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과 후
2023년 11월 19일 본문 말씀: 디도서 3:3-4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3: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인간들에게 있어 전과 후로 나누는 것은 전에 자신이 가졌던 야심을 후에 완성시킬 의도를 보이는 겁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초의 전이란 출생 당시 상태를 말합니다. 그때부터 이미 인간은 자기 사랑에 결핍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주변 부모들이 아이에게 잘 해봤자 이상스럽게도 아이에게는 만족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일방적으로 자신이 전부요 자신이 절대자입니다. 자신은 무조건적으로 존중받아야 되고 사랑받아야 된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타고난 본능입니다. 따라서 어린 시절이 지나고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가면, 인간은 누구나 사회 질서 힘에 다소 기가 죽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기를 “나도 사람답게 산다”고 여깁니다.
즉 인간에게 있어 전/후란 그 기준이 자신이 사회인으로 적합하도록 질서 잡힌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내부에는 여전히 자기 절대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상태를 두고 ‘속은 자오 가증스러운 자’라고 규정내립니다.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변신과 위선을 갖출 뿐입니다.
인간 세계 전체에 대해서 악하고 가증스럽게 속은 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성립됩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등장한 그 세계에 자진해서 넘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등장한 바로 ‘후(後)’ 상태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전(前)의 상태에서는 인간은 자기 발전을 도모합니다. 교회와서 말씀을 지키므로서 자신이 보다 향상된 존재로 전환되려고 합니다. 반면에 후(後)상태에서는 인간의 변화는 없고 오로지 예수님의 변화만 있습니다. 성도는 이 예수님의 자체적인 변화의 효과를 받게 될 뿐입니다. 전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말씀 지킨 자’가 되지만 후 상태에서는 ‘말씀 자체를 위한 나’가 될 뿐입니다.
전 상태에서는 인간이 자신에 대한 반응만 보일 뿐입니다. 자기 몸에 암 세포가 발견되면, 의사는 이렇게 환자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암세포를 제거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후 상태에서는 “당신의 몸에서 주님의 암세포를 제거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즉 성도의 몸을 아무리 살펴도 성도 본인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심장이든 쓸개든 간이든 다 주님의 것들 뿐입니다. 전의 상태에서는 자신을 살리려 합니다. 하지만 후의 상태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살리려 합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상황에서 구원이란 어린양의 죽음을 건지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어린양의 죽음에 합류된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10번 씩으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하나님의 처방은 이것입니다. “그냥 죽어!”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존재 안에 어린양의 죽음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는 이스라엘이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것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의미는 어린양 되시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주님 자체의 변화, 즉 어린양이 예수님 자신으로 전환되기 위한 활동성을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의 활동성입니다. ‘인간의 이름’도 그런 식으로 작용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존재한다고 우깁니다. 이것은 잘못 생각한 겁니다.
인간은 그저 조금씩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한결같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영원히 한결같이 있는 존재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뿐입니다. 진정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죽음 이후’도 없습니다. 진정한 죽음 이후는 예수님의 자신의 죽음 후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의 이름’을 끌어당겨서 내용이 채워집니다.
세례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례란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과 함께 심판 속으로 죽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바다 속을 통과하듯이 건너 왔습니다. 이럴 때, 그들만 홍해, 곧 죽음의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같이 죽음의 바다를 건너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의 이름으로 내 이름이 심판을 받는 겁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옛것과 새것은 모두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 이렇게 해서 인간의 의도와 방침으로 전의 세계에서 후의 세계로 넘어올 수 없음이 확실합니다.
자기 발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마땅한 자신이 이미 사라지는 식으로 이 세상에서 남은 여생을 보낼 뿐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는 전(前) 세계 전체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말해주십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여기에 나오는 이 ‘어두움’의 구체적 모습은 에베소서 5:14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즉 전의 세계는 모조리 꿈 속 세계며 망상의 세계에 속한다는 겁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들을 깨울까요?
에베소서 5:13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한방에서 침을 환자에게 놓아줍니다. 환자는 겉으로 육신이 멀쩡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침을 놓으니 책망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 알려집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책망은 일종의 인간의 몸에 침을 놓는 행위같은 겁니다.
이렇게 노출된 전(前) 상태로 인하여 빛은 더욱 빛답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말씀만이 진정 살아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런 일은 사람이 해내지 못합니다. 성령님께서 하시게 됩니다. 전 상태에서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므로서 얻어내고자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선물 저장창고를 만들어놓고 주의 이름으로 얻고자 가면 그 선물을 퍼갈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성령님께서는 자기 사람은 말씀에 입각해서 죽이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에 순종해 죽으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후 상태에 속하는 귀한 존재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게 하신 존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제대로 가증한 자요 속고 살아온 자임을 기쁨으로 자각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3강-디도서 3장 3-4절(전과 후)231119-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3장 3-4절입니다.
디도서 3:3-4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 자신을 향하여 스스로 가증스러운 존재다, 가증스럽다 할 때 이 자기의 평가에 대한 기준, 자기를 가증스러운 존재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은 무언인가? 4절에 나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신 것과 대비해볼 때 우리는 가증스러웠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가증스러운 자가 스스로 가증스럽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 사회에서 진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냥 인간들로부터 계속 출생, 출생이 이어지는 것 즉 태어난다고 하지 나타난다고 하지는 않는 거예요. 나타난다는 것은 인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 어떤 다른 존재가 등장했을 때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라고 이렇게 규정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 사이에서 특출한 인물은 등장 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없는 데서 나타나야 해요. 나타난 분이 바로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거예요.
