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성령에 의한 심판

아빠와 함께 2024. 8. 4. 19:17

성령님의 심판 

2024년 8월 4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6:3-8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말씀의 초보에 실은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안다고 해서 장성한 자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초보에 해당되는 내용이 도리어 본격적으로 ‘초보에 들었다고 자부하는 그 인간’을 공격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세상 보는 안목과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안목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의미를 못 놓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자기를 지켜내기 위한 용도로 여기고 다룰려고 합니다. 즉 자신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이미 저주 아래에 놓여져 있습니다.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습니다.

문제는 이 저주성의 끝이 하나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성향을 지녔다는 겁니다. 인생을 힘들게 살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해서 힘을 모아서 누구나 할 것없이 복수하게 됩니다. 이런 성향을 지닌 자들이 성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성경 자체를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말씀 자체를 가지고 자신의 의미를 지켜내는 용도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미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미는 주님에게서 나온 의미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생명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 애쓰고 힘써도 지옥불에 안 들어갈 가능성은 0%입니다.

모조리 다 들어갑니다. 그런 육신을 부모로부터 물러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값을 해야 합니다. 이사야 53:1-3에 보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치와 의미와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의 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으로 찾아드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비췸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가 죄인을 성도되게 하십니다. 성령의 내주가 되려면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행하신 바 그대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몰아세웠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내부 쪼개짐’입니다. 출애굽기 17: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모신 일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시한 방식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 17:6) 사람들 보기에 모세가 바위를 치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원망에 맞아 쪼개지는 상황을 연출하십니다.

하나님 내부가 쪼개지는 것, 곧 하나님께서 죽으시지 아니하면 인간에게 줄 생명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이 원칙은 오늘날 성도에게도 동일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포장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말씀을 뒤덮을려고 합니다. 결코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쪼개질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미가 소실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평생 살아온 자기 동영상을  귀하게 여겨 그 동영상 내용을 기어이 끌고 이어가려고 남은 세월을 보낼려고 합니다. 하지만 시편 39:5-6에서 하나님께서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즉 인간은 아무리 일생을 길게 끌어가봤자 허송세월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미는 예수님의 쪼개짐에서 나오며 그 나오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이 세상을 두 노선으로 정리하십니다. 멜기세덱의 내용의 핵심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개입할 어떤 여지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 노선이란 

인간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범죄했습니다. 따라서 거기에 따른 인간은 저주 안에 갇혀 있습니다. 혐의도 모르고 그냥 갇힌 겁니다. 체포된 적도 모르는데 감옥생활하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탈옥하고 싶어도 탈옥할 방법이 없습니다. 탈옥은커녕 도리어 자기 의미를 지키기 위해 사정없이 단호하게 타인을 공격합니다.

또 하나의 노선은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 성과를 다 이루었음을 나타내는 노선입니다. 쉽게 말씀 드려서 큰 축구 국제 시합에서 경기의 공정성을 위해 VAR이라는 판독 기계를 두고 진행합니다.

인간 심판의 판독이 애매할 때에 본부석으로 달려가서 축구 경기가 담겨 있는 비디오를 확인합니다. 그동안 축구장에서 사람들은 뭘하지요? 그냥 뭘하던 무의미합니다. 회개를 하든 타락을 하든 다 무의미합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옥같은 세상에서 천국가기 위해서 뭔가를 하지만 심판이 빠진 이상은 그 노력을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성은 인간의 어떠한 시도에도 벗겨내지를 못합니다. 따라서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합당합니다. 천국에 간 성도들의 특징들은 바로 VAR 판독에 의해서 죄 사함을 받은 대상이다는 사실로 근거한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성과를 위해서라도 성령님께서 성도에게는 이 동영상을 아예 내부에 심습니다.

인간들이 결사적으로 노력하고 수고하는 모든 것들이 전혀 자신의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그 필름을 무한 반복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 히브리서 6:3-8를 무한반복시키는 겁니다. 이미 우리 자신이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인식되게 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우리 내부를 늘 쪼개시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십자가의 공로만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을 상대로 농락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강-히브리서 6장 3-8절(성령에 의한 심판)240804 - 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6장 3-8절입니다.

히브리서 6:3-8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회개하지 아니한 자는 마지막에 지옥 불, 불사름의 저주 받아 지옥 불에 들어간다, 이것이 그리스도 도의 초보에 해당되는 게 아닙니까? 여기 6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했는데 초보에 해당되는 게 아니라 초보에 해당되는 건 따로 있고 장성한 게 따로 있다면, 우리는 예수 안 믿으면, 십자가 안 믿으면 지옥 불에 간다는 것을 익히 아는 초보에 해당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러면 장성한 내용이 무엇인가가 궁금한 거예요.

