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자

성도가 그리스도안에서 살아있다는 의미(이준)

아빠와 함께 2013. 1. 26. 17:39

보배와 질그릇의 관계 
이준   2006-11-06 00:15:56, 조회 : 172, 추천 : 4

                                                                                       보배와 질그릇의 관계
                                                              부제 :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는 표현의 이해를 재고함

혹자가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자로 보고, 그래서 성도는 비중생인과는 달리 죄만 짓다 지옥 가는 게 아니며, 성령의 열매가 맺히며 예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보는 입장에서 쓴 글들에 대하여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위하여 이 두서 없는 글을 써내려가게 되었다.
위와 같은 논지를 담은 글들에 대하여 기본적인 입장은 필자 또한 동일하다. 다만, 위와 같은 논지를 띤 글들이 한편으로 견지하는 바, 성도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죄만 뿜어내는 존재가 아니라고 보는 데 대하여 짚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혹자의 글에서 적극적으로 옹호되는 명제는, ‘성도에게서는 중생하지 않은 불신자의 전적 타락성만을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지가 근본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성도들도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몸은 죄로 죽어 있는(롬 8:10)” 존재라는 사실이다. 아울러, “몸은 죄로 죽어 있다”는 의미가 어느 정도까지인지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개역개정판. 이하 성경 구절 인용은 개역개정판에 의거함.)

우선, 롬 8:10에서 “몸”을 지칭하는 단어 soma의 의미에 대하여 확인해 두자.

“...신약성서에서도 특히 바울이 몸(소마)을 말할 때마다, 그것은 전인을 뜻한다.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이 곧 몸이다. 육(사르크스)은 인간의 육체성에 매여 있는 죄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죄에서의 해방은 육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그러나 바울은 헬레니즘의 이원론보다는 구약성서의 노선에 더 가까이 서 있다. 육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추어 본 인간의 허무성을 말한다. 육은 영혼이나 몸과 대칭되는 악한 죄성을 갖는 존재가 아니다...”
출처 : 이신건(성결대학교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전인치유의 신학적 이해. 인터넷 자료.


롬 8:10의 soma가 위와 같이 “전인”, 곧 인간의 전인격을 가리킴을 전제로 하여 롬 8:10을 죄로 인한 몸의 타락성을 부각시켜 다시 풀이해 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풀이1]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성도 - 롬 8:10은 분명히 사도가 성도에게 하고 있는 말씀임을 명심하라 - 라는 인간의 전인격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풀이2]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성도라는 존재는 전적으로(전인격적으로) 타락한 성품만 지닌 채 그 타락한 성품만 드러내지만,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결국, 혹자는 위와 같은 논지를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이다.

성경은(위의 롬 8:10) 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심으로써 살아 있는(혹은 살게 된) 자”라 표현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허물과 죄로부터 살리심 받은 자라 할 수 있다(엡 2:1, 5).
고후 4:7에 비추어 표현해 보면, 보배가 안 담긴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가 담긴 질그릇이라 할 수 있다.
요한복음 1장에 언급된 “빛”과 관련하여 표현하자면, ‘어둠에 놓여 있었으나 빛의 비침을 받게 된 자들’이라 할 수 있다(요 1:4에 의하면, “생명”을 “빛”이라 환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둠”은 ‘사망’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빛과 어둠, 즉 생명과 사망이라는 지배 세력들 간의 대결 구도 하에 놓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황에서 유추해 보면, ‘빛’과 ‘빛을 받은 사람들’은 별개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성도는 빛이 비쳐진 존재(대상)이지, 빛 자신도 아니요, 빛의 일부도 아니다).

