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제단에서 발생 되는 죽음의 계열을 따라 종착점인 십자가 제단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피가 땅에 뿌려지고 모든 의로운 피가 예수님의 피의 의미에 통합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내셨고,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피의 언약이 완성되면서, 잉태될 자격이 없는 자들이 잉태치 못한 한 분 안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담아 생산된다. 언약 안에서 벌어진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실상은 생명이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성도는 이미 생명 안에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신 죽음과 함께 죽는 것을 기뻐한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신 ‘네 안에 믿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신 그 믿음은 바로 창세 전에 예수님이 아버지를 믿은 예수님의 믿음이 그들 안에 미리 들어가 있는 것이었고 아들의 믿음이 십자가에서 성취될 때까지 감춰져 있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아들을 다시 살리신다는 약속을, 죽음에서 생산되는 생명의 언약을 믿으셨다. 믿는 행위는 오직 예수님의 고유권한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3:22~23)
예수님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십자가로 다 이루셨고, 그 완성된 믿음의 때가 덮친 자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행함이 ‘의’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내려가, 십자가 사건이 그들 안에서 활개 치기에, 내 안이 저주의 공간이고, 그 안에서 저주스러운 죄만 나오니, 뭘 해도 더이상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된다. 그것이 비참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바람처럼 시원하게 느껴질 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바라본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사람들이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라고 궁금해할 때,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 남자’라든지 ‘없지 않은 것이 아닌 여자’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잘난 남자, 이쁜 여자’라는 상식적 표현이 아니면 이유 없이 짜증이 올라오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동일한 질문에 대해, 문명화된 기존질서에서는 이름과 등록된 번호를 이용해서 혈연관계와 주소를 손쉽게 알려 줄 수 있다. 생물학적이나 지리적 정의가 삭막하다면 좀 더 철학적인 부분으로 접근도 가능하다. 인류의 문화적 기술적 발전과 함께 언어도 섬세하게 진화하면서 ‘나’라는 주체가 더욱 분명히 설명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단순히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 영역까지도 더 심오하게 나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현실 세계는 점점 커지는 ‘나’들의 욕구가 만들어내는 요구를 충족해줄 만반의 준비를 쉬지 않고 하고 있고, 그렇게 내가 내 안에 욕망의 실체에 관심을 돌리지 않게 돕는다. 이렇게 기성 사회는 내가 나의 충성 된 종이 되기에 손색이 없도록 모든 것을 제공해줄 용의를 표한다. 모든 것을 나의 가치를 위해서 찾고, 구하기만 한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참이고, 진리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요8:14) 이를 듣고 혹시 그 기이한 표현에 매료되어 나도 예수님처럼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지를 찾아내고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왔다면 그 뒤에 말씀을 계속 들어보면 된다.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주님은 사람들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 않으신다. 다만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너희가 알고 있는지를 물으신다. 너희들이 예수님만 관심이 있고, 예수님만 중요한지를 물으신다. “너희들이 나를 알지 못하니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요8:19)
인간은 일생을 동일한 평면상에서 좀 더 꼼꼼히, 좀 더 열심히 수색하고 탐구하며, 좀 더 지혜롭고, 창의적이고, 인류에 유익한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며, 죽을 때까지 갇혀있는 공간 안에서 뺑뺑이 돈다. 그러나 해 아래에 새로운 것이 없고, 이곳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벌어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형벌이 작동되고 있다. 아담 안에 인간은 그저 겸허한 맘으로 이 땅에서 마땅히 받을 벌을 받으며, 우리가 깨지고 망가지도록 조치하신 하나님의 뜻을 더욱 알게 하심을 구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면 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주의 심판대에 서기 전에. (전12:6~7) 그러나 사람은 ‘나’를 안다고 여기기에 진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지고 생명 나무로부터 차단되어 더이상 아무것도 아닌, 텅 빈 껍데기 같은 흙덩이가 무엇에 조종을 받고 있기에 ‘나는 완전할 수 있다. 나는 나뿐이다’라는 욕망을 품고 있고 그것을 스스로 버리지 못할까. 나는 이런 의문을 스스로 품을 능력도 없고 그 대답을 들을 권리도 없는데, 내부에서 이런 이질적인 외부요소가 작동되고 있다면, 나는 더이상 그 ‘나’가 아니라 유일한 ‘나’이신 그분 안에 ‘우리’로 사라진다.
