 쥐게 하시고 그게 왜 해답인지를 겪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짧은 순간이라도 십자가를 아시거든 여러분은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짧은 순간이라도 예수님 십자가 지신 이유가 머릿속에 떠오르거든 여러분 속에 주님이 함께 동행 하고 있는 겁니다. 너무 어려운 것을 했기에 다시 한 번 쉽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동행한다. 그 분은 불의 형상 속에 있다.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그러나 제단은 쌓아라. 성막은 만들어라. 왜 그렇게 만들라 했을까요?


형상을 만들지 말라면서요?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면서요? 그런데 왜 그걸 만들라고 했을까요? 바로 불로서 그 흠 없는 양을 죽이는 그 기능, 그 기능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이걸 이해하셨느냐고 묻는 이유는 제가 짧게 이야기한 그것에 대해서 신약에 진짜 어려운 것이 있기에 먼저 다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사역자니까 이해하신다 치고 제가 한 가지 묻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어디에 못 박혔다고요? 십자가지요. 사도바울시대에 예수님 십자가는 이미 15년~20년 전의 사건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뭘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혀요? 정말 어렵습니다. 누가 성경이 쉽다 했습니까? 십자가는 이미 십 수 년 전에 지나간 일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예수님과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이야기하세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십자가가 세 개가 섰습니다. 예수님 양쪽에는 강도가 십자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밑에 카메라가 있다고 칩시다. 찍습니다. 그 자리에 사도바울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바울이 거짓말 하고 있는 겁니까? 어떻게 해명해 보세요. (답변)‘자기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믿기에 같이 죽었다고 표현했다는 거지요.’ 그러면 십자가라는 말을 빼고 ‘그 옛날의 십자가를 생각하니까 지금 죄를 깨달았다.’라고 되어야 돼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지금의 십자가’라는 거예요. 그리고 ‘나만 십자가가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것을 ‘시간초월’이라 합니다. 신약시대는 시간을 초월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묵시라 합니다. 제가 아까 어렵다고 했지요. 이 묵시는 지상에서 사건의 반복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옛날의 그 십자가를 택한 백성에게 매일같이 반복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나는 5년 전에 십자가를 알았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5년 전의 십자가를 알아야 됩니까, 오늘의 십자가를 알아야 됩니까? 오늘의 십자가이어야 되지요. 그러면 그 5년이라는 기간은 날아가 버리지요. 또 다시 난감한 문제에 도달했습니다. 제가 난감하다는 것은 해답이 쉽다는 뜻입니다.


도마가 예수님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몸은 부활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예수님의 몸이 부활 했는데 그 부활체의 옆구리에 뭐가 있었지요? 창 자국이지요. 그리고 손에 뭐가 있지요? 못 자국이 있지요. 예수님이 부활했다면 무엇이 사라져야 됩니까? 깨끗한 몸이 되어서 못 자국이나 창 자국, 각종 두드러기나 종기 같은 것이 없어져야 되잖아요. 없어져야 맞지요?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어떤 형체를 보여줘서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계속해서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이제 해답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6장에,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지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갖고 있던 죄, 의, 심판에 대해서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성령세례란 쉽게 말해서 한 몸입니다. 한 몸이 되면 그 한 몸 내에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지체가 되는데 우리를 발가락이라 합시다.


발가락에 피가 흐르지요. 제 발가락에 ○선생님 피가 흐릅니까, 내 피가 흐릅니까? 제 피가 흐르겠지요. 발이 손더러 쓸데없다 소리 못하고 눈이 발더러 쓸데없다 소리 못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하는 겁니다. 어떤 점에서 하나일까요? 이 피가 모든 죄를 씻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그러면 예수의 피가 있는 사람은 너도 깨끗하게 되고 나도 깨끗하게 되고. 그런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 누구의 피 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다 씻음 받았지요. 그러면 교회에서 봉사를 해도 다 누구영광을 위해서 해야 됩니까? 누구에게 감사해야 돼요? 예수 이름으로 감사하지요. 그것을 한 지체, 한 몸이라고 합니다. 십분 쉽시다.
 이근호 (IP:117.♡.132.36) 11-04-10 08:10 
성막 제 6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이름에는 언약이 들어 있습니다. 오직 언약을 이 지상에 전개하고 성취하는 일을 하는데 그 중심에는 제단이 있습니다. 제단은 뭐가 필요한가, 불이 필요하고 죄가 필요합니다. 죄와 불이 만나서 피가 나옵니다. 그렇게 피가 나오게 되면 그 피로 죄를 거룩으로 바꾸어내는 작업을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냅니다. 자,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쉽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늘나라 가는 사람은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죄를 없애는 방법을 우리가 우리에게 사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용 못하지요. 그냥 사용 못하는 것이 아니고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도로 돌아가면 그만 아닐까요? 죄송합니다만 도로 돌아가는 길을 차단시켜 놓았어요. 깡패가 차단시켰습니까, 하나님이 차단시켰습니까? 하나님이죠. 어떻게 그런 하나님이 자비로운 분입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실수했을 때 용서해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잖아요. ‘엄마, 잘못했어.’ 하고 빌면 용서해줘야 되잖아요. 그런 기회는 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생명나무와 인간 사이에 길이 차단되면 안 되지요. 차라리 자비로운 하나님이라면 길을 차단하지 말고 길을 열어놓고 ‘얘야, 인간아! 이쯤 정신 차렸으면 돌아와.’라고 해야 정상이라는 말이지요.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하나님입니다. 저는 그 상식적인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산타클로스할아버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원칙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울면 안 돼.’ 안 울면 선물 줍니다. 선물을 받고 안 받고는 누가 결정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행동 하는가, 안하는가에 따라서 결정하니까 결국 우리가 하지요.

안 울면 선물 받고 울면 선물 못 받고. 이 산타클로스할아버지가 전 세계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킵니까, 안 일으킵니까? 다 좋아하지요. 그날이 무슨 날이지요? 크리스마스잖아요. 일본도 크리스마스, 러시아도 크리스마스, 중국도 크리스마스, 이런 하나님은 거부감이 없지요. 그런데 어떤 기회도 차단해버리는 하나님을 누가 좋아합니까?

진짜 하나님은 차단시키는 하나님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사 6:9,10 ; 행 28:26,27)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문제는 우리 손에서 떠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에서 의가 되는 것, 거룩 되는 것도 이제는 우리 손으로 된다, 안 된다? 안되지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울어도 소용없고 하소연해도 소용없습니다. 또 난감한 문제가 나왔습니다. 제가 오늘 난감한 문제를 한두 개 낸 것이 아닙니다. 난감한 문제를 낼 때마다 해답이 있었습니다. 기대하시라! 우리는 개입니다. 이게 해답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로 봤습니다. 이유가 있지요. 그것은 언약을 이스라엘에게만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분명히 이방인은 개 맞아요(엡 2:11,12). 시편에 보면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에게 자기를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맞습니다. 제가 개입니다.’라고 했지요. 하지만 개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 했지요. 그 여자는 무엇을 이해했느냐, 언약이라는 것은 이방인에게는 이미 혜택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코리아, 사우스코리아, 차이나, 모두 개입니다. 그런데 본 자손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부했어요. 티오(빈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우리가 들어간 겁니다. 끼어들기 한 거예요.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십자가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언약의 벽을 헐었다.’(엡 2:1-11)고 했습니다.


이제 해답을 제가 제시해드리겠습니다. 구원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죄가 의가 되고 거룩이 될 수 있느냐, 이스라엘은 그것을 두 자로 이야기합니다. ‘선택’이라고 합니다. 선택이라는 말은 선택받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본 겁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찾아오신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을 만들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불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행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했을 때 아브라함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로운 행동을 해야 의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에 보면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부르시매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피 묻은 손이 의롭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손가락이 다쳐서 피가 나온다 합시다. 제 손가락이 지나간 자국에 무엇이 남게 됩니까? 피가 남겠지요. 그 피를 약속의 완성, 하나님의 의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의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일한 것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거기에 줄을 그으세요. ‘아무 일한 것도 없이.’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일했다는 말입니까? 누가 친히 일했지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동행, 찾아오심이지요. 예수님이, 목자가 양을 찾아오신 거예요.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세상일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예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사람은 나한테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수천 명에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수천 명 전부 다 이상한 소리라고 하면서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순간에 그것이 나에게 ‘맞아, 바로 그거야! 예수님 때문에 의롭게 되는 거야.’라는 것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것을 선택이라 하지 않고 전도라고 하지요. 전도라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미 생명나무는 차단되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은 그 차단막이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그림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산을 산 할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구름 모자를 썼다 했습니다.


모세가 있는 곳이 거룩이지요. 아론이 있는 곳은 반대니까 세속이 되겠지요. 아론은 죄의 세계, 모세는 의의 세계가 되겠지요. 여러분,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뭘 먹고 살았습니까? 숙소는요?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고 40일 동안 그렇게 지냈어요. 우리 같으면 피부가 거칠어졌을 겁니다. 실제로 모세가 의와 거룩을 만나보니 피부가 어땠어요?


여기서 수건이 필요해졌습니다. 수건을 가리고 나타나야 됩니다. 태양이 멀리 있다가 가까이 오면 눈이 부시지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피부 관리했습니까? 성형수술 받았어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죄의 힘이 아니고 의의 힘, 거룩의 힘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가 의로 어떻게 바뀌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제일 쉬우니 의자 하나를 갖고 오겠습니다.


여기가 시내 산입니다. 이 걸(의자) 발로 그대로 밟아버립니다. 찌그러들겠지요.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시내 산을 발로 밟아버리면 이 위쪽은 거룩이고 밑에는 세속이죠, 여기는 죄고(시내 산 아래) 여기는 의가(시내 산 위) 되지요. 이 시내 산을 위에서부터 그대로 밟아서 한꺼번에 찌그러들면 납작해지겠지요.


이 납작한 부분이 성소고 나머지는 이스라엘 진영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거룩이 더러운 것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소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들어온 사람도 완전히 거룩한 모습으로 무장을 해야 돼요. 특히 제사장 같은 경우는 속옷까지라도 완전히 새로운 지시를 받아서 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움직이는 언약입니다. 머리의 관부터 모든 복장이 언약덩어리입니다. 그 제사장을 ‘거룩한 사람’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이 바깥의 사람은 속된 사람이지요. 더러운 곳에 있다면 이 사람들은 죽어야 되는데 농사짓고 양식을 먹으면서 왜 잘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 성소에서 일어나는 여분의 거룩이 바깥으로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착합니까, 안착합니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죠. 그러면 예수님 혼자 구원받아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혼자 착하니까. 왜 죄인인 예수 믿는 우리가 구원받습니까? 로마서 5장에서 사도바울이 이것을 알았어요. 움직이는 한 언약의 분이 의로우면 그 의가 흐르고 넘쳐난다는 거예요. 이것이 종지입니다. 이것은 물입니다. 이 물이 예수님의 의입니다. 이 종지는 더러운 종지입니다.


씻기 위해서 이 물을 종지에 붇습니다. 물을 부을 때 씻길 것만 붇습니까? 아니면 넘치도록 부어버립니까?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이 하나님의 넘치는 의를 다 소비시킬 수가 없어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 따먹기 전에 죄 없는 상태가 무죄, 죄 없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죄 상태가 아니고 넘치는 의로 인해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넘치고, 넘치고, 넘치고, 넘치고, 무슨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의가 줄줄 넘치고……,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알고 있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반성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치의 잘못은 오늘 치로 회개하면 끝나지만 내일 되면 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절망하고 또 절망합니다.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예수님의 의가 우리가 매일같이 짓는 죄를 하나님의 의로 바꿉니다. 우리가 뭐가 잘나서 그런 혜택을 받을까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것이기에 예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사용하시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있는 ○선생님께서 죄인입니다. 나는 죄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면 나 혼자 의인이 되겠지요. ○선생님은 계속 죄인으로 남겠지요. 그런데 ‘대신’ 혹은 ‘대체’하는 겁니다.


대체하면 막아버려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막아섭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성소입니까, 각각의 자기천막입니까? 성소가 되겠지요. 그래서 제사장이 대신 막아섭니다. 이제 잠깐 어려운 것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싸움을 벌이게 했습니다. 이방민족은 칼로 무장하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것을 ‘사람의 이름’, 혹은 ‘자기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름은 ‘기능’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말을 많이 가졌다, 무기가 발달했다, 창으로 무장했다.’ 이걸 가지고 덤벼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으로 나서지요. 그래서 인간의 이름을 멈추게 합니다. 저쪽은 더러운 민족인데 인간의 무기는 발달하고 같은 더러운 민족인데 이쪽은 거룩한 분이 대신하고 있으니까 더러움과 거룩의 싸움에서 누가 저주받고 누가 복을 받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이 이기는 거예요. 모세는 지팡이를 이렇게 들고 있습니다. 손이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지고 올라가면 적들이 물러갑니다. 적들은 고개를 갸웃 합니다. ‘ 상하다, 자기들이 아무리 봐도 똑같은 인간밖에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지고 저쪽은 이기는가?’ 사실 이스라엘에 누가 계십니까? 주의 이름이 함께 있지요.


그 주의 이름이 무슨 이름인가, 거룩이죠. 여러분이 아시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윗이 전쟁에 나갈 때 소년 다윗이 전쟁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전쟁했습니까? 문제를 너무 어렵게 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소년 다윗으로 보입니다. 소년 다윗은 말합니다. ‘나는 다윗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섭니다.’ 이게 바로 ‘대신’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소년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저쪽의 골리앗은 할례 받지 못한 더러운 인간이고 우리는 할례 받은 민족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쪽은 언약이 없고 우리는 언약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저쪽은 더러운 민족이고 우리는 이미 죄가 용서된 민족이다.’ 아무리 키가 3미터 이상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붙여준 전쟁은 하나님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전쟁이기에 일부러 큰 놈들이 나와야 돼요.


일부러 큰 놈들이 나와야 돼요. 신명기 1장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정탐꾼을 보내지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뭐라고 합니까? ‘저 더러운 민족이 있는 땅은 우리가 차지할 땅’이라고 하지요.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이름 대 사람의 이름으로 비교합니다. 시내 산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했지요. 납작하게 하며 그들 가운데 거룩이 있지요.


그런데 나머지 열지파의 정탐꾼들은 울었습니다. 왜 울었어요? ‘사람이름 대 사람이름’으로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을 장대같이 만들었습니다. 아마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나 관운장? 칼을 들고 흔들고 이스라엘 쪽은 손톱깎이 같은 칼을 들었습니다. 온 백성이 엎드려서 통곡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똑같은 사람의 눈인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으로 우리는 거룩해졌고 저들은 속되다.’는 사실을 갈렙과 여호수아는 알았어요.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도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십니까? 예수님이 구원될 수 없는 우리에게 거룩한 의를 주셨기 때문에, 이 의는 반드시 복이 오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네가 말씀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말씀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교회 6개월만 다녀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세례받기도 전에 아는 이야기에요. 목사님들 심방 갈 때 이 대목을 이야기하거든요. 특히 기분 좋은 말은 ‘내가 머리가 될 찌언정 꼬리가 되지 않는다.’는 그 대목입니다.


얼마나 성공하고 싶었으면 ……. 그런데 그 세배 이상의 대목이 저주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너는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와도 저주받고 떡 반죽 그릇도 저주받는다.’ 세무서에서 모든 가구에 압류딱지 붙여놓은 것 같아요. 문제는 죄가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율법대로 못살면 죄가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의로 넘치는 사람은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더 놀라운 사실은 머리가 되어도 복이요 꼬리가 되어도 복이고, 자빠져도 복이고 엎어져도 복이고, 재산이 늘어나도 복이고 줄어들어도 복이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그 생명을 바라봅니다. 그런 마음자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계속 성막 이야기 하겠습니다. 가로가 100C, 세로가 50C, 지성소의 가로 세로는 각각 10C, 성소의 가로는 20C, 세로는 10C, 높이는 10C, 이 번제 단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지요. 성막은 부서져도 하나님의 이름은 부서집니까, 안 부서집니까? 안부서지지요. 그러면 성막을 불태우고 성전을 없애면서 누가 떠납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떠나겠지요.


분리되지요. 비행접시처럼 떠나겠지요. 그게 에스겔의 주제에요. 제가 지금 P1, P2 하다가 갑자기 P4로 넘어갔습니다. 내일 P3에 대해서 이야기할게요. 먼저 P4부터 언급하면 에스겔 성전에 새 성전이 나오지요. 기존의 P3, P3는 다윗성전, P2는 성막, P1은 유월절, 이제 생각을 되살려 봅시다.


유월절은 선이라 했습니다. 이쪽에는 죽음의 사자고 거기에 대항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고 중간에 뭐가 발리지요? 피지요. 그 피가 언약의 피지요. 그 피를 보고 넘어가는 이유는 그 피 때문에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된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일한 것도 없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의인 되었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복으로 오신 분이 있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여러 명이 아니고 단 한 명입니다. 그 한명이 누구겠어요? 예수님으로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 명이 아니고 오직 한명.’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라디아서 3:13-16)


여러분의 자녀가운데서 고급관료가 났다 합시다. 그러면 시골에 있는 여러분들은 행세를 하게 될 겁니다. 어험, 누구 덕분에? 내 아들 덕분에.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일한 것도 없이 의인되었습니다. 누구덕분입니까?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죄를 가져갔다는 것,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은 그것을 기뻐하고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의인되었기에 주의 이름을 기다렸잖아요. P1은 선이고 이 선은 죽음과 대치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 두께를 늘입니다. 아까 다 했지만 여러분이 피곤해서 잊었을까 싶어서 다시 기억을 떠올리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늘이면 그 안에 피도 넓어지고 같이 무엇도 넓어진다고 이야기했던가요?


죄도 같이 늘어나지요. 그 죄가 피로 말미암아 씻어지지요. 오늘 이 시간에 이야기한 겁니다. 그 죄를 밝혀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뭐지요? 십계명과 율법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것으로 이야기했지요. 다시 하니까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까? 나지요? 그렇게 늘어납니다. P3는 다윗성전입니다. 혹은 솔로몬성전, 다윗이 준비하고 혹은 솔로몬에서 마감한 것.


두께가 더 두꺼워졌어요. P2, 성막에서는 ‘우리는 성막이 있다. 그리고 언약궤가 있는 우리는 적들, 이방민족들을 이겼다.’고 했지요? 그러면 언약궤만 있으면 항상 이스라엘은 승리합니까? 항상 승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답변해 보세요. ‘매번 다 이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약궤를 가진 그 교만,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함께 있기에 망하지 않는다는 그 교만, 죄가 또 늘어났지요.


‘우리 열두 지파가 단합만 하면 적들을 이긴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죄 인줄 미처 몰랐던 겁니다. 이제 어려운 것을 물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자체를 믿은 겁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믿은 겁니까? 이스라엘을 믿은 것이 죄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 왕이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의 기능이 중지되겠습니까, 중지되지 않습니까?


중지되지 않지요. 그래서 사울 왕의 기능을 어디로 이동하느냐, 다윗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사울 왕 때는 열두 지파가 평등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되면 유다지파가 불쑥 올라옵니다.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지파만 유독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어요. 다른 지파가 화가 나겠습니까, 안 나겠습니까? 화가 나겠지요.


기분 나쁘겠지요. 그래서 나라가 둘로 쪼개집니다. 남쪽과 북쪽으로. ‘왜 하나님은 날 빼놓고 유다지파만 높이느냐.’에 대한 시기심, 그리고 ‘우리 사울왕은 베냐민지파인데 왜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는가.’에 대한 오기 같은 것.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었지요. 그러면 사울 왕이 정권을 누구에게 넘겨줘야 됩니까?


다윗에게 넘겨줘야 되겠지요. 지금 이스라엘 역사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본 것을 기억해 주세요. 왜 사울은 다윗에게 순종하지 않고 공격합니까? 사울생각에 ‘이스라엘은 내 것이기 때문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때에 나온 책이 시편입니다. 시편 가운데 여러 유명한 구절이 있지만 그 중에 한 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게 어떤 상황에서 나온 찬양일까요? 다윗이 정권을 받았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입니다. 다윗은 세상을 포기한 겁니다. 이유가 뭘까요? 오늘 강의의 핵심입니다. 이제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서 뜨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을 뜨려고(분리) 하는 겁니다. 그냥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다윗의 자손만을 데리고 떠납니다. 그것을 다윗의 등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9장에 보면 ‘그 다윗의 등불에서 한 아기가 태어나는데 기묘자요 전능자요 여호와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이사야 9:6)


이사야 7장에 보면 ‘처녀가 아기를 낳을 것인데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고 ‘다윗의 뿌리에서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 모든 것을 이룬다.’(사 9:7)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손을 뗐다는 겁니다. 다윗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 일을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겁니다. 이제 1분만 더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 안에 뭐가 담겼다고 했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맹세가 들어 있지요. 그 맹세는 사람의 손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 사람은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다윗은 일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4장에 가면 두 사람의 이름이 다 나와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의 시에 보면 ‘일한 것도 없이 죄용서 받은 복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고 나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그게 다 누구 기능입니까? 주의 이름의 기능이지요. 지금 우리는 누구 이름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존재?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고 내일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동안 알고 있던 하나님을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다시 하나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는가 생각하지 말고 피 흘리시는 예수님 앞에서, 나는 저 피로 의인되었음을, 내 자랑하지 말고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끝으로, 기도에 누구 이름 들어가는가를 보세요. 누구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이제 아시겠지요?
 이근호 (IP:117.♡.132.36) 11-04-13 08:41 
성막 제 7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또 언제 다시 만날지……. 어제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고 갑시다. 없는데서 있게 하지요. 우리는 여기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여기 있고 여러분이 있지요. 모든 세상 사람은 있는데서 있는 데로 나아가요. 그래서 내가 있다는 그것은 하나님이 있다는 거지요.

‘내가 여기 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계셨고 그 먼저 계신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교류가 된다, 서로 통한다.’라는 생각이 우리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이방인들이 갖고 있는 신개념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 하나님이 중간에 들어와 버리면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아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봅니다. 십계명의 제 일계명이 ‘하나님을 섬겨라.’였습니까? 그렇습니까? 아니지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그 일계명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나’라고 한 그 하나님과 다른 신의 차이점을 알아야 되겠어요, 몰라도 되겠어요? 우리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신은 그 신이 그 신이고 신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모든 것이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민족의 전쟁이야기예요. 전쟁할 때는 신의 이름과 신의 이름으로 전쟁합니다. 심지어 사람의 이름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방민족도 그들의 신을 들고 나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말합니다. ‘너희 신은 엉터리고 우리 신이 참된 신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십계명 제 일계명은 말하기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경이야기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반발할까요? 하나님은 다 같은 하나님이지 이스라엘의 하나님 따로 있고 다른 하나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리는 하나님이다.’ 이것을 지난시간에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라디오나 TV의 뒤쪽을 분해해 본적이 있습니까? TV브라운관에 보면 사람 얼굴이 나오지요. 어린아이들은 말합니다. 마치 TV안에 작은 사람이 들어 있는 양 여깁니다.


막상 TV 뚜껑을 열고 분해를 해 보았습니다. 그 안에 사람이 있던가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던가요? 키 판이죠. 반도체 칩으로 구성된 배열 판이 나오지요. 거기에 어떤 꼬마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자적인 흐름과 배열에 의해서 화면에 사람 얼굴이 나오게 되어 있지요.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내가 여기 있으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라면, 심지어 절에 가는 사람까지라도 자기를 만드신 신을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신이 그 사람을 구원할까요?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사도행전 2장에 나와 있습니까? 로마서 10장에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주’가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에요.


그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나 여기 있고 하나님 여기 있는데 그 가운데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언약을 집어넣자는 말입니다. 그러면 세상 모든 역사는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것을 가지고 숨겨진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육으로 난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비밀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같은 이야기를 세 번째 시도합니다. 나 여기 있고 하나님이 여기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습니까? 그렇다면 숨겨진 비밀은 여전히 모르는 채 있습니다. 육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성령이 와야 숨겨진 십자가의 비밀을 비로소 안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고 사람의 지혜로는 오히려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오면서 놀라운 기적을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오직 어리석은, 어리석은 십자가 복음만 전한다.’(고전 1:22, 23)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모든 사람을 납득시키고자 함이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성령 받은 분이 계십니까?’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창세전에 예정된 자가 따로 있다.’ 했습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롬 9:13) 했습니다. ‘아직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놀라운 사실은 야곱과 에서가 둘 다 아브라함의 혈통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그 아브라함자손조차도 창세전에 사랑하기로 작정된 자와 미워하기로 작정된 자가 구분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말로 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고, 그것으로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기에 진짜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 산에서 만나신 진짜 하나님이 언약을 가지고 여기에 개입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지도자니까 다 아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옛날 언약을 구약이라 하지요. 그러면 새로운 언약을 뭐라 합니까? 새 언약이죠. 혹시 새 언약이 뭐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아십니까? ‘내 살과 내 피’로 되어 있습니다. 맞지요? 요한복음 6장에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되어 있지요.


오늘 강의 중에 처음으로 여러분에 묻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는 말을 듣고 떡을 얻어먹던 모든 제자가 다 가버렸습니다. 누가 답변해 보세요. 그 이유가 뭘까요? 다 가버린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웠기에……, 떡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육체의 필요와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사람들이었기에.’


이 세분의 이야기를 다 합친 것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내 행함으로 내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말인가, 왜 예수 당신만이 하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살과 피가 십자가 사건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제시한 조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는 말합니다. ‘십자가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이렇게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을 드립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뭐가 빠져 있습니까? 누가 답변해 보세요. ‘성령, 피, 살, 생명…….’ 로마서 4장에서 ‘내 행함이 빠져 있어도 구원이 된다.’는 그 생각이 빠져 있어요. 그 생각이 육에 속한 사람은 없는 겁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합니다. ‘나 여기 있고 하나님이 거기 계시면 내가 여기서 내 행함으로 하나님과 교류가 되고 교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다섯 번째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갑니다. 옛 언약을 구약이라고 했고 새로운 언약을 새 언약이라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었습니다.


새 언약이 무엇으로 구성된다고 물었지요?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되어 있지요. 그것이 십자가 사건이지요. 사도바울,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람이, 율법으로는 흠이 없던 사람이, 직접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오직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의 피에 있다.’고. 결국 무슨 뜻입니까?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핵심은 언약이라는 키 판을 중간에 집어넣게 되면 여기 있는 하나님은 내가 상상한 하나님이고 이 언약을 통해서, TV의 이미지처럼 언약의 성취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어렵지요?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육으로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이고 예수님의 영을 받아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알게 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은 내 육에서는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을 받아야 십자가를 알 수 있고 그 때부터 알게 된 것은 ‘내가 옛날에 알던 것은 육이었고 참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만 섬긴다.’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기존의 내가 육으로 했던 것을 ‘행함’으로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6절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나타났으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고 합니다. 또 ‘주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두 가지의 경우를 성령 받은 사람은 다 알게 됩니다. 이제 성막에 들어가겠습니다. 성막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문이 열린 곳이 동쪽이고 동쪽은 한 곳 뿐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왕이 들어오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중국에 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금은 왕이 없습니다. 그것을 공화국이라 합니다. 왕을 허용치 않습니다. 여러분 다 각각이 다 왕입니다. 자기 집에서. 그런데 새 언약은 왕이 오신다는 거예요. 내가 왕이 될 때와 왕이 따로 있을 때가 다른데 왕이 따로 있으면 좋은 점이 뭘까요?


