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권세 속에서
2023년 11월 12일 본문 말씀: 디도서 3:1-2
(3: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3: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권세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알려진 사항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23) 그런데 그 위의 권세가 지상에도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분의 몸은 기존의 인간들과는 다른 마지막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것은 기존의 권세로부터 공격받아서 죽는 죽음으로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물과 피’로 그 본질을 드러내는 주님의 몸입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6-8)
예수님의 죽으심은 기존 인간들의 노쇠해서 죽는 죽음과 다릅니다. 산 채로 죽으신 겁니다. 세상 권세가 어디를 향하여 집결해 있는가를 보임이 가능한 죽음입니다. “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인간의 보통 육신은 그냥 흙이 되는 육신입니다. 전혀 하늘의 권세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버지와 맺은 언약에 준해서 나타난 겁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6) 즉 예수님의 피흘리심이 있어야 비로소 이 인간 세계가 ‘죄 있음’이 드러납니다. 즉 이 세상의 권세는 악한 권세가 되며 이 악함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이어지면서 정립됩니다.
악이란 하늘의 권세가 지상에서 방해놓은 바를 두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선이란 하늘의 권세가 악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옛 것은 새 것에 의해 죽은 것이고 새 것에 의해 옛 것은 ‘옛것으로’ 부활됩니다. 두 권력은 대립되지만 동시에 재설정되어 위치를 잡습니다.
선의 반대말은 악함입니다. 하늘의 권세 아래서 악함은 주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개인적인 것에 관심 쏟는 것을 말합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즉 악함이란 온전치 못한 주제에 온전함을 가로막는 모습을 보입니다.
각 시대마다 이처럼 온전치 못한 것과 온전함이 함께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온전함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 하늘의 온전한 권세는 인간의 권세로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을 죄의 용의자로 간주하지 않는 채 말씀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온전치 못하는 마음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이 온전치 못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고 자신을 살리려 하기 자꾸만 사람만 믿고, 사람에게 기대는 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나 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그렇다면 인간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스스로 옳은 길을 가고 선한 일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레미야 10:23에 나옵니다. “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자기 인생을 끌어가는 자들에 대한 처벌은 단호하고 간결합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렘 10:25) 이처럼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도리어 저주의 길로 들어서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친히 어떻게 선한 일을 남기시는 겁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은 이상, 인간에게 선한 일은 없습니다. 선한 일은 생명나무와 관련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애굽의 바로왕 밑에서 노예가 되게 하십니다.
즉 ‘종-주인’ 관계로서 복의 자손이 시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주인-종’의 관계로 뒤바꿔버리게 하십니다. 마치 모래시간을 뒤엎어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는 작업입니다.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의 종으로, 희생자로 생활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 작업에 참여된 이스라엘은 늘 생명의 의미를 품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땅에 등장되는 생명은 이 세상에서 ‘종-주인’의 관계를 ‘주인-종’의 관계로 재설정돠게 합니다. 소위 세상에서 주인노릇하는 권세자들은 언약을 지닌 이스라과 만남을 통해서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권세자 노릇이 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선’, 곧 ‘생명’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더 같은 경우에도, 유대인 전체는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약 1년 지나면 모든 유대인들과 그들의 재산은 전부 이방민족의 것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종의 위치에 있던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할 게 없이 운명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 6:1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 지킨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 하는 것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 하였는지라”(에 67:1-2) 에스더의 사촌오빠 모르드개가 공을 세운 것을 알고 왕은 권세를 유대인들에게 돌리게 됩니다.
이처럼 옛것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통해서 하늘의 권세에 진입토록 하는 겁니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옳소이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단 3:24-25)
이처럼 성도는 이미 하늘의 권세 속에서 아들에 해당됩니다. 신분이 역전된 겁니다. 따라서 옛 것, 곧 죄악된 육신으로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가 된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개인적인 능력과 입장에서 도저히 구원될 수 없는 지경에서 오로지 예수님의 죄사함의 권세 안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재설정하여 오로지 십자가만 증거케 하는 겁니다. 이것이 생명이요 건한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상을 이 세상 안에서 경험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경로를 통해 천국 갔는지 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2강-디도서 3장 1-2절(두 권세 속에서)231112-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3장 1-2절입니다.
디도서 3:1-2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여기 “권세 잡은 자”, ‘권세’가 나오는데 두 종류의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에 두 종류의 권세가 나타나는 것은 권세와 권세 사이가 서로 끊어져 있고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권세가 연결되어 있으면 이건 두 권세가 아니라 하나의 권세니까요.
