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천국
2023년 9월 3일 본문 말씀: 디도서 1:5-9
(1: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1: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1: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1: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이 결국은 다 망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도 같은 처지에 일수가 있음을 감안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섬긴다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감당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통제합니다. 하지만 마치 줄 당기기 게임에서 알 수 있듯이 상대쪽이 더 세며 내가 잡은 줄은 나에게서 멀어집니다.
내가 나를 통제하는 것은 더 센 힘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아보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은 결국 국가로서 유지되지 못하고 소멸되었습니다. 있음이 없음이 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런 형편에 있는 인간들이 천국에 가는 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기요? 이점은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눈으로 보면서 믿을 것은 믿겠다는 자세가 옳지 않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해를 주기고 달을 주시고 별을 주시고 대지를 주셨지만 그것 말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내부의 마음에 직접 찾아오시는 방식으로 신약에 일하십니다.
예레미야 31:33-34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눈에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 곧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방해받지 않기 위한 조치인 말씀으로 직접 작용합니다. 이런 일을 해야 될 자가 바로 감독이요 장로요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가 관심있는 바는, 이 세상 일이 아닙니다. 최초의 일과 최후의 일입니다.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눅 9:31) 이 변화산의 영광은 이 세상이 곧 하늘나라의 폐품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이 세상은 쓰레기이고 그 쓰레기 더미에서 인간들이 태어난 겁니다. 왜냐하면 낙원에서 버림받은 세계가 이 세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도리어 안 망하는 자가 등장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한 일이 됩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령받은 것과 안 받은 것의 차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릅니다. 그들은 신앙과 불신앙을 나누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복음이 접하게 되면 이미 그들은 이 세상에 대해 신실한 종교인,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이 들통납니다. 그들은 도덕으로 무장해서 그 도덕심으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꾸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서 ‘용서받지 못한 자’로서 추방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뱉은 모든 말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발언’만 해내신 겁니다. 도덕을 내세우는 세상에서 도덕으로 같이 덤빈다고 해서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란, 그렇게 해서 죽으신 그 ‘죽음과 약속’했습니다.
즉 주님 죽으심 따라 같이 죽겠다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자신있게 나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최후와 최초’가 다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짧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길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생각은 일시적인 것들 뿐입니다.
장로와 감독들이 교인들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세상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5장에서는 이들을 ‘말씀의 초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의 초보’란 멜기세덱에 담긴 내용을 아직 알지 못하고 낯설어 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멜기세덱은 ‘최초와 최후’를 함께 지니고 자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이 12지파 내부에서 변천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은 시작도 모르고 최후도 모릅니다. 그저 하나님을 통해서 자신들의 생존에 몰두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소유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자아란 소유에서 비롯됩니다. 소유된 게 없습니다. 자아도 형성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를 손질해서 그 자아를 천국에 올려보내고 싶어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나 성령이나 말씀이나 예수님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도리어 해체하고 부서지게 하고 망가지게 하십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운명처럼 말입니다. 12지파 속에서 레위지파는 레위지파로서 죄를 짓고, 요셉지파는 요셉지파로서의 죄를 짓고, 유다지파는 유다지파로서 죄를 짓게 됩니다. 따라서 신약의 성령님께서는 이미 죽으신 바로 그분의 영으로 오셔서, ‘죽음과의 약속’을 성사시키십니다.
성도는 더는 자신의 몸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그들의 죽음에서 주어집니다. 교회에서 바로 이것을 감시하는 자가 감독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따라서 이미 무너진 자는 자신에 더는 미련두지 않는 자는 말씀의 움직임에 편승되어 같이 움직입니다. 천국과 이 세상 사이에는 봉쇄를 위한 막 같은게 있습니다. 사람의 세포막과 같습니다. 말씀으로 당겨지는 것과 말씀에 의해서 밀침을 당하는 기능을 막에서 하게 됩니다. 또한 막에는 통로가 따로 있습니다.
이 통로는 예수님께서 다녀가시면서 만들어낸 통로입니다. 이 통로에서는 수천 번 수만번 들락거림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어내신 공로만 드러내고 감사하는 통로입니다. 멜기세덱처럼 예수님 안에서 처음과 끝과 함께 공존합니다. 바로 이런 수준에서 십자가는 밝게 증거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를 쳐다보고 미련 갖지 않게 하옵소서. 내 몸의 행함을 믿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디도서 1장 5-9절(움직이는 천국)230903-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1장 5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디도서 1:5-9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장로 나오고 감독 나옵니다. 장로라는 것은 유대교 정통에서 지도자를 장로라고 하고, 감독이라 하는 것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가운데서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들의 책임자, 그들을 감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유대인 속에서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이방인 속에도 택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 장로나 감독이 왜 굳이 있어야 하는지,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구약 성경에 굳이 선지자들이 왜 있어야 되는가, 지도자들이 왜 있어야 되는가, 와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사도들은 왜 있어야 되는가? 사도 너희들도 죄인이고 우리도 죄인이면 감히 죄인이 같은 죄인 보고 이래라저래라 뭐라 할 수 있는 자격이, 권한이 없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통해서 교회를 감독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나오는 감독들이 도대체 무엇을 감독하느냐? 인간 자체를 감독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결합시키는, 결집시키는 다른 요소를 감독하는가?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렇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교회를 유지하는데 왜 흉악한 이리가 교회 안에 들어오도록 허용을 하셨느냐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강제로 막아주면 되는데요.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들었잖아요. 에덴동산을 만들면 에덴동산에는 깨끗한 것만 있어야 하는데 왜 사탄이 에덴동산에 들어오도록 왜 미리 차단하지 않았는가, 같은 취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을 두시고, 감독자로 삼고, 선지자로 있고,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모임 자체를 이 땅에서 천국의 백성 또는 천국의 집단이라고 경솔하게 말하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에 추려내기 위해서 그들을, 사도와 선지자를 두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구약에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나라죠. 그런데 하나님이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 역사를 아시겠지만, 다 망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한 집단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 쳐 내지고 다 망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 원칙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위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러분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망했는데 오늘날 우리는 뭐냐 이 말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우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만 열심히 찾았던 이들인데 결국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내침을 당했다면 오늘날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한쪽은 세상에 발 걸치고 한쪽은 교회에 그냥 얼굴 쬐끔 보이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우리는 진작 내쳐져야 마땅하다 이 말이죠.
