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자와 장성한 자
2024년 7월 2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5:11-14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5: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5: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멜기세덱의 특징은 시작과 없고 끝도 없습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의 세계 안에는 시작도 있고 끝이 있는 존재는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세계는 개체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런 개체입니다. 이와 태어난 것, 바르게 살아서 구원해 보겠다는 것도 이 개체 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장성한 자’이라는 표현에 인간들은 자극받습니다. 자기를 ‘장성한 자’로 변모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개체의 세계, 곧 멜기세덱 세계의 바깥에서나 있을 일입니다. 개체는 자신의 여정을 선(線)으로 표현합니다. 이 노선 끝이 바로 그 개체의 삶의 이상과 목표가 미리 점찍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멜기세덱의 세계에서 모든 인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기에 하나의 네트워크nectwork를 이룹니다. 하나의 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초신자나 장성한 자나 모두 하나은 영역이나 장(場)field 안에 있습니다. 모두 다 멜기세덱을 관계망을 드러내기 위해 각자 자기 자기를 할당받고 있는 겁니다.
이는 자신을 초신자로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자신이 장성한 자가 된 입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장성한 자의 처지에서 비로소 인간은 초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초보란 곧 언젠가 초보를 개체적인 자기로부터 떨어내고 장성한 자가 되었다는 야심을 품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개체(인간)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들로 연결짓고 또 연결짓습니다. 즉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들을 연결하여 장성한 자의 수준에 이르고자 합니다. 반면에 멜기세덱 안에 있는 초보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초보의 티를 퍅팍 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되는 모습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 12:5-8)
바로 이 징계와 경고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온 겁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14) 이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미지의 외부에서 주어진 신호를 접하는 안테나와 같은 존재였던 겁니다.
율법이라는 미지의 신호로 인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보입니다. 불신자들은 이런 초보와는 달리 아예 그들에게 율법 자체에 대한 의식을 거부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 인생을 본인이 처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들은 그 누구의 강제성 없이 본인의 마음 결정과 의지와 선택에 의해서 실시한다고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실은 거의 이 세상 모든 이가 이 불신자에 해당됩니다. 초보에 해당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민감한 반을 갖고 있으며 ‘애굽에서의 탈출’이 뭔지를 친히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성이 신약에 오면 인간성의 낳은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됩니다. 초보의 시작이 곧 율법이라는 겁니다. 초보로 시작해야지만 장성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4: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롬 14:1-2)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는 사도 바울은 장성한 자입니다. 그는 로마서 14:17에서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즉 장성자의 특징은 먹고 마시는 것과 특정 날 지킴에 억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장성자의 자세가 스스로 자유를 구가해서가 아니라 성령님의 활동을 드러내어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초보는 젖먹이에 해당되어 곁에 엄마 없이는 못삽니다. 갈라디아서 3:24에는 이 엄마를 ‘몽학선생, 곧 초등학교 교사’로 봅니다. 이 몽학선생으로 인도받는 이유는, 그동안 율법이 인간의 마음 속까지는 파고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초보 안에 장성자가 들어있는 겁니다. 마치 까고 까도 계속 나오는 러시아 인형 같습니다. 이로서 초보와 장성자 모두가 멜기세덱의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요소가 됩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게 된 것은 제사기능, 즉 하늘의 제사를 위하여 그동안 조카 롯과 헤어짐과 다시 만남이 있었던 겁니다. 즉 어느 것 하나 아브라함 본인이 본인의 시작이 아니라 하늘의 제사가 시작점이었던 겁니다.
이 제사 기능은 율법에 의해서 율법 안에서 전달됩니다. 히브리서 10:5-7에 보면, “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 10:5-7)
그동안 율법은 인간의 마음 속까지 들어오지를 못해서 ‘마음 할례’가 성립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새언약은 인간의 마음 속까지 완성된 것으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비로소 초보가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
초등학문은 그동안 무덤 위에 칠해진 페인트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영이 들어오므로서 이미 성도의 개체는 죽은 개체가 되고 멜기세덱 영역 안에서 살아 있는 자가 된 겁니다. 이 안목이 장성한 자의 안목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불신자인 우리들에게 빛이 우리 내부까지 들어선 것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5강-히브리서 5장 11-14절(초보와 장성한 자)240721 - 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5장 11-14절입니다.
히브리서 5:11-14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여기 초보가 나오고, 그다음에 장성한 자가 나오니까 이 대목을 보는 사람에게 살짝 긴장을 유발시킵니다. ‘너는 언제까지 초보에 머무를 것인가? 장성한 자가 되어야지.’라는 식으로 들릴 수가 있어요. 이럴 때 이걸 듣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후딱 초보에서 벗어나 나도 장성한 믿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충동을 야기시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장성한 자는 그냥 공짜로 되는 게 아니고 지각의 연단을 받아야 돼요. 많이 부대껴야 된다는 겁니다. 어디에 부대껴야 하는가? ‘말씀이냐, 세상이냐? 세상이냐, 말씀이냐?’ 이 둘 틈에 끼어서 ‘아, 세상이 아니고 말씀에 진리가 있구나’라는 것을 느낄 때, 자아가 깨어질 때 그때 장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시작은 뭐냐? 시작은 초보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초보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연단을 받아 장성한 자로 가기까지 코스가 있는데 이 코스에 대해서 이렇게 지정되어야 하거든요. 여러 갈래의 길이 아니고 한 갈래 원칙으로 이미 확정되어있는 그 코스가 있어요.
