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21강)신9:7(분노의 유발)20240429(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9장 7절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격노케 했다, 광야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격노케 한 것을 너, 인간아 잊지 말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이야기의 취지가 이거예요. <인간에게 애초부터 구원은 없다> 에요.
격노케,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만 하는 원인제공자가 인간이지,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다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세웠냐 하면, 나를 분노하게 하는 원인 제공자로 인간을 세운 거예요. 그렇게 세웠단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들은 구원이 없죠? 구원이 없는데 지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 악마 쪽에서 가만 안 있죠. 그러면 개입을 하면서 인간을 자꾸 악마가 부추겨요. 뭐라고? 구원해 달라고 떼를 쓰라는 거예요. “시킨 대로 다 할 테니까, 저를 구원해주세요.”
하늘나라 가게 해달라고 자꾸 떼를 쓰도록 뒤에서 자꾸 부추기는 겁니다. 악마가 인간 속에 앱을 깔아뒀는데, 통제하는 앱을 깔았습니다. 앱을 까는 이유가 누구의 글에도 참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만, “나는 원래 무죄하다.” 죄가 없다, 무죄하다. 나는 원래 죄가 없는 존재야.
이게 악마가 이런 제안을 이런 식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거예요. 이미 선악과 따먹었고, 선악과 따먹으면, ‘따먹었다’가 되는 게 아니라 여기에 누가 들어오느냐 하면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가 들어오는 거예요.
죽어야 될 존재가 구원을 해 달라? 이야, 이건 분수를 몰라도 정말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죽어야할 대상이 죽어가면서 “어떻게 좀 건져주면 안 됩니까?” 이 말이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뭐에 대한 개무시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죽인다는 것을 개무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배후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부추긴 거예요. 우리가 아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값없이 구원’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고, 여러 군데 나오죠. ‘값없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러 군데 나오잖아요. 값없이 구원을 한다니까 여기에 악마의 부추김을 받은 인간들이 “이거 참 괜찮다. 값없이 구원받겠습니다.” 라고 나와요, 인간들이.
인간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여기 신명기 9장 7절처럼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는 원인 제공자라는 것을 자꾸 인간은 생각을 안 하고, 말씀대로 생각을 안 하고 “뭐, 괜찮은 거 없나? 내게 이익은 없을까?” 하다가 ‘값없이 구원’이라고 하니까 “야, 값없이 구원이래, 공짜래.” 그러면서 “믿습니다!”하고 덤벼들죠.
그러면 주께서 뭐라 합니까? “값 내놔라.” “아, 구원 받았으니까 헌금, 십일조 하라 그 이야기지?” 그 값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헌금으로 때울 수 있는 값이 아닙니다. 값을 내 놓으란 말은 ‘너희들이 치를 수 없는 그 값을 네가 제공할 수 있느냐?’ 그게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 받았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값없이 구원을 얻을 자격자는 이 세상에 예수님 빼놓고는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모든 율법이고, 성경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이야기죠. 구원은 누구 이야기예요? 예수님 자기 구원 이야기예요. 예수님 자신 구원이야기.
이걸 함축해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환원되는 이야기, 이게 성경 이야기입니다. 여기 인간 못 끼어들죠. 마귀도 당연히 못 끼어들죠. 마귀는 당연히 못 끼어들죠. 그래서 어제 오후 설교에도 했는데 문장으로 한번 해볼게요.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부정이죠,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가 돼요.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
이 말을 어디에다가 초점을 두냐 하면, ‘아무도 없다’에 초점을 둬야 되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냐 하면,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 여기 ‘모든’이 영어로 하면 All,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 이게 하나님의 대자대비한, 완전 불교예요, 대자대비한 뜻인데, 여기서 예외적으로 구원 못 받을 자는 예외적으로 있다. 그 사람은 어디 간다? 지옥 간다. 이렇게 되겠죠.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죠. 그럼,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어떻게 확인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줄 때, ‘아무도 없다’가 구원받기를 원한다 할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아무도 없다를 생각 못하고 ‘하나님은 구원해 줄라고 아주 애를 쓰시는구나’라고 오해하면서 덤벼들 때, 과연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확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구원이 없다, 한번 적어볼게요. 굉장히 중요한 문장이기 때문에 여러분도 같이 적어 놓으면 좋은데..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를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겠느냐?> 인간에게 구원이 없다고 선언하신 그 예수님을 네가 믿을 용의가 돼 있나? 표정들을 한번 봅시다. 믿을 용의가 돼 있어요? 이게 믿음이거든요! 이게 믿음인 거예요.