두 종류의 권세는 두 몸에서 나옵니다. 기존 인간의 몸, 아담의 몸에서 나오는 권세 따로 있고, 인간의 몸이 아닌 성령에 의해서, 인간 몸을 통해서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분이 새로운 육을 가지고 오셨죠. 그분의 권세가 또 따로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는 땅에서 났고 나는 땅에서 났다.” 하늘에서 났다는 것과 땅에서 나온 것의 차별성, 그런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 아무 권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 한 몸으로 오셨고 열두 제자와 함께 있었지만 열두 제자가 어떤 권세를 펼칠 형편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말하는 것은 굉장히 권세가 있는데 실질적으로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별로 없네.” 해서 가볍게 다루기 시작했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끝나고 난 뒤에 제자들이 말씀의 권세에 대해 놀라면서 ‘세상에 이런 권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1장 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계속 활동을 하니까 그 당시 제사장들, 장로들이 나와서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지? 누가 너에게 이런 권세를 줬어?” 이 때 예수님이 질문하는 자에게 도로 질문을 하죠. “세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세례 요한은 무슨 권세로 저렇게 세례를 주었지?”라고 반박을 하게 돼요.
그 말은 이미 세례 요한이 이 땅에서 제거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기존의 권세가 자기의 속성과 본색을 드러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을 사형시켰습니다.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따라서 이 두 권세가 사이좋게 있는 것이 아니고 대립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을 통해 보여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져온 권세가 어떤 권세인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한1서 5장에, 그분이 오실 구원자, 구원자와 심판주는 같은 뜻입니다. 심판하기 때문에 구원하시거든요. 심판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만 구원이 돼요. 그냥 사람 데려가는 것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나는 이 세상에 구원자다.”라고 어떤 교주가 말하거든 “그러면 이 세상을 불로써 심판해 보라.”고 되물어 보세요. “네가 이 세상의 모든 자를 죽일 수 있거든 구원한 자라고 인정해줄 게.”
사람들은 자꾸 심판할 능력도 없으면서 구원만 이야기하고 언급하는 것, 이건 거짓말입니다. 심판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를 심판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심판이 먼저 우리를 완전히 싸 발라 버리는 거예요. 심판이 우리를 통제하고 통치할 때, 심판이 우리를 전적으로 압제할 때 비로소 거기 구원이라는 의미가 비로소 나오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뭐 때문에 구원주가 필요합니까? 필요 없죠. 근래 여러 번 이야기 한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구원주로 생각 하지 못하고 랍비로, 스승으로 생각했다는 점이에요. 물론 누구나 처음에는 그럴 수 있지만 나중에 성령받고 난 뒤에는 ‘내가 한 수 배울 분이 아니구나.’ 우리의 모든 것이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우리 육신이 부모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네가 뭔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심판받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please, 제발 자신의 과거의 행동과 앞으로 할 행동에 대해서 평가하지 말고 따지지 마세요. 이건 바보짓입니다. ‘행동 좀 똑바로 했으면…’ 행동 똑바로 한다는 게 인간에게는 없어요. 우리는 우리를 평가할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우리는 두 권세 안에서 놀아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 우리를 볼 때 우리에게 제대로 뭘 하라고 말씀을 준 게 아니에요. “네 배후에 권세 있다. 무슨 권세? 영원히 지옥 갈 권세 있다. 넌 모르지? 네 배후에 그게 있어. 넌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 그거 알려주기 위해 말씀 주신 거예요. 그럼 예수님이 그럴 수 있는 권한이 과연 본인에게는 있는지, 남들에게 그렇게 지적할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는 그런 권한이 있다는 증거가 뭐냐?
요한1서 5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야기하시면서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라고 되어 있어요. 아, 이 요한1서의 이 말씀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 어려워요. ‘육신이 DNA로 임했다.’ 이러면 얼마나 알아듣기 쉽습니까?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질로 구성된 근육질로 임했다.’ 이러면 얼마나 쉬워요. 왜 물과 피로 임했다, 라는 말이 필요한가요?
어떤 특수한 육신이기에 그런 말씀을 하느냐?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육은 분해됨으로써 권세가 나오는 거예요. 분해용이에요.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분해되면 흙이 되잖아요. 그 분은 그게 아니고 물과 피로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일어난 현상 중에 “그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되어 있어요.
인간이 외부에서 서서히 시간이 지나 부패할 때는 흙이 되지만 예수님의 몸은 살아있는 몸이에요. 예수님이 죽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몸으로서 그냥 죽으신 거예요. 살아있다는 것은 창으로 찌를 때만 확인될 수 있는 겁니다. 그 안에 살아있는 권세가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의 육신이 살아있다는 말은, 예수님 나를 찌르는 너의 권세도 살아있다는 거예요. 둘 다 살아있다는 겁니다. 나를 찌른 자도 살아있고, 찔림을 받은 나도 살아있고 그 몸들을 앞세운 배후의 두 권세도 살아있는 거예요.
