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성
2023년 9월 17일 본문 말씀: 디도서 1:12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자기와 같은 동료들을 악하다고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에 대한 훼손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런 자를 이기주의자로 몰아세웁니다. 하지만 본인마저 악하다고 말한다면 인간 세계에서 더는 공격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항상’이라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예외를 따로 뽑아낼 대상이 못된다는 겁니다. 세상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그 자신도 악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런 발언을 해야 합니다. 율법 안에서 인간이 애시당초 그러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모든 인간은 항상 율법 아래서 저주의 대상이 되어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여기에 그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매일의 삶 속에서 거짓과 가짜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이러한 악한 삶에서 선한 삶으로 전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죄를 피할려는 노력이 곧 죄라는 사실입니다. 죄를 피하는 식으로 죄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자기 안에서 자기를 알고 확립하려는 최종적인 확고한 최종점을 마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고정점을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이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긴 바로 그 지점이 영원하고 확고한 최종점입니다. 그것이 ‘피’입니다. 인간의 고정점은 자신을 영원히 살리겠다는 일념하에 자신이 죽지 않고 산 상태에서 획득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여망을 거부하십니다. 최종점이라고 선언한 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30) 바로 이 ‘다 이루었다’를 근거로 해서 인간 세계 안에서 그 어디에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고정점이 아님을 밝히시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 세계에서 그 무엇도 고정점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1:17에 보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멈춤이 없습니다. 늘 요동치고 있습니다. 결코 빛이 아닙니다. 그림자들의 조각들일 뿐입니다.
그저 얇은 이미지들이지요. 늘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야 하고 헤매야 하고 마음에 정착되지 못하면서도 그래서 자신은 한시도 안 착실하고 안 착한 점이 없다고 자부하는 이미지들이지요. 그들은 죽음으로 마감된 그 이후를 모릅니다. 안 죽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분과 결합될 일을 미처 생각못하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에 내려진 선언과 단언은 십자가 이후 반복해서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이 사람은 모든 일이 과거가 되어지면 그 과거에 대해서 담대하게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거짓이며 이단이며 거짓말쟁이다”고 말입니다. “나는 나를 고정화하고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내가 누구냐 묻는 식으로 나서도 결국 자신이 바라고 듣고 싶은 것만 회수하는 식으로 자아정립에 나서게 됩니다. 인간에게 자아란 미지의 영역에 속합니다. 이 미지의 영역이 남아 있기에 인간의 마음은 제대로 충족되지 못합니다. 갈데까지 가보자는 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영원한 고정성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피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34) 그리고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 13:12)
이런 취지로 해서 예수님 부활의 영, 곧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인간은 비로소 과거를 새롭게 보게 됩니다. 아무리 길게 인생을 살아도 몽땅 다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이미 자신은 ‘죽은 자’가 됩니다. 죽어 있는 상태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 있기에 살아닜는 겁니다.
십자가 관 속에 누워서 세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웅웅거리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들 어두운 그림자일 뿐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처소는 피가 있는 바로 그곳입니다. 성도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려내기에 하루하루 계속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처지에서는 그 어떤 심각한 일은 없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들만 연속될 뿐입니다. 이미 죽은 자이기에 영원한 고정성인 예수님의 피의 효력에 둘러싸여 삽니다. ‘나’라는 육신이 뿜어내는 모든 것은 거짓이 아닌 게 없고 가짜가 아닌 게 없습니다. 모든 것이 엉터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현상이 늘 새롭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즉 하늘 은사의 새로움이란 이 지상 삶은 기껏 그림자에 불과함을 반복해서 파헤쳐질 때마다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란 지옥의 삶의 초입이요 매표소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선과 악을 아는 티를 마음껏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선이 곧 악이요, 악이 곧 선이었습니다. 서로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선이란 죽음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 확고한 십자가 피 앞에서 성도는 비로소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즉 “나는 무얼해도 거짓이요 가짜며 특히 바르게 살고 바르게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바로 그 자체가 천국을 가로막은 장애물이다”는 겁니다. 교회가 천국을 막고 구원의지가 천국을 막은 겁니다.
이런 사실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자신의 하는 짓을 매일 새삼 바라보게 됩니다. 마치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자부하는 가운데 바벨론 대신에게 유다나라의 창고를 보여주는 태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사 39:4)
성도는 자신의 과거를 심판하는 권한을 성령을 통해 부여받았습니다. 자기 부정의 연속과 반복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효력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림자에 불과하기에 그 어느 것 같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강-디도서 1장 12절(고정성)230917-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1장 12절입니다.