자, 그렇다면 왜 우리를 내치지 않는가? 여기서 장로와 감독들의 역할이 드디어 중요합니다. 감독과 장로들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가 형성된 자리, 예수님의 자리를 반복해서 메꾸기 위한 것이고 그걸 위해 등장된 인간들이에요. 주님은 하늘로 가셨잖아요. 가셨지만 주님이 있는 그 자리는 교회의 그 중심으로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건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어요. 갔더니 거기에 예수님께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이렇게 돼 있어요.
거기서 이 제자들이 변화산의 경험을 한 것은 이 인간 세계의 초라함, 그리고 인간 세계가 아무것도 아닌 그런 세계인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렇습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쓰레기예요. 우리가 좋~다고 지금 악착같이 살려고 버티는 이 세상이 사실은 쓰레기 더미에요. 에콰도르라는 그 나라는요, 쓰레기 때문에 몸살 앓고 있습니다. 세계의 플라스틱의 2.2%가 에콰도르의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나오는데 오염의 나라죠, 배수 시설도 안 되어 있고.
이 세상이 바로 천국에서 버린 세상이에요. 쓰레기로 버린 세상이라고요. “나가!” 해서 주께서 쫓아낸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쫓겨날 때 그들은 생명 나무 먹지도 못하고 그냥 쫓겨난 거예요. 생명 나무 차단시켜 놓은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생명이 없어요. 생명이 없으니까 그들은 이미 죽은 채로 에덴동산에서, 낙원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추방되고 난 뒤에 그들은 고집 있어서 열심히 살아보자고 애를 썼는데 주님께서 아예 약을 올리십니다. “네가 살려고 땀 꽤나 빼지? 소용없어. 네가 목숨 붙어있는 한 계속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도 결국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라고 단언을 해버렸습니다. 망할 인간이 망해야지, 당연한 거지 뭐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뭘 이상히 여겨야 되느냐 하면, 천국으로 갈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도리어 이상한 일로 여겨야 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줄다리기 게임을 할 때 나로부터 줄이 멀어지면 나보다 더 센 힘이 나에게 작용하는 힘이 있다고 느끼시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붙들려고 하는데 내가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 내가 나를 붙잡을 수 없어요. 빼앗기는 것 같아요. 복 된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거 복이에요.
쓰레기 같은 나에게 나를 맡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복된 겁니까? 이것은 복 되고, 신기하고, 희귀한 일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하고 고집부릴 게 아니에요. “내가 믿습니다.”로부터, 나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믿습니다, 하는 것은 나를 붙들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거든요. 그 몸부림조차도 통하지 않는 곳으로 내가 내 자아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끊어져 가는 느낌, 아주 센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성령이 오셨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했을 때 그 취지를 몰랐는데 그때 뒤늦게 참여한 도마하고의 이야기에서 성령 받았다는 말은 바로 보지 않고 믿는 게 성령 받은 거예요. 그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도망쳤던 이유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도망친 거예요. 뭐가 보이느냐? 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세상에서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라는 그 고집, 살아남으면 성공이고 못 살아나면 인생 실패다, 그것이 압력으로 꽉 작용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런 쪽으로 해서는 이 쓰레기 속에서 탈출이 불가능하거든요. 구약 성경에 다 망했다, 는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다 망하면서 그 가운데 선지자와 선지자를 따르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이야기 한 거예요. 그 선지자 기능이 바로 장로 기능이고 감독 기능으로 그 자리에 둔 겁니다.
이제부터 어려워요. 굉장히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지금 시작됩니다. 그러면 분명히 제가 전제를 했어요. ‘성령이 오게 될 때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다.’ 보이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개종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믿음이냐, 믿음 아니냐’를 묻지 않는 세계가 이 세상이에요. “돈 얼마 있어?” 그걸 묻지 “믿음 있어?” 이걸 세상 어디에서 묻습니까?
삼성이나 엘지 입사할 때 “믿음 있어요?” 이걸 왜 물어요? “능력이 어느 정도 있습니까?” 이걸 묻지. 이 세상은 믿음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복음을 딱 접하게 되면, 복음이 오게 되면 그다음부터 이 세상 자체에 믿음이 있다는 것이 발견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은 이미 종교인들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왜?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성령이 없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이 세상이거든요. 성령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다예요.
뭐 마음에 안 들면 금식하면 되니까. 고집부리면 되니까. 복음이 접했을 때는…, 울산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이 만나고자 하는 것, 우리를 만나지 않아요, 하나님은 자기가 보내준 성령과 만나요. 하나님은 성령과 만나지 이 쓰레기 같은 우리 만나서 뭐 할 건데요? 몇 번 만나봐야 이렇게 만나도 쓰레기 저렇게 만나도 쓰레기, 앞을 보자 쓰레기 뒤를 보자 쓰레기, 뭘 봐도 쓰레기인데 쓰레기 만나서 뭐 할 건데.
성령을 집어넣고 성령과 주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럴 때 복음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가만있지 않고 움직이게 돼요. 가브리엘 천사가 왔을 때 마리아가 임신했고요, 그 친척인 세례요한의 엄마가 배 불룩해서 6개월 뒤 임신한 마리아보고 이야기할 때 뱃속의 아이들끼리 같이 반응을 나타냈다, 뱃속의 아이들끼리,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별을 주었다, 달을 주었다, 해를 주었다, 그러니까 해와 달과 별과 자연과 바다와 바람과 육지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니 하나님이 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식으로 오려면 무엇으로 와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직접 주시는 거예요, 말씀을.
