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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 비유

아빠와 함께 2023. 8. 25. 10:19

누룩 비유
2004년 2월 8일                                          
마태복음 13:33-35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천국은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뭘해도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되는 인간이 구상하는 천국은 처음부터 천국이 아니라 가짜입니다. 가짜 천국이 늘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기 쪽에서부터 천국을 출발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은 '감추인 대상'이 아니라 '공개-공개'로 계속 이어질 나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5절에 보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천국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흔히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그런데 인간들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한 나름대로 선입견을 갖고 이 선입견을 가지고 자기만큼은 '들을 귀'를 가졌노라고 누구나 자신만만해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셔도 그 내용은 자기에게 정확하게 이해된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마련입니다. 즉 본래의 예수님의 뜻은 사라지고 자신이 납득하는 식으로 이해 해 놓고서는, "나는 들을 귀가 있으니 이렇게 예수님 말씀이 잘도 들리는구나"라고 오해할 소지가 넉넉히 있다는 말입니다.

 

과연 이 주장이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순전히 예수님만이 수행해야 될 업무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예수님의 '드러내심'으로 인해, 소위 인간들이 '드러냄'의 능력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으로 확실해져 버립니다.

 

인간들도 조금만 꼬투리만 있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드러냄의 흔적'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근거로하여 천국에까지 이르고자 합니다. 바로 이러한 선입견이 뭐가 문제가 되는 겁니까? 제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만남의 경우의 예를 들겠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그 전에 여러번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던지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말씀에 의지해서 던지는 겁니다. 그랬더니만 배가 잠길 만큼 많은 양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접하고 난 뒤에 베드로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여, 저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자, 어떻게 베드로는 한 무더기 쌓여있는 고기 더미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인됨에 관심이 생길 수가 있었던 말입니까?

 

고기하고 죄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고기 잡힘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죄인됨까지 연장되어 꽂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자가 밀가루 반죽에다 이스트를 집어 넣었구나'를 먼저 생각하지 누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이 들겠냐 말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고기와 자기 죄인됨이 무관한 것처럼 보이듯이, 오늘 본문을 대하는 우리도 이 본문과 우리의 죄인됨이 무관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고 있는 천국은 엉터리이고, 참된 천국은 감추어진 형태로 활동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사도행전 9장에도 니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라면 예수님도 인정해 주었듯이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종교 행위를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최고라고 하니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종교 순수성은  어떤 잘못도 없다고 장담할 만 합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다메섹을 내려가면서 하늘에 계시는 그 누군가를 만나는 되는데 그 만나는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참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참 하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것이 너무나 경악스럽게도, 자신이 핍박했던 나사렛 예수님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잘못되게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자신과 참 하나님과의 만남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못되게 아는 자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우 즉사한다는 것은, 레위기 10장에도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일반 백성들보기에 참으로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사명자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쓰레기 같은 자신들은 죽여도 설마 저토록 숭고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은 아까워서도 함부로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들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향로를 바치다가 그 향로불에서 폭발한 진노의 불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했느냐는 겁니다.  민수기 16장에 봐도, 레위지파에 속하는 고라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하기를, 왜 거룩한 제사장 직무를 너희들이 독점하고 있느냐 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향로불에서 쏟아진 진노의 불에 의해서 250명이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죽이시는 그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즉 "천국이란 어떤 여자가 밀가룩 반죽에 섞어넣은 누룩과 같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주여, 저를 죽이옵소서.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느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아, 천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소개하시는구나 이 참에 잘 들어 놓았다가 나도 천국에 가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죄악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베드로의 고기 잡음이나 사도 바울의 다메섹 만남이나 고라자손들의 횡사나, 나답과 아비후 제사장의 즉사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사람의 죽음을 유발시키면서 진행됨을 보이는 증거들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죽을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왜 천국은 감추진 모습으로 등장됩니까? 그것은 죄악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공개성을 빌미로 해서 가짜 천국과 가짜 하나님을 제조해 내는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6:25-26에 보면,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그 바탕에서, 자신의 죽음경험이 깔려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으로서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천국에 대한 달성은 자신 소관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 소관이라는 겁니다.

 

즉 사도 바울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점은,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 위에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고 펼쳐 나가려고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곧 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의 만남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았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 "왜 너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가?"를 최초로 알려주신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천국 비유를 통해서 이런 취지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살기 위해서, 혹은 천국가기 위하여 말씀을 대하는 그 자체가 죄이기에 시도를 피해서 숨어있는 모습으로 천국이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란, 반드시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는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을 긍정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을 드러내는 그 작업은 순전히 예수님 혼자서 담당하시는 유일한 담당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가고 싶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감춰진 것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소원 안에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나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특정인들이 반드시 구원되어야 될 요건이 들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천국은 우리 소원이라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신의 소원이요,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3: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즉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위해 예수님은 일 하십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이미 죽은자로 계속 들추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룩과 부풀어오르는 밀가죽 반죽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밀가룩 반죽이 따로 손 쓸 빌미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밀가루 반죽은 계속 부풀어집니다.

 

결코 밀가루 반죽의 공로가 아닙니다. 단지 밀가루 반죽은 누룩의 능력을 외부로 발산시킬 뿐이지요. 이런 자가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려고 하는 자신의 욕망이 곧 죄인 것을 알게 해주옵시고, 이런 죄인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계속적인 일이 앞으로도 계속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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