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십자가를 아십니까(26강) 살후1:9(헌금과 누락) 20240325b(강의: 이근호 목사)
p.90(제본은 p.84)부터 할 차례인데 p.103부터 잠깐 보고요, 앞으로 다시 돌아옵시다. 가지고 있는 책마다 페이지 수 차이가 있으니까 그럼 뒤는 펼치지 마시고 p.90(p.84)만 펼치고 듣기만 하세요.【의인의 희생】.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희생시킵니다.
의인되고 싶어요, 안 되고 싶어요? 사람들은 누가 떠밀어서 희생하게 되면 희생의 대가는 본인이 재빨리 잽싸게 챙기려하는데 막상 의인은 안 되려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기 때문에 희생자가 의인이 되게 하는 거예요. 희생자가,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아무도 없는 죄인을 위하여 희생된 자가 유일하게 의인이 되는 거예요. 의인이.
지금 하고 있는 chapter가【십자가와 헌금】인데 헌금은 이 원리대로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헌금이라는 언급을 하는 그 안에 통째로 뭐가 들어있어요? 의인의 희생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 헌금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그러면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 헌금이지, 의인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은 헌금이 아니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헌금 자체가 우리를 의인되게 하는 원인으로 주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이미 희생의 효과를 얻은 당사자로서 참여해야 되지, 헌금해서 구원받는 일은 없습니다.
헌금해서 구원받을 거 같으면요, 부자가 구원받아요. 구원받기 더 쉬워요. 부자는 특징이 ‘있음’,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고 아무것도 없는 자, 헌금할 것도 없는 자는 결국 헌금도 성사가 안 됩니다. 헌금이 성사 안 되면 어디에 참여 못합니까? 희생에 참여 못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들은 의인이 되지 못하고 죄인으로 남아 있어버리잖아요.
아무도 되기 싫은 의인. 의인의 희생. 그런데 주께서는 희생 사건을 일으켜놓고 거기에 헌금으로서 참여되는… 그러니까 헌금=은혜=복, 헌금이 곧 은혜고 복이 되게 하는 거예요.
이러한 원리가 되려면 ‘누락지점의 발생’이 되어야 돼요. 너무 어렵습니까? 그럼 그냥 ‘누락’이라 합시다. 누락은 쉽게 말하면 빠져버린 것. 그러니까 있음이 뭐로 변했어요? 없음으로 빠져버리는 거예요. 있어야 될 자리가 빠져버릴 때 그때는 빈 공터가 되어버리죠. 없음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의인의 희생 사건과 관계성이 있어요.
그럼 여기 p.92(p.86)보면, 있음에서 없음이니까 이 약속을 이스라엘 백성 몸에다 새겨버리는 거예요, 문신처럼. 있는데 없애버리는 자체를 문신으로 만들어버릴 때 몸에 새기는 흔적, sign을 ‘할례’라고 합니다. 할례. 이것이 할례가 되는 겁니다.
p.92(p.86)에 나오죠.【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 한다.】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할례와 헌금의 관계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논리적으로 비약이 너무 심하죠. 앞에 들어가야 될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굉장히 많습니다.
할례라 하는 것은 멀쩡하게 있는 것을 없애는 거예요.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과 달리 할례 된 채 출생했다.’가 아니고 모든 인간이나 이스라엘이나 동일하게 할례 되지 않은 채 출생하는데, 아브라함의 언약을 몸에 표시하는 거예요. 있는 것, 있는 포피죠, 남성 생식기의 끝부분을 끊어서 없애는 거예요. 누락이죠. 빠져버린 거죠. 그게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가 되는 거죠.
사람들은 뭔가 있다가 없어지면 그다음 기대하는 게 뭐에요? ‘그 없는 자리를 뭐로 채울 겁니까?’라는 그다음의 기대를 잔뜩 하게 될 거예요. ‘있는 것을 없앴다면 그럼 없는 자리를 그냥 막연하게 비워놓으면 안되고 그걸 뭔가로 채워야 되지 않습니까?’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마련입니다. 자, 뭐로 채우는가?
