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생명의 연결체

아빠와 함께 2023. 12. 3. 18:31

생명의 연결체

2023년 12월 3일                본문 말씀: 디도서 3:8-9

(3: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3: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사도는 사람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의로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사람’과 ‘요모조모 따져야 구원 성사에 근접한다’는 사람들입니다. 보다 정확한 구원노선을 탐색하는 것은 ‘자기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루어내겠다는 의지 때문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인간 세계는 이미 망했습니다.

구원받겠다고 시도는 완전한 망한 현실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의를 달성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는 단순한 목표가 아니라 온전한 의를 달성하지 못하는 피조물에 대해서 공격하게 됩니다.

불의한 것에는 저주만 주어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다른 현실을 계속 감안하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이 고려하지 못한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악마입니다. 악마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이 땅에서 차단시키는데 있습니다.

차단하는 방법은 인간을 부추겨서 스스로 구원을 시도케 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은 자체적으로 인간 구원의 원칙을 수립했고 그것을 그 사회 전반에 유포시킨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단선적인 목적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외부에 놓여 있는 ‘우연함’을 고려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즉 그들의 족보와 그들의 유구한 역사에 포함되지 아니하는 사건의 다발들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그들이 자신들을 생각하는 방식은 자신이 여기 살아 있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겁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자신이 늙어 죽을 것임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제대로된 ‘죽음’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죽음은 오로지 예수님만이 아십니다. 즉 죽음이란 그냥 숨 끊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죽은 죽음’이요 ‘율법의 저주로 인하여 죽은 저주스러운 죽음’입니다. 이런 체험은 인간들로서 해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갖는 체험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죽음도 그리고 생명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살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살아 있는 자신을 계속 살려서 천국까지 들여다 보내서 영원히 살게 해보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진리라는 것은 죽을 인간이 받아 드릴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족보 논쟁이나 율법 논쟁이나 신학 논쟁을 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기 의로움과 결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장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진리가 인간 내부에 들어오면 그 인간은 제대로 죽습니다. 없어지게 합니다. 무슬람 여자들이 머리에 히잡 쓰고, 중들이 머리 깍고, 승복 입고 돌아다니고, 신부, 수녀들이 유니폼을 입는 이유는 진리가 그들 밖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을 알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겁니다.

마태복음 16:11-12에 보면,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본인들이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떡과 빵 구입이 정상적인 활동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 꼭대기에 먹지도 마시지 않고 40일 동안 있었던 그 상태가 제대로 ‘사는 상태’임을 모릅니다. 누룩이란 빵 속에서 인간들이 먹기 좋아라고 넣는 식품 첨가물입니다. 먹어야 산다고 인간들은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월절날 하나님께서는 누룩을 뺀 빵을 먹는 절기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을 얻은 날입니다.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칠 일 동안은 누룩을 너희 집에 있지 않게 하라 무릇 유교물을 먹는 타국인이든지 본국에서 난 자든지 무론하고 이스라엘 회중에서 끊쳐지리니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지니라”(출 12:18-
20)

즉 생명이란 사람들이 살기 위한 방식을 의도적으로 기피하면서 주어집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방식의 ‘산다’는 것을 도리어 진짜 생명을 가로막기 위한 악마의 술책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시험을 받습니다. 그런데 시험받으면서 예수님은 40일 주야로 굶게 됩니다.

이 와중에 악마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이것이 과연 틀린 말인가라는 식으로 묻습니다. 예수님은 답변은 이것입니다. “나 자신이 빵으로 왔다”입니다. 인간들의 방식의 빵이 아닙니다. 누룩이 들어 있는 빵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에 의해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들은 만나 먹었음에도 다 죽었습니다. 그것은 만나를 음식으로 여겼던 겁니다. 만나는 음식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음식을 찾는 것과 말씀을 찾는 그 차이에는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이 찾고 구할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이 생명 없는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비로소 생명은 출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2-33) 생명은 스스로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씨가 되어 이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악마가 장악해서, 그 어떤 경우에는 말씀의 씨가 열매를 맺는 것을 좌시하지 않고 훼방하고 방해하는 쪽으로 가동됩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에게는 피의 흔적이 생겼습니다. 성도도 또한 이러한 예수님의 체험에 동참하므로서 세상이 주는 방해공작으로 흠집이 생기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따라서 이 현실을 아는 성도는 주저없이 굳세고 당당하게 복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체험이 주님께서 고통받으신 체험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성도의 소망은 오직 하나 ‘교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자기 자신에게 승부걸지 말고 내기 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5강-디도서 3장 8-9절(생명의 연결체)231203-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3장 8-9절입니다.

디도서 3:8-9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사도 바울이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하는 것, 이 여러 것은 지난번 본문에 나왔던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이것 역시 여러 것에 포함됩니다.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 구절 역시 해당 돼요.

그다음에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이것도 여러 것에 해당 되는 겁니다. 7절에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도 여러 것에 해당됩니다.

