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부음
2024년 2월 18일 본문 말씀: 히브리서 1:8-9
(1:8)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1: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9. You have loved righteousness and hated wickedness; therefore God, your God, has set you above your companions by anointing you with the oil of joy."(NIV)
9. Thou hast loved righteousness, and hated iniquity; therefore God, even thy God, hath anointed thee with the oil of gladness above thy fellows.(KJV)
9. "THOU HAST LOVED RIGHTEOUSNESS AND HATED LAWLESSNESS; THEREFORE GOD, THY GOD, HATH ANOINTED THEE WITH THE OIL OF GLADNESS ABOVE THY COMPANIONS."(NASB)
사도는 인간을 말씀으로 죽이시는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죽이는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원래 ‘기름부음’이 없습니다. 기름부음은 예수님에게만 있는 하늘의 요소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또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스랍’이라고 하는 천사장입니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3:13-15)
이들 그룹은 창세기 3:24에 보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지키던 천사들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이들이 하늘 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땅으로 쫓겨나 땅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땅에 속한 모든 인간들을 본인 아니게 하늘나라의 ‘기름부음’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기름부음의 취지는 왕으로 행세하는 겁니다. 이런 악마의 정신이 모든 인간 내부의 자리잡고 있으니 인간마다 본의 아니기 왕이 되고자 하는 성향을 멈출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인생을 사는 이유도 목적도 모릅니다. 그저 자기 내부에게 시킨대로 왕이 되고자, 최고가 되고자 분투 노력하면서 헛된 세월을 보낼 뿐입니다. 자기가 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부러워하면서 자신도 내심 그 경지에 이를기를 노력할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실된 기름부은 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악한 기름부은 자를 잡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분(아들)에게는 원래 기름부음이 지닌 두 가지 본질을 투입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왕+제사장 기능입니다. 이는 기름부음의 왕적 기능을 정신없이 지배당하고 현 인간 세계에 제사장직으로 찾아드는 겁니다.
제사장 기능이란 희생당하는 기능입니다. 스가랴 4장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일의 기능을 계시받게 됩니다. 스룹바엘이란 총독이 성전의 촛대와 같은 존재로 놓여 있고 그 스룹바벨에게 양쪽으로 하늘에서 기름을 주유합니다. 이 양편에서 주유하는 자는 왕과 제사장 기능을 보여줍니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슥 4:2-3)
이처럼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두 개의 기름부음의 대결에 관한 겁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최고가 되고 싶고 왕이 되고 싶고 나아가서는 신이 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이 일을 위하여 인간들은 신에게 뇌물를 바치고 제사를 올립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두 종류의 제사가 나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3-5) 이 제사에서 아벨은 양 새끼와 기름을 따로 분리해서 드렸습니다.
아벨의 기름은 아벨 자신이 형으로부터 맞아 죽어 피를 쏟아내므로서 온전한 제물이 됩니다. 즉 온전한 제물은 기름으로 구분되고 그것이 피흘림으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는 왕적인 통치와 전혀 다른 기름받음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제물의 기름과 제물의 인간 안에서 통합이 되려면 제물 자체가 인격화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아벨의 제물은 나중에 이스라엘 제사법 안에 그래서 살아있고 이어집니다. 제단 전체는 기름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됩니다.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민 7:1)
그런데 제물 안의 기름이 서서히 인물로 변신이 꾀하게 됩니다. 특히 제사장의 경우, 피발린 제사장의 양식은 기름발린 제물들이 됩니다. (출 29:20-23) 기름발림을 왕으로 인식하는 사울왕은(삼상 10:1) 어느 새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왕이 율법의 제사법으로 스행해도 사무엘선지자는 사울왕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사무엘이 손수 진즉에 죽여야 할 아말렉의 아각왕을 쪼개버립니다.(삼상 15:33) 왕을 죽이는 것이 진짜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해야 될 왕다운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는 진정이 기름부은 왕을 배태하는 역사를 보내게 됩니다. 하박국 3:13에는 다음과 같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즉 메시야부터 먼저 구원되고 난 뒤, 그 구원방식을 근거로 백성들이 구원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서 백성들에게 기름(성령)이 부어집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1-22) 결국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만한 인간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고, 인간 속에서 참된 인간의 영(=기름)을 보내시고 그 기름을 되받아 내는 식으로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구원을 마무리 지으십니다.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9-10)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것이 이 기름부음을 가치를 방해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강-히브리서 1장 8-9절(기름부음)240218-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히브리서 1장 8-9절입니다.
히브리서 1:8-9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8. But unto the Son he saith, Thy throne, O God, is for ever and ever: a sceptre of righteousness is the sceptre of thy kingdom. (왕이 왕권의 상징으로 드는) 홀 (→mace, orb) 직장(職杖: 시장 등의 공직자가 권위의 상징으로 들고 다니는 장식용 지팡이) (→sceptre
9. Thou hast loved righteousness, and hated iniquity; therefore God, even thy God, hath anointed thee with the oil of gladness above thy fellows.
여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 지상의 왕을 이미 생각을 해 두셨는데 이 지상의 왕이 되고 지상의 모두를 통치할 그 분에게 지팡이가 있다고 되어 있고, 지팡이로 되어 있는 그것이 겉이라면 그 본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9절에 기름을 부었다,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기름이 있는 예수님이 기름이 없는 그들을 지배토록 그렇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이 뭐냐? 기름 부음은 이 지상에는 없고 하늘에만 있는 게 기름 부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기름 부음이 없는 게 바로 인간입니다. 사도가 전하는 이 성경 내용을 통해서 보게 되면, 사도는, 사도바울도 그렇고, 사도 요한도 그렇고, 사도 베드로도 그렇고, 멀쩡한 우리 인간을 죽이시는데 굉장히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써요.
