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전체성과 부분

아빠와 함께 2023. 10. 2. 08:38

전체성과 부분 

2023년 10월 1일              본문 말씀: 디도서 1:15-16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인간들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선과 악의 개념은 인간 선악과 따먹은 결과로서의 선악개념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기 위해 인간 안에 심어놓은 그런 선과 악의 개념입니다. 이렇게 인간 내부에 애초부터 잘못 되어 있기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3) 인간은 가짜 인간입니다. 진짜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모르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 존재만이 하나님께 진짜 만드신 그대로의 인간입니다.

문제는 가짜 인간에서 진짜 인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악마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하늘 나라의 존재입니다. 곧 전체성을 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 이 전체성의 주도권을 놓고 한바탕이 전쟁이 일어났고 패배한 마귀는 인간이 있는 이 땅의 세계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 12:7-9)

이 악마의 사자가 곧 귀신입니다. 이 귀신들의 특징은 이 지상에 자꾸만 어디로 들어갈려고 하는 겁니다. 전체가 부분 속으로 자리잡을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부분들이 집합으로 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상적인 존재로 자부합니다.

불신자 가운데서 점잖고 훌륭하고 착하고 성실하게 보이는 자들을 숱하게 많습니다. 아마 대다수가 그런 사람일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소환해서 한 번 다음과 같이 물어보면 그들로부터 무슨 답변이 나오겠습니까? “왜 당신들은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겁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내가 전체성이거든”

이것, 악마의 사자(使者), 곧 귀신이 말하는 겁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 8:28-29)

즉 예수님이 아니면 귀신과 (가짜)사람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자는 예수님과 상관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 상관없음의 결과가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배척받으심’이 최종 심판의 확정된 기준이 되어버렸습니다.

즉 예수님은 심판 때 물으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마귀의 사주를 받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평가하고 선악 지식으로 관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17:25에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5)

인간들이 겸손을 가장해서 참된 신을 찾고자 하면서 날리는 멘트가 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찾음이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 세계에 참된 인간을 찾고자 합니다. 선과 악의 지식이 없는 자를 찾고자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뭘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친히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입장에서 모든 일에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 영광성 때문입니다. (요 12:43) 즉 인간은 부분적인 자기 일에 심각합니다.

그러나 그 심각함의 수준이 하나님의 심각함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노아 홍수 때, 전 인류를 싹 쓸어버리고 또 쓸어버려야 하는지 그 심각함에 이르지 못합니다. 인간은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전체가 인간에게 찾아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끔 하십니다.(고전 10:31) 왜냐하면 결국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선과 악 지식은 그 자체로 ‘전체 악’으로 규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늘 차원에서의 ‘전체 선,’은 무엇이냐겠지요. 전체 선은 참된 인간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모든 율법을 다 이룬 바로 그 의를 예수님께서 달성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전체성이 어떻게 성도 부분에 임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 세계에서 비웃음과 비웃음의 교차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각함을 모조리 비웃습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

반면에 인간들이 주님에게 일어난 일을 비웃습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눅 23:35-36)

이 비웃음의 함축되어야 비로소 복음다운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이 복음 안에 비로소 ‘전체’가 다 담겨 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의 새로운 전체성입니다. 희생 피의 효과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기생 라합은 이 전체성을 위해 기존의 정치적 전체성을 포기했습니다. 더나아가서 자기에게서 자신의 가치마저 발라내게 되었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더는 의미가 없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기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친히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일상 패턴이 오로지 허무만 양산할 뿐임을 도리어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디도서 1장 15-16절(전체성과 부분)23100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1장 15-16절입니다.

디도서 1:15-16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여기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죠,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믿지 않는 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시험을 해볼 수 있어요. 믿지 않는 자 가운데서 바르게 살고, 착하고, 선해 보이는 사람들을 한 번 시험 삼아 소환해 보는 겁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겁니다. 왜 당신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거죠. 착하고 바르게 살고 선하게 사는데 복음은 안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그들의 인생을 보는 그 진지함이 하나님의 진지함 수준에 이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기 수준에서 이것은 진지하다 진지하지 않다,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 를 본인이 판단하는 거예요.

‘이것은 심각한 일이다, 심각하지 않은 일이다.’라고 하는데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심각한 거예요. 전체 다를, 노아 홍수 때 물로서 하나님이 충분히 자기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죽여버린다, 다 죽여버린다.’ 이게 하나님한테도 심각하지만 인간들에게도 굉장히 심각한 거예요.