이것을 축약하고 요약해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두 자로 이야기하면 뭐냐? ‘현실’이라고 하는 거예요, 현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사람들이 하는 것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오해하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인간은 다 배제하고 오직 주께서 하신 것만을 현실이라고 하고 우리는 그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현실을 이렇게 제대로 발견했기에 오늘 본문에 보면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굳세게 말하라, 는 말을 해요. 주저 없이, 구애받지 말고, 켕기지 말고, 담대하게, 어디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현실을 현실로 이야기하는데 네가 그렇게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사도 바울이 또 다른 현실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바로 9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렇게 토를 달았어요.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데,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고 이야기했어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 현실은 이렇게 보면 됩니다.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이것 또한 현실입니다.

자기가 얻은 구원에 대해서 요약을 하질 못하고, 그걸 담대히 굳세게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찾아가는 형식, ‘내 구원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찾아가는 식의 미 완료된 상태에서 헤매고 있는 그런 부류가 또 있다는 거예요. 3장 5절에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되지 않았다고 분명히 언급을 했는데 이걸 거부하는 거예요.

나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되지 않는다고 명시가 되어있거든요. 분명히 밝혀놓았는데 이걸 모른다는 거예요. 모르는 이유가 6절의,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요. 성령을 풍성히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는데 하나는, 성령을 받고 보니 내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굳세게 말해도 상관없다는 안정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내가 죽어서 천당 갈 수 있는지 천국 갈 수 있는지 여전히 헤매고 있는 사람, 그 두 사이를 사도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주님과 연결돼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쪽은 하나님과 연결이 되지 못한 사람이에요. 연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 믿는 사람 입장에서 우리는 애석하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애석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가 있기 때문이에요.

무슨 말인가? 사도가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는 이유, ‘나는 알았으니까 나만 알면 되지.’ 이게 아니라 상대를 알고 난 뒤에 상대와 나 사이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해요. 예를 들면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할 때 우리는 일단 하마스 입장이 되어보는 겁니다. 땅 없이 70년 동안 헤매고 있는, 유리하고 있는, 자기 땅인데 쫓겨간 하마스의 심정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팔레스타인 거주민들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들 거주민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해서 그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우리는 이렇게 잘못한 것이 없고 그냥 소박하게 내 땅에서 농작물 재배하며 사는데 왜 이스라엘은 날 공격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해요. “나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 지금 잘살고 있는데, 원래 우리 땅인데 왜 이스라엘은 자기가 뭔데 외부에서 와서 나가라고 하느냐, 너무 억울하다.” 그런 심정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우리를 왜 공격하는지 이유를 따져야 합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불교는 미신이다’ 할 것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불도 집안에서 커서 아주 불도가 심한, 그래서 불교만이 진리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의 입장으로 돌아와야 돼요. 돌아와서 ‘왜 기독교는 불교를 엉터리 종교라고 하는지’ 그런 질문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해요.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리석다고 단서를 붙였지만 사실은 어느 인간이고 자기의 행함으로 자기의 구원을 얻겠다는데 이게 뭐가 잘못이에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점점 늙어가면서, 병들어가면서 희망 없다는 건 다 아는 거고, 죽어서 인간은 어떻게 될지 그게 잔뜩 궁금하거든요.

궁금하면서 ‘이 땅과 하늘나라의 뭔가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그건 선한 거고 의로운 것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 착하게 살면 백 프로는 모르겠지만 아마 천국 가고, 이 땅에서 해롭게 하고 사기 치고 못되게 굴면 분명 나중에 지옥 가서 염라대왕 앞에서 벌 받는다.’라는 그런 마음이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인정해줘야 해요.

그러니까 이 땅에 살며 그냥 보내지 않고 착한 일 바른 일 해서 그것이 누적이 되면 죽어서 심사받을 때 “천국 쪽으로 가라, 착하게 살았으니까. 남한테 배려하고 많이 도와줬으니 내가 보상해 줄게.”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그렇게 생각을 철두철미하게 마음을 먹으면서 그다음에 이렇게 질문을 해야 해요. “왜 사도는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가?” 그렇게 되어야 돼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니까 성경 아무리 보고 교회 다녀도 소용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단서를 붙이면서 뒤에 지옥 가는 사람들이 어떤 유형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거든요. 거기에 대해 질문을 우리가 했다고 칩시다. 왜 바르게 살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이나, 세종대왕이 착한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사람들, 독립투사들, 자기 몸 바치고 목숨 바쳐 나라 구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왜 복음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가야되는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질문을 해야 합니다.

질문을 할 때 비로소 창세기 2장, 3장부터 시작이 돼요. 인간이 사는 이 현실의 모습은 망한 모습이에요. 망했던 거예요. 창세기 2장,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음으로써 망한 겁니다. 벌써부터 망한 거예요,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착한지 의로운지를 따지지 않아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그냥 망한 모습이에요.

망한 이유가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거예요. 성경에 의하면, 의를 이룰 수 없어요. 그럼 의를 이룰 수는 없지만 최선의 노력을 하면 되지 않느냐? 내가 최선의 노력을 할 권한도 없어요. 의를 이루지 못하면 의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그 공격의 첫걸음이 추방이었습니다, 낙원에서 추방.