기름 부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람행세를 하고 있으니 내가 너 도와줄게, 내가 너 죽여줄게, 네가 안 죽으면 인간인 양, 하나님 인정하는 인간, 존재인 양 그렇게 자꾸 오해를 하니까 내가 말씀으로 너 죽여줄게, 하는 그 사도들의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즐거운 기능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대하면서 죽기는 죽는데 사도가 시키는 대로 죽으시면 됩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따로 있고, 그리고 현재 이 인간세계에서 인간이라고 우기는 그 인간 속성이 따로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스스로 자기가 거짓되었다는 생각을 안 해요.
그런데 사도는 말씀을 가지고 누구를 소개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아들에 관하여는” 하고 이야기가 시작되거든요. 세상에 누가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궁금해 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뭐든지 그게 관심이나 있습니까? 없어요. 인간은 자기한테 관심이 있지 예수님에게 그렇게 관심 갖는 사람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나에게는 내 것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도가 전하는 말씀을 줘도, 말씀을 줘도 이게 튕겨져 나오는 이유가 ‘알았어, 알았어! 그래, 그게 하나님의 뜻이야? 알아들었어.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그래, 내가 배울게.’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성의를 표하고, 예의를 다 갖춰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마지막에 튕겨져 나가버려요.
마지막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의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바른 교회가 어디입니까?” 질문 자체가 이상하지만 “바른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또는 “우리 교회 바른 교회 해 봅시다.” 아무리 해도 내 것이 있는 이상은 바른 교회는 없습니다. 내 자아가 있는 이상은 옳은 교회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되는 것이 바른 교회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 말씀이 마지막에 내 것 파괴할 거냐, 아니면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올 것이냐의 싸움에서 인간은 기어이 이깁니다. ‘나는 천하의 말씀이고 하나님이고, 내 것 내놓을 생각은 1도 없다, 0도 없다. 내가 어떻게 만들어낸 내 것인데 이것을 내가 다치게 해? 나는 내 것 포기하면서 예수 믿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런 생각입니다.
사람에게 이(치아)가 있는데 이가 아프다. 겉으로는 멀쩡해요. 그런데 치조골 안에 세균 들어가 버리면 그곳은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도, 그 하늘의 말씀이라도 그걸 튕겨내는 또 다른 수상한 괴물스러운 것들이 이미 인간 각자 안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세균처럼 들어 있습니다.
주보에 나옵니다. 에스겔 28장 13-15절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천사라는 말이지요. 어떤 천사냐? 기름 부음을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오늘 히브리서에서 하나님의 아들도 기름 부었지만 똑같이 기름 부은 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천사들 중에서 천사를 통치하고, 통제하고 천사를 지배하는 또 다른 천사, 그룹입니다.
이 그룹이라는 천사는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할 때 생명 나무를 보호하는 것도 그룹이지만 그 그룹 중 하나가 뭐가 되었느냐 하면, 반항, 반기를 들어서 하늘에서 전쟁을 벌이다가 질 것 같으니까 어디까지 추방되었느냐?
미가엘에게 패배당해서 어디까지, 이 땅에까지 내려와서 뱀의 입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자기편으로 삼아버립니다. 세뇌시켰습니다. 세뇌시키는 그 정신이 뭐냐? 이 악마가, 사탄이 하늘나라에서 자기가 가졌던, 기름 부음을 갖고 있던 그 정신으로 인간에게 세뇌를 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낸 것은 기름 부은 자를 체포하기 위해서, 기름 부은 자를 체포해서 처형하기 위해서 기름 받은 자를 파견시켜 버린 겁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이 땅으로 쫓겨난 사탄이라는 기름 부은 자가 이 땅에서 무슨 노릇을 했는가? 왕노릇한 겁니다.
그걸 로마서 5장에서는 죄의 왕노릇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줄도 몰라요. 인간은 죄라는 것 자체를 몰라요. 인간은 그냥 행동할 뿐이에요. 그냥 생각하고 행동하지 나 죄짓자, 이런 식으로 인간은 행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쩔 수 없이 행동해요, 어쩔 수 없이.
이 아픈데 치과 가야지요. 당연하지요.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맹장 아프면 맹장 수술해야지요. 어쩔 수 없어요. 인간은 그냥 누구한테 휘둘리는 거예요. 휘둘리다 한평생 다 보내는 겁니다. 어떤 이유도 없어요. 인간은 이유도 몰라요. 사는 이유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아요. 사는 목적같은 것은 애초에 없습니다.
남 뒤꽁무니 따라다니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에게 진리라는 것은 관심도 없고, 진리도 인간에게 관심이 없어요. 진리는 누가 알고 있는가? 진리는 악마가 알고 있어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귀신을 쫓아내는데 귀신이 진리를 알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우리를 멸하러 왔지요?” 주님께서 “그 입 안다무나? 입 다물어!”
악마는 진리를 인간에게는 감추고 자기는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누구한테 들통났는가? 자기하고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나타나니까 자기 한계가 드러난 거예요. 자기 정체가 까발려진 거예요. 하지만 이 땅에서 마귀는 기 안 죽어요. 왜? 모든 인간이 자기편이니까.
