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을 밝히는 절차
2023년 12월 10일 본문 말씀: 3:10-11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3: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인간은 애초부터 이단입니다. 오류를 잔뜩 담은 채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 누구도 정상인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들의 이런 본색이 티를 내는 경우가 바로 예수님과의 마주침입니다.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요 10:20) 즉 예수님을 현지에서 본 사람들의 대체는 예수님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동시에 인간의 본심이 예수님에 의해서 들통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본심이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을 연구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궁금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의 덕을 보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들은 이단 아닌게 되면 진찌 예수님만 여전히 이단 취급 당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변신된 예수님’을 두고서 서로들 믿고 있는 형편입니다. 참된 예수님께서는 전체 인간 모두 다 비정상인 것을 고발하시는데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 말고 그들이 이해하는 가짜 예수를 신봉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참된 이단 규명에도 인간들은 실패합니다. 사도 바울도 전에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단이었던 존재였는데 예수님 만나고 이단에 대해 참된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단이었던 시절과 이단에서 벗어나 경우를 둘 다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단의 등장을 예수님 일에 있어 필연적이고 필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 5:16에서,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류 전체를 한꺼번에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한 인물인 아담을 내세워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정죄할 기준으로 삼으십니다.
이는 개인적인 여망이나 희망이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즉 인간들은 자기만의 소박하고 끝까지 쥐고 싶은 ‘쪼가리 행복’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양보해도 기어이 쥘 수 있는 극히 작은 행복이 자신이 계속 살 힘을 실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사적이고 개인적인 발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전체를 심판하십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개인이 자기 인생이 힘겹다고 불평하지만 그 어느 인생살이도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의 무게는 무겁습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노아 홍수가 바로 인류 전체를 보는 하나님의 견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약속’과는 달리 일하십니다. “내가 심판한다. 그 봐 심판했잖아”가 아니라 “내가 심판한다. 그 봐 너희들이 예상 못한 새로움이 그 심판 속에서 나오잖아”입니다. 노아 홍수 심판 이유에, 노아 가족만큼은 멀쩡한 인물이라고 짐작들을 하게 되지만 이는 오해입니다.
노아 가족 중에서 새로이 저주받을 자가 노선을 형성하면서 나옵니다. 즉 언약적 심판이란 하나님의 저주마저 ‘인간의 행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내세운 ‘언약의 결과’임을 드러내십니다. 인간은 천국의 의지도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지옥갈 의지도 그 인간을 지옥으로 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이점이 더욱 인간들을 화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반발하기를, “그래 나 정죄받았다. 그래 나 지옥간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내 의지로 지옥에 들어갈거야. 말리지 마!”라는 객기가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는 안 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과 지옥 가는 운명도 그 사람의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 개인에게 맡겨졌다는 말입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전체가 저주받고 정죄받은 겁니다. 이는 예수님 한 개인의 등장으로 인류 전체의 성격을 규명하시지 위함입니다. ■언약은 어떤 결과를 내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일을 도로 하나님 품으로 회수하기 위함입니다. 귀신들렸다는 예수님의 평가가 그대로 특정 인간 내부에 밀고 들어오게 되면 그 인간은 자신의 이단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이단인지 아닌지를 자기 판단에 의해서 결정내리라고 짐작한 그 인간은 예수님의 갑작스런 밀고 들어오심으로 인하여 자신이 졸지에 예수님을 가해한 ‘가해자’ 처지에 있을 알게 됩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26:13-15) 즉 애초부터 예수님은 모든 인간으로 인한 피해자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자기 내부에 구멍을 뚫린 겁니다. 진실은 인간을 자기로부터 끊어내게 합니다. 나하만 장군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었지만 그가 문둥병자 되엇을 때에 이스라엘은 어린 소녀로부터 간청을 받게 됩니다. 적의 나라 선지자 엘리사에게 치료받으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한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왕 다윗도 내부에 구멍 뚫린 자입니다. 남의 아내와 간음했고 그 남편인 우리아 장군을 고의가 아닌 것처럼 여기는 살인으로 살해하고 맙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윗의 후손에 예수님입니다. ‘구멍의 후손’이 메시야입니다. 이처럼 언약에는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 차별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처럼 이단 소리를 듣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남아 있는 진흙 덩어리는 떨어내는 남은 삶을 모든 성도에게 허락하십니다. 성도는 더는 자기 일에 자신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자기 목표도 없고 다 주님의 목표입니다.
자기 시간이 없고 다 주님의 시간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나는 ‘이미 죽은 자’ 됩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3:8-9에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자신에게 송사를 하고 답사를 해야 합니다. 자기와의 늘 이별하는 즐거움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액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6강-디도서 3장 10-11절(이단을 밝히는 절차)231210-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3장 10-11절입니다.
