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의 자신감

아빠와 함께 2023. 10. 23. 07:59

하나님의 자신감 

2023년 10월 22일               본문 말씀: 디도서 2:9-10

(2:9)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2:10)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세상이 ‘종과 주인’의 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는 척박한 자연환경에 대응해서 인간들 나름대로 버티고 대처해보고 싶었던 겁니다. 즉 힘의 서열화를 통해서 질서를 잡으려고 합니다. 힘 가진 자는 주인이 되고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자는 그들의 종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세계는 실은 ‘가인의 세상’입니다.

가인 마음 내부에 악이 침범합니다. 그 악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과 엮어진 아벨을 죽이는데 있습니다. 아벨이 죽고 난 뒤에는 가인은 죽지 않고 실질적인 인간 세계를 형성합니다. 힘의 논리로 체계가 잡힌 세상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 세계의 모든 윤리와 도덕과 법이 소통됩니다.

하지만 이 주인의식은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나기 전에는 당연시되고 생의 동력을 부여해 오고 있었습니다. 힘이 존중받는 것은 비와 바람과 폭풍이 치는 험악한 자연환경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하는 삶의 이유가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몰랐던 게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일체 기존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 속에 악마가 통치지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악마의 종이요 악마는 인간 세계의 왕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인간의 현실상은 악마에게 볼모잡혀 있는 처지입니다. 종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편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마저 이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인간들이나 악마나 모두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아는 그 최후의 것은 선과 아는 지식입니다.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낙원에서는 선악과 나무 뿐만 아니라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특별한 나무가 두 개였습니다. 이 생명나무에 해당되는 분이 이 세상에 오셨던 놀랍게도 그 분의 태도는 종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서 주인이든 종이든 모두 다 악마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즉 자유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악마의 종에서 자유자가 되는 방법도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생긴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이 세상 전부가 악마로 인해 주인의식으로 무장된 채 살아감을 폭로하는 일입니다.

이 작업은 구약 때, 이미 요셉을 통해서 실시해 오고 계십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요셉은 하나님의 꿈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꿈을 이동시키는 인생입니다. 그로 인해 그가 가는 곳마다 주인의식으로 가득 찬 세상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보디발의 아내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바로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8:1에서 예수님의 제자는 진심으로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

마태복음 20:20-21에서도 두 제자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합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너희들이 추구하는 것이 이 세상의 권세자들이 하는 짓이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합니다. 나는 너희들 위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 내 것을 주려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0:25-28) 율법이 주어진 것은 세상의 허무성을 실질적인 구체성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 전부가 복이 아니라 저주로 덮혀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율법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거기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준비해두신 모든 저주의 끝장까지 전부 예수님께서 다받게 됩니다. 더는 남아 있는 저주가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요한복음 5:24에 이 심판의 취지가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저주라 할 수 있는 모든 저주 안으로 들어선 사람에게만 사망에 이르지 않고 생명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에서 예언하신 ‘여호와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형편없이 오셨습니다. 모든 이가 다 주인의식으로 무장된 마음가짐으로 비추어보면 전혀 흠모할 게 없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사 52:14-15/사 53:2) 인간 마음 속에서 있는 악에 대해서 인간은 손 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예수님이 들어서시면 이는 주인-종의 관계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4:22-26에 보면,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는 약속 안에서 비유같은 존재로 쓰여집니다. 죽었던 내가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고 싶어 하는 내가 예수님 의의 종이 된 겁니다. (롬 6:18) 종이란 자기로 인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유자란 얻어받기만 했지 자기 것 내놓을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이것이 성도의 자신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우리의 육신을 주님의 손에 처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9강-디도서 2장 9-10절(하나님의 자신감)231022-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2장 9-10절입니다.

디도서 2:9-10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지상에서 인간들은 주인으로 사는 사람, 그 밑에 하인으로 살아가는 사람,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힘과 힘의 차이 때문에 발생 된 건데, 이런 세상 안에서의 질서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한다, 해서 이 질서는 숨어있는 하나님의 구조를 반영해 주고 있다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어떤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의 원형으로 자리 잡아요. 그 질서가 그대로 이 세상에 투영이 되는 겁니다. 투영이 되어 버리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질서가 장차 오실 예수님, 그리고 이미 오신 예수님께서 활동할 수 있는 체계를 형성해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구조를 가지고 지상에 내려올 때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 종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은 현재 하나님마저도, 예수님 자신마저도 이 땅에서 종의 구조에 순종한 거예요. 그것은 이 세상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어디가 잘못되어 있느냐 하면, 엉뚱한 주인이 주인 행세하고 주인 노릇 하고 있다는 잘못된 것을 들춰내는 일을 주께서 하신 겁니다.