여러분이 온전한 의를 이룰 수 있습니까? ‘없지만 최선을 다하면 되지.’ 최선을 다하는 게 통하지를 않는다니까요? 그냥 추방하는 거예요. ‘그럼 추방 한 번 당하지, 뭐.’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추방의 끝은 흙이 되는 거예요. 죽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이 죽는 이유가 밝혀지죠. ‘그럼 난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죽으면 내가 없죠. 죽으면 흙이 되기 때문에.

살아있는 아담이, 아담 자체가 흙이 되는 아담으로 된다는 말은 주님께서 처음에 살아있다는 아담에다 나중에 흙이 되는 아담을 엎어버려요. 엎으면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죽어가는 아담이 되고, 죽어가고 있는 아담은 곧 ‘아담이 없다’가 돼요. 있으면 곧 없어질 거예요. 저나 여러분이나 다 없어질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건 이거에요. 없어지는데 왜 살아있는 척을 하느냐고 성경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보고 닦달 내고 있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 쪽에서 이야기하면 “너 없잖아? 개코도 없는 게 왜 바르게 살아? 그냥 없어지세요!” 그거 요구하는 거예요.

“착하게 살겠습니다. 주의 복음 전하겠습니다.” “복음 전하지 말고 그냥 없어지라니까!” 없어지면 돼요. 그게 하나님의 조치를 수긍, 그냥 받아들이는 겁니다. “애 셋이나 키웠습니다.” “키우지 말고 없어지라니까, 애 셋 키운 거 말고.”

그러면 여기 뒤에 나오는 어리석은 자의 논란, 족보, 변론, 왜 이런 논란이 일어나냐면 인간이 자기 의로움과 결별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있다. 기왕 있는 거 의롭게 있고 싶다. 어떻게 하는가? 이성적으로 따지면 된다. 따질 땐 성경의 말씀을 정리해서 지식을 확보하면 나는 천국 갈 수 있다.’ 그런 아이디어.

그 지식을 왜 알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내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 또 틀리죠.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걸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지옥과 천국 가운데서 의로운 자만이 천국에 가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노력을 해야겠다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성도의 특징은 주님과 연결되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 문제이기 때문에 자기가 단독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도 내 손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노력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이걸 어렵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단선적인 목적성은 인간의 외부에 놓여있는 사건의 고유성에서 나오는 겁니다.

단선적, 선이 하나밖에 없는 내 인생이라는 것은 실은 단선적인 내 외부에 놓여있는 사건이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그 외부에 있는 것을 파악을 하려면, 외부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외부에는 역사라는 게 없어요. 역사가 없어 보이는 그 사건들의 다발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사건을 중심으로 내 역사를 만들어 버렸어요. 그 역사를 어떻게 질서 있게, 어떻게 순서 있게 짜 맞추느냐? 이게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이에요.

인간은 자꾸 단선적인걸, 또는 역사를, 족보 이야기를 제대로 꾸려야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받는다는 그 생각이 있는 거예요. 신학 체제를 제대로 잡아야,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되어야 하나님이 인정한다는 거예요. 누가 그런 구라를 쳐요? 교회가 그렇게 하잖아요. 그걸 해놔야 이단에 속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거 누굴 위한 논쟁이죠? 주님의 연결은, 나와 연결될 때 그 연결되시는 분은 이렇게 너와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우연적 존재예요. 역사 속에 포함되지 않은 우연적 인물이 예수님이에요. 인간들이 하도 자기들이 살아있는 척을 하니까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의 살아있는 척에 밀려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사람들은 예수를 죽여놓고 죽였다고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개념도 몰라요. 인간이 죽었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사흘 만에 살게 함으로써 네가 이해하고 있는 죽었다는 개념은 그게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의 경험만이 진짜 죽음이지, 우리는 죽어도 죽음을 모르게 되어있어요.

인간이 뭐 아는 게 있어요? 죽음이 뭔지도 몰라요. 숨 끊어지는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흙이 되어가는 것이고 처음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흙이었던 거예요. 인간은 산 적이 없었던 겁니다. 하루라도 살아본 적이 없어요. 그냥 죽음의 현상이죠.

죽음이라는 것은 부활하신 분이 경험한 것이 죽음이에요. 그럴 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숨 끊어져서, 목숨이 끊어져서 죽는 게 아니고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개념이 규정돼요. 죄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로 죽는다는 죽음은 예수님만 알고 있어요. 인간은 몰라요. 나이 들어 죽는 줄 알아요.

그래서 보람상조만 찾고 있는 겁니다. 가시는 길 고이 보내드리겠대요. 어디로 가는데 고이 보내요? 어디로 가는데요? 인간은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심판 날 다 소환된다고, 호출된다고요,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동안 우리가 같은 인간한테 엉터리로 들은 거예요. 잘못 배운 겁니다, 전부다. 같이 죽어가는 인간들에게 교육받은 거예요. 양육 받은 거예요. 성경을 그냥 폼으로 본 겁니다.