바로 멜기세덱에 관한 겁니다. 11절에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그러니까 이 멜기세덱이라는 이 하나님의 개념을 가지고 ‘너 이거 모르면 초보, 멜기세덱 알면 장성한 자.’ 그렇게 하나님께서 구분하기로 작정을 하셨다는 겁니다. 멜기세덱이라는 그 개념 안에 초보와 장성 두 가지 요소가 다 함께 들어있습니다.
멜기세덱이 다 관여한다는 말은, 멜기세덱은 초보도 지배하고 장성한 자도 지배하니까 이건 하나의 네트워크를 이루는 거예요. 장(場), 필드(field) 어떤 영역을 이루는 거예요. 영역을 이룰 때 그 반대말은 무슨 말이냐면, 개체입니다, 개인입니다. ‘나 초보 벗어나서 빨리 장성한 자 될래.’ 할 때 그건 여전히 멜기세덱의 품 안에 들어오지 못한 거예요. 멜기세덱은 어떤 네트워크지 개체를 개체답게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멜기세덱은, 히브리서 7장에 나오지만,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그다음에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목숨 끊어지는 끝 날도 없다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인간의 개체는 시작한 날이 있고 죽는 날이 있어요.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습니다. 족보도 있어요.
지금 멜기세덱은 그냥 이해할 문제가 아니에요. ‘초보에서 벗어나서 장성한 자 되기 위해 나 멜기세덱까지 더 공부할래.’ 지금 이렇게 될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공부하겠다는 그 개인, 개체 자체가 멜기세덱의 개념을 넘어가는데 철저하게 장애가 돼요. 방해가 되는 겁니다.
‘나 장성한 자 될래. 교회 나오는 새 목표를 잡았어. 나 장성한 자 되고 싶어.’ 하는 목표 자체, 여기에 대해 멜기세덱은 말합니다. “너 시작하는 날 없을 거야. 넌 끝 날도 없을 거야. 그래도 좋아? 난 널 없앨 거야. 그래도 좋아?” 이렇게 나오면 ‘나 장성한 자 될래.’ 이렇게 시도한 시도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가 되는 거예요.
우리는 시작한 날을 기억하고 있고 끝 날을 고려하고 있는 입장에서, 끝 날은 희망이죠, 그걸 고려하는 입장에서 멜기세덱 근처도 못 가봅니다. 멜기세덱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지도 못해요. 개체니까, 개체는 개체를 못 버리니까. 개인은 개인을 못 버리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멜기세덱을 통해 아주 친절하게 안내합니다. 하나님은 친절을 다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못 믿게 하십니다. 말씀을 믿지를 못하게 만들어요. 그게 진짜 사도요, 진짜 복음 전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화내서 못 믿게 하는 게 아니고 친절하게, 정성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상대방을 믿지 않는 자로 만들어요.
‘너나 나나 예수 믿는 사람 아니야.’ 왜? 우리는 개체를 못 버리니까. 나를 못 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멜기세덱의 장은 우리가 개체로 인정받는 이 세상하고 너무나 터무니없이 다른 세계에 속해요. 그건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동네에요.
나를 쥐고 어떻게 잘해서 날 천국 보내볼까, 하는 식의 그건 북한 미사일 쏘는 거랑 똑같아요. 시작이 있고, 미사일 있고 쏴서 동해안에 빠뜨리고 그 궤적을 추적하고. 이건 미사일이라는 개체가 있잖아요. 우리는 나라는 개체를 미사일처럼 사용하는 거예요. 자신의 인생의 경로, 인생의 궤적, 여정, 이걸 우리가 포기를 못 합니다. 내가 시작한 것 내가 끝까지 이루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초보 나오죠, 장성한 자 나오죠. 우리는 둘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둘만 알지 마시고 하나를 더 보태시기 바랍니다. ‘불신자가 뭐냐?’ 그래서 ‘불신자와 초보의 차이는?’ ‘초보와 장성한 자의 차이는?’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장성한 자와 멜기세덱의 차이는?’ 이 모든 것이 이 설교 시간에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초보하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초보하고 다릅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초보는 내가 비록 초보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장성할 거라는 거,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할 것이다, 은근히 노림수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인간들이 초보라는 느낌이 딱 들게 되면 ‘난 수준 높일래. 장성한 자 될래.’ 이거부터 생애 목표로 잡아요.
