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자아 끊어냄

아빠와 함께 2023. 9. 10. 19:36

자아 끊어냄 

2023년  9월 10일                 본문 말씀: 디도서 1:10-11

(1: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1: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할례당에 대해서 사도행전 15:1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들 할례당의 주장은, ‘할례 받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권한으로 삭제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할례도 받고 안식일도 지키고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여야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15:3-4에 나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구약의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 죽으심 안에는 율법 완성이 다 담겨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할례는 육신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할례란 ‘끊어냄’의 증표입니다. 끊어냄이란 단절됨을 표시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율법 해석은 이러하지를 못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진리를 찾고자하고 얻고자했습니다. 바로 이런 시도를 하면서 인간쪽에서 제안되는 방식들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금식 같은 경우를 들면 이러합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6-17) 즉 인간들은 율법 속에서 진리를 구현하고자 하면서 덩달아 자신을 의롭게 변모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다른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인간은 자기 안에 깊숙한 금고를 하나 만들어놓고서 그 안에 보물로서 자아를 넣어두어 보호하려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28-309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버렸다’는 베드로에 대항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자기를 끊어내지 않는 식으로는 영생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서 자기를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입니다. 복음이란 사람들에게 ‘줘 팸을 당한 한 남자가 하나님이시다’는 겁니다. 이 남자로 인하여 성도는 자기 생각을 할 이유가 없게 된 겁니다.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문제는 이 분을 안다는 것은 필히 인간이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도대체 인간은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끊어내는 것이 마음의 할례요 회개입니다. 자기에게 관심두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바로 이를 위하여 주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이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 받아들임으로 인간은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직접 나서서 십자가와 부활의 효과로 찾아드시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는 십자가와 부활로 찾아드신 주님에 의해서 으깨지게 되면 성도가 됩니다. 이게 바로 ‘말씀에 응하게 함이니라’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 생애에서 평소에 하나님의 영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그 움직임의 연속은 바로 ‘말씀에 응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32) 성도는 바로 이 예수님의 모델을 이어받게 됩니다.

말씀에 응하기 위해 성도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먹게 되는 방식이 주어집니다.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계 10:8-11)

즉 성도는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농락당하게 되는 겁니다. 성도는 주님의 장난감입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의 효과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 효과란 성도 본인에게는 주님에 의해서 ‘죄가 기억되지 않게’ 됩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기억한다’는 것은 계속 자아가 ‘살아있다’가 됩니다. 그러나 진정 살아 있는 것은 악마와 주님 뿐입니다. 인간들의 육신은 일시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즉 자아는 더는 자아 걱정을 할 필요도, 이유도 없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 남자’ 곧 하나님이 되시는 예수님의 행하심 뿐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오류를 따라 진리에 이르는 겁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자신이 세상과 한통속인 것을 비로소 발견하는 즐거움을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

 

 

3강-디도서 1장 10-11절(자아 끊어냄)230910-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1장 10에서 11절까지입니다.

디도서 1:10-11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할례당이 설치는 그 이유가 그레데 섬, 크레타섬이죠. 그레데 섬 교회의 합당한 장로와 합당한 감독이 없어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당에 속하는 자들이 그 헛점을,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감독과 장로를 세워야 마땅하다는 거죠.

그러면 이 할례당이 무엇인가?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5장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구약에 있는 가르침, 문자적인 가르침을 취소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럴 권한이 없다는 거죠. 구약에 있는 할례를 행하고 안식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엄중하신 말씀을 취소시킬 권한이 인간에게 없다는 겁니다.

없다는 말은, 할례도 행하고 안식일도 지키고 복음도 받아들이고, 이렇게 해야 하나님 영광이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것, 이것이 할례당의 이슈, 주장들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에 대해 사도 바울은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하셨어요. 로마서 2장 28절에 보면 할례에 대해서 언급을 할 때 할례를 두 종류로 나눴습니다.