디도서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여기 ‘그레데’라는 것은 지중해의 섬이고 요새는 ‘크레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는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라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약 600년 전에 있었던 사람인데 그 사람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 크레타라는 섬에 살고 있는 그 주민 중에 한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항상, 예외 없이 늘 항상 거짓말장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그레데인은 거짓말장이며 거짓말만 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누가 이야기하느냐? 그레데 사람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와 같으냐? “한국 교회 이단이다.”라는 말을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 교인 중에 한 사람이 ‘한국 교회는 이단’이라고 했을 때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너는 그 이단이냐, 아니냐?”라는 그런 반박을 들어올 수가 있을 겁니다.
여기 그레데인 중에 어떤 사람이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쟁이다’라고 했을 때 ‘그레데 사람은 몽땅 거짓말쟁이’이라는 그 말이 외부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그 안의 사람이 이야기 했다면 그 말은 참일까, 거짓일까, 하는 논리적 문제가 성립이 됩니다.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다.’ 이 말이 참말 같으면 “그러면 너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네?” 이렇게 되니까 문제가 되고,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을 한다.’라는 이 말이 거짓이 되어버리면 자기 말에 또 모순이 발생되는 거예요. 여기 에피메니데스라는 사람을 가지고 “어떤 선지자”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은 선지자 아니에요. 복음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그냥 철학자거든요. 원래 출생이 그리스 사람인데 크레타의 신성한 동굴에서 57년 동안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크레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뭐냐 하면, 그 시대에 그 장소에 해당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향하여, 자기 자신이 속한 시대와 같은 동료들을 향하여 “다 거짓말쟁이고, 다 가짜고 다 엉터리야.”라는 말을 과연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으로서.
인간으로서는 못합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모순이 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할 수가 없어요. 인간들은요, “거짓이다, 잘못됐다, 고쳐야 돼, 반성해야 돼.”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는 그것은 자기가 참되고 바르고 진리라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런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이 인간 세계의 한계가, 예수님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한계가 깨져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아비는 마귀다.”(요 8:44) 다시 말해서 “너는 마귀에게서 태어난 자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마귀 지시를 받고 살아간다. 모든 정신은 마귀로부터 받은 그대로 살아간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유대인들이 뭐라고 했냐면 “넌 뭔데? 그럼 네가 옳다는 증거를 대 봐. 그 말을 하는 네가 옳다고 증명해봐.”라고 해요.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 증명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람한테 증명을 받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이건 증거 하나 안 하나 분명 그렇게 될 거야.”라고 했을 때 그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그 당시 유대인 입장에서 확인하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메시아냐, 메시아가 아니냐를 구분하는 방법으로 사용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메시아라고, 구원자라고 우기니까,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우기니까. 하나님이 죽을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네가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너를 죽이려고 할 때 갑자기 천사가 와서 “이 사람은 하나님이야. 이 사람은 메시아야.” 하고 막을 건데 우리가 그 막는 현상 좀 보자, 우리가 고대했던 구름 타고 오신다던 메시아……,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구름타고 온다고 했어요.
시편에 나오고 다윗이 예언한 바에 따르면 그래요. “구름 타고 온다는데 넌 구름을 안 탔잖아?”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나 구름 타고 오는 걸 보게 될 거야.” 이러니까 거기서 완전히 돌아버린 거예요. 해도 해도 너무 과하다는 거예요.
구라를 쳐도 어느 정도지, 아무리 봐도 행색이 초라한데 무슨 구름을 타고 와요? 자기가 하나님이래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 10:30) 그러니까 이게 환장할 지경이에요.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뭐 병 좀 고치고, 귀신 나갔다는 소문이 도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고 착각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손봐줄게. 너 죽여 버린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래. 죽여라. 난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 이런 이야기 하니까 아, 이건 뭐 대화가 안 돼요. 정신병 증상이, 과대망상 증상이 더 심한 거예요. 그래서 ‘이 국가 질서가, 사회 질서가 이렇게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 죽여 없애자.’
원래 죽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로마 당국이 보니까 예수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 운동이 일어나게 되면 로마에 제때 세금을 납부하지 못하고 로마의 국가라는 지배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거예요. 일제시대 때 만약에 종교 운동 벌어지면 일본 순사가 가만있지 않죠.
국가는 통치하는 나라에 의해 질서가 잡혀야 하는데 불쑥 예수라는 인물이 등장해서 사람들이 예수 말 듣고 다른 국가 말을 안 들으면 나라 꼴이 되겠습니까? 안 되죠. 그러면 국가로서는 정당한 행정 조치를 해야죠. 그래서 죽여 버리는 겁니다, 사회 문란 죄로,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죄로.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 행여 예수님이 거짓말하기를 사흘 만에 살아난다, 소리를 했기 때문에 로마 군인까지 또 배치를 해서, 잔업수당 줘가면서…, 세상에 무덤을 왜 지킵니까? 무덤은 안 지켜도 돼요. 무덤에 들어가는 자는 이미 죽은 자에요. 그러나, 혹시나, 혹시나 살아날까봐 무덤을 지켰거든요. 무덤을 지켰다 이 말이죠. 경상도 말로 ‘단디’ 한 거예요, 단디. 단단히 단속을 한 겁니다. 두 번 다시 딴소리 못 하게.
