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님의 기억

아빠와 함께 2023. 11. 5. 18:29

주님의 기억

2023년 11월 5일            본문 말씀: 디도서 2:13-15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예수님은 자신을 주셨다는데 우리가 받은 적이 없다면 어디서 배달 사고가 일어났지요? 인간은 주님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어두움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먼저 우리 전체가 어두움에 이미 묻혀 있음을 공개하는 작업과 더불어 이루어집니다.

즉 진단과 더불어 치료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주심은 십자가 사건 안에서 진행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린 때, 그 현장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봐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 달린 강도 중 한 강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 23:39)

십자가 현장에서 왜 이런 강도가 있었는지를 유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라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서의 구원’이 되려면 죄가 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죄에 대해서는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잘 설명해줍니다. 즉 그 강도는 예수님보고 좌절합니다.

주님을 애초부터 안 믿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하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믿어줄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이런 강도의 생각은 모두 자기 기억에서 비롯된 겁니다. 인간은 기억은 선악과 이 전의 것으로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악마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악마 나름대로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곳은 무저갱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주의 감옥입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계 9:1-2)

벌써 마귀의 종들이 세상에 활개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평화롭게 각자 집에서 자기 아이를 키우던 엄마들이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강제로 아기를 잃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것은 바로 ‘아기 예수’의 탄생과 관련되어서 벌어진 일입니다. 즉 세상은 아기 예수의 등장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로 채워집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나만이 홀로 평화롭고 사랑스럽게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이 세상은 잠자고 있던 죽음과 저주의 힘이 들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꽁꽁 숨겨놓은 참으로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이 사정없이 박탈당하고 파괴됩니다. 마태복음 20:28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들이 있었던 그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자기 아들을 특별로 대우해서 하늘나라 높은 자리에 앉게해 달라고 부닥한데서 비롯됩니다.

어미가 이런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기억에 준해서 그 연속성 끝에 천국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선악과 나무 과실을 따 먹고 난 그 ‘이후의 기억’입니다. 그 전의 기억은 악마로 인하여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 ‘전의 기억’은 여자의 후손 되시는 분이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억을 자신을 기억으로 담고 이 세상에서 오셨습니다. 이렇게 되니 당연히 모든 세상, 모든 인간들은 저주받을 기억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되신 겁니다. 즉 스스로 자기 삶을 도모하고 책임지는 식으로 보내는 겁니다. 다윗을 미워한 사울도 이런 마음으로 무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영적이고 초월적으로 장착하려고 하지만 사울은 악귀에게 걸려든 계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즉 자신은 애초부터 저주의 대상이었던 겁니다. 이처럼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기억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대신 죽음’, 혹은 ‘대신 주심’이란 스스로 죽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함께 죽어 주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억 속에서는 ‘누구를 위하여 대신 한다’든지 아니면 ‘남이 나를 대신 한다’는 원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정성 있게 정리해 보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있다’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도 이런 마음입니다. 사울왕을 신접한 여인이 결코 책임져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와 더불어 한 팀을 이룰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 자신의 ‘대신 죽으심’을 건지시려고 합니다.

방법은 이러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로 인하여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판명날 겁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19-20)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이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시는 일입니다. 누구나 지니고 있는 인간들의 기억을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자신의 기억으로 바꾸어주시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기억이 바로 ‘죄인을 위한 대속물 되심’입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에 함께 매달렸던 다른 한 강도, 곧 구원받은 강도는 다른 옆의 강도보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다 같은 죄인 아니냐!” 즉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는 기억으로 살아오고 있음을 들추어내어 주시는 바가 예수님의 기억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실은 ‘죽음 위에 실려 있는’ 형편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게 아니라 죽음이 살아있고 저주가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본인이 한 일’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서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이 소금이요 빛의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가 ‘죽음 위해 일생됨’을 드러내 주십니다. 따라서 아무리 우리가 죄인이고 악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우리는 주님과 그 말씀 완성됨을 떠날 수가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말씀 성취가 우선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1강-디도서 2장 13-15절(주님의 기억)231105-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2장 13-15절입니다.

