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기능
2024년 2월 11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4-7
(1: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1: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1: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천사는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듭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설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한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창세기 3:24에 보면,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무슨 연유로 인간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미 예수님 한 분으로 결정지어졌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이 아드님을 모시고 섬기는 데 열중합니다. 반면에 인간 세상은 가인의 자식들이 대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자신들이 곧 신인양 행세하는데 열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냉혹합니다. 마태복음 7:22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살아도 시체도 죽어서도 시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의 신세는 늘 환경에 쫓기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6) 결국 인간은 무력감으로 뭉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철저하게 인간이 천국에 들어오는 것은 차단합니다. 생명나무 길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는 ‘그룹’이라는 천사는 이스라엘이 생시서 난 뒤, 그 한 가운데 장소를 차지합니다.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었으니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며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양편에 쳐서 만들었으되 한 그룹은 이편 끝에, 한 그룹은 저편 끝에 곧 속죄소와 한 덩이로 그 양편에 만들었으니”(출 37:6-8) 천사가 이스라엘 진영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보면 죽기 때문입니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한 가운데를 비워놓고 움집해 있는 집단 구조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난 뒤, 그들은 주변 나라들이 어떤 식으로 잘 사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욕망하는 신들을 자신들이 만들어 섬기고 있었던 겁니다.
즉 자기 안에 텅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은혜가 오는 구멍을 막아버리고 스스로 힘으로 잘 사는 나라를 시도하게 됩니다. 더는 자기 자신들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싫었던 겁니다. 다른 나라와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기를 원했던 겁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이런 이스라엘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꾸준하게 하나님의 뜻을 펼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천사들의 손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겁니다.(행 7:35) 율법의 힘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원의 능력을 지켜주시려고 하십니다. 결코 이스라엘 자체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아 마땅함의 증거가 되는 속죄소의 취지를 살릴려고 하십니다. 사사기 13:15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 가정을 찾아옵니다. 마노아는 천사에게 묻습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지만 답변은 이러합니다. “기묘자다” 즉 천사가 속한 세계는 인간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 세계에서 통하는 의미로는 결코 이 영적 세계를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영적 세계를 위한 모든 개념들은 사람에게 거부당한 예수님를 경유해야 비로소 밝혀집니다. 인간들의 이성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은 필히 ‘인간은 천국갈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함유하는 내용입니다.
마노아 가정은 자신들이 죽을까봐 겁을 내었지만 마노아의 아내는 말합니다. 천사가 더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에 우리 가정에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삼손의 등장입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의 머리키락은 그의 힘의 원천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된 겁니다. 보고 있기에 믿기지 않게 합니다.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아람나라 군대가 엘리사와 사환을 체포하기 위해 성을 포위했을 때, 걱정하는 사환을 위하여 엘리사는 기도해줍니다. 그랬더니 아람군대의 숫자보다 엘리사 쪽에 서 있는 천사들의 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천사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활동을 합니다.
신약에 들어와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마리아의 임신과 베드로의 탈옥과 예수님의 시험받으심 이 모두에 천사들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는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역할만 할 뿐입니다. 인간 마음 내부에 들어오는 것은 천사가 하지 못하고 성령님께서만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한결같이 성도 안에서 일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자기에게로 끌려 올라오고 있는 자가 이제는 더는 정죄함이나 고발대상이 안 됨을 분명히 해두십니다. 주님에게 끌려 올라오는 자는 그 마음 내부에 성령님이 계시고 복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성도에게 천사를 보내어 지키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삶은 갈수록 가벼워집니다. 지독한 죄의 무게는 매일같이 과거사로 넘겨서 즉시로 지워집니다. 성도는 늘 회개합니다. 회개란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동안 성도는 참으로 무겁게 세상을 살아왔음을 압니다. 그것은 지나온 자기 모습에 전부 거짓임을 기쁘고 가볍게 고백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성도는 더는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행위에 책임지지 않습니다. 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사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성도는 매일 같이 자기와 이미 이별한 존재임을 받아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복음을 위하여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히브리서 1장 4-7절(천사의 기능)24021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장 4-7절입니다.
히브리서 1:4-7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천사와 비교하는 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천사의 결정적 차이점에 대해서, 어떤 천사들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내 아들이라고 지칭한 천사는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천사를 끼워 넣어요. 끼워 넣으면 인간들은 이 천사에 의해서 아예 예수님 아는 것이 아예 가로막히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진실, 예수님의 실체, 예수님의 진짜 본 모습에 대해서 천사의 개입으로 차단되게 되어있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살다가 추방되고 난 뒤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천사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본질에 대해 인간들이 알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막혀 있다, 그런 취지로서 천사를 집어넣습니다. 그다음에 남은 문제는, 그러면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말인데 그게 쉽게 말해서 영적 세계죠, 그 영적 세계가 있는데 그 영적 세계에 하나님도 계시고 예수님도 계시는데 천사도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과 천사의 차이는 뭐냐? 그 차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내 아들이 되지만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천사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상속자가 아니다, 그 뜻입니다.