그 장성한 내용을 보니까, 초보 같은데요? 예수 안 믿으면 지옥 불에 간다는 그걸로 되풀이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뭐 장성할 만한 게 뭐가 없는 것 같아요, 여기서.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속이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됩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십자가라는 것이 초보에 해당 된다고 생각하고, 익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끝에는 여기 6절에 보면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가 또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는 이미 아니까 그건 제키고, 그건 초보에 해당되고 이제는 “십자가 이야기 하지 마세요. 그거 다 아니까.” 이렇게 줄거리가 진행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또 다시 십자가를 거론하고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 믿지 않으면 지옥 불에 간다는 것은 초보에 해당되는데 8절에 보니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하는 거예요.

결국 이 이야기를 합쳐보면 ‘예수님 십자가 믿으면 구원 받고 하나님 믿지 않고 예수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자, 지옥 간다고 알고 있는 너희들? 불사름이 되리라.’ 이런 뜻이죠. 십자가 알고, 하나님 알고, 하나님 믿고 하는 자들이 어디 간다? 결국엔 지옥 불에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여기서 뭐가 빠져 있죠? 장성한 자의 특징은 뭐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어떻게 이용 해먹을 것인가?’ 그 입장이 아니고, 장성한 자의 입장은 ‘내가 하나님 믿고 성경 말씀을 배워서 나 죽어서 천국 가는데 이 성경을 이용하겠다.’라는 그 심보, 그 심보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신 거예요, 그 심보 때문에.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하는 이 자세, 이 태도, 이 태도가 잘못됐다는 겁니다. 십자가 나오니까 믿으면 되고, 하나님 나오면 믿으면 되고, 그래서 내 단도리, 나 죽고 난 뒤의 내 운명의 단도리, 내 미래에 대해서는 이제 확보를 했다, 라는 이 의식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할 때에 이 대목부터 시작해서 8절의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지금 주신 이 성경 말씀이 우리 내부로 들어오질 않았던 거예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하면 우리는 그 밑에 곁가지, 가장자리를 불쑥 내미는 겁니다.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성경을 보면서 내가 주인공이 된 거예요. 그런데 여기 6장 4절에 보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할 때 이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엄청 오해를 한 겁니다. 잘못 생각한 거예요. 성령의 비췸을 얻는다는 말은…,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죠.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일은 어떤 식으로 다가왔느냐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러 왔죠. “성령의 비췸을 받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육체를 가지고 사람 모습으로 인간으로 한 번 나타난 적이 있고’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나타난바 되었었는데, 그렇게 비췸을 얻었는데, 빛이 어둠을 비췄는데 어둠은 깨닫지를 못하는 거예요.

깨닫지도 못했는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냐면, 예수님을 상상해가지고 깨달았다, 라고 자기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예요, 이걸. 왜? 자기 구원에 미쳐가지고. 사는 게 힘드니까 죽고 난 뒤엔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성경 어디에 해답이 있겠지.’ 하고 ‘해답이 있으면 내가 믿으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성령이 나오려면요, 예수님의 존재가 깨어져야 돼요. 예수님의 존재가 깨어져야 거기서 성령이 나와요. 우리에게 성령이 비췸을 얻는 거 말고 우리에게 내주(內住),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려면 우리는 깨어져야 돼요. 깨여져야 된다고요. 성령이 나오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깨어지듯이 똑같이 우리에게서 성령이 나오려면 우리 자신이 깨어져야 돼요.

이게 안 깨진 상태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을 천 독 만 독을 해도 전부 다 못 알아듣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왜? 내가 먼저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해할 때 의도가 있어요. ‘좋은 거니까 나에게 도움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겠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쪼개기까지 한다. 쪼개지는 거예요. 성령이 말씀이 함께할 때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쪼개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내주, 안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비췸을 얻는 것은 그냥 조명발이에요, 조명발.

여러분 성경 말씀 들을 때 간지럽지 않던가요? 간지러울 땐 긁으면 되죠. 혹시 성경 말씀 묻었습니까? 훅 불면 날아가요. 교회 와서 성경 말씀 좀 들었죠? 문 열고 나가면 전부다 그냥 세상 이야기고, 정치 이야기고, 우리끼리 이야기에요, 그거. 말씀 이야기 안 나와요. 말씀이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버젓이 살아 있어요. 쪼개진 적이 없어요. 내가 살아있다니까요. 이걸 뭐라고 하냐면, 나의 의미에요. 나의 의미.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주님의 의미가 아니면 우리에게 다른 의미는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의미가 내 속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에겐 생명이 없어요. 생명이 없는 자를 뭐라고 하냐면, 오늘 본문 8절에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저주의 불에서 나왔어요. 신명기 5장 24절 25절에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모세는 시내 산, 화산 속에 40일 동안 들어갔다가 나왔어요. 모세는 불 속에서 나왔는데 그 모세를 보고 있는 우리들은 모세 얼굴의 영광도 못 볼 뿐더러 지금 모세가 노리는 게 뭐냐, “나 불 속에서 나왔다. 말씀 들고 나왔다. 내가 불 속에서 들고 나온 말씀을 너희에게 줄 테니까 너희도 불 속으로 들어가.” 이걸 지금 모세가 율법에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25절에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 5장 25절에. “왜 살려는 우리를 굳이 말씀으로 죽이려고 하십니까?”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어디서? 화산 밑에서요. 그 모세 앞에서요. 이게 말씀이 영글어 내놓은 현장이잖아요.

