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7일 본문 말씀: 디도서 1:1-4
(1:1)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1. Paul, a bond-servant of God, and an apostle of Jesus Christ, for the faith of those chosen of God and the knowledge of the truth which is according to godliness,
(1: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2. in the hope of eternal life, which God, who cannot lie, promised long ages ago,
(1: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3. but at the proper time manifested, [even] His word, in the proclamation with which I was entrusted according to the commandment of God our Savior;
(1: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4. to Titus, my true child in a common faith: Grace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Savior.
사도는 지금 의연함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삽니다. 곧 이 세상을 떠나 영생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을 무한한 기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영생이란 것이 인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획득하면서 태어났기에 자신이 가진 것으로 살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하지만 이 마음은 실은 악마의 협박에 속아 넘어간 결과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목숨 붙드는 방식으로 줄곧 평생을 살아가기에 생명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원래 인간들이 선악을 아는 과일을 따먹고 하나님쪽에서 조치를 취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인간의 목숨을 버리라고 있는 겁니다. 털어버려야 합니다. 영생은 그 목숨을 털어버려야 될 쓰레기 통과 같은 겁니다. 비워있습니다. 인간들이 가질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영생이 인간이 새삼스럽게 가질 그 어떤 것이 아니기에 어느 누구도 영생을 안 가질려고 합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영생이 못합니다. 인간쪽에서 거부하니까요.
예수님께서는 영생이 다음과 같이 찾아오신다고 합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1-54)
즉 영생은 너무나도 폭력적입니다. 너무나도 파괴적입니다. 목숨을 지키려는 인간에게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존 목숨까지 뺏아가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폭력은 구약에서도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과 7장에서 북이스라엘은 아람나라에게 포위당합니다. 사마리아성 안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아비규환입니다.
아이들의 고기를 먹어가면서 버텨야하는데 막상 자기 아이를 내놓을 날이 오자 차마 내 아이를 이웃의 식량으로 내놓을 수없다고 버팁니다. 이것은 바라보는 여호람 왕은 이런 사태를 모두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선지자 엘리사가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말합니다. 선지자를 꼭 죽여버리겠다고 나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내일되면 성 안에 양식이 넉넉하다고 예언합니다. 이것을 부정한 장군에 대해서는 “너는 양식도 먹지 못하고 밟힐 뿐이다”고 예언합니다. 그 다음이 되자, 성 안에 있던 네 명의 문둥병자들이 이판사판이라는 식으로 성 밖에 나가봅니다. 아람나라 사람들은 많은 양식과 의복들과 귀중품들을 그대로 놔두고 다 사라졌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이 기쁜 소식을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즉 생명이란 이처럼 인간들의 평소의, 생활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 형식으로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광야에 나설 때에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일용할 양식’, 즉 하루치 양식입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모든 시간적 희망을 하루 단위를 끊어버리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께서 그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루만이라도 영생을 누리는데 전혀 지장없을 정도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반대말은 시간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그동안 인간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설정된 삶의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은 목숨 연장이 아니라 영생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요?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자에게만 돌아갑니다. “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살후 3:2) 이는 영생을 인위적인 시도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이 주어지는 사람은 어떤 경로로서 전달될까요?
레위기 17장에서 보면 ‘피’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에게 율법을 입혀서 짜버리면 인간은 피가 됩니다. 그런데 이 피는 더러운 피입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약속의 땅을 더럽혀서는 아니됩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육신을 제사 지내는 제단, 그 한 곳으로 집결시킵니다.
㉰제단으로 나오는 자는 자기 대신해서 양을 잡든지 제물을 갖고 나와야 합니다.
㉱당연히 양의 피를 흘립니다. 그리고 그 제물의 몸체는 제단 위에서 맹렬한 심판의 불로 인해 다 타버리게 됩니다.
㉲이 제물은 율법에 의해서 피를 흘리는 제물이기에 이 안에 율법의 완성이 담겨 있습니다. 즉 율법 완성에 의한 피는 더러운 피가 아니라 의로운 피가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 때까지 3일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성령께서 개입하십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령님께 목숨 바치고 수동적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6:2의 말씀으로 죽으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시 51:16) 하지만 그 상한 심령은 하나님의 마음인 성령님에 의해서 새롭게 들어오게 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1-12)
이로서 성도의 자아는 구멍이 뚫렸고 그 구멍 사이로 성령님으로 채워졌기에 비로소 성도는 자기 목숨을 위해 살아온 모든 얼마나 큰 죄인인 것을 압니다. 이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이요 영생생활입니다. 이 영생생활에서는 더는 악마의 그 어떤 고발도 씨도 먹히지 않게 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8-1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생이고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도 내가 관리하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강-디도서 1장 1-4절(목숨과 생명)230827-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1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디도서 1:1-4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믿음과 경건을 이야기하면서,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 결과물로 등장한 것이 영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디도, 편지 받는 이 디도는 참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디도에게 영생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구주로 쫓아온 은혜와 평강 때문에 영생이 주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생, 우리는 받았습니까? 영생을 언제 받았죠? 받은 적이 있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영생은 어디서 주어지느냐 하면, 이렇게 주어져요. 요한복음 6장 53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영생을 가지려면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되는데 언제 마셨어요? 마신 기억이 있습니까? 아, 이거…, 누가 누굴 속였는지요? 내가 나를 속였는지, 아니면 그동안 한국 교회가 우리 자신을 속였는지, 아니면 둘 다 속였는지, 분명히 속였어요. 영생은 분명히 내 살과 내 피를 마셔야 영생을 얻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침마다 뭘 하느냐, 아침마다 밥을 먹어요. 가끔은 김 싸 먹기도 하고 김치찌개, 된장찌개 이렇게 먹어요. 이렇게 먹으면서 50, 60, 70, 80 살았는데 영생을 언제 가졌습니까? 아, 정말…, 나 자신이 나 자신에게 속는 짓은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생을 받아본 적도 없는데 영생을 논하고 영생을 이야기하고, 천국 간다고 억지로 우기고.
