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사랑 안의 사람들

아빠와 함께 2023. 8. 20. 18:05

사랑 안의 사람들

2023년 8월 20일                디모데후서 4:19-22

(4: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4:20)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4:21)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4:22)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사도 바울이 한참 복음을 여러 민족에게 전할 때, 함께 일했던 자들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습니다. 사도에게 많이 협조하고 후원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활동상을 우리가 들었다고 칩시다. 그래서 오늘날도 우리가 이래야 된다는 말일까요? 사도와 이들 사이에는 흔한 인간 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에게 하신 이와 같은 말씀의 실현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사람들의 육신에는 눈이 박혀 있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중에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일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확증합니까? 사도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육신이 다가 아닙니다. 모든 육신의 배후에는 ‘악한 영’이라든지 아니라면 ‘거룩한 영’이 배후에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디모데 보고 ‘겨울이 오기 전에 오라’는 겁니다. 그냥 나와 너의 관계에서 오라는 것이 아니라 너의 배후에 계신 분과 나의 배후에 계신 분을 같이 만나게 하자는 겁니다. 너와 나 둘 다 동일한 거룩한 영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겁니다. 성령의 활동이란 항상 배후에 있는 악마의 활동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작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실망을 느끼고 떠난 후에 성령께서 찾아오셨습니다.(오순절 성령) 이는 제자들의 한계를 드러내는 경우가 먼저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한계입니다. 그 어디에 가도 자기 밖으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항상 최종적으로 자기에게로 돌아옵니다. 이는 곧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으려 합니다. 자신이 손해보는 일이 없도록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따라서 그 누구를 만나도 ‘우리’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5:22에 대한 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갖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번에는 남편들이 거부반능을 보입니다.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육신이 전부인줄 알고 말씀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란 곧 자신에 대한 자신이 완전하게 절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신을 믿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이 인간으로 하여금 결코 “네 자신을 놓치지 말라”고 독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거짓입니다. 원래 인간이 이만큼 사는데 필요한 에너지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본인에게 걱정하거나 염려할 권한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본인이 본인을 이만큼 키워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수시로 염려고 걱정하는 겁니까?

그것은 악마가 선악체계의 책임자로 인간을 집요하고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 대해서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직도 배 12척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배 12척도 불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누가복음 12:49에서는 더 과격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일체의 희망과 소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우리’가 형성되지 못하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의지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개인 의지는 선악체계 안에서 움직입니다. 자신을 보고 선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율법 자르기’에 나섭니다. 자신이 지킬 만한 것과 못 지키는 것을 임의로 잘라내는 겁니다. 아이가 우는 것은 순전히 자기 자신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탄식하고 분노하고 격분하고 우는 것은 자신의 독자성에 차질이 생겼음에 실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인간의 한계 너머로 불러내십니다. 그 방식은 선악체계가 아닙니다. 사랑의 구조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잡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근처 수풀에 양을 한 마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잡을 직전,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살해서 멈추게 하시고 양을 대신 잡아 죽이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이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양이 왜 죽어야만 했는가’를 생각해야 되고 바로 이 생각만이 우리 안에 있어합니다. 다른 생각들은 다 내어쫓아야 합니다. 로마서 8:32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고 되어 있습니다.

이 ‘내어 주심’만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 사랑의 감시하거나 측정하는 제 3의 인물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를 위해 사랑하는 당사자마저 그 사랑 안에서 상실되어야 하는 겁니다. 자꾸만 자신의 행한 것을 기억하고 거기에 의미를 두는 우리 자신은 살아남아서는 아니됩니다. 계속해서 상실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어린양의 희생’으로 온전한 상황에서 성도 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더 지킬 미완성은 없습니다. 모든 말씀이 십자가로 인해 완성입니다. 바로 이 말씀 ‘말씀 호흡’으로 인해 죽은 자도 삽니다. 성도는 주어진 모든 사정이 주님께서 어린양의 희생만을 드러내는 상황으로 인정해서 열심히 자신에게 절망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더는 믿지 말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8강-디모데후서 4장 19-22절(사랑 안의 사람들)230820-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4:19-22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명단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대충 어떤 사람인지 주보 뒤 ‘바울의 사람들’에서 요약한 것이 있습니다. 그걸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브리스길라(여자), 아굴라(남자)는 이들은 고린도에서 천막업을 한 부부입니다.(행 18:1-3) 평일에서는 사도바울과 더불어 천막을 제조하고 안식일에는 바울을 도와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디모데후서 1:16-17에도 오네시보로가 나옵니다.“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당시 헬라 세계에서 복음은 미련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바울은 이러한 복음으로 인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고 모든 사람이 바울을 배신하여 떠나간 상황속에서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점이 놀라운 겁니다. 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세상이 안겨주는 수치를 극복하는 것이 복음의 현재적 능력입니다. 이 사람은 에베소에서도 사도바울을 섬겼습니다.(딤후 1:18)