눈으로 봤던 나라,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31장 33절에서 3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에요.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마음속까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는 해와 달과 별의 그런 것 가지고 마음이 동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그럴 때마다 호들갑 떨 거 없다는 겁니다. 주께서 직접 마음속에 어떤 것에 의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식으로 이 마지막 때에 작용하는 거예요.
눈으로 보여서 하나님께서 뭐 이방 나라 쳐들어온다, 약속의 땅에 젖과 꿀이 온다, 뭐 외양간에 소가 많고 포도나무가 잘 되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옛날 구약 시대에나 따져라, 이 말이에요. 그 따졌던 그들 다 망했잖아요. 눈으로 보는 것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그들 다 망했어요. 말씀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눈으로 보던 이스라엘 망했죠. 바빌론 나라에 망했습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바빌론의 마지막 왕이 벨사살인데 그때 이야기입니다. 벨사살 왕이 눈에 보이는 기명, 제사에 쓰는 물건들을 탈취해왔죠. 3절에 보면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파티를 열었다는 말이죠, 술을 마시고 4절에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1장 5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찌라.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장로 나오고 감독 나옵니다. 장로라는 것은 유대교 정통에서 지도자를 장로라고 하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 가운데서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들의 책임자를 감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유대인 속에서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이방인 속에도 택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 장로나 감독이 굳이 있어야 하는지 이 점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구약 성경에 굳이 선지자들이 왜 있어야 하는가, 지도자들이 왜 있어야 하는가와 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사도들은 왜 있어야 되는가, 사도 너희들도 죄인이고 우리들도 죄인이면 감히 죄인이 같은 죄인 보고 이래라 저래라 뭐라 할 수 있는 자격이, 권한이 없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통해서 교회를 감독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나오는 감독들이 무엇을 감독하느냐, 인간 자체를 감독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결합시키는 결집시키는 다른 요소를 감독하는가?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이렇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교회를 유지하는데 왜 흉악한 이리가 교회 안에 들어오도록 허용을 하셨느냔 말이죠, 하나님께서 강제로 막아주면 되는데.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만들었잖아요. 에덴동산을 만들면 거기에는 깨끗한 것만 있어야 하는데 왜 사탄이 에덴동산에 들어오도록 미리 차단하지 않았나, 같은 취지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을 두시고 감독자로 삼고 선지자로 있고,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모임 자체를 이 땅에서 천국의 백성 또는 천국의 집단이라고 경솔하게 말하는 경향들이 있기 때문에 추려내기 위해서 그들을, 사도와 선지자를 두신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구약에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나라죠. 그런데 하나님이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 역사가, 아시겠지만, 다 망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한 집단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 쳐내지고 다 망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그런 위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 원칙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망했는데 오늘날 우리는 뭐냐는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우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만 열심히 찾았던 이들인데 결국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내침을 당했다면 오늘날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한 쪽은 세상에 발 걸치고 한 쪽은 교회에 그냥 얼굴 쬐끔 보이는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우리는 진작 내쳐져야 마땅하다 이 말이죠.
왜 우리는 내치지 않는가? 여기서 장로와 감독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감독과 장로들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가 형성된 자리를 반복해서 메꾸기 위한 것이고 그걸 위해 등장된 인간들이에요. 주님은 하늘로 가셨잖아요. 가셨지만 주님이 있는 그 자리는 교회의 중심으로 있어야 되는 거예요. 이건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변화산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명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어요. 갔더니 거기에 예수님께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이렇게 돼 있어요.
거기서 이 제자들이 이 변화산에 경험을 한 것은 이 인간 세계의 초라함 그리고 인간 세계가 아무것도 아닌 그런 세계인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의 쓰레기에요. 우리가 좋다고 지금 악착같이 살려고 버티는 이 세상이 사실은 쓰레기 더미에요. ( )라는 나라는요, 그 쓰레기 때문에 몸살 앓고 있습니다. 세계의 플라스틱이 2.2%가 가루로 강을 통해 바다로 흘러나오는데 오염의 나라죠, 배수 시설도 안 되어 있고.
이 세상이 바로 천국에서 버린 세상이에요. 쓰레기로 버린 세상이라고요. “나가.” 해서 주께서 쫓아낸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쫓겨날 때 그들은 생명나무 먹지도 못하고 쫓겨난 거예요. 생명나무 차단시켜 놓은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생명이 없어요. 생명이 없으니 이미 죽은 채로 에덴동산에서, 낙원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추방되고 난 뒤에 그들이 고집 있게 열심히 살아보자고 애를 썼는데 주님께서 약을 올리십니다. “네가 살려고 땀 꽤나 빼지? 소용없어. 네가 목숨 붙어있으면서 계속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도 결국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 라고 단언을 해버렸습니다. 망할 인간이 망해야지, 당연한 거지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천국으로 갈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도리어 이상한 일로 여겨야 해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줄다리기 게임을 할 때 나로부터 줄이 멀어지면 나보다 더 센 힘이 나에게 작용하는 힘이 있다고 느끼시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붙들려고 하는데 내가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 내가 나를 붙잡을 수 없어요. 빼앗긴 것 같아요. 복 된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거 복이에요.
