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육신에서 말씀으로

아빠와 함께 2023. 10. 15. 17:57

육신에서 말씀으로 

2023년 10월 15일             본문 말씀: 디도서 2:6-8


(2: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2:7)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2: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알게 되면서 ‘복음의 대적자’가 벌써 존재해 있음을 압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적이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도 젊은 이들은 알아야 합니다. 젊다는 것은 단지 경솔하고 경험하고 인생 경험이 적어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젊다는 것은 ‘늙음 이후’로 자신이 내딛고 있음을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늙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곧 ‘자기 자신이 사라진’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면 평생에 수고한 것이 빈 가방으로 마감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끝’ 말고 다른 ‘끝’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지 않는 죽음은 허망한 개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개죽음에서 고귀한 죽음 안으로 들어설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말씀을 따라 진척되는 노선에 의해서 성사됩니다. 이 말씀 안에는 모든 시간이 마감된 이후에 드러난 상황과 상태를 미리 보여줍니다. 즉 인간은 어떤 식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죽음을 겨냥해 집중되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잘못된 이해 안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몸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자신이 감당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만든 몸도 아님에도 말입니다. 인간 몸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말씀은 바로 이 몸의 주인으로 인도하고 이끄십니다.

이런 사례가 구약 이스라엘 민족이 보여줍니다. 그들은 한 분의 이름으로 이끌려 애굽나라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땅에 속한 자들입니다. 반면에 그들을 인도한 하나님의 이름은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해야 할 것은 ‘어린양의 죽음’을 운반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까지 말입니다.

그들 각자의 이름은 거부하고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이름은 ‘어린양의 죽음’을 이끄는 ‘하나님의 이름뿐입니다. 이는 사람과 직접 관계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례가 구약 욥기에 나옵니다. 욥은 스스로 자신을 의인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멈추지 않고 고통이 찾아듭니다. 욥은 스스로 조건을 만들어 내세웁니다. “반성할테니 그만 때리소서. 그런데 무엇에, 어떤 점이 죄가 됩니까?”라고 말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에게는 정답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고난받을 대상자로 뽑힌 것을 아예 정답에서 제외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악마의 실정을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악마는 지옥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의 보복을 당하고 또 당하고 또 당해야합니다. 당연히 반성같은 것은 하나님에게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악마의 외침을 욥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욥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던 겁니다. 요나 선지자의 경우는 더 심화됩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명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기 위한 사명이었음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곧 이 세상 어느 인간도 자신이 굳이 살아있어야 될 이유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인간이 살아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살아나야 합니다. 따라서 말씀이 인간 속에 찾아와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 므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들에게 주인의 것을 장착시키고 그 현장을 떠납니다. 그렇게 해서 누가 인간 자신에게 관심두는지 아니면 주인에게 관심두는지를 살필려는 겁니다.

누가 와서 다음과 같이 인사를 건넬 때, 다음과 같이 답변하기 마련입니다. “네 주인님 잘 계신가?” “그래 내가 잘 있어” 나의 삶의 관심있다는 말은 여전히 내가 나답게 살고 싶어서 자기에게 대한 미련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흥정에 나서려고 할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달라지고 있음을 안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타인들을 만나게 되면 남들이 변하지 자신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것을 보면서 여전히 자신이 한결같음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인간들이 더 생을 사는것과 관계없이 확정되었다고 봅니다.

시편 62:9에는,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39:5에서는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죽으심을 위한 말씀을 주시면서 여타의 율법들이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죄를 들추어내는 취지로 주신 이유는, 어린양의 죽음이 인간의 죄와 관련성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영원히 남을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구성된 복음 뿐입니다.

신약에 와서 드디어 이 사실이 성령의 오심으로 알려집니다. 사도행전 2:17에 보면,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년들에 대해서 꼭집어 이야기야 한 대목이 요한일서 2:14에도 나옵니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즉 성도 안에, 이미 악마를 이긴 요소가 들어왔다는 겁니다. 인간 내부에 외부적인 요소가 들어온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의 관심사는 오직 이 환타지, 곧 말씀 성취에 꽂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인간들의 해석의 오류를 들추어내는 식으로 주어진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12에 나오는 말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을 죄인인 인간쪽에서 돌려서 해석하게 되면 평소에 인간 죄성이 다음과 같이 폭로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해롭게 한 자면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반드시 갚아주겠다”가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변화,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변화를 통해서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졌음을 압니다. 이것이 신약 때에 말씀 해석에서 벗겨진 수건입니다.(고후 3:14) 기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육신이 나비처럼 말씀이 되어 떠오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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