그 물과 피가 나올 때 물과 피라고 해놓고는 최종적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다,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 하시는 것은 성령이시죠. 피로 임했다는 것은 이 피가 요한1서 1장에 보면, 그 피를 무슨 피로 보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창세 전에 계약된 내용, 피 흘림으로 화목제물 된다는 그런 약속이 창세 전에 있었어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몰라요. 우리는 기억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애초부터 죄라는 것은 예수님의 피와 연결될 때 피 흘려야 씻음 받는 죄를 지닌 채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에 대해서 평가하지 말고 따지지 말라니까요. ‘나 이렇게 안 했으면 더 건강하고 더 잘 살았다.’ 그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몸은 기존의 악마의 권세를 노리고, 노리고 등장했습니다. 나타난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도 이와 같은 기능을 이제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권세의 몸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 물과 피인 예수님의 한 몸으로 확산됐어요.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와 예수의 피 흘림의 차이를 아셔야 돼요. 피 흘린 분이지 활동하신 분이 아니에요. 모든 예수님의 활동의 종착지는 피 흘림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피 흘림은, 그냥 예수님이 산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칼을 찔러 낸 피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장악한 권세가 예수님 몸을 압박하도록 예수님이 유도하신 거예요.
어차피 심판받을 권세기 때문에, 인간이 탈출할 수 없는 권세. 그래서 철저하게 성경은 이 세상 권세와 주님의 권세, 하늘나라의 권세가 차이 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겁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이 모든 말씀을 다 줄이시기 바랍니다. 다 줄이고 ‘저주가 있을 것이라.’ 이거 하나만 기억하면 돼요.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게 사람이니까! 사람이 사람 믿지 누굴 믿어요? 주의 뜻은 이겁니다. 사람 좀 믿지 말라는 거예요.
사람 안 믿으면 살 수 없는데요? 같은 혈육을 믿지 않으면 못 살아요. 인간은 더불어 사는 것이고 우리는 정치적 동물이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이 그 뜻이에요. 인간은 홀로 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짓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게 저주니까. 결국 이 예레미야의 예언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대책도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이유가 예레미야 17장 9절에 나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심히 썩었고 더러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것도 충격적인데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걸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꾸 남을 믿는 거예요.
사람들이 교회 와서 성경을 보잖아요. 이때 제가 보기에 제일 큰 착각이 뭐냐 하면, 자기를 용의선상에 놓지 않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자기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말씀을 자기는 용의자가 아니라고 단정 짓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나만 빼주세요.” “뭘 빼줘?” 나만 천국 가게 해 달라, 벌써 마음 심보가 더러워요. 그게 바로 만물보다 더러운 거예요. 그게 부패한 거예요. 썩었으니까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예요. ‘나는 빼주세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바리새인이 주장한 것처럼요.
그래서 교회 나와 으쌰으쌰, 같이 더불어 친교하고, 친교하면 구원받습니까? 둘 다 부패했는데 친교 한다고 될 일이 있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이렇게 과격한 말을 하시는 주님의 대책은 뭐냐? 주님의 대책은 예레미야 10장 23절에 나옵니다. 이런 말씀이 있어요.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걷는 자에게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인생의 길은 분명히 내 길이거든요, 달력 체크 하면서 스케줄 체크하면서. 그런데 그렇게 체크한다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생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까의 말씀과 비교해보면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려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마음이 부패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거고요, 결국 하나님 믿고 의지하겠다는 것은 내 인생을 내게 돌리겠다는 그런 의도, 그것 역시 부패한 마음이에요. 그 부패함이 예수님을 창으로 찌르니까 피로 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창에 찔렸죠. 그 창에 뭐가 달렸는가? 기존에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권세가 힘을 다하여 주님의 몸을 찌르도록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셨으니까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나는 뭐다, 누구다, 재벌 3세다, 남자다, 여자다, 하면서 소개할 때 그럴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너는 세상이야. 너는 세상의 일부야.” 따로 나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세상의 일부고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죠.
왜 주께서 자신의 백성의 걸음을 친히 인도하시는지 예레미야 10장 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정말 충격적인 말씀이죠.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민족에게는 필히 저주가 주어진다, 창세 전부터 확정된 사실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이걸 몰라요. 세상 사람들은 이걸 모릅니다. 서로가 서로 쳐다보기 바빠요.
자, 그렇다면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본문에서 뭐라고 하냐면,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으로…”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이것은 뭐냐 하면, 방금 이야기 한 저주받아 마땅한 세상 권세에 대해서 주님께서 지금 그 권세 활동을 긍정적으로 인정해준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관용이라는 말이 뭐냐는 거죠.