모든 인간이 자기편이에요. 이 인간은 악마의 정신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킨 대로 그냥 움직일 뿐이에요, 시킨 대로. 인간 속에 악마가 갖고 있던 그 하나님 같은, 왕 같은 존재 같은 것들이 인간의 치조골 안에 들어 있는 세균처럼 안에 박혀 있어서 모든 인간은 이 땅의 왕이 되지 못해서 전부 다 환장하고 있는 거예요, 전부다. 이 땅의 왕이 되고 싶어서요.
자기가 하는 직업, 자기가 하는 재미있어하는 재능을 통해서 최고가 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우리나라에 왕이 몇 명이냐? 우리나라에 왕이 2만 2천 명입니다. 왜? 직업이 2만 2천 가지니까요.”
거기에 판매왕 있지요, 낚시왕 있지요, 왕 대통령 있지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인기 있는 가수는 가수왕이지요, 왕 같은 가수, 또 인기의 왕, 모든 분야에서, 바둑왕은 누구냐, 신진서, 이렇게 바둑왕은 따로 있어요. 랭킹을 매기면서. 축구는 손흥민. 하여튼 모든 게 각자 하는 분야의 왕이 못되어서 환장하고 왕이 된 것을 부러워하면서 그것을 자기의 모델로 삼는 겁니다.
우리나라 목회의 왕은 누구냐, 설교의 왕은 누구냐? 교회 왕은 누구냐? 그 왕 앞에 아낌없이 자기의 몸과 영혼을 다 바치고요. 여성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가운데 누가 자기 자식을 잘 키웠느냐? 주부 왕, 어머니 왕, 모친 왕.
그래서 드라마도 시시한 일반 드라마 인기도 없고요, 현대 드라마는 재벌이 나와야 되고요, 사극 같으면 왕 나와줘야 이게 재미가 있어요. 좌의정 정도 되어야 그래서 공주 바꿔치기하는 이런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재미가 난다고요. 내 본성은 이미 악마가 다 잡아줬거든요. 악마가 ‘너 왕이 되어야 해.’ 그게 신나잖아요. 신나니까 굳이 내가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누구신가, 사는 이유는, 사는 목적은, 그걸 굳이 생각할 필요 없어요.
굳이 내 몸이 시키는대로 따르게 되면 나는 이상하게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기름부음, 예수님의 본질,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보내주면서 본질을 두 개로 나눠버렸어요. 현재 왕이 된다는 것은 이미 기름 부음 받은 악마가 이 땅을 장악할 때 하나의 사고방식을 인간속에 집어넣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반대로 갑니다. 그 기름 부음이 뭐냐? 제사장 기름 부음, 희생제물이 되는 기름 부음으로 바꿔나가요. 예수님도 왕인데도 불구하고 희생제물이 되는 기름 부음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게 분리가 되어야 돼요. 가인이 제사로 제물을 바칠 때 이것은 내가 이 제물을 바침으로써 하나님에게 도움을 얻어서 나라는 존재가 이 시대에서 최고라는 느낌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예배와 제사를 드린 거예요.
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 하나님과 서로 소통하고 아는 사이가 되면 내가 본래 원했던, 내가 이 땅 이 시대에서 남에게 꿇리지 않고 최고가 되는 사람이 되는데 이게 유리하게 지름길이 되는 그런 능력을 하나님께 받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린 거예요.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자기를 위해서 이용하는 겁니다. 그게 가인의 제사에요. 가인의 예배고. 오늘날 교회의 예배가 바로 그거예요. 모든 종교가 다 그래요. 자기 것 날아가고 자기가 죽어? 그것은 어림도 없어요. 내가 왜 죽고, 내가 왜 남에게 손해를 봐요? 하나님 힘 빌려서라도 남보다 더 뛰어나고 위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 되고 싶어서 교회 오는 겁니다.
그런데 동생 아벨의 제사는 뭐냐? 분리시켰어요. 어린양과 그 기름, 두 개를 분리시켰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첫 새끼 따로, 본체 따로 기름 빼내서 따로예요. 아벨의 예배는 뭐냐? 우리를 망가뜨려서, 우리를 죽여서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기름 부음을 뽑아내는 것이 예배에요.
이걸 우리가 죽이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이 우리한테서 뽑히지를 않아요. 빨아당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은 죽어요. 아벨이 죽는 시나리오가 아니면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백성, 여자의 후손은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나와 동일한 노선에 있다(눅 11:51)고 했잖아요, 예수님께서. 죽은 아벨의 피, 사가랴의 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었던 선지자 사가랴의 피, 그다음에 예수님 자신의 피.
두 종류의 인간을 등장시키는 거예요. 두 종류의 인간 가운데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누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종류, 그 분리된 두 종류에서 누가 인간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누가 인간이냐? 그것은 우리는 모르지요.
모르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모든 것이 들통났고, 악마의 나라는 비상 걸렸고요, 악마의 나라가 비상걸리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 악마의 자식들이지요, 그들에게 악마가 사주해서 어쨌든간에 죽여버려라, 입을 막아라, 그걸 ‘입틀막’이라 하지요, 입을 틀어막아서 세상의 정체, 세상 나라의 이 구조의 정체가 다 들통나지 않기 위해서,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그 방법은 마지막으로 죽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정적이지요.