분명히 오늘 디도서 1장 2절에 보면 ‘거짓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 이 뜻은 뭐냐 하면, 영생을 직접 너에게 안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에게 주셨고, 예수님이 그다음에 우리에게 주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지 않는가? 우리가 영생을 받을 자격도 없고요, 영생을 줘도 못 알아보고요, 영생이 와도 우리는 영생을 거부하고 있어요. 우리 일상이, 삶 자체가 그래요. 왜? 자기한테 미쳐있거든요. 자기한테 환장한 인간이 영생을 왜 받습니까?
제가 알기로 분명히 창세기 3장에서 생명 나무는 인간에게 떨어져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생명 나무가 아니고 선악과나무에요. 지식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 간단히 말해서 지식, 지식을 우리는 갖고 있어요. 또 제가 알기로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영생을 못 얻는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식 가지고 우리는 내 인생에 삶을 도모했습니다. 어찌하면 하루라도 더 살까 애썼는데 그것은 영생으로 도모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으로 애쓰고 노력해서 이만큼 살아냈다, 이만큼 70, 80까지 살아냈다,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도 지옥문에는 바글바글합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어요. 그러나 천국 문은 한산합니다. 찾는 이가 거의 없어요. 줘야 받죠. 이 영생에서 인간들이 영생을 거부했다는 증거가 뭐냐?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나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이게 뭐냐 하면, 사람들에게 영생이 인기가 없다는 말이에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영생을 거부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영생을 거부하는 본능을 갖고 있어요.
선악과나무와 생명 나무, 나무가 두 개 있잖아요? 하나님 쪽에서 선언을 했어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 이게 하나님의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생명나무 과실이 이 땅에 온다고 할지라도 이 원칙, 이 대원칙, 선악 지식을 갖고 있는 인간들은 영생을 거부하게 되어 있다는 이 원칙이 이 땅에서 그대로 살아 있어요.
그동안 내가 아는 지식으로 이만큼 인생을 힘들게 일궈왔는데 거기다가 또 생명나무를 받는다고요? 받을 생각이 난다고요? 그것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실험을 해봤습니다. 예수님 자기 뒤에 쭉 따라 사람들이, 많은 제자들이 왔었어요. 그때 주님께서 이 한 마디 했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느니라.”
딱 이 말 하니까 그 뒤 요한복음 6장 60절에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하고 그 뒤에 보면 66절에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다시 생명 되시는 분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 없었더라, 이 말입니다.
그럼 ‘제자들은 있잖아?’ 하고 여러분들이 반문할 거예요. 제자들은요, 예수님 생명이 좋아서 따라다닌 것이 아니에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선택해서, 못 떠나게 만들어서 제자가 된 겁니다. 물론 그중에 하나 사탄이 들어있지만. 생명은 주께서 줘야 받는 거예요. “여러분, 하늘나라 천국 있고 생명 있습니다. 받으세요. 우르르!” 그런 일은 없습니다.
생명 나무를 왜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격리시켜 놨는지, 그 이유를 우리 태어난 육신이 담고 있어요. 우리 육신 안에, 생명 나무를 절대로 원하지 않는 요소가 우리 육신 가운데서 지금 작동 중입니다. 그런 육신을 가지고 있으면서 생명을 얻었다, 참 구라도 구라도, 거짓말은 사람만 통하지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죠.
제가 두 가지 대화를 이렇게 나열할 테니 어느 쪽이 지식 쪽이고 어느 쪽이 생명 쪽인지 여러분 한 번 구분해 보시기 바랍니다. ‘류현진 선수가 드디어 3승을 달성했다.’ 이런 문장이 있어요.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이 ‘죽은 죄인이 죄인들이 만든 게임에서 시간 잘 보냈구나.’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 두 문장 가운데 어느 쪽이 생명 쪽일까요?
‘비가 왔어요.’ 이런 문장과 ‘주님의 공간을 주께서 비로 채웠구나.’ 이거 하고. ‘내 친구가 죽었어요.’ ‘주님의 피조물을 주께서 제거해 가버렸네?’ 이거 하고. ‘내 친구가 죽었어요. 아까운 친구가 죽었어요.’ 이런 문장 하고, ‘주님이 피조물을 알아서 제거했네.’ 이 문장 하고, 어느 쪽이 생명 쪽이고 어느 쪽이 선악과 쪽입니까?