관용이라는 말은 인정해준다는 뜻이 아니고, 저들의 활동조차도 이미 하늘의 권세자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파악하자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죠? 비슷하게 이해되는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명쾌하게, 명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잖아요.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0절 31절에 나옵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되어있고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사람을 인정한 것이냐 하는 문제에요. 사람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니에요. 사람들을 배치를 함으로써 ‘사람이야, 주님이야?’를 비교하는 그런 배치물로서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세상권세가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왜? 나는 너희가 귀하니까. 누구보다? 저 사람보다 귀하니까.
그러니까 “내가 너를 지켜줄 테니 제발 네가 너를 지키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너를 지키고자 하면 자꾸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믿으면서 믿어놓고 사기당했다고 찔찔거리고 그리고 나서도 돌아서서 또 믿고. “주께서 긍정했잖아요. 이 세상 권세를 복종하라면서요? 그래서 복종했는데 왜 세상이 마음대로 안 돼?” 뭐 이런 식이죠.
이 세상 권세를 하나님께서 계속 유지 시키는 이유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언약이 된 피로 갈 때까지의 그 경로가 예수님조차도 세상 권세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통과했다는 말 대신 뚫고 지나간다고 하겠습니다. 뚫고 지나간다는 거예요. 이게 뚫리지 않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세상 권세를 뚫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자기 귀한 백성의 발걸음을 친히 인도해서 뚫리질 않는 곳에 뚫리도록 강제로 이끌어 가시겠다는 그 일을 해내시는 거예요. 무슨 권세가? 피의 권세가요. 지금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전부 잘난 체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생명 나무 열매를 따 먹지 못하게 했다.” 쉽게 말해 “너는 생명이 없어. 네가 선악을 가지고 까불고 윤리, 도덕 따지는 그 자체가 죽음이고 저주”라는 거예요. 그 자체가. 나쁜 짓으로 벌 받는 게 아니고 선악 자체가 저주다. 왜? “생명 나무 내놔 봐. 생명 나무 따 먹지 못했잖아. 생명 나무 없잖아?” 그것도 없으면서 무슨 자꾸 살려고 생각하고 천당 갈 생각을 하느냔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체가 생명 나무거든요.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다.’ 했으니까. 그 떡이 세상과 접촉해서 그것을 뚫고 성공하는데 그 피로써 뚫고 나가게 되어있어요, 피 자리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 따르라고 한 이유가, 우리와 예수님 피의 만남, 피가 보이는 쪽으로의 방향성, 그쪽으로 주께서 뚫고 지나가게 해 주시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이 권세자들의 활동이 구약에 얼마든지 많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살다가 우상 숭배해서 쫓겨났거든요. 쫓겨난 기간이 70년입니다. 그래서 가게 된 나라가 바사 나라에요. 페르시아, 지금의 이란입니다. 이란 쪽으로 갔어요. 아하수에로 왕 때에 유대 나라가 포로 잡혀서 노예로 갔거든요.
에스더에 보면, 그 나라에서 미스 바사 대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1등을 해서 그 아하수에로 왕의 부인이 되는 여자가 있었어요. 그 이름이 별인데, 에스더라고 하죠. 에스더가 사적으로는 만족스럽죠. 유대인 난민, 포로가 왕후가 되었으니 영광이죠.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켜요. 기존권세가 발작을 일으키게 만들어요. 기존권세가, 세상 권세가, 마귀 권세가 발작을 일으켜서 유대 민족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요. 왕은 뭣도 모르고 그냥 도장을 찍어서 전체가 1년 후에 다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6장 1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인데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라고 되어 있어요. 사촌 오빠인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궁 안에 있다고 너도 안심하지 못해. 너도 죽어.” 이러니 에스더가 감 잡았죠. ‘죽으면 죽으리라.’ 이렇게 감을 잡은 거예요. 그래도 어떤 대책이 없어요. 어떤 대책이 없는데 아하수에로, 그 최고 권력가가 어느 밤에 잠이 안 와요. 왜 잠이 안 옵니까? 유대인 구하려고 잠이 오지 않는 거죠, 유대인 구하려고.