지금 누락 나왔고요. ‘의인’ 나왔고 ‘희생물’ 나왔고 ‘누락’ 나왔습니다. 그다음 ‘할례’까지 나왔어요. 그다음 나온 절차가 뭐냐? ‘전쟁’입니다. 전쟁. 이상한 전쟁이에요. 누락된 쪽이 이기는 전쟁. 빠져있는 쪽이 이기는 전쟁. 모든 걸 갖추었을 때 우리는 정상이라 하는 겁니다. 누락되면 이건 비정상이 되겠죠. 그런데 모든 걸 갖췄는데 뭔가 빠져있는, 일종의 장애까지는 아니지만, 빠져있는 쪽에 갖춰있는 쪽이 져버립니다. 패배하게 돼요.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이 개입된 현장에 이런 일이 일어나요. 소년 다윗이 블레셋을 어떻게 이겼는가? 소년 다윗과 블레셋. 그럼 소년 다윗과 블레셋의 옷을 한번 다 벗겨보자는 거예요. 벗겨보면 골리앗한테는 있는데 다윗에게는 없는 것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할례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전쟁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할례를 행했다면 장차 오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다 갖춘, 있는 존재로 오신 게 아니고 꼭 중요한, 필요한 것이 누락된 채 오시는 분이다. 일종의 희생이죠. 누락된 채 오시는 분이 이 땅에 오셨다.
그것하고 헌금하고 무슨 관계 있는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자꾸 잊어버리니까 다시 제가 반복해드립니다. 희생에 참여하는 것이 헌금이다. 헌금은 강제로 빼앗기는 걸 말해요. 제가 언젠가 그랬잖아요, 구제하지 말라고. 구제하지 말고 강제로 빼앗겨버려야 된다. 만약에 구제를 하게 되면 오른손이 한 것을 필히 왼손이 알게 되어가지고 자기가 누락된 게 아니고 점점 더 자기가 착해지고 훌륭해져버려요.
사람의 취미가 심화되면 그걸 뭐라고 하죠? 취미가 심화되는 것을 중독이라 하죠. 중독 중에 가장 강력한 중독이 뭐냐? 남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중독이에요. 연탄 나르기. 이거 정말 무서운 병입니다. 남 도와주는 것, 무서운 병이에요. 너나 잘 하세요. 네 꼬라지나 잘 알지, 왜 남 생각하느냔 말이죠.
자기를 볼 줄 모르니까 남 걱정하는 거예요. 자기가 얼마나 어설픈지 모르니까 못난 사람 도와줌으로써 못난 사람을 도와주게 되면 그 사람의 결격사유가 충족되겠죠. 충족되고 온전해지는 그 모습이 자신의 모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도와주는 구제 중독에서 못 빠져나오는 거죠.
주식중독도 만만치 않거든요. 코인중독도 만만치 않아요. 주식이나 코인이 어느 정도로 중독인지, 도박인데 얼마나 심한지 의도적으로 누락됨을 만들어요. 일부러 만들어놓고 채워요. 주식이 좀 올랐어?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거 만족하지 않아요.
이거 설명하려면 시간이 굉장히 많이 드는데… 인간의 타인에 대한 욕망은요, 자기 욕망을 키우는 원인, 재료가 되는 겁니다. 나보다 더 월등한 게 있어줘야 덩달아 내 욕망도 커져요. 성경에 이와 비슷해 보이는 구절 나와요. “입을 크게 벌려라. 내가 채워줄게.(시 81:10)”
안간힘을 써서 더 벌려야 돼. 자꾸 벌려야 돼.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소년들이 야망을 키우면 키울수록 사람이 더 열심을 내게 되어 있고 악착같이 공부하려고 애를 쓴다는 거예요. 그 말이 맞아요, 틀려요? 맞죠. 대충 만족하면 안 되잖아요.
배드민턴 아시아게임 우승했다. 거기에 만족하면 영국 배드민턴 선수권대회에서 준결승 탈락. 안세영 있죠, 부상 때문에 탈락. 재기해서 다음에 우승.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은 자기 욕망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는 거예요, 욕망의. 문제는 배드민턴 선수권대회 우승이 천국에 합격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천국에 못 간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막혀있기 때문에? 장벽. 장벽에 막혀있어요. 그래서 욕망이라는 것은 굳건한 장벽에 내 욕망의 물결이 갔다가 튕겨져 나오면 더 세게 부딪치고 더 세게 부딪치는 것이 정신 있을 때까지 인생살이에요, 인간의.
그러면 구제중독이죠. 바깥에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이 구제중독이라면, 교회에서 하는 구제중독은 뭐냐? 헌금입니다. 헌금을 여러분들이 해봤잖아요. 해봤죠? 애들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해서 그때 돈 한 만 원 벌고 천원을 십일조 할 때 그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드디어 내가 구원의 반열에 들어섰구나. 세상에, 이걸 할 수 있다니.