인간으로서는 결코 납득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세상 방문, 그것도 죄인의 편에 서실 수밖에 없는 육신을 입고 오셔서, 잠잠히 계셨으면 좋으련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성령이 지시하신 것을 온전히 행하셨기에, 결국 인간의 손에 범인(凡人)처럼 죽으셨다. 미흡하기 짝이 없는 메시아,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서 찾아오셔서 우리 안에 꿰맬 수 없는 공백을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 틈 사이로 비친 내 안에 죄의 바탕을 어찌 볼 수 있었을까.
수련회에 참석해서 말씀을 들으려고 한 죄가 이리도 악독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면서, 강의가 2강까지 정주행했고, 강의실은 어느새 주체분쇄기로 변해있었다. 이제 네가 입은 육체를 너 말고 복음에게 말씀의 판으로 내어주라는 재촉이 밀려온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주인인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며 버티기를 마지않았고, 육체의 소욕보다 더 센 낯선 소욕이 부딪쳐 주셨기에, 마침내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욕망이 나인 것처럼 나를 진두지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죄가 내 안에서 왕 노릇 하며 명령한다.
‘복음을 열심히 들어야지. 자세가 그게 뭐야? 좀 더 집중 안 해? 그 복음이 너를 흠 없이 온전하게 만들어 줄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좀 더 가치 있기를 원한다면 미흡함이 없도록 완벽히 이해해야지’라고 마치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 나는 없었고 나의 가면을 쓰고 착 달라붙어 구원받기를 시도하는 마귀가 실체를 드러낸다. 마귀는 이제 갈라디아서를 듣고 천국에 가기를,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하고자 하는 헛된 소망으로 나를 단속해준다.
형편이 이러한데 말씀을 듣고자 애를 쓸수록 더 미궁으로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이제 안 들으면 될 것인가. 아니면 듣더라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하면 될까. 아니면 모든 것을 성령께 맡기면 될까? 무엇을 하든지 내 안에서는 그것을 선악적 법체계로 바꿔버리는 시스템이 쉼 없이 작동한다. 그러니 어느 것을 하든 안 하든 다 나의 행함이 된다.
이런 나를 강력히 밀쳐내시는 성령의 소욕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주의 뜻에, 주님의 손에 넘겨지고 나서야,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마귀가 순적히 지옥으로 보내지도록 마귀의 뜻대로 말씀과 혼연일체가 되기를 힘쓴다. 이렇게 철저히 율법의 종이 되어 주님의 행위에 대항하며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루신 공로만 빛나도록 차이를 만들어내는 ‘그것’이 된다. 하나님에게 유일한 주체인 ‘나’는 예수님 한 분뿐이시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사람에게 주신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는 법은 아담에게 지키라고 주신 법이 아니었다. 첫 번째 아담은 법을 지키는 주체가 아니라 이 율법의 구조를 담고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여지는 진흙 그릇 이었다. 아담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필요 없었고, 하나님 말씀의 움직임이 곧 자신의 움직이고, 하나님이 계심이 자신의 있음을 대신하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마치 엄마 품에 있는 아기처럼.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로 말미암아 자기 몸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나를 보는 몸, 죄를 표현하는 육체가 되었다. 죄의 원천인 마귀는 인간들 안에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신이 되어, 인간의 정신이 되어, 자기의 실체를 메우는 주체자로 인간을 사용해왔다.
내가 내 안에 살기에 말씀도 복음도 나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규명해보려는 도구로 전락한다. 아담 안에 모든 인간에게 말씀은 머무를 자리가 없고 그런 인간에게 보이고 들리는 말씀도 복음도 모두 다른 말씀, 다른 복음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유일하게 진짜 여호와를 안다는 자칭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8:37) 이스라엘은 단지 다른 복음이 무엇인지 이 세상에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뽑힌 하나님의 샘플이었다. 진짜 복음은 오직 하나님의 죽음과 하나 된 죽음 속에서만 나온다.