나의 팔자와 나의 미래를 왕에게 다 일임하면 그만입니다. 왕이 알아서 다 해줍니다. 왕이 없으면 내 미래를 내가 개척해야 돼요. 자기가 왕이어서 그 결과도 자기가 책임져야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약 여기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분이 계시다면 약간 실례되는 이야기지만, 예수님이 알아서 다 해줍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즐거운가, 그 왕의 똘마니가 되는 것이 즐겁습니다. 왕이 계시매 든든합니다. 바깥에 나가서 이야기하세요. 길에 가는 사람과 이야기 해 보세요. ‘여러분은 왕이 없지요?’라고 물으세요. ‘나는 황공스럽게도 임금님이 계십니다.’라고 이야기하세요.


‘나는 매일 그분에게 복종하는 즐거움으로 삽니다. 나는 결코 나를 왕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코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든든한 임금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왕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벌써 나는 이 땅에서도 그 왕의 백성입니다. 내가 왕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그 왕이 나에게 매일같이 지시하고 명령하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나는 그 왕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왕이 메시아입니다.’


구약성경에 다니엘이 있습니다. 이 다니엘서는 보이지 않는 왕과 지상의 왕과의 전쟁을 이야기한 겁니다. 누가 이겼을까요? 거기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나옵니다. 그 뒤에 여러 왕이 나와도 모두 다 느부갓네살 왕 밑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보면 세상 나라를 바벨론으로 봅니다. 바벨론은 BC 6세기경의 나라입니다.


지금은 바벨론 나라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보면 여전히 바벨론 나라가 계속됩니다. 이것이 다니엘에 보면 금 신상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역자니 이 이야기를 아시지요. 이것을 발로 차버립니다. 수직으로 세워진 것이 수평으로 눕게 됩니다. 그것을 인류의 역사라고 합니다. 눕혀진 신상의 마지막 발끝에 인자의 나라가 하나의 작은 돌로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한국성경에 보면 중국 산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 돌이 태산(泰山)을 이룬다.’ 그것을 인자의 나라라고 합니다. 오늘 둘째 날인데 그 인자되시는 분이 만드는 성전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공부하게 됩니다. 인자가 만드는 새 성전, 그것이 P4가 됩니다. 먼저 P2, 성막이야기를 계속 해 보겠습니다.


성막은 없는 것이 새로 생겼습니다. 이 성막에서 하는 일은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자기 행함으로 자기 죄를 의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데도 불구하고 의인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안하느냐가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은 죄에서 어떻게 의가 이루어지느냐의 문제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 보면 ‘그 의는 율법외의 한 의’라고 합니다. 무엇 바깥의 의라고요? ‘율법 바깥의 의’, 그러면 ‘율법의’ 따로 있고 ‘율법 외의 의’ 따로 있겠지요.


율법의 의는 우리가 지키고 행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의를 말합니다. 그러면 율법외의 의는 뭘까요? 로마서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얻은 의를 말합니다. 세 번째 질문하겠습니다. 둘 중에 어느 의를 더 좋아하십니까? 율법외의 의를 진짜 좋아하십니까? 그 질문을 달리 하겠습니다. 자신이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는 의를 싫어하시겠습니까?


‘지금은 싫어합니다.’ 아멘! 제 걱정을 덜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율법으로 의를 행했던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가지 못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천국 간사람 한 명입니까, 두 명입니까, 아니면 한 명도 없습니까? 한 명도 없지요.


바리새인이 한명도 없다면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천국에 못 갑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떤 인간도 바리새인보다 의가 앞서지 못합니다. 방금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가 아니고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단언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해서 천국에 들어갔습니까?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라 그렇습니까? 사도바울이 믿었던 것은 뭐예요? 율법의 의입니까, 율법외의 의입니까? 율법 외에 의는 바로 십자가의 피에서만 나온다는 것이 바로 새 언약의 율법을 다 이루심입니다. 다시 끊어서 하겠습니다. 율법외의 의는 오직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이루심이 뭐냐, 하나님이 원래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이제 성막으로 돌아가 봅시다. 성막은 없는 장치가 새로 생긴 장치입니다. 이 성막은 죄를 의로 바꾸는 장치입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지요. 동쪽에서부터 뭐가 흘러갑니까? 피가 흘러서 속죄 소에 피가 발리면……, 아! 이것은 어려운 질문인데 할 수 없이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어려운 질문을 할 테니 머리가 아프더라도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양의 피가 성막 안의 속죄 소에 묻히게 되면 우리가 의인되는 겁니까? 아니면 이 절차 전부가 의가 되는 겁니까? 1번, 나는 의를 얻었다, 이것이 의냐? 2번, 이 절차 전부가 의인가? 둘 중에 어느 겁니까?


만약 1번을 선택했다면 교회 가서 예수 믿고 의인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 맘대로 살아도 돼요. 어제 그 농구선수 이름이 뭐였지요? 야오밍이죠. 야오밍이 농구하는 것을 보고 자기 집에 가면 그만인 셈입니다. 그런데 2번을 선택하신 분은 그때부터 야오밍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6장에서 의의 종(롬 6:18)이라 했습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이 절차가 관통합니다. 평생!


그 관계를 의라고 합니다. 만약 이것을 의라고 한다면 이것을 가지는 것은 1번입니다. 이것을 삼키는 것이 2번입니다. 삼킨 상태에서 뛰면 이것이 위장 안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겠지요. 그러면 내가 주인공입니까, 내 안의 예수님이 주인공이 됩니까? 그 예수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우리가 가게 만드는 겁니다.


1번을 선택하시면 이것을 가지고 내 맘대로 살면 돼요. 마치 가게에 가서 물건 구입했듯이 이것은 내 것이 되었기에, 구원받았기에 내 맘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삼켜져서 뱃속에 들어오면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고 나는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겁니다. 내 속에 있는 예수님이 나를 가만두지 않아요.


십자가의 길을 가게하고 좁은 길을 가게하고 원치 않는 길을 가게 합니다. 왜냐하면 ‘너의 남은 인생은 너의 자존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 절차를 증거 하는 증인되게 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는 제가 이렇게 설명하지만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제가 분명히 2번을 이야기했건만 사람들은 계속해서 1번 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일의 전부가 예수님의 일의 일부가 되기를 싫어하고 예수 믿는 것을 자기일의 일부로만 간주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왕입니다. 내가 왕인채로 천국에 갈 수가 없습니다.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미 아들이 왕으로 계신 나라이기에. 아까 공부하기 전에 여러분이 기도하고 찬양했지요?


누구한테 찬양했지요? 설마 실례지만 찬양하는 자기 자신에게 찬양하지는 않았겠지요. 진정한 기도와 진정한 찬양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누구영상만 생각이 돼요? 예수님이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 속의 ‘달그락 달그락’입니다. 이 성소 밖의 전부가 죄인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동쪽에서 아버지가 옵니다. 왜 어머니는 오지 못할까요?


율법에 의하면 아버지가 온 식구의 대변자고 대표입니다. 아버지가 그 가정을 대신하는 거예요. 그래서 딸(여자)은 소용없습니다. 아버지가 통과하면 아버지뿐만 아니고 온 가족의 죄가 용서됩니다. 통과해서 죄가 씻어졌습니다. 의인이 되었습니다. 다시 본 생활에 돌아옵니다. 여기 뭐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율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탐내지 말라.’가 또 기다리고 있습니다. 맘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에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도 죄예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됩니다. 처나 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온갖 말씀이 다 들어 있어요. 다시 거치면 여기서 숨어 있는 우리의 죄가 또 나옵니다.


또 들어갑니다. 또 나옵니다. 구약 때는 양으로 했어요. 신약 때는 예수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구약 때는 ‘다 이루었다’가 이 성소 안에서 ‘다 이루었다’입니다. 신약 때는 이 범위가 넓혀져요. 죄짓고 있는 이 영역도 ‘다 이루었다’ 에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이유가 뭘까요? ‘달그락달그락’ 의가 안에 들어 있기에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고백을 하게 했다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1번을 선택한다면 예수님의 의를 갖고 세상에 나갈 때 또 죄지은 것을 가지고 본인이 예수님께 또 와야 됩니다. 그런데 2번을 선택하게 되면 누굴 만나서 내 죄가 발각되는 그것도 하나님의 의관계의 ‘다 이루었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더 진행하기가 곤란할 정도입니다. 다시 이야기 할게요. 구약 때는 이 성막 안에서만 ‘다 이루었다’가 됩니다. 이 바깥에 나가면 다시 죄가 돼요. 그래서 이 성막을 넓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P2에서 P3로 옮겨가게 됩니다. P3에서는 왕이 등장합니다. 제사장위에 왕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가문입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다윗은 왕이 됩니다.


백성들이 어떤 죄를 지어도 임금 되는 왕과 하나님 사이가 정상적이라면 그 죄인들은 그 왕의 은총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P1, P2와 P3의 차이점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P2와 P3의 차이점과 P3와 P4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죄가 더 깊어지고 넓어지지만 그것마저 다 조치해주신 하나님의 의와 은혜가 얼마나 더 커졌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십분 쉽시다.
 이근호 (IP:117.♡.132.36) 11-04-14 06:45 
성막 제 8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78편 60절, “실로의 장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했으니 뭐가 떠난 거예요? 죄에서 의로 바꾸는 장치가 떠난 거지요. 이것이 바로 언약이라고 했지요. 언약이 떠나버린 거예요. 그리고 지난 시간에 했듯이 이것은 주의 이름 또는 하나님의 이름이 떠난 겁니다.

인간은 성막을 붙들고 있어요. 성막을 붙들어버리면 하나님도 인간 소유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떠나버립니다. 성막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이야기를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이니 제가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언약궤 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나간다면 불집게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등대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진설병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번제 단 가지고 나가겠습니까?

언약궤지요. 언약궤를 들고 나가는 겁니다. 왜냐,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머리가 다 좋으시니 지난시간에 한 것 잠시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더러움과 깨끗함의 전쟁입니다. 거룩과 세속의 전쟁입니다. 제가 소년 다윗 이야기 했지요. 골리앗이 아무리 키가 커도, 소년 다윗이 아무리 키가 작아도, 저쪽이 아무리 무기가 강하고, 소년 다윗이 아무리 무기가 보잘 것이 없어도 이것은 거룩과 더러움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소년 다윗은 믿었습니다. ‘감히 더러운 민족은 거룩한 민족을 칠 수 없다.’ 왜냐하면 거룩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더러운 곳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기에 감히 저주가 축복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을 공격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사울 왕입니다. 맞지요? 시편 내용 전부가 사울이 다윗을 공격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전쟁인데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여러분, 언약궤가 어디 쯤 있다고 알고 계십니까? 성막이 있다면 번제 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고 여기에 칸이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작은 칸(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여기(성소)는 향 피우는 향단과 오른편에 진설상이 있고 그 위에는 떡 열두 개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금잔 두 개도 놓여 있습니다. 맞은편에는 등대가 있고 그 등대 줄기가 7개인데 그 안이 어둡기 때문에 조명시설로 갖추어진 겁니다. 이 조명시설이 뭘 의미하는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할 때 무엇을 들고 나온다 했습니까? 이 등대입니까? 아니지요. 진설상도 아니지요. 향단도 아니지요. 오직 언약궤를 들고 나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여기에만 계십니다. 왜냐하면 피가 묻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피 누구 피 입니까? 흠 없는 희생의 제물의 피지요. 여러분들이 어느 동네에 그냥 갔다 오면 기억이 잘 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서 강도를 만나 피를 흘렸다면 적어도 30년은 기억할 겁니다. 누구 피가 흘렸기에? 바로 내 피가 흘렸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를 잊지 못합니다. 그 피가 죄를 의로 바꿔주는 겁니다. 그것을 (둘째 날)첫째 시간에 율법 외에 한 의라고 했습니다. 또 지난 시간에 살과 피가 새 언약이라 했습니다. 또 지난 시간에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습니다. 옛 언약, 인간이 실천에 옮기는 것이 옛 언약이고 율법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이루었다 함을 얻지 못했다면, 제사 드리고 예배드려도 이루지 못했다면, 히브리서에 의하면 ‘단번에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루었다.’(히 9:12) 했습니다.


그 피가 바깥에 있으면 안 됩니다. 다시 2번으로 돌아가서 이 피가 ‘달그락달그락’ 우리 안에 있어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입고 삽니다. 이런 관계가 의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소유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피가 나의 전부를 소유했습니다. 그것이 새 언약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날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서 살게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린도후서 5:15)


참 이런 이야기를 해서 욕 많이 얻어먹고 있습니다. 왜 인간의 행함의 가치를 묵살하느냐, 이런 욕을 먹고 있습니다. 저는 그 행함까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스스로 왕이 되지 말고 당신의 왕이 예수님이라고 이야기 하세요. 소개하고 증거 하세요.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비록 가난하다 할지라도, 비록 몸이 아파도, 그것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1번이 아니고 ‘달그락달그락’ 하는 2번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시편 78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67절에서부터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같이 영원히 두신 땅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라고 되어 있지요.


제 강의가 어렵다고 느껴질 분도 계실 겁니다. 그래서 쉽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장막을 떠나버렸습니다. 이것이 어려운 말입니까? 그렇다면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요셉지파를 버리시고 유다지파를 선택했습니다. 그 전제가 있습니다. ‘사람의 손에서 만든 장막을 떠나시고.’


이 세 가지를 결합시켜 보겠습니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지요. 죄송합니다. ‘그냥 하나님 믿으면 간단한 것을, 그냥 예수 믿으면 간단한 것을, 당신은 왜 그리 어렵게 갑니까?’ 내가 믿는 예수님이 내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첫 번째, 인간 손으로 만드신 것을 떠나시고. 두 번째, 67절에 있는 대로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고.’


여기에 제가 줄을 그었습니다. “싫어 버리시고.” 세 번째, ‘유다지파, 종 다윗을 택하시고.’ 예수님 당시에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외쳤을까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맞지요? 다시 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 그만이 아닌가?’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차이나 사람이나 S.코리아사람이나 다 같이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성경의 문둥병자들은, 신학이 깊지도 않은 문둥병자들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버리고 문둥병자가 불렀던 그 다윗의 자손을 알고자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약속이라고 합시다. 우리 두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둘이 약속을 했습니다. ‘몇 시에 만납시다.’ 여러분, 이해되시지요. 왜냐, 여러분도 서로 약속을 하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하고 약속할 때는 사람과 사람이 약속하는 것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이분이 저한테 약속을 한다고 합시다. 죄송합니다만, ‘싫어하시고.’


이분이 나한테 약속을 하고자 합니다. ‘내가 싫어하고.’ 이분은 약속을 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택해서 약속을 줬’습니다. 다른 분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입니다. ‘요셉지파는 싫어버리시고’, 2번입니다. 3번은 ‘오직 유다지파는 택하시고.’ 오직 하나님이 먼저 손 내밀어서 선택하신 사람과 하나님과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문둥병자가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것은 이런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코리아, 차이나, 이방 민족들의 하나님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내가 신의 아들이에요. 그 사이에 아무 약속도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하나님께 정성을 다 바치면 하늘의 복이 쏟아 붓듯이 오고 …….’ 복(福)자가 거꾸로 된 채 복이 쏟아져요.


오다가 가게에서 그걸 봤어요. 바로 그런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불쌍히 여길 것도 없어요. 다윗의 자손도 필요 없습니다. 내가 정성을 다하면 신은 나에게 무조건 축복해야 돼요. 왜, 나는 나니까, 나는 대단하니까. 그것이 바로 약속이 없는 사람들의 하나님입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방민족의 신을 버리고 진짜 약속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은 사역자니까 이렇게 어렵게 설명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P1, P2에서 P3로 넘어갑니다. P2는 성막이라고 했습니다. P3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이나 성막이나 둘 다 거룩합니다. 둘 다 죄를 의로 바꾸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구조가 달라요. 왜 다를까요? 옛날식은 끝났다는 거예요.


옛날식은 왜 끝났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옛날식은 제사가 죄를 의로 바꾸는 장치였습니다. 제사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의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해서 ‘형식화’되었다고 합니다. 왜 형식화 되었을까요? 처음에 교회 나올 때는 울면서 나오는 사람이 한 10년 지나고20년 지나면 뻔뻔하게 나오지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처음에 제사를 드릴 때는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면서 내가 약속을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만 훌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 나도 훌륭한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예수님 죽인 자들이 누군지 아시지요? 바리새인, 사두개인등의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10장 3절에 보면 ‘그들이 자기 의에 몰두하고 열심내서 힘써서 억지로 하나님의 의를 밀어냈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의에 순종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나는 나에게만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왜, 나는 잘났으니까.


날마다 내가 행동하는 것을 관찰해서 세상에 이처럼 훌륭한 사람이 또 있다니, 자기가 자기에게 감탄하는 거예요. 찬양을 하면서 처음에 찬양을 할 때는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시작했다가 찬양을 두 시간만 해보면 ‘나는 왜 이렇게 찬양을 잘 하는 거야.’ 나중에는 거울보고 찬양합니다. 폼을 내면서. 이것이 자기 의입니다.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저나 여러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성령의 충만을 주십니다. ‘네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구나. 십자가를 바라보아라. 누가 너 대신 저렇게 피 흘리고 돌아가셨는가를 생각해 보아라.’ 전에는 작게 보이던 십자가, 그저 아주머니 목에 걸려있는 십자가목걸이정도로 밖에 안보이다가 이제는 자기 얼굴을 더 덮을 정도로 다가옵니다.


그 경험이 짧은 사람은 2초 내지 3초입니다. 좀 오래 가는 사람은 1분정도 갑니다. 곧 뭐로 돌아서느냐, 십자가 믿는 내가 그렇게 근사해 보이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이스라엘나라가 율법으로 지배하는 나라지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제사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제사가 지배한다면 누가 제일 높겠어요? 제사장이 지배계급이겠고 그 중에서도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대 제사장이 되겠지요. 이 체제가 유지되던 나라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제사장이 엘리제사장입니다.


나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겉으로는 여호와, 겉으로는 제사, 하지만 마음은 이방신으로 다 돌아갔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떠난 겁니다. 그들은 주장합니다. 매일 같이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대 제사장이 있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사는 이미 떠나버렸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약속의 땅을 가졌기에. 부동산을 가진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까 말한 2번이 아니고 1번이 된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으로 땅을 가졌습니다. Thank you! 고맙다고 이야기는 해요. 그러나 일단 내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우리 모습과 똑같지요. 욥기 2장에 보면 욥은 말하기를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우리는 그것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가져 가신자도 하나님이요.’ 제 말이 맞지요? 그런데 우리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그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제가 드리겠습니다.’ ‘씨에 씨에(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시 가져가려고 한다면 절대로 안 빼앗기려고 합니다. ‘줘놓고 왜 가져가? 줘놓고 왜 가져가는데?’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신학생 되게도 하시고 그만두게도 하시고, 교회를 보내기도 하시고 안 나오게도 하시고, 건강하게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그런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나를 존중히 여길 것이고 그런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멸시할 것이다.’ 했습니다.


이것이 아까 말한 2번입니다. 그런데 1번이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주신 자는 하나님이요.’ ‘오,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달라고 하면 절대로 안내놓습니다. 왜 줘놓고 빼앗는가 하는 식입니다. 왜 내 몸을 아프게 하느냐 합니다. 이래서 무슨 복음을 전하겠느냐고 따집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 주변에 이방민족을 배치했습니다. 사사기 2장 마지막 대목에 보면 하나님은 절대로 인간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 주변에 이방민족을 배치해놓고 호시탐탐 침범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모압, 암몬, 아람, 블레셋, 여러 적들로 하여금 들쑥날쑥 하게 만들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사실 놀라운 것이 아니라 정상적이지만 땅을 빼앗기면 하나님을 찾고 땅 안 빼앗기면 가만히 있는 이스라엘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원인을 찾았습니다. 뭐가 문제인지를 찾았습니다. 아까 이스라엘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라고 했어요? 대제사장이라고 했지요. 그 사람이 엘리제사장이었습니다. 엘리제사장과 대결할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 이야기가 사무엘상 이야기입니다. 엘리 가문을 치기 위해서 없는데서 생겨난 사람이 누구지요? 사무엘이지요.


사무엘하고 엘리제사장하고 같이 성소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제사장을 부르는 대신 어린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몇 번 불렀을까요? 네 번 불렀습니다. 비로소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엘리 자신을 부르기 위해서 철없는 사무엘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네 번째 부를 때 엘리 제사장은 어린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 시대는 끝났다. 우리 가문은 망했다.’


제사장이 망했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누구 체제로 가야 돼요? 그 때 등장하는 것이 왕 체제입니다. 제사장 위에 왕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제 율법으로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선택하신 왕을 따로 뽑아서 그 사람과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하다가 갑자기 잠이 와서 다 주무십니다.


저는 강의를 하고 싶은데 다 주무십니다. 그때 한 사람을 깨웁니다. 내가 선택합니다. ‘○선생님, 저와 이야기합시다.’ 나중에 여러분이 주무시고 다 일어나니까 여러분의 머릿속에 ○선생님에게 이야기한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하고 모든 약속을 다 이루었는데 예수님만 알고 있는 그 비밀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잠을 깼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다니 이게 다 누구덕분이지?’


1번, 내가 잘났어. 2번, 예수님 덕분이야. 어느 쪽입니까?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면 유다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모든 땅에 네가 내 증인 되리라.’ 증인이 되어라, 그게 아닙니다. ‘기어이 증인이 되게 하고야 말리라.’입니다. 성령이 우리보다 더 세기 때문에 우리 속에 이미 들어온 분이 더 세기 때문에. ‘누가 주님보다 강하리오.’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이 여러분에게 좀 어렵지만 성경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이제 한 사람이 율법 지켜봐야 자기 잘난 맛에 자기소유만 생각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사 기름을 붓습니다. 이게 바로 메시아에요. 왕입니다. 왕이 되면 그 사람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서 다윗을 왕으로 생각하는 모든 백성에게 혜택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럼 전에 모세가 율법을 받은 것은 무슨 언약이 되겠습니까? 모세 언약이지요. 그러면 다윗에게 한 언약은 무슨 언약? 노아방주는 무슨 언약? 노아언약. 마태복음에서 문둥병자들이 뭘 외쳤습니까? 나 잘났다고 외쳤습니까? 아닙니다. ‘나는 못났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다윗의 자손을 왕으로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잘났다는 이야기입니까, 못났다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창기가 있었는데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늘나라 간다고 했습니다. 창기가 착한 짓을 한 겁니까? 바리새인과 창녀의 차이는, 막달라 마리아와 바리새인과의 차이는 한 사람은 자기를 불쌍히 여길 왕이 있다는 것이고 바리새인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했습니다. 이 원리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사 왕의 취지를 높여주는 새로운 성전이 등장하는 겁니다. 왕을 돋보이게 하는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왔다 갔다 하는 제사장이 돋보이는 것이 아니고 성전에서 예배하는 내가 돋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구원할 것은 왕 밖에 없습니다.’ 하고 왕을 돋보이게 하는 성전입니다.


다윗언약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아들이 발생됩니다. 인간 대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들이 되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게 될까요?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의 것이 됩니다. 그것을 상속자라고 이야기하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영을 받게 되면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네가 받은 영은 종의 영이 아니고 아들의 영을 받았으니 이제 율법에 매여서 하는 모든 절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되어 있어요. ‘안식일, 절기, 그런 것에 얽매이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절에 보면 ‘십자가로 그 모든 율법을 다 찢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정서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로새서 2:14-16)


아들이란 아버지 것이 곧 자기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언약을 통해서 율법을 지켜야 되는 종을 율법을 다 이룬 아들, 율법과 상관없는 아들의 신분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P2에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었지요. P3에서는 종을 아들로 만드는 겁니다. 어떻게 만들까요? 아까 한 예를 다시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워낙 피곤해 하시니까. 여러분들이 다 주무시고 여러분이 다 제 맘대로 살 동안에 나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서 다른 사람들 다 주무시는데 우리를 아들 되게 하는 모든 요소를 자기 아들보고 다 만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영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누구든지 성령을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느니라.’ 이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보내서 다 이룬 겁니다. ‘누구든지 자기 죄로 죽어 마땅하지만 우리 속에 있는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 몸도 다시 살아나리라.’ 로마서 8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로마서 8:11)


십분 쉽시다.
 이근호 (IP:117.♡.132.36) 11-04-16 11:44 
성막 제 9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둘째 날 세 번째 시간입니다. 성막은 제사장이 지배한 장치라면 P3, 성전은 왕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면 P4는 인자되시는 분을 돋보이게 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에 나옵니다. P5는 예수님 곧 새 성전, P6은 교회가 곧 새 성전, 이런 식으로 발전하지요. 그럴 때 마다 점점 더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은 없어집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에덴동산에서 이미 추방된 존재이기 때문에 추방된 존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생명나무 가는 길은 강력하게 막혀 있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방에 가둬놓아 보세요. 발톱으로 물어뜯는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런 모습을 아시지요. 절대로 문열어주면 안되지요.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천국 문을 달라고 바득바득 우겼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천국의 문은 다윗의 자손이 엽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입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거기 ‘다윗 지파’라는 말이 나오지요.

여러분이 평신도가 아니고 지도자이기에 왜 다윗지파만이 천국을 여는 열쇠가 있는지를 알려줄 책임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약속이 다윗의 자손만 지목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배제하는 거예요. 우리의 열심 가지고 우리가 구원되지 않고 다윗의 자손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 선지자들은 다윗의 자손이 오기를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 1장에도 나오고 특히 로마서 1장에도 나옵니다. 로마서 1장 3절, 4절에 보면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에 우리는 뭐예요? 우리는 마귀의 자식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그 모든 능력과 혜택은 예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예수 믿어줌으로써, 믿는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것 까지, 예수님께서 믿게 하는 능력까지 주셔서 믿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 보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살 후 3:2)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원하는 사람만 살리시는 겁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면 제일 장벽처럼 느껴지는 것이 ‘선택론’이었습니다.


왜 어떤 이는 건지고 어떤 이는 버리느냐,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창세기 3장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처지는 이미 생명나무 가는 길에서 차단된 상태에 있다.’ 우리의 조상을 따라가게 되면 우리의 조상이 죄의 지배를 받기에 그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았기에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것을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죄에 갇혔다.’고 이야기 합니다.


마치 방안에 갇힌 강아지처럼. 발톱이 다 닳도록 두드려 봐야 소용없지요. 지금도 중국이나 한국이나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교 중들, 천주교 신부가운데 도 닦는 사람들이 많아요. 마틴 루터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루터가 도 닦다가 그것을 버리고 외쳤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느니라.’ 그래서 천주교와 결별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들은 적 있지요? 이 성경을 루터가 제대로 본 겁니다. 물론 상세하기 보지는 못했어요. 그것은 루터가 언약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언약이 어떻게 발달 되었기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이 왜 현실인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P3에서 성전은 왕을 돋보이게 하는 겁니다. 그 성전 구조를 소개하겠습니다.