‘이러한 족보 이야기와 분쟁, 율법의 다툼,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이런 걸 안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것을 안 하는 사람이 없어요. 왜냐면,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율법에 관한 논쟁, 그 논쟁을 파헤치면 그 원조가 바로 이스라엘이고 유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어요. 예수님이 누구한테 죽었느냐? 인류를 대표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 그들을 만나서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겁니다.

그들이 인류를 대표한다는 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 내부의 의식은, 내가 의로워야 죽어서도 안심이 된다는 기본적인 심보, 이 심보를 바리새인들이 대변해 주고 있었던 겁니다. 바리새인들에게 그런 자신감이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모세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를 봐주어서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그 속내를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게 율법이다. 따라서 율법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뜻으로 줬다. 지키자.’ 이게 바리새인들의 일관된 의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율법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자신이 살아있고 본인들이 질서 잡혔다는 것, 필연적 존재라는 그런 취지에서 율법을 파악하다 보니 자신이 율법을 지킴으로서 더욱더 구원받는데 확실성이 생긴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사실 율법은 도리어 인간들을 우연적 존재의 가능성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었어요.

율법을 통해서 내가 그냥 우연적, 출몰된 존재, 그냥 없어도 되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냥 출몰했다는 의식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기를 메인으로 본 거예요. 메인 존재, 확실한 주도권이 있는 존재로 자기 자아를 만든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실은 우연한 것에 불과하다, 거기에 의미 두지 말아라.” ‘왜 태어났지?’ 몰라야 되는 존재예요. “왜 살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야고보서 4장의 말씀처럼 하나의 안개 같은 차가운 이슬 같은 존재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면 우연은 어떻게 파악하느냐? 우연은 더 큰 우연이 와서 통제해야 되죠. 더 큰 우연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사람이 자기를 꼭 필요로 한 존재로 간주한다면 인간에겐 모든 일상이 게임입니다. 게임은 피곤해요. 왜? 승패가 나야 하니까. 내 인생이 잘 살았는지, 내 인생이 잘 못 살았는지, 매일 자기와 내기하는 인생, 아,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는 거예요. 자기를 상대로 내기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매일 속삭입니다. ‘두고 봐라.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크게 성공하는지 두고 봐.’ 허세 떨고, 허풍 떨고,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타인에게 증명할 거야.’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보다 의롭지 않은 죄진 아주 인간을 개무시한 자들이 누구냐?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이 무시하는 창녀, 그들이 무시하는 세리를 들먹이죠. 너희들보다 이 창기와 세리가 먼저 하늘나라 간다고요. 그들을 말씀으로 자극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고 실제로 부활함으로써 뭔가 세상이 잘못되어 있고 뒤집혀 있다는 어떤 감을 받으셔야 돼요. 지금 나에 대해서 나의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감을 잡아야 해요.

이미 뭔가 망해버린 세계가 아니냐는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이건 노력해도 안 돼요. 개선이 안 된다니까요. 애쓴다고 내 인생이 구원받은 인생이 되지 않아요. 애초부터 안 된단 말이죠. 하나님의 의의 수준을 우리가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요구를 우리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주께서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율법에 보면 ‘한 푼이라도 갚지 못하면 그 인간을 지옥에 보낸다’고 되어있어요. 얼마나 율법이라는 것이 압력감을 주는지요. 단 하나라도 어기면 전체를 다 어기는 게 되니까요.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어요?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감당 못 하죠.

그러니까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무슨 일을 행하는지 주목하시라 이 말입니다. 내가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주목하지 마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무슨 일을 벌이셨는지를 보라는 말이죠.

마가복음 8장 15절에 주께서 이런 일을 벌이셨습니다. 8장 15절에서 21절까지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여기 누룩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제자들이 알아듣질 못합니다. 제자들도 우리와 똑같아요. 못 알아들어요. ‘누룩을 주의하라?’ 그러니까 제자들이 서로 수군수군대면서 “주님 우리에게 떡이 없는데요?” 제자들의 생각은 이거에요. “너희들에게 빵이 있잖아. 빵이 있는데 거기서 누룩 빼고 먹어라.”라고 제자들은 그렇게 이해한 거예요.

제자들이 하는 말이 “빵이라도 있어야 빼고 자시고 하죠. 빵조차 없질 않습니까?”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답답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17절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아예 노골적으로 지적합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너희들은 지금 내가 너희에게 빵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느냐, 누룩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느냐를 묻는 거예요.

분명히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는데 제자들은 ‘누룩은 어디 안에 있다? 빵 속에 있다. 아, 누룩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빵 이야기를 하는 거구나.’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그것을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12절에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처음부터 바리새인의 교훈과 그 말씀을 삼가라고 하면 되는데 왜 누룩 이야기를 해서 빵을 연상하도록 그렇게 했을까요? 사람들은 빵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살 수가 없어요. 사람은 일단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기니까 살아있으니까 계속 살아있어야 하죠.