예수님께서 죽었는데 사흘 만에 막달라가 무덤에 가보니까 사람이 없어요. 로마 쪽에서는 ‘이게 살아난 것이 아니고 시체 훔쳐가 놓고 전에 예수가 살아 있을 때 했던 이야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미련이 남아 그대로 밀어붙이기 위해 숨겨 놓고, 살아났다고 옛날에 했던 그 거짓말을 유통시켰기 때문에 부활했다고 하는 거지 실제로 사람은 부활되지 않는다.’ 그리고 부활 됐으면 자기만 부활 됩니까? 다른 사람은 인간 아닙니까? 자기만 부활했다는 그 점이 더 수상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보니까 예수님 부활해서 약 500명에게 나타났어요.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고 제자들에게 나타나고. 그렇게 해서 제가 지난 시간에 했듯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거예요.
살아났는데 어디 계시죠? 살아났다면 살아난 곳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살아났는데 살아나셨는데 어디 계시냐, 이 말입니다. 살아났으면 “반갑다. 친구야.” 하고 찾아다녀야 하는데 왜 우리한테는 안 찾아오죠?
여기서 살아났다는 것, 살아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람이 한 둘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나타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모든 인간은 항상 모두가 다 거짓말쟁이고 거짓되다고 이야기했어요. 오늘 본문 그대로입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게 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다 거짓되다는 거예요. 아까 제가 한 논리대로 다 거짓 된다면, 이 세상은 다 거짓말쟁이고 다 가짜고 엉터리고 죄인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말 하는 너는? 너는 뭐냐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부활을 만난 성도들의 특징은 뭐냐? “나도 거짓되고 나도 가짜다.”는 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나는 이미 죽은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라는 불씨를 껐는데 불씨를 끈 게 아니고 그 끈 것 때문에 불씨가 온 사방으로 더 퍼지게 됐어요.
전에는 “예수 당신 뭐야?” 이게 관심사였는데 이제 예수님이 부활되고 난 뒤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등장하고부터는 “도대체 인간이 뭐야?” 관심사가 우리가 하는 전체에 다 확장되었어요. 확장되면서 이 세상은 거짓이고 다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근거가 뭐냐?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부활을 만나고 난 뒤에 내가 첫 번째로 느끼는 게 뭐냐? 내가 가짜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는 거예요. 내가 가짜.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면요, 자기 자신에 대해 밥 먹고, 일하고, 운동하고, 돈 벌고, 자식 키우고, 교회 다니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모조리 다 할 필요도 없는 일이 되는 거예요.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나에게는 없다 이 말이에요, 내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그러면 살아야 될 이유 없는 게 너 왜 사냐? 이것은 부활의 힘으로 산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그 사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이야기한다든지, 앉아있는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떻게 느껴지느냐? 자기는 관 속에 있는데 관 속에 있으면서 웅웅거리는 바깥의 소리를 듣는 식이에요.
관 속에 있다는 이 말이 여러분, 과격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기 때문에 그래요. 6장 14절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 안에 있다, “내가 관속에 들어갈게”가 아니라 이미 관 속에서 산다는 거예요.
관 속에서 살면서 죽은 자로 살면서, 죽었는데 자꾸 바깥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누가 17일 째 지금 금식한다, 자꾸 그런 소리가 들리고 내년에 총선 있다는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겁니다. 김정은이 어디 러시아까지 놀러 갔다, 그런 소리가 자꾸 들리는 거예요.
그러나 관 속에 있는 나와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밥 먹고 살겠다는 것은 내가 내 관을 못 벗어나니까요. 나는 내 죽음을 벗어나지 못해요. 나는 나를 잡아넣은 십자가 바깥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처지에 있는 겁니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확정이 난 확실한 FACT, 현실이 되고 만 거예요.
그러니까 “너 왜 관 속에 있어?” 하고 물으면 “나 가짜거든. 나 거짓이거든. 나 엉터리거든. 나 전부 다 구라거든. 난 죽어 마땅하거든.” 그런 이야기를 거침없이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주저 없이. 이걸 간추려서 말하면 이렇습니다. 거짓이란, 본문에 거짓말쟁이다, 하고 나오는데 거짓이란, 끝이 오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끝이 오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현상.
모든 것이 끝이 되게 되면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아, 나는 거짓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이 말은 나를 심각하게 만들 그런 또 다른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를 진지하게 만들 일은 없습니다. 왜?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의 연속이기 때문에. 내게 일어나는 당연한 일, 모든 것은 일어나야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거짓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과 심판, 그것은 거짓이기에 하나님 앞에 당연히 당해야 될 심판 현상의 연속이죠.