디도서 2:13-15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여기 보면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는데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은 적이 없는데요? 하나님은 주셨다는데 우리 쪽에서는 받은 적이 없어요. 어디서 배달 사고가 난 겁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독생자를 주셨다는데 언제 받았습니까? 새벽 탁송인가요? 받은 적이 없는데, 주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뭔가 연결이 끊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감안할 수 있어요.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주셨다. 우리는 받은 적 없습니다, 독생자 받은 적 없습니다. 어디서 이런 사달이 벌어졌는가?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실 때 무엇으로 주셨냐 하면요, 뭐 신문 광고에 낸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으로 독생자를 주신 거예요.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화되었다, 즉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고, 십자가 사건 없이 그냥 예수님을 줘버리면 어느 누구도 받을 사람이 없어요. 인간이 받을 만한 예수님이 되시기 위해서 스스로 십자가 사건 안에 자신이 들어오신 겁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사이에서 “나를 너에게 줄게.” 하면 어떻게 받습니까? “내 생일인데 너 선물 없어?” 이렇게 할 때 돈도 없고 그래서 선물 준비 안 해놓고는 하트 표시를 하면서 “나 자체가 선물이잖아.” 이러는데 말뿐이 아니라 네가 나한테 들어와야죠. “네가 내 선물이면 앞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할래?” 그건 또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그건 준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는 방식은 십자가 사건을 만들어서만 우리에게 제공을 해요. 경주에 있는 박물관 가면 옛날 훌륭한 사람들 선조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쭉 있잖아요. 그 사람들의 업적에 대해서 관람은 돼요. 구경은 되는데 그 사람이, 단군이라는 사람이 내 속에 들어오는 길은 단군 귀신을 받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무당 되는 것 외에는 없어요.

부부가 한 몸이라고 하잖아요? 한 몸 된 적이 없습니다. 무슨 한 몸이 자기 마음대로 삽니까? 그게 무슨 한 몸이에요? 내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어떻게 결혼식 할 때는 “한 몸인 줄 믿습니까?” “예.” 완전히 거짓말이죠. 인간은 타인과 한 몸이 될 수도 없고, 된 적도 없고, 시도 자체도 성립이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은 자기를 줬대요. 우리는 받은 적이 없는데요.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받을 생각조차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 하늘에 계시면 우리가 알아서 믿겠습니다.” 이게 할 수 있는 우리의 제안이에요. ‘하늘에서 내다보면서 아쉽고 필요한 거 어려울 때 몸 아플 때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그런 식으로만 존재합시다. 아, 골치 아프게 더는 가까이하지도 맙시다.’ 이게 우리 생각이라니까요? 진짜 주님 주시면 골치 아파요, 우리.

나다움이 날아가 버리는데요? 그 사달을 어떻게 감당하실 거예요? 귀 잡아당기면서 “이리 와, 너 나와 같이 십자가에 죽자.” 이러면 골치 아프잖아요. 자식 아직 고등학교도 안 들어갔는데 골치 아픈 이야기라니까요. 그리고 아가씨 같으면 시집도 안 갔는데, 지금 죽으라는 거예요, 지금! 시집도 안 갔는데요. 처녀로 죽으란 말입니까? 딸 결혼식도 안 했는데 결혼식 보고 죽어야지,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십자가 사건화됐을 때 주께서 주신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십자가 그 현장으로 가봐야 해요. 그 십자가 현장이 친절하게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35-39절에요.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군병들은 이제 예수님을 희롱하는 거예요. 예수님 입에 신 포도주를 먹였잖아요? 그렇게 가볍게 보지 마시고 신 포도주를 머리에 갖다가 그냥 부어버린 거라고 보시면 돼요. “자, 먹어라, 신 포도주. 이 마취제 먹어라.”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실제로 머리에 붓지는 않았지만. 여기 39절에 보면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으로 갔을 때 거기 같이 달린 사람이 두 사람 있었는데 둘 다 강도였어요. 한쪽 강도가 말하기를, “당신이 구세주라면 날 구원해라. 그러면 내가 당신 믿어줄 용의가 있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독생자를 주었다고 되어 있지만 우리가 받지 못하는 이유 뭐냐? 바로 우리가 그 십자가 현장에서 있었던, 예수님을 비방한 강도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이해할 때 구원받은 강도의 입장에서 이해하지 마시고 어디를 출발점으로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비방한 그 강도의 심정, 마음 자세, 여기서부터 십자가를 이해해야 해요. 다시 말해서 주님은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고 나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 그런 예수라는 사실을 우리가 절감해야 합니다. 절감하지 않으면 우리는 신자가 아니에요.

내가 20년, 30년, 50년 예수 믿었는데 그 예수님은 항상 나의 모든 인생을 좌절시켰다는 것, 그걸 명심해야 합니다. 헛꿈, 헛꿈 꾸지 마세요. 예수님을 비방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기때문에 성경에서 이렇게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백날 이야기 해봤자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한 번 믿어줄게.’라는 그 선에 머물 수밖에 없어요.