‘도둑이 집에 들어왔어요.’ 이 문장과 ‘주님의 것에 의해서 주님의 자리 배치가 있었네?’ 이거 하고. ‘택배 주소 바뀌었어요.’ 이 말 한마디 했는데 3억 8천만 원이 보이스피싱으로 날아갔어요. ‘보이스피싱 걸렸다.’ 이 문장 하고, ‘주의 돈 3억 8천 주께서 자리 배치했네.’ 이거 하고 ‘한국에 있는 돈 3억 8천 중국으로 갔네.’ 이거 하고 어느 문장이 생명에 관한 문장입니까?
하나는 본질을 이야기하는데 하나는 현상을 이야기합니다. 자,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현상밖에 볼 줄 몰라요. 그러나 생명을 아는 사람은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그 본질 속에서 항상 시작점이 주님이에요. 오늘 본문 디도서에 편지 안의 사도 바울은 본질을 이야기 한 사람이에요. 현상을 이야기 한 사람이 아닙니다. 본질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는 영생을 가진 사람과 영생이 없는 사람 두 종류밖에 없다.” 지금 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 영생에 대한 소망, 그리고 영생은 거짓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본인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사형수로 태어나서 이제 곧 사형 집행을 받는 그 결연함, 사형 집행을 받는 그 순간이 더는 나에게 내가 치이는 그런 시간에서 이제는 치이지 않는 시간으로 벗어나는 그 기쁨과 감사함으로, 결연함으로 이 편지를 지금 오늘 우리에게 보내는 겁니다. 팔공로 91길,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거예요.
“이 선악과 지식에서 나 떠나.” 너무 감사하고 기쁜 거예요. “디도야, 너도 떠날 준비 돼 있지?” 이러고 있다고요. 무슨 충격을 받아요, 도대체. 죽는다는 게 왜 충격이 돼죠? 이건 협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육신 안에, 히브리서 2장 15절, and free those who all their lives were held in slavery by their fear of death. 마귀가 육신을 가진 자에게 공갈과 협박을 꾸준히 해 왔다는 거예요. 완전히 보이스피싱한테 속아 넘어간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그걸 목숨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목숨은 탈탈 털라고 준 거예요. 목숨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영생이 오거든요, 영생이 주어지게 된다 하는데 영생은, 특징이 안에 내용이 하나도 없어요.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중 하나가 이게 영생은 안에 내용이 하나도 없고 쓰레기통이에요.
뭐 우리 교회는 그런 게 없습니다만, 제가 일반 교회 다닐 때 헌금 할 때 찬양대가 헌금 노래를 불러줘요. 지루하니까 노래 서비스를 해주게 되면 어떨 때 큰 곳은 매미채로 하는 데도 있고, 작은 데는 그냥 동그라미 헌금통을 돌리잖아요. 헌금통을 이렇게 앞에서 뒤로 넘기고, 또 넘기고 하면 그 동그란 통이 빈 통이란 말이죠, 그 빈 통에 준비한 헌금을 넣는 거예요. 안 들키게 이렇게 손으로 가로막고요. 5천 원짜리 넣으면 부끄럽잖아요. 5만 원짜리 넣으면 안 가리고 그냥 넣고요.
영생은 그냥 빈 쓰레기통이에요. 영생을 가지면 안 돼요. 영생을 가지게 되면 이건 하나님의 대원칙에 위반되는 겁니다. 영생은 우리의 목숨과 바꿔 치기 하는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목숨을 유지하는데 영생이 온다, 그렇게 영생을 주께서는 주신 적이 없고 그걸 영생으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만든 사기입니다. ‘내 목숨을 살다 살다 오래 살고 그 다음에 영생의 나라 들어가겠지.’ 이건 완전히 사기예요.
영생은 일종의 깊은 우물이예요. ‘이 쓸데없는 목숨, 이거 어디다 갖다 버리면 될까? 아, 저기 버리면 되겠네.’ 하는 깊은 우물, 그 우물 발견하는 게 영생 발견하는 거예요. ‘아 저기에 내 목숨을 풍덩 집어넣으면 되겠네.’ 그게 영생입니다. 목숨 갖고, 또 영생 갖고, 이런 건 없어요. 목숨은 털어 넣는 거예요, 털어 넣는 것.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3일 만의 텀이 발생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3일 만의 텀은 인간으로서의 손을 떼는, 평생동안 내가 나를 관리하다가 그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3일 동안은 인간이 더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어떤 수작을 하고 어떤 시도를 해도 건널 수 없는 갭이 3일의 갭이에요.
호세아 6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완전히 피동적이죠. 자율적 다 빠집니다. 나한테 내가 뭐 하는 것 없어요. 내가 ‘내일 뭐 계획해야지’, 없습니다. ‘6개월 동안 이렇게 해서 6개월 후에 이런 결과 나와야지’ 그런 거 없습니다. 다 뺍니다. 내가 나를 관리하는 거 쏘옥 다 빼는 것.
그러면 관리를 왜 했는가? 내 목숨이 있으니까 좋거나 싫거나 이 목숨 부지해야 될 거 아닙니까. 부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지런히 자기한테 관심 두고 자기한테 집중하면서 살아온 거예요. 그게 목숨 관리법이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평생.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무나 제대로 알고 있죠.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가보겠습니다. 영생의 반대말이 뭐냐? 시간이에요. 인간은 늘 시간에 쫓기고 있습니다. 원래 시간이라는 것이 인간을 위한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들어왔다가 빠져나오는 그 기간이 시간인데 인간들은, 이 시간을 ‘내가 보다 발전하고 잘 되고 나중에 천국까지 갈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그 기간’이라고, 자기가 자기 관리할 수 있는 기간이라고 시간을 생각한 겁니다.