디도서 3:10-11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오늘 본문에 ‘이단’이라는 단어 나옵니다. 이단이라는 단어를 누가 이야기하느냐? 이단이었던 자가 이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이단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께서 이단인 것과 이단이 아닌 것, 그 차이를 동시에 확실하게 다 보여주는 그러한 생애를 산 사람이에요.
사도 바울이 이단이었던 시절과 이단이 아니었던 시절, 둘 다를 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당시 유대 사회 속에 예수님이 유대인으로서, 다윗의 혈통으로서 태어났잖아요. 그 사회 속에 무엇이 확정되어 있느냐 하면, 이것은 이단이고 이것은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 그 사회 속에 이미 무르익어 있어요. 그게 인간들이 보는 관점에서의 이단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단이 뭔지 따로 규정되어 있는 그 체제 속에 들어오셔서 어던 평가를 받았는가? 예수님은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인생 가운데서 이단인 것과 이단이 아닌 것을 구분한 것처럼 그 원조, 원천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단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이단이 무엇입니까? 이단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궁금해하게 되는데요, 궁금해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그 시대에 이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다 알아야 해요. ‘예수님이 과연 이단인가?’ 하는 그 점과 그리고 ‘그 당시에 사람들이 어떤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단으로 규정했던가?’ 그 시대에의 규정,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해요. 우리는 이 시대의 규정 속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열심히 예수 믿는데 실은 우리 보기에 이단 아닌 예수님이라고 여기며 믿고 있고 진짜 예수님은 우리가 이단시해서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걸 파악을 해줘야 해요. 내가 예수님을 평가하든, 하나님을 평가하든, 타인을 평가하든 간에 내 기준은 옳다고 여기는 경향, 이게 사실은 예수님 보기에 이단적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로 볼 때 인류는 출생부터가 이단으로 출생했고 인간은 전체가 오류로 가득한 채 이 땅에 출생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정상적인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다 비정상입니다. 비정상끼리의 인간이 모여 예수님을 향해 “당신 이단이지? 당신 귀신들렸지?” 하고 규정할 때 우리는 그냥 경솔하게 그 사람이 예수님을 몰라서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게 아니라 현재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이단 규정을 내리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파악해줘야 해요.
마태복음 9장 3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기적을 베푸는데 그건 귀신이 하는 짓이라고 당시의 바리새인들,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게 평가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9절에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많은 사람이에요. 이건 소수 의견이 아니고 대다수의 의견이 “예수의 말은 믿지 마라.” “왜? 귀신 들렸다. 미쳤다. 과대망상증 환자다. 그러니 저 말을 듣지 마라.” 대세의 평판이 그래요.
이걸 보고 여러분 느낌이 어떻습니까? 그들은 예수를 몰라도 너무 몰라서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오해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런 평판이 오늘날 교회의 주류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예수 이야기 듣지 말고 교회 부흥 이야기 듣자, 라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주류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왜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할 수밖에 없는지, 사실은 그들이 더 솔직해요. 오늘날 교인들은 비겁해요. 그들은 너무나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권세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에 물론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지만, 말씀 듣기 위해서, 예수님을 연구하고 예수님이 누군가를 알기 위해 교회 나가는 게 아니에요. 오늘날 교회들은 하나님에게 행운 얻기 위해 힘을 얻기 위해 교회 나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에요.
덕 좀 보자는 그거 외에는 없어요.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테니 나에게 덕 좀 입혀 주세요.’ 내 인생 이렇게 꼬였는데 확 좀 다리미 질 하듯이 쫙 펴지게 해 달라, 이런 관점으로 교회가 유지되고 운영되는 겁니다. 교회는 사람이 듣고 싶은 것을 해줘야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당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자 취급받듯이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놓고 자기들끼리 모여 주장하는 것이 “우리 교회는 이단 안 받습니다. 신천지 교인들은 우리 교회 출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신천지가 누군데요? 이단이 신천지면 본인들은 구천지예요.
구천지나 신천지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 천지, 유토피아를 지향한다는 거예요. 인간의 이단의 특징은 마지막 남은 행복의 쪼가리를 기어이 포기하지 못한다는 가한다는 그것이 이단들의 공통점이에요. 그들이 정죄함을 받고서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밀어붙이는 힘, 에너지가 뭐냐?
아무리 불행해도 마지막 남은 내 행복의 쪼가리만큼은 놓지 못하겠다는 그게 바로 이단이에요. 행복, 유토피아 얻기 위해서, 죽어서 좋은 나라 가기 위해 교회 왔다면 그들에게는 진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상상한 그분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것 따로 있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한 것이 따로 있는데 그것이 매치 되면, 만나면 된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적이 없습니다. 항상 어긋맞게 되어 있어요. 비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은 전체를 다 보기 때문에 그래요. 전체를 다 보면서 그동안 구약 때 주어졌던 사건이 심판 사건입니다. 특히 전면적인 심판 사건부터 쫙 깔아놓고 시작했어요. 그게 노아 홍수였어요. 노아 홍수로 인하여 어떤 인간도 마지막 행복의 쪼가리마저 가질 어떤 고난도 이 세상엔 가질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거예요.
