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20강)신9:5(자기 해석)20240325a(강의:이근호 목사)
신명기 9장 5절입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 땅을 차지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내릴 수 있는 평가인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땅을 아직 차지하기도 전에 먼저 이 말씀을 하세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뭔가 차지하고 소유하게 되면 자기한테 긍정적인 그런 팩트, 긍정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뭔가 손에 쥐어줬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만큼 살아온 것은, 내가 못난 건 분명한데, 하지만 어느 구석이든 내가 살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게 했다는 것이 합리성이 있어요, 인간에게는.
그게 합리적이에요. 그만큼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명목 하에 자기 존재의 가치를 지워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게 목이 곧은 거예요. 목이 뻣뻣한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내가 이것을 살게 되고, 만약에 내가 천국 가게 된다면 천국 가는 그 요소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나에게 긍정적인 면이 섞여 들어갔기 때문에 남은 아니고, 저 사람은 아니고, 나는 합격이라는 그런 요소를 갖고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천국 못 가죠. 안 넣어줍니다. 천국은 정말로 예상 밖이에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게 우리의 본 모습인데, 망해야 된다는 게 있는데, 망해야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도착해보니 천국이다. 자, 한 번 가상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내가 망해야 되는데, 내가 강도인데 세리와 창기인데, 지금 도착해보니 어디란 말입니까? 천국이다.
이게 매치가 돼요, 안돼요? 매치가 안 되죠. 안돼야 돼요. 매치가 되면 안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평소에 살아있을 동안에 매치되는 결과물을 늘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 행위와 결과가 뭔가 관계있을 것이라고, 그것도 좋은 쪽으로 관계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제거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미리 단언하고 들어가시는 거예요. 선언하고 넣어주는 겁니다. “네가 그 땅에 들어간다면, 이건 네가 정직함도 아니고, 네가 의로움도 아니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마음이 들겠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갖추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오겠죠.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너 말고 네가 어떤 마음을 갖춘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너 말고 내가 치려는 저 쪽과 나랑 상대하고 있지, 너하고 상대하는 게 아니야.
왜냐 하면, 저 쪽을 쳐서 비워놓고 공짜로 들어가기 때문에. 값없이 들어가기 때문에, 값없이 들어가는 주제에 “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하면 그 때 주께서 하시는 용무가 있어요. 세 자. 요새 유행하는 <입틀막> “입 다물어, 입 다물어!” 입틀막인데, 이게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바로 <가족> ‘너는 내 가족이다’ 이 말이죠.
가족은 누가 책임져요? 가장이 책임지면 돼요. 내 형제고 모친이고 누이고.. 그거는 가장이 책임지고 난 뒤에 가족은 그냥 따라가는 겁니다. 가족, 패밀리. 다음 주 설교할 내용이 있는데, 형제라는 내용입니다. 다음 주 낮 설교 제목이 ‘내 형제들’ 인데 형제라는 것은, 이게 한 명입니까? 두 명입니까? 형제가 되려면? 둘이 되어야 되겠죠.
성경에서는 ‘단일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늘의, 하늘에 올립시다. 하늘의 단일성,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설명하기 위해서 형제 형식으로 자식을 낳게 돼요. 이삭이 약속의 아들이잖아요. 그런데 먼저 뭐를 낳게 합니까? 이스마엘을 낳게 하죠. 낳게 해놓고 이스마엘을 어떻게 합니까? 나가이~ 내쫓아버리죠.
내쫓을 때 그 차이점에서, 그 차이점에서 육의 세계에 대해서 영이 어떻게 작동 하는가, 작용 하는가 그 차이를 보게 하는 거예요. 어쨌든 오늘 다시 신명기 9장으로 돌아와서요. 이제부터 이 말씀이 난해한 걸 알겠죠. 뭐냐 하면, 왜 땅을 줘 놓고 네가 차지한 것은 네 덕이 아니고, 내 덕이라 하면 얼마나 아멘 하겠어요, 예?
‘우리가 그럴 줄 알았지요. 우리가 한 게 머 있겠습니까?’ 하면서 겸손도 아닌 겸손 티를 낼 수 있는데, 미리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미리. 미리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이것은 인간의 뭘 제거하느냐? 인간의 합리성을 제거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하는 땅이 약속의 땅일 것이라는 것을 주께서 다 끊어버리죠.