다음으로, 롬 6:11로 옮겨가보자.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곧, 생명 관계이다. 이에 대하여 ‘사망’은 생명 관계가 단절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관계’란 언약적 관계를 말한다. 언약은 생명과 사망을 가르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엡 2:14-16)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 곧 성도가 되었다는 말을 관계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위와 같은 것이다. 성도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말씀들이 초두에서 언급한 롬 8:10의 의미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롬 8:10과 위의 말씀들의 조화로운 이해가 요구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화로운 이해의 필요성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으되, 그 살아 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며,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도 여전히 죽은 존재이되, 어떤 의미에서 여전히 죽은 존재라는 말인지 규명해야 함을 골자로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다른 성경 구절들도 얼마든지 있지만 일단) 로마서, 갈라디아서 및 에베소서 일부 구절들을 함께 연관지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갈 2:20에 의하면 사도는 분명히 내가 사는(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는(살아 계시는) 것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럼에도 20절 후반부에서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은...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여전히 “나”라는 자기 자신이 사는(살아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 그러나, 그 내용을 가만히 생각해 보라. 과연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과연 성도가 자력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인지를.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도인)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셔야만 가능한 일이 아니던가(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계시는 존재라야만 성도라 불릴 수 있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 점을 갈 2:20은 자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갈 2:20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 일차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놓인 성도라는 존재를 두고서 산(살아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성도 자신이 아닌, 성도 안의 그리스도 때문이다’라는 데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영) 자신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성도가 살아 있다는 말 자체가 성립 안 된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지 않는가. 즉, 성도는 죽어 있다. 살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럼에도 성도가 살아 있는 것처럼 인식되는 이유는,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도 우리는 신불신을 막론하고 인간은 이미 아담 속에서 ‘죽음’을 경험하였으며, 그 이후 자체적으로 다시 살아난 적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생각을 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고,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해서 살아 있다고 표현하는 게 성경의 입장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불신자들은 물론이고, 나아가 성도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성도가 복음에 대하여 거론하고 말씀을 나누며, 서로 교제하고 봉사하는 것 등은 그 속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이지, 성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갈 2:20이 견지하는 바이다.
성도더러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그 속에 살아계시기 때문이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자체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부터가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기 위한 표현이지, ‘성도가 살아나게 되었음’을 증거하기 위한 용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도를 ‘굳이’ 따로 떼어내서 이해하자면, 살아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요, 성도는 여전히 죽어 있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는 ‘죽은’ 성도 안에 거하신다. 이것을 통상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성도가 살아 있다”는 식으로 진술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들이 이런 식의 표현, 즉 “그리스도안에 성도가...”라는 표현을 두고서 그리스도가 무슨 비닐하우스인가라는 식으로 연상한다거나,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는...”이라는 표현을 놓고서 성령이 무슨 만두피 속의 소인가라는 식으로 연상을 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좋다(좋아서 좋다는 게 아니라 인간의 원천적인 언어 표현의 한계 때문에 하는 말이다). 핵심은,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이시지, 성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실제로는 지구가 태양 주변을 공전함에도, 통상적으로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성도가 살아있느니 없느니...라는 식으로 우리가 논의랍시고 떠들어대어도, 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는 말이다. 성도(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인간)는 여전히 죄와 허물로 그 몸(전인격체)가 죽어 있다. 롬 8:10을 다시 보라.