구약에서 아버지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맏아들에게 주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라고 해서 예수님을 맏아들로 그렇게 간주하십니다. 그리고 그 맏아들을 어디까지 높이게 하시느냐? 3절에 보면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는 어느 천사도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자가 없다, 그런 겁니다. 하나님 그 우편의 자리는 특수한 일을 하는 자리인데요,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아버지의 모든 혜택이 주어지는 자리입니다.
만약에 어떤 죄인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고 한다면 그 죄인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지느냐? 로마서 8장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와 더불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리를 누가 감히 죄 있다고 언급을 하고 누가 고발, 고소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꾸준하게 일했고 그 결실을 맺은 자리가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요. 그 우편의 자리에 하나의 천사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천사는 예수님한테도 밀리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천사들이 성도한테도 밀려요.
성도가 시시해 보이지만 에베소서 2장 6절의 말씀처럼 최종 자리는 하나님 우편의 자리입니다. 성도에 대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되어있거든요. 이러한 결과가 도출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들로 하여금 인간이 자력으로, 자발적으로 천국까지 기어 올라가는 것을 막고 차단시킨 겁니다.
차단시키고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뚫고 들어올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을, 천사들을 주신 그 율법을 통해서 확실하게 다지고 다졌습니다. 구약의 율법뿐만이 아니고 신약에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그 무력함, 인간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존재가 되는 이유는, 인간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 쪽에서 믿지를 않아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도 너를 믿지 말라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너를 믿지 않는데 네가 왜 너를 믿어? 나는 나만 믿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하나님은 너 안 믿어.’
인간이 어느 정도로 허약하고 미약하고 무력한 존재냐?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뭐 두 군 데만 찾아봅니다. 마태복음 8장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인간은 어느 정도로 무력하냐, 아무것도 아닌 존재냐? 시체입니다. 이미 죽은 자에요.
이미 죽은 자는 이미 죽은 시체고, 아직 안 죽은 자는 살아있는 시체고, 시체인 건 똑같아요.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이 세상에 어떤 환경이 올 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당부한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6절에 보면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산으로 도망쳐라.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그 환경 속에서 무력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칠 수 있으면 한번 도망쳐 봐라, 그겁니다.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뭐냐? 도망치기의 연속이에요. 계속 하나님이 환경을 이렇게 밀어붙여서 못 버티면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그 다른 곳에서도 못 버티면 또 다른 곳으로 도망쳐요. 회사 다니기 힘들면 사직하고, 사직해서 치킨집 하다가 힘들면 카페 내고, 카페 내고 하다가 힘들면 파리바게트로 도망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끊임없이 무력해요. 환경에 대해서 이겨내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왜 그렇게 무력하냐? 성경은 그 무력한 이유에 대해서 죄의 카탈로그를 제시하며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에 보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죄의 카탈로그를 쫙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더 길게 돼 있어요. 로마서 1장 28절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여튼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는 전부 다 이미 시체에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형에 해당된다고 되어있어요.
인간은 인간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불”로 들어간다고 되어있어요.
죄의 카탈로그에서 제일 긴 게 있어요. 1등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에서 5절, 무척 길어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런 자가 누구냐? 본인인데요. 본인에서 돌아서면 되죠.
이 말은,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누가 너를 고발하리요,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다시 말해서 이 카탈로그를 길게 끌어놓은 것은 아담 안에 속한 어떤 인간도 천사를 통한 이 율법의 조항에서 결격 사유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거기에 고발 대상이 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모두 다 저주 아래 있다는 거예요.
“너 자신을 알라.”는 거예요.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평생을 해도 몰랐던 것, 너 자신을 알라. “너 시체야.”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눈 뜬 시체고, 귀 들리는 시체고, 교회 나오는 시체고, 뭐 다 시체죠.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다른 게 없어요. 결국은 죽어요. 유치원생도 죽고요, 초등학교 2학년생도 죽고 다 죽어요. 결국은 죽게 돼 있다고요.
설에 모여서 절했잖아요, 덕담하고. 최고의 덕담은 뭐냐? “그만 살고 죽어라, 인간아! 네가 쓸데없이 죄만 지으면서 왜 자꾸 살고자 하느냐? 그래 네가 덕담 들었으니까 세뱃돈 10만 원 줄게. 가서 이 돈 가지고 고스톱이나 쳐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천사를 개입합니다. 인간은 하늘나라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요. 그래서 하나님 우편에 앉을 분은 오직 누구밖에 없는가? 천사 본인도 아니에요. 천사들도 아니에요.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것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걸 알리기 위해서 천사들을 집어넣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천사들과 예수님 사이에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둘 사이에, 천사들은 많죠, 그 천사들과 예수님 사이에 연속성, 지속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거예요. 여기 6절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시편 97편 7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비록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특정 인물을 아들로 확정 지었습니다. 그 외에는 아들이 아니에요. 천사들부터 모든 나머지들은 뭐냐? 하나님의 뜻은 그 아들을 섬기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신앙생활 억수로 쉬워요.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구름 속에 나타나신 말씀처럼 “너희는 그의 말만 들어라. 끝!” 다시 말해서 예수님한테 미치며 살리라, 그거에요. 너 자신에게 미치지 말고, 너 자신에게 혹하지 말고, 매혹되지 말고 주님에게, 예수님에게 매혹되게 되면 비로소 그런 자가 영적 세계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 외에는 다 막혀 있어요. 영적 세계에서 다 차단되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가, 왜 예수님만 아들인가?’ 그것 또한 천사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차이가 나느냐, 라는 것에 성급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천사가 어떤 차이가 나는지 그걸 먼저 생각해 봐야 해요.