이걸 어떻게 끊어버리는가? 제가 이제부터 세 가지의 상반된 의견을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성경을 대하는 태도거든요. 여러분, 어느 게 맞는가 한번 보세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가질 때, 이것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과연 우리가 감히 성경을 해석할 자격이 되는가? 그 점은 고려하지 않고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마땅히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권한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니까 이런 해석이 나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라는 뜻으로 주는 게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주신 건 이거에요.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을 네가 매순간마다 만들어봐라>
‘성경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이것은 한번 성경 해석했으면 그걸로 계속 밀어붙이자는 거예요. 이건 인간의 권한으로서는 성립이 안돼요. 그런데 인간은 매순간마다 본인이 달라져요.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종잡을 수 없는 인간들한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매순간마다 성경을 그때그때마다 해석하는 방식을 네가 새롭게 한번 만들어봐라.’
‘만들어봐라’니까 이건 다른 말로 하면 ‘창조’지요, 창조. 네가 만드는 그 창조, 성경해석 창조와 하나님의 확정된 성경해석과 대비해봐라. 이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오늘날 성도를 되게 하는 환경입니다. 영적 환경이 이거예요. 한 번 해석한 것 가지고 계속 그걸 우려먹을 생각하지 말고, 상황 따라 그때그때마다 성경해석 방법이 달라지도록 성도를 그렇게 이끄십니다.
실제로 성도가 살아가면서 살아간다는 말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세상보기,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요. 인간의 시공간이라는 것은 자기의 추억을 담는 그릇이라 할 수 있는데, 어릴 때 고향에서 봤던 느티나무, 또는 산, 어떤 정자, 누각, 여러분들이 어릴 때 봤던 그 누각과 나이 한 50년 지나서 그 누각을 보게 되면 어떤 차이가 나겠습니까?
어릴 때 동화책 읽으면서 누각을 보게 되면, 마치 선녀가 누각에서 가야금 곧 탈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나는 그 선녀가 가야금 탈 때에 어린 애들 특징이 뭐냐? ‘여기가 좋사오니’입니다. 이건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이야기한 거예요. ‘여기가 좋사오니’ 뭐 더 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전에 제가 이걸 여러 번 했는데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지금 이 시점이 일곱 살이다, 일곱 살인데 누각을 봤다. 오색 창연한 누각이고, 너무 아름답고 그게 강 옆에 언덕 위에 참으로 경치 좋은 곳에 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일곱 살 애가 누각을 보면서 그 때 선녀가 와가지고 여기서 가야금 탈 때, ‘여기가 좋사오니’ 더 이상 뭐 내 인생을 여기서 계속 끌어가도 괜찮고, 선녀와 같이 사는 것도 좋겠다 하는 생각은 어디서 나는 생각이냐 하면은 여기 한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의 추억이 모여서 이 생각이 집대성된 거예요.
밑에 이렇게 기억 층이 있어가지고, 기억 층이 그때마다 올라와서 되는 겁니다. 그런데, 50년 지나서 57세가 되었다. 누각을 봤다.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렇죠. 고향에 갔는데 누각을 보고, ‘아, 저거 견적 한 2500만원 정도 나올 것 같은데?’ 왜? 너무 낡아서 수리해야 할 것 같으니까. ‘군수는 뭐하냐? 이런 좋은 관광자원이 있으면 정부한테 예산 타내서 빨리 수리해가지고 하면 되지. 그런데 수리할 때 서류가 뭐가 필요해?’ 이런 생각 든다니까요.
왜? 이게 50년 동안 그냥 보낸 게 아니고, 줄곧 그런 방면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었기 때문에 그래요. 예산 타내는데 서류는 뭐가 필요하고, 그렇게 해서 관광객 유치했을 때, 모텔은 몇 개를 더 지어야 되고, 이것만 하지 말고 여기에 맛집도 들어와야 되는데, 추어탕 집 하나 또 이렇게 간판 해가지고 할까? 하게 되면 계산해보자.
그러면 어느 쪽에 땅값이 오르지? 미리 사놓을까? 등등 이런 것 까지 계산한다고요. 그런데 인간은 살아가면서 뭘 하는 게 문제냐 하면, 이거예요. <계산> 계산하는 존재예요. 딱입니다, 이거. 인간은 늘 계산해요. 인간은 계산합니다.
