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잔인한 사랑

아빠와 함께 2024. 8. 11. 21:41

잔인한 사랑 

2024년 8월 1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9-12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6: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과연 우리 인간이 사랑을 언급한 자격이 될까요? 왜냐하면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미쳐서 홀로 살기로 작정하고 모든 마음 시스템을 그런 식으로 체제를 갖추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나로부터의 시작’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멜기세덱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근원적 문제점은 ‘나를 시작점’으로 따로 채비를 차리고 살려고 활동에 나선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밝히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요 12:24)

우리는 나 자신이라는 시작한 밀알이 한알 그대로 있기에 소원하면서 야무지게 인생을 설계합니다. 그래서 남들이 “너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이런 사람이다”고 내세우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물음은 이것입니다. “너 누구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타인과 가까운 가족에 대한 분노는 당연하고 하나님에게까지 분노를 보냅니다. 도무지 자신을 없애 방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과 동일한 육신으로 사셔도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안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5:7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 굳이 기도가 필요할까요?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능히 구원하실 수 있음을 본인이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왜 “도와달라”는 식으로 기도하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냥 “죽여달라”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죽여달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기도는 “살려달라”가 아니라 “죽여달라”는 겁니다. 사는 것이 힘들어서 단순히 고통이 그만 당하겠다고 ‘살려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과 아버지의 뜻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틈이 있음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 구원’은 애초의 하나님의 계획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 구원이 아니라 ‘죄인 구원’입니다. 문제는 어느 인간도 자신이 죄인으로 다루어지는 것에 내부적으로 거부감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예 구원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죄인된 것도 죄인이 알아서 주님께 돌아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누가 데려다 주어서 주님께 오는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이 또 도망갈까 봐 아예 어깨에 메고 같이 다니십니다. 누가복음 15장 그 뒤에 나오는 탕자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알아서 아버지집으로 오는 것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틈이 있습니다. 그는 ‘아들’이라는 인식으로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아들됨’의 신분은 자기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들 아닌 자를 아들 되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고유 권한입니다. ‘사랑’이라는 환경 안에서는 이러한 인식의 전도가 일어나야 합니다. 금붕어를 키우기 위해 어항 속에 물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물에 담긴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물 안에 금붕어를 키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은 어디서 생길까요? 인간에게서 생깁니다. 인간의 고집과 자기 주장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이 그 인간의 시작이나 끝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새로운 시작과 끝을 그 인간 속에 주입시키십니다.

예수님을 평소에 정성을 다하여 섬겼던 나사로,마르다,마리아 집안에 하나님깨서 오빠 나사로를 갑작스레 죽여버리는 일을 발생시킵니다. 남은 마르다, 마리아는 오빠 살려내라고 예수님을 대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의 기도와 통곡이 이 인간들과의 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라는 것은 본인이 본인을 고려하고 인생 설계해서 생산되는 결과가 아닙니다. 마치 아침이슬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노고와 고뇌와 갈등과 슬픔과 고통에서 발생된 ‘중간 생성물’입니다. 성도는 독자적인 자기 시작과 끝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악마와 벌린 전쟁의 결실로 나타나는 것이 성도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2-3) 악마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이 아닌 지옥 방향으로 그들을 돌리기 위한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3-15)

그 방법은 바로 자신의 시작점을 공고히 하고 살찌우게 되면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7:12-19에 그 방식의 사례가 나옵니다.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오히려 다시 돌아온 문둥병자가 참으로 신기합니다. 챙기 것 챙기면 다 된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과연 나는 저주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되느냐”를 문제삼는 이방인 문둥병자는 도로 예수님께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하실 일을 모독했다는 생각에서 돌아온 겁니다. 이처럼 구원되는 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멸되는 것이 마땅함을 아는 자입니다.

한 일의 밀은 스스로 죽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죽은 밀알이 들어오면 그 성도는 자신이 십자가 사건화되어 그 안에 있는 주님이 구원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세리의 모습으로, 창기의 모습으로, 강도의 모습으로, 약한 소자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중간 생성물이기에 주님의 시작과 끝을 사랑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주님에 의해 잔인하게 처리되어도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8강-히브리서 6장 9-12절(잔인한 사랑)240811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6장 9-12절입니다.

히브리서 6:9-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히 6:8) 이렇게 지옥 불에 대해서 강력하게 강조를 해놓고, 오늘 본문에 들어와서는 상당히 격려하는 차원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과 격려받는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 9절에 보면, 단어 하나가 나오죠.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한테는 따로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 어떤 특정의 목적을 향하여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방향은 어디 안에서만 있는 방향이냐? 사랑 안에서만 있는 방향입니다.