그래서 그 착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들인데 믿지 않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항상 부분적으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체를 다 봐요. 전체로 다 보게 되면 자기 입장에서 심각한 걸 챙기는 이런 개인주의자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전부 다 코미디언들이에요. 인생 자체가 웃기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시편 2편 4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인간들이 이 땅에서 부분, 자기라는 개인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은 주님 앞에 비웃음당할 수밖에 없는 웃기는 이야기인데 그들 나름대로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심각해요. 위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개인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그 다수의 진지함의 쇄도에 인생 마음 자체가 지쳐있습니다. 힘들어 있습니다. 자, 원인은 무엇이냐? 원인을 알려면 전체를 보는 주님의 안목으로 성경을 볼 필요가 있죠. 전체를 봤을 때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선악을 전혀 모르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인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았다? 그것은 이미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니무니다, 정말. 전체로 볼 때 인간이라고 볼 수가 없죠. 그래서 마귀가 인간을, 아담을 꾀어서 그 후의 모든 인간을 가짜 인간으로 전 세계에 깔아놓았습니다. 이 가짜 인간을 깔아놓고 그다음에 가짜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찾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은 선하기 때문에 선하게 살면 신을 만날 수 있다, 라는 그런 풍문, 가짜 뉴스를 이 땅에 퍼뜨린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뭘 찾느냐 하면, 진짜 인간을 찾아요. 인간은 진짜 신을 찾지만 하나님은 진짜 인간을 찾습니다. 어떤 인간? 선악에 대해서 모르는 인간을 찾아요. 선악에 대하서 알지 못하는 인간.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선악을 모르는 인간은 우리 중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짜 인간을 인간 앞에 보내셨죠. 그러면 진짜 인간은 뭐냐? 모든 율법을 다 이룬 분이에요. 모든 율법, 하나를 어기지 않고 다 이룬 분을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전체성이, 전체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인간도 진짜 인간이 아니고 가짜 인간이며, 가짜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전부 다 가짜며 악한 일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행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3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게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와 좀 달라요. 항상 유대인들은 오른쪽이 바른 쪽이고 왼쪽이 나쁜 쪽이었어요. 구제할 때도 오른쪽으로, 왜냐면 출애굽 때 하나님이 오른쪽을 통해서 일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유대인들은 왼손잡이를 저주받은 자라고 간주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이 인간 속에 배겨 나오고 인간의 오른쪽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에요.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은 인간에게 있어 옳은 일도 실은 나쁜 일이라는 거예요. 인간 속에는 선한 일이, 옳은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이 바르게 해도 모든 것이, 믿지 않는 자들의 모든 것이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다고 오늘 성경 구절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모든 것이 더럽고 깨끗한 것이 없다, 왜? 전체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 부분적으로 부분적인 자기 일에 몰입하고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생긴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마귀가 인간을 가짜 인간으로 바꾸었습니다. 가짜 인간으로 바꿨다는 말은, 인간이 인간이라면 자기를 가짜로 만드는 그 힘, 세력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무덤가에 귀신들린 자가 나왔을 때 귀신들린 자가 인간치고는 어떤 날 것을 그대로 폭로하는 그러한 틈이 되어버린 거예요. 보통 인간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도 다 마귀 자식이지만 그것은 귀신에 의해서 됐다는 것이 날 것으로 다 드러나지 않는 반면에 여기에 특이한 사람, 귀신들린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 위에서 보기에 인간의 전체적인 특징들, 인간의 특질, 특징, 인간이 왜 가짜 인간인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로써 이들이 등장한 겁니다.

등장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죠. 이런 대목에서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만났다, 라고 했을 때 남들이 보면 그냥 사람 둘이 예수님 만난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고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왜 사람 둘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지 않고 귀신들린 자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냐면, 귀신들린 자 입에서 사람 대 사람 만남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와 버렸어요.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을 했어요. 믿지 않는 자를 대표한 거예요. 왜 착하고 선한 사람, 여러분도 명절 돼서 식구들 많이 만났죠? 그야말로 만났을 때 대전강의에 의하면 좀비와의 대화에요. 그건 그냥 좀비들이에요. 세상 것으로 완전히 환장한, 경직된, 굳어진, 세상 것을 마약처럼 계속 먹어야 움직이는, 그게 삶의 목표인 것처럼 세상 것을 먹어야 사는 그 좀비들, 그걸 추석이라고 같이 만난 거예요. 나올 수 있는 대화는 세상 것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부분적으로 자기는 바르고 선하게 착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들 하고 있어요. 그중에 두 사람이 의도적으로 예수를 만난 거예요. 만나서 하는 말이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시 묻습니다. 이 세상에는 믿지 않아도 착하고 바르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입에서 최종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게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전체거든요. 전체니까 상관이 있는 거예요. 너는 개인이고 너는 부분이고. ‘몸이 아프고 마음이 가난하고 돈도 없고 아, 짜증 나, 짜증 나.’ 주께서는 “너 지금 코미디 하니?” 그게 바로 코미디라는 거예요. 이게 왜 코미디가 되는지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 설교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17장 25절에 보면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지금 인간들은 자기가 얼마나 착한지 티를 내기 위해서 교회 나가서 하는 고민이 뭐냐면, ‘내가 하나님께 드릴 게 없네.’ 이러고 있다고요. 그게 바로 코미디에요. 주님 입장에서 볼 때 이게 웃을 일이 아닙니까? 지금 저만 웃습니까, 지금?