신혼부부가 오은영 박사한테 부부 상담을 받는데, 헤어질까, 말까하고 있어요. 자기는 MBTI 검사 상 F인데, 남편은 T랍니다. 자기는 너무 감정적인데, 남편은 너무 이성적이라는 거예요.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 안했다는 겁니다. 6개월 사귀고 결혼했는데, 암튼 급하게 결혼했어요. 6개월 만에 결혼했는데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겁니다. 너무 계산적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뭐라 하겠어요? 남편의 인생관이, 세상관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 자기가 결혼할 때까지 그 쪽 방면으로 추억이, 세계관이 쌓인 거예요. 쌓여서 온 거예요. 그리고 감정적인 것도 역시 계산하기 마련이죠. 그러니 인간은 나름대로의 계산을 하면서 항상 그 현지에서는 어느 것이 이제는 후회 없는, ‘그래 이젠 죽어도 좋아’라는 그러한 것을 목표로 해서 끊임없이 계산하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해서 해석을 하고 있습니까, 안하고 있습니까? 쉬지 않고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쉬지 않고. 그런데 그 사람이 만약에 성경을 봤다. 성경을 보면, “그래 이거야, 나 이제 구원 받았어. 예수 믿어. 주여,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살아도 돼요.” 라고 했는데, 1개월 뒤에 다시 일 터지고 난 뒤에 회사에서 무슨 문제 있고 난 뒤에 성경 다시 보세요. 성경 어떻게 보입니까?
그때 은혜 받은 구절 별로 은혜 되지도 않고, 그때 눈물 흘리며 불렀던 찬송가 다시 보면 눈물 나지도 않고. “아니야, 그게 다가 아닌 거 같아.”이러고 있다고요. 왜? 계산하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방금 이러한 경우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미리 한번 정리해보자는 거예요. 정리하는 방법은 이겁니다. 1번 2번 그리고 3번. 3번은 나중에 이야기 하고요. 1번 먼저 할게요.
1번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없다’라는 데서 논리 체계를 먼저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예 없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면 되고, 세상은 어디서 나왔고,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이걸 하나님이 없다는 이 논리 체계의 전제 하에 세상에 대해서 해석해 보는 거예요. 세상에 대해 해석을 해보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없다고 했을 때 논리체계는 이렇습니다. 자기가 이렇게 있잖아요. 자기 주변의 모든 사실이 촘촘해지겠지요.
그림1
그런데 자기 하고 조금 멀어진 것은 점이 어떻게 됩니까? 점이 드문드문 찍히죠. 예를 들어서, 모스크바의 테러, 사람 죽었다. 뭐, 죽었겠지? 그런데 뭐 나하고 관계있어요? 이미 자기하고 관계되는 것, 자기하고 관계되는 것 이렇게 멀어져요.
그림 2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더 멀어지죠. 더 멀어지는 것을 하나님이 없는 경우에 뭐라고 하냐 하면, 신화, 전설이라고 합니다. 전설로 보면서, 가까운 것은 뭐냐 하면, 현실이라고 봐요.
그림3
그럼 이거는 20대, 30대 그리고 젊은 애들 그 세계를 그대로 가져가는 겁니다. 10대가 오토바이 타고 싶다. 떼를 쓰면서 공부 몇 등 하면 오토바이 사줄 거예요? 뭐 이렇게 떼 쓸 때, 지금 걔가 우크라이나 전쟁 걱정 안하죠. 뭡니까? 자기가 지금 오토바이 타고 싶다는 욕구 달성, 욕구 달성에 지금 환장하고 있죠. 벌 떼 같이 걱정하는 거예요.
그림1을 더 촘촘하게..
집이 이사 가는데 애들은 뭐를 걱정하느냐 하면, 방금 사귀었던 친구하고 헤어지는 게 안타까워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지금 엄마아빠는 부도나서 야반도주해야 되는데, 애는 친구랑 헤어질 때 어떻게 낭만적으로 헤어지나 그거 걱정하고 있어요. “엄마, 이사 갈 때 바지 입을까, 치마 입을까?” 쓸데없이 그런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어디까지 가느냐? 이것이 요양병원까지 가요. 그러면, 신화, 전설 가운데 뭐도 포함되어 있느냐? 성경의 모든 내용이 여기 포함됩니다.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 하나님이 있든 없든, 지금 내 문제는 하나님이 있든 없든 그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내 하나 돈벌이하고, 4대 보험 넣고, 빨리 밥 먹고 사는 이게 중요하지, 하나님이 뭐가 중요해요? 하나도 안중요해요.
그래서 1번의 논리체계라는 것은 <나는 나의 일 외에는 모르겠다.> 1번을 다시 한 번 결론 내리면, 흔한 말로 상대방 말 끊을 때 뭐라고 합니까? 그건 ‘됐고!’ ‘나는 모르겠고, 나는 네가 뭐라 하는지 모르겠고, 나는 내 할 것만 한다.’ 이게 하나님이 없는 자세입니다. 하나님 없는 자세예요.
