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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함께 하심

아빠와 함께 2023. 2. 3. 13:18

전통적인 신학의 해석방법은,인간에게는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류없는 해석력이 당연히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접근을 시도한 것이었다. 설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오류를 유발할 의도로 주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이다.(천주교 사상) 그런데 성경 자체가 이러한 인간들의 선입견을 반박한다면? 인간의 이해력 자체가 진리를 훼방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면? 본인들부터가 늘 신앙심을 가장해야 하고 하나님을 조작하고픈 의식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하는 이런 문제들과 결부된 말씀 해석이 되려면,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주체의 만남의 장은, 하나님의 말씀 쪽에서 지금도 살아 운동하기에, 성령의 일하심에 따라 인간들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도록 친히 열어주신다. 구약 다니엘이 접했던 '70이레'에 관한 계시도 이러한 묵시의 장으로서 오늘날 다가온다. 하나님의 이 묵시적 활동은 다니엘 시절뿐만 아니라 전 성경의 범위와 연관되어 있기에,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 사건이, '새 언약의 성취'라는 내용을 품고 있기에, 그 십자가 안에서,인간의 주체 문제와 더불어 묵시의 내막을 비로소 살필 수 있다.

 

1. 인간의 의식에서 나오는 해석은 비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의식은‘나 중심으로’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고, 이미 구심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의 특징은 다른 말로 하면 완전, 불변 또는 무(無)모순 또는 독립성, 유일, 절대, 일관성, 항상성, 늘 그렇다는 겁니다. 중심이라는 것은 최종성이에요, 최종성. 어떤 최종성? 의미의 최종성. 모든 의미는 최종적으로 나한테 와야 한다. 완전하다, 변하지 않는다, 모순 없다. 자기 자신이 무슨 모순이 있어요. 유일한 절대, 일관성인 신을 닮은 거예요. 자기가 신처럼 이미 신이 된 겁니다. 나는 절대적이다. 나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다. 이 질서를 부여하면서 이게 제2의 현실이 되는 거죠. 나만 생각하는 식으로 현실이 조성되고 구성됩니다. 그렇죠? 이게 바로 객관적으로 어떤 현실이 있든 간에 나한테 중요한 것은 내가 의미를 주는, 나 중심의 현실만이 나한테는 중요한 거죠. 나한테 중요한 겁니다. 이걸 지키려니까 공포,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지킬 게 있어서 생기는 거예요, 죽으면 그만인데. 죽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지킬 게 있는 거예요, 의식이 있다는 말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의식이 있다는 자체가. 의식이 고장 난 거예요. 이건 망한 거예요.  인간의 의식이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당신 중심이고 늘 공포를 달고 다니는 겁니다. 내가 지킬 게 있기 때문에. 나 중심은 시간과 공간을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으로 나의 현실구조를, 질서를 부여하고 있거든요. 그럴 때 반드시 나 중심에서는 나의 역사가 나오죠. 역사란 말, 아주 거창하죠?  역사는 그냥 기억입니다.기억을 한 줄로 쭉 나열하는 것이 역사에요. 나의 역사는 쉽게 말해서 나의 스토리, 지금은 내가 현재 위치에 있고 과거가 현재의 나를 되게 했고 현재가 나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이게 바로 나 중심의 나의 역사 입니다. 나의 의식이 나 중심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나 중심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즉 역사적 해석, 내 중심적 해석,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말씀은 항상 이러한 나 중심적인 태도에 대해 공격하겠죠?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인간세계에 대해 심판하고 공격하는 언약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2. 언약은 모든 민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언약은 볼링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10개의 핀이 있죠. 