그 시간에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이자율이에요.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것. 거기서 나온 것이 금융업입니다. 지금 살아 있는 내 목숨을 1년 뒤에, 2년 뒤에, 5년 뒤에 어떻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뭘 하면 되느냐를 생각하는 것, 이것이 인간이 시간에 휘둘리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1절, 교회 다니고 이거 모르는 사람 없어요. 주기도문이에요. 그 주기도문에 보면, 6장 11절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루 치 양식이에요. 하루 치 양식. 이게 어디서 나오냐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루 치 양식만 준 거예요.
이것은 작두로 인간의 시간을 하루치로 다 자른 거예요, 하루치로. ‘지금 너희가 너희들 끼리 있는 게 아니야.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말은 함께 계신 하나님이 하루만 살게 한다는 거예요. 너희들을 하루만 살게 한다는 것은 동행한 하나님한테는 하루만 있어도 된다는 이야기예요. 왜? 하루 안에 영생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루 안에 영생이 들어있어요, 단 하루 치만. 일 년이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아요. 하루만 살아도 천국 가는데, 영생 얻는 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그런데 9월달이 왜 필요하고 10월달이 왜 필요하죠? 11월달이 왜 필요합니까? 도대체 평소에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서 뭘 캐냈습니까? 뭘 알게 된 거예요? ‘뭐 이렇게 목숨 유지하다가 늙어서 죽으면 천당 가겠지.’ 그런 건 없습니다. 중간에 뭔가 가지고 있는 목숨을 털어낼 수 있는 쓰레기통을 만나야죠. 그 쓰레기통이 뭐냐 하면, 말씀이에요. 말씀 하나하나의 뒤에 영생이 받쳐져 있어요. ‘그만 살아라, 그만. 그만 살아 제발! 그만 살아라, 이 말씀이 있잖아. 그만 살아라.’
이거 눈 감고도 됩니다. 눈 감고 아무 데나 해 볼께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 예요. 눈 감고 아무 데나 해보겠습니다. 하니까 사도행전 딱 나왔다. 보니까 여기 사도 바울이 ‘여기 나사렛 예수라,’ 쭉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성경을 아무 데나 펼쳐도 예수님 이야기 나오고 예수님이 함께 있으면, 옛날 출애굽 때 광야에 하나님 이름이 함께 있는 것처럼 예수와 함께 있으면 이미 시작된 천국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살려주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손을 떼게 만들고 새로운 사태를 만나게 해요. 계속 새로운 사태, 아침 일어나서 또 오후쯤 되니까 고지서에 전기세 내라고 붙어있으면 그 전기세 내라는 게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예요. 그거 내면 되죠. 돈 낼 곳 없으면 안 내면 되고. 내가 나를 관리할 일이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 하루 치.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일용할 그 만나를 주면서 신명기 8장에서 만나를 뭘로 바꾸느냐 하면, 말씀으로 바꿔버려요. “내가 매일 치 말씀을 주었잖아.” Q.T.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매일 말씀을 주었잖아.” 지금 이 말씀에 담긴 내용이 상당히 어려워요. 그래서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열왕기하 7장 4절의 내용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구약 이야기입니다.
엘리사 시대였어요. 엘리사 시대에 나라가 남쪽 이스라엘, 북쪽 이스라엘 둘로 쪼개졌거든요. 쪼개지고 난 뒤에 나라가 쪼개져야만 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북이스라엘로 보내는 겁니다. 지금의 북한이라고 보내면 되죠. 보냈는데 엘리사 선지자가 있을 때 그 북쪽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있으니까 우리나라 아무 탈이 없겠지.’라고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도 보냈겠다, 아람 나라가 와서…’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아람 나라가 오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켜주잖아. 그 증거가 뭐냐? 선지자가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지.’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니까 하나님 우리를 지켜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사고방식인 겁니다.
그런데 아람 나라 벤하닷이, 이름도 어려워요. 이 벤하닷이 이스라엘 성을 포위했어요. 사마리아 성인데, 아람 나라, 지금의 시리아입니다, 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포위하면서 전략이 뭐냐 하면, 굶겨 죽이자는 거예요, 굶겨 죽이자. ‘쳐들어갈 것도 없어. 바깥으로 못 나오게 만들고 그냥 굶겨 죽이자.’ 이 정책을 쓴 겁니다.
공격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시리아는 계속 기다리는 거예요, 항복할 때까지. 처음에는 견딜 만한데 양식이 떨어지니까 그다음부터 열왕기하 6장에 보면, 어른은 못 잡아먹고 아이 고기, 사람 고기죠, 인육을 먹기로 이웃끼리, 아파트라면 옆에 사는 주민끼리 서로 “너희 애 태어났잖아. 먹자. 일단 먹고 내일 되면 내 아이 내어놓을게.” 이렇게 버티는 거예요. 살아남는 게 목숨을 연장하는 거예요.
구약 때입니다. 구약 때는 영생 없어요. 있는 것은 목숨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숨밖에 없는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목숨 가지고 지금 하나님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환경으로 삼는 거예요. 그걸 보고 지도자, 윤석열 대통령이에요, 윤석열 대통령이 그걸 본 다음에 “엘리사 오라고 해, 엘리사 오라고 해!”