주께서 줬잖아요. 주께서 뭐든 줬다고요. 전체가 내 안에 들어온 거예요. 그런데 줬다는 사실은 생각지도 못하고 전체가 내 안에 들어왔는데 부분이, 이거 가짜거든요, 부분이 자기가 전체인 줄 알고 “내가 하나님께 뭐 드릴 게 없네요.” 이게 웃기는 것인지, 주제 파악이 안 된 건지. 아니 하나님께 왜 드려야 됩니까? 네가 뭔데? 네가 뭔데 하나님께 드려요?

인간들은 말해요. “내가 나한테는 전체거든.” 그러니까 쥐어박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판받아 마땅한 거예요. ‘받은 게 있으면 돌려줘야지.’ 돌려준다는 생각 차원으로 살아야죠. 자기 건데 기마이 써서, 기마이, 일본 말이라 죄송합니다만 친일파니까 할 수 없어요, 기마이 써가지고 하나님께 드린다니요? 뭐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드린다고요? 그건 자기 영광 아닙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자기 영광에 미쳐서 그래요. 자기가 자기 됨을 놓치기 싫어서,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겁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가짜 인간으로 규정짓고 인간들에게 배척을 받음으로써 노아의 홍수처럼 심판의 진지함을 실시하는데 그 기준이 있어요.

심판의 기준이 뭐냐 하면, “너희들 나 배척했지? 아직도 날 배척하니?” 이게 기준이에요. 딴 기준 아닙니다. 네가 얼마나 착하냐, 훌륭하냐, 바르게 살았냐, 성실하냐, 이걸 묻는 것이 아니고 “나 어떻게 생각해?” “주님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됩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 솔직하게. 나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런데 주님, 주님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야.”

주님은 그냥 부록이에요. 주님 때문에 전혀 진지하지 않습니다. 진지한 것은 내가 나다움 을 지키는데 진지하죠. 나다움을 지키는 게 진지해요. 그러니까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면서 계속 자기 자신을 탐색하는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부분이 부분을 판단하는 거, 비판하는 거, 평가하는 것, 그게 바로 악이라고요, 악.

선과 악을 몰라야 하는데 인간 치고 자기비판 자기 평가 안 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내가 옳게 살았나, 바르게 살았나? 하나님 앞에 훌륭한 성도인 양 착각을 해서 말이죠. “난 날마다 나를 점검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바르게 살았나, 악하게 살았나 날마다 점검합니다.” “점검하지 마. 점검하지 마.”

마태복음 7장에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했어요. “네가 전체를 알아?” 너는 부분밖에 모르면서 어디 건방지게 부분이 왜 너 자신을 평가하느냐는 말이죠. 가짜가 평가해 봐야 가짜라는 그 사실이 나오겠어요? 안 나오죠.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선과 악을 모르는 인간을 찾아요. 선과 악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는 모르는 인간을 찾습니다.

그런데 이미 인간은 악마가 장악해서, 악마가 장악했다는 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게거품 물고 쓰러지고 이게 마귀가 장악한 것이 아니고 항상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생각하는 자체가 악마가 가득 들어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내가 나에게 성실하기 위해서 판단하고 늘 이성적으로 제대로 정신 바짝 차려 살아가고 있는데 예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 이 말이에요. 내가 내일 알아서 하는데 예수 당신이 왜 끼어드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그 귀신하고 인간하고 분리시켰어요. 귀신보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귀신과 나의 분리는 가짜 인간인 우리들은 못 해요.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귀신보고 나가라, 해서 분리하니까 그때 귀신이 분명히 앞에서 뭐라고 했었냐면 “예수님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선을 딱 긋다가 분리가 딱 되니 귀신이 하는 말이, 갑자기 상관없는 예수님 보고 부탁을 합니다. “우리 이 인간 없으면 갈 데가 없습니다.”

왜 귀신은 자꾸 갈 곳을 찾죠? 귀신은 전체성에 속하기 때문에 그래요. 전체성에 속하기 때문에. 인간은 부분이거든요. 전체성이 부분 안 속에 들어올 수 있는 거예요. 그게 귀신입니다. 정말 귀신같죠? 누가복음 11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24절부터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그냥 다니면 되는데 왜 자꾸 귀신이 거할 곳을 찾습니까? 그것은 귀신이 하늘에서 쫓겨나서 그래요. 이 세상은 부분들의 세계에요. 자리를 잡아야 해요. 귀신이 자리를 잡는데 어디에 잡는가? 인간에게 잡는 겁니다. 인간을 자기의 거처로 삼았어요. 삼았을 때 현상은 뭐다?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나?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바르게 살고 있습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런데 주님께서 그 귀신을 심판했다고요. 심판은 전체성이에요. 심판을 딱 해버리니까 갑자기 귀신이 주님 앞에서 쫄았어요. “지금 그 인간 빼놓고 갈 데 없습니다. 돼지 많은데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해 주옵소서.” 그러니 여기서 ‘개나 돼지=인간’ 3자가 동질의 존재가 되었어요. 돼지나 개나 인간이나. 돼지보고 돼지라고 하면 돼지는 기분 안 나빠요. 인간보고 돼지라고 하면 기분 나쁘죠.