안 죽으려고 하니까 말씀이 간지럽죠. 침투가 안 되는 거예요, 우리 내부로. 살려고 하니까. 튕겨 나가니까요. 지금은 내 안에 나의 존재 의미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서 우리는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나에게 어떤 것이 유리하고 이득이고, 어떤 것이 불리한지의 그 자기의 이익을, 소득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성령은 성령의 생각이 따로 있습니다. 성령의 생각은 예수님의 쪼개짐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하늘의 의미를 우리 안에 심어주는 거예요. 성령께서 예수님이 활동할 때 어느 인간도 예수님을 알아보질 못 했습니다, 어느 인간도. 제자들도 물론이고요. 예수님의 생각을 조금도 알지 못했어요.

그러나 성령의 비췸을 받고 알게 된 사람이 있었죠. 그 사람을 가지고 초보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 회개하고 나왔던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은 알아요. 뭘 아는데 뭘 빠뜨리고 있냐면 십자가라는 걸 빠뜨려요. “하나님 덕분에 병이 나았고 하나님 덕분에 귀신 나았고 하나님 덕분에 우리 가정이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데서 멈추면 초보에요.

그런데 그 모든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이 예수님 자신이 쪼개졌다는 사실, 거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모르면 그건 장성한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하고 같이 이야기 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말씀 듣는다고 구원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합류한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충실하게 따르던 마리아 세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몰랐어요.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빈 무덤인데 ‘무덤에 예수님 시체나 잘 있나 보자’ 이런 수준이었습니다. ‘나 살아있고 예수님은 죽어있으니까 죽은 예수나 잘 돌보자.’ 이 수준이 소위 말하는 3인방 마리아에요.

성경에서 보기에 그만한 배려도 대단한 것처럼 보이죠. 본인이 쪼개지는 것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하지 성령 없는 상태에서는 본인이 쪼개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를 쪼개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 받을 때 끝까지 어디로 가느냐면 십자가 죽기까지 끌고 가요, 십자가 죽기까지.

우리는 “어~, 안 됩니다. 교회 까지는 올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우리는 자꾸 성령께서 나를 쪼개기까지 하는 것을 적극 거부해요. 십자가에서 왜 예수님이 굳이 사망해야 합니까? 왜 죽어야 되죠? 그건 예수님이 우리 인간 육신의 몸을 지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육신의 몸이 어떤 몸인데? 우리 자신이 육신을 지녔다는 말은, 우리가 갇혀 있다는 말이에요. 우리 육신에 갇혀 있어요. 우리가 구금 상태에 있습니다. 혐의도 모르고 그냥 무의미에 갇혀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그 육신이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미 죄악 된, 저주가 뿜어져 나오는 육신 속에 네가, 자아가 갇혀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해서. 그 창세기 3장부터 줄줄이 시작된 그 육신을 우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탈옥이 안 된다는 거예요. 성령에 비췸을 얻는다? 예수님께서 오셨다? 성령이 찾아왔다? 전부다 외부적인 거예요. 외부적이라는 말은, 네가 현재 갇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어디에 갇혀있는가? 육신에 갇혀 있죠. 육신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의미도 아닌데 자꾸 의미라고 우기는 거예요. 무의미한 것에 우리가 갇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히브리서 6장 3절에서 8절의 내용은 뭐냐? 창세기 3장에서 이미 저주받은, 저주에 갇혀 있는 인간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성령의 비췸을 받고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 육신을 갖고 있어요. 사무엘상에 보면 10장에 사울 왕이 나와요. 사무엘상 10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는데 그것도 엄청나게 크게 임했어요.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 그 주변의 사람들이 누구나 이야기 했을 거예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이 나중에 악신 들릴 일은 없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편하게 생각했죠.

그러나 그렇게 예언을 하고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옷도 벗어가면서 예언하던 그 사울 왕이 사무엘상 18장에 보면 10, 11절에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야료(惹鬧)는 놀린다, 이 말이죠.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번 피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거룩한 신이에요. 하나님의 거룩한 신이 충만하게 임했던 그 사울 왕에 악신이 임해 다윗을 그냥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고 창을 들고 다윗을 향해 날려버립니다. 다윗을 벽에 창으로 꽂아서 자기 손에 맥없이 죽어있는 그 모습을 사울왕은 보고 싶은 거예요. 그게 악신 걸린 자의 목표입니다. 목적이에요. 자기 존재의 의미가 그거에요. 나보다 더 인기 있는 왕이 등장하는 것은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나의 의미가 분명히 있는데 왜 나의 의미를 손실 시키는, 삭제 시키는 일은 내가 아무래도 참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떤 70대 노인이 같이 아파트에서 노는데 어떤 60대 아주머니가 요구르트를 다른 사람들은 주고 나는 안 준다고 정글 칼을 그 여자에게 휘둘렀어요. “나한텐 요구르트 안 사주나?”