이게 뭐냐면 “사주팔자 보는 무당 오라고 해.” 그런 거예요. “네가 선지자면 똑바로 해야지. 나라 꼴이 이게 뭐냐.”라고 엘리사 보고 말은 못 하고 “오라고 해. 죽여 버린다. 내가 선지자 엘리사 안 죽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 내릴 거야. 내가 꼭 죽인다.” 이러는 거예요. 그 왕이 여호람 왕이에요. “내가 꼭 죽인다.” 이렇게 했어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생명이 아닙니다, 목숨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고, 아람 나라는 포위돼 있고, 선지자 엘리사는 뭐하냐 이 말이에요. “뭐 하냐? 지금 우리 목숨 구하지 않고 뭘 하느냐?” 그 말이죠. 드디어 열왕기하 7장에서 엘리사가 이렇게 합니다. 무슨 대책을 내놓으라 하니까 “내일 여러분들이 풍족하게 먹습니다, 내일!” 그렇게 한 거예요.
그걸 보고 한 장군이 엘리사 면전에 이야기합니다. “구라를 쳐도 엄청나구나. 내일? 하늘의 창을 열어서 곡식이 떨어진대도 내일까지 풍족할 수 없어. 어떻게도 그런 일은 없어.” 그러니까 엘리사가 “누가 이야기했어?” “내가 이야기했다, 왜?” 하니까 “넌 내일 밟혀 죽어. 넌 하나도 못 먹고 죽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고 난 뒤에 성안에 문둥병자 4명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환자죠, 곧 죽습니다. 죽는데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에게 신에게 저주받았다고, 율법에 보면 문둥병 걸린 사람은 저주받는다 했으니까 저주받았다, 해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도 굶어 죽을 판에 자기들이 동냥해도 못 얻어먹으니까 그 네 명이 이렇게 했어요.
“여기 있으나 밖에 나가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우리 밖에 나가서 죽자.” 그래서 죽기로, 기존에 있는 자기 목숨을 탁 털기 위해서, 탁 털기로 하고 성 바깥에 나간 거예요. 이때 나오는 말이 7장 4절에 ‘죽으면 죽으리라.’에요. 죽으면 죽으리라, 해서 나가 보니까 아람 군대로 가득 차야 할 그 성 바깥에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들이 막 버리고 간, 음식이 아주 따뜻해요, 막 버리고 간 음식물이 가득한 거예요. 의복도 있고.
뭐 실컷 먹었죠. 실컷 먹고 난 뒤에 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기쁜 소식이 나와요, 복음.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그래서 ‘우리가 잠잠하고 있으면 안 된다. 기다릴 것 없이 지금 가서 성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깥에 먹을 거 많다고 전하자. 우리는 우리 목숨 건졌잖아. 그러니까 이 목숨 전하면 그들도 얻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안 믿다가 나중에 와보니 정말 음식이 가득해서 굶겨 죽이려고 온 그 아람 군대가 그 성에 식량 보충을 해주는 식량 보충대 역할을 한 거예요.
그리고 엘리사 비웃었던 그 장군은 사람들이 갑자기 몰리는 바람에 선지자 말대로 가다가 밟혀 죽었어요. 밟혀 죽었다는 이야기가 열왕기하 7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20절에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요, 하나님의 영생은 우리가 믿으라, 받으라, 해서 오는 게 아니고 가장 극단적인 폭력성으로 온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생이.
그 폭력성은 우리를 파괴하는 겁니다. 나를 파괴하는 거예요. 나를 짓밟아 버리는 거예요, 그 장관처럼.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 이만큼 살아왔다는 그 이력, 그 이력 있잖아요, 우리의 그 습관,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 이렇게 해서 애 키우고, 여기서 아파트 사고 이만큼 사는 거야. 이렇게 해서 살았어. 앞으로 그렇게 살 거야.’를 미리 살아생전에 영생이 와서 그걸 짓밟아 버립니다.
폭력적이에요. 성 바깥에 있는 문둥병자가 성안에 있는 멀쩡한 사람을 공격하는 거예요. 파괴하는 거예요. 그게 기쁜 소식이에요. 그게 복음이에요. “이 쪼다야. 이 바보들아!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지? 그게 전부라고 여겼지? 저 바깥에는 목숨을 유지할 넉넉한 것이 있다.”라고 문둥병이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뭐냐 하면, “우리 죽음 밖에 영생이 있다.” 이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죽음 밖에는 영생이 있다. 그동안 네가 뭐 하고 살았냐?” 먹어봐야 배고프고, 먹어봐야 아프고, 먹어봐야 또 진찰 받아야 되고, 맨날 해도 관리 안 되는 육신, 그러면서도 늙어가고, 마스크 쓰고 뭐 웃고, 화장발 안 받고…….
구약에서는 목숨에서 더 연장된 목숨이지만, 이게 신약에 오면 목숨과, 죽어도 괜찮아, 이제 죽어도 상관없는 영생, 이것을 대조해서 이야기하고, 구약에서는 목숨과 연장된 목숨으로 대조해서 설명해 주는 겁니다. 엘리사가 그걸 알고 있었죠. 지금은 엘리사 선지자죠.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에요.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게 되면 그땐 목숨 연장책이 오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오는 거예요, 생명.