우선 같은 점은 뭐냐?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새로운 영적 세계에 함께 계시다는 점이 공통점이에요. 예수님과 천사들과 함께 있어요. 그리고 그 세계는 어떤 안정성 속에 있습니다. 영원 속에 있습니다. 그 천사들이 영원 속에 있기 때문에 천사들의 특징은 뭐냐? 추억이 없어요. 인간의 존재의 뿌리는 추억에 있습니다. 자기 옛날 기억에 두고 인간은 살아가요. 인간들이 텃세하는 이유가 자기 기억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런데 천사는 자기 추억이 없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기계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천사의 특징은 자기 것이 없어요. 천사는 자기 것이 없기 때문에 굉장히 가벼워요. 굉장히 가벼워요. 그래서 천사와 예수님과의 공통점은 뭐냐? 천사는 예수님의 그 상승 기류를 보여준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는 추락이었습니다. 십자가에까지 냅다 막무가내로 추락했는데 예수님의 그 추락 가운데서도 천사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상승 기류를 준 거예요. 예수님으로 하여금 뜨게 만드는 겁니다. O2 같아요. 산소, 산소같이. 가벼운 원피스 하나 입어도 붕붕 떠요.
상승 기류니까 천사가 활동한다는 것은 성도 입장에서는 소망입니다. 왜? 성도 자신은 어떤 걸 해도 죄 밖에 나올 게 없어요. 그래서 이건 자기를 생각해 볼 때 하강 기류에요. 이건 내리꽂는 겁니다. 그런데 천사가 내리꽂는 그 성도를 상승 기류로 가볍게, 가볍게 만들어줘요. 천사가.
어떤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하얀눈 하늘높이 자꾸 올라가네~” 이문세의 <옛사랑>이라는 노래 가사에 나와요. 왜 눈이, 하얀 눈이 내려와야지 왜 자꾸 올라가죠? 그건 바로 위의 관점에서 볼 때 끌려가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땅에 내려왔던 눈들을 눈을 내렸던 그 위쪽으로 계속해서 잡아당긴다는 뜻이에요.
성도가 천사에 의해 상승 기류를 타게 되면 위에 이미 가 계신 주님께서 성도를 끌어 올리는데 올릴 때마다 성도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어요. 점점 더 가벼워요. 따라서 천사가 안 도와주면 인간은 그동안 얼마나 무겁게 인생을 살아왔는가를 본인이 절감해야 되는 겁니다. 그 무게, 중량감이 자기를, 인생을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어요.
개뿔 성경 말씀 하나 지킨 것도 없으면서 복은 복대로 받아 챙기려고 열심히 기도 해대고 헌금 해대고, 무슨 속임수가 그런 속임수가 있어요. 가볍게 올라가면서 성도는
“지나온 내모습 모두 거짓인가~” 이영훈이 작사를 잘했어, 하여튼. 지나온 모든 것이 거짓인걸.
전에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함부로 불렀는데 가벼워지고 난 뒤에 그다음부터는 예수님 이름을 아껴서 부르죠, 아껴서. 옛사랑이 아니고 얼마나 새로운 사랑인지. 올라오니까. 주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아껴서 부르는 거예요. 왜? 너무 소중하고 너무 사랑하니까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누가 너를 고발하리요.” 이 무거운 죄를 올라가면서 먼지 털듯이 매일같이 털어주니까요. 너를 의롭다 해주시니까 도대체 이런 복이 어딨어요. 이런 주님의 덕담이 어딨습니까? 매일이 설날이죠. 세뱃돈 안 줘도 좋아요. 매일이 설날이에요.
여기서 우리는 천사와 성도의 차이점을 알아야 해요. 천사는 회개가 없습니다. 회개 자체가 없어요, 회개할 것이 없어요. 왜냐면 이미, 회개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회개라고 하거든요. 울고불고 반성하는 게 회개가 아니고 “어? 이런 세계가 다 있네?” 이게 회개입니다. 그동안 이 세계 빼놓고 엉뚱한 세계에서 잘난 척하려고 질질 짜고 힘들게 살았는지.