성도는 모든 것이 깨끗해요. 불신자는 모든 것이 더럽고 성도는 모든 것이 깨끗해요. ‘더러운 것이 있을 텐데, 죄진 건 나도 아는데’라고 평가하지 마세요. 비판하지 마세요. 왜? 새로운 전체성이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전체성이 들어왔으면 모든 것이 깨끗해요. 무엇을 해도 영광이고 깨끗해요, 무엇을 해도.

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다음에 나온 말,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게 성립되는 존재가 인간이에요. 무엇을 하든지, 그 무엇,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무엇도 다 집어넣어 보세요. 그게 영광이 돼요. 이게 믿어집니까? 이게 부분으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성사되지 않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인간 속에 악마가 들어왔다는 말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왔다는 말이에요. 들어오면 안 돼요. 그런데 이미 들어와 버렸습니다. 들어오고 난 뒤에 성경을 보니 거룩하라, 착하라, 바르게 살아라, 하니까 그다음부터 인간은 완전히 자기 자신이 지옥 갈 수 있다는 자기 사적인 진지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싶어서 그 사적인 진지함에 정신을 못 차려요.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요. ‘교회 한 두 번 빠졌는데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어떻게 주께서 작은 벌이라도 내려서 상쇄되는 방법을 주면 좋겠다.’ “제가 자진해서 벌 받을까요?” 이런 식으로. 십일조를 안 했더니만 서문시장에서 물건 사는데 세상에, 6천 원 더 주고 샀어요.

정신 번쩍 차려서 ‘주여, 6천 원 더 날린 거 그걸 징계라고 여기고 그다음부터는 따박따박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우리 교회 교인들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죠? 해본 적 없죠? 뭐 복음을 아니까. 지금 놀리는 것 같은 느낌 들어서 내가 기분이….

이게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주셨는데 인간은 사적인 것이라도, 부분적이라도 주께 드리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가 자기가 가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게 인간도 아니에요, 개돼지예요, 그 미련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보고 뭘 해도 말씀 봤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포기되는 게 아니에요. 부분이 자기가 전체로 승화되는 것도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전체를 감당 못 합니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는 전체를 밀어내는 식으로 마귀로부터 조종받고 살고 훈련받고 살아요.

그러한 모습을 한 인간들이, 마귀에 속한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아까 시편 2편 4편은 하나님이 비웃는다, 인데 이 코미디 생활하는 인간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어요. 이게 누가복음에 나와요. 누가복음 23장 35절에 보면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해보지? 하나님이 택한 자, 그리스도이거든 자기도 구원해보지? 자기도 구원 못 하면서. 당신부터 먼저 탈출해 놓고 그다음에 ‘나처럼 구원된다’고 하면 내가 믿어주겠는데 당신도 구원 못 해놓고 남을 구원해? 내가 믿을 듯싶어? 당신이 그런 입바른 복음이라는 것 가지고 나를 설득한다고 해서 설득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는 당신이 나빠.”라는 욕을 하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한테.

“당신 말 몇 마디에 내가 당신에게 넘어갈까 싶어? 그렇게 예상한 거야? 당신은 날 몰라도 너무 몰랐어.” 갑자기 제가 이렇게 흥분하고 하는지. 이 말은 뭐냐면, 그때 바리새인 보고 나쁘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우리 마음이 이 마음이잖아요. 예수를 믿고 교회 50년 다니면서‘내가 당신한테 속아 넘어갈 것 같아? 설교는 들어주지. 하지만 안 속아 넘어가!’ 그 이야기 하고 싶은 거예요, 그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좀비 같은 인간하고 말 잘 통하는 거예요. 좀비 이야기하고, 이재명이 이야기하고, 뭐 그런 이야기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대화가 되는 이유가 뭔데요? 예수가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놓고 맨날 불평하기를, 지구 온난화가 어떻고, 러시아 푸틴이 전쟁해서 물가가 비싸고, 전부 다 외부적인 이야기에요, 외부적인 이야기.

지금 아제르바이잔이 자기 영토에 있는 지역, 영토 안에 이웃 나라 아르메니아 나라가 실효적으로 지배를 하고 있는 지역이 있어요.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지역. 뭐 지명까지는 나도 잘 못 외운다만, 이 아제르바이잔이라는 나라에서 ‘이제는 못 참겠다, 내 나라 만들어야겠다’고 일본이 독도 삼키듯이 삼킨 거예요.