그 이유가, 나는 나를 기억하거든요. 내가 나를 기억하는데 예수여, 당신이 나를 건져주면 내 기억 속에 당신을 편입시켜 줄 용의가 있다는 것, 이걸 인간들은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19세기 독일에 그림 형제라는 동화작가가 있어요. 그들이 무서운 이야기, 잔혹 동화도 많이 썼어요. 책에서 삭제된 내용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아버지와 엄마, 아들 셋, 이렇게 다섯 명의 가족이 있었어요. 아빠는 바쁘고 엄마는 막내아들 목욕시키고 있었어요. 그때 형하고 둘째 동생 둘이 노는데 아빠가 평소에 돼지를 잡았던 거예요. 그래서 형이 동생에게 돼지 역할을 맡기고 자기가 아빠 역할을 하면서 진짜로 동생을 칼로 찔러 죽였어요. 아무 생각 없죠. 그냥 죽였어요, 놀이니까.

그걸 보고 엄마가 화가 나서 칼로 큰아들을 죽였어요. 정신없이 혼미한 채로 다시 돌아가 보니 뜨거운 물에 막내아들이 죽어있습니다. 아들 셋이 한꺼번에 다 죽었어요. 동화에요. 그리고 난 뒤에 가슴 아파서 엄마는 자살합니다. 아빠도 그 내력을 알고는 자살해요. 한꺼번에 다섯 명이 다 죽는 것으로 동화 끝입니다. 한 방에 다섯 명 다 보내버렸어요. 참 무서운 동화죠. 오늘 밤 여러분 밤 못 잡니다.

그런데 이 무서운 동화가 왜 무서울까요? 이것이 인간의 기억 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이 기억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의 기억이에요. 잔혹 동화가 아닙니다. 내 과거의 기억,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실제로 그게 나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베들레헴에서 애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 동네에 아기 예수가 태어났어요. 그런데 아기 예수가 태어났는지도 몰라요. 그냥 각자 자기 애 키우고 있었던 거예요. 아기 예수 태어난 것을 보고 때를 놓쳐 화가 난 헤롯 대왕이 나잇대가 비슷한 베들레헴의 2살 밑의 아기들을 다 죽였습니다.

18절에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는 에례미야의 말씀이 여기 성취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잔혹 동화 아닙니까? 이건 결국 동화가 아니라 팩트, 잔혹 팩트인 거예요.

엄마가 꽁꽁 숨겨 놓은 두 살 밑의 아기, 그처럼 절대적 가치를 지닌 가장 소중한 것, 이건 누구에게나 다 있는 거예요. 그런데 누구 때문에 죽었다? 아기 예수의 출생 사건과 맞물려서 죽은 거예요. 헤롯, 마귀의 앞잡이이자 하수인이죠, 헤롯이 아기 예수를 제때 죽이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아기 예수 태어난 그것을 기화로 해서 애꿎은 베들레헴의 2살 밑 아기들이 다 죽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아기 예수 하나에 연루되어있는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어요. 그 아기 예수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꽁꽁 숨겼던 진짜 내가 사랑하는 자식…, 사람에게 희망이 뭐냐? 모든 인간은 그저 자식 키우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차라리 내가 내 목숨 달아나게는 둬도 자식은 죽으면 안 돼요. 그 정도로 소중한 가치가 자식입니다. 나는 어쩔 수 있어도 자식은 어쩔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바치라고 한 이유를 아시겠죠? 그 소중한 가치, 자식이 왜 소중합니까? 내 기억 속 가장 핵심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자기 기억에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강도, 예수님을 비방했던 그 강도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기 기억을 포기할 생각은 못 하고 내 기억에 연속성에 있는 천국, 내가 지금은 이렇지만 죽어서는 천국 가겠다는 그 열망이 계속 살아있는 거예요.

그럴 때 “당신이 구세주라면 나로 하여금 당신이 구세주인 것을 확인할 수있는 기회를 달라. 내가 당신 하는 것을 봐서 믿어줄 용의가 있다. 그런데 당신은, 그 구세주라는 양반이 어떻게 자기 몸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고, 그동안 남들 죽은 자도 살렸고 물 위도 걸으면서 이게 뭐야, 이게!”

지은 죄도 없으면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항소나 하지 항소도 안 하고 이게 뭐예요. 자기 편들어줄 열두 제자는 다 도망가게 만들고. “당신 한평생 뭐했어? 아, 나는 진짜 때려죽여도 당신 같은 인생 안 살 거야.”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거예요. “당신은 나를 실망케 했어.” 당신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었다는데 인간 중에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팩트고 이게 정답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대신 죽었거든요, 대신. 왜 우리가 예수를 믿지 못하냐면, 우리는 자신이 기억하는 그것이 나에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나’가 있어요. 내가 도저히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내가 있습니다. 그 다른 나는, 나는 기억을 못 해도 주님께서 기억하고 있어요.