볼링공을 10개 핀을 향하여 세차게 돌진하듯 굴려서 각 핀들이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불변하는, 무모순적으로 완전으로 자기가 지탱하고 있는 것을 반드시 전부다 무너뜨리는 거예요. 모두 X.  모든 신학은 사기다. 좋게 이야기하면 모든 인간은 그냥 철학이다. 헛소리다 이 말입니다. 성경에 대한 모든 인간들의 해석은 어떤 해석이든 간에 비역사적 해석이 아니고 역사적 해석 외에는 나올 게 없기때문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인간은 변명하고 핑계하고 방어하고 반발하고 반항하고 그렇게 되겠죠. 반항하는 이유가 나의 기억, 나의 역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다니엘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라 하면 그 내용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모든 인간들이 현실을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공격하겠죠? 심판하고 공격하는 해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인간세계에 대해 심판하고 공격하는 언약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언약. 새 언약이 바로 언약의 완성입니다.볼링공이 쭉 빙글빙글 돌다가 마지막 스트라이크가 된 부분이 언약인 거예요. 기존의 이스라엘을 표본조사해서, 이스라엘이 인간이잖아요, 그 서있는 인간들을 언약이 와서 계속 무너뜨리는 겁니다. 무너뜨리다가 마지막에는 전 세계를 다 무너뜨리죠. 사도행전 17장. 내가 이방민족한테는 그냥 묵과했지만 마지막 때에 죽은 자를 살림으로써 이제는 모든 심판이 이스라엘 경계를 넘어서서 모든 민족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심판할 그 날이 오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의 설교에 보면 오직 이거 하나에요. 전 세계는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심판에 돌입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 '비 동일자'에 의한 복음 전파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라면 이 땅에서 살아있을 동안 자기의 사명과 해야 될 일은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성령과 더불어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안겨줬어요. 이 현실세계에 나가서 무엇을 증거 하라는 말이냐.  진짜 너희는 죽은 자야,  ‘벌써 너는 죽은 자야. 곱게 죽은 자가 아니고 저주받은 자야.’ 라는 것을 말이나 행동이나 태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성도를 그렇게 활용해주십니다. 이 사명,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즐거움 있잖아요, 이미 합격한 자의 즐거움. 여유 있는 자가 피울 수 있는 농땡이. 이런 거. 가진 자의 여유, 이런 거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말은 더 이상 나부터 해서 이 세상 의식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우리한테 의식이 있다고 했죠. 그 의식은 역사, 시간의식과 관련되어 있잖아요. 성령께서 먼저 나를 치는 방식으로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깨끗한 식당에서 깨끗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계란을 튀게 하는 방법, 옷에 계란을 묻히는 방법은 계란을 던지는 방법도 있지만 그냥 앉아 있는데 계란 놓고 망치가지고 계란을 갑자기 때려버리면 계란이 다 튀잖아요. 성령께서 소위 성도라는 우리를 계란으로 간주해서 깨는 거예요. 이놈아, 네 의식은 엉터리야. 깨다보니까 나는 깨졌는데 주변에 깨진 이 종말의, 심판의 현상들이 바깥에 다 튀어버리는 겁니다.그게 비(非)동일자에요.

분명히 같은 인간인데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동일한 인간이 아니었죠. 다른 사람은 승진 같은 거하면 막 좋다고 웃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승진했다고 지 차에 앉아가지고 엉엉 울어요. 엉엉 운다고요. 다 이 잘못은 내 탓이요. 나의 의가 많아서 이런 겁니다. 막 운다고요. 승진된 게 그렇게 나쁜 짓입니까? 그 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본인이 하잘것없는 존재인 것을 놀랍게 자각한 거죠, 놀랍게. 나는 살 자격도 없고 살 필요도 없는 존재로서 주께서 살려내고 있는 겁니다. 살려내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의식하는 자체가 죄가 숨 쉬고 있는 거에요.-왜 의미없는 명분에 빠지는가.