그 요구르트 얼마 한다고요. 500원이면 살 수 있잖아요. 요구르트 안 준다고 정글도로 사람을 죽여 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노인 나이가 70대라는 거예요. 그러면 1살 때부터 70년 동안 그 사람 어떻게 살았습니까? 누구든지 내 의미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는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 사람이 교회 간다고 해서 인간성이 달라질까요? 변할까요? 성경 말씀 보면 달라집니까? 비췸을 얻고 은사를 맛보면 달라집니까? 선한 말씀을 내세의 능력을 맛보면 달라집니까? 인간은 달라지지 않아요. 왜 그러냐면 인간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탈옥되는 게 아니거든요. 자신의 육체가 자기의 의미 세계에서 본인이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요.

그런 인간이 어딜 가요? 인간은 자기가 안 쪼개집니다. 오히려 자기를 강화 시키죠. 혹시나 흠집 날까봐 강화 시키는 거예요. 그게 평소에 나오는 행동이고 태도에요. 주님은 쪼개졌는데 인간은 안 쪼개집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광야에 데려갑니다. 광야에 데려가니까 인간의 본성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물이 없다, 양식도 없다, 고기 먹고 싶다, 불평불만이 다 나옵니다. 왜 우리를 죽이려 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창세기 3장 이후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로 태어나는 거예요. 어떤 개 키우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우리 검둥이가 점점 더 색깔이 없어진다.” 죽음을 그보다 잘 표현한 게 어디 있겠어요? 탈색하는 거예요. 검둥이인데, 새까만 개인데 개 색깔이 회색으로 변하면서 없어져요.

개 색깔이 없어지는 건 알면서 본인이 없어진다는 사실은 왜 모르죠? 인간은 무의미함에 갇혀 있으면서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네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미 너는 죽으리라’는 것을 그대로 실현해 보인 거예요. 뭐가 문제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문제가 하나도 없어요. 죽은 인간 죽이는 게 뭐가 그리 문제입니까? 모기 한 마리 죽여 놓고 여러분 애곡하십니까? 집에 바퀴벌레 죽여 놓고 그게 슬퍼서 어쩔 줄 몰라요?

바퀴벌레를 왜 죽이고 모기를 왜 잡습니까? 그 바퀴벌레 모기가 내 의미 내 행복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행복을. 그러면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바퀴벌레 모기 치러 오신 거예요. 나를 죽이라, 이 말이에요. 나를 죽여라. 네 속에는 나를 죽이는 악신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그걸 까발리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넌 나를 죽이고 싶어 환장해 놓고 뭐 믿습니다, 찬양 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무슨 그런 개소리를 다 하고 있는지…,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그런 거짓말이. 이사야 53장 1절에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아무도 하나님을 알아볼 사람도 없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고 해서 알아볼 사람 없어요. 아무도 모릅니다. 말씀을 주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아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본인의 의미로 가득 찼는데 무슨 하늘의 의미를 알아요.

다시 히브리서 6장으로 돌아와서 6절에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성령의 비췸을 얻고 세상으로 빠졌습니다. 흔히 말하는 시험 들었습니다. 시험 들었는데 한 5년 뒤에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교회 나왔습니다. 이거 회개입니까, 회개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인간이 선한 말씀으로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는 다시 회개하지 못한다고 했거든요? 다시 회개를 못해요. 그런데 여기 나오는 단어 타락, 회개를 인간은 자기 구원 위주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서, ‘전에 9살까지는 교회 나왔는데 그 다음부터는 세상이 좋아서 교회도 안 다니고, 또 고3 됐다고 교회도 안 다니고, 대학 다니면 교회 나가야지 했는데 대학 가고 술 마시느라 안 다니고, 그래서 또 내가 결혼하면 열심히 가야지, 결혼을 또 불심에 열심인 여자를 만나서 교회 간다고 하니까 나 죽이고 가라고 해서 또 교회 못 나가고 그랬습니다.’ 아내 죽고 나서 또 교회 나온다고 하면서 ‘하나님 천부여 의지 없어서 이제 손들고 교회 나옵니다. 전에는 타락 했었지만 이제는 회개해 돌아옵니다.’ 어디서 구라를 또 하고 있어요.