그게 자기 일상의 할 일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사람들은 빵을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인간이 원하는 빵을 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들이 얻는 빵에는 반드시 그 안에 바리새인의 누룩이 들어있어요. 여러분들도 지금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은데, 제자들과 똑같은 것 같은데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출애굽기 12장 20절에 보면 주님께서 히브리, 이스라엘 사람에게 애굽에서 나오면서 생명을 줄 때 조건이 있었어요. 네가 이날을 지키는데 이 절기를 지킬 때, 12장 20절에 “너희는 아무 유교물이든지 먹지 말고 너희 모든 유하는 곳에서 무교병을 먹을찌니라.”

유교병과 무교병의 차이가 뭐냐? 누룩, 빵집에서 파는 사람이 먹기 좋게 푹신푹신 맛있는 빵 거기에 이스트가 들어가 있거든요. 발효 물질이 들어가 있는 거죠. 그게 누룩이에요. 네가 인간이 얻을 수 없는 진짜 생명을 얻었던 그 날에 너는 인간이 먹는 누룩이 들어있는 빵을 먹지 말라는 거예요. 일주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라. 일주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는다고 해서 무교병(無酵餠), 교(酵)가 없는, 무교절(無酵節)이라고 하는 거예요. 유월절은 하루고 그다음 날부터 8일 동안 무교절이에요. 무교절을 지키는 겁니다.

누룩이 없는 빵 먹는 것, 그거하고 생명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관련을 또 지어야 해요. 왜냐면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부터 이야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부터 줄곧 이어져 왔고, 예수님은 바로 구약에서 했던 그 모든 것을 성취하는 입장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야곱이 예언을 한 대목이 창세기 끝에 보면 나오죠. 신명기 끝에는 모세의 유언, 창세기 끝에는 야곱의 유언. 그런데 그게 유언이 아니고 예언입니다. 성경에서는 축복으로 되어있는데 예언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의 이 현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이 말이에요. 인간의 모든 일상이라는 현실은 현재 말씀으로 꽉 차 있어요, 말씀으로.

성도가 할 일은, 그 일상에 꽉 차 흐르고 있는 사건의 다발과 결합되어 있는 그 말씀을 발견하고 찾아내는 거예요.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성도는. 그게 압축이 된 것이 성경인데 그 압축 된 중에 압축된 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거든요. 그 행하신 일 가운데서 이 무교병, 빵, 인간은 어떻게 사는지와 관련해 나오는 말씀이 마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예요.

그 시험 받을 때 야, 이거 중요한데, 시험받을 때 인간이 아닌 존재가 등장해요. 인간의 현실 속에 속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들은 말합니다. “우리들은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우리가 인간 세계에서 빼자.” 이게 인간의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광야에 있을 때 인간들이 빼버린 존재가 등장해요. 그게 악마예요. 악마가 그동안 인간을 격려해 왔던 겁니다. 인간들을 부추겼던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내가 살아있다는 이것이 악마가 준 유혹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가 엄연히 살아있다, 찌르면 아프다, 이게 악마가 준 유혹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어요. ‘아프니까 살아있다. 죽은 자는 고통이 없지만 아프니까 분명히 죽지 않았고 그러니까 살아있는 거 맞잖아. 나는 이게 옳다고 생각한다.’ 이게 마귀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요.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과 맞닥뜨렸습니다. 그때 악마가 예수님에게 제일 먼저 질문한 것이 모든 인간들의 속에서 원하는 것을 질문했어요. “예수 당신도 다른 인간들과 다를바 없어. 똑같잖아.”라는 식의 질문이 뭐냐? 예수님이 지금 40일 동안 굶고 있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 보세요. 지금 아무것도 안 마시고 안 먹고 있어요.

아무것도 안 마시고 안 먹고 있다는 것은 인간들 생각에 인간 본성에 위배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못하죠. 모세가 시내산에서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먹지도 않았어요. 그게 하나님이 가장 원하는 인간다움이에요. 왜?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먹지 않아도 모세는 영생과 함께 있었잖아요. 그게 사는 거잖아요. 영생을 가지고 사는 거라고 한다, 이 말이죠. 그게 우연적인 거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언제부터 먹고 살아야 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래서 제가 울산 강의에서 칠판에 크게 썼어요. “돈이 자존심”이라고. 돈 없어 보세요. 자존심도 없어지죠. 돈이 자존심이에요. 이건 마땅하고 당연하다고 다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파도 돈이 없으면 고치지 못하니까요.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악마가 예수님에게 이야기합니다. 마귀가 하는 말이 “이 돌덩이가 떡이 되게 하라.”라고 이야기했어요. 이 돌덩이가 떡덩이가 되게 하라. “너도 뭘 먹어야 기도도 할 게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럴 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곧 떡인데? 내가 곧 빵인데?” 예수님 자신이 빵이에요. 내가 빵이라는 거예요.