그래서 40만이나 되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지역에서 피난길에 나섰던 겁니다. 그 지역이 아르메니아 자치 세력이니까요. 여기서 아르메니아는 골수 기독교, 전통적인 기독교 단체고요, 아르메니아 땅은 예루살렘에도 따로 있어요. 그 정도로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오래됐고, 아제르바이잔은 이슬람 나라에요. 이슬람 나라지만 이슬람의 종교적 성향치고는 가장 무신론이 지배하는 그런 나라입니다.

이 시사 이야기를 제가 왜 하는 겁니까? 인간의 전체성은요, 정치라는 외부 이야기로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윤석열, 이재명 이야기. “너희 싸우지 말고 좀 나라나 잘 먹고 잘살게 해 달라.” 외부 이야기로밖에 할 수 없어요. 정치가 다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시간 가더라도 중요한 것 이야기해야 돼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원래 전체성중 하나인 악마가 싸움에서 져서 땅으로 내려왔다고요. 요한계시록 12장입니다. 7-9절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땅으로 내려와 버렸거든요. 그래서 전체성이 땅으로 내려와 버리면 인간이 개인적이고 부분적으로 살던 이 땅이 하나의 전체로 묶이게 돼요. 하나의 구성이 된다고요. 그 구성된 것이 뭐냐? 요한계시록 17장, 18장에 보면 그게 정치입니다. 그 정치는 경제의 토대 위에 있는 그 정치에요.

요한계시록 17장 1절에 보면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 음녀라는 게 나오는데 음녀는, 모든 인간의 의사가 서로 하나로 통한다는 뜻이에요. 좀비는 좀비끼리 의견이 통하게 되어 있어요.

전부 그들은 뭘 먹고 사는가? 경제를 먹고 살아요. 그 음녀, 경제 먹고 사는 것이 요한계시록 17, 18장에 죽 나오기 때문에 뭐 제가 여기서 언급을 더 안 하겠습니다만 못 말리는 자본이에요, 못 말리는 자본. 무슨 뜻이냐 하면, 어디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한 느낌이 드는데요. 재판할 때,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법부에서 재판할 때 판사가 딱 하나만 생각하는 거예요.

“무슨 문제입니까?” “저 사람이 날 보고 욕을 하고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러면 판사가 물어요. “그래서 돈 얼마 손해 봤습니까?” “직접적으로 손해 본 것은 크게 없고요.” 그러면 판사가 “그러면 되었어요.” 어떤 경우라도 돈 안 나갔으면 된 거예요. 네가 보살을 믿든, 점을 치든 돈 많이 안 나갔으면 그것은 이 땅에서 이 음녀의 세계에서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요, 인간의 자존심이고 뭐고 그것은 돈으로 환산해서 계산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판결 내립니다. “욕했으니 벌금 10만 원!” 벌금 십만원, 그 돈으로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게 이 세상이에요.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으로 인하여 그 전체성, 정치적 전체성, 짐승같은 이 국가의 전체성을 인간 내부에 전체성으로 드디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어요.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이스라엘 나라가 전체성이거든요. 전체성인데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이스라엘 국가라는 그 정치조직을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전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자기의 마음속에서 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남들처럼 약속의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면 하나님께 ‘고맙습니다’ 할 수 있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들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바로 부분이 부풀어진 전체성, 가짜 인간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잘 먹고, 잘살고, 건강하면 그만 되었다는 거지요. 그게 가짜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조처는 뭐냐? 절대로 부분이 전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없는데 이미 구약 이스라엘부터 하게 해주셔요. 어떻게? 어떻게 하면 이 나밖에 모르고, 부분밖에 모르는 내가 전체가 될 수 있는가?

사사기 6장 25, 26절에 보면, “이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비의 수소 곧 칠년된 둘째 수소를 취하고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견고한 성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취하여 네가 찍은 아세라나무로 번제를 드릴찌니라.”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시킨 게 뭐냐 하면, 우상을 쳐 내버리라, 우상을 쳐내는 거예요. 얼마 전에, 어제지요, 해외뉴스에 나온 겁니다. 영국에 ‘로빈 후드 나무’가 있었답니다. 그 나무가 2백 년 된 나무에요. 그 나무는 국가에서 정했어요. 로빈 후드의 정신이 깃든 나무라 해서 어떤 사람은 자기 추억으로 남기려고 사진을 찍어요. 어떤 사람은 자기 친척이 죽자 유골을 그 나무 곁에 뿌렸답니다.

2백 년이나 된 거대한 나무지요. 그런데 밤새 그 나무가 싹둑 전기톱으로 잘렸어요. 밑둥치가 잘려져 나갔어요. 16세 소년이 밤새도록 나무를 자른 거예요. 페인트로 나무 둘레를 표시해놓고 잘렸다는 거예요. 원래 그런 방식은 16세 소년이 하기 전에 이미 성경에서 주님이 하신 거예요.