쓰레기 같은 나에게 나를 맡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복된 겁니까? 이것은 복 되고 신기하고 희귀한 일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하고 고집부릴게 아니에요. “내가 믿습니다.”로부터, 나로부터 벗어나야 돼요. 믿습니다, 하는 것은 나를 붙들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거든요. 그 몸부림조차도 통하지 않는 곳으로 내가 내 자아와 점점 더 멀어져 가고 끊어져 가는 느낌, 아주 센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성령이 오셨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했을 때 그 취지를 몰랐는데 그 때 뒤늦게 참여한 도마하고의 이야기에서 성령 받았다는 말은 바로 보지 않고 믿는 게 성령 받은 거예요. 그 전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도망쳤던 이유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도망친 거예요. 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세상에서 밥 먹고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 그 고집. 살아남으면 성공이고 못 살아나면 인생 실패다, 그것이 압력으로 꽉 작용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런 쪽으로 해서는 이 쓰레기 속에서 탈출이 불가능하거든요. 구약 성경에 다 망했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런데 구약 성경이 다 망하면서, 이스라엘이 망하면서 그 가운데 선지자와 선지자를 따르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이야기 한 거예요. 그 선지자 기능이 바로 장로 기능이고 감독 기능으로 거기 자리에 둔 겁니다.
이제부터 어려워요. 굉장히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지금 시작됩니다. 그러면 분명히 제가 전제를 했어요. 성령이 오게 될 때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 되다. 보지 않고 보이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개종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믿음이냐 믿음 아니냐를 묻지 않는 세계가 이 세상이에요. “돈 얼마 있어?” 그걸 묻지 “믿음 있어?” 이걸 세상 어디에서 묻습니까?
삼성이나 엘지 입사할 때 “믿음 있어요?” 이걸 왜 물어요? “능력이 어느 정도 있습니까?” 이걸 묻지. 이 세상은 믿음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복음이 딱 접하게 되면, 복음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이 세상 자체에 믿음이 있다는 것이 발견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은 이미 종교인들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왜? 성령이 없기 때문에. 성령이 없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이 세상이거든요. 성령이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게 다에요.
뭐 마음에 안 들면 금식하면 되니까. 고집부리면 되니까. 복음이 접했을 때는, 울산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지 않아요. 하나님은 자기가 보내준 성령과 만나요. 하나님은 성령과 만나지 이 쓰레기 같은 우리 만나서 뭐 할 건데요? 몇 번 만나봐야 이렇게 만나도 쓰레기 저렇게 만나도 쓰레기. 앞을 보자 쓰레기 뒤를 보자 쓰레기, 뭘 봐도 쓰레기인데 쓰레기 만나서 뭐 할 건데.
성령을 집어넣고 성령과 주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럴 때 복음이 찾아오게 되면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이 가만있지 않고 움직이게 돼요. 가브리엘 천사가 왔을 때 마리아가 임신했고요, 친척인 세례요한의 엄마가 배 불룩해서 6개월 뒤 임신한 마리아보고 이야기 할 때 뱃속의 아이들끼리 같이 반응을 나타냈다,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오셨다는 건 하나님이 별을 주었다, 달을 주었다, 해를 주었다, 그러니까 해와 달과 별과 자연과 바다와 바람과 육지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 그러니 하나님이 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식으로 오려면 무엇으로 와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직접 주시는 거예요, 말씀을.
눈으로 봤던 나라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31장 33절에서 34절에 눈에 보이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에요.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마음속까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는 해와 달과 별의 그런 것 가지고 마음이 동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그럴 때마다 호들갑 떨 거 없다는 겁니다. 직접 마음속에 어떤 것에 의해서 반응을 나타내는 식으로 이 마지막 때에 작용하는 거예요.
눈으로 보여서 하나님께서 뭐 이방 나라 쳐들어온다, 약속의 땅에 젖과 꿀이 온다, 뭐 외양간에 소가 많고 포도나무가 잘 되고 그것은 눈에 보이는 옛날 구약 시대에나 따져라 이 말이에요. 그 따졌던 그들 다 망했잖아요. 눈으로 보는 것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그들 다 망했어요. 말씀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눈으로 이스라엘 망했죠. 바빌로니아 나라에 망했습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바빌론의 마지막 왕이 벨사살인데 그때 이야기입니다. 벨사살이 눈에 보이는 기명, 제사에 쓰는 물건들을 탈취해왔죠. 3절에 보면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성소 중에서 취하여 온 금 기명을 가져오매 왕이 그 귀인들과’ 파티를 열었다는 말이죠, 술을 마시고 4절에 “그 금,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눈에 보이는 신들을 찬양하는데 5절에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썼다고 했어요.
그 손가락 어디 있습니까? 없죠. 손가락은 없어요. 쓰고 없어져요. 하지만 그 손가락이 쓰는 데 왕이 보니까 글씨가 거기 박혀있게 된 거예요. 25절에 보면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부족하다, 부족하다, 그리고 너 짤렸어.’ 그런 내용이에요. ‘넌 부족해, 부족해. 너희 나라 물 건너갔어.’ 그런 내용이란 말이죠.
이 글자 안에 마지막이 들어있습니다. 마지막 종말의 사태가 글자 안에 들어있어요. 글자 안에 마지막이 담겨 있고, 그 글자 안에 최초의 것이 담겨 있어요. 그러면 감독과 장로의 역할은 뭐냐?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중간 상태를 최후의 상태 그리고 최초의 상태로 늘 되돌아가게 만드는 그 역할을 선지자 같은 장로와 감독이 해야 된다 이 말이죠.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등장했던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모세와 엘리야에요. 모세와 엘리야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사람하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누구하고 하느냐? 예수님과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 세상을 언제 끝장내십니까?” 그 이야기 한 거예요.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겁니다.