교회 나와서 교인들의 하나의 목표가 이겁니다. ‘저를 천국 갈 만큼 훌륭한 사람 만들어주세요, 목사님.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게 해주세요.’라고 은근히 요청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믿음이 생깁니까?’ 그걸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 세계에서 준비된 게 있습니다. ‘믿음의 서정’ 같은 거예요. 신학교 가면 조직 신학 시간에 다 배워요. ‘구원의 서정’ 같은 게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서정을 거쳐서 천국에 이른다. 그 서정을 딱 제시하게 됩니다. ‘당신은 지금 이 단계…, 5단계, 6단계, 7단계에 있습니다 …, 10단계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요.
‘당신은 지금 5단계, 6단계…, 인데 나중에 최종 단계에 이르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학교에서 전문적인 신학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가진 목사한테 앞으로의 모든 단계에 필요한 것들을 저에게 배우시기 바랍니다. 책임지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정통적인 교단에 속한 정통적 교회입니다.’
그걸 죽이 맞는다고 해요. 그러나 진짜 목사는요, ‘이래서 당신은 믿음이 없습니다. 당신은 절대로 예수를 못 믿어요. 제가 친절하게 다 알려드릴게요.’ 수련회 근처 숙소까지 다 친절하게 소개해드리면서, 왜 우리는 믿음이 없는가, 그것을 지금 알려주는 사람, 그것이 바로 사도입니다.
사도의 특징은, 나라는 인간이 저 사람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이끌어서 믿음을 알려줘서 그 사람이 배우게 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막고 있는지, 그 실체를 들춰내고 완전히 까발려내는 일을 사도들이 하는 거예요. 인간은 개체가 있다, 이것밖에 몰라요. 나는 태어나서 지금 이만큼 살았다, 이것밖에 몰라요.
그런데 네가 태어난 그 바닥을 알아? 원 배경을 알아? 넌 그걸 모르니까 매일 자기 자신 개체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거잖아요, 이거! 빛이, 주님이 왔는데 이 세상에 인간치고, 어떤 인간이고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라는 이 바탕, 이 바닥, 이걸 그대로 알려주고 소개하는 것이 성령 받은 사도가 하는 일이에요.
어둠이 어떻게 빛을 알아요, 어둠인데? 어둠이 빛을 알면 어둠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온 규정 자체가 틀린 게 되는 겁니다. 어둠에 몰입하시고 어둠에 충실하세요. 우리가 어둠이라는 걸 아는 것, 그때는 바탕 자체가 바뀐 겁니다. 내가 개체가 아니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 네트워크에 내가 놓여있고, 거기서 어떤 자리를 할당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이 멜기세덱이 하는 일이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에요. 세상적인 초보는 어떤 것이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꾸준함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꾸준함, 그 연속성. 어제도 내가 할 수 있는 거,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더하기, 이어가기, 이게 내 인생, 하고 펼치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작성합니다. 자기 스토리를 자기가 작성해나가는 것, 작성하고 꾸미는 것, 이게 불신자의 특징이에요. 왜? 시작이 있으니까 시작은 나라는 개체, 개인이니까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시작이 있다니까요, 시작이. 있는 시작을 어쩔 거예요. 괜찮은 끝으로 마감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그런 생각으로 교회 나오는 거죠.
그래서 시작은 나부터 시작할 테니까, 성경에 보니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 ‘성경 말씀을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해주세요, 목사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친절하게 설명해드릴게요, 왜 못 믿는지를. 믿는다는 게 왜 믿음이 아닌가를 정성을 다하여 모든 몸을 다하여 설명해드릴게요.
인간의 초보에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초보로 바뀌는 것은요, 멜기세덱의 활동이에요. 이건 어떤 이미 주어진 말씀 세계의 장, 네트워크, 장의 활동력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초보의 특징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연결이라면 하나님 초보의 특징은 ‘왜 인간은 내가 하는 것으로 구원되지를 못하는가? 내가 믿는 것으로 왜 구원되지를 못하는가?’를 점점 더 점검하는 과정에 놓이게 되면, 축하합니다. 그 사람은 초보에 들어섰습니다. 이제 초보에 들어서신 거예요, 초보에. 하나님이 말하는 초보에 들어서신 거예요.
‘왜 나는 내 일상에서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의 결과물로 자꾸 주입되느냐? 내가 결정하지도 않았고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일의 파도에 휘둘려서 살아가느냐?’ 그것을 내가 계속 경험하는 거예요. 그러면 초보에 들어갔다는 말은…, 이게 첫 번째 나오는 어려운 겁니다. 지금 다 안 조는 시간이에요. 아직 졸 때는 아니에요. 중요한 거 합니다.