생명 나무와 통하는 자기 백성을 주께서 주군의 권세자에 의해 보호받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 인간들 세상에서는요, 아예 위기가 오지 않으면 되지 왜 위기를 초래하고 하나님께서 또 개입해서 그들을 인도하느냐, 하죠. 이 땅에 위기 없는 구원을 받는 자는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물과 피, 죽음이죠, 산 채로 박살 나버리는 산 채로 죽는 죽음, 산 채로 체험되는 그 죽음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하늘의 권세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죽겠다, 가 아니라 아예 그냥, 그냥 죽는 거예요. 죽는데 이유를 달아주는 거예요. 살다 죽으면 안 돼요. 살다 죽으면 안 됩니다. ‘아이고, 나중에 요양병원 가서 예수 믿자.’ 소용없어요. 그냥 그거는 살다 죽는 거고, 죽어가며 죽는 것 말고 생생하게 살아있으면서 ‘왜 내가 죽어야 해?’라는 인식을 품으면서 이 세상에 대한 권세, 내가 사람 믿고 살았던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죽음을 맞이해야 해요.
‘아, 내가 늙어 죽는 것 말고 세상이 나를 잡아 죽이는구나. 나를 잡아 죽이는 세상이구나, 이 세상이.’ 나는 이 세상을 살려고 하는데 잡아 죽이는 세상이에요. 왕이 어느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그다음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누구 있느냐?” 해서 밤중에 불러내 모르드개 확 올려버리고 모르드개를 핍박했던 하만을 낮추고, 그래서 1년 뒤에 유대인들은 완전히 ‘음메 기살어.’ 나머지들은 ‘음메 기죽어.’ 되어 버린 거예요.
이러한 위기가 바로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져요.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다 아시는 이야기지만, 다니엘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건들지 말아야 할 자를 건드려 버렸어요, 권세자로서. 다니엘 세 친구를 건드려버리고 불 속에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불 속에 넣을 때 기존의 느부갓네살 권세를 총동원해서 다니엘의 세 친구를 집어넣었는데 그 권세보다 더 센 권세의 네 번째 사나이가 불 속에서 세 친구와 함께 있게 되었던 겁니다. 기가 차죠. 깜짝 놀랐습니다. ‘이야, 내 위에 또 있구나.’ 내 위에 누가 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다리오왕 최고 권세자 아닙니까? 그 다리우스 왕, 그 때는 바빌론이 바사 나라로 바뀌었는데, 그때 거기에서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는 사자 굴에 집어넣는 법을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탄핵이죠. 다니엘 탄핵. 갑자기 정치적 발언이 나오는데. 법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다니엘이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걸 알고 그렇게 한 거죠. 징을 치고 할 때 전부 우상에게 절을 해야 하는데 다니엘은 문을 활짝 열고 기도를 한 거죠. 뭐 사진 찍고 난리 났죠. 빼도 박도 못하게 증거 나왔다고. 그래서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습니다. 위기에 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봉함으로써 다리우스 왕의 명령체계, 인간들이 도장 찍는, 최고 권력자가 하는 이 사인을 의미 없이 허망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권세를 봤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주와, 그리고 주를 따라 움직이는 종의 관계로서 이미 창조 세계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종이에요. 이 종과 주인의 관계를 악마가 반대로 바꿔놨거든요. 그래서 이 반대로 바꾼 것을 다시 반대로 바꾸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바로의 나라, 애굽 나라의 종으로 팔려가게 만들었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죠. 이삭의 하나님이고 야곱의 하나님이죠. 그 자손들은 바로의 종이 되는 거예요.
분명히 아브라함의 복된 후손들인데 애굽 나라의 노예가 된 겁니다. 왜? 왜 그렇게 돼야 되는 거예요? 모래시계처럼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 위해서인 거예요.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는 이게 참 어려운 말인데요. 약간 쉽게 하면, 전체 시간을 식빵이라고 한다면 식빵은 이미 고정된 거예요. 이 고정된 식빵을 슬라이드 식으로 자르는 거예요.
자르게 되면 이 식빵의 얇은 한 장마다 두 개의 이질적 요소가 같이 섞여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는 이미 확정된 것, 다른 하나는 불확실한 것. 인간의 선악 체제는 불확실해요. 그러나 생명은 확실한 거예요. 잘게 썰어진 단면 하나가 그 세대를 구성합니다. 그 세대에서 확정된 새로운 선함이 나와요. 선함, 이것은 기존의 선악과 자체에서 말고 생명 나무가 이 시대 속에 섞여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만이 선한 일이 돼요.
로마서 8장 28절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선의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악의 개념을 알면 그 반대가 선이 되겠죠. 악의 개념이 마태복음 25장 26절에 보면 나옵니다. 달란트 비유에 세 명의 직원이 있는데 한 직원이 악한 직원이에요.
그 주인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다시 말해서 주인이 준 것은 주인에게 귀속이 되야 하는데 중간에서 차단시키는 것이 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은 무조건 선인 이유가,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이미 계약된 것이 선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 선함이 주어짐으로써 “누가 그 선을 방해해?” 그걸 악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악의 특징이 뭐냐? 개인주의에요. 나는 내가 알아서 내 인생 산다, 이게 악이에요.