인간이 인간을 분석할 때 이해가 안되는 게 2가지 있어요. 하나는 어떻게 인간이 의미없는 허구의 명분에 빠지는가? 이데올로기, 이념 때문에 사람들을 죽였잖아요. 두 번째가 같은 이야기에요. 스스로 미친 걸 알면서도 왜 못 고치는가? 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마귀 들렸다는 것 외에는 해답이 없습니다. 언약이 하는 일은 인간의 이해력, 해석, 인간의 의식 자체가 무엇을 방해합니까? 진리, 주님이죠, 주님을 방해하고 훼방하는 수상한 괴물이 들어있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그 기능이 이 땅에 주어지는 언약의 효력입니다. 모든 개념은 어디서부터 도출되느냐 하면 십자가에서 도출되어야 돼요 디모데전서 6장 6-8절은 말합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인간으로서 손해 본 게 없어요. 손해라는 게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진리가 없다.-진리는 외부에서 다가와야한다.

인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나의 겸손에 내가 매료됩니다. 절대자 앞에서 나는 유한하다. 내가 이 관계를 보면서 자신을 자부하게 되고 흐뭇하게 여깁니다. 자기가 매혹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착한 일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이제는 아시겠죠? 자기 겸손에 자기가 매혹되니까 다시 그 결과는 뭡니까? ‘역시 나는 잘났다’로 오죠. ㉯결국 나는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다. 나는 나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니까 절망을 싫어하는 거예요. ㉰절망은 왜 싫은데?  왜 안 아파야 되지? 거기에 대한 답변이 없는 거예요.
인간은 내가 정답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무(無)모순적이라 해요. 내가 질문하고 내가 답변하니까 모순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게 바로 모순 덩어리에요. 아무 정답이 없어요. 정답이 없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진리가 없어요. 그럼 진리가 없으면 진리는 외부에서 다가와야죠, 외부에서.

 

■상호영향.

상호영향을 준다, 이게 바로 해석학의 중심사상이에요.  과거에 살던 사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현재 내가 사는 삶과 두 가지의 판을  중첩해서 결합해버리면 여기서 융합이 생기고 이 융합이 바로 진리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성경은 과거 이야기죠. 과거 이야기를 지금의 나의 의미로 해석해낸다. 이게 바로 신학에서 말하는 세속적 해석법이에요. 세속적 해석법인데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해석학에서 나온 거예요. 융합하는 거예요.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답게 되는 거예요.

십자가는 융합이 아니고 그냥 볼링공 굴려서 작살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답게 되는 것.  바로 자기 백성, 성도를 원천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원천,  바로 죄인이고 저주이고 심판의 자리.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시는 거예요. 언약을 가지고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되돌아보니까 죄인은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되는 거예요.  
운명은 끄떡도 없어요. 고정되어 있어요.  모든 원인은  본래의 자리를 안 찾은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구체적으로 율법이죠, 율법과 만남으로써 이스라엘은  목이 곧고, 쉽게 말해서 건방지고 교만한 애굽인이라 탄로나고,  애굽은 하나님으로부터 열 가지 재앙을 받아야 될  대상 . 그러니까 진작 심판받아 마땅한 거예요.  ‘심판받아 마땅함’이라는 이 요소가 갖추어지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내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 ‘나는 진리를 훼방하는 사람이 맞다’라는 그것을 유지시켜 주는 거예요. 누가? 성령께서. 그것 때문에 죽을 때까지 우리의 자아의식은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늘 우리는 건방떨고 교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자인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인간과 함께하시나? -'우연을 능가하는 불가능성'