나를 빼는 거예요. “나를 빼시더라도 그거는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흔쾌히, 제가 흔쾌히 그 주님의 일에 찬양하고 동의합니다.” 가 되는 겁니다. 갑자기 뭐 걱정이 되세요? 예수님을 상대로 기싸움이라도 할 생각 하지 마세요. 주님은 아버지의 지시만 받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거기에 신경도 안 써요.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자를 내가 마지막 때에 다 살린다 하거든요. 다 살리는 거예요. 마지막 살릴 때 어떻게 살리느냐 하면, 그 사람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낸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를 살립니다. 수천 번, 수만 번 들었던 이야기죠.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수만 번 들었잖아요.
들었는데 똑같은 이야기를 요 문장으로, 요걸 집어넣자 이 말이죠. ‘인간에게 구원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이렇게 돼야 돼요. 만약에 시큰둥해서 이걸 못 믿는다면, 인간은 다른 예수를 원했던 거예요, 다른 예수. 내 소원을 들어주는 예수를 원했던 겁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모습이 신명기 9장 7절에서 인간들은 뭘 해도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대상일 뿐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대상이 인간들은 평소에 잘 안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냐 하면, 7절에 보면, “너는 광야에서”라고 돼 있죠. 광야. 다음 주 설교의 제목도 ‘광야’인데요, 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일이죠. 이 광야에다가 집어넣지 아니하면 인간은 꾹꾹 참으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나름 애를 쓰고 있는 인간이에요. 그런데 그 애씀을 모조리 무용지물로 만드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애쓰고, 하나님이 얼마나 성실하게 우리를 사랑하는지 그걸 안 놓치려고 안 잊으려고 애를 쓰는데, 결국 그것마저 몽땅 뭐냐 하면, 내 쪽에서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잘 대우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이게 다 무용지물로, 소용없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이 인간을 죽이는 거니까,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는구나, 물도 없죠, 양식도 없죠, 먹고 싶은 고기도 없죠, 뭐하자는 겁니까?
노무현 멘트지만, 이거, 이거 뭐하자는 이야기죠, 지금? 이거는 인간을 죽이고자 하는 느낌 아닙니까? 죽이고자.. 인간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인간 안에 앱을 깐 누구를 공격하고자 함이다? 마귀가, 인간을 통제하는 마귀가 가만 두지 않죠. 뭘 해야 돼요? 그 다음엔 뭘 합니까? 반항하죠. 반항을 성경에서는 광야에서 ‘원망’이라 했잖아요. 반항하잖아요, 반항.
우리가 그럼 뭘 어쩌란 말인지, 하나님께 뭘 해드려야 돼요, 뭘? 뭘 해드려야 되냔 말이죠. 상당히 이런 이야기가 이해하기 힘들죠. 이해하기 힘들면 안 되는데, 이런 이야기가 힘들다는 말은 그 동안 우리가 모든 성경을 보면서 자기 구원을 전제로 해서 성경을 봤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말로는 뭐 주께 영광, 주님 찬양 하지만 아직까지 이 대전 바닥이 살 만하고, 서울 바닥이 또 살 만하니까, 아직까지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약간 에너지는 있고, 다 홀라당 날아가도 배 열두 척은 남아 있으니까, 뭔가 수가 나겠지 라는 생각인데, 하나님께서는 그거한테 용납이 없습니다.