에스드라는 고린도출신으로서 디모데와 한 팀이 된 사람입니다.(행 19:22) 드로비모는 에베소 출신으로서 예루살렘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 에베소 교인들의 헌금을 예루살렘까지 운반한 사람입니다.(행 20:4) 그는 또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유대인 무리에 의해 성전 내에서 급습당한 뒤,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는 무고한 원인이 됩니다.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보고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행 21:28)”고, 군중들이 오해하게 됩니다. 즉 이방인이 넘어서는 안 되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벽(엡 2:14)을 넘어서 이방인을 데리고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이제는 몸이 쇠약해서 사도가 밀레도에 머물게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끼리는 이미 천국입니다. 죽기 전부터 살아생전에 성도는 자아라는 한도를 넘어서 새로운 우리를 경험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죠. 그래서 뭐? 자, 이런 내용이 있다 칩시다. 그거 다 과거지사 아니겠어요? 지금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이야기입니까? 사도 바울 당시에 이런 일, 저런 일 있었다. ‘그래서 뭐?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여기서 우리가 이 점을 봐야 해요. ‘옛날에 사도 꽤나 고생했구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여기 끝부분에 “성도는 자아라는 한도를 넘어서 새로운 우리를 경험”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어서 오라고 이야기해요. 사도 바울 자기가 뭔데 오라 가라,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오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이유가 뭔지를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알아내야 됩니다. 인간은, 나와 너 사이는 ‘오라, 가라’ 명령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에요. 너는 너고 나는 나예요. 내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 일은 아니에요. 그들 일이죠. 도와줄 수 있지만, 관심 가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일은 아니잖아요.

인간은 ‘나’라는 한계에서 벗어난 적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나’가 절대 ‘우리’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예요.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이 나에게 오라고, 겨울 되기 전에 나에게 오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권한이, 권한보다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이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 ‘너희’라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방금 우리가 봤던 주보의 내용, 바울의 사람들에게 있었던 그때 그 당시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지금 우리한테는 상관없는 일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디모데후서 4장을 본다는 것은, 여기에 그들과 우리 사이에 ‘우리’라는 것으로 형성돼 있고, 그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미 천국의 백성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천국의 백성에게는, 천국 안에서는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오라.”가 성립이 되고 “가라.”가 성립이 돼요. 천국 안에서는. 그러나 지옥에서는 대화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죽을 곳도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은, 쉽게 말해서 나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도 지옥이고 죽어서도 지옥입니다. 지옥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나는 나다.” “그래서?” “그러니까 나한테 관여하지 마. 네가 뭔데 나보고 오라 해? 넌 너나 잘하세요.” 이 세상에서는 이게 충분히 통합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는 납득이 되고요. 하나님의 언어가 빠진 상태에서는 그게 납득이 돼요. 그런데 하나님의 심령이 같이 있고, 주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다면 이것은…,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까,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거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이거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 우리 육신의 한계를 발견해야 합니다. 인간의 육신은 눈이 달려있고 눈은 보이는 것이 전부예요. 그래서 믿는 것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요. 그게 육신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에 예수님과 함께 있고,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눈에 보이기 때문에 너는 나에게 겨울 되기 전에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속해 있는 세계가 내가 속해 있는 세계와 같은 세계이니 만나자는 거예요.

“너 말고, 눈에 보이는 너 말고, 너의 육신 말고 보이지 않는 아우라, 그 아우라 속에 네가 놓여 있잖아. 너 그거 믿잖아. 네 눈에 보이는 거 안 믿고 네 속에 함께 계신 분을, 그 세계를 네가 믿잖아.” 그걸 언급하는 거예요. 인간은 눈에 보이는 육신이 인간에게는 다예요. 과학적으로 관찰해도 다입니다. 다인데 이 육신이 이 땅에 살면서 이 세상에 의해 압박을 받게 되고 고문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은 인간에게 고문실이에요.

어릴 때 집안에 있으면 아픔이 없지만 커서 세상에 나오고 학교에만 나가도 그렇고요, 사회에 나오면 그렇게 아파요. 많이 아파요, 이 세상이.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에 보면 자기 씨족들끼리 모여서 살 때는 아프질 않았어요. 그런데 인민군 들어오고 또 국군 들어오니까 그 마을이 엉망이 돼요. 많이 아파요.

이것은 구조가 나를 이기는 겁니다. 내가 바르게 살고 싶어도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 구조가 나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나를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안 아픈 사람이 없어요. 다 아파요. 아프니까 아픔 가운데서도 살아남으려고 애쓰는데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꼬입니다. 더 아파요.

그 아픈 이유가, 이 땅이 벌써 예비적인 지옥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타인과의 대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면 끝이에요. 대화라는 것이 성립이 안 돼요. 왜? 말이라는 것은 나에게서 나왔고 나에게 돌아오는데 나 자체가 나라는 한계를 못 벗어나요, 나 자체가. 어딜 가도 마지막 챙기는 것은 나만 챙기기 때문에 내가 나를 못 벗어나는 그런 입장에서 내가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나 자체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상실하지 않기 위해 일하고 상실하지 않기 위해 말해버려요.