그런데 이 생명은 문제는 난관이 있어요. 왜냐면 생명이 와도, 영생이 와도 인간은 영생을 거부한다는 거예요. 자기가 그동안 살아왔던 그 행세가 있기 때문에. 내가 노력해서 내가 나 관리해서 나에게 집중해서 이만큼 살아온 이 이력이 있어서 이걸 포기를 못 해요.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그런데 왜 포기를 못 하느냐 하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공갈과 협박을 받기 때문에, 마귀한테 협박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일평생 동안 죽는 게 무섭다는 것은 배후의 악마가 우리에게 그렇게 준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주관성은 순수한 주관성이 아니고 악마가 심어준 악마의 주관성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걸 지니고 태어나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죽은 자에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시체고 영생이 없어요. 목숨은 있는데 영생은 없어요. 구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나가 보세요. 만나는 사람 보세요. 전부 다 목숨에 관한 이야기에요. 영생에 관한 이야기는 입도 떼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쳤는가? 목숨이 있기 때문에 영생을 안 받는 이 난관을 무슨 수로 뚫을 것인가? 레위기 17장에 보면 뚫는 그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짜요. 인간의 육신을 으깨 버립니다. 으깨 버리면, 여러분, 참깨를 차면 참기름 나오죠? 인간을 짜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피가 나온다는 거예요. 인간을 짜면 피가 나오는데 그냥 짜서는 피가 안 나오고 인간의 육신에 뭘 거기에 집어넣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집어넣어요.
인간의 육신에 율법을 집어넣고 짜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피가 나오는데 어떤 피냐? 더러운 피가 나옵니다. 더러운 피에요. 이게 하나님이 율법을 줄 때, 제사법을 줄 때 아이디어에요. 어느 인간도 자기 육신을 짤 생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죽으면 흙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건 율법이 없을 때고 율법을 집어넣으면 흙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 차원에서 피가 돼버려요. 그 피는 하나님이 계시는 이 깨끗한 약속의 땅에서는 절대로 흘려서는 안 되는 피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한 곳에 집중시킵니다. 집중시키는 방법은 뭐냐? 하나님의 말씀, 율법 가지고 집중시켜요. 인간의 이스라엘의 육신들을 요리조리 몰아넣어요. “이렇게, 이렇게 와야지. 이렇게 와, 이렇게 오라니까? 거기로 가지 말고 이렇게 와.” 그곳이 어디냐? 제단이에요. “제단으로 와야지, 제단으로 와야지. 그냥 오지 말고 어린 양 끌고 와야지.”
어린 양을 제단에서 죽여 버립니다. 피를 내요. 그 어린 양의 피는 어린양의 육신을 제단에서 무서운 심판의 불로 다 태웠다는 증표로서 남겨진 양의 피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그 피를 담고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성소에 갑니다. “똑, 똑, 똑! 계십니까?” “밖에 누군데?” “제사장입니다.” “왜?” “피 가져왔어요. 더러운 피 가져왔습니다.” 더러운 피.
하나님이 육체에다가 말씀을 주게 되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 인간이라는 자체가 시체였다는 것을 들추어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말씀과 멀어지면 안 되는 이유가, 말씀을 봐야 내가 죄인임을 알아요. 내가 죄인인지를 알고, 나를 죄인으로 하게 한 그 말씀 안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그 말씀 안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그 율법도 같이, 같이 담겨 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의 피와 다른 의인의 피에요. 예수님의 피가 있다고요.
우리가 육신을 스스로 짠 사람이 없어요. 제자들 가운데 누가 짰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수님이 스스로 피 흘림으로 자기 육신을 마감을 해버려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피를 흘림으로써 예수님이 자아에 스스로 구멍을 뚫어버리죠.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게 되면 말씀이 우리를 죄인 만들고, 죄인을 만들면 우리가 어느 정도 얼추 건질 선한 것들이 없어요, 우리한테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하는 일이 잘 안 되는 것은 내 안에 아직도 나쁜 게 들어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선악 지식이에요. 나쁜 게 있는 것이 아니고 덜 짜서 그래요. 우리는 못 짜니까 주께서 우리 대신 우리 몸이 어떤 몸인 것을 짜내는 거예요. 짜내니까 그게 피가 되는 겁니다.
피가 되고 그 피를 흘려서 그 피를 근거로 의로운 피를…, 율법 안에 이웃을 위해 대신 죽는 것도 율법에 들어있거든요. 그게 이웃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을 달성하신 그분이 죽으면, 피를 흘리면 그 피가 뭐가 되느냐 하면, 다시 육신이 돼요.
그게 사흘만의 텀을 지나간 부활의 몸이 되는 거예요. 신기하지요? 육신이 피 되고 피가 육신 되고, 그게 전부 다 말씀의 다 이루심에 의해서 전개되는 절차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같아요. “주여, 따라가겠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하다가 어디서 스톱이 되느냐 하면, 십자가 앞에서 “야, 집에 가자, 집에 가자. 안된다. 끝났다, 끝났다. 안돼. 끝났어, 집에 가자.”
십자가에서 다 돌려보내지요. 다 돌려보내요. 십자가 흉내 내는 것은 되는데 십자가는 안 돼요. 왜? 우리가 흘린 피는 더러운 피기 때문에. 순교의 피, 그 어떤 무슨 피도 다 더러운 피에요. 선악과 따먹은 그 죄, 그 죄는 그냥 죄라 하면 우리가 죄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죄를 보여줄 때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유도했던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는 죄는요, 기껏 이런 것을 아는 죄에요. 어느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인데 <누가 죄인인가?> 하는 노래에요.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극 중에서 지금 안 중근이 죽 이야기해 가는 거예요.