질서가 감춰졌다는 그 대목, 옛날 모세의 성막에 지성소가 있는데 지성소의 특징은 창문이 없어요. 창문 없는 자체 구조가 이스라엘 집단 내부에 숨어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사실 백성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지성소가 중요해요.

지성소의 신기한 점은 분명히 땅에 성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질서가 그 안에 담겨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성막 바깥에서 움직이는 모든 활동은 지성소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이름의 활동성을 바깥으로 드러낸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주 특수한 민족입니다.

특수한 민족일 때, 이 세상에서 힘과 소유의 차이 때문에, 가진 것의 소유의 차이 때문에 주인과 종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지상에 있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철폐해버리고 뭐로 바꾸느냐 하면, 자유인으로 바꾸는 거예요, 자유인. 종도 아니고 주인도 아닌 자유인으로 발생시키고자 하는 겁니다. 이 땅에 종으로 오셔서 유일하게 자유인으로 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그 아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자유인으로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에 매여 있다, 그리고 붙잡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자유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 2절에 보면, 십계명 줄 때 십계명만 생각하지 마시고 그 앞 서문에 이게 나와 있어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애굽 자체를 종 되었다, 애굽 사는 사람들은 자기 나라니까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는 특별하게 종으로 기억되는 나라였어요.

종 되었던 너희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너희들을 인도하여 냈다’는 거예요. 이게 구출이고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구원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종 의식이 없으면 구원 의식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 중에 자기가 종 되고 싶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모조리 주인이 못 돼서 환장한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주인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주인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뭐가 성립되지 않느냐 하면,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구원은 종 의식을 가진 자에게만 구원이 의미 있게 덧붙여지는 거예요. ‘내가 지금은 너에게 꿀리지만 언젠가는 나도 주인 노릇 한다.’ 이런 식으로, 과장이 너무 뻑뻑대면 ‘내가 언제까지 이 회사 종인 줄 알아? 나도 퇴직하고 카페 차린다.’ 이게 인간 사회에서의 구조고 의식이잖아요.

사람에게 내뱉어지는 모든 말이 어디서 내뱉어지느냐? 자기 생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 생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라는 환경에서 제공된 말을 내 식대로 그냥 반사할 뿐이에요. 되풀이되는 메아리죠. 그걸 메아리라고 하지요. 나에게 도착한, 이쪽에서 들리는 세상이라는 그 파동이 인간인 나라는 존재를 통해 되받아 줄 때 세상이라는 환경과 내 내부의 환경이 점점 닮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자체가 인간을 저주의 종으로 삼기 위해서 마련된 환경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가만 계시지 않거든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그래, 선악과 따먹었니? 또 심으면 되지. 그냥 낙원에서 같이 살자.” 이게 인간들이 이해하는 자비고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우리 편이야.’ 뭐 이런 식으로요.
하나님은 사람 편 된 적이 없습니다. 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사람이에요. 마지막 아담이거든요, 두 번째 아담. 진짜 아담은 예수님 뿐이고 나머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 편에 선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사람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다들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지만…, 여러분, 여기서 아셔야 돼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조건이 있어요. 거기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을 때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이것을 마귀의 형상으로 만든 것이 마귀거든요.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마귀 잡자.’로 나오시는 거예요. ‘마귀 잡자. 마귀 잡아야 되겠다.’

마귀 잡는 방법이 창세기 3장에서 약속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마귀 잡고, 두 번째로 여자 잡고, 그다음에 남자 잡고. 차례로 하나님께서 저주를 베풀어서 ‘이 세상 전체가 내가 원한대로 만든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어요. 제가 인간들이 이 세상에 있다고 했으니까 그냥 인간이라는 단어를 쓰겠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이 세상 살면서 자기가 알아야 될 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 환경 속에서 그 나물에 그 밥이기 때문에, 환경을 누가 바꿔요? 못 바꿉니다. 내 인생, 내 모습, 안 바뀝니다. 바뀔 수가 없어요.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것도 사기 고요, 구원해 주겠다는 것도 둘 다 사기에요. 교회에서 그것 가지고 밥 먹고 사는 거예요, 사기 쳐서.