그 대표적인 예가 교회에서 바로 헌금이라는 겁니다. 헌금을 하는 이유는 의외로 자기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헌금을 해버려요. 왜냐하면, ‘하나님, 돈 한 오천 원 냈습니다. 나머지 돈은 내 겁니다. 손대면 안 돼요. 줄 거 줬습니다.’ 나머지 돈 가지고, 내가 그 돈 가지고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헌금하는 거예요. 뭐 헌금 안 하는 사람은 그것도 아까워서 안 하죠.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해요. 헌금으로 재산 반을 바치고 죽은 사람 있잖아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 반을 왜 남겨둡니까? 반이 있어야 내가 사니까요, 그 반이라도 있어야. 내가 나한테 유도리를 둘 수 있어요. 뭔가 있어야 자율성이라는 것이 성립이 돼요.

심지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상실하지 않고, 내가 손해 보는 것은 나의 내부에서 강렬하게 저항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우리에게 보내서 압박을 해버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네 배후에 악한 영이 있는지 아니면 네 배후에 거룩한 영이 있는지 그걸 파악하려고 하는 겁니다.

“너 지금 누구 말 듣고 그런 행동 했어? 너 누구 지시받고 그런 행동 했어?” 우리를 탓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육신 자체가 한계 지어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 바리새인 보고 그런 이야기 했어요. “너희 안에 진리가 없다. 진리가 너희 속에 없다.”고 이야기 했어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이것은 뭐냐? 예수님께서 우리를 볼 때 네 속에 진리의 영이 있는지, 다른 말로 하면 진리가 우리 안에 있는지 그걸 찾으시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에 있어서 예수님은 항상 ‘우리’가 안 됐어요. 우리가 된 적도 없고 될 수도 없고 될 능력도 없고, 예수님은 네가 되었어요. 그리고 제자들은 자기 자신인 ‘나’가 되고.

그러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볼 때 나와 너의 관계로 본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고 가면서 이런 취지로 이야기했죠. “너 나에게로 오라. 이 십자가, 내가 죽는 쪽으로 오라.” 하니 제자들이 다 배신하고 가버렸습니다. 안 왔습니다. 왜? 계산을 하거든요. ‘예수님한테 붙어있다가는 나도 망하는 수가 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데 사람들은 딱 들어보니까 예수님이 자기 예상외에 다른 길로 가고 있거든요. 제자들이 내뺐죠. 도망친 거예요. 예수님 있는 곳 근처에도 오지 않고 다 내뺀 거예요. 고기 잡으러 가자고 몇 명 가버리고요. 이게 인간의, 나의 한계에요.

나한테는 네가 보이고 너로 인하여 내가 보이고, 나는 나 밖으로 절대로 나가지 않고. 그게 육신을 가진 인간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성경을 볼 때도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떤 취지로 성경을 보는지 잘 헤아리기가 좀 곤란해요.

부부에 관해서 언급을 할 때 에베소서 5장 22절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렇게 딱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피해서 도망친 거, 도망쳤던 거와 똑같이 사도 바울이 “아내들이여,” 하는 순간 아내들은 다 사도 바울로부터 도망칩니다. 왜냐하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게 자기 생리하고는 맞지 않기 때문이에요. 자기 육신과는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을 딱 하게 되면 우리 내부에서 이렇게 나오죠. ‘어어어어어~! 안 들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교회에서 열심히 자기 목숨 바친 것처럼, 주신 것처럼 죽어라, 이렇게 하니까 ‘어어어어어~! 나 안 들었다. 자는 척해야지.’ 안 듣습니다. 우리 육신 자체가 거부해요. 이유는? 방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삽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되는 경우는 없어요. 어느 단체에 가도 ‘나’에요. 어느 집단에 가도 ‘나’입니다. 어느 집단에 가서 결코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취직해도 마찬가지고, 집안일에서도 마찬가지고, 어떤 경우라도 나를 잃으면 다 망한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나의 대한 이 한계를 ‘우리’, 우리로 옮겨오기 위해서 거룩한 영이 작용을 하시는데요, 거룩한 영이 작용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망하게 하는 거예요.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겁니다. 누구한테? 나 자신에게 절망케 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로든 빠져나오려는 내가, 바로 이 내가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그 앞에서 얼쩡거리며 방해 공작을 하는 그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만드는 거예요.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가야 하는데 십자가로 못 가게 만드는 그 요소가, 바로 내가 상실하지 않으려고 하는 나의 집착에 있는 거예요. 주님이 “야, 베드로야 같이 가자.” “주님, 일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누가 방해해요? 내가 방해하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네 배후에서 마귀가, 악한 영이 너로 하여금 그렇게 사주를 했다는 거예요. 네가 그 한계에서, 그 분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 성령께서는, 기존의 인간들이 못 빠져나온다, 자기에게 못 빠져나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시고 난 뒤에 일을 하시는 거예요.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게 만듭니다. 열심히 살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주의 뜻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뜻은, 열심히 살아야 인간은 이 세상에서 망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걸 기뻐할 수가 있어요.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난 기쁨.