남들이 우리에게 질문 할 때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런 식으로 질문을 많이 하거든요. 그러나 성도와 성도끼리는 질문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이렇게 질문 해야 해요. “당신은 누구를 사랑합니까?” 사랑이 없는 경우에 분노해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짜증이 확 올라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없어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모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마음대로 안 돼서 짜증이 올라온다고 이렇게 오해를 해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사랑 안에 있으면, 누구를 사랑하게 되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거리가 안 돼죠.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신 혼자 살려고 해요.

그래서 히브리서 6장 9절에서 12절까지의 이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 안에 함몰하라, 거기에 푹 빠져 버려라, 이 말이에요. 어항 속에 금붕어 키울 때 보통 사람들은 ‘물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건 지옥 불에 타버릴 이 세상 사람들의 견해고요. 천국에서는 사랑과 함께 주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물고기는 물이 어떤 종류의 물인가를 알기 위해서 물고기가 그 안에 노닌다. 그것도 부담 없이, 분노하지 않고, 염려 없이.”

이것은 나 말고 내 주변을 둘러싼 환경이 어떤지, 어떤 성질의 환경이 우리를 덮치고 있고 사로잡고 있는가를 성경에서는 사랑의 환경, 사랑이라고 묘사하고 표현해 주고 있는 겁니다. 네가 너 자신을 분석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 기도하실 때 대단히 중요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려고”라는 기도 운을 처음으로 그렇게 뗐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없어요. 그런 게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코자 하는 것은 죄인이에요.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인간 당사자가 죄인 되기 싫어해요. 죄라고 하면 천리만리 도망치기 바빠요. “내가 뭐가 못나서 죄인이냐? 나 죄인 안 될래.”

죄인 안 되기 위해 도망치니까 혼자 사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 ‘사랑 안’ 그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준 사랑이 아니고 죄인에게 준 사랑이에요. 그래서 인간 치고 자기가 알아서 주께 찾아온 사람이 없습니다. 주께서 데려왔죠. 그게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한 마리의 양에게 찾아갑니다.

그런데 한 마리 양은 뭣도 몰라요. 그냥 자기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찾아가는가? 예수님 쪽에서 찾아가서 그 양을 그냥 “내가 너 찾아왔다. 감동 먹었지? 알아서 따라와.” 이게 아니라 아예 주님께서 자기 어깨 위에 멥니다. 양이 뭘 알아서 찾아와요. 주님의 어깨 위에 메고 그래서 주께서 데려오는 거죠. 데리고 오는 거예요. 자기 알아서 오는 게 아니고.

그런데 누가복음 15장 그 뒤에 보면 탕자 이야기 나옵니다. 탕자는 자기가 알아서 온 것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탕자가 자기가 알아서 왔을 때 그는 뭘 아느냐면, 아버지 생각과 내 생각에 틈이 발생 됐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 오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게 아니고 자기가 돼지하고 같이 빌어먹기 싫어서 그냥 일꾼으로 삼아주면 그걸로 고맙습니다, 그냥 오는 거예요.

아버지의 사랑 같은 것은 몰라요.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의 그다음 조치에 의해서 자기에게 덧입혀질 때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겁니다. ‘아버지가 사랑해 주시겠지.’ 이래서 온 게 아닙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입을 자격이 안 될 정도로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거예요.

구원? 어디서 주제넘게 구원을 이야기합니까. 천국? 왜 내가 천국 가야 되죠? 죄인 주제에. 이 틈이 있어요. 틈이 있어 줘야 주님의 사랑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틈이 없으면 이 사랑 자리에 자기가 하나님 찾고, 예수님 믿은 행함이 거기 끼어듭니다. 겉으로는 죄인, 죄인 하지만 자기가 잘났어요. 다시 말해서 자기가 자기 구원에 대한 설계를 미리 마친 거예요. 설계하고 있는 겁니다. 꿍꿍이속이 다 있죠.

지금 여기 히브리서 6장을 하면서 계속 히브리서 자체가 어렵다, 어렵다, 어렵다, 하는 이유는, ‘멜기세덱의 법칙 안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어려운 이야기를 내가 하고 있습니다’ 하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오늘 이 본문 내용도 멜기세덱 안에서 풀어줘야 돼요. 멜기세덱의 특징, 멜기세덱은 시작도 없고 끝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은 뭐가 문제냐면, 본인이 본인 인생의 시작을 구성하려고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분명히 제가 결론 삼아 말씀드립니다만, 천국 가는 성도의 특징은 시작이 없어요. 그냥 중간 생성물이에요. 예수님이 시작을 해서 끝내려는 그 가운데서 전혀 시작도 없었는데 중간에 나와 있는, 생성된 그 무엇이에요. 물집이 생긴 거예요. 주님께서 일하다가 보니 생긴 물집인데 그 물집 안에 성도가 발생 된 겁니다.

주님께선 어떤 일을 하셨는가?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눈물과 간구, 기도죠, 기도하시고, 통곡하시고, 눈물 흘리시고. 이건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원칙입니다. “아버지, 시작한 일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 시작과 끝은 하나님 쪽만 갖고 있고 인간 쪽에는 없어요.