이렇게 되면 정욕과, 행락과, 종노릇, 악독과 투기, 가증스러운 것, 피차 미워하는 자, 이런 우리 자신에게서 스스로 탈피할 수가 없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이 합니다. 내가 스스로 개과천선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분이 나타나심으로서 우리의 형편이 가증스러운 존재라는 게 발각된 입장에서 우리는 계속 가증스러운 입장에 머무르며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확실해진 거죠.
여기 3절에 보면 “우리도 전에는” ‘전(前)’의 반대말이 ‘후(後)’거든요, 후, 반대말은 전이고. 전과 후를 나눌 때,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변화가 없다, 라는 것을 굳히기에 들어가는 것이 전의 사정입니다.
후의 사정은, 인간은 변함이 없는데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가 등장해서 생겨난 새로운 환경, 새로운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전에는 이랬다, 고 이야기 하는 건 우리 자신이 변화했다고 볼 수가 없어요. 우리 자신은 변화되지 않고 예수님 자체의 변화가 우리에게 전달된 겁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변화가 변화될 수 없는 우리까지 변화시킨 거예요. 우리가 스스로 변화하려는 것을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종교.
종교단체 또는 종교 시설, 종교 모임, 거기 왜 갑니까? 가는 이유가 뭐예요? 거기 가면 준비된 지시와 명령이 있을 것이고, 주어진 지시와 명령을 따르면 나 자신이 그 명령을 준수하고 실천에 옮김으로써 다른 인간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어떤 짐작 때문에, 희망 때문에 가잖아요. 그러나 인간이 변할 수 없는 ‘전’이 있다면, ‘후’에는, 인간이 짐작할 수도 기대하지도 못했던 상황이 ‘후’에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가 변화한다고 우기는데 사실은 변화된 게 아니에요. 자기 과거에 미흡한 것을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변화라는 말을 끄집어내고 새사람 됐다는 말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건 내가 나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라는 뜻인데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알지를 못합니다. 그렇고 그런 인간들끼리 거기서 뭘 알겠다고요? 몰라요. 인간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여기 “어리석은 자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어리석다는 사실은요, 예수님이 등장했을 때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고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여기는 자체가 어리석은 거예요. 그리고 3절에 보면 더 확실한 것이, 우리가 속았다는 거예요.
인간이 누구에게 속아요? 인간은 누구에게 속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속았다는 것, 그것도 특정 부분은 속았고 어떤 부분은 속지 않았다가 아니라 몽땅 다 속았다는 것은 우리의 짐작과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어떤 분이 등장했기 때문에 성립되는 이야기입니다. 속았다는 거예요.
속은 것 중에 하나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에게는 사후(死後), 죽음 이후가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건 살아있는 거고 숨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이거 속은 거예요. 그거 인간들끼리 알고 있는 겁니다. 이거 속은 겁니다. 인간에겐 사후라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만 죽음이지 인간 죽음은 죽음도 아니에요.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다시 심판대에 전부 다 되살아 나와요. 자기가 죽은 줄 알았는데 죽지 않았어, 이게 골칫거리에요. 최고의 골칫거리는 인간이 안 죽는다는 거예요. 지렁이도 안 죽어요. 지렁이도 죽지 않고 계속 고통받는 거죠.
인간이 기껏 장담하고 자신만만한 게 ‘나 지금 숨 쉬잖아. 살아있어. 숨 끊어지잖아. 나는 우리 할아버지 부모님처럼 죽을 거야. 죽어서 화장터에 갈 거야.’라고 그게 진실 된 이야기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진실이 아닙니다. 몸이 흙으로 변형된 거지 그게 죽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가장 확실한 죽음조차도 거짓말이에요. 이거 속은 겁니다. 인간이 살고 죽는 것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면 인간이 속지 않은 것이 없고요, 인간이 무지하지 않은 것이 없어요. 인간에게 죽음이 없다는 말을 더 이어보면, 죽기 전에는 인간이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을 때나 존재지, 인간은 존재한 적이 없어요. 사라질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멈추지 않고 사라져 가고 있어요. 그게 무슨 존재입니까? 존재는 항상 있어야 존재죠.
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네 이름 믿지 말고 내 이름, 주의 이름 믿으라는 겁니다. 인간은 믿을 게 자기 자신밖에 없는데 그것이 속은 상태고, 그것이 가증스러운 상태이고 무지몽매한 상태라는 걸 도저히 상상도 못 하지요. 내가 살아있는 이것이 어떻게 속았다는 것의 바탕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잖아. 말하고 있잖아. 그런데 이게 거짓말이라고? 이걸 거짓말이라고 하는 자가 누구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같은 인간들끼리 다 같이 속고 있는 상황에서 누가 그걸 가르치겠어요? “당신은 살아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오셨는데 죄를 용서해 주시려 피 흘리셨습니다. 살아있는 당신은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살아있는 인간이 뭘 하느냐 하면, 움직임을 보여줘요. 무슨 움직임? 예수 믿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는 움직임을 왜 보여줍니까? 그 움직임이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그 의미가 왜 있느냐? 내가 살아있으니까 움직인다는 그게 의미 있다는 거예요.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그게 속았다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 이름이 있다는 것은 부모가 존재했기에 이름을 지어줬으니 이름이 있는 거예요. 이름이 있다는 말은, 내가 이름을 가진 채로 여기 존재하고 있다, ‘있다’는 뜻이에요. 있을 때 그냥 있습니까? 움직임을 보이죠. 그 움직임이 무엇을 만드느냐? 자기만의 공간을 조성하게 되어있습니다.