망가진 내 인생을 가지고 나와서 “이것 양보하고 저거 양보하고 다 양보해도 주님 이것만큼은 제가 도저히 포기를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님께서 해줄 수 있는 말씀은 “노아 홍수를 네가 아느냐? 싹쓸이한 노아 홍수에 대해 네가 알아?”
주님께서 자꾸 어떤 일을 벌일 때는 그 안에 전체가 다 담겨 있어요. 우리는 일부라고 생각하는데 일부가 아니고 일부라고 여기는 그 안에 전체가 다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죽어 마땅하다. 태어난 자체가 오류로 태어났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성경에는 함축적으로 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6절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 이유는 한 사람을 정죄하는 거예요. 정죄라는 말은 심판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심판한다, 또는 고발한다, 고발하는 의미에서 심판을 했는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니” 그 정죄에 이른 한 사람이 누구냐? 아담이거든요. 아담을 확장 시킵니다.
확장 시켜 버리면 아담에게 있었던 그 정죄함이…, 아담 안에서, 안이에요, 아담 밖으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의 항아리 속에 있다면 아담이 거기서 계속 새끼를 까고 새끼를 까는 거예요. 항아리 속에 쥐가 있다면 쥐 두 마리가 계속 새끼를 까서 항아리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나중에 항아리가 완전히 물로 불로 다 심판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일을 벌이실 때 정죄함을 받는 한 사람을 이 땅에 확장, 번식시켜 버려요, 빈대가 번식하듯이.
그러면 그 사람은 비록 태어나 죽었지만 정죄함은, 정죄 받을 만한 그런 요소는 세상 끝까지 계속해서 확대되고 확장되는 거예요. 이게 인류 전체의 모습입니다. 한 사람을 정죄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정죄당하지 않을 위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거예요.
로마서 5장 16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했고 그다음 17절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는 말은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인생을 살아가려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살아봤자 위에서 누르는 하나님 저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에요.
바르게 살면 복 주시겠습니까, 교회 나가면 하나님께서 행운을 주시겠습니까, 백날 발악에 발악을 해도 하나님의 이 저주의 무게, 심판의 무게에서 탈피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이게 현실입니다. 종교, 교리, 이런 게 아니에요. 사상, 철학, 아닙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교독문에 나왔듯이, 빌립보서 4장에 나온 말씀처럼, 기도를 할 때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면, 감사할 거리만 그냥 기도하면 된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내 인생이라는 것이 꼬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인생은 아무것도 어떤 노력을 해도 회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기도에요. “지금보다 더 나아진다는, 호전된다는 희망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 앞에서는, 이미 정죄함 앞에서는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걸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감사가 어디 있어요? 내게 일어나고 벌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감사할 일밖에 없는데 그 일이 뭐냐? 나의 일을 주의 일이 뭉개고 있다는 이 현재성을 감지하고 있으니까 감사한 거예요. 그럼 이단은 뭐냐? 이단은 이거예요. 나에게 내 것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내게 내 것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이단의 모습은 내 것을 끝까지 사수하고 지키는 거예요. 행복의 조그마한 쪼가리라도 그게 내 행복이기 때문에 설사 내가 지옥을 간다 할지라도 이건 양보를 못 합니다, 하는 게 있어요. 그 조그마한 쪼가리의 행복을 위해 미친 듯이 자기 자신을 지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꾸민 쇼에요, 쇼. 조작극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계속 다니시며 전했어요. 특히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전체를 한꺼번에 이야기를 해요. 항상 주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은 전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한꺼번에, 전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래요. “나는 빛이고 너는 어둠이다.” 끝났어요. 끝났습니다. 나는 빛이고 너는 어둠이라는 거예요.
요한복음 12장 35, 3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다시 말해서 너희는 어둡다는 거예요. 내가 빠지면 너희는 어둠이라는 거예요, 내가 빠지면.
처음부터 너희는 어둠이었고 빛이 잠시 왔다가 빠져나가는 거예요. 처음부터 어둠이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하는 모든 사고방식, 생각, 모든 열심, 노력, 투지, 그건 어둠의 표상, 표현들이에요. 어둠의 표출, 안에 있는 어둠이 표출되는 겁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이든지 어둠을 위해 일했어요. 어둠의 세력, 악마의 권세를 위해 악마의 하수인으로서 철저하게 농락당해 온 겁니다. 그리고 빠져나갈 재간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는 게 있어요. 자아도취적인 증상인데, 물 위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너무 미남이라고 생각해서 물결에 어른거리는 자기 얼굴에 반해 물속에 빠진 사람이 있어요. 우리 중에는 그런 수준만큼 될 사람이 없어 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나는 빛이고 너는 어둠’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이해했느냐?