제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를 들 테니까 한번 보세요.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느냐 하면, 히틀러와 스탈린을 한 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히틀러, 스탈린 이 두 사람이 모두 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국가를 강제로 지배했던 1인 독재 했던 자들이잖아요. 이걸 가지고 전체주의라고 합니다. 전체주의는 마지막 피라미드 정점이 있어줘야 전제적으로 통제가 되니까, 김정은이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차이점이 있어요. 어떤 차이점이냐 하면, 히틀러는 나치 당원들이 박수를 막 친다고요, 히틀러한테. ‘하이 히틀러’ 그러면서 박수를 치면 히틀러는 “음, 그래, 그래.” 하고 그냥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스탈린은 소련의 인민들이 박수를 막 치면, 자기도 같이 박수를 칩니다. 한 20년 전만 해도 TV 에서 누가 박수를 사람들이 그냥 고맙다고 했지, 근데, 20년 전부터는 같이 박수치잖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인민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고, 인민들과 같이 있으면서 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대의명분에 앞에서 저는 똑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라고 티를 내는 겁니다. 스탈린, 이 사람은 대학교 때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에요. 인간을 가스라이팅 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회사에서 꼰대란 소리 들어가면서 일을 막 함부로 시키잖아요. “이것들이 뭐, 라떼는 말이야. 야근한다고 어디 불평이 있어? 뭐, 커피가 어디 있어? 먼저 새벽부터 와서 일했어. 이게 배불러가지고 말이야 요즘 젊은 사람들이“라고 막 간섭하고, 틈나면 ”라떼는 안 이랬어. 그냥 시키는 대로 했어.“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가학적인 상사로 보잖아요.
그것 하고, 부하 직원에게 사소한 가정 일도 묻고, ‘그래요’하면서, 안아주고, ‘생일 축하합니다.’도 해주고, 잘 격려해주고, 낮은 자세에서 해 줄 때, 어떻습니까? 서열이 바뀝니까? 위계서열이 바뀌어요? 안 바뀌죠. 어느 쪽이 더 간사해요? 어느 쪽이 더 교묘합니까? 스탈린 쪽이 교묘한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신학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했느냐 하면, 히틀러 같은 경우에는 이래요. ”너 왜 나치 법을 지켰어? 너 반성해? 어떻게 네가 회개할 거야?“ 범죄자에게 그렇게 하잖아요, 특히 유대인 같은 경우에. 히틀러는 뭐냐 하면, 그런 거 없고, 고문도 없어요. 히틀러한테는 고문 같은 게 없어요.
왜 고문이 없느냐 하면, 유대인이 나타나잖아요, 그러면 유대인 자체가 죄예요. 굳이 고문할 필요가 없어요. 출신 자체가 죄예요, 출신 자체가. 상당히 복음적이에요, 히틀러가. 그런데 스탈린은 그에 비해서 교묘해요. ‘부하린’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 친구입니다. 혁명을 같이 한 사람이고, 친군데, 나중에 정치적인 적이 된 사람인데, 부하린을 딱 잡아놓고 심문을 해요.
스탈린은 심문을 해요. 회개와 반성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회개와 반성을 촉구하는데, 심문하는 문제를 누가 정하냐 하면, 스탈린이 정해요. ‘너는 언제부터 인민의 적이 되었는가?’ 부하린은 적 된 적 없어. 적 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질문 자체가 ‘너는 언제부터 인민의 적이 되었는가?’ 히틀러 같은 경우에는 일방적으로 ”너는 유대인이야. 그러니까 아무 이야기 하지 마. 그냥 죽여줄게.“ 이게 히틀러라면, 스탈린은 교묘하게 이미 정해졌어요.
인민의 적이에요. 적인데, 자칫하면 스탈린이 히틀러처럼 인민들의 위에 있는 사람처럼 되잖아요. 그러나 스탈린은 뭐로 위장하느냐 하면, 인민 위에는 아무도 없이 모든 주권이 인민에게 있고 인민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명분 같은 게 있어요, 명분. 그 명분을 위해서 어떤 범죄자를 잡을 때는 나한테 잘못한 게 아니고, 대의명분에 대해서 도전하는 자라는 것을 자기 입으로 폭로하도록 그때부터는 강압적인 고문이 들어오는 겁니다.
‘너는 언제부터 인민의 적이 되었어?’ 그러면, 거기에 대해 스탈린이 원하는 답변은 뭡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부르주아 집안에 태어나서 인텔리겐자 교육을 받아서, 서양 교육을 받아가지고, 그 때는 내가 인민의 피를 빨아먹고 유학 갔다 온 줄을 내가 몰랐습니다.’ 라는 말을 스스로 하게 함으로써 독재는 자기가 자행해놓고 이게 뭐냐 하면, 공동의 인민이 하는 작업인 양 돌려버리는 그런 수작을 한 거예요, 수작을.
그런데 하나님은 히틀러 부류에요? 스탈린 부류입니까? 하나님은 스탈린 부류에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이 들어갑니다, 율법이. 율법으로 들어가요. 광야는 사람이 살 곳이 못돼요.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에다가 집어넣어요. 집어넣을 때, 율법을 같이 집어넣어요.