이 자기만의 공간, 이 자기만의 공간을 키우면 어떻게 되느냐? 키워버리면 그게 국가가 돼요. 그래서 인간에겐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분명 출발점인데 이렇게 계속 가면서 어떤 갈등과 부딪히죠. ‘국가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거야?’ 하는 이런 딜레마에 빠져버려요. ‘나라에서 전쟁한다고 나보고 군대 오라고 하는데 내가 가야 해, 말아야 해? 도대체 국가가 뭔데, 네가 뭔데 나를 불러? 그것도 나 죽으라는 일에, 총알받이 되는 일에 나를 왜 부르지?’
여기서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공간과 자기 바깥의 공간을 정해 버렸어요. 국가의 말을 들어주되 내 고집은 고집대로 지킬 수밖에 없는 충동이 내 안에 있다, 이렇게 정리를 합니다. 그러나 그 정리는요, 국가의 힘을 우습게 봐서 그래요. 국가의 힘은 그 충동마저 압사, 그냥 짓밟아 버립니다.
사회에서의 모든 인간관계라는 것은 어릴 때부터 고대해왔던, 어릴 때부터 은근히 희망해왔던 나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을 갈망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게 우리의 모든 움직임의 바탕이에요. 내 마음의 바탕이 뭐냐면 ‘나는 무조건 사랑받고 싶어요.’ 이거에요. 그래서 그런 노래 있잖아요. ‘나는 사랑 없이 못살아.’ 패티 김의 그런 노래가 있어요. 하루라도 사랑 없이는 못 살겠다.
왜냐? 어릴 때의 그가 커서 그대로 어른이 되어있으니까요. 어릴 때 무조건, 무조건 날 사랑해야 해요, 무조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는 좀 상황도 참작하고 자제를 한다고 하지만 그 본심은 절대로 달라진 적이 없어요. 대인관계에 있어서 사람과 만날 때 내가 날 사랑하는 것처럼 무조건 당신은 날 사랑할 수 있느냐, 그런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타인을 만날 때 우리가 말은 안 하지만 제일 먼저 원하는 속셈이 있어요. ‘당신은 나를 존중할 수 있어요?’ 그 이야기에요. ‘당신은 나를 존중할 수 있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당신이 무시하지 않을 수 있어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겠지만 어느 한순간이라도 나를 무시한다면 당신과 나의 관계는 그걸로 끝이야.’
사람들이 타인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에요. 돈 몇 푼 더 받고 그거는 겉이고, 그 내부엔 내가 어떤 짓을 하고 어떤 성질을 부리더라도 그걸 당신이 용납하고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 조건하에 우리 관계는 지속될 수 있다, 이게 인간의 본심입니다.
그런데 국가는 어떻게 하는가? 국가는 그런 개인적인 자기 애정결핍, 이것과 대립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개인의 순수한 충동, 욕망에 사로잡힌 자기 나름대로의 윤리와 국가의 질서와의 마주침, 이게 우리 인간이 이 세상 살아가며 힘든 이유입니다. ‘나는 나 좋아하는 대로 살고 싶은데, 내가 운전을 어떻게 하든 욕을 안 하면 좋겠고 길 다 비켜줬으면 좋겠어. 모세의 기적처럼 껄떡대지 말고 비켜줬으면 좋겠어. 이게 어릴 때부터 내 사랑이었어.’
국가의 공정성과 내 속에 있는 무질서가 정면으로 마주치는 그 지점, 그 지점이 바로 전과 후, 내가 집구석에서 앉아 있다가 나와 사회 생활하면서의 나와 거기서 인간은 가늠을 합니다. ‘전과 후가 이렇게 다르구나.’ 전에는 가정에서 내가 하고 싶은대로 다 했던 것이 전이라면 후는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 앞에서 꼼짝 못 하고 따라야 하는 나, 사회에서는 그걸 인간 됐다고 하거든요. 그 사람 된 나와 집에 와서는 양말 아무 데나 벗어놓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이 전후, 인간의 전후는 사회에서 이렇게 나눠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전과 후를 나누기 전에 먼저 제가 이렇게 개인과 사회의 전후를 먼저 나눈 이유는, 말씀 자체가 말하는 전과 후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 오해는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겪는 전과 후를 먼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집구석에서는 대장질했는데 사회 나오니 만만치 않더라. 양보할 건 양보하고 배려할 건 배려하고. 나 참 사람 됐지, 그렇지? 취직하고 나 인간 됐지, 그렇지? 거봐 전과 후 내가 이렇게 다르잖아.” 할 때 이야기 하는 전과 후는 성경에서 말하는 전과 후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여기 ‘전’이 나오고 하니까 ‘옛날에는 내가 나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하나님 믿고 착한 사람이 됐다’ 후, 전에는 나쁜 사람, 전, 이제는 예수 믿고 착한 사람, 후. 이렇게 나누는 건 본문과 완전히 정반대에요. 전과 후 사이에 일종의 판문점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판문점에서 북한 대표와 남한 대표가 만난다고 생각해 봅시다.