이사야 6장 13절에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자체를,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잘라버려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가짜 인간을 주께서 몸통 자르듯이 잘라버리는 것, 그 자르는, 그렇게 자르고 들어오는 그것, 그게 바로 전체성이에요, 그게!

이 자본주의세상에서 인간의 소망은 딱 하나입니다. 제가 대신 말씀드릴게요. 나 놀면서 살래, 이거잖아요. 나 그냥 놀래. 그런데 주님 뜻은 뭐냐? ‘나 없어질래.’ 나 없어질래. 나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 왜? 그동안, 사도행전 17장 25절처럼 그동안 내가 산 것도 주께서 주신 것이니까. 주께서 주셨으니까 어떤 것도, 무엇을 해도 주께서 주신 거니까 범사에 감사한 것밖에 나올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주께서 주셨으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고마운 것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걸 누가 훼방했습니까? 내가 스스로 선하고 착하게 산다고 내가 판단한 거예요. 그 판단을 주님께서 밤중에 그냥 잘라버렸지요. 원래 여호와는 밤에 일해요. 그걸 여호와의 밤이라고 합니다. 유월절날. 원래 창세기에 보면 하루를 정할 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노동이 스며들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전체성의 일이에요.

그런데 부분적인 일은 내가 나한테 의식을 하면서 일을 할 때 그게 바로 악한 것이고 나쁜 것이 돼요. 내가 나한테, 내가 나보고 일을 이렇게 한다는 것을 두고두고 우리가 모를 리가 없어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여러분이 알아 맞춰 보세요. 찐 계란을 어떻게 먹는가? 단답형 문제입니다. “삶은 계란 먹을 때 ( )을 쳐서 먹는다.” 초등학교 시험문제에 나왔어요.

선생님이 원하는 답은 “삶은 계란 먹을 때 (소금)을 쳐서 먹는다.” 이게 정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같은 생각을 하는 어떤 아이가 있었던 모양이지요. 진짜 전체성으로 정답을 이야기 했습니다. “삶은 계란 먹을 때 (가슴)을 쳐서 먹는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실 때는 주께서 전체성으로 오실 때는 내가 달라지지는 않아요. 다만 가슴을 칠 뿐이지요. “이놈의 내 영광, 이놈의 내 영광, 이거 없어지지도 않고 이게 무슨 골칫병, 이런 병이 다 있느냐? 왜 자꾸 나는 내가 옳으냐 그르냐, 왜 자꾸 판단을 내리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복음을 봐도 자기 자신이 바뀌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나 구약에 보면 바뀐 사람이 있어요. 전체성으로 보면 바뀐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 이 행함과 관련해서 무지무지하게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야고보서 2장, 하여튼 설교나 강의를 하다 보면, 지금은 그런 현상이 별로 없는데 한 30년 전에 설교나 강의를 하게 되면 꼭 이렇게 야고보서 2장을 들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야고보서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라 하는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데 ‘네가 행함이 없어? 그러면 네 믿는 것도 가짜야.’ 이런 뜻인데 그런데 이게 무슨 뜻입니까? 방금 본인이 뜻을 내려놓고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물어요.

그 뜻이 뭐냐 하면, “아무리 예수 믿어도 행함이 없는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제가 그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되받아서 친절하게 그대로 복사, 반사하듯 그대로 복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묻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참 코미디 같은 이야기에요.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그것은 헛믿음이라고, 소용없는 믿음이라고요.” “글쎄요, 그것은 나도 아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고요?” 지금 질문하는 그 분이 뭘 모르냐 하면, 아까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그것, 내가 가짜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요. 질문을 하는 내가 지난 것도 가짜고, 지금도 가짜고, 앞으로도 가짜라는 생각을 한번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요.

전혀 우리는 부분이 전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가짜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건 뭐 어려운 것 아니에요. 쉬워요. 가짜가 가짜만 나오지 거기서 뭐 “진리가 무엇입니까?” 무슨 진리를 찾아요? 가짜인데. 오죽했으면 우상 잘라내듯이 우리를 잘라버리겠습니까? 우리가 우상생산자인데. 그런데 우상은 잘라버려야 되는 거예요.

기드온이 밤중에, 낮에는 못하고 종들 데리고 가서 밤중에 우상을 잘라버리지요(삿 6:27). 바로 그 방식, 우상을 자르듯이 우리 몸 전체를 잘라버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왜? 내가 나한테 로빈훗이니까, 영웅이니까요. 대단한 영웅이잖아요. 아, 사는 이유가 나 때문에 살지 뭐 남 때문에 삽니까? “야야, 난 니 때문에 산다.”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인간은 본인 자기 때문에 살아요.