복음이라는 물결에 자기를 비춰온 거예요. 그러나 그 복음은 자기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자꾸 저쪽이, 복음 쪽이 흔들린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물결이 바람이 일면 흔들리듯이. 거울이 안정돼야 비추는데 거울 자체가 흔들려 버리면 안정된 자기의 모습이 비치지 않으니까 그냥 단편적인, 파편적인 이미지만, 요소만 자꾸 떠오르죠.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복음 들어라. 복음 믿어라.”가 아니라 복음 속으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복음 속으로. 이건 ‘내 죽음 속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에요. 당연히 제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죠.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게 그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있는 데서 어미가 아들 둘 잘 봐 달라고 예수님께 힘쓰러 왔죠. 아들 한 명은 예수님 좌편에 한 명은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어요. 22,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쓴 잔, 주님이 마시는 잔이에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마시는 쓴 잔 말고 주님 개인, 주님 단독으로 마셨던 그 잔을 마시는 자, 마시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인류 전체를 전체로 규정해 놓고 그중에 특이하게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 하나의 개인을 앞장세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일을 벌이시는 거예요.
그런 주님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다가서면 안 돼요. 우리는 전체의 일부로서 다가서야 해요. 전체의 일부로서 다가선다는 말은 뭐냐? “내가 워낙 이단이라서, 이단인지 이단 아닌지도 구분 못 하는 오류가 발생 되는 그런 저입니다.” 하고 주님 앞에 나와야죠.
예수님을 이단으로 여긴다는 말에 악마가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인간들이 진짜 예수님을 이단으로 여겼으니까, 귀신들린 자로 여겼으니까 마귀는 인간 앞에 멀쩡한 광명의 천사로 등장하면 이건 목회 그냥 먹히죠. 교회 부흥? 그냥 되는 거예요. “네 소원이 무엇이냐?”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망가진 인생 나에게 오라. 내가 빨리 회복시켜 주리라.” 이게 회복 신앙 아닙니까? 통일교가 이거 해서 먹혀 들어간 거예요. 통일교 신앙은 회복입니다. 아무리 과거에 어려웠더라도 하나님 믿으면 회복된다는 거예요. 신천지도 구천지도 전부 다 한통속이에요, 한통속.
쥐가 가난한 집에 살아도 쥐고요, ‘이 동네 못 살겠다. 신천지나 한번 가볼까?’ 신천지 가도 그게 쥐예요. 쥐가 어딜 가도 쥐지 종교 바꾸고 교회 바꾼다고 쥐가 쥐 아닌 게 아니잖아요. 본래 우리가 죄의 종이었습니다. 로마서 6장 17절에 나와요. 그 점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거예요.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하여튼 사도는 말을 해도요, 항상 전체를 두고 이야기해요. “저는요?” 하는 이런 질문이 안 나오도록 전체를 다 이야기해요. “저랑 저 사람 중에 누가 나아요?” 이런 소리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전체 판을 다 깔고 이야기합니다.
노아 홍수에 의해 모든 인간은 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심판을 받는데 ‘주께서 심판해서 너희가 다 죽었다.’가 아니라 심판할 때 뭐로 심판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노아 언약, 언약이 정답인데 언약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약속으로 바꿀 수도 있는데요. 약속으로 바꾸면 언약적 요소가 또 없어져요. 그냥 언약으로 쓰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그들은 물의 심판을 받았어요.
자, 언약과 약속의 차이점을 보세요.
약속은 하나님이 뭘 해준다, 하는 거예요. 뭘 해준다. 이게 약속이에요.
언약은, 하나님이 뭘 하시면서 하나님이 기대한 목표와 결과를 그 심판 속에서 새롭게 끄집어내는 게 언약이에요. 심판 약속은 “심판하겠다. 다 죽여 버려라.” 이것은 심판의 약속이고 언약은 심판을 함으로써 거기 없었던 구원이 나오게 하는 게 언약입니다. 여러분, 그 차이점을 감안하시겠지요?
심판은 심판으로 끝나는데, 그게 약속인데, 언약을 하게 되면 ‘어? 심판받았는데 왜 구원받지? 내가 지옥 가야 하는데 왜 천국에 가지? 아, 이건 약속 때문이 아니라 언약 때문이구나.’ 언약이라는 건 우리 좋으라고 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회수용으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던진 약속, 언약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나님을 위해 끄집어내는 거예요.
따라서 나 좋아라고 하는 언약도 없고, 약속도 없고, 하나님은 나 좋아라고 하는 것을 일체 준 적이 없습니다. 왜? 나는 전체에 포함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내가 받는 특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노아 홍수에 의해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거기서 특이 사항이 벌어져요.