두 번째를 봅시다. 1번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제가 의도가 있어요. 왜냐 하면, 항상 하나님을 아무리 믿어도 인간 내부의 잠재적인 것은, 잠복돼있는 것은 하나님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내 챙기는 것은 소홀함이 없어야 된다. 너무 빠지지는 말자.” 이런 거. 나는 확실하고, 내 숨 쉬는 것은 확실하고, 하나님은 모호하고, 교회는 다니되, 발은 하나 걸쳐 놓는데, 언제든지 뺄 수 있는 나만의 세계,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라는 것이 ‘하나님은 없다’ 이것의 정답을 뭐라 했습니까?
결국은 뭐다? “모르겠고”, 그리고 교회 다니고, 설교 그만큼 듣고, 50년씩 다녀도 나중에 고백하는 것 보면 ‘모르겠고!’ 누가 그런 주장, 그런 해석하고, 어떤 목사는 그렇게 해석하는데, 그런데 나는? 나는 모르겠고! 이것 저것 그냥 ‘세발 낙지 사세요’ 그러는 것처럼, 세발 낙지 장사치도 있고, 제주도 갈치 파는 장사치도 있는데, 나 아는데, 들은 적 있는데..살 마음은 없고! 나는 나만 편하면 되고! 이게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깔려 있어요. 깔려 있다고요. 깔려 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로 깔려있고요. 남은 속여도 본인은 속일 수가 없어요.
두 번째, 두 번째가 재미있어요. 하나님이 있다고 ‘간주하고’ 나오는 논리 체계에요. 그러면 아까 나는 요지부동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예요. 나 주변에 촘촘하게 뭔가가 있지요. 특히, 가정주부 같으면 어떤 경우입니까? 점심 먹고 난 뒤에 저녁 때 뭐 해 먹노? 이런 거. 봄철 됐는데 이불 호청은 빨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런 거. 이게 기본이에요. 나는 나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있다고 하니까 하나님은 어느 쪽에 있었습니까? 신화와 전설 듬성듬성 있었지요. 듬성듬성 있는 것을 내 쪽에서 끌어당기려면 철로, 노선이 깔려야 되겠지요. 이게 논리 체계에요. 하나님이 있다고 치고 내가 나에게 관심 있는 관심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관심도 여기에 합류를 시키려면 어떤 논리 체계를 가지고 쫙쫙 줄다리기 하듯이 당겨 오는가?
그림4
그 논리 체계가 뭐냐? 하나님이 있다고 간주했을 때, 당겨 보는 거예요. 당길 때 그 논리 체제가 빈틈이 없고 촘촘해야 되고, 비약하든지, 점프하기 없기. ‘그냥 믿자’하지말기. 세밀하게 요렇게 요렇게 해서..‘그래, 맞아!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거야!‘ 라고 이성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것, 그걸 잡아당기는 거예요, 논리 체계에.
그럼 논리체계에는 어떤 게 있느냐 하면, 여기서 작게 세 가지가 있을 수가 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논리니까 이성적으로 ’이거 있죠, 이거 있죠, 이거 있죠‘ 주일학교에서 이야기 한 것을 다시 언급할게요. 어제 주일학교 설교 제목이 ’천지창조‘였어요. 선생님이 가르칩니다. “여러분들 한 번 골라보세요. ’하나님이 해를 만들었다‘와 ’하나님이 만든 게 아니고 ‘해는 또 다른 옆에 있는 우주로부터 중력에 의해서 튕겨져서 해가 생겼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여러분 마음에 듭니까?” 라고 투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해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걸 만약에 선택한다면, 해를 만드신 분이 누굴 만들었어요? 자기를 만들었겠죠.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해는 만드신 분인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처럼, 나는 누구한테 지시받아야 돼요? 하나님께 지시받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지시 받는 것이 좋아요, 나빠요?’ 하고 문제가 똑같아지는 거예요.