그래서 회개를 하게 되면 너무 기뻐요. 이 세계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그걸 감지하는 데서 오는 그 기쁨이 너무 기뻐요. 그래서 세상에 천하보다 더 소중한 기쁨이 와요.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 있느냐는 말씀처럼 온 천하보다 더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그 사탄 말고요, 천사는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부인이 안 돼요. 자기 부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주님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 계속해서 자기가 자기로부터 헤어지는 가벼움을 갖게 돼요. 나와 헤어진다는 말은 뭐냐?
내가 행한 것에 대해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세계로 이끌림을 받고있는 거예요. 하얀 눈이 자꾸 위로 올라가요. 이 땅에 있는 우리가 자꾸 위로 올라가요. 내가 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게 만들어 버려요. 그게 자기 부인입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바 없어요.
그다음에 이 천사와 성령의 차이가 뭐냐? 천사는 우리를 도와줍니다. 도와주는데 성령은 우리 속까지 들어와요. 그래서 천사의 도와줌은 항상 일시적이고 임시적입니다. 창세기 5장 19절에 보면 베드로가 탈옥을 해요. 스스로 탈옥하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냥 천사가 문 다 열어주고 “나가세요.”하고 보냅니다. 베드로의 신체, 몸은 옥에 있다가 바깥으로 나왔어요. 하지만 베드로 속에 있는 것은 천사가 아니고 성령이, 성령이 작용하게 되죠. 천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활동에 제한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임신할 때에 가브리엘 천사가 오죠. 그것도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임신케는 했지만 마리아 자신의 죄를 천사가 사할 수는 없어요. 뭔가 천사는 보조적 위치에 있어요. 그리고 시험받을 때, 특히 마태복음 4장 11절에 예수님이 시험받고 난 뒤에 천사들이 와서 수종 들더라, 하는 대목이 나와요.
그 천사들이 와서 도와주기는 해요. 하지만 그 도와주는 것이 성도를 위해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성도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복음, 그 복음을 위해서 천사는 돕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천사 하고 안 논다. 천사랑 헤어지련다.’ 이런 마음이 있다면 간단해요, 여러분 속의 여러분 복음하고 결별하면 천사들이 안 찾아옵니다.
마치 유월절 날 천사가 와서 애굽 나라의 모든 장자를 칠 때 그 사람의 성격, 인품, 인간 됨됨이, 삶의 태도, 자세, 학위, 학력, 재산 여부, 나이, 남녀 성별, 일체 안 봤어요, 안 봅니다. 천사가 본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보고 피 발렸으면 그냥 살려주고, 피 없으면 그냥 죽이고. 아주 고지식해요.
그러니까 천사와 예수님이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면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그 천사가 더러운 인간세계에서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 고지식한 그런 인상을 받는다면 성도 자체가 이 땅에 살면서 천사 같이 돼야 되죠. 아주 고지식해야 되죠.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설교할 때 그 얼굴이 천사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도 고지식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외치다가 돌에 맞아 터져서 죽었죠. 일가친척들이 봤으면 기절초풍했을 거예요. “인생을 어떻게 저렇게 사나. 네 인생 네가 챙겨야지 어떻게 죽은 예수가 네 인생을 챙긴다고 그런 착각을 하느냐?”라고 얼마나 주변 사람들이 욕을 했을까요.
만약 거기에 대해 스데반 집사가 할 말이 있다면 할 말은 간단해요. “나도 왜 이렇게 된지 몰라.” 내가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 믿으면 구원 받겠다든지, 교회 나오면 천당 간다든지, 그런 구원의 탐욕과 욕심이 있다면 짱돌 정도가 아니라 욕만 날아와도 예, 하고 아무 소리 안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미 성령이 임하니까 내 속에 내가 원치 않은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와 버리니까 ‘내 인생 나도 몰라.’ 그야말로 내 인생 갈 곳을 잃어, 에요. 내 인생 나도 몰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께서 ‘너 잘 걸렸다. 낚싯대에 걸렸다.’ 해서 잡아당기고 릴을 가지고 막 끌어 올리는데 천국으로 끌려가면서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거 없어요.
“어, 어어…?” 이게 성도가 할 말이에요. 세상 친구, 친척, 일가식솔, 가정, 가족들의 사고방식과는 날이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어어…?” 점점 더 멀어져요. 전에는 5센티, 10센티, 30센티, 3미터, 나중에 5킬로…, 점점 더 각도가 벌어지기 시작해요.
저쪽 사람들은 이 복음의 세계, 영생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납득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달래기도 하고 뭐 어떻게 다 해도 “저게 미쳤지. 어떻게 내 몸으로 난 자식이 왜 저래 됐냐?” 저도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내 몸에서 난 자식이 왜 그렇게 풀렸냐.
차마 말은 못 하지만 속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직 멀었습니다. 이 간격은 아직 벌어진 것도 아니에요. 진짜 벌어진 거 한 번 보시렵니까?’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이 같을 리가 없죠.