노아 가족 여덟 식구가 심판에서 방주 때문에 겨우 살았잖아요. 살았으면 우리 생각에는 아마 그들이 다 복 받을 거라고 여겼을 거예요. 그러나 창세기 9장에 보면 어? 노아 가족 가운데서 뭐가 나오는가? 거기서 생각도 못 한, 도저히 예상치도 못했던 저주의 노선이 나와요.
창세기 9장 25절에 보면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저주가 나온다고요. 심판을 행함으로써 내가 왜 심판을 행했는지, 그 하나님의 정당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저주받는 자가 나와요. 이게 인간의 분노를 격발한 겁니다. 자극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들은 자존감이 있어서 “하나님, 저하고 같이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들어보고 내가 믿을 만 하면 믿고 구원받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에 내 기분이 상한다든지 내가 기분이 나쁘면 하나님 지시마저 어겨버린 대단한 존재로서 나는 과감하게 지옥 가겠습니다.” 이게 인간 쪽의 주장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권한마저 인간에게 주지 않아요.
내가 너를 심판하는 것은 네가 원한다고 저주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도적으로 저주받게 하기 위해서 너를 택했다는 것, 이게 사람을 화딱지 나게 만들어 버려요. 내가 교회 안 나오는 건, 복음 듣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내게 속했다, 그런 자유만큼은 나에게 있다, 라고 마지막에 지옥 가더라도 나는 내 의지로 지옥 갔다는 이야기를 내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으니 더 독이 올라버린 거예요. 완전히 돌아 버린 거예요.
여러분, 누가복음 16장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 아실 거예요. 거지 나사로는 낙원 가고 부자는 지옥 간 이야기. 거기 보면 부자가 호화롭게 날마다 파티를 열었다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부자라고 칩시다. 매일같이 파티를 한 번 열어보세요. 여러분 할 수 있습니까? 굉장히 피곤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어지간한 사람은 지옥 못 가요. 힘들어서 못 가요. 지옥 가는게 얼마나…, 이건 갈만한 사람이 가야 되지요. 지옥 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지옥가는 생활이. 여러분 부자 한번 해 볼래요? 부자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부자 안 되어 봤으니 뭘 아나! 지옥 아무나 가는 게 아니에요. 무척 힘들어요.
우리가 이 세상의 분위기에 잘못 속아 넘어가면 안 돼요. 지옥 가는 것이 자기가 가고 싶어 가는 게 아닙니다. 지옥 갈 수 있는 자유마저 주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는 이 소식이 가뜩이나 예수님을 싫어하는데 더욱더 우리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내 의지로 천국 가든지 지옥 가든지 결정하겠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단입니다, 이단. 이단의 특징, 그 사람들은 약속을 운운하지 언약을 운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이단이에요. 여러분들의 결정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 확정된다는 것, 이게 이단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이단이었던 시절과 이단 아니었던 시절 그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었던 그 하나님의 절차를 몰라요. 예수님이 이단 소리 들어가며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사실, 귀신들렸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 그걸 모르는 사람이에요. 심성이 깨끗한 내가 판단해 보고 예수님을 믿을 만하면 믿는다, 이게 바로 이단인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전체적으로 이단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원을 만들어 내는가? 외부적인 이단적 요소를 이단이면서 이단인 줄 모르는 우리 내부에 밀어 넣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런 주님 같으면 저 못 믿겠습니다.’라고 버틸 때 ‘구원받는 건 네 뜻대로가 아니야. 내 뜻이야.’ 하고 이런 예수 같으면 내가 못 받아들입니다, 할 때 그런 예수님을 우리 안에 쏙 집어넣는 거예요. 그때부터 주님의 시간이 내 시간을 접수하고 점령해버리는 겁니다. 주님의 목표가 내 목표를 뭉개버리는 거예요. 주의 일이 내 일을 뭉개버리는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된 거죠. 나는 죽은 자가 된 겁니다.
하도 세상이 이단 천지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부터 이야기해 십자가로 가셨잖아요.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그 방식을 그대로 남은 이 세상에다가 사용하십니다. 그게 사도 바울의 편지 같은 곳에 보면 줄줄이 나옵니다. 산상설교가 율법적 요소거든요. 율법적 요소를 줌으로써 어떤 인간도 그 앞에 할 말이 없게 만들어 버려요.
로마서 1장에 27절부터 32절까지 굉장히 깁니다. 이 시간을 아까워하는 제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6장 9, 10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여러분 들어보니 어때요? 대단한 율법적 요소 아닙니까? 갈라디아서 5장 17-21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술취함과, 이 대목 두 번 읽었습니다,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죠.