율법을 같이 집어넣으면, 인간은 물 없어서 못 살겠다고 원망하고, 양식 없다고 원망했는데, 광야에 집어넣은 하나님은 뭐라고 죄목을 짓느냐 하면, 율법을 어겨서 너는 죽어 마땅하다고 보는 거예요. 율법을 어겨서. 그러면 인간 쪽에서 생각할 때, 인간 쪽이라 하지만 마귀 쪽이라 보면 돼요. 같은 편이니까.
마귀 쪽에서, 인간 쪽에서 생각할 때, ”그러면, 율법을 지키면 될 게 아닙니까? 율법 지키며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했으니까 둘 중에 하나니까. 그러면 지키면 되잖아요.“ 이렇게 나오겠죠. 그런데 이 광야라는 곳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 환경으로 조장해놓고 율법을 줘버렸어요. 지킬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마귀의 지시를 받고 자기가 안 다치고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악마가 그래요. 악마의 반란을 반란으로 그걸 기정사실화 하고 악마도 하늘나라에 같이 살고 싶은 거예요. 그게 그 습관이 그 마음이 인간에게도 가는 거예요. 나 안 다치고 구원받는 방법,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 가운데 어느 게 아주 멋집니까? ‘값없이 구원’이죠.
그건 내가 안 다치잖아요. 행함 없이 믿음으로, 이거 얼마나 좋은 거예요? 자기가 안 다친다니까요. 믿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상대로 할 때,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걸 알고, 이 악마가 교묘한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남성만 60만인 그들을 어디로 몰고 가느냐? 출애굽 했을 때, 바다로 몰고 가요.
바다로 몰고 갔다는 것은 떼죽음 당해도 마땅함을 알려주는 겁니다. 떼죽음 당해도 마땅해요. 그러면, 유월절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 같으면 자기가, 우리 민족이 탈출했지만 어디로 갑니까? 바다 속으로 들어가죠. 바다 속에 들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돼요.
왜, 그 유월절 날 이미 한번 죽었던 거기 때문에 당연한 걸로 여기는데, 그들은 유월절 날 좋~~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만 구원됐다, 우리만, Only 우리만 구원되었다고 좋아해가지고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살 것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들을 집단적으로 죽일 것이라곤 생각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환경을 조성하고 율법을 계속 거기에 동반시킴으로 말미암아 인간들로 하여금, 결국에 인간들은 구원될 자격도 없으면서 배후에서 악마가 시키는 대로 ‘제발, please 저를 좀 구원해 주면 안돼요?’라는 식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그걸 내뱉게 돼 있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뭐에 대한 모독이냐 하면, 죽이려고 하는, ‘정녕 죽으리라’는 율법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을 율법을 줌으로써 마주치고 부딪치게 하는 게 하나님의 작전이에요. <율법은 진리>죠. 율법만 진리에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거짓이죠. 그런데 율법의 진리가 어디서 등장하느냐 하면, 그냥 ‘율법은 진리다’하면 이건 몰라요.
율법의 진리가 인간과 동반해서 율법에 의해서 인간이 어느 정도로 거짓됐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그 들추어냄이 진리에요. ‘저거는 진리다’ 가 아니라, 진리가 우리 속에 와서 들추어내야 돼요. 들추어내는 그 거짓이 뭐냐 하면, <나는 기어이 구원 받아야겠다> 이게 바로 거짓입니다.
진리는 뭡니까? 진리는 <예수님만 구원>돼요. 예수님만 구원돼요. 모든 인간을 피합니다. 모든 인간을 피하고 예수님만 구원되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개념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지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메시아가 오면 구원받는다고 했느냐? 그거는 바로 율법에 대한 해석을 성급하게 해석해서 그래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율법을 해석해버린 거예요. 율법해석, 말씀해석을 인간들은 자체 내에서 율법을 받으니까 율법 가지고 자기가 메시아 나라의 백성,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속에 숨어있던 자기 본심을 안 터뜨릴 수가, 안 내놓을 수가 없어요, 본성적으로. 주님은 잘 걸렸다는 거예요. ”내 그럴 줄 알았어. 잘 걸렸어.“ 느그 애비는 뭐다? 악마다, 마귀다. 느그 애비는 마귀다 이 말이죠.