그런데 아르바이트 두 군데 뛰었습니다. 이만 원 벌었어요. 그럼 뭡니까? 인간은 뭐하는 존재? 계산하는 존재죠. 딱 나오죠. 이천 원. 산수배운 거 그때 다 써먹습니다. 천국 갈 때 안 써먹는 게 없어요. 천국 갈 때 그런 거 다 계산해야 돼요. 십일조 하라고 했으니까 이천오백 원하면 안돼요. 이천 원 해야 돼요. 법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애들 심성에, 젊은 심성에 법을 딱 지켜야 돼요. 턱걸이할 때 턱만 봉을 살짝 넘겨야 되지, 까분다고 상반신을 더 올리면 불합격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딱 법만 지켜야 돼요. 십일조 같으면 십분의 일만 해야 돼요. 십이조 하면 안돼요. 그렇게 했는데 어느 날 부흥사가 온다든지 오후 예배 때 청년회 헌신 예배에 어떤 목사가 와서 하는 말이, 얍삽하게 십일조 해서는 현상유지밖에 안됐는데 어느 날 어느 장로님이 사업이 어려워서 어차피 이렇게 망하고 저렇게 망하는 거 이참에 십에 이조 한번 해보자. 십에 이조하고 난 뒤에 그야말로 도저히 절대로 믿지 못할 말씀이 있었는데 그 말씀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30배, 60배, 100배 그거는 도저히 엄두가 안 났는데 실제로 그 장로님은 사업을 크게 해서 많은 선교사들을 도와주고 지금 어느 큰 교회에 은퇴 장로가 되어서…. 은퇴 장로 이야기까지만 하고 입을 다물어요. 그다음부터는 목사 다룬다는 그 이야기는 안하죠. 이 교회 내 거다! 그런 소리했다는 건 안 하죠.
헌금을 하게 되면 헌금 액수에 스스로 본인이 본인한테 중독 들어요. 십일조는 턱걸이했잖아요. 법을 지켜야 되니까. 그거 말고 야간수업 있잖아요. 다른 거 더 보충 수업하는 쪽으로 주일학교 애들 사탕 사주는 것부터 시작해가지고 선교 회비부터 점점 늘어나서 해놓고는 집에 가서 뭐 계산합니까? 내가 십에 일조 이상 십에 이조까지 다다랐는지를 계산해봐요. 계산해본다고요.
헌금이 계산이 된다? 이게 헌금입니까? 그건 애초부터 헌금이 아니죠. 헌금을 계산한다는 것은 헌금일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 특히 여자 분들은 어릴 때 고무줄 하잖아요. 고무줄 놀이하잖아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 봉~ 이라든지 안 그러면 전쟁,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노래 부르면서 한다 할 때, 뒤에 오는 친구가 참여를 하는 거예요. 발 넣고 그다음 몸 들어가고 조정해서 하잖아요. 할 때, 정말 발이 들어간 거예요, 몸이 들어간 겁니까? 사실은 몸 전체가 들어간 거잖아요. 발 넣었다는 말은 뭐냐? 내가 이 줄넘기를 할 의사가 있다 이 말이거든요.
헌금은 이거에요. 주님께서 일으킨 그 일에 나를 누락시킬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나 전체를. 그럼 그동안 뭐냐? 나는 없음으로 살기 싫었고 나는 나 있음을 보람으로 살았다는 것이 지금까지 생활이었다면 그 노선은 결국 성경에 보니까 내가 멀쩡하게 계속 간다는 것은 이건 지옥 갈 노선이잖아요. 이건 넓은 길로 가는 거고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고 나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그게 뭐냐? 사탄의 일이죠. 인간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 곧 사탄의 일이다. 베드로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사탄아, 물러가라. (마 16:23) 그 근거가 십자가의 사건을 근거로 해서 주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데살로니가후서 1장 한번 봅시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9절,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무엇의 형벌을 받으리라?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여러분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동창회 혹시 참석해본 적 있습니까? 동창회라든지 어떤 모임에. 계모임이라든지 안 그러면 친척들 모여서 오랜만에 제주도 놀러갈 때 이런 마음가지고 한번 가본 적 있습니까? 회비 얼마 내라, ‘오만 원 냈는데 만원씩 더 냅시다. 물가가 이렇게 센지 몰랐어요.’ 뭐 이렇게 할 때 그런 주고받는 대화, 대화의 그 기초가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과 9절이 기초가 되어서 대화가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어떤 대화를 할 때에.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뭘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필히 형벌을 주시는 걸로 확정됐죠. 신앙적으로 이게 ‘평온의 유일성’입니다. 유일성. 뭐 클래식 음악 듣는다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아니고 가장 편안한 것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에서 9절이에요.