그러니까 구원받는 것에 대해서 남한테 설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일종의 자기 자랑 밖에 안 됩니다. 같은 죄지은 주제에 뭘 자랑해요. 다만 “어, 어…?” 자꾸 잡아당기는 거, 그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경 지식? 성경 몇 독 했다? 복음 연구한 지 몇십 년 됐다? 아, 그것도 중량으로 작용할 수가 있어요. 우리를 무겁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거 안다고 그게 구원의 능력이 아니잖아요.
항상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담기게 되면 그때부터는 천사가 우리와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줘야 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예수님 시험 받는 것, 마리아 임신, 베드로 탈옥, 이건 신약 때 나왔던 천사가 성도 안에 복음이 있으니까 성도를 도와주는 방식이라면 구약 때 천사는 무슨 일을 했는가?
창세기 3장 24절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구약 때 천사의 일은 차단입니다. 인간들을 차단해서 천국에, 에덴동산에, 생명 나무 있는 곳에 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일을 하는데 이 차단 일을 하는 것이 멈춰서 일하는 것이 아니고 차단의 일을 인간이 사는 세상 내부까지 쳐들어와서 계속 차단시키는 일을 벌이는 거예요.
그 이유는, 인간세계의 대세가 뭘 로 바뀌는가 하면, 점차 가인의 자손 쪽으로 권력이 쏠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6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사람들은 복이라고 여겼죠? 아, 역시 인간은 이렇게 번성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번성하면 할수록 여기 3절에 나의 신, 하나님의 신이 그들과 함께 있지 않겠다는 식으로 번성하고 있어요. 그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그냥 힘 되는 쪽수, 숫자만 많으면 뭔가 자체적으로 사는 데 안정감을 얻었다고 여기고 안심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땅에서 번성할 때에 사람의 딸들과, 가인의 딸이죠, 사람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 천사들과 연애해서 자식을 낳아서 그때부터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체가 된다는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의 인간, 겉으로는 인간인데 사실은 하나님의 배제된 대상으로서의 인간들이 대세를 차지한 겁니다.
그 가운데서도 희미하게나마 면면히 가느다랗게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죽은 아벨의 씨에요. 죽은 아벨의 씨에서 에녹이 나옵니다. 아벨에서 셋이 나오고, 아들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고, 그렇게 죽 나와서 나중에 에녹까지 옵니다. 다음에 므두셀라 나오죠. 그다음에 노아 나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천사가 기계처럼 움직이는데 그 기계가 하는 일은, 인간은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주 나발을 불어요. 광고를 해 댑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계속해 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이스라엘 같으면,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이니까 하나님께서 그들만큼은 넣어주겠지.’ 이렇게 생각하시죠? 그렇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3장 20절에 보면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이 동행한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동행하니까 이젠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고 뭐가 동행하느냐? 너희들 민족만큼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 얼굴을 볼 수 없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그 점을 이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 뜻을 운반하는 운반체로서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이스라엘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나님을 본 자가 없어요. 보면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죽는다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천사를 통해 율법을 줬습니다. 천사를 통해 율법을 줬다는 것은 스데반 집사 설교 사도행전 7장에 보면 나와요. 줬단 말이죠.
그럼 어떤 식으로, 하나님 보면 죽는다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보이느냐?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줬는데 출애굽기 37장 7절에서 9절에 보면 “금으로 그룹 둘을” 그룹이죠, 그룹이라는 것은 창세기 3장 24절에 나오는 생명 나무 가는 길을 막는 그 천사를 그룹이라고 해요.
그 그룹 둘을 “속죄소 양편에 쳐서 만들었으되 한 그룹은 이편 끝에, 한 그룹은 저편 끝에 곧 속죄소와 한 덩이로 그 양편에 만들었으니 그룹들이…” 속죄소라는 언약궤 위에 나란히 엎드려서 언약궤에 어떤 인간도 접근이 불가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 중심으로, 그 표시 기구 중심으로 사방으로 확대된 그 단체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그 중앙에 사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천사가 있고 천사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함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 구원? 구원같은 소리하고 있네. 무슨 구원이 있어요? 못 만나는데 무슨 구원이 있습니까? 구원 없습니다. 교회? 교회는 오락 하는 데고요. 노는 데에요. 하나님 갖고 까불고 찢고 노는 데에요. 놀려고 예배당 만들고 한 거예요. 하나님 섬긴다고 하고, 뭐 성경 구절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해서.
모든 성경의 개념은 어디에 붙어 있어야 되느냐? 새로운 세계에 별처럼 박혀 있는 개념이에요. 그 개념들이 이 땅에 주어지게 되면 그 개념 하나하나에 너희들은 구원 받지 못한다, 그 내용이 다 포함되는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개념들입니다.