로마서 2장 28절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할례를 둘로 나눈 거예요. 육신에 문신처럼 새기는 그것이 할례가 아니라 어디에 새겨야 되는가? “오직 이면적(내부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할례를 인간이 마음대로 취소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구약에서 마음 앞에까지만 왔던 그 율법이 이제는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온 사람이 진정 하나님의 성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 유대인들이 가만있겠어요? “사도 바울, 우리나 너나 똑같은 문자로 된 성경을 보는데, 구약을 보고 다 보면서 무슨 근거로 너는 구약에 나오지 않는 소리를 하느냐? 네가 엉터리 아니냐?” 이렇게 나오는 거죠. 거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그 근거를 댑니다. 그 근거가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너희는 받지 않았는데 나한테 먼저 온 것이 있다는 겁니다. 너희는 받지 않았는데. 왜? 자기가 사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고 그리스도가 지명한 사도기 때문에 사도라는 이유 때문에 너희들은 모르고 내가 아는 게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면,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라고 되어 있어요. 모든 구약의 율법과 성경이 나에게 너희에게 우리에게 오기 전에 먼저 intercept, 그것을 먼저 장악하시고 이루신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예수님 안에 모든 율법이 완성된 채로 다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이걸 복음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분이 몸으로 보여주는 모든 행위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한 몸짓이었고 그걸 성취하셨다는 겁니다. 그 성취한 증거가 뭐냐?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고…” 이게 고린도전서 15장 3절, 4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할례당이 문제가 된 것은, 인간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 말이, 구원 받고자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쉽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지만, 문자대로 하니까요, 그러나 복음을 아는 자에게는 터무니없는 가짜인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어디 가짜가 교회에서 설치고 있어?”라고 지적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대처는 진짜 복음 아는 감독과 장로를 세워버려요. 사도 바울은 본인이 갈 수 없어요. 본인은 지금 교도소에 가 있고, 또 다른 일도 많아서 바빠서 일일이 다 섬까지 갈 수가 없고요, 사도의 자격으로 편지로만 보내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감독과 장로를 보면 되지 않겠느냐? 세우라는 겁니다.

문제는 이거에요. 예수님이 죽으시고 예수님이 살아났어요. 예수님이 죽으시고 살아났는데 파견한 그 장로 감독도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보장할 수 있는 근거 있습니까? 예수님이야 예수님이니까 할 수 있다 치고 그러면 감독과 장로 자기는 뭔데? 자기가 이 말씀대로 다 지킬 수 있어요? 안 되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이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이,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졌다는 말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당사자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열심히 일하신다는 거예요. 이게 성령이 오셨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예수님이 지금 놀고 계시다는 게 아니고 일하신다는 겁니다. 마치 열두 제자와 함께 있을 때 부지런히 일한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이 일하시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감독과 장로를 세울 때 그 감독과 장로가 보여줄 것은, 예수님이 지금 자신과 함께 일하고 있음을 보여주게 되면, 할례당 같은 그런 이단들은 교회에서 물러날 게 아니냐는 거죠. 감독과 장로에 있어서 그 기본적인 것은 뭐냐 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이어야 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 받아서 본인이 일한 게 아니고 성령이 그 사람을 가지고 일하게 되죠, 성령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디도서 1장 6절에 “장로 된 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믿는 자식이 있어야만 장로가 될 수 있다, 장로로 세우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문제는 이 믿는 자식이라는 것을 확정 지을 권한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가 장로이니까 내가 낳은 자식을 믿는 자식으로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아버지가 자식을 믿는 자식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믿음이 믿는 자식을 만듭니다, 믿음이. 믿음이, 주님이 믿는 자식을 만들 때 아버지는 빠지세요. 빠져야 돼요. 내가 아버지 값도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믿는 아버지예요.

그럴 일이 잘 없겠지만 만약 여러분 가정에 자식이 복음을 받아들이거든…, 물론 그런 일이 잘 없어요. 혹 받아들이거든 이렇게 물어보세요. “너 미친 거 아니야? 안 하는 짓을 하고 있어. 이게 뭔데, 네가 이게 믿을 내용이야?”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 나는 이미 죽은 시체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건데 요새 젊은 사람 가운데 “나는 시체입니다.” 이야기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혹시, 혹시, ‘혹시’입니다, ‘혹시’라고 네 번이나 했어요, 혹시 믿는 자식이 있거든 완전히 미친 거예요, 그거는.

그럴 때 자식이 이런 이야기 하게 되면 그 자식은 진짜 믿음이 만들어낸, 성령이 만들어낸 자식입니다. 자식이 이와 같이 답변합니다. “이건 아버지 어머니 덕분이 아니거든요?” 이거 진짜예요. 진짜입니다. 아버지 엄마가 신앙생활 하는 거 봐가지고 본 받아서 하겠다, 이건 가짜에요. 또 자식들이 이런 이야기해요. “저는 아버지,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이때는 이제 부모가 이렇게 답변해야 해요. “존경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가 너 자신을 존경해서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냐?”

왜 그러냐면요? 십자가 안에는 율법이 들어있고, 이 율법은 자아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 주께서 주신 거예요, 인간의 한계. 할례도 마찬가지이지만 율법이 어떻게 한계를 드러내느냐면, 인간은 율법이 진리인 줄 알고 딱 덤벼드는데 율법에서, 법에서 진리를 얻고자 덤벼들면서 인간은 평소에 자기 속에 자기가 자기를 찾아가는 방안, 방식, 이런 것을 노출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평소에 진리를 찾기 위해서 이런 수완을 벌리고 있고,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것, 율법을 보고서 단박에 덤벼들어요.