산다, 안 산다는 것은 악마 밑의 인간들의 관심사고 주님은 내가 빵이라는 거예요. 내가 떡이라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6장 46절-51절에 나옵니다. 조금 길더라도 제가 다 읽겠습니다. 너무 중요해서요.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 하고 난 뒤에 네가 왜 나를 찾았나, 하니 “떡 주셨잖아요. 기적적으로 떡 주신 분은 모세 이후 당신이 처음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주었듯이 당신이 우리에게 떡을 주었습니다.” 모세처럼 우리는 당신을 존중할 마음 준비가 되어있다는 거예요. 왜? 우리를 살려주시니까.

그럴 때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준 만나 먹었는데 살았어, 죽었어?”를 묻는 거예요. “모세가 준 만나 먹어도 죽었잖아.”라는 겁니다. 왜 그들은 만나가 너희들이 원하는 떡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말이죠. 만나의 뜻은 뭐냐 하면, 만나의 뜻은 죽으라고 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떡이라는 개념과 내가 원한 떡이라는 개념의 그 차이가 죽음을 야기한 거예요, 죽음을.

주의 모든 말씀은 왜 우리가 죽어 마땅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죽어가는데 살려달라고 준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는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새삼 죽이는 게 아니고 죽일 자를 죽였다고 확인 사살하는 거예요.

이 바리새인들은요, 율법을 통해서 진리를 알고 그 진리가 우리를 살린다고 생각하는데 진리는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우리 속에서 우리를 죽여 버려요. 그게 진리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나를 없애줘야 진리다워요. 마가복음 7장 26절에, 정말 예수님도 칭찬했지만, 놀라운 믿음이 나옵니다.

7장 26절에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25절에 보면 예수님이 두로 어느 지경에 가는데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 엎드리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여자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냐면 ‘내 딸이 귀신들린 것도 주님의 뜻입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 딸이 귀신들린 것도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편입된 일입니다. 주께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라고 받아들인 거예요. 수로보니게 여인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테스트를 해요. “나는 개한테 복음 전하러 온 것이 아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개한테 온 것이 아니라 하니 여자가 하는 말이 “내가 개입니다. 주인이 있는 개입니다. 주인이 있는 개이기 때문에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그걸 먹고 사는 개, 그 연결, 그 연결이 저의 전부입니다.”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주인이고 나는 주님이 개가 되든 소가 되든 연결 되었다는 것, 이것은 나를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나 고유의 나 자신을 잃어버린 거예요. 주님과 한 몸통이 된 겁니다.

이게 영생이에요. 주님이 떡이고 떡의 확장이, 떡의 열매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과 한번 비교해 보세요. 그들은 단선적인 자기 조건을 따져요. 율법이 어떤 율법이 옳은지, 그리고 신학논쟁, 어떤 것이 정통적인 신학인가, 이렇게 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이야기하지만 진리를 바깥에 세워놔요. 진리가 안에 들어오지를 않았어요.

진리가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종교적인 틈새를 자기 몸에 장착한 사람이에요. 대표적인 것이 중들. 머리 왜 깎습니까? 진리가 안 들어왔으니 머리 깎는 거예요. 승복을 왜 입어요? 진리가 안 들었으니까 티 낸다고 승복 입는 거예요. 신부들, 로만 칼라, 수녀들, 머리에 뒤집어쓰는 것, 이슬람 여자들, 인도네시아인 여자들 머리에 뒤집어쓰는 것, 왜 뒤집어씁니까? 천주교인들 집에 가면 마리아상 놓고 그 앞에서 졸면서 묵주 돌리는 것, 왜 돌립니까?

진리가 안 들어오니까 그래요. 진리가 안 들어오니까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는 거예요. 내 쪽에서 뭘 하면 나는 구원받느냐, 이것만 줄곧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사도 바울은 두 종류의 인간을 생각합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나의 어떤 의로운 행함으로도 내가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과, 그리고 성령이 없으니까 내 쪽에서 최선을 노력을 다 해야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내 쪽에서 뭘 하게 되면요, 주춤대요. 주춤거린다고요. 주춤거리면 오늘 디도서 본문 3장 8절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고 하는데 굳세게 말하지를 못해요. 제가 설교시간에 개인적인 이름을 거론해서 죄송합니다만, 이만도 장로님 기도하실 때 굳세게 말할 경우의 모델이 된 것 같아요. 아, 이거 공개적으로 하면 시험드는데요.

차분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다 이야기합니다. 어떤 주춤거림이 없어요. 본인이 속마음은 알 수가 없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춤거림 없이 굳세게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이런 것을 일체 다 잘라내고, ‘비평하려면 비평해라’ 이런 식으로요. 아, ‘너는 듣기나 해’ 이런 식이지요. 그런 자신감.

모르지요. 제가 듣기는 그렇게 들었다 그 말이지요. 그런 분이 또 있어요. 울산모임 하러 가면 차 태워주시는 권사님입니다. 제가 너무나 고마워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권사님한테는 칭찬도 모자란다 했어요. 왜냐하면 할 소리를 여과 없이 다 해버리니까 얼마나 그게 보기 좋은지요. 지난 수요일에 설교했던 본문 스가랴 8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장차 예루살렘 성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동남과 동녀, 어린애죠, 어린애 남자와 어린애 여자가 같이 놀면서 장난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성도한테는 인생이 그냥 놀이에요. 진지할 필요가 없어요, 진지할 필요가 없다고요. 그냥 장난치는 거예요, 인생이. 주눅 들 필요가 없다니까요. 게임을 할 필요 없어요. 내기나 승패가 없어요. 뭐 장난치는 데 무슨 승패가 있어요? 장난치는데. 그냥 놀이인데요. 인생 자체가 놀이인데.