아무리 우리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통상적으로 말해왔고, 또 그것이 보편적인 진리인양 우겨도 진실은 그게 아니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아무리 온갖 성경 구절들을 동원하여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강변해도, 실제로 살아 계신 분은 성도가 아니라 (성도 안에) 그리스도이시라는 진실에는 변함이 없다.
갈 2:20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는, 눈에 보이는 실제로 여겨지는 우리 삶과 관련된 실체가 따로 계신다는 점을 드러낸다. 살아 있는 실체는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시라는 점 말이다. 그렇다면, 이 와중에 성도더러 살아 있다, 살아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어떤가? 실체를 보지 못하도록 오해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리스도라는 실체가 버젓이 살아 계신 마당에 그러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외침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롬 7:4로 옮겨가서 성도의 ‘죽음’ 문제를 살펴보자. 일단, 성도가 그 무엇에 대해서 죽었든지 간에 롬 7:4의 맥락을 보면, 성도는 ‘죽음’에 앞에서 ‘피동적인’ 존재임이 드러난다. 성도 본인이 자원하고 자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마치 ‘휩쓸려’ 죽은 것처럼 말이다. 즉, 죽고자 원해서 죽은 것은 성도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러한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진(자원)하여 죽으심에 동참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율법에 대하여 (덩달아) 죽은 자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이 점이 갈 2:19에서 다시 거론된다. 갈 2:19의 ‘표현방식’은 마치 사도(또는 성도) 자신이 (자진해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듯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앞서 태양과 지구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성도의 살아 있음과 그리스도의 사심의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와 똑같은 방법으로, 실제로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시지만(롬 7:4에 근거), 우리가 그 죽으심에 동참됨으로써 우리도 율법에 대하여 죽임 당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을 읽어내야 한다. 하지만, 정작 갈 2:19은 이러한 내막을 '통상적으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식의 능동형으로 표현하는 것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한편, 여태까지 성도라는 존재를 두고서, 율법에 대하여는 죽었고, 실제로는 성도 그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았다. 이제는 “성도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데서 살아난 존재”라는 말씀(엡 2:1)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허물과 죄에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은, 엄밀히 말해 허물과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부터 놓여났다고 이해하는데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허물과 죄 때문에 사망이라는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하는 게 누구냐는 것이다. 다름 아닌 율법이다.
(선한(롬 7:12) 율법은 늘 죄와 불가피하게 동반자적 관계에 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거룩하신 선악 지식이 아담의 범죄 이후 늘 그 선악 지식(내지는 의식)과 인간의 죄성이 결합되게 된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렇다면, 허물과 죄에서 살아난 존재라는 말은 곧 율법에 대하여 죽임당한 존재라는 말과 같다. 근본적으로, 허물과 죄를 극복하는 것, 달리 말해 허물과 죄로 인한 대가를 치르라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분은 유일하게 딱 한 분, 즉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성도가 살아난 존재”라는 말을 이러한 내막과 관련지어 ‘순환논리적으로’ 정리해 보자.
성도가 살아났다는 말은 성도가 허물과 죄로부터 살아났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성도가 율법의 요구 - 허물과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라는 - 를 충족시켰다는 말이다. 그런데,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예수님의 행위는 율법을 다 지켜내는 방식이 아니라 율법에 대하여 그냥 죽어버리시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성도가 허물과 죄로부터 살아났다는 말은 성도 자신이 율법의 요구 - 허물과 죄에 대한 대가 치르기 - 를 충족하여 살아난 게 아니라, 그 요구를 충족시키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살아났다는 표현이 지닌 의미와 가치와 공로는 오직 예수님께만 돌려져야 하며, 성도에게 돌려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인간들이 이해하든 못하든 간에...근본적으로...살아났다는 말은 예수님께만 해당된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렇게 말하면 인간들이 못알아들으니, 성도(라는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났다는 식으로, 즉 인간들이 - 사도들도 평소에 -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이해하는 의사소통 방식으로 표현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우리들에게 하나의 문제거리로 다가오는 이유(들 중에 한 가지)는, 실제와 통상적인 언어 사용 사이의 내막을 우리가 언어적으로 잘 처리해내지 못하는데 기인한다.