이 초보에 들어왔다는 것은, 내가 초보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아는 것, 그건 바로 장성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필드에 있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장성한 자가 무엇이며 초보가 무엇인가가 바로 같은 공간에 같이 있어요. 왜? 초보라는 말, 장성이라는 말 둘 다 멜기세덱의 네트워크를 이루는 단어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초보된 자가 굳이 장성한 자가 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초보 안에 장성이 들어있습니다. 꼭 러시아 인형 같아요.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 나오죠. 초보라고 규정하는 말씀 안에 장성이 뭔가가 같이 함께 들어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파급되어 가면, 넓혀가게 되면 성경 66권 전체의 내용이 지금의 나 안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 내 안에 같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응축된 그 주름을 한 꺼풀 두 꺼풀 살아가면서 이게 펼쳐지는 과정이에요. 두 살 때, 세 살 때, 일곱 살 때, 계속해서 50, 60, 70, 80…, 90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90은 여기 안 계시니까.
계속해서 하나씩 펼쳐낼 때 거기서 뭐가 발생되는가? 말씀의 새로움이 발생되면서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세상이 주는 감사가 아니고, 난데없는 감사와 기쁨이 거기서 펼쳐지며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상 것은요, “너 초보니까 완성을 위해 노력해라.” 이게 세상적인 초보라면 예수님의 초보는 초보에게 완성이 다가와요. “완성돼라.”가 아니라 완성이 저벅저벅 다가오는 거예요, 완성이.
시작이 없고 끝이 없다는 말을 달리하게 되면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이다’ 에요. 같은 공간 안에 다 들어있으니까요. 선(線)이 아니고 공간이에요, 공간. 하나의 노선이 아니고 공간이란 말이에요, 공간. 주께서 다 이뤄놓은 공간입니다. 공간 안에 멜기세덱이 있어요. 이걸 뭐 이렇게 추상적인 말로 하는 것보다도 실제적인 역사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창세기 13장 9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다녔는데 이제는 함께 다닐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가족들을 축복해 가족들이 너무 많아져서 같이 먹을 목초지를 찾는 게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9절에 보면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드디어 조카 롯과 그리고 삼촌 아브라함이 헤어지게 됩니다. 떠나는데 조카 롯이 어딜 선택하냐면, 에덴동산에 버금가는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했어요. 소돔과 고모라 땅이 너무나 살기 좋다고 소문이 났고 실제로 모든 것이 윤택한 땅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소문난 요지의 땅이고 땅값이 제일 비싼 부동산이죠.
그 땅을 탐내는 족속이 한두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14장에 보면 다섯 족속 더하기 네 족속이 붙어 전쟁을 벌입니다. 벌일 때 그 틈에 누가 사로잡히느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사로잡혔어요. 그걸 보고 헤어졌는데 헤어지지를 못하고 아브라함이 ‘내가 가만있어서는 안 되겠다. 구해야 되겠다. 내가 적어도 아브라함의 언약, 언약의 복을 받는 가족인데 그냥 방치하면 안 되지.’ 해서 자기 집에서 길렀던 318명과 동맹한 사람들 합해서 전쟁에 참여해 롯을 건져냈습니다.
건져낼 때 이건 어디까지나 아브라함과 롯의 하나의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을 때에요. 그런데 그 전쟁에서 이기고 올 때 14장 18절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여기 멜기세덱이 관여합니다. 멜기세덱이 관여함으로서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창세기 14장 22절에서 24절에 보면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이렇게 죽 나오는데, 소돔왕이 너무 고마워서 아브라함에게 전리품을 들고 “이건 당신이 개입해서 얻은 전리품이니 내가 가지면 안 되고 드리겠습니다.” 하니까 아브라함이 “내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데 절대로 당신 거 받지 않습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당신 때문에 부자 됐다는 소리 듣기 싫어요.”
23절에 보면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이건 아브라함이 뭘 알았느냐 하면, 이것이 인간 대 인간, 개체와 개체문제의 전쟁이 아니라는 거예요.
헤어졌던 조카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발생 된 그 전쟁이 사적으로 내가 집안 식구 하나 챙기기 위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은 누구의 개입으로 언약이 언약답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러한 전쟁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기의 인생에서.
인생에서 느낀 것은 뭐냐?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시작도 없고 끝이 없는 그 세계에 하나의 자리로서, 하나의 인물로서 그냥 개입한 거고 참여 된 것뿐이죠. 내 것이 없는 거예요, 내 것이. 이게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 내내 개입하는 멜기세덱의법칙이에요, 멜기세덱의 법칙입니다.
“어이구 내 조카,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잃었던 것 내가 다 다시 얻었잖아.” 이게 아니라 인간은 자기 조카도 없고, 자기 것도 없고, 더 나아가서 따로 나라는 개체, 나라는 것은 하늘나라의 하나님께서 언약적으로 이걸 지워버렸다는 거예요, 이걸 제거해버렸다는 거예요. 시작한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는 개체가, 시작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 지울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지워져야 내가 할 수 있는 걸로 연속해서 내 인생이라는 것이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만약 있어 버리면 우리는 시작한 것도 있고 끝을 내다볼 수가 있어요.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시작한 나를 천국에 넣기 위해서 믿음이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뭐 행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라고 하니까 그 믿음을 알려면 성경 공부해야 하지 않습니까?