성막은 이동성입니다. 성전은 고정성입니다. 고정성이라는 것은 다윗언약 외에 다른 언약은 없다는 겁니다. 다윗언약이라는 말이 어렵기 때문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친절하게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언약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를 택하시고……, ‘다윗이 노력하고’가 아닙니다. ‘누가 노력하고’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시고 다윗외의 요셉지파를 싫어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1번, 2번, 3번을 했지요? 다시 천천히 하겠습니다. 다윗을 택하시고, 다른 사람하고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시고, 다윗에게만 약속을 하시고 ‘네 자손이 이 율법을 다 지키게 되면 다른 사람이 거저 혜택을 입는다.’ 복을 받는 거예요.


모세언약에서는……, 참 모세언약을 여러분이 이제 아시지요? 율법, 아시지요. 신명기 28장에 보면 ‘네가 이 말씀을 지키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안 지키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그게 모세언약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바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율법 앞에서 동등하게 생각했던 그 시절이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택하신 그 사람만 이야기합니다. ‘다윗과 너의 후손이 율법을 지키면 나라의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겠다.’고. 기름을 부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메시아입니다. 다윗가문에 복을 준다는 말은 다윗 자체가 최초의 왕이 됩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사울이 최초의 왕이 아닐까’라고 하는데 사울은 최초의 왕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요구했던 왕입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됩니다.’라고 생각해서 만들어낸 왕입니다. 죄악 된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를 본받아서 생각했던 왕입니다. 그래서 그 사울왕은 회개해도 소용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왕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왕은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택했다.’는 말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 제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된다고 요구했을 때, 사무엘 상 8장에서 그 이야기를 했을 때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나의 왕 됨을 거부하는 짓’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놓고도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어떻게 망하는가를 보라는 거지요. 사울 왕이 망한 것을 봐서 현재 이스라엘은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민족인 것을 똑똑히 알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아무리 회개하고 반성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십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 아니기에.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왜 사람들이 언약을 안 믿느냐, 내 구원은 내가 노력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합니다. 무엇이 빠졌을까요? 선택, 창세전 선택이 빠져버렸지요. 창세전 선택 때문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는 것인데 우리는 나의 선택이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기색입니다. 여러분은 좋아하시지요? 표정들이 왜 그래요? 한국의 개그프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을 놀리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에 우리를 예수 안에서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준비된 피를 가지고 태어난 그들을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를 예수 안에 편입시키려 하심이라. 그래서 세상을 예수로 말미암아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에베소서 1장 10절의 이야기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에베소서 1장 4-10)


그렇게 통일된 모습을 가지고 ‘주’라고 합니다. 이제 주와 하나님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분이 주가 되는 겁니다. 아드님이 주가 되심으로 누가 가장 기뻐하시는가, 아버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2장 11절에 나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11)


잘 음미해 보세요.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그것이 영광 돌리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언약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는 것이 영광이 아니라 아드님을 주라고 공경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버지는 귀하고 아들은 그보다 덜 귀하다고 여기잖아요.


이것이 이방민족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높이면 높일수록 아버지가 더욱 더 기뻐하십니다. 원래 그것이 아버지의 계획입니다. 다시 성막으로 돌아갑니다. 성막은 이동식이기에 텐트로 되어 있습니다. 지성소, 성소가 있는데 그것을 덮는 천이 있어요. 천사의 모양을 수를 놓아서 짰습니다. 그 천의 가로가 28C(규빗), 세로 4C, 이것을 다섯 개를 붙이고 또 다섯 개를 붙입니다. 합하면 총 10개가 되지요.


이 길이가 40C가 됩니다. 지성소와 성소의 총 길이가 30C이니 덮고도 남는 겁니다. 그 위를 염소 털로 만들어서 덮는데 그것은 길이가 2 규빗 더 깁니다. 가로가 28C가 아니고 30C로 되어 있어요. 이걸 앙장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덮개를 만듭니다. 천으로 한 번 덮고 염소 털로 더 길게 덮고 그것을 끝일까요?


수양의 가죽으로 또 덮습니다. 그것으로 끝일까요? 해달의 가죽으로 또 덮습니다. 네 겹으로 덮지요. 거기 들어온 제사장들은 천사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그 천사의 세계는 거룩한 세계지요. 흠도 티도 없는 깨끗한 세계, 따라서 무서운 세계입니다. 어느 누가, 어느 인간이 그 무서운 세계에 감히 거주할 수 있을까요? 기적중의 최고의 기적이 바로 그곳에 사는 겁니다.


하늘나라를 내 맘대로 상상하지 마세요. 모세가 실제로 본 하늘나라가 그대로 성막 안에 그 모양새가 나와 있습니다. 온통 천사의 세계입니다. 교회에 먼저 오신 분들이 찬송할 때 어떤 모양으로 합니까? 한국에서 부흥회 할 때 치는 박수가 있어요. 그것을 해병대박수라고 합니다. 이런 박수입니다.


그러면 처음 교회 온 사람이 뭘 흉내 낼까요? 옆 사람을 가만 보고 따라 합니다. 해병대 박수도 있고 또 뒤로 제쳐서 치는 박수도 있습니다. 혈액순환에 좋지요. 어깨 아프고 허리 아픈 분들은 아까 그 박수가 더 좋을 겁니다. 기도원의 노인들은 이렇게 해요. 운동 삼아, 찬양삼아. 이처럼 나중 온 사람은 먼저 온 사람을 모방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성막안의 천사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천사가 갖고 있는 모든 몸의 기능은 찬양용입니다. 이제 약간 어렵습니다. 찬양용이니까 그냥 하나님께 펄럭이며 찬양하는 용도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날개 여섯 개 가운데 네 개는 찬양합니다. 그런데 두 개는 ……,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이걸 잘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를 가립니다. 찬양이라 하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께 찬양한다고만 찬양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도 찬양입니다. ‘주여, 제 행위를 제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주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찬양입니다. 그것이 이 성막 안에 가득 충만해 있습니다. 천국의 선배입니다. 그러면 후배는 누구일까요?


그 후배로 등장한 것이 열두 개의 떡입니다. 일종의 호떡이죠. 떡이 총 몇 개라 했지요? 열 두 개지요. 이스라엘이 몇 지파입니까? 열두 지파지요. 사실은 열지파지요? 요셉지파가 둘로 갈라지면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되는데 거기서 한 지파가 따로 떨어져 나와서 대표지파가 되는 겁니다. 레위지파가 따로 떨어져 나옵니다.


레위지파는 무엇을 하기 위한 지파입니까? 제사를 드리지요. 그래서 제가 모세언약에서는 레위지파, 제사장이 지배계급이라 한 겁니다. 민수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이런 것을 여러분이 지도자니까 아셔야 돼요. 아무리 열두 지파가 열심히 일해도 제사기능이 멈춰버리면 자동차가 굴러가지 않는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가 망해버립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난 뒤에 십일조나 안식일을 제대로 지켰을까요, 안 지켰을까요? 1번, 지켰다. 2번, 안 지켰다. 왜냐하면 이미 땅을 소유했으니까. 소유한 땅에서 내가 노동으로 밭 갈면 되니까. 그때부터 레위지파와 제사장이 직업을 잃었습니다. 이직률이 높았어요.


그래서 사사기에 보면 레위 인들이 밥 먹을 곳이 없어서 개인집에 가서 그 집의 복을 빌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연봉 협상했어요. 아무도 십일조를 안 하고 아무도 제사에 관심이 없으니까. 모세언약, 모세율법에 관심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미 가졌으니까. 부자가 말씀에 열심내면 그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부자는 아쉬운 것이 없잖아요.


부자가 천국가기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성경말씀을 좋아할 부자가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지요. 그 대신 부자는 부자 된 것이 복 받은 것이라는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더 좋아하겠지요. 즉 ‘나는 착하니 부자 되었고 너는 나보다 신앙생활 못하니 가난뱅이가 되었다. 그러니까 나처럼 믿어.’라고 나오기가 쉽지요.


그러니까 지도자고 뭐고 그들 눈에는 뵈는 게 없습니다. 그 당시 지도자들이 갈 곳이 없어서 떠돌아다니면서 부자 집에 가서 복 빌어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게 사사기 이야기입니다.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았’(삿 21:25)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렸을까, 안 버렸을까요? 하나님은 자기숙제, 자기언약에 대해서 충실하십니다.


인간들은 성경을 덮어도 하나님은 성경을 덮지를 않았습니다. 그대로 실천에 다 옮기십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버리고 왕을 택해서 왕하고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디에 있을까요? 왕 밑에 있는 겁니다. 왕의 지시를 받는 겁니다. 이것이 솔로몬 성전의 특징입니다. 솔로몬 성전, p3은 제사장의 합숙소입니다.


모두가 왕의 지배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대도 왕 밑에 있습니다. 제사장이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왕이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다윗과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잊으면 그 나라는 일찍 망합니다. 다윗의 선택을 인정 못하겠다고 나간 나라가 무슨 나라지요? 이스라엘이지요.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다윗의 약속을 거부하고 따로 떨어져나간 열 지파의 나라가 뭐라고요?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겁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열두 지파가 동등하게 나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율법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의 유다지파, 너희가 뭔데 우리보다 높으냐.’고 나온 겁니다. 인정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생긴 나라가 무슨 나라라고요? 이스라엘이지요. 그러면 유다지파의 나라이름이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만 여러분도 한 번 지어보세요. 이름을 어떻게 지으면 좋을까요? 어떤 이름이 적당할까요? 차이나? 코리아? ‘우리는 오직 모세언약이 아니라 다윗언약을 믿습니다.’ 해서 나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지파 이름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아시지요? 유다지파입니다.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가 되는 겁니다. 어느 나라가 진짜 하나님 나라입니까? 북쪽입니까, 남쪽입니까? 남쪽 유다지요. 그걸 북쪽 사람들이 인정합니까, 안 합니까? 인정을 안 하지요. 왜 인정을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만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서 역겹고 자존심상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에서 ‘창세전에 예수님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이 이야기 한다고 합시다.


이게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믿어본 적도 없는 사람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 창세전에 선택되었기에 예수 믿도록 예정되었다고 이야기를 해 봅시다. 상대방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너는 뭐가 잘나서 선택되었고 나는 뭐가 못나서 선택되었나.’ 이렇게 나옵니다.


그것은 잘나고 못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만드신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찾아봅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여기서 ‘그’가 하나님입니까, 예수님입니까?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는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거예요.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겁니다. 내가 구원 챙기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1번입니다.


우리는 1번을 버려야 합니다. 2번이 옳습니다. 예수님이 기거하시는 성전 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신 겁니다. 그것도 창세전에. 그런 계획이 있을 줄이야, 비로소 성경을 통해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제사장의 합숙소라고 했습니다. 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일할 때만 거기에서 살면서 활동합니다.


솔로몬 성전은 높이가 60미터입니다. 3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방이 1층에 30개, 2층에 30개, 3층에 30개 총 90개의 방이 있습니다. 여기서 활동하게 되지요. 지성소와 성소도 성막보다 두 배로 큽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는데 성막시절에 있었던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든 항아리가 없습니다.


있는 것은 깨진 돌 판을 대신해서 만든 돌판 밖에 없어요. 그 이유가 뭘까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는 고정되기 전에 이동할 때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원망들이었습니다. 광야시절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성막을 이동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그것이 고정이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상대자가 한 사람으로 결정되었다는 말입니다.

두 번 다시 언약상대자가 바뀐다는 말입니까, 안 바뀐다는 말입니까? 바뀔까요, 안 바뀔까요? 안 바뀌지요. 그래서 예수님으로서 이미 구원자가 확정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는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고정된 이유가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 마호메트, 한국의 이만희, 문선명, 그런 이름들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언약이 다윗의 자손으로 고정되었기에 그렇습니다. 다른 왕이 없습니다. 시편 2편을 보겠습니다. 7절과 12절입니다. 7절,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12절,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많은 사람과 사적으로 약속하는 것이 아니고 한 분을 택해서 약속했지요. 그 택하신 사람이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그를 아들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와도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맞지요? 그런데 다윗언약에 오면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달라졌을까요? 하나님이 오직 다윗의 아들하고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약속을 맺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했습니다. 한국에는 대통령이 있고 국무총리 있고 많은 관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국회의원이고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저주를 받을찌어다.’


왜냐하면 우리의 왕은 주님이고 우리는 그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쉬고 합시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근호 (IP:117.♡.132.36) 11-04-19 23:29 
성막 제 10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시작합시다. 히브리서 9장 11절에 보면 사람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이 나옵니다.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이 있다는 것은 그 성전을 만드신 분이 따로 있지요. P6,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성전이 바로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입니다.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에 우리가 가려면 우리가 눈으로 보이지 않아야 되겠습니까, 그대로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그대로 들어가면 되겠지요. 왜냐, 우리를 불러주신 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 손으로 짓게 되면 다 눈에 보이게 되는 거예요. 히브리서 9장 11절에 나오는 사람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초대를 받아야 됩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을 위해서 사람 손으로 짓는 성전을 그분은 배척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성전이 없었던 것 아니라 헤롯성전이 있었지요. 모든 사람이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인줄 알았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헐어버려라. 내가 삼 일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습니다.

누가 짓겠다고요? 예수님이 짓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삼 일만에 짓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삼일 만에 지은 성전에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문제지요. ‘여러분은 가만 계십시오. 제가 삼일 만에 짓겠습니다. 삼일 만에 다 지었습니다. 들어오세요.’ 아무도 안갑니다. 왜, 우리는 성전 짓는데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예배당 짓는데 아무리 짧게 해도 6개월 이상 걸립니다. 아마 중국에서는 더 빨리 지을 거예요. 예수님은 3개월도 아니고 1개월도 아니고 3일 만에 짓겠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당황했습니다. 46년 지어도 다 못 지은 성전 말고 예수님이 따로 성전을 만드시는 줄 알았어요. 예수님의 말씀이니 일단 그들이 믿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 성전이 지금 어디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제자들은 당황스러웠어요. 예수님을 아무리 따라다녀도 예수님이 3일 만에 지은 성전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입장에 서도 마찬가지지요.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난 뒤에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한데 무엇을 알았느냐, 그 성전이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디 있느냐가 중요하면 제자들이 거기에 들어가면 됩니다. ‘아, 여기 있구나.’ 하고 그냥 들어가면 되지요. 그런데 3일 만에 지은 성전은 어디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일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했다는 겁니다. 그전에 사람의 손으로만 짓는 성전을 생각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 못했는데 성령이 오고부터는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아예 성전을 만드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칭다오나 베이징에 가는 것이 아니고 여기 심양에 그냥 있어도 괜찮아요. 성전이 우리에게 덮쳐 씌우는 겁니다. 사흘 만에 지은 성전에 우리가 포함이 되어버립니다. 그 성전 안에서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덮쳤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만들 필요가 없는 성전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겁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에베소서 2장 끝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으로 서로 성전이 되어졌느니라. …… 저와 여러분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의 성전이 되었느니라.’ 제가 지었습니까, 우리 ○선생님이 지었습니까, 누가 지었습니까? 아무도 지은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성전에 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도합니다.


그들이 알아먹을 리가 없겠지요. 제자들도 못 알아먹었으니까. 예수님 죽으시고 부활하고 난 뒤에, 십자가를 알고 난 뒤에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가 뭐고 부활이 뭐고 성령이 뭔지를 아시는 분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예수님이 지은 성전에 하나 됨을 믿고 싶습니다.


이 성전에 들어오면 어떤 기쁨과 어떤 감사가 있겠습니까? ‘내가 짓지 않았다. 주께서 친히 만든 하나의 벽돌, 하나의 창문틀, 하나의 처마,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런데 머릿돌은 우리들 차지가 아닙니다. 최초의 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지요? 그분이 누구신지. ‘예수 그리스도 머릿돌 안에 성령 안에서 성전이 지어져간다.’고 합니다.


오다 보니 아파트 공사 중이었습니다. 분명히 벽돌과 벽돌 사이에 시멘트가 들어갑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 사이에 하나가 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그 분의 영만 필요합니다. 그분의 영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간단합니다. 두 사람이 한 몸 되는 것.


머리 좋은 사람은 여기서 더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이 한 몸 되는 것. 머리 더 좋은 사람은 더 할 수 있습니다. 백 명이 한 몸 되는 것. 여러분, 결혼을 한 분이 계시지요.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부부가 한 몸이 되던가요? 부부는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 성령으로 접착하지 않았기에. 그 증거를 대겠습니다.


부부가 나란히 잠을 자도 아내가 꾸는 꿈을 남편이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압니까, 모릅니까? 모릅니다. 그런데 신약의 성도가 꿈꾼 것을 한국의 성도가 압니다. 그 꿈의 내용을 이야기해드릴까요?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꿈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의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볼까요?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와 같은 내용을 성령 안에서는 다 똑같이 느끼고 있습니다. 차이나에서나 코리아에서나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준바, 또는 죽으신바’가 되고, 그러니까 ○선생님이나 저나 다 범죄 함이 있습니다. 벌써 두 사람이 한 몸 되었지요? 범죄 함, 범죄 함, 같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죄인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선생님이 예수님 믿어서 의인 되었습니다. 저도 예수님 믿어서 의인되었습니다. 보세요. 두 사람이 한 몸 되었잖아요. 한 머리에서 나오는 효과가 한 몸을 이룬 겁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면 ‘머리가 하나요,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그리고 사랑도 하나요.’ 한 성전 안에 같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성질도 다르고 인물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과거의 추억도 다르지만 그 모든 것이 범죄 함이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같이 죽었고 그 모든 추억과 과거의 경험이 십자가 때문에 의롭다 한 재료로 사용되는 겁니다. 아, 통역하기 굉장히 어려웠을 것인데! 이렇게 해 놓고 제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북쪽의 나라 이름을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이스라엘이라고 했는데 북쪽 이스라엘이 아니고 그냥 이스라엘입니다. 묻는 형식으로 복습을 잠깐 하겠습니다. 그들은 왜 이름을 북쪽 이스라엘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로 했을까요? 그들이 생각하는 옳게 되는 것은 항상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옳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열 두 지파가 평등하게 나왔습니다. 그 평등하게 나온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되었으니까 도로 옛날처럼 돌아가면 그것으로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우리의 평소의 생활에서도 엄마가 애들에게 나무랄 때 애들에게 뭘 요구합니까? ‘네 잘못을 회개하고 예전처럼 돌아가라.’고 요구하지요.


그게 우리 인간들의 상식이잖아요. ‘전에는 이랬는데 왜 지금은 잘못된 거야? 그러니까 전처럼 다시 돌아가라, 회복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아들입니다. 출애굽기 4장 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스라엘 전체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했습니다.


비록 숫자가 40만 명이 되어도 그것을 하나로 본 겁니다.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는 그것을 생각한 겁니다. 잘못된 길로 갔으면 도로 옛날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원상복구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읽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반성을 요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새로 준비한 새로운 것에 대해서 주목하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이라 이름 한 것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 되기 위함입니다. 남쪽나라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유다였습니다. 유다나라는 그 왕이 있어요. 그 왕 이름이 다윗이죠. 이 다윗이 다윗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다윗 왕이 하나님의아들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다윗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하나님은 옛날로 돌아갔습니까, 새로운 것을 준비했습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꾸 옛날로 돌아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때가 되매 새 일을 준비했다.’고 하십니다. 이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스라엘사람들이 유다지파를 인정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정상으로 돌아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이런 정신을 갖고 있는 것이 진짜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지은 겁니다. 상식적으로 오히려 북쪽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 침투했습니다. 다윗 왕을 통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새로운 약속을 해버렸습니다.


그것을 네 자로 다윗언약이라 했습니다. 에스겔 37장 24절, 25절,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었습니까, 유다 편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유다 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이 종이가 이스라엘이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청소하시는 분에게는 좀 죄송합니다. 쫙쫙 다 찢어버립니다. 이것이 성경 그대로입니다. 옛날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모든 이방민족에게로 다 흩어졌습니다.


(어질러 놔서) 청소하시는 분에게는 죄송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만 다윗의 등불로 남겨두었습니까? 북쪽입니까, 유다입니까? 유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패에 보면 이스라엘이 아니고 유다의 왕이지요. 예수님 자체가 언약을 철저히 따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준비한 것에 대해서, 예상 밖의 일에 대해서 우리는 행함이 아니라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잘해왔던 것, 잘할 수 있는 것에 미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잘하는 일을 기피해 버리고 새로운 일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내 재주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잃어버립니다. 그 일에 우리 자신을 매일 같이 맡겨야 됩니다. 그것을 날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독수리 날개처럼.


나라가 둘로 쪼개짐으로써 남쪽 나라에는 다윗의 등불이 계속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아는 쉬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윗 언약에 의하면 왕이 대표해서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백성은 가만 앉아서 그 혜택을 입습니다. 그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보면 아무리 죄를 짓고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성전 안에서 기도하면 다 용서가 됩니다.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할 때 어느 쪽을 향하여 기도했습니까? 성전을 향하여. 그러자 죽은데서 살아났습니다. 그것은 죄인이 잘해서가 아니라 왕이 하나님의 말씀과 따로 약속을 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왕 하나만 제대로 말씀대로 살면 백성들이 거저 혜택과 구원과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윗의 후손인 왕들이 제대로 말씀을 지켰습니까? 솔로몬은 어떻습니까? 르호보암은 어떻습니까? 바아사는요? 어때요? 그들이 말씀은 온전히 지켰습니까? 안 지켰지요. 나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변의 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지요.


그런데 어떤 왕은 사람의 무기가 아니고 찬양하며 오직 주님만 의지했더니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이 왔을 때 그 편지를 그대로 펴놓고 누구에게 의탁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 그 왕의 근본 믿음이 뭐겠습니까?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짜 유다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이사야 53장에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유명한 말씀인데 아시지요? 그때 누가 채찍에 맞습니까? 여호와의 종이 채찍에 맞습니다. 그 여호와의 종을 누가 해야 되는가? 바로 다윗의 자손이 해야 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은 ‘자기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왕이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하나님이 진정 이 유다의 왕입니다.’를 고백해야 돼요.


유다의 왕은 사람 보기에는 왕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자기의 종에 불과해요. 한 때 다윗 왕이 착각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 숫자가 많으니까 그것이 자기 백성인줄 알았습니다.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셌지요. 그런데 삼일 만에 7만 명이 빠져나갔습니다. 아 아까운 교인 7만 명……,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고 자기가 제사장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진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다윗은 제사장이 된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다윗이 왕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이 왕인 것을 다윗은 증거 한 겁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다윗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해서 우리야 장군을 전쟁에 내보냈습니다.


아람나라와의 전쟁입니다. 자기는 왕이니까 전쟁에 나갈 필요 없이 그냥 결과만 지켜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심해서 높은데 올라갔습니다. 보니까 저 아래쪽에 어떤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뚱뚱했겠습니까, 날씬 했겠습니까? 뚱뚱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여인이 누구의 여인인지도 상관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왕이니까. 이 나라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여인을 초대해서 동침을 했습니다. 왕으로서 그런 짓을 했습니다. 여기서 약간 어려운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 언약은 왕 한 사람과 약속을 한 것이라 했지요. 그러면 왕이 잘못한 것은 전 백성이 잘못한 것을 대표하는 겁니다.


다윗의 개인 잘못이 아닙니다. 다윗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전쟁 중에 있는 우리야 장군에게 하루 휴가를 줬습니다. 우리야 장군은 지금 하나님 전쟁에 관심 있습니다. 자기 아내 사랑하는 것은 전쟁 끝나고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 자기 아내거든요. 하루 이틀 살고 끝날 관계가 아니잖아요. 지금 하나님이 왕 되셔서 아람나라와 싸우는 이것이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야 장군은 그런 생각이 바로 죽을죄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우리야 장군을 죽였습니다. 고의가 아닌 것처럼 꾸며서 고의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왜냐, 왕이니까. 신하는 자기 밑에 있으니까. 착각이었습니다. 진짜 왕 되신 하나님께 누굴 보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왔습니다.


‘임금님이여 당신이 율법을 압니까?’ 다윗이 대답합니다. ‘잘 알지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 ‘율법에 따르면 네 배나 갚아주라, 고 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죽여 버리라, 고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바로 그 죽을 자가 당신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보다 더 높은 분이 계셨어요. 선지자? 아닙니다.


누굽니까?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은 비로소 알았습니다. 기뻤습니다. 기쁘다는 말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적인 죄가 아니고 개인 삶을 통해서 백성들의 죄를 들추어 낸 겁니다. 자기가 간음하고 자기가 살인한 것은 개인의 간음과 개인의 살인이 아닙니다. 자기는 왕이기에 백성을 대표하는 살인자요 간음자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율법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상한 심령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밖에는 없습니다. 그 전까지 다윗은 하나님과 자기가 동업자인줄 알았습니다. 여호와 왕 앞에 자기가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쁜 유부녀를 보게 해서 왕인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모친의 죄 중에서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진짜 하나님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죄인임을 아시고 그 죄마저 용서하시는 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이고 제사고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이끄시는 것은 누구십니까? 그것은 다윗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비로소 다윗은 다윗언약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다윗언약에 속한 사람은 ‘난 다윗 언약을 안다.’가 아니라 참된 왕 앞에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야 6장 1절에서 5절에서 이사야선지자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섰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다.’고 하면서 하는 말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그 때 천사가 제단의 숯불을 가지고 이사야의 입술을 지져버리지요. 제가 묻습니다. 성막이 취소되었습니까? 성전이 사라졌습니까? 계속 살아 있지요? 다만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모습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이사야는 그 현실을 본 겁니다.


지금 성령 안에서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성막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 손으로 짓지 아니한 방식이 동원됩니다. 그 모든 성소와 언약의 모든 것을 히브리서에 보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무수한 제물도 아니고 무수한 기름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이 단번에 죽으심으로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보이지 않는 성전을 위해서 P3의 성전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솔로몬 성전에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항아리가 없습니다. 지붕도 네 겹의 가죽지붕이 아닙니다. 고정되었다는 뜻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단단한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뜰에 서면 오른쪽에는 제단이 있고 왼쪽에는 물두멍이 있습니다.


성막에서는 물두멍이 성소의 출입구에 있지만 여기서는 오른쪽과 왼쪽 양쪽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여기 기둥이 서 있습니다. 기둥 이름은 야긴과 보아스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성전을) 세우겠다.’ 야긴, ‘그럴 능력이 있다.’ 보아스, 그렇게 되는 겁니다. P3, 솔로몬 성전은 누구 손으로 지었습니까? 솔로몬의 손, 사람 손으로 지었지요.


이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요. 솔로몬 성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결국 성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왕 자체가 온전하게 율법을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지성소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언약궤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왕이여 언약대로 다 준수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백성하고 맺은 계약이 아닙니다. 오직 왕하고 맺은 언약입니다.