나와 그 다른 내가 짝을 이룹니다. 나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나’가 서로 짝을 이룰 때 그 사이에서 뭐가 발생 되는가? ‘대신 죽으심’이라는 것이 성립이 돼요.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게 아니고 대신 죽으심이라는 말씀 자체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강도 사건을 다시 봐야 해요. 그 비방하는 강도, 그 심정, 그 심정을 우리는 이해를 해 줘야 합니다. 아마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딱 우리 마음이거든요. ‘50년 교회 다니면서 예수 믿었는데 주님 나한테 해 준 거 뭐 있습니까?’ 딱 이 마음이 그 강도 마음이에요. 내 형편이 나아졌습니까, 살림살이가 나아졌습니까? 내 인생만 망했지, 뭐 있어요?

여기서 내가 나를 기억할 때 대신 죽으심은 절대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기억하게 되면요, 이 세상에는 나밖에 없어요. 나 외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이해하기 힘든데,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는 한 남이 살아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값이 떨어지기 때문이에요.

하마스 가자 지역 사람들 죽든 말든 내가 안 죽었으면 되었어요. 그 사람들 죽는 것 상관 없어요. 나만 죽지 않으면 되거든요. 값이, 비중이 떨어져요. 내가 죽으면 안 되죠. 난 소중하니까. 그 사람들이 죽든 말든 내 죽음은 끄떡없어요. 건재합니다. 이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은 나 외엔 아무도 없어요, 나 외에는.

이것을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해요. “나랑 같이 죽을 사람 아니면 꺼져라.” 나랑 같이, 내 아픔을 함께하고 날 위로해줄 마음이 없거든 저리 가버려, 이게 우리 평소 행동입니다. 이걸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차려놓은 음식과, 그 차려놓은 음식 중 하나를 골라서 내 입으로 가져간 그 음식, 그 둘 사이에 차이가 나요. 왜 그러냐? 차려놓은 음식에는 차린 주방장의 주체가 묻어져 있지만 그 음식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내 입으로 가져와 먹을 땐 내 주체성이 음식에 같이 섞여 있어요.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고,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엔 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말과 행위만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요, 우리가 그런 실정이 있기 때문에 “넌 그 누구도 사랑하지 마라. 아무도 사랑하지 마라. 대신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넌 그따위 자격과 인식 가지고는 누구도 사랑하지 마라.”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넌 원래 누굴 사랑할 줄 아는 재주가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성경 말씀 백날 줘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소망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절대적인 나의 안정성, 이 땅에서 그 안정성을 추구할 뿐입니다. 그 안정성을 세상에서는 평화라고 이야기해요. 그 평화를 재밌게 하기 위해서는 사랑, 그래서 ‘사랑과 평화’ 또는 ‘평화와 사랑’ 모든 인간은 이것을 원합니다.

인간은 그 평화, 안정성, 고정적인 것을 원하는데 정작 내가 기억하는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어요. 썩어가고 있어요. “나 가만있을 때 건드리지 마.” 안 건드립니다. 안 건드리는데, 거울을 보세요. 조금씩 여러분의 모든 얼굴과 신체는 점점 더 썩어가고 있어요. 무너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게 평화입니까? 그게 평화에요? 죽음을 누가 이깁니까? 강도가 예수님한테 그렇게 비방하면 본인이 안 죽어요? 아무 대책이 없어요. 인간은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기억을 끄집어내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기억. 그 다른 기억을 끄집어내는 방법은 여자를 통해서 끄집어냅니다. 여자의 후손. 왜 예수님이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냐? 오늘날 우리 인간의 기억은 이미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의 기억이거든요. 선과 악을 아는 기억. 이것은 그 전의 기억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러나 처음에 여성이 그 행위를 해서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이제는 진짜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진짜 인간으로 될 수 없는 그런 비극적이고,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인간, 그러면서 고집은 있어서 선악으로 자기 잘난 척하는 그 인간, 자기의 우기는 인간, 나는 나라고 고함치는 그 인간, 그 기억 이전의 없었던 ‘나’, 남자가 아닌 여자의 후손이 주님 자신의 기억으로 우리를 바꾸어 주십니다. 그걸 가지고 ‘대신 죽으심’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대신 죽으심입니다.

이건 어려운 이야기인데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악마가 인간 속에 자아를 집어넣은 거예요. 인간 속에 깊숙이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항상 생각하는 나와 생각되는 나 그 둘 사이에서 매일같이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모자란 나와 내가 되고자 하는 소망하는 이상적인 나 사이, 그 안에 갇혀 빠져나오질 못해요. 마귀가 그렇게 한 거예요.