성경 공부할 때 그냥 해서는 안 되죠. “믿음까지 주시옵소서.” 뭐 이렇게 돼야 한단 말이죠. 백날 그런 소리 해 봐야 여전한 것은 바로 내가 여전히 개체를 안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쟁이 일어나든 언약이 주어지든 이건 내가 원할 바가 아니에요.
나의 소원이 아니고 언약을 주신 하나님의 소원이라면 내 쪽에서 할 것은 ‘왜 나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되고, 왜 나는 행하지도 않아야 하고, 왜 나는 내가 시작한 일이 없어야 하는가?’를 알게 하는 말씀 자체가 시작이 되는 그 영역 속에, 네트워크 속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증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일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자, 첫 번째, 불신자와 초보의 차이점이 뭐냐? 불신자는 자기가 자신을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가룟 유다예요. 사탄이 들어간, 악마가 들어간 가룟 유다. 주님께서 왜 이 가룟 유다를 제자로 뽑았는가? 제자 열두 명 속에도 세상 전체 모든 구성 요소가 다 들어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가룟 유다까지, 사탄의 요소까지 다 집어넣은 거예요.
내 제자 열두 명을 보면서 인간 개체의 전체 과정을 조망해 봐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여정은 열두 제자와 함께 시작한 여정이에요. 물론 처음에는 예수님은 이 땅에 없는 분이죠. 시작이 없죠. 마리아가 임신했으니까요. 그건 시작이 시작이 아니거든요. 열두 제자가 예수님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거기에 가룟 유다가 포함됐다는 것, 결국은 가룟 유다와 나머지 열 한 제자가 헤어져야 되거든요. 헤어질 때 열두 제자가 자기들끼리 회의해서 헤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죠. 열 한 제자는 나름대로 따로 헤어졌고 가룟 유다는 그야말로 사탄이 지목했기 때문에 사탄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내 인생을 내가 처분할 수 있다고 늘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는 불신자만 있는 게 아니죠. 가룟 유다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성경에는 가룟 유다가 한 명이니까 성경에는 불신자가 참 적다고 생각하지만 그 가룟 유다가 성경에서 빠져나와 바깥에 나오면 모든 인간이 그래요.
쫙 뽑아내면 모든 인간이 가룟 유다예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처분할 거야.’ 그걸 다 모아서 알라딘 램프에 압축해서 쭉 넣으면 가룟 유다, 가룟 유다에 들어있는 괴물을 뽑아내면 전체 인류입니다. 이 양면을 다 보여주는 것이 바로 초보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초보입니다.
그럼 성경에 나오는 초보의 예를 들면, 경계선에 있기 때문에 불신자와 신자의 경계선의 그 구분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죠. 성경에 나오는 초보 예의 적절한 것은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짐으로써 인간의 두 가지 면을 노골적으로 다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14장 4절에 보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애굽으로 돌아가자’가 되는 거예요. 불신자는 아예 나온 적이 없어요. 불신자는 항상 자기가 자기를 처분하기 때문에 어디에서 나온 게 없어요. 불신자의 시작은 자기 몸뚱아리에요. 자기 몸이, 자기 개체의 몸이 시작이기 때문에 ‘내가 어디서 나왔다고? 난 처음부터 여기 있었어.’ 그게 불신자예요.
그런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애굽에 살던 사람이에요. 애굽에 살던 사람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살던 생활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율법의 세계와의 그 경계 선상에 있어요. 양쪽 면을 다 보여준다고요, 양쪽 면을. 쉽게 말해서 그들이 율법을 받은 것은 시그널이 있다는 겁니다.
미지의 외계의 시그널, 신호에 반응하는 안테나 역할을 하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받을 뿐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반응을 드러냈던 민족이에요. 뭐가요? 이스라엘이요. 반응을 보니까 율법에 대해서 극도의 혐오함으로 드러났습니다. 극도의 혐오함으로 드러나는 그조차도 반응이에요. 그것도 초보적 입장의 발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초보적 발상을 뭐라고 하느냐? 어린아이라고 되어있어요. 젖먹이 아이. 애굽에서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딱딱한 것을 먹을 재간이 없어요. 젖먹이 아이는 그냥 젖을 먹는, 젖을 삼키는 거니까. 어릴 때, 저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만화경이라고 해요, 만화경.