인간은 타락했으면 회개가 없다는데요? 도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어떤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게 누가 좋아하는 의미에요? 자기 천당 가려는 의미 아닙니까? 그게 탐욕 아니에요? 그게 욕심이에요. 성경대로 해요, 성경대로.

그래가지고 ‘40대에 회개해서 교회 왔는데 와서 집사 열심히 하니 교회에서 승진이 돼서 장립집사 되어서 열심히 하는데 50대 돼서 사업 부도나고 부끄러워서 교회 안 나가고 그 다음부터 술 먹고 그랬다. 그러다가 60대 돼서 다시 회개했다.’ 회개를 몇 번 한 거예요? 타락 두 번 했고 회개 두 번 했죠. 도대체 회개를 7번 하고 7번 돌아올 수 있습니까? 말씀을 가지고 아주 장난을 쳐요, 장난을.

타락해도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받아준다고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러면 여러분들이 편리하게 ‘고3이니까 교회 안 가도 된다.’ 또 이제 불교 여자 만났으니까 일단은 부부 관계가 좋아야 하니까 ‘하나님 당분간 10년 동안은 교회 못나가겠습니다. 10년 뒤에 나가겠습니다.’ 이런 통박을 굴리죠. 굴려서 그래서 10년 뒤에 교회 나왔다 칩시다. 그게 무슨 회개입니까? 회개라는 근거가 어디 있어요.

그렇게 해서 부끄러워서 또 교회 못나왔다, 이 말이죠. 이혼 했다고 교회 못나오고, 부끄러워서 교회 못 나와요. 나중에 싸워서 교회 안 나오고 ‘10년 뒤에 나갈게.’ 그러니까 지금 나올 수 있는 회개를 부끄러우니까, 내 의미가 스크래치 나서 부끄러우니까 10년 뒤에 다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온다는 것을 본인이 지금 미리 연출하고 있는 거예요. 뭐 장난도 아니고, 갖고 노는 것도 아니고요, 하나님을.

스타트 업, 새로 시작하는 기업이 기업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3퍼센트랍니다. 백 개 기업 생기면 97개는 망하고 3개만 그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자영업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인간이 천국 갈 수 있는 퍼센트는 몇 퍼센트입니까? 0퍼센트에요. 없어요.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범죄 했는데, 범죄 했으면요, 그냥 죄 지은 게 아니에요. 범죄 한 그 죄 성이 그대로 살아있어요.

이 범죄 한 마음이 나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 지배, 나를 가둬둠에서 내가 내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0퍼센트에요. 구원 받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열심히 일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최종 의미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교회 나오고 성경 보는 거 다 헛짓입니다.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왜냐? 십자가가 모든 인간의 구원을 막는 십자가기 때문에, 막는 십자가기 때문에. 네 주제 파악도 안 된 채 천국 올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아무리 천국 오려고 해도 자기 주체 파악이 안 돼요. 그러니까 0퍼센트에요. 구원 받을 가능성 0퍼센트입니다. 0퍼센트인데 성령이 그 0퍼센트를 그대로 가지고 똑같이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성령이 찾아오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는 것과 똑같은 취지에요. 아무도 네 힘으로 성령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성령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12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12장 32절에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다시 읽습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사하심, 용서하심의 가능성이 있다, 이 말이죠. 있는데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이에요. 예수님을 언급할 때는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언급할 때는 사하심을 얻지 못함,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제 용서 받을 기회는 없다는 거예요. 용서 받지 못하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원래 우리는 용서 받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0퍼센트, 빵 퍼센트입니다. 구원 받을 수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처사에요. 뭐 여기서 불만 같은 게 있으면 안 됩니다. 목사가 되었고, 신학교 나왔고…, 무슨 엉뚱한 소리 하고 있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무 소용없는데요.

지난 금요일 우리 집사님이 챗GPT를 들고 교회에서 만났어요. 가까이 계시는 집사님. 챗GPT 가지고 성경의 모든 신앙, 모든 성경 구절을 설교해 주고 강의를 해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물어보라고 했어요. 인공지능에게 히브리서 6장 3절에서 8절을 가지고 물어봤습니다. 성령을 받고 타락할 수 있느냐, 아니면 성령을 받고도 타락할 수 없느냐, 그 질문을 했어요. 인공지능이 뭐라고 이야기했게요?

인공지능이 이런 취지를 이야기 했어요. ‘성령을 받고 타락해도 다시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살면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이게 한국 교회 모든 목사가 가르치는 거예요. 그게 챗GPT, 전 세계 모든 목사가 다 그렇게 가르쳐요. 챗GPT한테 물어보지 말고 성령한테 물어보세요.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성령의 답변은 간단해요.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얼마나 간단해요. 얼마나 간단합니까?