(참고로...이 글의 핵심 논지는 아니지만, 성경에 자체적으로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하여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은,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앞서 우리는 로마서 일부 구절과 에베소서 일부 구절의 의미가 서로 상충되지 않음을 사례로 하여 살펴보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혹자의 글(손무성.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대한 오해에 대한 고찰. 십자가마을 칼럼 게시판)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명제만을 강조하면서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도) 여전히 죽어 있다(롬 8:10)는 명제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 글을 제대로 읽어본 자라면 누구나 상기하게 될 것이다.

롬 8:10로 되돌아 가보자.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우리가 또 하나 상기해야 할 점은(이 글의 초두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말씀이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즉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점이다. 보라. 이 구절에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성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임에도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라고 하신다. 다름 아닌 너희 성도들의 몸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 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놓인 성도”라는 표현을 억지로(?) 분리시켜서 그리스도와 성도로 떼어놓고 본다면, 몸이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성도 쪽이다. 그리스도 쪽이 아니다.

위의 구절을 놓고서 몸(soma)을 인간의 전인격체가 아니라, 살덩어리로만 이해할 경우 문제는 달라진다. 즉, 뒤에 언급된 “영(pneuma)”을 인간의 영혼으로 오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은 문맥적으로 성령을 가리킨다. 본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로마서 8장의 범위를 1~17절로 한정지어보면, 이 본문에 등장하는 “영”이라는 단어(개역개정판 기준)는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괄호 안의 숫자는 해당 구절에서 “영”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횟수).

8:4(1), 8:5(2), 8:6(1), 8:9(3), 8:10(1), 8:11(2), 8:13(1), 8:14(1), 8:15(2), 8:16(1)

아울러, 2절과 16절에는 성령을 가리키는 ‘성령’이라는 직접적인 명칭이 각각 1회씩 등장한다. 그리고, 15절의 “종의 영”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0절의 “영”을 인간의 영혼으로 오해하는 자들도 있지만, 해당 본문 전체의 문맥을 보면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성령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께서도 직접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육”은 철저히 인간에게 속한, 인간과 관련된 것이다. “영”이라는 말은 인간과 관련된 것과는 별도의 것을 말한다. 즉, 예수님께 속한 것을 가리킨다. 굳이 인격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따라서, “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왜 중요한가? “영”이라는 말이 인간의 영혼을 가리킨다면, “몸”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체(살덩어리)만을 의미하겠지만, “영”이라는 말이 성령 내지는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과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면 “몸”이라는 말은 오직 인간에게 속한, 인간과 관련된 것, 내지는 인간의 전인격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을 전제로 하여 롬 8:10을 다시 보면, 사도는 성도를 향하여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이나”라고 말씀하심을 알 수 있다. 즉, 중생한 인간도 (불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죄성(전적 타락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인더러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자기 근본 속성(아담적 태생으로서의 죄성)은 여전히 동일하게 ‘죽음성’, ‘죄성’, ‘전적 타락성’을 띠고 있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육은 무익하며 살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이라 말씀하신 것이다.
(참고로, 요 6:63의 “육”은 롬 8:10과는 달리 soma가 아니라 sarx이다. 요 6:63과 롬 8:10을 종합해 보면(조화시켜 보면) 인간은 전인격체적으로든, 살덩어리로든 간에 그야말로 “영”에 비하여 인간을 살리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성도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놓인 존재를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는 자를 말한다. 위의 여러 성경 구절들에 대한 논의에 대하여 중간 정리를 해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 하더라도 몸(전인격)은 여전히 죄로 인해 죽어 있다.” 이를 달리 풀이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도 여전히 전인격적 타락성을 그대로 담지하고 있다.” 이를 그리스도의 공로와 연관지어 확장시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살아 있다는 말은 중생 이전과 같은 전적 타락성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공로 덕분에 살아 있는 자로 간주된다(여겨진다, 롬 6:11 “...여길찌어다”).” 왜 굳이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간주하라(여기라)”고 하셨을까. 살아 있는 실체(주역)는 성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성도의 행실을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수시로 넘어지지 않던가. 오직 온전함의 실체(주역)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혹자의 글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논지를 띤 글들 대할 때, 필자가 느끼는 것은, 그 글들은 성도안에 놓여 있는 죄성을 두고서 ‘전적 타락성’이라 여기지 않고 ‘부족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어째서 아담의 속성이 불신자들에게서는 ‘전적 타락성’으로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성도에게서는 ‘부족함’으로 바뀌었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롬 8:10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굳이 ‘죽으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시려 했는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전적 타락성이 그야말로 ‘너무나 지독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전적인 것’은 ‘부족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죽는 것’은 ‘아픈 것’과는 수준이 다르다.
‘아픈 것’이라면 어디까지나 ‘다시 나을 수도 있는 것’과 연결된다. 즉, ‘정상(충족)’ 상태에서 한시적으로 이탈한 ‘비정상(부족)’ 상태일 따름이다. 그러나, ‘죽음’의 문제는 ‘부족’, 즉 ‘일부’가 아니라 ‘전부’와 관련된 사안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공로가 ‘전부’이냐 ‘일부’이냐, ‘믿음’이 지닌 구원 효력이 ‘전부’냐 ‘일부’냐, 성도에 대한 성령의 위상이 ‘전부’냐 ‘일부’냐(즉, 성령이 주체자요 주도자냐, 아니면 조력자일 뿐이냐) 등의 사안들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참로고, 성령은 예수님의 동역자요 동반자이시지, 성도라는 인간들의 ‘시다바리’가 아니시다).