내 인생을 누가 바꿉니까? 바꿀 수가 없는데요.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바꾸질 않습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네 인생은 네가 속한 이 자연환경과 함께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종노릇이라고 하는 겁니다. 종은 바뀌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인간은 일을 해야 돼요. 영어로 ‘work’죠. 인간은 일에 치이고, 시달리고,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해요. 육신은 육신대로 망가지죠. 일을 하는 데 망가지지 않는 육신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 극장에 나와요. 충북 괴산에서 하루 종일 열 몇 시간씩 통닭 튀기는데 온 몸이 다 망가져요. 일 해서 망가진 거예요, 몸이. 그리고 자연 현상, 번개, 바람, 비, 폭풍, 기근, 이거 인간이 어떻게 수정합니까? 태풍 보고 지시할 일 있습니까?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특히 구약에 나오는 태풍, 번개, 폭풍, 비, 바람, 이것을 관장하는 신에게 잘해보겠다, 할 때 그 신이 바알이에요. 우상입니다. 우상을 왜 섬기느냐 하면, 어떻게 한번 잘 보여서 내 형편 나아져 볼까, 이걸 시도하는 그 신이 그 바알 신이에요. 바알이라는 말은 나의 신 또는 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벌써 인간에게는 주인이 있었죠, 바알 신.

고통스러워서 어쩔 수 없으니 나름대로 해결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구약의 바알도 있지만 신약에 들어오면 그 내용이 더 심해지고 깊어집니다. 구약에서 ‘우상 섬기지 말라’가 신약에 와서는 이렇게 바뀌어요. ‘네 육신을 섬기지 말라’고 바뀝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3장 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상 숭배는 다른 것이 아니고 네가 네 욕심에 고개 숙이는 것, 쉽게 말해 네가 너를 지시하며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우상 숭배라는 거예요. 그러면 육신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육신에 대해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에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여기 구원, 구출할 때 어디서부터 되느냐? 혈육이에요. 우리 육신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 육신을 무엇이 잡고 있느냐? 육신에게 사망이 번지는 이유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 마귀가 육신을 붙잡아서 우리의 육신이 볼모로 잡혀 있는 거예요. 누구에게? 악마에게. 어떤 식으로요? “너 그러다 죽는다?” 죽음에 협박당하면서 놓여 있다는 겁니다.

15절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죽기를 무서워하는데 이게 뭐 한순간이었을까요? 5년? 십 년? 아닙니다. “일생에 매여” 그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종노릇” 이거? 어쩔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구원이 안 됩니다. 우리가 마귀를 이겨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마귀의 세력을 잡은 자”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세력이라는 건 확고하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꼼짝 마라.”가 세력이에요. 그리고 종이라는 것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완전히 묶여 있는 거예요. 가스라이팅 당하는 겁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제가 이렇게 하면 뭐 ‘마귀한테 그렇게 당하고 있군요?’라고 생각할 거예요. 맞아요. 마귀에게 당하는데 더 중요한 문제는 그 마귀가 우리 내면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6장에 보면 22절에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우리 내면마저 마귀에게 다 내어준 거예요. 이 내면을 다 내줬으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사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 내면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 이 사회고, 질서고, 어릴 때부터 그 질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질서를 대물리면서 우리가 받고 주고받고, 주고받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일평생을 무서움에 떨면서, 죽기를 무서워하며 주고받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내면 속에 악마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한 이유가 있어요. 인간이 환경이 나빠서 어쩔 수 없이 죄짓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내면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어떤 왕이, 인간을 지배하는 통치자가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된 거예요.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있는데 동생을 죽인 사람이죠. 가인이 평소에 마음이 나빠서 뭐 누구 죽이는 걸 취미로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죠. 그런데 여기 7절에 보면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라고 했어요. 이 말은 결국 가인 내부까지 악마가 지배한 겁니다. 악마는 인간을 내면을 장악해서 악마가 자기 할 일을 다 해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를 죽이는 일을 해야 해요. 그 가인, 그 마음 씀씀이가 바깥 사회로 투영된 것이 가인의 역사고 그게 오늘날 우리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가인의 역사고 악마의 역사에요. 사람이 생존 때문에 먹을 게 없고 살기 힘들어서 괴롭고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더 괴로운 것은 인간 내부에 악마가 들어오면 나는 하나님께 미움받는데 쟤는 사랑받을 때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입장에서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벌써 질서 자체가 단순히 밥 먹고 사는 질서가 아니에요. 악마와 하나님과의 투쟁 장으로 변한 것이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의 환경입니다. 그러면 악마는 아벨을 왜 죽였는가? 악마가 사주해 집어넣은 의식이 있어요. 그게 뭐냐? 주인의식이에요, 주인의식. 아까 이스라엘은 종 되었던 데서 나왔잖아요? 종 되어 나왔던 그 이스라엘이 나중에 멸망할 때 왜 멸망 당했는가? 종의 의식이 하나도 없고 주인의식으로 돌변했기 때문이에요.