스스로 판단해서 살래요? 누구한테 거대한 어른한테 지시받고 살래요? 어느 쪽입니까? 차라리 자연은 자연 그대로 어디서 온 건지는 모르지만 스스로 흐름이 이쪽이 이쪽을 밀어내고 이쪽이 이쪽을 밀어가지고 흐름이 흐름을 영원토록 흘러가는 그래서 있음이 없음을 낳고 없음이 있음을 낳는 불교의 ‘연기설’처럼 그런 식으로 자연은 스스로 얽히고설켜서 지금 이 현상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자연은 운가 만든 게 아니고 저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네츄럴, 자연입니다. 그게 진화론이거든요. 이거 할래요? 아니면, ‘누가 만들었다’ 이거 할래요? 물으면, 학생들이 뭘 선택하겠습니까? 자연적으로 자연스럽죠. 자기는 이미 지시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기 때문에 누가 간섭하는 게 싫거든요.
마귀적이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마귀적이기 때문에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진화론이 그 동안 참다가 중세의 그 기독교 압력 때문에 말은 못하고 있던 것이 프랑스 혁명으로 터지고 난 뒤에는 이제 본격적으로, 본격적으로 드디어 다윈의 진화론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거예요. 생물학에서 진화론 터져 나오니까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진화하자~!!하고 데모해가지고 모든 분야에 다 진화론이 퍼져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뭡니까? 차라리 속이 시원한 거예요. 전에는 억지로 하나님이 있다고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 받고 이거 안 받으면 지옥 간다고 간주하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 위선도 이제 짐이 돼 가지고 차라리 솔직한 게 나아요. ‘모르겠고!’ 우리가 알아서 기술 개발해서 사는 게 편하다는 거예요. 죽은 다음에는 모르겠고, 그건 죽고 난 다음 문제고, 이성적으로 따져서 신이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감성적인 것. 감성적이고 또는 감정적,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예술 분야에서 많이 나왔어요. 이걸 ‘숭고미’라 해요. ‘거대’ 앞에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냐? 높은 산에 간다든지, 넓은 바다를 보면서, 또는 우주에 나가서 광활한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겠는가? 하나님이 만들었겠지. 그러면 나는 뭐냐?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 시편 90편을 한번 볼까요.
90편 2절부터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2)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3)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4)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5)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6)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7)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8)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9)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
자 이렇게 할 때, 이게 성경에 나와 있는 이것을 우리가 대자연 앞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살아보니, 인생 살아보니 아무 것도 아니고, 뭐 있다, 있다, 괜찮다 하는데 홍수 지나고 싹 쓸려 가니까 폐허 밖에 남지 않죠. 우리 인생도 따지고 보면, 그거밖에 안되잖아, 그러니까 인생만사가 다 허무하다, 허무하니까 허무하지 않은 위대한 신을 믿어야 돼. 이게 뭐냐 하면 감성적이고 감정적이죠. 그러니까 신이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성적으로는 성경을 논리적으로 따지면 되고.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의지’예요. 의지는 뭐냐 하면, 내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 ‘세상에 이런 행운이 오다니’ 이런 거. 이것은 나를 깜놀,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에 예를 들면, 병원에서 ‘이건 끝났습니다. 당신은 3개월밖에 못삽니다.’ 했는데, 이건 뭐 3년 지나도 멀쩡해. 그리고 나중에 조사해보니까 “이상하네요. 그 많던 암세포 다 어디 갔지? 누가 다 먹었지 그 암세포를?”
이럴 때 이건 누구 솜씨 아니면 안 된다? 내 솜씨 아니니까 누구 솜씨에요? 신의, 하나님의 솜씨니까, 이제 ‘주여, 이제부터는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 이건 감정이 아니고, 내 의지가 차단되고 의지에 의해서 예상된 결과 말고 다른 결과가 난데없이 주입되었을 때에 이것은 내 의지 아니라면, 이건 뭐다? 이건 나보다 위대한 분의 의지가 내 인생에 꽂힌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에 의해서 하나님이 있다고 간주하는 거예요. 여러분, 2번이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찝찝하고 좀 수상한 느낌 들지요? ‘그럼 이것도 아니란 말입니까?’ 그런 느낌 들죠? 예, 역시 이것도 아니에요. 왜 아닌가? 이것은요, 무슨 해석이 안 되느냐 하면, 멀리 있는 신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 세 가지를 끌어 온다고 해서 이 촘촘한 나의 이야기가 부정당하지 않습니다.