세상 권세의 특징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권세를 주었는데 이 권세가 점점 뭘로 변질되느냐? 왕, 교주 또는 대표자 개인주의로 변질돼 가는 거예요. 제가 처음에 신학교 가기 전에 교사로 있으면서 교장이랑 얼마나 싸웠는지 몰라요. 교장이 내린 지시에 대해 가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교장 선생님!” “왜요, 이 선생” “이게 학생을 위한 겁니까, 재단을 위한 겁니까?” 이렇게 따졌어요. 잘렸죠.
모든 학교 시책이 학생들 편에 서서 해야 하는데 재단이나 선생님 편들기 위해 해버리면 이것은 학교가 아니에요. 학교라는 권세가 나쁜 것은 아닌데 변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이 국가의 권세를 짐승이라고 한 거예요. 개인주의에요. 주님은 섬기러 오신 분이에요. 자기 몸을 주러 온 거예요. 그러나 모든 개인은 남을 죽이고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혼자 밥 먹고 살면 되지.’ 그게 부패한 마음이라니까요. 그게 부패한 마음이에요. 그게 천하보다 더 부패한 마음이에요. 심지어 그걸 본인이 몰라요. 자꾸 남들도 그렇게 사는데 왜 나는 안 되냐는 식이죠. 왜 사람을 믿습니까? 피 흘린 주님 앞에 서지 않고요. 인간에게는 바르게 산다는 것이 없습니다. 선한 게 아예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악한 인간을 데리고, 자기 백성을 데리고 선을 가지고 뚫고 나가는 그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환경을 가지고 인간을 다뤄요. 종과 주인 사이를 거꾸로 뒤집기 하는 겁니다. 뒤집기 할 때에 히브리인들에게 뭘 주느냐면, 이미 모든 것이 완료된 것을 줘 버려요. 만나. 히브리인들은 그걸 두고 “이게 뭐지? 과자 같기도 하고.…” 히브리인들은 그걸 과자로 먹는데 주님께서는 신명기 8장에 그걸 말씀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이 스스로 광채를 내요. 빛이고, 소금이고, 스스로 하나의 반딧불 같아요. 어두운 이 부패한 마음속에 만나를 먹으면 안에서 빛이 나요. 말씀이 빛이 난다고요. 나는 모자라고, 나는 부족하고, 나는 어설프고 확실치 않은데 내 안에 들어온 그 말씀은 자체적으로 스스로 발광해요. 스스로 완성된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주님께서는 주인과 종의 위치를 바꾸느냐 하면, 아예 종 된 것을 자기 아들로 삼느냐 하면 죽였다가 살려버려요. 그게 완성된 거예요. 죽였다가 살리는 것. 히브리인들에게. 죽었다가 사는 것은 나중에 예수님이 그렇게 되시잖아요. 그걸 미리 말씀 속에, 언약 속에 집어넣는다고요. 그게 바로 선한 일이고 그게 생명에 관한 일이에요.
이게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늘의 일이에요, 요한복음 3장에서. 인간은 선한 일이 없어요. 선한 일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모든 세력은, 세상은요, 이 선한 인을 보호해야 해요. 선한 백성을 보호해야 돼요. 이사야 45장 1절에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고레스라 해서 바빌론 다음에 바사 나라가 오는데 그 고레스 왕,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네 본국으로 돌아가!” 하는 그러한……, 분명히 이방 권세에요. 언약을 모르는, 저주받아 마땅한 이방 권세자가 도리어 누굴 돕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준해서 자기 백성이 약속의 땅에 되돌아오도록 모든 것을 도와주는 충실한 종, 메시아처럼 기름 부은 자를 고레스라는 이름으로 밝힙니다. 아직 고레스라는 인물은 태어나기도 전인데 이름을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밝혀요.
이사야 44장 28절에 보면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불에 타버린 성전, 위기죠. 하지만 고레스, 이방 민족의 권세자를 통해서 다시 재건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그 효과를 우리 내부에 간직한 자는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히브리인들, 애굽에 있던 자들 안에 감싸져 있어요. 포근하게 있다고요. 그 히브리인들이 이제는 이스라엘 나라가 되면서 펼치기에 들어가요. 감싼 것을 펼치기에 들어가요. 그 전에 세상 권세와 주님의 권세가 대립되는 동시에 이게 재설정이 돼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옛것은 새것에 의해서 죽은 것이고 새것에 의해서 옛것이 다시 옛것으로 부활되는데 이것은 기존의 권세에 대한 재활용입니다.