그런데 그 눈물과 통곡과 간구로 말미암아 없는 새로운 시작이 나온 인물들이 바로 성도라는, 천국 가는 사람들이에요. 인간이 자기가 어떤 구원 계획을 가지고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어떤 그런 스케줄을 짜는 것은요, 멜기세덱 법칙에 위배되는 거예요. 없는 겁니다.

성경대로 이야기하면 아침 이슬이에요. 아침 이슬. 아침 이슬은 이슬이 되고 싶어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긴 밤 지새울 때 나타나는 게 아침 이슬이에요, 긴 밤. 이게 시편 110편에 나옵니다. 주의 권능으로 인하여 주의 백성이 나타날 때 주의 백성을 어떻게 묘사하냐면,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3) 주로부터 생산되는 거예요. 이슬이 되어 나오는 거예요.

출발점, 개시점, 시작점,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내가 내 시작점이 되었어요. 이 덩치, 이 덩어리를 어떻게든 천국으로 올려보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사랑이 이미 있는 이상 그 자기 사랑을 버리고 그 외에 다른 사랑을 수입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주님의 사랑, 사랑, 언급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이미 내 사랑에다가 미비한 점을 보태는 식으로 주님의 사랑을 채우려고 하는 그 꼼수, 요령 부리는 것 외에는 인간에게 나올 게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 1서 4장 10절에 보면, 너희들이 나를 사랑한 게 아니라고 되어있어요. 사랑은 우리의 시작점도 없을뿐더러 우리가 시작했다고 우기는 사랑은 주께서 받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그 받지 않는다는 표현이 뭐냐?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만 사랑해요. 우리 자신만 사랑하는 이유가, 내가 있는 이상 끝장을 아주 의미 있게 맺어야겠다고 야무진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선 오셔서 인간이 생각하는 그 노선과 다른 노선으로 틀어버리는 겁니다. 시작을 모르는, 시작이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걸 틀어버리니까 예수님과 예수님 당시 만났던 사람들 사이에 틈이 생긴 거예요. 아까 탕자하고 아버지와 틈 생긴다고 했죠?

그 틈의 예가 바로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눈물 안에서 아침 이슬처럼 성도가 발생 되는 거죠. 생성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이렇게 되어있어요.

통분히 여기는 거예요. 이게 다르다는 거예요. 주님의 생각과 다르다는 겁니다. 마르다, 마리아는 자기 오빠가 죽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정말 멱살을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뭡니까”라고 대들었죠. 오빠가 산다고 하니까 “예, 예수님 다시 올 때, 메시아 다시 올 때나 살겠죠.” 이런 식으로 삐져서 이야기 한 거예요.

말씀 해석이, 본인이 알고 있는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이미 시작된 나를 천국에 들어가는 마감을 지을 것이라고 그렇게 꼼수를 부린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겼다고 했어요. 그게 아닌데, “내 뜻은 그게 아니야. 그 뜻이 아니야.” 너희들이 시작점을 고려한다는 자체가 내 뜻을 전혀 해석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주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주께서 왜 기도를 하셨죠? 주께서 왜 기도하셨죠? 다 아시는 분인데 왜 기도하죠? 아버지의 뜻을 아시면서 왜 기도하죠? 아까 히브리서 5장에도 그런 말씀 있는데 모든 걸 아시는데 왜 통곡과 간구를 하죠? 눈물까지 흘리시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죽여 달라고 기도한 거예요, 아버지의 뜻대로. 예수님의 기도는 뭐냐? 가만히 있어도 죽는 데 가만있는 죽음 말고 아버지의 뜻 속에서 나를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뜻 말고, ‘죽으면 천국 가야지.’ 그거 말고, 지금 아버지의 뜻에 의해 내가 죽게 해 달라고 예수님은 간곡히 기도한 겁니다.

그런데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 붙들고 닦달 내고 따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오빠 왜 죽입니까? 우리 멀쩡한 오빠 뭐가 잘못돼서 죽이십니까?” 따지는 겁니다. 예수님하고 틈이 생긴 거예요. 예수님은, ‘인간은 제대로 죽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상당히 무시무시한 말씀이에요. 제가 대신 그 무시무시한 말씀을 읽어드릴게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한 알이 미리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이걸 우리한테 하는 거예요. “너 그대로지? 그렇지? 너 그대로 맞지? 그러니까 너는 땡, 탈락이야.” 이런 뜻이에요. “왜 그대로 있어, 왜?” 왜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삶이 아니냐는 거죠, 왜. 그냥 자살할 생각이나 하고. ‘살다 죽겠지. 요양병원 가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주님의 뜻에 의해 죽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라고 왜 기도를 안 하느냐, 이 말입니다.