이것(나의 이야기)은 이것대로 챙기고, 저것(신의 이야기)은 저것대로 추가적으로 하나 더 챙기고, 없는 것보다 낫다는 거예요. 이 논리가. 하나님을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게 낫다는 거예요.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이야기죠. ‘내기 하자.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안 낫냐? 그러다 없으면 그만이고, 있으면 아이고, 안 믿었으면 큰 일 날 뻔했다. 그러니 너에게 이익이 아니냐?’ 이거예요.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은 돈 문제가 여기서, 돈을 포기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도입해도 인간은 하나님보다 먼저 현실적인 것은 ‘현찰’, 현찰, 그것도 한국 돈보다는 달러. 은행 파산해도 괜찮은 것, 부동산이라든지, 해외 자산이라든지 금, 귀금속, 이것 들고 가까운 일본이나 미국으로 도망 쳐도 거기서 밥 먹고 살 수 있는 것, 결국 이건 뭡니까?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뭐가 안 된다? ‘자기 부인’이 안돼요. 자기 부인이 될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2번의 하나님은 나를 망하게 하는, 적극적으로 망하게 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 대신 뭐냐? ‘하나님 거기 계세요. 내가 알아서 당신을 모실 방 하나 마련해 드릴 테니까 내 쪽에서 하나님께 잘 해드렸으니까, 하나님도 저를 섭섭지 않게 해주실 거죠?’ 하는 하나님.
얼마 전에 제가 이런 하나님에 대해 언급을 했어요. 심청전 이야기 했잖아요. 중국 사람한테 걸려서 삼백 석 날리고 아버지 눈 뜨게 하겠다고 제 한 몸, 치마 뒤집어쓰고, 지가 요나입니까, 뭡니까? 물 속에 던져졌는데 이 바보같은 아가씨가 자기 아버지 ‘심학규’의 눈 뜨는 것 하고 지가 물에 빠지는 것 하고 무슨 인과관계가 있어요?
거기에 인과관계가 있습니까? 안되잖아요. 이게 말이 안돼요, 말이. 지금도 이 말이 안 되는 걸 교회에서 써먹고 있다니까요. 내가 철야기도 하는 것 하고 내 암 낫는 것 하고 무슨 관계 있어요? 없지요. 없는데, 교회에서는 뭐라 하냐하면, 네 믿음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못되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예요. 겨자씨를 고마 부숴버릴까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지죠. 산을 옮기죠. 그러니까 목사가 뭐라 하느냐 하면, 믿음이 없어서 그게 안 되지, 믿음 있는 사람은 벌써 암 다 나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 믿음이 없든지 또는 네가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이런 뜻으로 받아줘야 돼요. ‘네가 왜 바칠 때 안 바치느냐?’
그렇게 이해해야 돼요. 주께서 쓰시겠다는데, 네가 나귀 새끼냐? 왜 버티냐? 이 말이죠. 하여튼 성경 구절 인용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봐라, 주께서 쓰시겠다 해서 얼른 돈이고, 전세 집이고 다 내놨잖아, 믿음 좋은 조상 덕에 복 받은 후손들 봐. 다 교회에서 교육관 짓는다고 하니까 자기 집 팔아 전세로 옮기고 그 돈을 교회에 바쳤다는 거예요.
저한테는요, 전세 사기 당했다는 사람들이 연락이 와요. ‘목사님, 전세 사기 당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여러분 지금 웃지만 속으론 못 웃을 거예요. 하도 속아 넘어가가지고. 평생을 속아 넘어왔잖아요. 왜 속아 넘어간 줄 알아요? 뭐가 안 되기 때문에? 자기 부정이 안 되기 때문에.
지 아들 영국 유학 보냈다고 하고는 실제로는 염전에서 일하고..그게 뭐냐 하면, 내 아들을 부정 못한다는 거예요. 내 아들을 부정 못한다는 건 누굴 부정 못했다? 나를 부정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1번도 아니고, ’아니고‘가 아니라 1번도 우리 속에 들어있고, 우리 속에 들어 있는 걸 또 파묘 한번 해봐요? 묘를 한 번 파 봐요? 묘 안에 귀신 들었는지? 1번입니다. 1번은 아까 했죠. ’하나님은 없다‘예요. 이게 우리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없는데, 없는데 내가 너무 인간성이 좋아가지고 너무 성품이 좋아서 장차 죽고 난 뒤에 천국 갈 것을 대비해서 어디까지는 봐줄 수 있다? 2번까지는 봐주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 가서 장로 되고, 목사도 되고, 집사도 되고, 권사 되는 것은 2번까지는 봐주기 때문입니다. 자 이 2번을 어떻게 뚫을 수 있느냐?
세 번째, 3번은 이렇습니다.