세상은 쓰레기예요. 그러면 최후의 모습이 뭐냐? 쓰레기가 쓰레기로 드러나는 그것이 이 세상 최후의 모습이고 그때까지 세상은 겨우겨우 지금 버티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최초의, 창세 전에 있었던 최초의 인물이 최후의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 땅에 방문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 세상 말고 믿을만한 다른 세상이 없어요. 이 세상을 믿는 믿음이 그들의 종교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것은 거기서 개종한 거예요. 이 세상을 믿지 않기로 개종 된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다녀가시면서 세상 사람에게 어떤 발언을 했기에 세상은 예수님을 용서하지 않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냐? 이 세상이 용서하지 않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예수님이 다녀갔던 이 세상에 태어나 같이 살면서 세상이 용서하지 못할 발언들을 쏟아내는 자가 성도에요. “너 나 용서 안 할 거지? 그렇지?” 뻔히 알면서 그 발언들을 쏟아내는 겁니다. “이게 죽을라고!” 세상이 그러겠죠. 그럼 “죽여라, 죽여라!”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성도가 용서받는 것은요, 용서받지 못할 발언들로 인하여 세상에서는 용서받지 못하고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을 아셔야 돼요. 인간은 어지간하면 용서해요. 인간에게는 배려심과 자비심이 있어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나쁜 생각 안 하고 나쁜 사람 안 되려고 그렇게 아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게 이 세상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인간들의 자비심을 끝까지 건드려요, 인간의 자비심을. 아, 참 못 됐죠, 주님이. 요 근래에 흉기 가지고 설쳐대는 인간들 있잖아요,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데 흉기를 가지고 설칠 때 그 앞에서 30cm 플라스틱 자 가지고 덤비면요, 흉기든 자가 같잖아서 웃겠죠. ‘뭐 자 가지고 나한테 덤비려고?’
그런데 흉기 들고 덤빌 때 야구 방망이 들고 딱 등장하면요, 흉기는 25센티, 야구 방망이 1 미터, 이게 뭐 게임이 되겠습니까? 쥐어패면 되지. 도망치죠. 이 세상에서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살기 위해서는 인간은 도덕으로 나와요.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는 내 마음, 그게 자비심이에요. 남에 대한 배려심입니다.
이렇게 자비심과 배려심을 옹호해주고 그것을 우대하는 이 세상. 서로서로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이게 짐승이 아닌 가장 고상한 인간다움으로 그것이 인정받는 이 세상, 그 세상을 이기고 탈출하려면 도덕으로 나가야 합니까? 저쪽에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 내 몸으로 자비를 베풀어서 결국 내가 믿을 건 내 몸뚱이밖에 없고, 내 마음밖에 없다고 믿는 그 흉기에 대해서, 그걸 흉기라고 하는 게 이상한데, 그 흉기에 대해서 ‘나도 착해’ 하고 되지도 않는 자기 착함 가지고 대결하면 그걸로 이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안 되죠. 그래서 인간들이 이 세상을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남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참, 사람 괜찮은 사람이네.” 이 소리 듣고 싶은 거예요. “참 저 사람 훌륭하다. 희생할 줄 알고 참 훌륭하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는요, 가장 좋은 것은 위에서 와요. 이 땅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대한 신앙, 신앙이 있으면서 교회 나왔다, 이 세상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종하지 않고 이 세상도 믿고, 교회도, 하나님도 믿겠다?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선지자에게 걸리면 불신자로 들통나는 거예요. 뭐냐 하면, 자신을 손질해서 그 자신을 천국에 올려보내려고 세상에서 하는 행세 가지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다루는 거예요. 철저하게 자기 관리 하는 거예요.
‘6일 동안 세상에 나가 열심히 살고, 하루 동안 열심히 교회 나와서 봉사하고 자, 이만큼 관리했으면 괜찮잖아.’ 그게 자기 몸뚱이를 여전히 믿고 있다는, 세상 보기에 진짜 신앙이지만 주님이 보기에는 전형적인 불신앙이에요. 그러면 세상에서 도덕 들고, 도덕적인 행위 들고 나올 때 여기서는 뭘 가지고 나오느냐? 죽음과의 약속입니다. 죽음과의 약속.
죽은 자와 약속한 거예요. 우리 예수님과 약속한 거예요. 산 자와 약속하면 그것은 천국에서 불신앙이지만, 죽은 자와 약속하면 천국에서는 그걸 유일한 신앙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 따라 가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발언들을 쏟아내면서 그 자비심 많은 인간들로부터 기어코 용서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면, 그 죽으신 분의 죽음이라면 나는 죽으신 분과 약조를 맺고 나는 세상과는 약조를 맺지 않겠습니다.’
붉은 댕기 하나 들고 “이 붉은 댕기, 내가 널 찾으러 다시 올게.” 장현이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남궁민이가! 모르죠? <연인>이라는 드라마를 봐야 알지. “내가 청나라 갔다가 다시 올게.” 기어이 와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랑 결혼 해버리고.
제자들에게는 성령 주시고 돌아가셨잖아요? 우리에게는 죽고 난 뒤에 성령이 오신 거예요. “쓰레기지만, 쓰레기 속에 너를 그 쓰레기로 다시 살릴 수 있는, 내가 다 이루었다, 를 네 속에 집어넣을게. 너도 나처럼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할 말, 발언만 내뱉고 살아라.” 세상이 어줍잖게 자비를 베푸는 데 구멍을 뚫어놔야 해요.
사도행전의 그 대목, 후딱 지나갔습니다만 20장 28절, 교회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거예요. 피라는 것은 죽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게 피거든요. 교회는 뭐냐?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이 약속으로 남겨진, 죽은 자가 남긴 유산이 교회에요. 따라서 교회 들어온 사람은 죽은 자와 약속한 사람들이에요. 내 살과 내 피가 생명인 것을, 그걸 아는 자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면 감독 된 자와 장로 된 자의 역할은 뭐 간단한 거죠. 뭐냐? 바로 발 한 쪽을 세상에 딛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하는 그것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들이 장로와 감독입니다. 그 점이 오늘 본문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 점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히브리서 5장에 나옵니다.