왜 자꾸 주의 뜻으로 살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살면 안 돼요. 왜? 그대로 있으면 안 된다고요. 죽어야 된다고요. 제가 청년 때 아주 집안일 때문에 섬뜩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결혼하기 전에 제 평생을 우리 할머니가 키웠거든요. 할머니가 저를 키우면서 늘 넋두리처럼 하신 말씀이 있어요. “근호야, 너하고 나하고 죽자. 너희 할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구박한다. 보니까 너도 어지간히 구박받는다. 구박받는 우리끼리 그냥 죽자. 속상해서 못 살겠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천사예요, 천사. 그런 할머니 없습니다. 해야 될 일 똑바로 하시고, 자기 맡은 일 차질 없이 하시고, 딱딱 집안 정돈 깔끔하게 하시고, 어디에 뭐가 있고, 음식은 끝내줘요. 음식 정말 맛깔나게, 김치부터 해서 모든 음식을 너무너무 잘해요.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할머니의 가치를 못 알아보고 맨날 “등신아, 등신아.” 손자 자식들 있는데 맨날 구박하고 그랬습니다.

그랬던 할머니, 제게는 신과 같은 존재의 할머니가 어느 날, 그때 할머니 나이가 60 중반쯤 됐나, 갑자기 안 드시는 막걸리를 이만~큼 잡수시고 그 무시무시한 남편도 나 몰라라 하면서 고래고래 고함지르면서 술주정을 하시면서 집안 식구들한테 전부터 있는 욕 없는 욕, 욕설을 막 해요. 그래서 천사 같은 우리 할머니가, 싫은 소리 한번 안 하는 우리 할머니가 완전히 깽판을 치는 연유가 뭐냐?

보니까 그 손자, 자식, 남편까지 합쳐 11식구 가운데서 오늘이 자기 생일이라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래서 깽판 논 겁니다. 혼자 막걸리 먹고. 그래서 부랴부랴 우리 어머니께서 뒤늦게 낌새를 차리고 미역국 끓이고, 후다닥 시장 다녀오고 그렇게 달랜다고 했지만 못 달래죠. 술 이만큼 취했는데, 생전에 술 취하시는 분이 아닌데 그 날 처음으로 취했어요. 동시에 그분의 천사 이미지 그날로 다 날아갔습니다.

아, 인간은 자기의 시작점을 못 놓고 있구나, 시작점을.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데?’ 이걸 못 놓고 있는 거예요. 교회 백날 가도 못 놓고 있는 거예요. 안 죽었던 거예요. 안 죽으려고 아둥바둥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왜 죽어.’ 그걸 못 죽이는 겁니다. 본인이 나서서 자기 자신을 못 죽이는 거예요. 목 졸라도 안 돼요. 이 육신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단합니다. 우리의 똑같은 육신을 지니고 오신 분이 누구? 예수님이에요.

예수님도 마찬가집니다. 자기를 스스로 무가치하게 죽일 수가 없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도 통곡과 기도를 했는데 그 기도 내용이 뭐냐? “아버지의 뜻대로 이 잔을, 저주를 마시도록 저를 독촉해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한 겁니다.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육신대로 저주받아야죠. 지옥 불을 받아야죠. 당연한 거잖아요. 그게 뭐 이상합니까? 우리가 태어난 게 지옥 가기 위한 육신인데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죄인을 구원하러 왔지 애당초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에 없는 이야기에요.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죄인임을 모르고 자꾸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중간 과정에서 나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13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이렇게 되어있어요. 백날 자기가 죽어서 들어가 봐야 도로 토해내요, 이 대자연이. 왜 토해내는가? 이 대자연은 시작점이 아버지와 아들이고 끝도 그렇게 마감돼요.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중간에 툭툭 튀어나온 거예요, 죄인으로서. 죄 있는 육체를 가지고 튀어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중간 과정에 튀어나온 것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심판을 내리면서 그 중간에 대한 운명은 주님한테 있지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사랑이 안 됩니다. 사랑은 주님이 하시지 ‘너희들이 날 사랑한 게 아니요.’라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자꾸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노림수가 있어요. 주님을 사랑해서 구원받기 위해 하고자 하는 거예요. 누구? 나. 내가 뭔데요? 이게 한 알의 밀알이 안 죽은 거예요. 살아 있는 밀알이 괜찮은 밀알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천국을 운운하고, 구원을 운운하고, 성경의 개념들을 운운하고 있는 겁니다. 종교적 용어들을 남발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지금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아셔야 돼요. 이 본문 멜기세덱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은 뭐냐? 우리 안에서 예수님 본인을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게 아니고 예수님 본인을 구원하는 겁니다. 어떻게 구원하는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나를 만들어서 끄집어내면 그건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 이 마귀가 지독하죠. 이 마귀가 우리 자신 안에 주님을 끄집어내는 작업에 대해서 알아요. 마귀가 눈치가 빠르거든요. 눈치가 백 단입니다. 꼭 김종필 같아요. 정치 9단. 아주 눈치가 빨라요. 마태복음 23장 1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저주 있는 자들이란 이런 유형이 저주 있는 자들이라고 주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천국에 문이 있다는 것, 창세기 3장에 보면 문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이미 생명나무, 선악과로 완전히 갈라졌기 때문에 출구, 입구가 없습니다. 그런데 눈치 빠른 이 바리새인들은 이 천국 문을 주께서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마귀가 이 바리새인을 통해 가만있지 않고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천국 문이 있으면 그 문 쪽을 마귀가 알고 그 앞에 딱 서 있어요. 서서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쪽 방향 말고요, 저쪽 방향입니다.” 하고 소개해주는 거예요. 그게 15절에 나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자, 지옥 자식이니까 지옥 있는 거 맞아요. 천국 문이 있으니까 천국이 있는 것 맞습니다. 문제는 어디를 주시해야 하느냐면, 왜 천국 문으로 알아서 못 가는지 이유를 간파해야 돼요. 마귀가 인간에게 준 것은 뭐냐? ‘네가 있으니까 네 존재를 시작점으로 잡고 일을 개시하라’는 거예요.