이거 녹음해놨다가 무한 반복해보세요. 편안해져요. 복음을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미 끝났어요. 더 이상 뭐 수정조항 없습니다. 끝났어요. 의대 교수들 사직서 내는 거 융통성 있게 해라, 그런 거 없어요. 융통성 없어요. 끝났어요, 전부 다. 모든 게 끝났어요. 예수님을 모르는 자는 형벌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똑바로 살아라’가 아니라 내가 기필코 거기에 갈 자를 기필코 몰아세우고 있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일들이. ‘가, 빨리 가! 너는 저주의 길로 가라고!’ 강제로 밀어붙이고 있고, 반대쪽은 뭡니까? 복음을 아는 쪽은 ‘넌 천국을 가. 가란 말이야!’ 계속 뒤에서 밀어붙이는 일을 지금 천사와 성령께서 하나님께서 열심히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집에 하나씩 있는 거 있잖아요, 안마기. 그냥 누워있으면 퉁탕퉁탕 막 두드리잖아요. 너무 맞아서 나중에 골병들어가지고 또 정형외과 찾지 마시고. 그게 뭐냐? 종을 이제 평안히 쉬게 하시는군요. 평온의 유일한 방법이 그거에요. 형벌의 복음, 저주의 복음이에요.
놀러갔는데 약속된 렌트카가 안 잡히고 차도 안 온다. 우짤고 우짤고 할 때, 이 말씀 기억하게 되면 뭐 렌트카 차 안와도 뭐 천국 가는 데에 전혀 지장 없잖아요. 평온하죠. 말을 잘못했어요. 평온이 아니고 평온~~~~~~~~~해요. 평온~~~~~~~해요. 조항조 노래 있잖아요.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하는 것처럼 평온~~~~한 겁니다.
이게 왜 평온할까요? 이 말씀이 왜 평온할까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가는 게 왜 우리한테는 그렇게 평온하게 다가올까요? 마치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 같아요. 자기가 강도인 것은 변함이 없고 옆에 못 박혀 있는 이 사실이 왜 그리 편안하냐? 왜 그리 편안한지.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한 게 아니고. 내가 하면 어떤 결과를 내가 손에 못 쥐면 불안 불안한데 이건 내가 하는 걸 개무시해버렸어요, 주께서. 내가 평소에 얼마나 어떤 성과 얻으려고 노력하고 애썼던지, 그것을 완전히 박살내버리고 모든 것이 복음대로 다 진행되는 거예요.
이런 예가 적당한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아이가 옛날에 이사를 가고 난 뒤에 깜빡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자기가 이사 가기 전에 엄마가 용돈, 세뱃돈 준 거 따로 모아서 자기만 아는 은밀한 장판 밑에다가 돈을 딱 모아놨는데 이사할 때 고만 깜빡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려가지고 한 6개월 뒤에 자기 집 잘 있는가 싶어서, 어린 애니까 찾아가보니 포크레인이랑 불도저가 와서 자기 있던 집을 완전히 8차선 대로로 만들어놨어요.
그게 얼마나 편안~~~합니까? 자기 용돈 모아놓은 거 다 누락되었잖아요. 박살나버렸잖아요. 내가 애써서 공들여 쌓아놓은 모든 저금이 불도저 밑에 다 없어져서 못 찾아요. 흙 속에 파묻히면 못 찾아요. 아예 없어졌어요. 누락되었어요. 그 기쁨이 바로 내 몸 자체가 헌금인 겁니다. 내 몸 자체가. 또 아내 생일인데 꽃 사는 걸 잊어버렸다고 자기 얼굴에 리본 묶어서 ‘내가 꽃이다’ 이런 짓하지 말고. 얍쌉한 짓이죠. 돈 아깝다 해라. 너한테 쓸 돈 아까워 죽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신약에 우리 몸이 하나님의 제물이 된다는 말씀이 있어요. 로마서에도 나오는데(롬 12:1) 그거 하기 전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걸 가르쳐요. ‘잃어버림’. 잃어버린 30년. 잃어버린 세월. 잃어버린 역사를 이스라엘이 만들어가게끔 합니다. 이스라엘로 만들어진 역사를 이스라엘로 누락시켜요. 없애버려요. 만들어져야 없애요.
이스라엘 역사는 뭐냐? 하나님이 동행함으로서 얻어진 역사잖아요. 이 역사가 이스라엘 마지막에 다 날아가버립니다. 그러면 에녹도 하나님과 동행했죠. 이스라엘도 동행했죠. 노아도 함께 동행했죠. 이스라엘은 집단, 나라 자체가 동행했죠. 개인적으로 최종적으로 동행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예수님은 어떻게 됩니까? 주와 동행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빡세게 겟세마네 기도했고 기도의 응답은 뭐였습니까? 너 자신을 잃어버려라.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잃어버림. 나를 잃어버리는 것. 이것은 앞으로도 못하고 누구도 못하고 오직 예수님만 합니다. 찝찝하게 남기는 것도 없어요.