마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마귀가 원래 그런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이 마귀는 항상 어디서 나왔느냐를 봐야 해요. 요한계시록 9장 1절에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 악마는 떨어진 별이에요. 악마죠. 무저갱이란 바닥이 없는 감옥이에요. 한없이 저주 쪽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거기서 잠시 자기 졸개가 쏟아져 나온다는 그 대목입니다. 악마는 이미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요. 악마 자체가 그렇고, 악마의 졸개 귀신도 그렇고 특징이 뭐냐?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에 의해 뱀의 머리를 친 순간 악마는 이미 어떠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는 한정된, 확정된, 고정된 운명을 지니게 돼요. 자기 안에 갇혀버리는 거예요. 무저갱 안에, 자기 선악 체계, 선악 지식 안에 갇혀버린 겁니다. 그 선악 지식이 자기를 고발하죠. 늘 저주하죠.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라는 검은 보자기 안에 담겨 있습니다. 거기서 말합니다. “내가 뭘 하면 여기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탈출 안 됩니다. 복음을 가지고 기쁜 소식이라고 하죠? 참 기쁜 소식이라고 해요. ‘기쁘다. 나를 구원하다니. 믿습니다.’ 이러고 있다고요.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이 성화 들어가니까 슬픈 소식으로 변했어요. 자기가 자기를 측정하는 거예요. ‘어디까지 왔나~, 어디까지 착하나~, 얼마나 내가 퇴보했나~’ 그게 자기에게 너무 부담이 되고, 그게 짐이 돼서 도무지 내가 나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구원을 받아야 되겠고, 내가 아는 것은 착해야 되고 나쁜 짓 하면 안 된다는 그것은 알고. 그래서 내가 나를 감당하지 못하는 겁니다.

‘나만 갇혔나?’ 자기만 갇힌 것이 아니에요. 자기 가르치는 그 교회 목사도 갇혔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더 잘나지 못해서 다 갇혀있는 거예요. 꼭 완전히 무저갱이에요, 무저갱. 전부 검은 보자기에 다 싸여 있어요. 그저 최선, 최선, 최선의 노력만 할 뿐이에요. 그러면서 내가 아는 나는 조금씩 썩어가고 있어요.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예가 구약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8장 7절, 악신에 들려 창을 던졌던 그 사울 왕이 자기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어요. 자기 내부의 자기, 대외적으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자기죠, 그 자기를 지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동안 ‘다윗이 없어도 나는 사무엘이 있잖아.’ 했는데 사무엘이 죽으니까 사무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계시도 끊어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나를 지키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데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독생자 없이도 나 혼자 살 수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냐? 빈 공간? 아닙니다. 사울이 죽기 직전에 엔돌이라는 지역에 갔어요. 거기 신접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신접한 여인은 귀신을 정리해주는 사람이에요. 인간들은 자기로부터 탈출을 할 수 없으니까 초월적인 것, 영적인 걸 바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사람을 위해서 맞춤 피트니스, 우리의 영적 정신 관리자, 그게 신접한 여인이에요. “불러줘? 귀신 불러줘, 귀신?” 요새 말로 하면 “예수님 불러줘?”

신접한 여인도 마찬가지고, 사울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신을 찾고, 선지자 찾고, 하나님 찾아도 본인 자체가 본인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고, 그냥 몸부림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왜 그러냐? 그 잔혹한 동화보다 더 무서운 내 과거의 기억이 나를 도망칠 수 없게 만들기거든요. 그 기억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 영적인 생활, 교회 다니면서 기도 열심히 해서 은혜받고 그런 식으로 하는데 그건 속임수잖아요. 그건 속임수고 그 속임수가 결국 신비화되거든요. 제가 어제 울산에서 식사하면서 웃음이 나서 식사를 못 할 뻔했어요. 앞에 같이 식사하는 권사님이 이런 이야기 하셨어요.

자기 아는 사람이 백병원에 입원했다가 죽었대요. 여호와 증인이라 수혈을 거부해서 죽었다는 거예요. 그 소리 듣고요, 웃음이 막 터져 나왔어요. 제가 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인간은 이미 죽었어요. 인간은 이미 죽었잖아요. 왜 새삼스럽게 이걸 하고 죽을까, 안 하고 죽을까, 이거 자체가 나에겐 코미디에요.