반대로 이번엔 이렇게 생각해 보자. 인간(일단 신불신을 막론하고)의 죄성이라는 게 ‘전적 타락성’을 띤 게 아니라, ‘부족함’이라는 성질의 것이라면, 지옥에 한 시간쯤, 아니 하루쯤...만 담궈서 그을리게 하시면 되지, 왜 굳이 영원히 쳐넣으실까라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그만큼 인간의 타락성이란 ‘전적인’ 것이요, ‘철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님께서는 “죄인 중에 내가 죄수니라(딤전 1:15)”고 하신 적이 있으신데, 이것은 다메섹으로 가는 노상에서 회심하기 전까지 저질렀던 과거의 극악무도한 죄들만을 회상하며 술회한 것일까, 아니면 이러한 발언을 하던 그 시점에도 늘 그러한 심정으로 살아가며 고백한 것일까. 어떤 이들은 문맥을 보건대 딤전 1:13절을 거론하면서, 사도 바울의 그러한 심경의 고백은 과거에 기인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고마해라 마이 무웃다 아이가...”라는 힘겨운 신음조차 없으신 주님...사도 바울은 “몸은 죄로 죽은 것이나...”에 등장하는 바로 그 몸을 자기 자신이 걸치고 숨쉬고 있다는 현실 자체가 빌라도의 관저와 골고다에서만이 아니라 ‘늘’, ‘끊임없이’ 그 분의 머리를, 그분의 옆구리를, 그분의 손과 발을 찔러대는 것임을 고백했던 것이라 본다.

아울러, 우리(성도)는 우리의 몸과 예수님의 몸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성도의 몸은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죄로 인해 죽은 것이라 선언되었음을 앞서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런데, 성경은 아담의 몸이 아닌, 낯선 몸을 말씀하신다. 인간의 몸과는 다른 몸, 즉 형태는 인간의 몸과 같은데 그 속에 죄가 없는 몸 말이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인간의 몸은 이미 죄로 죽어 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역설한 젊은 천재 신학자의 손을 이 시점에서는 정말 열렬히 들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문제는, 그의 손을 언제까지 들어주어야 하느냐, 바로 중생 이후까지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 신학자와 그의 후예들은 반대할는 지 모르겠지만, 정작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사도이다. 롬 8:10을 상기하라.
‘죄로 죽은 몸’의 문제는 현상적인 차원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생래적이면서도 ‘끝까지 가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성도 또한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구조 속에 출생한 것이다. 이 폐허가 된 구조물을 마치 장막으로 덮듯이 덮어버림으로써(계 7:15) 구원을 이루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는 자가 성도...”라는 말은 성도의 몸이 죄로 인해 죽은 몸이라는 사실까지도 함께 담지하고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죄 있는 몸들’이 ‘죄 없으신 몸’의 희생으로 뒤덮혔기 때문에 죄 없는 몸처럼 하나님께 간주될(여겨질) 따름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성경적 구원이다.