한평생 우리 안에 들어있는 생각의 핵심이 그거에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 일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결실을 내야된다는 거예요. 이거 빼면 우리는 바보예요.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있어요. 하루 종일, 24시간 생각하는 게 뭐냐? ‘나는 여기 있고 내 일이 있으니까 내 일을 함으로써 어떤 결실을 맺는다.’ 이거 외에는 뭐, 있습니까? 없어요.

그럼 내 일을 내가 알아서 하지 남이 해 줍니까? 남이 해 주지 않잖아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내 인생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그 생각, 그 생각을 가진 사람 중 하나가 성경에 누가 나오냐면, 사울 왕이 나와요. 사울 왕은 자기 일이 뭐냐?

사울 왕은 국가의 책임자입니다. 왕의 임무는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거예요. 대통령의 의무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겁니다.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고, 경제 발전을 시켜 국민들로 하여금 풍족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대통령 하겠다고 헌법 위에 손을 얹고,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따라서 사울의 일은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현재 블레셋의 침공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 왕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누굴 찾아갔는가? 엔돌이라는 지방에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거예요. 왜? 자기 일 해야지, 왜? 자기 일 한다고요.

대통령이 왜 무당 찾아갑니까? 왜 도사들한테 물어요? 국민들을 사랑해서 도사한테 묻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잘 되겠습니~까?” 묻는 거예요. 여러분이 대통령 해 보세요. 점쟁이한테 안 묻겠는가. 교회 권사들이 뭐 합니까? 짬짬이 무당한테 가는 거죠. 그것도 기독교 무당한테, 기도원에 가서 기독교 무당한테 점괘를 얻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내가 내 시작점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나의 시작점. 시작도 없고 끝이 없고, 우리는 그게 무서워요. 내게 시작점이 있다는 것이 그게 안심이 되는 겁니다. 내가 시작한 구원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거예요. 마무리 지으려고 신접한 여인에게 갔습니다. 그러니까 귀신한테 욕 얻어먹고요, “넌 잘렸어. 넌 끝났어.” 그렇게 욕 얻어먹었는데 그다음 구절이 재밌습니다.

사무엘상 28장 22절, 23절에 보면 이제 잘렸거든요. 잘리고 나서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그 여인 집에서 살찐 송아지도 잡고 해서 그걸 먹고 기력을 회복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가 힘들 때, 내가 이 세상에서 지치고 힘들 때 누가 나를 위로해줍니까? 누가 나를 위로해주죠? 마귀입니다. 마귀가 위로해주죠. 처음부터 시작 다시 하면 되잖아요. 시작, 시작을 다시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마귀는 한 알의 밀알이 다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한 알의 밀알이 상처 입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한 알의 밀알이 소리 없이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한 알의 밀알로 태어났으면 멀쩡해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멀쩡한 자를 기뻐하신다는 거예요.

그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나를 봐. 우리가 말씀 연구하니까 이렇게 복 받잖아.” 이것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 문을 가로막고 다른 방향, 천국 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전부 다 돌려보내는 겁니다. 열심히 살면 천국 간다고, 우리처럼 율법 말씀 지켜서 바르게 착한 사람 되면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천국 문에 온 자를 다 돌려보내는 거예요. 배나 지옥 백성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아니라면, 그게 반대 방향이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 한 것은 뭐냐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 방식이 틀렸다면 주님께서 이야기 한 건 뭐냐, 이 말이에요. 아까 장로님 기도하실 때 벌써 해답 나왔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마 5:3)