그 작업, 그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바닥까지 다 들춰내는 그러한 본래의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거예요. 그러면 그 율법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마지막 때 오신 예수님 자신의 기름 부음이 율법, 제사법안에 기름이라는 요소로 미리 사전에 다 들어가 있었던 거예요.
아벨이 본체와 기름을 따로 분리해 내고, 양을 잡되 본체와 기름을 따로 분리해 내고 그 양과 기름이 어떻게 통합되느냐 하면, 제사 드린 아벨 본인의 순교적인, 희생적인 피로 통합이 돼요. ‘본체 + 기름 = 억울한 피’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형한테 맞아 죽습니다. 피를 냈던 가해자가 사탄이고 형한테 맞아 죽는 이쪽이 이 땅에 피해자의 모습으로, 다른 유의 기름 발림이 바로 그쪽 노선으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인간에게는 기름 부음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기름 부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알 생각도 없고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하나의 인간을 두고 두 개의 기름 부음이 서로 자기가 장악하기 위해서 씨름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의 인간을 두고 먼저 선방을 때리는 것은 누구냐? 사탄이 먼저 인간 나라에 찾아와서 인간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지요.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가 이미 악마에 의해서 완전히 통제당하는 그 세계에 하나님의 아들이 거기에 뛰어듭니다.
뛰어들기 전에 아벨을 통해서 먼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기 전에 먼저 역사 속에 툭툭 이렇게 던져 넣듯이 자신의 모형과 그림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심어 놓고 태어나게 하고 그들을 통해서 기름 부음의 두 종류성에 대해서 언급을 했던 겁니다. 그 아벨의 피, 아벨의 그 죽음을 통해서,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민족을 만들어낸 것이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이 해야될 일이 있어요.
그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어린양의 피의 제사를 엔진이 가동하는 것처럼 반복해서 계속해서 피제사를 드리는 일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생명은 피에 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피에 있다. 여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 권한 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사를 갖춰놓고 드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고 안 받고는 인간이 강요할 수가 없어요. 실제로 레위기 9장 23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아론이 속죄제, 번제, 화목제를 다 끝낸 그 대목이에요.
화목제와 번제와 속죄제, 율법이 시키는대로 제사장이 양 잡고 소 잡아서 드리는 것은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20절에 “그 기름을 가슴들 위에 놓으매 아론이 그 기름을 단 위에 불사르고” 제물과 기름을 분리해놓고 기름은 따로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물론 고기도 불사르지만, 그렇게 불 사르고 21절에 “가슴들과 우편 뒷다리를 그가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드니.” 이것은 다 인간이 할 수 있어요.
그런데 24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제단에 제물을 바치고 하는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인간이 불 지르지도 않았는데 불이 나타나서 제물을 홀랑 태운다면 이것은 인간이 예상했다, 가 아니라 아무리 예상했어도 막상 일어나게 되면 예상을 뛰어넘는 공포와 두려움이 그 온 이스라엘을 덮어버립니다. ‘죽었다, 우리는, 우리는 이제 죽었어.’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결과를 예상해서 내가 행하는 것, 이게 반복되는 이것이 인생살이잖아요.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 그런 예상이 되기 때문에 인생살이라는 하는데 내가 이렇게 했는데 내가 예상 못 한 다른 초월적인 힘이 와버리면 그 말은, 내 인생은 이제는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내 인생 없다, 내 인생 조졌다, 또는 반대로 ‘내 인생 이거 뭐야? 내 인생이 내가 공중으로 나는 거야?’ 뭐 이런 거요. 여러분 차를 몰고 비행기 활주로에서 한 번 운전해 보세요. 땅이 쫙 넓으니 운전하기 좋겠죠, 비행기가 없다면. 신나게 시속 160으로 밟을 수도 있어요, 160으로, 신나게.
그런데 매일같이 그렇게 하다가 어느 날 그 몰던 차가 공중으로 떠보세요. 이건 공포입니다, 공포. 미친 거예요, 이거는. 주께서 그걸 해주겠다는 거예요, 지금. 그 말은 그거 안 되면 그건 성도 아니고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오는 건 오락이에요. 취미 생활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예배, 찬송, 기도하고 뭐 어떻게 하고 ‘12시 맞춰서 끝내주세요.’ 끝내고 점심 먹고 놀러 가고, 그건 일상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예상되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런 교회를 한 26년 정도 다녔는데 어느 날 자기가 공중에 붕 떠버렸다? 이건 나의 죽음이에요, 나의 죽음. 내 예상대로 안 된다는 말, 그 새로운 자아 앞에서 내 예상이 안 되었다는 말은, 나는 이미 죽은 존재로 간주 된다는 뜻이에요, 이게. 다시 말해서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네가 어떤 행동, 어떤 태도, 어떻게 인생을 살았던 너에게 일체 묻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이게 기름 부음이에요.
기름 부음 앞에 너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이게 기름 부음의 취지입니다. 왜? 기름 부음은 고향이 하늘이기 때문에. 고향이 하늘이에요. 사탄의 고향도 하늘이지만 예수님 고향도 하늘이에요. 그런데 지금 인간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땅에 살고 있어요. 땅에서 기껏 하는 게 뭐냐? 교회 다니기, 예배드리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헌금, 전도, 선교,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디 보험 들어놨어요? 기름 부음은 보람상조에요, 보람상조. 가시는 임 고이 보내줘 버립니다. 사도의 모든 말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쓰잘데 없는 짓 그만하고 그냥 죽어, 인간아. 내가 공중에 뜨게 해 줄게.” 들으면 그냥 기쁘죠. 그런데 이 말조차도 우리가 기쁘지 않은 이유가 그 치조골 속에서 ‘그럼 내 건? 홍콩 펀드 넣어 놓았는데 그 내 돈은? 내 집은? 내 가족, 내 자식들은 어떻게 되는데? 내 가정은?’ 이게 방해가 되는 거예요.