내 속에 악마가 있으니까 내가 남의 들러리가 되기 싫은 거예요. 심지어 나는 하나님의 들러리로 사는 것도 싫어요. 왜 싫으냐? 그냥 싫어요. 그러면 그것 좀 고치지. 그거에 대한 정답은 없나? 어쩔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 방법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한테 꿀리지 않는 존재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하나님 앞에 잘난 걸 내놓을 것이 있기를 내 쪽에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나님 시킨 대로 다 했습니다. 이래도 지옥 보낼 겁니까?’ 이렇게 거래하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자유인의 특징은 뭐냐?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면 전부 다 받아 먹은 거니까요. 일방적으로 평생 주님께 받은 것만 있기 때문에 내가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자유입니다. 그래서 자유에요. 아무것도 없는 것. 그러면 옆에서 마귀가 “너도 솜씨, 열심히 한 거 있잖아. 그것 좀 발휘하면 되잖아.”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라다니면서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어요.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이 예수님의 제자가 한 질문을 사실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실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지만 안 하는 척을 하고 있으니 그게 문제인데, 마태복음 18장 1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말을 했어요.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 질문을 우리가 해야 해요. 내가 마귀라는 것을 드러내려면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사실은 하루에 한 이백 번 정도는 할 거예요. 우리가 남하고 하는 모든 대화가 ‘누가 누가 잘났나’에 관한 대화에요. “이선균이 마약 했대.” 이거잖아요. 잊을 수가 없어, 잊을 수가 없어. “‘어이가 없네?’ 걔도 마약 했다네?” 주변의 아는 사람, 연예인 이야기 이 모든 것이 누가 누가 우수한가, 누가 누가 잘났나, 누가 내 공격의 표적이 될 만한 존재인가에 대한 거죠. 특히 명절 날 큰집에 모여서 동서 간에 “네 애 몇 등 했는데?” “우리 애 별로 못했는데?” “그렇군. 우리 아이 이번에 1등 했다.” 이런 거. 1등도 수석으로 1등 한 것.

이 모든 대화, 제자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20장에도 비슷한 말이 있는데,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어요. 예수님과 딱 붙어 있는 제자들이에요. 우리가 이런 말을 보면서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시기 바랍니다. 육신은요, 우리 육신은 어쩔 수가 없어요.

마태복음 20장 20절에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참, 이 대목을 볼 때마다요,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어머니가) 그 아들을 데리고” 이 대목 있잖아요. 이 대목에서 제가 느끼는 것은 ‘민식이 법’ ‘학교 앞에서는 속도 30 이하로 천천히 가야 한다.’ 그 법. 이 세상의 모든 법이 이 어미의 심정을 반영한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과 질서는 스스로 한 개인 한 개인에게 주인의식을 못 만들어줘서 환장한 법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베대의 엄마가 아들 데리고 예수님께 나올 때 이 질문 자체가 문제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내가 자유인이 되는 방법은 자기가 최고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그게 이 세상이 가르쳐준 거고 그러한 품성은 육신이 있는 한 그것은 마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자꾸 이걸 고칠 생각을 하면서 교회 와서 인간 만들겠다, 하는데 교회 와서 인간 된 적이 없어요. 교회 와서 인간 안 됩니다. 그냥 교회에서 털어놓는 거죠. 우리 본색이 노출되고 발각되는 겁니다, 말씀 앞에서, 주님 앞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같은 이야기 여러 번 했어요.