그물 비유를 들어볼까 한다.
바다는 아담의 세계이다. 죄, 허물, 사망, 율법, 선악의 지식과 의식, 저주 받은 노동이라는 성분으로 구성된 바닷물로 가득 찬 인간 세상 말이다. 이 바다를 누비고 다니는 결코 터지지 않는 견고하고도 특수한(살아 있는) 그물이 하나 있다. 이 그물 안으로 들어온 물고기들이 성도이다. 물고기는 그물 안에 있어도 여전히 그가 태어난 바닷물을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나가는 천적들에게 먹히지 않는 이유는 이 그물 덕분(?)이다(자신들을 포획한 그물임에도...“덕분(?)”이라니...그러나 정말 성도라면 “덕분”이라는 말만 튀어나올 것이다). 물고기는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자신의 살아 있음이 아니라 그물의 견고함과 위력에 감탄한다. 이쯤 되면 물고기들이 그물을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물이 물고기를 싣고(끌고) 다닌다는 걸 새삼 실감해야 할 터이다.
물고기가 그물을 몰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물이 물고기를 끌고 다닌다...이 상식적인 원리가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는 성도”라는 명제를 이해하려 함에 있어서는 극명한 차이를 가져 온다.
‘믿음’은 소유물이 아니라는 기본적인 명제로 우리는 되돌아 가볼 필요가 있다. 성도가 믿는 것인가, 믿음이 성도를 소유하는 것인가. 여기서도 우리 인간들의 본유의 언어적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실제로는 ‘믿음이 성도를 소유하는’ 것이지만, 현상적(통상적) 언어 표현상 우리는 ‘성도가 믿는다’고 표현한다.
‘성령의 내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도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셨다 - 개별적으로든, 관계적, 집단 유기체적으로든 간에 - 는 말을 마치 성도라는 만두피 속에 성령이라는 소가 들어온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감기약 한 알이 아무리 작아도 그 알약 하나의 효능이 자기에 비해 훨씬 거대한 인간 몸집 전체에 퍼져 인간의 몸을 제어한다는 비유가 보다 적절할 듯하다. 실로 희한한 알약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비유를 들으면서, “거봐. 알약(성령) 때문에 변화되는 거 맞잖아!”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렇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즉, ‘감기약과 인간의 몸을 따로 생각해 볼 때 감기약 없으면 인간은 언제든 그 모양 그 꼴의 상태로군.’ 성도라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라는 요소(?)만 제거(?)하면 그는 불신자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전적 타락한 아담이라는 점.
이렇게 보면, 질그릇이 보배를 담았다는 말씀(고후 4:7)도 알고 보면 보배가 질그릇에 담긴 게 아니라, 보배가 질그릇을 지배(?)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인간 언어 표현의 한계...

성도는 믿음을 ‘소유한’ 적이 없으며, 성령은 성도 안에 ‘소유물로서’ 내주한 적이 없으시다. 성도가 믿는 게 아니고, 믿음이라는 원리가 성도를 지배한다. 성도가 성령을 내포하여 살아가는 게 아니라, 성령이라는 인격적 주체께서 성도를 관리해 나가신다. 성도에게서 이러한 성질을 띤 믿음을 분리해 보면, 이러한 성격의 성령을 분리해보면 ‘그 즉시로’ 시체(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로마서는 유사한 병행구를 반복하여 기술하고 있다.

(롬 6:10-11)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구조 분석을 해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 : 죄‘에 대하여.’ +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 : 하나님께 대하여.
*성도의 죽음 : 죄‘에 대하여.’ + 성도의 살아 있음 : 하나님께 대하여.
*성도의 몸의 죽음 : 죄‘로 인하여.’ + (성도를 지배하는) 영 : 의로 인해 살아 있음.

위에서 (성도를 지배하시는) 영(성령)이 ‘성도를 살리신다’고 하지 않고, ‘(영 그 자체가) 살아 있다’고 되어 있는 표현은 왜 그런 것일까. 여지껏 논의해 온 바와 같이, 성도는 여전히 전인격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살아 계신 분은 그리스도(영)이시기 때문이다(갈 2:20). 굳이 살아 계신 한분(예수님)만 언급하면 되지 살아 있지도 않은 성도까지 언급할 필요가 있던가. 그럼에도 사도는 친절하게(?) “너희 성도들아, 너희는 본질적으로(전인격적으로) 죽어있지만,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희 자신이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신다고 믿거라”는 말씀까지 해주고 계신다(롬 6:11).