자, 노아의 경우를 한번 봅시다.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노아의 경우 언약 받았죠.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고 하나님과 동행했죠.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에게 나타난 것은 바로 노아 홍수였습니다. 노아 홍수. 이건 뭐 잃어버려도 대규모로 잃어버렸어요. 애들 저금통, 돼지 저금통 잃어버린 정도가 아닙니다. 결혼반지 잃어버린 게 아니에요. 강제조치였습니다. 완전히 인간사는 전체가 재개발 들어갔어요. 땅값? 땅값 못 받아요. 거주민 하나도 없어요. 그냥 다 밀어버렸어요. 노아 식구 달랑 여덟 명 빼놓고는 다 날아갔습니다. 그럼 노아 부동산 어디 있습니까? 물속에 있죠, 뭐.
노아는 뭘 알아요? 내 것 잃어버린 것을 유일하게 아는 살아있는 사람, 남은 자가 노아입니다. 그러니 언약의 특징은 뭐냐?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누락시키는 거예요. 사라지게 만드는 겁니다. 아까 데살로니가후서 1장 8절 9절,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 복종치 않는 자들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일가친척, 친구들 보세요. 아는 사람 가운데서 거래처 한번 쭉 보세요. 전부다 복음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눈앞에 다 사라질 겁니다. 없어져요. 그때는 물로써 사라졌지만 지금은 불로써 사라져요.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안 보이지만 그 사람들 어깨에 불을 지고 가는 거예요. 여러분, 국민의 힘 이번에 지면 안 됩니다, 할 때 불이 막 옆에 있어요. 불이. 갑질하는 회사 사장 옆에 불이 막 있어.
평온한 유일성. 만사를 평온하게 만드는 것은 주님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기꺼이 누락되는 거예요. 누락을 즐기는 것. 누락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헌금은 어디에 내는가? 헌금은 없어졌습니다. 죽은 인간에게 무슨 돈을 받아요? 이미 죽어버렸는데. 헌금은 없어요. 이 땅에서 헌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구제죠. 구제인데 빼앗기는 식이에요. 뭐를 빼앗기는가? 헌금했다는 구제했다는 당사자, 나 자신을 없애버리는 방식이 흔히 말하는 헌금이에요. 복음과 관련된 돈을 내는 것, 거기에 해당되는 거예요. 나를 내가 없애는 게 아니고 빼앗기니까 주님께서 없애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약간 난해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17년 만에 일본 중앙은행에서 금리를 0.1% 인상했습니다. 17년 만이니까 2007년에 약간 올랐다가 2024년 올해 3월에 처음 올렸습니다. 이것과 복음을 논하라, 이런 거. 이게 무슨 의미냐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의미냐.
아까 그림을 다시 한번 그리겠습니다. 인간이 있으면 인간 주위에 자기 주관심사가 점점이 붙어있다 했죠. 촘촘해요. 붙어있습니다. 붙어있을 때 ‘하나님이 없다’죠. 하나님이 없죠. ①번,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고 인간과 약간 멀리 있는 것, 하나님 생각 또는 신화지만 나는 믿고 싶다는 성경에 관한 이야기(②).
①번 같은 경우에는 성경에 관심도 없어요. 성경내용이 중요한 거니까 책 보는 게 뭐가 중요해요. 지금 나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 성경을 왜 보는데? 관심 없어요. 그러니까 ①+②이죠. ①+②인데 ②번은 내게 도움 되는 쪽으로 할 때만 ②번에 내가 약간의 다리를 걸쳐놓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 지금 이게 인간의 모습인데, 17년 만에 일본 중앙은행에서 금리를 인상할 때 이것이 확 당기는 사람이 있어요. 일본 엔화에 돈을 투자한 사람, 일본 국채에 투자한 사람, 그리고 일본 주식시장에 기대를 걸고 투자한 사람.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있어서 주식시장이라든지 일본 투자라는 것이 멀리 있는 점이 아니고 가까이 있는 점이에요. 공무원 월급보다 주식이 더 좋아요. 기다려봐, 내가 너 호강시켜 줄게. 이게 훨씬 시급한 문제에요. 성경은 아무 관심도 없어요. 차나 다려주지, 관심도 없어요.