악마가 종교를 만들고 인간에게 준 최후의 유인책은, 네가 새사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많이 들어봤죠? 새사람 된다는 거? 그게 사탄의 유혹인 줄 여러분 몰랐어요? 새사람 된다는 건 무슨 뜻이냐? 간단해요. 하나님이 너 포기 안 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그게 사탄이 전하는 복음이에요.
하나님을 이용하든, 예수님을 이용하든 인간들은 조건 걸고 하나님 믿어요. ‘날 안 버릴 거죠?’라는 조건을 이미 악마가 치조골 속에 걸어 놨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 살면서 힘드니까 천국 가서는 편하게 한 번 살아보자.’ 편하게 살려고 해서 성경에 보니까 새로운 사람, 새 피조물 된다니까 교회에서 “믿습니다.” 이러면서 저를 새 사람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그거 왜 만들어 줘야 되죠? 만들 필요도 없어요. 꾸겨야 돼요. 뭘 새 사람 만들어요. 휴지통에 버려야 하는데. 지옥에 보내 버려야 하는데.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노림수는 그거에요. 새사람 되게 해 준다는 거예요. 그딴 거 우리한테 필요 없어요. 우리는 죽어 마땅하지 새사람 될 필요 없다고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우리를 발로 짓이겨서 거기서 주님이 집어넣은 기름 부음만 뽑아내면 그만이에요. 그게 바로 요한1서 2장 27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에도 나오고.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절)
내가 뽑아내는 것은 바로 주님이 주신 것…, 하늘에서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기름 부음이 성령이거든요. 그 성령을 반환시키고, 소환시키고 그걸 되찾아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성령은 부활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이 있는 자만 부활 돼요.
그런데 성령은 조건이 뭐냐? 우리의 자아를 버리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집어넣어 준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로마서 6장 4절에도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죽었고’라는 말, ‘내가 죽은 척이나 하고’ 그게 아니고 왜 죽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안 죽으면 성령이 내 것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래요. ‘아, 내게 성령 있어야 구원받으니까 내게 성령은 꼭 필요해.’ 성령이 왜 우리에게 필요하죠? 성령은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니고 주님에게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악착같이 닦달 내면서 성령을 ‘내 건데, 내 건데’ 악착같이 붙들고 있으니까 “손 떼. 손 놔!” 성령으로부터 우리를 손 떼게 만드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 그 사건이에요.
구약의 제물은 전부 다 기름이 들어가 있어요. 기름이 들어가 있고 그 기름 부분과 분리시킵니다. 제물에 기름을 바르고 하는 대목이 한두 대목이 아니고 굉장히 많아요. 민수기 18장 17절 같은 경우도 “그 피는 단에 뿌리고 그 기름은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릴 것이며”
18장 8절에도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거제물 곧 이스라엘 자손의 거룩하게 한 모든 예물을 너로 주관하게 하고 네가 기름 부음을 받았음을 인하여 그것을 너와 네 아들들에게 영영한 응식으로 주노라.”
이게 좀 어려운데요. 제물에 기름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진행되면서 기름 있는 제물을 인격화시켜버리면 이 제물이 사람으로 점차 변환되는 과정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보여줘요. 그 역사의 마지막이 뭐냐? 예수님 자신이 바로 왕이고, 왕으로 기름 부었고 제사장으로 기름 부어서 왕과 제사장이 결합되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 이뤄집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그 예언이 주어져요. 그 이스라엘 망할 때 예언이 스가랴 4장인데 그 4장에 보면 인물이 스룹바벨이 하나 나오고요, 스룹바벨은 촛대 역할을 하고 촛대 역할에 양쪽에 주유소 두 군데가 있어요. 관이 두 개가 있어요. 두 감람나무가 스룹바벨에 기름을 주유하듯이 기름을 주유해요. 그러니까 스가랴가 환상을 보고 “저 두 감람나무는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천사가 하는 말이 “너 아직도 모르겠어? 모르겠어?” 그것만 자꾸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중에 알려줍니다만, 스룹바벨은 이스라엘 망하고 성전이 깨지고 난 뒤에 이스라엘에게 찾아오신 총독이죠. 바사나라에서 파견된 총독인데 이스라엘로 하여금 깨진 성전을 다시 재건하라고 지시하는 실제 인물인 총독이 스룹바벨이에요. 이 스룹바벨은 역사에 속한 인물이에요.
역사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에 역사의 마지막 끝에 최종적으로 다 드러나야 될 진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진리의 내용이 텅텅 비어있는 것을 두 감람나무가 등장해서 이 스룹바벨에게 역사 끝 하늘나라 하나님의 뜻을 그 기름을 주유해 주는 겁니다. 그 주유가 한 쪽은 왕이요, 한쪽은 제사장이 스룹바벨로 결합시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복잡하게 하는 이유가, 이미 이 지상에 기름 부음 받은 사탄이, 천사의 통치자가 이 땅을 왕으로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게 666(계 13:17)이에요. 사탄이 인간에게 제안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내가 너를 인간답게 살려 줄게, 그거에요. “살려줄게. 내 말 들으면 살려 줄게.”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 만날 때의 제안 3가지 합치면 딱 그거에요. “네가 하나님의 메시아이니까 내가 살려줄게. 협조해 줄게. 네가 내 손 잡으면 네가 하고자 하는 메시아의 일, 하나님의 일, 아들의 일 성사시켜 줄게.” 여러분 세상살이하는데 이런 예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전부 다예요. “한국 축구 이기게 해 줄게!” 그래서 3년 계약에다 연봉 26억, 클린스만인지 그렇잖아요.