그래서 이미 관 속에서 죽은 자에게서는 심각한 전혀 일이 없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잘 살다가 보따리 싸 들고 “나 친정 갈래. 나 너랑 빠이빠이 할래.”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갈 때 차 조심해.”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횡단보도는 잘 건너고.” 이러면 끝날 문제에요. 그게 무슨 심각한 일입니까? 살다가 죽으면 죽는 게 아니고 이미 죽어버린 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됐기 때문에 안 살고 싶어도 예수님이 부활 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계속 이 땅에서 출몰돼야 되고 출현 돼야 될 이런 신세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보니까 아, 이 세상이라는 것이 지옥의 초입, 지옥의 매표소, 지옥으로 가는 초입에 이 세상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거짓되고 모든 것이 엉터리예요. 그러면 누가 왜 인간은 거짓되냐, 이렇게 물어볼 게 아니겠습니까? 성도는 성령을 통해 그것을 알죠. 인간이 거짓된 이유는 이 땅에 어떤 고정된 자리를 부여받지 못해서 그들은 계속 헤매고 있기 때문에 거짓된 겁니다. 부여받은 고정된 것이 없어요.
그게 야고보서 1장 17절에 나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뭐냐? 이 세상은 늘상 변하고 있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그 그림자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늘 회전하고 변화하는 거예요.
인간에게 인간이 거짓이라는 것, 고정된 것을 이 세상에서는 구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고 얻을 수가 없어요. 고정된 나라는 것은 없어요.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모른다는 거예요. 아무리 탐구하고 연구해도 고정된 나가 ‘이거다.’ 하고 잡을 수 있는 게 없어요. 평생 세월을 그렇게 살아도 내가 누군지를 우리 자신은 확정된 정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거울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나를 알려줄 어떤 특정한 것을 보고 싶은데 그것을 찾아가서 이야기 들으면, 저쪽이 거짓이 되는 이유가, 나의 반사, 나의 모사, 모방체가 그 앞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은 누구하고 이야기해서 “어이, 자네! 내가 누구야?” 하고 물으면 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했든 반사되어서 나온, 내가 듣고 싶고 도로 거두어들이고 싶은 것만 골라 들어서 내 쪽에서 이거다, 하고 편집하고 있는 자세를 갖추고 그 이야기를 듣게 되어 있어요.
욕하면 뭐라고 합니까? “반사!”하잖아요. 모든 것이, 그 반대는 사실 똑같아요. 선의 반대가 악이 아니고 선이 악이고 악이 선이에요. 똑같습니다. 나의 거짓을 타인이 가지고 있고 그 타인이 가지고 있는 내 거짓을 도로 회수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고정된 것으로 해서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다.’고 했어요.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단언해버렸어요. 단언해버리고, 그다음에 십자가 이후에 부활된 상태에서 세상을 보는 안목을 자기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 그것을 나누어 준 거예요. 다, 이 모든 것이 끝장이 났어요. 끝장이 나면서 역시 이 세상에는 나를 알려줄 고정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회전하는 그림자, 요동치는 그림자뿐이었다는 말이죠.
‘회전하는 그림자’라는 말은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해시계를 이야기합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라는 말은 그림자가 단독으로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위에 빛이 있었고 그 빛이 지상에 비치면 빛에서 이 지상에 많은 여러 가지 그림자를 뿌려댔고 양산했다는 뜻이에요. 그림자하고, 그림자하고 아무리 연구하고 대화하고 찾아봐야 그것은 빛이 아니고 그냥 그림자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이. 신학이고 철학이고 과학이고 문학이고 예술이고 다 마찬가지예요.
모조리 그림자입니다. 거짓이에요. 십자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영원히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이 진짜 다 이루었고 확정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는데 십자가 이후에 부활 되고 난 뒤에 주께서 성령을 보내주니까 비로소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 안에 있는 다 이루심의 선언이 왜 확정된 지를 성령을 받은 자만, 십자가 이후에 성령을 받은 자만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하고 헤어지고 난 뒤에 주님과 만난 것이 아니고 주님과 만나고 난 뒤에, 전에는 우리가 헤어져 있는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거예요. 모든 것이 거꾸로인 거예요.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아, 그때 나는 나 혼자 살아왔구나. 주님과 만난 적이 없구나. 주님과 헤어졌구나.’ 왜 주님과 헤어졌는가? 그것은 내가 거짓 아닌 존재로 되기 위해서, 나를 확정하기 위해서 내가 ‘이것은 영원한 내 자리야.’ 하고 그 고정된 자리를 찾고자 했던 그 짓,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게 거짓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했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기를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피하는 방식이, 죄입니다. 죄를 안 짓기 위해 애쓰는 그것이 바로 죄에요. 선에서 악을 가도, 악에서 선으로 가도 둘 다 죄인데요. 둘 다 죄에요.