대한의 황제를 폭력으로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과 정미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죄
무고한 대한의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죄
여기까지 하면 코러스가 나옵니다.
누가 죄인인가? 누가 죄인인가?
이게 <영웅>이라는 뮤지컬 노래의 한 대목입니다.
조선의 토지와 광산과 산림을 빼앗은 죄
극 중에서 안중근이 재판에서 마지막 변론을 하는 그 대목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이게 추가되겠지요. 태평양에 방사능 오염수를 방류한 죄.
이게 죄입니까? 이게 죄예요? 이게 목숨 차원이에요. 생명 차원이 아니고 목숨 차원이에요. 인간들이 태어나서 기껏 공부하고 학교에서 배운 게 목숨 유지하는 법만 배운 거예요. 목숨 유지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똑똑해야 되고, 지혜로워야 되고, 끝까지 자기 최후의 것을 잃으면 안 되고 자아를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 뮤지컬 가사를 제가 다 적어 왔는데요 시간관계상 다 못하겠습니다만,
한국인들의 외교권을 빼앗고 유학을 금지한 죄
신문사를 강제로 철폐하고 언론을 장악한 죄
이게 죄입니까, 이게? 제가 가사를 보면서 뭘 생각했느냐 하면 이걸 생각했어요.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라면 그러면 일본이 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 안했으면 의인 되었네요? 그러니까 이게 선악입니다. 의와 죄를 누가 결정한다고요? 내 목숨에 유리하냐, 생명이 아니고 내 목숨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로 무엇이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를 굳게 지식으로 갖고 있으니 생명이 들어올 수가 없지요, 생명이.
물론 뒤에서 마귀가 우리한테 그렇게 협박 공갈을 해서 우리를 배후조종을 하니까 그런 현상이 벌어진 거예요. 주께서 주신 영생은 우리가 죽어도 여한이 없는 걸 줬어요. 그냥 시시~한 거, 우리가 관리할 필요도 없는 걸 주셨습니다. 요한 1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그 어떤 악마의 고발이 성도한테 줘도 성도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악마가 성도한테 어떤 고발을 해도. “저 집사님은 밥 먹을 때 맨날 밥을 남기더라.” 이런 악마의 고발이 있더라도 씨도 먹히지 않아요, 성도한테는. 성도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합니다. (코러스)“누가 죄인이냐, 누가 죄인이냐?” ‘그게 죄야?’ 너는 아직도 목숨 차원에서 죄와 의를 논하느냐 그 말이지요.
따라서 생명 차원에서의 죄는, ‘내 목숨이 내가 그동안 영생을 거부했습니다.’라고 그게 죄인 것을 발견할 때 이게 은혜에요. 영생을 방해하는 사람이 남이 아니고 내가 영생을 방해했습니다, 라는 것을 이제는 돌이켜 보면서 파악하는 거예요. 아프면 죽으면 되는 거예요. ‘남의 이야기니까 쉽게 한다.’ 하는데 남의 이야기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 하루 치, 하루 치의 하루를 살게 한다는 것……, 목숨 사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하루, 하루,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영생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내가 관리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겁니다. 우리가 사형수라는 사실, 사형집행인에 의해서 사형이 집행되는 그 기쁜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그 기쁨의 소식을 우리가 감사히 여기지 아니하면요, 우리는 계속해서 마귀한테 협박 공갈받고 있어요.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이 말을 소극적으로 읽지 말고 적극적으로 읽어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영생은 줄 사람에게만 준다. 영생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개나 소나 다 주는 것이 아니고 줄 사람에게만 주는데 그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생을 거부한 나에게 어떻게 이 내 속까지 영생이 침투해 들어왔습니까?’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이 이미 영생을 받은 사람이에요.
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앞으로 우리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생략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우리를 관리하지 못하는, 우리를 완전하게 시체로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우리한테 조치 못 하게 하는 그 간격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한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우리한테 손 못대는 경우들이 발생되야 돼요.
내가 더는 나한테 손 못 대는 것, 이게 걱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염려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마치 우리 두 손과 두 팔을 아예 십자가에 못을 박아서 “더 이상 손대지 말고 네가 손을 벌리고 있거라. 그리고 네 몸에 대해서는 내가 알아서 관리할 게.”를 실감나게 체험하는 그런 순간순간들이 있어야 돼요. 그것 없으면 영생 받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아침에 보니까 수풀에 뭐가 떨어져 있느냐 하면, 고사 지낸 돼지머리가 계곡에 떨어져 있었어요. 피부가 하얬어요. 그리고 인상 깊은 것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어요. 그래서 느낀 것은 ‘아, 돼지나 사람이나 죽은 자는 눈을 뜨지 않는구나.’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시체이면서도 눈 뜨고 사는 것이 그게 문제구나.’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 될 문제를 왜 눈을 떠서 부라리고 부르르, 왜 그러냐 그 말이지요. 무엇을 더 알아야 되고, 무엇을 더 살펴야 되고, 왜 그러냐 그 말이지요. 살필 때마다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고 충격받고 그러는데 그걸 왜 살피냐는 말이지요. 좀 지그시 눈 감으면 안 되느냐. 하루를 살더라도.