이스라엘을 난관에 집어넣어요, 맞닥뜨리는 모든 인생사에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서는 더 이상 할 게 없게 만드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끄십니다. 황무지인 광야 그리고 요단강 건너가고 홍해 건너간 것, 이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반드시 무엇을 통과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이 스스로‘나의 뜻도 아니고 나의 의지도 아닙니다’를 확정짓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예요. 그걸 체험하게 하시는 거예요, 체험하는 것.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한테 50억을 준다. 주여, 이것은 분명히 내 뜻이 아닙니다. ‘우연을 능가하는 불가능성’이에요.  아브라함이 100세 때 어린 아들을 얻는 거예요. 어린 아들을 생명이라 보고 아브라함을 죽음이라 본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죽음 속에서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인간에게서는 있을 수 없어요. 죽어야 된다는 조건을 인간은 거부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 우리 죽음을 활용하는 일관성이 있다는 그 점을 우리는 감사히 여겨야 되죠. 마르다 여동생 마리아가 그 귀한 향수를 아낌없이 주님 발 앞에 던져버립니다.  박살내버리죠. 향수병이 깨진다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것이 깨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예수님은 자기 장례식을 준비한다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장례식을 누구의 장례식으로 미리 보여줬습니까? 마리아의 자아, 자기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장례식을 미리 보여준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시신이 들어있는 하나의 관이라고 볼 수 있죠.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은 바로 불가능성으로 몰아 부침. 나의 노림수조차도 예상 못하는 지경으로 몰아세웁니다. 기차는 터널을 통과하지만 성도에 터널이 마중을 나왔다고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성도가 버티고 있는데 주님이 만든 터널이, 내가 달려가는 게 아니고 터널이 와서 나의 중앙지점에다가 그 구멍을 뚫어버린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뻥 뚫린 공백, 빈 자리가 생기는 겁니다.

■언약에 의해 결정 난 자리가 천국 가는 자리, 지옥 가는 자리에요.

왜 주님이 그렇게 하느냐 하면 천국과 지옥의 운명은 둘 다 자리로 결정하는 것이고 이 자리는 일방적으로 언약에 의해 결정 난 자리에요. 제가 아까 인간의 모순점 이야기했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챙기면서 살기 마련인데 이게 완전히 미쳐버릴 경우에는 명분이나 이데올로기, 이념에 미쳐버리면 정신도 없이 사람 막 죽여 버리잖아요. 그건 본인도 어떻게 못해요. 왜냐하면 본인의 자리가 저주받을 자리로 형성된 겁니다. 개코도 아무것도 없으면서 천국, 주님 하나로 기뻐하는 것은 본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런 자리를 배정받은거죠.자아는 그 자리에서 결과로 나온 것이 자아구요. 죄 많은 자기 백성들 속에다가 주님의 자기 자리를 펼치시기 위해서 인간들은 모르고 주님만 아는 그 길을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행해서 이끄신 겁니다. 계속해서 난관에 부딪치게 하면서 그걸 뚫고 뚫고 뚫고 가는 거예요, 계속해서 전쟁을 통해서. 전쟁에 승리하는 방법은 어떤 힘을 비축해서가 아니라 그냥 붙이심에 붙여주심에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주께서. 적들 스스로 알아서 와서 박살나도록! 우리는 적을 이길 수 없었고 우리는 적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지만 함께 계신 분이 우리한테 의도적으로 맞닥뜨리게 하신 그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 세상을 못 살도록 조치하셨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아까 계란 이야기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부터 계란으로써 깨질 때 이 계란 안에 주님이 계셨구나, 라는 사실을 (계란이) 튀는 방식으로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 안에 어떤 괴물이 있는데 그 괴물이 자꾸 어느 쪽으로 몰아가느냐 하면 너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인식을 자꾸 주는 거예요. 그러한 생각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인간들은. 어디서 오는지 몰라요.