이럴 때 일본 중앙은행에 금리가 0.1% 인상되어버리면 내가 투자한 것에 대해서 다른 투자자가 몰릴 것인가 빠질 것인가를 생각하는 거예요. 몰리면 가만있어도 주식이 어떻게 됩니까? 아무 노력한 것도 없이, 그걸 성경적 용어로 ‘값없이’, 값없이 주식이 확 올라가는 거예요. 더 은혜롭게 하면 까닭 없이. 까닭 없이 주식이 확 올라가는 것. 극한직업 가운데 제일 아닌 극한직업이 바로 그거잖아요. 올라가는 거죠.
그러면 올라갈 때 이걸 언제 팔 것인가 뺄 것인가만 생각하게 돼요. 홍콩 ELS 가는 거요, 홍콩. 중국이 망합니까? 이 말에 7억씩 넣었다가 삼분의 이가 날아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중국은 안 망합니다, 해서 거기 넣었다가 신한은행, 국민은행, 농협중앙회 전부다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17년 만에 일본 금리 0.1% 올렸다는 이걸로 인하여 과연 사람들이 투자를 할 것인가, 미국의 금리가 4.5%인데 이거 빼고 일본으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고민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거 해서 만약에 예를 들어 주식이 올랐다 칩시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아이고, 갖고 있어도 소용없다. 이거 빼가지고 다른 데 삼성이나 해볼까?’하고 빼고 난 뒤에 그 다음날 주식 올랐다면 어떻습니까? 이거 누구한테 빼앗긴 거예요? 누구한테 빼앗긴 겁니까? 하나님한테 빼앗긴 게 되죠. 왜? 본의 아니니까. 그럼 자기한테는 뭐가 돼요? 누락이 되겠죠.
내 생돈 한 2천만 원 날아갔다. 그럼 2천만 원 빼앗긴 게 되죠. 빼앗겼으니까 멀리 있던 신이 갑자기 소환돼요. 잠깐만 봅시다, 해서 소환된다고요. 내 돈 왜 빼앗아갔습니까? 그 경우에 뭘 느끼느냐 하면, 그 인간은 내가 나를 관리하는 데에 한계가 있구나, 하는 걸 느끼죠. 내 인생을 내가 계획한대로 밀어붙이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그럼 평소에 그 사람은, 전쟁한 겁니다. 나를 위한 전쟁. 하나님께서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대리전쟁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대리전쟁해요. 예수님은 없는 채로 오신 분이에요. 없는 채로 오셔요. 할례뿐만 아니고 모든 게 없어요. 이 땅에 주님의 것이 없어요.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복음을 모르는 자들과 이 세상 자체를 없애도 주님한테는 하나도 안 아까워요.
원래 이 세상은 후패하고 썩어져가야 되니까. 로마서 8장에, 탄식하며 썩어져가야 돼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건 썩어져가야 되기 때문에 이미 쉰내 나는데 거기에 뭘 미련을 갖고 있어요? 주께서 오신 이유는 너 없어진다는 그 통보하러 온 거예요. 노아처럼. 이 땅은 멸망한다고 없어진다고. 그걸 안 믿어서 주님께서 살해당했지만.
우리는 아직도 여기에 미련 있다면 우리는 무슨 전쟁하고 있습니까? 나의 전쟁하죠. 나의 전쟁. 인간은 ①번, ②번 자기 전쟁이 기본이에요. 남 죽든 말든 나만 안 죽으면 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싸운다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죽은 시체는 안 싸워요. 죽어있으면서도 안 죽었다고 우기니까 싸우는 거예요. 죽으면 저리 가. 죽으면 저리 가. 자꾸 저리 가라는 거예요.
손가락 아프다. 자칫하면 파상풍으로 죽을 수도 있잖아요. 대일밴드 칭칭 감고 후시딘 바르면서 안 돼, 안 돼, 죽으면 안 돼! 막 상상해보는 거예요. 손가락 썩었다, 손목까지 썩었다, 팔 다 썩었다, 다 썩어서 팔 잘라내도 안 돼. 다 썩었다. 그럼 안 돼! 죽어도 너무 비참하게 죽는 거야. 고상하게 죽어야 되는데 너무 비참해. 왜 내가 누락이 돼야 돼? 미쳤어? 안 돼! 난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이유는? 몰라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죽은 거예요. 죽었다는 말을 성경의 다른 말로 버림받은 겁니다. 버림받은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 헌금은 뭐냐? 버림받은 것을 나한테 내 놓으라. 내가 바꿔줄게. ‘두껍아, 두껍아. 옛 집 다오. 새 집 줄게.’ 이거에요. 썩어가는 나를 주께 드려야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그렇고 열두 제자 도망치기 바빴지, 십자가 죽는 데 참여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고요. 안타까워했지, 타인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지, 자기는 안 죽으니까. 별로 안타까운 것도 없어요. 약간 마음이 쓰였죠. 주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요한복음 21장, 이거 참 중요한 구절인데… 이거 한번 보셔야 돼요. 요한복음 21장, 제가 이 말씀을 굉장히 은혜로 들은 순간이 있었어요. 서경수 목사님이 사당동에 있는 하나교회 강의하실 때 이 본문가지고 했어요. 이 본문 21장 18절, 서 목사님 한번 읽어보세요.