디모데후서 3장 1-5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전체를 율법으로 도배를 해놨어요, 전부 다, 이 세상 전체를. 항상 성경은 전체를 이야기하니까 어떤 인간도 못 빠져나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하늘나라 물 건너갔어요. 빠져나올 수 없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전체를. 어떤 인간도 나 구원 달라고 요청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려요.
그러고 난 뒤에 개인이 찾아와요. 예수님이라는 개인이 찾아와요. 개인이 찾아오는데 그 예수님이 뭘 가지고 나오느냐? 쓴 잔을 가지고 나와요. 주님의 일은 아주 치밀하게, 침착하게, 절차대로, 순서대로 일합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를 하는데 이 기도를 하실 때도 마찬가지예요. 율법적이에요.
예수님이 기도하는데 대표 제자 3명은 저쪽에서 자고 있습니다. 기도 노선에서 탈선했어요. 기도하지 않고 자고 있었어요. 예수님만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이 뭐냐?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세 번 기도했어요. 그리고 “이 잔을 내가 마시겠나이다.” 이 잔을 내가 마시겠나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고 있는 제자들과의 차별화를 이룬 겁니다. 이 차별화가 우리 속에 들어와요, 우리 속에. 그러면 우리 속에는, 율법에 의하면 정죄당해야 마땅한데 그 정죄 당해 마땅함과 차별화된 새로운 쓴 잔, 그 두 개가 우리 안에서 만나게 돼요. 쓴 잔과 그리고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나, 이 둘이 내 안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 겁니다.
만나면서 거기서 뭐가 이루어지는가? 언약이 이루어지죠. 주님의 일관된 밀어붙임의 일이 어떻게 어둡기 짝이 없는 속까지 들어오셨습니까? 내 속까지. 주님께서 바깥에서 얼쩡거리지 않으시고 속까지 들어와서 인간이 율법 아래 저주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그리고 주님이 흘리신 그 피, 쓴 잔, 그 쓴 잔을 통해서 거기서 무엇이 구현되는가?
로마서 8장에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아무도 너를 정죄할 수 없다는 주님 자기만의 고유한 목표를 달성해 버린 겁니다. 우리를 사용하셔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게 복음 아닙니까? 로마서 8장 34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여기서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라고 하시면서 그 근거가 뭐냐? 다시 살아나신 분이 누구다? 다시 살아나신 분은 그리스도 예수 개인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신 거예요, 개인이. 그럼 우리 전체는 뭐냐? 전체는 죽은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죽으라는 말이 아니고, 죽은 것을 죽은 것으로 확인하는 작업으로 율법을 주신 거예요. 성경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내 것을 지켜요? 내 쪼가리 행복을 지킨다고요? 그거 미친 거 아니에요? 지금 어느 동네에 와서 엉뚱한 짓을 하고, 엉뚱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동네가 달라요, 동네가. 예수님 혼자 죽으시고 혼자 부활하신 동네에요. 나를 살리는 동네가 아닙니다. 주께서 죽으시고 주님 혼자 우리를 살린 거예요.
우리가 살고자 하는 것은 떨어내야 할 진흙 덩어리로 이것은 떨어내야 되지요. 사도 바울의 소원이 그거예요. 빨리 이 진흙 덩어리가 털려 나가는 것 이것이 자기 소원이었어요. 자기 육신이 자꾸 귀찮게 하거든요. 주님 혼자 살아났다는데 자꾸 우리는 뭐냐? 내 기분 따라서 내가 살아난다고 하는 거예요.
진실은, 진리는 우리가 나에게서 끊어져 나가는 게 진실이에요. 해봐야 그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거예요.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에 보면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이라는 유명한 남녀 배우가 나옵니다. 거기에 ‘진실의 입’이라는 게 나와요. 둘이 ‘진실의 입’ 앞에 올 때까지 그냥 대충 사귀었어요. 간 보고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그랬어요.
그레고리 펙은 그 영화에서 기자로 나오고 오드리 헵번은 영국의 앤 공주로 나오는 거고요. 그 둘이 ‘진실의 입’ 앞까지 왔는데 거기서 그레고리 펙이 이야기를 해요. “여기서 거짓을 행하는 자는 손목이 잘립니다.” 그래놓고는 자기 손을 그 입에 스윽 집어넣어요. 그 순간 “어……어?”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드리 헵번이 “빨리 손을 빼세요” 해서 얼른 꺼냈는데 손이 끊어져 버렸어요. 바바리코트에 손을 싹 집어넣어 놓고 손이 끊어진 것같이 한 거예요. 오드리 헵번 얼굴이 하얘져서 ‘진짜 손이 끊어졌나?’ 하는데 순간 바바리코트 소매 속에 손을 숨겼다는 것을 알아챈 거지요.