■언약 구조

케이블카  쭉 내려오죠. 십자가까지 내려옵니다. 누가?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십자가에 내려오잖아요. 성경이야기죠. 내려오면서 여기 이 줄에 대롱대롱 뭐가 매달려 있습니까? 케이블카가, 대롱대롱. 이게 이스라엘 성경 역사로 나와 있죠, 대롱대롱. 자, 대롱대롱 이것을 케이블 선에, 여자의 후손이라는 개념이 체험을 담아야 되잖아요. 그 체험은 인간의 체험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 본인의 체험이니까 그 체험의 마지막이 죽기까지 낮아진 십자가에서 완성되죠. 높은데서 낮음까지. 그러면 이 사실을 알려면 여기 매달린 인간은 몰라요. 어떻게 아느냐? 케이블카에서 창문 열고 밖으로 튀어나가야 돼요. 나와서 보면 아, 내가 있는 이 케이블카 세계가 진리가 아니구나. 진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형편에 있다는 것을 알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지를 못해요. 창문 열고 나가는 순간 으악~ 이게 추락이 된단 말이죠, 추락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창문 열고 나가는 사람 전부다 으악~해서 저주받게 하시는 거예요. 그럼 매달려 있는 사람은 뭐냐 하면 성신 받은 선지자들하고 여호수아하고 갈렙 같은 사람 또는 룻 같은 사람. 하나님의 언약적인 특별한 관계, 신약에 와서 보면 그것을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성령 받은 사람은 매달려 있다는 거예요, 이게. 케이블 줄에 매달려 있잖아요. 독자적이 아니죠?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이게?  이 구조가 전부다 언약 구조이기 때문에 이게 새 언약에도 그대로 새 언약 구조를 전개합니다. 발산하거든요. 구약이라는 옛 언약에 매달려 있다면 지금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 이 선에 매달려 있는 동글동글 이 사람들이 성도요, 이게 바로 참 교회가 되는 거예요. 창문 열고 뛰어내릴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인간의 육적인 의식은 뭡니까? 의식은 이것을 보고 싶어 하죠, 의식은. 보고 싶어 하니까 주님께서 성령께서 으악~하게 만드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계획과 기대는 으악~하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은 벌써 케이블카 창문 열고 지금 떨어지고 있는 중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날마다 우리의 괴물 같은 것은 이 나락으로, 바닥으로 떨어져야 마땅하죠. 매일같이 피어오르는 내 생각은 저녁때쯤 돼서 발길 차여가지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하고 우리 면상을 차버리죠. 으악~하고 떨어지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이게 바로 신학이에요. 신학이 떨어져야 돼요. 발길질로 차여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사람 상대로 속 타지 마세요. 우리는 혈과 육과 상대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공중권세 잡은 악마하고 상대하는 거예요.

■네 개인에 속한 인간이 아니고 내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돌려받으시는 하나님-함께 있음

모든 인간은 죽은 자이고 재앙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에요, 성경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한 하나님의 그 계획 때문이고 우리는 그 케이블카 줄에 매달린 존재에 불과해요. 막장 드라마 아닌 게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아담과 하와가 결혼한 것 자체가 막장 아니에요? 둘 다 죄인 되었는데. 우리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여보, 우리 이혼합시다, 아니잖아요. 그들에게는 주의 말씀을 위반한 게 문제가 아니고 이미 마귀가, 악령이 들어와 버렸잖아요. 악령이 들어와 버렸으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아이디어, 어떤 인생을 계획하더라도 바로 진리를 훼방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습니다. 내가 산다는 자체가 막장 드라마에요, 막장 드라마. 그런데 거기다가 겸손을 논하고 신앙을 논하고 하는데......