그때 율법이, 주께서 ‘잘 걸렸다. 네 속에 있는 네가 의롭게 되기 위한 수완을 율법 때문에 폭로 당하게 된 거’예요. ‘잘 걸렸다. 그건 하나의 해답이 아니야. 방식이야.’ 해답이 아니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서 그 해답을 율법이 거부해 버려요. 그래서 율법의 해답의 해답은 뭐냐? 그렇게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를 죽여 버리는 것이 율법에 담겨 있는 답입니다. ‘너는 꼭 죽어야 돼.’ 이게 답이에요.

할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할례는 뭐냐? 나와의 끊어짐을 보여주는 증표가 할례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대대로 내려져 오는 육신을 끊어내는 것이 할례의 증표, 율법의 증표에요. 그래서 이 율법을 준 이유, 우리는 율법에 아예 패배하면 되는 겁니다.

율법의 예를 하나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6장 16절에 보면 금식도 율법이거든요.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평소에는 양복 입고, 깨끗한 얼굴로 탁 머리도 하고, 신발도 단화 깨끗하게 신어놓고, 이건 뭐 검찰에 나오니까 수염도 안 깎고, 운동화 신고 나오고…, 누구 이야기하는 거 아니에요. 이재명이 이야기하는 거 아니고 이게 지금 금식했다는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이건 뭐냐? 평소에 나는 사람들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식으로 평소에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식으로 나는 하나님의 법조차도, 하나님의 율법조차도 그런 식으로 다루겠다는 겁니다. 이게 뭐 남의 이야기 할 잽이 못 되죠.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할례는 나와의 끊어짐이기 때문에 할례 입장에서 가장 큰 죄악은 뭐냐? 자기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영생은, 영생은 자기 생각과의 반대죠.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단출한 문장으로 영생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17장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영생은 뭐냐, 어떻게 받는가?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 알면 돼요. 하나님 안 보이니까 나타난 예수님을 알면 됩니다.

이게 얼마나 쉽고도 간편하고도 이게 불가능한 일인지. 어떤 남자가, 이 땅의 어떤 남자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영생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내가 나에 대해서 생각할 모든 권한을 박탈당했습니다. 이게 마음의 할례에요. 자기를 끊어버리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던 십자가와 부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한 게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했다는 이 말을 바라보면서 성경에 그렇게 나오니까, 성경이 진리고 영생이니까 우리는 믿고자 합니다. 믿고자 하면서 진리를 얻고자 하는 순간, 그 복음조차도 안에 율법이 들어있으니까 율법적 기능이 나와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믿고자 하고 알고자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믿고, 부활 알고 지옥 가는 거예요. 왜? 우리 속에 담겨 있던 것이 십자가 부활 소식과 더불어 결부되면서 티를 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단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전한 거라, 그렇게 믿자, 믿자, 믿는다.’

그러면 나는요? 나는 어떻게 되는데? 나는 멀쩡하게 그대로 살아 있죠.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십자가와 부활을 성경을 통해 알려줘요. 그리고 그걸

㉯나는 믿는다고 자부하게 만들어요.

㉰그걸 진짜 십자가 부활로 으깨버려요. 십자가 부활을 믿는 나를 으깨버린다고요. 거기서 완전 작살 나버리죠. “이게 십자가야. 이게 부활이야, 인간아. 이게 진리야.

십자가 부활 믿는 너는 진리가 아니야.” 그건 네가 평소에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중에 하나였죠.

인간은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가는데 거기다가 십자가 부활까지 더 보태면 죽은 나에게 영생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남자는 어떻게 돼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구원받습니다. 뭐 왜? 하나님은 살아계시거든요.” 이렇게 주장하거든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게 그게 복음이 아니고, 어떤 남자가 인간에게 맞았다는 게 복음이에요. 얻어터졌다는 것이 복음이라고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복음이 아니고. 얻어터지는데 거기에 우리가 합세하고 있었던 겁니다.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쥐어팼습니까? 죽여 버렸습니까? 미워서 그런 거거든요.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합니까? 그건 나를 미워하기 싫어서 그래요. 나를 미워하기 싫어서 그래요.

어떤 20대밖에 안 된 젊은 사람인데 어디서 환청이 들린다는 거예요. 환청이 들리면, 그냥 들리면 되는데 길을 걸을 때 90도로 고꾸라져서 길을 걸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바짝 굽혀서 걷는 다고요. 정신과 의사가 제대로 이야기해요. 의사가 말하기를, “지금 허리가 구부러진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구부러졌는가? 남들이 나에게 구시렁구시렁 욕하고 비난하니까 본인이 그걸 강력하게 방어하다 보니까, 늘 방어 자세를 하다 보니까 신체가 덩달아 경직되어 구부러진 것이 더 구부러진” 거예요.