주께서 그 생략된 것을 뭘 로 채워주느냐 하면, 주님의 심령으로 채워줍니다. 아, 이게 또 시편에 나와요. 시편 51편 16절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한심령이에요, 상한심령.
그러니까 어떤 사태가 주어지는 것은 우리 보고 걱정하고 염려하라는 사태에요. 고민하라는 사태에요. 그래서 나의 심령…, 생명이 아닙니다. 자꾸 말을 구분해야 돼요. 내 목숨을 부지하면서 지켜왔던 내 심령이 내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는 경우가 발생돼요. 충격받아요. ‘나, 나 어떻게 살아?’ 그 경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져와, 가져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한 마음이에요. 썩어 문드러진 마음. 내가 더이상 할 게 없는 도리, “딱 가져와. 딱이야!” 가져올 때 눈 지그시 감고, 돼지머리처럼 눈 지그시 감고.
주께서 이렇게 합니다. “이제 오냐, 이제? 그동안 네 맘대로 네 관리 하다가 이제 손 놓고 이제 왔냐? 십자가로.” 감사할 것은 우리의 심령을 받아 줄 분이 있는 것도 감사하지만 우리의 심령을 새로운 심령으로 바꾸어주시는 분으로서 주께서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4장 22, 23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심령으로 새롭게 된다.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자, 이 대목에서 주의할 것은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새로운 심령,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하는 이 담당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보고 손을 떼게 한 십자가와 부활사이의 생략된 그분,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서 예수님에게 생략된 것은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죽어계시고 성령이 와서 그 십자가와 부활을 이어줬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하셨거든요.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생명 주시고 부활시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11-11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사람의 사정은 사람 속에 있는 주관성 외에는 누가 알리요.
그런데 그 주관이라는 것이 악마한테 사로잡힌 주관이거든요. 늘 ‘네 목숨 죽으면 너 끝나. 네 인생 실패야. 너 살아온 것 다 헛거야.’ 그렇게 돼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죽는 게 무서운 거예요. 왜? 내 목숨을 잃어버리니까. 목숨 잃으면 내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께서 짤 때, 그 자아마저 구멍을 뚫어서 그거마저 없애버리는 거예요. 너는 ‘너’라고 하는 그 심령마저도 죄 있는 육신에서 비롯된 자아라는 거거든요. 그 자아 죽을 때 우리도 우리로 하여금 손 놓게 만들어요. 여기까지, 너는 여기까지! 넌 더이상 너한테 손 못 대. 너도 끝났고 니 자아도 끝났고 이 육신도 끝났고 끝났어.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도 그걸 각오했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가 십자가예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는 내 뜻에서 아버지의 뜻으로 건너갈 능력이 없어요. 마귀가 발목을 잡고 있어 못 건너갑니다. 어디를 가! 어디 천국을 가!! 니는 끝까지, 니는 내 시키는 대로 해야 돼. 니 목숨 유지하면서 열심히 살아야지. 악마가 그걸 쥐고 있는 거예요.
성령이 오셔서 그다음에 고린도전서 2장 12절을 계속 읽어보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내가 나한테 손대는 것은 목숨이지만 주께서 나에게 손대서 집어넣는 것은 예수님의 심령 곧 영생입니다. 예수님의 심령,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준 거예요. “나 니때문에 애먹었다, 십자가에... 아이구, 이 골칫거리야...! 마귀한테 매여가지고 지 이기주의밖에 모르는 인간, 아~~ 골치아픈 인간, 그 구멍 뚫느라고 내 애먹었다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성령은 일종의 스크루(screw)예요. 목수들이 구멍 팔 때 왼쪽으로 돌리고 오른쪽으로 돌리고 구멍 팔 때, 구멍 파고, 거꾸로 돌려서 빼내잖아요. 구멍 뚫고, 우리의 텅 빈 자아에다가 성령이, 예수님의 마음이 와버리면 우리가 그때 느끼는 건 뭐냐면 ‘우리가 바로 죄인입니다,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뭐 영생을 관리할까요? 예수님 믿음을 관리할까요? 그런 소리가 다 들어가버리죠. 우리가 관리하면 안 돼요. 주님의 믿음, 소망, 사랑. 우리가 관리하면 안 돼요. 주님의 심령을 내가 관리할까요? 관리하지 마세요! 오랜만에 말합니다.
그냥 막사세요! 막국수 알죠, 막국수. 그냥 막사세요. 막사는데 염려하면 아직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 마귀가 작동하기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냥, 그냥 막 안 살아도 주께서 여러분을 막살게 만듭니다. 어떻게 이런 복음 들어도 여전히 ‘내가 돈을 벌어야 살지, 내가 뭘 해서 벌지...?’ 병원에 가 봐야 돼요. 병원에 가봐야지요. 돈 벌어야지요. 그런데 그게 다 뭐라? 이게 바로, 이게 바로 죄인 것을 감사하는 감사와 기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저희에게 영생이라는 것으로 폭력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치는 것, 우리가 상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고 충격받는지. 하지만 그거마저 목숨에서 영생으로 바꾸어주는 교체 시기인 것을 왜 우리가 진작 몰랐는지. 주여,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고 주님께서는 주님 마음대로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