이미 맛이 간 권세를, 복음과 복음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권세를 활용하시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재설정하는 겁니다. 그 재설정에 죄많은 우리도 같이 들어가 있어요.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은 사람은 우리의 이 아담의 죄성, 나밖에 모르는 것이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재설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삶이 즐거운, 아주 즐거운 죄짓는 삶이 되는 겁니다. 즐거운 죄짓는 삶. 내가 바로 용의자고 내가 바로 죄인인 것을 날마다 세상과 더불어 살면서 확인하고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게 재설정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기 백성만을 골라서 가려내는 주님의 권세의 방식이에요.
아무리 교회 다니고 아무리 뭘 해도 인간은 ‘나는 혼자 못살아. 같이 더불어 살아야 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하나의 예를 들며, 조선 시대 때가 무슨 시대냐? 신분 시대에요. 신분 사회에 무슨 선한 것이 있겠습니까? 날 때부터 종으로 태어났고 날 때부터 서자로 태어나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데 해봐야 테러범, 홍길동이라는 테러범밖에 더 될 것이 없잖아요.
그런 신분 사회 때 어떻게 선한 것이 있을 수 있느냐? 그리고 옛날 조선 시대 때에는 쓰개치마라는 것을 머리에 썼어요. 여자들이 밖에 나갈 때 쓴다고요. 지금 쓰개치마 쓰고 다니라고 하면 난리도 아닐 겁니다. 표 안 나옵니다. 매시대마다 확정된 것과 불확실한 것을 겸하여서 보여주는 거예요. 앞으로 몇십 년 뒤에 한 오십 년 뒤에 어떻게 될지를 몰라요. 또 무슨 희한한 문화가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한결같은 것은 뭐냐 하면, 어느 시대든 내가 죄인이라는 것, 심히 마음이 부패하다는 것, 부패하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고 권세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전쟁해서 가자지역 건물이 반이 날아갔어요. 반이 없어졌어요, 반이 없어졌다고요.
그러면 거기 국민들이 방송에서 인터뷰를 할 때 마땅히 나올 말이 뭐냐 하면, “우리 하마스 정권이 잘못됐어요.” 그 말이 한마디라도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일체 안 나와요. 참 희한하지요. 그렇게 망하면서도. 이스라엘이 나쁘대요. 자기는 안 나빠요. 자기를 용의 선상에 놓지를 않습니다. 이건 권세의 재설정이 안 되어서 그래요.
그런데 성도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냥 받는 거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뭐든지. 자기에 대해서 평가하지 않고 자기에 대해서 따지지 아니하고. 뚫고 지나가는 것은 주께서 알아서 뚫고 지나가는데 ‘아, 주님이 이런 경로를 밟았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육에 속한 사람은 그게 없어요. 소위 세속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그 중들, 뭐 여자들까지 머리를 깎았으니까 얼마나 큰 용기를 낸 겁니까? 막상 그 동네에 가게 되면 그 동네 나름의 똥군기, 군기라는 게 있어요. 주지 스님 불러놓고 “여기 밥 먹으면서 밥 다시 섞어 먹는 놈 나와.” 다시마를 섞어 먹었다 그 말이에요.
“어? 너 머리 밀었네. 질레트로 민 거야? 그런데 머리에 상처가 없네. 여기 질레트로 머리 민 놈 나와. 6중 날로 밀었어? 내가 말했지? 2년 차 이상 되어야 6중 날로 밀라고. 옛날에 내가 처음 왔을 때는 도루코 면도날로 밀었어. 이게 어디서 질레트 6중날로 밀고 있어. 그리고 어제 백팔 배 하면서 무릎 보호대 한 놈 나와. 너는 백팔 배 하면서 101에서 103으로 그냥 건너뛰던데? 그리고 머리에 피부보호제 바른 놈 나와. 또 연등축제 때 가발 쓴 놈 나와. 그리고 밥맛 없다고 서브웨이에서 vegetable로 배달의 민족 배달시킨 놈 나와.”
이게 다 군기 잡는 거예요. “나 혼자 극락 가겠다는 짓이야? 티꺼워? 어제 반야심경 외우면서 립싱크 한 놈도 나와. 이런 것도 못 참겠으면 속세로 꺼지세요!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체크할 짬이야?” 이런 식으로. 이게 소위 성스럽고 거룩한 절에서 일어나는 일, 물론 코미디에서 나왔지만 이런 것이 성당에는 없는 줄 압니까? 신학교에는 없는 줄 알아요? 모든 조직에 없는 줄 알아요?
왜 그것을 허용하느냐? 이 세상은 나 혼자 못살기 때문에, 나 혼자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나 혼자 사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거든요. 세상이 이렇게 만만치 않아요. 자유도 얻고 구원도 받고, 아, 무슨 그런 환상을 꿈꿉니까? 이 땅에 자유라는 게 없어요. 고까우면 죽든지 살고 싶으면 복종하든지, 주께서 우리에게 세상 권세를 주신 것은 복종의 컨셉으로 무장하라는 거예요, 복종의 컨셉으로.