그림5
동그라미 두 개가 겹쳐 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면 영역이 세 개가 생깁니다. A,B,C 세 개 생기죠. B가 예를 들어서 신명기 9장 5절, 다시 말해서 율법입니다. 율법을 줘요. 율법을 주게 되면, 인간이 여기(A)에 등장합니다. 이걸 주체라 합시다. 쉽게 말해서 인간, 영어로 하면 subject 라고 해서 대문자S, 주체를 subject 라고 해요.
주체란 말은 뭐냐 하면, 주인공, 인간은 인간인데 그냥 인간이 아니고, ‘나는 너희와 달라’ 왜? 나는 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 주인공이란 뜻이에요, 주인공. 주인공이기 때문에 남 걱정 보다 누구 걱정이 우선입니까?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 걱정이 최우선이에요. 주인공이 율법을 만났어요. 그러면 아까 내부에는 뭐가 있고? 1번이 있죠.
그런데 1번이 있는데, 이제 돈 버는 데 약간의 여유가 생겼어요. 여유가 좀 생기니까, 두리번거리는데 앞에 돈 버는 데 앞에 있던 그 신경보다도 약간 멀리 있는 점점이 드문드문 있는 점들까지 신경 쓰는 거예요. 갑자기 아프리카 우물 파는 데 돈 천 원씩 보내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깐 이제는 주변에 약간 신경을 써요. 환경오염에도 신경 쓰고.
예를 들면, 영월인가? 거기에 가마우지인가 하는 겨울 철새가 와가지고 문화재 있는 삼림을 다 뜯어먹었다는 거예요. 그걸 2,30대 직장 다니는 애들한테 이야기하면요, ‘됐고~ 나는 모르겠고!’ 에요. 영월에 문화재 근처에 가마우지라는 외래종이 와서 삼림 뜯어먹는 것하고 무슨 관계 있느냐?
그런데 이제는 좀 시간 남는 70 넘어, 80 가까이 되는 영감들은 가서 시위한단 말이죠. 빨리 쫓아내든지, 문화재 이동해라, 우리의 유구한 역사가 어떻고... 우리나라 유구한 역사는 지가 직장생활 안할 때나 생각하는 거예요. 하루에 열두 시간씩 잔업까지 하는 사람에게, 단순 노동하는 사람이 문화재 걱정을 왜 해요? 지 밥 먹고 살라고 취직했는데..
모든 인간은 자기 코 앞에 있는 일밖에 몰라요. 여유 있고 건강한 사람이나 걱정하지. 그럴 경우에 율법을 마주해요. 그러면 1번에서 플러스 뭐 까지 합니까? 하나님 있다고 치고, 2번까지 계산하는 겁니다. 율법을 하죠. 그런데 3번은 뭐냐 하면, C에 누가 등장하느냐? 예수님이 등장해요.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율법을 예수님이 마주하는 방식은 여러분 다 아시죠? 예수님이 율법을 마주하는 방식이 무슨 방식이었습니까? ‘다 이루었다’가 어느 방식입니까? 십자가 죽음이죠. 누구 죽음? 유대인 죽음요? 아니죠. 유대인한테 얻어맞아 죽죠. 그게 뭐냐, 맞아죽을 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마귀 자식한테, 하나님의 원수한테 맞아죽을 때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분이에요. 죽으러 오셨다. 그런데 그냥 죽으면 안돼요. 어디에 근거해서? 율법에 근거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죽을 경우에만 율법을 다 이룬 거예요. 율법을 다 이루었을 때 이것을 뭐라 하느냐 하면,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없는 게 뭐냐? 사랑이 없어요.
이 세상에 사랑은 없습니다. 자기 이익하고 계산하는 것만 있고,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율법인데 예수님이 이렇게 해석을 해버리면 이 주체는 어떻게 되느냐? 주체는 부정당해야 되죠. not S가 되는 겁니다. 한글 글자 쓸 때, 컨트롤 하고 MA를 딱 쳐버리면 편집기가 나와요. 편집기. 그냥 써서는 안 되는 여러 가지 도형들이 나올 때, 그때 밑에다가 not S를 쳐버리면 S에 빗금 친 게 나와요.$
A나 h 같은 다른 글자도 not A, not h를 치면 마찬가지로 빗금 쳐서 나와요.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나는 칼날이 나를 탁 치면, 나는 두 동강 나버려요.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나는 하나였다는 것이 뭡니까? 중간에 칼날이 확 지나가버리면, 십자가가 확 지나가면 나는 두 개로 쪼가리 나버리죠. 쪼가리 나면서 하나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하나가 둘이 되어 버리죠.