자,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하시는가? 야고보서 2장에 두 사람 나옵니다. 어떻게 전체가 개인을 이기는가? 세상에 아버지가 되어가지고요,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이 있잖아요. 아들을 잡습니다. 죽여버립니다. 이게 전체성의 위력입니다. 아버지가 아들 잡을 때 기분 좋았겠습니까? 아니에요. 자기가 자기 잡는 거예요. 아들 사랑한다는 말은 “아들아, 나보다 아들 너를 더 사랑한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아들, 내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지시가 나를 톱으로 잘랐다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행함입니다. 하나님의 행함이 아니면 네가 믿는 그것은 네 믿음이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다. 사도행전 17장 25절에서는 모든 것을 주십니다. 무엇까지 주시는가?

믿음도 주시고요, 사랑도 주시고, 소망도 주시니까 그냥 내가 여기 있는 것 그냥 내 인생 어떻게 살았든, 얼마나 개판이고 엉망진창이었든 그런 것좀 평가하지 마시고요, 자기에게 평가하지 마시고 그냥 ‘고맙습니다.’하고 살면 안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하고 살면 되잖아요. 몸이 아프든 뭐든 간에.

자꾸 주의 일을, 주의 전체성을 마귀 편에 서서 자꾸 방해 놓지 마세요. 악은 뭐냐? 악은 나한테 의미가 쏠리는 게 악이고요, 선은 뭐냐? 선은 주님한테 모든 의미가 가는게 선이에요. 주님께서 오실 때 “내가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잖아.” “좀 따먹으면 어떻습니까?” “따먹으니까 생명나무 못 따먹었잖아. 생명나무도 못 따먹은 주제에 네가 지금 선해? 선하다고? 생명 없는 게 선해?” 그런 선이 어디 있어요?

생명나무 따먹게 되었다고? 그러면 그 자체가 전체가 선이에요. 무엇이든지 해도 선이에요. 생명나무의 사랑이, 감사가 풀풀 나오니까, 풍겨 나오니까 그보다 더 선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기생라합, 지금 야고보서 2장 합니다. 기생 라합 또 나오잖아요. 기생라합하고 같이 있던 그 여리고 사람들, 그들이 기껏 한 것은 정치적 공동체,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 그 여리고 나라 전체에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살고 있는 이 내 나라, 국가가 전체라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생 라합에게 외부적인 전체가 아니고 기생 라합 마음속 내부에 그 전체가 들어가니까 “우리나라 망해버리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나라 심판해버리소서.” 기생 라합보고 애국가 지으라면 다른 애국가가 나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주의 심판이 우리나라에 임하게 하옵소서.” 이 좀비 나라에 임하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우리나라에 대한 최고의 사랑이에요. 주님의 복음과 심판을 전하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인간들 자신이 코미디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세상 착한 게 자기밖에 없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비웃잖아요. 비웃으니까 인간 쪽에서 뭐하느냐? 그렇게 비웃은 예수님을 비웃고 죽여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부분과 전체의 만남은 비웃음과 비웃음의 교차에요. 비웃음과 비웃음의 교차. ‘네가 복음 전한다고 내가 너한테 넘어가지 않는다.’ 이게 비웃음이에요. 복음의 설교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마귀가 자기의 마귀다움을 지키기 위해서 복음에 대해서 비웃음을 할 수밖에 없지요.

주께서 그 비웃음을 담고 그 비웃음이 뭐가 되느냐? 복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 그러니까 이 복음이라 하는 것은 뭐냐?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 세상 죄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 내가 지금 외부에서 어떤 비웃음을 방금 겪고 또 겪어 왔느냐가 있어 줘야 돼요. 사람들로부터 가까운 일가친척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한 그 비웃음의 뭉치, 덩어리가 이게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그게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이 세상 지혜가, 신학과 철학 이런 것이 버젓이 있는 이상은 절대로, 특히 신약의 십자가를 몰라요. 십자가를 모르고 십자가를, 복음을 대신해서 그들은 신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가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목회를 하고 있는 거예요. 교인들이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교회 다닌다는 것을 착한 일로 여기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왜? 남한테 비웃음을 안 당할 사람이어야 한다는 자기 요구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을 전하는데 한국교회는 뭘 전하느냐 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거예요. 그 차이를 여러분들이 아십니까?

알아야 돼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십자가에 못박혀야 어리석음이 계속 어리석음으로 지속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 너희 교회 부흥해라. 나는 십자가만 전할래.’ 이게 되어야 돼요. 이게 되어야 된다고요. 명절날 모여서 ‘그래, 넌 자식 자랑해라. 나는 십자가만 자랑하련다.’ 이게, 이게 되어야 된다고요.