이걸 히스테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게 무의식적 작용입니다. 의식적 몸이 아니라 무의식적 작용을 받는 게 인간의 몸이에요. 인간은 왜 아프냐?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파요. 이거 이상한 이론으로 들어갔는데 믿지는 마세요. 인간은 왜 미워하느냐? 내 몸이 아파서 그래요. 몸이 아프니까 밉고, 미우니까 몸이 아프고, 이게 왔다리갔다리 하는 거예요.

결국 거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왜 왔다 갔다 하는 중에 거기서 왜 본인은 미워할 줄 모르냐, 그 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영생이 없다’는 거예요. 아까는 예수님을 알면 영생이라고 해놓고, 요한복음 12장 25절을 보면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서는 영생이 없다, 그럼 이 두 개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합니까?

자기를 사랑해서 십자가 부활을 믿는 것은 이것은 나중에 진짜 부활한테 걸리면 이건 완전히 빠개져야 돼요. “이게 어디서 사기를 치고 있어? 그건 너를 위한 거잖아. 너를 위한 십자가, 너를 위한 부활이잖아. 네가 너를 살리는 방식이잖아. 넌 평소에 율법도 그런 식으로 이해했어. ‘뭘 하면 구원받겠습니까, 어떻게, 헌금하면 되겠습니까…’ 이게 전부 다 너를 위한 거잖아. 너를 위한 것.”

빌립보서 1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내가 욕을 얻어먹든지 남한테 어떤 소리를 들어도 내가 기뻐하는 이유는, 그런 식으로도 그리스도만 전파되면 나는 OK라는 거예요. 빌립보서 1장 21절에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나는 나를 위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이게 진짜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왔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에요. ‘믿습니다’ 말고, ‘압니다’ 말고, ‘성경에 부활, 십자가 있습니다, 그거 어느 대목에 있습니다’ 그거 외우지 말고 진짜 주님이 왔을 때 ‘나 죽어도 괜찮아요. 죽여주세요.’ 할 정도. 왜? 나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이니.

남이 날 미워하고, 그래서 90도로 허리가 굽어지고, 뭐 그럴 거 없어요. 덤벼라, 이런 식으로 살 이유 없다고요. 자기 방어하는 식으로 살 수는 없어요. 전에 이야기 했지만 이순신 장군이 ‘아직 배 12척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거 남은 한 척마저 남김없이 불타야 돼요. 12척도 너무 많아요. 한 척이더라도 다 없애야 돼.


사람들에게 정치, 문학, 과학, 예술, 이거 다 오락입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것도 오락이에요. 왜 교회 다니는 것이 오락이 되느냐면, 이 세상이 판돈, 도박판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아직 판돈 여유 있다, 이 말입니다. 교회 좀 빠져도 아직 살 만큼 산다, 이 말이거든요. 계산해보면 판돈이 괜찮으니까, 내가 나 다울 만한 여유가 있으니까 나머지는 오락이 되는 겁니다. 취미 생활 되는 거예요.

할례라고 하는 것은 끊어지는 거예요. 마음의 할례는 끊어지는 겁니다. 나로부터 끊어지는 거예요. 남 미워하기 전에 나를 미워하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쥐어패는 거죠. ‘당신이 뭔데 내 존재를 부정해?’ 이런 거지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나라 여자 바둑의 제1 인자는 최 정이고, 2 인자는 김은지라는 사람인데 출생이 2007년도에요. 올해 16살입니다. 천재 났죠. 바둑이 좋아서 온종일 열 몇 시간씩 집에서 바둑 공부합니다. 그런데 그 김은지라는 소녀에게 질문을 한 번 던져 보는 거예요. “은지야, 인생이 무엇이냐?” 바둑이 뭐냐고 묻는 게 아니라 인생이 뭐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아저씨, 나 바둑에 빠져서 그런 건 아직 몰라요.”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아직 청소년인데 그런 거 모릅니다. 모호함이죠. 인생이 무엇이냐? 바둑이라는 좁은 것 말고 전체에 대해서 뭐냐, 할 때 “난 그런 것은 몰라요. 나는 바둑만 신경 쓰겠어요.”

이게 모호함이 아니고 단절돼서 그래요. 단절된 겁니다. 걔가 어른 되어도 마찬가지예요. 모호해요. 어른이 되어도 바둑 때문에 시시덕거리고, 바둑 때문에 행복하고, 바둑 때문에 돈 벌어서 좋고, 바둑 때문에 만약 결혼한다면 가정이 바둑으로 먹고사니까 만족하고. 그래도 단절된 것은 마찬가지로 단절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주님이 직접 그 사람에게 오지 아니하면 인간은 다른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김은지라는 소녀가 만약에 나이 좀 들어서 누구 친구 소개로 우연히 교회에 갔다고 칩시다. 교회 가서 십자가 부활 듣고는 믿습니다, 하면 다른 인간 되는 거예요?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다른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자기가 소중하기 때문에 그래요.