문제는 우리가 심령이 가난할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사실이에요. 왜 우리가 약합니까? 내가 뭐가 잘못되고 못나서 약한 자가 되는 거예요? 약한 자는 될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건 약한 자 정도가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도둑놈이 네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 이런 자의 특징이 뭐냐? 시작이 끝났어요. 끝도 끝났어요. 시작도 희망이 없어요. 끝났고 저주가 기다리고 있어요. 끝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걸 그 안에 키우는 겁니다, 주께서. “너 창기 그렇게 욕했지? 강도 그렇게 욕했지? 돈 많은 세리 욕했지? 왜, 너는 잘났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뭐라고 하냐면, “예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그들이 예수님께 왔어요. 열 명이 왔어요. 열 명이 올 때 누가 봐도 그 속에 아홉 명 더하기 한 명으로 열 명이 짜였다는 것을 그 누구도 몰라요. 그냥 열 명이에요. 누가 봐도 그건 문둥병 환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병을 낫게 해 줬어요. 낫게 해 주니까 열 명이 얼마나 좋았겠어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갔어요. 문둥병자 열 명이 온 것은, 나의 시작점은 멀쩡한 사람처럼 나도 건강해서 남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자,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는 그런 평가를 듣고 싶은 거예요. 멀쩡해서 멀쩡한 사람의 집합에 같이 평범하게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겁니다.

지금 문둥병 걸려서 저주의 병에 걸려 그들에게 무시당했으니까 다시 내가 원하는 나의 원천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그걸 원해서 주님 앞에 나와 도와달라고 했고, 도와줬고 돌아갔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얻었어요. 그러면 다시 그들은 예수님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 본인이 노리는 목적이 있었거든요. ‘멀쩡한 나, 시작은 괜찮았어. 인생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렇게 가버리면 되는 거예요.

뭐가 이상하냐면, 챙길 거 다 챙겼는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시 찾아왔어요. 와~. 주님도 의아했습니다, 주님도. ‘아니, 얻을 거 얻었잖아. 됐잖아. 너 원래 원했던 거 그거였잖아. 나보고 원했던 그거였잖아.’ 돌아온 한 사람은 이방 사람인데 무엇을 알았냐면, 과연 내가 문둥병에서, 저주의 병에서 나을 잽이 되는가를 자기가 발견한 거예요.

내가 저주받은 병에서 건강해야 된다는 그런 권리가 과연 내게 합당하냐, 이 말입니다. 병 고침이 내게 부합되는 조건이냐, 이 말입니다. 왜? 나는 이방인이고, 율법도 없고, 언약도 없고, 건강해 봐야 또 저주받을 게 뻔한데 내가 문둥병이나 고치려고 주님 앞에 찾아왔다는 이 자체가 이게 주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냐, 이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 올 때 주님을 왜 믿습니까? 뭐 얻을 거 얻으려고 온 거 아니겠어요? ‘나를 구원하는 거 아니면 누굴 구원해? 나 같이 훌륭한 사람을.’ 이런 마음 자세로 오는 게 아닙니까? 우리가 이 시작점 자체를 못 없앱니다. 우리 힘으로는 나를 못 없애요. 고집이 세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뜻은 나로 하여금 ‘없음’으로 만들 수가 있어요, 없음으로. 자살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뜻에 의해서 나를 아예 시작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시작이 없는 중간 존재로 만들어줘요, 중간존재. 시작에 의해 평가 받아야 되는 심판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려요. 내가 나의 시작이 될 수 없음을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온 문둥병자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네가 믿음으로 오늘 구원 받았다(눅 17:19)고 이야기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주님한테 능력 받아서 문둥병 고친 것이 구원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음을. 그것은 욕망이었음을. 그것은 천국 문을 가로막는 사고방식이었어요, 천국 문을. 방향이 틀려먹었어요, 방향이. 왜 나는 저주받아야 되고, 나는 왜 죄인이어야 하는 그쪽을 아는 방향으로 방향이 바뀌어져야 돼요.

그것은 바로 어디 안에서? 사랑 안에서. 이미 사랑을 받은 자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누구십니까?”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이 안돼요. 매사가 내 잘난 것에 집중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홀로 있어도 잘났고, 더불어 있어도 잘났고, 그런 사람 되고 싶기에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이 뭔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처럼 발각되는 것이 두려운 거지요.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사랑하게 되면 노림수가 없습니다. 자기 인생에 어떤 노림수라는 것이 없어요. ‘배 째라’지요, 그냥. 배 째라, 입니다. 오늘 본문에 어떤 방향성이 있어요. ‘네가 성도를 섬긴 것’, 그리고 ‘이제도 섬기는 것’, 그리고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는 것 등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 가신 멜기세덱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이제 남은 것은 뭐냐? 어떤 식으로 가느냐, 또는 어떤 식으로 했을 때 이것은 사랑 안에서 제 방향대로 천국 가는 방향이다, 또는 사랑 안에서의 방향이다, 를 어떻게 우리가 파악할 수 있고 알 수 있느냐의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어야 돼요. 상당히 힘든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힘든 사태가 어떤 것인지를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1절에서 23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인간은 중간생산물이기 때문에 저주를 하든 복을 내리든 그것은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기분 나빠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예 시작이 없는 존재에요.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자, 23, 24절이 문제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게 뭐가 충격적이냐? 문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시면서 이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너희들이 그대로 담고 너희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하라는 거예요. “스승님, 예수님,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 심판 내린다는 이야기를 하라” 그 말입니다.