북한에서는 우리 인민들을 잡아 족치는 것이 행복이에요. 왜 그런가? 인민 사회주의 건설과 미 제국주의를 이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내가 굶어 죽는 것도 영광이라고 보는 거예요. 북쪽의 주장이에요. 북에서는 내가 각자 신이 아닌 이상 누구 어떤 신이 등장해서 우리를 잡아 족치는 데에 인민들은 비로소 만족과 삶의 기쁨을 누리거든요.
좀 못 먹고 못 살아도 위대한 어버이 수령이 통치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이 세상 어떤 인민들의 국가보다 행복하여라, 이렇게 늙은 아줌마 아나운서가 나와서 이런 소리 하는 것 봤지요? 이게 판문점에서 북쪽의 주장이에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내가 신이 될 수 없는 이상 누가 나의 신을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좀 같이 어렵고 같이 고생해도 대신 그 신이 된 인민과 더불어 함께 사는 이게 인민이 원하는 이상적인 행복 아니에요? 아멘 할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지만.
남쪽 대표는 뭐냐? 간단해요. “너희 신 있잖아. 김정은이나 김일성, 그런 신 있지? 남쪽은 우리는 우리가 신이야. 내가 신이야.” 내가 신이에요. 이 말은 뭐냐? 두 평가가 뒤집히는 그 지점, 북쪽과 남쪽이 동일한 땅에서 살고 동일한 인간이면서도 현실을 바라보는 평가가 반대로 뒤집히는 그 지점, 그 지점이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요. 북한에서는 “우리 대신 누가 위대한 지도자, 영도자, 신이 되면 그걸로 족하다.” 남쪽에서는 “내가 신이 되면 족하다. 나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사랑받아왔어, 내가 신이면 족하다.” 성경은, “둘 다 신 아니야. 둘 다 속은 거야. 둘 다 가증스러운 거야.” 이게 전과 후에요.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가 교회 다니기 때문에 나는 말씀 지키는 게 자기가 신이 되는 스스로의 방식 중에 하나에요. 그런데 성경에서 그건 ‘전’이라는 거예요. 네가 말씀 지키고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심이라는 말이지요. 그건 ‘전’이에요. ‘후’는 뭐냐? 말씀을 지킨 네가 아니라 말씀 자체를 위한 나가 되는 거예요.
전에는 내가 신이기 때문에, 이건 남조선 이야기입니다,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가 더욱더 위대해지는 그 과정이…,
전에 생각했던, 속았던, 가증스러운, 피차 비난했던, 투기했던 그 시절에서는 내가 위대하게 되는 그 과정이 우리의 일생이라고 보지만
‘후’에는 뭐냐? 주님이 스스로 주가 되시는 그 과정이 바로 인간들이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이 추진하신 본래적 세계입니다. 주님이 주가 되어가는 과정이에요.
그 증거가 출애굽기 12장에 나옵니다. 1절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유월절 밤 이야기입니다. 유월절 밤에 애굽에 나올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 달력 새로 만들자.” 이렇게 한 적이 없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국가라는 체계 안에서 이미 줄곧 살아왔어요. 국가가 개인보다 위대하다는 것, 나 위주의 혼돈을 국가의 공정성이 짓밟아줌으로써 국가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이미 익히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국가가 나만 짓밟은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해코지하는 타인도 짓밟아서 같이 국가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사는 이것이 국가 본래의 목적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국가가 히브리인 보고 “너 노예 해.” 하면 “예.” 노예 하는 거예요. 북한하고 마찬가지예요. 바로 왕이잖아요. 바로 왕이 신,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바로 왕이 시킨다면 우리는 노예라고 할지라도 그 품 안에서 전지전능한 신과 더불어 있는 그런 정서적 안정감을 얻는 것으로 족하다는 거예요. 어버이 수령 있으면 족한 거예요, 그냥.
북한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 되죠. 이해되려면 개종을 해야 해요. 북한의 김일성 섬기는 종교에서 자본주의 종교로, 돈이 나를 신으로 만든다는 남조선 종교로 개종해야 돼요. 남쪽에서는 돈 없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날짜를 정한다는 것은 기존의 네가 태어나서 알던 사건을 완전히 묵살해 버리는 거예요. 인간들이 살았던, ‘내가 애굽에 삽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습니다. 존재합니다.’ 자체를 묵살하는 거예요. “네가 살아있느냐?” “예.” “그러면 넌 속은 거야. 넌 살아있는 게 아니야.”
그럼 뭐가 살아있어요? 어린 양이죠. 여기 3절에 보면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찌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이렇게 어린 양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어린양이 된다는 것은 어린 양이 어떻게 주님이 되시고, 주님이 오시기 전에 어떻게 먼저 어린양을 보내셨는지, 어린 양이라는 그 존재에서 어린 양 나름대로 인간들이 예측도 못 한 움직임이 나오고, 그 움직임이 새로운 어린 양 중심의 공간을 조성하게 되어있어요. 그게 주의 이름의 공간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찾아오기 전에는 나에 대해서 항상 나의 반응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장 내시경 할 때 의사 선생님이 이야기합니다. “용종 7개 떼어냈습니다.”라고 할 때 의사 선생님이 실수한 거죠. “당신 안에 있는 용종 7개를 내가 떼어냈습니다.” 이건 말을 잘못한 거예요. 전혀 복음적이 아닙니다. 말을 이렇게 바꿔야 해요. “당신 안에 있는 주님의 용종 7개를 떼어냈습니다.”