간음한 여자를 현장에서 잡아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끌고 왔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끌고 오면서 한 이야기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 당신 딱 거기 있어. 당신 잘 걸렸어.“ 이거잖아요. 예수님은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너희들이 잘 걸렸어.“ 너희들이 잘 걸린 거예요.
제가 전에도 얘기했습니다만, 다니엘, 그리고 구약의 에스더, 에스더의 아하수에로 왕, 그리고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나오죠. 여러분들도 그런 느낌 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경을 한 번 보세요. 보게 되면, 그 아하수에로 왕이나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실력을 인정한 걸로 돼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정했죠. 막 찬양해요.
모르드개한테 반지를 다 주면서 하만 집 네 맘대로 해도 괜찮아. 너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느부갓네살은 더 심하죠. 다리오 왕도 다니엘을 사자 굴에 넣었다가 끄집어낼 때에 다리오 왕이 깜짝 놀랐어요. 자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요, 너의 하나님을 건드리는 자는 내가 용서치 않으리라고 했다고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 왕이 구원을 못 받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참 이상하죠.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겸비하고 겸손하고 하나님이라면 꼼짝 못하고 그것도 체험적으로, 이론이 아니고, 신학이 아니고 체험적으로 그걸 느껴놓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에요. 뭐가 빠졌죠? 뭐가 빠져서 그렇습니까?
그 해답이 야고보서 2장 19절에 나와요.(약2: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알고 무서워하고 벌벌 떨어요. 벌벌 떤다는 말은 이야, 대단하다, 쓰고이~ 일본말로 대단해요. 대단한데, 제가 여러 번 얘기했지만, 감사가 없어요. 고마움과 감사가 없어요.
‘졌다’ 이건 돼요. ‘야, 정말 내가 믿던 마르둑 신보다 훨씬 낫다. 졌다. 진짜 신은 당신이 최고’ 일부러 막 오른 팔 들고 최고라고 해줘요. 그러나 고맙고 감사함이 없어요. 그걸 신약에서 최종적으로 은사를 이야기 하는데, 그게 뭐냐, 그걸 사랑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처지를 챙겼다고 하는 말은 사랑이 없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에요. 아직도 자신의 것을 챙기는 것, 제가 광주강의에서 초반에 인간의 구원의 구조에 대해서 언급한 게 있죠. 기억 안 나시면 잠깐 이야기해 드릴게요. 인간은 신에게 바로 다이렉트로 연결하면서 반성하고 회개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냈다? 예수님을 보내서 피 흘려 죄 사했다 하니까, 내가 지은 죄를 내가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의 피로 나는 구원받는다. 요 구조, 요 구조가 바로 마귀가 만든 신학이죠. 쉽게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이라 보면 돼요.
그리고 마귀가 만든 구조에 빠진 사람들이 더욱 더 고마운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부활의 영을 주셔서 그 다음에 뭐냐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 함이라. 보너스가 한 두 개가 아니에요. 보너스, 복지가 빵빵하게 보장돼 있어요.
그러니 인간 보기에 어찌 이런 좋은 하나님을 아니 믿을 수가 있겠어요? 이런 하나님이 고맙다는 거예요. 감사가 되고, 찬양이 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뭡니까? 이 전체가 뭐냐 하면, 무슨 노림수냐 하면, 내가 몰랐던 나의 구원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자, 이러한 연쇄사슬에서 내 죄는 어디 있죠?
여기서 반성한다는 죄는 내가 끄집어 낸 죄죠. 구원받고자하는 그것이 이것조차도 죄라는 사실을 인간은 고백하지를 못합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상정해서 나도 존재하지만, 하나님도 존재한다, 존재끼리 놉시다. 따지고 봅시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다이렉트로 연결되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께서 ‘정녕 네가 죽으리라’는 말이 빠져 있어요.
나 살아있고, 하나님 살아있으니까, 우리 살아있는 존재끼리 이바구 한번 해봅시다. ”잘못됐고, 하나님 경배 못하고 나만 이기주의인 것을 회개합니다.“ 라고 나왔을 때, 그 인간은 사실은 악마의 앞잡이에요. 악마도, 인간이 용납할 수 있는 십자가를 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냐 하면 인간이 용납해버리면 그런 주님은 이 땅에 내려오신 적이 없어요. 하늘에서 내려온 주님은 인간에게 맞아죽고 피를 흘리는 메시아, 하나님이지, 인간이 이해가 되는 예수님을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거에요. 피예요. 그래서 주님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뭐를 흘리지 않았어요? 피를 흘리지 않았어요.