20장 16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순서 바뀐다.” 들어도요, 이 말이 인간에게 먹히질 않는 이유가, 이 말씀은 예수님 본인에 관한 이야기에요. 예수님 본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면서도 이 땅에 종으로 오셨잖아요. 빌립보서 2장, 이거 외우는 사람 꽤 될 겁니다. 6-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철저한 종이죠. 종인데 왜 종으로 오셨는가? 아무도 믿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인간들은 주인 못 되어서 환장한 사람, 정신병자들 다 됐기 때문에. 그게 바로 이 땅에서 아주 마귀 사람다운 모습이에요. 우리는 그 세계의 출신자고 어쩔 수 없이 그 세계에서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면서 일평생을 이유도 모른 채 벌벌 떨며 살아가고 있어요. 해결이 되지 않아요.

인간이 아니죠. 형상이 빠졌으니까요. 마귀의 형상으로 교체되어 들어왔으니까 이건 뭐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죠. 그냥 죄의 종이에요. 이게 실생활에 주어진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디도서에서는 짧게 나와 있지만 에베소서 6장 5절에서 9절에는 길게 나와 있어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모두 다 종이라는 거예요, 이 땅에서. 예수님 마저도 종 되었고 예수님 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종이라는 겁니다. 종인데 종이라고 아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비록 내가 가진 것이 없어 너의 노예로 살지만 언젠간 네 것 다 빼앗는다, 다 뺐고 출세한다.’ 이미 마음속에서 본인이 주인이에요. 이걸 어떡할 거예요? 해결이 안 되는데. 육신이 있는 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될 수가 없어요.

구원? 무슨 구원이 있어요. 세상에 마귀를 받아주는 천국도 있습니까? 인간이 주인 노릇 할 때 그 특징이 뭐냐?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자기 의라는 것은…, 생고구마 있잖아요. 생고구마를 칼로 베어내듯이 인간을 얇게 베어내도 결국 마지막 남는 것은 뭐냐? ‘자기의’에요. 심지어 자살해도 남아 있는 것이 ‘자기의’입니다.

그 의를 왜 가지고 있는가, 나는 내 의가 있는 한 그 안에서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나의 의’입니다, 나의 의.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도한테는 그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율법 외의 의’로 바꿉니다. 율법에의 의. 이스라엘이 나타난 것은 ‘집단화된 율법체’에요. 집단화된 율법체. 그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이 세상보다 우위에 있고 먼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하나님의 종 또는 일꾼으로서 활동하게 되어 있어요.

율법이 있기 전에 인간들은 뭘 느끼느냐? 허무를 느끼거든요? 허무라고 하는 것은 모호해요. 허무란 것은 헛되다, 이런 식으로 모호한데 그 모호한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고 그냥 사는 게 허무해요. 그런데 그 이유를 분명하게 구체화 시켜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허무를 저주로 바꿔주는 게 율법이에요. 네가 허무한 이유는 네가 저주받아서 그런 거예요. 벌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이 너를 저주할 거야.” “저를 왜요?” “네 안에 마귀 들었거든.” 마귀를 넣어주는 천국은 없습니다. 지옥을 지옥답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고 합니까? 자식 교육, 철저한 자식 교육. 제가 세베대의 아들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거든요.

세베대의 엄마가 이 정도 열심 같으면 자식 둘 어렸을 때부터 먹이고, 키우고, 씻기고, 한다고 얼마나 애를 썼겠어요? 그리고 주변에서 어떤 상을 주겠습니까? ‘장한 어머니상’을 줄 거예요. 장한 어머니상. 이 세상 질서에서는 “쟤 크게 되겠다.” 자, 크게 되겠다는 말, ‘종 쪽이 안 되고 주인 쪽에 서게 되겠다.’라고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자식들을 교육 시킵니다.

엄마 죄의 종이죠. 그 나물의 그밥, 자식도 죄의 종이죠. 거기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외할아버지까지 같이 덤벼들죠. 온 집구석 전체가 죄의 종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말은 딱 간단해요. 어쩔 수가 없어요. 왜? 타고 났으니까.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이 아닌 티를 내야 할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이 죄의 종에서 자유자로 바꾸는 방식이 시편 105편에 보면 나옵니다. 시편 105편 17절에 보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종으로 팔렸어요.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셉은 꿈을 받은 사람이에요. 그 꿈을 받았는데 꿈과 부합된 동시에 요셉은 종으로 팔렸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가는 곳마다 뭐가 다 펄펄 들춰지느냐 하면, 인간들이 얼마나 주인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는지를 다 들춰내는 방식이 나오는 거예요. 그게 보디발의 아내입니다. “넌 종이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 관계하자.” “안 됩니다.” “왜 안 돼?” 왜 안 될까요? 자기 속에 꿈이 있는데 그 꿈은 뭐냐 하면, 기존에 종으로 팔려야 될 꿈이기 때문에 그래요.