최고의 컨디션, 최고의 컨디션은요, 복종의 컨디션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복종하라. 그리고 심판은 내가 알아서 해줄게.”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가 나대지 말라는 말이지요.
주께 복종하는 거예요. 왜 이젠 아들이니까, 종이 아니니까. 아들이니까 얼마든지 복종할 수 있는 거예요. 이미 신분적으로 확정이 되어 있으니까요. 종의 특징은 그 사람의 인물보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종의 특징은 그 사람의 일로 나타나는 거예요. 허병원에 가니 간호사가 있는데 얼마나 간호사가 일을 잘하는지요. 일을 너무 잘해요. 안심이 돼요.
그 간호사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환자에게 말을 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에요. 너무나 빠르게 이야기를 해요. 항상 쉬지 않고 빨리 움직여요. 내과 의사도 빨리 움직이지요. 운동화 신고. 간호사도 빨리 움직여요. 그러니까 병원에 활기가 차요.
연탄재라 하는 것은 발로 차도 돼요. 이미 죽었으니까. 골목에 버려진 연탄재는 스트레스 풀기 위해서 발로 차는 재미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연탄재 발로 찼다고 “어? 네가 왜 차?” 이러면 이것은 재 아니에요. 안 죽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철저하게 성도로 하여금 내가 육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육이라는 것을.
내 힘으로 어떤 수완을 부리고, 내 힘으로 어떤 노력을 해도 이 세상 권세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계속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여러분, 아이스크림을 보게 되면 특징이 있어요. 아이스크림의 첫맛과 끝 맛이 똑같아요. 이걸 뭐 대단한 발견이라고. 콘으로 되어 있는 아이스크림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스크림이 남아 있는 한 그 맛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마귀의 종이었고 나중에 예수님의, 주님의 종이 되잖아요. 종이 된다는 말은 물론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종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출애굽기 4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22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아들인데 이제부터는 종으로 사는 거예요. 종이라 하는 것은 뭘 하는 그 기능으로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인물 잘생기고 돈 있고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얼마나 일을 빠릿빠릿하게 하는가예요. 시키는 대로. 어느 정도로? 자기에 대해서 평가 안 할 정도로. 자기에 대해서 따지지 않을 정도로 주인이 시키는대로 그냥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연탄재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가 마귀의 종이기 때문에 이 땅에 육신으로 살면서 철저하게 뭘 경험해야 되느냐 하면, 내가 죄의 종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기에서 매일같이 발견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도 새롭게 발견해야 되는 거예요. 한 시대에서 나는 그 시대가 시키는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 어느 정도로 움직이느냐?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니 어떤 사람이 회사 일 하다가 횡령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인이 알고 “네가 정리하고 나가라” 하고 쫓아냈습니다. 3절에 보면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땅을 파자니 힘도 없고 빌어먹으려니 내가 망가진 게 부끄러우니 남은 것은 뭐냐? 사기 치는 것 외에는 없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구원을 받았어요. 이 사람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빛나요. 이게 바로 오늘날 성도의 위상입니다. 현재 이렇다는 거예요. 불의한 청지기가 구원을 받는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지 뭐가 기쁜 소식이에요! 갑자기 내가 왜 고함을 지르는가. 무슨 최선을 다해요? 주의 말씀대로 빛과 소금 된다면서. 그런 것은 없어요.
세상은 우리의 잘난 얼굴을 망가진 얼굴로 만들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이 그 망가진 얼굴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왜 망가졌느냐? 일하신다고 망가졌지요. 우리도 일을 하지요. 이 사탄의 지배 아래서. 악마가 우리에게 뭘 요구하고,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악마한테 맘 맞춰줬는지를, 이미 아들 된 입장에서, 이 권세 아래서 맘껏 복종하시면 그 세상 권세와 우리 안에 있는 말씀, 그 틈새에서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선한 것이 나오는 거예요. 그 선한 게 뭐냐?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세리가 기도하는 것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오직 십자가 외에는 나는 자랑할 게 없다는 것, 이것보다 더 선한 일 없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 짐승 같은 세상 권세에 던진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어떤 고생과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같이 당할 때 바로 더이상 우리는 악마의 종이 아니고 주님의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권세, 어떻든 믿어서 일단 챙기고 살고 보자는 식의 이 본성, 만물보다 더러운 것이 우리 마음, 바로 이 마음을 위해서 주께서 피를 흘렸다는 이 사실, 이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생명인 것을 이제는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