지난번 강남 강의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왔습니다만, 누가복음 18장 29절 30절을 제가 한 번 읽어 드릴 테니까 여러분이 이런 인간이 되었는지 스스로 한 번 자문해 보세요. 28절부터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29절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리스트 나옵니다.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베드로가 자기 딴에는 모든 것을 버렸는데 너는 버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버린다고 해서 베드로야, 네가 다른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버리려면 어느 정도로 버려야 하는가?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나, 그렇게 다 버려야 돼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자기를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 아무리 버려도 자기 자신은 못 버리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뭐냐? “베드로야 잠깐 비켜볼래? 바로 그 뒤에 마귀 있잖아.” 마귀는 특징이 뭐냐? 절대로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심지어 지옥에 가도 자기를 안 버려요. 이게 마귀입니다. 인간은 마귀의 대변인이잖아요. 어떻게 자기를 버립니까? 그래놓고 교회 와서 영생을 얻는다고요?

여기 누가복음 18장 29절, 30절, 확 다 빼버릴까요? “가하시면 ‘예’ 하시기 바랍니다.” 해가지고. 이거 다 뺄까요? 인간은, 예를 들어 아까 읽었던 누가복음 18장의 말씀이 싹 들어오게 되면 베드로처럼 나와요. ‘그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려야 해.’

그런데 이 베드로가 뭘 모르냐 하면, 인간은 바깥의 어떤 법적인 요구가 들어오면 그 요구를 가지고 커다란 어떤 벙커, 금고를 만들어요. 그 금고 안에 또 작은 금고를 하나 만들어서 거기에 자아를 귀한 보물로서 작은 금고에 집어넣고 바깥에는 “열심히 하겠습니다.”는 식으로 마중 나가는 게 인간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어이 포기할 재주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마귀한테 발목 잡혀 있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버립니까. 자기를 어떻게 미워해요? 끝까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인데요. 아까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제목이 이거에요. 잘 아시죠?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 예수님 여기 놓고 귀하다고 여기는 것, 정치, 명예, 돈, 이것보다 예수님이 더 귀하다, 그렇게 비교하지 말고 예수님 옆에다가 나를 집어넣어야죠. 나를 집어넣고 ‘예수님이냐, 나냐?’ 둘 중에 하나만 하세요. 둘 다 하지 말고, 엮이지 말고.

마음의 할례라고 하는 것, 그 뜻은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끊어진 사람이 있어요.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8절에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뭔가 나에게서 빠져나간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뭐냐? 내 안에서 율법의 완성은 나를 찾을 수 없게 만든다, 에요. 내가 찾을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오고, 주님이 오고, 율법의 완성이 오게 되면 날마다 나에게서 무엇이 빠져나가냐 하면, 내가 빠져나가요, 내가. 내가 이걸 했고, 어제는 이걸 했고, 몸이 아프고, 어떻고…, 자꾸 내가 빠져나가요. 그런데 빠져나가면서 웃어요, 빠져나가면서. 지금 내가 혼자 웃고 있는데, 미안합니다. 나 혼자 웃어서.

내가 하나의 폐품으로 빠져나가면서 그것이 그렇게 신나고 즐겁게 웃어요. 이게 즐거운 일이라니까요? ‘나 그동안 뭐했어?’ 하고 후회하는데 이 후회가 신나는 후회, 그걸 회개라고 이야기합니다. 신나는 회개, 즐거운 회개. 왜? 반성이 아니고 빠져나가니까.

그러면 빠져나가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거 때문에 제가 여기 있는 거니까요. 요한계시록 10장 8절 끝에 보면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절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책을 먹는 거예요. 우리 속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아예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말씀을 우리 안에 책을 먹게 만들어요. 책을 먹게 만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내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미 말씀에 응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로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십자가 부활을 지킨 것이 아니에요.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소급해서 돌이켜 보면 전부 다 말씀이 예정된 대로 된 거예요, 예정된 대로. 내가 언제 어느 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내 죄가 다 날아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그것 내가 믿었다.’가 아니라 주께서 말씀이 말씀대로 응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그걸 소급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8장 32절에 보면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게 첫 모델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이 말씀대로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자기에게 강권적으로 역사하니까, 일하니까, 일하니까 자신이 십자가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첫 모델이라면 그다음 모델이 우리들이에요, 성도들이에요. 성도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성경 말씀대로 되어가는 거예요. 바리새인 이야기라면 그게 바로 우리 이야기고, 사두개인 이야기라면 그게 우리 이야기고, 이단 이야기하면 그게 다 우리 이야기에요.