“예수님 믿으면 구원 받습니까?”라고 예수님한테 물어보세요. 뭐라고 답변합니까? “아무도 나를 믿을 수가 없다.” 얼마나 간단해요. ‘너는 네 식대로 네 의미대로 평생 살아가라. 그리고 마지막에 지옥 불에 들어가라.’ 이게 주의 뜻이에요. 이게 주의 뜻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는 사람 아브라함과 이삭과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합격해서 어떻게 갔느냐? 주님의 말씀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쪼개버렸죠. 쪼개니까 그 안에 성심이 들어있고, 성령이 들어있고, 말씀이 들어있는 거예요. 쪼개니까. 출애굽기 17장에서 그들이 광야에 갈 때에 물이 없어요. 양식이 없어요. 특히 물이 없어요. 물이 없어서 물 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했습니다.

출애굽기 17장 6절에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무슨 말이냐면 이 말이에요. “네가 지팡이 들고 가거라. 그리고 그 반석 위에 내가, 하나님의 이름이 설 테니 네가 지팡이를 들고 그 반석 위에 서 있는 나를 쳐라.” 이 말입니다.

그것이 신약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치는 거예요. 치면 예수님이 쪼개지고 그 쪼개진 거기서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의 본성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밖에 없어요. 하나님을 죽이는 이 본성이 악마로서 이미 장착된 채로 태어났어요.

그러니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을 죽이는 겁니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에 그냥 하나님을 죽여야 돼요. 하나님을 죽이게 되면 그때는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나님을 죽인 자가 돼요. 그럼 어디에 딱 맞추느냐 하면 “이제 네가 죽어서 지옥 불에 들어가도 할 말 없지, 그렇지? 네가 나를 죽였잖아. 할 말 없지 그지? 딱 그게 너야. 쓸데없이 교회 50년 60년 다니고 뭐 하고, 군소리 하지 마. 딱 그 모습이 바로 네 모습이야.”

하나님을 쪼갠다는 것은 선빵 날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몸에 손댈까 싶어 먼저 선빵 날리는 거예요. 때려버리는 거예요. 나는 계속해서 건재하고 싶은 거예요. 열왕기하 13장에 보게 되면, 수련회 때 했던 대목인데요, 아람 나라, 지금의 시리아죠, 헤즈볼라죠. 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포위했어요.

그래서 요아스 왕이 벌벌 떨어가지고 쫄았어요. 지금 엘리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으니까 가서 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나라 좀 살려달라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죽어가며 힘든 가운데서 이야기해요. “활을 잡으시고 동쪽 문을 열고 아람 쪽의 창문을 열고 활을 쏘세요.” 쏘니까 “또 쏘세요.”

쏘고 난 뒤에 “이제 남은 화살을 가지고 땅을 치세요.” 땅을 쳤어요. 탕, 탕, 탕! “세 번을 치세요.” 치니까 그 때 죽어가는 엘리사가 화를 내면서 “왜 세 번을 치십니까? 다섯 번 쯤 쳤으면 안전할 텐데 세 번 쳤으니까 또 쳐들어올 겁니다.”라고 이야기 했어요.

이 대목을 한 번 보세요. 이게 뭐냐 하면, 다섯 번 치라고 했는데 세 번을 쳤다면 내가 지적 받아도 할 말이 없는데 그냥 다섯 번이니 세 번이니 말이 없었으니 그냥 쳤어요. 그냥 쳤는데 세 번 쳤다고 해서 나무라는 거예요. 더 치지 않았다고. 그러면 다섯 번 쳤다면 또 일곱 번 안쳤다고 나무랄 거예요. 그러면 일흔 번의 일곱 번, 490번을 쳤으면 491번을 안 쳤다고 또 나무랄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가 몇 번을 용서하면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하니까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어요. 일흔 번의 일곱 번, 490회 용서하면 용서 끝나는 거예요? 인간의 의미는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미에 도달할 수가 없어요.

그러고 난 뒤에 엘리사가 죽었습니다. 엘리사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나랑 같이 죽자는 이야기에요. 당신 입장이나 내 입장이나 그냥 죽으면 된다는 거예요. 엘리사가 죽고 난 뒤에 장사지냈는데 어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마다 그 사람이 죽은데서 살아났어요. 열왕기하 18장 21절의 말씀입니다.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살아있다는 자체가 생명을 훼방하고 있고 죽었다는 자체가 죽은 생명을 살린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살아있는 나를 교회 다녀서 어떻게 천국 보낼까 생각해서 교회 나오고 있는 거예요. 이게 사기지 뭐, 이건 사기단체에요, 사기단체. 살아가는 자체가 사기에요. 이게 거짓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으니까 이제는 타락하지 말아야지, 왜? 타락했다가는 다시는 회개하여서 되돌릴 수 없기에 그렇다. 그렇게 되면 나만 손해이기에 이제는 타락하지 말아야지. 열심히 제대로 잘 사는 이것이 바로 초보를 버리고 장성한 자에 이르는 하나님의 성도의 참된 모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본문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에 돌이킬 수 없는 두 개의 노선을 제시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몸과 마음 전부다 이미 타락했어요. 그 타락이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이에요. 인간이 바르게 산다고 타락이 취소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타락한 그 근성, 그런 성격을 가진 육신을 지닌 한 이 타락은 지옥 불에 갈 때까지 끝까지 타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중간에 예수 믿고 회개하고 백날해도 육신의 타락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하다 보니 가슴이 아파. 가슴이 아프니까 ‘아, 이게 사랑이 아닌가? 이렇게 아플 수가 없는데. 그래. 결론 내렸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거 누구위주입니까? 자기위주잖아요, 자기위주.