묻습니다. 왕이 모든 율법을,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까? 못 지켰지요. 드디어 P3가 무너지게 됩니다. P4, 에스겔 새 성전입니다. P3과 P4의 차이점은 P4안에는 그 안에 언약궤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언약궤가 없을까요? 새 성전은 언약궤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십분 쉽시다.
 이근호 (IP:117.♡.132.36) 11-05-06 10:53 
성막 제 11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솔로몬 왕이 말씀을 제대로 지켰으면 나라가 둘로 안 쪼개졌습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자기소유로 여기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이방나라와 혼인외교술을 사용했습니다. 본처가 삼백 명 첩이 칠백 명, 부럽지 않습니까? 주변의 모든 이방종교가 다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것을 걱정도 안했어요.

이미 많이 가졌으니까. 이미 많이 가졌다는 이야기를 전에 여러 번 했지요. 어디서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가서 풍족하게 살 때에는 여호와의 언약을 버렸습니다. 이미 가졌으니까. 신명기 8장 12절부터 봅시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고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제가 묻습니다. 먹어서 배부른 것이 축복입니까? 아름다운 집을 짓는 것이 축복입니까? 번성하고 은금이 증식되는 것이 축복입니까? 소유가 풍부하게 되는 그것이 축복입니까? 진정한 축복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축복입니다.

신명기 8장 2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 그 이유가 17절에 나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니라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부자 되는 것이 나쁜 겁니까? (좋은 것도 될 수 있고 나쁜 것도 될 수 있다고.) 부자 되는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부자 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겁니다. (아멘!)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된 것은 내가 부자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고 주의 뜻대로 부자 되어야 하기에 부자 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습니까? 내가 가난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가난하게 되어야 하기에 가난하게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래서 주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 겁니다. 대답이 옳고 그르고 그것과 관계없이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가난한자나 부자나 다 우리는 부족한 것밖에 없습니다.


P3이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은 많이 가졌습니다. 숟가락 젓가락이 다 금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벌 받아도 어지간히 떼어줘도 남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머릿속에는 나라가 두 조각이 나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징벌조차 우리가 예상한 징벌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 못한 징벌을 주십니다.


이점을 슬퍼하지 마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내가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아이는 부모가 나무라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손들고 벌서는 경우가 있습니다. 엄마가 기가 차서 ‘이놈……!’ 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벌 내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주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발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에게 벌을 내리지 마세요. 남들이 여러분을 정죄하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을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우리의 잘못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더 깊게 아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정말 사랑하는 관계라면 상대방이 말할 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참 듣기 싫어해요. 왜냐하면 자꾸 미안하다, 죄송하다, 하는 것은 내가 저를 사랑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꾸 자기 완벽을 기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상대방 남자는 말합니다. ‘네가 완벽하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네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도 아름답다.’


요한일서 3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왜, 거기에는 더 이상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내가 너를 심판하지 않겠다.’ 그것이 솔로몬 성전이 깨어져야 될 이유가 되는 겁니다.


재산을 많이 가졌느냐, 여자가 많은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성전답게 유지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은 지옥 갔을까요? 많은 사람이 성경 보다가 그런 것이 궁금해서 질문을 합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는데 지옥에 갔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사울은 악신 들렸는데 지옥 갔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를 묻는 분이 계신데 모세는 예수님의 변화 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천국 갔습니다. 이 땅의 약속의 땅에는 못 들어갔지만 천국에는 갔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드라마 보면 나쁜 역할을 하는 배우가 있지요. 그 사람은 그 드라마 끝나고 감옥에 가야 됩니까? 그렇지 않지요? 자기 역할만 했을 뿐이지요. 모세와 사울은 자기역할만 했을 뿐입니다. 천국가고 지옥가고에 관하여는 주님께서 택한 자는 구원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이가 천국 갔을까요, 지옥 갔을까요?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비로 애라도 구원받습니다. 창세전에 예정되지 못한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차이나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착한 사람은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성경에는 언약 밖의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날 때부터 아담의 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금 이 질문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하늘나라는 천사만큼 의롭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갑니다.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만 어겨도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어제 강의한 것을 다시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여기에 컵이 있습니다. 여기에 물을 붓습니다. 이 컵보다 물이 더 많으면 물이 넘치겠지요. 단순히 우리가 죄가 없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넘쳐서 천국 갑니다.


실제로 부어 보이겠습니다. 여기서 참겠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넘칩니다. 그 의가 다 누구 것입니까? 예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 구원된 겁니다. 인간의 행함으로서는 어떤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없는 겁니다. 솔로몬이 천국에 갔는가, 지옥에 갔는가의 문제는 전도서에 나옵니다. 전도서 1장 2절에 보면 다섯 번이 나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나는 공부도 많이 했고 책도 많이 지었고 부자도 되어보았다. 하지만 인간의 몸은 흙으로 무너진다. 사람은 가진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지혜로 구원받는다. 그 지혜는 다른 것이 아니다. 청년들아,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라. 세상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렇다면 나는 왜 왕으로 살았는가, 그것은 한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워할 때가 있으면 사랑할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나가면 그것이 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은 또렷이 우리에게 다가와야 됩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평생 알고 있던 진리였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도 쓸데없는 것이 없지요. 이 솔로몬 성전에 의하면 왕이 똑바로 해야 언약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말씀대로 순종한 경우도 있지만 평생토록 완벽하게 말씀을 다 지킨 왕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기원전 722년에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라는 제국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을 멸망케 했습니다. 이 앗수르가 성경에 몽둥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몽둥이 끝을 누가 잡고 있었겠습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몽둥이로 개 패듯이 패버립니다. BC 586년에 유다나라가 멸망합니다. 망했을까, 안 망했을까요? 안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 살던 곳을 잠시 비우고 다른 곳에 가서 성소가 됩니다. 이것은 몽둥이가 아니고 보호자가 됩니다. 그 제국 이름은 바벨론입니다. 앗수르는 나쁜 편, 바벨론은 좋은 편, 앗수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바벨론은 유다의 신앙을, 요시아 왕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전을 개혁한 요시아 왕의 신앙이 바벨론제국에서 꽃을 피웁니다.


우리교회에서 수요일에 예레미야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강해하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제발 포로 잡혀 가거라. 그게 사는 길이다. 제발 가진 땅, 부동산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약속 따라서 그 쪽 나라의 포로가 되어라. 그러면 살리라.’ 그런데 버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참혹하게 멸망당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라.’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의 대표자를 들 테니 여러분은 너무 기이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달린 분의 직업이 뭐지요? 강도지요. 강도가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뭐가 날아가 버렸습니까? 강도 직업이 날아가 버리고 남은 것은 믿는 자만 남았지요. 그 사람은 왜 강도 되어야 됩니까? 강도가 되는 것이 주님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뻔뻔스럽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생각해 주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 강도가 대단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점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 ○선생님과 제가 둘 다 물에 빠졌습니다. 물에 안 빠진 사람보고 건져달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같이 물에 빠진 사람보고 건져 달라고 해야 되겠습니까?


이 강도들은 로마 군인들 보고 살려달라고 해야 됩니다. 로마 군인들이 권력을 갖고 있으니까. 옆에 다른 강도가 있었습니다. ‘같이 죽는 마당에 참 놀고 있다.’ 이렇게 놀렸습니다. 누가 상식적입니까? 구원받지 못한 그 강도가 상식적이에요. 바로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있는 그것이 죽든지 살든지 그것이 천국입니다. ‘오늘 밤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거기서 빠뜨리면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낙원에 있으리라.’를 좋아하면 안 됩니다. ‘나와 함께’,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런 경우가 또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건너왔을 때 반가워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만 보고 그냥 나선 거예요. 계속 예수님만 보고 갑니다. 이것이 물인지 땅인지 구분도 안갑니다.


갑자기 정상으로, 상식으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미쳤지.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 거야?’ 하는 순간 빠져버렸습니다. 예수님한테 꾸중 듣습니다. ‘베드로야,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여러분, 믿음이 뭡니까? 관심이 예수님에게 가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강도라 할지라도, 비록 창녀라 할지라도 ‘주님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하고 살았습니다.’


P4, 새 성전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동쪽 문이 닫혀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야기 하는 것은 여러분이 거의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입니다. 성전 안은 솔로몬 성전과 같습니다. 방이 90개 있는 것이 동일합니다. 그런데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없습니다. 에스겔 11장에 의하면 그 언약궤는 우리 맘속에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에스겔 11:19)


바깥에 있는 십계명이 우리 맘속에 들어올 때는 어떻게 들어올까요? 1번, 십계명이 그대로 다 들어온다. 2번, 통합 되어서, 뭉쳐져서 들어온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두 번째가 정답입니다. 다 맞추네요. 로마서 13장에 9절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절하지 말라.’는 어떤 계명이 있더라도 ‘사랑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같은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로마서 13:9)


사랑으로 완성된 채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지금부터 로마서 7장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두 남녀가 부부가 되었습니다. 여자가 마음을 단단히 먹었습니다. 내가 시집가서 훌륭한 여성이며 아내인 것을 보이기를 원했습니다. 스스로 십계명을 만들었습니다. 남편이 늦게 들어와도 잔소리 안하기, 남편이 바람피워서 다른 여자에게서 난 아이를 안고와도 상관없기, 그릇에 먼지 하나 없도록 청소하기, 시부모 잘 섬기기, 치매 걸린 시부모 섬기기, 애들에게 영어 가르치기, 몸이 부서지도록 재산을 불리기, 잠언서 31장에 나오는 대로 현숙한 아내 되기를 작심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미흡하면 스스로 자신을 자책하면서 때렸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설거지를 감시하지 않습니다. 청소 상태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단 한마디만 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끝!’ 로마서 7장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남이 나를 나무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너무 냉정하고 냉혹합니다.


우리 맘속에 장부가 있습니다. 이쪽은 착한 일 한 것, 이쪽은 나쁜 일 한 것,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나쁜 짓을 했다, 교회 가서 헌금을 더 추가해서 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정을 얻습니다. 만약에 내가 착한 일을 너무 많이 했다, 그러면 교회에서 약간 태만히 합니다.


저축해 놓은 착한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래서 몇 개 빼내도 괜찮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긴 것이라고, 천사보다 의롭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이런 선악과를 따먹고는 천국에 이르지 못합니다. 방법은 뭡니까? 신랑하나 잘 만나는 거예요.


어떤 신랑? 대신 죽으시는 분, 내 대신 죽으시는 분, 예수님은 말로 사랑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서 사랑한다, 했습니까? 예수님이 산상설교 해서 사랑한다 했습니까? 아닙니다. 내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사랑한 거예요.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내 대신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삼촌? 동서? 올케? 시누이? 형수님? 누가 내 죄를 대신 합니까?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가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부터 예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한 그릇으로서 사용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습니다. 이제 이 새 성전에 언약궤가 없는 이유를 설명할 때입니다. 이 십계명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때는 사랑으로 바뀌어서 들어옵니다.


그것이 사랑, 사랑, 사랑, 이렇게 말로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5,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갔거늘’, 양이 없는 상태에서, 양이 빠져버린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의 징벌을 그분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우리 속에, ‘다 이루었다.’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지금 약간 어려운 것을 할테니 긴장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을 하겠습니다.


제가 물을 테니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히브리서 10장 16절에 보면 새 언약이 나오는데 보기 전에 먼저 묻습니다. 1번과 2번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텐데 1번이 맞는지, 2번이 맞는지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1번,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지셨다. 이것이 새 언약이다. 2번,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시고 그 십자가지신 효과와 의미를 우리 마음속까지 집어넣으셨는데 그 집어넣으신 그것까지도 새 언약이다.


몇 번입니까? 어느 것이 새 언약입니까? 항상 끝에 것이 정답이지요. 우리가 2번이 좋아서가 아니고 성경자체가 그것을 이야기하지요. 히브리서 10장 16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우리 인생은 예수님의 칠판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 묻은 필기도구가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평생토록 써내려갑니다. 우리가 믿을 때뿐만이 아니고 믿기 전과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준 새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포기가 없습니다. 우리가 도망가면 붙들고 글씨를 쓰십니다.


우리가 엉뚱한 길로 가면 붙들어서 쓰십니다. 여러분이 크리스마스 때의 천사의 가사를 아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한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하나님께서 먼저 기쁨으로 보시는 거예요.


기쁜 소식을 한자말로 줄이면 두 글자로 됩니다. 복음, 기존의 모든 신학은 그 복음을 우리가 기뻐해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쁘신 겁니다. 강도 같고 창녀 같은 우리를 건져내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예요. 관점을 우리 관점에서 주님의 관점으로 바꿉시다. 성령이 오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선악과 장부로 인해서 맨 날 우리의 기쁜 것을 우리가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선악과의 것은 보지 않고 신랑 되신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감사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고 난 뒤에 가락지를 꼈습니다.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동네 거리에 나갔습니다. 그 가락지를 어떻게 자랑하겠습니까? 1번, 내가 탕자가 되어서 받았다고 자랑하겠습니까? 2번, 아버지가 거저 주셨다고 자랑하겠습니까?


항상 끝에 것이 정답이죠. 그런데 늘 집을 나가지 않았던 큰 아들은 뭘 자랑하겠습니까?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는 너무나 잘났으니까.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탕자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기뻐해서 잔치 하노라. 나는 완벽한 바리새인보다 불의한 청지기를 더 좋아하노라.’


은혜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그렇습니다. 이제 P4 성전의 기이한 구조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동쪽 문이 닫혀 있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같습니다만 그 바깥에 또 성전이 크게 있습니다. 50미터를 걸어와야 됩니다. 여기에 문지기 방이 있습니다. 사방 10C(규빗)입니다. 더 들어가면 솔로몬 성전과 구조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문지방이 있습니다. 우리가 배웠습니다. 피가 언약궤에 묻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성전은 언약궤가 없습니다. 그러면 피를 어디에 묻힐까요? 바로 문지방에 묻힙니다. 우리는 P1에서 유월절에 문지방에 피를 바른 것을 알고 있습니다. P1에서 P2, P3로 가면서 점차 이 두께가 늘어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P4에 오게 되면 이 두께가 다 사라지고 다시 선으로 돌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문지방에 피를 바릅니다. 그러면 여기 피를 바를 분은 어디로 들어옵니까? 동쪽 문이 닫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P3, 솔로몬 성전과 P4, 새 성전의 다른 점은 P3에서는 동쪽으로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새 성전은 문이 세 개 있어요.


동쪽과 남쪽과 북쪽입니다. 동쪽은 닫혀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이 문으로 들어왔을 때는 도로 그 문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남쪽 문으로 들어와서 맞은편에 있는 북쪽으로 나가야 되고 북쪽으로 들어와서 남쪽 문으로 나가야 됩니다. 동쪽 문으로 들어와서 도로 동쪽 문으로 나가시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분이 바로 왕이라는 겁니다.


제사장이 아닙니다. 왕입니다. 문이 닫혀 있습니다. 이 문은 마지막 고정된 왕, 마지막 왕이 올 때까지는 닫혀 있습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동쪽 문으로 왕이 들어오면 이 왕은 문지방에 피를 바르고 동쪽 문으로 되돌아갑니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경우는 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문지방에서 뭐가 생기는가? 놀랍게도 물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발목, 그 다음에 무릎, 나중에는 넘치게 되는데 네 개의 강줄기로 나누어집니다. 왕의 땅을 적십니다. 왕의 제사드림의 혜택을 입은 모든 백성들에게 다 물이 넘칩니다. 에덴동산의 재현입니다. 에덴동산에 강이 네 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왕이 오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기에 사람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닙니다.


이 벽돌 하나하나는 요한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그 때는 문이 세 개가 아니고 열두 개가 됩니다. 왕은 동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옵니다. UFO같이. 드디어 혼인잔치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 전에 언약궤가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 언약궤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성도의 마음 안에 있지요.


그렇다면 사랑이 우리 허락을 받고 들어옵니까? ‘똑똑! 들어가도 좋습니까?’ 이렇게 허락받고 들어오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들어오는 겁니까?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세 천사의 말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믿었다, 안 믿었다? 안 믿었어요. 그래서 아들 이름을 뭐라고 지었습니까? 이삭이라고 지었는데 그 이름의 의미가 뭐예요?


비웃음이라는 뜻이지요. 픽, 하고 웃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포기했습니까? 절대로 포기 안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니까. 십분 쉬겠습니다.
 이근호 (IP:117.♡.132.36) 11-05-06 10:54 
성막 제 12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새 성전을 이야기하면서 요한복음 7장을 이야기해야 되는지 궁금해 하실 것인데요. 그 당시에 수장절이라는 유대인의 추수절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어떤 이벤트를 했습니다.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문지방에서 물을 흘려보내는 이벤트를 벌였습니다.

 그 행사에 예수님께 때를 맞춰서 참석했습니다. 처음에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가자고 할 때 주님께서 안 갔습니다. 형제들의 권유를 예수님이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때를 맞춰서 그 물 붓는 행사에는 참석했습니다. 그 물을 붓는 행사와 성령과 관련을 지었습니다. 이 둘째 날 마지막 시간에 진짜 어려운 것을 하겠습니다.

물 붓는 것과 성령 사이가 그냥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인자(人子)가 들어갑니다. 쉽게 표현하면 ‘사람의 아들’이지요. 20세기 신학계에서 신학자들이 이 ‘인자’를 푼다고 애를 먹습니다. ‘인자가 무엇인가?’ 인자, 사람의 아들? 아닙니다. 아담의 아들?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가 이해했던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 전에 물어봅니다. 베드로가 ‘인자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자신의 실력으로 알았을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아버지의 능력으로 알았을까요?

항상 해답은 뒷부분에 있지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 게 알게 한 이는 네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7) 그래서 인자에서 메시아가 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풀 수 있다, 풀 수 없다? 풀 수가 없지요. 기껏 여러 사람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이것은 메시아가 됩니다.

자, 어떻게 푸는지 여러분이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인자에서 메시아로 갈 때 그냥 바로 가지를 않습니다. 인자에서 어디로 가느냐하면, 언약으로 갑니다. 언약에서 메시아로 갑니다. 참 쉽지요? 인자에서 언약으로 화살표가 되어 있는데 실제는 언약이 인자로 다가오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여기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믿기로 했습니까, 아니면 십자가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찾아왔습니까?

십자가를 새 언약이라 합니다. 아까 히브리서 10장에 있는 말씀처럼 새 언약이 우리 맘속에 우리 허락도 없이 그냥 들어옵니다. 이것을 반대로 예수를 자기 쪽에서 믿고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을 들겠습니다. 한 사람은 가룟유다입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두 가지 경우를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룟유다는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권능을 행사했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쳤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의 능력이 열 두 제자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22절 이하에 보면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지요. ‘제가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고 귀신을 쫓아냈고 선지자노릇을 했습니다.’ 주님 하시는 말씀이 ‘I don't know, 나는 너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귀신도 나갔는데, 권능이 나갔는데 왜 주님은 나를 모를까?’ 가룟유다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우리가 가룟유다를 이해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해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어떤 권력을 생각해서 예수님을 생각했는데,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나서 모든 권세들이 물러가고 우리가 하늘나라 권좌에 앉게 되는데, 그래서 모든 재산을 버리고 3년 동안 따라다녔는데, 제자훈련 잘 받았는데, 예수님의 그 마지막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이렇게 고개 푹 숙이고 가는 모습이지요.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실망을 했습니다. 화가 난 베드로는 칼을 빼고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로마 군병이 말렸습니까, 예수님이 말렸습니까? 예수님이 휙 돌아보시면서 떨어진 귀를 주워서 친절하게 가져다 붙이시면서 ‘칼로 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을 들은 가룟유다는 배신감과 실망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이전부터 가룟유다는 예수님에게 복수할 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호를 보내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었습니다. 돈이 궁해서가 아닙니다. 30냥이 고가라서가 아닙니다. 30냥은 그냥 기부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실망에 대한 복수로 보상받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얼마나 양심적인지 스승을 팔아먹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요즘 세상에 이정도로 양심 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얼마나 양심적입니까? 스승 팔았다고 자살할 정도로 그 정도로 스승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악마의 얼굴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베드로를 봅시다. 자기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 죽는데 따라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이 ‘아서라. 말아라.’ 하고 거부했습니다. 예수님 가시는 곳에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앉아서 불을 쬐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소녀 하나가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다. 당신은 저 죄수와 한패’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는 ‘아니야!’라고 부인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같은 지적을 했습니다.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지요. 그리고 베드로가 말을 더 붙였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하노라.’ 했습니다. 여러분, 가룟유다가 나쁩니까, 베드로가 나쁩니까?


베드로는 자기 장모도 낫게 했습니다. 물 위를 걷게 했고 오병이어로 떡도 먹었습니다. 풍랑일 때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했습니다. 성전세가 없을 때 물고기를 끌어올려서 동전을 끄집어냈습니다. 많은 기적과 많은 체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결국 마지막에 나에게 손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걷어차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바로 사랑이지요. ‘주께서 저를 사랑하셨기에 찾아오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주님한테 ‘나 주님위해 이만큼 일했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교회에 이 만큼 충성을 했는데 나를 감히 내치다니!’ 이렇게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주께서 저를 사랑하신 줄을 주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결국은 사랑이었습니다. 사울왕은 회개했을 때 사무엘이 내쳤습니다. 울면서 옷을 붙잡으니까 옷을 찢어서라도 내쳤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간음하고 살인해도 주께서는 한 번 회개하니까 그것으로 다 용서가 되었습니다. 그 차이점이 뭘까요?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과 미워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바로 언약이 인자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찾아오게 되면 인자 속에는 두 개의 구분 작업이 일어납니다.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구분하는 작업을 인자가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인자가 하는 모든 말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양과 염소,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나쁜 고기 좋은 고기, 열매 맺는 씨와 열매 맺지 못하는 씨, 게으른 종과 착실한 종.


어제 한 이야기 잠깐 하겠습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지요. 그 할아버지가 천국과 지옥을 나누시는 분입니까? 아주 어진 할아버지지요. 타이완에 가면 어떤 신이 있는데 그 신의 인상이 그렇게 어질 수가 없어요. 향불을 피워서 그 어진 신에게 바칩니다. ‘우리 남편 건강하고 올 해 사업 잘 되게 해 달라.’고 빕니다.


우리가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다 용납해주시고 복을 내려달라고 빕니다. 그 신의 인상이 이렇습니다. 제가 그려보겠습니다. 눈동자는 거의 안보이고 눈썹만 보입니다. 입은 이렇게 벌어졌습니다. 항상 웃는 상입니다. 귀는 부처 귀입니다. 머리는 대머리입니다. 턱 살은 두껍습니다. 항상 인자스럽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찾는 신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 말씀가운데 한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노아홍수 때까지 사람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사고팔고 했다가 갑자기 홍수가 났을 때 사람들이 다 멸망했다.’ 한 번 따져봅시다. 먹고 마시는 것이 죄입니까?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입니까? 사고파는 것이 죄입니까? 이것 아니면 우리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물속에 다 잠겼습니까? 살기 바빠서 심판의 날을 잊어버렸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이런 인자하신 아저씨 하나님만 생각한 겁니다. 그 뒤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날도 그러하리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그 때에 갑자기 도적같이 임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 24:38-44)


인자가 하시는 일이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일입니다. 달란트 비유, 게으른 종과 착실한 종을 구분하는 것도 심판입니다.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자는 천국에 가거라, 했습니다.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지 않은 자는 지옥 가거라.’라고 했습니다. ‘네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말고 네 몸과 영혼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인자가 뭡니까? 인자는 지옥과 천국을 구분하는 그 자체가 기준이 되는 겁니다. 이 말씀 굉장히 어렵지요? 어렵게 하겠습니다. 인자 자체가 인자인 것을 모르면 지옥 갑니다. 인자인 것을 인자라고 인정하면 천국 갑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32, 33절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착하고 안착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심판 주 되시는 분이 이 땅에 왔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 천국은 누굴 이야기 합니까?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내 뒤에 심판주가 오셨다는 겁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예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불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백부장은 말하기를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에스겔로 돌아가겠습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하나님께서 인자를 보냈습니다. 이름이 에스겔입니다. 인자된 에스겔에게 새 성전을 보여줬습니다. 다윗 왕이 오게 되면 피를 바르고 여기서 물이 나옵니다.


낙원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는 언약궤도 없습니다. 십계명도 없습니다. 십계명을 압축하면 뭐가 된다 했지요? 사랑이 되지요. 용서가 되면 그것을 우리 맘속에 집어넣으면 되는 겁니다. 이 전체가 바로 인자에게 속합니다. 에스겔 속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새 언약이라 합니다. 인자되시는 분이 새 언약을 이루게 되면 그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단, 인자의 이름으로 됩니다. 새 성전을 이루실 인자가 오기를 기다려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에스겔에서 말하는 그 인자되시는 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새 성전에서 이루어질 모든 것은 예수님 당신이 다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새 성전이 다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를 어떻게 압니까?


에스겔 37장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너무 내용이 많으니 제가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선생님을 인자라고 해 봅시다. 제가 하나님입니다. ‘인자야, 골짜기로 가자.’ 골짜기로 가니까 뼈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 묻습니다. 축축한 뼈입니까, 바짝 마른 뼈입니까? 바짝 마른 뼈지요. 축축한 뼈라면 DNA가 자동적으로 결합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바짝 마른 뼈입니다. 하나님이 ‘인자야, 저들이 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에스겔이 할 말이 없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살 것입니다.’ 그 때 성신이 임합니다. 그런데 뼈들이 마치 자석처럼, 마치 로봇 조립하는 것처럼, 트랜스포머처럼 주섬주섬 모아지더니만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었습니다.


인자를 통해서 성령이 임할 때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인자가 죄를 용서하게 되면 여기서 축복이 주어지게 되고 이 축복은 언약에 약속된 축복이 다 주어지게 됩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창조시나리오입니다.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것도 우리 가슴속에 성신이 오게 되면 새 성전에 약속했던 것이 다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새 성전이 오고 그 다음에 성령이 오기 전에 반드시 누가 와야 됩니까? 인자가 와야 되는데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인자가 오지 않고 성령이 오는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33절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세례요한이 예언한 겁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비둘기 같이 오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자기 혼자 성령 받고 혼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받은 성령대로 누구에게 성령을 나누어주는 주인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비둘기같이 성령이 오게 되면 혼자 ‘신난다. 나는 구원받았다. 끝!’ 하고 혼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 받은 그 분이 남들에게 성령을 나누어주시는 분입니다.


바로 에스겔 37장 같아요. 인자로 오신 분이 성령을 나눠주는 겁니다. 바짝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런 사실을 그 당시 유대사회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하고 이번 시간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예수님께서 어떤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물 길러 온 여인이지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 자리에 제자들이 없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인자에게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 내용 안에 새 성전도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언약이 자기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생각은 달랐습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메시아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자가 믿게 하면 누구나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 제자들은 다 없는 사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다가갔습니다. ‘물 좀 주세요.’ 새로운 의미의 작업이지요. 그 사마리아 여인이 놀랍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이방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여인은 먹는 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이기에 새 성전에서 나오는 그 물을 생각했습니다.


도저히 멈추지 않는 물, 끝없이 나오는 물을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은 인자로 오셨기에 인자 역할을 해야 됩니다. 어쨌든 새 성전을 다 이루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이야기합니다. ‘너에게 물을 달라한 그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말을 해도 너무 어렵습니다.