다른 층위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막혀있습니다. 부활의 세계로 넘어가지를 못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인간 세계를 떠나며 마지막 보여준 고정성이 바로 피의 고정성인 무덤, 자신의 무덤입니다. 무덤의 고정성이죠. 그 무덤의 고정성 이후에 주께서 부활하셔서 우리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무덤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인생을 산다, 그것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죠.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
바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인간에게, 성도에게 뭐가 나오느냐? 새로움이 나옵니다. 새로움. 성도의 사는 보람, 기쁨, 행복, 즐거움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새로움입니다. 인간은, 성도는 새로움 없이는 못 삽니다. 살 수가 없어요. 그 새로움은 반드시 무엇을 경유해야 나오냐면, 내가 거짓이라는 사실이 새록새록 확인하고 들추어질 때 인간은 그렇게 즐겁고 기뻐요.
내가 살아도 거짓이고 죽어도 거짓이고, 그래서 사나 죽으나 똑같은 문제고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 이래도 거짓이고 저래도 거짓이고, 이렇게 살아도 가짜고 저렇게 살아도 가짜고, 진작에 죽어도 아무 애통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거짓이고, 더 살아도 소용없을 정도로 거짓이고, 그것을 아는 순간순간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보는 새로움이 등장합니다. 새로움이 거기 덮이게 됩니다.
온 천하보다 더 귀한 게 뭐냐?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거짓 존재고 가짜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온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이. 아내가 바가지 긁으면서 “여보 설거지 좀 똑바로 못 해? 설거지 좀 똑바로 하라고 내가 몇 번을 이야기해.” 그럴 때 ‘그래, 네 마음대로 하세요.’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거는 뭐 온화함의 극치에요. 설거지한다고 해서 무덤 속에 있는 내가 신세가 바뀌지 않거든요. 왜냐면 부활은 죽음조차 이기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부활이 취소되지가 않습니다. 부활이 취소되지 않아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부활이 취소되지 않아요.
왜? 그걸 가지고 고정성, 십자가 안의 고정성, 예수님의 무덤 안에 놓여 있는 고정성이에요. 이 고정성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알았습니다. 내가 바로 그레데인이고, 내가 가짜고, 내가 거짓말쟁이고,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는 것, 내가 바로 이단이었다는 사실을. 정말 이 고정성이 올 때까지 왜 그리 힘들었을까? 이런 고정성이 올 때까지 나는 왜 그리 힘들었을까!
“그동안 뭐 했니? 정말, 그동안 뭐 했어, 도대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까지 도대체 뭐 했냐, 이 말이죠. 뭐 위대한 영웅 찾아가고, 책 보고, 공부하고. 가짜 봐서 뭐하는데? 전부 다 가짜인데요. 자기도 모르는데 뭘 이야기해 줍니까? 박사 따고 난리, 주여, 주여, 부르짖고. 세상에, 기도원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직렬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병렬로 연결해요. 직렬 되는 인간을 죽여 버리고, 죽여 버리면 거기에 빈자리가 생길 것 아닙니까? 그 빈자리에 성령께서 병렬로 나란히 오셔서 빈자리를 주의 부활로 채울 때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연결되는 겁니다.
인간은 끝에 가지 않는 한 내가 누군지도 뭐가 진리인 줄 알 수가 없어요. 그냥 노력할 뿐이죠. 열심히 노력할 뿐이에요. 인간의 끝은 예수님의 죽음이죠. 죽음 뒤에 가봤나? 죽음의 끝은? 죽음의 끝은 예수님의 죽음이죠. 거짓의 끝은? 거짓의 끝은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아, 모조리 다 거짓이구나. 그레데인들 항상 다 거짓이구나.’
항상 이 그레데인들이 항상 거짓이라고 하기 전에 이미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을 했어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장 10절입니다. 저도 백 번도 더 이야기했어요. 안 믿으니까 문제죠, 안 믿으니까!
방금 이 말씀, 우리가 저주 아래 있다는 이 말, 항상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는 이 말을 왜 믿지 않느냐면 살아 있는 내가 믿으려고 하니까 이게 안 믿겨지는 거예요. 그냥 알 뿐이에요. 성령으로 쓴 성경 말씀은 이미 성령 받은 자만이 납득이 돼요.
이 말씀을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이미 부활의 영을 받았기에 내가 온갖 일을 행해도 그것은 저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팩트고, 세상은 지극히 당연하게 이렇게 돼야 되는 거예요. 살다 죽어야 되고, 먹다 죽어야 되고, 잠자다 죽어야 되고, 홍수 나서 죽어야 되고, 이것은 저주받은 세상에서 저주가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고마운 사실은 그 세계가 오기 전에 주님께서 이미 고정된 것을 주셨다는 사실이에요. 끝이 오기도 전에 이미 고정된 것을 주셨는데 그것이 예수님 피의 고정성입니다, 피의 고정성. 물론 이 이야기를 한다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만 히브리서 12장 24절에 보면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피.