5장 12절에 보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보면 사도가 초보에 해당되는 사람과 장성한 사람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보에서 장성한 사람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되는데 누가 가르치느냐는 거예요. 그 누구가 누구냐 그 말이지요. 그 누구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오늘 나오는 감독과 장로들이 바로 그들이어야 돼요.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을 가르쳐서 세상에 빠진 사람과 이미 영원히 천국에 갈 사람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감독과 장로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감독과 장로는 누구냐? 이게 누구냐가 아니에요. 이게 어려워요. “감독과 장로가 누가 되면 됩니까?”가 아니라 “어떤 움직임을 보이면 됩니까?”로 말을 고쳐야 돼요. 어떤 움직임을 보이면 되느냐는 거예요. 어떤 움직임을?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한테 소유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누구 특정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소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소유입니까?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울산 강의에서 다윗이 오해한 것은 하나님을 소유하려고 성전 지으려고 한 거예요. 그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지은 집에 내가 왜 굳이 있어야 되느냐?”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요. 네가 지금 누굴 소유하느냐 이 말이죠.
인간들의 자아 형상은요, 반드시 뭘 소유해야 자아가 돼요. 내가 끌어모은 게 있을 때 그게 ‘나’가 된다고요. 그게 하나, 둘 없어지게 되면 사람은 자살 충동을 느껴요. 내가 지금까지 끌어모았던 것을 이렇게 동그라미 치고, 제가 울산 강의에서 그릇에 담는다고 했는데, 짬뽕 그릇에, 담아버리면 이게 자아가 돼요.
그런데 자아의 것이 돈이든 뭐든 명예든 간에 그게 우세스러운 일에 빠져버리면 사람은 내 자아가 무너지는 걸 견디지를 못해서 과거의 내 자아다움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자기 목숨을 끊어버리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이게 허망 된 일이에요?
옆집의 할아버지가 우리가 이사했을 때부터 20년을 살았는데 며칠 전, 지난주에 돌아가셨다고 했죠.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남아 있는 할머니가 제일 먼저 하는 행위는, 영감님이 가지고 있던 가구 다 갖다 버리는 거예요. ‘너는 너고 이건 내 집이야.’ 가구부터 냄새나는 거 하여튼 흔적은 다 치워버려요. 어제 1톤 트럭 와서 다 실어갔습니다, 깔끔하게.
인간은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 누구와도. 심지어 개하고도 함께 있지 않아요. 오직 내가 내 소유라고 지명한 것만 남아 있고 그 외는 다 내 보냅니다. 그런데 인간이, 다윗이 하나님을 소유하려고 했어요. 하나님은 “넌 날 소유할 수 없다.”
그러면 누가 깨져야 합니까? 다윗이 깨져야죠,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나를 버리든지 하나님을 버리든지…, 이게 소유할 수 없으면 내가 될 수 없거든요. 내가 구원받으려면 성령을 소유하든지 말씀을 소유하든지 하나님을 소유해야 하는데, 이게 일반 교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거란 말이죠. 모든 교회가 다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이나 말씀이나 성령은 소유 대상이 안 돼요. 그러니까 누가 깨져야 되는가? 내가 깨져야 돼요. 내가 깨지면 내가 내 손으로 손질해서 천국에 올려보낼 내가 없어지는데요? 이걸 어찟까, 전라도 말로 어찟까? 어쩌면 좋아요, 이걸. 주님께서 감독과 장로들과 성령을 보내셔서 인간의 짧은 생각과 주님의 긴 생각을 비교시키는 겁니다. ‘네가 성령을 가지고, 하나님을 가지고 내가 구원받겠다’는 것은 그게 짧은 생각이에요, 짧은 생각.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소유해서 구원받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막을 만들어요. 막을 만들어서 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선택될 자, 구원될 자는 구원하고 구원받지 못할 자는 구원 받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장성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건데 히브리서 보게 되면 6장에는 맹세 나오고, 7장에는 장성한 자의 그 내용이 나와요. 이게 멜기세덱입니다. 히브리서 5장 11절에 보면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어디까지 장성해야 되느냐 하면, 멜기세덱 알면 너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다, 이 뜻이에요. 멜기세덱이 오기 전까지는 초보인데 이 초보는 그냥 두지 않고 선지자들 보내고, 감독과 장로들을 보내서 말씀으로 너희를 가르쳐서 너희로 하여금 장성하게, 신앙이 자라나게 내가 조치를 해주겠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이 시간에 멜기세덱에 대해서 우리가 알면 되죠. 알면 되는데 그 멜기세덱이 뭡니까? 멜기세덱, 사람 이름 같은데 네 글자인데 이게 뭐냐? 처음과 끝을 같이 함께 품고 있는 분이에요. 처음과 끝을 함께 품고 있는 분이 멜기세덱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의 그림자가 뭐냐? 이스라엘 역사의 열두 지파에요. 이게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왜 이스라엘 한 지파, 두 지파가 아니라 열두 지파냐? 멜기세덱이 품고 있는 내용이 역사 속에 펼쳐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멜기세덱에 대해 히브리서 7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없다, 가 몇 번이에요? 없고, 없고, 없고, 없고, 없고 다섯 개 나오죠.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게 멜기세덱이에요.
그러면 멜기세덱과 대비되는 이스라엘은 변화를 겪어야 해요. 있고 없고, 있고 없고, 있고 없고, 를 반복하고 되풀이해야 돼요. 장로인데 장로 됐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는데 또 장로 생겼고, 감독 있는 데 없어지고 잘리고, 그 잘린 자리에 감독 또 들어오고. 그러니 감독이나 장로의 자리는 누구 하나 소유하는 자리가 아니라, 목사도 마찬가지예요. 요새는 합쳐서 목사라고 하는데, 그거하고 똑같이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는 거예요. 이게 움직임입니다, 움직임.
제가 6월 말에 제주도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행하면서 마지막에 본 관광지가 엉또 폭포에요. 엉또 폭포.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멍또 폭포? 아니 엉또 폭포. 발음 안 좋은데 거기다가 엉또 폭포? 외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껏 외운다는 게, ‘엉뚱하게 폭포 되는 곳.’ 폭포가 되었다가 안 됐다가, 그 폭포가 그렇거든요.