다시 말하지만, 살아 계시는 분은 ‘보배’이시지 질그릇이 아니다. 그렇다면, 질그릇 자체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은 무엇인가? 보배로부터 흘러나오는 광채는 질그릇의 소유가 아니다. 질그릇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에 등장하는 바로 그 전적으로 타락한 전인격체적 몸뚱아리의 근성 밖에 없다.

우리 인간들의 의식적 습성에 따르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한다라는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살아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덩달아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라고 표현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 살아 있다’는 표현의 의미를 두고서 여전히 기존의 의식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즉, 중생이전에는 죄와 율법에 대하여 살았지만, 중생 이후에는 죄와 율법 대신 의와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살아 있는,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석연치 않은 점은, 이 과정에서 십자가는 삶을 전환시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역할만으로 축소되어 버리고 만다는 점이 역력히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삶(살아 있음)의 주역(주체)은 여전히 성도 ‘자신’이라는 점을 포기 못하고 있다는 인상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입장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즉, 성도 자신의 살아 있음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이다. 성경은 성도가 자체적으로 살아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다른 성경 구절(갈 2:20 등)과 반드시 연관되어 제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셨지만’, 그것은 (죄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죄가 없는) 몸으로서 죽으신 것이었지, 그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분으로 드러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인간’이란 오직 이 한 분 예수님 밖에는 없다. 내막이 이러할 진대 ‘성도’라는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던가? (보배 아닌 그저) 질그릇의 속성 밖에 더 있던가?
중생 이후 인간은 빈 질그릇이 아니라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이기에 질그릇에 대하여 보배의 주체성과 영광이 비치시는 것, 즉 성령님께서 성도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의 열매를 맺으시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은 백번 천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질그릇 자체의 속성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점을 아울러 간과하거나, 약화시켜선 안 된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 혹자가 제기한 네 가지 문제들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혹자는 자신의 글을 마무리 하면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문제들을 제기하였다(손무성. 같은 글. 십자가마을 칼럼게시판).

1. 성도라는 것이 어떻게 죽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
2. 아직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있는 인간(산 것이 아니요), 아직도 저주 상태로 머물러 있는 그 인간과 교통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3. 성령이 거한다고 억지를 부려 보았을 때 성령은 ‘산 것이 아니요’ 상태의 성도에게 어떻게 내주하실 수 있는가하는 문제
4. ‘산 것이 아니요.’ 라고 하는 성도라는 상태의 죽어있는 죄인만 있지 살리신 분에 의해 산 의인에 대한 문제

굳이 답변이라 명명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위의 문제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면,

1. 성도, 즉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는 존재도 여전히 죽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몸은 죄로 죽어 있으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롬 8:10). 이에 대한 고찰이 이 글의 핵심이기도 하다.
몸이 죄로 인해 죽어 있다는 말은 이 육신(살덩어리)의 목숨이 꼴까닥 하고 끝나는 시점을 겨냥한 말이 아니라 성도에게도 여전히 서려 있는 죄성(전적 타락성)을 띠고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2.전적 타락 상태의 인간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신 예는 성경에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교통(교제)의 수준이 가능하냐는 말로 환언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질그릇에 보배가 담기는 것(고후 4:7)부터가 말이 안 되지 않느냐는 것밖에는 안 된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분명히 질그릇의 속성이 전적 타락성(죄성)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성도의 몸이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다는 말씀(롬 8:10) 등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질그릇에 보배가 담긴다는 것은 필자의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다(고후 4:7).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인간이 나서서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또한, 이러한 교통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주의 상태의 인간과 직접 교통하시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를 통하여 교통하시기 때문이다. 중보자는 오직 예수님 한분이라고 하셨다(딤전 2:5).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상태는 교통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보는가? 물론, 성도라는 인간이 직접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게 아니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든 아니든)과 직접 교통하시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시고 교통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사례로서, 출애굽 당시의 표면적인 중보자는 누구였던가. 죽임 당한 양이었다. 그런데, 양은 이미 죽었고 고기로 요리되어 먹혀 버렸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시고 그들에게 심판하지 않으셨던가. 이미 죽임 당한 어린양의 혈흔을 보시고 심판 내리지 않으셨던 것이다. 중보자의 ‘혈흔’이란 무엇인가? 중보자의 죽음이 과거로 끝나버렸음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아니면 중보자의 죽음이 현재에도 계속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내고 있음을 위함인가. 과연 십자가에 못 박혀 진 상태, 곧 저주 받은 상태란 어린양의 혈흔과 다른 것이던가?