요한복음 1장 33절이 기억나시지요? 성령세례를 받는 그분이 남에게 성령세례로 성령을 나누어주는 겁니다. 조금 주고 맙니까? 한 컵 주고 마는 겁니까? 목마른데요. 우물에서 푸는 물은 마셔도 목마르지요. 그러면 그 사마리아여인은 어떤 여인이어야 할까요? 예수님께 물 얻어먹었는데 그 물이 희한한 물이라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물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인이어야 되는 겁니다.


그 여인은 새 성전의 벽돌입니다. 사람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이에요. 목마르지 않는 물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이상한 여인입니다. 바라기는 여기 있는 여인들이 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돈으로 목마르지 마시고, 명예로 목마르지 마시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으로 목마름이 아닌 뭔가 다른 목마르지 않는 것이 계속 나오는 것, 우리 자체가 하나의 우물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예수님이 들어 계셔서 1번이 아닌 2번, 달그락달그락 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하지 마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우물로 사용해서 계속해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성령이 여러분에게서 계속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새 언약이고 새 성전입니다. 여인은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비웃습니다. ‘그런 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야곱의 우물은 유명한 우물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셉니까?’라고 물었어요.


자기는 이 우물이 아무리 좋은 우물이라도 여기서 물을 정기적으로 길어야 되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우물을 이미 주기로 작정했기에 목마를 수밖에 없는 물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이야기해 줍니다. 여인은 인자입니까, 인자 아닙니까? 이번 이틀 동안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여인은 인자입니까, 인자 아닙니까? 답변해 보세요. 여인은 인자가 아닙니다. 여인은 인자에게 혜택을 받는 사람이지 인자가 아니에요. 인자가 아니기에 목마를 수밖에 없지요. 그 여자의 과거를 추적합니다. ‘인자는 목마르지 않는 것이 계속 나오는데 당신은 인자가 아니기에 기껏 남자가 다섯 명’ 밖에 안돼요. 지금 사귀는 남자는 여섯 번째입니다.


저는 남자가 되어서 아직도 여자에 대해서 모르겠어요.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알겠는데 여자가 남자를 그리워하는 그 심정을 아무리 헤아려도 이해가 안돼요. 남자가 뭐 좋다고 그리워합니까? 수염이 이렇게 나서 껄끄러운데, 목소리도 앵무새 목소리가 아니라 거칠기 그지없는데. 같은 남자끼리는 전혀 매력을 못 느껴요.


그런데 내가 봐도 매력 없는 남자를 왜 여자들이 좋아할까요? 장 동건, 배 용준, 현빈, 원빈, 동방신기, 중국여자들이 그 사람들을 왜 좋아합니까?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렴풋이나마 공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를 원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가 열 명이라도 자기가 결핍으로 여기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반면에 남자는 열 여자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이에요. (남자를 너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느냐고!!) 성경을 연구하면 그걸 같이 공부해야 합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는 다섯 남자를 거느린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다섯 여자를 거느릴 수가 있습니다. 베이징에 하나, 칭다오에 하나, 베트남에 하나, 로스엔젤래스에 하나, 베이징에 하나, 천명이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바꿔치기 합니다. 다른 남자, 또 다른 남자로 계속 바꿔치기 하지요. 내 모자람을 채워줄 수 있는 넘치는 사랑을 위하여.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지적했습니다. ‘당신은 다섯 남자를 거쳤고 지금도 여섯 번째 사귀는 남자가 있다.’ 그 때 여자가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선지자지요?’라고 했습니다.


메시아라는 뜻이 아니고 선지자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자기 아는 이야기를 합니다. ‘나같이 목마른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선지자가 아니고 메시아’라는 거지요. 그 메시아를 만나는 장소가 어떤 사람은 사마리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마리아일까요, 예루살렘일까요? 예루살렘이라면 그것은 P3, 다윗언약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도 P3입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P3, ‘예루살렘도 아니고 사마리아도 아니고 신령과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오겠다.’고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이 와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때가 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그 여인은 진짜 물을 마셨습니다. ‘당신은 메시야 맞지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때는 메시아가 먼저 와야 된다, 인자가 먼저 와야 성령이 온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메시아가 누구라고 합니까? ‘바로 나다.’ 요한복음 4장에 이 만남 이야기를 왜 기록했을까요? 새 성전을 약속했던 그 인자가 인자라는 호칭을 쓰시면서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이제 사람의 허락도 없이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십니다. 그 물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 안에 늘 넘쳐나는 물입니다. 그 물이 뭘까요? 요한복음 7장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실로암 못에서 물을 가져다가 물 붓는 행사를 했다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그걸 보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저것이 새 성전의 완성이 아니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끊임없이 성령의 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이 몸은 어떻습니까? P6, 바로 예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입니다. 끝으로 질문하겠습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겠습니까? 답변해 보세요. (헤어졌답니다.) 


헤어지나  안 헤어지나 더 이상 목마름은 없습니다. 계속 또 만나도 괜찮아요. 그 여인은 남자로 인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살아 있음을 보이는 그릇이고 하나의 성전이기 때문에. 남자 여섯 명을 갈아치운 그 여인이 거룩한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계획대로 실시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전에는 돈으로 살고 가족으로 살았지만, 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웬 은혜인지 웬 사랑인지 주님의 주시는 용서로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이근호 (IP:117.♡.132.36) 11-05-17 15:43 
성막 제 13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P2에서 성막을 제가 이렇게 그렸습니다.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고 동쪽으로 문이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보고 있습니까? 바깥에서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소 안에 우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우리가 이 죄에서 의로 바꾸는 장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장치 안에 우리가 들어 있습니까, 안 들어있습니까?

(존재합니다!) 존재하지요. 어디에 존재하느냐, 바로 이 성소에 존재하는 겁니다. 진설상이 있고……, 떡을 진열한다는 뜻이에요. 떡이 몇 개라고 했습니까? 열 두 개지요. 여기에 등대가 있습니다. 등대를 제가 조명시설이라고 했지요. 여기에 하나 더 있어요. 향단인데 향을 피우는 기구입니다. 보통 해석에 의하면 이런 것이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그 해석이 틀렸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이 일곱 촛대란 일곱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열 두 개의 떡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향단을 성도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성소 안에 성도가 들어 있습니까, 안 들어 있습니까? 들어 있지요.

이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 것이 아니지요. 이 안에는 구원받은 성도가 들어 있는 겁니다. 성막 안에 성도가 들어 있다는 사실, 물론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물론 거룩한 성도입니다. 어찌되었든지 사람이 들어 있지요. 그러면 성소 안에는 사람이 하나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맞지요. 문제가 굉장히 간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문제가 복잡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안에 있을까요, 바깥에 있을까요? 1번, 밖이다. 2번, 안이다. 2번이 되려면 1번이 없어야 되고 1번이 되려면 2번이 없어야 됩니다. 왜, 우리는 한 몸이니까. 우리 몸은 하나 맞지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는 것은 두 개입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나를 생각하고 그런 나를 이 밖에 또 봅니다.

밖에 있는 것을 ‘나1’이라고 하고 안에 있는 것을 ‘나2’라고 합시다. 나1로 봤을 때 우리는 이 전체를 소유하고자 합니다. 나2로 봤을 때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 소유된 사람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입니다. 여러분 둘 중에 나1에 속합니까, 나2에 속합니까?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질문입니다. 보통 대부분은 나1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저에게 뭘 주시겠습니까, 라고 시작합니다.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은 저기 있다고 보니까 저쪽에 있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뭘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라고 요구합니다. 기도를 할 테니 뭘 주시겠습니까, 묻습니다. 찬양을 할 테니 저에게 뭘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묻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나1이 아니고 나2라면 ‘주여, 저를 어디에 쓰시겠습니까?’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이미 주어진 것이 나의 것이 아니고 이미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매일같이 쓰인다는 것을 생각해야 될 텐데 마치 물 길어오듯이 저쪽에서 가져다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을 합니다. 흔히 교인들이 처음 교회 왔을 때……, 여러분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사역자니까, 여러분은 지도자니까 여러분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교회 온 교인들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는 겁니다. 여기에 우리의 구미를 당기는 것이 있습니다. ‘전능하심’ 전능하심이 구미에 당깁니다. 전능하다는 말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제가 쉽게 하기 위해서 통역 자 되시는 ○선생님하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선생님이 보시는 대로 아주 총기 있게 생겼습니다. 흔히들 스마트 하다고 하지요.


수학이 80점, 영어는 98점, 경제사회는 99점, 그런데 제가 어떤 경우에 부럽겠습니까? 내 수학점수가 50점, 영어는 30점, 경제는 20점이 될 때 제가 ○선생님을 부러워하겠지요. 제가 수학을 100점, 영어를 100점, 경제를 100점을 받았다면 다른 점수가 부럽겠습니까? 안 부럽지요. 바로 인간은 나1이 되면 자기가 자기를 보기에 욕망이 차지 않아서 너무나 미흡한 거예요.


아침부터 어려운 것을 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 몸은 하나지요. 그런데 몸에서 두 개의 자아가 나옵니다. 나1이 나오고 나2가 나옵니다. 나1은 현재 나에 대해 스스로 부족을 느끼는 나입니다. 영, 성이 안차요. 가정도 마음에 안 들어요. 남편도 마음에 안 들고 자식도 마음에 안 들고 아내도 마음에 안 들고 교회도 마음에 안 들어요.


그렇다면 그 미흡한 것이 채워진 만족스러운 나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게 나2입니다. 그 사이에 간격이 있어요. 그 간격을 무슨 수로 채울 겁니까? 여기에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도입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좋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갖고 있는 능력이 좋습니까? 아무리 능력을 많이 얻는다 할지라도 내가 좋은 겁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좋은 거예요. 제가 이 분을 좋아하면 안 되지만 좋아한다고 치면, 얻을 것이 있다고 치면, 내 몸이 잠시 이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척 합니다. 얻을 것 얻고 후딱 도로 돌아와 버립니다. 누구의 자리예요? 나2의 자리지요. 그러면 나2가 그것으로 다입니까? 나2가 나1로 변하면서 또 거기서 욕심을 냅니다.


나2를 나1로 바꾸면서 그것이 자기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몸에서 나1과 나2가 또 등장합니다. 새롭게 나1과 나2로 갈라질 때 그 동기가 있습니다. 그 동기를 타인, 남이라고 합니다. 어렵지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아무리 봐도 자기의 한 달 수입이 제일 많습니다. 헌금도 많이 합니다. 그런 자기 자신에게 만족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보다 수입이 많은 새로운 교인이 등록했습니다. 갑자기 나에서 발작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상상합니다. ‘나보다 더 부자는 돈은 많지만 기도는 짧게 할 것이다. 기도의 내용이 다양하지 못할 것이다. 찬송가를 많이 알지 못할 것이다. 비록 나는 저 사람보다 돈은 많지 않지만 기도도 오래하고 말도 잘 구사하고 찬양도 잘한다.’라고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부자에게 기도를 시켰더니만 기도를 5분해도 밑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찬양을 시켜봤습니다. 율동을 너무나 잘합니다. 드디어 나 자신이 둘로 갈라집니다. 저 사람을 따라 잡아야 분이 풀리고 만족합니다. 그 능력을 갖기 위해서 누굴 찾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습니다. 날 사랑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까?


결국 자기를 위한 기도를 한 겁니다. 남들 보기에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를 의식하면서 한 겁니다. 어느 날 수입이 올라갔습니다. 기도도 5분에서 50분으로 늘어났습니다. 주위에서 저 사람보다 더 찬양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으샤!’ 이겼습니다. 그럴 때 느끼는 하나님은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할렐루야!


두 달 뒤에 먼저 사람보다 돈이 더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 계속해서 6시간 다 채울까요? 원인을 규명해야지요. 근본적인 잘못된 이 순환구조를 벗어나야 됩니다. 만약 이 잘못된 순환구조를 벗어나지 아니하면 어떤 강사가 강의를 해도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성막 안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고 말았습니다. 성소 바깥에서 성소를 보지 말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성소 안에 들어가면 내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내 몸은 내 목적을 위해서 쓰일 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전체로 하시는 언약적인 일을 위하여 내가 참여 된 겁니다. 저는 이제부터 성막 안에서 보는 나와 성막 바깥에서 보는 나, 둘 다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듣고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이제 나2에 있으니까 나1을 버려도 괜찮지 않겠습니까?’라고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현재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이 육의 몸은 계속해서 죄가 올라오는 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고 난 뒤에는 ‘나’가 바뀌는 것이 아니고 이 몸이 바뀝니다.


전에는 우리가 연약한 흙에 속한 몸이었는데 부활하고 나면 예수님의 몸으로 바뀝니다. 어제 오후 마지막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여자는 사랑을 찾기 위해서 대상을 고르고 있지만 남성은 모든 것을 지배하기 위해서 대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여성은 뭔가 자신의 반쪽이 항상 결핍되어 있는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에요. 혹시 이중에서 자신을 남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제 질문 자체가 이상하지요? 성경은 우리 모든 성도를 여성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신부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남자를 먼저 만들었습니까, 여자를 먼저 만들었습니까,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만들었습니까? 정답은 두 번째입니다.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라는 것은 남자를 전제로 해서 생긴 이름입니다.


남자 없이 여자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그냥 홀로 있어서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미흡함을 채워주는 남성을 만나야 완전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겁니다. 이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부부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교회에 관한 이야기라 했습니다.


오늘 P6,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교회 이야기는 P1, P2, P3, 죽 내려와서 점점 더 계속 구체화 됩니다. 성경에서 부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부부간에 행복하게 잘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세상의 어떤 남성도 우리의 온전함을 채워줄 수 있는 남성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부부생활을 하는 겁니다.


결혼이란 행복을 완제품으로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결혼을 통해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겁니다. 결혼을 해 봐야 알지요. 결혼을 해 보세요. 그리고 결혼에서 벗어나세요. 결혼도 안 해보고 결혼에서 벗어나기는 힘듭니다. 아마 그런 사람도 있기는 한데 그런 사람은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천국을 위해서 고자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남자에게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녀로 혼자 사는 것이 혼자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에서 말하기를……, 잘 들어보세요.


‘아내가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바람둥이 남편한테는 멋진 말 아닙니까?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바람피우라는 이야기가 아니지요. 이 세상 행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없는 자처럼 살아라.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신속히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구절 들어보신 적 있지요?


안 들어봤어도 성경책에 있으니까 여러분이 펼쳐보시면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지도자니까 성경을 보면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안 가르쳐줬다고 누구를 탓하지 마세요. 성경책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평소에 듣고 싶은 이야기만 보지 마시고 성경전체를 다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보면 왜 예수님께서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한 그 이유를 아실 겁니다.


우리는 코리아, 차이나, 이런 식으로 고정되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끊임없이 움직였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다.’ 그럼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어두운 세상이요, 마태복음 끝에 가면 불로서 심판받을 세상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우리는 객이고 나그네고 여행객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향이 있어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고향이 하늘에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2:13-16)


여러분, 탕자에게 아버지집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탕자의 절망은 자기 자신이 망가지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집이 없었다면 정말 절망했을 겁니다. 탕자가 아무리 자기가 스스로 망가져도 항상 아버지집이 있다는 그것이 소망이었습니다. 이걸 ‘돌아갈 본향’이라 했습니다. 본향, 본래의 고향, 새는 자기의 보금자리를 찾아가지요.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은 그 고향을 찾아가야 됩니다. 창세전에 구원받지 못하게 된 사람은 그들의 고향에 돌아가야 됩니다. 이 땅에서 사업하면서 서로 악수 먹고 친하게 맺어졌지만 그것으로 끝이고 각자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 사이에 서로 소통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것을 간격이라고 합니다. 간극이라고도 하지요.


그 간극, 그 끊어진 사이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천국과 지옥 양쪽 장면 다 나오기 때문에 저도 지금 이 강의에서 나Ⅰ과 나Ⅱ, 둘 다를 강의하고자 합니다. 나Ⅰ에 있는 사람이 나Ⅱ가 될 수 없고 나Ⅱ에 있는 사람이 나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양쪽 다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가 나쁜 짓 했을까요? 거지가 착한 일을 했을까요? 거지가 착한 일을 한들 얼마나 했겠습니까? 본래 고향이 그래요. 이번 중국의 춘절에 엄청난 인구가 이동했습니다. 2월에 서로 만났지요. 3월에 어디가 있습니까? 각자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요.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의 고향이 있습니다.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과 창세전부터 미움 받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각각 고향이 다릅니다.


그 구분시키는 기준으로 오신 분을 어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얼마나 기억하는지 여러분의 답변을 들어보겠습니다. 그 기준이 뭐라고 했던 가요? ‘인자’라고 했지요. ‘인자를 시인하면 저를 시인할 것이고 인자를 부인하면 저를 부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지시를 내리는 것이 기준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그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착하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기뻐하시면 구원되는 겁니다. 여기 컵이 두 개가 있습니다. 모습이 비슷합니다. 제가 인자라고 칩시다. 인자의 기능은 지옥과 천국을 가르는 기능이라고 어제 마지막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이 두 컵이 나한테 잘 보이려고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둘 다 예쁜 척을 하고 겸손한 척을 하고 있습니다.


한 쪽이 더 착한 것이 아니에요. 둘 다 같은 인간이라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쪽을 그냥 선택해버렸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만한 권리가 있음을 선택받은 사람은 차후에 알게 됩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컵은 말합니다. ‘제가 착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맘대로 선택해서 저를 구원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선택받지 못한 컵은 이렇게 반발합니다. ‘내 구원을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도록 나에게 선택권을 달라.’라고 합니다. ‘예수 당신이 뭔데 나의 구원을 왜 당신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느냐.’고 따집니다. 이쪽의 구원받은 컵이 나Ⅱ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컵은 나Ⅰ입니다. 이 사람 나Ⅱ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예수님의 결정권을 그대로 감사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이 항상 타인입니다. 나1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장래에 내가 어떻게 될 것은 내가 결정한단 말이야. 다만 미흡한 것에 대해서만 예수 당신이 나에게 채워주면 그만이야.’라고 우깁니다. 그래서 신학도 나Ⅱ의 신학이 있는 반면 나Ⅰ의 신학이 있습니다. 나Ⅱ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자기 몸도 예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는 일은 무조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보는 겁니다.


나1은 뭘 해도 짜증나요. 하나님이 하는 일이 뭐든지 맘에 안 들어요. ‘당신이 살아 있다면 무조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달란 말이야.’ 라고 시위를 하고 대듭니다. 이 사람은 아무리 은혜를 줘도 나Ⅰ, 자기 안에서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나Ⅱ도 못 벗어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못 벗어나는 나를 주께서 일방적으로 건졌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내 힘으로는 못 벗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오늘 통역하는 분이 애먹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제를 한번 내고 진도를 더 나가보지요. 성막을 크게 그리겠습니다. 지성소가 있고 성소가 있고 여기에 제단이 있는데, 성막 안에 사람이 들어간다고 했지요. 열두 개의 떡은 열두 지파를 이야기하고 등대는 일곱 교회라 했지요. 여러분은 그것을 다 아시지요? 사람이 성소에 들어가고 지성소에는 못 들어가고 제단은 죽음의 제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걸 제가 지우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에 들어간다면 여러분 생각에는 성소가 어떻게 짜였으면 좋겠습니까? 여러분들이 한 번 만들어 보세요. 몇 해 전에 중국에서 유인유주선이 발사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과학자라면 사람을 어디에 싣겠습니까? 1번, 꼭대기에. 2번, 중간에. 3번, 연료 있는 제일 아래 부분에.


여러분 같으면 사람을 1번, 2번, 3번 중에서 어디에 싣겠습니까? 어디에요? (2번에 싣는답니다.) 실제로는 1번에 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우주선이 중요합니까, 사람이 중요합니까? 사람을 위해서 우주선이 있는 거지요. 이제 성소를 만들어 봅시다. 지성소, 성소, 제단이 있다. 여러분이 성소를 일체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사람을 어디에 집어넣겠습니까?


1번, 2번, 3번, 어디입니까? 우주선은 1번인데 제일 중요한 1번에 넣을 겁니다. 왜냐, 2번에 있어버리면 1번을 탐내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셨겠지요. 여러분, 2등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앞에 미흡함이 남아 있으면 사람은 만족함이 없어요. 여러분, 재벌 2세가 되고 싶어요, 재벌이 되고 싶어요?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세요.


사람은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이것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저나 여러분이나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악마가 아담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따먹으면 뭐가 된다? 신이 되지요. 너만 신이 아니고 나도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겁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간음죄가 나쁜 죄가 아니고 살인죄가 나쁜 죄가 아니고 비록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평소에 화산처럼 들끓는 욕망, 악마가 심어준 그 욕망, 그 욕망의 실체를 알았습니다.


내가 바로 최고가 되겠다는 거예요.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옛날에 서양에서 귀족들만 1등을 했습니다. 1789년에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서민들도 귀족이 될 수 있다고 일으킨 혁명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전 세계에 퍼져나간 것이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겁니다. 코리아, 차이나, 전 세계의 모든 나라가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슬람권까지 다 그러합니다.


그때부터 무한경쟁에 들어가는 겁니다. 너도 신이고 나도 신인데 너보다 좀 더 센 신, 너보다 더 큰 축복을 받는 신이 되고 싶은 겁니다. 그게 또 교회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1번 자리에 가고 싶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을 2번 자리에 안치를 했습니다. 2번 자리는 엎드리는 자리에요. 무엇에게 굴복하느냐, 1번에 굴복하는 거예요.


‘지성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저희가 굴복합니다.’라는 뜻이에요. ‘1번에서 일어나는 일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겠습니다.’라는 뜻의 굴복입니다. 비록 전에는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내가 신이 되고자 했는데 바로 내 자신이 나에게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계명의 제 1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우겼는데 그런 나를 주께서는 일방적으로 구원하셔서 이제는 이런 용서를 해 주신 분이 나의 주님이며 그분을 섬기고자 하는 겁니다. 성경 한 구절 찾아보고 이번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11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모든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스스로 다 1번 자리에 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1번 자리 때문에 핍박받고 고난 받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주께서 부활하심으로서 1번 자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차지하도록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2번 자리로 내려와서 1번 자리에 계신 예수 이름을 높일 때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천국을 자기나라라 하지 않고 이름을 아들의 나라로 바꿨습니다. 골로새서 1장의 이야기입니다(골 1:13). 그래서 이 아들의 주되심과 그 주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면 아들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주여, 저는 죄인이었는데 이 죄인을 주께서 용서해주셨습니다.’ 하는 사람만 거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2번은 1번에게 예속된 자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만 예속된 것이 아니고 천사들도 예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P4, 새 성전에서의 모든 천사들은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를 가든지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천사들은 하늘나라 선배지요. 2번에 속한 우리는 1번이 시키는 대로 어디든지 가야 됩니다. 마치 천사처럼.


천국 가면 결혼도 없습니다. 이미 신랑 되시는 예수님으로 만족하기에 다른 남자한테 눈 돌아가지 않습니다. 십분 쉬겠습니다.
 이근호 (IP:117.♡.132.36) 11-05-24 15:38 
성막 제 14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이어서 계속 하겠습니다. 한글로 간격이라는 뜻은 벌이진 것, ‘사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벌어졌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으려고 할 거예요. 중국무술영화에 보면 절벽들이 많이 나와요. 특히 저나 여러분의 꿈속에 절벽이 나오지요. 절벽이 나오면 아~! 하고 떨어지지요. 그 꿈을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오만가지 이야기를 하 합니다. 꿈에서 죽음의 경험을 하는 것은 평소에 죽음을 의도적으로 메우는 작업이 꿈속에서 계속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의 낮 동안에 죽음의 위협을 메우는 일들을 해 오신 거예요. 그것을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는 ‘죽기를 무서워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브리서 2:14, 15)

베드로의 이름이 반석이지요? 그 반석의 의미가 뭔지 아시겠습니까? 돌이라는 뜻이겠지요. 그 돌이 어떤 돌인가, 시편에 나오는데요, 그 돌이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돌입니다. 바탕입니다. 반석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요. 그만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들입니다. 어른들한테는 총이나 칼을 든 강도가 위협이 되겠지요?


어린 아이에게는 무엇이 죽음의 위협인줄 아시겠습니까? 엄마 없음입니다. 엄마 없음, 그럴 때 애가 울잖아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만 것 다 이야기합니다.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자기 몸이 자기가 아니라 엄마의 몸이 자기가 되는 겁니다. 엄마가 시장에 가버리면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어른이 되면 강도가 나를 죽이면 내가 없어지는 거니다.


둘 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5절의 말씀처럼.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게 제일 기다려지는 것은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를 안기다리는 사람은 구름타고 오든지 말든지 상관없어요. 그렇지요? 진짜 그렇다면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이번 토요일에 여러분이 딸이 결혼 합니다. 금요일에 주께서 재림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기뻐하시겠습니까?


제가 어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에 인자가 도적같이 올 것이다.’ 그러니 딸의 결혼식에 가더라도 딸의 결혼식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이상 말하면 지도자라도 시험 들까 싶어요. 지금 제가 간격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이 여기에 개입합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맞지요?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언약을 몰고 왔지요? 이것을 통해서 성경전체가 언약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언약이 있는 곳은 천국이고 언약이 없는 곳은 지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옥도 언약대로 지옥이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저 지옥에 가 있는 부자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셋째 날 두 번째 시간에 제일 중요한 것을 먼저 언급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쪽으로 못 건너가가고 너는 거기서 우리에게 오지를 못한다.’ 그러면 그 간격은 우리 인간들이 파놓은 겁니까, 예수님이 결정한 겁니까? 예수님이 결정한 거지요. 그것도 언약대로. 인자 자체가 기준이 되어서.


보세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 현실입니까? 그때 부자가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두 번째 시간에 할 이야기는 부자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부자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왕 지옥에 간 것, 이제 내 인생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땅에 남아 있는 다섯 동생이 있습니다. 다섯 동생에게 죽은 나사로를 다시 되살려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허락했을까요, 허락하지 않았을까요? 허락하지 않았지요? 그 이유가 뭘까요?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인데. 그 이유가 그 뒤에 나와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 그러면 땅위에 살아 있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뭘 보고 믿으라는 말입니까?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들이 있으니 그 글을 믿으면 죽어도 천국이 온다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간증이 필요 있다는 말입니까,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꿈에 천사가 나타난 것을 믿지 말라는 겁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요한복음 5장 39절에 보면 누구를 증거 하게 되어 있습니까? 모든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묻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어떻게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까? 비록 거지지만 그는 모세와 선지자를 믿었고 그 모세와 선지자의 이야기가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을 믿었던 겁니다. 그러면 거지가 성경을 믿을 그 시간에 부자는 뭐하고 있었습니까? 부자는 성경 대신 더 믿을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였을까요? 우리가 되게 좋아하는 건데요. 부자 되는 거지요. 이제부터 더 어렵게 하겠습니다. 남이 부자 된 겁니까? 아니면 자기가 부자 된 거예요? 자기죠. 결국 내가 나의 구원을 막는 겁니다. 주님은 날 구원하고자 하여도 나는 나에게 그냥 매여 있기를 원하는 겁니다. 주님은 나를 빼앗아가도 나는 정들었던 나를 안 빼앗기려고 합니다.