인간의 한계는 내가 망하면 안 된다, 인데 성령께서는 망해도 괜찮아, 라는 그 선을 넘게 만들어버려요. 배 열 두 척이 문제에요. 그 배 열 두 척, 거북선 열 두 척 있잖아요. 그거 불타버려야 됩니다. 그것마저 없어야 돼요. 절망할 수 없는 게 뭘까,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노력하고 애쓰고 힘들면 내가 도저히 나로서는 안 되는, 내가 절망하고 잃어버리고 상실한다는 그 안 되는 일을 내가 어떻게 성취할 수 있냐는 거예요. 어떻게 나한테 큰 실망을 할 수 있는 어떤 그런 복을 언제나 받느냐는 겁니다, 그 복을.

내가 나한테 절망하는 복. 내가 믿어서는 안 된다는, 때려죽여도 절대 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내 노력과 내 지혜를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심지어 내 믿음도 내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걸 언제쯤 알까요? 성령이 오셔야 압니다, 성령이 오셔야.

그러면 그 선을, 그 절망의 선을 넘었다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상태가 될 때 ‘아, 나는 나의 절망마저 넘어섰구나. 주께서 그렇게 하셨구나.’를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바로 아까 요한복음 8장 44절의 말씀을 다시 드리면 ‘네 속에 진리가 없다’는 말은 네 안에 지금 마귀가 들어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볼 때 이렇게 봐요. ‘너는 지금 소경이다. 소경인데 소경 속에, 네 안에 진리 즉 말씀을 우리 속에 집어넣으면’ 돼요. 말씀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 말씀이 미완성이 아닙니다. 완성된 말씀이 쏟아져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굳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믿고 기대하고 소망을 가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한테 기대할 필요가 없다고요. 왜? 우리 안에 말씀이, 그것도 완성된 말씀이에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에요. 그걸 다른 표시로 한다면 ‘말씀보’, 제가 지어낸 용어지만 말씀보에요. 울음 잘 우는 아이를 울음보라고 하잖아요. 보가 주머니 같은 뜻 아닙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갖는 걸 다 긁어내고 거기에 말씀을 집어넣어서 말씀 보자기로 만드는 거예요. ‘말씀보.’ 그것도 우리가 손대지 않았던, 우리가 하지 않았던 그 말씀보로 다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말씀보 되려고 하면 성경을 또 몇 독 해야 되고, 성경을 도대체 몇 구절을 다 외워야, 다 외울 수는 없겠죠, 어느 정도나 몇 퍼센트를 외워야 말씀보라 말씀 주머니라 할 수 있느냐, 또 이런 걱정이 되죠. 자기에게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거 참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이 결정적인 말씀이에요. 로마서 8장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셨다’는 단어가 나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 백성 천국 백성 만들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는 일을 하셔요.

그러면 우리가 말씀 보자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은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 여러분 잘 아시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갑니다. 죽이기 위해서 가는 거죠.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시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네 아들을 내게 바치라, 해서 바치러 갑니다.

모리아 산에 제단 만들고 자기 아들 묶어놓고, 반항하니까 묶어놔야죠, 묶어놓고 칼로 찔러서 아들을 잡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됐다. 옆에 수풀을 보아라.” 수풀을 보니까 양이 한 마리 갇혀 있었어요. “그 양을 대신 잡고 아들은 풀어줘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대목을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뭘 생각하느냐 하면 ‘아, 아브라함 살았다. 이삭도 살았다.’ 사람들 사는 것만 신경 써요. 아브라함 살았다, 이삭 살았다만 생각하고 ‘휴, 역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야. 고마운 하나님이야. 살리기 위해서 양을 준비하셨구나. 여호와 이레’ 그래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왔잖아요. 그렇게들 생각하는데 그게 그 뜻이 아니고요. 반대로 해야 돼요. 누가 죽었는가에 관심이 있어야 돼요, 누가 죽었는가.

모리아 산에 가기 전까지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나 살았다, 가 주 관심사였다면 수풀 속 양을 잡고 난 뒤에는 ‘내가 살았다’를 좋아하지 말고 ‘누가 죽었다, 양이 죽었다.’에 관심을 두고 ‘양이 죽었다’가 진리로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말씀의 보자기가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절망에서부터 벌써 선을 넘어선 거예요. 우리가 망한다는 것을 넘어선 거예요. 당연히 망해야 되죠. 수풀 속의 어린 양을 위하여. 그건 당연한 거죠. 사람들 보면 걱정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있다는 말이 어폐죠. 다죠 뭐. 그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모든 에너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어요. 생존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는데 지가 왜 걱정합니까? 자기가 왜 염려하죠? “네 에너지야?” 네가 애써서 이만큼 살았어요? “너는 네 것도 아니잖아. 네가 만든 것도 아닌데 걱정을 왜 네가 하느냐?”는 말이죠. 우리는 걱정하거나 염려할 권한 자체가 없습니다.