히브리서 13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그 고정성은 피로서만 드러내는 거예요. 피로서만 드러내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피 외에는 일체 보여준 것이 없어요.
인간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 쉽게 말하면 바르게 살기 위해서, 그 말은 쉽게 말해서 내가 거짓되지 않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 그런 뜻이에요. 그렇게 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요즘에 있어서는 과학이에요. 물리학이에요. 물리학에서 공부할 때 사람은 그냥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고정성을 딱 집어서 해요.
물리학에서 고정성은 뭐냐? 빛의 속도입니다. 1초에 30만 킬로미터 간다는 이것. 그것 가지고 모든 양자 물리학이 다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빛이 30만 킬로보다 더 빠른 경우를 알게 되었어요. 처음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우기는 빅뱅 시대에는 빛의 속도가 30만 킬로보다 더 빠릅니다. 그러면 그건 어떻게 됩니까? 그건 단 한 번 예외적인 것이고 그 이후에 빛이 있다, 그러는 거예요.
수학에서는 항상 이 공식이 참이냐 거짓이냐,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써요. 증명하는데 역시 고정성이 있습니다. 프라임 넘버(Prime Number) 소수라는 거예요. 1, 3, 5, 7, 11, 13, 17…, 1과 자기 외에 나누어지지 않는 수, Prime, 그 근본적인 Number, 수, 그것을 중심으로 세상의 모든 수학은 다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결국은 어디까지 증명하냐면, 여기까지 증명합니다. 나 자신이 내세우는 명제, 어떤 주장 같은 거죠, 수학의 명제는 스스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가만 보면 아주 웃기는 이야기에요. 인간 자체적으로 이것이 진리냐 아니냐를 증명하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괴델의 ‘불완전성 증명’이라는 거예요. 그걸 할 때 바로 소수 가지고 하는 겁니다. 1, 3, 5, 7, 그다음에 11, 13, 17은 그 숫자가 자기 외에 다른 수로는 더 이상은 분해가 되지 않으니까요, 소인수분해가 안 되니까 이거 가지고 고정성을 원하는 거예요.
문학이나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무엇을 고정성으로 삼는가? 내가 의식한다는 거예요. 내가 ‘의식’하는 것, 내가 뭘 느끼는 것. 이 신학과 문학과 그리고 철학의 의식한다는 것, 모든 것은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게 깨졌어요. 무의식 때문에 깨졌어요. 인간의 의식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영원히 메꿀 수 없는 구멍이 있다, 그게 무의식이에요. 경제에서 하나의 고정점은 뭐냐? 자본. 돈은 인간이 다룰 수 없다,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한다, 그거에요. 자본의 팽창입니다. 자본, 인간의 돈, 인간은 이만하면 됐다는 것에 스톱하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고정점이 있는데 문학, 철학, 신학, 경제학, 물리학, 이 모든 고정점 전체를 하나로 딱 묶어버리면 그 고정점은 뭐냐? 자연이에요. 자연은 그때부터 영원히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물로 심판받은 것도 잊어버리고, 장차 불로 심판받을 것도 잊어버리고, 그냥 자연은, 인간은 죽고 변해도 자연은 그대로 있다. “어제의 해 내일도 뜰거야.” 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 공부를 하는 이유가 자기를 고정된 자기로 관리하기 위해서, 고정된 나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그러한 수고를 하는 거예요. 아주 발악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도는 요한 1서 1장 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게 참 놀라운 겁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영원한 고정성을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 받은 사도 요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회고하여, 소급해서, 이미 자기가 구원받은 상태에서 소급해서 이제 고정된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미 주신 바 되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요한일서 1장 7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했다는 거예요.
교회가 천국을 막습니다. 신학이 천국을 막고요, 교회가 천국을 막아요. 내가 천국을 막습니다. 내 구원받고자 하는 욕심이 천국을 막았어요. 그런데 이게 슬픈 이야기가 아니고 신나는 이야기여야 합니다. 내가 천당가려는 것이 바로 천국을 막았다는 사실, 내가, 천국가고자 하는 내가 그전에 왜 가짜인 것을 몰랐는가 그 말이지요.
천국 가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성경 보고, 말씀 듣고, 예배 참석하는 이 자체가 엉터리고 거짓말의 연속이고 이게 가짜인 것을 왜 몰랐는가 그 말이지요. 왜 몰랐는가, 고함지르면서 이게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거예요, 막 좋아서. 신나는 겁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신나야 되는가? 이 정도로 신나야 돼요.
어제 손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유치원에서 소방훈련 하는데 어른들 걱정할까 싶어서…, 아주 시건머리가 있어요. 걱정할까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짜 불난 것 아니데이.” 진짜 불난 것은 아니다. 어른들이 걱정해서 진짜 불이 났나, 자기 걱정할까 싶어서. 소방훈련을 했는데 그 단어를 모르니까 진짜 불난 것은 아니라고 한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불난 상태에 돌입하면서도 ‘이거 이미 해답을 알아. 이게 진짜 불난 것은 아니라’는 그 해답을 알고, 고정점을 알고 흔쾌히 소방훈련에 참여하니까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런 아주 깊~은, 사려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 사는 것 진짜 아닙니데이, 이거! 우리 다 죽은 거예요.