성전, 율법, 하나님 나라, 기도, 금식, 구제…, 이 모든 개념, 제자, 교회, 이 모든 개념에는 어떤 것을 해도 너희들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개념들이에요. 그 개념들의 본체는 새로운 영적 나라에 하늘에 박혀 있는 별처럼, 붙박이처럼 박혀 있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 이 땅에 오면서 같이 따라왔고, 그 개념들을 예수님은 품고 있었고, 그 품은 예수님을 사람들은 살해했고 죽여 버렸던 거예요. 하나님을 죽여 버렸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구제, 금식, 기도, 하늘나라, 구원 개념에 대해서 십자가를 근거로 재해석을 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죽인 거예요.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율법대로 우리가 바르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정직하게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주의로 나갔던 거예요. 그들이 하나님을,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그들이.
그 바리새인들은요, 이레의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율법에서 ‘하지 말라’ 하는 것은 안 하고 ‘하라’고 하는 것은 하고, 그것으로 완전무장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또 사도바울은 죄의 카탈로그를 확 늘려 버렸지요. 그 하늘나라에 박혀 있는 개념들은 어떤 것이냐 하면, 뭐든지 고맙고 감사하게 되면 그게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10장에서 하늘에서 어떤 천사의 소리가 났어요. 베드로보고 율법에서 먹으면 안 되는 어떤 조항들이 보자기 담아서 내려왔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11-13절)
내려오니까 베드로가 순간적으로 자기 내부의 육적인 요소가 탁 튀어나왔어요. 본능이지요. 누구나 마찬가지고요. “못 먹습니다. 제가 율법을 모르는 게 아니고 아는 이상 못 먹습니다.” “먹어라.” “못 먹습니다.” 14, 15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다윗, 시편 51편의 고백을 한 그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이야기합니다. “이 나라에 양이 많은 부자에게 손님이 왔습니다. 이때 자기의 많은 양들은 놔두고 한 마리 양밖에는 없는 종의 그 양을 잡아서 손님 대접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이 화를 벌컥 내면서 “우리 이스라엘에 그런 인간이 있어? 내가 율법을 좀 알거든. 네 배나 갚아야 해. 아니, 네 배고 뭐고 그런 인간들은 아예 죽어야 해. 율법을 함부로 생각하는 자들은 죽여버려야 해.”
사무엘 하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럴 때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하느냐? “바로 당신입니다.” 율법을 안다고 우쭐대는 바로 당신입니다. 아는 게 죄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요. 율법을 아는 게, 성경 아는 게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상상도 못 한 겁니다. 그 이유는 뭐냐? 우리가 땅에 속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땅에 속한 인간에게 어떤 말씀도 너는 천국에 못 간다, 를 알려주는 신호가 이 말씀이에요. 갈 수가 없습니다. 아니 안가야 돼요. 못가야 돼요. 가면 안 돼요. 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이니까. 가면 안 되지요. 자기가 마귀의 자식이고 마귀의 아들이라면, 마귀의 종이라면 자기에 대해서 구원을 철회를 해주는 것이 가장 정직한 태도 아닙니까?
죄지은 주제에 구원받겠다는 그 욕심은 또 뭐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예요? 돈은 돈대로 사랑하고 헌금은 헌금대로 하겠다고요? 그게 어떻게 사도, 성령님 앞에서 통합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 이게 내가 뭘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님을 알고 자기 행함에 대해서 먼지 털 듯이 털어버리는 겁니다.
천사의 특징은 추억이 없어요. 기억이 없어요. 주님은 날 알지요. 나는 그분을 몰라요. 기억이 안 나요. <사랑이 지나가면> 이문세 노래 또 나오네.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 그리고 우리는 솔직하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몰라요. 우리는 모릅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데 어떻게 남에 대해서 알아요? 남을 장악하려고 시도합니까? 본인도 장악되지 않는데.
너는 내 말 들으라고. 뭐 본인은 본인 장악하고 있어요? 몰라요. 우리는 바람같은 존재입니다. 그냥 부는 바람 따라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지 내가 굳세게 내 마음을 붙잡는다고요? 우리 마음이 나보다 더 세요. 내 속의 충동이. 내 의지로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을뿐더러 책임지고 싶어도 책임질 게 없어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랑이 변하니?” 이렇게 하니까 “사랑이 아니니까 변하지.” 무슨 우리가 사랑을 해요? 사랑이라는 개념, 소망개념, 그리고 믿음개념은 다 주님 나라에, 영적 나라에 박혀 있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개념이지 내 구원받기 위한 개념들이 아닙니다. 어떤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남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매 순간 궁지에 몰아넣어요, 매 순간. 매 순간 궁지에 몰아넣고 매 순간 천사가 와서 우리를 도와주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지금 구약의 그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제일 중심에는 왕이 있으면 안 돼요. 그 자리는 왕 대신 비어 있어야 돼요. 빈공간이 있어야 돼요. 빈공간이 지배하는 거예요. 우리가 성도라면 성도의 중앙에는 내가 예수라고 부르는 분이 계시면 안 돼요. 성도의 중앙에는 구멍이 뚫려야 돼요.