보게 되면, 서로 대칭적인, 반짝반짝하는 꽃가루 같은 게 들어있어서 만화경 세계 속은 아름다운 대칭적 세계에요. 애들은 찰칵찰칵 넘어가는 그 만화경을 보잖아요. 변화하는 아름다움에, 화려함에 매료되는 겁니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바라볼 줄 몰라요. 그냥 대상체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만화를 좋아해요. 만화의 세계는, 동화의 세계는 철저하게 있음의 세계입니다. 있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있음의 세계 속에서 어린아이는 자기도 여기 있다는 것, 자기 자아를 더 아름다운 있음의 세계의 일부로 정리해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린아이의 세계에서 감당 못 하는 것이 뭐냐? 이 세계가 없어지는 죽음의 세계에 대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자기가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를 지나서 살게 해 줄 거라고 생각 한 거예요. 꼭 어린아이 같아요. 그래서 항상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뭘 먹여서 우리 집단을 살려주시겠습니까?” 그걸 줄여서 이야기하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알고 있는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을 다 치워버리는 거예요.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다 치워버리는 겁니다. 그 유명한 야구 감독이 한 말이 있잖아요.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한 말이 있잖아요. 뭘 로 야구 할 건데?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줘야 사랑이잖아요!”
내가 이해하는 사랑은 일단은 나를 살려주고 보는 게 사랑입니다. 거기다 덧붙여서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택시드라이버를 하든지, ‘인생 힘들지 말고 편하게 살자.’ 이래야 사랑다운 사랑의 하나님 아니겠습니까? 이것 때문에 새벽기도도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걸 구약 때 다 보여준 거예요. 초보라는 것은 경계선을 보여주는 겁니다, 경계선.
신약에 와서 초보가 없어졌는가? 신약에 와도 초보가 있지요. 바로 갈라디아서 2장의 베드로.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게바, 베드로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사도바울이 누구를 면책하느냐? 제자 중에서 수제자인 베드로를 면책했다는 거예요.
이걸 보는 사람들마다 ‘참,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다. 이건 위아래도 없고, 선배도 없어. 막가자는 이야기야?’ 바울이 사도로서 후배잖아요. 신입, 신입이잖아요. 어딜 고참을 건드립니까? 회사 분위기 개판이지요, 지금. 어떻게 제일 마지막에 사도가 된 인물이 사도의 첫 번째인 베드로를 건드립니까? ‘대체 바닥도 무슨 이런 바닥이 다 있어?’
바울이 베드로보고 “당신은 왜 위선적으로 놉니까?” 이렇게 면책을 한 거예요. 왜 위선적으로 놉니까? 선배님이라고 해줍니다. “선배님은 복음을 알아요, 몰라요? 이미 십자가 앞에서 할례가 무엇이며 무할례가 무엇이며, 그딴 게 뭐가 필요합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 거예요. 그딴 것.
여기서 참 중요하고도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초보가 뭐냐? 율법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줬을 때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몽학선생이라. 이걸 몽학선생이라고 하는데 다른 번역으로 하면 ‘초등학교 선생님’ 초보의 선생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초보의 선생님이지만 사실은 더 깊이 들어가면 이것은 엄마예요, 엄마. 어린애, 젖먹이는 엄마 곁을 못 떠나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초보 된 자를 장성한 자로 만들 때 ‘나 장성한 자 만들어주세요.’ 이렇게 오게 되면 멜기세덱의 장(場)에서 뭐라고 하느냐? 멜기세덱은 모든 말씀의 장의 기초를 갖고 있어요. 그 기초가 뭐냐? 멜기세덱 제사거든요. 죽음이에요.
죽음에 기초해서 말씀이 해석되는 그 해석이 멜기세덱의 장이에요. 그 장 앞에서, 그 네크워크 앞에서 모든 개체는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되는 그 해석입니다. 그 멜기세덱의 말씀은 뭐냐? “너 초보야? 장성한 자로 만들어줄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너 엄마 데리고 와, 엄마. 엄마를 데리고 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엄마가 누구냐? 율법이 엄마예요. 율법이 몽학선생이에요. 율법에서 태어난 거예요. 율법과 더불어 함께 살아온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몽학선생을 율법의 엄마라 해서 ‘너는 엄마 품을 못 떠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갈라디아서 4장 8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율법의 종이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종은, 네가 마귀의 종이었다는 것을 티 내는 기호가 율법이에요. 기호, 언어가 율법입니다.
9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초보 학문, 아직도 거기에 신경 쓰고 있느냐. 초등학문이 뭐냐? 10, 11절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즉 ‘헛되이 하는구나. 방해하는구나. 복음에 대해 훼방하는 짓을 하는구나.’라고 꾸중하는 거예요. 누가요? 멜기세덱의 네트워크에 있는 사도바울이. 누구를 향하여? 같은 멜기세덱의 네트워크에 있는 초보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는 거예요. 초등학문은 예수님께서 이미 율법을 칭칭 감고 다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에게 이미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 28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아까 위선자, 외식한다는 말 했지요. 갈라디아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베드로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위선자라는 말을 했지요. 십자가를 아는 베드로가 왜 아직도 위선자처럼 행동합니까? 외식이 위선이에요.