내 진심을 폭로시키는 민망한 상황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오드리 헵번이 달려드는데 그레고리 펙이 그걸 살짝 피하는 순간에 껴안게 되는 장면이 있어요. 확 덤비는데 살짝 옆으로 비키는 듯이 하면서 안아 버리지요. 진실이라는 것, 율법은 그거예요. 진실하지 않으면 끊어지는 거예요. 이 세상 전체가 진실의 입이에요. 우리는 율법이라는 이 성경 말씀, 진실 앞에서 그래도 마지막 남은 행복을 찾고 있다고요.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입입니다. 이 입속에 들어갔을 때는 우리보고 끊어내라고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자신을 끊어내는 거예요. 자, 어떻게 하면 이걸 끊어낼 수 있느냐?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는 어떤 아저씨가 가게를 비추는 CCTV를 보고 있어요. 그걸 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는 거예요.
초등학생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애가 돈을 훔쳐간다든지 그것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고, 또 돈도 안 내고 물건 가지고 도망가는 그것 때문에도 아니라 돈을 집어넣어야 할 그 통에다 종이를 구겨서 집어넣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단이라 하는 것은 쓴잔만 들어가야 될 그 자리, 그게 교회거든요, 쓴잔만 들어가야 할 그 자리에 인간의 행함을 꾸겨서 거기에 집어넣는 거예요. 이게 이단이에요. 신천지, 구천지 다 마찬가지예요.
“내가 어떻게 믿으면 됩니까, 어떻게 행하면 됩니까, 어떻게 살면 됩니까?”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뭘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어떻게 믿으면 되겠습니까?” 그 질문 자체를 다음으로 바꿔야 돼요. 뭐냐? “주님의 적이 누구입니까? 누가 복음을 방해합니까? 누가 주님의 죽으심의 가해자입니까?”
질문을 그렇게 바꿔서 하는 사람이 있어요. 사도행전 26장에 나옵니다. 13부터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예수님 자신이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올 때는 주님은 피해자의 모습으로 들어와요. 졸지에 우리는 가해자가 되는 겁니다. 그냥 예수가 아니고, 예수 믿고 새삼스럽게 나쁜 짓을 해서 예수님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시작부터가 우리는 가해자로서 피해자를 만나는 거예요.
그럴 때 여기서 가해자가 뭘 해줘요? 할 게 없어요. 주께서는 아예 자기를 피해자로 간주하고 피해자 입장에서,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피해자 입장에서 들어오기 때문에 가해자가 “심심한 사의(謝意)를 표합니다.” 이딴 소리가 아무 의미가 없다니까요. 앞으로 잘할게요, 가 소용없어요. 내 존재 자체가 가해자예요. 존재 자체가 나는 주님 앞에서 가해자입니다. 이걸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누가 알겠어요?
그렇다면 계속해서 이 관계를 주님께서는 멈추지 않으니까 계속 유지합니다. 주님은 계속 피해자로서 우리는 계속 가해자로서 남은 인생을 살게 만들지요. 살게 만드는데 그 결과는 언약적 결과기 때문에 내게 정죄함이 없느니라.
그러면 이러한 경우로 주께서 계속 일을 할 때 어떻게 하느냐? 요한복음 8장 10절에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라고 해서… 주님의 정죄라는 것은 심판이거든요. 하나님의 고발입니다.
하나님의 고발과 하나님의 정죄, 예수님부터 먼저 당해버렸으니까,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라고 먼저 당했으니까 이 어두움의 세계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계속 살게 하시면서 주님께서 겪었던 것, 이단 아닌 분이 이단으로 취급받는 그 경험, 체험을 성도로 하여금 계속 하게 만들어요. 죽을 때까지 계속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계속 정죄가 날라오게 하는 거예요. 정죄가 날아오면서 성도는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정죄가 날아오는데 주님은 “네가 정죄함이 없다”고 해요. 한쪽은 “네가 죄 있다”고 이야기하고 주님은 “너는 죄 없다”고 하고 그 둘의 경험을 다 공유하는 것, 이게 사도 바울이 경험한 이단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게 남아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남들이 나보고 정죄하는 것, 그런 것은 도망가고, 피하고, 기도원에 가서 숨고 그러면 되는데 문제는 내가 나를 정죄한다는 거예요. 이 육신이, 이 남은 육신이 나를 정죄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그럴 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보내버려요.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더 이상 나의 일에 내가 끼어들지 않게 만들어요. 되어지는 모든 결과에 대해서 내가 끼어들어서 생긴 결과가 아니게 만들어 버려요. 그렇게 되면 나는 뭐냐 하면, 나는 주님 앞에서 계속 죽은 자로, 이미 죽은 자로 확인되는 겁니다. 계속 죽은 자로. 몸은 살아 있지만 내가 내 일에 끼어들 권한 자체가 없으니까요.