하나님과 함께 있음이에요. 신앙이 아니고 함께 있음이에요. 죽어 나가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것은 함께 있음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삭은 내 자식이다, 아니다? 내 자식이 아니고 누구의 아들로 돌려줘야 돼요. 주인이 와서 찾아가야 돼요. 그래서 아낌없이 죽이는 거예요. 죽일 때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고 네 손으로 죽여서 돌려받겠다는 거예요. 돌려받을 때 그 돌려받는 그 취지, 그 의미가 담기게 하는 존재가 성도입니다. 성령이 온 성도가 그런 거예요. 담기게 하는 방법은 바로 우리 육신 자체부터 그 원천부터 건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마귀에 속했다는 사실을. 마귀에 속한 정도가 아니고 마귀에게서 도저히 못 벗어난다는 것을 건드리면서 우리를 데려간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받은 복입니다. 언약은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본래의 자리, 우리의 원 자리, 십자가 지신 주님을 진리를 훼방하는 그 자리가 원래 우리가 있던 그 자리라는 거예요. 우리는 언약을 반기고 있어요. 제가 믿을게요, 믿을게요. 성급하게 믿을게요, 이렇게 한다고요. 네가 나를 믿는 게 아니고 다루어도 내가 다룰 거야. 네가 나를 다루는 게 아니고. 그냥 네 자리에 가 있어. 네가 박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너로 하여금 대략 난감하게 만들어줄게, 내가. 그러니까 미리 어떤 난관을 예상하지 마세요. 난관을 예상하게 되면 거기서 우리는 비극을 빙자한 희극이 나와요. 끝내 이기리라가 되어버린다고요. 그런 것은 우리한테 전혀 해당되는 게 없어요. 끝내 이기리라는 건 없어요. 단지 우리가 예상보다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게 이긴 거예요. 내가 빨리 지고 끝내는 것이  이기는 방법이에요. 게임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내 인생을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내 인생을. 나의 계획, 미래를 무효화시키는 겁니다  그걸 사자성어로 뭐라고 한다고요? 영구 없다. 죽으면요, 내가 없어요. 죽으면 그 동안 살면서의 고민거리가 없어요. 처음부터 우리는 그러해야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해야하는.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존재로 지금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네가 죽어도 살았고 살아서 날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이 말은 난 이제부터 뭐든지 하게 하시면 할 수 있다, 가 되는 거예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인간의 역사 의식을 문제 삼으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타인으로 인하여 속 터지지 마세요. 다른 말로 하면 신앙을 신비화시키지 마세요. 신앙은 현재 있는 이 모습 그대로에요. 이게 신앙이에요. 신비가 되면 이것 있고 또 따로 있는데 현재 이 모습이 이스라엘의 모습, 성도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자기를 신앙으로 꾸미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령은 굉장히 냉혹합니다. 우리가 꾸미는 그런 신비를 가차 없이, 우리를 난관에 부딪치게 해서 소용없게 만들어요. 빡시게 금식하고 뭐 기도하고 철야해가지고 주여, 믿습니다 하면 성령이 찾아와서 그딴 거 소용없게 만들어요, 그딴 거. 아무 소용없게 만들어요. 그 다음에 봅시다. “인간의 주체 문제를 다루십니다.”  인간을 문제 삼는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주체의 만남의 장은, 하나님의 말씀 쪽에서 지금도 살아 운동하기에, 성령의 일하심에 따라 인간들의 이러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도록 친히 열어주신다”  구약 다니엘 이 접했던 ‘70이레’에 관한 계시도 이러한 묵시의 장으로서 오늘날 다가온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역사 의식 자체를 문제 삼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다니엘 70이레에 대해서 제가 아는 한 이런 해석이 없어요. 전부다 역사적 해석이에요. 세대주의, 여호와의 증인, 흔히 말하는 이런 해석들이 전부다 역사적 해석이에요. 그런데 그 70이레의 해석은 역사적 해석을 하는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 바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복인 줄 알아라 이 말이죠. 너희들 복인줄 알아라. 70이레를 역사적 해석하는 내가 왜 죄인인가, 왜 지옥 갈 인간인가를 알려줄 해석으로서 다가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이.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순수한 신앙심만 있으면 이해된다는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성경을 봤단 말이죠. 그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제 말은.그게 아니고 그렇게 한 그 자체가 오류를 유발시킨다는 식으로 해석되어야 된다는 그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위에 있고 우리가 찾아가는 식으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자는 이 사고방식은 바로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 그것을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십자가를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를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를 이용해서 내가 천당 갈 생각하지 말고 오직 주께서 하시는 일에 같이 참여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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