왜? 피를 알기 때문에. 그분이 피를 흘렸거든요. 피 흘린 분을 눈으로 본 바요, 만진 바요, 목도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 요한은 왜 도망갔느냐? 그때는 성령을 안 받았거든요. 그때는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다는 말이지요. 나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 따라 다니면 천당 갈 줄 알고 이용한 거예요.
요한복음 20장 23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이 말씀을 하셨거든요. 성령을 받기 전에 마태복음 16장 19절에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걸 천주교에서는 신부들이 고해성사하면서 삐딱하게 앉아서 “무슨 상담하려 오셨습니까?” 해서 “제가 이런 나쁜 짓을 했습니다…” “주기도문 세 번 외우시고 회개 기도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처방전 내려주고 “다음 사람!” 하거든요. 이게 그 뜻이 아니고 이건 뭐냐 하면, 성령 받은 당사자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자기의 과거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내 과거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의 성령이 한껏 마음껏 내 기억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게 된 거예요.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은 자였다는 사실, 그 이야기를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바로 영원한 고정된, 확정된 다른 층위의 다른 세계가 이 세상에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주의 증인 된 겁니다. 자기의 과거를 거짓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그게 바로 피, 그 피를 보고 아는 거예요. 그 피 흘리심.
사도 요한이 이 요한일서 쓰기 전에요, 십자가 전에 예수님을 얼마나 따라다녔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피 흘린 것을 알면서도 요한일서 같은 이야기를 못 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아, 영원히 고정된 것은 내 쪽에서 구획하고 형성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우리한테 피로써 확정지어 줬구나.’ 이미 다 이루었다, 선언하시고 단언 된 그 다 이루었다, 함을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그것을 반복시키는 거예요. 그걸 되풀이하는 겁니다.
지난 9월 7일 날 파키스탄에서 열차사고 일어났어요. 30명이 죽고 90명이 다쳤는데 열차 사고 난 이유가 탈선이 되어서 그래요. 기차가 탈선된 이유가, 그 나라가 못사는 나라가 되다 보니까 철로와 철로를 이을 때 쇠로 이어야 되는데 단단한 나무를 가지고 이은 거예요. 나무다 보니까 비도 오고 나중에 썩어서 철로가 뒤틀리니까 탈선한 거예요.
예수님 피는 뭐냐? 예수님 피에서 다른 데 관심 두는 것은 전부 다 탈선입니다. 다 지옥 가는 거예요. 분명히 영원한 고정성을 줬으면 그 피뿐이에요. 그거 외 나머지는 탈선이니까 그쪽으로 가야 되는 거예요, 그쪽으로. 우리가 얼마나 거짓되었으면 주께서 피를 흘렸겠습니까?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히브리서에서 이 언약의 피를 모독한 자는 주께서 용서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언약의 피, 새언약의 피, 최종적인 언약이에요. 내 살과 내 피. 왜 흘렸겠어요? 그 피 왜 흘렸겠습니까? 피 흘려도 사도 요한은 몰랐지요.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부활의 영을 받고 난 뒤에 ‘아, 그 피가 그 피였어. 그게 생명이었어.’라고 아는 거예요. 동시에 나의 일상은 뭐냐? 왜 그 피만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몽땅 우리가 거짓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거짓임을 늘 발췌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림자로 살아가야 되는 거예요. 야고보서를 다시 한번 보게 되면 야고보서 1장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하늘에서 와요, 성령을 통해서 와요. 하늘에서부터 오는데 그러면 땅은 뭐냐?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여기에 ‘그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다’ 이 말은 이 땅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독특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이미지거든요. 이미지라는 것은 그냥 시커먼 그림자, 아무것도 없는, 실체라고 하지만 없는 거예요. 없는 그 속에서 그 실체가 인간의 육신, 또는 마음, 육신이라는 모습으로 그림자의 행태를 보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냥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오셨거든요. 죄 있는 육신을 가지고 오셨는데 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다 이루었다, 피로 용서함을 받는다, 피로 영생이다, 천국이다.’가 되려면 주께서 우리의, 성도의 육신이 필요한 거예요. 육신에다 뭘 집어넣는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그 대결, 약속의 구조를 우리 속에다 집어넣습니다. 집어넣는 방법은 말씀을 가지고 집어넣어요. 이제 성령 받고 구원받은 상태에서, 그 어떤 말씀, 오늘 본문 말씀도 그렇고 여러 가지 말씀을 딱 보게 되면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하게 되면 우리 속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대결구조가 있으니까 선악 체제가 가동이 되지요. ‘나 거짓말쟁이 안될래. 난 예수 믿고 복음만 전하고 참된 사람 되어야지.’라고 하지요.