동서 간에 명절에 이야기해보세요. 개돼지한테 말할 필요는 없는데 괜히 말이 툭 나와버렸으면 “형님, 내가 또 그럴 줄 알았다. 화투나 치고 끝냅시다.” 화투 치는 것은 전혀 어리석은 것이 아니에요. 지혜로워요. 굉장히 진지합니다. “바가지, 2점씩……” 굉장히 진지한 거예요. 인간세계는 굉장히 진지해요. 탁구는 지금 결승전에 올라갔지요. 농구는 일본한테 졌지요. 2진한테.

전부 다 지금 진지하기 짝이 없어요. 아시안게임 때문에. 오늘 저녁에 있을 축구는 또 중국이 얼마나 반칙을 할지, 선수들이 전부 장애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지요, 온 국민이! 외부적인 전체성이니까요, 외부적인. 내부는 비웃음당하는 내부인데.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곧 우리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미련한 것이다.

부활은 미련하지 않아요.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들의 염원입니다. 전혀 미련하지 않아요. 그러나 못 박힌 예수님은 미련해요. 못 박힌 예수님은 미련합니다. 어리석음을 감내하지 않으면 부활도 없어요. 어디서 십자가를 건너 뛰려고요. 그래서 복음이라는 상품을 팔아서 교회부흥이나 하려고요?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기생라합은 그 나라에 본인이 속했지만 나는 이 여리고성에 속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하나님께 속했다는 그 새로운 전체성으로 교체가 일어난 자가 기생라합이고 그 교체의 면면들, 교체당한 면면들이 바로 믿음의 행함이라는 거예요, 그게! ‘나 잘렸어. 나 로빈 후드, 잘렸어. 주께서 날 잘라버렸어. 왜? 내가 우상이니까. 내가 방해했거든. 내가 귀신들렸거든. 내가 멧돼지거든.’

구약 노아 홍수 이후에 새로운 전체성을 주께서 준비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물 아래 희생양의 피를 중심으로 새롭게 번져나가는 전체성을 노아언약, 홍수 심판 그 안에 담아준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피를 흘리고 하늘에는 무지개를 피웠습니다. 이 무지개라는 것이 희한해서요, 멀리서 보면 보여요. 그런데 이 무지개를 조금 더 가까이 관찰하는 순간 무지개는 거기 현장에 없습니다.

멀리서 보면 십자가 믿는 것 같아요. 그러나 삶 속에서 가까이, 가까이 십자가에 가게 되면 십자가는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십자가 믿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그 이후에 새로운 전체성이 흘러나오는데 그게 다윗언약까지 흘러나옵니다.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제가 지어낸 용어가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거예요. ‘다윗에게 언약을 주었다. 그래서 다윗언약이다.’

다윗언약의 내용이 뭐냐? 그것은 다윗언약에 의해서 태어난 왕이 있어요. 그 왕 이름이 솔로몬인데 솔로몬이 하나님께 계시받아 쓴 책이 전도서입니다. 그 전도서 7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마음을 거기에 두라는 말이지요)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어리석은)의 마음은 연락(잔치)하는 집에 있느니라.”

죽음을 통해서, 어떤 죽음, 그 죽음, 십자가의 죽음이지요, 그 죽음을 통해서 전체성으로 다시, 곧 죽음 차원에서 세상을 보게 하는 거예요. 누가 죽었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죽었다는 거예요. 그 죽음이 전체성이에요.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 주님. 그럴 경우에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옳은 것이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영광이고,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거룩한 일이 되는 겁니다.

왜? 죽음, 예수님의 전체성, 그 죽음을 드러내면서 나의 부분은 같이 죽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기에 그렇습니다. “나는 이제 나 위해서는 안 살아. 나같은 것은 죽은 것이 마땅해. 나는 주님의 죽으심 때문에 살았어.”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리 여러분이 말씀 지금 들었어도 예배당 문 열고 나서면 또 일상이 기다려요.

그런데 그 일상을 전도서에서 다 이야기하고 있어요. 일상이 뭐냐? 일상은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루하루 일상의 패턴에 몸이 습관화되어 있어요. 그 습관을 반복하면서 나오는게 허무를 생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빼도박도 못하고 전도서 안에서 사는 거예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90년 살아도 헛되고요, 하루 살다 죽어도 똑같이 헛돼요. 헛됨에 차이가 없습니다. 무의미에 차이는 없습니다. 서울 가서 살아도 무의미하고요, 부산 가서 살아도 무의미하고요, 대전 찍고, 부산, 서울…, 돌아다녀도 아무 의미 없어요. 그 의미 없음이 신나야 되고, 그게 감사해야 되고, 그 의미 없음에 도리어 고맙다고 반복할 수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주께서 거저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행함? 안 받습니다. “주께서 값없이 의롭다 함, 값없이 거룩한 것, 그것 네 안에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오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아니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가짜인 주제에 어딜 감히 인간이라고 우겼던 그 자체, 심지어 그런 모습조차도 이제는 고맙고 감사케 하옵소서. 가짜를 가짜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에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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