사람이 계약을 한다는 건, 누굴 만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해준다는 보장 하에 그 사람한테 우정의 악수를 하게 되어 있어요.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엔 자식들이 부모한테 순종했잖아요. 요새 자식들은 사업처 사장이에요. 유튜브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가게 되면 아빠 엄마를 상대로 계약서 쓰게 하는 거예요.
“내가 이거 하고 싶은데 학원 보내주고 이것도 해주시면 내가 나이 서른 돼서 독립해 줄게요.” 뭐 이런 것. “해외여행 일 년에 두 번 보내주고, 미국 영어 연수 보내주고 그러면 나중에 엄마 아빠 아플 때 요양병원에 잘 모셔 드리겠습니다.”
모든 사고방식이 악마가 시킨 대로 움직여요. ‘네가 잘 되는 데 있어서 누구와도 계약을 하면 된다. 왜? 너는 소중하니까.’ ‘자식이 되었거든 엄마 아빠 멀쩡할 때 마음껏 이용해라.’ 그걸 했던 사람이 누구냐?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에요. 자기 나라였습니다.
다윗이 보기에 사울 왕이 기름 부은 건 맞아요. 그래서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거예요. 무슨 뜻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기름 부은 왕이 두 종류가 되었어요. 하나는 사울, 하나는 다윗. 사울은 율법이 시키는 대로 다 합니다. 거기에 등장한 사람이 사무엘이에요.
사무엘은 안 속아 넘어가요. 사울 왕에 대해서. 나라가 내 것이라고 하는 것. 사무엘상 10장 1절에 보면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여호와께서 왕이 되게 하신 건 맞아요. 여기서 사무엘은 아직도 사울 왕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짜 왕을 먼저 줄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뭐 사무엘 입장에서야 하나님이 시킨 대로 그냥 기름 부어서 왕이 되게 했죠.
그런데 사무엘상 15장에 보니까 어? 서서히 사울왕이 이스라엘을 자기 나라로 만들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전쟁을 하는데 블레셋과 전쟁을 하면서 자기 노림수가, 본색이 드러났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아말렉과 전쟁을 하는데 분명히 다 죽이라고 했는데 다 죽이지 않고 여기 9절에 보면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사울 왕은 백성들도 율법을 알기 때문에 전쟁할 때 제사 드리고 한 겁니다. 사울 왕이 “내가 제사 드리고 다 했어요.” 하니까 사무엘이 성질나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22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제사법에 기름 들어가는 것은 사울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엔 노림수가 있었죠. 그래서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한 수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왕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아요?” 하면서 32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이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가로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아각, 이건 또 착각하고 있어요. 자기가 살줄 알고.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이 말은 “아각아, 네 어미 너 나올 때 굉장히 좋아했지? 이제 너희 엄마 아주 슬프게 됐다. 오늘부로 아들 없어지니까.” 하고 칼로 아각의 머리를 찍어 쪼갰다고 되어있어요.
사람 취급하는 게 아니고 완전히 우상 나무 찍듯이 사람을 찍어 쪼갭니다. “이게 왕이야, 이게. 이게 왕이라고.”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게 이게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통해 알려주는 하나님의 뜻이에요. 찍어버려요. “사람 같지도 않은 게 어디서 사람인 양 행세야, 건방지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새삼 놀랄 필요가 없어요. 왜냐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었는데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제사의 제물을 홀라당 태운다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게 지금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자체가 우리가 산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거예요.
참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까?’가 아닙니다. ‘어떻게 내가 살까?’가 아니라 기쁨에 의해서, 자기가 지금 죽게 된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자기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이게 바로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자기보고 그러는 거예요. ‘아이고, 인간도 아닌 게 사람 행세한다고 수고 많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저를 헛짓 그만하고 이제 쉬라고 아각인 나를 아주 머리를 쪼개주시네요.’ 머리가 사무엘로 인해서 쪼개졌잖아요. ‘주의 기름 부은 자가 와서 쪼개주시니 이렇게 황공스럽고 영광스러울 데가 있나.’ 이것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고백이에요. 스데반 집사가 죽음을 받을 때 기쁨으로 죽음을 받았어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하나 그거에요. ‘나 그만 살래요.’
그래서 성도가 늘 기쁘다는 말은 항상 떠날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늘 기뻐요. 기름 부음이 고향이니까. 전에는 기름 부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기름 부음이 들어온 이상은 굳이 이 땅에서 성공하며 살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총선까지 살아서 투표할 필요도 그냥 내일부로 가면 돼요. 누가 되든지 뭐.
이스라엘에 있었던 그 제물이 그다음에 다윗으로 넘어와요. 다윗으로 넘어오면서 다윗은 자기가 기름 부었다는 뜻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사무엘상 16장 3절에 사무엘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사울은 버리고 다윗을 왕 되게 한다’고 해서 뭣도 모르고 다윗은 그냥 양 치다가 걸려들어서 기름 부음을 받았어요.