내가 예수를 부르는 순간, 내가 누구라는 어떤 대상을 부름으로써 이름 부르는 대상은 그 이름을 부르는 나에게 종속되는 관계가 되어버려요. 내가 예수 부르면 예수님이 쪼르르 쫓아와서 나한테 “뭘 도와드릴까요?” 이렇게 해야 돼요. 예수님이 무슨 ‘보이’입니까? 웨이터입니까? 아니거든요.
따라서 그 공간은 비어 있어야 돼요. 내가 부르는 예수님을 빈공간에서 출현하는 예수님이 그걸 어떻게 매일같이 수정시키고 변경시키는 것을 우리가 그 결과로 받아들여야 돼요. 우리는 하루하루가 내가 만드는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 뒤에 고백형식으로만 나타날 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하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나오는 고백이 그 고백이에요.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없었고 주께서 원하는 대로 되어질 뿐이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모든 과정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이스라엘은 언약과 빈공간 중심으로 갑니다.
갈 때 그 빈공간, 우리가 할 것은 없지만 주께서는 빈공간을 통해서 게워내듯이, 마그마가 터져나오는 화산의 중앙처럼, 그 중앙의 구멍처럼 그 구멍에서 자꾸 뭐가 나와서 이 약속의 땅에서 우리를 살게 한다는 그런 믿음을 갖고 있었는데 약속의 땅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뭐냐 하면, 주변의 다른 나라들이 얼마나 자립적으로 스스로 잘 살아가는가에 그만 마음을 거기에 다 빼앗긴 거예요.
‘저 사람들은 뭘 해서 우리보다 더 잘사느냐?’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내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 상황보다 더 나은 상황이 따로 있을 수 있다는 이 자체가 미혹이에요, 이게. 이게 바로 유혹이었던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와 함께 살면 그것이 주의 일인 것을 생각해야 될텐데 그다음부터는 주의 일이라고 하면서도 결국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니까 나만의 내 독자적인 나의 인생을 따로 꾸리고 싶은 거예요. 자존심이지요.
그러니까 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 본색을 더는 숨길 수 없게 만드는 땅이에요. 왜? 약속의 땅에는 주변에 잘사는 이방나라, 강대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나라, 모압, 암몬, 블레셋, 아람나라, 밑에는 애굽, 완전히 둘러싸서 전부 다 셰퍼드처럼 쳐다보고 있어요. 전부 다 이스라엘을. 언제 날름 잡아먹을꼬, 하고 쳐다보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잘 사는 나라들이 섬기는 신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어요, 마음속으로. 자신의 빈자리, 구멍이 나 있어야 하는데 다른 잘 사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는 그 욕심으로 그 구멍을 그냥 막아버렸어요. 코르크 마개처럼 꽉 막아버렸어요. 막으니까 주님의 은혜가 닫혔지요.
자, 이러한 시대가 사사시대였습니다. 이 사사기 13장에 보면 여기에 천사가 드디어 옵니다. 사사기 13장 16절에 보면 마노아 가정에 하나님의 사자가 임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함께 있는 이스라엘 자신의 뜻, 하나님의 영적 세계, 율법이 완성된 영적 세계, 그 세계를 보호하고 싶은 겁니다.
천사가 옵니다. 천사가 오니까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사 가운데 날개 있는 천사도 있지만 대부분의 천사는 날개가 없어요. 그냥 사람의 모습으로, 남성의 모습으로 와요. 그것도 아주 잘생긴 남성의 모습으로 오지요. 소돔과 고모라에 온 천사는 너무 잘생겨서 그 동네 남자들이 완전히 반해버릴 정도의 모습으로 왔었습니다.
천사가 왔을 때 마노아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삿 13:17) 물었어요. 그럴 때 그 천사가 하는 말이 “내 이름은 기묘니라.”(18절) 했어요. 이게 뭐냐? 차단이에요. 너희 인간들이 사용하는 개념 가지고 이 영적 세계에 붙일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네가 아는 모든 것으로 인하여 너는 영적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이 세계에서 저주받고 죽어야 마땅함을 나의 이 천사를 통해서 발견해야 된다.
마노아 가정은 그다음부터 이 천사가 하는 일을 지켜봐야 돼요. 그때 마노아가 하는 말이 “우리는 이제 죽었다. 천사를 만났으니 이제 죽었다.” 이렇게 하니까 마노아의 부인이 하는 말이 “죽을 것 같았으면 진즉에 죽였지 왜 이렇게 무서운 천사가 직접 찾아왔겠는가? 분명히 그분이 우리 가정에 하실 일이 있다.”
그 하실 일이 누구냐? 삼손이었어요. 삼손의 힘은 어디에 있느냐? 머리카락에 있는 게 아니에요. 삼손의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준 표시가 머리카락이에요. 머리카락 이게 뭐 힘이 있어요?