죽은 초상화에 색깔 칠한다고 인간이 삽니까? 아, 얼마나 웃었는지. 종교 자체가 코미디 같아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어있잖아요. 낙원에서 끊어졌잖아요. 이미 죽었는데 뭘 살려고 시도하는 자체가 얼마나 인생사는 게 재미가 없었으면 교회 나오겠나 싶어요. 얼마나 재미가 없으면 교회 나가서 이것저것 해보겠어요? 죽었으면 그냥 죽으면 되는 거예요. 떨어진 낙엽이 낙엽 만난 거예요. 떨어진 낙엽 그 사람이 여호와 증인이라는 그 낙엽, 그걸 만난 거예요. 둘 다 떨어진 거예요. 이 가을철에 실감 나죠. 밟아도 아무 끽소리 못하는 낙엽.

그러면 주께서 대신 죽으심이란 이것은 뭐냐? “죽지 못하는 널 대신해서 내가 같이 죽여줄게.” 이게 대신 죽음이에요. “네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 못 하잖아? 내가 대신 죽여줄게. 구원이고 뭐고 생각하지 마. 대신 죽여줄게.” 죽여주게 되면, 여자의 후손 되시는 그분이 죽여주면 우리가 기억하는 그 이전의 내가 있어요, 그 이전의 내가 구원받는 나예요. 왜? 주님의 기억에 있으니까. 내 기억에서 주님의 기억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그때부터 우리는 뭘 아느냐?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그 말씀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그게 뭐냐? 요한복음 3장에 나옵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주셨다는 거예요. 주셨는데 누구에게 줬는지 19절에 보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독생자를 누구한테 줬느냐 하면, 어둠한테 준 거예요, 어둠한테. 나에게 준 것이 아니라 어둠에게 줬다고요, 어둠.

그럼 빛은 무엇이고 어둠은 무엇인가? 어둠부터 먼저 이야기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게 어둠이에요. 교회 나와서 십일조하고, 예배 참석하고, 내가 이렇게 선교하고, 이게 어둠이라고요. 이게 죄라고요, 죄.

삶은 간결해요. 삶은 굉장히 간결합니다. 어둠입니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니까 복잡해지는 거예요. 뭘 기억해도 어둠이고 죄인데, 그걸 그냥 오케이 하면 되는데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분투 노력하고 있어요, 분투 노력. 어딜 가려고? 천국 가려고. 뭘 했든, 무엇이 되든 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의 말씀을 떠날 수가 없어요. 떠날 수가 없습니다. 왜? 뭘 해도 죄니까, 죄라고 알려주는 그 말씀을 떠날 수가 있습니까? 못 떠나죠. 떠날 수 없어요. 주님을 못 떠나요. 교회는 떠나도 주님은 떠날 수 없습니다. 말씀은 떠나지 못해요. 왜? 모든 것이 간결해지니까요. 모든 것이 간결해져요.

그 말씀이 뭐냐? 대신 죽었다는 그 하나의 사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그 사실, 어느 누구도 기존의 나라면, 비방하는 강도라면 절대로 받을 수 없는 거예요, 절대로! 대신 죽음도 안 받아요. ‘뭐 인생 내가 알아서 하는 건데 대신 죽으십니까? 그렇게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알아서 착하게 거룩하게 바르게 살 거예요.’ 이게 우리의 고집입니다. 왜? 나의 가치가 그 가치니까.

주의 말씀은 뭐냐? 진단기 동시에 치료기에요. 에너지 부스터 딱 켜놓고 숟가락 같은 거 가지고 쭉 밀고 그렇게 합니다. “어때요?” 하면 “아아~!” “바로 거기네. 아픈 곳이 거기네.” 알로에 바르고 30분 치료하면 “어, 좋아졌네.” 진단과 더불어 치료하는 거예요.

죄가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치료되고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방향성, 당신의 인생은 치료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생은 개차반이고 엉망이지만 방향이 내 기억이 아니고 주님 기억 쪽으로 가고 있다면 여러분, 복 받으신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나오는 말씀이에요.

마태복음 7장 24절에서 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되어 있어요.

사람은 이 말씀이 궁금해 죽습니다. “반석이 무엇이고 모래는 무엇입니까?” 반석은 주님의 기억이고 모래는 나의 기억이에요. 십자가의 한쪽 강도는 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자기 기억이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당신을 판단하고 내 선입관으로 당신을 보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나를 구원할 만한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 판정은 내가 하겠다는 거예요. 자기 기억의 가치를 아주 놓지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옆에 있는 친구보고 하는 말이 “너 그런 소리 할래? 네 기억 내 기억 다 알듯이 우리 다 죄인이잖아.” 우리는 주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든지 간에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비판, 평가할 자격조차 없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이 초라하게 오든 거창하게 오든 주님의 죽으심 그 자체로 끝났다는 거예요. 주님의 죽으심.