나에 대한 나의 반응은 일체 없어야 해요. 이렇게 나를 해부한다 해도 “쓸개가 있네. 간이 있네. 심장이 있네.” 다 주님 거예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요. 그런데 이건 후의 일이고, 전에는 심장이고 쓸개고 내 거예요. 나에 대한 나의 반응이 전부에요. 그러나 후에는 주님의 것에 대한 나의 반응만 말하면 되는 거예요.
그 어린 양이 애굽이라는 국가에서…, 개인과 국가라고 할 때 국가는 공정성을 주장해요. 정의를 주장하거든요. 인간은 충동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사는 것밖에 모르고. 그 전후를 완전히 철폐한, 국가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국가 자체로부터 벗어나면서 어린 양이 죽어요. 죽는다고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어린 양이 그냥 곱게 데려가자, 이게 아니라 어린 양이 죽어야 국가로부터 너희들이 구출될 수 있고 빠져나올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거죠. 이 말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 집에 갈래요.” 하면 “안 돼. 여기서 죽어.” “왜요?” “네 삶 속에 나의 죽음이 포함돼 있으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며 주장했던 것이 뭐냐? “애굽으로 돌아갈래.”였어요, 그것도 열 번씩이나.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 “여기서 그냥 죽어.” 네가 건너온 것은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돌아갈 내 존재는 이미 없어졌어요. 왜? 어린 양과 함께 죽었으니까. 어린양과 함께 죽었으니까! 이제 죽고 살아도 그건 어린 양 안에서 죽고 사는 거예요, 어린양 안에서. 이게 십자가 의미입니다.
어딜 그런 전제를 해요? ‘아 뭐 교회 갔다가 뭣하면 안 나가면 되지.’ 어디 친목 단체에요, 이게? 놀러 온 겁니까?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핵심은 이겁니다. 네가 애굽에서 나올 때 인간이 해내지 못한 일을 주님께서 해냈기 때문에 네가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주님이 하신 일을 무효화시킬 때만 가능한데 주님은 자기 일에 충실하기 때문에 무효가 될 수 없어요.
전과 후에서 후의 상태는 어떤 상태야? 주님이 주님 스스로 주님이 되는 그런 일만 있어요. 그 일을 인간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자기 일에 충실하기 때문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 도와줄까?” 이런 거 없습니다. “내가 양보하마.” 이런 거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 후의 세계의 특징은 뭐냐? 전의 세계에서 생활은 내 생명을 살리려고 했던 움직임이었어요. 새로운 세계, 후의 세계에서는 ‘주님의 죽으심을 살리라’ 하는 겁니다. 왜? 다 이루었기 때문에. 무엇을 이루었는데? 변하지 않는 존재. 뭘 또 이루었는데? 영원히 영생을 얻는 존재를 주의 안에서 이루셨기 때문에, 주께서 홀로 이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우리가 예수님 모를 때는 이것저것 챙겼습니다. 이것저것 챙겼어요. 그 이것저것 챙기는 그 마음의 동기는 뭐냐? ‘나 사랑받고 싶어, 어릴 때처럼.’ 어릴 때도 사실 사랑받은 것이 아니에요. 어릴 때도 사랑이 결핍됐죠. 어릴 때 사랑의 결핍이 어른 되어서도 여전히 결핍으로 있는 거예요.
“왜 세상은 내 위주가 아닌 거야!” 이렇게 거리에서 고함치며 돌아다니는 거예요.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왜 내 앞에서 차가 거치적거리는 거야. 빨리 비키지. 내가 차 모는데 왜 갑자기 빗길에 미끄러지게 만들었어. 아, 짜증 나.”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후’에 된 사람, 예수님, 그리스도와 함께 된 사람은 이것저것 챙기는 데 아무 계획 없이 열심히 챙겨요. 왜? 내 것이 아니니까. 주께서 그렇게 챙기게 하시니까요. 주께서 맞닥뜨리게 하는 일에 대해서 열심 내게 되어있어요, 내가 계획하지 않고 내가 기대하지 않은 일, 맞닥뜨리는 일.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흔히 종교단체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 첫째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인간도 없는데 하여튼 인간을 사랑하신대요. 이 세상에 인간은 없어요. 주님만 인간이죠. 두 번째 아담만 인간이지 나머지는 인간도 아니에요. 흙이에요.
그런데 그걸 인간은 모르죠. 종교단체가 알 수가 없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뭘 해주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편한 것이 없도록 선물 창고를 하늘에 만들었다는 거예요. 선물 저장 창고를 만들어서 나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내 것으로 퍼 담을 수 있게 했다는 거예요.
그 선물 창고에 보면 빵, 고기, 그리고 물, 돈, 인간이 살 때 필요한 것이 가득하다고요. 네가 교만해서 너밖에 모를 땐 생각을 못 하다가 어렵다 싶을 땐 언제든 와, 언제든 와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되면 응답대로 고기, 각종 선물, 떡이고 뭐고 다 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이거 가증된 것이고 속았다는 생각을 종교단체 사람들은 몰라요. 왜? 본인 자체가 사랑에 미쳐있기 때문에, 사랑에 갈급해 있기 때문에 무조건 자기를 사랑해주면 그게 좋은 하나님인 줄 알고 있어요. 이걸 쉬운 예로 들면, 아이가 촌에 있다가 서울에 취직하겠다고 취업 준비생으로 서울에서 자취를 합니다. 엄마가 바리바리 싸 들고 가서는 ‘너 안 보고 그냥 내려간다. 사물함에 김장 김치 넣어놨으니까 가져가라.’ 하니 아들이 들여다보니 그 안에 여러 가지 필요한 거 라면도 있고 돈도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느 날 엄마의 마지막 편지가 거기에 담겨있어요. ‘아들아 미안하지만 내가 좋은 아저씨 만나서 그 집 애 돌봐야 해서 이젠 신경 쓸 수가 없네. 이제 네가 알아서 살아라. 당분간은 돈 약간이랑 쌀, 김치, 된장 담가놓은 것 주긴 줄게.’ 다음부터는 아무리 살펴도 고기도 있고 김치도 있고 라면도 있는데 엄마의 편지가 끊어진 거예요, 엄마의 편지가. 그 사물함 안에 들어있지 않아요.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를 살려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말씀, 주님의 편지에요. 주님의 편지 그거 없으면 아무리 이 땅에서 우리가 햇빛과 공기를 공짜로 받으면서 이게 왜 왔는지 우리는 몰라요. ‘아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날 살려주기 위해 햇빛과 공기를 줬구나.’ 그런데 무슨 취지로, 왜 주셨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뜻도 몰라요.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있는지도 몰라요.