21장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아멘. 이게 바로 헌금이잖아요. 이게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내게 채운 거잖아요.
안 빼앗기려 하는데 주께서 강제로 빼앗아버리는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그냥 자살하면 안돼요. 손가락 다치고 이거 안돼요. 말씀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강하게 당겨지는… 복음을 전하면서 추진력으로 내가 빼앗기는 것,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점점 더 상실되는 것이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이 상실된다는 그런 관점에서 헌금을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신 유일한 십자가라는 헌금에 참여하는 셈이 되는 거예요.
참여해버리면 뭐냐? 이스라엘 전쟁에 합류한 셈이 된다고요. 없는 자들이 있는 자와 벌이는 전쟁에서 누가 이겨요? 결국은 할례 받은 자가 이기잖아요.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잖아요. 할례 받은 자, 그러니까 없는 자가 있는 자를 이기는 거예요. 그 원칙은 한결같습니다. 이유가 뭐냐? 이 환경이 불로써, 물로써가 아니라 이제는 불로써 심판 당한다는 것이 확정된 환경이기 때문에 그래요.
노아가 동행하면서 결국 홍수사건이 일어났잖아요. 노아 홍수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에 하나님으로 인하여 노아는 그 의미를 뭐로 봤느냐 하면 나대신 잃어버린 자가 대신해서 노아 홍수를 마감했어요. 노아 홍수는 방주가 새 땅에 도착된 게 마감이 아니고, 도착하면서 새로운 원칙이 수립되어야 되죠.
새로운 원칙이 뭐냐? 정결한 짐승, 정결한 거예요, 그것 때문에 방주에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차별해서 집어넣었으니까, 정결한 새를 잡아서 드려요. 정결한 짐승을. 새도 잡고 짐승도 잡고. 정결한 짐승을 잡음으로써 뭐가 수립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없애지 않는 것은 정결한 것이고 정결한 것만 받는다는 식으로 정결한 것을 없애버렸어요, 제물로. 번제로.
정결한 것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결한 것이 떠나버리면 저절로 정결한 것이 살던 그 공간은 정결한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거룩한 게 없기 때문에 그냥 날아가게 되어 있어요. 정결한 짐승이 그 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이 노아 홍수의 취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되었을 때 하늘에 갑자기 없던 게 등장했죠. 뭐가 등장했을까요? 레인보우. 무지개가 등장해요. 무지개가. 무지개는 이 지구상에서 대기층에 일어나는 빛에 대한 산란현상을 무지개라 합니다.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데 입자가 오면서 꺾이는 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이 해석하는 망막의 색깔이 서로 구분지어 차이 나게 보이는 그것을 무지개라 합니다. 과학적으로 그렇게 하죠.
그러나 성경에서 무지개라 하는 것은 ‘이번 홍수기획, 작전은 성전에서 비롯되었다’ 이게 무지개의 의미입니다. 에스겔 1장(1:28)과 요한계시록에 보면(4:3, 10:1) 하나님의 성전에 뭐가 있을까요? 무지개가 있어요. 무지개가 있고 성전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요. 아래쪽을 관할하는 성전과 위쪽을 관할하는 성전, 그 사이에 무지개라는 패널(panel)이 있어요. 샌드위치 구조, 패널로 되어 있어요.
위쪽과 아래쪽. 아래쪽은 난리도 아니에요, 사람 조진다고. 위쪽은 평온~~해요. 너무 평화로워요. 하늘의 평화를 위해서 아래쪽은 난리 나야 됩니다. 위쪽의 천국은 값없이 천국이 아니에요. 지옥이 지옥다워야 천국이 천국다워요. 아주 잔인한 이야기지만.
그러니까 효심 많은 사람 천국 못갑니다. 지옥 간 자기 엄마 걱정되어가지고. 그래서 천국 가는 사람은 뭘 빼내겠어요? 효심을 누락시키는 겁니다. 효심을. 효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온 할머니도 아니고 너네 엄마만 사랑하면서 그것도 효심이가? 이기주의지. 내 자식 사랑하는 그것은 자식사랑 아니에요. 짐승도 자기 새끼 사랑할 줄 알아요. 인간은 짐승만도 못해요, 사실은.