수풀에 갇혔던 어린 양의 어린양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이 됐을 뿐인데 우리가 걱정하고, 우리가 염려하고 거기에 마귀에 놀아나 우리가 절망하고, 우리가 낙담하고. 무슨 권한으로? 무슨 권한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니 굉장히 괘씸하고 교만해요. 염려하고 걱정하는 자체가 교만하다고요. 어린 애가 우는 것은 자기의 때문에 울고 있는 거예요. 자기의 의 때문에, 자기 잘났다는 거예요. 그게 커서 어른이 되죠.

인간은 뭘 놓쳐버렸냐 하면, 피조물이라는 그 자리 자체를 놓쳐버렸어요.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네가 신이 된다고 이미 부추겨 놨기 때문에 피조물은 내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태어날 때부터 이미 마귀로부터 사주받고 있었습니다. 그 악마가 계속 인간 배후에 있으니까 따라서 성령께서, 주께서 일할 때는 악마가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켜서 일을 해 나가시는 겁니다.

일을 해 나가시는데 주님께서 이미 그 작업의 패턴을, 형태를 구약에서 이스라엘 통해 많이 알려줬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그 언급을 한 겁니다. 갈라디아서 수련회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요. 갈라디아서 4장 30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자, 여러분들이 성경의, 말씀의 보자기라 칩시다. 완성된 말씀이 여러분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여러분 속에서 지금 여러분들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을 살게 만듭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어떤 지시를 내리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29절부터 보면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은 내어 쫓는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거예요. 내어쫓는 일.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내 속에서 내가 나의 종이 되는 것을 쫓아내고 내가 주님, 하늘나라의 아들 된 것만 남기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종이라는 것, 우리 안에서 우리가 왜 종이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되겠죠? 그 종은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 보면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 자, 시내산이라는 것은 인간을 종으로 만들게 된 근거가 주어지는 데 그게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무엇과의 만남이냐 하면, 하나님은 따먹지 말라고 하고 악마는 따먹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말 듣지 않고 악마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따먹은 그것으로 인간이 어떤 신세가 되었느냐를 율법을 통해서 밝혀주는 거예요. 그게 율법의 종이 된 겁니다. 선악.

선악의 특징은, 우리가 등장하지 않고 오직 나만 있어요. 나의 의지가 전부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악해지지 않고 선할 수 있는가, 여기에 평생의 정신을 다 집약시켜 몰두합니다. 이게 종이에요. 이게 선악과의 종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어떤 체제, 선악과 체제의 종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 뭐냐?

율법을 가위로 잘라요. 성경을 가위로 자릅니다. 왜 자르느냐 하면, 가위로 잘라 자기가 지킬 것은 따로 뽑아내고 지키지 못할 것은 잘라서 옆으로 내칩니다. 아까 여러분이 보셨잖아요. 에베소서 5장 22절, 아내 된 자여 남편 대하기를 주님 대하듯 하라, 가위로 다 잘라버려요.

“어어어어어~, 난 안 들었다~, 못 들었다~!” 이렇게 자르는 이유가 그걸 자름으로써 자기가, 내 의지로 인한 행위가 선이 되고 악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선과 악 그 사이에 끼어서 어쨌든 악이 아니고 선 되고 의인 되기 위해서 나의 의지를 총동원시켜서 분투노력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지옥 가는 것을 배태하는 교회 모습이에요. 모든 교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교회의 특징이 그거에요.

수련회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런 뜻이에요. 유대교로부터 구원받았다고 보는 거예요. 사도 바울의, 그 율법을 가지고. 유대교가 뭐냐? 여러분이 이 한마디 들으시면 “이건 완전히 한국 교회네.”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유대교가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홍해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것을 표 내기 위해 그다음에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해야 한다.’ 이게 유대교입니다.

뭐 들어보니 여러분, 한국 교회 하고 차이가 납니까, 안 납니까? 안 나죠. 불교는 뭐냐? 불교 및 이방 종교와 이슬람은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줬다. 그러면 우리가 바르게,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구원받고, 그 믿는 마음으로서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피조물의 본분이다.’ 이게 바로 이방 종교에요. 이슬람 또는 불교 종교에요.