27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페인트칠을 한 거예요. 곱게 페인트칠을 한 거예요. 뭐냐? 초등학문의 특징은 속은 못 건드리고요, 겉만 페인트칠을 하는 거예요, 페인트칠.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박사, 전부 다 이게 뭐냐 하면, 페인트칠하는 겁니다. 대통령, 대통령 부인, 전부 다 페인트칠 한 거예요, 페인트칠한 것.
그러면 세상에서 사람들의 관심사가 뭡니까? ‘너는 재벌이라는 페인트칠하고 나는 왜 날 때부터 흙수저냐. 네 페인트와 내 페인트가 왜 다르냐?’ 이 세계가 바로 시작과 끝이 있는 세계, 언약 밖의 세계, 바로 지옥, 저주받은 세계입니다. 멜기세덱 바깥의 세계에요. 평생을 살면서 기죽고 살고, 평생을 살면서 야심, 야망,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tious)!’ 야망, 기대, 희망, 목표, ‘국민들이여, 기다리소서. 우리가 메달을 따오겠습니다!’ 파리로 올림픽에 간 그 선수들, 거기 왜 갑니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 페인트칠, 위선스러운 인간을 더욱더 위선스럽게 하는 그 페인트칠, 그것 못 가져서, 그것 달성 못 해서 환장하고 고소하고 고발하고 변호사 선임하고, 모조리 전부 다 위선의 세계에요. 거짓의 세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네 믿음 있나?’ ‘나 믿음 있다.’ ‘너 성경 아나?’ ‘나 성경 모른다.’ 이것 페인트 아닙니까?
그러면 속은? 속은 이렇게 되어있어요. 성경에, 겉에 할례를 하지 말고 마음에 할례를 행해라. 이 마음의 할례에 대해서 골로새서에서 두 가지 다를 이야기합니다. 페인트칠과 그리고 마음의 할례까지 언급되어있는 것은 2장에 나옵니다. 할례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페인트칠부터 이야기할게요.
20절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의문, 단어에, 문자에 순종하는가. 여러분, 이게 초보입니다. 여러분, 이게 불신자가 아니에요. 불신자는 말씀 자체를 거부해요. 사도의 훈계 자체를 거부한다고요. ‘안 들으면 되지 뭐. 이 성경 모르면 되잖아.’ 이것은 불신자의 세계에요.
성경이 참 어렵지요? 왜 어려운지 로마서 14장 1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연약한 자. 믿음이 연약한 그 사람들이 왜 연약한가를 보니까 어떤 날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날을 안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것을 먹어도 되고 어떤 것은 안 먹어야 된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걸 가리는 거예요. 이것은 먹어도 되고, 이것은 안 먹어야 되고, 이날은 지켜야 되고, 이날은 안 지켜도 되고, 그게 불신자가 아니라 초보예요. 초보인데 거기에 대해서 사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먹고, 마시고’에 해당되는 그러한 언어의 조항과 법률과 제도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 희락이란 고마움, 감사, 기쁨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연약한 자, 그 사람들을 받되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그 당사자, 사도바울 그 당사자가 장성한 자에요. 장성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내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이유가 로마서 14장 15절에 “만일 식물(음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성경이 이렇게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이유가, 성령이 없는 자들이 천당 가려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도바울은 장성한 자기 때문에 항상 말씀을 줄 때는 개체를 공격해요. 개체를 공격하는 이유는, 네가 너 자신을 부인하면 천국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깨야 그 안에 사람이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 사람 속에 넣어준 것이 있어요. 러시아 인형처럼 큰 인형 안에 작은 것이 들어 있다고요. 그 작은 것을 가지고 성령이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
성령이 있으니까 성령이 보고 싶은 거예요, 사도바울은!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사람들보고, 베드로보고도 책망하는 이유가 지옥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책망을 용납할 수 있는 더 근원적인 것이 네 안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멜기세덱의 제사에요, 제사.
그러니까 일단 사도바울은 말씀을 하면서 기본이 뭐냐? 제발 불신자들은 좀 가세요, 라는 거예요, 불신자들. “어떻게 하면 믿습니까?”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불신자들은 가주세요. 내가 행해서 구원받겠다는 사람들은 좀 가주세요.” 사도, 내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만 하는 이야기에요, 택한 자에게.