김 광석이 그렇게 노래했지만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구원, 하나님, 천국, 거기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야기 안할까요? 똑같이 이야기해요. ‘아이고, 교회 다니고 말씀 들어보니 안 돼, 안 돼, 나는 못해. 난 포기했어.’ 포기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포기할 권한도 없어요. 뭘 포기해요. 뭘 했어요? 한 게 있어야 포기를 하지요. 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포기를 해요.

모든 인간은 그냥 끝까지 갑니다. 또 다른 노선이 있어요. 그게 뭐냐? 예수님의 성과입니다. 예수님의 성과도 돌이킬 수 없어요. 그래서 이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을……, 5장에서 멜기세덱 이야기했잖아요. 6장 나오고 7장에서 멜기세덱 이야기합니다. 멜기세덱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냐 하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이것은 한 번 진행되면 돌이킬 수가 없는 겁니다. 두 개의 돌이킬 수 없는 노선을 두 개 다 알리기 위해서 말씀을 줬는데 그 말씀이 두 개의 노선으로 나오는 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쪼개짐을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예수님 안에는 복도 있고 저주도 있고, 예수님 안에는 천국도 들었고 지옥도 들었다.

그런데 인간이 나서서 예수님을 쪼개버렸어요. 쪼개니까 쪼개진 그 현장에서 영원한 복도 나오고 영원한 저주도 나오고 두 개의 노선이 둘 다 나오는 거예요. 둘 다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어느 쪽에 속하냐를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다는 입지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일관된 예수님에 의해 이미 이루어진 성과에 대해서 우리가 끼어들 자리가 전혀 없어요.

이게 이런 말이에요. 올림픽 축구를 합니다. 두 나를 대표하는 팀이 죽어라고 운동장을 뛰지요. A팀이 B팀에 한골 넣었습니다. 응원단부터 해서 A팀은 난리가 났어요. 드디어 8강에 올라간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 때 심판이 “잠깐!” 하고 본부석으로 뛰어가요. 잠간. VAR(Video Assistant Referees)을 보러 간 겁니다.

그걸 보고 난 뒤에 주심이 이런 행동을 해요. 가슴 앞에서 양손을 들어 사각형을 그리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방금 VAR을 보고 왔다는 거예요. 최종운명을 보고 왔다는 겁니다. 심판이 그걸 보고 왔을 때 그라운드에는 축구공과 함께 22명의 선수가 있고 벤치에 감독과 코치가 있고 그 뒤로 관중들이 있어요.

그들의 모든 행위와 움직임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아무 의미 없어요.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 낳고, 키우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태어나고, 죽고, 요양병원에 가고…, 아무 의미 없어요. 왜냐? 주님께서 이거 보라는 거거든요, 이거, VAR, 이거 보라고 하는 거예요.

회개 다섯 번 했습니다, 하는 그런 것 아무 소용없어요. 심판이 VAR 보러 갈 때 선수들은 공 가지고 그냥 장난치고 놀고 있어요. 축구 안합니다. 왜? 결과가 안 나왔으니까요. 결과 딱 보고 난 뒤에 “페널티킥 무효!” 또는 골 넣은 것 오프사이드, 무효! 이게 바로 예수님의 성과입니다. 예수님의 성과에요.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VAR 들어 있습니다, VAR. 녹화필름이 들어 있어요, 재방송용 필름. 창세기 3장부터 해서 요한계시록까지 다 들어 있어요. 그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고요. 우리가 얼마나 나 위주로, 교회 나와도 나 위주로, 살아가도 나 위주로, 나 안 다치고 싶고, ‘나 다치기 싫어’ 이거, 이거 하나 위해 살아왔던 그 모든 것이 그 필름 안에 들어 있고, 그 필름을 그대로 우리 안에 되돌려줘요.

그게 바로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우리 안에 내주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온 거예요. 성령은 우리 구원받으라고 들어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마저 쪼갤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공격의지, 하나님에 대한 저주, 하나님에 대한 반발, 반항, 마귀적인 생각, 이 모든 내용을 필름에 담아서 우리 안에 집어넣어 줄 때 그걸 가지고 성도라고 해요, 성도. 거룩한 백성이에요.