하나님의 참뜻이 담긴 해석은 특별한 죽음 사건으로만 등장한다. 십자가 사건 이전부터, 창세 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정된 자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피흘림이 있었다. 아벨의 죽음으로부터, 이삭의 죽음, 요셉의 죽음, 모세의 죽음, 홍해 바다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집단적 죽음, 850 대 1의 싸움에서 나무에 물을 끼얹듯 죽음으로 들어간 엘리야의 죽음, 우리야의 죽음, 요나의 죽음, 그 외에 수도 없는 선지자들의 미리 맛본 죽음.
그때 당시, 이 사람들이 다 죽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올라올 수 있다. 그러나 이 오류는 내가 성경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말씀을 보고 듣기 때문이고, 그때마다 결코 빠져나오지 못하는 폐쇄공간에 갇혀있고 외부의 참 진리와 차단되어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선지자들은 죽을 뻔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처럼 살아난 사건을 보인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미리 심겨있던 외부적 요소인 낯선 한 분의 죽음을 보이는 역할자였고, 자신들이 진짜 죽었든지 아니면 살았든지 그 결과와 상관없이 그들은 죄로 인해 이미 죽은 자임을 감지하고, 언약궤에 뿌려진 피의 의미를 알게 된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살든지 죽든지, 장차 다가올 십자가라는 최종지점이 되시는 예수님의 때에 볼 것을 고대하고 즐거워하며 그리고 그것을 미리 맛보고 기뻐했다.
신비한 생명 탄생의 과정에서, 오직 하나의 정자만 난자와 만나 생명을 이룰 수 있음을 돋보이려고 수억 마리의 정자들이 들러리로 바짝 따라붙어야 한다. 약속으로 말미암은 단 하나의 정자만 생명을 이룰 자격이 있고, 수가 아무리 많아도 남은 정자들은 부활 생명의 신호가 시작되면 모두 밖으로 폐기처분당하게 된다. 잉태치 못한 한 분의 다 이루심이 빛나도록 구원받지 못할 수많은 잉태한 자들이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려는 불굴의 행함으로 잉태치 못한 분을 대적해야 한다.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완료 안에서,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난 자를 핍박하는 십자가 사건이 반복되면서,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갈4:26) 예루살렘이(마23:37) 내어 쫓기고,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로 말미암아 계집종의 자녀가 내어쫓기고, 나로 인해 잉태된 복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될 자격이 없는 복음으로 쫓겨나는 현상이 예수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의 내부를 통해 매일매일 벌어진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 태생들은 하나같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사이에 이리 튀고 저리 튀는 공의 모습 같다. 철저히 성령에 놀아나기에 어디로 튈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완전한 어린아이인 것이다. 자기 안에 담긴 것이 흘러나올 때 주변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어도, 정작 자신은 알지 못하기에 철저히 내가 배제된 주의 증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증인은 어디까지나 증인일 뿐이지 사건의 해석자가 아니다. 자기 이마에 붙은 보이지도 않는 메시지를 타인의 반응으로 자기가 자체해석하려는 것은 스스로 마귀의 올무에 더욱 빠져드는 꼴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약속대로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시어, 주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온전히 망하고 무너지고 버려지도록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마5:17~18) 우리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이미 죽은 자가 되고, 이 육체가 율법과 함께 폐기될 수 있는 운명에 합류된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를 지킬 필요 없는 패배자로 만드시고,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문둥병자로, 욕을 얻어먹고 비난받아도 할 말 없는 자로, 쫓겨나도 할 말 없는 자로 완전히 저주의 자리에 놓이게 만들어 주시고, 그렇기에 주님의 몸으로 교체될 자격자가 되었다는 낯선 소식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만드신다.
댓글
이근호
가짜가 대들면 진짜는 할 말은 잃는다. 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천국에는 경찰이 없다. 죄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마저 고소당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메시야라면 왜 심판하지 않는가?”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했다.(마 11:3) 이미 이 세상이 심판받았기에 새삼 심판할 것은 없고 구원할 자만 생겨난다.
보편적 죄 세상을 ‘지옥’이라고 부른다. 예외없이 죄인들이다. 지옥을 지옥이라고, 죄인을 죄인이라고 지적해주는 분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