그러니 어떤 인간치고 우상숭배자 아닌 자가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 사실을 아시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살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의 말씀이죠. 못 들으셨다면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


금요철야기도하실 때 기도제목을 제가 걸어보겠습니다. 많이 걸지 않고 두 개를 걸겠습니다. 아차, 하나 더 걸겠습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라. 좁은 길로 가자. 부자가 천국가기 힘들다.’ 간절히 기도할 마음이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잘 모르겠지요. 자, 바꾸겠습니다. ‘나를 사랑해주세요. 편하게 살게 해주세요. 부자 되게 해주세요.’ 간절하게 기도하고픈 마음이 마구 샘솟지요.


누구나 그렇습니다. 부자가 지옥 갔습니다. 이번 수련회의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도 부자가 지옥 간 이야기는 절대로 거짓말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부자가 돈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부자는 부자 된 나를 믿은 거예요. ‘역시 나다워. 그래! 그게 내가 원했던 바야. 너는 가난해도 나는 부자 돼야 마땅해. 나는 최고가 돼야 마땅한 존재야. 왜, 나는 신이기 때문에. 나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지옥 갑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이맘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안 바뀝니다. 교회 다녀도 안 바뀝니다. 그러나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동생 다섯 명은 안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기회가 있습니다. 죽어서 천국과 지옥으로 영원히 갈라놓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이미 그 사이를 갈라놓는 기준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죽어서 지옥에 있으면 저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을 한탄하기 전에……, 한국 코미디 멘트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있을 때 잘해라.’ 살아 있을 때, 바로 옆에 있을 때 천국이 바로 곁에 있을 때 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기 있고 성도가 여기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여러분의 부모일수도 있고 동생일수도 있고 여러분의 자식일수도 있어요.


심지어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부부일수도 있습니다. 이 간격이 2.25밀리미터입니다. 가까워요. 그런데 이것이 점점 더 갈라집니다. 드디어 생명이 끝나는 날입니다. 이 작은 간격이 나중에 천국과 지옥으로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거대한 사이로 벌어집니다. 지금은 크게 벌어지지 않고 작은 간격입니다. P1에서 이것을 선으로 봤습니다. 애굽사람들은 몰랐습니다.


히브리인들과 같은 인간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홍해가 갈라졌을 때 애굽 군사들은 말을 타고 저 앞서가는 히브리 사람들을 따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옵니까? ‘나도 인간이고 너희도 인간이다. 너희가 홍해 바다를 건너간다면 우리도 갈 수 있다.’ 그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왜, 히브리인들은 물고기가 아니니까, 오징어가 아니니까, 고등어가 아니니까.


히브리인들이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애굽 군사들이 말을 타고 급속히 따라잡습니다. 거의 다 따라왔습니다. 히브리인의 마지막 사람이 저쪽의 육지로 올라가는 순간, 바지 자크 잠기듯이 벌어진 간격이 다시 합해졌습니다. 그래서 애굽 군사들은 물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억울해 할까요, 안할까요? 그들은 억울해 하면 안 됩니다. ‘왜 사람이 물에 들어와? 지들이 물고기야?’


그러면 애굽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저 히브리인들은 왜 바다를 통과했습니까?’라고 묻겠지요. ‘저들은 천국 가는 사람이거든. 너희는 죽음을 이기지 못하지만 저들은 죽음을 이기거든.’ 그러면 애굽 사람들이 묻습니다. ‘저들은 뭐가 있기에 죽음을 이겼습니까?’ 피 입니다. 피! 어린양의 피죠. 찬송가에 보면 나옵니다. ‘어린양의 피를 보고 우리를 넘어간다.’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모세의 노래를 부르면서 종려나무 들고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를 믿고 천국에 가고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는 영원히 갈라졌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동생 다섯 명이 있습니다. 그들이 영원히 지옥가지 않으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의 뜻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구원받은 겁니다. 그 일하심이 층층이 쌓여서 십자가에서 드디어 다 완성했습니다.


그게 ‘다 이루었다.’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자기의 목숨을 바칠 때 주님께서는 거절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은 네 목숨을 바쳐도 못가는 곳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목숨을 주님께 바치지 마세요. 안 바쳐도 됩니다. 안 바쳐도 구원받아요. 예수님의 피로! 주께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주섬주섬 내놓습니다. 이것도 헌금이고 이것도 내 목숨이고……, 주섬주섬 내놓습니다.


주님께서 ‘거둬 넣어라.’ 몽땅 그 위에 피를 발라 버립니다. 합격! 주님께서 우리에게 피를 발라놓고 말씀합니다. ‘너는 2번 자리에 들어와서 거룩한 등대야. 열두 개의 거룩한 떡이야. 너의 기도는 향기로운 기도야. 너를 볼 때마다 예수님인 내가 기뻐. 왜, 내 작품이니까.’ 여러분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입니다. 이분은 지금 모나리자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나리자입니다. 실제 모델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모나리자가 아닙니다. 왜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림을 안 그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가 있으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성령이 너희 속에 거하면 너희는 이제 예수님의 것이라.’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할 자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성막으로 들어가 봅시다. 아직 성막 안 끝났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데 할 수 없습니다. P1에서 P2, P3, P4, P5, P6로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대되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그 차이를 알고 계세요. 성막을 다시 그립니다. 지성소, 성소, 이 두 번째 방이 어떤 상태냐 하면 소유가 아니라 대기입니다.


여기 전부 다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는 양상입니다. 방향은 주께서 다 이루었다 한 그 지성소를 향합니다. ‘주여, 하감하시옵소서.’ 하감이 어려운 말이면, ‘주여, 우리는 대기하고 있습니다. 명령만 내리소서.’ 그런데 뒤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비켜라! 길을 비켜라.’ 뭐가 통과합니까? 피가 통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평생 동안 보고 있는 겁니다.


제가 묻습니다. 이 피는 성도의 피 입니까, 아니면 성도 말고 다른 피 입니까? 이것은 양인데 그냥 양이 아니고 흠 없는 양입니다. 그런데 엎드려 있는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여러분, 죄가 뭡니까? 나쁜 짓을 한 것이 죄지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은 것이 죄예요. 안 믿는 사람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성도는 나Ⅰ에서 나Ⅱ로 들어왔습니다. 들어와 보니 이 전체가 성경의 세계입니다. 성경이 만들어낸 리얼리티입니다.


여기에 성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주변에 창세기 2장도 있고 3장도 있습니다. 나Ⅰ이 있을 때 여기는 차이나였고 코리아였습니다. 세상이란 현실 속에서 죄라는 것은 뭡니까? 누가 가르쳐 주지요? 어릴 때는 부모가 가르쳐줍니다. ‘오줌 싸면 안 돼, 음식을 가려먹으면 안 돼.’ 저는 중국에 와서 음식을 굉장히 가려먹지요. 복음을 위해서……, 물론 핑계입니다.


어릴 때는 엄마가 이야기합니다. 말 안 들으면 회초리를 듭니다. 그래서 아이는 배웁니다.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웁니다. 이제 크면 학교에 갑니다. 학교 선생님에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배웁니다. 그때부터 아이는 속에 갈등을 일으킵니다. 내부에 분열이 일어납니다. 엄마에게 배웠던 선과 악, 학교 선생님에게 배운 선과 악, 이것이 서로 다릅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내일은 삼촌의 결혼식이니 결혼식에 참석해야 되니까 너는 학교에 가지 마.’라고 엄마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날 학교 선생님이 ‘내일은 학교에 큰 행사가 있으니 학교 빠지면 안 된다. 꼭 참석하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참석 안하면 다음날 매 맞을 각오를 하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둘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어떻게 결정을 내릴까요?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여러분 보기에는 아이가 진리, 올바른 쪽으로 선택할거라고 보십니까? 예, 혹은 아니오, 라고 답변해보세요. 아이는 자기의 이익을 생각합니다. 내가 신이기에 어릴 적에 부모에게 교육은 받지만 꼭꼭 감추어둔 자기의 선악과 따먹은 악마의 본색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쪽이 이익인가를 생각합니다.


엄마에게 학교 선생님이 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참석 안하면 매 맞는다고 전합니다. 엄마가 제안 합니다. ‘참석하면 시계 사줄게.’ 애는 생각합니다. 매 한 번 맞더라도 시계 갖는 것이 이익이죠. 결혼식에 참석합니다. 엄마를 위해서,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이것은 바로 내가 신이기에 그러합니다.


그 아이가 더 자라서 고등학생이 됩니다. 엄마로부터 배운 선악에서 멀어지고 학교 선생님에게 배운 것도 멀어지고 자기의 고민거리를 친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선생님 없이 살아도 친구 없이는 못삽니다. 왜, 생각이 서로 맞으니까. 선생님은 40대고 자기는 10대고, 엄마 아빠는 50대고 자기는 10대고 내 친구도 10대고, 어느 것이 자기 욕망에 이익입니까? 친구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엄마 말을 안 듣고 이유 없는 반항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애가 사회에 나가서 취직을 했습니다. 고향에서 전화가 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제삿날이다. 참석해라.’ 전화를 받고 이렇게 답합니다. ‘엄마, 회사에 작업물량이 밀려서 바빠서 못가.’ 하고 끊어버립니다. 듣는 엄마 섭섭합니다. 하지만 엄마가 내 생활비를 대주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가 내 생활비를 대줍니다. 내가 누구 말을 들어야 됩니까? 무엇이 선과 악입니까? 회가가 옳다 하면 선이고 회사가 나쁘다 하면 악이 되는 겁니다. 이웃 회사의 정보를 캐내라고 하면 캐내야 돼요. 그런 남자가 드디어 여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여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때부터 선악이 바뀝니다.


‘자기 뭐해?’라고 전화합니다. ‘지금 잔업하고 있어.’라고 합니다. ‘핑계대고 빨리 빠져.’라고 하면 ‘알았어.’라고 답합니다. 그 때부터 결혼하고 난 뒤에 남자는 드디어 여자 밑으로 들어갑니다. ‘내 이야기인가?’ 보세요,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자기이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성경에서는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이익을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너는 그것으로 인하여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 지도자, 사역자, 목사님들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알아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마시고 그들이 몸부림치면서 두려워 떠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것을 이야기해줘야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언제 자기 생명이 끝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는 겁니다. 죽어도 오늘밤에 어디 갑니까? 낙원에 갑니다.


천국이 좋은 점은 한 번 들어가면 못나온다는 거예요. 지옥에 누가 있는지 그렇게 궁금한데 나갈 수가 없습니다. 간격이 있어서. 다 누구 덕분입니까? 내가 교회 충성한 덕분입니까? 헌금한 덕분입니까? 헌금이 우리의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의 선행이 우리의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나의 어떤 것도 이기지 못합니다. 이런 성경공부로도 이기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가 이깁니다. 그것을 반석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홍수가 나도 반석위에 지은 집, 피 위에 지은 집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잘 아는 두 자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교회입니다. 교회의 특징을 여러분이 감 잡았지요? 예수님의 피 때문에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사는 것,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이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를 살린 겁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했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을 보는 것보다 진실 되게 믿게 하실 겁니다. 두 번째 시간에 할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야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장 19절에서 21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다 읽으셨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왜 예수님이 죽어야 성전을 짓는 겁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왜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성전이 안 되는 겁니까? 이것을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잖아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잖아요. 그러면 살아 계신 동안에 성전을 만들 수도 있잖아요. 지금 살아 있는 몸은 성전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하나님의 몸 맞아요. 아무리 하나님이지만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그 몸이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죽는 하나님’이지요. 우리는 죽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겁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을 정도로 허약한 분은 결코 하나님일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니엘의 예언에 의하면 인자되시는 분은 죽는 분이 아니고 하늘에서 구름타고 당당하게 임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끝부분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너는 인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구름타고 안 나타났느냐고 따집니다. 유대인들이 말씀에 정통하고 몰두한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그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대로의 예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무 부실하고 너무 허약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험해 봤습니다.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예수님을 죽여 봤습니다. 죽었습니다. 밑에 있는 로마 군병들도 잔뜩 기대했습니다. 과연 살아나는지를. 십자가에 달릴 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예수님 죽기 전에 빌라도가 시험했습니다.


‘네가 메시아인데 하나님은 왜 너를 돕지 않는가.’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 말씀하기를 ‘내 나라는 이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단서를 붙였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하늘의 천군이 동원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의 간격을 두기 위함이다.’ 제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이야기하면서 계속 간격 이야기를 했지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죽고 나면 천국 갈사람 천국가고 지옥 갈사람 지옥 갑니다. 그 간격을 만들어내실 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만이 그 간격을 만들어냅니다. 십대에게 물어보세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그들은 누구 말 듣습니까? 같은 친구 말 듣지요.


초등학교 애한테 물어보세요. 선과 악의 간격은 누가 시키는 대로 잡습니까? 학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지요. 그러면 십대 애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초등학생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우리는 십대도 아니고 초등학생도 아니고 어른도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이 만드신 그 간격을 믿고자 합니다. 걱정되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양과 염소를 가려내기 위해서 왔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모든 계층에 속한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인간 사이에 간격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간격을 하나님이 완전히 무시하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은 되고 이방인은 안 된다.’는 간격이 있었습니다. 종은 안 되고 주인은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간격을 다 없애버립니다. 어떤 계층이든 하나님은 모든 계층의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세운 기준과 협상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여겼던 유대인들에게, 신이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믿는 그들에게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진짜 성도는 안 죽어야 될 하나님이 왜 죽으시는가를 생각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바로 우리 죄 때문에. 우리 죄와 주님의 죽음을 관련시키는 사람이 성소 안에 들어 있는 나 Ⅱ입니다. 십분 쉽시다.
 이근호 (IP:117.♡.132.36) 11-06-05 23:19 
성막 제 15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시작합시다. 지난 시간 끝부분에서 제가 죽는 하나님을 이야기했지요. 왜 죽어야 성전이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왜 죽지 아니하면 성전이 될 수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벌써 몇몇 분이 정답을 이야기했어요. 이렇게 답변했어요. ‘죽어야 피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제 공부를 잘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P1에서 문설주에 피를 발라야 더러움에서 깨끗함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아까 홍해 건너간 이야기했지요. 그처럼 뒤따라오는 애굽사람을 성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살아난 사람만 성전이라고 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전에 봤던 출애굽기 15장을 보겠습니다.

17절에 보면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림이 영원 무궁하시도다.”라고 되어 있지요.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우리는 나Ⅱ가 아니고 자꾸 나Ⅰ에서 생각하는 버릇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Ⅰ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 여기 있고 여기에 성전이 세워지면 내가 거기에 들어가겠다.’라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들어가면 죄가 의로 바뀌지 않습니다. 죄가 거룩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방금 출애굽기 15장을 읽었는데 이것은 방금 홍해를 건너온 히브리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애굽사람은 해당이 안 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애굽사람도 사람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맞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계층, 모든 민족의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하여튼 모든 민족이지만 모든 사람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의 피로 건너온 사람만 성전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 15장 성소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성전이 세워지고 우리가 들어가는 방식은 아니 됩니다. 나Ⅰ이 선택하는 선택권은 무시하고 이미 만들어진 성전이 와서 우리를 성전의 일부로 덮쳐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Ⅱ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 나Ⅰ이 자기가 알아서 성전에 가고자 하는 이유가 뭘까요?


영원히 살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영원히 산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이 영원히 살고자 하는 거지요. 그만큼 자기가 죽는 것이 무섭다는 말입니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살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애굽인이든 히브리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죽기 싫어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은 다 천국 간다면 지옥 갈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지옥 간 부자도 살고 싶어서 물 한 방울 찍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은 주님이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과 다릅니다. 주님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살고 싶다고 해서 그 죄가 거룩으로 자동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천국 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죄가 없는 곳이다. 완전히 거룩만 있는 곳이다.’


살고 싶다고 해서 거룩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능력은 우리 선에서 떠났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이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나 소개해서 예수님이 어떤 차원에서 기적을 일으켰는가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니 편하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순번표를 보니 차례가 한참 남았어요. 성질 급한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내려왔습니다. 그 말씀 기억나지요? 지붕을 왜 뚫었을까요? 중풍 병 낫기 위해서지요. 중풍 병으로 죽기 싫어서 그렇지요. 병 나아서 더 살고 싶어서 뚫었겠지요. 과연 예수님께서 거기에 대해 동의했겠습니까? 동의하지 않고 이용했습니다. 순서를 바꾸어서 중풍병자를 앞 순서로 당겼습니다.


제가 예수님이라고 하고 1번을 이야기했을지 2번을 이야기했을지 여러분이 알아 맞춰보세요. ‘네 병이 나았다.’ 1번입니다. 2번은 ‘네 죄 사함을 얻었다.’ 몇 번입니까? 2번이죠. 중풍병자는 자기 죄 용서받으려고 왔겠습니까? 병 나으러 왔겠습니까? 병 나으러 왔지요. 교회 오는 사람들이 병 낫기 위해서, 부자 되기 위해서, 가정화평 위해서 오는 것을 저는 탓하지 않습니다.


제가 옛날 시골에서 12년 가까이 목회를 했습니다. 돼지를 키우는 시골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돼지를 키우는데 돼지 머리에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돼지가 새끼를 뱄을 때입니다. 제가 기도를 해드렸습니다. 어떤 분은 트럭을 새로 샀습니다. 저를 초청해서 트럭 머리위에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기도해 드렸습니다.


뭐라고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주여 이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얽매이는 것에서부터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그런 식으로는 죽음을 이길 수 없기에. 죄가 있는 것에는 모든 저주가 오지 말래도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머리에 꿀을 뒤집어쓰고 벌 있는 곳에 달려가 보세요.


‘벌아, 오지 마라. 제발 부탁이다. 오지 마라.’고 부탁해 보세요. 벌은 내 말을 듣지 않고 꿀을 보고 옵니다. 아무리 저주가 오지 말라고 부적을 붙여도 죄가 있는 곳에는 저주가 오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피로 그 죄가 의로움이 된다면 축복이 오지 말래도 축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벌이 꿀 따듯이, 이 세상 어디를 가듯이 축복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시편 1편에 나옵니다. ‘율법을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냇가에 있는 나무처럼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번성해도 결국 망해서 의인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 책을 하나 냈습니다. 책 제목이 「시편속의 그리스도」입니다. 이 내용을 거기에 듬뿍 실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사신다면 죽음이 오더라도 그것이 천국이라고, 죽어도 산다고, 죽어도 천국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준을 만드실 때에 죽으심으로서 우리 죄를 의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 성전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우리와 같이 죽었던 예수님 때문에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 성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두 번 다시 무너질 수 없고 영원히 존속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어서야 비로소 사흘 만에 성전이 세워지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무척 쉽습니다. 지금부터 어려운 겁니다. 들어가기 전에 먼저 다짐을 하겠습니다. 이것이 참 쉽지요? 피로 죄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참 쉽지요? 그렇다면 그 성전 안에 누가 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계시겠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 성전에 예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이 계신다면서요? 그것을 신약에서는 머릿돌이라고 합니다. 들었던 기억이 나지요? 에베소서 2장을 봅시다. 20절과 21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모퉁이 돌로 계신다는 말이 뭐가 어렵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될지 말지를 주저하고 있는데 해야 되겠습니다. ‘모퉁이 돌이 뭐가 어렵습니까? 주저하지 마세요.’라고 하신다면 제가 용기를 얻겠습니다. 모퉁이 돌이 버림받은 돌입니다. 버림받은 돌, 이게 어려워요.


여러분, 버림받은 돌이 첫째, 누구로부터 버림받았는가? 둘째, 왜 버림받았는가? 이 두 가지를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예수님이 모퉁이돌이 되어 있는 성전에 합류된 사람입니다. 누구로부터 버림받았는지, 왜 버림받았는지를 알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아니고 본인이 모퉁이 돌이 되어 있는 거룩하지도 않은 엉뚱한 건물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 어려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아까 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다지고 들어가겠습니다. 나Ⅰ이 생각하는 성전이라는 것은 내가 알아서 성전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나Ⅰ이라고 했지요? 기억하십니까? 그런데 나Ⅱ는 성전이 와서 나를 덮친다고 했지요. 이미 만들어진 성전이 덮치지요? 그것은 이미 만들어진 머릿돌이 바로 우리 머리를 때리는 겁니다.


제가 지금 로마서 9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머리를 때리게 되면 머릿돌만 버림받은 돌이 아니고 우리도 같이 버림받은 돌임을 알게 됩니다. 제가 아까부터 어렵다고, 어렵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생은 예수님 혼자 하시고 우리는 안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같은 성전이라고 하기가 곤란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았지요? 열 두 사도가운데 순교 안 당한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 순교 당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갔습니다. 제 말이 맞지요? 사도 가운데 누가 벤츠 타고 다녔습니까? 목사는 유지가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닙니다. 교황 같은 존재가 아니고 추기경처럼 힘을 축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가 어렵다고 한 말은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고 은연중에 교회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세상을 탐하는 욕망을 지적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없는 교회라면 마음껏 우리가 세상권력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20절, 21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머릿돌입니다. 머릿돌 빼버리면 무너집니다. 그리고 머릿돌이 있으면 그 다음의 돌들도 머릿돌과 동일한 경우에만 그 성전에 참여 됩니다.


이것은 고함지른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조용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머릿돌이 버림받았으면 거기에 들어가는 성전 돌도 똑같은 이유 때문에 똑같은 사람들로 버림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머릿돌만 사랑하게 됩니다. 돈과 권력보다 머릿돌만 사랑합니다. 첫째 시간에 나Ⅰ과 나Ⅱ의 차이점을 이야기했습니다. 나Ⅰ은 성소 바깥에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나Ⅱ는 성소 안에 2번 자리에 들어가 있습니다. 불과 두 시간밖에 안 지났습니다. 벌써 다 잊어버렸습니까? 2번 자리에 있는 나Ⅱ는 1번 자리를 향하여 엎드립니다. ‘명령만 하옵소서. 1번 홀에 계신 분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2번 자리의 나는 신이 아닙니다. 나의 주님은 1번에 계십니다.’ 이게 나Ⅱ의 위치입니다.


저는 3번 홀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1번은 지성소였고 2번은 성소였고 3번은 제단이었습니다. 3번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3번에 들어가는 사람을 숯불갈비라고 합니다. 제단 불에 늘 지집니다. 성도가 맨 날 울고불고 하는 것도 안 좋습니다. 이미 2번에서 피로 깨끗해졌습니다. 아직도 피를 믿지 못하고 맨 날 자기 우는 재미로 살면 안 됩니다.


여러분한테는 그런 분이 없는데 가끔 기도원에 가면 그런 사람 있습니다. 맨 날 우는 사람 있습니다. 한이 맺혀서. 2번에 있는 사람은 이미 깨끗한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깨끗해 졌습니다. 이미 자체가 그리스도 몸이기에 주님의 명령과 지시를 늘 받고 있습니다. ‘죽어도 살겠고’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1번, 2번, 3번이 같은 로켓입니다. 아까 로켓 이야기했지요.


1번이 버림받은 머릿돌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지 않은데 이 세상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하늘나라 안가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하늘나라 가고 싶지요? 그 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해답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에 나옵니다. ‘저들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들을 내 나라에 데려가지 않겠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들에게는 전도라는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자기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 했습니다. ‘당장 죽어서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아내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사도바울이 자식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사도바울이 너무 이기적이라는 느낌이 안 듭니까? ‘나의 소원은 지금 당장 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지만 지금 떠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 이유는 여러분들이 나의 상전이고 나는 여러분을 섬기는 종이기에 그렇습니다.’라고 합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빚진 자일까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자에게 복음에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그 복음을 전해야만 구원받습니까? 이미 구원받았기에 그 일을 한 겁니까?


이미 구원받았기에 그는 새로운 일, 숙제를 받은 겁니다. 숙제 잘한다는 조건하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같은 로켓에 탔기에,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런 지시를 하달 받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도바울처럼 천막장사 합니까? 아니지요. 어떤 사람은 농사지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천막장사 해야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농사지어도 구원받습니까? 농사지어도 상관없지요.


그러면 하나 더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백수입니다. 구원됩니까? 충분히 구원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백수 될 수 있습니까? 주께서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왜, 우리는 2번 자리에 있기에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된 겁니다. 제가 한국에서 설교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남자 된 사람은 여자가 되려고 기도를 왜 안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다고 믿으면서 그 기도는 왜 안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게 되면 만만한 것을 기도해요.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노래가운데서 ‘만만하니? 만만하니?’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날 우습게보니?’라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날 여자로 다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안 합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할 때 자기가 약간만 하며 되는 것을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연예인가운데서 하리수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남자인데 여자가 되었습니다. 기도 응답받았습니까? 아니지요.


머릿돌이 가지고 있는 그 운명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제가 방금 십자가라고만 이야기했지 두 가지를 이야기 안했습니다. 첫 번째는 누가 예수님을 죽게 했는가, 그 누가라는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두 번째는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야 되었는지를 이야기 안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되는 이유는 우리가 머릿돌과 함께 있는 돌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Ⅰ이 아니고 나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당하는 그 수모를 이 어두운 세계에서 같이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Ⅰ과 나Ⅱ가 한꺼번에 나온 성경구절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하지 않다고요? 그러나 저는 억지로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로마서 9장 30절에서 33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으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9:30-33)


이것 때문에 제가 어렵다고 한 겁니다. 이 성경구절을 덮지 마시고 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6절에서 8절, “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저는 교인들에게 일을 시키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설교시간에 성경을 읽으라고 하지 않고 제가 그냥 읽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교회까지 오신 것도 얼마나 고생하신 겁니까? 좀 편하게 해드리려고 제가 읽어버립니다. 베드로전서 2장 6-8절에 보면 그냥 돌이 아니고 ‘버림받은 돌’이어야만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안 들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 오셔서 예수님 십자가 믿으시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여러분, 십자가 믿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교인은 구원받기 위해서 뭐든지 다 시키는 대로 합니다. ‘예, 십자가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모든 것 속에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깨진다는 느낌이 안 듭니다. 그저 고분고분 순종했다는 느낌만 들어요. 그래서 제가 십자가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너무 쉽게 십자가를 이야기하는데 마치 마트에서 미끼 상품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미끼 상품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대형마트에서 이것이 만 원짜리인데 이것을 천원에 팝니다.


그렇게 팔면 손해지만 그보다 더 큰 다른 상품을 팔기 위해서인데 그것을 미끼상품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그냥 믿으시면 됩니다.’라고 넘어가버리지요. ‘믿습니다.’ 하고 한 마디만 하고 그냥 다니고 있습니다. 깨진 경험도 없고 버림받은 느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머릿돌과 다른 돌 사이에 공통점, 연결점이 없습니다.


이제 어렵지만 십자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봅시다. 첫 번째, 누가 십자가를 지게 했는지, 누가? 두 번째, 그들이 왜 예수님을 싫어했는지? 로마서 9장 30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겠습니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하나씩 묻는 대로 답변하시면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은?