주께서 인간의 역사 중 마지막 때에 마지막 편지로 친히 오시는 겁니다. ‘아들아.’ 마지막에 오시는 거예요. ‘오랜만에 편지했지? 내가 너에게 갈게. 가서 너에게 꼭 필요한 것 너에게 해 줄게.’ 아들은 이제 반갑고 좋아서, 기뻐서 “‘엄마가 그렇지. 날 버릴 리가 있겠어? 엄마! 뭐 해줄 건데?” 엄마는 “네 새 아빠가 말씀에 의해서 죽은 것처럼 너에게 찾아가서 새 아빠처럼 죽여줄게.” 그게 주님의 속마음이에요. 주님이 우리를 죽여주시는 거예요. 어린양과 함께. 이게 속마음이라니까요.
“그동안 살아있다고 고생 되게 많이 했지? 내가 죽여줘야 해. 네가 그냥 죽으면 죽음 없어. 진짜 죽음은 말씀 때문에 죽으신 그 새 아빠의 죽음, 그 죽음과 같이 죽어줘야 네가 진짜 영생을 얻는 거야.” 해서 오는 엄마 이름을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는 ‘보혜사’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성령께서,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고기 주고, 밥 주고, 돈 주고.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죽어봐야 죽음이 되지 못하는, 죽어봐야 존재가 안 되는, 그런데 진짜 죽었다가 존재가 되는 것은 진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한 죽음이어야 그게 가능한 겁니다. 그 외에는 다 실패고 헛방인 거예요.
방금 쉬운 예를 들었는데 사도가 이걸 본격적으로 이야기한 대목이 따로 있어요. 에베소서 5장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그거 보기 전에 14절 먼저 보면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사도가 성령 받은 성도에게 편지를 하면서 “나도 성령 받았는데 우리 똑같은 거 받았잖아, 그렇지? 그럼 나에게 일어났던 경우와 너에게 일어난 경우가 일치한다는 것은 분명히 옳은 판단”이라고 보고 나는 어디서 태어났느냐, 나? 나 사도바울은 어디서 왔는가? 잠자고 있었다는 거예요. 잠자고 있었다. 깨어날 줄 모르는 잠을 자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의 현실, 평생이라는 것은 그냥 꿈 같은 겁니다. 깨어날 줄 모르는 자가 자고 있었던 거예요. 인간의 평생이라는 것은 그냥 꿈같은 겁니다. 꿈에서 온갖 잡동사니 인간들이 다 만나고 있지요. 어떤 사람은 95세까지 꿈꾸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90, 요새는 평균이 다 90세까지 꿈을 꾸고 있어요. 좀 오래 산다 싶으면 백 살, 우리나라에 백 살 넘은 사람이 약 2300여 명이 된다니까 꽤 많잖아요. 하여튼 지루하게 주무시고들 있어요. 백 년까지.
문제는 백년이 간다 할지라도 깨어날 줄을 모르는 거예요. 누가 깨줘야 깨어나지요. 엄마의 편지가 있어야 되는데, 성령의 보혜사가 있어야 되는데 깨어날 줄을 모르는 거예요. 아직도 눈에 보이는 국가가 전부고, 사회가 전부고, 자기의 본능은 충동밖에 없어요. “나 미치도록 사랑받고 싶어. 자식들이 전화도 안 해. 나 사랑받고 싶은데.” 이러고 있다고요.
애들 결혼해도 마찬가지예요. “엄마! 요새 나 잘 안 찾더라? 호박 지짐 좀 가져가라.” 이러면 또 기분 좋지요. 왜? 호박 지짐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인정해 줬으니까, 나를 무시하지 않으니까. 인간은 미쳤어요. 누구든지 날 무시하면 안 된대요. 심지어 하나님이라도. 이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자고 있다고 한 겁니다.
자고 있는데 그냥 곱게 백설 공주처럼 자면 어때요. 자고 있는데 어디에서 자고 있느냐 하면 에베소서 5장 6절에 보면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불순종의 진노 안에서 잠자고 있어요. 어두움 안에서 잠자고 있어요. 마귀가 주는 약물 먹고 약에 취해서 악마의 잠을 자고 있었던 거예요. 어두움의 잠을 자고 있었던 겁니다.