세베대의 아들 엄마에게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예요. “너희들이 하는 행세는 이 세상 주관자들이 하는 행세다.” 이 말이죠. “주인 못 돼서 환장하고 주인 된 것을 부러워하는 자들, 너희 이 세상 주관자들은 섬기길 원하지만 나는 너에게 말한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섬김을 받는 게 아니고 사람들의 종이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 엄마는 되려 “이 천국에서 우리 애들 높이 되겠습니까?” 하고 치맛바람을 집어넣으니 주님께서는 그것조차도 이 세상이 얼마나 서로서로 힘없어서, 주인 못 돼서 환장한 동네인지 그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는 거죠.

요셉이 종으로 팔려서 결국엔 이 세상에 모든, 애굽부터 바로 왕까지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딱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그게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이 세상은 주인과 주인들의 집합이에요. 종 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언젠가는 부자 되어 나도 주인 되겠다, 는 그런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둘 다 죽었던 대목이 나오죠. 거기 보면 이 부자가 지옥 가서도 주인의식을 버리질 못해요. 거지 나사로 보고 내게 와서 물 좀 배달하게 해달라고 그런 지시를 내립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지옥 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 인간이 어딜 가겠습니까?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의 전조에요, 전조. 왜냐하면 이 세상 살아가는 마음가짐이 그대로 지옥으로 갑니다.

따라서 여기서 천국 간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어떤 식으로 성도를 천국에 보내는가? 갈라디아서 4장 말씀에 보면 나옵니다. 하도 유명한데요, 여기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숨어있는 하나님의 질서가 언약의 이름으로 주어집니다. 두 명의 자식을 갖게 만들었어요. 하나는 계집종에서 나온 자식인데 육체를 따라 난 자식 이스마엘이 나오고, 또 하나는 여기 23절에 보면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없고 이 세상에 주어진 약속이 있을 경우에만 거기에 자유가 주어지는 겁니다. 약속 없다, 이것은 ‘자유가 없다.’ 약속 있다, 이것은 ‘그 안에 자유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유인이라고 하는 건 악마가 있던 그 사람 마음속에 약속이 들어올 때 그것은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유인이 되는 원칙은 뭐냐? 출애굽 할 때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들을 인도해내셨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 삶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충실히 이 마귀의 종, 세상의 종, 죽음의 종, 사망의 종에 해당되는 그 육신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 인식을 위해서 율법이라는 것이 주어졌어요.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로마서 7장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내 안에 다른 마귀 들었다, 죄 들었다가 율법을 통해 밝혀집니다. 어떻게 밝혀지는가? 율법이 ‘하라’고 하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든 하게 만드는 또 다른 ‘나’가 율법을 통해 나옵니다. 이게 말씀의 효과에요. 언약의 효과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언약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최종적으로 윤리 도덕, 자기 의죠. 그게 최종적이라고 다 생각해요. 이건 뭐냐? 선악과가 최종적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선악과 말고 다른 나무를 제시해요. 나무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있었던 겁니다. 선악과가 아니고 생명 나무가 또 있었던 거예요. 두 개의 생명나무의 질서를 아브라함에게 두 개의 언약 모습으로 자식이라는 구체화를 통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두 자식은 뭐냐? 두 자식은 비유죠, 비유. 우리는 인간이 아닌데 약속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 자신이 은유와 비유로 활용당하게 되는 거예요. 쓰이게 되는 거예요. 이게 실내용인 거예요. 실제 내용이에요. 흙으로 죽어야 되는데 말씀이 들어와 버리면 영원과 연관되어 있어요. 우리 몸이.

바깥에 있는 보이지 않는 다른 질서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겁니다. 거울 보면 비치는 내 모습, 은유에요, 비유입니다. 실제 인간은 아닌데 장차 너와 같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의 약속이 먼저 우리 속에 들어오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던 악마가 있고 또 우리 바깥에 율법과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 내부는 전쟁이 일어나겠지요.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미 악마는 우리 속에 자기 의를 심어놨어요. 자기의, 이미 알아버린 선악을 우리가 모독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다. 윤리 도덕을 모독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내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고 열심히는 살았잖아. 애 둘 키우면서.