이방인은 율법이 없고 유대인은 율법이 있었습니다. 맞지요? 그전에 물어야 될 것을 예수님을 십자가에 유대인이 죽였습니까, 이방인이 죽였습니까? 유대인이 죽였지요. 유대인에게 무엇이 있다 했습니까? 율법이 있지요. 율법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맞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연결된 율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굴 죽였다?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사람이 알고 있는 여호와가 예수님이 알고 있는 여호와를 죽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여호와인데 그것을 몰랐던 거지요. 여러분,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을 인정했지요. 그런데 십자가가 사라지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사라지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 그 유대인 역할을 누가 해야 되겠습니까? 유대인역할을 해야 십자가가 계속 살아 있으니까 그 유대인 역할을 누가 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해야지요, 내가! 바로 내가 해야지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그러면 내가 어떻게 유대인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뒤에 9장 32절에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우리가 육의 몸을 갖고 있지요? 우리 생각은 이 육의 몸을 죽여 버리고 그냥 구원받았으면 좋겠지요.


그런데 이 육의 몸을 가지고 전도해야 되기에 아직도 안 죽고 있다고 이야기했지요. 이 육의 몸이 있어야 십자가 사건이 계속 나옵니다.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이 있어야 됩니다. 그 유대인은 어디에 의지했습니까? 행함을 의지하게 되어 있지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 죄인의 몸에서 뭐가 자꾸 나옵니까?


‘나는 최선을 다 했는데, 영어로는 Best do it, 왜 내가 최선을 다 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안주는 거야? 남보다 더 많은 행위를 했는데 왜 저 사람보다 더 수입이 적은거야? 이렇게 노력했는데 왜 교인이 빨리 불지를 않는 거야?’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했던 일입니다. 유대인의 몸이나 우리 몸이나 똑같은 몸입니다.


다만 유대인은 피가 없고 우리는 피가 있어서 거룩한 몸이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몸을 아직 죽이지 않고 이 몸을 가지고 우리 속에서 십자만이 구원이 됨을 계속 일으킵니다. 왜냐, 머릿돌은 계속 살아 움직여야 되니까. 그 머릿돌은 1번 홀에 있고 우리는 2번 홀에 있으니까.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육적 몸은 안다고 자꾸 해놓고는 또 다시 돌아서면 그 아는 것이 행위로 돌변합니다.


그리고 남을 지적합니다. 남을 정죄합니다. ‘청소는 나만 하고 끝나면 이불 나만 펴고 남은 놀고 남은 봉사 안하는데 나만 봉사하고…….’ 구원받은 즐거움도 다 깨어지고 교회에서 말썽의 소지가 발생됩니다. 처음 온 교인이 아닙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겁니다. 포도원에 아침 9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5시에 온 사람, 마태복음 20장 이야기입니다.


똑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똑같이 기뻐해야 됩니다. 이상합니다. 같은 예수를 받았는데 같이 의로움을 받고 같이 거룩하게 되었는데 받아놓고 짜증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입니다. 받아놓고 좋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중에 온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이것으로 천국을 설명했습니다. ‘유대인 역할을 너희들이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도가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생전 처음 들었을 겁니다. ‘내가 착해야 전도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면 마귀가 이야기합니다. ‘네가 이렇게 못되었는데 어떻게 전도가 되겠는가? 전도를 하지도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네 행동이 완전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완전한 예수님을 증거 하겠느냐.’고 마귀가 방해를 놓습니다.


그러나 행실 나쁜 막달라 마리아가 충분히 전도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는 베드로가 사도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였던 사도바울이 최고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지만 이 죄인중의 괴수를 창세전에 구원했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피의 효과다.’라고. 그 내용으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 버림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떠민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떠민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스데반 죽었을 때 주동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가 예수님의 사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는 내 잘남을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잘 믿는 것을 증거 하지 마시고 나 같은 죄인도 예수님의 피로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증거 하세요.


점심 먹고 하겠습니다.
 이근호 (IP:117.♡.132.36) 11-06-22 16:13 
성막 제 16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십자가 이야기를 할 때, ‘누가 죽였는가, 왜 죽였는가?’ 이 이야기가 나와야 되는 것은 여기서 피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묻습니다. ‘그 피가 어디서 나왔고 어떻게 나왔지요?’라고 물으면 ‘그냥 예수님이 죽었대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손목의 동맥 끊어서 피 짜내신 것은 아니잖아요.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의 동맥을 끊어서 자살을 시도했고 거기서 피가 나왔고 우리는 그 피를 양푼에 담아서 그 피를 내 가슴에 바르면 구원을 받는다. 이런 식입니까? 아니지요. 구약에 어린양의 피를 양푼에 담아서 뿌리니 죄용서가 되었지요.

어린양은 예수님이고 양푼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고, 피를 뿌리는 것도 우리가 스스로 우리에게 뿌리고, 그런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각본이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여기에 어린양이라는 명찰을 달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른손을 면도칼로 그어야 됩니다.

‘각각 아파트마다 대야 하나씩 준비하시고 제가 피를 흘리면서 갈 테니까 1동부터 2동 3동 차례로 제 피를 받아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의 가슴에 바르시는데 혹시 온가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아파트 출입구마다 바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런 식으로 하면 굉장히 쉽지 않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이 부담 없이 다 예수 피를 믿을 거예요. 옛날 유대인들이 양의 피를 바르듯이 우리도 똑같은 식으로 예수님의 피를 분배받아서 용서 받으면 얼마나 구원받기 쉽습니까? 상당히 기계적이고 자동적이고 수월하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예수님이 자살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자살하지 않고 죽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예수님을 죽인 자가 있으면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피가 용서하는 피라는 것은 스스로 자살하는 피 입니까, 아니면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서 나온 피 입니까? 그 점에 대해서 성경을 보면서 확인해 봅시다. 사도행전 2장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 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 다음에 37절 계속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그렇게 했더니 38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했지요.


여기서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계없다.’ 이런 사람이 죄 사함 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다시 할게요. 예수님이 자살한 것은 아니지요? 누군가 예수님을 죽였지요? 예수님을 죽인 사람을 보고 너는 나가라, 지옥가라, 이렇게 내 팽개쳤습니까, 아니면 예수 죽인 사람을 향하여 ‘예수 피로 죄용서 받아라.’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들로 인해서 생긴 그 피가 예수님을 죽인 자들도 용서하는 피가 되겠지요.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가담했는데 우리 중국 사람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데 가담했습니까? 그 때 태어나지도 않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습니까?


아파트마다 양푼에 그 피를 바를까요?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그것은 죄 사함 받을 때 죄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 제가 미안한 느낌이 드네요. 좀 어렵게 이야기한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쉬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안 따먹었습니까? 선악과 따먹지도 않은 우리가 왜 죄 값으로 죽어야 됩니까?


우리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구경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죄 값으로 죽어야 됩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제 마지막을 치닫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어려운 것이 나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재에서 사건으로 갑니다. 선악과 따먹은 사건이 내 존재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태어나기 전에 여러분의 부모님과 의논해서 ‘날 이렇게 태어나게 해주세요.’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억울합니까? 가난한 집의 아이는 돋아나듯이 부모가 커진 겁니다. 발 하나에 발가락이 몇 개지요? 이 발이 부모라면 이 발가락은 자식들입니다. 돋아난 거지요. 그런데 이 부모라는 발은 할아버지 발의 발가락이 되는 겁니다. 그 할아버지는 그 할아버지의 발가락이 되는 겁니다.


어제 여러분이 해바라기 씨를 드셨지요? 해바라기 씨가 해바라기에서 생겨난 거지요. 해바라기 씨가 해바라기입니까, 해바라기 전체를 해바라기라고 합니까? 전체가 해바라기지요. 해바라기 씨가 여기 한 개 있고 또 자기 한 개 있습니다. 하나는 해바라기 맛이 나고 하나는 오렌지 맛이 나는 겁니까? 해바라기 씨끼리는 서로 차이 난다고 다투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똑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해바라기 씨를 봅니다. ‘이것도 해바라기 씨고 저것도 해바라기 씨네.’ 하고 똑같이 취급합니다. 둘 다 해바라기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달라도, 차이나, 코리아 이렇게 서로 달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아담입니다. 똑같습니다. 아담의 죄가 다 흘러내리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 있다.’ 라고 나를 존재로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존재로 보지 않고 ‘여기 사람이 있는 사건’으로 봅니다. ‘여기 또 사람하나 생겼네.’하고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짜증이 나서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하고 상대하시죠.’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너는 네가 태어난 하나의 사건이야. 너는 하나의 일이야.’라고 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저기도 사람 하나가 있는 사건이 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두 다 사건으로 보기에 사건은 자기존재를 하나님 앞에 주장하면 안 됩니다.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저를 왜 만들었습니까?’라고 해야 됩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저 어때요?’라고 물으면 안 돼요.


‘여기 이 해바라기 씨를 내가 만들었구나.’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가 아니고 사건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이 있지요. 그 사건은 대대로 여기서 사건이 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아담에서 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아담을 죄짓게 하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이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느냐, 죄가 아담으로 죄짓게 했느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담이 더 세냐, 죄가 더 세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네요. 죄가 아담보다 센 것을 두고 ‘좌가 왕 노릇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내가 여기 있다.’고 자기존재를 내세우겠지만 하나님은 죄짓는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고 봅니다. 그 밑에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나오지요. 가인을 통해서 죄짓는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요. 그 죄를 짓기 전에 가인은 죄인이었습니까, 죄인 아니었습니까? 죄인이었지요. 가인은 그것을 몰랐는데 동생을 미워하고 죽이고 보니 죄짓는 사건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믿고 난 뒤에 맘속으로도 간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요. 10년 동안 마음속으로도 간음하지 않았어요. 여자를 보기를 돌같이 봤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1년째 되는 어느 겨울날 3초 동안 마음속으로 간음했습니다. 갑자기 의인에서 죄인된 겁니까, 아닙니까? 원래 죄인이었지요.


그런데 왜 10년 동안 마음속으로 간음 안했습니까? 아직 죄가 사건화 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얼굴 보니까 전부 다 돈 좋아할 분들이 아닙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런데 지금부터 26년 6개월 뒤에 갑자기 돈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의인이었는데 그날 갑자기 죄인 되는 겁니까?


아니지요. 잠복되어 있는 죄가 그 때 죄를 사건화 시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의 종입니다. 존재인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건이 나에게 잡히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할지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50년 동안 예수님을 싫어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 바람 부는 날, 굴러가는 전도지의 요한복음 3장 16절을 봤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는 영원히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 그 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창세전부터 버림받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은 왜 예수를 안 믿었어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건화 되지 않아서 그래요.


그래서 모든 성경을 존재로 해석하지 말고 사건으로 해석하면 모든 성경이 다 풀립니다. 성장이란 개념도 없습니다. 실컷 성장했다가 하루아침에 죄인 되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통해서 인간들을 다 죄짓는 사건으로 만들었어요. 로마서 5장의 그 대목을 찾아봐야 되겠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 모든 사람에게 죄가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망이 왕 노릇한다고 14절에 나와 있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건 또 사건으로 매일같이 살아가는 겁니다.


인간은 그 사건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에 인간은 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6절에 나옵니다.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여기 보면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이겁니다. ‘많은 착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하심에 이르렀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이것이 성장개념입니다. 하나의 존재가 있으면 성장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사건화 되면 많은 범죄가 일어나면 일어나는 족족 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 바뀝니다. 누가 그렇게 되느냐고 묻지 마세요. 그런 사건이 일어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그 사람을 가지고 성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도에서 어떤 위력이 일어나는데……, 성도에게 많은 범죄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일어나는 사건이 일어나면 그 범죄가 의로 바뀌는 희한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제가 너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상식하고는 너무나 대조가 되지요? 이 말을 믿을까 말까 주저되지 않습니까? 평소의 우리 윤리도덕과 너무나 차이가 나지요. 착한 일을 하려고 애를 쓸 경우에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내 존재가 우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은 생각을 못합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더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말씀을 알게 하십니다. 전에는 죄가 아니었다고 여기는 것도 성경말씀과 대조해보니 죄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제자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예수님한테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이것이 죄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아시는 분이 이야기해보세요. 제 말로 차마 이야기 못하겠습니다. ‘죽은 사람으로 죽은 사람을 장사하게 하라.’는 그 말을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예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이 너무 달랐습니다. 우리는 핑계를 이렇게 댑니다. ‘예수님은 신이시고 우리는 인간이니 많이 봐주세요.’라고 합니다. 우린 연약한 죄인이니까 많이 봐주세요, 라고 합니다. 또 자기 존재를 우선시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빙그레 웃으십니다. ‘걱정하지 말라, 내 아들아. 너의 죄가 많이 나올수록 은혜가 더욱 많이 느껴질 것이다.’


아버지 장례 치르는 것까지도 죄라고 지적받으면 이 세상에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면 이 세상에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실천에 옮긴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가게에서 전기톱을 하나 사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주겠습니다.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제가 보는 앞에서 즉시 잘라버리시기 바랍니다.’


가게에서 갈고리를 하나 사겠습니다. 오른손에 쥐어 드리겠습니다. ‘혹시 당신의 오른 눈이 백화점 물건보고 탐이 나거든 갈고리의 뾰족한 부분을 이쪽 부분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한꺼번에 쏙 빼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말씀 지키는 겁니다. 말씀 지키는 분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지킨다고요? 온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면 전부를 어기는 겁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이왕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니 맘 놓고 이야기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부담이 되시는 분은 아직도 존재를 생각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사건으로 다루신다고 생각한다면 마음편이 이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마음 놓고 죄라는 것을 저를 통해서 다 끄집어내 주세요. 그 범죄 함이 어떻게 의가 되는지를 알려주세요.’


알려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청년이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어떻게 생활을 하고 어떻게 장사를 해서 이득을 보리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죄 아니래요.) 죄 맞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 나옵니다. 놀랍지요.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아닙니까?


우린 교회 나온 청년들에게 이야기하잖아요.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지세요. 입을 크게 벌리세요. 각도에 따라서 채워주십니다. 각도가 작으면 조금 이루어지고 아가리의 각도가 크면 많이 이루어집니다.’ 세상에 그것이 죄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야고보서 4장에서 그것이 죄라고 했다면 어떤 것이 죄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을까요?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주 지금 신납니다. ‘우리는 안개니라.’ 했습니다. 물방울입니다. 물방울은 존재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고 사건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물방울은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도 돌아서면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존재가 없어져도 물방울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건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사건입니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리니.’ 그런 마음으로 도시에 가라는 겁니다. 그것이 2초입니다. 끝입니다. 돌아서면 도시에 가서 돈 벌어서 고향에 가서 ‘내가 도시에 가서 성공했다.’는 자랑거리를 알리고 싶어 합니다.


갑자기 사건에서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날 야고보서 4장을 보는 순간, 성령을 받은 순간 그 존재가 다시 사건으로 바뀝니다. ‘주여, 제가 안개 맞군요.’라고 기뻐합니다. 2초 내지는 3초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사건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2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유대인들이여, 당신이 예수를 죽인 것은 당신이 남보다 더 나빠서가 아닙니다. 이방인보다 더 나빠서도 아닙니다. 당신들은 인류의 대표자들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하나의 사건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사건을 하게 된 것은 비로소 여러분들이 예수 죽인 것을 죄인 줄 알고 당신들의 사건으로 생긴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게 하려하심입니다.’


어렵습니다. 그냥 교회 다니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교회 안 나올 걸……! 도시에 가서 장사하는 그것이 죄인 줄 알았다면 교회 안 나올 것을! 그저 기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만 하면 그만인데 왜 십자가의 은혜를 알아야 될까요? 십자가에 예수 죽은 자도 용서받는다면, 우리의 어떤 죄도, 하나님을 죽인 죄도 용서 받는다면……, 여러분, 사람 죽인 죄도 용서 받습니다.


자기가 안개 아니라고 우겼던 그 죄도 용서받습니다. 아버지 장례 치르는 그것이 우선이라고 우기는 그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지 않는다고 우기는 그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용서받고 난 뒤에 내가 예수님의 재림이 없다고 한 것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가슴 아파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때부터 진지하게 예수님의 재림을 진실로 믿게 됩니다. 2초 내지 3초지만, 돌아서면 또 잊어버리지만. 토요일에 예수님 재림한다는데 금요일에 자기 딸 결혼식에 가면, 결혼식 날에 재림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세상에 어느 목사님이 주례를 하면서 ‘여러분, 이 결혼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일이라도 주께서 재림하신다면 여러분은 휴거할 수 있습니까?’라고 외치는 주례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다 퇴장할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항상 중요해요.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의 물방울로, 안개로, 사건으로 보는데 우리는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하나의 존재로만 우리를 품고 다닙니다. ‘어화 둥둥 내 사랑아!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네. 비록 가난하도 내가 좋고 못생겨도 내가 좋고 병원에 입원해도 내가 좋고 염색이 잘 안 나와도 내가 좋고…….’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해서 그렇게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늘 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죄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 바뀌는가를 한 번 보라는 말이지요. 존재로 보는 나를 사건으로 다가설 때 이 존재는 깨어져서 사건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로마서 9장의 이야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행함을 주장했습니다. 그 행함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것이 사건에서 나오면 이것은 자기 행함이 아니에요. 사건에서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존재에서 행함이 나오면 ‘이 행함은 내가 행한 거야.’ 라고 내가, 내가, ‘내가’를 주장하게 됩니다. 로마서 9장 32, 33절을 봅시다. 다 같이 읽어봅시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존재에 뭐가 부딪혔어요? 돌이 날아왔지요. 여러분들이 길을 가다 발에 돌멩이가 부딪히면 그 돌을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가져다 버립니까? 그렇게 해서 버려진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존재를 깨는 모든 것을 저항하고 반대합니다. 그러면 그 거치는 돌, 깨는 돌을 뭐라고 합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뒤에 붙어 있는 것은 십자가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 다음에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습니다. 두 개의 존재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겁니까? 두 개의 존재가 아니고 아담을 죄인 되게 하는 사건과 그 죄를 의로 바꾸는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우리 몸을 중심으로 해서 계속해서 사건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아까 오전에 한 것을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입니까, 두 개입니까? 하나지요. 그런데 그 하나가 나Ⅰ과 나Ⅱ로 두 개로 나눠진다고 했지요. 몸이 하나인데 나Ⅰ과 나Ⅱ로 갈라진다고 이야기하게 되면 혹시 제가 돌아가고 난 뒤에 ‘저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어요. 제가 오지랖이 넓어서 오만 것을 다 걱정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악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악하다.’고 이야기한 나는 악합니까, 착합니까? 나는 착하잖아요. 착하니까 내가 나쁜 짓을 했을 때 악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착한 거지요. 쉽게 합시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 있는 나는 나쁜 사람이지요? 그러나 내가 나쁘다고 회개하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착한 사람 되어버리지요. 그러니 몸은 하나인데 갑자기 내가 둘이 되었잖아요. 우리는 어느 쪽을 더 좋아합니까? 반성 잘하는 나, 그 나가 더 좋은 거지요. 그래서 아무리 회개하고 아무리 반성해도 자기는 죄인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욥이 그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욥의 마지막 장면이 어떻습니까?


욥은 말하기를 ‘하나님, 친구들이 나쁘지 저는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친구들처럼 나쁜 짓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멀쩡하게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갑니까? 욥기의 마지막 장면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게도 불평했던 욥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입을 다물었습니다. 왜 입을 다물었을까요? 내가 고난당한 것은 내가 잘못이 아니라 고난 자체가 사건으로서 내가 동원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욥의 마지막에 보면 ‘내가 입을 막고’라고 했지요. 이것을 찾아보고 이번 시간 쉬겠습니다. 로마서 3장 19절입니다. 욥의 마지막 대목을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읽어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거기 욥의 마지막 장면이 나오지요. 뭐라고 합니까? 입을 막아버리지요. 사람이 입이 막히면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휴대폰으로 전화하십니다. ‘얘야, 입이 막혔나?’ 하고 묻습니다. 십분 쉬겠습니다.
 오용익 (IP:183.♡.212.7) 11-07-01 20:51 
성막 제 17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존재는 면적입니다. 사건은 화살입니다. 화살이 꽂히지요. 이것이 하나하나 다 찢어집니다. 찢어지면 이것이 하나하나가 다 새끼존재가 돼요. 쉽게 예를 들면 시집가서 교회 갔는데 시집에서 핍박이 심합니다. 핍박이라 하는 것은 사건이지요.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으니까 사건입니다. 자기가 찢어졌어요. 그러면 자기가 고난 받은 새끼존재, 작은 존재가 됩니다.

이런 생각이 잘못된 거예요. 찢어져야 내가 또 멋있는 존재가 되니까. 그럼 뭐가 중요한가, 이 화살을 통해서 주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느끼는 겁니다. 한국에서 좋은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그것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쓰레기 속에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들추어내는 그 사건이 바로 보물이다.

사도바울이 ‘내가 의인’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셨던 그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사도바울입니다. 나 같은 인간도 십자가의 그 사건 때문에, 이 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건이 나오기에 그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이제 쉽게 정리하겠습니다. 몸은 하나지요. 이 몸을 우리는 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의존재가 나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사나 죽으나 그것은 너의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옵니다. 그 말씀이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내 몸은 내가 다루는 몸이 아니고 주께서 다루는 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하시고 죽이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은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고 하나님은 부자 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그래서 나는 주님이 그림 그리는 도화지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하나 사건이 되는 겁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낳았습니다. 자식이 부모한테 묻습니다. ‘엄마, 나는 왜 키가 작게 태어나게 했어?’ 따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에 그 부모한테 ‘엄마, 왜 나는 키를 작게 태어나게 했어?’라고 따진다면 그것은 태어난 그것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 마치 자기가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겁니다.

‘엄마, 내가 키가 작은 것은 엄마가 키가 작아서 그렇지?’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건입니다. 아담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담을 위해서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서 아담이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가?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누구를 위해서요?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진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 조상 아담이 죄를 짓고 난 뒤부터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 ‘나를 위해서’가 되어버렸어요. 죄짓고 난 뒤에 여자 탓하고 뱀 탓하고 자기 탓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원래 하나님의 창조했던 그 내용을 소개해 줍니다.

아담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아담에게서 두 뿌리가 나옵니다. 하나는 여자의 후손이 나오고 하나는 뱀의 후손이 나옵니다. 보세요. 우리 몸이 사건이잖아요. 이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지요?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여자의 후손 나오고 뱀의 후손 나온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이었습니까?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본래의 창조의 뜻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아무리 자식을 낳아도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죽고, 죽고……, 했는데 거기서 ‘안 죽고’가 나왔지요. 안 죽은 사람이 누구지요? 에녹!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늘나라 갔지요. 아담의 생각입니까, 아담 속에 계신 하나님의 창조입니까? 하나님의 창조행위지요. 누구를 가지고 다루었습니까? 아담의 몸속에서 계속 새끼를 까고 자식을 낳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다 참여하셔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갈라지게 했습니다.

에녹의 아버지 이름이 야렛이죠. 야렛은 죽음을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죽음을 봤지요. 그런데 자기 아들 에녹은 죽음을 봤습니까, 보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보지 않았지요. 그러면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솜씨입니까, 하나님의 솜씨입니까? 하나님의 솜씨지요. 하나님이 동행했지요. 아버지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왜 내가 물려준 것 말고 다른 것이 튀어나와버렸나? 자식도 맘대로 안 됩니다. 자식 키우는 사람 다 알지요? 그러면 자식은 누구 맘대로 됩니까? 하나님 맘 대로지요. 말 안 듣는 자식을 둠으로써 내가 신앙생활 잘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 말 안 듣는 남편, 말 안 듣는 자식이 있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 창조의 사건입니다.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니고 아내가 내 아내가 아니에요. 각자 누가 다루십니까? 하나님이 다루시는 거예요. 그리고 나도 누가 다루십니까? 바로 주님이 다루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사람입니다. 말씀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 모나리자처럼. 이제 이야기를 계속 해보겠습니다.

이제 쉽게 하겠습니다. 어려운 것을 너무 많이 해서 겁이 나서 못하겠습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제가 혼이 났습니다.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지요. 십자가, 이것이 사건이라 했습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 버리면 십자가사건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는 십자가사건에 의해서 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존재를 두고 제가 면적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면적에 무엇이 쓰이는지를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김 씨 집안에서 출생, 세 살 때 천재소리 들었음……, 세 살 즈음에는 애들이 다 천재에요, 일곱 살 때 초등학교, 스무 살 때 대학생, 스물다섯에 교회 다님, 스물일곱에 성령 받음, 50에 장로 됨……. 자, 이것이 면적에 쓰여 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역사라고 합니다. 이 역사가 십자가사건에서는 다 죄로 깨어집니다.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면적을 지우겠습니다. 방금 한 것은 개인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새로운 역사를 쓰겠습니다. BC 2000년에 아브라함이 부름 받음, 1400년경에 홍해 건너옴, BC 1000년경에 사울이 왕이 됨, BC 900년경에 다윗이 왕이 됨, BC 600년경에 유다 멸망함, BC 4년에 예수님 탄생,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 역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사건에서 다 깨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사건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못 박은 이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지나온 과거가 하나님을 잘 해석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모든 역사에서 이방인보다 자기들을 더 우수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넘어가게 했습니다.

이방인을 봅시다. 중국을 생각합시다. 중국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어떤 분이 2011년도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 중국 사람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예수를 믿었습니까? 신기하지 않습니까? 무슨 역사가 있는데 역사가 있어서 예수를 믿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뭘 믿었습니까? 뭘 믿어서 죄에서 의로 바뀌었습니까?

지금 16시간 강의를 했는데……, 예수님의 피지요. 그게 유대인들이 화가 난 겁니다. 어떻게 아무 율법도 없는 사람인데 예수님의 피가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 거기서 화가 난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뜻은 뭡니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간에, 지금까지 어떤 사람에게 율법을 주기도 하고 안주기도 한 것은 율법을 주든지 안주든지 간에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겁니다.

모세가 구원받았다면 무엇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예수님의 피요.) 예수님의 피지요! 엘리야가 구원받았으면 무엇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예수님의 피지요. 예수님, 엘리야, 모세 이 세분이 대화를 한 산 이름이 변화 산입니다. 그 산에서 대화한 것을 말씀 드릴 것이니 다음 중에서 어느 것인지를 맞춰보세요.

1)베트남 커피를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 2) 교회 교육관을 지을 것인지 말 것인지? 3) 전도를 몇 명 더 할 것인지 말 것인지? 4) 예수님이 언제 죽으실 것입니까? 몇 번입니까? 4번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모세가 그렇게 율법을 많이 알고 엘리야가 그 많은 기적을 일으켰지만 정작 자기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증거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우리가 되풀이 하는 겁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진짜 어렵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죄가 의로 바뀌는 장치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너무 어렵기 때문에 성질 급한 제가 정답을 아예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다 자기 존재로 사세요. 주제넘게 사건으로 살지 마세요. 존재로 사시고 거기에 자기 잘난 역사를 쓰세요. 이방인들은 이방역사를 쓰시고 유대인은 유대인의 역사를 쓰세요. 우리 조카가 일곱 살인데 그 애가 하는 말이 ‘참 세상 살기 힘들다.’ 했습니다. 일곱 살인데! 왜 힘든가, 영어 과외 해야 되고 피아노과외 해야 되고 노래도 해야 되고 게다가 주일학교 참석해야 되고, 참 살기 힘들어요. 이 얘가 일곱 살입니다. 피아노 교습하는 것 자기면적에 다 쓰는 거예요. 이 역사를 기억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두뇌는 시냅스라는 두뇌세포로 되어 있습니다. 두뇌세포는 비죽비죽 나와 있습니다. 어릴 때는 이 정보망이 끊어져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여기서 교통하는 세포의 숫자가 많아집니다. 이것을 기억이라고 합니다. 인생을 살면 쓸데없는 기억들이 그렇게도 많아요. 그걸 다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존재에 뭐만 기록하겠습니까?