그게 새롭지가 않아요. 그게 바로 거짓이에요. 그게 거짓인 것을 날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확인할 때마다 나오는 것이 뭐냐? 새로움이에요. 내가 이토록 거짓이었나, 가 나올때마다 이게 늘 새로움이 같이 덩달아 나와버려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으려다 살아났어요. 15년 수명 연장되도록 하나님께서 살려줬어요. 살려줬는데 15년 연장되어서 한 일이 나와요. 자기가 이제 살았으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다시 말해서 오늘 설교 내용대로 하면 ‘나는 이제 거짓이 아니다.’ 이렇게 착각한 거예요. 구약이니까요.
그래서 바벨론의 대사가 오니까 히스기야가 자기가 하나님의 도움으로써…, 바벨론 이전에 앗수르 제국이 있었어요. 아직까지 앗수르가 안 망했을 때 ‘앗수르 제국이 우리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18만 5천 명을 하루아침에 다 죽여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인정하시고 이렇게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해준 증표를 주셨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라는 그것을 만끽해서 그 바벨론 대사에게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보물, 무기를 다 보여줬어요.
그게 이사야 39장 4절에 나오는 겁니다. “이사야가 가로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나는 구원받았어. 이제 나는 성령 받았어.’ 하면서 내놓는 모습들이 이거예요.
내가 거짓이라는 생각을 못 하고 이제는, 이제는 내가 새사람 되었으니까 나는 거짓이 아니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15년 동안 히스기야 왕을 살려준 거예요. 살려준 이유가, 구원한 이유가, 아직도 남아 있는 그 거짓된 것을 탈탈 죽을 때까지 긁어내기 위해서. 그것이 성도의 새로움이고, 즐거움이고 사는 보람입니다.
나의 거짓의 끝은 어디인가? 전에 여러 번 했잖아요.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양수경의 노래처럼 ‘내 거짓의 끝은 어디인가?’ 나의 오만과 나의 교만의 끝은 어디인가? 아주 뭐 싱글벙글하면서 기쁘게 맞이하는 거예요. 나의 상대방 이용하기의 끝은 어디인가? 내가 하나님 이용 해먹는 그 악마의 본성의 끝은 어디인가? 그것 하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몰라요. 그런데 사태를 일으키게 되면 거기서 비로소 나의 거짓이 주는 즐거움을 우리가 만끽합니다. ‘아하, 이래서 피구나, 이래서. 이래서 피가 고정성이고 무덤이 고정성이구나. 구원받은 내가 고정성이 아니구나.’ 내가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나를 믿지 말라고 주께서는 구원하신 거예요, 우리를!
우리가 어느 정도로 거짓말인지 어느 초등학교 시험에 이렇게 문제가 나왔어요. “고구려의 시조는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탄다. 이 시조는 누구냐?” 그때 그 초등학생이 답변하기를 “송일국” 맞아요. 송일국. 왜? 송일국은 주몽의 그림자기 때문에. 주몽의 그림자거든요. 우리는 나로 인하여 살아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이 사실이 내가 거짓말쟁이고 성경 말씀에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만 나온다는 사실, 지금도 우리에게서 거짓말만 나온다는 이 감사함.
잘했다, 못했다, 잘했다, 못했다, 선악 구조, 아…, 우리 속은 뱀의 후손, 악마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 미국 가서 동료 여자 하나 죽여 버린 그것, 그런 단체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단체, 도대체 종교단체가 뭐가 문제입니까? 옳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문제인 거예요, 옳은 것을. 옳은 것이나 악한 것이나 둘 다 악한데 그걸 모르고 ‘옳다/악하다’백날 해봐야 죽음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못 뛰어넘어요.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피의 능력이 하는 거예요. 옳다/그르다, 옳아도 악이고 그르다는 것도 악이에요. 우리는 항상 그레데 사람이니까요. 항상 거짓말쟁이니까. 아무 차이 없습니다. 백설공주와 백살공주는 점 하나 차이거든요. 뉘앙스가 확 달라요. 공주 백살 먹어서 뭐하는데요.
우리는 말 하나 제대로 선택 못 합니다. 왜? 너무나 거짓되기에 어느 것이 진짜 내 뜻을 담은 의미고 그런 단어냐, “아 다시 이야기할게, 다시!” 다시 이야기해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해도 거짓인 것을, 하나도 심각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다만 거짓임을 밝혀서 늘 성령이 주시는 새로움을 만끽하고 감사하면서 주의 증인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매일같이 탈선이고, 매일같이 거짓되고, 매일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그렇게 즐겁고 감격스럽고 기쁜지, 주여, 이미 십자가의 다 이루심, 그것이 우리 안까지 파급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로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만 증거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