삼손 그림 그릴 때 우락부락하게 마동석이처럼 그렇게 그리는데 이것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빼빼한데 머리카락만 길 뿐이에요. 그야말로 어디를 봐도 힘 나올 구석이 안 보여야 돼요. 누가 봐도 무시할 만한 사람이 돼야 돼요. 이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그럴싸한 내세울 것이 없어야 돼요. 쓸데없는 것 기도하지 마세요, 쓸데 없는 것. 우리 애 공부 잘하게 해주시고…, 그런 것 하지 마세요.
그럴싸한 것 그런 것 다 빼야 돼요. “니 뭐고?” “나 구멍! 나 호구.”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없는 게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신약에 보면 더 놀라운 말씀이 있는데 참 납득하기가 인간의 합리적 언어로 힘들어요.
요한복음 6장 57절에 보면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이게 무슨 뜻이냐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어떻게 뜯어먹어요. 예수님이 정육점 고기도 아니고요. 어떻게 나를 먹어요? 예수님을 어떻게 먹느냐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온 상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게 되면 주님의 몸과 우리 몸이 한 몸이 되어서 서로 한 몸으로서 먹고 마시는 관계가 된다는 거예요. 그게 영적 세계에요. 하늘나라에서 산다, 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빵 먹고, 떡 먹고, 떡국 먹고…, 그게 사는 것인데 여기 하늘나라는 예수님 계시면 그게 사는 거예요. 다른 사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세상적으로 사는 방법은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죽어도 살았어요. 이게 사사기 지나고 나라는 더 엉망이 돼요.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엘리사 이야기가 있는데요. 엘리사 때에 북쪽 아람 나라가 엄청난 군대를 보내서 밤에 그 성을 에워쌌다고 되어있어요.
14절에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그리고 15절에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엘리사의 사환, 단지 사환으로 되어있는데 그 사환이 그걸 보고 “선지자님, 우린 이제 죽었습니다. 우린 달랑 두 사람인데 저쪽에 엄청난 수의 군대가 선생님 하나 잡기 위해서 왔는데 어쩌면 좋겠습니까?” 그럴 때 엘리사가 기도를 하니까 그 때 사환의 눈이 열리면서 저쪽에 있는 숫자보다 엘리사와 함께 있는 천군 천사의 숫자가 더 많아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이게 영안이 열린 거지요. 비늘이 눈에서 떨어진 거지요.
영적세계가 따로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따로 있는 영적세계는 인간의 철학과 수학과 의학과 물리학, 어떤 학문, 어떤 전통과 역사를 동원해도 그 영적세계는 뚫리지 않습니다. 그 뚫리지 않는 세계가 성령을 통해서, 성령이 내주함으로써 그걸 보면서 살아간다는 것, 호구라도 좋고 멍청하다는 소리도 좋은데 너희들은 이 세계를 몰라.
성도 안에는 구멍이 있고 그 구멍 안이 언약궤, 하나님이 다 이룬 십자가가 그 구멍으로 작동하면서 그 십자가의 죄사함을 얻게 하는 작용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성도는 성도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십자가 복음을 운반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 안에 예수님의 마음, 성령을 예수님의 마음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있으니까 누가 우리한테 경배하느냐 하면, 천사가 경배하는 거예요, 성도보고! 성도가 천사보고 경배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천사 숭배하지 말라고 골로새서 2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네가 누군데 왜 천사를 숭배해?” 2장 18절에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천사가 오히려 너희를 도와주게 되어있어요. 네 안에 천하보다 귀한 게 들어 있기때문에.
창세기 32장에 마하나임이 나옵니다. 이제 이것 이야기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마하나임은 하나님의 군대에요. 사다리 타고 내려왔던 군대입니다. 이 천사의 특징은 개인주의, 개인플레이를 하지 않아요. 집단으로 움직입니다. 똑같이 성도들도 개인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집단화되어서 구원받아요. 전부다 예수님의 몸의 지체들이에요.
이 세상은 전부다 개인플레이, 개인주의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개인주의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세울 것이 없어요, 내세울게. 자기 안에 뻥 구멍이 뚫리고 그 안에서 십자가의 죄사함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 작용한다, 이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 외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내세울 것이 없어요. 주께서 사용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같은 성도라면 성도와 성도끼리는 서로 내세울 것이 없는 자의 만남이고 대화이고 모임이어야 돼요.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것, 이게 얼마나 상상을 초월한 기이한, 그야말로 기묘한 일입니까?
죽어도 상관없고, 살아도 상관없고, 이래도 가볍고 저래도 가벼운 것, 그리고 마지막에 성도는 주와 함께 하나님 나라 우편에서 천사들의 경배를 받으면서, 섬김을 받으면서 사는 것, 이것이 누구의 프로젝트인가?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원하신 창세 전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계획의 일부로서 이 지상에 그것을 마음껏 증거하는 그러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눈만 열고 귀만 열리면 들려오는 세상 이야기, 정치 이야기, 총선 이야기, 돈 이야기, 사기 치는 이야기. 주여, 이제는 그것이 죽은시체들끼리의 더러운 지옥 같은 세상인 것을 이제는 흐뭇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자유함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