그러면 누가 먼저 당황하느냐 하면, 제자들이 당황스러운 거예요. 왜?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정체에요. 이것은 노아 홍수의 물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도성을 싸그리 불로써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지금 파리에서 올림픽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메달 다 녹아버려요. 시상대마저 다 녹아버립니다. 금메달 열세 개 다 소용없습니다. 다 녹지요.

그러니 이것은 세상을 보는 안목 자체가 잔인해도 이것은 너무 잔인해요. 예수님은 그렇다치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예수님의 그 잔인한 안목을 우리도 같이 지녀야 된다는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라는 말이지요. 전도하는 사람이 “이 집에 불 심판 내리겠다. 가자.” 이걸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잔인해야 돼요, 도대체 어디까지? 진멸에 대한 잔인성을 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갖춰야 됩니까?

우리가 들었으면 “주님, 저는 빼주세요. 저는 못합니다.” 할 거예요. 이 세상이 불 심판 받아 마땅하다, 지금 그 이야기잖아요. 이 세상은 내가 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불 심판 받아 마땅하다는 그 생각을 우리가 갖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 진멸 받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가 진멸 받을 의사가 없어서 그래요.

창세기 32장의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혼자 남았을 때 밤중에 천사가 와서 야곱과 씨름합니다. 그럴 때 틈이 생깁니다. 하나님과 인간 존재 사이에는 틈이 있어요. 하나님과 죄인 사이는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인이기 싫어해요. 인간이고 싶어해요. 그래서 틈이 발생해요. 그 틈의 전쟁입니다.

새벽이슬, 시편 110편의 그 새벽이슬은 앞에 전쟁 이야기가 먼저 나와요. ‘주와 원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그 전쟁의 결과물로 새벽이슬이 나온다.’ 간단하지요, 성경. 인간은 이 세상 사람과 전쟁할 마음이 없어요. 이 말은, 내가 진멸 당할 마음이 없어요. ‘내가 왜 진멸 당해?’ 이런 식이에요. 그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의 문제점은 뭐냐? 자기를 지키려는 자기의 관점이 옳다고 계속 고집하고 있는 입장이에요. 그런데 밤중에 얍복 강가에서 천사가 와서 야곱과 씨름할 때 그 야곱의 태도가 온 힘을 다해서 저지하고 있습니다. 천사인 줄도 모르지요. 모르는데 어떤 사나이가 자기를 공격할 때 야곱은 그냥 대충 항복하는 존재가 아니고 온 힘을 다 끌어내서 안 지려고,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상대방보다 더 강하기 위해서 싸웁니다. 그것도 밤새도록 싸워요. 올림픽 나갔으면 금메달감이에요.

이게 우리 관점이고 야곱의 관점이에요. 천사의 관점은 뭐냐? 그 힘이 나왔던, 뽑아낼 대로 다 뽑아낸 그 힘, 그 힘이 나왔던 원천을 어퍼컷 한 방으로 내쳐버리는 것, 내 칠 때 야곱은 힘이 쪽 빠지면서 더 내놓을 힘이 없어요. 힘이 있었는데 그 힘이 한 방에 작살난 그 자리, 그 자리가 이스라엘이 계시는 자리가 된 거예요.

왜? 야곱은 지팡이를 집고 다니게 되었고 마지막에 야곱이 자기손자에게 축복할 때 다른 데가 아니고 오직 지팡이에 의지해서 축복을 했어요. 히브리서 11장 21절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즉 “너희들은 나처럼만 되어라. 왜 강자로 살려고 하느냐? 왜 남에게 안 지려고 해? 주제 파악도 못하고. 왜 실패하지 않으려고 해? 왜 그래? 뭐야?”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연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렸다고 되어있어요. 성경에서 그런 것이 잘 안 보이실 수가 있어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4)

이게 뭐냐? 한 알의 밀알이 아버지의 뜻대로 죽는 방법은 십자가 이것밖에 없어요. 십자가가 담긴 저주의 잔을 마시는 이 방법밖에 없어요. 나? 강도. 나? 창녀. 나? 세리. 나? 도둑놈. 내가 기대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나 자포자기. ‘주여, 시작을 시작으로 저에게 새겨주옵소서.’ 그 안에 들어온 예수님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우리를 껍데기로 사용해서.

그러기 위해서 그 절차가 뭐냐? 우리는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잔인해야 돼요. 잔인해야 됩니다. 그런데 교회나 세상은 뭐라고 합니까? 교회는 종교적인 용어들을 다 자기한테 뒤집어씌우지요. 세상에 나가면 윤리, 도덕적인 용어들을 다 뒤집어씌우지요. 학문에 가면 과학적인 용어들을 다 뒤집어씌워서 “그것은 과학적이 아니야. 어떻게 권투 하는데 남자가 끼어드는가? 여자 복싱대회에서 XY염색체가 왜 금메달을 따?”