주님 관심사는 그거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피를 누가 동기가 됩니까? 신명기 9장 7장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뭐했다? ”격노케“했다. 완전히 하나님은 스탈린이죠. 격노하게 만드는 게 없으면, 절대로 피흘림이 없어요. 피가 없으면 다 이루었다도 안돼요.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다 이루었다’예요.
악마의 요구 조건은 그겁니다. 인간을 넣어주고 다 이루었다 하라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릴 때, 혼자 달리지 말고 구원받은 사람도 데리고 달리라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뭐냐? 목자를 치니 어떻게 됐다? 양들이 흩어졌어요. 목자의 가는 길을 어느 양도 아는 양이 없다. 양은 왜? 제 갈 길만 아니까.
양들의 길은 목자의 길과 틀어져있고 막혀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말씀은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다 막혀있음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통보하는 겁니다. 나는 너를 구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나를 믿느냐? 믿습니다! 그럴 때 주의 이름만 높아지죠. 그 공간이 뭐냐? 예수 안이에요. 그게 십자가 안이에요. 죽은 자가 나불나불 말한다고 산 자로 간주하는 게 아니거든요.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에 지시고 뭐 어쩌고...’ ‘파묘’라는 영화에 보면, 고수(북, 장구 등을 치는 사람) 비슷한 사람과 굿 하는 여자 무당 얼굴에 뭐가 있죠? 문자가 있죠. 문자가 빡빡하게 박혀있어요. 한자로 다 쓴다고 애 먹었을 거 같애. 문자가 액운을 막아주는 거예요. ‘오멘’이라는 옛날 영화에도 귀신이 안 나가니까 신부가 뭘 하냐 하면, 도배지를 다 바꿨어요. 성경 말씀으로 가득 찬 도배지로 다 바꿨어요.
이게 누구 아이디어예요? 그게 바로 마귀의 아이디어에요. 그게 효과 있다, 없다를 자꾸 마귀는 따지려고 하는데 따지기 전에 하나님은 뭐라 하냐 하면, 구원 되지도 않는데 왜 쓰잘데기 없는 노력을 하느냐 이 말이죠. 구원이 안 되는데, 구원 대상도 아닌데 왜 잘 보이고, 예뻐 보이고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고 애를 쓰고, 왜 그런 쓸데없는 노력을 마귀가 아니면 누가 시키겠어요?
주님은 아주 쿨합니다. 너 구원 안 돼. 오케이? 오케이! 끝입니다. 진짜 너무 쉬워요, 너무 쉽다고요. 그 점을 출애굽기 15장을 한 번 봅시다. 15장 6절과 12절을 보겠는데 6절부터 먼저 봅시다. 6절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기에 주의 뭐가 나오죠? ‘오른손’, 주의 오른손, 그리고 주의 오른손이 무슨 뜻인지를 그 당시 이스라엘도 모르고, 몰라요. 주의 오른손이 뭐냐 하면요, 오른손이 겨냥하는 게 있어요.
이거는 주님만 겨냥할 수 있는 곳이에요. 주의 오른손이 겨냥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오른손 끝에 뭐가 보이냐 하면, 주의 원수가 있어요. 인간은 원수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원수가 있다는 걸 몰라요. 인간에게 원수가 없으면 어떤 폐해, 어떤 문제가 발생되느냐 하면, 누가 나보고 너 나의 원수라고 지적하는 걸 인간은 몰라요.
존재하는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도 나와요, 인간은 존재함 자체가 선이라고 보는 거예요. 없는 것은 악이고, 있는 것은 선이고. 에피쿠로스 학파라는 게 있거든요. 에피쿠로스 학파가. 서기 79년도에 베수비오 화산이 터져서 매몰된 도시가 뭐냐? 폼페이인데, 에피쿠로스 학파의 본부, 총 본산지 같은 곳이 한꺼번에 5분만에 다 매몰됐어요.
5분 만에 완전히 불바다 됐는데, 에피쿠로스 학파가 뭐냐 하면, 정신적인 쾌락을 유지하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자, 성경적으로는 뭐가 빠졌습니까? 방금 한 이야기, 쾌락주의가 육체적 쾌락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절제성 이런 걸 말하는 겁니다. 정신적으로 안정되게 되면 행복하게 된다는 주장이 에피쿠로스 학파인데, 이 에피쿠로스 쾌락주의 학파의 문제점이 뭐냐?