그런데 당사자가 택한 자인 줄을 몰라요. 그래서 사도는 전력을 다하여 “당신이 믿는 것은 예수가 아닙니다. 당신 말고 성령이 와서 믿게 하시는 분이 당신을 성도되게 했습니다.” 이 논리를 끄집어낼 때 그때 성령이 하신 일이 바로 제사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10장 5절 이하에 길지만 제가 중요한 것을 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들어보면 놀랄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6) 직접 번제와 속죄제의 제물이 되시고 당사자 되시는 분, 한 몸을 준비해 놓았다고 미리 구약의 책 안에, 율법과 선지자로 예언을 했다(5, 7)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라고 분명히 율법에 되어있는데 그 율법을 이야기해놓고 율법과 무엇을 섞느냐 하면, “너희가 속죄제 번제를 드려도 나는 안 받을 거야. 진짜 속죄제 번제를 위해서 내가 한 몸 보낼게”라고 미리 예비한 몸이 따로 주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율법이 엄마가 되어서 율법에서 못 떨어지는 자에게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속죄제와 번제를 대신 드리면 그제야 이제는 율법이라는 엄마하고 헤어질 수가 있다는 거예요. 율법과 헤어지게 되면 더 이상 위선을 떨 근거 자체가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죽은 자에게서 아무것도 안 받아요. 죽은 자에게서 받지를 않습니다. 죽은 자의 행함을 왜 받습니까?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의 그 이야기는 장성한 자나 할 수 있지요”라고 해요. 아니에요. 초보자 속에 장성한 자가 들어있어요. 불신자 같으면 안 들어있어요. 삐집니다.
그런데 초보는 삐지는 것이 아니고 ‘참, 히브리서 12장의 말씀대로 내가 아버지께 얻어맞는 징계를 많이 받아야 되겠구나. 아직도 내가 개체를 고집하고 내 개체와 남의 개체를 비교하고 대조하는 이런 애굽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니 맞아도 내가 많이 맞아야 되겠구나. 더 때려주세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뭐야, 너!’ 이렇게 안 나와요.
더 쉬운 예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 5장에서 사이좋은 부부지요. 죽이 잘 맞았지요. 재산을 팔아서 일부를 떼고 헌금을 했는데 그렇게 헌금한 것 때문에 한 날에 죽어버린 부부 이야기에요. 문제는 이 부부가 지옥 갔겠느냐, 하는 겁니다. 한 날에 죽은 것은 맞는데 과연 지옥에도 갔겠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사람들 역할이 죽는 역할이었어요. 헌금 바치다 죽는 역할입니다. 또 역할 하나 더 알려드릴까요? 이것은 더 충격적이라서 여러분은 제가 이 이야기하면 ‘안 들었다, 안 들었다’하고 싶을 거예요. 고린도전서 5장에 아비의 처하고 음행한 사람, 간음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다. 그 간음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죽여버렸는데 그 죽인 이유가 4, 5절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죽여버리고,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이걸 누가 못 견디느냐 하면 불신자들이 못 견뎌요, 불신자들이.
‘내가 아는 하나님은 바르게 살면 천국 보내고 악하게 하면 지옥 보내는 하나님이다. 이런 짓을 하고도 천국 간다는 것은 도저히 나는 못 믿겠다’는 거예요. 강도가 천국 가고 기생이 천국 가고 죄인이 천국 가는 그런 하나님은 못 믿겠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 축하합니다. 당신 정체가 바로 그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만났던 제사장, 살렘의 대제사장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은 제사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거예요. 하늘에 있는 제사, 완성된 제사 때문에 지상에서는 그 죽음을 반영하기 위해서 애초부터 죽음이기 때문에 태어난 것으로 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태어나서 여기에 개체가 만들어졌으니까 나부터 출발하자는 그 이야기는 아예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적으로 말해서 멜기세덱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요. 시작은 십자가 사건이니까요. 하나님이 죽는 사건이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원칙, 예수님이 속죄제의 원칙을 우리 마음속까지 집어넣어요. 왜 마음속이냐? 초등학문은 페인트칠이거든요. 철학, 과학이 페인트 하는 것 아닙니까, 페인트. 생물학, 물리학, 전부 페인트 하는 거예요.
인간은 마음은 손 못 대요. 두뇌 연구하는 게 인공지능이잖아요. 페인트잖아요. 두뇌 연구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아는 것은 아니에요. 마음은 손을 못 대요. 마귀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항상 위선자기 때문에.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16절 마지막 때 언약을 주는데 그 언약은 무슨 언약이냐?
내 법을 페인트칠하는데 머물지 않고 속에까지 집어넣어서 뭐라고 하느냐? 17, 18절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제사, 제사입니다,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장성한 자는 완성, 제사의 완성이 뚜벅뚜벅 걸어서 그 사람 마음속까지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제사 앞에서 죽은 자가 되지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내 개체를 계속해서 끌고 가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하는 그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지옥에서 왜 화를 내세요? 지옥인데 지옥에서 왜 화를 내지요? TV 화면이 안 나온다고? 냉장고 손잡이가 박살 났다고? 애가 수학을 못 한다고? “누구야? 나를 군대에 처넣어서 1년 6개월 동안을 시간 낭비하게 한 게 누구야?” 왜 화를 내지요? 이재명한테? 그러면 ‘국민의 힘’에게? 우리가 초보라는 것을 완성된 십자가로 늘 지적받는 장성한 자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다시 보게 하옵소서. 내 입장이 아니고 멜기세덱에 계신 주님의 입장에서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일에, 십자가 일에 참여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항상 세상이 주지 않는, 내 죄가 밝혀지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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