<나폴레옹>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거기서 마지막 전쟁이 ‘워털루 전쟁’이에요. 그 영화가 두 시간 반 정도 하는데 그 대미를 뭘로 장식하느냐? 나폴레옹이 쓴 모자, 군만두 비슷한 게 있어요. 나폴레옹이 전쟁할 때 그 모자를 쓰고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키도 자그마한 사람이 그 모자를 쓰고 폼을 잡곤 하잖아요.
그런데 워털루 전쟁에서 저격수가 쏜 총알에 그 모자에 구멍이 나요. 영웅의 몰락이에요. 구멍 난 모자 쓰고 내빼는 나폴레옹. 아프리카 서쪽의 먼 섬에 가서 6년 동안 있다가 홀로 죽습니다. 미쳐서 죽지요. 영웅의 몰락이에요. 구멍 난 영웅.
그게 주님께서 그렇게 말 안 듣는 나, 자아에 구멍을 내버리는 겁니다. 구멍 난 그 예가 구약에 나오는데 그게 구멍 난 나아만 장군, 그리고 대표적인 사람이 구멍 난 다윗. 밧세바와 간음했고 그 남편을 살해한 다윗, 주님은 그 구멍으로부터의 후손이에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분이에요. 그 구멍이 실재화 된 것, 우리가 감추고 싶은 구멍이 하나의 인물로 등장한 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나에 의한 피해자, 우리 마음속의 구멍이에요. 근사해 보이고 거창해 보이고 훌륭해 보이고 남들 앞에 대단해 보이는 내 안에 십자가라는 구멍을 뚫어놓고 그 구멍 속에서 주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그 언약이 차별화예요. 특별히 너에게만 ‘사랑한다’는 차별됨, 그 차별함이 복음의 내용이기 때문에 지옥 가는 사람들은 그 차별을 견디지 못합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내가 구원받을 게’ 이렇게 주장합니다. 그 구멍 낼 때 오는 총알이 뭐냐?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그 총알이 오면, 그 사랑이 오면, 13장 8절에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방언도 구멍 내 버리고, 지식도 구멍 내 버리고, 예언도 구멍 내 버리고, 뻥! 뻥! 뻥! 다 구멍을 내버려요.
왜? 지식과 예언하는 너 자체가 살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사랑은 나를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리지요. 그러면 내가 죽은 자가 되면 언약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냐? 나의 위치는 주님의 액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테두리 치는 하나의 액자로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느 장소에 살든 거기에 걸리게 됩니다. “보라! 그림만 보지 말고 둘러친 액자도 좀 봐줘. 내가 강도야. 내가 세리고.”
주님께서 내 안에 구멍을 내버리고 구멍 낸 그 속에 주님의 쓴 잔, 십자가를 거기에 걸어놓습니다. 결국 성도는 뭐냐? 위치에요, 위치. 실체가 아니고 위치입니다. 진짜 실체는 우리 안에 주님밖에 없고,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밖에 없고 나는, 성도는 그 테두리에 지나지 않아요.
그 이야기가 골로새서 1장에 나옵니다. 12, 13절에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우리 중에서 액자가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는 것,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전체가 아니고 단 한 분, 한 분이에요. 우리 모든 인간이 죄인 된 것은 아담 단 한 사람 때문이라면 이제 마지막 전체를 볼 때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정죄함이 없는 것은 오직 예수님 단 한 분 때문이에요, 한 분.
포기할 수 없는 나와 포기할 수 없는 주님과 같이 결합이 되어서 나를 구멍을 뚫어버리고 포기할 수 없는 내 자리에 주님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의 일의 목표이고 주의 시간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 있어요.
【빛 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송사,
답사는,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군이 되겠습니다】
윤석중 작사, 정순철 곡이에요. <빛나는 졸업장>이라는 노래에요. 사도행전에 보면 이걸 그대로 20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지금 좋아 죽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죽여주신 주님이 좋아 죽어요. 이제 남아 있는 이 육신까지 털어버릴 날이 곧 온다는 거예요. 가기 전에 답사를 하는데 이런 답사를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입니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29절에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올 것이다.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은. 왜? 그래야 언약이 이루어지니까. 우리도 그랬으니까, 우리 시대에 흉악한 이리가 있으니까. 그 흉악한 이리, 바로 내가 흉악한 이리였으니까요. 십자가로 구멍 뚫려서 그렇지 우리가 흉악한 이리였어요. 마지막 행복 쪼가리 그거 포기 못 하고 교회 온 사람들이에요.
사나 죽으나 오직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사랑에 내가 죽었다는 그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냥 최후의 기쁨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상상도 못 한 현실, 겹쳐진 현실을 저희들이 알아보았습니다. 나만을 위해서 살면서 안 그런 척하면서 주님한테 같이 영광 돌린다고 우겼던 그 허세와 위선과 거짓과 오류와 비정상적인 것, 고칠 수는 없습니다만 비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적으로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