세베대의 아들들 어미도 마찬가지예요. 두 애 잘 키우면서 애들을 종이 아니고 주인으로 살게 하겠다는 그런 의지가 아주 강렬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거기다 율법을 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갖고 있던 어떤 것도 율법의 우위를 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선악을 아는 것으로 행세하는 그것보다도 율법 자체가 갖고 있던 선과 의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우리 속에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그 율법에 의해서 심판받아야 되는 겁니다. 서울강의에서도 잠간 언급을 했는데 요한복음 5장 24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할 때 이 사망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내가 목숨 끊어지는 것을 사망으로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 말씀에 반대되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죽을 뻔했던 내가 이제는 영생을 얻었다, 가 되어서 내가 그대로 유지가 되어버립니다. 죽을 뻔했던 나가 이제는 영생 얻는 나가 돼요.

그런데 이 본문 말씀은 그것이 아니고 심판에서, 혹독한 심판을 다 받았기에 더 이상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율법이 종이 되셨어요. 하나님이 피조물에서 저주를 줄 때 마지막 저주의 끝판왕, 저주를 줄 때 저주는 이게 저주의 전부 다, 저주의 전부 다를 누가 받았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저주의 전부 다를 받은 거예요. 더는 저주가 없어요. 아버지께 받은 저주입니다.

그 저주 그것이 바로 심판이에요. 그게 성도한테 기름부음의 성령이 와버리면 성도된 사람은 받을 저주를 몽땅 다 받아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받은 그 저주에 합류하고 참여했으니까 주께서 준비해 놓은, 달달 긁어서 저주란 저주는 전부 다 예수님께 주어졌는데 그 예수님의 저주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심판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심판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벌써 받았기 때문에 더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거예요. 남는 것은 영생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에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게 하나님의 자신감이에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솜씨고 자기 작품이고 자기 열매에요.

로마서 8장 34절에도 나와요. “누가 정죄하리요” 즉 “그 사람에게 내 아들 내가 줬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그 사람 속에 약속, 아들을 줬다.” 이미 저주란 저주는 다 받아버린, 그래서 그 저주에서 부활하신, “저주 없다!” 하고 나왔던, ‘영구 없다’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 없다!”로 나온 그분을 우리에게 집어넣으면 우리는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가 되면서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출애굽에 의해서 보면 그걸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누가 잘 먹고 잘사는가, 누가 애 교육 잘하는가,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에서 죽 나오는 이야기가, 사도 바울은 이 현실을 어떻게 보는지? 이미 이런 복음을 갖고 있으니까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생명을 얻어버린 거예요. 이러면 성도는 나무를 두 개 다 알고 있는 셈이 돼요. 불신자는 선악 나무만 알아요.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자.’ 또는 ‘교회 나왔다. 왜 교회 나오는가? “교회 나오면 참 좋은 말 많더라.” 이런 거요. “그거 지켜야 천국 간대.”

도 닦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다 하고요. 그러나 사도가 아는 복음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도가 어느 정도로 자유로운가는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나옵니다. 20, 21절에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왜 당신은 이중트릭을 쓰느냐. “뭐야? 율법 없는 자야 있는 자야? 유대인이야, 헬라인이야? 정체를 분명히 하라.” 은유는 정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없어요. 두 개 다를 보여주는 겁니다. “당신이 오실 메시아입니까?” 많은 질문을 예수님이 받았어요. 여러분, 적그리스도를 누가 낳았느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적그리스도를 만들어요.

왜냐? 이삭을 통해서 야곱도 나오지만 에서도 나와요. 짝이 있어야 돼요. 짝이 있어야 본래의 것이 나와요. 먼저 된 자를 만들어야 나중 된 자가 나온다고요. 주님께서 종으로 오셔야 예수님 빼놓고 전부 다 악마에 속해서 주인 못돼서 환장한 정신병자라는 것이 들통이 나는 겁니다. 하루하루 사는 목적이 뭡니까? 종 안되기 위해서. 남 들러리 안 서는 인생, 그게 성공한 인생의 전부였잖아요.

우리에게는 그게 전부 다 그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예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종으로 오셨습니다. 이사야 52장 1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분명히 하나님의 종이, 여호와의 종이 높이 되는 것은 맞는데 현재는 어떤가? 현재, “이왕에는(현재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현재는)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현재는)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그래서 현재는 아무도 이것은 상상도 못 한, 이것은 인간일 수 없는, 이런 인간은 여태껏 본적이 없는 사람으로 오셨어요.

