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마련되고 자의식을 소환하는 대화가 시작되면 왜 고통스러울까.
나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인 코스프레의 증상은 말씀은 이야기하지만, 말씀으로 작동되는 진짜 속사정은 억누른다. 혹시라도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민망함과 나도 모르는 내가 발각될까 봐, 그래서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며 복음으로 가드를 친다.
말씀에 관심도 없고, 말씀과 아무런 상관없는 남편과 아이들이 한집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되어 있다. 그렇게 배치되어있다. 나의 복음판타지는 남편과 아이들을 블레셋으로 그리고 나를 이스라엘로 마음속에 구분 짓게 했다. 그들은 답답한 상황에도 떠나지 않고 곁에 남아서 나를 안스럽게 여긴다.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히 여긴다.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착각도 간혹 한다. 돌고 돌아 그 모든 이유가 밝혀지는 때를 만난다. 우리가 동질이구나. 같은 것끼리 모여서 전혀 힘들 것이 없는데 왜 스스로 애를 썼지?
성경은 독서목록에 책 한 권쯤으로 읽었고 교회는 다녀본 적도 없는 남편에게는 교회와 이단이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있지도 않은 하나님, 예수님을 믿으라 사기 치는 종교단체만 있고, 그 사기에 말려들어 보이지 않는 허황한 것에 도취 되어 나약하게 휘둘리는 한 사람이 눈에 보일 뿐이다.
뉴스에서 종교계와 거기에 속한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추한 모습들이 간간이 보도되기라도 하면 남편의 합리적 판단이 힘을 얻어 옆에 있는 자를 찔러본다. ‘너도 그의 당이 아니냐? 너도 예수 믿잖아’ 이제는 이런 추궁에 더이상 대꾸하지 않는다. 말씀을 듣는다고 믿을 수 있는 예수님이였다면 죽기 살기로 남편과 아이들에게 말씀을 듣게 했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그토록 부인하려 했던 내 본모습을 대면하도록 남편은 옆에서 충실히 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문이 열리네요~그대가 들어오죠~첫눈에 난 내 사람인 걸 알았죠’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는 내 모습은 바다 위로 기어 올라오는 짐승의 손아귀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모습이었고, 이 세상이 온통 악으로 꽉 찼기에 어느 한구석, 피할 집도, 피할 길도 없는 몽땅 복음의 현장이 되어 있었다.
선은 없고 오직 악만 가득찬 이곳에서 낯선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내가 마귀의 껍데기인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천국은 이 세상에서 거론되면 안 되는 것을 이미 알게 되는 것이다. 지옥 동기생으로 저절로 상대방에게 입이 열린다. ‘당신과 아이들도 지옥을 가는 이유는 알고 죽어야 할 텐데. 죄가 뭔지 알고는 죽어야 할 텐데. 태어나서 죽는 것이 그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데’ 가족에게서 ‘그게 뭔데?’라는 질문이라도 받기를 기대하는 것조차도 자격 박탈되었음을 이제는 알기에 무슨 말을 해도 결과에 구애받지는 않는다. 부끄러움이 누구의 몫이 되는지도 걱정되지 않는다.
‘원래 잘 통하는 가족이었는데 네가 스스로 차단하고 고립시키며 사니까 가정이 이 모양이잖아. 너, 그렇게도 혼자만 살고 싶었니?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예수와 무슨 상관이야?’ 구구절절 뱀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뱀처럼 지혜롭지 않고서야 비둘기처럼 순결한 영역으로 접근조차 할 수 없다. 둘 중 하나만 있는 경우는 없다. 이 세상 신에게 눌려 불의함에 온전히 충성하지도 못하는 자가, 의로운 것에는 충성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눅16:11)
카운커테너의 천상의 목소리를 듣고 ‘잘 부른다’라는 생각이 날아갈 정도로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수많은 댓글을 보며 나를 의심한다. 마치 뭔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복음을 듣게 되었고, 천상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눈물 날만큼 아름다웠고, 이제 더이상 살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 마음의 중심에 도대체 ‘나’가 있는지 ‘어린양의 죽음’이 있는지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것도 믿어지지 않으면서, 정말 내가 스스로 시작한 것이 없다는 그 초라한 변명 하나 붙들고 말씀을 듣고 강의를 듣고 있는데 그런 행위가 모두 하나로 치우쳐 끝까지 내 믿음을 의심치 않으려고 하나님을 끊임없이 시험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빨리 자의식의 불을 꺼버리는 시도를 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잡생각을 없애는 데는 최고라는 국룰에 따라, 잡일에 집중한다.