거지로 죽든 잘난 자로 죽든 주님의 죽으심 그 자체로 모든 나는 죽어 마땅함이 그 앞에서 다 노출되어 버립니다. 그게 바로 독생자를 주심입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피를 줬다는 말이고 그 피 속에 그 피를 흘린 네 죄가 네 핏속에 섞여 있다는 뜻이에요. 내 피 말고 더러운 피도 같이 섞여 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했었어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 제자들도 다 기억이 나니까 마태복음에 기록되었잖아요.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놓고 친절에 친절을 다 하면서 “잘 들어봐라. 내가 너희들 구원해줄게. 이렇게 하고 또 저렇게 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해도 그게 안 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이렇게’ 혹은 ‘저렇게’라고 하는 그 ‘이렇게, 저렇게’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을 주신 적이 없어요. 어떤 분이 저에게 성경 구절을 질문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을 질문했어요. 그 질문을 듣고 여러분 나름의 답변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그다음에 14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그렇게 해서 마지막 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비슷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 끝부분에도 나옵니다.

오늘 본문 디도서 2장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대목, 이 대목과 마태복음 5장 16절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이 대목, 이게 무슨 의미냐 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고 질문하는 그 자체를 저는 귀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질문할 게 아니잖아요. 이미 악마로부터 선악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 같으면 이 해석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이 추호도 있을 수 없는 너무나 명백한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너 되게 착하네. 너 어떻게 그렇게 착해?”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착합니다.” “그래? 나도 네가 착한 것을 보고 하나님 믿을게.” 달랑 이거지요. 달랑 이 이야기처럼 들리잖아요.

이런 이야기 같으면 십자가의 강도 둘 다 예수님 안 믿습니다. 이 대목을 생각해서 다시 대속물, 대신 죽으심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대신 죽었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너는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이렇게 해야 되고, 너는 저렇게 살아서도 안 되고 이렇게 살아야 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듣는 쪽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고 이렇게 하라. 그리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이렇게 살아라.’ 할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대속을 받는 쪽이 순서상 어떤 소리부터 먼저 들려야 되느냐? “너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가 먼저 들려와야 돼요. “인생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가 먼저 들려와야 된다고요. “그렇게 하면 안 돼!”가 먼저 와야 돼요.

그게 뭐냐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보고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돼”라고 먼저 이야기할 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그 내용이 뭐냐는 거예요. 그 내용은 대신 죽으심을 방해하고 대신 죽으심을 쓸데없는 일로 여기는 그런 요소가 네 안에 이미 장착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기계입니다. 악마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기계에요.

악마는 이미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인간은 이미 추방되었어요. 추방되었다는 말은, 추방된 존재라는 말은, 주께서 끝까지 추방된 존재로 본다는 것이고 추방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 추방한 이유가 뭐냐? 감당도 안 되는 네가 선악 지식을 가졌다는 자체게 네가 천국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선악, 그걸 없앨 방안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 속에서. ‘이게 옭고 저게 그르다’ 하는 이것을 제거할 방안이 없어요. 마귀가 집어넣어 가지고. 따라서 우리는 언제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요, 언제 죽어도. 인간이 사는 자리는 주 앞에서 추방된 자리입니다. 추방된 자리가 가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저주를 안겨주고 우리로 하여금 혼란하게 만들지요.

이 혼란이라는 말,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혼란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인간은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꾸 우리는 안정성, 고정성, 평화, 평온, 이걸 추구하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게 되면 이것은 우리에게 안 일어나야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주님께서는 우리와 한 팀을 이룹니다. 한 팀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존의 나와 떼 낼 필요가 있어요.

떼 내기 위해서는 “너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가 주어져요. 너 그렇게 살아서는 안 돼. 그래서 이 대신 죽으심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될 인간과 그리고 그걸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 그것이 짝을 이룰 때 대신 죽음이라는 것이 성사가 돼요. 성립이 된다고요. 그 일에 여러분이 참여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복 받은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생을 죽음에 얹혀살도록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죽음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위에 잠시 얹혀 있는 게 인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살아 있는가? 내가 사는 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 내 밑에서 살아있죠. 그게 죽음이에요. 저주에요. 저주 위에 약간 붕 떠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거울 보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소금이다, 혹은 빛이다,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우리의 토대, 우리의 기반에다 죽음을 집어넣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악마와의 싸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과의 싸움에서 인간은 그동안 악마의 기계였거든요. 이제는 주님의 기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주님과 악마 둘 다 각기 자기가 나왔던 원천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아서 끌어당기고 있어요. “가자 우리 집으로.”