거기에 대한 형식들이 뭐냐? 오늘 디도서 본문에 나왔던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이것은 원인도 없고 이유도 없어요. 그냥 성질나요, 그냥. 나 사랑받고 싶은데 주변에서 그것에 미흡한 거예요. 결핍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짜증 날 수밖에 없지요. 짜증 나서 짜증 내는데 그 원인은 자기가 찾을 수 없어서 “왜 당신은 짜증 내고 화를 냅니까?” “화가 나네요.” “기껏 할 말이 그것밖에 없습니까?” “내가 아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화가 난다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분노한다는 그것밖에.”
“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 도대체 누가 이렇게 성질을 돋아놓았습니까?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어서 그렇다.” 아직도 잠자고 있어요. 인간의 세상은 뭐냐? 깜깜한 어두움이에요. 깜깜한 어두움.
다시 에베소서 5장 13절에 보면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우와! 이게 뭐냐 하면, 한의원에서 침을 놓을 때 일종의 침은 ‘책망 침’이거든요. 침이 들어온다 그 말이지요. 침이 들어오니까 우리 속에, 육신 속에 있던 부끄러움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부끄러움이.
“아저씨, 요새 운동 안 하셨지요?” 이런 거요. “아저씨, 요새 고기 너무 드셨지요? 사탕도 많이 드셨고요!” 침은 거짓말 안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침에 묻혀 나오니까, 침이 빛이니까, 침이 성령이니까, 침이 십자가니까요. 십자가를 믿으면 안 돼요. 십자가가 침이 되어야 돼요. 십자가 믿는 실천을 하면 안 된다고요. 실천은 주님 쪽에서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안에 파고 들어오는 겁니다. 모든 부끄러움을 들춰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 일을 사실은 하셨어요. 마태복음 13장 5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새것과 옛것. 뭐 이제는 새사람 되었으니 옛사람은 없다고요? 아닙니다. 새것과 옛것을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이전’에서 ‘이후’로 우리의 능력으로 절대로 넘어설 수 없다는 것, 주께서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의 이름을 위해서 나의 이름을 활용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거예요. 십자가는 인간의 더러움을 당겨오지 아니하면 주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요. 인간이 죄인이 아니면 주님이 의인이 될 수 없어요.
교회 와서 좀 더러운 척 좀 해 줘요, 더러운 척. 안 그래도 가만있어도 더러운데 뭐. 점잔 뺀다고 될 일이 아니거든요. 전부 다 날 사랑해주고 날 무시하지 마라, 이러고 앉아 있는데 모르겠어요?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옛것과 새것이 결합이 될 때 주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그 주의 이름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지금부터 좀 어렵습니다. 어려워도 안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은. 성경 자체가 어려우니까 그런데 그 어려운 대목을 이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6장 1-4절, 본문부터 먼저 읽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이해되는지 스스로 한 번 보세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어디서 어려우냐? 세례가 뭐냐 하는 거예요, 세례. 세례는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내 이름을 주님의 이름에 의한 심판으로 집어넣는 게 세례입니다. 우리를 심판 가운데, 주의 이름이 행사하는 그 심판 주의 대상으로 우리 이름을 집어넣어 주는 게 우리에게 복이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안 넣어주게 되면 새생명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병든 사람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한 거예요. 왜 병든 자가 필요하냐? 주의 이름을 위해서 병든 나의 이름이 필요한 겁니다. 어느 정도로 병들었느냐? 오늘 본문에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 그래서 나밖에 모르고, 잘 안되면 남 미워하고, 이럴 정도로 병든 거예요.
불순종의 능력 안에서 살았던 것, 그것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의 세례를 위해서. 세례가 주께서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함께 죽는 것이 세례거든요. ‘너는 죽어라, 나는 살리라.’ 이게 아니고 함께 죽는 거예요,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홍해 바다가 세례기 때문에 그래요.
멀쩡한 길 놔두고 홍해 바닷속에,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바닷물 속을 통과시킨 이유는, “너희만 통과하냐? 나도 같이 통과 했잖아.”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자꾸 너만 통과한 것 같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 하지 말라. 나도 통과했어. 나는 다시는 애굽으로 안 돌아갈 거야. 너도 마찬가지로 못 돌아가. 돌아가려면 여기서 죽어. 여기서 그냥 저주받아 죽어.” 그게 주의 이름의 일관성입니다. 한결성이에요.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서 도닦고, 자기 깨끗한 사람, 세상은 날 안 알아줘도 나는 나를 존중해야 마땅한 존재라고 우기면서 이 더러운 세상 같이 못 하겠다고 기도원, 그것도 금식 기도원…, 금식 알지요? 지난 수요일에 나왔던 그 금식, 그게 자기와 이별이 됩니까? 자기와 이별은커녕 오히려 집착만 강해질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이별하는 방법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주께서 강제로 우리를 주님의 자기 죽음에 같이 집어넣어야, 세례를 받아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와 바이바이를 할 수 있습니다. 헤어질 수 있어요. 이미 확정되었거든요. 규정되었거든요. 가증한 자로.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자기가 가증한 자, 라는 사실을 늘 되풀이해서 확인하면서 주께 감사하는 거예요. 주께 감사하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주의 이름 안에서 우리는 살아있으면 우리는 가증한 그 티를 막 냅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우리는 막 티를 내는 거예요. 마치 옛날 장터에 가면 장날 풍경에 그런 것이 있어요. 고양이나 닭이나 강아지를 촌사람들이 내다 팔려고 장에 나올 때는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옵니다. 바깥에는 매끈한 보자기에요. 그 안에 닭이나 고양이가 들어 있어서 발로 마구 차는 거예요.