말씀을 먹으니까 그 말씀이 우리를 장악해서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말씀이. 우리는 말씀으로 확인만 하면 되죠. 이게 뭐냐 하면, 오류를 따라가다 보면 진리가 나온다는 뜻이에요. 오류를 따라가다 보면 진리가 나오는 거예요. 계속 잘못되고, 잘못되고 모든 게 그래요.

이 디도서도 그래요. 성경이 66권인데 구약 39, 신약 27, 합쳐서 66권이거든요. 그러면 디도서 이야기와 창세기 이야기가 어디서 만나는가? 이 디도서, 고린도전서, 성경 하나하나가 동굴의 입구에요. 66개의 동굴 입구로 돌아가게 되면 거기서 창세기 만나고, 출애굽기 만나고, 다 만나요.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니까요, 십자가로 통일되니까요.

그렇게 해서 그 중앙에서 만날 때 주께서 하신 이야기가 단적으로 히브리서 8장 12절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희 죄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인간의 자아는 기억 덩어리라는 뜻이었어요. 그래서 옛날 내가 하는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를 미워할 수 없었던 겁니다.

살아온 것이, 내가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니까 그게 유의미, 의미가 있음이 되거든요. 의미 있는 나를 이제 와서 패대기칠 수는 없다, 이 말이거든요. 내가 이 땅에 살아보려고 애쓰는 게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데, 그래서 이 만큼이라도 살아왔는데 그걸 왜 패대기치느냔 말이죠.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사투를 벌여왔는데 그게 무의미하다는 것은 너무나 허망한 세월이 돼버리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그 기억을 못 버리기 때문에 금고에 넣어놓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여호수아, 하나님께서 악마가 보는 앞에서 행동을 했어요. 악마가 보는 앞에서. 실은 악마가 여호수아에게 시비를 걸었죠. 얼레리 꼴레리, 네 옷 더럽다고, “아이고, 인생아! 왜 그렇게 추잡스럽게 살았냐.” 악마의 주장은 이거에요. ‘더럽게 산 놈은 지옥 가고 착하게 산 놈은 천국 가야 된다, 이게 선악 체계에 합당하다.’ 이게 악마가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가 보란 듯이 여호수아는 뭐 모르고, 하나님께서 “악마 너 잘 봐, 잘 보라고. 네가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할 테니 잘 봐. 여호수아 이리 와.” 하고 거기서 천사를 통해 여호수와의 옷을 강제로 벗겨버립니다. 거기서 제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하나님이 강제로 여호수아에게 손을 댔다. 천사로 여호수아의 몸에 손을 대게 했어요.

그런데 오늘날 어떻습니까? 우리는 남이 내 몸 손대면 기겁하죠. 왜 기겁하는지 알아요? 허리 구부러진 정신병자들이거든요. 우리가 정신병자들이에요. 왜? 내 자아를 지키는 것이 평생의 모토이기 때문에. 나를 지키는 것이 내 인생에서 확고한 인생 목표에요. 지켜진 나, 너보다 우수한 내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미워해서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은 거예요. 같은 인간들끼리 그렇게 보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제껴버리고 “악마 너 나와!” 악마가 인간을 이런 식으로 완전히 망쳐놨어요.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알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이런 논리가 됩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죄로 인하여 벌 받고 있어요. 내가 왜 이렇게 고생하는지 본인은 몰라요.

내가 교사로서 학부모한테 왜 이렇게 시달리는지, 3년간 재판하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그 이유를 모르니까 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걸 한마디로 네 자로 정신병자지요. 다 그래요, 다! 자기를 미워할 수가 없어요.

왜? 나를 지키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에.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 천국 간다는 그 십자가 복음까지 끌어당겼잖아요. 그래서 나를 죽음 너머까지 보험 들어 놨잖아요. 그런 식으로 교회 왔잖아요. 그게 정신병자라니까요, 그게! 십자가 복음 아는 나를 미워해? 미쳤어요? 내가? 교회 온 지 20년 만에 알게 되었는데 그걸 부인해 버리면 이건 십자가 복음도 날아가 버리는데?

도대체 뭐 하고 사는 겁니까?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라는 유명한 여류 추리소설 작가가 있어요. 영화로도 나왔는데 그 작가가 쓴 유명한 소설이 <오리엔탈 특급살인사건>입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이래요. 서로 모르는 체 파리에서 터키로 가는 오리엔탈 특급 열차, 아주 비싸고 고급스런 열차를 타고 가는 그 사람들, 그 열차 한 칸에서 어떤 사람이 살해됐어요.

그 때 유명한 탐정, 콧수염이 위로 꼬부라진 그 탐정이 조사를 시작합니다. 조사를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뭐냐? 그 객차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혐의를 벗으려고 애를 쓴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스스로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그들은 말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남은 죽어도, 남들은 음주사고로 차에 받혀서 죽어도 나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그 정도로 나는 귀한 나의 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다는 겁니다.