유대교는 달라요.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구원받는 거예요. 주께서 주신 것을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다음에 주신 말씀,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구원하신 하나님께 말씀에 순종해서 영광을 돌리자, 이게 바로 유대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나 이방 종교나 전부 다 나의 의지가 죽지 않았어요. 내가 나한테 절망하면 안 돼요. 내가 나에게 실망스러운 사람으로 인식되면 안 돼요. 나는 끝까지 가치 있는 인간, 의미 있는 인간으로 유지를 해줘야 하나님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보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거기서부터 그게 바로 종이라는 겁니다. 그게 선악 체제의 종이에요. 악마의 종이에요. 율법의 종입니다. 거기서 벗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벗어나는 방법은 뭐냐? 그 율법으로 철저히 너의 한계, 나는 도저히 나의 의지에서 내가 벗어날 길이 없는, 내가 마귀의 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선악 체제라는 그 굴레, 그 체계 자체에서 못 벗어나는 자라는 것을 네가 발견해야 한다는 거예요.

뭐로 발견하는가?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선악 체제의 대척 관계에 있는 구조가 사랑의 구조에요. 사랑은 2자 관계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통하는 사랑은 2자 관계가 아니고 삼자 관계에요. 세 존재가 개입해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지켜보는 나, 세 명이에요. ‘나는 너에게 사랑한다고 명품 가방 사줬잖아. 내가 너에게 사줬지?’라는 것을 기억하는 나, 3자 관계입니다.

2자 관계는 뭐냐? 내가 너에게 가방을 사줬는데 그 가방 사준 것을 내가 몰라요. 잊어버렸어요. 망각해버렸어요. 왜? 나를 상실했기 때문에. 사랑만 남기기 위해서 나는 그 앞에서 상실한 거예요. 이게 2자 관계입니다. 너를 통해서 사랑만 드러나는 거예요. 사랑은 ‘잘했다, 못했다’가 완전히 빠져버리는 거죠. 왜? 나 자체를 상실했기 때문에. 나 자체를 상실한 것은 ‘내가 잘했나, 못했나’의 주인공인 나도 같이 상실해 버린 거예요.

아까 기도하신 장로님께서 잘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안 돼요.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사랑이 사랑을 훼방하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한 그 나를 상실해야 됩니다. 소멸해야 되고 잊어버려야 돼요. ‘야, 난 이제 주님 은혜로 믿고 은혜받았으니까 주의 말씀대로 잘 살아야지.’ 그걸 상실해야 돼요. 그건 바로 완전한 말씀이 들어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나 자체를 상실해야 돼요.

그래서 사랑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죠. 사랑은 부끄러워할 게 없어요. 그러면 뭐가 부끄러운가? 사랑 빼놓고 다 부끄러워요. 더러워요. 가장 부끄러운 게 도덕과 윤리 체계입니다. 선악 체계에요. 사도 바울이 보기에 더러워서 못 봐요. 선악 체계. 바르게살기운동 이런 거, 남한테 희생하기, 봉사하기, 배려하기, 추잡하고 더러운 짓입니다.

1920년에 나온 장예모 감독의 <홍등>이라는 중국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이 ‘공리’에요. 부잣집 남자가 있는데 돈이 많아서 아내를 계속 모집합니다. 아내가 세 명이 있는데도 주인공인 공리를 네 번째 아내로 들입니다. 그 부잣집 2층 저택 꼭대기에 어떤 수상한 방이 있어요.

그 방이 무슨 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방에 대해 알 생각하지 말라고 주위 사람들이 당부를 하죠. “알면 안 돼. 쉿! 비밀의 방이야.” 그런데 ‘내가 네 번째 아내로 들어왔는데, 이 네 번째의 내가 왜 필요하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잣집 남편이 자기 아내와 관계할 때마다 홍등을 걸어요. ‘그다음은 네 차례다’ 요새 같으면 전기 신호가 오는 거예요. ‘오늘 밤은 네 차례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뭐냐 하면, 정식 마나님이 아닌데 종이, 아주 어린 종이 남편의 총애를 받아요. 비공식적으로. 그 영화에서 공리, 주인공이 나중에 알게 됩니다. ‘왜 아내가 네 명이나 필요했던가?’ 그것은 바로 아들, 아들을 가진 자가 여자의 권력을 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 대사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마님은 종년과 다르다.’는 그 대사가 나와요. 마님은 종년과 다르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내어쫓으라는 말이 있거든요. ‘종이 낳은 자식은 나는 내 아들로 받아준 적이 없으니까 아브라함아 그 종과 아들을 내어쫓으라’는 거예요. “선악 체제에 속해 있는 그것을 나는 아들로 받아본 적이 없다.” 왜? 배후에 악한 영이 작동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윤리와 도덕 고상함과 건전함 이런 것은 내어 쫓아야 되는 거예요.