어떤 질문이 이 문제점을 밝혀낼 수 있느냐 하면, 왜 인간은 굳이 행복해야 될 이유를 대봐라. 여기에 이유 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대죠. 그래서 악마는 끝까지 답을 안 줘요. 인간은 존재한다. 여기 있나? 있습니다. 그러면 행복하라. 아프지 말고. ‘우리 아부지 직업은 택시드라이버~ 아프지 말고~행복하자~ 우리끼리..’
절대로 그 뒤를 넘어설 수도 없고, 넘어서도록 허락하지도 않아요. 행복함에 대해서는 왜라고 묻는 것이 실례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목사가 해야 될 질문은 ”왜 당신은 지옥 가면 안 되는 이유를 대보세요.“ 당신이 지옥 가서는 안 되는 이유를 대보세요. 이유 못 댑니다.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모르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부터 스타트를 해요.
오른손이 겨냥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 12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라고 되어 있죠. 하..참.. 지금 이스라엘은요, 어떤 입장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악마하고 싸우는데, 주의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이니까, 주의 이름과 악마하고 싸우는데 그 현장에 강제로 끌려나온 자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이 이스라엘이 원했던 것도 아니고, 요구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이 은근히 기대했던 것도 아니에요. 이건 날벼락이에요. 홍해를 왜 건너와요? 바다를 비켜서 갈 수 있는 길도 있는데.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감을 잡아야 돼요, 지금. 구원이 내 구원하고 지금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걸. 주님의 자기 구원과 상관있는 일인데, 이스라엘은 그냥 딸려 들어오는 거예요, 그냥, 관찰자로.
스탈린이 친구이자 부하인 부하린을 심문할 때, 그 때 동료들을 많이 죽였어요. 그 때, 스탈린이 인민들이 많이 보고 있으니까, 의식해서 하는 이야기죠. 스탈린이 뭐를 하냐 하면, <전지적 관점> 전지적 관점은 누구 거냐 하면, 인민의 것이에요. 아주 못됐죠. 전지적 관점. 인민들이 동의하니까요.
푸틴이 전쟁 일으켰잖아요. 90퍼센트 가까이 누구를 지지해요? 푸틴을 지지하죠? 푸틴이 일으켰지만, 러시아의 국민들은 뭐를 공유하고 있느냐 하면, 신적인 전지전능한 전지적 관점에 그들이 합류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푸틴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거예요. 북한도 마찬가지고요.
이 말은 인간들이 얼마나 쉽게 악마의 밥이 되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악마는 이미 앱을 심었어요. 심은 앱이 내용이 뭐냐 하면, ‘너도 신처럼 된다’는 거예요. ‘신이 되고 싶어?’그러면 전지적 관점에 네가 합류하면 되잖아. 전지적 관점은 신의 것인 것을 인간들이 다 동의해요. 하지만 그 관점에 내가 참여했다는 것은 덤으로 내가 뭐가 된다는 말입니까? 드디어 신으로 승격하는 순간이에요.
그것을 어제 오후 설교에서 이야기했지요. 주님과 손잡고 주님을 끌어오면서 어떤 것을 예상하는 겁니까? 신과 더불어서 같이 내가 신의 자리에 앉는 것, 이 본심 외에 인간에게 다른 본심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없어요. 복음을 공부하든지, 교회 다니든지, 모든 본심은 뭐냐 하면, 전지적 관점을 내 소유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냐? 그러니까 너의 구원은 되지 않아야 되고, 너는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너는 구원되지 못해야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도의 답변은 간단해요. ‘오케이’하면 끝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 본성을 내가 못 버리잖아요. 내가 신이 되고 싶어 환장한 본성을 내가 못 버린다고요. 그러니까 내 병을 누가 치료해요? 내가 치료할 수 있습니까? 안되죠.