한편, 2.와 같은 문제 제기는 매우 위험한 발상에서 비롯되는데, 만약 이런 문제의식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급기야 예수님의 초림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약이 아니라, 과거 이미 무천년설자들과 전천년설자들 간에 있었던 천년왕국 논쟁에서 수없이 오고간 주제였었다. 즉, 가시적으로 임하는 지상 왕국의 성격을 놓고서 하나님의 거룩성이 비거룩한 물질성과 과연 조합될 수 있느냐에 대한 논의 말이다(베른 S. 포이쓰레스 저(1996). 권성수 역. 세대주의 이해. 서울 : 총신대학교 출판부. / 로버트 G. 클라우스 편(1995). 권호덕 역. 천년왕국. 서울 : 성광문화사. 참조). 물론,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세대주의자들의 무지만 보더라도 어느 쪽이 보다 성경적 입장에 근접해 있는가는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필자는 앞서 이 아담 세계를 죄, 허물, 사망, 선악의 지식과 의식, 저주의 노동 등의 성분으로 구성된 바닷물로 가득 찬 바다에 비유하였다. 예수님의 지극한 거룩성, 순결성, 고귀하심, 의로우심...등에만 정신 팔려 있다면 어찌 더러운 바닷물에 그것들을 담그실 수 있겠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게 가능했다는 것이다. 묵시 세계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역사 세계에 들어오셔서 처음 외치신 말씀이 “천국이 가까웠으니라”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룩성은 비거룩성 속을 꿰뚫으실 수 있다. 의로움은 얼마든지 죄악성을 비집고 들어 올 수 있다. 비거룩성과 죄악성이 거룩성과 의로움을 거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죽었으면 죽었지 항복은 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단번에 숨이 끊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당연히 불속에 ‘영원히’ 집어넣어야 한다. 그 방법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옥은 영원히 개업중인 것이다. 한번 손님 받고 문 닫는 곳이 아니다. 그러한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의 거룩은 비거룩의 세계를 종횡무진 비집고 다니면서 일하고 계신다.

3.필자가 판단하기에 세번째의 질문은 두번째 질문과 동일하다. ‘저주 상태의’ 인간과 교통 못한다는 논리나, ‘산 것 아님’ 상태의 성도에게 성령의 내주가 불가능하다는 논리가 같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2.의 내용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4.이것은 “의인”의 개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의인”에 대한 개념의 재정리가 필요하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인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곧 필자가 여태까지 살펴 본 바, 몸은 죄로 죽어 있으나(죄성 내지는 전적 타락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나) 영은 의(예수님의 희생 공로)를 인하여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존재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는 누구에겐가 ‘전도’라는 것을 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교회 밖’은 ‘용서 안 받은 죄인들’이요, ‘교회 안’은 ‘용서 받은 죄인들’...이라고 말이다. 물론, 교회 안에도 역시 용서 안 받은 종교인들이 득실거리지만, 일단 아무 것도 모르는(!) 불신자들이기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용서 안 받은 죄인과 용서 받은 죄인...무슨 차이던가. 용서의 차이이다. 용서란 인간 쪽에서 자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공통점은 무엇이던가. 죄인이라는 점이다. 교회 안의 용서 받은 죄인들 치고 말씀 한 구절이라도 온전히, 제대로 지킨 인간들이 몇이나 되던가.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는 성도라 불려선 안 된다. 예수님 본인과 방불한 존재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