받고 난 뒤에 ‘기름 부음이 뭔지를 모르겠어요. 하여튼 뭐 왕인 것 같긴 한데’ 그리고 난 뒤 17장에 보면 자기가 그냥 돌 하나 던졌는데 골리앗이 죽어요. 이렇게 희한한 일이 있어요. 다른 사람이 “야, 너 솜씨 좋다.”고 하니까 “아, 제발 오해 좀 하지 마세요. 이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죽였어요. 나는 그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 다윗이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내가 기름 부음 받은 게 아니고 내 안에 기름 부음 받은 다윗 같은 분이 내 안을 이용해서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안에 다른 분이 있어요. 나에게 기름 부은 게 아닌데 기름 부음을 따라서 내 안에 들어온 분이 있어요.
이 원리 원칙을 창세기 28장 18절에서 야곱이 이미 경험을 했습니다. 창세기 28장 16절부터 보면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라고 되어 있어요.
루프, 자동차 천장이 열리는 거, 분명히 차 살 때는 지붕이 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지붕이 날아가고 없어요. 지붕 있는 데서 하늘이 보였다, 이 말이죠. 하늘이 보이니까, 자기가 그대로 하늘나라에 노출되니까 야곱의 첫 번째 인상이 뭐냐? 무섭고 두렵다는 거예요.
무섭고 두렵지만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은 날 교체하고 대체하는 분이 나라는 몸 안에 쑥 들어왔다는 뜻으로 여기고 거기에 어떤 표시로서 기름 부음을 집어넣는 거예요. 거기다 돌 세우고 기름을 부었단 말이죠. ‘여기가 하나님의 문이다. 여기가.’
야곱은 ‘여기’라는 공간을 벧엘로 이야기 했지만 나중에는 야곱 본인이 바로 하나님의 문이었어요, 본인이. 그래서 얍복강에서 씨름하고 난 뒤에 야곱 이름이 뭐로 바뀌었느냐? 야곱은 죽고 하나님의 본 이름으로 바뀌어요. 이스라엘 이름으로. 전쟁하는 분. 전쟁하는 분이 야곱 속에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나는 죽었고’라는 표시를 ‘브니엘’로 이야기했어요. 그 지명이 브니엘. ‘나는 하나님 앞에 이미 죽었는데 내 속에 있는 분을 위하여 나를 살리고 있구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나는 죽었는데 내가 왜 죽지 않는가, 그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못 죽고 있다는 거예요. 안 죽는 게 아니고 못 죽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내가 못 죽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이 주신 그 믿음 안에서 사는 거예요. 내 믿음이 아니고 주님 믿음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내 자아가 내 발목을 더는 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다윗에 있던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십니다. “다윗 너는 피 흘려서는 안 돼. 네 아들 통해서 성전 만들래.” 아들은 없어요. 성전 만들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이 죽어야 죽은 다윗에서 나오는 아들이 성전을 세우는 겁니다.
다윗이 “나는 왕도 아니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고 나는 내 모친의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나쁜 놈이요, 살인자요, 간음자요.”라는 고백을 통해 나온 자식이 솔로몬이에요. 그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세웁니다. 열왕기상 8장 11절에 성전 완공하고 난 뒤에 전에 출애굽기에서 본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성전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줘요. 금으로 입히고 무엇도 하고 다 할 수 있는데 거기에 영광이 오고 안 오고는 인간의 손을 떠난 거예요. 그러니까 열왕기상 8장 11절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그 잘나가던 제사장이 감히 성전에 있질 못해요. 왜? 하나님의 영광이 오니까. 내가 뭐 제사하고, 내가 뭐 제사장이고, 이딴 소리가 그 진짜 현실화된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말도 못 하고 거기서 엎드려 있어요. 죽은 자 같이.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영광을 감추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광이 없다, 가 아니고 영광을 감추는 방식이 뭐냐?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썼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죄 있는 육신의 몸을 입고 옴으로써 사람에게 귀싸대기 맞을 정도로 철저하게 보안, 영광에 대한 보안이 철저했던 거예요.
하나님인데 전혀 하나님 같지도 않은 하나님, 이건 뭐 노숙자도 아니고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어요.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봤는데, 봤는데 하나님이 아니에요. 목수의 아들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보고 있으면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거예요. “나이가 몇 살인고?” 이런 소리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 나이? 아브라함이 나를 봤는데?” 그러니까 돌아버리는 거예요. 솔로몬 때 영광,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사람이 무서워서 떠는데 그 영광이 감추어진 모습으로 오니까 “농담하지 마세요. 당신 나이가 50도 안 되었는데 무슨 아브라함을 봐?”(요 8:57)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개무시 당하는 겁니다. 그 개무시 당하는 예수님에 대한 그 표현, 예술적 표현, 문학적 표현이 계속해서 인간 세속에 남아있는 거예요, 문학에, 철학에 남아있는 거예요. 그게 학교 교육에서 배우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 4대 성자? 어디 게임하는 겁니까? 4대 성자 중에 한 분이게? 세상 사람이 예수님을 무시한다고요? 교회는 무시 안 합니까? 자기가 돈 내서 세운 예배당이 더 중요하지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까? 헌금한 내 인생이 중요하지 예수님이 더 중요해요?
기름 부음, 이거는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더욱더 무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그 무서운 방식이 뭐냐? 이미 하늘나라에 천사와 같이 된 성도를 주께서는 이 땅에서 예수님과 똑같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사실이에요.