그게 인간의 두 종류의 방향성이에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두 강도가 있었는데 한 강도는 기어이 악마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한쪽 강도는 주님께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이렇게 양쪽에서 끌어당기는 데 ‘네가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는 것이 악마 쪽이에요.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데 마귀가 바보입니까? 울산강의 들으신 분들은 아시지요? 말씀 밑에 뭐가 있다? 말씀 밑에 악마의 해석을 같이 품어서 우리에게 말씀을 제공하는 겁니다. 기존에 내가 살고자 하는데 부합되도록, 내 소망을 달성하는 쪽으로 네가 그 말씀을 해석하도록 내가 해석할게, 마귀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악마 쪽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성경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마태복음 5장 이야기를 누구 보고 이야기했는지. 열두 제자 보고 이야기했지요. 열두 제자에게 소금과 빛, 5장 이야기를 하면서 그 뒤에 6장, 7장, 8장, 9장 계속 이야기하는 게 뭐냐? 처음에 이 말씀을 할 때 기분 좋았겠지만 갈수록 뭔가 괴리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보는 성경 말씀과 그 말씀을 통해서 나라는 것이 주의 말씀과 합치되지 않고 점점 더 격차가, 그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감 잡을 거예요. 마태복음 20장 28절도 마찬가지예요. 21절에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할 때 나온 말씀이에요.

점점 더 벌어지는 거예요. 그 간격이. 말씀을 지키고 싶은데, 소금이고 싶은데, 빛이고 싶은데 주께서 주신 환경 자체가 우리가 이 죽음이라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만들어서 살고 보자는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요. 말씀은 뒷전이고 일단 나부터 밥 먹고 살고 보자 하는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말씀이 진단기에요. 너 말고 네 밑에 저주 있다, 네 밑에 마귀 있다, 네 밑에 죽음 있다, 너는 죽음 위에 붕 떠 있는 기름 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실제로는 네 죽음을 내가 관리하고 십자가로서 이 죽음, 율법, 사탄, 이걸 내가 직접 다룬다 그 말이지요.

“그리고 너는 죄인으로서 나와 한 팀이 되어서…”, 한팀이 되어서 뭐하는데요? ‘한팀이 되어서’ 그다음에요, “나랑 같이 대신 죽으심의 취지를 높이는 프로젝트에 네가 참여하라.” 이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이게. 이게 성도거든요. 주께서 일 다 해치웠다는 것. 팀을 이룬다니까요, 팀을.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이고, 주께서는 이미 대신 다 치렀고, 이것보다 선한 일, 영광돌리는 일 있습니까? 없어요.

빛과 소금이라 하는 것은 뭐냐? ‘썩어가는 세상 중에 네가 썩어있었고, 어두운 세상에서 네가 어두웠다. 뿐만 아니고 예수님이 빛으로 왔을 때 너는 빛을 반기지 않았고 너는 소금을 거부했다. 그게 너였어. 그게 너였어.’ 왜? 나는 내 식대로 선악체계, 내 식대로 훌륭한 사람, 바른 사람 되어서 하나님 보시기에도 감동할만한 착한 사람 되어서 천당가는 게 내 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죽음은, 썩어빠져 가는 육신은…, 사람이 아프면요, ‘왁!’ 하는 그것만 나와요. 다른 것 아무것도 안 나와요. 순간적이에요 이것은. 왁, 만 나와요. 사람이 자기 이름을 지키려고,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얼마나 몸부림 치는지, 내가 어떤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니까요. 뭣 때문에 놀랐느냐? 유영상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배드민턴 대표선수인데 미국에서 성추행하다가 추방되었다는 거예요. 이름이 유영상이라, 얼마나 놀랐는지.

뭐 김진태 같으면 안 놀라요. 그런데 아는 사람이거든요. 여러분도 들어봤지요, 그 이름. 그 이름이나 저 이름이나 전부 다 하나님 앞에 추방된 이름인데, 그래서 주의 이름 아니잖아요. 주의 이름도 아닌데 왜 우리는 그렇게 집착합니까? 왜 나에 집착해요? 정답은 어두움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단짝이에요. 주님하고, 주님 피하고 단짝이에요.

십자가에서 주님을 비방한 내 피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은근히 주님한테 희망 걸고 교회 나왔던, 마귀의 종으로 수작 부리는 내 피를 십자가 피에서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키는 나는 버려야 될 나입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주께서 우리를 죽여주시니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매일 죄지으시고 매일 죽어가는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마다 대신 죽으심만 드러내는 하나님의 선한 일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그러한 상황 속에 여러분이 놓여 있음을 여러분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남들이 뭐라고 하는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특히 내가 나한테 속아 넘어가지 말게 하옵소서. 십자가 앞에서 나서기를 원합니다. 거기서 두 강도를 만나고 비방한 강도 쪽으로 들어가서 구원받는 강도로 나올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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