푸아로, 그 탐정은 그런 것을 모아서 전부 다 한통속이라는 사실, 모두 다 그 죽은 자와 원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서 전체가 다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그러한 영화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니고 전체가 다 범인이 되는 거예요. 아담을 조상으로 하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쥐어패는데 한 그룹이 되어 있었고 다 같은 한마음으로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 특징이 뭐냐? 어떤 인간을 건드려 봐도 나는 지옥갈 이유없다는 것, 자기 스스로 자기가 옳고 남은 죽어도 자기는 살아야 되고, 중국에 태풍와도 대구는 태풍이 오면 안 되고, 모든 것을 내가 사는 이 중심이 다치지 않아야 된다는 식으로 마음이 그쪽으로 정향, 방향이 그쪽으로 다 쏠리고 있어요.

얼마 전에 새부산고속도로 청도휴게소 근처 터널에서 불이 났어요. 불이 났는데 뒤차는 불이 난 줄 모르지요. 앞차는 지금 불타고 있는데 뒤에 오는 차들은 앞차가 달리니까 그냥 죽 따라가는 거예요. 전부 다 자기 잘난 맛에. 지옥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언론, TV에 나오는 예능프로, 드라마, 모든 세상이 전부 다 한 마음으로 완전히 단체로 담합하고 있습니다.

나 살려 줘, 하는 식으로 죽 가는 거예요. “살려 도~?” 하는 그 길이 지옥으로 앞차 빠지고 또 빠지고 그 빠진데 또 빠지는 거예요. 이걸 개미지옥이라 합니다. 아프리카에 가면 개미들이 호르몬 이상현상이 나타나서 빠지는데도 불구하고 그 둘레가 500여 미터나 되는 거기에 수많은 개미들이 집단으로 자살하는 집단자살 현상이 있다는 겁니다.

집단자살 현상이 오늘날 인간들의 이 세상 구조에요. 앞에 사람들이 이렇게들 다 사니까 그냥 가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 욕하면서 그냥 기성세대 따라서 가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유는 간단해요. ‘내가 여기 있잖아. 있는 것을 뭐 어쩌란 말인가? 있는 것을 그러면 쓰레기통에다 버릴까?’ 어쩔 수 없이 있는 것을 그냥 갖고 가는 거예요. 어느 쪽으로? 남 따라서.

남이 메시아입니까? 자, 터널에 불이 났어요. 멋도 모르고 뒤차들이 계속 따라와서 박습니다. 불난데서 그 앞차들은 도망치기 바쁜데 뒤차들은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지요. 도로공사에서 그 장면을 CCTV로 확인하고서는 터널 차단막을 내렸습니다. 터널 차단막을 내린 그분이 바로 그 남자입니다. 바로 예수님이에요.

어느 인간 예외 할 것 없이 너희들이 가고자 한 그쪽은 나를 죽이는, 하나님을 죽이는 악마의 사주를 받은 그 노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새부산고속도로 달려오던 차들이 사고 안 나게 된 것은 터널 차단막이 내려와서 그래요. 그 차단막을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차단하는 겁니다. 십자가 알고 부활 아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그것이고 그것은 취미고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내가 뭔가 살아야 되지 않느냐?’ 해서 “나는 혐의 없어요. 나는 살만한 가치 있습니다.” 계속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딱 내리니까 ‘야, 이 십자가를 알고 부활을 믿는 게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었구나. 나를 미워해야 되는구나.’ 그런데 미워한다는 말은 아예 나를 없앨 수는 없어요. 없앨 수는 없는데 전에는 내 쪽에서 십자가를 잡고자 했는데 이제는 십자가 쪽에서 나를 밉다고 잡아 버리면 그것이 나의 즐거움이 되고 감사의 내용이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말씀을 먹어버리면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나를 통해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네가 구원되지 못하는 것, 내가 이 말씀으로 너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되풀이해 주는 겁니다. 첫 번째는 내가 있는 한 십자가와 부활을 내가 지식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게 첫 번째에요. 두 번째, 진짜 십자가와 부활이 와서 십자가와 부활을 아는 것을 무효화시켜 버립니다. ‘십자가 알아서 뭐 하려고?’ 완전히 빠개버려요. 없애버려요.

세 번째는 그걸 반복시킵니다. 반복시켜요. 십자가 빠개지고 난 뒤에 ‘야, 이제 진짜 나는 주님이 와서 구원받았구나.’ 하는 그 순간부터 째깍, 째깍, 째깍……, 시간이 갑니다. 시간이 가게 되면 구원받은 내가 또다시 경직되기 시작해요. ‘나 구원받았다.’ 그렇게 주장합니다.

자, 다시 한번 디도서를 봅시다. 디도서 1장 6, 7절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지요.