이런 낭패가...일이 손에 하나도 잡히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하나님을 시험하러 가야 하나. 결국 이것 뿐인가. 다시 강의를 들어보고 말씀을 들어보고 엎어보고 뒤집어보고 돌려보고. 양털에만 이슬이 젖게 해달라 했다가 그걸로 부족하다고 이번엔 양털만 빼고 사면 땅을 이슬이 젖게 해달라는 꼴값을 떨다가, 마침내 응답을 얻는다. ‘하나님은 너와 상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기드온의 시험에 응하신 것이, 발람 선지자에게 발락의 신하들을 따라가도록 허락한 것이 결코 사람의 뜻을 들어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떤 뜻과 행함도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일뿐인 것을 보이시려고 응답하셨다.(민22:22) 그 진노가 쌓이는 지점이 미리 앞서 비친 곳이 제단이었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보이는 도구일 뿐인 것을 제단을 경유 해서 알게 하신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창조주의 존재를 시험하면서 나를 믿고자 하는 마음과 살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 맘대로 못하게 하는 장본인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국 사람이 아니었다.
‘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다 하라고. 어차피 맘대로 안 되니까’ 네가 네가 아니고 그러니 네가 너를 통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분이 벌이시는 전쟁에 신체가 ‘터’로 제공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아무것도 아니면 되고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데 그렇게 어려워?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오히려 무능이 유능이 되고 불가능이 가능이 되어, 전쟁같은 후들거림이 멈추고 평정을 찾았다면 도리어 두려워해야 한다. 누가 주인인지 점검 당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 평생을 겪어야 하는 수고로움은 두려움이다. 한 번도 두렵지 않은 적이 없는 속을 무엇이 막고 있기에 ‘나는 괜찮다’라는 착각에 빠지게 하는지. 차라리 피 튀기는 살인과 강간이 수시로 일어나는 전쟁의 현장이 정직하다. ‘무섭다고그래요무섭다고그래요’ 틈도 없이 밀려오는 두려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냥 두려움 자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현실로 드러날 때, 그 현실 건너편에 참 현실의 공간에 대한 소식이 들리게 된다. 지옥의 출구와 천국의 입구는 서로 다른 공간에 있지만 같은 사건 지점에 놓여있다. 서로 반대편을 바라보며 한 지점에 붙어있다.
‘살고 싶으면 도망가’라는 말보다 더 강렬하게 ‘죽기 싫으면 힘껏 도망가’라는 충동질이 올라온다. 어느 순간? 가정, 신앙, 그리고 나, 내가 믿은 모든 것이 눈앞에서 무너질 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른 믿음, 목숨까지 버려져도 상관없다는 그 다짐이 그때는 진짜 거짓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거짓으로 드러난다.
베드로가 좇은 믿음은 국가권력 앞에 그리고 종교 권력 앞에 그렇게 무너졌다.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주변에 따르던 모든 자가 도망갔지만(마 26:56), 베드로는 그때까지도 ‘혹시’를 놓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를 놓지 않았다. 베드로는 ‘나는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는다’를 놓지 않았다. 믿음과 자신 사이에 이전보다 간격은 좀 넓어졌지만, 여전히 끝까지 따라 붙였다. 그렇게 베드로는 자기부정이 기다리고 있는 그 자리로 끌려가고 있었다.
‘너도 그의 당이라. 너의 말소리가 그것을 증거 한다. 너는 예수 편이잖아’라는 주변의 집요한 추궁에 베드로는 ‘어떻게 내가 복음을 아는 것을 알았지? 천국 갈 자인 것을 어떻게 알았지? 정말 기쁘다’가 아니었다. 예수 아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조차 수치스럽고 두려고 그리고 분노하며 베드로는 확실하게 쐐기를 박으며 예수님을 부인했다.
주님의 택한 백성의 자기부인이 시작될 지점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바로 그 자리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백성 구출방법이시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9)
조금의 희망도 남겨놓지 않으시고 완전히 죽으셨다. 혹시나 하는 반전은 전혀 없었다.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하고 약속대로 진행하신 단절프로젝트가 먼저 하나님과 아들 사이가 갈라지며 시작되었고, 예수님과 양들 사이가 갈라지며 완성되었다. 쪼개짐 안에서 벌어진 저주의 불심판이 아버지와 아들을 온전히 하나 되도록 이끄시는 유일한 문이었고 왕과 제사장이 하나 되시는 흠도 티도 없는 나라가 창조되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요8:56) 자기가 사랑하는 약속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아브라함은 미리 믿음의 노선을 따라가서 십자가 위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자손을 죽이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어느 지점에 그분의 진노를 쌓고 기다리시는지를 미리 보았고, 하나님의 분노가 응축되는 자리에 마땅히 형벌 받아야 할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계심을 보았다.
아브라함의 기쁨은 자신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기쁨이 아니라 땅에 오셔서 친히 제물이 되어 제사장직을 완성하신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 되기 위해 이루신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보고 기뻐했고, 아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아버지의 기쁨으로 기뻐했다. 이 기쁨에 동참될 주의 백성은 오직 예수의 찢긴 살과 흘리신 피에 참여된 자들이고, 이들은 아무런 한 일이 없다는 고백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는 자리, 생명을 주시는 분을 죽였다는 나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아픔과 눈물을 담는 자리로 내려간다.