왜? 우리가 살면서 그것을 무한반복하기 때문에 그래요, 무한반복.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돌아서면 헤헤헤, 하고 다시 돌아가요. ‘이러면 안 되는데, 십자가에 감사해야 되는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구원받았지요.’ 하다가 또 무슨 일 시키면 ‘아, 말씀 안 듣겠습니다.’ 하고 가버리고…, 도대체 우리가 종잡을 수가 없어요.

말씀이 와서 우리를 쪼갤 때 그냥 쪼개기만 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와서 우리 안에 들어와서 내주하거든요. 성령이 내주한다는 말은 십자가 사건이 우리 안에 내주하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들어오려면 우리 안은 해체되고 분해되어야 돼요. 우리는 머무름이 없어요.

그게 시편 39편 5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나의 일생이, 나의 긴긴 일생이 주님 앞에서 없는 것 같이 된다. 없어요. 없는 것 같이 돼요. 없어요. 없는데 우리는 거울 보면 있어요. 내가 보이는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 사건, 창세기 3장에서 이미 범죄한 육신, 이것은 제로입니다.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어요.

없는데 주께서 그 없는 자를 자신의 필름에다가, 십자가 필름에다 담아버리니까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가 말하기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이게 누구 공로지요? 누구 업적이지요? 누구 업적입니까? 십자가 안에서, 말씀 안에서,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나를 위한 복음은 없다는 것, 오직 모든 복음은 주님의 자신의 성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있다는 것, 그것만 드러낼 뿐이에요. 그러니까 뭘 아느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백퍼센트 지옥 불에 들어갈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어요. 그리고 이 육신은 우리를 가두었습니다. 나는 나의 의미 밖으로 못 벗어나요. 그 못 벗어나는 그것, 못 벗어나는 것을 성령이 바깥 범주로 해서 입혀버린 거예요. 여러분이 새벽탁송으로 배달음식 밀키트를 탁송 받을 때 안의 내용이 중요하던가요, 껍데기가 중요하던가요?

얼른 껍데기는 벗겨버리면 그 안의 내용이 내가 구입한 거잖아요. 날마다 우리에게 배달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지옥 불에 들어가야 될 의미라는 것, 그걸 배달받아요. 그런데 우리는 뭘 버리느냐 하면, 이 껍데기를 벗겨버려요. 우리가 말씀을 보는 이유가 구원받기 위해서 말씀을 봐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껍데기가 뭐냐? 그 껍데기가 십자가라는 사건이라는 껍데기에요. 주께서 죄인을 용서했다는 그 결과, VAR, 그 결과가 동반해서 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이게 장성한 자에요. 내 구원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나의 관여가 안 됩니다.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만 증거 하는 겁니다. “주께서 하셨습니다.”

날마다 주께서 하신 그 십자가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이 히브리서 6장 3절에서 8절 이야기를 매순간에 집어넣어요. 집어넣어서 이 육신이라는 것이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새롭게, 새롭게 주님의 의미를 알게 만들어요. 그 이유가 뭐냐? 주어지는 모든 상황은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상황들이 바닷가에 파도가 밀려와서 부딪히듯이 매일같이 부딪히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내가 숨 쉬는 이것이 결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검둥개처럼 썩어가고 있어요. 썩을 것이 썩어가고 있는 것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어요. 썩을 것은 그냥 썩으면 되는데 그다음에는 오늘 본문에 보면 지옥 불에 간다니까요. 썩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옥 불에 가요.

따라서 제가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지금 심각한 처지에 있는가를 우리가 날마다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동시에 우리가 어떤 의미가 정말 우리에게 소중한 지를 날마다 놓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의미만이 중요하지 십자가도 중요하고, 나도 중요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 의미는요, 내가 뭘 해도 하찮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십자가의 의미가 높아지는 겁니다. 가장 귀한 것은 가장 천한 것과 조율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잘난 체 하고 자기가 가치를 높이니까 가장 귀한 십자가가 욕보이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 28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우리가 평생 살면서 얼마나 천한 것 될까 싶어서 겁을 내고, 멸시받는 것 될까 싶어서 겁을 내는 거예요. 이 질문을 하면서 마치겠습니다. 내가 계속 내가 되는 것이 무섭습니까, 아니면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는 것이 무섭습니까? 못 들었어요? 다시 할게요. 내가 계속 내가 되는 것이 무섭습니까? 아니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는 것이 무섭습니까? 그 답변은 각자 점심시간에 생각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십자가 앞에 있다 치고 돌아보게 하옵소서. 그렇게 부질없고 소용도 없는 것에 울고 웃고 살아오고 있지 않은지, 아무것도 아닌 무의미에 목숨 걸고, 희망 걸고, 목표 걸고 살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탈옥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 육신에 갇혀 있음을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되풀이 하면서 도리어 감사가 나오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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