이게 이사야 52장입니다. 그다음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 유명한 말씀, 2, 3절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 (모든 사람이)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하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모든 인간이 적그리스도한테 매여 있다는 증거가 뭐냐?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바로 악마의 평가를 인간의 입으로 그냥 내뱉어지는 식의 질서, 이 세상 구조 속에 주님께서는 들어오신 거예요. 우리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고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다시 말해서 그가 십자가에 찔림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허물 덩어리며 우리 자체가 어쩔 수 없이 허물을 간직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뒤에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는 애초부터 죄악이며 저주받아 마땅하며 천국은커녕 지옥 가야 합당한 맞춤 지옥 맨, 지옥에 딱 맞는 맞춤 인간으로 이 땅에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거예요.

그런 주제에 무슨 천국을 넘봅니까? 천국을 아주 우습게 여기고 있어요. 어딜 그런 사기에 넘어가요? 주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왔지만 우리의 그 잘난 행함이 자유를 다 가려버렸습니다. 매일의 삶에서 나의 행함에 집중하고 그걸 귀하게 신경 써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자유마저 가리게 만들었어요.

갈라디아서 4장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다가와야 돼요. 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베드로전서 3장 6절에 보면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사라가 자기 남편 아브라함보고 주님이라 했어요. 이것은 부부 사이를 넘어서서 두 비유 사이고 두 언약 사이라는 것, 언약을 받은 분과 언약을 구체화하는 자의 관계, 그게 바로 주님과의 관계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주님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집어넣으면 우리가 바로 주의 종이 되는 거예요. 종이라는 의미는 뭐냐?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주님의 종, 이거 못되어서 환장한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인생에 대해서 원망합니까? 주의 종 되는 것이 그리 쉬운지 알아요? 제가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공짜로 준다고 당연한 게 아니라고요.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종에 대해서 이렇게 합니다. 7-9절,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명한대로 했다고, 시키는 대로 했다고 사례하겠느냐. 사례하면 안 되지요. 그러면 그 종은 하나의 존재자, 실존자가 되고 그러면 비유가 안 되잖아요. 빨리 실존을 버리고 자유가 되려면 언약의 사람이 되어야 돼요. 언약의 사람이 되려면 아까같이 심판의 율법, 율법에 의한 심판에 이르러야 돼요. 율법이 주고자 하는, 주께서 야무지게 준비한 그 율법을 그대로 우리가 다 받아야 됩니다.

받을 때 그 신나는 기쁨. 왜? 내가 다룰 수 없는 육신을 다뤄 주시니까, 망치게 하시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종이라는 것은 주인을 드러내기 위함이지 종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에요. 우리 인생, 우리 운명, 우리 숙명, 나를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그 효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겁니다.

끝으로 로마서 6장 보겠습니다. 17, 18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는 수시로 죄가 툭툭 튀어나왔는데 이제는 수시로……, 나의 의 아닙니다. 이제는 수시로 주님의 의가 튀어나오면서 우리는 다시 내 육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를 훼방하는 적그리스도적인 속성을 지닌 육신인 것을, 그걸 깨닫는 즐거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빨리 벗어야 되지, 이 더러운 유니폼 이거 빨리 벗고 튀어나가야 되는데 주님께서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더.” “빨리 죽여 주옵소서.” “좀 기다리라니까! 이번엔 저쪽에서 카페한번 해야지. 그리고 손자도 키워야 될 것 아니야? 신발도 새로 사야 되고.” 네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얼마나 내가 주인의식에 찌들리고 주님을 어떻게 이렇게 모멸하고 모욕하는, ‘이게 바로 마귀구나’ 하는 그것을 절실하게 느낄 때 그와 동반해서 우리는 감사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에서 외치는 그 사기, 잘 하면 천당 가겠다 하는 그러한 속셈, 천당 가서 주인 노릇 하겠다 하는 이 악마, 그런 악마를 받아주는 천국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여, 고칠 수 없으면 심판해 주옵소서. 그 심판하시는 그것이 주와 함께 하는 즐거운 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의 기억  (0) 2023.11.05
하나님의 폭력성  (1) 2023.10.29
육신에서 말씀으로  (0) 2023.10.15
전체성과 부분  (1) 2023.10.02
세례의 세계  (0) 2023.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