주께서는 그걸 받은 적이 없다. 자기가 선하고 착하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 그것은 가위로써 뭘 째느냐? 가위로써 율법을 째서 그래요. 자기가 지킬만한 것은 지키고 안 지킬 것, 못 지킬 것은 내놓은 거예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얼마나 지켰느냐가 아닙니다. 90퍼센트 지켰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고 네가 왜 그런 아이디어, 그런 생각을 왜 하고 있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자기 자신이 마귀의 종인 것을 인정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직도 자기에게 미련이 있는 거예요. 자신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나는 기어이 천국을 가야 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저, 저, 저거 내어쫓아라! 저거 내어쫓아라.” 자기에게 아직도 미련이 있고 절망하지 않고 실망 안 하고 싶은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이 땅에 검을 주러 왔다 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9절에서는 더 급진적으로 과격하게 말씀하십니다. 12장 49절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내가 검을 주러 왔다, 그리고 내가 불을 지르러 왔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이 지옥 세계와 협상하거나 대화할 의지는 없다. 그냥 불을 지를 쓰레기다. 제발 이 세상만 쓰레기가 아니고 이 세상 속에 태어난 너도 같은 쓰레기라고 제발 그걸 인정하는 즐거움을 가지라’는 거예요. 그러니 ‘네 속에 내가 내어주신 그 수풀 속의 양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남겨두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양 때문에 산 거예요. 이 두꺼운 성경,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간단하게 이야기합니까? 사도 바울도 굉장히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굉장히 간단해요. 구약에서는 ‘어린양 외에는 너희가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어린양 믿고 십자가 믿는 나를 아직까지 포기 못하고 있으니까 이게 얼마나 아직도 자기가 누군지를 인정을 안 하고 좋다는 다 주워다가 자기에게 덕지덕지 붙이는 거예요. 이래서 신자인 척하려고.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것, 해도 소용이 없어요. 저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침대에 환자가 누워 있는데 침대에 누운 환자를 돌보는데 그만 죽고 말았어요. 돌아가면 보호자가 침대에서 일어나면 되는데 그런 마음이 아니고 침대에서 죽은 환자보고 “그래, 내가 이야기해 줄게.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치러 갔대. 그리고 아내 된 자는 자기 남편을 보고 주께 하듯 하라, 이렇게 이야기했대.”

그 이야기하면 침대에 죽은 사람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지요. 그래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인공호흡이라 하지 않고 말씀호흡이라 하는 겁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 이미 다 죽었어요. 죽었는데 행여나 성령께서 일하셔서 말씀에 감전되어서, 찌릿찌릿, 해가지고 혹시 죽은 데서 소생 할까봐, “갈라디아서에서는 그 계집종과 자식을 내어쫓으라고 했어. 이유가 뭔지 알아? 우리 안에 수풀 속의 어린양만 남고 나머지는 다 내어쫓기 위해서 그런 거야.”

그러면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그냥 죽었지요. ‘뭐라는 거야? 대체 뭐라는 거야? 귀찮아 죽겠네. 뭐라는 거야?’ 차라리 죽어서 숨도 안 쉬면 다행인데 죽은 상태라는 게 뭐냐 하면, 아직도 자기에게 기대를 거는 채 죽어 있기 때문에 마귀가 주는 활동성, 움직임이 있어요, 움직임이.

이게 바로 이 세상이 본질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맨날 겉모습만 측정하고 파악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눈에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아무리 교회 와서 정신적으로 추상적으로 초월적으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도 교회 밖에 나가면 전부 다 눈에 보이는 사람뿐이에요. 움직이는 것이 육신만 움직이는 거예요.

제가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좀 돌아다녀 봤거든요. 다녀보면 서울이 없어요. 대전도 없고 부산도 없고 광주도 없어요. 있는 것은 사람들밖에 없어요. 저는 사람들만 봤어요. 서울이 어디 있어요? 거기 가면 서울 사람들이 있지요. 사람들만 만나요. 이게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죽을 때까지 사람들만 만나요. 눈에 보이는 육신만 만나요. 하나님도 없어요. 예수도 안 보여요. 예수님은 이미 고인이에요. 없어요. 사람만 보인다고요.

교회 오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만 만나요. 예수를 못 만나고. 전부 다 이게 죽은 자들이에요. 그 때 드러나는 표현들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눈 감고 두 손~모~아 널 위해 기도 하리라” 그러면 그 사람이 “너 나 알아? 네가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모르면서 눈감고 널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한다고? 너 누군데?”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너 긴 머리 소녀잖아. 개울 건너 작은~집~에 사는 긴 머리 소녀가 너잖아.”

나이 어린 사람은 무슨 말 하는지 모릅니다. <긴 머리 소녀> 가사 아는 사람만 알아들어요. 눈감고 두 손 모아 널 위해 기도하는 그 긴 머리 소녀를 어른이 되어서도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소나기>라는 그 소설처럼. 어릴 때 그 긴 머리 소녀가 머리를 팔랑이면서 개울을 건너서 그 작은 집에 가는 그걸 아직도 못 잊어서 그 가사를 쓴 겁니다.