비 오면 폭포 되고 비 안 오면 폭포 안되고. 엉뚱하게 폭포 되었다가, 안 되었다가. 그래서 ‘엉또’, ‘엉뚱하게 또, 또 폭포야’ 그래서 ‘엉또 폭포’ 엉뚱하게 폭포 되었다, ‘엉또 폭포’ 저는 그렇게 외웠습니다만 원래의 뜻은 ‘엉’이라는 것은 바위라는 뜻이고 ‘도’라는 것은 그 바위 쪽으로 가는 길, 그래서 합해서 제주말로 ‘엉또 폭포’ 그렇게 하든 말든 나는 내 식으로 외울 거예요.
반복하고 되풀이되는 가운데서 천국이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 세상의 현상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고정된 천국이라는 것은 나타나지 않고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마태복음 20장 1절에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이걸 보세요. 천국이라고 해놓고는 이걸 움직임으로 표현한다고요.
마태복음 22장 1, 2절에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이게 움직임이에요 움직임. 마태복음 25장도 마찬가지예요. 1절에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인간은 자꾸 이 땅에서 온전한 것을 소유함으로써 천국을 확정 지으려는 경향이 있어요. 내가 천국을 소유함으로써 나는 천국 간 자아가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천국은 그 자아를 해체시켜 버려요. 천국은 네가 소유하는 용도가 아니고 오히려 천국을 소유하려는 너를 해체시키고 부숴버리고 와해시키는 그 작용이 바로 천국입니다.
누가 주인공인지 누가 거기에 후달리는지 구분을 하셔야 돼요. 그뿐만 아니지요. 마태복음 13장에는 우르르 쏟아지지요. 마태복음 13장 31절에 보면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그다음에 33절에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45절에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7절에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다시 말해서 천국은 움직임을 보이는데 어디서 어디까지 움직이는가?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그 움직임 안에, 말씀 안에 다 품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너 처음으로 안 돌아갈 거야?” 또는 “너 마지막으로 안 돌아갈 거야? 너 이미 끝났어! 너 죽은 자와 약속했잖아. 왜 중간과정 거기에 대해서 자꾸 미련 갖고 집착갖는 거야? 너도 중간과정이야. 너 믿지 마. 너는 시작도 아니고 끝이 아니야. 그 멜기세덱이 시작과 끝이야. 너 아니야. 중간에 있으니 왜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아. 어린아이 같아, 생각하는 것이!”
기후가 안 좋다, 어쩌나, 나라가 경제가 어려운데 어쩌나, 태풍 부는데 어쩌나, 태풍으로 돼지 250마리가 다 떠내려갔는데 나 이제 어쩌나, 나는 이제 죽을 거야……. 이게 뭐냐 하면, 소유로서 자기를 표현하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가 발생 되는 거예요. 어쩌나, 어쩌나, 어쩌지, 왜, why me,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이게 전부 다 중간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께서,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 못 하고 소위 교회 왔다는 교인들이 세상에 휘둘리는 겁니다. 세상 신앙인인지 천국 신앙인인지 구분도 안 되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확실한 것을 우리가 또 붙잡아야 되지 않습니까?” 붙잡는게 맨 소유지요. 그러면 붙잡지 않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같이 휘둘리면 되지요, 같이 휘둘리면.
마태복음 18장 21절에 참 좋은 말씀 나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할 때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그러니까 이것은 490번이 아니라 4,900이라도 해라 그 말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반복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죄를 반복하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히브리서 6장을 한번 보셔야 돼요. 히브리서 6장 4-6절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이 말씀, 야……, ‘만약에 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진짜 믿었다면, 그다음에 네가 다시 왔다갔다 하면 너는 완전히 잘렸어.’ 그런 이야기거든요. ‘천국? 이제는 생각도 하지 마라. 너는 이미 잘렸어.’ 한번 타락한 자는 다시 새롭게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아까 본 마태복음 18장 21절, 490번, 만 번이라도, 천만번이라도 용서해줘라, 하는 이 말씀과 한 번 타락하면 다시는 안 받아준다는 이 말씀이, 어떻게 이 두 말씀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있느냐, 이것이 바로 움직임으로 나의 확고한 존재를 대체하면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조화가 안 되는 이유가 자꾸 ‘나 천당 가요, 지옥 가요?’ 자기 존재에 대해서 포기를 못 하고 있으니까 이 두 개의 쌍날, 욕하는 것 아닙니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칼날에 의해서 종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봐도 나 천당 가는 것만 신경 쓰고 있으니까, 그게 최종적이니까요. 우리는 최종적이 아니고 멜기세덱이 최종적이에요. 우리가 시작이 아니고, 내가 시작이 아니고 멜기세덱이 시작입니다. 우리는 멜기세덱이 왔다 지나가는 하나의 중간과정에 불과한 거예요. 그 중간과정에서 열두 지파 이스라엘이 다 망했던 겁니다.
망하는데 그 망하게 하는 그 말씀의 움직임, 그 움직임에 의해서 구원받을 자는 구원받는 거예요. 나 위주로 살아가는 인생은 망했는데 나를 망하게 한 그 말씀은 망한 나를 살려주는 거예요. 그 말씀의 움직임 따라서 같이 내가 요동치고 움직여 가는 거예요. 이걸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세포막입니다. 세포막은 이중층으로 되어 있어서 양면을 보여줍니다. 세포 바깥에 있는 물질과 세포 안에 있는 물질 사이에 ‘인지질’이라는 층이 있습니다.
그게 머리 부분인 친수성(물과 친한)과 그리고 물을 배타하는 소수성, 그 두 부위가 이중으로 딱 붙어있어요. 나란히 붙어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꼬리-머리-꼬리’, 가 아니라 ‘머리(친수성)-꼬리(소수성)-꼬리(소수성)-머리(친수성)’, 이런 형식이라는 말이지요. 막이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한번 들어온 것은 절대로 바깥으로 못 나가요.