이 말씀은 이미 십자가에 닫혀 있는 율법적 기능을 여기서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성령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가 고집대로 아니하고, 분내지 아니하고, 술을 즐기지 아니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 디도서의 편지를 근거로 해서 그레데 교회에서 ‘네가 목사 해라’라고 지목했다 칩시다. 그러면 목사 되고 난 뒤에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가요.

흘러가게 되면 고집대로 하지 않은 것이 나고, 분내지 아니하는 것이 나고, 술을 즐기지 않는 것이 나기 때문에 나는 목사 될만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이런 나를 내가 미워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땡, 그 사람은 탈락입니다. 감독으로서.

반복이 되어야 돼요, 반복이. 장로 된 자는 믿는 자녀를 둬야 한다. 애가 믿는다고 하지요. 믿는다고 하는데 그 애도 째깍째깍 세월이 가게 되면 나중에 “엄마, 옛날에 믿었잖아.” 이게 나와요. 옛날에 믿었잖아, 이렇게 된다고요. 나 신자 맞잖아, 이렇게 나온다고요. 주께서 계속해서 작용해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의 회개라 하는 것은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이 땅에 있는 것은 주님과 악마밖에 없는 거예요. 중간에 우리는 있다가 없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게 신령한 영적인 거거든요. 악마는 영적인 존재예요. 주님도 영적인 존재예요. 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존재가 마귀고 통틀어서 제일 바쁜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마귀하고 이야기하고 그 효과로서 그 결과물로써 성도를 이 땅에 세우는 겁니다. 감독을 세우고 장로를 세우는데 그 감독 장로는 날마다 ‘내가 감독 될 자격이 없고 목사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매일 같이 동일한 말씀을 먹어서 동일하게 나와야 되지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뭐냐? 우리는 말씀에 농락당해야 됩니다. 날마다 우리는 내가 하는 모든 생각이 오류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즐거움으로 살아가야 돼요. 우리는 주님의 장난감입니다. 장난감. 그렇지 않으면 말씀에 응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아는 내가 나를 다루는 방식이 되어버려요.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렇게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다 할 때 무슨 수로 우리가 자기를 미워하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다른 인간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내가 이제 복음 알았으니까 다른 인간이 되었을 것이라는 이 자기 자신을 성령이 임하면, 말씀이 오게 되면…… 바로 그 남자, 그 남자는 예수님입니다, 그 남자라고 했는데 갑자기 그 남자를 내가, 구원받은 내가 가려버려요. 그래서 이게 엉덩이 차이고 매를 맞아야 싼 겁니다. 이거 많이 맞아야 돼요.

옛날 1960년도 시골에서 서울에서 돈 벌겠다고 무작정 상경하는 아가씨들이 많이 왔어요. 서울역에 봉고차들이 죽 대기하고 있습니다. 가발 공장 쪽으로 가는 것, 버스 안내양 쪽으로 가는 것, 평화시장 봉제 공장으로 가는 것, 죽 있습니다.

그러면 서울역에 보따리 하나 들고 성공하겠다고 시골에서,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충청도에서 아가씨들이 올라오자마자 취업알선책한테 걸려서 공장으로 막 팔려나가지요. 그러면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서울의 봉제 공장에서 일하면 다른 인간 된 겁니까? 아니지요. 같은 인간이지요.

시골에서는 자기를 미워하다가 서울에 와서는 자기를 사랑하고 뭐 그런 겁니까? 아니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그 말씀 따로고, 그것은 내가 지키는 것이고요, 주님이 다 지켜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집어넣어 주는 말씀, 그 차이가 뭐냐 하면, 네가 그동안 무슨 짓을 했든지, 심지어 네가 너를 미워하지 않는 짓거리를 하더라도 나는 너를 기억하지 않으리라, 라는 그 순간,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 주님이 나타나는 그 순간순간입니다.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너의 죄에 대해서 묻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 지금 얼마나 바쁘게 일하는지 몰라요. 현실 속에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차라리 우리는 없는 식으로 있는 편이고, 시체로 있는 것이고 진짜 살아계신 것은 악마와 그리고 그 악마를 이겨주셔서 기어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효과와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우리 주님이 우리와 더불어 같이 살아 있을 때 아까 빌립보서 1장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주께서 나를 붙들고 주님께서 살아계시겠다고 우리를 붙잡아 준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감독감이고 장로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다시 한번 늘 비교하게 해 주옵소서. 얼마나 우리가 꼼수를 부리며 하나의 오락으로 간주했는지, 정작 귀한 것은 금고에 집어넣어 놓고 믿는 척했던 그것이 감사하게도, 주께서 다 들통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이 금고까지 주의 십자가가 침투하여 모든 것을,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해주시고 드러난 죄를 기억하지 않는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감사케 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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