그 효심, 자식 사랑 다 솎아내버리죠. 다 솎아내요. 육에 속한 것. 다 집어내요. 마지막 장애가 자식이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저지레를 다 용납하시고 “이래도 아직까지 네가 한 것에 대해서 네 행함에 대해서 미련 갖는 것 있나, 없나?” “뭐 저는 저한테 미련 없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테스트, 마지막 통과, 네 자식 바쳐라. 이스마엘 바치지 말고 미운 자식 말고 사랑하는 이삭 바쳐라.”
아브라함은 바치라 할 때 안 바쳐요. 안 바치고 아브라함이 꼼수를 썼습니다. 그 꼼수를 여러분 배워야 돼요. 뭐냐 하면,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야. 이게 꼼수가 아니고 진짜 믿음이에요.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모든 행함이 부정당하는 이것이 주의 일이다.’ 달리 얘기할까요? 주의 일이란 ( ). 괄호 안에 ‘나의 모든 행함이 거부당하는 것’. 이것이 주의 일이에요.
그래서 겨자씨만한 믿음이 뭐냐 하면 산이 뽑혀서 바다에 빠지는 거죠. 내가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죠. 그러니까 나를 안 믿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 29절, 어제 낮 설교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의 일을 할까요?” 할 때 주의 일은 뭐냐? “네 손 떼고 나 믿는 것이 주의 일이다. 네가 생각하는 한계, 네가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 나온다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걸 포기해야 된다. 따라서 내가 하는 일과 너의 일을 비교해보라. 너는 예상되는 일을 하지만, 네가 예상 못한 일을 너에게 하겠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거창한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에 우리가 관련되어있음을 인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내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이 이사야의 말씀의 완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어떤 기계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기계의 중심선은 용수철로 되어 있어요. 여자들 갖고 있는 화장품 봐도 그런 게 있어요. 겉은 그 중심선을 감추는 식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양쪽을 갖고 놀다가 손을 탁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다시 용수철이 하나가 되어가지고 ‘무슨 일 있었지?’ 하고 아무 일 없는 것이 되죠.
인간의 모든 일은 안에 주님의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우리는 겉만 장식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겉인데 따지고 보면 누가 한 일이에요? 주님의 누락과 관련된 일을 우리가 벌인 거예요. 실컷 해놓고 ‘아무 의미 없다. 이것도 주의 일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우리는 주님 자신의 바침에 헌금에 우리가 이미 참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평생은 주님께 헌금하는 일생이라 볼 수 있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주님 앞에 날마다 내 것이 누락되고 잃어버려지는 세월이 우리 인생입니다. 내 것을 자꾸 잃어버리는 거예요.
돈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고 여겼던 돈의 의미가 날아가버리죠.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 자식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내 것이라 여겼던 그 자식이 알아서 엄마한테 대들어요. 알아서. 뭐 이거 모리아 산에 안 갖다버려도 돼요. 자기가 알아서 가. 자기가 알아서 가요.
“엄마,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노? 엄마가 4대 보험을 해줬나, 뭘 했나? 아무것도 해준 거 없잖아. 나라가 해줬지.” 실컷 해놓고 돌아오는 것은, “엄마, 내가 안 돌보면 엄마 이제 돌볼 사람 없어. 그러니까 엄마가 알아서 남은 돈 있거든 나한테 바쳐라. 형 주지 말고 나한테 가져와.” 이런 식입니다.
그걸 너무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왜? 데살로니가후서. 그땐 속으로 ‘이 자식아, 네가 복음을 알아? 세상은 이미 끝났어. 세상은 지금 파장이야. 불심판으로 라이터만 딱 켜면 폭발하게 되어 있어. 여기서 복음을 모르는 자는 다 멸망하는 거야. 노아 홍수의 제2탄이야.’ 그걸 이제 말하게 되면 “엄마, 난 관심 없어.” 하고 점점이 있는 자기에게만 관심 있겠죠.
헌금은 누락입니다. 누락이고, 우리는 평온한 유일한 것, 복음과 결부해서 우리 인생을 늘 대조해보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없는 자가 주께서 복음을 안다 했는데 우리 가운데 지혜 있는 자가 누가 있으며 가진 자가 누가 있으며 대단한 자 권력 센 자가 누가 있느냐 하지만 십자가 복음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교회라고 했는데 저희들 주께서 그런 식으로 이끄심에 대해서 너무나 감사하고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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