그게 바로 성령이 주는 자유 아닙니까? 이거 하면 죄일까요, 이거 하면 죄 아닐까요, 그걸 따진다는 자체가 이게 뭔가 율법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거예요, 율법 논쟁. “목사님, 이게 죄일까요, 아니면 이게 죄일까요?” 그걸 왜 따집니까? 그거 따져서 바르게 산다고 구원받습니까? 왜 살아있는 척을 하시고 왜 의로운 척을 하셔요? 다 죽었는데. 척을 하려면 차라리 죽은 척이나 하시지.

이 땅에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자 말고 불신자 만들기 위해서인 거예요. 말씀은 우리를 불신자로 돌려버려요. 불신자 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이 보입니다. 신자가 되면 신자인 내가 보여요.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무슨 생각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 정말 심오한 게 있어요. 내가 보기에 작사한 사람이 심오하지는 않아요.

<긴 머리 소녀>라는 그 노래에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이런 가사가 나와요. 이 가사가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긴 머리 소녀. 단발머리 나가 주세요. 긴 머리 소녀에 해당됩니다.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가락이 막 나오려 한다 지금. 왜 우리는 그렇게 못살아요? 뭐가 그렇게 주눅 들었습니까? 좋은 아버지, 좋은 엄마, 좋은 자식, 아이고 그래서 지옥이나 가세요.

사도 바울이 사는 데는 필연적 세상이 이 땅이 아니고 하늘나라에요. 고린도후서 12장 1, 2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어디에 사는가? 셋째 하늘에 살고 있다는 거예요, 셋째 하늘에. 아, 셋째 하늘에 사는 사람이 남에게 이야기할 때 굳세게 말하지 뭐가 켕겨서 벌벌 떨면서 이야기하겠어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생명 덩어리로 만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첫 번째 타자예요.

고린도후서 12장 1, 2절에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셋째 하늘, 이게 필연적 현실에 없는 주께서 이야기하는 다른 현실의 셋째 하늘 이야기입니다. 그곳이 여러분의 자리이기를 바랍니다. 그 셋째 하늘이, 지금 여러분이 앉아있는 의자 말고 셋째 하늘에 앉으시기 바랍니다. 앉아있는 것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여러분 자신이 어떻게 행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주님의 생명의 몸통이 되면 돼요. 열매가 되면 된다고요.

그 권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서경수 목사님하고 저를 울산역에서 태워서 강의하는 교회까지 이동시켜 주는데요. “우리 아들이 두 분 목사님 말씀 전하는 데 편하게 해드리라고 차를……” 그래서 ‘아, 내가 이건 감당하기가 곤란한데? 차까지? 이걸 내가 어떻게 거절해야 되지? 거절하는 척만 하고 이걸 받는 수도 있을 것인데.’ 몇 초간 이런저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두 분 목사님을 위해서 차 뒷좌석에 열선을 넣어드렸습니다.”

아, 열선, 차가 아니고 차 뒷좌석의 열선, 열선. 아, 정말 그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시는 권사님의 자유가 부럽다 정말. 열선, 차가 아니고 열선, 엉덩이 뜨듯하게 가시라고. 권사님이 얼마나 겸손한지 나는 모든 게 기억이 안 나고, 모든 것을 못한대요. 왜? 어렸을 때 연탄가스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렇대요. 그 이야기 듣고 칭찬 안 할 수가 없지요, 제가.

굳세게 이야기하라고 굳세게. 거침없이 굳세게. 거침없이 하이킥이 아니고 굳세게 이야기하세요. 이렇게 하면 내가 남한테 해코지가 되고 이렇게 하면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고 천국 가는데 손상이 되고, 이런 계산을 전혀 하지 않는 것, 이게 동남동녀, 인생 자체가 그냥 놀이에요, 놀이, 인생 자체가. 게임이 아니고 그냥 놀이에요. 승부가 없는 거예요. 왜? 자기 인생이라는 게 없으니까. 관리해야 될 내 인생이 없어졌으니까.

주님께서는 그 ‘한 통’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씨뿌리는 비유로 이야기했어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유명한 씨뿌리는 비유. 그 씨뿌리는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현실은 주께서 우연적으로, 필연이 아니고 우연적으로 뿌려대는 출몰하는 우연한 씨의 등장이 현실세계를 만들어낸다. 이게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인간은 씨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씨가 주어지면 이 세상에 예수님 말고 다른, 예수님처럼 이 땅에 속하지 않는 존재가 등장해요. 마귀에요. 마귀가 와서 뭘 노리느냐 하면 그 씨만 노려요. 씨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악마가 아니까. 악마는 그동안 인간에게 ‘네가 먹어야 산다. 빵이 중요하다.’ 그런 식으로 했잖아요. 그래야 네가 단독적인, 개별적인 네 존재가 계속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고 악마는 이야기했다 그 말이지요.