멋있는 것, 잘난 것, 착한 일 한 것, 하나님 은혜 받은 것, 암에서 기적으로 낳은 것, 전도 잘해서 한 50명 숫자 불어난 것, 그것을 다 쓰세요. 이것이 십자가 안에서의 우리의 삶입니다. 참 편합니다. 그냥 쓰세요. 그때부터 기다리는 겁니다. 우리 ○목사님의 목회방법이 ‘기다림’이랍니다. 남을 나무라지 않고 기다려 주는 거예요. 너무 띄워주는 것 같은데.

그런데 여기는 십자가 안이기에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사건만 인정합니다. 화살이 날아옵니다. 일곱 살 먹은 애한테 화살이 날아오고 12살 먹은 애 건너뛰고 60살 먹은 할아버지에게 화살이 날아오고 이 사람 건너뛰고 37살 아주머니에게 화살이 날아오고……, 교인 백 명 가운데서 이번 주에 세 명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다리세요. 또 기다리세요. 그 다음 주일날 지난번에 빠졌던 9살 먹은 애에게 화살이 날아오고 50넘은 아저씨에게 날아오고 지난주 은혜 받은 사람은 다 그 존재가 찢어졌다가 또 여기에 역사를 씁니다. ‘나는 지난주에 은혜 받았다!’ 여러분, 또 기다리세요. 이것, 또 화살 날아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완전한 모습을 그리지 마세요.

누구에게 성령이 올 것인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성령이 온 사람은 고백합니다. ‘목사님, 내가 착해서 구원받는 줄 알았더니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전에도 이미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어젯밤에 다시 느꼈습니다. 그거 하루 갑니다. 다음날 되어 보세요. 내가 하나님께 은혜 받아서 구원받았다는 그것으로 다시 자기역사를 씁니다.

석 달 뒤에 또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은혜 받았다고 좋아하는 이것도 죄가 되는군요. 그런데 이것을 죄라고 알려주시니까 주님께서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목사님이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처럼 남들에게도 기다리세요.’ 이것이 목회자의 인내입니다. 그리고 믿음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어떤 사람은 삐져서 이 아저씨가 바깥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기다리시고 또 복음만 전하세요. 6년 뒤에 다시 기어들어옵니다.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6개월 뒤에 또 나갑니다. 8개월 뒤에 또 들어옵니다. 기다리세요. 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나중에 천국 갈 때에 받은 면류관 다 주께 반납하면서 ‘제가 구원된 것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기다리세요. 이 대목을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들어와도 인간은 자기의 옛적 몸이 있기 때문에 자기 몸을 존재로 만듭니다. 그러면 다른 존재와 비교합니다. 여기서 나Ⅰ과 나Ⅱ가 또 생겨납니다. 제가 ‘기다리세요.’라고 했지요. 기다리세요. 그러면 나Ⅰ이 나Ⅱ고 주께서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건, 사건들이 나오는데 그 사건이 십자가의 도가 됩니다. 성령님이 하신 겁니다. 이제부터 사도바울에 나오는 권면과 명령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 시간을 여러분이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십자가는 몰라도 사도바울의 명령과 권면은 잘 아는데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을 보겠습니다. 22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교회 안에서 존재가 있다고 했지요? 방금 성경 말씀에 금지할 법이 없는 이것이 법으로 주어졌지요. 사람은 자기 과거의 경험가운데서 맘에 드는 것만 기억한다 했지요? 기억이 연결되는 것을 역사라 합니다. ‘나는 언제 사랑했고 나는 언제 화평했고…….’, 이것이 죽 나열이 되지요. ‘목사님, 저는 왜 이렇게 착한지 모르겠어요.’라고 목사님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기다리세요. 사건이 주어집니다. 이 존재에 십자가가 화살 되어서 날라 옵니다. 그것이 바로 몇 절이냐,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화살촉이 있고 화살대가 있지요. 이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여기에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 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화살이 그대로 여기에 꽂히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다른 존재와 비교하면서 자기가 온유한 사람이고 사랑 많은 사람이라고 우겼다가 이것이 딱 꽂혀 버리면 그러한 생각이 사적인 정과 욕심인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자기존재에서 나온 자기만의 행위지요. 여러분, 쉬운 질문 해보겠습니다. 내가 온유하면 내가 온유한 것이지 남이 온유한 겁니까?

아니지요? 온유하고 화평하고 사랑이 많더라도 다 누구 겁니까? 내 거지요? 이것이 바로 정과 욕심이라는 겁니다. 분명히 십자가는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리스도가 산다고 해놓고 갑자기 그것이 누구 것으로 변했습니까? 내 것으로 변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하늘나라 화살을 쏴 버립니다.

슝! 화살이 꽂힐 때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럴 때 나오는 그 모습이 바로 온유와 화평과 사랑과 자비 형제우애입니다. 그럴 때 다른 존재가 묻습니다. ‘집사님, 너무 훌륭하십니다. 이것이 집사님의 열매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이 어떻게 답변합니까? ‘저의 열매가 아니고 성령의 열매입니다.’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에요.

내 열매라고 우겼다가 얻어터졌을 때 나오는 열매, 내 온유가지고 저 사람 존재의 온유를 묵살하는 쾌감으로 살던 그 내가 깨질 때 나오는 그 열매.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기다리세요.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겁니까? 아닙니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가만히 기다리지 마시고 여러분이 자랑하고 싶은 것을 여러분의 역사에 꼼꼼히 쓰세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것을 꼼꼼히 쓰세요. 그리고 기다리세요. 언젠가는 박살이 날 겁니다. 그 때 나오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또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이야기를 제가 이렇게 한마디로 이야기합니다. ‘맘대로 사세요.’ 그걸 더 줄여버립니다. ‘막 사세요.’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이해 못합니다.

오래 교회 다니고 권면대로 명령대로 살아야지 왜 막사느냐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사람들만 있다면 제 말이 틀렸습니다. 교회 목사님만 계시다면 제 말이 틀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 화살을 쏘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주여, 저는 주님 앞에서 늘 죄인입니다.’ 항상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세요.

스스로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것을 주님께서는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부인되도록 만드십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이 모자라서 돈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께서 설교시간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도할 때는 기복신앙, 세속적인 것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늘의 뜻을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은 그것이 옳은 줄은 알지만 솔직한 마음은 돈을 구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타협합니다. ‘하나님, 이번만 도와주시면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약간의 흥정을 합니다. 목사님 귀에 안 들리는 방향으로 기도합니다. ‘그저 한 천 만원만……’ 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것이 기복신앙인 줄도 알고 예수 믿는 사람답지 않게 돈을 구하는 것인 줄 알지만 제 속마음이 답답해서 못살겠습니다. 그저 이번만 도와주시면 앞으로 전도 많이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천만 원 달라는데 하나님께서 2천만 원 줘 버립니다. 그 때 그 사람이 놀래 버립니다. ‘하나님, 다시는 돈 달라고 기도 안할게요.’ 이것이 바로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죄를 알게 하는 방법이 멋지지요? 그런 방법만 생겼으면 좋겠지요. 우리가 아는 방법은 이런 방법입니다. 돈 천만 원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갑자기 멀쩡한 아들이 아파요.

그래서 ‘하나님, 잘못 기도했으니 용서해 주세요.’ 하는 식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나에게서 나온 선악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그 방법이거든요. ‘내가 나쁜 짓 하는 것은 일단 허용하셔서 그대로 놔주시되 대신 징벌은 제가 받겠습니다.’ 하는 식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징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방법은 그 방법이 아니라 천만 원 달라는데 2천만 원 줘서 ‘잘못되었습니다.’ 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방법을 사용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 제가 돈을 벌어야 되니 앞으로 6개월간 교회를 못나가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나 양심적이기 제 신경통이 다시 도지는 벌을 제가 달게 받겠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6개월 뒤에 더 튼튼해지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입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십일조를 못하겠습니다.’ 하고 마음에 다짐을 합니다. ‘급하게 돈 쓸데가 많아서 당분간 십일조를 끊겠습니다.’ 합니다. 그동안 목사님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있습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두 배, 세배 손해가 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벌벌 떨면서 십일조를 끊었습니다. 자기 재산이 다 날아갈 줄 알았습니다. 십일조 하기 전보다 재산이 더 불어났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왜냐, 하나님은 십일조를 하나 안하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 몸이 죄인이라는 것을 그 일을 통해서 깨닫게 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관심이 없이 맨 날 내 존재가 잘 있는지, 존재가 잘 있지 못하는지 그것만 몰두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나님과 흥정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십자가에서 용서받았다는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맘이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자비가 되는 겁니다. 옆에 있는 집사님이 놀립니다. ‘십일조 끊어 부자 되니까 좋디?’ 참으로 돈에 관심이 있는 인간 같았으면 ‘봐라, 십일조 안 해도 복 받잖아.’라고 합니다.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동안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했었어. 어떻게 하면 돈을 아끼고 어떻게 하면 돈을 사랑할까, 그것만 알았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십자가가 내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어.’ 그 사건을 하나님이 생산 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복음 전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나 기다리시고,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기다리면 교회 목회 잘 됩니까? 기다리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기다리면 목회 잘 된다는데 언제 교회가 커지지?’ 라고 관심을 두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기다렸더니만 한 달 새 교인 반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때부터 안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다시 교인 반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 때 아차, 하고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십자가에 있었던 것인데 목회자는 십자가를 이용해서 목회가 잘되는지, 잘 안되는지, 거기에 정과 욕심을 낸 겁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기 위해서 화살을 보낸 겁니다.

화살촉에 이런 글자가 쓰여 있습니다. ‘노아 방주는 그렇게 넓어도 달랑 여덟 명만 구원받았다. 노아는 하늘나라에서 환영받았다. 노아도 구원받았다.’ 노아가 목회 잘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성경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존재에서 우리가 평소에 우리 몸이 할 수 있는 것을 그대로 기억하세요.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를 계속 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행함이라고, 유대인들이 그것 때문에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바로 너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흘린 피로 너의 죄마저 용서되었다.’고.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시면 되는 겁니다. ‘나의 모든 것은 죄고 그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십분 쉬겠습니다.
 오용익 (IP:183.♡.212.7) 11-07-06 15:46 
성막 제 18강(20110222~4, 이 근호목사)

마지막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아담에게서 두 뿌리가 나옵니다. 하나는 여자의 후손, 다른 하나는 뱀의 후손이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5절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약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이용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너를 어떻게 살릴까?’ 이것을 의논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뱀의 후손이 나옵니다.

뱀이 악마라 하는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그러면 뱀의 자손은 누구입니까? 이것이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너희들은 죄의 종이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이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럴 때 ‘너희 아비는 마귀다.’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마귀라고 했을까요?

1번, 나쁜 짓을 많이 해서. 2번, 숨어 있는 죄가 많아서. 3 번, 예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몇 번입니까? 3번이지요. 제가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악마냐, 악마 아닌가 하는 것은 우리는 판단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예수님을 못 믿게 하면 모조리 그것이 악마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여자의 후손은 누가 됩니까? 바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악마와 사람으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쪽은 다 악마 쪽이 되는 겁니다. 성경의 이런 내용들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성이 나오지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부라고 했습니다. 또 어린양의 신부라고 했습니다. 신랑은 그럼 누구지요? 예수님이지요.

여기서 어려운 대목은 우리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반대하면 다 자기적이고 자기한테 잘해주면 다 자기한테 친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말 안 들어주면 마귀가 내 말에 호응해주면 천사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인이 보기에 어떤 여자가 간통을 했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옷을 주섬주섬 대충 주워있고 나왔겠지요.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나쁜 짓이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의 율법에 보면 간음한 자는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냥 돌로 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이 그 여자를 끌고 예수님에게 왔습니까?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죠,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한 거예요.

예수님 당신이 율법 보는 것이 우리보다 더 못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틀렸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성경대로 하자는 거예요. 문자대로 지키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고 보는 겁니다. 더 빼거나 보태지 말고. 우리 이런 이야기 굉장히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아까 제가 전기톱 이야기를 한 겁니다. 갈고리도 이야기 했지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누가 나누는 셈이 되느냐하면 우리 사람이, 본인이 나누는 셈이 돼요. 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 바리새인이 여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여자한테 죄가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 여자를 돌로 칠까요, 말까요?’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치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나와 동일하고 안친다면 율법을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싶었던 겁니다.

옛날에는 율법을 반대하면 뱀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 아비가 악마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자기 말을 안 들으면 그야말로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이 되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제가 성경을 보고 있는데 그 성경에 위배되는 사람, 성경을 실천에 옮기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당신은 성경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니 내가 보기에 죄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한테 갔다 칩시다. 만일 여기 예수님이 계시고 그 사람이 여기 있다 치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은 이 말씀에 어긋나게 살아갑니다. 제가 맞고 이 사람이 틀렸지요?’라고 했다 칩시다. 예수님께서 저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시겠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죄가 있는 자가 돌로 쳐버리면 죄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옳으니 그르니 판단하는 것이니 그것은 죄가 없는 것입니까, 죄가 있는 겁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죄가 있는 상태에서 성경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은 과연 죄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그 말입니다. 그것도 죄지요. 그런데 내가 판단한 것은 우리는 죄라고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나는 존재니까.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예수님께 데려와서 물을 때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무슨 행동을 했습니까?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땅에다가 글씨를 쓰셨지요. 그 사람들이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라고 할 때에 돌을 놓고 갔습니까, 아니면 글씨 쓸 때 갔습니까? 글 씨 쓸 때 갔지요.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그 글이 바리새인들 본인들이 쓴 반성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쓰신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누구도 내가 옳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간음한 여인이 죄 있는 겁니까, 죄 없는 겁니까? (있지요.) 그게 바로 우리 역사의 오류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현재를 판단할 때 지나온 과거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미래에서 봤을 때 그 여인이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가 없는 겁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성입니다.

왜 우리의 미래상을 보여주느냐 하면……, 이 말은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네 과거의 입장에서 현재의 어떤 죄라고 단정을 짓더라도 미래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예루살렘성은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한 거예요. 그 미래를 위해서 현재가 있는 겁니다. 방금 나도 모르게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현재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과거의 자존심을 위해서 현재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관점이 바뀌어야 됩니다. 우리 몸은 과거의 생산물이 아니고 주께서 미래의 모습을 위해서 지금 미리부터 이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 많은 죄가 다 어디로 갔지? 누가 용서해 줬지?’ (예수님) 그것을 그냥 예수라 하지 말고 우리의 신랑이라고 합시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신부가 나오는데 그 신부를 예쁘게 단장한 쪽이 신부 본인이 아닙니다. 누가 신부를 그렇게 단장했을까요? 신랑이죠. 그 때 신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줍니다. 신부가 자기 손수건 꺼내서 자기 눈물 닦습니까? 바로 신랑이 신부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다시는 아픈 것도 없고 다시는 울지도 않고 영원한 생명나무에서 신부와 함께 혼인잔치 하기 위해서 신랑이 먼저 생명나무 쪽으로 건너갔습니다.

무엇을 남기면서 건너갔습니다. 무엇을 남겼습니까? 그것을 어린양의 피라고 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하얗게 희어졌다고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옵니다. 제가 시간이 아까워서 성경을 찾지를 않습니다.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렇게 용서받은 그 사람들은 다른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오직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으니라.”(요한계시록 7:14)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요한계시록 7:10-12)

어린양의 노래가 바로 과거의 노래가 아니고 미래에서 당기는 노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거의 힘을 축적해서 현재의 나를 밀어냅니다. 뒤에서 앞을 미는 식이지요. 우리 성도는 미래에서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쫙쫙 잡아당깁니다. 당깁니까? 그렇게 당길 때 앞으로 여러분의 역사책에 나 잘난 것 쓰지 마시고 요한계시록 21장만 되풀이되기를 바랍니다.

‘신랑이 보고 싶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신랑 되시는 주께서 오실 때에 주께서 준비하신 기름이 여기 있습니다. 항상 신랑 맞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딸의 결혼식장에서도 남편과 이혼도장 찍으면서도……, 아, 이 말은 실수로 나왔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의 껍데기로 사용합니다. 일곱 귀신이 나간다는 이야기를 혹시 여러분이 기억합니까?

성경을 해석하면서 설교하는 본인도 굉장히 난처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마귀 들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마귀가 들어있으면 우리는 껍데기가 됩니다. 일곱 귀신이 나가도 우리가 빈 마음이 된다면 일곱 귀신이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도로 들어와 버립니다. 우리가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까요?

아주 재미있는 주제네요.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귀신들린 청년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왔지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뭐라고 합니까? 영접합니까, 아니면 나가주세요, 라고 합니까? 당신과 헤어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예수여, 당신은 우리를 심판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기분 나빠서 이제는 당신과 헤어지고 싶습니다. 나를 이 사람에게서 나가서 저 돼지에 들어가도록 허락해주세요.’ 이것이 바로 이별입니다.

여기서 마귀 들린 사람의 특징을 가진 사람을 찾기가 참 궁금하지요? 취미도 참 가지가지입니다. 재미있잖아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좋은 분인 줄 알지만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헤어지고 싶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악마의 말입니다. ‘목사님, 그런 성경 귀절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옵니다.

3절에서 4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 사람이 지식이 모자라서 예수 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대게를 드셔본 적이 있지요? 거기서 껍데기가 중요합니까, 그 속살이 중요합니까?

사람들은 사람들의 껍데기인 학력을 보고 재력을 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속을 봅니다. 속이 죄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누구나 죄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헤어지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계속 만나기를 원하느냐를 보자는 겁니다.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보다 더 큰 악한 영이 그 사람을 예수 못 믿고 망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것도 바로 영에 속한 사람의 능력입니다. 실습을 해 보세요. 남편에게 해 보세요. 아내에게 해 보세요. 자식에게 해 보세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전하는 내가 마귀 들렸어요. 왜냐하면 ‘이게! 안 믿어?’ 하고 내가 성질납니다. 기다리세요. 왜 기다려야 되느냐하면 우리 자신도 구원받았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 전한다고 해서 금방 믿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서 믿었습니다.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는 억지로 하지 마시고 사랑으로 하세요. 사랑이 없는 복음은 울리는 꽹가리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도 좋고 소망도 좋은데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냥 기다리지 마시고……, 기다리라 하니까 그냥 막살면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시고 그것을 자기 존재에 꼼꼼히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이것을 왕창 무시하시고 내가 기도하고 찍어놓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이 전도해서 구원받게 하십니다. 나는 뿌렸는데 그 사람을 통해서 구원받게 하십니다. 갑자기 우리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육의 열매가 나옵니다. 아까 성령의 열매는 이야기했지요. 반반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마저 하겠습니다. 육의 열매를 봅시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로 묶으면 뭐가 되겠습니까? 내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안 죽은 상태를 말합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살아 있으니 남과 비교하니까 시기와 질투가 생기는 겁니다. 내가 사랑으로 점찍어 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분이 전도해서 그 교회 나갑니다. 갑자기 나에게서 시기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 거예요,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사건을 위해서 그 사건을 통해서 내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서 못 박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이 십자가사건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그 후에 그 사람에게 찾아갑니다. ‘사실은 당신이 우리교회 왔으면 좋았는데 하나님께서 다른 교회 가게 함으로서 나에게 이런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것을 두 자로 전도라고 합니다. 왜냐, 십자가 도를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전도 잘하는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럴 때 인간은 우리 껍데기 속에 십자가가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이제 갈라디아서 6장을 보겠습니다. 이 갈라디아서 6장을 보면서, 그리고 성막 이야기를 하면서 모든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6장 14절을 봅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문제 드립니다. 자랑할 것이 뭔지를 꼽을 테니 어느 것이 옳은지를 보세요. 1) 예수님의 재림 2) 예수님의 부활 3) 예수님의 십자가. 몇 번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만일 부활을 자랑하는 사람 같으면 자기존재 쌓은 것을 자랑하는 셈이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면 ‘나는 날마다 십자가로 얻어터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셈이 됩니다.

그 정도로 내 행위로 내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를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기 위한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취소시키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사람의 십자가 되기 위해서 증거 한 겁니다. 본격적으로 십자가를 드러내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너희 중에서 알지 않기를 원한다.’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의 말씀이지요. 이상하게 거기서 부활이 빠졌지요? 거기서 내 새 생명이 빠지지요? ‘예수님과 그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 재림도 나오고 부활도 나오고 성령의 열매도 나오는데 왜 사도바울은 말을 함부로 그렇게 했습니까?

그만큼 우리 자신은 껍데기만 남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 껍데기 안에는 뭐가 있어야 돼요?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피만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랍스타(바다 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껍데기일 뿐이고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 입니다. 이제 성막 이야기하고 모든 것을 마치겠습니다. 성막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동쪽 문은 열렸고 번제 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고 여기 열두 개의 떡이 있고 분향 단이 있고 여기에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 전체가 피가 들어와서 피가 관통해서 피가 적십니다.

언약궤도 피요, 분향단도 피요, 온 천지가 피 천지입니다. 제사장은 이 휘장에다 또 피를 뿌립니다. 그 휘장이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때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왜 없어져야 됩니까? 왜 예수님께서 성전에, 성전휘장에 피를 안 바르지요? 성전이 있어버리면 존재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차이나에서 구원받으려면 이 교회 다니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그 때의 그 성전에 가야 될까요? 가야 될까요, 안가야 될까요? 이슬람교는 그렇게 하는데, 왜 우리 기독교는 그렇게 안합니까? 세례줄 때 여러분은 무슨 물로 세례 받았습니까? 요단강 물입니까? 무슨 물입니까? 수돗물이지요. 생수입니까? 왜 요단강 물 안 떠옵니까?

십자가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당기는 사건? 미래에서 당기는 사건이거든요. 우리 신랑이 기다리잖아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지요. 주님은 시작이요 나중, 알파요 오메가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같은 동기입니까? 신학교동창생입니까? 나이가 한 참 차이 나지요.

그런데 변화 산에서 예수님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는 껍데기, 사건을 담는 껍데기고 그 안에 십자가 들어 있습니다.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이 분명 혼자 달렸지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사건, 역사를 초월하는 미래의 사건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찾아온 겁니다.

그래서 피 발린 성막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성막 자체가 없어지는 겁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죠? 성전은 영원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안 죽어야 되잖아요. 우리가 성전이면 안 부서져야 되잖아요. 우리 몸은 영원히 안 죽어야 맞지요. 그런데 우리 몸은 죽잖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제 성막을 통해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성막이 없어지고 나중에 이 언약궤가 남습니다. 이 언약궤는 전쟁하는 용도입니다. 민수기 10장에 보면 언약궤가 나아가면 적들이 물러가고 언약궤가 멈추면 적들이 굴복한다는 겁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사람이 언약궤 들고 나갔다가 크게 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대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크게 졌는데 언약궤는 이겼습니까, 졌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그 상자를 다곤 신전에 놓아두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다곤신상의 발목과 손목이 다 부서져 있었습니다. 재수 없다고 그 언약궤를 다른 동네로 옮겼습니다. 그 동네에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했지만 누구는 승리했습니까? 언약궤는 승리했지요. 바로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언약궤하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이제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전쟁하는 이 언약궤가 역사를 통해서 이 지상을 떠납니다. 구약때는 이방민족과 싸웠습니다. 신약에는 누구하고 싸울까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누구하고 싸울까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희한한 용어가 나옵니다.

옛 뱀, 용, 짐승, 바다에서 온 짐승, 땅에서 온 짐승, 그들이 다 누구입니까? 악마들이고 뱀의 후손이죠.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제가 상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까 귀신들린 청년이 말하기를 귀신들리니까 하는 말이 뭐였습니까? ‘예수님이 몇 살입니까?’ 이런 것 안 물었지요? 학력이 어떻게 됩니까, 이런 것 묻지 않았지요?

‘예수여, 당신은 우리를 멸망시키러 온 심판주입니까?’ 우리가 청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심판주이십니까? 그러면 제가 믿겠습니다.’ 그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그 청년은 어떻게 합니까? ‘주여, 우리가 멸망하기 전인데 왜 일찍 왔습니까?’ 하면서 다른 데로 옮겨달라고 하지요. 결국 인간은 껍데기밖에 안 된다는 거지요.

속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옛 뱀, 귀신, 짐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어요. 누가 자기보다 더 센, 악한 신을 누가 이길 수가 있습니까?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가구가 있어요. 냉장고, 장롱, 가구가 있는데 곱게 앉아 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그 강도가 예수님 이십니다. 강도 오기 전에 가구는 그냥 곱게 앉아 있습니다. 그 강도가 담은 타넘어 왔습니다. 마침 주인이 잠을 깼습니다. ‘누구야!’ 붙었습니다. 누가 이겼겠어요? 주인입니까, 강도입니까? 강도가 이겼어요. 강도가 이겼습니다. 우리는 가구인데 그냥 곱게 아주 곱게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나갈 생각도 못 합니다. 벌벌 떱니다.

죽기가 무서워서. 그런데 그 강도가 와서 우리를 보쌈해갑니다. 이렇게 두 번 묶고 이렇게 세 번 묶습니다. 우리는 안 가려고 합니다. 이 세상이 좋아서, 이 세상주인에, 이 세상에 정이 들어서, 세상 술친구가 그렇게 다정스러워서, 나에게 용돈 주는 부모님이 그렇게 고마워서, 효도하고 싶어서 우리는 떠나지 않습니다.

주께서 밧줄을 꽁꽁 묶었습니다. 밧줄을 강도되시는 예수님이 끌고 갑니다. 우리는 버팁니다. 질질 끌려갑니다. 그것이 바로 미래의 힘입니다. 미래에 우리는 신부가 되는 겁니다. 미래에 우리는 신부가 되는 겁니다. 옷도 더럽습니다. 신랑의 격에 맞게 신랑이 신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힙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열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전부가 예수님의 신부를 위해서 마련한 곳입니다.

그 신랑과 함께 영원히 삽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 신랑이 우리에게 뭘 요구하겠습니까? 1) 믿음 2) 소망 3) 사랑 4) 아무것도 없다. 몇 번입니까? 몇 번이죠? 정답은 4번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남자의……, 이것 참 어렵다! 남자의 갈빗대에서 여자가 나왔어요. 남자가 그 갈빗대를 바로 취해버리면 처음부터 그 여자는 남자 몸이었던 겁니다.

창세기의 그 창조행위가 아담의 자손 우리에게 스며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신부가 되게 하신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믿음이라고 하고 소망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그 여자가 누구만 쳐다봅니까? 신랑만 쳐다보지요. 그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신랑만 쳐다보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줄 알아요?

그것을 소망이라고 합니다. 신랑만 쳐다보는 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아야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과거의 힘으로 잘난 체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질질 미래에서 끌고 가는 그 사랑의 힘을 몰랐습니다. 갈수록 우리의 입이 막힙니다. 고개를 쳐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었습니다. 그게 길이었고 생명이었고 진리였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예수 안에서 살도록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이제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신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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