세상에서는 돈 가지고 인생을 거론하잖아요. 그런 천한 대우를 받았던 그 줄기가 히브리서 11장에 죽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주의 영광에 들어서서 주님의 기름 부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광스러운 기름 부음을 이렇게 드러냈거든요.
아벨은 제사로서 제물로서 이야기하고, 노아는 방주로 말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그네 된 삶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히브리서에 쫙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대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모세는 기꺼이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해도 그 거절한 이유를 몰라요. ‘아이구, 아까워라. 공주, 그 얼마나 좋은데. 어떻게 백성들과 광야에서 고난받기를 좋아하느냐?’ 이거는 모세가 ‘어느 쪽이 더 좋을까?’가 아니고 모세 본인은 지금 더 큰 영광 앞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 지경이에요.
히브리서 11장 36절, 37절에 쭉 나옵니다.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하면서도 내 인생 조졌다, 가 아니라 주여,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감추는 용도로 알고 그걸 영광스럽게 여겼던 사람, 이것을 신앙의 열조, 신앙의 노선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거기에 비하면요, 교인들 요새 장난치는 거죠. 이건 노는 거, 취미 생활, 노는 거예요. 하박국 3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이 부분은 약간 어렵기 때문에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요. 하박국 3장에 보면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인간 같은 인간은 없어요.
없는데, 누굴 구원하느냐? 하나님이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한다고 했어요. 하박국 3장 13절에.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먼저 구원해요. 먼저 구원하고, 기름 받은 자를 먼저 구원하면 그럼 천국 갈 사람은 예수님 달랑 한 분밖에 없잖아요? 그럴 때 고린도후서 1장 21절에 보면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먼저 예수님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구원하시고, 구원하고 난 이후에 성령 세례로 우리에게 기름 부음이 주어집니다. 기름 부음이 주어지는 것이 고린도후서 1장 21절. 그렇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스스로 변장해서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 마치 죄인처럼 살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이 땅에서 성도도 똑같은 삶으로 반복, 컨트롤 브이(ctrl+v) 복제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어요.
이미 우리는,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데도 이 땅에서는 버려진 사람처럼, 그런 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뭐 섭섭하고 아쉽습니까? 아닙니다. 성도는 섭섭하고 아쉬운 게 아니고 이렇게 주님 가신 길을 답습하고 흉내 내는 식으로 답습하게 해주신 것만 해도 무한 영광으로 여겨요. 성도라면.
요한1서 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하늘나라 주유소에서 성령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유해주는 거예요. 주께 받은 바 있으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다.
무얼 통해서? 우리가 태어난 가정환경과 교회를 통해서, 앞으로 살아가는 모든 과정, 요양병원을 통해서 하여튼 우리가 마주치는, 만나는 모든 환경을 통해서 이미 우리는 죽었고, 나는 사람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것을 성령을 주어서, 주께서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천국 백성 만드셨다는, 그걸 티를 내는 그런 삶이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오늘부로 죽지 않는 한 남아있어요.
이걸 누가 아느냐? 마귀들이 알죠. 마귀의 종들이 알아요. 기름 부음도 없으면서 교회 목사, 장로, 집사하고 교회 세우는 당회장하고 목회자 하는 사람들, 귀신같이 알아냅니다. ‘내가 너를 가르쳐야 되는데…’ 요한일서 2장 27절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되어 있는데 지가 뭔데 누가 누구를 가르쳐요?
“내가 헬라어 히브리어를 아니까 내가 가르쳐줄 게. 이리와.” “저리 가!” 성령이 친히 우리를 가르치는데 환경을 통해서 가르치지요. 물론 그런 인간과의 만남도 주님의 가르침의 일부일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내칠 필요는 없어요. 누굴 만나든, 어떤 부모를 만나든, 어떤 자식을 만나든, 어떤 가정을 만나든, 어떤 교인을 만나든 우리는 그들 속에서 이야기할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쁨으로 자기의 죽음을 대화 속에 넣으세요. 나의 죽음을 집어넣고 대화할 때 대화가 되면 같은 사람이고 안되면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아빠, 한 1억만 당겨줘. 내가 영국 가서 영어 좀 배우고 올게.” “왜 영국 가서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데? 우리 집안 사정 알면서도 네가 그렇게 호강하려고 하냐?” “아니, 나 죽으려고. 영국 구경하고 죽으려고.” 항상 마지막 끝은, 사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 끝은 뭐냐? “이 가방, 명품가방 하나 메어보고 죽으려고.”
항상 마지막에 죽으려고 할 때 그 사람 안에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는 겁니다. ‘네가 세상 부귀가 그렇게 원하느냐? 그래 네 소원대로 들어줄게. 한 달 수입 한 2천만 원 되게 해줄게. 그러나 잊지는 마라. 내가 널 죽이기 위해서 한 달 수입 2천만 원 해주고, 네 자식 판사, 검사, 의사 다 되게 해줄 테니까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일찌감치 내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생애의 최고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그동안 무슨 생각 했습니까? 하나님 이용해서 내 것 키우려고, 내 것 지키려고, 남보다 잘 되고 성공했다는 그 자랑질 하려고 교회 나왔습니까? 바로 그것이 우리가 스스로 치료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악마라는 강력한 기름 부음보다 나를 죽여서 빼내는 더 강력한 주님의 십자가의 위용, 십자가의 능력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