이삭이 애기를 못 낳는단 말이죠. 그런데 리브가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아들을 줘버리면, 아들이 어떻게 돼요? 아들이 쌍둥이죠. 네가 나고, 내가 너예요. 하나님께서 아담 줬지요? 아담 줬는데, 아담이 끝인 줄 알았더니만, 또 누가 있어요? 하와를 만들어 버렸죠. 너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가 됐지요.
상대를 통해서 내가 어떻게 규정되는 것이 주님의 인간 해석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인간 해석이에요. 주님 보시기에 인간 해석을 인간이 고스란히 물려 받아놓고 이제는 해석이 안 돼. 왜? 도중에 칼날이 지나가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어 이제는. 내가 나와 만날 수가 없어요. 같이 한 덩어리가 될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나와의 작별이고, 나와의 이별입니다.
나와 나 사이에 십자가가 획 지나가면서 그 지나간 나를 만나려면 나와 나를 다시 만나려면 그 지나간 십자가와 만나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와 만나는 것을 사도바울은 그걸 예수 안이라고 해요. 예수 안의 사건. 예수 안이라 하게 되면, 그것은 내가 생각한 육신에 속한 나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창세 전에 예수님이 마련해주신 색동저고리, 또는 오빠가 사준 무슨 구두? 비단구두!
천국에서 생명책에 기록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새로운 자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양자라는 자격으로 부여받게 돼요. 엄마가 하늘에 있어요. 하늘의 예루살렘이니까.(갈4: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주어지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 했듯이, 우리는 그걸 예상 못해요.
우리는 뭐냐, 아까워요. 내가 알던 나와 늘 마음이 한마음 되지 못한다는 게 아까워요. 성도의 특징은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뭐하고 싶으냐? 둘로 쪼가리 났으니까..사과가 두 쪽이 났으니까 반반 남았잖아요. 한 쪽은 뭐가 되느냐 하면, 한 쪽은 내 내부고, 한쪽은 외부가 되죠. 나는 선을 행하기를 원했으나 내 안에 뭐가 있다? 나를 사로잡아오는 이 원수 같은 죄가 나를 사로잡아 오는 거예요.
죄가 좋아서 미치는 거예요. 죄를 못 지어서 환장한 나와 ‘그러면 안 돼’ 라고 달래는 나와, 이거는 지킬과 하이드처럼 내가 이중성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그것이 바로 영적 사람이라는 거예요. 육적 사람은 십자가가 안지나갔기 때문에 끝까지 1번이에요. 1번 아니면 2번이에요. 이게 육이에요.
1번이나 2번의 특징은 뭐냐? 자기가 부정당하지 않았어요. 자기가 부정당하지 않았어요. 나는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을 애써, 애써가 아니라 난 그걸 생각한 적도 없어요. 그저 나는 뭐냐? 유대인하고 똑같아요. 최선을 다했으며, 나는 선악을 알기 때문에 악은 될 수 있는 대로 굉장히 미워하고, 할 수만 있다면 선한 데에, 그것도 말씀 지키는 데에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최선의 모든 것을 다했기 때문에 장차 나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아주 ‘잘났어, 정말’이라는 말이 정말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잘났고, 모레보다 그 다음날 더 잘 나고, 마지막 때는 더욱 더 잘난 채로 나는 찬양하면서 주님을 영접하려 했는데 실제로는 뭡니까? 요양원에 가서 미쳐 있는 거예요. 치매 걸려가지고. 아침 먹고 돌아서서 “왜 아침 안줘?”방금 먹었는데, 먹은 그릇 있는데 아침 달라고 하고, “어머님, 권사님이잖아요. 즐겨 부르는 찬송가 한 번 들어봅시다.” “치아라!” “예수님이 누구신지 압니까?” “예수가 누군데?” “나훈아는?” “나훈아는 잘 알지!” 평소에 교회 다니면서 찬송가 부르면서 나훈아의 ‘18세 소녀’ 이런 거 ‘홍씨’는 잊을라 해도 안 잊어버려요.
왜? 우리 속에 1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행여나 있을 까봐 보험 드는 식으로 2번 하자. 이게 바로 우리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못 가죠. 못 가는 데. 이 사실을, 이게 바로 죄거든요. 이 사실을 성령이 오니까, 주체가 쪼가리 나니까 아, 이게 바로 우리가 목이 곧은 것이고, 교만이고, 이게 악한 것이고 의롭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내대로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안 된다? 없지요. 없는데, 누가 칼날로 잘랐습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사랑으로 값없이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된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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