그래서 천국의 특징은 뭐냐? 절대로 하나님께서 구원시켜주는 자는 천국에 못가는 일이 없게 만드는 막이 있어요. 구원된 자는 타락 아니라 천 번을 타락해도 절대로 천국에서 내보내지 않아요. 그리고 동시에 지옥에 온 사람은 절대로 천국 가는 법이 없게 만들어버려요. 이중막이 되어서. 말씀에는 두가지 기능이 있어요. 하나는 말씀이 당기는 기능과 또 하나는 말씀으로 발로 차는 기능이 있어요. 천국과 지옥이지요. 세포막의 친수성(親水性, Hydrophile) 소수성(疏水性, Hydrophobe)처럼.
한쪽은 말씀이 당겨주는 쪽, 보지 않고 믿는 거지요. 말씀으로 당겨주는 것과 그리고 말씀으로 ‘너 오지 마’하고 미는 것, 그것은 그 주체가 말씀에 있어요. 그래서 한번 구원받은 자는 타락할 수 없고, 한번 타락한 자는 구원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층이 두 층이 있는 반면에 세포막에는 통로가 또 두 개 있어요.
이게 어려워요. 하나는 막 단백질이라 해서 통로가 마련되어 있어요. 이 통로로는 큰 물질, 이온이라든지 아미노산이라든지 이런 큰 물질이 들락거리는 통로에요. 그리고 작은 것, 산소, 탄산가스, 인지질을 통과 못 하는 것, 물과 친해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작은 물질이 통과하는 통로, 이렇게 통로가 두 가지가 있거든요.
하늘나라에도 통로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의 통로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길이 되신 통로가 있어요. 예수님이 길이 되신 통로인데 그것은 천 번을 들락날락해도 괜찮아요, 천 번을. 왔다 갔다, 교회 나왔다 안 나왔다, 삐졌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왔다가, 그런 식으로 해도 주께서는 아무 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들락날락하는 그 문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은 문이기 때문에 들락날락하는 그 인간이 애써서 통과한 문이 아니에요. 인간의 행함으로 열린 문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했기 때문에 그 들락날락하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항상 예수님 바라보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문의 특징이.
베드로가 말하기를 “몇 번 용서합니까?” 할 때 “일흔 번의 일곱 번, 490번이라도 용서해야 된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용서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용서할 그것은 멜기세덱 처럼 단회적입니다. 십자가는 단회적이에요. 이미 시작과 끝은 예수님에게 다 있어요. 예수님이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에요.
그 단회성, 한번으로 끝났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의 특징은 매일 들락날락해야 돼요. 나를 쳐다보는 인간은 기껏 들락날락, 자기 혼자 회개했다가 다시 구원받았다가, 좋았다가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다가 또 세상 만나면 좋~다고 훅 빠지고, 이걸 이렇게 하면서 ‘왜 주님께서 나와 상대하지 않는지’를 갈수록 더 감사하는 것이 이게 성도의 역할이에요. 그게 말씀의 역할이고요.
말씀이 우리를 장악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때려버리면 우리에게 성령이 있기 때문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면서 말씀이 오지 않았을 때는 자기 잘난 체를 하면서 ‘나 이만큼 소유 있다.’ 하다가 말씀이 오고 난 뒤에 ‘주여, 이것이 죄군요.’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 이루셨음의 말씀을 보지 않고 내 힘으로 신학을 연구하고, 성경을 바삭하게 다 알아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디에 걸리느냐 하면, 한번 타락한 후에 두 번다시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 대목에 다 걸려 넘어가는 거예요.
히브리서 6장 6절에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걸 보고 소위 신학을 하고 성경 많이 보고 자기가 자기 손질해서 천당 가려는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에~~~, 이건 초보잖아!”라고 이야기해요. 이건 초보다. 십자가를 초보라고 이해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초보는 뭐가 초보냐 하면, 히브리서 6장 1절에 나와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내 힘으로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그래서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어떤 경우라도 계속해서 자기한테 집착해야 되고 자기 행함을 가지고 자기를 구원하는데 진력을 다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저쪽에서 흉기 들고 나오는데 지는 줄자 들고 나가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도덕 들고 나오는데 ‘나는 너보다 더 착한, 더 선하고 더 착했다.’ 이거 들고 천당 가려고 나서는 인간과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열두 지파가 레위 지파로 시작했거든요. 레위 지파로 시작했다가 레위 지파가 타락하고 난 뒤에는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가 남북으로 갈립니다. 나중에 둘 다 다 망해요. 열두 지파는 다 망하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내 편이고 우리는 하나님으로 산다고 여기는 자들, 그 나라 다 망했습니다. 나중에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멜기세덱,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만이 구원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날 쓰레기같은 우리, 맨날 들락날락 하는 우리 자신을 만들었음을 도리어 감사하는 사람, 도리어 고마워하는 사람, 우리는 늘 망해도 할 말 없는 사람으로 알게 된 것을 도리어 감사하는 사람, 주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 이것, 이런 이야기, 세상이 이런 발언하는 우리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기뻐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개종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이루었다는데, 다 이루었으니 이제부터는 내 것 챙기려는 새로운 시도가 또다시 우리 속에 벌어지는 것을 감지합니다. ‘천국은 갔으니까 이 땅에서 내 포부나 내 소망이나 이루어보자’는 그 심보, 필히 일어나야 될 죄고 주께서, 성령께서 말씀으로 그 죄를 때려주시니 다시 한번 주께서 다 홀로 다 이루심이 어떻게 그렇게 고맙고 감사한지, 하나님, 늘 들락날락거리면서 주께서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신 주님의 십자가 피만 자랑할 수 있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