그러나 모든 인간이 하는 짓은 뭐냐? 내 병은 내가 알아서 치료하겠다는 겁니다. 성경공부 하는데 참석하든지, 기도하든지, ‘값없이’를 내가 ‘믿습니다’ 하든지, 내 인생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 내 인생이니까, 내 인생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신 이유는 내가 내 구원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그냥 방관하지 마시고, 방치하지 마시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 주시면서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참 매정하게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에 인간은 낄 수가 없어요. 예수님으로부터 새롭게 창조된 자만 들어가지, 기존의 인간은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첩관> 파묘에 나오는데, 관 속에 관을 쓰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나의 죽음을 합류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너는 내 죽음에 합류하는 것이 너에게는 마땅하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뭐 특별히 우리가 뭐 멋있는 일을 하는 게 아니고, 마땅한 일이에요. 이게 너무나 마땅한 거예요. 뭐 안 해도 될 일을 특별히 해주는 게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게 너무나 마땅한 거예요, 마땅한 거.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 위주라는 걸 너무나 잘 알죠.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뭘 바꾸냐 하면, <환경을 바꾼다>환경을 뭐로 바꾸느냐? 멀쩡한 환경을 뭐로 바꾼다 했어요? 광야로 바꾸죠. 그리고 출애굽 해서 물에서 나왔잖아요. 물에서 나와 가지고, 그들은 다 된 줄 알았어요.
이제는 뭐 하나님께 찬양하며, 출애굽기 15장이 찬양이에요. 주의 원수를 쳤다했잖아요. 원수가 누굽니까? 애굽이죠. 애굽을 쳤다는 거예요. 본인들이 애굽의 일부라는 사실을 몰라요. 애굽을 뚝 떼서 끌고 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율법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애굽 나라가 율법에 준해서 망했다는 걸 모르고, 그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인간은 율법을 못 지켜요. 왜냐 하면, 출신이 애굽 출신이기 때문에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세계에서 태어났어요. 생일날 태어났기 때문에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환경은 우리는 가만 있지 못하고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환경을 무시 못해요.
어떤 사람은 포터블, 이동용 변기를 마련해 주니까 물이 안내려간다고.. 물이 안내려간다는 거예요. 우습지 않습니까? 일종의 요강인데, 요강이 왜 물이 내려가요? 그런데 그 분이 치매기가 있어서 화장실에 가서는 물을 안 내린대요. 인간이 자기를 지배하는 환경에 의해서 자기가 그 환경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환경을 내 환경을 내가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어제 거미줄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피의 언약적 관계망이, 그 관계망이 예수님만 주께서 살렸다는 그 관계망에 우리가 걸려들 때, 우리는 구원 받습니다. 왜? 예수님만 구원됐기 때문에. 예수님만 구원되고 나는 구원되지 못할 때, 그것이 ‘예수님만 구원’이라는 율법의 다 이룸이 우리 자리에서 성취가 돼요. 우리 자리에서.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광야에 집어넣는 것은 원망할 만하고, 그리고 대들만 할 때, 주님께서 하는 이야기는 이거예요. ”그래도 율법은 있잖아.“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율법이 나를 구원해주는 율법인 줄 알았어요. 왜? 율법에 조건이 붙으니까.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그러니까 안 지키는 건 신경 안 쓰고, 복 받는 것만 생각나가지고, 율법은 나를 구원하는 율법이라고만 생각했지, 밟는 데 더 밟는 줄은 몰랐던 거예요.
죽은 불도 다시보자는 식으로 두 번 죽이는 거예요, 이거는. 자근자근 죽이는 거예요. 행여나 나 구원 받고 싶어서 구원 받았고, 행여나 나 구원 받고 싶은데 마침 주께서 죄 용서한다고 해서 메시아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소리 나올까봐 철저하게 율법으로 짓밟는 거예요. 참, 주님의 아이디어는요, 마귀가 아무리 해도..욥기 1장에 마귀 나오잖아요. 아무리 해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죽이죠. 욥의 입에서 뭐가 나온다?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바로 그 때! 된 거예요. 그 때! ”바로 그거야! 이제는 내 의에 대해서, 네가 구원받는 의에 대해서, 네 의가 포함 되겠어, 안 되겠어?“ ”의가 뭡니까? 죽어 마땅합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의가 욥에게 도착한 현상이고, 그것이 욥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돼요. 10분 쉽시다.
'대전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증거 제작소 (0) | 2024.05.28 |
---|---|
십자가-원수의 등장 (1) | 2024.04.30 |
자기 해석 (1) | 2024.03.26 |
십자가-헌금과 누락 (0) | 2024.03.26 |
십자가-헌금의 순환구조 (1) | 2024.0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