하여튼 그 ‘긴 머리 소녀’ 가사가 그래요. 그처럼 우리는 본질은 모르고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기도해 줄 사람, 그런 식으로 분류를 해요. 그런데 본질이라 하는 것은 변화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게 사랑뿐이에요. 사랑이라는 그 다양한 형태, 사랑이 어떤 식으로도 사랑이다, 한번 사랑이면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께서 지금 우리가 놓여있는 이 현실 자체를 조성해 나가는 겁니다. 우리가 직면했던 모든 사태는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맞닥뜨려야 될 사태를 우리에게 허락한 거예요.

그걸 선악 체제로 읽지 말고, 나 잘났다는 목적을 가지고 그걸 대하지 말고, 나로 하여금 나를 상실하게 만들고 나를 포기하게 만들고, 내가 나를 믿지 말아야 될 사태로 여러분들을 이해해 줘야 돼요. 그게 사랑입니다. 영화 <홍등> 이야기 계속합시다. 그 영화에서 공리, 주인공이 넷째 부인인데 그 넷째 부인이 결국 미쳐버려요.

존경하는 셋째 부인, 그러니까 형님이라 하지요, 그 형님이 남편이 자기를 안 불러주니 바람을 피우다 남편에게 발각되니까 꼭대기 층에서 죽여버렸어요. ‘감히 내 소유가 다른 사람 소유가 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 이게 뭐냐 하면, 사랑에는 반드시 그 배후에 미움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주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해주는 것은 우리를 미워해야 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분류를 할 때 미워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우리를 사랑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착하고 바르게 사느냐, 말씀 지키느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게. 어린 양이, 수풀 속의 어린 양이 대신 죽는 그것을 여러분이 살펴야 돼요. 그걸 보게 되면 하나님의 미움이 그 안에 들어있어요.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미움이 들어 있다고요. 육신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그런데 그 동일한 육신을 가진 우리가 미움이 아니고 사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그 은혜가 오늘 본문에 네가 나와 하나가 되니까 오라는 겁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있듯이 너도 은혜 받았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너 나 할 사이가 아니고 우리 사이니까 오라’는 거예요. ‘오기 싫어? 그러면 내가 갈 수도 있어요.

나에게서 나가 상실되고 너에게서 네가 상실되고 남는 것은 사랑만 남는 거예요. 미움이 아닌 사랑만.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반대하는 지를 아는 것은 쉬워요. 그런데 우리가 뭘 원하는 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치가 그런 거잖아요. 반대하는 것은 쉬운데 “그러면 네가 뭘 하고 싶은데?” 몰라요.

주께서 지금 주어진 이 세상이라는 것의 구조 이 자체를 우리로 하여금 늘 마주하게 했어요. 이것은 내 계획에 의해서 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이라는 것은 내가 구상하거나 나의 프로젝트가 아니에요. 그냥 부딪히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수련회 교재 첫 번째 나오는 이야기가 이겁니다. 우리는 쏠리는 대로 쏠린다. 【나와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살고,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한데 몰리고 있다.】 밀리는 대로 밀리고요.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 같아요. 내 인생이 내 원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죽 밀면 다시 밀리게 되어 있고 어느 쪽으로 쏠리면 같이 쏠리게 되어 있어요. 거기서 나라는 것은 성립이 안 돼요. 내 소원, 바램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내 뜻, 내 소원, 내 인생, 이것은 억지지요. 전체 구조를 모르는 억지입니다. 그냥 주어진대로 살 뿐이에요.

인간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선택당하는 겁니다. 매일같이. 선택당하면서도 극구 우기기를 내가 내 인생 선택해서 살아간다고 그렇게 억지를 부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귀가 준 자율성을 버리고 끝까지 우리는 피동성으로 가야 돼요. 우리는 피동성으로 가야 돼요. 주께서 지시한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체가 우리 자신이 이미 주 앞에 상실된 존재에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이걸 즐거워하는 거예요. 내가 내 것이 없어졌다는 그 자유와 그 가벼움을 감사하고 즐기는 겁니다. 그 순간순간 열심히 노력을 해야 그 순간순간 내가 이미 나로서는 망했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 없고 어린양의 인생이다.’

끝으로 성경 말씀 읽고 마치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왜? 믿어야 구원받으니까. 믿으려고 하니 하나님이 나에게 믿을 만한 것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하는데 요한복음 2장 25절에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뭐냐 하면, “나는 너희들이 믿을만한 일체의 것도 나는 제공할 의사가 전혀 없다. 왜? 믿게 되면 너의 의지, 선악과의 의지가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가 믿기를 잘했다는 자기 의지가 살아나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손을 떼고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에너지가 아닌 것이 없고, 주께서 살게 해주시고 이끌어주시는 주의 성령의 힘이 아닌 게 없음에 대해서 우리가 영원토록 평생 감사케 하는 것, 이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나 나나 모두가 주께서 살려주셔서 사는데 마귀가 또 작동을 해서 네가 노력해야 산다, 네가 잘나서 살았다는 내 세계를 따로 구성하게 만듭니다. 주여, 그것이 주에 의해서 늘 깨어지게 하시고 절망에 이르는 기쁨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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