우리가 아는 상식처럼 내가 스스로 나한테 매일같이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가 이미 마귀로부터 주어진 이야기에요. 안 망해야 된다는 거예요. 창세기에서는 이미 망했는데 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걸 누가 격려하는가? 마귀가 격려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원천으로 가요. 씨가 알아서 열매 맺는다. 그 이야기가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그러면 왜 열매를 못 맺는가? 마귀가 가만두지를 않아요. 이 세상의 시스템이 있는데, 체제가 있는데 그 체제는 뭐냐? 말씀을 솎아내서 말씀이 열매를 못 맺게 한다는 일념으로 뭉쳐져 있는 시스템이 현재 인간들의 사회에요. 복음을 지워버리고 없애는 체제로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그런 에너지가, 악마적 에너지가 활동하는 데가 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교회고.

너는 이렇게 믿고,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 이게 교회잖아요. 그게 마귀의 소리예요. 나라는 게 없다면 뭐가 있느냐? 그 씨의 30배, 60배, 백배의 열매가 있지요. 열매에요, 열매. 씨와 연결된 열매라니까요. 씨가 자생적으로 만들어 낸 열매에 해당돼요. 우리는 예수님의 열매라니까요.

그래서 주께서 이런 말씀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2절 씨뿌리는 이야기하면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여기서 이 대목에서 어려운 것은 뭐냐? 없는데 어떻게 있는 것을 빼앗을 거리가 있느냐 하는 그 문장이에요. 없는데 그 있는 것을 빼앗기리라. 없는데 왜 있는 것이 생겼지? 이상하잖아요.

없다는 말은 말씀이 없는 것, 말씀이 없는데도 내가 살아있다, 그 ‘살아있다’가 있는 그것은 빼앗기리라. 없음을 없음으로 내가 활짝 다 들춰내 줄 테니까. 주께서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만, 예수님의 몸통만 있어요. 우리는 그 지체고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거울에 비추이는 우리의 모습은 뭐냐?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 와서 긁어내지는, 이 악마가 만든 세상이 긁어내서 생긴 스크래치, 그 흠집난 흔적, 그 흔적이 오늘날 성도입니다.

예수님에게 그 십자가의 흔적이 있듯이 성도에게도 그 십자가의 흔적이 있는 거예요. 그들은 족보를 자랑하고, 역사를 자랑하고, 논쟁을 좋아하고, 율법이 뭐냐를 따지면서 계속 주님의 성령이 자생적으로 만들어 낸 성도를 스크래치, 그들의 존재에 흠집을 내고 구박을 하고 핍박을 해 왔던 거예요. 그들은 못 알아먹으니까.

불신자가 ‘자기에게 몸이 있다’ 하고 주장하는 그것은 하나의 미끼였습니다. 유인책이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주께서 빼앗아버리지요. 그리고 새로운 저주의 몸으로 그들을 부활시킵니다. 지옥 갈 몸으로. 흙으로 바꿔놓고 지옥 갈 몸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바꿔줍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피가 있는데 그 피가 뭐냐? 세상이 주님을 긁어버린 흔적입니다.

그 피가 그 찢겨진 살이 곧 우리에게 생명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뭐냐? 생명의 흔적이에요. 성도 자체가 생명의 흔적이고 성도를 건드리면 주님을 건드린 게 돼요. 심판을 받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처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

이 세상의 흔적은 전부 다 자기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흔적이지요. 어떤 노래에 보면 사랑은 이별의 흔적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가사가 너무 구구절절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흔적>

【이제는 가도 되는 건 가요
어두워지는 거리로
오늘만은 왠지 당신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내가 만든 과거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절반의 책임마저 당신은 모르겠지요
지나간 날을 추억이라면…】

그다음의 가사를 보세요.

【…당신이 미소지을 때
기억해요 슬픈 여자 마음에
상처뿐인 흔적을】

당신이 미소 지을 때 ‘에이, 그건 그냥 추억이잖아.’라고 쿨하게 미소지을 때 ‘당신 똑바로 기억하세요. 당신에게 당했던 이 슬픈 여자의 마음에 상처뿐인 흔적을’ 최유나가 불렀던 <흔적>이라는 노래에요, 이 노래가. 이 세상은 인간의 자기를 위한 흔적만 챙기고 살아가기에 우리는 자꾸 따지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하루하루 주시는 그것, 주께서 생명의 통으로, 내일은 없어요, 내일은 보장 못 합니다, 하루하루 예수님이 당했던 체험, 내 체험과 예수님의 체험을 교체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소망은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의 체험으로 교체되는 것, 그래서 신나게 남은 생애를 놀이하면서 사는 것, 그 자유를 마귀한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어떻게 살았는지 말씀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누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막았는지, 누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막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로 우리 자신이 복음을 막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그것마저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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