울퉁불퉁 바깥으로 막 튀어나오지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이 죄인, 가증한 죄인이 자기 맘대로 사니까 윤곽이 막 나오는 거예요. 주 안에 있으면서 성질이란 성질은 다 부리는 거예요. 이게 주와 함께 세례 된 모습입니다.
그때마다 성령께서 “이 죽은 자야! 가만히 안 있나?” 하게 되면 아까 에베소서 5장의 말씀처럼 ‘아, 때리는 것마다, 징계를 받는 것마다 다 빛으로, 주께서 빛이시구나, 이미 빛 된 세계 속에 우리가 놓여 있구나. 내 세계가 아니고 이미 주님의 세계로 전환되었구나.’ 그게 전이 아니고 후, 이미 자비 속에 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에베소서 5장 12, 13절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해 놓고 그다음 더 어려운 말이 뭐냐? 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성경에서 어떤 묘사를 할 때 우리가 미리 짐작하거나 예상할 수 있는 게 없고 상상도 못 하는 표현들을 사용해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건너올 수도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잘라내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종교단체에 가는 것은 내가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말씀 지킴으로서 내가 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내 반응을 내가 계속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이것저것 챙기지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그 육신과 말씀의 다 이루심을 맞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맞바꾸는 겁니다. 세례를 통해서. 골치 아픈 나, 어떻게 할 수 없는 나를 주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이 하신 일을 드러내는 증거로써 맞바꾸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와 성도의 만남은 뭐냐? 성도를 어떻게 봐야 되는가? 귀한 존재로 봐야 돼요. 귀한 존재로. 타인을 볼 때 ……, 성도입니다, 교인 말고 성도, 성도를 볼 때는 그 사람을 함부로 보면 안 돼요. 왜? 귀한 존재예요. 어떻게 성질을 부리더라도 귀한 존재예요. 왜? 빛이 빛으로 드러나기 위해서 쓰임받고 있으니까.
참 이거 어떻게 보면 좀 심하지 않습니까, 라고 욕할만한 이야기인데 성경에 보면 제가 안해도 사도바울이 한 욕 얻어먹을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절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이런 음행을 저지른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에게 사도바울이 이런 평가를 내립니다. 4, 5절,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그다음의 말을 들어보세요.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우와~! 이거 오버 아닙니까? 어떻게 사단에게 내어준 자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이건 뭐 화끈한 불의의 청지기 아닙니까. 불의한 청지기의 끝판왕, 불의한 자가 구원받는 끝판왕, 이게 성경에 나온다니까요! 그 대목 다시 읽어드릴까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육신과 주님의 다 이루심 십자가의 공로와 맞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23장 27절에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위해서 끌려갈 때 여자들이 불쌍하다고 따라오면서 우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28-30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 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주께서 처참하고 확실한 세상의 무너짐, 뭉개짐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 자기 아들과 이 세상의 뭉개지는 것과 맞바꿨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의지하고 우리가 믿을만한 이 세상, 하나님은 자기 아들만 믿는 거예요. 이 세상 전체를 다 바꿔버린 거예요. “어디서 이 더러운 세상에서 더럽게 살려고? 새로운 세계가 있는데, 아들의 세계가 있는데! 천국이 있는데 천국 가야지 왜 이 세상에서 계속 살려고 하느냐?”
그 세계, 무너진 세계가 얼마나 처참한지. 그때 임신하지 못한 여인이 젖 먹이는 여인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는 겁니다. 누가복음 23장 29절에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얼마나 그 상황이 처참했으면 젖을 먹일 애가 없는 것이 “휴~, 다행이다. 자식까지 있었으면 자식까지 망할 뻔했다.” 이 정도로 믿을 구석, 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빛이라는 구석은 일체 다 없는 거예요. 일체 다 어두움, 완벽 어두움이에요, 전부가 어두움이었다는 거예요.
그 세계가 빛의 세계인 예수님의 나라와 맞 바꿔치기 된 겁니다. 끝으로 에베소서 5장 끝 부분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제 알겠지?” 하면서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술 취하지 말라. 그건 방탕한 것이다. 술 취하는 것은 세상이 내 맘대로 안되니까 그런 거잖아요. 속풀이 한다고. 나는 나 혼자 내 식대로 살겠다는 것이 이게 술 안 먹어도 술 취한 자에요.
그러니까 이게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무지한 자에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라요. 자기 이름만 챙기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에베소서 5장 19절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서로 화답하라는 말은…, 교인이 아니고 성도에게만 해당됩니다. 상대에게 있는 성령께서 그 사람의 더러운 것을 들춰내시는 그 침, 빛이라는 그 침, 성령의 역사를 존중한다면 같은 성도를 그렇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적어도 성도는 어떠냐? 성도는 예수님의 몸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주의 몸에 들어갔다가. 이게 세례거든요. ‘아이고 식겁했다.’ 식겁한 것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 몸 안에서, 그리스도 몸의 일부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마지막, 이제 마지막 그리움이 여러분에게 무엇이었던가요?
이 세상에서의 출세였습니까? 그 그리움은 계속 견지하세요. 그것이 바로 어두움이고, 그게 꿈속에 있는 세계인 것을 이제는 깨어서 다시 후에서 전을 뒤돌아보는 여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만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는 착실함이 나에게 얼마나 많이 내 인생을 변화시킬까만 신경 썼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속은 것이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만 존재하고 따라서 우리도 영원히 존재하게 된 것을 주께 무한히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