남자는 금메달을 따버리고 중국의 여자선수(XX)는 실컷 얻어맞고 은메달. 그걸 뭐가 결정합니까? 남자도 여자도 아니에요. 과학이 결정하는 거예요. 과학용어로 완전히 진리를 도배를 한 겁니다. 과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진리는 그것이 진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용어, 윤리용어, 과학용어, 인간은 내가 여기서 시작하고 있음, ‘내가 여기 있음’부터 하니까 이게 단어 자체에 접근이, 진리에 접근이 안 되는 거예요.

단어를 쪼갠다고요? 단어를 쪼개면요, 아무것도 안 나와요. 인간은 그냥 나 여기 있음만 증명하기 위해서 단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단어를 쪼개면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생겨요. 여러분은 우습지 않겠지만 저에게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샹하이, 샹하이 트위스트~” 할 때 다른 사람은 중국의 지명 상하이를 말하지만 저에게 들리기는 상, 하의, 상, 하의…. 그냥 넘어갑시다. 상의(上衣), 하의(下衣), 합쳐서 상하의.

단어 자체에서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안 나와요. 능력이 안 나옵니다. 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잔인할 수가 없고, 나한테 잔인하지 않으니까 남을 자꾸 봐줘요. ‘저렇게 하다가도 착해지겠지. 교회로 돌아오겠지.’ 돌아오긴 뭘 돌아와요? 우리도 교회에 있는 것이 누가 데려와서 있는 건데 자기가 알아서 왜 돌아와요? 못 돌아와요. 예수님 어깨에 메여서 돌아오잖아요. 제발 좀 너 자신에게 잔인하라고.

그런데 성경에 보니 그 내용을 소개한 대목이 나옵니다. 사무엘하 12장 31절, 제가 성경 그대로 읽어볼게요. 다윗이 전쟁할 때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도끼질과 벽돌구이를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라”

전쟁에 나가서 다윗이 한 일이 뭐냐? 적국의 백성들을 슬근슬근 톱질해서 죽여버리고, 써레질을 해서 찢어서 죽여버리고, 도끼질을 해서 죽여버리고 그다음에 벽돌 구이, 벌건 벽돌 굽는 그 안에 집어넣어서 벽돌 구이가 되게 해서 죽여버린 거예요. 지져 먹고, 구워 먹고, 잘라 먹고…, 그런 식이에요. 누가? 다윗이요.

그런데 이것보다 더 센 것이 있습니다. 사무엘 하 8장 2절, 다윗이 하는 행동을 보세요.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사람을 죽이되 줄 자 가지고 두 줄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린다.

이것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느냐?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 나옵니다. 포로를 잡아서 침대에 눕힙니다. 키가 침대보다 커서 발이 나오잖아요. “침대가 안 맞습니다.” “톱으로 잘라.” 그러니까 우리는, 주께서 진멸하는, 불로 심판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이 시작점을 얻고 내 성과를 얻기 위해서 억지로 우리를 맞춰나가요. 맞춰나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비어져 나오는 발가락에 금가락지를 끼우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잔인함, 쫜인함, 주께서 아주 잔인하게 말씀으로 우리를 끊어내는 이유는 한 알의 밀알이 그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스스로 잔인하게 죽을 의사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주님의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이미 우리 손에 잔인하게 죽으신 분을 우리 안에 키우십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거기에 방향성이 있어요. 성도를 사랑으로 돌본다? 주님의 지체를 사랑으로 돌봤겠지요. 오늘 본문에 주님의 사랑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그것은 인간이 주님을 잔인하게 죽였다, 보다도 아버지가 아들을 잔인한 말씀, 진멸의 말씀으로 잔인하게 죽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천사를 만났을 때 야곱 자기 관점으로 생각하지 말고 천사의 관점으로 생각해야 돼요. “오늘 내가 야곱 죽인다. 잔인하게 죽일거야. 죽여야 네 안에 이스라엘 자라난다. 너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그러나 시작도 있고 끝이 있는 이스라엘을 네 안에서 내가 키울 거야. 그 이스라엘을 키워서 끄집어내면 너는 덩달아 구원되는 거야, 언약의 사람으로.” 이게 하나님의 멜기세덱적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걸 간추려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뭐로? 십자가의 사랑, 죽음을 집어넣어서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좋게 평가하고 마치 남한테 져서는 안 되는 대~단한 존재로 간주하면서 천국의 문이라는 문은 다 막아버리고 마귀로부터 위로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그래서 내 행복을 찾는 식의 이 거짓 삶, 이제는 십자가 앞에서 그게 거짓됨을 아는 성도가 되게 하시고 주님을 사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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