피의 분노로 참혹하게 도륙하시는 임마누엘의 전쟁터에서 분명 멸하시는 것은 마귀인데 그 일의 여파가 진동되면서 내가 짓밟히고 내가 당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내가 판타지라고 흔들어 깨우시는 성령의 도우심은 우연히 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반복이기에 손에 잡히지 않으니, 곧바로 우리는 다시 마귀에게 사로잡혀 인간이 된다.
나 자신도 역겨워 죽을 만큼 미운 흔적이 몸을 덮고 있을 때 더이상 나를 쳐다보고 싶지 않고 우리의 받을 저주가 대신 임하신 곳을, 예수님의 고난이 만든 공의로운 피의 음성이 들리는 쪽을 쳐다본다. 두려움이 틈이 없이 꽉 찬 땅의 현실 너머에 내가 알지 못하기에 나는 넘어갈 수 없는 그 공간에는 주의 사랑이 빈틈없이 충만하다.
유형이 무형이 되고 무형이 정말 실재가 되는 현상은 유형의 신체와 신체가 만나서 일어난다. 네가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될 수 없는데, 너의 속에 담아온 전쟁터가 내 안에 담긴 전쟁터와 동일할 때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다른 색깔의 경험을 나누는데 동일한 절망을 내놓는다. 태어난 것이 저주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자에게 대신 퍼부으신 심판이 우리에게 덮치는 순간, 주님의 발에 목이 밟혀 꼼짝도 못 한 채로 악마와 내가 한 몸인 현실에 낙망하고, 주께서 대적들을 이 몸과 함께 친히 쳐 죽이신다는 소식이 차라리 기쁘다. (여호수아10:24~26)
생각없이 무슨 말이 오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가볍게 수다 떨었던 것 같은데 상대에게 불쾌감을 안겨준 결과가 왔을 때, 전한 사람도 빠지고 그걸 들었던 사람도 빠지지 않으면 주님과 악마의 싸움은 가려진다. 전쟁터에서 부디 왕의 의로운 전쟁을 가리지 말고 옆으로 비키라고 그렇게 복음이 왕왕거리는데 굳건히 길목을 지키며 ‘책임은 내가 진다. 이 길은 내가 지킨다’라고 되도 않는 완악함을 드러내게 되니, 아모리왕 시혼처럼 개박살이 나서 갓길로 치워지는 만신창이가 마땅하고 도리어 그런 징계가 고마울 따름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 먹은 티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가. ‘하나님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저 여자가 먹으라고 했어요’ 여자도 지지 않았다. ‘뱀 때문이에요. 뱀이 먹으라고 나를 꾀었어요’ 둘의 태도는 하나도 멋지거나 의젓하지 않았다. 나만 살면 된다는 선악적 판단대로 그들은 책임을 야무지게 전가하며 진짜 추궁을 당해야 할 최종 대상이 드러나도록 충실히 역할을 했다.
이제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의 모습은 이러하다. 요나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야 하고, 베드로처럼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서 주를 부인하고 저주하는 코너에 몰려야 한다. 자격제로의 상태에서 우연히 덮친 사랑에 날벼락 맞듯 맞아 죽어, 주 안으로 던져지는 의식 불명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심판대에서 왕의 판단하심에 어느 것도 긍정하거나 부인하지 못하고 그저 의아해한다. ‘어느 때에 제가 그리하였나이까’(마 25:34~40)
이근호 댓글
“주님의 택한 백성의 자기부인이 시작될 지점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바로 그 자리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백성 구출방법이시다.”
0에서 시작하는 사람과 1에서 시작하는 사람의 차이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합니다. 0은 없음이며 1은 최초의 있음입니다. 주님은 1(=있음)을 0(=없음)으로 가져오셔서 0을 담아 다시 1이 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매일같이 머뭇대지 말고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나와 예수와 무슨 상관이 있나? 언제 봤다고?”(마 8:29)
1이 0을 의식하고 반응을 보일 때, 비로소 그 사람 속에 말씀이 살아있는 성도입니다. 성도는 그저 말씀이 왕래함을 현장에서 생중계하고 있는 신호등입니다.
임청일 댓글
"자격제로의 상태에서 우연히 덮친 사랑에 날벼락 맞듯 맞아 죽어, 주 안으로 던져지는 의식 불명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심판대에서 왕의 판단하심에 어느 것도 긍정하거나 부인하지 못하고 그저 의아해한다. ‘어느 때에 제가 그리하였나이까’"(마 25:34~40)
'의식 불명의 상태에서 의아해하는 것'이란 표현에 토를 달고 싶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나이다'라고 하는 자가 성도라면 '어느 때에 제가 그리하였나이까' 는 의아해하는 의미가 아니고 강한 부정(제가 아닙니다)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주일 설교를 다시 한번 들으면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그래야 면류관도 벗어 주님 앞에 던질 수 있겠죠.